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날에 배를 타고 온 한국인 관광객이 백명 가까이 되기 때문에 어디서든 스치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커플 두어 팀 빼고는 한국인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뿔뿔이 흩어진 걸까.
단체관광객은 전용버스타고 여기저기 달리고 있는 중이겠고, 자유여행객들은 다들 다른곳으로 흩어졌나보다.
이곳 산인지방은 이렇다 할 유명한 관광지는 한두군데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특유의 '별것 아닌 소재도 잘 꾸며서 관광지로 만드는' 능력이 여기저기에 엿보여서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흩어져 있으니, 그렇게 흩어지는 것일까 싶다.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들은 어느 나라나 점점 비슷해져 가는 시대지만
그리 멀지않은 한국이라도 자연 풍경만큼은 일본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올때마다 꼭 한두장씩은 찍게 되는,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로 이번에도 눈요기.
마츠에 성을 내려오면서 보이던 연못.
아주 조그마한 곳이고, 흐르지 않는 물이다 보니 상당히 지저분한 느낌이다. 중간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얕은 곳.
연못 앞에 '馬洗池' 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름 그대로 말을 씻기던 곳인듯 하다. 과연 식수터는 아닌것 같았다.
이 연못의 맞은편에는 '기리기리 우물터' 라는 의미불명의 푯말이 세워져 있다.
우물터라는건 뭐, 말 그대로이겠는데 '아슬아슬'이라는 뜻의 기리기리가 어째서 붙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슬아슬한 우물이란 게 대체 무슨 뜻인지. 주변 풍경이 그렇게 아슬아슬해 보이지도 않고.
우물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아슬아슬한 우물이 어떻게 생긴건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
나름 일본어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본인이 이렇게 막혀버리니 뭔가 패배감을 느끼며 다시 길을 가는데...
다행히도 조금 더 걸어가니 이 정체불명의 우물터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어서 안도의 한숨.
그런데 일본어로는 열줄 가까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반면, 한국어로는 단 두줄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놓아서
그냥 한글만 읽으면 거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성의 부족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듯.
대강 설명하자면, 에도시대 축성공사때 벽면이 한쪽 무너지는 바람에 그곳을 깊게 파서 조사해 봤더니
사람 해골과 창이 발견되어, 정중히 제사지낸 후 벽을 다시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깊게 파낸 구멍이 사람의 가마와 닮은 모습이었고, 그곳에서 물이 솟아난 덕에 그대로 우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 가마 닮은 구멍때문에 이 근처의 성문과 우물이 모두 '기리기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여기까지 읽고도 그게 기리기리하고 대체 뭔 관계인가 싶었는데
사실 기리기리(ぎりぎり)라는 단어는 가마(つむじ)의 오사카 사투리 버전이라는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가마란 선모(旋毛) 라고도 하며, 사람 정수리의 소용돌이 모양의 머리털을 의미한다. 머리털의 선회점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가 빠를 듯.
애초에 저 가마(つむじ)라는 단어 자체가 여간해서는 외국인이 배울 일이 없는 녀석이라서 깔끔쌈빡하게 모르는 단어인데
그걸 사투리로 '아슬아슬'과 똑같은 단어인 기리기리라고 썼으니 내가 알 턱이 있나.
어쨌든 실생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지만, 평생 잊어먹지 않을 단어 하나 배우고 뿌듯한 기분.
말 씻는 연못을 빙 둘러 내려와서 걸어가면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이 나온다고 표지에 적혀있다.
사실 기념관은 한참 더 걸어가야 나오는 거리지만, 어쨌든 길은 맞으니 한동안 산책하는 기분.
물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은 나무의 본능인지, 이곳에도 수면쪽으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가 있어서 한 장 남긴다.
여행중 이런 사진을 은근히 많이 남기는 기분이 드는데...
한국에서도 못 볼 풍경은 아니지만, 습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나무에 자리잡은 무수한 이끼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역시 외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은 사람이 조경을 목적으로 기른 이끼가 아니라서 보기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생명력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보고 있으면 왠지 사진 찍고싶어지는 장면이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한국보다 고온 다습에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서 식물들의 생장력이 꽤나 강한 편.
말 씻는 우물터를 빙 돌자마자 후덥지근한 하늘 위에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사실 성에 올라설 때 부터 조금씩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라서 그냥 한숨 한번 쉬어줄 뿐.
여름날 비 오기 직전의 그 텁텁한 습도를 자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곧 비가 오리라는 예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애초에 날씨가 영 불안정하다는 소식은 듣고 온 터라, 비가 오면 맞으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카메라 가방과 카메라는 어느 정도 방수기능이 있고, 내 옷은 위아래 전부 등산용 쿨맥스 소재라서
비를 맞아도 30분 정도만 걸어다니면 금새 말라버린다.
카메라 장비도 짐인데, 언제 올지 모르는 비때문에 우산을 갖고 나오긴 싫어서 맨몸으로 나왔다.
사실 자전거 여행때 워낙 익숙해지는 바람에 그렇게 건성으로 대처해 버렸지만
엄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비맞으면 땀냄새와 섞여서 영 불쾌하기도 하고, 신발이 속까지 젖어버리면 그 꾸린내라는 건 엄청난 민폐라서.
자전거 여행때는 며칠 달리면서 비 맞고 나면, 냄새때문에 편의점에 들어가기도 미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런 배려심이 오랫동안의 배멀미로 인해서 다 사라져 버리고, 판단능력이 한없이 저하된 지금은
비맞으면서도 꽃한테 눈길이 팔려서 사진이나 찍고 있는 태평함을 연출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살짝살짝 간보듯 내리던 비가 일순간에 폭우로 변하자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소나기도 보통 소나기가 아니라, 맨살이 닿는 부분에는 방망이로 두드려 맞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미친듯한 빗줄기.
거의 사고가 마비되어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운도 좋게 주위에 비 피할 수 있는 처마란 게 아예 없다.
간이 휴게소라고 소개되어 있는 친절한 장소도, 탁 트인 하늘아래 벤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곳이라서 도움이 안된다.
처마가 있어보이는 유일한 장소는 바로 옆 언덕 위의 신사. 30초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간신히 처마밑으로 피신했을때는 이미 옷 입은채로 바다에 뛰어든거나 마찬가지 꼴이 되고 말았다.
조금만 과장하면 대중목욕탕의 폭포수 기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하늘이 무너질 듯이 콸콸 쏟아진다. 비 맞은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지만 속옷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카메라 가방은 재질이 워낙 두꺼워서 방수팩 없이도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지만
몸으로 최대한 가리며 갖고 온 카메라는, 조금만 더 노출됐더라도 이번 여행 촬영은 황으로 날아가 버렸을 터.
뷰파인더 안쪽에 습기가 차서 닦이지도 않고, 자연스레 말라 없어질때까지는 거의 장님촬영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래도 뭐, 일단 처마밑에서 비 피하고 있으니 더 이상 젖을 염려는 없고
망원렌즈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의 피사체를 찾아서 두리번거린다.
비를 맞아가면서 하는 촬영은 참 고역이지만, 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비내리는 곳을 촬영하는 건 의외로 꽤 재미있는 일이다.
대비색이 부각되는 피사체를 찍으면 빗줄기때문에 주변 채도는 낮아지고, 몽롱한 꿈 속에서 한가지만 또렷하게 튀어오르는 느낌이랄까.
우렁찬 카메라 셔터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폭우라서, 부옇게 보이지 않는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현실감이 사라진다.
찍고 나서 화면을 보면, 방금 내가 봤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결과물이 나와주니 묘한 기분.
홀딱 젖어서 짜증은 나지만, 의외로 여행중에는 꽤나 긍정적이 되는 타입이다.
특히 카메라를 들고 갔을 때는, 어쨌든간에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는게 다양한 추억거리를 남겨올 수 있으니까.
뷰파인더가 너무 흐려서 사실 화면 보기전까지는 저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주황색 뭔가가 보이길래 찍어본 것.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나와는 달리, 저런 녀석들은 비가 오니 왠지 좀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살짝 김빠진 느낌이 나던 방금 전의 말 씻는 우물터도 지금은 뭔가 왁자지껄하게 파티가 열렸을 것 같아서 근질근질하다.
아무래도 이 빗속을 뚫고 다시 그쪽으로 갈 수는 없지만.
버스 시간에 쫓기거나, 거래처와의 약속에 늦지 않는 한에서라면
사실 비 내리는 구경도 상당히 운치있는 놀이다.
한 걸음만 내딛어 빗속에 뛰어들면 눈도 뜨지 못할 격류속에 휘말린 기분이겠지만
든든한 처마 밑에서 이 세상과 단절된 듯 혼자 서서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좋은 고독감을 만끽할 수 있다.
고양이가 좁은 박스를 좋아해서 어떻게든 몸을 끼워보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귀와 눈을 때리는 거대한 빗줄기를 남의 일처럼 쳐다보고 있으면
이 넓은 풍경 속에서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이 경이로운 지구의 움직임 사이의 조그마한 틈새에 끼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꼼짝도 못하게 사방이 막혀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한테만 주어진 안락한 공간이라는 안정감.
고개를 돌려보니 인공 폭포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이쯤되면 쏟아지는 비가 되려 고마운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밋밋한 여행이란 건 사실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알아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면 여행의 추억거리가 더욱 늘어나니까.
배멀미 때문에 거북하던 머리도, 한국인 관광객을 놔두고 혼자 버스를 타버린 죄책감도, 갑갑한 하늘때문에 흥이 바랬던 천수각도,
몽둥이같은 빗줄기로 머리 한방 맞고 나니 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여행의 흥이란 이렇게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에 의해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고, 삶이 지루해지지 않게 해 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어차피 시간은 남아도는 여행.
숙소는 아무리 늦게 가도 뭐라 할 사람 없으며, 약속 장소에서 발을 굴릴 동행인도 없다.
물론 여기서 발이 묶인다면 돌아보려 했던 몇몇 관광지를 갈 시간이 부족해질수도 있겠지.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초초한 마음으로 달리는 것은
찌든 일상생활 안에서 싫어도 얼마든지 겪을수 밖에 없다. 뭐하러 여행에서 그런 초초함을 추구해야 하나.
시간이 늦으면 안 보면 되는 것이고, 빡빡한 여행일정 계획대로 소화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곳의 사진 더 많이 올려서 블로거들한테 칭찬 한마디 더 듣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되려 이렇게 혼자만의 공간을 강제로 만들어 나를 붙잡아 둔 폭우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우산을 갖고 오지 않아서 생길 수 있었던 시간의 낭비. 그 덕분에 두 손으로 카메라를 쥘 수 있으니까.
아무리 미친듯이 쏟아져도 소나기는 소나기. 10분쯤 내리니 저 멀리서부터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이곳은 빗줄기가 약해지지 않았는데도, 마츠에에 도착한 후 처음 접하는 맑은 하늘.
노란 신호등처럼, 이제 곧 끝나니까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라는 배려깊은 풍경이라고 할까.
빗줄기는 충분히 약해졌지만, 기왕 기다리는거 완전히 그칠 때까지 그냥 서있기로 했다.
후덥지근한 날씨도 완전히 젖어버린 옷 덕분에 많이 시원해졌고, 옷은 한 시간만 걸어다녀도 다 마른다.
형체마저 흐트러진듯 보이던 모자상이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멈춰진 듯한 10여분의 시간이 다시 현실감을 띄고 다가오는 듯 느껴진다.
사진에서 생기가 도는 것은 단지 비온 후 먼지가 씻겨 내려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머리는 알아서 흔들거리고 있지만, 이제부터가 제대로 여행한번 즐겨보자는 새로운 각오가 사진에도 영향을 미치는게 아닐까 싶다.
비가 오지 않아서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다면 아마 오늘 하루의 대부분을 상당히 뚱한 기분으로 넘겼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엔 다들 비 맞으면서 신나했는데, 간만이긴 하지만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어서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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