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 보니, 엄숙한 준비동작과는 반대로 잘 웃고 유쾌한 성격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북 앞에 앉아있다.
태고라고 불리는 북을 연주하는 팀인데, 북의 재질이나 타법은 다르지만 동양권에서는 나름 익숙한 모습.
전통연주다 보니 각이 딱 잡히고는 있지만, 앞에 자리깔고 앉은 사람들은 도시락도 먹고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나라별로 북치는 방법이 다르긴 한데, 이게 또 지역별로 눈에 띄는 특색이 있다 보니
딱 어느 방법이 어느 나라의 방식이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타악기의 특성인지 지역적 특생이 강하게 남아있는 악기.
입은 옷만 봐도 '각'이 느껴지는데, 북을 치는 방식 역시 꽤나 절도있는 모습이다. 태권도의 품새를 생각나게 한다고 할까.
원형적인 움직임이라던가, 손목과 어깨의 스냅을 이용한다던가 하는 방식이 아니라, 팔을 어깨 위로 쭉 올렸다가
간결한 직선으로 내려오면서 북을 치고 다시 각을 맞춰 위로 올리는 모습이다.
느린 박자였을때는 굉장히 엄격한 느낌이 드는데, 점점 속도가 빨라지도 살짝 엇박자가 겹치며 리듬이 다양해지는 순간부터
소리도 풍부해지고 경쾌함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움직임은 절도가 넘치는데 사람들은 서로 웃어가면서 즐겁게 치고 있다.
앞자리에서 북소리를 들으니 귓가가 파르르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시원하다.
공연이 끝나고 잠깐 소개를 하는데, 이곳 마을 사람은 아니고 이렇게 북을 가지고 다니며 축제 있는곳에 가서 연주를 하는 팀이라고.
자주 와 주기 때문인지 소개하는 도중에도 장난끼있는 친구들이 소리도 지르고 한다.
공연중의 강렬한 이미지와는 달리 웃는 얼굴이 굉장히 편안한 아저씨 아줌마 팀이라서 친근하게 느껴진다.
태고 공연은 계속되지만 언제나처럼 끝까지 듣지는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 정도 걷다보니 이 축제 거리의 구조를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길게 이어진 거리의 양쪽 사이드 부분은 각종 공연이 열리고 중앙부분에는 노점과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이 포진해 있다.
일단 공연 구간을 빠져나온건지 조금 한산해진다. 슬쩍 둘러보니 현지인들은 그냥 평범한 옷 입고 마실나온듯한 편안함을 보여주는데
외국인들도 굉장히 흡족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커플끼리' 둘러보고 있다.
뷰파인더에 담긴 타인들의 모습을 토대로 내려본 결론은, 뭔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거대 사이드백에 카메라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래도 나밖에 없다는 사실 정도. 찍을땐 몰랐는데, 우측의 체육복 처자가 날 웃으며 바라보는 모습에서 세삼 그 생각이 든다.
난 관광하러 와서 항상 관광당하는거 아닌가 싶은 자의식 과잉적인 생각이.
생필품 판매하는 지극히 평범한 동네 슈퍼였는데, 창문쪽에 애니메이션 '빙과'의 관련 포스터들이 잔뜩 걸려있다.
작품의 무대가 이곳 타카야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실제 제작은 쿄토에 있는 제작사에서 만들었을 뿐이지만
자신들이 만든 작품인 것 처럼 열심히 홍보중이다. 한국에서도 무슨 유명 드라마 촬영지라면 관광객이 모이는 그런 느낌인가.
애니메이션까지 그런 범위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위치를 짐작할 수는 있다.
덕후들이라면 여기까지 와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장면이나 건물들의 모습을, 구도까지 똑같이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게
소위 성지순례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유야 어쨌든 덕분에 타카야마에서 돈 좀 쓰고 돌아가 줄테니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쁘지는 않을 듯.
빙과 관련 포스터 중간에 이상한 연하장 같은게 걸려있어서 뭔가 싶었다.
리얼한 냥이 얼굴이 중앙에 붙어있어서, 처음엔 저 구멍 너머로 진짜 냥이가 보고 있는건가 착각도 했다.
왜 연하장이 애니메이션 광고와 함께 걸려있나 의아했는데
조사 좀 해보니 이 연하장을 보낸 사람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중 한 명을 연기한 사카구치 다이스케(坂口大助)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50년이 넘은 일본은, 성우라는 직업도 하나의 연예인 같은 취급을 받아서 나름 유명한 사람도 있다고.
상술, 이라고까지 단언할 정도는 아니지만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객에게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에 대해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질 만한 내공이 아니라는 점을 세삼스럽게 이곳 저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냥 대자보에 '낙서 공간'이라고 적어놓은 것만으로도 덕후들의 능력이 발산된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도 감탄하면서 이렇게 사진 한장 더 찍게 되는 것이고.
그림 실력은 거의 프로급인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이 빙과라는 애니메이션이 꽤나 인기가 있었던 듯?
한국의 둘리와 마찬가지로 인기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주민증도 발급하는 일본이라서
몇몇 마을은 주민증은 물론 학교 교복까지 캐릭터들 의상과 맞추려고 시도하는 곳도 있는데
타카야마는 어쨌든 전통의 힘이 강하고 충분히 유명한 관광도시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듯 하다.
다음으로 내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아이들의 놀이터.
그냥 폐기할 박스를 아무렇게나 가겨온 건가 싶지만, 묘하게 히타치 박스가 많이 보여서
설마 이것도 히타치에서 정식으로 제공한 것인가 하는 의문점이 들기도 한다. 일본이 워낙 그런데 꼼꼼한 나라라서.
그냥 보면 별것 아닌게, 박스에 구멍 좀 뚫어놓고 박스끼리 연결해서 통로 만들어 놓았을 뿐인데
아이들 시선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의외로 저 사이사이를 통과하는게 재미있을 법도 하다.
아침에 엄마한테서 당근 안먹는다고 야단맞은 아이라거나
아베 총리의 연일 정신나간 발언에 자신이 성장터가 될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어 스트레스가 쌓인 아이라거나
주입식 교육에 진절머리가 난 아나키스트 초등생 등등이
혹시 한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한번 우당탕 난동만 피워도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어 버릴 정도의 내구성을 가진 놀이기구라서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으려나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애들이 순한지 다들 안에서 얼굴 쏙쏙 내밀고 얌전하게 논다.
원래 풍선 건지기는 아이들 손바닥에 딱 잡힐 정도의 크기였는데
요즘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나오는지, 애 머리통보다 더 큰 녀석을 낚느라 정신이 없다.
사탕처럼 알록달록한 무늬의 풍선들이 아이들을 유혹하는 듯, 작대기도 없이 손을 가져다 대는 아기를 막느라 부모들이 애쓴다.
대충 축제 파할때쯤 되면 반쯤 공짜로 애들한테 나눠주기도 한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안주겠지?
상가 거리를 직선으로 주욱 걷기만 하면 되는 축제길이라서 어려움없이 전진한다.
다음 볼거리는 좀 더 본격적인 놀이인데, 미니카의 수명이 얼마나 긴지, 25년전 내가 초딩이었을 때부터
지금도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에겐 변함없는 권력과 욕망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 당시야 뭐, 모터 돌려서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재밌어서 난리치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전으로 이런 서킷에서 제대로 승부도 낼 수 있는 훌륭한 브루주아 놀이로 격상되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의 놀이이긴 한데, 자동차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연령대가 나눠지는 것인가.
어른들도 상당히 흥미진진한 얼굴로 미니카 조절중인 팀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 이것에 대한 지식이 없는 어른들은, 저 조그만 장난감이 이렇게 큰 서킷을 어떻게 달리는 건지 궁금하실 듯.
기본적으로 판매되는 미니카의 모터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어른의 기술과 자본력을 살짝만 투입한 녀석들의 스피드는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아마 미니카가 서킷을 처음으로 달리는 그 순간, 놀라는 어른들이 꽤 많을거라 상상해 본다.
레이스가 치뤄지기 전 사회자가 간단한 소개와 함께 테스트 드라이브를 시연해 보인다.
모터 기술이 워낙 발달하다 보니 속도는 충분한데, 가벼운 자체 탓에 조금만 실수하거나 밸런스가 안 맞으면
주행 중에 서킷에서 튕겨저 날아가 버리는 일이 빈번하다. 그래서 테스트를 철저하게 거쳐 봐야 하는 것.
사실 미니카 레이스는 속도 경쟁보다 더 중요한게 서킷 완주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시험삼아 두 대가 달리는데 정말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 속도로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언덕코스와 점프코스에서 서킷을 이탈해 버렸는데, 뭔가 조금 만지적거리고 나서 다시 테스트 하니 문제없이 완주한다.
구경하면 참으로 재미있을 것 같지만, 이건 카메라로 찍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라서 그냥 눈으로만 조금 관람후 이동한다.
공연도 그렇고 이벤트장도 그렇고, 관객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참가자라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분위기는 매우 훈훈하다.
화려하고 거대한 규모를 가지는 축제도 물론 볼거리로서 부족함이 없지만
어깨에 카메라 끼고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이런 소소한 축제의 즐거움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아이디어와 아이들을 위한 배려심이 만들어 내는 부스.
'골판지 시어터'라고 적혀있는 이곳은, 안전상 전부 골판지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된 TV와 스피커까지 갖추고 '이웃집 토토로'를 방영해주는 미니 극장이다.
밑에는 장판이 깔려있어서 아이들과 부모들이 앉아서 보거나, 아예 드러누워 보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토토로를 보고 있는 아이들이 아직 정자와 난자 상태로 생성되기도 한참 전에 만들어 진 작품인데
아마 100년이 지나도 이 나이대 아이들에게는 토토로를 보여줄 듯 하다.
한국에서도 그런 미디어가 한개쯤은 나와줘야 할 텐데...
'라바'라는 애니메이션이 참 재밌긴 한데, 그걸 100년지대계로 유아들에게 보여주다간 한국은 더럽혀 질것 같다.
아이들을 위한 코너가 끝나면 이젠 어른들의 휴식처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맥주만 파는게 아니고 각종 음료수나 생과일 주스 등도 노점상에서 판매중이니
대화와 휴식에는 딱 알맞은 장소. 꽤나 자리를 많이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앉을 자리는 없다.
여기 앉아서 휴식을 취하다 보면, 옆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을 듯 해서
훈훈한 축제라고 해도 어쨌든 사람의 지갑문을 열게 만드는 이 사람들의 능력은 여기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축제 마지막 구간에 도달했는데, 아직 연습중인 듯 하다.
자전거를 탄 사람 두 명이 다양한 장애물 위에서 몸을 풀고 있다.
이런 작은 이벤트 하나 준비하는데, 그래도 자전거라고 빨간 꼬깔기둥 세워놓고
거기 맞춰서 벤치도 준비해 놓는 이런 모습이 더 훈훈하게 다가온다.
그것과 별개로, 일행으로 보이는 한 여성의 머리에 뭔가 익숙한 모자가 쓰여져 있는게 신경쓰인다.
한국에서는 트라우마 때문이라도 좀처럼 보기 힘든 모자인데.
준비하는 동안 옆의 가게들을 슬쩍 둘러봤는데, 평화로운 히다 카타야마에 어울리지 않는 인형집이 매우 눈에 띤다.
저 인형은 한국에서는 몰라도 일본에서는 꽤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녀석인데
아무래도 애들 주라고 만든 듯한 녀석은 아닌 듯 하다. 아주 찰지게 문신이 그려져 있다.
타카야마에서 갑자기 이런 엽기 상품을 만나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교토에 비해 좀 덜 딱딱한 느낌도 들고 한다. 이거 구입하면 세관에서 통과가 될런지.
야쿠자 인형에 정신을 뺏기고 있는 사이, 축제의 가장 마지막 줄에서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저 자전거는 이런 묘기에 쓰이는 녀석으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생각보다 이리저리 휙휙 잘 돌아가는 녀석이다.
가볍게 몸풀기를 시전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묘기보다 이 몸풀기가 더 신기하게 느껴지는건 나 뿐일까.
긴장한 탓인지 아직 실력이 부족한지, 첫 번째 선수는 미스를 많이 저지른다.
사실 일반인 입장에서는 미스를 저지르지 않는다는게 더 이상할 정도긴 하지만.
지면에서 점프에서 저 나무판 위에 착지하는 퍼포먼스인데, 나무판 넓이가 양 바퀴 넓이와 거의 같다.
보호대는 헬맷밖에 없어서 미스할 때마다 크게 다치는거 아닌가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도 미스하는데는 익숙해져 있는 듯.
비꼬는게 아니라 이런 자전거를 탈 때는 가장 우선시 하는게, 실수할 때 다치지 않는 연습이다.
몇번 실패를 해도 돈을 주고 보러온 관객이 아니니 다들 편하게 박수를 쳐 준다.
어차피 이런 건 자신과의 싸움이라서, 관중이 할 수 있는 일은 성공할 때까지 응원하는 것 뿐이다.
두 번째 퍼포먼스는 나무판 위로 점프해 올라가 타이어 폭보다 좁아보이는 작대기를 타고 이동해서
목적지인 미니 트럭 위로 올라가는 것. 진짜 실수하면 어떻하나 싶을 정도로 위태위태하지만
다행이라고 할까. 저 자전거는 급 브레이크 시에도 중심을 흐트리지 않고 딱 정지할 수 있도록 고안된 녀석이다.
진짜 프로처럼 막힘없이 주르르 흘러가지는 못해도, 조금씩 조금씩 멈춰가며 세심하게 전진하는 모습 역시
노력하는 자의 열정이 느껴지기 때문에 보기좋을 따름이다.
두 번째 주자는, 보기에는 친구처럼 보이는데 실력은 스승과 제자라고 생각될 만큼 차이가 난다.
간보기도 없고 실패도 없고, 바퀴 하나로 공중에 정지된 듯 서 있는 모습이 매우 능숙하다.
어쩌면 친구의 거듭된 실수로 마음 단단히 먹고 출전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원수는 갚았으니(?) 안심해도 될 듯.
마이크로 응원과 해설을 겸하고 있는 매니저 비슷한 여성분은,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관객층이 지긋한 아저씨 아줌마층이라
한국사람 입장에서 보면 살짝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지만, 광란의 밤과는 거리가 먼 소소한 축제 분위기에 오히려 들어맞는듯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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