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차 마시는데 국민학교 동창 재미군한테서 문자가 왔습니다. 근 4년만인가?
4년전 차 뽑았다고 자랑하면서 만난 후 한 번도 연락이 닿질 않은 녀석이었습니다.
그때 인턴 들어간다고 이제 바빠질거라 말하길래, 2년쯤 문자와 전화를 보내도 도통 대답이 없어도
그냥 인턴이 그런갑다 싶어서 가만 놔뒀습니다. 결혼할 때 되면 알아서 전화오겠지 했죠.

그런데 이녀석 벌써 결혼하고 애가 9개월째랍니다.
제가 일본서 달리고 있을때 결혼했더군요.

이 친구가 제 연락처를 알게 된 사연도 참 기구합니다.
블로그 포스팅중 위 사진의 강군 집에 놀러가서 회를 흡입하던 이야기가 있는데요.
도중에 강군의 고등학교 친구인 L님이 합석해서 좀 놀다가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L님이 재미군과 같은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친구라 그걸 통해 강군한테 연락하고
다시 강군한테 제 전화번호를 알아서 연락을 하게 됐더군요.

참 사람 사는 세상이란게 좁기도 좁네요. 그렇게 이어지다니.


이 친구가 국민학교 3학년때 같은 반이 된 후로 질긴 악연을 이어가는 재미군입니다.
본명은 아니지만 저희 엄니께서는 아직도 재미라고 부르고 계시죠.

저는 이 친구 의대가서 결혼할 여친도 있다는 것까지 알고는 있었지만
강군은 사실 중학교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이번이 거의 15년만의 만남입니다.
그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지...

전 사람 이름 기억하는게 너무나도 서툴러서 사실 초중고대 전부 합쳐도 기억나는 이름이 10명 남짓이죠.
사실 고등학교부터 취미생활이나 동호회 활동으로 알게 된 분들과 더 친해서
학교 친구는 그닥 기억이 안나기도 합니다.

강군과 저는 이곳저곳 옮겨다녔지만 재미군은 평생을 예전 초등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더군요.
그 꼬맹이들이 이젠 결혼과 자식 이야기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나이가 되다니...


횟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재미군의 신혼집으로 쳐들어갑니다.
올줄 알고 부랴부랴 청소를 해 놨다고 하더군요.
빚도 좀 내서 젊은 나이에 번듯한 아파트도 한 채 구했고, 의사니까 먹고 살 걱정도 비교적 적고.
이 인간이 이렇게 인생의 승리자가 될 줄은 몰랐네요.

워낙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 여러가지 집안 사정도 잘 알고 있고
본인 스스로도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할 정도로 고민이 많던 시절이 있었는데
(의사 친구를 줄줄이 비엔나로 꿰고 계시는 아버지 왈, 정신과 의사는 절반쯤은 정신병 환자라고...)
훌륭하고 듬직한(?) 와이프분과 함께 안정을 찾았는지 지금은 내과의사라고 합니다.

자던 애를 깨워서 대면을 했습니다. 커서 여자 꽤나 울리겠더군요.


이 친구가 결혼해서 애를 낳다니...
저로서는 참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구나 싶을 정도의 놀라움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역시 축복인 것 같습니다.

재미군의 표정을 보고 저도 안심이 될 정도니.
근데 재미군은 아마 저 보고 별로 안심이 안 될듯.


결혼년차로서는 선배인 강군은 아직 아기가 없는데
역시 슬슬 시기가 되었는지 아기를 굉장히 귀여워 하네요.
근데 남정네 둘이서 쳐들어와 그런지 아기는 고양이처럼 경계합니다.

일단 눈빛에서 지면 안되니까 강렬한 기싸움도 해 보고.


와이프분께서 닭 똥꼬에 맥주캔을 꽂아 만드는 요리를 해 주셨습니다.
아기는 아직 그런거 못 먹으니 바나나를 물려줍니다.

당연하겠지만, 원래 잘 먹고 잘 웃는 녀석이라고 하는데
한 남정네는 귀신같은 미소를 띠며 손을 뻗치고
한 남정네는 시커먼 흉기같은 카메라를 들고 연신 찰칵거리니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는군요.


빈틈을 노려서 엉덩이를 터치하는 노련한 강군의 손놀림에 놀라는 표정이네요.
일단 안되겠다 싶으면 아버지한테 꼬물꼬물 기어가서 와락 안기를 걸 보니 뿌듯합니다.

전 고양이 키울때 그런 일 많이 겪어서 공감이 되더군요. TV 보고 있으면 목 사이로 목도리처럼 끼어들곤 했었는데.


저야 결혼 예정이 없으니 아이 예정도 없지만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강군의 눈에 비치는 아이의 모습은 아마 각별하겠죠.
그래도 손에서 맥주 놓치 않는건 역시 강군답습니다만.


아기가 치킨에 너무 관심을 많이 가지는 바람에 감옥에 가둬놨습니다.
어느 정도 버티다가 내보내달라고 떼를 쓰니 부모로서는 어쩔 수가 없더군요.


연기공부도 해 봤던 강군이라 표정이 변화무쌍하긴 합니다만
이런 표정은 쉽게 나올 수 있는게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자기 아기와 이러고 있는 모습도 사진으로 남길 수 있겠죠.


본인 스스로도 남녀역할이 바뀐 집이라고 말할 정도로
마음여린 재미군이니, 자기 자식이 얼마나 귀여울지 상상이 갑니다.
인생의 행복이란 그렇게 원대하게 생각할 것 없구만 싶더군요.

저희 엄니께서는 자식새끼가 크고나니 이건 뭐... 라고 반농담으로 말씀하시지만
어쨌든 '반'농담인건 확실하니, 지금 이럴때 최대한 행복을 만끽해야 하겠죠.


벌써부터 자식한테 술 권하는 사회가 되다니... 오호 통재라.

재미군이야 의대다니니 술이 느는건 당연하고
강군이야 더 늘면 그건 인간이 아닌데
전 참으로 오랜만에 술을 아주 빨고 또 빨았습니다.

평균 1년에 맥주 한두 캔 정도가 정량인 제가
이날 마신 맥주가 약 4병에 화랑, 벡세주 등등이었으니.


바나나는 초토화시켜놓고 포도에 관심을 보이는 아기.
재미군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나중에 자기가 바나나 다 처리한다고 말하는걸 보니
이제 정말 한 자식의 아비가 됐구나 싶더군요. 뭔가 찡한 순간이 많던 날이었습니다.


친구는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는데
강군이나 이 친구나 저나, 뒤에 합류한 L님이나
나름 굴곡있고 사연있는 집에서 자란 경험이 있어서

뭔가 이 이상 행복할 수 없는 듯한 지금의 장면 장면들을 보면
Bravo my life 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남정네들과 노는게 질렸는지 부엌에서 이유식 만들고 계시는 엄니한테 후다닥 기어갑니다.
속도가 B모 생물체를 연상시킬 정도로 빨라서, 돌 지나고 나면 아주 날아다니겠구나 싶더군요.


밥 먹고 상황이 좀 익숙해지는지 박수도 쳐 주고 합니다.
아쉽게도 활짝 웃는 모습은 찍어주질 못했지만
다음에 볼 때는 아마 웃어주겠죠.

돌사진도 찍어달라면 찍어주겠지만, 가족끼리만 소소하게 보낼거라니 그것도 좋습니다.


와이프분한테 뭐 사러 나간다고 둘러대고
택시까지 타고 이곳으로 오는 L님과 합류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갑니다.
그 전에 술이라는 연료를 충분히 충전한 강군의 불타는 연기혼은 사그라들줄 모릅니다.

강군 자식한테 보여줄 사진이 많아서 햄볶아요.


L님은 사실 지난번에도 강군 집에서 술 마시다가 좀 늦게 들어가셨던데...
이거 우리가 한 가정 파탄내고 있는게 아닌지 걱정이 되더군요.
와이프분께 인사하고 다시 한잔 걸치러 조그만 술집으로 걸어갑니다.


가정의학과 L님이십니다.
아기가 생기고 나서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증인들이 말을 하는데
인턴때였나, 아주 대차게 선배와 싸우고 확 때려친 경험이 있을 정도로
나갈때는 잘 나가는 성격인 듯 합니다.

그러니 이쪽 부류와 친구가 되는거지 싶기도 하고. 저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고...
재미군은 자기도 빠따 맞아가면서 생활했다고 하니
저는 의사 안되길 잘한것 같긴 합니다.
고등학교때도 한 발짝만 더 나갔으면 그대로 중퇴해버렸을 듯한 성격이라...


생맥주 벌컥벌컥 마셔가면서 밀린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강군이 제 카메라로 재미있는 사진 많이 찍었는데
어두운 술집에서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수동렌즈로 찍으려니 힘들었을 듯.

좀 과하게 망가진 사진은 차마 여기 올릴수가 없어서 패스.


이 날이 일요일이라서
L님과 재미군은 12시 조금 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강군과 저는 대구에서 유명한 막창골목이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제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만한 아파트 주위가 어느새 막창골목으로 변했더군요.
예전엔 정말 아무것도 없던 주택가였는데...

밖에서 술을 거의 안마시는 관계로 막창이란걸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궁금해하는 저를 위해서 강군이 데리고 가 줬습니다.
새벽이 지나가는데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바글바글하더군요.


혼이 실린 요리사 강군이 (꼬막 포스팅을 보면 아실듯) 정성을 다해 구워준 막창.
엄청 질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씹어보니 그닥 질기지는 않더군요.
딱히 맛이라 할 만한건 없어도 가만히 씹고 있으면 고소한 향기가 입 안에 퍼지는게
음식으로서는 부족해도 술안주나 간식거리로는 그만인 듯 합니다.

집에서도 할 수 있다면 가끔 구워먹고 싶네요. 이런 맛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에도 다시 호프집에 들어가 맥주를 빨아대며 이런저런 세상이야기 하고
집에 돌아오니 거진 새벽 3시가 되어갑니다.
숙취란 것이 걱정되서 중간에 여명808 이라는 신비한 명약을 마셨는데
그 덕분인지 자기 전까지는 머리가 지끈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두통이 없네요.
과연 술 좋아하는 분들에게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헛소문은 아닌 듯 했습니다.

강군은 얼마 안있으면 다시 미국으로 가서 라스트 스퍼트를 준비하겠죠.
거의 연락을 포기한 친구와의 접점이 다시 생겼으니 본가에 있는 동안에 얼굴 좀 봐야겠습니다.

그때 그 국딩들이 이런 밤을 보내는 나날이 온다는 건...
여러가지 감회가 참 깊어서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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