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려고 보니 어디서 베인건지 긁힌건지 피가 흘러 있다.
원래 잠자다가 무심결에 슬쩍 긁어도 다음날 일어나보면 셔츠에 피가 베여있는 터라 이런게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하루 종일 깨어있었고 밖에서 제정신 차리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기억이 없다.
제정신 차리고 있었다는 말은 철회. 음악을 듣고 걸으면 눈에 뵈는게 없다. 그런 면에서 난 밖에 나가면 항상
만취한 상태에서 귀소본능에 의지해 집을 찾아 돌아오는 주정꾼에 불과하다. 그런데 술은 안마신다.
아마 오늘도 걷다가 뭔가에 긁히거나 했을텐데 아마 음악 듣느라 슬쩍 아픈건 신경도 안쓰고 넘겼나 보다.
찬물에 몇번 씻으니 그제서야 상처에 물이 들어갈 때의 따끔함이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이 아픔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따끔함이 없어질 때 까지 찬물로 팔을 마비시키니 무감각해진다.
며칠 전 서울로 돌아오는 KTX 안에서 어머니께 가볍게 '이제 차 탔다' 고 문자를 보냈었다.
30분쯤 뒤에 '잘 가' 라는 두 글자가 내 휴대폰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어째서 그렇게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것만 같았을까.
난 항상 바흐의 'Air on G String' 을 통해 내 기분을 해석한다.
이 노래가 그렇게도 아련하고 슬프게 느껴진다면 내 마음이 지치고 힘겨워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러면서도 난 아직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멀리서 팔짱끼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
휘둘리지 않음을 지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여기며 자신을 강철로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음악, 영화, 문학에 대해 애써 자신을 저 높은곳에 올려놓고 그 작품들은 자신을 뒤흔들어 놓을 자격이
없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툭툭 내뱉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지기 싫어하는 에고덩어리일 뿐이다.
아직 나를 감정에 북받치게 만드는 요인이 내 속에, 그리고 내 주위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것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이곳에 있다 보면 가끔씩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는 사람을 만나고, 익숙한 거리를 걷고, 편히 앉아 TV 를 보면서도 사막 한가운데 던져진 느낌이다.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는 강군도 아마 나와 같은 고독을 이겨내려고 힘쓰고 있을 것이다.
전화해 줄 때 마다 그리 반갑고 격려가 될 만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값은
훗날 똑같은 형식으로 갚게 될 것이다.
멈추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앞으로 나가는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