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나 같은 덩치가 엎드려서 고개 한쪽으로 돌리고 잠자다 보면
가끔 숨이 목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며 껄떡! 거리며 화들짝 깨곤 한다. 거의 정신을 잃은 듯 했는데 아직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하늘은 여전히 예술작품이라서 이곳 타카야마에 온 보람이 느껴지는데
뉴스에서는 오늘 새벽에 나고야에서 있었던 폭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오늘 새벽 자면서 들었던 빗소리는 예사로운게 아니었던 듯, 새벽에 내린 비로 JR선 운행이 30분 이상 중지되었다고.
본인이 슬금슬금 움직였던 8시 너머부터는 이미 비가 소강상태였기 때문에 문제없이 타카야마로 이동했던 것이다.
타이밍이 조금만 안맞았으면 오늘 여기서 이런 하늘을 바라볼 수도 없었으리라 생각하니, 이번 여행은 운이 따르는 듯 하다.
이제 슬슬 노을이 질 무렵이라, 낮에 잠깐 맛만 보았던 거리 산책을 좀 더 즐겨볼까 하고 몸을 일으키니
아직 완전히 피로가 풀리진 않은 듯 찌부둥함이 남아있다. 하긴 이렇게 잠을 자면 그다지 몸에 좋지도 않고.
감동적인 하늘 풍경과는 달리 마음속은 걱정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내일 목적지이자 이번 여행의 사실상 유일한 관광 목적지인 시라카와고(白川御) 쪽의 문제때문에.
시라카와고는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현대식 숙박시설을 지을 수 없다.
가격도 비싸고 편의성은 극악인 곳이라, 버스로 10분쯤 거리에 있는 훌륭한 온천여관에 큰맘먹고 1박 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일본 도착후부터 그 여관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 옛날 여관이라 인터넷 예약이 힘들어 일본 와서 전화할 예정이었지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대기신호만 계속 울리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시라카와고는 정말 깊숙한 깡촌이고, 문화유산인 관계로 노숙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숙소를 정하지 않으면 섣불리 가서 죽치고 앉아있을수도 없는 곳이라 고민중이다.
몇번 더 전화해보고 연결이 되지 않는다면, 예정을 바꿔서 이곳 타카야마에 다시 돌아와 숙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불안을 안고 해가 지기 시작하는 무렵 다시 호텔을 나선다.
해가 저물어도 덥긴 덥지만, 직사광선에 살갗이 비명을 지르는 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옛 마을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6~7살쯤 되어보이는 금발의 외국인 자매가 엄마 사이를 원자처럼 빙글빙글 돌며 걷고 있다.
비록 일본 전통의 가벼운 외출복인 유카타를 입고 있었지만, 그거야 뭐 관광와서 하나 사입었을테고
히다 타카야마 어디에서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서양사람이라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갑자기 애들이 엄마한테 일본어로 뭐라뭐라 하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본토사람이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라, 뭐하는 애들인가 싶었는데
옆에서 지나가던 자동차 창문이 열리며 아이 엄마한테 반갑게 인사하는 일본 아주머니를 보고서야 국제결혼한 가족이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고보니 좀 전까지 그냥 같은 길 가던 사람인 줄 알았던 일본인 남성이 아버지인듯 자동차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아이들은 서양쪽 유전자가 강한지 거의 100%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구분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일본어를 모국어로 여기는 듯 하지만, 엄마쪽은 확연히 외국인 일본어라는게 느껴진다.
도쿄도 아니고 이 타카야마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가족을 보니 뭔가 신선하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을 걷다가, 문득 주위가 굉장히 소란스러워져서 의아하다.
아직 옛 거리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한쪽으로 굉장히 몰려 걸어가는 모습이 보여서 슬쩍 따라가 보니
유명 관광지인 옛 마을거리에 비해 한산했던, 평범한 요즘 상점가에서 뭔가 축제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
타카야마라는 유명한 관광지에게 조금 실례될지도 모르지만
본인에게는 그냥 여행 경유지의 목적밖에 없었던 곳이라, 관광 루트라던가 계획이라던가 짜 놓은게 없었다.
그래서 오늘이 마을 축제날이라는 것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술렁술렁 걷다 보니 이런 이벤트와 만나게 되었다.
만약 낮에 좀 더 힘내서 많이 구경하고 돌아다녔다면, 또는 저녁에 눈을 떠도 몸이 피곤해서 그냥 자버렸다면 이 축제를 접할 기회도 사라져 버렸을 텐데.
여행중 이런 우연과 조우하는건 이제 신기한 일도 아니지만, 항상 여행의 가장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 녀석이다.
시끌벅적했던 소리는 대규모 브라스밴드의 화음이었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열심히 연주중.
구성원을 보니 특정한 곳에 소속된 밴드가 아닌듯 하다.
중학생 정도의 학생과 70은 되어보이는 할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경쾌한 화음은, 본인의 이상적인 시골마을 모습중 한 가지였는데
이곳에서 보게 되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만약 자식이 있다면 손자와 함께 색소폰 부는 것처럼 매력적인 일도 없을테니까.
지휘자가 곡이 끝나고 난 뒤에 가볍게 단원 소개를 한다.
역시 예상대로 근처 초중고에서 모인 학생들, 마을 음악클럽 회원과 함께 이웃마을 밴드까지 합세한 그룹이다.
그런 고로 연습시간이 좀 부족했다고 고개를 숙이긴 하는데, 여기가 예술의 전당도 아니고 이 정도면 어깨를 들썩이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들었던 곡은 본인도 익히 알고있는 곡이라 어렵지 않게 감상 가능했다.
현재 NHK 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침드라마 '아마짱'의 오프닝 테마.
욕하면서 본다는 드라마들이 가지는 막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야말로 맑은 이야기만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하며
이런 소재로도 인기를 끌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웰메이드 드라마... 라고 하긴 하는데
본인은 드라마를 보지 않으니 내용은 모르겠고, 오프닝 테마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어서 따로 구입해 듣고있다.
발매된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앨범이고, 드라마 오프닝 정도는 그냥 공개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NHK가 강력하게 유료 음원으로 밀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소개를 할 수는 없다.
이 정도라면 살짝 들려도 문제 없을듯 하니 소개하는 겸, 고양이를 감상하는 겸 업로드해 본다.
아무튼, 드라마는 몰라도 오프닝 테마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을에 울려퍼지는 신나는 음악에 활기가 넘친다.
마을 사람들끼리, 혹은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일년에 한두 번씩 이렇게 모여서
시원스럽게 연주를 피로하면 그것을 손자와 함께 보러 온 할머니가 즐기는 이 풍경은
한국에서라면 어디쯤 가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구의 본가가 하천변에 있기 때문에 여름에 여러 이벤트가 벌어지기는 하는데
항상 초청받아 오는 프로 아티스트가 아니라, 이렇게 동네 지나다니며 인사 한번씩 나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결코 아마추어의 장난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합주를 완성해 내는 모습은 여러가지로 인상깊다.
내가 시골마을에 갖고 있는 이상적인 이미지란 이런 것이었는데. 말은 쉽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괜히 낙심한다.
카메라의 동영상 녹화기능이 딸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음악이 주가 되는 공연이다보니, 재미삼아서 한곡 정도 녹화를 해 봤다. 엄청 대단하진 않지만 나름 잘 나온다.
사진작업은 재미있지만 동영상 후처리는 괜히 귀찮아서, 녹화는 했지만 블로그에 포스팅 할 일은 없을 듯.
연속된 시간을 보여주는 동영상과 달리, 나는 아직 단절된 시간속에서 동영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내포할 수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더 익숙하고 편하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의 광란에 가까운 축제를 보면서 '저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구나'하는 생각도 하지만
일본엔 그런 축제 말고도 이런 소박한 마을축제 역시 자주 열린다.
한국처럼 아파트 덩어리라 인구밀도나 이웃과 일면식도 없는 구조에서라면 이런 축제 열어봤자
다들 서먹서먹한 방관자 역할만 할 뿐이겠지만, 이곳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이 지휘자한테 손 흔들면
지휘하는 도중에도 웃으면서 같이 손 흔들어 주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사실상 사회 부적응자에 가까운 성격인 본인도, 같이 끼어들기는 힘들지만 이런 모습 자체를 즐기는 것은 굉장히 좋아한다.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면 나 같은 사람도 더 늘어나는 부작용이 생기겠지만, 전체적으로 배울점이 많은 마을 꾸리기가 아닌가 싶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가볍게 예정되어있던 저녁거리 산책은 아무래도 힘 좀 쓰고 땀 좀 빼야할 듯 하다.
예상치 못한 이벤트지만 다행히도 카메라 베터리가 2개인 탓에 아직 여유는 있다.
규모면에선 그렇게까지 크지 않은 축제지만, 사람들의 수는 상당하다.
이렇게까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보이는 축제는 처음이라는 점이 신선하기도 하고.
브라스밴드의 공연은 마지막 곡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본인은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마지막 곡을 다 듣고나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함께 자리를 뜨는 인파때문에 앞으로의 구경이 힘들어진다는 걸 예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원래 이 거리는 옛 마을 거리의 근처에 위치한
반쯤은 관광객을 위한 가게와 반쯤은 주민들은 위한 생필품 가게 등으로 이루어진 상가거리다.
뭔가 거창하게 준비하고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주는 축제와는 달리
이곳은 거리 분위기와 비슷하게도, 아이들을 위한 소소한 장난거리, 어른들을 위한 맥주 좌석 정도가 자리를 차지한다.
한국에서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에서 풍선 건지기 같은 게임도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어른들이 하면 가차없지만 아이들이 실수 몇번 하면 그냥 풍선 하나 건네주는 인심을 가진 곳으로 유명하다.
축제가 이루어지면 상대적으로 원래 장사하던 가게들의 타격이 없지는 않을 테지만
하루 이틀의 매상 저하가 결국엔 마을 전체의 매출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알고 있는듯 하다.
열어놓은 가게도 있지만 일찌감치 문 닫고 축제를 즐기러 나선 주인들 역시 눈에 들어온다.
살아남기 위해 이루어진, 협동과 분업의 상징인 마을 공동체는 이미 한국에서는 멸종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축제를 위해 임시로 세워진 가게 주인장들이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과 즐겁게 인사하며 잡담 나누는 이 모습은
보기 좋기도 하고 괜히 부럽기도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단지 남들이 하는 공연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재미가 없는지
이곳에는 공연하는 부스 공간만큼이나 테이블과 의자를 잔뜩 비치해 놓았다.
먹는게 남는거라고, 사람의 코곳을 잔혹하게 후벼파는 달달하고 고소한 각종 군것질거리의 냄새와
이슬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비주얼의 맥주를 흔들어대는 호객꾼들의 모습은, 공연만큼이나 자극적이다.
분위기는 살지 않지만 혼자서라도 맛있게 마시고 즐기고 뜯지 못할것도 없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앉을자리 찾는게 힘들다는게 문제가 된다. 합석할 수도 있지만 본인이 좀 소심해야...
이 정도 인파와 이 정도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축제임에도, 곳곳에 대형 쓰레기봉투용 비닐이 설치되어 있고
바닥엔 나무젓가락 하나 떨어져있지 않은 모습은 여전히 사람 감탄하게 만든다.
이게 단순한 시민의식이 아니고, 젊은 자원봉사자 학생들이 곳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쓰레기 수거에 협조해 달라고.
사람과 사람이 움직여 만들어내는 축제는, 사람의 목소리와 행동 하나하나도 흐름의 큰 원동력이 된다.
넘치려는 쓰레기통 덩그러니 설치만 해 놓고, 자원봉사자들은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리는 모습 안에서 이런 청결함을 바라기는 힘든 것도 그런 이유.
타코야키, 감자칩, 감자버터구이, 야키소바, 닭꼬치 등등...
저절로 맥주를 부르는 녀석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냄새를 풍기니 이건 축제를 즐기러 온 건지 고문을 받으러 온 건지.
물론 돈이 없는건 아니지만 조금만 참기로 한다. 일단은 축제를 한바퀴 죽 둘러보며 사진 좀 찍고 한 다음에
느긋하게 좀 먹어볼까 싶다. 이걸로 저녁을 때울 정도는 아니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되겠지만.
축제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리잡고 앉아서 맥주 마시느라 바쁜 사람들이 많다.
의자가 없으면 벽에 등대고 서서 마시는 커플도 있고, 그냥 바닥에 앉아서 마시는 사람도 있다.
뭔가 난장판 일촉즉발의 상황 같으면서도 항상 무난하게 잘 끝나는 이런 축제가 신기하기도 하다.
어른들이야 뭐 우리의 친구 맥주와 닭꼬치만 있으면 어디서든 즐거울 따름이지만
축제는 역시 아이들의 것이라 그쪽 취향에 맞춘 노점상들이 꽤 많다.
솜사탕 만드는 기계도 보이고, 한국의 뽑기같은 그림 떼어내기나 물풍선 건지기 금붕어 건지기 등등.
이쪽은 축제라는게, 관광객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의 일종이라기 보단 마을 사람들끼리 한번 재밌게 놀아보는 느낌이 강해서
이런 문화에 대해서 면식이 없는 서양쪽 관광객들은, 이런 노점상들의 놀이 하나하나가 매우 재미있게 다가올 듯 하다.
축제는 역시 쓸데없이 친절하기보다는 이렇게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한 번쯤은 다들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광경.
주인은 어디 놀러갔는지, 적어도 이 주변엔 없는 듯 하다.
사람들이 마구마구 만지진 않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꽤나 침착하게 가만히 바구니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주인 기다리다가 튀어나온 눈은 아닐지라도 좀 걱정이 되긴 한다.
고맙게도 카메라를 들이대니 시선도 마주쳐 준다. 기분대로라면 마구 끌어안고 뒹굴뒹굴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동네 5일장 같은 가벼운 축제일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리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규모는 된다.
카메라만 너무 들이대면 축제 자체를 즐기지 못할 듯한 느낌이 들어서 가능한 한 눈으로 감상을 즐긴다.
휴대폰으로 찍는 사람은 많지만 나처럼 카메라 들고 움직이는 사람은 묘하게 시선을 느끼게 된다.
브라스밴드의 공연은 끝난 듯 한데, 발걸음이 향하는 쪽에서 또 뭔가 우렁찬 소리가 들려서 귀를 기울이고 이동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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