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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동'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01.05  과거로의 여행 - 나고야의 사치 & 향락 6
  2. 2013.08.24  과거로의 여행 - 토요타 박물관 7편 8
  3. 2010.02.21  오사카(쿄토)여행기 11편 - 쿄토역 방황과 마지막 저녁 14
  4. 2010.01.29  오사카 여행기 1편 - 신세카이와 츠텐가쿠, 오덕로드 8

 

 

새벽부터 어렴풋이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오긴 했는데 해가 뜨고 나서 보이는 창밖 풍경은 역동적이기 그지없다.

키소에서 돌아오고 난 후 살짝 우울한 채 잠이 들었다.

탄산 기포가 터지는 소리처럼 지면을 때려대고 있는 바깥 풍경이 오히려 위안을 주는 느낌이다.

내일 귀국이고, 오늘은 여행 전부터 아무런 예정도 넣지 않았다. 그냥 하루를 멍하니 보내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키소에서의 추억은 인생의 큰 획을 긋는 크고 명확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추억 되짚기를 하고 난 후의 반동 역시, 즐거운 해외여행과는 아귀가 살짝 어긋날 수 밖에 없다.

이런 기분에 콘크리트 숲인 나고야 시내로 돌아와 맞이하는 첫 아침이 화창한 푸른 하늘이었다면

오히려 할 일이 없도록 해 놓은 여행의 하루가 너무 눈부셔 보여 한층 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어 줬을 터였으니까.

 

밖에 나가고픈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건물의 경계와 하늘 사이를 미묘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볼 만한 풍경이 된다.

비와 물체가 부딪히는 모습보다는 하늘에서 총알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의 모습이 더욱 훌륭하다.

아주 강렬한 폭우가 대낮에 쏟아내려야 시야에 담을 수 있는 빗줄기라서 희소성도 있고.

 

 

 

지금 가진 카메라 장비로는 그런 풍경을 담을 수 없다.

애초에 내 실력으로 그 모습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지면의 실루엣에 들어가기 전의 묘한 컨트라스트, 정지해 있지 않음에도 장노출로는 담을 수 없는 동적인 빗줄기는

제대로 된 비디오 카메라가 아닌 이상, 두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를 정적인 사진으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다.

 

대충 이렇게 비가 신나게 왔다는 증거품으로 몇 장 남기긴 했지만

사진에 담기는 노이즈 낀 듯한 결과물 보다는 기분이 좋았다는 기억도 되살아난다.

 

한여름이라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아침에 이렇게 내려봤자 별로 겁나지는 않는다.

단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니 어디로든 쏘다니기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약간 희석시켜주는 효과는 있다.

천천히 호텔 조식을 먹고 돌아와 모닝 TV를 보면서 대충 오늘 할 일을 생각해 본다.

 

나고야 역까지 투숙자들을 배달해 주는 무료 셔틀버스는 10시 30분까지 운행하기 때문에

아무리 비로 인해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그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내 섬세한 마인드와 별개로 돈은 아껴야 하니까.

마지막 날이고 하니 부탁받은 물건들 좀 사는 겸, 서점에서 건질만한 책 좀 찾아보는 일은 필수 코스나 다름없다.

일단 쇼핑 물건을 호텔에 놔 두고 저녁즈음 다시 나가볼까 싶다. 오늘은 남는게 시간밖에 없으니까.

 

확정하진 않았지만, 나고야에서 시간이 남으면 당시 상영중이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불다'를 볼까 생각중이었다.

한국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작품이었고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을 모를리 없으면서도 무리하게 실제 역사를 고집한 미야자키의 의도가 궁금했으니까.

 

역사적 고증에 따라 작품 감상의 관점에 민감한 성격이기 때문에

한국의 언론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포인트가 실제로 작품 속에서 내 신경을 긁는다면

미야자키가 나이 헛처먹었구나 하고 미련없이 기억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미야자키는 아무래도 그런 단순한 미화에 치우칠 리가 없다는 사전 경험 때문에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 되려 한번은 꼭 봐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극장 가격이 그리 낮은 편이 아니라 여행중의 소비치고는 좀 사치스러운 면이 있는 탓에

보러 갈 것인지 말지의 판단은 아침까지도 내려지지 않고, 일단 쇼핑을 끝낸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한다.

 

 

 

폭우는 슬슬 그쳐가지만 10분의 짧은 간격 사이에도 확 내렸다가 부슬부슬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호텔 프론트에서 우산 하나 빌려서 갖고 나간다. 필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우산 하나만으로 굉장히 불편해지는 감각이다.

몸에 닿는 모든 소지품을 몸의 일부분처럼 상비하고 다니는 여행 중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할 일이 없는 우산이고

싸구려이긴 해도 일단 빌린 물건이다 보니 익숙해 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심코 버려두고 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때문에 더욱 귀찮아진다.

 

편안하게 나고야 역에 도착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공짜의 마력이란 이런 것인지, 무료 셔틀버스는 탈 때마다 이득본 기분이다.

 

날씨가 어떻든 나고야 역은 항상 사람으로 붐빈다.

중심가가 역 주변에서 점점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 한국의 대도시와는 달리

일본은 대도시간 거리를 자동차로 커버하기 힘들기 때문에 철도의 비중이 한국보다 훨씬 높고

그런 점에서 대도시의 중앙역 주변은 굉장한 밀집지역으로 악명이 높다.

 

나고야는 오사카와 도쿄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도시로, 대놓고 막나가진 않아도 향략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출근시간이 넘어서 그나마 좀 한산해진 역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넘어가 본다.

나고야 역은 정문 쪽과 반대편 쪽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데

정문에서는 주욱 걸어나가기만 하면 여행 가이드에 실려있는 모든 유명 장소를 다 둘러볼 수 있는 '정석적' 코스가 보이고

후문으로 나가면 관광하고는 별 관계없는 낡은 비즈니스 호텔과 낡아빠진 상가, 어른들만의 공간 등등이 좁은 골목골목에 포진해 있다.

 

연휴 기간이 끝난 우중충한 날씨의 대도시 골목길은 관광이라는 단어와 동떨어진 기분을 주기에 충분한데

나이 지긋한 노인네들이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모습과, 작업복을 허리에 둘러매고 원을 이뤄 길거리에 나앉아 술 마시는 노동자들의 모습 등

서울역 뒷골목에서 볼 법한 모습이 한적하게 펼쳐지고 있다. 아마 홀로 여성 여행자라면 은근히 다른 길로 나가버리고 싶은 느낌이 들 듯.

 

밤이 되어야 활기가 돌아오는 곳이다 보니 오전의 역 뒷골목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아침부터 28도를 넘어가서 덥기는 무지하게 덥고.

이곳 뒷쪽 어딘가에 친구가 부탁한 게임, 애니메이션, 코믹스 등등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어서 찾아온 것인데

오타쿠들에게 10시 30분이란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개점 시간이 11시라서 아직 문도 열지 않고 있다.

30분만 기다리면 첫 손님으로 혼잡하지 않은 가게 안을 마음껏 탐방할 수 있어서 좋긴 한데

키소의 상쾌한 공기에 익숙해진 내 몸은 진득진득한 더위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

이곳에서 30분 동안 서 있는 것은 극기훈련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고야 역까지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니 역으로 돌아가서 적당히 까페 하나 찾아 들어간다.

일본도 절전운동이 활발하긴 하지만, 까페처럼 공간을 제공하는 서비스업에서는 훨씬 융통성이 있다.

밖에 나가기가 싫어지는 쾌적한 온도와 커피 향기가 나의 대퇴근섬유를 마비시켜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든다.

양복 입은 젊은이들, 양복 입은 늙은이들, 세련된 옷을 걸친 아가씨들이 아침부터 뭐하는지 많이들 앉아있는데

회사 직원임에 분명한 수트맨들은 대체 왜 이 시간에 까페에 들어와 있는건지 모르겠다.

 

커피를 홀짝이며 메모장을 꺼내 일기를 쓴다. 남는게 시간밖에 없어서 그런지 글도 여유있게 써지는 느낌.

일반적으로 8일간의 해외여행이라면 짧다고 할 만한 길이는 아니지만, 본인에게는 그냥 잠깐 한숨 돌리고 오는 정도라

귀국 시간이 돌아오면 슬슬 아쉬움이 밀려오는게 일상적인 흐름이었는데

왠지 오늘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으니 '이번 여행은 이걸로 됐다'라는 기분이 든다.

끝내도 좋은 여행이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의외로 좋은 느낌이다. 아쉬움 보다는 만족감이 우선하니까.

 

 

 

11시 30분에 카페를 나와 오덕가게인 멜론 북스에 들어간다.

평일 낮의 쇼핑을 즐길 수 있는 특권 탓에 사람도 적어서 느긋하게 책 구경하고 부탁받은 물건도 살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발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책이나, 한국에서 발매했지만 그 전에 이미 원서를 사 버린 시리즈물 등등

눈에 불을 켜고 쇼핑을 즐기고, 그 와중에 구입하기는 망설여지지만 가게에서 서서 읽어볼 만한 책들은 탐독하다 보니

3시간 정도가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 카메라를 든 가방이 슬슬 무겁게 느껴질 즈음이 되고 나서야 계산대로 이동.

 

돈을 좀 느긋하게 갖고 온 여행이라 귀국 하루를 남겨 둔 지금도 1/3 정도의 자금이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귀국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인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마구 책을 쓸어담았다.

친구에게 부탁받은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근 12만원 정도 책 사는데 사용한 듯.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원서를 많이 보는 입장상 여유 자금이 있을때 쓸어오지 않으면 훨씬 더 후회할 테니까.

 

책 구경이 꽤나 지치는 일이라 약간 피곤한 몸과 뻐근한 눈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니 세상이 달라져 있다.

아침까지 쏟아붓던 비는 말할것도 없고, 모노크롬의 하늘마저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공간엔

맨눈으로 바라보기에도 힘든 강렬한 푸른색이 도시 이곳저곳에 색깔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덥기는 매한가지라도 하늘이 이만큼 빛나고 있으면 기분도 밝아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가방이 책으로 가득 차서 카메라는 이미 어깨에 걸어두고 다닌다. 허기가 진 건 아니지만 왠지 음식과 함께 자리에 앉아 쉬고싶은 기분이 든다.

 

 

 

마지막 날이라 거하게 한번 먹어볼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건 저녁식사때의 일이라

적당히 싸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선택은 별 후회없는 요시노야가 제격이다.

 

식욕이라는 의미보다 그냥 규동을 한번 먹어두고 싶다는 마음으로 갈 때는 저렴한 규동 한그릇으로 해결을 보지만

지금은 자리에 앉아 얼음물 한잔 들이키니 순간적이지만 천국을 체험할 정도로 상쾌한 기분인 것으로 보아

좀 더 풍요로운 메뉴를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듯 하다. 규동에 비하면 비싼 편인 580엔 짜리 카레 규동을 주문한다.

 

카레가 아주 맛있는 편은 아니지만, 규동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때 이 녀석을 먹으면 한국인이라도 나름 배가 든든해 진다.

카메라 좀 진한 편이기 때문에 규동과 카레의 남은 양을 잘 조절해 가며 먹는 편이 좋다.

너무 한 쪽에 집중해 버리면 혀가 마비되어 규동의 고소한 맛을 느끼기 힘들어 지니까.

 

점심시간이긴 해도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다. 자리가 널널하니 사진도 찍고 일기도 쓰고 하면서

에어콘 바람을 좀 더 즐겨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일본에서는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후다닥 먹고 나오는 것이 제일 싫다.

 

만족감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온다. 무료 셔틀버스는 오후 5시부터 운행을 재개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

아무리 공짜를 좋아한다고 해도 34도의 폭염 속에서 할 일도 없이 무거운 책뭉치를 지고 도심지를 떠돌아 다닐 수는 없으니까.

방으로 올라와서 어깨의 짐을 내려놓자 홀로 여행중 항상 쥐고 있던 가벼운 긴장이 풀린다.

바닥에 땀이 똑똑 떨어지는 걸로 봐서 확실히 짐 들고 돌아다닐 만한 날씨가 아니긴 하다. 카메라만큼은 어쩔 수 없어도.

그래도 에어콘 틀어놓고 전리품들을 꺼내서 다시 정리하는 일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기분좋은 일이다.

종류, 크기별로 구겨지지 않게 책을 정리해서 베낭에 넣고 있는데 세삼스럽게 키소에서의 하루가 마음을 움직인다.

 

이번 여행엔 52L 짜리 대형 베낭을 들고 왔는데, 본인이 사용할 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키소 사람들에게 줄 선물 부피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소에서 나고야로 돌아오는 오늘 같은 날부터는 베낭이 매우 널널해 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맨손으로 나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은 못 보내겠다는 듯이, 소야노 씨 가족부터 해서 카미무라 씨와 소바집 사장님까지 전부 선물을 들고 와 나에게 건내주셨다.

덕분에 텅텅 빌 것이라 생각한 내 베낭은 올 때와 다름없이 빠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책은 부피가 적어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이라, 이래가지고는 분명 내일 귀국시에 추가금을 내야 할 듯 하다.

저가항공이기 때문에 규정 무게를 조금만 넘어가도 칼같이 추가 요금을 받는다. 그래도 키소 마을의 선물이니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한다.

 

 

 

5시가 넘어 셔틀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로비로 내려가 직원에게 근처 극장이 어디 있는지 물어본다.

우연의 일치인지 나고야 역 바로 앞 빌딩에 극장이 있다고 하니 망설임없이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나고야 역으로.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역 주변은 평소대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파도처럼 일정한 진폭으로 횡단보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극장이 있다는 건물은 단순한 극장도 아니고,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갖춘 백화점도 아니다.

상당히 비싼 고급 요리점과 층마다 위치한 회사 사무실 등등 비지니스와 서비스업이 묘하게 혼합된 빌딩이다.

젊은이들 왁자지껄하게 노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엘리베이터 타고 극장층으로 이동하는데 묘하게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극장 앞에 가니 '바람 불다'는 6시 15분 상영이라 조금 난감하다.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점도 그렇고

상영 후에는 저녁을 제대로 먹을만한 시간이 좀 아슬아슬하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일본에서의 극장 관람은 역시 돈이 좀 아깝기도 하고 해서, 10분 쯤 고민하다가 그냥 다음에 기회되는대로 보기로 하고 돌아선다.

대신 극장 관람을 포기한 분 만큼의 자금과 시간은 최후의 만찬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기로 한다.

 

다시 나고야 역으로 돌아가 고층으로 올라간다. 나고야 역은 그 자체가 거대한 쇼핑몰 구조를 하고 있어서

여행이 아니라 쇼핑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역 안에서 거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

서울역처럼 역사 내부 음식점들이 비싸기만 비싸고 맛은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고

비싸긴 비싸지만 비싼 값은 하는 그런 가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일단 '호기'를 부려보고 싶은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장소.

 

나고야는 여러 번 와 봤지만 자전거 여행 당시 나고야에서 먹은 가장 비싼 외식이라고 해 봤자 500엔 정도 하는 전골 정도였기에

역 위의 음식점들이 무엇을 팔고 어떤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물론 일본 물가에 대한 상식 정도는 알고 있는 본인 경험상 지갑속에 든 소지금이 결코 모자라는 일은 없을거라 확신하고 있고

만에 하나 소지금보다도 요금이 높을 경우엔 비상수단으로 신용카드를 쓸 수 있으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먹을거리를 찾아 본다.

 

어느 매장에 들어가도 후회할 일은 없어보이지만, 결국 여행 마지막 날 선택한 식사는 초밥이다.

그것도 싸구려 회전초밥이 아니라 제대로 된 회전 초밥집. 비상 사태를 대비해 신용카드 사용 가능 여부까지 물어본 후 입장한다.

회전초밥이란 원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저가 경쟁의 일환으로 탄생된 구조라서, 고급 회전초밥집이 무슨 의미인가 싶은데

이곳은 레일 위를 완성된 초밥들이 돌아가고 있는 상태에서 손님들이 집어가는 일반적인 구조가 아니라

모든 초밥이 터치패드를 통해 주문 받은 후, 주문한 사람에게만 자동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즉석 초밥집이다.

'회전'이라는 요소를 순수하게 가게의 규모를 확장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하고, 초밥의 질은 떨어트리지 않은 하이브리드 방식.

 

가족 단위의 손님이나, 정장 갖춰입고 비지니스식 접대를 즐기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혼자 자리 잡으니 약간 긴장도 되지만

테이블 사이의 간격이 꽤나 떨어져 있고 간이 칸막이까지 착실히 갖춰져 있어서 사진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다.

 

 

 

터치패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잘 눌리지 않는 단점이 있지만 어쨌든 주문하기는 어렵지 않다.

종업원이 와서 간단한 설명은 해 주고 가는데다가, 외국인이라면 영어로 메뉴를 전환하는 항목도 있어서 문제 없다.

하지만 이럴 경우 본인처럼 일어만 잘 하는 사람 입장에서 좀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생선 이름은 전부 다 꿰고 있느게 아니다 보니 사진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데다가

영어로 바꿔봤자 내가 영어로 생선 이름을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본 한 접시에 300엔이 넘고, 고급 초밥은 600엔도 넘어가는 초밥집이라

괜히 전투 직전의 병사처럼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돈 신경 안쓰고 식사를 즐기리라 다짐하고 버튼을 누른다.

초밥이 레일을 타고 돌아와서 정확히 내 테이블 쪽으로 쪼르르 밀려 들어온다.

접시가 내 앞에서 멈추면 그 사이에 내가 집어들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테이블 앞으로 이동하는 것까지 완전한 자동.

외식 문화란 역시 자금의 차이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중요한 초밥 맛을 느껴본다.

 

나고야 역에 존재하는 어떤 초밥집도 새벽 수산물 직판시장 앞에서 장사하는 초밥집에 비할 수는 없다.

초밥은 재료의 신선함이 맛의 80~90%를 좌우하는 극단적인 요리라서, 산지에서 떨어진 초밥집은 일단 가격대 성능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점을 제외하고서는, 이 가게의 초밥은 100~300엔 짜리 초밥이 레일 위를 굴러다니는 일반 회전초밥집과 비교할 건덕지가 없는 훌륭한 맛이다.

 

 

 

주문을 한 접시씩 할 필요도 없어서, 한꺼번에 3~4 접시를 주문하면 같은 종류별로 나눠서 도착한다.

밥의 끈기와 온도, 초대리의 배합 역시 교과서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며

생선 쪽은 부위 선정을 칼같이 지키고 있다. 맛이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발라내는 것은 초밥 요리사의 양심이기도 하고.

 

겉을 살짝 구운 다랑어 타타키(たたき)도 재료의 상태나 구운 정도 등, 가격대 이외의 모든 부분에서 상급이라 할 만 하다.

이러한 초밥을 수산시장 근처에서는 반값 정도에 먹을 수 있다는 게 항상 마음에 걸리는 일이지만

이곳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식사 환경과 아름다운 인테리어, 최상급의 접대 매너를 함께 즐기는 외식이란 것도 나름 중요한 점이라 본다.

 

애초에 나고야의 마지막 밤만큼은 이렇게 사치와 향락에 젖어 보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왠지 신분 상승한 듯한 기분으로 우아하게 맛을 음미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먹는거 가리질 않다보니 150엔 짜리 편의점 도시락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초밥 두 점에 편의점 도시락 2개 가격이 확확 날아가는 식사를 하고 있으니 색다른 스릴과 된장남의 자뻑기분을 조금이나마 대리체험할 수 있는 듯 하다.

 

 

 

사실은 초밥에 대해서만은 그나마 조금 민감함 편이라 더욱 기쁜 탓도 있다.

일본의 저가 회전초밥집 정도라면 감탄 막 하면서 먹을 정도는 아니고, 그냥 맛있구나 하는 수준으로 만족할 수 있는데

한국의 상당한 대다수 초밥집은 그 정도 만족감 주는 곳도 꽤나 드물다.

 

애초에 한국에서 초밥이란 횟집에서 적당히 회 먹으면서 사이드 메뉴로 넣는 듯한 녀석들이 많고

그런 곳에서는, 생선은 그럭저럭 신선해도 초밥 쥐는 법이나 생선과의 비율 등은 그냥 엉망인 수준이다.

밥은 쥐꼬리만큼 쥐어놓고 생선은 꼬리쪽을 길게 늘어트리면서 '밥 적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따위의 헛소리를 하는 곳도 있으니까.

 

일본의 회전초밥집 정도가 마지노선이라면, 한국의 회전초밥집이나 그마트 등에서 파는 낱개 초밥같은건

사실 초밥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냥 말라 비틀어진 과자일 뿐.

 

 

 

6인 가족이 앉을 수 있을 만한 반 독실 좌석이라서 짐도 마음껏 풀어해쳐놓고 사진 마구 찍어도 전혀 거슬릴 게 없다.

얼핏 칸막이 너머를 바라보면, 회사 사람들 접대 자리인 듯 중앙에 후나모리를 떡하니 세팅해 놓고 덕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후나모리는 익히들 알고 있는 모듬회와 같은 메인 요리로, 이곳에서는 크기 때문에 따로 주문받아 종업원이 직접 들고 온다.

 

나고야에서 다시 이 가게에 들를 확률은 한없이 낮기 때문에 아쉬울 것 없이 시험해보고 싶은 녀석은 전부 주문해 버린다.

가게의 숙련도를 가늠하는 계란 초밥은 충분히 괜찮은 편이다.

TV에 나오는 진짜 명인의 카스테라같은 계란 초밥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사실 그 정도 계란초밥을 만드는 명인 가게에서 먹으려면 적당히 1인당 40~50만원 쯤은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 사람 대부분이 평생 그런 계란초밥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리는 널널하고, 초밥이 레일위를 돌고 있어서 말라가는 것도 아니니

무심코 '역시 돈은 좋은 것이로구나' 하는 속물적인 감탄사까지 읊게 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인데, 여기서 이런 초밥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먹는다 해도 금액은 많아봐야 5~6만원 내외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대식가인 가족들과 함께 고기라도 굽는 날엔 20만원 정도는 훌쩍 넘겨버리는 것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서 가슴 졸여가면서 서민 행세하며 먹고 있는 건, 마치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기가 걸어온 길도 돌아보지 못하는 행동이다.

한국에서 먹었던 외식의 평균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이 초밥집에서 지불할 금액은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평균가에 가깝다.

그게 단지 소지금이 한정된 헝그리 여행중의 한 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천상의 행복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

 

해외 여행이라면 다들 자연스럽게 자국에서보다 절약하게 되니, 덜덜 떨면서 초밥을 입에 집어넣다 보면 인지부조화 상태를 느끼기도 한다.

 

 

 

마음의 여유를 밖으로 발산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냥 허세 한번 부려보고 싶었던 것일까.

평소엔 거들떠도 보지 않는 가지절임 초밥도 호기심에 한번 주문해 본다.

해산물 초밥 지상주의인 본인으로서는 초밥집에서 해산물 초밥 이외의 초밥을 먹는다는 것은 이단으로 간주하는데

못 먹어본 맛도 경험해 보자는 의미로 이런 것까지 한번 먹어본다. 이왕 버린 몸(?) 이것저것 시도해 보자는 심정이었던가.

 

시원한 가지의 수분과 짜지 않게 적절히 절임된 맛이 입가심으로 나쁘지 않다.

가격도 100엔대로 싼 편이라 해산물 초밥의 짠 맛에 조금씩 부담을 느낄 때 먹어주는 것도 괜찮을 듯.

물론 따끈한 녹차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초밥집에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있을까 싶지만.

 

가지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잘 먹는 야채인데, 초밥의 다양화는 가격적 폭리만 아니라면 여러가지로 시도되어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다.

 

 

 

가게에서는 홋카이도 특선이라고, 홋카이도쪽에서 유명한 해산물로 만드는 초밥을 선전중이다.

물론 홋카이도에서 가져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신선해도 거기서 나고야까지 초밥 재료를 가져올 수는 없다.

 

주문한 녀석들 중에서는 가장 비쌌던 이 녀석은 김으로 밥 주위를 둘러싼 군함말이인데

위에는 홋카이도에서 유명한 해산물인 연어알, 가리비, 게살, 성게알이 한꺼번에 올라가 있는 디럭스 초밥.

저 네가지 모두 없어서 못 먹는 최고의 재료들인데, 저걸 흘러내릴정도로 담아올렸으니 그 사치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백화점 사치품 부스에 들어가서 프라다나 에르메스 제품을 눈 앞에 했을 때의 느낌일까.

이 배덕적인 초밥의 모습을 보면서 가방에 환장하는 허영심 덩어리 여성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섞어놓으니 4배로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초밥은 장르별로 하나씩 먹는게 낫다.

 

 

 

배가 터질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아쉬움 없이 먹었다고 생각하며 만족감 가득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먹은 금액은 5700엔. 당시 환율로 치면 6만원 조금 넘는 가격이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도 혼자 먹어본 적이 없는 금액이긴 하다.

자전거 여행중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고, 단기 홀로 여행 역시 자금을 넉넉히 들고 나간 적이 별로 없다 보니

마음이 가끔 동해도 좀처럼 시도하지 못했던 쾌락의 추구였는데, 시원하게 해결해버리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 것일까.

 

왠지 키소에 있을 때보다 물질적으로 타락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지만 그냥 과한 생각이겠지.

 

초밥은 만족스러웠지만,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역시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

편의점이 아닌 나고야 역 지하상가에서 한참 떨이중인 나고야 코친을 한 팩 구입해 온다.

나고야 역 지하상가는 사실상 백화점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음식물들 수준이 장난 아닌데

어떤 지역이라도 폐장시간이 되면 병적으로 재고 소진을 위해 할인판매를 하기 때문에

이걸 잘 이용하면 식비를 절약하면서 맛있는 것들을 많이 맛볼 수 있다.

 

200엔 정도 가격으로 나쁘지 않은 코친을 사 온 덕택에 저녁이 외롭지 않다. 맥주도 한 캔 따고.

코친은 그 쫄깃함과 함께 살이 별로 붙어있지 않은 날개부분을 뜯어먹는게 재미있어서

먹을때는 열정적이지만 다 먹고 나면 허무함이 살짝 밀려오는 그런 안주거리.

 

가방에 가득 쌓인 전리품 도서를 보며 오늘 영수증을 체크해 보니, 거진 8일간 여행 경비의 1/4 정도를 오늘 하루만에 다 써버렸다.

이제 남은 돈은 3000엔 남짓. 이 정도면 공항에 돌아가서 마지막 식사 정도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여행가서는 항상 짜투리 경비를 남겨 와서, 다음 여행의 추가 용돈으로 사용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광란의 마지막 하루 덕택에 남는 예산이 거의 없다. 물론 그걸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뉴스를 보니 오늘 새벽부터 나고야에 내린 폭우는 시간당 50mm 라는 집중호우였다고 한다.

그 정도면 그냥 하늘이 뚫렸다고 표현하는게 적당한데, 그 탓에 나고야 역의 모든 신칸센이 오전 내내 연착되었다고.

오늘 하루는 그런 굳은 날씨에도 전혀 관계없는 일정이었고, 이제까지의 7일간 한 번도 날씨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기에

이번 여행은 이 협조적인 날씨만으로 충분히 고맙고 즐거운 편에 들어간다. 35도를 넘나드는 폭염만큼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내일 귀국 비행기는 오전 10시 45분이라 더 이상 여행이라는 개념은 없다.

TV 프로를 즐기면서 이런 단기 여행으로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만족감으로 충만한 눈꺼풀 셔터를 내린다.

 

 

길고 긴 토요타 박물관의 순회도 드디어 끝이 난다.

사실 시간이 별로 많이 걸린건 아니다. 넉넉잡아 세 시간 정도.

느긋한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느긋하게 구경하고 휴식까지 취한 뒤 나고야로 돌아가도

볼거리 한두 군데는 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듯 하다. 본인은 예정된 일도 없어서 그냥 쉬러 돌아가지만.

 

시간에 비해서 많이 지치는 느낌은 든다. 꽤나 열심히 설명까지 읽어가며 보는 것만으로도 체력소모가 꽤 되는데

찍은 사진만 200장이 넘으니 이게 또 쉽게 볼게 아니다. 미러리스였다면 좀 덜 피곤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신관을 나오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제임스 릿지라는 사람의 '트래픽'이라는 작품.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일부러 살짝 각도를 틀어서 담아본다.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제목에 더 어울리는 듯한 복잡함이 매력적.

예술가에겐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문외한인 나로서는, 밑에 가격이라도 적어놓으면 좀 더 맛을 음미해 보려고 노력할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식사까지는 할 생각이 없고, 일기를 좀 적으며 목이나 축이고 싶어서

아담한 까페에 들어간다. 까페 중앙엔 기념품 가게가 듬직하게 위치해 있어서

휴식을 위해 들어갔다가 아이들에게 이끌려 지갑을 열게 되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의외로 아이가 없는 어른들까지 진지하게 둘러보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음료수나 한잔 마실까 했는데, 핫도그 세트가 100엔 정도 저렴하다고 선전중이라 그걸로 간다.

음료수값이 한국보다 비싸니 오히려 이런 세트메뉴를 먹으면 좀 손해를 덜 본다는 느낌일까.

 

창가 자리에 앉아서 느긋하게 밖을 바라보는데, 1920년대 자동차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 앞의 서킷에서 꾸준히 주행중이다.

정비를 마치고 시운전이라도 하는 것일까. 자동차란 녀석도 참치와 마찬가지로 달리지 않으면 죽어버릴 듯.

자동차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 일도 즐겁게 해낼 수 있을듯 하다.

팜플렛을 얼핏 보니, 좀 레어한 자동차가 시운전 할때는 미리 선전도 하고 해서 관람객이 많이 모이는 모양.

 

 

 

핫도그는 미국식이 아니라 아주 아담한 녀석이었는데,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는 탱글탱글한게 씹어먹는 맛이 있었다.

사실 여기서는 사진 찍을 생각이 없었지만 지친 몸을 추스리면서 일기 쓰고 찍었던 사진을 점검하다보니

문득 한장 찍고 싶어지는 바람에 핫도그의 자태를 담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정말 풍족한 여행이 아닌 이상, 남들처럼 맛집 찾아가서 증거사진 착착 남기는 멋들어진 행동은 못하고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동네 분식집에서 수백만원짜리 카메라 펼쳐놓고 심각하게 셔터 누르는 짓만 하고 있다.

여행의 먹거리라는게 꽤나 추억거리가 되기 때문에 납득은 하지만, 찍고 있으면 묘하게 초라해 보인다.

 

예정대로라면 예산이 꽤나 널널하기 때문에, 일부러 남겨오려 하지 않는 이상

한 번쯤은 돈 좀 들여서 제대로 식사를 즐길 기회가 있다. 그 때는 정말 인정사정없이 찍어줘야겠다고 생각중이다.

 

 

 

밖에 나오니 그래도 박물관 안은 시원한 편이었다고 향수에 젖을만큼 무덥다.

습도는 아직 조금 낮은 편이지만 36도에 달하는 낮시간 온도는, 어디서 솟아나는지 모를 정도로 땀을 송글송글 맺게 만든다.

2시쯤 되니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들어오는 편인데, 이곳 주차장이 워낙 넓어서 전체적으로 한산한 분위기다.

 

대도시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에 이런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는 건

나같은 여행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나고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소소한 축복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그리 싫어할만한 곳도 아니고, 그렇게 성장하다보면 첫 자동차를 토요타 제품으로 선택할 가능성도 높아질테니.

'돈만 있으면 어디 횬다이 따위를'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을 한국인 입장에서 본다면

자국 자동차 메이커의 근시안적인 발상은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잘 가꾸어진 조경을 한번 둘러보고 돌아가려다 오랜만에 깔끔한 녀석을 한 마리 만난다.

손가락으로 시야 앞에서 깔짝깔짝 거리면 양손으로 공격도 걸어온다. 물론 꽉 잡히면 조금 따끔하지만.

황색 사마귀보다는 이런 녹색 사마귀가 귀여워 보이는건 역시 색채의 이미지가 가지는 힘일까.

 

자전거 여행 도중 워낙 많이 짜부를 만들어버린 녀석이라서 미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다.

산길 언덕을 내려갈 때면 나나 저녀석이나 도저히 피할수가 없으니 그냥 밀어버리는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사마귀는 체형 자체가 뒤로 물러날 수 없게 되어 있어서, 빠른 물체를 피하는 능력이 전무하다.

그 덕분에 가진 공격성으로 포식자 위치를 점하고는 있지만, 사람에게도 덤벼드는 무모함은 사실 겁이 없어서라기 보다 도망갈수가 없어서이다.

 

 

 

주차장에는 전기 자동차를 위한 무료 충전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과연 자동차 박물관이다 보니 자동차에 대한 배려 역시 사람에 대한 그것 못지 않다.

외부 디자인은 그냥 조금 수수한 정도이지만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이 녹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푸른 하늘 아래서는 단정한 인상을 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더워서 그런지 거의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자동차를 끌고 온 듯 하다.

들어올 때나 나갈때나 이렇게 걸어서 역 사이를 이동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따가울 정도의 햇살이 힘들긴 하지만, 덕분에 사진 담는것도 수월하니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나고야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주위도 한적하고.

관광객 상대가 아닌 본토 사람들 상대하는 가게가 드문드문 보이는 것도 나에게는 즐거운 요깃거리다.

시 외곽에는 커다란 창고형 북오프나 잡화점, 파칭코 가게 같은게 들어서 있어서

의외로 정해진 코스만 이동하게 되는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다.

자전거 여행하면서 실컷 즐겼으니 그건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리니모에는 벌써부터 학생들이 많이 타고있어 소심한 나는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

시간에 여유가 있는 관광객이라면 이 리니모를 타고 주변을 구경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하다.

가이드 역할을 할 일은 없겠지만, 이 블로그에 들어와서 이 정도 정보는 얻어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고야역에 돌아오니 4시쯤 되는데, 호텔까지의 무료 셔틀버스는 오후 5시부터 운행한다.

1시간 일찍 들어가서 쉬어봤자 시간만 아까울 뿐이니 역 주변을 술렁술렁 돌아다녀본다.

여행중 가장 먹기 힘든것이 야채나 과일이다보니, 편의점 들어가서 야채주스 하나 마시기도 한다.

 

다행히도 역 근처에 부탁받은 물건을 살 만한 가게가 있어서 잠깐 들어가 구입해 온다.

사람이 너무 바글바글해서 오래 있고싶진 않았지만, 한국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코믹스가 있어서 그것도 서둘러 몇권 사고 나온다.

학생이 많이 몰려드는 시간대라서 그런 듯. 한번쯤은 더 갈 기회가 있으니 다음엔 오전에 일찍 나와서 조용하고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고 싶다.

 

일단 나고야에서의 초반 일정은 이걸로 끝이고, 내일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오늘밤엔 식초에 절인 문어라도 좀 뜯으면서 한 잔 마셔보려고 생각중인데

그래도 이거 한그릇 더 먹는다고 내 배가 포만감을 느낄 일은 없으니, 휴식을 겸해서 요시노야에 들어간다.

딱히 엄청 맛있다고 생각이 드는 녀석은 아니지만, 어째선지 일본에 오면 반드시 규동집에 들어가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한 끼 식사라기보다, 휴식을 취하며 허기를 달래는 간식이라는 느낌이라서 그럴까.

한국서 규동 한번 먹어보고는 그 생각이 좀 더 강해졌다. 한국에서 규동 먹는건 돈이 아까운 행위다.

이미 40년 가까이 맛이 거의 변하지 않는 우직한 요시노야 규동은, 어딜 가도 꽝을 뽑을 일이 없어서 안심이니까.

 

 

 

나고야 역 안내센터에 가서 내일 목표인 히다 타카야마(飛騨高山)에 가는 방법을 물어본다.

처음엔 JR 전철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던데, 내가 좀 더 싼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자 버스 시간표를 알려준다.

 

20분쯤 더 소요되지만 무려 1500엔 정도나 저렴하다.

나고야로 돌아오는 하루 루트가 아니라 거기서 숙박할 예정이라, 20 분의 시간차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히다 타카야마가 굉장히 유명한 관광지이긴 하지만 나한테는 그곳 역시 그냥 전초기지 역할이라서.

 

호텔에 도착하니 6시가 넘어있다. 나고야 여행중에 하루 꼬박을 토요타 박물관 하나 돌아보는데 소비했다고 하면

아마 아까워 할 사람이 적지 않을거라 생각하는데, 홀로 여행의 즐거움이란 이런 느긋함에서 오는 것이다.

 

셔틀버스를 타기 전에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안주, 술을 좀 사왔다.

오늘은 세탁기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쉬기는 힘들지만,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라서 어쩔수가 없다.

보통 호텔에 들어가면 옷이고 뭐고 다 벗어버리고 속옷 한장으로 뒹굴거리기 때문에.

 

1층에 위치한 코인 세탁기를 사용하려면 옷 입고 세탁 돌리고, 1시간 뒤에 내려와 건조기에 집어넣고, 또 한시간 뒤에 걷으러 가야 한다.

한마디로, 약 2시간 반이 넘는 시간동안 방 안에서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 이거 나한테는 꽤나 불편한 일이다.

 

 

 

쥐꼬리만한 세제도 30엔씩 받아챙기기 때문에, 반드시 한국에서 세재를 비닐봉지에 담아온다.

 

매번 담으면서도 참 이 돈 아껴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의외로 여행이란, 수천 엔씩 들여서 맛있는거 먹고 수천 엔씩 버스비 내고 이동하는 것보다 빨래하는데 30엔 쓰는게 더욱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국에서 조리도구와 쌀과 반찬을 들여와 여기서 만들어 먹을수는 없지만 세탁세제는 충분히 갖고 올 수 있으니까.

 

그리 길지 않은 토요타 박물관 관람이었지만, 찍어온 사진을 보니 오늘은 만족감으로 충만하다. 이 정도면 하루 잘 보냈다는 기분이 든다.

 

 

 

도시락을 먹고 한 시간쯤 지나서 빨래 돌려놓고 냉장고에서 식혀놓은 캔을 꺼낸다.

나고야를 떠나는 날이라 기분이나 좀 낼까 싶어서 한잔 마셔볼 생각이었는데

아침에 TV에서 선전하던 녀석이 기억에 남아있어 일부러 이 녀석을 찾아 구해왔다.

 

한국에서는 분류되기 어려운 츄-하이(チューハイ)라는 주류인데, 증류주에 소다와 함께 각종 과일향을 첨가한 술이다.

발포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소주와 같은 증류주 계열이라도 거의 맥주 마시는 느낌으로 알싸하고 시원하게 즐길 수 있다.

일본에서는 물론 여성들이 좋아하는 술인데, 이게 마셔보니 한국의 왠만한 맥주보다는 낫다.

 

정통 맥주도 나쁘진 않지만, 이번에 기린에서 자사의 '빙결'주에 가장 원하는 과일 앙케이트를 했을 때

1위를 먹은 녀석이 이 복숭아맛이라고 아침 TV 에 광고가 나와서 구매해 봤다.

당연하게도 기간한정 제품이라 지금 한번 먹어보자 했지만

사실 기간한정이라고 이름붙이고 이제까지 셀 수도 없을만큼 다양한 과일종류가 나왔었기 때문에 반쯤은 그냥 상술.

 

증류주의 깔끔함과 탄산의 시원함, 달달한 복숭아맛이 아주 훌륭하다.

 

빙결이라는 이름의 이 술은 일본에서 매우 대중적으로

캔을 뜯으면 기압차로 인해 표면의 프리즘처럼 생긴 무늬부분이 자동적으로 구겨지기 때문에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게 만드는데, 이 아이디어가 대박을 터트렸다. 지금도 기린 빙결의 심볼과도 같은 녀석.

 

원래는 레몬이나 오렌지 빙결을 마시곤 했지만, 신경 좀 써서 만들었는지 확실히 맛과 향이 잘 조합되어 있다.

술이 그리 강하진 않아도 즐겁게 시큼한 문어다리를 뜯으며 술과 함께 TV 버라이어티를 시청한다.

여행와서 이렇게 초저녁부터 느긋하게 방에 틀어박혀 술과 TV를 즐긴다는건, 조금 사치러운 행동일런지.

 

내일도 버스가 10시 30분에나 출발하기 때문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 필요도 없다.

세탁 때문에 계속 1층으로 왔다갔다 해야 한다는 귀찮음만 제외하면 후회없는 느긋한 하루였다고 자찬하며 한 모금 들이킨다.


키요미즈데라를 올라갈 때와는 다른 길로 내려갑니다.
키요미즈자카(淸水坂)라는 원가 비공식틱한 이름이 붙어있는 이곳 거리는 왼쪽으로 산넨자카(三年坂)로 이어지는
메인 로드인데, 산넨자카는 요즘 이 키요미즈자카의 기념품점과 음식점들에 밀려 거의 이름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산넨자카가 유명했던 건 거의 100년 전쯤이라,
지금은 유명한 '이곳에서 굴러 넘어지면 3년안에 죽는다'는 소문만 남고
그냥 키요미즈자카에 흡수되다시피 했죠.

키요미즈데라를 빠져나올 때쯤 되니 눈도 그치고 날씨도 풀려가는 듯 합니다.
머피아저씨 면상 좀... ㅡㅡ;


보통 이곳 상점가에서는 이곳의 명물인 야츠하시 팥떡(八ッ橋)과 녹차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유명합니다.
야츠하시는 투명할 정도로 얇은 삼각형 모양 피에다가 팥고물을 넣어 만드는 찹쌀떡 종류인데요.
요즘엔 팥고물 대신에 딸기크림, 계피크림 등등 다양한 베리에이션 제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명물 과자란 어딜 가나 마찬가지지만, 이름값에 비해서 특출나게 독특한 맛은 없어요.
떡 종류가 발달한 한국인이라면 더더욱 그럴것 같습니다. 그냥 별다를 것 없고 모양만 귀여운 떡입니다.

기념품점은 잘 안들어가는데 동생분이 슬금슬금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이 녀석을 발견하고 덥썩해버렸네요.
꽤나 센 가격때문에 (한국돈으로 4만원쯤?) 동생분이 한참을 고민했지만
제가 미친척하고 구입하니 결국은 덩달아 구입해버렸습니다.

햇빛만 들어오면 차방에서 애교를 떨어대니(빛을 받으면 꼬리가 달랑거립니다)
무리해서 구입해 온 보람은 있네요. 알고보니 이곳 가게에서는 우수 관광품으로 선정되었답니다.


일단 키요미즈데라를 빠져나와 버스타고 금새 도착할 수 있는 쿄토역 앞으로 나왔습니다.
랜드마크로서는 한참 모자라는 듯한 느낌의 쿄토타워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네요.
쿄토역 주변은 일본의 고도라는 느낌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건물들의 집합소라
그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녀석이 이 쿄토타워와 쿄토역이라 할 수 있을 듯.

무료 쿠폰이 있는것도 아니고 저 곳에 올라갈 일은 없습니다.
아직 한 번도 안올라가 봤는데, 언젠간 올라갈 일이 있을려나요.


똑같이 이질적인 녀석이라도 이 쿄토역은 그래도 나름 사연이 깊은 건물입니다.
처음 이녀석을 봤을 땐 그 거대함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죠.

원래 1877년 벽돌 빌딩으로 시작했던 쿄토역은 개축과 화재 소실로 인해 여러 번 재건축을 거친 끝에
쿄토역 건립 12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하라 히로시(原廣司)가 
설계를 맡은 끝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호텔, 백화점, 극장등 첨단 복합 문화공간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쿄토역은 일본에서 가장 거대한 전철역이죠.


높이 60m에 이르는 타원형 구조의 건축 양식 도면을 처음 접했던 당시 사람들은
하라 히로시에게 폭언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부으며
'쿄토의 미관과 정신을 오염시키는 최악의 건축물'이라는 악평을 쏟아냈습니다.

잘나신 분들이 언제나 그렇듯 '쿄토' 하면 나즈막하고 전통적인 미적 감각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믿은 거죠.


하지만 역이 완공된 후 수많은 해외 유수의 건축 디자인상을 수상하고
쿄토 최고의 명물로 단숨에 부상하는 등 쿄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쓰게 했다는 찬사가 이어진 후로는
아무도 이곳에 대해 트집잡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예술가의 혜안을 윗자리의 잘나신 분들이 어찌 이해하리오.



참고로 하라 히로시는 지난 번 오카사 여행기에서 소개했던 우메다 스카이빌딩을 디자인하기도 했으며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장이라는 홋카이도 삿포로의 돔구장을 설계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가장 쿄토답지 않은 느낌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소화해 낸 그의 능력은 정말 천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직접 한바퀴 둘러보지 않으면 이곳의 신선함을 체험하기 힘들 것 같네요.
쿄토의 관광 코스에 꼭 한번 넣어볼 만한 멋진 건축물이니
고즈넉한 쿄토의 문화 유산들과 대비되는 이곳을 감상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것 같습니다.


원래는 이 다음에 제가 좋아하는 만화박물관에 가려고 했습니다만...
자전거 여행 당시의 거리감각으로 이녀석을 찾다 보니 영 동떨어진 곳을 찾다가 시간이 흘러가 버렸네요. ㅡㅡ;

자전거 여행땐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로 느껴졌는데, 실은 쿄토역에서 도보로 40분 가까이 걸어가는 거리였습니다.
확실히 시간은 상대적인 건가 봐요.

사실 만화박물관은 오후 5시 까지밖에 개장하지 않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도착했더라도 30분밖에 관람하지 못했겠지만.


지난 자전거 여행때 들렀던 쿄토 만화박물관.
원래는 초등학교 건물이었는데, 폐교하면서 학교 전체를 만화박물관으로 개조했습니다.
복도, 교실 모든곳에 빽빽히 만화들이 가득차 있어서 간단한 입장료만 내면 어디서든 아무렇게나 만화를 볼 수 있죠.

운동장에 누워서 느긋하게 만화를 즐기는 이 곳의 모습은 정말 인상깊었습니다.


당일치기 쿄토 여행이라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오사카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4박 5일간의 짧은 여행도 내일로 마지막이군요.
실질적으로 관광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에
8시가 다 되서 도착한 오덕들의 성지 덴덴타운에서 수집해 갈 원서 코믹스를 몇권 샀습니다.

일반 소설이든 코믹스든 한해 출판되는 서적의 양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서
일본의 서점에 가면 항상 부럽고 부러워요.

이런 일본도 미국 출판시장의 1/10도 되지않는다니...
그저 도서관이나 지역별로 많이 만들어주면 좋겠지만 현실은 사대강 따위나 파재끼는 시궁창...

덴덴타운도 거의 8시쯤엔 문을 닫기 때문에 오덕쇼핑은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끝났구요.
내일은 아침에 짐 챙기고 나가면 공항 가기 전까지 딱히 멀리 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또 덴덴타운이나 어슬렁 거리겠죠. 그러니까 오늘은 그저 배 든든히 채우고 숙소에서 편히 쉬면 됩니다.

숙소 들어가기 전 일단 저렴한 규동체인점 스키야(すき家)에서 맛만 살짝 보기로 했습니다.

동생분은 치즈 카레.


친구는 소고기 덮밥 곱배기


저는 카레 소고기 덮밥 곱배기 시켰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에는 뒷풀이겸 해서 배를 가득가득 채우는게 제 여행의 전통이라
비록 자금이 부족해서 저렴한 녀석이긴 하지만 배불리 실컷 먹었네요.

이곳 스키야는 일본 규동집의 절대 아성이었던 요시노야(吉野家)를 제치고
2009년 일본 규동 체인 매상 1위를 차지한 떠오르는 신흥 규동집입니다.
요시노야보다도 저가를 유지하면서, 품질에서 떨어지지 않는 대신 줄어드는 이윤을 증가하는 고객수로 채운다는 전략으로 인해
당당시 요시노야와 경쟁해서 승리를 쟁취한 곳이죠.

한국에서는 별것 아니겠지만 사실 일본의 거대 규동체인은
서민경제의 가장 민감한 지표의 하나로 작용할 만큼 일본 시장의 분위기를 살피는데 필수적인 요소라서
이런 체인점들의 전략과 승부는 매년 일본 경제신문의 주요 관심거리중 하나입니다.


숙소에 돌아와 마지막 밤을 준비합니다.
오늘같은 날 오덕들은 챙겨온 전리품들을 감상하느라 정신없죠.

힘든 여행을 마치고 만화책을 펼칠 때의 기분은 꽤나 즐겁습니다.


여행 마지막 밤인데 필름이 좀 남아서 숙소의 전경과 함께 자연샷을 남발하기 시작합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역작 '터번을 쓴 소녀 or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찍었습니다.
심각한 초상권 침해라면서 태클을 걸어 올 동생분이 걱정이지만 주요 부위는 다 가린 것 같은데? ㅡㅡ;


매일매일 생산되는 수건과 손수건은 이렇게 널어두면 적당히 마릅니다.
숙소가 수건을 1인당 한개씩밖에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여분의 수건을 한국서 가져왔었죠.


욕실과 화장실은 복도에 각각 비치되어 있지만
방 안에도 간이 세면대가 있습니다. 사람이 많을 때는 요긴하게 쓰이죠.


스키야에서 배는 채웠지만 끝이 얼마 남지않은 여행에 대한 아쉬움을 채우고 싶어서
맥도날드에서 햄거버도 사고, 편의점에서 과자랑 음료수 등등도 사왔습니다.

오늘 다 먹진 못하지만 실컷 먹고 내일 아침에 또 먹을겁니다.

항상 돌이켜보면 짧게 느껴지는 아쉬운 여행이지만, 세계 일주라도 하지 않는 한 항상 짧게 느껴지는건 당연할 듯.
언젠간 짧게 느껴지지 않는 여행도 가 봐야겠죠.


여차저차해서 오사카(大阪) 관광 겸 가이드로 고등학교 동창 친구와 그 동생분과 함께 4박 5일의 일정으로 떠났습니다.
3년 전에 얘네들 데리고 동경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이 친구가 애니메이션, 게임을 워낙 좋아해서 동경에서는 작정하고 아키하바라, 이케부쿠로 등지를 돌아다니며
만다라케, 애니메이트, 게이머즈, 옐로 서브마린, K-Books 등등 오덕들의 성지란 성지는 전부 다 섭렵했었단 말이죠.

덕분에 정상적인 관광이라기보다는 오덕에 특화된 관광형태를 취하다 보니 정작 제대로 즐기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이번엔 친구를 정상적인 관광의 길로 인도해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평범한 코스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비행기는 언제나처럼 아침 출발이라 새벽에 일어나서 리무진 버스를 기다립니다.


비행기를 타고 나니 한국에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실감할 수 있더군요.
참 기록적인 폭설이었습니다. 저야 뭐 눈이 귀한 곳에서 자란 탓인지 그저 신기할 뿐이었지만.


칸사이 국제공항에서 일단은 내일부터 사용할 '오사카 주유패스'(大阪周遊パス)를 구매해두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는데요...
결국 한참동안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얻은 결론은 원래 갈 예정이었던 난바(難波)역까지 가야 구매할 수 있다는 서글픈 현실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1일 패스밖에 판매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오사카 주유패스는 오사카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나 마찬가지인 티켓으로...
원래는 1일권 밖에 없지만, 외국인들에게만 발행하는 2일권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기본적인 기능은 1일, 혹은 2일간 오사카 시영 전철과 버스 등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실제로 여행자들에게 크나큰 축복이 되는 부분은 오사카 시내 유명한 볼거리 25개소의 무료 입장 쿠폰이 동반된다는 사실이죠.
게다가 그 외의 수많은 볼거리, 탈거리를 조금씩 조금씩 할인해주는 쿠폰도 있습니다.

무료 입장가능한 지역을 중점적으로 이틀간 돌아본다면 보통 5000~7000엔 가까운 요금을 절약할 수 있는
여행자를 위한 최상의 패스카드임에 틀림없습니다.
단지, 1일 패스로는 아무리 용을 쓰고 달려도 무료 쿠폰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인을 위해 특별히 2일 패스가 만들어 진 거죠. 
특히 오사카는 기본 전철비도 꽤 비싸고, 몇 구간만 지나면 요금이 추가되는 터라
오사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데도 주유패스가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결국 일행은 꽤나 긴 시간을 소비한 후에 리무진 버스를 타고 난바역으로 향했습니다.
난바는 남부 오카사의 모든 전철선이 모이는 중심지로, 오사카 최고의 번화가인 도톤보리(道頓堀), 신사이바시(心齋橋)등이 밀집해 있습니다.
일본 제 2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는 화려함을 자랑하는 곳이죠.

하지만 일행은 지금 짐덩어리를 여기저기 짊어지고 있는 터라 일단 숙소로 가서 짐부터 풀어야 했습니다.
그 전에 어떻게든 주유패스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패스 판매처인 Visitor's Information Center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또 한차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T_T
일본의 둘째 주 월요일(1월 11일)이 성년의 날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사카에 도착한 날이 1월 10일이었는데요, 일본에서 성년의 날은 굉장히 큰 기념일이고 법정 공휴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주유패스의 무료 쿠폰을 쓸 수 있는 여러 관광 명소들 중, 원래 월요일이 휴관인 곳들이었죠.
일본은 보통 공휴일과 일요일이 겹치면 다음 날 월요일로  휴일을 밀어버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원래 월요일 휴관인 곳들이 성년의 날 관계로 전부 월요일 영업한 후,
다음 날인 화요일날 휴관을 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주유패스로 뽕을 뽑으려고 월요일 휴관하는 곳과 화요일 휴관하는 곳을 잘 구분한 후 거기 맞춰서 열심히 돌아다니려 했던 터라
상당수 관광지가 화요일날 왕창 쉬어버리는 사태는 여행계획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크나큰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인포메이션 센터 앞에서 안내원 아가씨를 괴롭혀가며
월요일, 화요일 휴관인 곳, 이틀 모두 영업하는 곳 등을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일정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나마 위안을 삼자면, 원래 계획했던 코스가 정말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열심히 달려야 소화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에
몇 군데 돌아보지 못하는 곳을 제외하면 이틀간 주유패스를 이용한 여행경비 절감은 그럭저럭 가능할 듯 했습니다.


결국 도착은 오전에 했지만 오후가 훨씬 넘어서야 숙소가 있는 에비스쵸(恵美須町)에 도착했습니다.
여기도 꽤나 번화가라서 골목 구석에 숨어있는 숙소 찾기가 참 어려웠네요.
원래 혼자 여행할때는 그저 두리번거리며 하염없이 목적지 찾는것도 일상다반사였는데
가이드할 일행을 두고 그러려니 왠지 뒷통수가 뜨끔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ㅡㅡ;

이곳 에비스쵸는 아직 옛날 풍경이 조금은 남아있는 시장 신세카이(新世界)와, 그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츠텐가쿠(通天閣)가 유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재미있었던 것이, 신세계라고 당당히 이름붙힌 거리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전광판으로 그 길을 시작하고
거리 안엔 오사카 안에서도 꽤나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즈넉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거든요.

그리고 하늘과 통한다는 거창한 제목을 단 츠텐가쿠는 사실 요즘 보면 초라할 정도로 조그만 탑입니다.
원 탑은 1912년에 세워졌고, 화재로 소실된 후 195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으니, 지금와서 뭐라 할건 아니지만...
높이 103m의 타워는, 오사카의 랜드마크인 WTC 코스모타워의 256m나 우메다(梅田)의 명소 스카이빌딩(スカイビル)의 173m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어린애 장난이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이런 작명성에서 오사카의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기도 합니다.
홋카이도에서나 오사카에서나 도쿄 사람들은 쑥맥에 핏기없는 의지박약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한데
그만큼 홋카이도나 오사카 사람들은 배포가 크고 인정이 많으며, 호탕한 기질이 부각된다는 말이 되니까요.

한국사람들과의 상성은 쪼잔한 도쿄보다 오사카 사람들이 더 맞는다고 할 만큼 적당히 뻥도 잘 치고 친근하게 대하기 좋은 느낌이죠.
이미 전통 문화의 향수는 거의 사라진, 이름뿐인 문화의 도시 오사카에서 그나마 이 아이러니한 제목의 두 볼거리가 저를 한번 피식 웃게 만듭니다.

일단 숙소에 서둘러 짐을 풀고 아까운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길거리로 나섭니다.
주유패스 2일권은 내일부터 써야 본전을 뽑기 때문에 오늘은 전철비도 아낄 겸 주변 구경만 슬쩍 하기로 했습니다.
동생분 몸도 별로 좋지 않은것 같아서 초장부터 무리를 하면 안될 것 같기도 했고.


일단 저렴한 덥밥체인인 마츠야(松屋)에 들어가서 배를 좀 채우기로 했습니다.
친구와 저는 규동(牛丼)을 주문했습니다. 그냥 평범한 소고기덮밥.
뭔가 비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재료의 질만 좋으면 누구나 만들어먹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요리입니다.
친구는 이 규동을 참 좋아하더군요. 전 싼맛에 일본 갈 때마다 자주 먹긴 하지만 그닥 맛있다는 느낌은 못받았습니다.


동생분은 속도 안좋은데 모험정신을 발휘해서 무려 저도 처음보는 비빔동(ビビム丼)을 시켰습니다.
분명 한국의 비빔밥+덥밮 이라는 의미겠죠. 그런데 도착한 음식은 아무리봐도 비빔밥이라고 하기엔 좀... ㅡㅡ;
암튼 용감한 동생분은 열심히 먹긴 먹었습니다만 양도 꽤 많았고, 훗날 속이 안좋아서 고생 좀 하셨습니다.


정말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이 날은 에비스쵸 서쪽의 신사에서 축제가 열리는 날이라고 하네요.
꽤나 큰 규모의 축제라 인포메이션 센터 직원께서 교통이 혼잡할거라고 미리 주의까지 주셨습니다.
신사까지 따라들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길게 늘어있는 상점들도 구경할 수 있어서
주유패스의 악몽이 조금은 희석되는 느낌이었네요.


축제를 즐기는 사람 중 상당수가 저런 나뭇가지를 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더 통이 큰 사람이었다면 아무나 붙잡고 저게 무슨 의미인지 다짜고짜 물어봤을테지만
전 섬세한 사람이라서 그냥 남몰래 사진만 찍었어요.


동생분은 예전부터 어떤 맛인지 궁금해하던 사과사탕(リンゴアメ)을 하나 샀습니다.
일본 만화책이나 영화 등등에서 아이들이 축제날 자주 사먹는 녀석이죠.
별다른 거 없이 그냥 사과에 설탕 녹인 시럽을 둘둘 발라서 굳힌 것 뿐입니다.
사과와 시럽의 조합으로 굉~장히 달달하기 때문에 단 것 좋아하시는 분은 사과의 상큼함에 단맛이 가미된 이 녀석이 마음에 드실 듯.

저처럼 단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머리가 찡할 정도로 상당한 당도를 자랑하니 그냥 한 입만 먹어보세요.


이번 여행에도 전 필름카메라 알파 세븐이를 주력으로 사용했는데,
마음껏 쓰라고 건네준 DSLR A550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잠만 잤습니다. ㅡㅡ;
대만 여행땐 형님이 알아서 저것 가지고 열심히 찍고 해서 상당수의 사진을 건졌는데
이 친구녀석은 카메라의 'ㅋ'자도 관심이 없어서 그냥 멀뚱멀뚱 갖고만 다녔네요.

열심히 찍어댔으면 그래도 몇 장은 참신한 사진을 건질 수 있었을텐데 그냥 제가 필요할 때 받아쓰는 용도로밖에는 사용하지 못했네요.
친구는 이번 여행동안 '아이템박스'로서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조금은 자율성을 발휘해도 좋았을 텐데...


칸사이 하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마성의 간식 타코야키입니다.
타코야키도 많이 만들어본 사람이 잘 만든다고, 유동인구가 많고, 잘 팔리는 타코야키집이 맛도 일정 이상은 합니다.

한국에서 먹던 늘어붙은 떡같은 타코야키와 비교하면
겉은 과자처럼 아삭거리면서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열기의 반죽과 토실토실한 문어조각의 향연이 예술이죠.
전 참을성이 없어서 항상 일본서 타코야키 먹으면 항상 입천장이 헐렁헐렁 거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맛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방금 전에 규동을 먹은터라 그 감동이 조금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 혼자 10개 정도는 더 먹을 수 있었는데
출발 전부터 속이 좋지 않던 동생분이, 비빔동에 이어 이것까지 무리하게 먹다가 상태가 별로 안좋아졌습니다.
간식거리는 다음에 동생분 속이 좋아지면 같이 즐기기로 하고 일단 군것질은 여기서 끝내기로.


노점축제가 다 그렇듯 이곳에서 파는 것들은 조잡한 애들 장난감이나 출처불명의 기념품들이라 그냥 재미있게 구경만 해도 만족합니다.
왠지 전문 기념품점에서 팔면 '이런 걸 기념품이라고' 하면서 기분나빠질 저질 물건들도
이런 노점상에서 팔고 있으면 나름 정취를 풍기는 문화적 코드가 된다고 할까요.


축제 노점판을 슬쩍 둘러본 후 날이 어두워지자 급조된 오늘의 행선지로 향합니다.
숙소 근처에서 지하철을 탈 필요가 없는 관광지.
오덕들의 성지 덴덴타운(でんでんタウン)입니다.

지도에는 결코 나오지 않지만 많은 오덕들에 의해 오타로드(オタロード)라는 애칭까지 갖게 된 거리입니다.
원래 15년 전까지 도쿄의 아키하바라(秋葉原)가 그랬듯이 이곳 덴덴타운도 처음엔 PC 부품 관련 상가들이 중심이었는데
점차 오덕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아니메, 게임관련 점포들이 입주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꽤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거의 오덕들의 성지로 변한 아키하바라에 비해 아직은 PC 관련 점포도 꽤나 남아있는 이곳이지만
오히려 아키바보다 노골적으로 성인용품, DVD를 판매하는 점포가 더 강성한 듯 해서 재미있었습니다.
아주 열정적인 목소리로 성인 DVD를 홍보하는 테이프를 가게 밖으로 크게 틀어놓은 점포도 있고
'세계의 속옷 전문점'이라는 묘하기 그지없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점포도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들어가진 않았어요. ㅡㅡ;
친구 동생분이라는 '여자사람'도 있고, 친구는 반 오덕에 가까운 녀석이라 현실세계의 여성에겐 관심이...
(이 이상 했다간 친구분의 인생에 큰 장애가 생길수 있으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기로 하죠)

숙소도 어찌어찌 잡다 보니 이 덴덴타운과 걸어서도 갈 수 있는 희한한 위치가 되어버렸는데
어차피 이번 여행의 컨셉이 오덕문화에서 탈피한 정상적인 관광인 고로
일부러 시간내서 덴덴타운을 찾아가지 않는 대신 숙소 근처에 있으면 저녁에 정상적인 관광 후 조금씩 둘러볼 수 있겠다
싶은 저희 면밀한 계획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번뜩번뜩하며 중고 게임소프트를 굶주린 늑대처럼 찾아다니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뭔가 제가 오덕의 저력을 너무 우습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가슴을 엄습해 오더군요.
동생분은 친구만큼 오덕은 아니고, 평소 즐겨하던 NDS 게임이 있어서 그것만 찾아다녔습니다.

저도 참 한때는 저 친구를 오덕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전반적으로
굉장한 수집력과 지식을 자랑했었는데 말이죠. 지금은 가끔 코믹스 몇 권씩 사는 것 외엔 거의 손을 뗀 상태라서
손을 떼지 못하고 오덕의 피로 물들어가는 친구의 모습에 쥐똥만큼의 죄책감을 느낄랑 말랑 하기도 합니다.


대충 저렴하다 싶은 게임 소프트를 구입한 후 첫 날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갑니다.
일본은 가게들이 문을 꽤나 일찍 닫아서 밤부터는 그닥 할 게 없다는게 아쉽죠.
물론 도톤보리 같은 환락가에 가면 먹고 마시는 거야 밤새도록 할 수 있지만 여행경비는 한정되어 있으니.
저 츠텐가쿠 전망대 역시 원래는 600엔이지만 주유패스에 무료 입장권이 있으니 잘 써먹어야겠습니다.


효심이 지극한(?) 친구는 엄니한테 안부전화도 잊지 않습니다.
저는 워낙 이리저리 뛰쳐나가는 터라 엄니는 제 전화 별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4박 5일 정도의 여행이야 그냥 동네 슈퍼에 과자사러 나가는 정도지만 그래도 한두 번은 연락을 드려야겠죠.


신세카이 거리는 신, 구의 조화가 기묘하게 얽혀있는 느낌입니다.
허름한 꼬치구이집과 한국에선 거의 자취를 감춘 동시상영 영화관, 그리고 휘황찬란한 파칭코 가게.
숙소 근처엔 상당히 큰 스파 월드도 있었지만 여행 끝날 때까지 그곳을 이용할 일은 없었네요.
동생분 혼자서 여탕에 들어가봤자 심심할 테고... 저는 그냥 여행 후 혼자 조그만 욕탕에서 몸만 담궈도 행복하니까요.

근처 편의점에서 간식거리 조금 사들고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여행의 첫날은 비행기에서 버스, 전철까지 항상 피곤함의 연속이라 힘들군요.
물이 가득 담긴 욕탕에 몸을 담그니 역시 그 짜릿함과 편안함은 여행의 최고 즐거움입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주유패스를 이용한 입장료 남겨먹기 계획을 실행합니다.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주유패스의 무료 입장권을 헛되이 할 수는 없죠.
상당한 강행군이 예상되는데, 저는 익숙하지만 이런데 면역이 없는 친구와 동생분은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