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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11.02  21th Marathon Des Sables - Stage 4 - Long Day 8
  2. 2009.10.30  21th Marathon Des Sables - Stage 3 - 38km 4
  3. 2009.10.27  21th Marathon Des Sables - Stage 2 - 35km 8
  4. 2009.08.14  21th Marathon Des Sables - Stage 1 - 28km 8


드디어 사하라 레이스의 백미 'Long Day'의 첫 날이 밝았다.
Long Day란 이틀간 야영지 없이 72km 를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말하면 제한시간이 넉넉한 편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편할 수도 있지만
나같은 저질 체력의 소유자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 지는 날이기도 하다.

밤엔 달리고 싶으면 달리던가 준비된 간이 펜트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달리던가 마음대로다.
어느 정도 체력이 남은 선수들은 대부분 밤늦게까지 달려서 하룻만에 야영지에 도착한 후, 긴 휴식을 취하는게 정석.

다음 날이 실질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42.195km 구간이기 때문에 Long Day 마지막날에 체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오늘은 스텝들로서도 거의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선수들 상태를 일일이 따라다니며 체크해야 하는 날이라
긴장감이 감돌지 않을 리가 없다.

밤중엔 특히 위험하기 때문에 모든 차량과 서치라이트, 그리고 방향안내용 레이저 빔까지 쏴 대면서 선수의 안전을 책임진다.


3일간의 레이스를 마치고 일어나는 기분은
입대 하루 전에 쫑파티로 진탕 퍼마시고 눈을 떠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고 입영열차에 오르는 기분이랄까.
만신창이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몸이 지저분하다거나, 머리를 못감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3일동안 섭씨 50도가 넘는 하늘 아래서 10kg이 넘는 짐을 지고 101km를 달려온 사람의 심정이 어떻겠나.
알맨님의 얼굴이 그 모든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마디 사진이다.


아침에 아시아 에이전트 제임스 장씨에게 재차 물어봤지만 코스 거리가 단축되는 일은 없다고 못을 박으신다.
21년간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그 말의 무게가 내 고개를 숙이게 만들 정도로 무겁다.
오늘 정말로 나는 사하라에서 비참한 탈락의 맛을 봐야 하는 건가.


원래 275 정도의 신발을 신지만, 레이스중엔 발이 붓는다고 해서 일부러 285짜리를 신고 왔는데
이젠 발이 신발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양쪽 새끼발까락은 스치기만 해도 면도칼로 베인 것 같은 짜릿함이 전해온다. 물집이 너무 많이 잡혔다 터져서 이젠 따로 진물을 뺄 필요도 없다.
그냥 알아서 양말을 적셔주기 때문에 별다른 응급 처치 방법도 없다. 뒷굼치에는 이슬같은 물집이 수십 개씩 동글동글 맺혀있다.

인생 포기한 심정으로 누워있으니 그래도 슈가님과 알맨님은 좋다고 사진 찍는다.
나도 좀 긍정적으로 살아야 할까?


버프 속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 있는데
멤버들이 알아서들 재밌는 장면을 연출해 준다.
어찌보면 등산용 스틱이 전사한 용사들 앞에 장렬히 꽂혀 있는 위령비 같은 느낌이네.

출발 시간이 11시로 지연되어서 계속 저렇게 누워있었다.


3일간 탈락자가 100명을 넘었다.
이 3일동안만 역대 모든 레이스 중 가장 많은 탈락자 수를 기록한 것이다.

지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출발선 앞에 서니 대회 위원장인 패트릭 바우어가 지프 위에서 뭔가 말한다.
참가자들이 술렁거린다.

탈락자가 너무 많고, 날씨가 더워서 선수들의 건강에 위험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과 내일 72km 구간을 57km로 줄인다는 것이다.

15km가 줄었다.
나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꽤나 망설였던걸로 기억한다.

이제 정말 빼도박도 못하기 때문에.
거리까지 줄여줬는데 주저앉아서 탈락당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침반님은 오히려 거리가 줄어서 아쉽다고 하신다. 충분히 완주할 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같은 저질체력 민간인을 위해 본인의 아쉬움은 흔쾌히 접기로 하셔서 내가 덜 미안하다?


제임스 장씨가 멋적어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몸을 추스린다.
사하라에서 단 하루밖에 없는 야간 레이스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즐기는 마음 뿐이다.


애초에 사하라 레이스란게 마음 단단히 먹고 나가는 경기긴 하지만
특히 오늘의 Long Day는 여러가지 의미로 선수들을 초심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간식 섭취, 페이스 조절, 남은 물의 적절한 분배 등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3일간의 레이스에서 느꼈던 신선함, 짜증, 괴로움 등이 오히려 마음 속에선 사그라들고
시험지를 앞에 둔 수험생처럼 신중하게 시간과 거리계산을 하며 체력을 아낀다.

조금 더 진지해지는 것이다.


대충 10km 간격으로 CP가 있다는게 몸에 각인되어 있을 시기가 되었다.
예전처럼 그놈의 10km라는게 언제 내 앞에 나타나는지 전전긍긍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초보에서 탈피한 느낌.
이젠 대충 남은 물의 양과 걸어온 시간만 계산해도 대충 어디쯤에서 CP가 나타날 것인지 예상이 가능하다.

물론 이런 여유로움도 12시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숨을 곳 없는 태양빛과 미친듯이 다리를 괴롭히는 복사열이 몸을 가마솥에 넣고 쪄 버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중간중간 예고없이 찾아오는 매서운 모래폭풍.
오늘은 어제처럼 무시무시한 산이 버티고 있진 않지만 반대로 낮은 모래언덕이 수십 km에 걸쳐 분포해 있다.
몇 미터 되지 않는 작은 모래언덕이지만 워낙 입자가 고와서 밟을때 마다 발목 깊숙히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
그런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문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면 어디가 언덕의 끝인지 모르겠다.
앞에 보이는 언덕을 넘으면 예전처럼 삭막한 자갈밭이겠지 싶지만 그 위로 올라가 보면 또 펼쳐진건 모래언덕.
보이지 않는 모래언덕의 끝을 기대하며 일단 눈 앞의 언덕이라고 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보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지.


스텝들이나 사진사들도 이런 환경이 달갑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지프는 모래에 묻혀버리지. DSLR에선 모래가 덜그럭거리지.
심각한 사고가 날 수 있는 Long Day이기 때문에 모든 스텝들이 끊임없이 코스를 순찰하며 선수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야말로 천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한마음이 되어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삽질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ㅡㅡ;


울트라맨이 되어버린 나침반님은 그래도 우리 중에선 제일 사하라를 즐기며 달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다시 가게되면 좀 더 즐길 자신이 있거든.
일행중 유일하게 2년 연속으로 참가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나도 이제는 충분히 이해한다.


CP에서 신발 벗는건 이제 그만하고 싶다.
벗을때나 신을때나 너무 아파서 오히려 체력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모든 선수들의 체력은 한계에 달했고, 한번 주저앉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선수도 많다.

하지만 오늘은 하위 선수들이 재미있는 구경을 했는데
Long Day의 특성상 선수들의 실력차에 따라 거리가 너무 벌어지기 때문에 특별히 하위 선수들을 먼저 출발시키고 선두권 선수들은 3시간 늦게 출발시킨 것.
그래서 한창 빌빌거리며 걷다 보면 눈 깜짝하는  속도로 무시무시하게 앞으로 달려가는 상위권 선수들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구경할 수 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본격적으로 Long Day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쯤이면 기온도 적당히 내려간다.
물론 적당히란 말은 사하라 사막에서 적당하단 이야기.

유난히 모래언덕이 많은 오늘 코스는 체력적으로는 힘들지만 오히려 다리엔 부담이 덜 가서 좋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날카로운 자갈이 많은 단단한 평지는 발바닥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고통스러운데
모래언덕은 비록 발걸음이 힘들긴 하지만 발바닥과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아서 오랜 시간 걸을 수 있다.

일본인 연예인 아이나씨와 내가 걷는 속도가 비슷한지 계속 앞뒤로 지나쳐가는데, 이젠 무덤덤하다. 말도 안건다.
5시쯤 되니 몸의 영양소가 완전히 고갈됐는지 걸으면서도 잠이 오고 눈이 스르르 감긴다. ㅡㅡ;
머리는 멀쩡해서 앞으로 걸어가고 싶은데 뭔가 세상만사가 귀찮아 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는 희한한 느낌.
스스로도 몸의 놀라운 반응에 신기해 하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파워 젤을 입에 짜 넣는다.
5분만 있으면 웃기게도 정신이 번쩍 든다.

그 짓을 1시간 간격으로 반복하며 모래언덕을 오르고 내린다.


깊은 한숨이 저절로 내쉬어지던 곳이다. 드디어 3시간이 넘는 오르락 내리락 모래언덕이 끝을 보인다.
이런 사진조각 따위로 느낄 수는 없지만, 사하라 사막은 정말 한 순간 한 순간이 볼거리로 가득하다.
아득한 시간이 압축되어 건조보관 되어있는 사막이라는 자연은 인간의 희노애락으로 설명하기 힘든 어색한 감동을 주곤 한다.


모래언덕을 빠져나오자 갈라진 땅이 나온다.
주위에 가끔 삼엽충의 화석이 보이기도 하는 이 곳은 원래 수억년 전에 바다였던 곳.
바다에서 강과 울창한 숲으로 뒤덮힌 낙원으로, 그리고 또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온 이곳의 역사에
내가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경외감 비슷한게 들기도 한다. 삼엽충과 나는 친구먹은건가?


드디어 이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야간 레이스의 시작이 다가온다.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할 때 도착한 CP에서는 형광봉을 나눠준다. 똑 부러트리면 빛이 나는 가요프로그램의 단골 아이템.
이걸 베낭에 끼우고 달려야 한다. 앞뒤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또 조난당했을시 찾기 쉽도록.
그 외에도 비상용 구명 폭죽도 하나 가지고 있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 터트리면 사방팔방에서 저글링 개떼밀려들듯이 스텝들이 찾아줄것이다.

물론 이건 돈이 좀 나가는 물건이라 이걸 반환하지 않으면 완주 기념품을 주지 않는단다. 길을 잘 찾아가서 이놈을 살려가야지.
사막에서는 해가 지는 순간 기온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달리는 경험은 신선하다.
3일 전까지 사막에 와 본적도 없는 인간이 이젠 많이 컸구나.


어지간히 좋은 카메라와 삼각대 장비를 갖추지 않는 한 선수가 야간 레이스 사진을 찍는것은 불가능하다.
인위적인 불빛이 단 한조각도 없는 망망대지에서 해가 지는 순간은
20년동안 세계의 호러영화란 호러영화는 다 보고 다녔던 나로서도 등골이 오싹한 순간이다.
한낮의 매서운 햇빛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눈이 어둠을 만나자 장님으로 돌변한다.
머리의 간이 헤드렌턴을 켜봤지만 1m 앞의 길바닥조차 게슴츠레하게 보일 정도의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주위에 선수나 스텝이나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바람소리만 들리는 광야의 한 복판에서 장님이 서 있다고 생각해보라.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내 앞의 세상은 똑같은 모습이다. 그건 정말 공포였다.


플래시를 터트려도 보이는 건 간신히 이 정도 거리다.
그리고 도무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야광봉 하나 끼워놓은 표지'가 코스 안내의 전부다.
원래대로라면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해서 길을 찾아야 한다지만, 지도가 제대로 보일리나 있나?

내가 길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자 뒤에서 따라오던 선수도 '어디로 가야 하냐'고 나한테 묻는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깎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모래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이쪽'이라고 말했다.
사하라 레이스 특성상 급격한 방향 변화가 없다는 가정하에 그렇게 가리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외국 선수가 망설이자 나는 그냥 낭떠러지에서 구르듯 엉덩이를 거의 언덕에 붙인 채로 서벅서벅 걸어 내려갔다.
모래는 발목을 넘어 무릎 가까이까지 밀려오지만 덕분에 절벽같은 언덕을 내려갈 때도 다리에 부담이 가진 않았다.
언덕을 내려갔으니 다시 올라가야겠지. 거의 맹목적으로 언덕을 올라가 보니 마침내 저 멀리 평지에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공포스럽던 어둠에 눈이 익고, 달이 뜨자 세상이 밝아진다.
그땐 몰랐지만 Long Day 밤은 일부러 보름달 즈음에 날짜를 잡는단다.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면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완전한 고요의 세상이 다가온다.

수평선의 대지에서 소리 한 점 없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무채색의 대지에서 명암만으로 이루어진 달빛에 비치는 세계를 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하늘을 가득 덮은 별과 고고한 보름달에 비치는 밤의 사막은 인간이 왜 자연을 경외시하게 되었는가를 실감하게 해 준다.

자꾸 걷다가 서다가를 반복한다. 지쳐서가 아니고 걸음을 떼는것이 아까워서.
벅차는 행복감에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저 거칠게 행복하다.
걷다가 노래도 불러본다. 저절로 흥이 날 정도로 과도하게 행복하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미술품을 이 밤, 이 곳에서 나 혼자 독점하고 있다는 뿌듯함은
거기 가 보지 않으면 어떤 글이나 사진으로도 느낄 수 없는 최고의 보물.


달이 뜨고나서는 무서움도 사라졌지만 스텝들은 안전을 위해 오만 짓을 다 저지르고 있다.
강력한 레이저를 쏴서 방향을 가르쳐 준다. 상당히 멀리까지 뻗기 때문에 수 km 밖에서도 저걸 보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자정이 넘자 코스 옆으로 차량들이 정기적으로 왔다갔다 한다. 스텝들이나 선수들이나 낮보다 더 흥분한 것 같다.


마지막 CP 근처에서 피터를 만났다. 야영지까지 7km 쯤 남았는데 함께 가기로 했다.
마지막 CP에서 의료진들에게 내 발가락과 뒷굼치를 보여줬는데, 한동안 바라보다가 '여기선 응급치료만 해 줄테니 내일 야영지 의료센터에 가'라고 말해준다.

피터와 터벅터벅 걸으며 세상사 이야기를 한다. 이녀석 나보다 많이 젊더군. 22살이던가 23살이던가.
이번 마라톤이 끝나면 그대로 모로코를 여행 할거란다. 그를 위해 스와힐리어도 배워놨다고 한다.
조금 수줍음을 타긴 하지만 자기가 정한 인생에는 거리낌없이 나가는 피터 녀석 굉장히 존경스럽다.

확실히 나는 야행성인지 뭉툭해진 느낌의 다리도 아랑곳없이
사하라 레이스 시작 후 처음으로 즐거운 기분이 되어 거침없이 걸어 Long Day를 끝마쳤다.


야영지 앞에선 마지막 한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스텝들이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이름도 모르는 선수들을 위해 골인점 앞에서 묵묵히 응원을 위해 기다리는 선수들도 있다.
차분하지만 화려한 성취감으로 가득 찬 멋진 밤이다.

물론 다른 한국팀은 옛저녁에 들어와서 잘 주무시고 있다.
결국 난 Long Day도 통과해 버렸구나.

오히려 몸이 극도로 피곤하면 숙면을 취하기도 힘들다.
새벽에 아픈 몸을 일으켜서 텐트 뒤로 소변을 보러 나가기도 하는데
등이며 허리며 허벅지며 안 아픈 곳이 없다. 발이 퉁퉁 부어서 슬리퍼 신는것도 참을성을 필요로 한다.
하루에 물을 10L 넘게 마시는데도 오줌 색깔은 100% 천연과즙 오렌지 주스처럼 샛노랗다.
한국에선 하기 힘든 체험 참 가지가지도 하는구나.

새벽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야영지 전체가 공동묘지처럼 음산하다. 다른 사람들은 잠 잘자나봐.
마음먹은대로 대변 조절만 가능하면 이런 새벽에 몰래 싸고 오는것도 괜찮다.
일단 해 뜨면 어쨌든 엄청 멀리 걸어가지 않는 한 사람 눈에 보일 수 밖에 없으니.


아침마다 콘텍트 렌즈 끼는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아주 미세한 바람이라도 모래가 섞여있기 때문에 눈에 이물감이 느껴져서 뺐다 꼈다를 반복한다.
지금은 라식을 해서 안경이 필요없지만. 다음에 갈 땐 좀 더 편안한 여행이 될 것 같네.

기상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꼭 군대같다.
난 잠은 저절로 깰 때까지 자는 편이라 의도치 않은 일로 일어나는게 좀 짜증이다. 어차피 오래 자진 않지만.

사막에서 맨살 다 태우고 싶지 않으면 선크림은 아파트 시멘트 공사하듯이 '처'발라야 한다.
가장 강한 녀석으로 온 몸이 하얗게 될 때까지 듬뿍듬뿍.
하루라도 빼먹었다간 피부가 끓어오르듯 물집이 생기고 따가워 견딜 수가 없다.
우린 역시 여기선 이방인일 뿐이라는 감정을 갖게 해 주는 시간이 바로 이 선크림 바르는 순간.


피터가 나침반님에게 와서 신발 수선을 부탁했다. 스패치가 떨어진 모양이다.
보스턴 마라톤에도 참가할 만큼 실력있는 피터지만 이런 사막에서의 레이스 경험은 전무해서 준비가 영 시원찮았다.
음식도 너무 적게 가져왔고, 휴식시간에 쓸 여분의 슬리퍼도 없어서 종이조각같은 슬리퍼 임시로 사용했다.

누구나 생각했겠지만 한국 팀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분명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본인도 엄청 고마워하더라.


힘든 건 누구나 마찬가진데, 알맨님은 쇼맨쉽이 좋아서 힘들다고 투정부릴때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홍양이 탈락한 시점에 이제 힘들다고 엄살부릴 여유도 없다.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게 탈락하는것 보다는 나으니까.

오늘은 아침부터 마음을 비웠다. 그냥 적당히 걷다가 한계에 도달했다 싶으면 앉아서 호송차를 기다리기로.
물집이 너무 자주 잡혔다 터졌다 해서 양말이 진득하게 늘어붙었다. 겁이 나서 양말 벗고 보지도 못하겠다. ㅡㅡ;


햇빛이 뜨거워서 출발 전까지 저렇게 버프 푹 뒤집어쓰고 휴식을 청한다.
다리가 무겁고 뜨거워서 베낭 위에 올려놓았다. 저렇게라도 다리의 피로를 풀어주고 싶을 만큼 필사적이었다.


그래도 출발 시간이 다가오면 이렇게 폼잡고 사진은 찍어야.
지금이니까 이런 이야기나 쓰면서 썰을 푸는 것이지, 저기선 푸념할 상대도 없다. 모두 지치고 피곤하다는걸 아니까.

홍양의 빈자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 본인이다 보니 버프를 벗지 않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부러라도 웃어줄 여유조차 없었거든. 얼굴 속은 잔뜩 뚱한 표정이다.


대회 3일만에 역대 대회중 가장 많은 탈락자를 배출했다. 이미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탈락.
코스를 너무 어렵게 잡은 탓에 물 소비량도 예전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늘어났고
고저차가 높은 코스도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코스 자체가 사하라에서도 기온 높기로 유명한 곳이다.

아니 왜 생애 첫 대회에 21년동안의 대회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녀석이 얼굴을 들이미는건지 모르겠다.
첫날의 들뜬 열기와 흥분감은 식어가고 반대급부로 사람들의 얼굴은 점차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래도 출발이 가장 힘들다는 진리를 모두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에
정말 30분에서 1시간만 지나가면 이 더위도, 찢어질 것 같은 다리의 통증도 모두 슬그머니 익숙해 진다.
의식은 살짝 몽롱한 상태가 되고, 마치 자기 몸이 아닌것 처럼 고통이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몸은 잘 만들어진 로봇이고, 머리 위의 조종석에서 내가 기계를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


룩셈부르크에서 온 가족일당.
참 건전한 여가활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 1년 가까이 주위 사람들한테 사하라 가자고 말하고 다녔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1위가 '돈없다', 2위가 '시간없다', 3위가 '뭐하러' 였다. ㅡㅡ;



어제도 출발하자마자 산을 넘어서 아주 열이 끝까지 받쳤는데
내 눈앞에 자리잡고 있는 저것은 도대체 뭘까. ㅡㅡ;
지금 나하고 한판 하자는 거냐 추최측?

어제의 산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거대한 녀석이 그림처럼 버티고 있다.
정말 저길 올라가야 하는 건가? 이쯤 되면 사실은 옆에 돌아가는 길이 있겠지 하고 강하게 믿어버릴 정도로 현실구분이 어렵다.


이~ 십후랄 쌍쌍바! 정말로 사람들이 저쪽으로 달려간다.
옆에서는 원주민들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앉아서 지켜보고 있다.
나도 이런 원숭이 재주를 왜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놈의 산은 정말 징글징글하다.
경사가 심하지 않아서 은근히 올라가게 만드는데
발목정도는 쉽게 빠져버리는 곱디고운 사막의 모래를 철퍽거리며 완만한 경사를 올라가니 정말 죽을 맛이다.
차라리 경사가 급하기나 하면 확 올라가 버리기나 하지, 거의 2시간동안 계속 은근한 모래 오르막을 올라가는건 지옥이다.

햇빛은 또 얼마나 강한지. 살아생전 화 한번 안내본 성인군자도 폭도로 변모하게 만들 만큼의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모래가 워낙 고운 터라 그 많은 사람이 올라가는데도 발자욱은 서너 사람분 밖에 찍혀있지 않다.
앞 사람이 밟았던 곳을 밟는게 훨씬 편하거든.


정말 본능만으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는게 어떤 것인지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던 코스다.
이놈의 대회를 주최한 인간들에 대한 상상할 수 없는 저주와 폭언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에 대해 분노를 쏟아내다보니 어찌어찌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역시 고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게 이런 것인가 보다?


CP가 산 정상에 있다. ㅡㅡ;

간이 텐트에는 휴식하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버려서 들어갈 엄두도 못 냈다.
물을 공급받고 육포를 씹어먹으며 내 인성을 더럽게 만들어 주었던 산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일본인 연예인 아이나씨와 스텝 일행이 다가왔다.


오는 동안에 알맨님과 함께 했다고 하는데, 영어로 대화했나? 뭔가 좀 석연찮지만 그냥 넘어가자.
그나마 외국인중 일본어가 되는 사람이라 스텝이 나한테 아이나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행자분만큼 이 아녀자에 대해 관심은 없었지만 여기까지 온게 기특해서 좀 놀란듯한 어투로 말해줬다.

'솔직히 저런 체격으론 1~2일만에 그만두고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기 그지없다. 나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하는 것 같다.'
요런 식으로.

아이나씨는 영화에도 출연할 예정이라는데 불행히도 제목까지는 가르쳐 줄 수가 없단다.
혹 한국 영화는 좋아하는거 있냐고 물었더니 올드보이를 좋아한댄다. 그거 당신 나이에 볼 수 있는 영화였던가? ㅡㅡ;


한편 우리와 동떨어진 곳에서는 스텝들의 사투도 계속되고 있었다.
상당한 수의 자원봉사자로 이루어진 스텝들도 사막의 극한 상황에 적응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
4륜 바이크, 오프로드용 지프, 헬기까지 총 동원되어 선수들의 상태를 체크하는 주최측이지만
저렇게 모래구덩이에 박혀 버리면 땀 뻘뻘 흘리며 씨름하는 수 밖에 없다.
슈가님이 탄 차가 저런 상황을 맞이하는 바람에 오늘 애좀 쓰셨단다.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한 건데, 올라올 때 워낙 악이 받쳐서 그만두자라는 생각을 못한 것 같다.
이제 좀 그만두려는 생각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상황이 또 막막하다.
이런 모래바람 속에서 앉아서 쉬면 뭐가 편하나.

바람이 잠잠할 때 저 쪽 계곡 끝에 다음 CP가 보이길래 조금만 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왠걸. 눈으로도 확인이 가능했던 CP는 이동식이었는지 가도 가도 당최 가까워지질 않는다.


CP가 보이길래 안심하고 물까지 다 마셔버렸는데 거의 신기루에 가까운 착시현상이었는지
1시간 가까이 걸어도 한참 남은 것 같다. 덕분에 옆에서 함께 걷던 알맨님 물까지 얻어마시고 말았다.
중간중간 불어오는 모래폭풍은 시야를 5미터 가까이까지 제한시켜 버려서 앞 사람이 없으면 방향도 잊어먹어버릴 정도.



나침반님은 그 와중에도 카메라의 동영상 기능을 십분 발휘하셔서 귀중한 자료를 남겨주셨다.
정말 미치겠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산을 내려왔다고 너무 방심했다.
파김치가 되어 CP에 도착하고 신발을 벗은 후 육포와 파워젤을 입에 짜 넣는다.
어지간히 하드 트레이닝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이라면 체력고갈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를텐데 (나도 몰랐다)
몸에 영양소가 딱 떨어져 버리면 자기 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의 탈력감과 무기력함이 일시에 몰려온다.

힘들어서 헥헥거린다기 보다는 그냥 의식이 몽롱해지고 손과 발에 힘이 없어지며, 계속 나가려는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이 축 쳐지는 느낌.
이럴 때 흡수가 빠른 파워 젤은 섭취 후 5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더불어 고통과 짜증도 함께.


이제 마지막 코스다.
이번 코스는 중간에 조그만 마을을 통과할 뿐, 무난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한낮에 미친듯이 산을 등반해 버려서 이제 해도 저물어가는 시간의 이런 평지는 왠지 평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도 많이 컸구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이런 수도시설도 있어서 선수들이 물을 담아간다. 원래는 규정위반이지만 누가 그거 따지나.
마을 사람들이 코카 콜라를 팔기도 하는데 이걸 사 마시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원래 Long Day 마지막날 주최측에서 콜라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그 때의 즐거움을 위해.


꽤나 이렇게 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시도는 못해봤다.
정말 천국같았겠지. 특히 미칠것 같은 정오 시간에 이런 물웅덩이가 있었으면 아마 거기서 살림 차릴 사람이 많았을거다.


한국 팀 중에선 내가 가장 늦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은 아마 야영지 텐트에서 쉬고 있겠지.
오늘 코스는 38km 로 이제까지 중 가장 긴 거리이자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코스였기 때문에
드디어 해가 지는 모습까지 보면서 걷게 됐다.

나는 이 점이 굉장히 우울했던 게
38km 걷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으니, 내일부터 시작되는 지옥의 Long Day에 혹여 시간 제한에 걸려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됐던 것.
내가 스스로 지쳐 쓰러지는건 몰라도 시간제한이라는 녀석때문에 탈락당하는건 정말 참을 수 없다.


무난한 평지를 절뚝이며 걷는 동안
오늘의 무사 통과를 기뻐하기보다 내일의 탈락가능성에 더 몸서리를 친다.
조금이라도 다리를 쉬게 하면 통증이 살아나서 지독하게 아프기 때문에 그냥 스틱에 의지해 장애인처럼 비틀거리며 걷는다.
새끼발가락에 질퍽질퍽한 느낌이 나는데 그거 확인하려고 앉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간다.

조금은 왁자지껄한 마지막 도착지가 가까워지니 마음이 좀 풀린다.
먼저 와 있던 팀원들이 짐도 들어주고 물도 들어주고 밥도 만들어줬다.
제일 능력이 떨어지니 이런 황송한 대접도 받아보는데, 고맙긴 하지만 역시 마음이 편하진 않네.

만약 다음 대회때 이 멤버로 다시 간다면 그 때는 좀 더 어리광 부리며 대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친근하기 때문에.
대회 시작전까지 제대로 말 한번 안 섞어본 멤버들이지만 이제는 20년지기 친구처럼 가까운 느낌이다.
거지꼴로 함께 먹고 자니 당연하겠지.

밤이 되자 피터가 여기저기서 괴소문을 들고 왔다.
탈락자가 너무 많고, 남아있는 선수들의 체력도 위험한 수준이라 내일 Long Day 72km 구간을 단축한다는 소문이다.
아시아 에이전트 제임스 장씨는 터무니없는 일이라며 웃고 넘겼는데, 멤버들은 제발 좀 단축되길 원하며 수다떨기 바빴다.
사실이든 아니든 내일 아침까지는 굉장히 기대에 부풀 수 있는 멋진 소재였으니까.

다만 나는 좀 절실했던게, 단축되지않은 72km 구간은 정말 내가 쓰러지든 시간제한에 걸리든 탈락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침낭 속에서 혼자 결심했다.
단축되지 않으면 그냥 중간에 포기해 버려도 괜찮고
만약 거리가 단축된다면 그때는 그 단축된 구간이 아까워서라도 죽기살기로 완주하고 말겠다고.


누가 사하라의 밤이 춥다고 했는가!
밤엔 영하에 가깝게 기온이 떨어진대서 일부러 오리털 침낭까지 들쳐매고 왔는데
더워서 웃통 다 벗고 퍼질러 잘 정도로 적당히 서늘하고 살짝 따뜻할 정도였다.

그때는 정신이 없었지만, 훗날 나침반님 이야기를 들으니 대회 코스를 어렵게 잡으려다 보니
이렇게 험한 지형과 고온 코스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은 뻐근하기 그지없고, 어제 달린 영향은 둘째치고 아직 비행기 여독도 안 풀린듯한 느낌.
새벽에 해 뜨자마자 토착민인 베르베르족이 텐트를 훨훨 걷어가 버린다.
빨리 다음 야영지에 가서 수백개의 텐트를 설치해 놔야 하니 우리보다 더 급하다.


찬물에 즉석쌀 적당히 불려놓으며 장비 점검하고, 대충대충 우드득거리는 몸을 움직이다 보면
무심하게도 하늘은 벌써부터 엄청난 햇살로 우리를 반겨준다.
텐트가 없어지니 세상천지 그늘이라고는 없는 허허벌판이라 앉아서 쉬어도 땀은 계속 흐른다.


멤버들은 짐 정리한다고 분주한데 나는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그래 인생 뭐 있길래 짐 정리따위 하나... 그냥 가다 쓰러지면 알아서 차가 실어가겠지.


그래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똥폼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슬픈 생물.
그나마 아직 봐줄 만한 몰골이라서 이렇게 올릴수나 있지.
1주일동안 씻지도 않고 사막 속을 달리고 나면 서울역 앞 노숙자는 버킹엄의 공작처럼 보인다는 결론이 나온다.


푸른 하늘이 원망스러워 보이는건 왜일까.
한국의 흐리멍텅한 하늘이 싫어서 여기 왔을 터인데.
역시 난 아직 수행이 부족한가보다. 내가 원하는건 전부 여기 있는데 왜 계속 짜증만 나는지.


어째 슬그머니 와서 놀자던 피터가 결국 우리 텐트에서 잠까지 잤다.
아무래도 자기네 텐트보다 이쪽이 더 편한갑다.
일본인 혼혈 2세라 그쪽과는 그리 친근하게 끼어들지 못했는지도. 뭐 아무렴 어떤가.


사막 레이스에서 중요한 스패치.
신발 안으로 모래가 들어가면 물집 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저렇게 감싸줘야 한다.
경험자인 나침반님은 직접 신발에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 오셨다. 나는 그냥 파는거.


출발 전에 모여서 스트레칭을 하니까 외국인 선수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와서 구경도 하고 따라하기도 한다.
몸이 얼마나 뻐근한지 몸을 제대로 늘리기도 힘들더라.
이제 둘째 날 출발하기도 전인데 몸 상태는 레이스 마치고 귀국 비행기 기다리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행자분은 프랑스 공항에서부터 계속 통역해달라고 조르던 일본 연예인과 사진 찍으며 즐거워한다.
'아이나'라는 이름의 이 연예인 아가씨는 SES처럼 세 명으로 이루어진 아이돌 그룹같은데
아직 여자아이돌 그룹은 3명이 SES, 4명이 핑클, 떼거지가 소녀시대라는것 밖에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예시. ㅡㅡ;

한국 프로그램으로 '도전 지구탐험대'같은 느낌의 프로그램에 참가한건지, 따라오는 스텝들이 무지 많다.
스폰서도 한건지 MDS 주최측에서도 신경 써주는 분위기였다. 연예인이니 살 태울수도 없어서 완전무장했다.
저렇게 가냘픈 몸으로 완주 할수 있으려나 생각도 들었지만
나처럼 우람한 몸으로 남 완주 걱정하는건 건방진 생각이다.

즐거워 죽으려는 행자 뒤에서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나침반님과 걸러.


어찌됐든 시간은 가고 출발은 해야 한다.
오늘은 35km.
어젠 28km 라는 거리에 속아서 무지 힘든 산행까지 했는데 오늘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설마설마 했는데 눈 앞에 보이는 저 산이 첫 번째 코스란다.

그냥 날 죽여라.


죽기전에 나침반님이 본인과 나 모두에게 포트레이트가 될 수 있는 재미있는 사진을 한 장 찍으셨다.
사하라 마라톤 사진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녀석 중 하나.

PEACE 가득가득 적힌 버프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속마음은 '건들기만 해봐, 다 쓸어버리겠어'라는 방향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다.
그냥 덥고 지치고 짜증날 뿐.


군대 끌려온 것도 아니고, 제 돈주고 왔는데 이렇게 짜증만 내서야 되겠나.
일단 둘째날이 시작되었으니 따라가고 본다.
나만 힘든 건 아닌지 어제처럼 환희에 들뜬 사람들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
등에 짐을 짊어진 패잔병들처럼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장하다.


아이나씨를 따라온 스텝들이 선수들보다 더 고생이다.
미리 산을 올라가 있다가 아이나 일행이 오면 찍어대고
그녀들 사라지기 전에 다음 포인트로 후다닥 먼저 이동해야 하니.

시작하자마자 산을 오르니 아주 입에서 향긋한 욕이 베어나올 정도다.


다행히도 산은 그리 높지 않았고, 저 멀리 펼쳐진 끝없는 세계가 날 협박한다.
어제는 거리에 따른 물 소비량을 완전히 잘못 계산했기 때문에 낭패를 본 터라
이번엔 어지간히 목 말라도 거리를 잘 봐가면서 조금씩 마시기로 했다.
참고 참았다가 체크포인트에서 새 물을 받으면 남은 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테니.


스텝 자격으로 온 슈가님은 차를 타고 미리미리 지점으로 이동하며 사진을 찍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첫 도전이라 카메라를 아무데서나 꺼내들 만한 체력적, 심리적 여유도 없었던 터라
멤버들 전원의 사진을 다 모아도 한창 레이스 도중의 사진은 별로 건질 게 없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데 뭔놈의 사진이냐. ㅡㅡ;
그런데 지금은 이를 갈면서 준비하고 있다. 다음에 갈 땐 DSLR 세트를 들고 가서 작품 하나 찍어와야지 하고.


나도 이런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싶다.
다음엔 다스베이더 옷을 입고 달려볼까? 아마 훈제돼지구이가 되겠지.
퍼포먼스를 즐기며 가면 마음도 좀 가벼워 질 것 같다는 느낌이 이제서야 든다.
다음엔 나도 근엄하게 똥폼만 잡지 말고 뭐 좀 만들어 가야겠다.


본인이 힘들어서 찍을 여유가 거의 없었는데 슈가님 덕분에 사진도 건졌다.
물론 뒤로 가면 갈수록 나하고 홍일점 홍양만 뒤로 쳐지는 바람에
앞선 선수들 따라가며 사진 찍던 슈가님 카메라에 거의 담겨지지 못했던 비극이 있었지만.


아이나씨 일행은 완전 우주인처럼 입어놓고 잘도 걷는다.
아마 내 몸무게의 2/3도 안될텐데, 역시 연예인이란 것도 불굴의 정신력 없이 그냥 설렁설렁 하는건 아닌가 보다.

하긴 내가 연예인이라도 저 정도는 하겠지만. 돈과 인생이 걸렸는데.


어쩐지 어제보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서서인지 코스 자체가 어제보다 어렵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제 코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첫 날에 너무 심한게 아니었나 싶다. 도대체 산을 몇개나 넘은거야.
그렇다고 오늘도 무난하다고는 하기 힘든게, 12시가 넘어가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칼날같이 날카로운 모래폭풍이 한번 불면 맨살을 들어낸 다리쪽은 마치 사포로 갈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체크포인트를 통과하면 그나마 천국과도 같은 차량 밑 그늘에서 쉬며 물도 마시고 음식도 먹고 한다.
나처럼 늦게 걸어오는 사람은 이미 자리잡기도 글렀지만.
햇볕 아래서는 체력이 회복되는 기미도 거의 없어서 오래 앉아있기도 뭣하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잠깐 쉬어보긴 했는데, 분비되던 아드레날린이 멈춰서인지 오히려 고통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물과 초콜릿만 좀 먹고 다시 일어섰다.
처음 몇 발짝은 하반신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때문에 절룩거렸는데, 30분쯤 걷다보니 통증이 둔해져서 꼭 마취제를 맞은 것 처럼 다리가 뭉툭한 느낌이다.


오후 3~4시쯤 되고 슬슬 체력의 한계와 상황의 익숙함이 동시에 찾아올 때가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지평선밖에 없는 이 사막 한가운데서 드디어 조금이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귓가에 들리는 매서운 모래바람 소리와, 그것보다 더 크게 들리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어두운 스포츠 고글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버프 속에서
프라이버시에 가까운 아득한 고독감을 느끼는 순간은,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이라면 꼭 경험해봐야 할 순간이라고 본다.


이제 그만 주저앉아서 날 데려가줄 백차탄 왕자님이나 기다릴까 싶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그러지 않고 계속 걸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이거다.

그늘이 전혀 없어서 앉아서 쉬어도 편할 것 같지 않았거든.
어차피 땡볕에 앉아서 편하지도 않게 차를 기다릴 바에는 똑같이 힘들어도 그냥 걸어만 가자고 생각했다.
별로 듣고싶은 말이 아닐수도 있지만 이쯤 되면 두 다리와 내 뇌를 연결하는 신경이 느슨해진 느낌이라
이젠 뇌 속에서 아무리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던 말던 그냥 두 다리를 교차해서 앞으로 내딛기만 하면 가긴 가더라.


이런 생각 하면서 걷다보면 가끔 진한 동료애를 느끼게 만드는 녀석들과 만나기도 한다.
나도 포기하고 널부러져서 자동차나 기다리고 있으면 딱 이런 꼴 아닐까 싶어서
눈물을 훔치며 '니 몫까지 내가 달려주마'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원래 더우면 사람이 살짝 가는 경우도 있다.


오늘 최고의 난코스라고 생각되던 모래언덕... 이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지도대로라면 무지막지한 모래언덕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데 여긴 겨우 발에 살짝 채일만큼의 모래밖에 없다.
표지판이 있는걸 봐서 길을 잘못 든건 아닌데 의아해 하면서 어쨌든 칼날같은 모래바람을 뚫고 계속 앞으로 나갔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청난 모래바람이 지속된 탓에 원래 있던 모래언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댄다. ㅡㅡ;
참 사하라에선 희한한 일도 다 만나게 되는구려.


모래바람 덕분에 종아리 뒷부분에 찰과상에 가까운 화상을 입긴 했지만
모래언덕이 사라진 덕분에 오늘 겨우 완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멤버들 5명중 4번째로, 앞선 멤버들과는 3~4시간이나 차이나게 도착했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까지 마실 물을 챙겨들고 텐트로.

홍일점 홍양은 나보다도 늦어서 앞날이 걱정된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사막은 사람을 비정하게 만든다.
여기선 결국 무슨 짓을 해도 혼자 완주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텐트에 도착해서 쉬고 있으니 비보가 들려온다.
홍양이 제한시간에 걸려 탈락해 버렸다는 것.

원래는 제한시간을 넘겨도 그냥 계속 달리게 해 주는데, 이번엔 뭔가 사고가 있었나 보다. 제한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고 늦은 사람은 탈락시켰다.
힘이 다해 탈락한 것이 아닌 터라 홍양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래도 홍양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여기서 함께 생활하겠단다.
참가자 중에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성숙하고 배려심 깊었던 홍양이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다음 탈락자는 나였다.

물집을 터트리고, 실을 꿰매서 진물이 흐르도록 놔 두고.
저건 알맨님 다리지만 내 다리는 상상 이상으로 망가져 있다.
진물에서는 피가 섞여 나오고, 양쪽 새끼발가락 부분은 워낙 물집이 생겼다 터졌다 해서 너덜너덜하다.


먼저 오신 멤버들이 성심성의껏 식사까지 만들어 주셔서 편안하게 밥 먹고 누웠지만
탈락한 홍양 생각과, 남은 멤버들 중에선 확연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내 입장때문에 쉽게 잠이 안온다.
오늘도 많은 수의 탈락자가 생겼고, 내일은 중앙에 거대한 산이 떡 버티고 있는 38km 구간.
지도상으로는 Long Day 다음가는 난이도로, 이번 대회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이 아닐까 싶다.

어찌보면 홍양의 탈락때문에 나로서는 겁도 먹고 용기도 얻고 하는 이상한 결과를 맞이하게 됐는데
다음 탈락자는 확실히 내가 될거라는 불안감과,
탈락한 사람을 옆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감정때문에
절대로 탈락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이 동시에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게 참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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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는 6시쯤 해가 뜨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원주민들이 걷어간다.
빨리 걷어가서 다음 비박지에다가 설치를 해야 되기 때문. 그러니 늦잠같은거 없다.
어차피 숙면따윈 취하지도 못하니 그냥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서 밥부터 먹어야지.

군복무 한 사람이라면 한번씩은 먹어봤을 즉석건조쌀과 고추장이 한국팀의 식사.
원래는 뜨거운 물 붓고 기다려야 하지만 그럴 시간이 어디있나. 그냥 맹물에 붓고 좀 있으니 대강 먹을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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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팀만 정식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서 오늘은 임시로 적은 번호표를 달고 뛴다. ㅡㅡ;
신발에는 모래가 들어가는걸 방지하는 스패치를 부착하고, 나처럼 뛸 자신 없는 사람은 등산용 스틱으로 몸의 부담을 줄인다.
아시아쪽 에이전트인 제임스 장씨가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해서 베낭에 태극기를 꽂으라는등등의 주문이 있는터라 이 사진은 태극기가 보이게 찍은 듯.

일어를 한국어의 70% 정도 능숙하게 하는 나에게는 일본 사람에게 일부러 일어를 쓰지 마라는 주문도 부탁하셨다.
이젠 세계속의 한국이니 굳이 우리가 저들에게 맞춰줄 필요 있느냐는 것 같은데...
나하고는 애국심에 대한 정의가 많이 다른 것 같아서 그냥 웃고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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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저러나 일단 기념할만한 첫날이니 모두들 잔뜩 들뜨고 잔뜩 겁먹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날 아침에 이미 체력이 거의 고갈되어 있는 느낌이라 웃음이 잘 안나왔다.
8시만 되도 뭔놈의 햇빛이 끔찍하게도 쏟아지는데, 텐트를 걷어가버리니 그늘이라곤 사방천지 50km 주위에 아무것도 없음.
등에 맨 베낭은 12kg에다가 지급된 물까지 넣으니 한국서 걸어도 헥헥거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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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물은 이런 카멜백에다 넣은 후 배낭안에 넣고, 호스를 빼내어 어깨에 걸어놓은 후, 필요할때 쪽쪽 빨아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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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첫날 28km 라도 완주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중인데, 다른 참가자들은 완전 축제분위기다.
사방에서 신나는 음악이 터져나오고 선수들 입가엔 웃음이 가시지 않는데.
난 어떻게 기권하면 꼴사납지 않을까를 고민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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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엔 여러가지로 신경써서 촬영해주니 모두들 앞쪽에서 먼저 튀어나가려고 준비중이다.
MDS 홈피에 자기 얼굴이 실리면 정말좋겠네 라서일까?
나도 일단 첫 스타트땐 열심히 뛰기로 했다. 명색이 마라톤 대회인데 시작부터 끝까지 걸어버리면 슬퍼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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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출발!

이거 꼭 수십년전 어딘가의 Operation Overlord 작전시
MG42가 반갑게 맞이해주는 앞에서 셔터문 내리고 달려갈 준비하는 모 이병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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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자기 어필하느라 정신이 없다.
저 영국기 든 사람은 결국 저걸 들고 완주하고 말았다. 경사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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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조금 달리자 무너진 폐허같은곳이 보였다. 아이들이 재미있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달리는건 여기까지. 좀 더 달렸다간 그야말로 아프리카 사하라사막까지 와서 20분만에 기권하는 추태를 보일것 같아서.
스틱 꺼내들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처럼 헥헥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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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그렇고 지면 상태도 그렇고 정말 돌아가실것 같은 환경이었다.
사막이 전부 모래언덕 투성이일거라는 생각은 어느 개같은 쥐가 자주 하는 말처럼 '오해'다.
사막의 돌맹이는 바람에 의해 깎여나간 터라 굉장히 거칠고 각이 심하게 져 있다.
아예 안 밟고 지나갈 수는 없는데, 발바닥이 굉장히 뜨겁고 충격이 많이 전해진다. 특히 나같은 특이한 발바닥을 가진 사람한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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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선수들은 처음부터 무지막지하게 달려나가서 우리같은 일반 서민들은 얼굴조차 볼 기회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뭐 먹고 달리나 싶을 정도로 작은 베낭을 매고 보스턴 마라톤 하듯이 뛰쳐나간다.
참고로 이 대회 단골 1,2 등은 이곳 모로코 출신의 형제가 나눠먹고 있다. 이곳에선 멍연아급 인기 스포츠 스타.

CP에 도착하고나서 고민은 더욱 깊어갔다.
나 이제껏 사하라 다녀온 많은 사람들에게 공동적으로 들은 말이 있었거든.

'물은 충분히 주니까 걱정마요! 나중엔 남아돌아서 샤워도 하고 중간에 버리고 해요!'

이런 !@#*&% 같은! 충분하긴 개뿔이!
스타트 지점에서 받은 물은 CP 보이기도 전에 다 마셔버려서 나 이제 사막 한가운데서 말라비틀어지나 싶었다.
겨우 CP가 보여서 기듯이 통과한 후 물을 받았는데, 1.5L 생수통 절반을 받은 그자리에서 마셔버렸다.

물론 나역시도 방심했던 것이, 평소에도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긴 하지만 10km 가는데 1.5L 이상을 마셔버릴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긴 했다.

이제 750m 남은 물로 다음 CP 까지 가야한다 이 말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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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이 잘못됐나? 그러고보니 아침에 컨택트 렌즈 넣을때 모래때문에 많이 따가웠는데.
아, 그렇구나~ 이게 바로 사막에서 자주 보인다는 신기루였던 것이다.
난 사하라사막 마라톤 왔지 등산하러 온게 아니었거든.

근데...
왜 사람들이 자꾸 저 산을 향해 가는걸까... T_T

그렇다. 사실은 지도에 저 산이 나와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도에 귀여운 그림으로 그려져 있던 산이 현실에선 왜 저렇게 웅장한 것이란 말인가. 이건 주최측의 농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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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물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극한 상황까지 몰리지 않는 한 계속 갈증을 느끼는 상태를 유지하며 수분보급에 신경을 쓰고 있다.
거의 헤롱헤롱한 상태로 어떻게든 산을 올라오니 위에선 헬리콥터가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다.
대회가 대회인만큼 안전에 있어서는 만전을 가할 수 밖에 없는터라, 선수들 주위에는 항상 응급키트를 소지한 의료 요원들이 따라다닌다.

엄청난 양의 지프차와, 험한 장소를 가기 위한 4륜구동 바이크같은 탈것과, 헬리콥터까지 움직이고 있다.
잘 가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항상 차에 탄 요원이 '나트륨 알약 필요한가요?' 하고 물어본다.

수분만큼이나 땀의 배출도 엄청난 곳이라 이곳에서는 필히 3시간마다 나트륨 3알을 먹어줘야 한다.
이건 뷔페식이라 언제든지 말만하면 공급되는 약이지만, 소금맛이 나는것도 아니므로 과식은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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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서 이어져있는 능선을 타고 가는 도중 쉬고 있는 한 선수를 만났다.
상당히 대단한 몸집이라 신발도 놀라고 베낭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훗날 완주까지 해서 더욱 놀랐다)
뒷 배경이 그럴싸해서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하니 흔쾌히 승락해줬다. 내 사진도 찍어주겠다고 했는데 난 내 얼굴은 잘 안찍는 편이라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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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오면서 확실히 느낀 거지만 이번 대회는 뭔가 이상하다.
이전 대회까지는 참가자 100명중 10명 정도가 탈락, 전체 탈락자가 50명을 넘지 않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첫 번재 스테이지에서 저렇게 널부러진 선수들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차량 옆에 있는 선수는 지나가면서 보니 마구 토하고 있었다. ㅡㅡ;

50도가 넘는 직사광선아래서 달구어진 지면과 돌맹이들이 내뿜는 반사열이 상상을 초월하는터라
가끔 머리보다 발쪽이 더 뜨거울 때도 있었다. 산에 올라오니 발이 8옥타브 비명을 질러서 주위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항의도 했다. (이걸 믿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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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 줬다.
그 앞에 펼쳐진 사막의 모습과 개미처럼 기어가는 선수들의 뒷태를 보니 또 다시 한숨이 나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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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멀쩡하던 하늘에 돌연 공포의 모래바람이 불어와 나를 괴롭게도 했지만.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갖고 있는 막강체력 알맨님은 그야말로 터미네이터처럼 CP를 통과해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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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회 첫날에 기권했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죽기살기로 간신히 28km 를 걸어오긴 했는데 앞날이 깜깜했다. 240km 중에 28km 란 말이지.
그것도 28km 달리는데 8시간 정도 걸렸다. 한국서 그냥 걷는것보다 더 느린 속도.

홍일점 홍양은 나보다 더 늦게 도착했는데, 힘이 많이 부치는게 확실했지만 밝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띄워줬다.
내가 따라하기 힘든 좋은 장점을 가진 분이라서 그저 감탄과 존경 한 방.

물집이 안잡히면 그건 인간이 아니고, 일단 바늘로 터트린 후 진물이 빠지도록 실을 하나 박아놨다.
오늘같은 지옥을 앞으로 6일이나 더 참아내야 한단 말인가.
거짓한점 없이 나 2~3번째 스테이지에서 포기하면 덜 쪽팔리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완주는 거의 포기상태.

대회 전에도 가끔 얼굴을 비추던 미국선수 피터 무라카미가 자꾸 한국팀 숙소를 기웃거린다.
잉글랜드 팀과 함께 숙소를 배정받았는데, 그네들이 별로 재미없는 것 같아서 이쪽이 마음에 든단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혼혈인 피터는 좀 소심하고 숫기가 없는 표정이라 정통 서양인들과는 잘 못어울리는 듯.
한국인이라면 생판 남이라도 일단 끌어들이고 보는 끈끈한 정이 주특기 아닌가. (난 아니지만) 금새 친해졌다.

피터는 보스턴 마라톤을 3시간에 주파하는 준 프로급. 좀 말고 걸어보고 하고 싶긴 했는데 이 때의 난 자기 문제 해결하는데도 정신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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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섬주섬 밥을 입에 집어넣고 있으니 아시아 에이전트 제임스장씨가 오셔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대회 코스가 너무 어려웠던지, 오늘 하루에만 탈락자가 50명이 넘었고, 많은 사람들이 식수부족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내일부터는 출발지에서나 CP에서나 1.5L 물을 2통씩 제공해 주기로 했단다. ㅡㅡ;
이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20회 대회 참가자인 나침반님도 초반부터 이렇게 어려울줄은 몰랐다고 하신다.
스테이지 2는 35km. 거기다 지도에는 상당한 크기의 모래언덕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 포기하려면 내일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억지로 침낭속에 들어갔는데, 여전히 덥고 피곤하지만 잠은 안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