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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04  2월 16일 오비히로 - 반에이 경마 1편 2

 

 

경기 시작 직전까지도 흙을 고르고 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다.

오기 어려운 길을 온 김에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멋진 사진을 담고 싶은 본인 욕심은 충분히 이뤄졌지만

이런 곳에서 달리는 말과 기수들은 상당히 괴로울 듯 하다. 속도가 빠르진 않아도 눈 때문에 시야가 상당히 제한될 듯.

 

 

 

그 와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까마귀들이 트랙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지능도 높고 호기심도 많은 녀석들인데 이런 폭설중에도 어디 박혀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 보면 참 건강하다 싶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었지만 뒤끝도 대단한 편이라, 자전거 여행 도중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는지 10여분간 내 머리위로 소리를 지르며 활강을 하는 바람에

다람쥐등이 맹금류한테 낚아채여갈 때의 섬찟함을 대리체험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까마귀는 덩치도 상당히 큰 편이라 소리만 들어도 무섭다.

한번만 더 뒷통수로 돌진하면 죽여버린다고 고강도 레이저를 꺼내서 몇번 깜빡여 주니 그 다음부터는 오지 않았다.

 

 

 

경기 시작까지 눈이 전혀 그치지 않은 지금 상황이 고맙기 그지없다.

어찌 이렇게 본인이 바라는 대로 날씨가 딱딱 맞아주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추워보이는 복장의 관객들도 신이 나서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꺼낸다.

 

프레스 기자로 보이는 젊은 사람은 카메라를 두 개 정도 어깨에 매고 대기중이다.

하나는 표준 줌렌즈, 하나는 내 팔뚝만한 망원 렌즈. 스포츠 사진을 찍을 때는 렌즈 갈아끼울 시간이 없으니 그런 준비는 당연하다.

 

취미로 사진을 즐기는 듯한 할아버지도 든든한 백통 망원을 들고 서성이고 있다.

이런 곳에 오면 본인이 들고 다니는 거대 DSLR 과 렌즈가 그리 주목을 끌지 않기 때문에 안도감이 든다.

 

 

 

생애 첫 경마이자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반에이 경마 첫 레이스가 시작된다.

두 개의 언덕 중 결승점 앞의 두 번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초반 언덕을 넘어가는 순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의 촛점에 방해를 받을 만큼 눈이 많이 내리고 있어서 10 장 찍어 1장 건지면 성공한 편이다.

 

매우 조용한 상태였는데 말들이 달려나가기 시작하자 기수의 고함소리와 몇몇 아저씨들의 함성소리가 조금씩 분위기를 띄운다.

눈 속을 달리는 강인한 말들의 모습. 이걸 보기 위해 일부러 일정에 넣어가며 이곳까지 왔는데 결과는 대성공이다.

 

 

 

반에이 경마는 농경마들의 힘을 겨루는 방식이라 일반 경마와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

기수가 말 위에 타지 않고 뒤의 썰매에 타 있는데, 썰매 무게가 600~1000kg에 육박한다.

경주마들의 무게도 1톤에 가까워 거의 소떼들의 돌진을 방불케 하는데, 그러다보니 속도는 그냥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 느리다.

 

하지만 총합 2톤에 가까운 거대한 덩치들이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은 힘이라는 단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데 더 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기수들간의 심리전도 매우 치열한데, 언덕 밑에서 멈춰서 숨을 고르는 장면은 오직 이 경마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힘이 부족해 언덕을 오르지 못하면 그 무거운 썰매를 진 채로 경사로에서 숨을 고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언덕을 오르는 말이 우승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일반 경마에서도 상대마를 견제하는 기술은 보통이 아니지만

속도보다 힘이 중시되는 이 경기에서는 언덕이라는 장애물 앞에서의 심리전이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다.

 

 

 

눈을 헤치며 언덕을 오르는 말들의 모습은 현대에서 보기 어려운 군마들의 질주를 방불케 하는 장관.

바로 이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레토코에서 이곳까지 먼 길을 둘러왔다.

부족한 것은 이런 사진의 경험이 적은 본인의 실력 뿐이지만, 어쨌든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눈 앞에서 펼쳐지는 힘의 향연을 감상한다.

 

저런 거대한 말이라도 1톤에 육박하는 썰매를 끌며 언덕을 오르는 것은 힘에 부치는지 입가에서 뜨거운 김이 거칠게 뿜어져 나온다.

사람 걸음걸이보다 느린 속도로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에, 몇몇 반대론자들이 동물 학대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언덕을 넘어왔다고 시원하게 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두 개의 언덕을 넘으면 남은 거리는 30m 남짓하지만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달한 말들은 기수의 고함소리에도 네 다리를 땅에 고정시키고 거친 숨을 내쉰다.

엄살을 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극도의 피로가 뷰파인더 너머에서도 느껴진다. 거의 악을 쓰며 썰매를 끄는 느낌.

 

원래 농경마들의 경주다 보니 반에이 경마는 말 뿐만 아니라 썰매 끝부분이 전부 결승점을 통과해야 완주로 인정이 된다.

몇 미터 남겨놓지 않고 힘이 다해 멈춰선 자기 말 옆으로 다른 말이 천천히 지나가는 모습을 보는 기수의 심정은 어떨까.

 

길게는 2km 까지도 달리는 일반적인 경마와는 달리 한 순간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반에이 경마는 시작과 끝이 언제였는지도 어렴풋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승부가 난다.

 

 

 

얼떨떨한 상태로 첫 번째 경마가 끝나니 내가 뭘 본건지 어리둥절하다.

한 번으로는 너무나 아쉬운 경기고, 실제로 사진을 재생해보니 태반이 엉망이라 거의 다 삭제버튼을 누른다.

다행히도 경마는 15분 단위로 몇 시간이고 이어지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오늘은 이것 외에 예정도 없고.

 

이런 폭설 속에서도 그나마 촛점을 잡아주는 카메라 덕분에 한두 장이라도 건질 수 있었다.

빠른 경주가 아니라고 해도 폭설 탓에 동체추적이 상당히 힘든 편이라 그냥 싱글샷으로 찍어대는게 더 성공률이 높은 듯 하다.

 

순위 발표 후 두 번째 주자들이 패독에 들어선다. 이번에는 가까이서 구경해 보기로 했다.

거대한 말의 위용은 정말 늠름하기 그지없지만 폰카와는 달리 거대 DSLR로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이 신경쓰이는지 자꾸 힐끗힐끗 쳐다본다.

경기를 앞둔 말은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너무 셔터를 눌러대면 그것도 부담이 될까 조심스럽다. 플래쉬는 당연히 금지고.

 

실제로 기수가 안장 위에 앉는 건 경기가 아니라 이런 패딩 시간 뿐이란 것도 재미있는 요소.

 

 

 

이런 걸 신기해 할 시기는 지난 사람들은 따뜻한 실내에서 관람중이라 밖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덕분에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나로서야 눈이 고마울 따름이지만.

 

흥분감때문에 느끼지 못해도 사실 체감온도는 영하 15도로 내려가고 있어서 상당히 춥다.

두세 경기 정도를 관람한 후엔 안으로 들어가서 휴식을 취해야 그나마 동상에 걸리지 않을 듯 하다.

 

경마장이란 이런 것이구나 신기해하며 이곳저곳 기록을 남긴다.

한국에서는 경마장 갈 생각도 없고, 겨울의 반에이 경마로 첫 타석을 끊은 터라 과연 다른 경마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더미 속에 서서히 파묻혀 가는 마권이 더할 나위 없는 애상감을 불러일으킨다.

예상이 적중했다면 이렇게 눈 속에 버려져 있지는 않았을 터.

경마장에서 버려진 마권에 감정이입을 하다니 이것도 눈의 매력 탓인지.

 

 

 

두 번째 레이스에서는 언덕 앞에 자리를 잡고 구도를 잡아보기로 한다.

언덕을 올라가는 힘겨운 뒷모습도 굉장히 인상적이지만, 언덕 너머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말의 모습도 장관이다.

정상에 서서 숨을 고르며 후위 말들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는 모습도 보인다. 일반 경주마였다면 발목이 부러질지도 모르는 무게니까.

 

그야말로 악을 쓰며 올라오는 말의 모습에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말은 달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동물이고, 반에이 경주마들은 보디빌더와 같은 근육덩어리라 힘을 쓸 데가 필요하긴 한데

그들에게도 이 200m의 경주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통과할 수 있는 큰 도전인 듯 하다.

 

사실 말들이 바보는 아니라 경주에 나오는 녀석들은 자신이 우승했다는 사실을 매우 명확히 자각한다고.

섬세한 말의 경우엔 우승하지 못한 날 밥을 먹지 않고 우울해 하기도 한다.

 

 

 

전차처럼 줄줄이 언덕을 넘어오는 모습은 아이맥스 영화를 뷰파인더 안에서 감상하는 듯한 박력이다.

마지막 언덕을 넘고 나서 느끼는 그 환희가 경주마들을 결승점까지 달리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느껴진다.

 

비로소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내는 모습은 클라이막스를 넘긴 후의 알싸한 안도감과 닮지 않았을까.

 

 

 

온 몸의 근육이 폭발할 듯한 거구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결승점으로 달린다.

이미 채력은 거의 고갈되어 달린다기보다는 걷는 수준이지만 이 지점부터가 진짜 승부가 갈린다.

막상 두 개의 언덕을 넘어왔음에도 이곳에서 퍼질러지는 말이 상당히 많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긴장 풀리면 그걸로 끝이다.

 

소 대신 농사에 쓰이던 말의 위용이란 게 어떤 것인지 눈 앞에서 체험하고 있으니 세삼 현실은 어떤 극적 장치보다도 다이나믹하다는 것을 느낀다.

 

 

 

경마의 덧없음이란 이런 것일까.

 

2분만에 마권을 산 사람들의 희비가 갈리는 동시에 내가 뭘 봤었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멤돈다.

뭔가 부족한 듯 해서 눈속에 서서 한번 더 경기가 열리길 기다린다.

 

한두 번 보면 만족할런가 싶었는데 놓친 부분이 너무 많게 느껴진다. 동물을 찍는 건 더더욱 시간가는 줄 모르는 데다가.

손가락에 점점 감각이 없어져 가고 있지만 한 번만 더 보고 건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아마 잠깐 몸을 녹이고 다시 나오게 되겠지만 사진이라는 방면에서도 한참 만족하지 못했고 카메라 없이 맨눈으로 즐기는 경마도 놓쳐서는 안 된다.

 

경기 시작되기 전에 패독으로 가서 말을 감상하고, 말들이 출발점으로 향하면 다시 트랙으로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말이란 동물이 참 잘생기긴 잘생겼다. 흩날리는 갈기와 우람한 가슴, 우수에 찬 눈빛 등이 귀족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실제로는 장난도 잘 치고 섬세한 성격이지만 그런 자신의 내면을 거대한 근육으로 숨기고 돌진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