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첫 조카 구경좀 하고 버스타고 동해시까지 가는데 3시간 남짓.

동해항은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따로 시간보낼게 없어서 승선까지 2시간 반이나 남은게 조금 난감한 상황.

잡화점 직원분이 아주 친절하게, 고객이 아니더라도 터미널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주신다.

딱히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 친절함에 이끌려 음료수도 한병 사 마시게 된다. 서비스의 중요성이란 이런 것.

 

아침부터 밥먹은게 없으니 항구 밖의 조그만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주문해서 아주 느긋하게 먹는다.

남는게 시간이라 급할것도 없다. 페럴림픽 축구도 구경하고, 음식점 꼬마형제들의 라이브 쇼도 은근히 감상한다.

 

형은 유치원생이나 초딩 1학년쯤 되어보이고, 동생은 아직 학교 갈만한 나이는 아닌 듯 한데

형이 낮잠 자고 있는 동안 NDS 포켓몬 게임이 어디가 막혔는지 동생이 안절부절이다.

엄니한테 가서 이것 좀 해달라고 졸라도, 엄니가 포켓몬을 어떻게 알수 있으리.

 

결국 엄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는 형 옆에서 오만 오도방정을 떨어서 깨우고 만다.

형은 짜증내면서도 게임기 받아들고 뭔가 만지작거리고, 엄니는 화내기보다는 그냥 웃으면서 동생을 나무라는 정도.

 

근 1시간에 걸쳐 식사를 마치고 다시 터미널에 돌아와 남은 음료수 마시며 멍하니 앉아있다.

사실 제대로 준비된 여행이었다면 그렇게 멍할 이유가 없었는데, 이번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매번 여행준비할 때, 이제 다 됐겠지 싶어서 여러번 체크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꼭 한두가지는 빼먹곤 한다.

복병이란 의외성이 있어야 빛이 나는 법. 백팩과 숄더팩 두 가지 안에 든 물품은 몇 번이고 체크를 해서 완벽하다.

중간에 코인세탁기에서 빨기 위해 더러워진 옷을 넣을 대형 비닐까지 완비했으니.

 

그런데 이번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가방 내 소지품이 아니라, 맨날 들고다니는 아이팟 나노를 깜빡했다는 것.

옷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녀석인데, 가방에만 신경쓰다 보니 외출시에 절대로 몸에서 떼지 않는 음악기기를 까먹을 줄이야.

게다가 카메라 가방을 새걸로 바꾸고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라서, 옛날 카메라 가방에 항상 들어있었던 필기도구도 깜빡했다.

필기도구와 아이팟, 밖에 나갈때면 신체 일부분처럼 붙어다니던 녀석이라서

새 가방으로 바뀐 이번에도 그냥 저절로 걸어들어와 주머니속에 박혀있을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덕분에 버스 3시간 타면서 음악 듣지 않았다. 아마 이런 일은 이어폰 고장나서 듣지 못했던 적을 빼면 극히 희귀한 케이스.

서울 출발할 땐 거장의 붓놀림과 같은 현란한 구름이 눈을 즐겁게 했는데, 대관령 넘을때는 폭우가 쏟아져서 걱정이었다.

바깥 풍경이 워낙 기세등등하게 변해서 음악 없이도 대충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동해항 터미널에서 움직이질 못하니 음악과 필기도구가 없는 나는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고 만다.

 

승선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나처럼 젊은이 몇명도 있었지만 나이 지긋한 단체관광객이 많다.

 

동해항에서 사카이미나토(境港)항을 왕복하는 이스턴 드림호는, 일본 도착이 아침 일찍, 출발이 오후 늦게라서 좋긴 하지만

일본에서 단 1박만 할 수 있는 왕복구조를 갖고 있어서 (놓치면 1주일 뒤에나 배가 온다) 그런 여행에 기겁하는 나로서는

완전히 흥미 밖의 이야기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로 2박까지 할 수 있는 스케쥴이 만들어졌다.

물론 2박도 나한테는 잠깐 한숨 돌릴정도의 기간일 뿐이지만, 어찌됐든 아침도착 저녁출발의 이점을 챙기면

꽉꽉 채워서 3일간의 여행 풀코스를 즐길 수 있으니 그럭저럭 만족하는 편.

 

배를 편도 15시간씩이나 타야 하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4박 5일의 여행이지만 사실은 2박 3일인 셈.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경비의 절반 정도를 절약할 수 있는 여행이라서, 장시간 페리여행에 질색하는 나로서도

차마 놓치기 아까웠던 탓에 훌쩍 떠나게 됐다. 배는 크면 클수록 멀미가 덜한데, 이스턴 드림호는 별로 크지 않다.

 

자전거 끌고 승선준비하는 젊은 사람도 서넛 보인다.

그때 그 생각이 나서 몸이 살짝 근질거리기도 했지만, 2박 3일의 자전거는 나한테는 동네 슈퍼 놀러가는거나 마찬가지.

자전거 매니아가 아니라 여행 매니아기 때문에, 그렇게 짧은 자전거 라이딩은 전혀 흥미 밖이다.

 

승선후 짐 풀어놓고 카메라부터 챙겨 선내를 훌쩍 둘러본다.

일본 국내를 돌아다니는 몇몇 괜찮은 페리와 비교하면 별로 잘 꾸며놨다고 할 수 없는 녀석.

그래도 없어보이는 내부를 직원들의 열정과 아이디어로 극복해 보자는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여서 나름 재미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보게 되는 저 기세등등한 눈빛이 이 배의 구경거리.

 

 

 

승선후부터 날씨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어서, 아무래도 내일 아침해 촬영은 포기해야 할듯 하다.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너무 어두침침하다. 파도가 높진 않으니 출항은 하겠지만 은근히 겁이 날 정도.

운 나쁘게도 여행기간동안 산인지역은 날씨 좋은 날이 없다. 순간순간만이라도 괜찮은 하늘을 볼 수 있기를 바랄 수 밖에.

 

탈것에 약한 체질인데 이미 버스를 3시간이나 타고 온 몸이라서, 영 찌부둥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일단 멀미약 없이 한번 가보기로 했는데 솔직히 걱정이다. 사실 의외로 배의 성능에 따라 멀미가 줄어들 수도 있는데

이 녀석은 대강 둘러보니 내 멀미를 줄여줄만한 안락함까지 갖추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일단 멀미가 시작되면 사진 찍으러 돌아다닐 여력도 없을 것 같아서

정박해 있는 동안 대강 바깥 풍경을 둘러본다. 대체 왜 이런 공룡뼈가 서 있는건지.

 

 

 

혼자 온 여행객도 있긴 한데, 대부분은 행복해 보이는 커플 천지.

안개때문에 별로 볼게 없는 상황에서도 즐겁게 샷 날릴 수 있는건 역시 옆구리가 든든해서일 듯.

사람 사진 찍는데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2층 갑판은 아무래도 저녁무렵부터 포장마차와 BAR가 영업을 하는 듯 하다.

아직은 덩그러니 빈 곳이지만, 기둥에 붙어있는 간판을 보니 그러한 듯.

난 멀미걱정에 도저히 이런 곳에서 술 마실수는 없겠지만.

 

 

 

3층 갑판에는 젊은 직원 한명이 투호 놀이장을 만들어놓고 손님들을 안내하고 있다.

자기보다 더 많이 넣는 분들에게는 맥주 한캔씩 지급하는 듯.

소박하지만 정감가는 프로그램들로 장시간 항해할 손님들의 지루함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개그끼 넘치는 간판도 그 일환이 아닐까 싶다.

처음엔 밑의 문구를 보지못해서 '외상환영단' 이라고 읽은 탓에 거참 통도 크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별로 큰 페리가 아니라서 없는 시설 잘 활용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 배 안에는 포장마차, 술집과 함께 아침에 한잔 할 수 있는 커피샵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후쿠시마와 홋카이도를 잇는 일본의 태평양 페리는 정말 화려한 내부장식과, 저녁식사후 밴드와 뮤지컬 공연까지 준비된 녀석이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물론 초라할 수 밖에 없어도, 주어진 환경 안에서는 정말 열심히들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비가 내리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로.

동해항은 군사시설과 인접한 탓에 사진 잘못 찍으면 큰일난다는 경고문까지 붙어있는데

오늘같은 날은 아무리 찍어대도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대구 -> 서울 -> 동해라는 코스를 밟고, 아이팟과 일기장이 없이 여기까지 오니

사실 멀미걱정과 더불어 기분이 상당히 침울한 상태. 인셉션 생각이 나기도 했다. 여기 지금 내 꿈속인가?

 

주위에서 열심히 사진 찍고있는 커플들의 들뜬 모습을 보면서, 여행시작때 들뜬 기분이 없어진 건 언제부터인지 생각해 봤다.

자전거 여행때는 사실 들떴다기보다는 정말 죽고싶은 심정이었으니 할말 없고.

아마 국딩때 미국가는 비행기를 14시간씩 타면서 고생을 한 후로 기대감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대충 목적지에 도착해서 카메라 들쳐매고 걸어다니다 보면 조금씩 흥이 날거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밖에.

 

 

 

가시거리가 10m 쯤 될까말까 한 지금 상황에서

이 녀석이 앞으로 얼마나 밝게 불타오를 것인가 상상하는 정도가 유일한 소일거리.

그 많던 단체관광객 할배할매들은 의외로 외부까지 나오지 않고 대부분 방안에서 뭐 까먹으면서 잡담하는 듯 하다.

 

무료 목욕탕에 타올이 비치되어 있지 않다는 말에, 마누라 타올 빌려쓰는 분도 많다.

여성들은 아마 대중목욕탕에 단련되어 있었겠지만 남성들은 타올이 없다는 사실이 신기한 체험일 듯.

사실 페리나 크루즈에는 타올이 없는 경우가 많다. 훔쳐가도 잡을 방법이 없으니.

돋 받고 대여도 해주긴 하는데, 구입도 아니고 대여에 손을 쓴다는 건 굉장히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을수가 없겠지.

 

 

 

얼핏 볼땐 그냥 전화기구나 싶었는데, 잘 보니 뭔가 이상하다.

밑에 걸려있는 또 하나의 수화기 비스무리한 건 어떻게 쓰는걸까.

 

고장난건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원래부터 저렇게 만들어진 녀석인 듯 하다.

직원 붙잡고 물어보면 좀 귀찮아 할려나.

 

직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몇몇 승무원들을 빼고 잡일거리하는 대부분은 동남아인들이다.

고물가의 일본도 페리나 크루즈에 외국인을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요즘은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한국 승무원들보다 더 싹싹하고 인사 잘하고 잘 웃는 사람들이라서 기분은 좋은데

페리 사업이란 것도 참 빠빡하구나 하는 안스러운 느낌이 들긴 한다.

 

애초에 배가 여기저기 낡은 구석이 보여서, 쓰레기 떨어져 있진 않지만, 이불도 그렇고 그렇게 깔끔하다는 느낌은 없다.

배타고 즐기는 여행은 사실 멋들어지게 즐기려면 비행기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드는 고급 여행이라서

한국의 동해와 일본의 사카이미나토라는, 도시 이름을 단것 치고는 허벌나게 깡촌인 두 지역을 연결하는 이 페리에

고급스러움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할 테지. 멀미걱정때문에 신경이 굉장히 예민해져 있다는 증거일 뿐.

 

 

 

만약 내가 멀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체질을 타고 났다면

밤에 분명 이곳에 와서 오뎅국이라도 한그릇 맛있게 비웠을 테지만

워낙 멀미에 약한 몸이라서 소소한 즐거움이 될 이벤트는 전부 넘겨버리고

배가 출발하기도 전에 드러누워서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출항하면 어차피 제대로 자지도 못할 터, 내일 아침부터 돌아다니려면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해 놓아야 하니까.

 

 

 

아주 잠깐 자고나니 금새 밥먹으러 오라는 안내방송이 흐른다.

이미 출항 후인데, 생각보다 훨씬 흔들리는게 조짐이 좋지 않다. 쑤욱 밑으로 꺼졌다가 불쑥 올라오는 느낌이 굉장히 불쾌하다.

 

이스턴 드림호는 티켓과는 별도로 저녁과 아침식사 식권을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승객 입장에서는 좋다고만 말할수는 없는 상술인데, 빙글빙글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가 본 식당에서는 더욱 실망.

한끼 8천원쯤 하는 식사인데, 바다 위가 아니라면 4천원 줘도 먹을 생각이 생기지 않는 퀄리티였다.

 

거의 인스턴트나 마찬가지인 반찬과, 색깔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이 희물그레한 카레, 조미료맛밖에 나지 않는 군대식 국.

시장이라는 녀석을 길동무 삼지 않고서는 입에 집어넣을 의지도 생기지 않는 이런 식단을

출항후 생각보다 더 요동치는 배 위에서 먹자니 아주 지옥이 따로 없다.

돈 아깝다는 일념 하나로, 자칫 먹다가 토해버릴 것 같은 위험 속에서도 정말 정성을 다해 입에 집어넣는다.

뭔가 이쯤되면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란 마음이 들게 된다.

 

이걸 입안에 집어넣으면서 확실히 든 생각은, 돌아올 때는 멀미약 먹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뿐.

사실 멀미만 아니었어도 먹을만은 한 녀석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한 성격이긴 하지만, 군대식이라도 군침돌게 깨끗이 비우는 타입이기도 하니까.

 

결국 식사후 기절한듯 누워서, 안내방송이 속삭이는 야간 포장마차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뻗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목욕은 해야겠어서 비장한 각오로 욕탕에 가기도 했다. 운이 좋아서 아무도 없는 욕탕을 혼자 전세냈지만

탕 안의 물이 강력한 힘으로 출렁출렁거려서, 이거 정말 날 잘못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홋카이도 토마코마이(苫小牧)에서 시가현 마이즈루(舞鶴)까지 운행하던 안락한 페리에서의 목욕은

배가 진행하는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느긋하게 욕탕에서 피로를 풀던 기억이 나는데,

아무래도 이쪽 코스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바다 상태가 안좋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올 때의 파도가 어떤지 다시한번 관찰해 봐야겠다는 포부좋은 생각을 하면서, 2시간쯤 수면후 2시간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나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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