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주 전 이야기입니다만, 장애학생 박람회가 끝난 다음날 엄니께서 필리핀으로 가셨습니다.
걸스카웃 포럼 참석차인것 같은데, 의무감에 가긴 하지만 경비는 모두 자기 부담이더군요.
반쯤은 서울와서 손자 보기위해서이기도 한듯한 기분이 듭니다.
애 기르느라 체력이 남아나질 않는 형수님을 위해서 해물탕도 끓여주셨죠.
고춧가루는 자극적이라 그냥 이렇게 끓였습니다. 대구에서는 '지리'라고 하던데 서울은 어떨런지?
필리핀행 비행기가 아침 8시에 출발하고, 공항 집합이 6시 까지라서 5시 전에 리무진 버스를 타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주섬주섬 챙기고 해물탕 한그릇 먹었죠. 맛은 있는데 뼈가 너무 많아서 약간 실패.
다행히 집에서 리무진 타는 곳까지는 택시로 3분밖에 안걸리긴 합니다.
콜택시 전화해 봤더니 그렇게 가까운 곳은 못간다더군요.
그래서 그냥 나가서 택시잡고, 내릴때 기사분께 짧은거리라 죄송하다고 팁을 따로 드렸습니다.
전 물론 필리핀까지 따라가지는 않지만, 여기까지 배웅하고보니 에라 모르겠다 공항까지 같이 가자고 결정했습니다.
왕복 차비가 좀 깨지지만 일단 일행분들과 합류하기 전까지는 제가 에스코트 하는게 좋겠다는 판단에.
여행 전날 잠이 안오는건 저나 엄니나 마찬가지라서, 사실상 한두 시간쯤 눈 붙인게 전부였습니다.
손주 보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다행히 필리핀에서는 도착하자마자 일단 호텔로 직행한다니 강행군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번화가인 건대입구의 새벽은 여전히 너저분합니다. 대부분의 찌라시들이 싱그러운 살색 처자들 사진이죠.
이 날은 좀 놀랐는데, 새벽 5시 리무진을 타려는 사람이 아주 많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일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해외에 아침부터 많이 나가는건지 신기하네요.
여기서 수십번 리무진을 탔지만 한 번도 자리 걱정한 적은 없었는데, 이번엔 거의 남은자리가 없이 빡빡했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엄니와 따로따로 앉아가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네요.
새로 장만한 a99 의 고감도 성능덕에 이런 새벽에도 마음놓고 촬영이 가능합니다.
애초에 F1.4 의 밝은 단렌즈라서 예전 a900 으로도 찍을수는 있었지만.
서울은 추워도 필리핀은 최저기온이 18도쯤 되는 더운 날씨라서 옷관리가 좀 난감하더군요.
귀찮지만 일단 서울에서 버티기 위해 얇은 잠바와 스카프를 둘둘 두르셨습니다.
짐가방을 모양 보고 찾기가 힘들어서, 강렬한 색의 손수건을 손잡이에 묶어두셨네요. 생활의 지혜입니다.
피곤하지만 잠은 안오는 드라이브가 끝나고 공항에 도착합니다.
차가 밀리면 1시간 20분쯤 걸리는데, 새벽이라 그런지 55분만에 도착했습니다.
엄니야 조카보러 미리 서울에 올라와 있었지만, 다른 일행분들은 대구에서 어떻게 오는가 싶었는데
한밤중에 버스타고 새벽 4시에 이미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는군요. 엄니보다 젊긴 하지만 굉장히 피곤할텐데.
일단 일행들과 합류하고 짐을 맡기러 가니 저는 인사하고 헤어집니다. 일단 할 일은 다 했다는 느낌이네요.
돌아가서 좀 쉬다가 조카 돌보는 일상을 시작하면 되겠죠.
새벽임에도 공항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대체 다들 어디가는건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가 여행갈때는 이상할 정도로 공항 사진 찍을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기회다 싶어서 느긋하게 공항 여기저기 촬영하면서 좀 놀아봅니다.
인천공항은 특색이란게 좀 부족하긴 해도 완성도면에서는 국제적으로 손꼽히는 녀석이죠.
이런 알짜배기를 민영화하려는 개색(아 쥐색인가) 때문에 생각만 하면 부글부글합니다만
일단 그건 제쳐놓고, 24시간 정신없이 돌아가는 공항임에도 참 깔끔합니다.
사람들을 마음대로 찍을 순 없으니, 그냥 둘러보면서 좀 볼만하다 싶은 느낌으로 담아봅니다.
딱히 목적이 없이 시선 가는대로 찍어보는 것도 기분전환으로는 괜찮군요.
국제선탑승이라는 문구는 저의 로망이기도 합니다.
로또라도 되거나, 어마어마하게 성공해서 돈이 전혀 쪼달리지 않는 몸이 된다면
한국에서 제일 많이 보게 될 간판이 아마 저거 아닐까 싶네요.
승객들은 바글바글한데, 항공사 카운터는 조용합니다. 상당수가 아직 문도 열지 않았네요.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본격적으로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하고
화려한 면세점이 문을 여는 시간이 되면, 인천공항은 얼마나 활기가 넘칠지 눈에 그려집니다.
슬슬 가볼까 싶은데, 아직 버스시간은 좀 남았더군요.
그래서 요즘 잘 담지 못했던 새벽녘 풍경을 담아보러 나왔습니다.
좀 더 기다리면서 본격적인 일출 부근까지 담아볼까 싶기도 했지만
날씨도 춥고, 그렇게까지 맑은 날씨도 아니고 해서 그냥 이 정도 분위기로 만족하기로 합니다.
자전거 여행때는 어차피 새벽부터 달리기 때문에 수도없이 새벽 하늘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니 이 풍경이 벌써 생소해 보이는군요. 조그만 한숨이 나옵니다.
마음에 쏙 드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인천공항은 한국의 거대 구조물 중에서는 단연 인상적인 녀석입니다.
음식이나 좀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건 도저히 좋게 못봐주겠더군요.
하긴 공항에서 맛있는 음식 먹어본 기억이 있나 싶긴 합니다. 새로 개장한 하네다 공항에서
굉장히 맛있는 수제버거집을 찾은게 유일한 듯 하네요. 거기 참 맛있으니 하네다 통하시는 분들은 한번 드셔보시길.
많이 담을 생각은 없었지만, 돈 주고 여기까지 배웅왔는데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한장 더 찍습니다.
쉴새없이 사람을 실어나르는 버스와, 한국을 떠나고 들어오는 비행기들의 모습이 굉장히 분주하더군요.
현대 사회의 단편을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는 장소가 공항이 아닌가 싶습니다.
머리는 헤롱헤롱한데, 원래 새벽에 깨어나서 돌아다니면 텐션이 좀 올라가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막 문열기 시작하는 까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가방에 넣어온 책좀 읽었습니다.
새벽공기가 매우 찬데, 일부러 정신 좀 깨려고 밖에서 마셨네요. 덕분에 사진도 찍고.
찍고나서 제 머리가 좀 이상한가 하는 생각을 했던 사진입니다.
분명 수평 맞춰서 찍었는데 왜 이렇게 일그러졌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니, 애초에 저렇게 생겨벅은 벽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이렇게 의아해 했다는 사실 자체가, 새벽부터 꽤나 피곤했다는 증거겠죠.
하늘이 좋은건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시린 하늘에 커피 한잔 하면서 책도 읽고 사진도 찍고 하니
세상 부러울게 없다는 환상에 잠시 젖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낭만이 가끔 현실 생활의 활력소가 되죠.
하지만 어차피 집에 가서 아침잠 잔 후에 조카 돌보기 시작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 당시는 육아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셨기 때문에 이런 여유를 부릴수도 있었죠.
엄니 안전하게 공항까지 에스코트 했으니 할 일은 다했다는 개운함이 드는 아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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