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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02.04  엄니와 함께 - 코베 (2/2) 10
  2. 2014.01.28  엄니와 함께 - 오사카 14
  3. 2013.02.08  도쿄 산책 - 나는 어디 여긴 누구 18
  4. 2010.04.10  대구의 밤거리 산책 15

 

요즘 도쿄의 스카이 트리 같은 경우는 엄청난 관광객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데

코베의 포트타워는 야경이 좋긴 하지만 역시 높이도 그리 높지 않고 관광객도 그리 많이 찾지 않아서 좀 황량합니다.

 

낮에 찾아왔으니 더더욱 그런데, 딱히 주변엔 먹을만한 게 없더군요.

하지만 날씨는 쌀쌀해지고 배는 고프고 해서 근처 호텔의 뷔페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런치 뷔페가 1200엔으로 꽤나 싼 편이었는데, 사실 그걸 더 원했다고 할까요.

아침을 많이 먹어서 굳이 코베 스테이크 같은 고기요리를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뷔페 들어가면 많이 먹긴 하겠지만.

 

 

 

저렴한 뷔페다 보니 음식 종류는 꽤나 적었지만 하나하나가 먹을만해서 다행입니다.

밥하고 어울릴 반찬부터 간단한 닭고기와 돼지고기 요리 등등

작정하고 가게를 박살내러 갈 요량이 아니면 느긋하게 런치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네요.

 

코베까지 와서 이런 국적불명 뷔페나 먹나 싶기도 했지만

엄니께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고, 바람이 매서워서 좀 쉬고 싶었으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뷔페가 적당하다 싶더군요.

런치 영업시간이 3시까지였지만 어차피 2시간이 넘게 남았으니 문제 없습니다.

 

 

 

크게 비싼 요리는 없었지만 다들 음식이 깔끔해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직원분이 소고리를 끌고다니면서 원하는 손님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고 있습니다.

소금에 절인 후 겉만 살짝 익혀 보관한 듯한 녀석이로군요.

 

돼지고기는 이탈리아 등에서 이렇게 햄처럼 숙성시킨 녀석들 많이 먹는다는데

아무래도 단가가 비싼 녀석인지 그냥 놔두지 않고 요렇게 한 사람당 두 조각씩만 나눠줍니다.

 

 

 

겨울이라 그런지 뷔페에서 가장 인기있는 메인을 장식한 녀석은 이 전골이더군요.

일본에서는 이런 1인용 전골 냄비를 많이 사용합니다.

여행사 따라 여행할 때, 손님들에게 바로바로 내 줄 수 있는 장점도 있고 말이죠.

 

이곳은 뷔페다 보니 안에 들어갈 재료와 국물 종류를 자기가 선택해서 담으면 됩니다.

종업원 분들이 돌아다니다가 이걸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밑의 고체연료에 불을 붙여 주죠.

 

 

 

저하고 엄니는 벌써 꽤나 많이 먹은 후라서

한 냄비로 두 명이 나눠먹기로 합니다. 따뜻한 국물과 각종 해산물, 닭고기 등을 넣어서 시원하네요.

 

대구의 이리로 보이는 저 녀석은 볼 때마다 제가 엄니한테 물어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옛날엔 그냥 내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내장이 아니더군요.

궁금한 분들은 한번 찾아보시길.

 

뷔페 음식은 미리 만들어 놓아서 질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 있지만

이렇게 고체연료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끓고 있는 냄비를 보면

왠지 그냥 뷔페보다 좀 더 괜찮아 보인다는 느낌이 듭니다. 머리 잘 썼네요.

 

 

 

아이스크림이 6종류가 있는데, 처음엔 그냥 맛만 보자 하고 가져왔지만

먹어보니 이게 빕스나 에슐리 같은 곳의 아이스크림과 레벨이 다른, 상당히 제대로 만든 녀석이라

안 먹고 가는건 아깝다고 모든 종류를 다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엄니께서도 처음엔 영 주저하셨지만 드셔보니 종류별로 맛과 향이 잘 드러나서 결국 조금씩 다 드시더군요.

똥색은 뭐 설명할 것도 없지만 푸른색은 라무네라는 일본식 레모네이드 사이다 맛이고 분홍색은 복숭아 맛입니다.

 

 

 

옅은 색은 요구르트 맛이고 노란 색은 망고, 녹색은 뭐 말할것도 없죠.

생각보다 괜찮은 퀄리티에 놀라는 동시에, 한국의 뷔페집 아이스크림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세삼 깨달았습니다.

 

에슐리라던가 빕스라던가, 음식은 이제 그럭저럭 적응하고 맛있게 먹는 편이지만

아이스크림만큼은 그냥 애들 먹으라고 대충 선정한 듯한 그 낮은 수준이 영 적응이 안되고 있죠.

가끔은 아이스크림 값이 비싸니 그냥 맛없는거 놔 둬서 많이 못 먹게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엄니와 저도 꽤 오래 앉아있었지만 재미있게도 원래 앉아있던 모든 손님들이 저희보다 더 늦게 일어나더군요.

아주머니 몇 분이 언제부턴가 식사는 접어두고 줄창 음료수만 뽑아와 계속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1200엔 정도의 런치 뷔페란 일본에서 그냥 간단한 식사 한 끼 하는 정도의 금액이라

아주머니들 역시 아이들 학교 보내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 떨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75세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은 혼자 오셔서 천천히 음식 덜어먹고 커피 마시며 신문 읽고 계시네요.

걸음이 조금 불안하게 보일 정도로 몸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분인데, 일본의 혼자 식사 문화에 어지간히 익숙해 진 저로서도

흔치 않은 광경이라 살짝 놀랐습니다. 10년쯤 뒤엔 한국에서도 이렇게 혼자 외식하러 나오는 70대 후반의 노인들이 많아질 듯 합니다.

 

그러고보니 저희 가족 중 혼자서 식당에 앉아 밥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기도 하네요.

부모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혼자서 외식은 못한다고 고개를 흔드시는데,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긴 합니다.

 

 

 

조금만 먹고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데 음식을 앞에 두면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결국 배가 터질 때까지 뷔페를 즐기다가 아까와는 달리 터질듯한 배를 움켜잡고 다니 돌아다녀 봅니다.

 

한국의 재래시장이 요즘 애를 써서 지붕도 만들고 하며 자구책을 고심하고 있는데

일본 역시 대형 마트의 난립으로 많이 힘들어졌다고 하지만 워낙 이런 상가가 발달되어 있어서 한국보단 여유가 있는 편이죠.

시대 흐름의 차이라고 할까, 이쪽은 같은 장소에서 몇 대를 이어 장사하던 사람들이 눌러앉은 곳이라서

마을 사람들과의 유대 덕분인지 망하지 않고 계속 장사할 정도는 되는 듯 합니다.

 

물론 한국처럼 점점 이웃 얼굴도 모르게 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그 유대감이 끊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죠.

 

어느 가게에서 폐업 세일을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 엄니가 호기심에 들어가 봤는데

시장판 싸구려가 아니고 원래 50~60만원 하던 것을 15만원에 파는데다가 200만원짜리 가죽 가방을 60만원에 파는 굉장한 세일중입니다.

엄니도 보시고 가방 수준이 장난 아니라고 굉장히 눈여겨 살펴보시는데, 점원이 슬슬 바람을 잡아주더군요.

물론 엄니는 일본어를 모르시니 제가 알아서 커버했습니다.

 

가방의 품질로 본다면 이걸 60만원쯤에 구입하면 굉장히 잘 산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문제는 이 가게 독자적인 브랜드라서 소위 '명품'이라 잘못 불리고 있는 사치품 가방에 비해 희소가치가 떨어지는게 문제인 듯 합니다.

아마 가게 안에서 고민중인 많은 여성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더군요.

엄니는 그냥 실컷 구경하다가 가방은 집에 많이 있다면서 그냥 나오셨습니다. 하나 구입하셔도 된다고 옆구리를 찔러봤지만 별 효과가 있었죠.

 

 

 

코베 관광에 꼭 들어가는 차이나타운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란히 늘어서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장 거리와 바로 한 블럭을 두고 늘어서 있어서 상권 경쟁같은거 일어나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파는 물건이나 음식도 그렇고 차별화가 아주 명확해서 크게 다툼은 없을 것 같더군요.

 

능숙하게 일본어를 구사하는 화교도 있고, 그냥 일본인이 장사하는 가게도 있고 그렇습니다.

일본 정도로 철처하게 고립된 사회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마을을 이루는 화교의 수완은 정말 놀랍기 그지없네요.

 

 

 

한국에서 꽤나 많이 찾아간다는 나가사키의 하우스 텐 보스도 그렇고

이곳에 와서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딱 그겁니다. 왜 일본에서 중국풍 거리를 걷고 있는 걸까.

 

여기는 구경하러 왔다기 보다는 산책하는 길에 맛있는 거나 먹어볼까 싶어서 왔지만

하우스 텐 보스 같은 곳은, 어마어마한 돈을 써가며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구경할 필요가 있을까 항상 궁금할 따름이죠.

버블경제의 절정을 달리던 시기에 지어진 녀석이라 모든 건축자재를 전부 네덜란드에서 수입해 왔다는 점이 놀랍긴 합니다만.

 

각설하고, 저나 엄니나 배는 터질 것 같지만 차이나타운에 와서 먹을거리도 하나 즐기지 않고 돌아가기는 너무 아쉬워

터질 배를 움켜쥐고 조금이라도 신기해 보이는 거 먹어보려 애 씁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더군요.

 

검은색도 그냥 검은색이 아닌 암흑의 심연같은 만두가 눈에 띄여서 하나 사 봤습니다.

색깔은 맛에 크게 관련이 없는 듯 해서 아쉬웠지만, 육즙 가득 머금고 살짝 짭쪼름에 달달한 돼지고기 볶음 속이 맛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뷔페집에 간 걸 조금 후회하게 되었죠.

여기서 조금씩 조금씩 맛있는 거 다양하게 먹었어야 되는데 뷔페에서 그렇게 빵빵하게 하고 왔으니.

 

홀로 여행때는 자금을 아끼기 위해 고심고심해 맛있어 보이는 녀석 사먹고 했다면

지금은 배가 너무 부르기 때문에 고심고심해 맛있어 보이는 녀석을 골라야 하는 사치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엄니는 정말로 배가 부른지 아무리 나눠먹자고 말씀드려도 한 입도 드시지 않더군요.

 

일본식 교자도 맛있지만, 교자 하면 역시 원조는 중국이기 때문에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이것저것 먹을 배가 아니라 아쉽지만 좀 더 한국에서 먹기 힘든 녀석을 찾아다녀 보기로 합니다.

 

 

 

중국음식은 일단 기름을 사용하는 것들이 많고

특히 군것질거리는 뭐 말할것도 없이 칼로리 폭탄인 것들이 많아서...

 

확실히 저렇게 먹는게 맛있긴 합니다. 은근히 빡빡해 보이는 일본 군것질거리와 비교해서

한국적인 느낌도 나고 말이죠. 배만 고팠으면 아주 정복을 하고 다녔을 텐데.

 

 

 

진짜 중국 거리와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세계 어디든 차이나타운의 분위기는 아이덴티티가 드러나죠.

강렬한 붉은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거리의 모습은 일본의 거리와는 다른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겨울이고 평일이고 해서 코베 시내 전체는 꽤나 한산한 편이었지만

차이나타운엔 역시 관광객들 많이 오더군요. 차이나타운에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았다는 건 좀 신기하지만.

실제로 오사카에 있는 코리아 타운도 그렇고, 제일 많이 활용하는 건 재일한국인이었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이곳 코베의 차이나 타운에도 중국사람들이 실생활에 사용할만한 자국 식재료들 같은 거 많이 팔더군요.

 

중간중간 신라면이나 냉동만두 같은 한국어가 적혀진 녀석들도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코베의 소고기가 유명한 대신 차이나타운에서는 돼지고기 요리가 인기를 끕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길게 줄서서 뭔가 사먹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엄니도 함께 있고 해서, 배만 안 불렀다면 줄 좀 서서 뭔가 먹어보기라도 했겠습니다만

시장이 반찬인 것처럼 배부름은 어떤 진수성찬도 길바닥의 개X처럼 보이게 만들죠.

 

 

 

먹는건 포기하고 그냥 재밌는 마스코트 앞에서 사진이나 찍습니다.

차이나타운은 왠지 아무렇게나 마구 사진 찍어도 별 문제없을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이죠.

쿄토 같은 곳에서는 기념품 파는 가게에서도 매의 눈으로 살펴보다가

'사진 찍으면 안됩니다!' 같은 소리로 사람 김 빠지게 만드는데, 이곳은 별로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먹는데 대한 미련은 별로 없어서, 못 먹어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저기서밖에 먹을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먹거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엄니는 중국에도 몇 번이나 여행을 다녀오셨고

이런 거리음식과는 다른 진짜 진수성찬도 먹어보고 하셨기 때문에 이곳에 별 미련이 없으신 듯 하네요.

간식거리 조금 맛이라도 보라고 말씀드려도 배부르다는 말만 하시고 전혀 손을 대지 않으십니다.

 

 

 

차이나타운을 빠져나와 산노미야 쪽으로 걸어가면 큰 백화점이 있는데

엄니가 학교 선생님한테 부탁받은 유아용 그림책과 함께

손자가 가지고 놀 만한 그림책이나 장난감 찾아보려고 서점에 들어가 보자고 하십니다.

 

키노쿠니야(紀伊国屋)라는 일본 최대의 서점체인이 마침 백화점에 입점해 있어서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놀랍게도 할머니 한 분이 이 강아지 두 마리를 자전거에 남겨놓고 그대로 백화점에 들어가 버리시는군요.

이곳은 아직 강아지 납치 같은거 걱정 안해도 되는 곳인가봅니다?

 

강아지들은 많은 사람들이 귀엽다면서 다가와 웃어줘도

할머니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딱딱하게 굳어서 오직 백화점 문 앞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몇 번 겪어본 일인지 뛰쳐나가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게 대견하다고 할까 안스럽다고 할까.

 

10미터쯤 떨어진 백화점 앞 네거리에서는 젊은이들이 피켓을 들고 큰 소리로 지원자를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싶어 들어봤더니 후쿠시마 지진으로 갈 곳을 잃은 강아지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돕자는 호소를 하고 있더군요.

단순히 애완동물만의 문제가 아니라 후쿠시마의 남겨진 동물들에 대한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한국의 다큐에서도 많이 나왔듯, 수만 마리의 소와 말, 개, 닭, 고양이 등이 방사능에 피폭당하는 동시에 굶어죽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이죠.

 

젊은 청소년들의 힘은 한계가 있으니 일단 애완견, 애완묘라도 돕자고 홍보를 하고 있는데

엄니께서는 역시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그냥 피식 웃으시더군요.

사람도 못 돕는데 동물은 뭔 동물이냐고. 하지만 손자가 커서도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을지가 걱정이네요.

사람이 동물도 못 도우면 사람답게 살 수나 있을까 싶습니다.

 

 

 

여기서밖에 못 먹어볼 듯한 녀석이라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하나 사 왔습니다.

창업 40년이 넘은 전통있는 가게에서 팔고 있던데, 조금 딱딱한 크로와상 같은 빵 속에 코베 소고기를 넣은 고기호빵 같은 느낌입니다.

만두처럼 부드러운 건 아니고 프랑스식 빵에 고기를 넣은 듯한 묘한 퓨전느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만족했던걸 보면, 춥고 배고픈 겨울날 하나 사먹으면 굉장히 맛있었을 듯 하네요.

무게감이 있고 크기도 작은 편이 아니긴 하지만 380엔이나 하는 비싼 군것질거리라 혼자 여행다닐 때 과연 먹을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점에서 부탁받은 그림책과 손자용 장난감을 좀 구입한 후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쉴새없이 걸었으니 엄니께서는 굉장히 피곤하실텐데

버스타고 가자고 해도 한 코스밖에 안되는 거 뭐하러 타냐고 하시며 계속 걷는군요.

 

저도 다리가 후들후들할 정도인데, 걱정을 하면서도 일단 코베에 왔으니 건질 건 건지려고 다시 포트타워 쪽으로 이동합니다.

 

 

 

엄니가 오늘 이곳만 세 번이나 왔다면서 웃으시더군요.

사실 제 사진 욕심때문에 괜히 엄니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닌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좀 마음에 걸리는 중이긴 했습니다.

 

포트 타워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라서 엄청 놀라운 야경을 보여줄 정도는 아니죠.

밖에서 보는 모습이 더 재미있긴 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올라는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전진 또 전진.

 

 

 

포트 타워 안엔 별하늘 아래를 걷는 듯한 조명이 사방에 깔려있어서

야경사진 담기엔 오히려 좀 귀찮은 구석이 있더군요. 밖에서 보는 것 만큼 조그마한 타워라서 별 감흥은 없었습니다.

하긴 이 타워의 4배가 넘는 높이의 스카이 트리에서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여기라고 별 수 있나요.

세삼스럽긴 하지만 타워 올라가서 구경하는 건 제 성격과 별로 맞지 않는 듯 합니다.

 

그래도 볼만한 것들은 많았는데요. 쿄토 산자락의 '大' 자를 본따 만든듯한 항구 표시가 저기 산 위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좀 멀어서 박력이 좀 줄었지만, 어쨌든 한 번쯤 신기하게 쳐다볼 가치는 있겠죠.

 

 

 

해양박물관은 밤이 되니 좀 더 볼만하네요.

포트 타워는 이름답게 바다를 끼고 있어서 다른 곳보다는 야경이 좋습니다.

밤이 되니 한번 더 20년 전의 모습이 상상속에서 일어난 듯한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제가 괜히 엄니를 싸구려 비지니스 호텔에 끌고 갔나 싶은 생각이 항상 남아있어서 그런지

여행중 멋진 호텔만 보이면 '돈만 많았으면 저기 묵을 수 있었는데' 하는 한숨을 쉬곤 했네요.

 

물론 엄니께서도 어차피 저녁에 잠만 잘거 뭐하러 그런 데 돈 쓰냐고 하시긴 합니다만.

저는 아직 호화스러운 여행을 가 본적이 없어서, 한번쯤 경험해 보면 그것도 재미있지 않겠나 상상만 하고 있습니다.

호화스럽다고 해도, 여행사 패키지에 들어있는 4성, 5성급 호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니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겠죠.

 

여담으로 부모님이 예전 여행갔을 때 여행사에서 착오가 있어 호텔 스위트룸에서 자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돈이 있어도 투숙할 수 없고, 국빈들에게나 제공하는 스위트룸이었는데 저희 집보다 두세 배쯤 컸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일박 수천만원짜리 그 스위트룸 역시 그냥 하룻밤 자고 일어나 떠나면 끝이었다고 허무해 하셨습니다.

 

 

 

포트 타워 근처는 해양박물관 쇼핑몰, 유원지, 유람선 등 즐길거리가 많지만

엄니나 저나 그런건 별로 안좋아하는 성격에다가, 오늘 이상하게 관광객이 별로 없어서 굉장히 음산한 느낌밖에 안들더군요.

 

포트 타워 야경 구경이라는 항목은 어느 여행 가이드에나 반드시 나와있는 정석 코스인데

막상 와보니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 무리들 말고는 동네 마실 나온 듯이 조용했습니다.

대학생 커플쯤 되는 아해들이 많이 와서 야경의 낭만을 즐기고 있던데

아무래도 저처럼 엄니와 둘이서 여행 온 일행은 없는 것 같아서 더더욱 군중속의 고독을 느낀다고 할까요. 물론 전 그런 거 매우 좋아합니다.

 

 

 

 

산노미야 주변에도 괜찮은 호텔이 좀 있긴 합니다만

이곳 코베 항 주변은 역시 경치 때문인지 척 봐도 고급스럽게 보이는 호텔이 많습니다.

코베는 지진 탓고 있고, 버블 붕괴 이후로 킨키 지방중 가장 경기가 안 좋은 편에 속하는 도시라서

이렇게 한적한 동네 풍경속에 유난히 빛나는 고급 호텔의 모습을 보면 왠지 안스러운 느낌마저 들곤 합니다.

 

실제로 차이나 타운 정도 말고는 거의 대구의 본가 근처 동네 산책할 때보다 사람이 더 없었던 하루였네요.

엄니도 우리 뭔가 관광 잘못온거 아니냐고 걱정하실 정도였고.

 

겨울이라 일본 중부지방은 관광 수요가 좀 줄어든 탓도 있습니다만

겨울에 돌아본 도시 중에서도 이 곳은 제 예상보다 좀 황량한 느낌이 드는군요.

 

 

 

타워 야경을 꼭 보라고 꼬드기는 세간의 흐름에 넘어가 억지로라도 올라간 포트 타워입니다만

엄니나 저나 피로가 상당히 많이 누적되어, 이젠 뭐가 어찌되든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그래도 1층에 내려오니 한국의 빼빼로와 비슷한 포키로 만든 타워가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옆에는 일본 각지의 타워들을 소개해 놓았는데, 자전거 일주여행을 하다 보니 거진 한번씩은 지나가면서 쳐다본 것들이네요.

엄니는 우메다 공중정원 사진을 보고 신기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곳 코베보다 오사카 우메다가 더 가까웠기 때문에 살짝 뜨끔했습니다.

 

예전에도 가 봤지만 높은 곳은 그렇게까지 볼 만한게 별로 없어서.

 

 

 

코베에서 한 번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은 채 걸어다닌 저와 엄니입니다만

이제 지칠대로 지쳤고, 어차피 오사카행 지하철 타려면 산노미야 역에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코베 지하철을 한번 타 봤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역내에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네요.

 

엄니와 저는 둘이서 미나토 모토마치(みなと元町)역의 고요한 승강장에 서서 공포를 만끽했습니다.

인구 150만의 중소도시 치고는 너무나도 한적해, 왠지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물론 피와 살과 뼈가 날아다니는 상큼한 영화라서 진짜 긴장하고 있는 엄니한테 말씀드리긴 어렵죠.

코베에 관광와서 이런 한적함도 구경해 보는구나 싶어 사진은 재미있게 담았습니다.

 

일본은 전혀 관광 시즌이 아닌건지, 코베가 그냥 그런건지, 우리가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닌 건지.

이러나 저러나 제가 코베를 관광 목적으로 다시 찾을 일은 거의 없을 듯 해서

느껴진 텅 진 승강장도 나름 재미있게 느껴지더군요. 어차피 산노미야 역은 붐비겠지만.

 

 

 

산노미야 역에서 난바까지는 40분만에 간단히 도착합니다.

기차 안에서 신나게 졸아댈 정도로 피곤했나 보더군요.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엄니가 가볍게 저녁 먹자고 하십니다. 숙소 안에서는 별로 먹을 게 없으니까요.

 

숙소 바로 옆이 상점가라서 먹을 건 많습니다만, 짜고 기름진 거 싫다고 하셔서 조금 더 발품을 팔아봤습니다.

그래서 10평도 안되는 허름한 가게 문을 무작정 열고 들어갔네요. 여기도 창업 40년은 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동네의 조그만 가게들은 대부분 술집도 겸하고 있는 형식이라, 들어가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맥주 한 잔씩 들이키며 식사 중이로군요.

 

일본에서는 아직 실내 흡연도 인정되고 있어서, 술과 저녁식사와 담배까지 함께 하는 사람들 덕분에

담배냄새가 좀 거북했습니다만, 이것도 동네 구멍가게의 저녁 풍경이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누그러진 마음으로 구경했습니다.

 

엄니는 계란과 버섯, 각종 야채를 얹은 덮밥을 주문하셨습니다. 이것도 좀 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담백해서 먹을 만 하다고 하시더군요.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할아버지와 서빙하는 할머니는 아무래도 부부인 듯 합니다.

엄니가 처음엔 자매가 아닌가 생각하셨다고 할 정도로 닮았는데, 역시 오랫동안 함께 하면 얼굴도 닮아가는 걸까요.

 

저는 중화소바를 시켰는데, 강렬한 라멘보다는 훨씬 옅은 국물맛에 숙주나물이 듬뿍 들어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늦은 밤이라서 너무 짜고 진하면 얼굴이 참 귀엽게 부풀어 오를거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운 맛이라서 부담없이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옆에 후추통으로 보이는 깡통이 있어서 후추 좀 뿌릴까 싶어 집어들었는데

너무 가벼워서 빈 통인갑다 하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 놨습니다.

라멘 먹으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노인들이 담뱃재를 그 깡통에 털고 있더군요. 재떨이였습니다.

안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면 아마 그걸 라멘에다가 들이 부었을 텐데

그랬다면 라멘이 아까운 게 문제가 아니고, '라멘 잘먹다가 담뱃재 들어부은 괴인 출연'이라고 뉴스에 나갈 것 같아서 섬뜩하더군요.

 

미친놈 취급 받지 않고 안전하게 끝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숙소에서 목욕 후 2층 침대로 기어 올라가는데, 내일은 아무래도 여정을 좀 가볍게 해서 일찍 돌아와 쉬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엄니가 퇴직하시고 좀 심심해 하셔서 저하고 가볍게 근처 오사카 정도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일본쪽으로 가면 가이드 필요없이 저하고 다닐 수 있어서 말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엄니는 2월 초에 부부모임 동창회에서 대만여행 간다는 사실을

제가 오사카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나서야 알게 되었네요. 그래서 좀 있다 또 나가십니다.

 

더더욱 아이러니하게도 저 역시 작년 10월부터 2월에 홋카이도 가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눈축제 구경이라는 목적도 있지만 거기서 취직하신 대학원 졸업생분과 이야기 좀 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엄니나 저나 전혀 갈 필요가 없었던 여행이었습니다만

그래도 뭐, 자식하고 둘이서 해외여행 나가는 건 평생 처음이니까 괜찮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불행히도 오래 직장을 비울 만한 여력이 없어서, 그냥 2월에 대만 함께 가시는 걸로 결정했네요.

 

대구에서 부산 김해공항으로 당일 버스타고 갈 예정이라 까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엄니가 커피를 너무 조금 드셔서, 이럴 줄 알았으면 음료수는 하나만 시켜도 될 뻔 했네요.

 

 

 

직장생활 당시 시간에 쫓기는 출퇴근을 워낙 많이 경험하신 엄니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가서 기다리는게 낫지 늦게 가서 허둥대기는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별로 볼 것 없는 조그만 김해공항에도 탑승 2시간 반이나 전에 도착해서 미리미리 체크인을 해 버렸네요.

 

김해공항은 정말 아담해서 눈이 번쩍번쩍하는 인천공항의 면세점 물건들 구경할 수는 없지만

청사 내부에 재미있는 쓰레기통이 있어서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줬습니다.

엄니는 한참동안 '왜 여행가방이 이렇게 여기저기 세워져 있지'라고 생각하셨다고 하는군요.

 

 

 

오사카를 기점으로 하는 저가항공인 피치항공을 사용하는 여행입니다.

첫날은 저녁 7시가 넘어야 겨우 오사카 시내에 도착할 것 같지만, 저가항공이니 감내해야 할 듯.

그래도 난바역에서 도보로 이동가능한 숙소인데다 도톤보리라는 밤의 거리까지도 걸어서 갈 수 있으니

피곤한 여행 첫날 저녁은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엄니나 저나 여행 전날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세우는 성격이라

고속버스 -> 비행기 -> 전철 등 하루 5시간 정도를 이동하는데만 소모하는 첫 날 여정은

항상 머리가 지끈거리는 힘든 날입니다만, 그것도 이제는 익숙해 질 만큼 많이도 나가다녔군요.

 

 

 

피치항공은 물조차도 사 먹어야 하는 곳이라 남은 시간동안 점심식사를 합니다.

오사카에서 뭐 먹으러 나가려면 적어도 저녁 8시는 넘어야 할 것 같으니까 말이죠.

 

한국의 공항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은 없어서 심히 불안했지만

배 속에 뭐라도 넣어놔야 하니 일단 푸드코드에서 적당히 주문했습니다.

엄니는 타이식 볶음국수였나 어쩌구였나 주문하고, 저는 뚝배기 된장국 비슷한거 주문했습니다만...

역시 돈값은 거의 하지 못하는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일 뿐이었네요. 기대하지도 않긴 했지만.

 

식사 후에 도착층 쪽으로 내려가 귀국시 바로 타고 갈 버스표를 예약하고 있는데

그 쪽에는 번햄즈 버거였나 크라제 버거였나 아무튼 좀 비싼 버거집이 있는걸 봤습니다.

차라리 그걸 먹는게 좀 더 만족감이 있었으리라 생각했죠.

 

 

 

이륙이 연착되는건 특히 저가항공사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사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예정시각보다 20분쯤 지연되었지만,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워낙에 가까운 거리라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이라면 그 첫경험의 황홀함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금새 착륙해 버릴 테죠.

 

오랜만에 딱 해가 질 무렵쯤 하늘 위를 달리는 비행기를 탄 덕에

푸른 하늘과는 또 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은 만족할만 하군요.

 

 

 

기내 쇼핑 팜플렛을 보니, 칸사이 공항에서 오사카 난바까지 가는 특급열차인 '래피드 a'를

원래 1500엔에서 1000엔으로 판매한다는 좋은 광고가 있어서 그거 사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1시간 15분의 짧은 비행시간동안 기류가 불안정한 곳이 많아서

기장 명령으로 승무원들도 대부분의 시간을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게 되었더군요.

이런 경우엔 기내 쇼핑도 자연적으로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경험했습니다.

 

두 장만 사도 만원이나 절약할 수 있어서 언제 쇼핑이 시작되려나 매우 조마조마했는데

결국 기류 문제로 인해 쇼핑은 시작도 하기 전에 오사카에 도착해 버렸네요.

 

 

 

일단 비행기 내리면서 구입할 수 있는지 한번 더 물어보기로 하고, 해지기 전의 창밖이나 담아봅니다.

노파심에서 적지만, 창쪽 좌석은 엄니에게 드렸고 저는 카메라를 쭈욱 뻗어서 한손으로 담은 겁니다.

 

엄니는 오사카도 외국이라고 추우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시는데

오사카나 쿄토 등의 지역은 한국에서도 따듯한 편인 대구와 비교해도 겨울 평균기온이 더 높은 곳이라

그냥 입던대로 입고 가도 된다고 말씀을 드려도 별로 효과가 없네요.

 

어느 가족이나 다들 그렇겠습니다만

제가 한국의 새집증후군에 대해 설명하면서 추운 겨울이라도 환기 꾸준히 해야 독성물질이 빠져나간다고 한참 설명하면

그냥 듣고 계시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응응거리시다가, 며칠 뒤 TV에서 똑같은 내용의 방송이 흘러나오면

깜짝 놀란 얼굴로 저한테 달려와서 새집증후군이란 게 그런 거라서 우리 환기 열심히 해야겠다고 말씀을 하시곤 하죠.

 

아무튼 금새 착륙하고 내리려는데 옆좌석 밑에 면세점에서 구입한 듯한 담배 두 보루가 떨어져 있습니다.

불쌍하게도 누군가가 잊어버린 모양이네요.

 

저는 팔면 밥값 정도는 나오겠다고 생각했는데

엄니는 남의 것 가져가면 밤에 잠이 오겠냐고 하시며 승무원에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저야 뭐 담배 두 보루 정도라면 밤에도 잠 잘만 하겠지만 어쨌든 얌전히 승무원에게 인계하고 내렸죠.

 

래피드 a 할인권 좀 구할 수 없냐고 물어보니 공항 터미널에서도 할인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거긴 1000엔이 아니라 1100엔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었습니다.

 

 

 

평일에 출발해 평일에 돌아오는 여행이라 좀 한산할 줄 알았더니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이 많은지 한국인 중국인 관광객들이 아주 칸사이 공항을 점령중이더군요.

 

일단 앞으로 이용할 칸사이 스루 패스를 구입한 후 래피드 a 에 탑승하러 이동하는데

광장 한편에 세계의 명화가 묘하게 전시되어 있어서 한번 가 봤습니다. 재현도는 상당한데 대체 뭘로 만든건가 싶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건 다 쓰고 회수한 전철 티켓을 모아 만든 그림이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회수권의 검정 마그네틱 부분과 앞쪽의 노란 부분을 꾸준히 이어붙여서 만든 것이 보이더군요.

 

이 작품에는 131,516장의 티켓이 사용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 전시회 너무 좋더군요. 화려함보다 친근함이 앞서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 혼자라면야 이런 특급열차 탈 필요 없지만 엄니와 함께니까 최대한 편한 이동을 선택합니다.

사실 이 시간에 혼자 온다면 첫 날은 숙소도 잡지 않고 넷까페 같은데서 새우잠이나 자고 있겠죠.

 

무사히 열차를 탔는데 앞 옆 뒤 거의 대부분이 한국 아니면 중국인 관광객입니다.

대학생쯤 되어보이는 젊은 아기들 서너 명이 즐겁게 한국어로 이야기 중이든데

남정네 여럿이 오사카 와서 뭘 즐겁게 여행하고 갈런지 궁금하더군요.

 

그러고보니 전 남하고 여행간 적이 혼자 여행간 적 보다 훨씬 적어서

단체 여행의 매력이란 거 아직 이해하기 힘들긴 합니다.

 

 

 

편안하게 난바역에 도착해서 잠깐 걸어 숙소에 짐 풀어놓고

그냥 하루 보내기는 아쉬워 도톤보리(道頓堀)로 이동합니다. 대낮보단 야경이 더 괜찮은 전형적인 도심지죠.

 

인공 하천을 중심으로 조성된 상가임에도 서울의 청계천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 환락의 거리입니다.

저희 집안 사람들의 특징이, 옆에서 혜성이 폭발해도 미간에 주름 하나 변하지 않고 흐음 하는 성격이라

하천 양쪽에 끝없이 늘어선 욕망의 네온사인을 떡하니 보여드려도

지금 엄니가 초상집에 온 건지 여행 즐기러 온 건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는 보살의 은은한 표정으로 일관하시더군요.

 

제가 즐긴다기 보다는 엄니 가이드 역할로 따라온 터라 이렇게 되면 장소 선택이 잘못된 건가 고심하게 됩니다.

 

저녁이 늦었고 해서 술안주 비슷한 자극적인 먹거리가 많은 도톤보리의 음식점보다

적당히 한끼 때우고 슈퍼에서 간식거리나 사 가자고 하셔서 그냥 요시노야에 들어갔습니다.

일본 서민들의 휴식처인 요시노야인데, 어째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이 전부 한국인 관광객이더군요.

더 웃긴건 영어로 어물어물 뭔가 주문하는 한국인과, 그 주문을 어설픈 일본어로 받아드는 중국인 알바의 시트콤이었습니다.

 

매우 심란한 일본어를 어색하게 발음하고 있어서 오히려 영어와 일본어의 혼합 의사소통보다

제가 일본어로 말하고 종업원이 일본어로 대답하는 그 순간이 더 알아먹기가 어려운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네요.

 

 

 

도톤보리 요시노야점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와서인지

역대 제가 먹어본 백여 군데의 요시노야 지점중 단연 최악의 품질을 보여줬습니다.

규동 소스도 제대로 뿌리지 않아서 밑에 흰 맨밥이 떡하니 늘어붙은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그릇을 점장 머리에 던져주고 싶을 정도더군요.

 

워낙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라, 규동집의 품질마저 개판이 되어버렸습니다.

밝고 해피하고 사교성 좋은 사람들에게는 밤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곳인데

인류의 미래와 진리에의 탐구에 여념이 없는 진중한 저희 모자는 그냥 밝은건 전구고 어두운건 사람이구나 하며 걸을 뿐이었습니다.

 

 

 

도톤보리가 그렇게 일자무식 먹고 마시는 곳만은 아니어서

상당히 오래된 카부키 극장이라던가, 문화 예술적인 면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긴 합니다만

외국인들에게는 별 의미 없는 곳이고, 엄니께 그걸 추천할 수도 없어서 조금 아쉬울 따름이네요.

 

 

 

그래도 일본의 상가 거리는 꽤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어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입니다.

한국의 재래시장 상인들이 이곳에 와서 이렇게나 번창하고 있는 개인 상점들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사진 옆의 멍청한 용이 서 있는 가게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매우 유명한 킨류 라멘입니다.

대체 어떤 멍청이들이 오사카 가이드북에 꾸준히 저 가게를 소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사카의 라멘집 중에서도 레벨이 중하 정도로 떨어지는 곳이라 일부러 갈 일이 전혀 없는 곳이라고 생각.

 

얼마나 한국사람들이 많이 오면 반찬으로 김치도 내준다고 합니다.

 

 

 

오사카 사람들이 부산사람과 닮았다는 말이 도는 이유가 이런 도톤보리의 풍경 때문이기도 하죠.

먹다 죽다(食い倒れ)라는 말이 오사카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이듯

이곳 도톤보리는 일본에서 먹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먹거리가 다 밀집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본의 정갈한 회 요리, 코스 요리 등과는 달리

욕망에 솔직하다는 느낌이 드는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쓰러지기 위한 식당이 너무도 많습니다.

 

성격이 그렇지 않으니 동료들끼리 어깨동무하고 한 손에 맥주병 들고 웃고 떠들며 고기집 찾아다니는

그런 드라마같은 행동은 해 본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지만

이곳 도톤보리는 그나마 일본에서 그런 모습이 제일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엄니는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사진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제가 카메라를 들던 말던 자기 갈 길을 가십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중 찍은 엄니 모습의 90%는 뒷통수만 나와 있네요.

 

엄니는 그걸로 아쉬워 할 성격이 아니니 저도 부담감은 없습니다.

혼자였다면 아마 저 별다방에 들어가 새벽 1시쯤까지 책이나 읽으며 시간 보내다가

적당히 넷까페 찾아들어가 잠 좀 자고 나오는 그런 여행을 즐겼겠죠.

 

 

 

오사카가 일본의 제 2 도시이긴 하지만, 도톤보리를 걷고 있으면 항상 신기한 기분입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거대한 상권을 소화할 인적 물량이 유입되고 있는지 말이죠.

 

아무래도 20여년의 불경기를 겪은 일본의 입장상, 이 정도의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할 듯 합니다.

오사카에 이 정도의 상권은 도톤보리뿐만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중국의 부유층은 요즘 그야말로 자기들의 세상이라고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일본 관광시장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죠.

 

도톤보리는 항상 그렇지만, 오늘은 아무리 둘러봐도 한국인+중국인 관광객 수가 일본인보다 더 많아 보입니다.

 

 

 

도톤보리에 오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 글리코 전광판도 변함없이 한 장 남겨봅니다.

이 다리가 이 다리에 대한 설명은 예전 오사카 여행기에서 언급을 했으니 넘어갑니다만

프릴이 잔뜩 달려 풍성한 미니스커트에 인형같은 차림을 한 여식들이 한 잔 하고 가라고 바람을 불어넣고 있더군요.

 

젊은 남정네들끼리 온 관광객들은 저런 것도 경험이다 하면서 한 잔 걸치러 갈 것인가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자기들끼리는 허세 만빵이라도 막상 현지인들이 저렇게 덤벼들면 매우 얌전하고 소심해 지는게 지금의 한국 대학생들이 아닐까 싶네요.

 

엄니는 놀랍게도 옷 귀엽게 입었다면서 저보고 사진 같이 찍어보자고 말 걸어보라 하십니다.

저도 만만치 않게 소심한 편이라, 바람잡이들에게 그런 말을 걸 자신은 없죠.

거기다 술 마시러 갈 것도 아니면서 업무에 지장을 주면 안 되니 그 제안은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뭔가 신기한 표정을 슬금슬금 걸어가고 있는 엄니입니다만

세상 여기저기를 다 둘러보셨기 때문에 이 정도는 그냥 슬쩍 보고 넘겨버리는 레벨에 도달하신건지

이미 구경은 다 하셨다는 듯 슈퍼에서 먹을거 좀 사가자고 하십니다.

 

물론 도톤보리에는 재미있는 슈퍼인 돈키호테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습니다. 사진 정면에 보이는 거대 관람차 건물이 돈키호테입니다.

 

 

 

도톤보리 들어가기 전에, 언제 봐도 놀라운 소비의 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담아봅니다.

오사카 사람들이 원래 좀 태평하고 거친 느낌이 있습니다만

묘하게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 들면서도, 여기서라면 한번쯤 타락해버려도 좋을 거라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소비와 향락의 거리인 이곳의 모습은 조화와 부조화가 묘하게 공존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엄니도 한참동안 조그마한 하천 양쪽으로 뻗은 끝없는 건물들을 바라보시더군요.

이곳 도톤보리는 일본이 현대화 되고 나서부터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400년 전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습니다.

 

처음엔 물자 수송 하천으로 개발되었지만 에도시대부터 이미 환락하고 유명했죠.

강가에 배 띄워놓거나 하천 옆 유곽에서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며 경치를 구경하는 곳이었습니다.

뭐랄까, 이 정도 되면 환락가에서도 역사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단순한 슈퍼는 아니고 상당수 제품의 품질이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일본 관광 루트에도 이 곳에 들어가는 코스가 포함되어 있을 만큼 독창성으로 넘치는 가게입니다.

 

엄니도 물건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서 좋아하시더군요. 중간에 아기 장난감은 없냐고 물어보셔서 난감했지만.

손자 장난감은 이런 곳에서 사지 않아도 얼마든지 있다고 설득한 후에 정상적인 구경이 이어졌습니다.

 

의외로 샤넬이라던가 루이 뷔통 같은 브랜드품 중고도 상태 좋게 전시되어 있고

보석류나 고가 시계도 많은 걸 보면, 역시 이곳은 외국인들이 워낙 많이 보다보니 상당히 특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네요.

이곳 돈키호테 만큼은 외국인 관광객이 먹여살리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맨 위에 주욱 내려오면서 일본어보다 한국어와 중국어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눈썰미 좋은 엄니께서도 '저기 저 아해들 우리하고 같은 비행기 탄 애들이다'라고 지적하실 정도로

다들 그 시간에 칸사이 공항에 도착해서는 생각하는 것이 전부 똑같았습니다.

 

지금 내가 한국에 있는건지 일본에 있는건지 헷갈릴 정도로 사방 천지에 한국인들 투성인데

부디 내일부터는 좀 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니와 함께하는 고로, 대충 다들 생각할만한 안정적인 루트를 짜 놓았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긴 했죠.

 

돈키호테는 곳곳에 피식 웃을만한 장치를 많이 마련해 놓은 곳인데

매 층마다 멋지게 그려놓은 캐릭터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저 화풍은 일본에서 꽤나 유명한 예술 장르(?)인데, 궁금하신 분은 '저연비 소녀 하이디'를 찾아보시길.

 

 

 

동키호테는 공산품 품질이 영 엉망이지만 그걸 감안하고 구매하는 그런 곳이고

어디서나 똑같은 물, 음료수, 술 같은 경우는 편의점에 비해 꽤나 싼 편입니다.

오사카의 호텔에서는 3박을 할 예정이라 물과 음료수 빵 등을 넉넉하게 사가지고 돌아갑니다.

 

도톤보리의 화려한 모습은 많이 봤으니 돌아갈 때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돌아가 봅니다.

엄니는 혼자서는 이런 길 못걷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어째 사진 찍고있는 저를 놔두고 혼자서 쑥쑥 전진하시더군요.

 

 

 

난바에서 도톤보리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상권은 그야말로 절제되지 않은 소시민의 거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북쪽의 우메다(梅田)는 좀 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소비가 주를 이루고 있는 편이구요.

 

도톤보리 주변의 이런 골목길은 물론 적당한 고급 요리점이나 숨겨진 맛집 등이 존재하는 곳이긴 합니다만

난바역 주변까지는 워낙 풍속업소가 많아서 사실 엄니와 함께 오손도손 걸어가기 좋은 곳은 아니죠.

하지만 다행이라고 할까, 대부분 엄니가 봐도 풍속업소라는 걸 눈치채기 어렵게 되어 있어서 별 문제는 없습니다.

 

호텔은 어차피 잠만 자고 나오는 곳이라 비싼 곳 필요없다고 말씀하셔서

시장통 주변의 조그만 비지니스 호텔을 선택했지만, 예전부터 제가 칭찬하던 슈퍼호텔이라서 서비스는 좋습니다.

2명 고객을 위해 2층침대가 구비된 슈퍼 룸을 선택했는데 역시 좁긴 좁네요.

사실 엄니하고 함께 간 것이라 자금도 넉넉하게 준비해 왔는데, 좀 더 좋은 호텔로 할까 여쭤봐도 돈아깝다고 하셔서.

 

전날 잠을 못 주무신 터라 많이 피곤하신듯 했습니다. 씻고나서 금새 주무시더군요.

저는 TV라도 좀 보고싶었지만 엄니 수면에 방해가 되니 조용히 2층 침대로 올라갔습니다.

2층 침대는 1층 침대의 절반 크기밖에 안되는 작은 사이즈라서 저는 발을 쭉 펴기도 힘들었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침대를 바꿀수는 없고, 오히려 저는 예전 자전거 여행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듯 해서 기분좋게 잘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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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간 렌즈가 35mm 와 70-300mm 라서, 중간화각이 조금 비어버리는 느낌이다.

망원렌즈를 사용하려니 전신 담기가 힘들어서 발품을 팔아 뒤쪽으로 물러나 찍는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사진 찍는 풍경이 좀 바뀐 듯 한데

컴팩트 카메라 갖고 다니는 사람은 물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상당수의 관광객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대부분 화각이 넓은지 사진 찍으려고 뒤로 물러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예전 사하라 사막 마라톤 당시엔 절대로 DSLR 급의 장비를 들고 달릴수가 없었으니

고르고 골라서 코닥의 이너줌 컴팩트 카메라를 들고 갔었는데, 내 실력에 비하면 훌륭한 사진을 남겨줬지만

그래도 역시 장비의 아쉬움은 있어서, 여행갈때는 어깨 부서지더라도 좋은 장비 갖고 다니려고 노력한다.

요즘엔 휴대폰 사진도 너무 잘나와서 딱히 카메라 갖고 다닐 필요가 없는걸까?

 

스마트폰을 가지고는 있는데, 그 녀석으로 사진 찍은건 열손가락으로 꼽아도 남는다.

스마트폰으로도 이 정도를 척척 찍어낸다면, 쓸데없이 크고 비싼 카메라 들고 다니는 꼴이 되니 걱정도 된다.

 

 

 

일본쪽 유머사이트에는, 2009년 진도 6 정도의 지진에 이녀석이 쓰러졌는데

혼자서 스윽 일어나더니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 서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밤에 관람객들이 없어지면 가슴의 해치가 열리면서 조종사가 나오는 모습도 봤다는 둥의 이야기도 있다.

 

물론 1:1 스케일의 로봇이라는 특징때문에 만들어진 소문일 뿐이지만

정해진 시간에 손이나 팔이나 머리가 살짝살짝이라도 움직이는 모습 보면

사실 이녀석은 겉모습만 아니라 실제로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병기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드는것도 사실.

 

여기까지는 그냥 뜬소문이지만, 2009년 당시 전시를 마치고 해체작업을 시작할 무렵에

머리부터 차례로 해체하다 보니 건담 애니메이션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라스트 슈팅' 장면이 재현되고 말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디테일에 신경쓰는 일본인 특성에 건담 매니아들이 집대성되어 만든 모형이다 보니

2009년 해체했다가 이번에 다시 세우면서도 나름 애니메이션의 설정에 들어맞는 이유를 만들어 냈다.

주인공 아무로가 이 건담 타고 활약하는 도중에, 그의 반사신경을 기체가 점점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관절부의 운동성을 높히는 마그넷 코팅이라는 신기술을 채용해서 업그레이드를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

이번에 새로 세워진 이 녀석은, 자세히 보면 2009년 버전과 비교해 팔다리의 관절부분이 미세하게 다르다고 한다.

고증에 대한 이런 집착이 때로는 관람객들에게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기도 한다.

 

 

 

건담 모형 옆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에 따라 화려한 치장을 한 다이바 시티의 단면이 보인다.

건담을 마음껏 즐긴 아이들은 이 빛으로 가득한 계단을 마구 오르내리면서 여운을 만끽하고 있다.

 

계단에 조명 설치하는것도 괜찮은 선택인데, 매끈한 벽면을 스크린 대용으로 사용해서 프로젝터로 글씨는 비추는 시도 역시 훌륭하다.

물리적인 공사를 요하는 것도 아니고, 묘한 조명과 어우러져서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준다.

옆에 초현실적인 크기의 건담도 서 있으니 더욱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도 들고.

 

 

 

건담이란게 일본에서는 국민적인 브랜드로 자리잡기도 했고

요 근래 들어 만화나 애니메이션 매니아들의 소비자 충성도가 상당한 장사가 된다는걸 실감한 기업들이

저 건담까페같은, 완벽한 매이나지향 프렌차이즈를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는게 요즘 현실이다.

 

일단 인구와 소비층이 두텁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라서, 한국의 경우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케이스지만

어쨌든 부럽긴 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프렌차이즈의 다양화는 선택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주니까.

 

어릴때는 프라모델에 빠져서 건담을 참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냥 전시된 프라모델 구경하면서 감탄정도 해 주는 레벨이라서

괜히 음료값 비싼 저런 까페에 들어갈 일은 별로 없다. 만약 건담 좋아하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과 함께 왔다면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들어가 봤겠지만.

 

그리고 자금이 간당간당한 지금 상황에서 자칫 들어갔다간 쓸데없는 기념품에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기도 하고.

건담까페 대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현수막에는 하로만(ハロまん)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하로' 라는건 건담에 나오는 마스코트적인 캐릭터로, 대강 이렇게 생긴 녀석이다. 애완동물같은 포지션.

'만'이라는 건 한국의 호빵과 같은 간식이라고 생각하면 되니, 하로만은 아마도 이 녀석 모양을 한 호빵을 의미하는 듯.

어릴적만큼의 애정이 있었다면 꼭 한번 사먹어 봤을법한 녀석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건담에 크게 흥미가 없다.

 

 

 

건담만 주구장창 담다 보니 아무래도 사진에서는 크기가 잘 실감나지 않을 듯 해서

죄송하지만 동의없이 한 커플의 뒷모습을 비교대상으로 담아버리고 말았다.

 

여행같은거 가면 특히 좀 더 용기를 발휘해서 사진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자세가 필요한데

이렇게 새가슴이어서야, 담고싶은 모습도 제대로 못 담는 사태가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인도같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사진 찍히는걸 너무 좋아해서 막 덤벼든다는데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도여행이 필요한 것일까.

 

이렇게 한바퀴 돌아가며 건담을 담고, 잠깐 카메라 꺼둔 채 눈으로 감상을 하고 있으니

아마도 좀 전에 열심히 기념사진 찍고 있었을 법한 젊은 여행객 무리가 나한테 다가온다.

맛폰으로 한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자유의 여신상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적당한 아시안 엑센트 영어로 물어보는데

1초 정도 되는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내 머리가 너무 많은 요소를 복합적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잠깐 말이 헛나가 버렸다.

 

외국사람이라면 그렇구나 착각할수도 있지만 왜 한국사람이 내가 한국사람이란걸 알아차리질 못하는가.

다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분위기좋은 커플이나 일행도 아니고, 시커먼 옷에 덜덜한 덩치에 눈매 사납게 혼자 카메라 잡아든 나를 골라서 물어보는가.

지금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걸 밝히게 되면 자신들의 착각에 대해 부끄럽고 미안해 할 것인가.

이 사람들의 착각을 너그러이 눈감아주려면 그들의 생각에 맞춰서 일본사람인 것처럼 반응을 보여줘야 예의에 맞는 것일까.

 

사실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고 해서 놀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내 머리를 휘젓는 탓에

적정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반사적으로 일본어가 입에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실 자전거 여행때부터 반드시 지키고 있는 사항인데, 일본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머릿속을 완전히 일본어 OS로 바꿔놓고 있다.

머릿속 생각도 한국어를 일본어로 변환하는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일본어로 나오도록 연습을 했고

그게 지금은 꽤나 익숙해 진 탓에, 일본서 술 마시고 한국에 전화 걸었을 때는 한참동안 한국말이 안나와서 고생하기도 했다.

 

그런 고로, 머릿속이 멀티태스킹으로 정신없을 때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본어가 나와버린 것.

건담에서 자유의 여신상까지는 바닷가쪽으로 쭈욱 일직선이었기 때문에 길을 잊을 염려는 결코 없었지만

내가 일본어로 대답하자,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한국인 일행은 'Can you speak English?' 라고 묻는다.

이제 한국어로 대답하는건 불가능. 지금와서 대답한다면 내가 젊은이들을 갖고 논거나 마찬가지가 되니까.

 

일본어로는 머릿속 생각도 돌릴 수 있을 정도지만, 일본사람처럼 영어 발음 하는건 한 번도 시도해 본적이 없어서

그냥 배운대로 말해줬는데, 일본사람치고는 발음이 좋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네들 발음이나 내 발음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그냥 쭉 가라고 말해주니 이번엔 레인보우 브릿지는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는다.

자유의 여신상 보이는 곳에서는 레인보우 브릿지도 보인다고 대답해주자 고맙다고 밝게 인사하며 멀어져간다.

 

결코 악의가 있어서라거나 장난끼 같은 감정은 전혀 없었지만, 이래도 되는 것일까 살짝 생각에 잠기게 해 준 여행길의 에피소드.

사실 여행가서 한국사람에게 한국어로 말하지 않게 된 것에는 아주 사소한 이유가 있기도 하다.

2008년 자전거 여행때, 페리를 타고 홋카이도에 발을 들여 삿포로 맥주 박물관으로 향했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징기스칸과 삿포로 생맥주 무한 뷔페였지만, 개장시간 전에 오는 바람에 남는 시간동안 맥주박물관 견학을 하기로.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데 아기를 안은 젊은 부부가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길래

여행 떠나고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라, 반가운 마음에 무심코 한국어로 '여행 오셨나봐요' 하고 말을 거니

마치 호러영화 사이코에 나오는 샤워실 마리온의 비명소리와 버금갈 정도로 '어머낫!!' 하고 깜짝 놀라길래 내가 더 놀랐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나 싶어서 걱정될 정도였는데, 물론 그쪽은 바로 웃으면서 '한국사람이신줄 몰랐어요' 하고 설명해 주긴 헀다.

 

하긴 살은 흑인 못지않게 탔고, 머리에 버프 뒤집어쓴채 다떨어진 넝마같은 옷 걸쳐입고 (훗날 알았지만 실제로 바짓가랑이가 걸레가 되어있었다)

혼자서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짐작하는게 힘들법도 하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내가 외국에서 한국사람한테 먼저 말 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먼저 걸지 않는다만.

 

 

 

건담을 실컷 구경했으니 이제 오다이바에는 별 볼일 없다.

레인보우 브릿지 야경이라도 한번 감상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지금 가면 방금전 그 한국사람들하고 또 마주칠까봐.

죄지은 건 아니지만, 두번 세번 만나서 친해지다가는 결국 한국사람인거 밝혀야 할것 같아서 부담된다.

참 쓸데없는 걱정도.

 

문득 생각해보니, 오늘은 낮에 아키바에서 물건 사고 일기쓴다고 KFC에서 샌드위치 하나 먹은것밖에 기억나지 않아서

내부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서 다이바 시티안으로 들어가 본다. 본인하고는 한참 인연이 없는 곳이지만

외국에까지 와서 그런지 이런 거대 쇼핑몰 모습도 나름 신기한 구경거리라고 자기암시를 걸지 못할것도 없어 보인다.

 

물론 아무리 외국이라고 해도 사람 붐벼터지는 대형 쇼핑몰에 들어가는건 나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이번엔 번듯한 이유가 있다. 뭐라도 배좀 채우고 싶었고, 지난번 의뢰받은 헬로키티 파우치를 여기서도 한번 찾아보기 위해서.

아키바 같은 곳은 전자제품이나 게임같은 매니아의 천국이지만 아무래도 헬로키티같은 샤방샤방한 아이템은 좀 드물다.

 

다행히도 1층 광장 주변이 푸드코트라서 가볍게 둘러보는데, 유명한 타코야키 체인점인 긴타코(銀たこ)가 있어서 그리로 갔다.

이 블로그 자주 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난번 오사카 킨키지방 여행때 급성 통풍의 습격을 받아서

타코야키 하나 못먹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뼈아픈 추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뭐라해도 타코야키를 먹어보려고 벼르고 있던 중이다.

괜히 이런데서는 용기가 솟아나서 직원에게 만들고 있는 모습 한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직원이 조금 망설이길래 아차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는데, 친절하게도 남들 모르게 한장 찍어가시라고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타코야키 다 먹고나서야 안 사실인데, 직원의 그 망설이는 태도는 긴타코의 제작과정이 비밀스러웠던게 아니라

다이바시티 전체가 원칙적으로는 카메라 촬영 금지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다들 휴대폰으로야 아무렇게나 찍고 다니지만

본인 카메라는 누구에게나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거대한 DSLR 이라서 직원이 당황했던 것. 세삼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다. 

 

 

 

 

긴타코는 창업 초기인 1990년대엔 정말 고급스러울 정도로 빼어난 맛이 특징이었는데

전국적인 체인점이 된 후로는 그냥 대충 골라도 기본은 간다는 믿음을 줄 정도의, 하지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릴 정도는 아닌 그런 가게가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것이, 개업 초기의 긴타코는 아시아 최대의 수산시장인 츠키지(築地)에서 매일새벽 직접 공수한 신선한 문어로 만드는 타코야키를 내세웠기 때문.

실제로 맛이 훌륭하기도 했거니와, 칸사이 지방 사람들의 프라이드라고 할 만한 간식인 타코야키를, 동쪽 지방에서도 맛있게 만들수 있다는 묘한 경쟁심리가 더해져

긴타코는 짧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타코야키 전문점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긴타코의 '긴'은 일본 최대의 번화가 긴자(銀座)의 '긴'으로, 창업시 목표가 긴자에 가게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 실제로 긴자에 본점이 있다.

 

지금은 항상 일정수준 이상의 타코야키를 제공한다는 정도로만 인식되는 녀석이라서

매니아들에게는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래도 추운 바깥에서 건담 찍느라 얼어버린 몸에는 타코야키가 제격이다.

한국에서 끝장나게 추운 날 포장마차에 서서 오뎅과 국물 한잔으로 행복의 절정을 느끼는 것처럼

일본도 추운날 간식으로 이 타코야키가 몇 순위 안에 들어간다. 물론 한국이나 일본이나 1위는 단연 오뎅이지만.

타코야키는 바삭바삭한 겉에 비해 속이 흐물흐물하고 매우 뜨겁기 때문에

겨울날 밖에서 이녀석을 씹어먹으면 속에서 퍼지는 어마어마한 입김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래서 붙여진 이미지일까.

 

배도 고프고 지난번 오사카에서 타코야키를 못 먹은 한도 있고 해서, 한알 한알 입에 집어넣을 때마다 행복감이 밀려온다.

누구나 그렇듯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코야키를 먹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콱 씹는 바람에

그 뜨겁기 그지없는 걸죽한 액체에 입천장을 완벽하게 태워먹었던 추억도 있지만

지금은 워낙 요령이 생겨서, 만든 즉시 내놓은 타코야키도 아무 문제없이 잘만 씹어먹는다.

 

먹으면서 항상 하는 생각인데, 일본은 미각에 까다로운, 혹은 까다로운 척 할뿐인 매니아들이 워낙 많아서

타코야키 역시 가이드북까지 만들어가며 어디가 맛있고 하면서 열을 올리곤 한다.

 

다들 날카로운 송곳으로 절묘하게 회전시키면서 만들어내는 이런 제작방식에 익숙하겠지만

이렇게 제품화 되기 전의 타코야키는 지금처럼 겉은 바삭 속은 흐물이 아니라 그냥 바삭하게 구워낸 문어구이였을 뿐이다.

재료와 도구를 갖추고, 어느 정도의 요령만 익히면 그렇게까지 만들기 어렵지 않은 B급 요리 혹은 간식이기 때문에

이녀석 가지고 미묘한 맛의 차이를 가린다느니, 눈돌아갈 정도의 황홀한 맛이라느니 하는 수식어는 좀 낯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물론 타코야키의 성지 오사카의 구석구석을 잘 뒤져보면, 정말 맛의 레벨이 틀린 가게가 몇군데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타코야키를 좋아하고 여러번 먹어본 사람에게나 통용될만한 이야기.

 

 

 

좀 비싸긴 했지만 만족스럽게 타코야키를 청소한 후, 헬로키티가 있을 법한 가게를 찾아서 다이바 시티 내부를 방황한다.

몇 군데 찾긴 했지만 역시 싼 것들은 너무 어린애틱하고, 비싼 건 아무리 못줘도 10만원은 넘는다.

부탁받은 3천엔 정도의 좀 덜 어린애틱한 파우치는 아무래도 찾을수가 없어서 의뢰인한테 문자로 연락을 넣어보니

그럼 그냥 사오지 않는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헬로키티 파우치는 물품 리스트에서 지워버렸다.

 

조금 피곤해진 몸을 이끌로 마지막으로 레인보우 브릿지의 야경 감상하러 걷기 시작한다.

후지TV 앞에는 상당히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주변을 둘러싼 은하수같은 행렬이 눈길을 잡는다.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레인보우 브릿지보다 이 녀석이 더 볼만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트리를 감싸고 있는 야광 필름에는, 아무래도 후지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들 사진을 모아놓은 듯.

 

 

 

해변가까지 거의 다 왔는데, 이곳에 올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고급 호텔들이 보여서 한 장 담아본다.

오다이바 내부의 호텔들은 두 곳으로 나뉘어 밀집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유람선 선착장과 함께 레인보우 브릿지를 바로 감상할 수 있는 이곳 다이바(台場)역 근처에는

4성급 호텔이 주를 이루며 꽤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5성급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스탠다드가 20~30만원쯤 하는 호텔이고, 좀 좋은 객실로 가면 200만원대를 넘는 곳도 있어서

가뜩이나 여행중 숙박업소에는 돈쓰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그림의 떡같은 곳.

 

이곳과 반대편, 그러니까 레인보우 브릿지가 보이지 않는 아리아케(有明)역에도 호텔이 많은데

그건 아시아 최대의 컨퍼런스 타워 빅 사이트 (Big Sight)가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각종 회의와 전시회가 1년내내 열리는 곳이라서

호텔도 관광 중심의 고급보다는 10만원 초중반대의 납득할만한 가격을 가진 녀석들이 많다. 물론 그래도 나한텐 비싸다.

 

 

 

레인보우 브릿지의 야경이 보이는 장소에 도착.

역시 이제까지의 도쿄여행중 가장 많은수의 DSLR과 삼각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일단은 35mm 단렌즈로 화각을 넓게 잡고 담아본다.

아무리 조명을 밝혔다고 해도 상당히 어두운 곳이라서 삼각대 없는 촬영은 실패 확률이 높다.

 

원거리 야경이다보니 조리개를 마냥 개방할수도 없고 해서, 이 정도가 손으로 담을 수 있는 한계가 아닌가 싶다.

물론 RAW 촬영이다보니 노출 조절의 범위가 커서 어렵지 않게 되살릴 수 있었지만, 이 경우는 최대한 덜 떨리는 사진을 담는게 관건.

F1.4 의 단렌즈로 이 정도지, 70-300mm 의 어두운 줌렌즈를 손으로 들고 촬영하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려면 감도를 12800 까지 올려야 하는데, 그건 니콘이나 캐논의 플래그쉽 D4, 1DX 정도가 아니면 힘들다.

 

 

 

물론 손으로 들고 찍는 야경사진이란 건 결국 감도를 올릴 수 밖에 없고

본인 노이즈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라서, 사실 마음가는대로 감도를 올려도 아예 못봐줄 사진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감도를 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는건, 아무래도 위화감 때문일까.

필름 써 본 사람들은 아마도 나처럼 '감도 1600, 3200 정도는 껌처럼 여기는' 지금의 디지털 센서들에 이런 위화감을 느낄거라 생각한다.

해상력을 유지한다는 전제를 달때, 필름은 많이 봐줘도 400 정도가 한계다. 800 이상의 필름은 해상력과는 다른 표현을 위해 사용하니까.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감도가 400 정도라고 한다면, 증감 현상을 통해서 1600 정도까지는 뻥튀기를 할 수 있다.

이제는 증감 해주는 가게도 별로 없고, 이건 요즘 디지털 사용자들이 알 필요가 없는 내용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아무튼, 그런 의미로 본인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감도는 최대 1600 정도, 많이 봐줘도 3200 까지다.

그래서 요즘 6400 까지도 잘만 찍어대는 디지털 센서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3200 이상은 손이 가질 않는다.

 

이렇게만 보면 영락없는 삼각대 사용자인것 같지만, 사진보다 여행이 중요한 본인에게 삼각대는 너무나 먼 존재.

 

 

 

 

 

손으로 들고 찍어봤으니 이제는 여행중 몸에 익은 스킬인 '적당한 삼각대 대용 찾아보기'를 시도해 본다.

자전거 여행중에 DSLR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인데, 삼각대까지 넣고 다닌다는건 좀 미친 짓이다.

그렇다고 어두워지고나서 아예 사진을 안찍을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방법을 짜내다 보니 대강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요는 카메라를 얹어놓을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것.

다행히도 적당히 평평한 난간이 있어서 카메라를 얹어놓는다.

그리고는 렌즈때문에 앞으로 넘어지는걸 방지하기 위해 수첩이나 지갑 등을 바디와 렌즈 사이에 끼운다.

높이 조절을 위해서는 지갑 내용물을 다 비워야 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수고야 삼각대 들고다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 수평이 맞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중에 크롭해서 수평을 맞출 수 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삼각대에 비해 극단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촬영중 손으로 잡고 있어도 안된다. 손의 떨림에도 금새 결과물에 영향이 나타나기 때문.

당연하게도 셔터 누를때의 진동 역시 감지될 정도로 불안불안한 지지대라서 타이머 기능은 필수.

 

삼각대 촬영의 꽃인 벌브촬영은 불가능하다. 바람만 불어도 결과물이 흔들릴 정도니까 많이 버텨도 30초 정도.

그렇게 해서 찍은 30초 노출 사진이 위의 결과물이다.

 

저 위의 야경사진은 감도 3200 에 1/30초 촬영이고, 이 장노출 사진은 감도 100에 30초 노출시킨 녀석.

사실 원본크기로 봐야 감도에 따른 해상력의 감소 같은걸 느낄 수 있지, 이런 작은 사진으로는 그런거 구별하기 힘들다.

눈에띄게 차이나는건 역시 노출시간의 변화에 따른 해수면의 모습이랄까.

고정된 빛은 노출값만 동일하면 어차피 똑같은 모습이지만, 항상 출렁이는 바다 표면의 경우엔 단노출과 장노출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든든한 삼각대와 ND 필터를 이용한 극단적인 벌브촬영이라면 그 결과는 더욱 극대화되어, 그럴 경우의 바다는 마치 안개속에 파묻힌 듯한 몽환적인 모습이 된다.

 

물론 알고는 있고, 지인거 빌려서 찍어보기도 했지만 본인은 삼각대를 쓸 일이 정말로 드물기 때문에

그냥 그런 멋진 사진은 그렇게 나오는구나 감탄만 하고 말 뿐이다.

여행 사진은 어디까지나 여행 당시의 내 시선과 감각을 따라가는 이정표일 뿐이지, 황홀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현실과 점점 동떨어져가는 야경 장노출 사진을 별로 찍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거의 반 장난 형식으로 사진을 담고 있다.

그때는 정말 장난치는 기분이었으니까 여행의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을 듯.

 

적당한 삼각대 대용을 찾았으니 이제는 좀 전까지 찍지 못한 어두운 망원 줌렌즈로 야경을 담아보려 한다.

삼각대는 렌즈의 조리개값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아이템이니까.

 

낮에는 고층빌딩에 가려서 힘을 쓰지 못하던 도쿄타워도, 밤이 되니 온몸에 빛의 은총을 받아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레인보우 브릿지에 가리는 형국이라서, 높은 곳에서라면 다리와 타워를 동시에 간섭없이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역시 해변가 4성급 호텔의 수백만원짜리 객실이 필요한가 싶어서, 역시 세상은 돈이구나 하고 한숨 한번 쉬어본다.

 

 

 

야경을 담은 후엔 다시 유리카모메를 타고 시오도메 역으로 돌아왔다.

오다이바는 관광객들만 가서 노는곳이 아니고, 제대로 된 주거시설과 수많은 회사들이 들어서 있는 상업지구라서

출퇴근 시간의 유리카모메는 만만히 볼 녀석이 아니다. 앉을 자리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꽉꽉 눌려가며 갈 정도는 아니었다.

 

날씨가 매우 매서워지고 있지만 길을 빙 둘러서 다시 한번 지브리의 거대한 시계탑 앞으로 걸어왔다.

대낮 사진도 찍었으니 밤 사진도 한번 찍어볼까 싶어서.

 

특별히 유명한 관광 스팟이 아니지만, 역시 지브리의 디자인은 둥글둥글하고 온화한 느낌이라서 기분이 좋다.

특정 장소의 조명이 유난히 밝은것을 보니, 아무래도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는 인형들이 나오는 곳인가 보다.

 

 

 

시계의 조명 역시, LED를 직접 밖으로 내놓지 않고 숫자 뒤를 비추는 식으로 표현한게 마음에 든다.

디자인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도쿄에서 이 녀석 감상해 보는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에 잘 안드러나서 그렇지 상당히 큰 녀석이라서, 작정하고 세부적으로 사진을 담으면

굉장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뜯어볼 수 있다. 솔직히 질감이 참 마음에 들어서 직접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동판을 직접 망치로 두들겨서 이어붙인 녀석이라고 하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 지나친 샤프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와 비슷한 느낌일까.

아쉽지만 두 번의 시도 전부, 인형들이 움직이는 시간대와는 많이 떨어진 때에 도착하는 바람에

이녀석들의 공연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시오도메에서는 지하철로 숙소 근처까지 바로 갈 수 있으니, 넓직하게 조성된 통로를 걷는다.

예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도쿄의 비즈니스 중심단지에 속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에는, 그 인파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가 될 정도로 이 광장같은 통로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다.

 

남아공에서 너무 느긋하게 생활하던 모 지인 여성은, 한국 와서 그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력에 굉장히 감동했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이라면 출근시간대의 이곳 모습도 한번 소개해주고 싶다. 도시라는 짐승의 혈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소.

 

 

 

지하철 쪽으로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길래 뭔가 싶었다.

카렛타 시오도메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취급하는 장르는 좀 다르지만 테크노마트 같은 구조의 복합단지라고 할까.

47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의 지하와 지상 몇층, 그리고 최상층 몇군데는 각종 쇼핑거리와 까페가 들어서 있지만

중간의 40여층은 그냥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비즈니스 센터다. 이런 구조의 건물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하고는 일고의 인연도 없는 곳이라서 한 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었는데, 그 카렛타 정문 상태가 심상치 않다.

이게 뭔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입구쪽 벽면 전체에 프로젝터용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를 상영하듯이 동영상을 재생중이었다.

아마 앞쪽에 프로젝터 장비가 있을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인파가 가득해서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기술적으로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만큼 큰 벽면에 이렇게 선명한 화질을 뿌려내는 모습은 좀 놀랍다.

 

기술적인 쪽으로 관심이 살짝 가긴 했는데, 이럴때는 그냥 어린애처럼 이론같은거 다 잊어버리고

앞에서 펼쳐지는 뮤지컬같은 분위기에 취하는게 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집중하기로 했다.

 

 

 

춤과 노래가 이어지는 전형적인 뮤지컬 방식인데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거리는 멀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신데렐라가 아닌가 싶다.

영사 방식이나 작품 내용이나 묘하게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드는게 오히려 마음에 든다.

요즘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상매체는 좀 지나치게 디지털을 강조하는 듯 해서 좀 식상하던 참이라.

 

5분쯤 감상하고 있는데 10명쯤 되어보이는 일행이 사진좀 찍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 온다.

예순은 되어보이는 부부와 좀 더 젊은 부부, 아무래도 친구 가족들과 함께 놀러나온듯 싶다.

설정을 이리저리 만지고 건네주는 카메라는 리코의 컴팩트 카메라. 적어도 카메라에 어느 정도 관심은 있는 분인가 보다.

 

한국에서는 그닥 인지도 없지만, 컴팩트 카메라계의 리코는 상급자 지향의 고급기로 정평이 난 회사.

카메라는 그냥 장난으로 만들고, 원래는 일본 유수의 광학회사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유명한 신도리코의 '리코'가 그 '리코'다.

한국에서 오히려 훨씬 인지도가 높은 카메라 브랜드 펜탁스를 이 회사가 인수해버려서, 이제는 리코 산하의 펜탁스 카메라가 될 정도니까.

 

뒤의 저 벽면이 나오도록 찍어달라고 해서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해서 낮은 각도로 프레임을 만들어본다.

오토모드니까 역광보정 정도는 카메라가 알아서 할거라고 믿고 흔들림에만 주의해서 셔터를 누른다.

한장 담고나서 예비용으로 한장 더 찍어드린다. 이건 남에게 사진 찍어줄 때의 불문율같은 것.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는 할아버지 일행과 헤어졌는데, 왠지 미소가 아주 자연스럽고 기분좋은 사람이었다는 인상이 남는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지만, 그 할아버지 역시 나를 외국인으로 보진 않았나보나 싶다.

반나절만에 두 번이라는 숫자는 나름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이긴 하다.

 

편의점에서 컵라멘과 뼈없는 후라이드 치킨 한조각 사들고 와서 먹는데 생각보다 훨씬 남은 자금이 빠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여행자금으로 생각한다면 내일 하루 충분히 버티고도 남는 금액이지만

부탁받은 선물이 중간중간 급작스럽게 늘어난 탓도 있고, 특히 돌아가는 날이 아주 이른 새벽이라

콜택시를 사용할 수 밖에 없어서, 거기에 대비해 일정 이상의 금액을 남겨놔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내일 식사비조차 아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일단 그건 그거고, 어쨌든 굶어죽을일은 없으니 걱정은 내일부터 하기로 한다.

라멘과 치킨을 뜯으며 TV 보고, 한국보다는 확실히 추운 일본 숙소덕에 좀처럼 가동하지 않는 히터 스위치도 넣으며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집이 대구시내에 그리 멀지않은 곳이라
심야영화를 보고나면 한적해진 길을 따라 걸어서 집에 옵니다.
걸어서 30분이면 되는 거리를 택시타고 할증까지 내면
짧은 거리를 가는 기사도 기분나쁘고 저도 지갑이 다이어트해서 기분이 나쁘니까요.

그 이유가 아니라도 집까지 오는 길엔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이 불을 밝히고 있어서
충분히 즐기며 걸어올 수 있습니다.


원래 밑에서 위로 쬐이는 자연광이 없는 관계로
밤에 이런 모습을 보면 굉장히 신기하게 보이죠.
꼭 현실세계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나무들도 밤에 잠은 자야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녹색 조명을 받아서 평소보다 훨씬 녹색같은 식물 사이로
아직 붉은색 잎이 보이더군요. 이렇게 대비가 강한 녀석은 사진으로 남기기 좋습니다.


필받아서 붉은 열매와도 함께.

제가 쓰는 구박이가 고감도 노이즈 쥐약인 녀석이라지만 어지간한 밤이라도 적당히 노하우만 있으면 이정도는 찍습니다.
곧 출시되는 어도브 라이트룸 3.0 에서는 엄청난 성능의 노이즈제거 기술이 탑재되니
이제 더이상 구박이에겐 모여라 측거점 이외엔 약점이 없어질듯.

카메라 관련 이야기는 못알아들으시는 분이 많으니 이정도로 패스. (할말은 다하고... ㅡㅡ;)


2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인데도 공원에서는 스케이트보드 연습하는 어린 여자사람분이 있네요.
제가 위협이 될까봐 스르륵 빠져나왔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본 후 어두운 길을 걸으면 봤던 영화 되새김질하는데도 좋더군요.


전등의 빛을 나무가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입니다.
밤거리도 의외로 사진 찍을게 많아요.

다리 근처나 높은 건물위에서 삼각대 세워놓고 찍는 야경도 멋지지만
이런 스냅도 평소와는 다른 결과물을 보여주니 찍는 맛이 납니다.
손떨림방지 기능덕분에 덜 흔들리고 찍을수도 있고.


봄에 빨리 반응하는 녀석들은 벌써 지기 시작하는데
아직 기지개도 안 편 녀석들이 있으니
식물 세상도 사람사는 곳처럼 개성이 중요한가 봅니다.


신천 주변은 지금 희고 노란 꽃들로 가득 덮혀있죠.
오래가진 않겠지만 낮엔 그 화려함을 마음껏 담기엔 내공이 부족해서
이렇게 밤에 피어있는 꽃들을 소박하게 찍는게 더 마음에 듭니다.

벛꽃은 왠지 밤이 어울리는 듯한 느낌.
야시장과 축제 때문에 그런가... ^^;


아파트에 돌아오니 어디론가 밤놀이 하러 나가버린 소화기의 흔적만이 덩그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