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가든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다. 깔끔할 때 비어가든 모습이나 담아주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먹으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건물 자체가 가치를 지닌 붉은 벽돌집이라 구경하기에도 좋다.
생애 첫 비어가든은 자전거로 도쿄에서 이곳까지 달려오기도 했고 싱싱한 20대였기 때문에 미친듯이 고기와 맥주를 흡입했던 기억이 난다.
바지 고간쪽이 자전거와의 마찰 때문에 구멍이 나 버려서 난감했지만 누가 쳐다나 볼까 싶어 그냥 입고 다녔는데
문제는 행색이 워낙 노숙자같아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서 있던 한국인 부부에게 '한국서 오셨나봐요' 하고 말을 거니
몰래카메라라도 걸린 듯 꺅 하면서 기겁을 하던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그쪽은 금새 친근하게 대답해 줬지만.
비어가든 주변엔 거대 쇼핑몰도 있어서 구경하기 좋지만
여행자들의 경우엔 시내에도 구경할만한 쇼핑몰이 많아서 굳이 이곳까지 둘러볼 필요가 없다는 게 아쉬운 점.
시간을 느긋하게 잡아서, 3~4시쯤 이곳에 와 쇼핑몰을 구경한 뒤 비어가든으로 들어가도 나쁘지 않지만
비어가든에서 배를 채우려면 쇼핑몰 안쪽의 먹거리가 전부 무의미해 지기 때문에 약간 김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근은 관광객이 비어가든 외에 별로 즐길거리가 없는 거주지 구역이지만
삿포로 역과 버스 연계가 매우 충실한 편이라 거대 쇼핑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 봐도 될 듯.
한국 물가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지를 확실히 체감해 볼 수도 있다.
붉은 벽돌집은 겨울의 눈과 굉장히 잘 어울리지만 사실 이곳은 여름이 좀 더 낫다.
더울때 먹는 맥주가 각별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비어가든이라는 이름답게 공원처럼 주위 조경이 아름다워서.
여름 삿포로는 눈축제가 열리는 중앙공원 전부를 비어가든으로 만들어 온갖 맥주를 야외 잔디에서 즐길 수 있다.
여름에 맥주, 겨울에 눈축제라는 두 가지 큰 이벤트만으로도 이 곳의 활기는 일년 내내 사그라들줄 모른다.
대구에서 치맥축재라며 사람들 줄 세워놓고 그깟 치킨조각 조금과 김빠진 맥주 한 잔 돌리는 모습을 보니
축제의 의도와 방향성이 얼마나 그 축제를 아름답게 혹은 추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세삼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저 양조주 근처에 블루 포피라는 희귀종을 키우고 있어서 여름즈음엔 귀한 구경을 할 수 있다.
자전거 여행때 찍은 블루 포피 사진. 학명은 메코놉시스라는 희귀 양귀비로, 원래 부탄 고지대에서 발견된 야생종이다.
고산지대 양귀비중에서도 특히 귀하다는 푸른색 양귀비이고
일본이나 한국 여름기후에서는 생존하기 어려운 녀석이지만 노력끝에 이곳에서 번식에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삿포로의 여름은 예전에 비해 월등히 더워지고 있어서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로 알고 있어서, 이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홋카이도 관광겸 이곳으로 오면 좋을 듯.
사진 몇장 찍고 있는데 다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다.
물론 건물 내부는 고기굽는 열기로 후끈후끈할 테니 크게 문제는 되지 않지만.
건물 풍경과 함께 산책을 즐긴다던가, 삿포로 맥주 역사에 관심이 있다던가 하지 않는 이상 사실 이곳의 가격대 성능비는 그다지 좋지 않다.
1인당 3000엔 정도의 요금을 내면 양고기 징기스칸과 맥주가 무제한으로 나오지만
삿포로 시내에서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무제한이 아니더라도 배 터질만큼 징기스칸을 즐길 수 있으며
양고기 품질도 이곳보다 훨씬 좋은 맛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맥주야 삿포로 어디든 레벨이 높은 편이고.
하지만 관광객으로서 이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 삿포로에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기는 행위이기도 하고
거대한 양조 기계를 볼 수 있는 2층 뻥 뚫린 벽돌집의 디자인을 즐기며 뛰어난 서비스를 맛볼 수 있는 이곳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맛 뿐만 아니라 여행 기분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역시 이 곳을 추천할 수밖에 없다.
눈축제가 끝났다고 해서 눈이 그치지는 않기 때문에 여전히 이곳의 겨울은 현재진행형이다.
매일 이렇게 쏟아붓는 눈 청소하고 길 만드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을텐데.
삿포로 시민들에게는 정신적 상징이나 마찬가지 건물인데다, 이 정도 넓은 공간에서 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식당 안은 항상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럽기 그지없다. 일본은 일반 음식점은 조용하지만 술집은 묘하게 시끄러운데
이곳은 일본답지 않은 호탕함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 몇 번이고 혼자서 고기 구우러 오는 본인도 어지간이 제정신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이곳만큼은 혼자 와도 그다지 눈치 볼 일이 없다. 거의 모든 음식점을 혼자 즐기는데 매우 익숙한 본인이라도
고기집만큼은 어지간해서 혼자 찾지 않는데, 여기는 그런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 즐겁게 즐길 수 있다.
사실 혼자 가서 보통 일본인 가족 2~3인 정도가 먹는 양을 먹어치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수용인원이 많기도 하고, 제대로 요리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레스토랑도 있어서
원하는 건물과 음식 내용에 따라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매표소 사람들은 영어도 곧잘 알아들으니 문제는 없다.
본인처럼 몇 번이고 이곳을 찾은 사람이라면 이제 슬슬 다른 건물에서 식사를 즐겨도 될 법하지만
그래도 항상 징기스칸 무제한이 반기는 가장 앞쪽 벽돌집을 찾게 된다. 왠지 이제는 하나의 정해진 코스처럼 느끼고 있으니.
낮에 이곳을 찾으면 맥주 박물관도 견학해 볼 수 있다. 삿포로 맥주의 역사와 맥주 제조공정 등을 구경해 볼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다.
한 잔에 100엔짜리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를 견학 후 조그마한 바에서 시음해 볼 수 있는데
그 맛은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본인에게도 꽤나 충격을 줄 정도로 깔끔하다. 이래서 국산 맥주가 욕을 먹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눈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많이 쏟아지고 있어서 지채하지 않고 들어가기로 한다.
본인만의 징크스라도 해도 되겠지만, 이곳에 올 때는 버스를 타도 돌아갈 때는 항상 걸어서 숙소까지 가는 일이 일상화 되어 있다.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댔으니 가볍게 밤거리를 산책하며 삿포로의 야경을 구경하고 걸어가면 적당히 속도 진정이 되기 때문에.
거리상으로는 느긋하게 걸어도 30분 걸리지 않아 삿포로 역에 도착할 정도니 무리가 없지만
만약 식사 후에도 이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다면 조금 고심해 봐야 할 듯 하다.
식당 안은 여전히 왁자지껄하다. 맥주와 고기를 즐기며 소리를 지르면 소화도 잘 될것 같다.
기름이 많이 튀기기 때문에 옷가지와 가방 등을 넣을 수 있는 비닐백을 좌석마다 준비중이다.
징기스칸은 양고기를 야채와 함께 구워먹는 홋카이도의 소울 푸드인데, 정작 양고기가 부족해서 현 삿포로 시내 징기스칸의 99%는 호주산 or 유럽산 양고기다.
일본산 양고기는 매우 고가로 특급 요리점에서나 구경할 수 있다고. 맛은 호주산이라 해도 괜찮으니까 별 문제 없지만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이긴 하다.
고기는 로스구이용과 생고기가 준비되는데, 직원들이 상시 테이블을 둘러보다가 고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알아서 추가 주문여부를 물어본다.
홋카이도의 지형을 그대로 본뜬 불판은 올 때마다 인상적. 불판 중앙에 떡하니 놓인 별모양이 이들의 프라이드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먼저 지방을 불판 여기저기에 골고루 발라 윤기를 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양고기가 지방이 좀 있는 편이라도 쉽게 들러붙기 때문에 꼼꼼히 바르는 편이 좋다.
식당 한켠에는 맥주 제조에 쓰이는 거대 양조기가 구릿빛 광채와 함께 전시중이다.
이렇게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고기 레벨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많다.
아니 관광객이라기 보다는 주말 나들이나 회사 회식등으로 이곳을 찾는 현지인들이 더 많다.
본인 역시 삿포로에 살고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혼자 이곳을 찾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보니 약간 차질이 생긴다.
원래 징기스칸은 바닥에 야채를 가득 깔고나서 그 위에 고기를 얹어 익히는 것이 정석.
고기의 육즙이 밑의 야채에 스며들고, 고기가 타서 들러붙지 않기 때문에 깔끔하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온 본인으로서는 한꺼번에 고기를 많이 구워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야채 위를 고기로 덮을수가 없다.
야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게 고기를 덮어야 제대로 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덮으면 혼자서 처리가 힘들다.
그래서 그냥 첫 번째 접시는 대강대강 주위에 야채르 놓고 생고기를 중앙에 얹는다. 이렇게 하면 그나마 육즙이 옆으로 내려가니 흉내는 낼 수 있다.
맥주는 가볍게 한 잔 마신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 애주가들처럼 마구 퍼마실수는 없지만
이곳에 오면 기본적으로 500cc 두 잔은 마실 정도로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다. 신선한 삿포로 생맥주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도 하고.
찍고나면 바로 테이블 밑 의자로 숨겨버리며 카메라에 기름이 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생각보다 기름이 많이 튀기기 때문에 방심했다간 렌즈 앞이 기름범벅이 될지도 모른다.
육즙을 머금은 숙주나물과 양배추는 고기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최소한 두 명이었다면 업무 분담이 가능해서 좀 더 편안한 흡입이 가능하지만
고기를 혼자 구우면 사진 찍고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타기 전에 접시에 담아 먹는 모든 행위를 혼자 진행해야 한다.
홀로 여행의 장점이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런 점에서만큼은 아쉬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고기 굽기를 혼자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지만. 삿포로에서 이곳을 찾지 않기는 또 아쉽고 해서 조금 난감하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많이 잡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소나 돼지고기와는 그 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처음 먹었을 때 거부감이 심하다면 다시 찾지는 않을 터이지만, 본인은 고기라면 어지간하면 다 환영이라 폭풍 흡입중이다.
두 번째 잔은 흑맥주로 부탁한다. 이곳은 일반 생맥주와 흑맥주, 그 둘을 섞은 갈색 맥주를 무제한 마실 수 있는데
본인은 종류별로 마셔보기엔 술이 약한 편이라 그냥 두 잔 정도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한국에서 흑맥주 처음 마셨을 때는 영 쓰기만 하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는 친구가 구인네스를 한 캔 가지고 왔을 때 흑맥주의 매력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고
이곳 비어가든에서 마셨던 흑맥주에서 비로소 흑맥주만의 무게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자전거 여행으로 녹초가 된 직후였고
밥이라 해 봤자 하루 12시간 40여일간 달리면서 편의점 주먹밥 정도밖에 먹은 게 없었으니
거의 눈이 뒤집힌 채로 고기와 야채를 7접시 정도 먹었던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편안한 기차여행이고 점심때 뜨끈한 수프 카레까지 먹었으니 헝그리 정신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네 접시 정도 먹으니 배가 한계임을 분명히 하는 신호를 내보낸다. 역시 먹는것도 젊을 때 많이 들어가는 것인지.
로스를 좀 많이 주문해서 원래 정석대로의 모습을 구현해보려 한다.
원래는 좀 더 수북히 쌓아서 야채가 보이기는 커녕 공기 빠져나갈 구석도 없게 만드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랬다가는 타기전에 먹느라 너무 허둥댈 위험이 있어서 이 정도로 타협을 보기로 한다.
맥주 세 잔까지는 아무래도 무리라 마지막 입가심을 위해 무알콜 진저 에일을 부탁한다.
진저 에일이 아동용 음료수는 아닐텐데 비어가든의 마스코트인 삿짱의 얼굴이 예쁘장하게 찍힌 컵에 담겨온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음료수지만 일본서는 탄산음료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달달하긴 하지만 생강의 상쾌한 씁쓸함이 조금 남아있어서 무작정 달기만 한 콜라 등을 싫어하는 본인 마음에 드는 녀석.
야채까지 합하면 총 5접시를 맥주 1000cc, 음료수 500cc 와 함께 혼자서 먹고 마시니 배가 거의 폭발직전이다.
아주 많이 오버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그냥 용인해 주긴 하지만, 일단 시간제한도 2시간이기 때문에 아슬아슬하다.
일행이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2시간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느긋하게 즐겨도 충분하겠지만
혼자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사진 찍고 하다보면 2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다.
삿포로 사람들은 일본에서 고기 잘 먹기로라면 오키나와와 쌍벽을 이루는 매니아들이라
이곳의 징기스칸은 그야말로 식사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쿄같은 얌전한 본토사람이 이쪽 토박이들과 고기 먹으러 갔다가 제대로 입에 넣지도 못하고 패배하는 경우도 많은 듯.
그런 전투적인 흡입을 본인 혼자서 하고 있으니 왠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접시째는 진짜 이러다가 토하는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절박하다.
뭐든 과하면 좋은게 아닌데, 이곳 비어가든에서는 왠지 배 터질만큼 채워넣지 않으면 굉장히 아쉬워진다.
이건 전후 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꿀꿀이죽의 맛을 잊지 못하고 풍족해 진 후에도 부대찌개를 찾는 그런 심정일려나.
생애 첫 징기스칸을 골골 골아가던 자전거 여행 중에 즐기다 보니 이곳에서는 미친듯이 먹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뇌리에 박혀있는 듯.
어쨌든 더 이상 먹었다간 정말 못볼 꼴을 보이게 될 것 같아서 남은 것들 대강 입에 쑤셔넣고 남아있는 진저 에일을 윤활유삼아 위 속에 밀어넣는다.
숙소에 도착하면 폭풍 배설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지만 이 정도면 삿포로의 마지막 밤에 어울리는 진수성찬이었다고 자찬해 본다.
한겨울의 폭설 속에서도 열기를 잃지 않는 비어가든 내부를 기념으로 남기고 자리를 정리한다.
이제와서는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삿포로를 찾을 때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반사적인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온 몸에 진득하게 베어버린 징기스칸의 미묘한 냄새는 사진을 정리할 때마다 입맛을 돌게 만든다.
맥주와 징기스칸이면 삿포로의 하룻밤은 언제든 즐겁게 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