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의 소화전 뚜껑이 비에 젖어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듯 하다.

나름 관광지라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그리 신기하지도 않은 모습이지만

한국과 비교해서 조금 놀라운 점은, 저 총천연스러운 색깔이 굉장히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한국에서도 의외로 이런 다양한 모양을 가진 뚜껑이 꽤 많이 있다. 요즘 대구시내 돌아다녀도 가끔 볼 수 있고.

관광지에서는 시야가 넓어져서 이것저것 쳐다보며 걸으면 눈에 들어오지만

맨날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는 의외로 옆에 있어도 잘 보이지 않더라.

 

하지만 자동차가 지나가는 곳에 설치된 녀석이 이렇게 색깔 하나 벗겨지지 않고 본모습을 유지한다는 건 칭찬할 만 하다.

 

 

 

이나리 신사를 지나서 계속 걸어가면 한동안 관광지와는 별 관게없는 주택가가 이어진다.

여기서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까지는 2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또 조금씩 비가 흩뿌리는 바람에 발걸음도 약간씩 늦어지는 기분.

 

한적한 시골 분위기에 흠뻑 젖어서 있으나 없으나 한 앙증맞은 대문같은, 관광지 사진과는 전혀 관계없는 녀석도 담으면서 이동.

문득 제주도 생각이 났는데, 요즘에도 도둑이 없어서 문이 필요없다거나 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진다.

일본엔 일년에 몇번씩이나 가면서 제주도는 가본지 20년이 넘었다는 것도 좀 아쉽고.

 

그런데 이제껏 다녀온 일본은, 제주도 여행경비보다 더 쌌기 때문에 갔다는게 숨겨진 반전.

 

 

 

비가 오고나니 반가운 녀석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초콜릿이 진하게 들어간 녀석은 참 오랜만에 보는 듯.

 

어렸을 적에야 많이 갖고 놀았는데, 2008년 자전거 여행때 길가에 포진한 수만마리의 달팽이를

어쩔 수 없이 와그작와그작 밟아재끼며 전진할 수 밖에 없었던 사건 때문에 관계가 좀 소원해 진 요즘이다.

손가락으로 저 늘씬하게 뻗은 요술봉의 동그란 끄트머리를 건드려보고 싶었지만

그냥 오랜만에 반가운 모습 보여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도시든 시골이든, 일본 주택가의 특징이라고 할까, 대문 앞에 여러가지 꽃을 기르는 모습이 참 좋다.

오사카같은 삭막한 도시에도 그런 녀석들의 얼굴 덕분에 조금이나마 어두운 골목길이 밝아지는 느낌이고.

 

여기는 제대로 된 공장시설도 거의 없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라서 꽃들도 스스럼없이 색을 발하는 듯 하다.

아직까지 따로 길거리 사진을 찍은 적은 없지만, 사카이미나토 항구에 도착하고 나서 지금까지 버스, 도보로 이동해 오면서

도로에 쓰레기라는거 떨어져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츠에에서 가장 붐비는 마츠에 역에서조차.

아마 이런 곳에서는 적당히 뭐든 심어놓으면 쑥쑥 잘 자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폭우 때문에 고생한 흔적이 보이지만 그래도 생기를 머금은 이름모를 꽃.

꽤나 큰 녀석인데 꽃잎이 완전히 분리되어 자라는 듯한 묘한 모습이다.

 

사진 찍는 도중에도 다시 조금씩 비가 내리길래, 방금 전의 경험을 바탕삼아 미리 대피할 곳을 찾아본다.

다행히도 골목 맞은편에 넓은 공터가 있고, 그 끝에 든든한 지붕이 버티고 있는 벤치가 보인다.

비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휴식을 하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

 

사진 찍으려고 뷰파인더를 보고 있으면 어깨와 손은 딱 고정되는데 머리가 앞뒤로 흔들흔들거려서 여간 힘든게 아니다.

그 지옥같던 15시간의 항해가 끝나고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멀미란 녀석.

사실 전날 잠을 잘못자서 왼쪽 허리까지 뻐근한 상태였기 때문에, 벤치에 앉을때 멀미와 허리통이 동시에 습격해서 혼났다.

 

 

 

서 있을때가 허리는 덜 아픈 편인데, 멀미때문에 앉아있으려니 이젠 허리가 쑤신다.

이럴때는 살짝 느긋한 정자세를 유지해서 한쪽으로 가는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줘야지.

 

한숨 한번 길게 쉬고, 무거운 가방과 카메라를 옆에 던져두고 나니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 든다.

정신없어서 잘 몰랐지만, 항구에 도착후 버스타고 이동하는 시간 외에는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구나.

15시간의 항해는 아무리 누워있어도 체력이 소비되기 때문에, 지금 꽤나 피곤한 상태다.

 

방금 전의 폭우와는 달리 조금씩 뿌리는 듯한 비라서 맞아도 별 문제는 없지만

어깨에서 카메라를 한번 내려놓고 나니까 왠지 자리를 뜨기가 귀찮아진다.

 

사진의 자판기가 서 있는 건물은 꽤나 근사한 찻집이라서, 다양한 차와 달콤한 화과자를 판다.

이곳 마츠에는 딱히 해산물이 다양하고 신선하기로 유명하지만, 그것 외에는 특산품이라 할 만한 음식은 없어서

그나마 가장 유명한 것이 차와 함께 먹는 화과자이다. 사실 화과자라는게 그렇게 특출난 맛을 보여주느 것도 아니라서.

 

저기 들어가서 차와 함께 화과자를 한입 씹으면 기분이 좋아질것도 같지만, 여전히 홀딱 젖은 차림새.

물론 웃으며 맞이해는 주겠지만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될 필요는 없다.

자전거 여행때도 그랬지만, 이런 여행에 익숙해지면 멋들어진 까페나 레스토랑보다 그 옆의 공터가 더 편안한 법.

 

 

 

두 개의 벤치 중앙에는 나무 색깔을 한 콘크리트 휴지통이 놓여 있다.

가볍고 쓰기 편한 50mm 수동렌즈를 교체하면서 테스트용으로 담아 봤는데

나무 흉내내려는 차가운 녀석의 색감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서, 처음부터 흑백변환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찍었다.

 

혼자 휴식하고 있으니 원래는 카메라 가방에 들어있어야 할 일기장이 참 고프다.

이럴 때 항상 펜과 메모장을 꺼내들고 한숨 돌리면서 몇십 분이고 글을 쓰는게 일과였는데.

여행때는 잘 듣지 않지만, 아이팟도 가져오지 않아서 그냥 아무 일도 하지않고 멍하니 앉아있을 뿐.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휴게소는 뭔일인지 저런 구멍이 나 있다.

바람 잘 들어오라고 해 놓은 것일까. 하지만 이곳은 원래 그렇게 더운 지방도 아니다.

이 구멍 말고도 바람 통하는 창은 뚫려있기 때문에, 대체 뭘 하는 녀석일까 궁금해진다.

 

조금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다치 미술관 흉내라도 내려는 걸까 하는 상상도 해 보고.

아다치 미술관이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한 폭의 예술작품이라 불리는 바람에

미술작품 구경오는 사람보다 그 유명한 창문너머 정원 모습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은, 이 지역의 유명한 미술관.

 

 

 

비는 대충 그쳤지만 여전히 자리를 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멍하니 아기자기한 주택들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본다.

 

옆집하고 너무 붙어있어서 프라이버시는 어쩔까 하는 생각을 이미 20년 전부터 해 왔고...

가끔 일본 만화를 보면, 저렇게 딱 붙어있는 집 애들이 나중에 연인이 된다던가 하는 그런 달달한 러브스토리도 있었는데

진짜로 그러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만화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소재를 쓰는게 일반적이니까.

 

홈스테이 했던 나가노의 집은, 저렇게 다닥다닥이 아니라 사방팔방이 확 트인 저택같은 구조라서

이웃집이 어쩌고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름의 매력은 있겠지만 난 프라이버시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저런 집에서는 살기가 좀 힘들지도. 특히 주택거주의 가장 큰 장점인, 빵빵하게 소리켜놓고 영화감상도 못할 것 같으니 말이지.

 

문득 교복입은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서 저 앞을 지나간다.

군것질 하는 애들은 아스트랄하게도 방금 전의 그 찻집에서 화과자 사들고 나와서 먹으며 걸어간다.

중고등학교 귀갓길 군것질을 화과자로 때우는 모습이라...

그러고보니 대구의 서식지 근처에도 호두과자 전문점이 있어서, 교복입은 학생들이 그거 사들고 가는 모습도 봤으니.

 

남정네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남녀 둘이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몇몇 학생들은 시커멓고 빵빵한 채 젖어있는 내 모습을 슬쩍 쳐다보기도 하는데, 들어와서 말 걸 것 같지는 않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제일 말 잘거는 사람은 대체로 상대방보다 나이가 많은 쪽이니까.

 

나야 뭐 누구든 말을 걸어오면 기꺼이 대화할 용의는 있지만.

 

1년동안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자전거여행을 했으니 나름 이 나라에도 꽤나 익숙한 편이다.

일본어 수준도 그쪽 TV 쇼 보면서 웃을 정도는 된다.

알바도 3개월동안 하면서 여러가지 친분도 쌓고, 일본 곳곳에 전화 한통하고 찾아가면 재워주고 먹여줄 사람들은 꽤 있다.

 

그런데도 문득 역시 난 이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행중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주위를 지나가는 교복입은 학생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생시절이란 일생 단 한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극히 특수한 상황이니까.

아무리 일본에 익숙해져도 그건 단지 나이들고나서 적응한 것일 뿐,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학생들 사이의 대화같은, 아무 저항없는 의사의 교류는 아마 평생 나누기 어려울거라 생각한다.

이제껏 만난 그 많은 사람들도, 그 인연의 가장 근원적인 곳에는 내가 일본말 잘하는 외국인이라는 의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까.

 

 

 

내가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렇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듯 하다.

여행도 공부의 일종이니, 점점 능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창문 밖으로 나가서 직접 풍경을 만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40분 정도 휴식하고 다시 일어난다. 여전히 비는 계속 조금씩 내리고 있다.

하늘을 보니 완전히 그칠것 같지도 않고, 머리는 여전히 흔들거려도 체력이 조금 회복된 것 같으니까.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까지는 정말 순식간인데, 그 와중에도 계속 시골풍경이 눈길을 끌어서 걸음을 멈춘다.

왠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지는 녀석. 돌담이나 흙담, 나무담같은 것들은 확실히 콘크리트 담보다는 좀 더 편안하다.

 

 

 

한적한 산책로를 빠져나와서, 그나마 표시선이 그려져 있는 도로가로 나온다.

사실 역 근처 외에는 딱히 번화가라고 할 만한 곳도 없으니, 주욱 이런 느낌의 가옥들이 이어진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지만, 쓰레기가 없어서인지, 도로가 움푹움푹 파여있지 않아서인지

굉장히 잘 정리된 느낌이 드는 골목길. 자전거 한대 있으면 좀 더 즐거울 것 같은데.

마츠에 시내에는 자전거 대여해주는 곳이 몇군데 있어서 못 탈것도 아니지만

카메라 장비가 꽤나 부피를 많이 차지하고, 계속 비가 내리다 말다가 해서 그냥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무채색이 많은 일본의 주택가에서, 비 내린 후의 상큼함을 책임지는 녀석들이란 역시 물방울 머금은 식물들이구나 싶다.

사람은 비맞으면 굉장히 애처로워 보이는데 이 녀석들은 어째 더욱 발랄해 보이니.

 

 

 

이제 마츠에 성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왔다. 멀리 왔다기 보다는 언덕 너머에 가려서 안보이는 것 뿐이지만.

마츠에 성을 둘러싼 해자 역할을 하는 호리카와(堀川) 강은,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물길을 만들기가 용이해서

다른 곳보다 훨씬 넓고 길게 만들어져 있다. 사이사이로 빠지는 지류도 굉장히 많고.

 

지리적 특성에 대해서는 훗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테니 넘어가고, 이 둥글넓적한 호리카와 강을 느긋하게 한 바퀴 도는

호리카와 유람선이 이곳에서는 꽤나 유명하다. 다른 도시처럼 잠깐 즐기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50분 가까이 쪽배를 타고 뱃사공이 구수한 입담으로 여러가지 설명도 해 주고, 노래도 한 곡조 뽑아주는 이곳의 명물.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높이가 매우 낮아서, 뱃사공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할 정도.

겨울에는 유람선 안에 난방기구까지 설치되어서, 내리는 눈과 함께 유유히 흘러가는 느낌이 또 각별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15시간이나 페리를 타고, 땅 위에서도 멀미의 여파로 머리가 터져나가는 기분이라서

아무리 명물 유람선이라도 배라는 탈것에 더 이상 타고싶은 기분이 쥐박이 양심만큼도 들지 않는다.

긴 시간만큼 요금도 꽤 비싼 편이지만, 외국인에게 할인이 되기 때문에 놓치기 아까운 녀석이긴 하지만

아무리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배를 한번 더 탄다는 건 생리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으니.

 

그냥 유람선 모습이나 몇장 찍는걸로 만족하기로 하고, 눈 앞으로 다가온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쪽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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