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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야'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01.05  과거로의 여행 - 나고야의 사치 & 향락 6
  2. 2013.08.24  과거로의 여행 - 토요타 박물관 7편 8

 

 

새벽부터 어렴풋이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오긴 했는데 해가 뜨고 나서 보이는 창밖 풍경은 역동적이기 그지없다.

키소에서 돌아오고 난 후 살짝 우울한 채 잠이 들었다.

탄산 기포가 터지는 소리처럼 지면을 때려대고 있는 바깥 풍경이 오히려 위안을 주는 느낌이다.

내일 귀국이고, 오늘은 여행 전부터 아무런 예정도 넣지 않았다. 그냥 하루를 멍하니 보내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키소에서의 추억은 인생의 큰 획을 긋는 크고 명확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추억 되짚기를 하고 난 후의 반동 역시, 즐거운 해외여행과는 아귀가 살짝 어긋날 수 밖에 없다.

이런 기분에 콘크리트 숲인 나고야 시내로 돌아와 맞이하는 첫 아침이 화창한 푸른 하늘이었다면

오히려 할 일이 없도록 해 놓은 여행의 하루가 너무 눈부셔 보여 한층 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어 줬을 터였으니까.

 

밖에 나가고픈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건물의 경계와 하늘 사이를 미묘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볼 만한 풍경이 된다.

비와 물체가 부딪히는 모습보다는 하늘에서 총알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의 모습이 더욱 훌륭하다.

아주 강렬한 폭우가 대낮에 쏟아내려야 시야에 담을 수 있는 빗줄기라서 희소성도 있고.

 

 

 

지금 가진 카메라 장비로는 그런 풍경을 담을 수 없다.

애초에 내 실력으로 그 모습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지면의 실루엣에 들어가기 전의 묘한 컨트라스트, 정지해 있지 않음에도 장노출로는 담을 수 없는 동적인 빗줄기는

제대로 된 비디오 카메라가 아닌 이상, 두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를 정적인 사진으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다.

 

대충 이렇게 비가 신나게 왔다는 증거품으로 몇 장 남기긴 했지만

사진에 담기는 노이즈 낀 듯한 결과물 보다는 기분이 좋았다는 기억도 되살아난다.

 

한여름이라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아침에 이렇게 내려봤자 별로 겁나지는 않는다.

단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니 어디로든 쏘다니기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약간 희석시켜주는 효과는 있다.

천천히 호텔 조식을 먹고 돌아와 모닝 TV를 보면서 대충 오늘 할 일을 생각해 본다.

 

나고야 역까지 투숙자들을 배달해 주는 무료 셔틀버스는 10시 30분까지 운행하기 때문에

아무리 비로 인해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그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내 섬세한 마인드와 별개로 돈은 아껴야 하니까.

마지막 날이고 하니 부탁받은 물건들 좀 사는 겸, 서점에서 건질만한 책 좀 찾아보는 일은 필수 코스나 다름없다.

일단 쇼핑 물건을 호텔에 놔 두고 저녁즈음 다시 나가볼까 싶다. 오늘은 남는게 시간밖에 없으니까.

 

확정하진 않았지만, 나고야에서 시간이 남으면 당시 상영중이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불다'를 볼까 생각중이었다.

한국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작품이었고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을 모를리 없으면서도 무리하게 실제 역사를 고집한 미야자키의 의도가 궁금했으니까.

 

역사적 고증에 따라 작품 감상의 관점에 민감한 성격이기 때문에

한국의 언론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포인트가 실제로 작품 속에서 내 신경을 긁는다면

미야자키가 나이 헛처먹었구나 하고 미련없이 기억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미야자키는 아무래도 그런 단순한 미화에 치우칠 리가 없다는 사전 경험 때문에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 되려 한번은 꼭 봐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극장 가격이 그리 낮은 편이 아니라 여행중의 소비치고는 좀 사치스러운 면이 있는 탓에

보러 갈 것인지 말지의 판단은 아침까지도 내려지지 않고, 일단 쇼핑을 끝낸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한다.

 

 

 

폭우는 슬슬 그쳐가지만 10분의 짧은 간격 사이에도 확 내렸다가 부슬부슬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호텔 프론트에서 우산 하나 빌려서 갖고 나간다. 필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우산 하나만으로 굉장히 불편해지는 감각이다.

몸에 닿는 모든 소지품을 몸의 일부분처럼 상비하고 다니는 여행 중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할 일이 없는 우산이고

싸구려이긴 해도 일단 빌린 물건이다 보니 익숙해 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심코 버려두고 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때문에 더욱 귀찮아진다.

 

편안하게 나고야 역에 도착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공짜의 마력이란 이런 것인지, 무료 셔틀버스는 탈 때마다 이득본 기분이다.

 

날씨가 어떻든 나고야 역은 항상 사람으로 붐빈다.

중심가가 역 주변에서 점점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 한국의 대도시와는 달리

일본은 대도시간 거리를 자동차로 커버하기 힘들기 때문에 철도의 비중이 한국보다 훨씬 높고

그런 점에서 대도시의 중앙역 주변은 굉장한 밀집지역으로 악명이 높다.

 

나고야는 오사카와 도쿄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도시로, 대놓고 막나가진 않아도 향략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출근시간이 넘어서 그나마 좀 한산해진 역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넘어가 본다.

나고야 역은 정문 쪽과 반대편 쪽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데

정문에서는 주욱 걸어나가기만 하면 여행 가이드에 실려있는 모든 유명 장소를 다 둘러볼 수 있는 '정석적' 코스가 보이고

후문으로 나가면 관광하고는 별 관계없는 낡은 비즈니스 호텔과 낡아빠진 상가, 어른들만의 공간 등등이 좁은 골목골목에 포진해 있다.

 

연휴 기간이 끝난 우중충한 날씨의 대도시 골목길은 관광이라는 단어와 동떨어진 기분을 주기에 충분한데

나이 지긋한 노인네들이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모습과, 작업복을 허리에 둘러매고 원을 이뤄 길거리에 나앉아 술 마시는 노동자들의 모습 등

서울역 뒷골목에서 볼 법한 모습이 한적하게 펼쳐지고 있다. 아마 홀로 여성 여행자라면 은근히 다른 길로 나가버리고 싶은 느낌이 들 듯.

 

밤이 되어야 활기가 돌아오는 곳이다 보니 오전의 역 뒷골목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아침부터 28도를 넘어가서 덥기는 무지하게 덥고.

이곳 뒷쪽 어딘가에 친구가 부탁한 게임, 애니메이션, 코믹스 등등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어서 찾아온 것인데

오타쿠들에게 10시 30분이란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개점 시간이 11시라서 아직 문도 열지 않고 있다.

30분만 기다리면 첫 손님으로 혼잡하지 않은 가게 안을 마음껏 탐방할 수 있어서 좋긴 한데

키소의 상쾌한 공기에 익숙해진 내 몸은 진득진득한 더위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

이곳에서 30분 동안 서 있는 것은 극기훈련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고야 역까지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니 역으로 돌아가서 적당히 까페 하나 찾아 들어간다.

일본도 절전운동이 활발하긴 하지만, 까페처럼 공간을 제공하는 서비스업에서는 훨씬 융통성이 있다.

밖에 나가기가 싫어지는 쾌적한 온도와 커피 향기가 나의 대퇴근섬유를 마비시켜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든다.

양복 입은 젊은이들, 양복 입은 늙은이들, 세련된 옷을 걸친 아가씨들이 아침부터 뭐하는지 많이들 앉아있는데

회사 직원임에 분명한 수트맨들은 대체 왜 이 시간에 까페에 들어와 있는건지 모르겠다.

 

커피를 홀짝이며 메모장을 꺼내 일기를 쓴다. 남는게 시간밖에 없어서 그런지 글도 여유있게 써지는 느낌.

일반적으로 8일간의 해외여행이라면 짧다고 할 만한 길이는 아니지만, 본인에게는 그냥 잠깐 한숨 돌리고 오는 정도라

귀국 시간이 돌아오면 슬슬 아쉬움이 밀려오는게 일상적인 흐름이었는데

왠지 오늘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으니 '이번 여행은 이걸로 됐다'라는 기분이 든다.

끝내도 좋은 여행이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의외로 좋은 느낌이다. 아쉬움 보다는 만족감이 우선하니까.

 

 

 

11시 30분에 카페를 나와 오덕가게인 멜론 북스에 들어간다.

평일 낮의 쇼핑을 즐길 수 있는 특권 탓에 사람도 적어서 느긋하게 책 구경하고 부탁받은 물건도 살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발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책이나, 한국에서 발매했지만 그 전에 이미 원서를 사 버린 시리즈물 등등

눈에 불을 켜고 쇼핑을 즐기고, 그 와중에 구입하기는 망설여지지만 가게에서 서서 읽어볼 만한 책들은 탐독하다 보니

3시간 정도가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 카메라를 든 가방이 슬슬 무겁게 느껴질 즈음이 되고 나서야 계산대로 이동.

 

돈을 좀 느긋하게 갖고 온 여행이라 귀국 하루를 남겨 둔 지금도 1/3 정도의 자금이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귀국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인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마구 책을 쓸어담았다.

친구에게 부탁받은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근 12만원 정도 책 사는데 사용한 듯.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원서를 많이 보는 입장상 여유 자금이 있을때 쓸어오지 않으면 훨씬 더 후회할 테니까.

 

책 구경이 꽤나 지치는 일이라 약간 피곤한 몸과 뻐근한 눈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니 세상이 달라져 있다.

아침까지 쏟아붓던 비는 말할것도 없고, 모노크롬의 하늘마저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공간엔

맨눈으로 바라보기에도 힘든 강렬한 푸른색이 도시 이곳저곳에 색깔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덥기는 매한가지라도 하늘이 이만큼 빛나고 있으면 기분도 밝아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가방이 책으로 가득 차서 카메라는 이미 어깨에 걸어두고 다닌다. 허기가 진 건 아니지만 왠지 음식과 함께 자리에 앉아 쉬고싶은 기분이 든다.

 

 

 

마지막 날이라 거하게 한번 먹어볼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건 저녁식사때의 일이라

적당히 싸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선택은 별 후회없는 요시노야가 제격이다.

 

식욕이라는 의미보다 그냥 규동을 한번 먹어두고 싶다는 마음으로 갈 때는 저렴한 규동 한그릇으로 해결을 보지만

지금은 자리에 앉아 얼음물 한잔 들이키니 순간적이지만 천국을 체험할 정도로 상쾌한 기분인 것으로 보아

좀 더 풍요로운 메뉴를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듯 하다. 규동에 비하면 비싼 편인 580엔 짜리 카레 규동을 주문한다.

 

카레가 아주 맛있는 편은 아니지만, 규동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때 이 녀석을 먹으면 한국인이라도 나름 배가 든든해 진다.

카메라 좀 진한 편이기 때문에 규동과 카레의 남은 양을 잘 조절해 가며 먹는 편이 좋다.

너무 한 쪽에 집중해 버리면 혀가 마비되어 규동의 고소한 맛을 느끼기 힘들어 지니까.

 

점심시간이긴 해도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다. 자리가 널널하니 사진도 찍고 일기도 쓰고 하면서

에어콘 바람을 좀 더 즐겨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일본에서는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후다닥 먹고 나오는 것이 제일 싫다.

 

만족감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온다. 무료 셔틀버스는 오후 5시부터 운행을 재개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

아무리 공짜를 좋아한다고 해도 34도의 폭염 속에서 할 일도 없이 무거운 책뭉치를 지고 도심지를 떠돌아 다닐 수는 없으니까.

방으로 올라와서 어깨의 짐을 내려놓자 홀로 여행중 항상 쥐고 있던 가벼운 긴장이 풀린다.

바닥에 땀이 똑똑 떨어지는 걸로 봐서 확실히 짐 들고 돌아다닐 만한 날씨가 아니긴 하다. 카메라만큼은 어쩔 수 없어도.

그래도 에어콘 틀어놓고 전리품들을 꺼내서 다시 정리하는 일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기분좋은 일이다.

종류, 크기별로 구겨지지 않게 책을 정리해서 베낭에 넣고 있는데 세삼스럽게 키소에서의 하루가 마음을 움직인다.

 

이번 여행엔 52L 짜리 대형 베낭을 들고 왔는데, 본인이 사용할 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키소 사람들에게 줄 선물 부피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소에서 나고야로 돌아오는 오늘 같은 날부터는 베낭이 매우 널널해 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맨손으로 나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은 못 보내겠다는 듯이, 소야노 씨 가족부터 해서 카미무라 씨와 소바집 사장님까지 전부 선물을 들고 와 나에게 건내주셨다.

덕분에 텅텅 빌 것이라 생각한 내 베낭은 올 때와 다름없이 빠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책은 부피가 적어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이라, 이래가지고는 분명 내일 귀국시에 추가금을 내야 할 듯 하다.

저가항공이기 때문에 규정 무게를 조금만 넘어가도 칼같이 추가 요금을 받는다. 그래도 키소 마을의 선물이니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한다.

 

 

 

5시가 넘어 셔틀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로비로 내려가 직원에게 근처 극장이 어디 있는지 물어본다.

우연의 일치인지 나고야 역 바로 앞 빌딩에 극장이 있다고 하니 망설임없이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나고야 역으로.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역 주변은 평소대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파도처럼 일정한 진폭으로 횡단보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극장이 있다는 건물은 단순한 극장도 아니고,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갖춘 백화점도 아니다.

상당히 비싼 고급 요리점과 층마다 위치한 회사 사무실 등등 비지니스와 서비스업이 묘하게 혼합된 빌딩이다.

젊은이들 왁자지껄하게 노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엘리베이터 타고 극장층으로 이동하는데 묘하게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극장 앞에 가니 '바람 불다'는 6시 15분 상영이라 조금 난감하다.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점도 그렇고

상영 후에는 저녁을 제대로 먹을만한 시간이 좀 아슬아슬하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일본에서의 극장 관람은 역시 돈이 좀 아깝기도 하고 해서, 10분 쯤 고민하다가 그냥 다음에 기회되는대로 보기로 하고 돌아선다.

대신 극장 관람을 포기한 분 만큼의 자금과 시간은 최후의 만찬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기로 한다.

 

다시 나고야 역으로 돌아가 고층으로 올라간다. 나고야 역은 그 자체가 거대한 쇼핑몰 구조를 하고 있어서

여행이 아니라 쇼핑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역 안에서 거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

서울역처럼 역사 내부 음식점들이 비싸기만 비싸고 맛은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고

비싸긴 비싸지만 비싼 값은 하는 그런 가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일단 '호기'를 부려보고 싶은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장소.

 

나고야는 여러 번 와 봤지만 자전거 여행 당시 나고야에서 먹은 가장 비싼 외식이라고 해 봤자 500엔 정도 하는 전골 정도였기에

역 위의 음식점들이 무엇을 팔고 어떤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물론 일본 물가에 대한 상식 정도는 알고 있는 본인 경험상 지갑속에 든 소지금이 결코 모자라는 일은 없을거라 확신하고 있고

만에 하나 소지금보다도 요금이 높을 경우엔 비상수단으로 신용카드를 쓸 수 있으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먹을거리를 찾아 본다.

 

어느 매장에 들어가도 후회할 일은 없어보이지만, 결국 여행 마지막 날 선택한 식사는 초밥이다.

그것도 싸구려 회전초밥이 아니라 제대로 된 회전 초밥집. 비상 사태를 대비해 신용카드 사용 가능 여부까지 물어본 후 입장한다.

회전초밥이란 원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저가 경쟁의 일환으로 탄생된 구조라서, 고급 회전초밥집이 무슨 의미인가 싶은데

이곳은 레일 위를 완성된 초밥들이 돌아가고 있는 상태에서 손님들이 집어가는 일반적인 구조가 아니라

모든 초밥이 터치패드를 통해 주문 받은 후, 주문한 사람에게만 자동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즉석 초밥집이다.

'회전'이라는 요소를 순수하게 가게의 규모를 확장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하고, 초밥의 질은 떨어트리지 않은 하이브리드 방식.

 

가족 단위의 손님이나, 정장 갖춰입고 비지니스식 접대를 즐기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혼자 자리 잡으니 약간 긴장도 되지만

테이블 사이의 간격이 꽤나 떨어져 있고 간이 칸막이까지 착실히 갖춰져 있어서 사진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다.

 

 

 

터치패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잘 눌리지 않는 단점이 있지만 어쨌든 주문하기는 어렵지 않다.

종업원이 와서 간단한 설명은 해 주고 가는데다가, 외국인이라면 영어로 메뉴를 전환하는 항목도 있어서 문제 없다.

하지만 이럴 경우 본인처럼 일어만 잘 하는 사람 입장에서 좀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생선 이름은 전부 다 꿰고 있느게 아니다 보니 사진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데다가

영어로 바꿔봤자 내가 영어로 생선 이름을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본 한 접시에 300엔이 넘고, 고급 초밥은 600엔도 넘어가는 초밥집이라

괜히 전투 직전의 병사처럼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돈 신경 안쓰고 식사를 즐기리라 다짐하고 버튼을 누른다.

초밥이 레일을 타고 돌아와서 정확히 내 테이블 쪽으로 쪼르르 밀려 들어온다.

접시가 내 앞에서 멈추면 그 사이에 내가 집어들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테이블 앞으로 이동하는 것까지 완전한 자동.

외식 문화란 역시 자금의 차이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중요한 초밥 맛을 느껴본다.

 

나고야 역에 존재하는 어떤 초밥집도 새벽 수산물 직판시장 앞에서 장사하는 초밥집에 비할 수는 없다.

초밥은 재료의 신선함이 맛의 80~90%를 좌우하는 극단적인 요리라서, 산지에서 떨어진 초밥집은 일단 가격대 성능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점을 제외하고서는, 이 가게의 초밥은 100~300엔 짜리 초밥이 레일 위를 굴러다니는 일반 회전초밥집과 비교할 건덕지가 없는 훌륭한 맛이다.

 

 

 

주문을 한 접시씩 할 필요도 없어서, 한꺼번에 3~4 접시를 주문하면 같은 종류별로 나눠서 도착한다.

밥의 끈기와 온도, 초대리의 배합 역시 교과서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며

생선 쪽은 부위 선정을 칼같이 지키고 있다. 맛이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발라내는 것은 초밥 요리사의 양심이기도 하고.

 

겉을 살짝 구운 다랑어 타타키(たたき)도 재료의 상태나 구운 정도 등, 가격대 이외의 모든 부분에서 상급이라 할 만 하다.

이러한 초밥을 수산시장 근처에서는 반값 정도에 먹을 수 있다는 게 항상 마음에 걸리는 일이지만

이곳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식사 환경과 아름다운 인테리어, 최상급의 접대 매너를 함께 즐기는 외식이란 것도 나름 중요한 점이라 본다.

 

애초에 나고야의 마지막 밤만큼은 이렇게 사치와 향락에 젖어 보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왠지 신분 상승한 듯한 기분으로 우아하게 맛을 음미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먹는거 가리질 않다보니 150엔 짜리 편의점 도시락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초밥 두 점에 편의점 도시락 2개 가격이 확확 날아가는 식사를 하고 있으니 색다른 스릴과 된장남의 자뻑기분을 조금이나마 대리체험할 수 있는 듯 하다.

 

 

 

사실은 초밥에 대해서만은 그나마 조금 민감함 편이라 더욱 기쁜 탓도 있다.

일본의 저가 회전초밥집 정도라면 감탄 막 하면서 먹을 정도는 아니고, 그냥 맛있구나 하는 수준으로 만족할 수 있는데

한국의 상당한 대다수 초밥집은 그 정도 만족감 주는 곳도 꽤나 드물다.

 

애초에 한국에서 초밥이란 횟집에서 적당히 회 먹으면서 사이드 메뉴로 넣는 듯한 녀석들이 많고

그런 곳에서는, 생선은 그럭저럭 신선해도 초밥 쥐는 법이나 생선과의 비율 등은 그냥 엉망인 수준이다.

밥은 쥐꼬리만큼 쥐어놓고 생선은 꼬리쪽을 길게 늘어트리면서 '밥 적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따위의 헛소리를 하는 곳도 있으니까.

 

일본의 회전초밥집 정도가 마지노선이라면, 한국의 회전초밥집이나 그마트 등에서 파는 낱개 초밥같은건

사실 초밥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냥 말라 비틀어진 과자일 뿐.

 

 

 

6인 가족이 앉을 수 있을 만한 반 독실 좌석이라서 짐도 마음껏 풀어해쳐놓고 사진 마구 찍어도 전혀 거슬릴 게 없다.

얼핏 칸막이 너머를 바라보면, 회사 사람들 접대 자리인 듯 중앙에 후나모리를 떡하니 세팅해 놓고 덕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후나모리는 익히들 알고 있는 모듬회와 같은 메인 요리로, 이곳에서는 크기 때문에 따로 주문받아 종업원이 직접 들고 온다.

 

나고야에서 다시 이 가게에 들를 확률은 한없이 낮기 때문에 아쉬울 것 없이 시험해보고 싶은 녀석은 전부 주문해 버린다.

가게의 숙련도를 가늠하는 계란 초밥은 충분히 괜찮은 편이다.

TV에 나오는 진짜 명인의 카스테라같은 계란 초밥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사실 그 정도 계란초밥을 만드는 명인 가게에서 먹으려면 적당히 1인당 40~50만원 쯤은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 사람 대부분이 평생 그런 계란초밥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리는 널널하고, 초밥이 레일위를 돌고 있어서 말라가는 것도 아니니

무심코 '역시 돈은 좋은 것이로구나' 하는 속물적인 감탄사까지 읊게 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인데, 여기서 이런 초밥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먹는다 해도 금액은 많아봐야 5~6만원 내외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대식가인 가족들과 함께 고기라도 굽는 날엔 20만원 정도는 훌쩍 넘겨버리는 것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서 가슴 졸여가면서 서민 행세하며 먹고 있는 건, 마치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기가 걸어온 길도 돌아보지 못하는 행동이다.

한국에서 먹었던 외식의 평균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이 초밥집에서 지불할 금액은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평균가에 가깝다.

그게 단지 소지금이 한정된 헝그리 여행중의 한 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천상의 행복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

 

해외 여행이라면 다들 자연스럽게 자국에서보다 절약하게 되니, 덜덜 떨면서 초밥을 입에 집어넣다 보면 인지부조화 상태를 느끼기도 한다.

 

 

 

마음의 여유를 밖으로 발산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냥 허세 한번 부려보고 싶었던 것일까.

평소엔 거들떠도 보지 않는 가지절임 초밥도 호기심에 한번 주문해 본다.

해산물 초밥 지상주의인 본인으로서는 초밥집에서 해산물 초밥 이외의 초밥을 먹는다는 것은 이단으로 간주하는데

못 먹어본 맛도 경험해 보자는 의미로 이런 것까지 한번 먹어본다. 이왕 버린 몸(?) 이것저것 시도해 보자는 심정이었던가.

 

시원한 가지의 수분과 짜지 않게 적절히 절임된 맛이 입가심으로 나쁘지 않다.

가격도 100엔대로 싼 편이라 해산물 초밥의 짠 맛에 조금씩 부담을 느낄 때 먹어주는 것도 괜찮을 듯.

물론 따끈한 녹차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초밥집에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있을까 싶지만.

 

가지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잘 먹는 야채인데, 초밥의 다양화는 가격적 폭리만 아니라면 여러가지로 시도되어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다.

 

 

 

가게에서는 홋카이도 특선이라고, 홋카이도쪽에서 유명한 해산물로 만드는 초밥을 선전중이다.

물론 홋카이도에서 가져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신선해도 거기서 나고야까지 초밥 재료를 가져올 수는 없다.

 

주문한 녀석들 중에서는 가장 비쌌던 이 녀석은 김으로 밥 주위를 둘러싼 군함말이인데

위에는 홋카이도에서 유명한 해산물인 연어알, 가리비, 게살, 성게알이 한꺼번에 올라가 있는 디럭스 초밥.

저 네가지 모두 없어서 못 먹는 최고의 재료들인데, 저걸 흘러내릴정도로 담아올렸으니 그 사치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백화점 사치품 부스에 들어가서 프라다나 에르메스 제품을 눈 앞에 했을 때의 느낌일까.

이 배덕적인 초밥의 모습을 보면서 가방에 환장하는 허영심 덩어리 여성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섞어놓으니 4배로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초밥은 장르별로 하나씩 먹는게 낫다.

 

 

 

배가 터질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아쉬움 없이 먹었다고 생각하며 만족감 가득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먹은 금액은 5700엔. 당시 환율로 치면 6만원 조금 넘는 가격이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도 혼자 먹어본 적이 없는 금액이긴 하다.

자전거 여행중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고, 단기 홀로 여행 역시 자금을 넉넉히 들고 나간 적이 별로 없다 보니

마음이 가끔 동해도 좀처럼 시도하지 못했던 쾌락의 추구였는데, 시원하게 해결해버리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 것일까.

 

왠지 키소에 있을 때보다 물질적으로 타락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지만 그냥 과한 생각이겠지.

 

초밥은 만족스러웠지만,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역시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

편의점이 아닌 나고야 역 지하상가에서 한참 떨이중인 나고야 코친을 한 팩 구입해 온다.

나고야 역 지하상가는 사실상 백화점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음식물들 수준이 장난 아닌데

어떤 지역이라도 폐장시간이 되면 병적으로 재고 소진을 위해 할인판매를 하기 때문에

이걸 잘 이용하면 식비를 절약하면서 맛있는 것들을 많이 맛볼 수 있다.

 

200엔 정도 가격으로 나쁘지 않은 코친을 사 온 덕택에 저녁이 외롭지 않다. 맥주도 한 캔 따고.

코친은 그 쫄깃함과 함께 살이 별로 붙어있지 않은 날개부분을 뜯어먹는게 재미있어서

먹을때는 열정적이지만 다 먹고 나면 허무함이 살짝 밀려오는 그런 안주거리.

 

가방에 가득 쌓인 전리품 도서를 보며 오늘 영수증을 체크해 보니, 거진 8일간 여행 경비의 1/4 정도를 오늘 하루만에 다 써버렸다.

이제 남은 돈은 3000엔 남짓. 이 정도면 공항에 돌아가서 마지막 식사 정도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여행가서는 항상 짜투리 경비를 남겨 와서, 다음 여행의 추가 용돈으로 사용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광란의 마지막 하루 덕택에 남는 예산이 거의 없다. 물론 그걸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뉴스를 보니 오늘 새벽부터 나고야에 내린 폭우는 시간당 50mm 라는 집중호우였다고 한다.

그 정도면 그냥 하늘이 뚫렸다고 표현하는게 적당한데, 그 탓에 나고야 역의 모든 신칸센이 오전 내내 연착되었다고.

오늘 하루는 그런 굳은 날씨에도 전혀 관계없는 일정이었고, 이제까지의 7일간 한 번도 날씨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기에

이번 여행은 이 협조적인 날씨만으로 충분히 고맙고 즐거운 편에 들어간다. 35도를 넘나드는 폭염만큼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내일 귀국 비행기는 오전 10시 45분이라 더 이상 여행이라는 개념은 없다.

TV 프로를 즐기면서 이런 단기 여행으로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만족감으로 충만한 눈꺼풀 셔터를 내린다.

 

 

길고 긴 토요타 박물관의 순회도 드디어 끝이 난다.

사실 시간이 별로 많이 걸린건 아니다. 넉넉잡아 세 시간 정도.

느긋한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느긋하게 구경하고 휴식까지 취한 뒤 나고야로 돌아가도

볼거리 한두 군데는 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듯 하다. 본인은 예정된 일도 없어서 그냥 쉬러 돌아가지만.

 

시간에 비해서 많이 지치는 느낌은 든다. 꽤나 열심히 설명까지 읽어가며 보는 것만으로도 체력소모가 꽤 되는데

찍은 사진만 200장이 넘으니 이게 또 쉽게 볼게 아니다. 미러리스였다면 좀 덜 피곤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신관을 나오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제임스 릿지라는 사람의 '트래픽'이라는 작품.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일부러 살짝 각도를 틀어서 담아본다.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제목에 더 어울리는 듯한 복잡함이 매력적.

예술가에겐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문외한인 나로서는, 밑에 가격이라도 적어놓으면 좀 더 맛을 음미해 보려고 노력할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식사까지는 할 생각이 없고, 일기를 좀 적으며 목이나 축이고 싶어서

아담한 까페에 들어간다. 까페 중앙엔 기념품 가게가 듬직하게 위치해 있어서

휴식을 위해 들어갔다가 아이들에게 이끌려 지갑을 열게 되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의외로 아이가 없는 어른들까지 진지하게 둘러보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음료수나 한잔 마실까 했는데, 핫도그 세트가 100엔 정도 저렴하다고 선전중이라 그걸로 간다.

음료수값이 한국보다 비싸니 오히려 이런 세트메뉴를 먹으면 좀 손해를 덜 본다는 느낌일까.

 

창가 자리에 앉아서 느긋하게 밖을 바라보는데, 1920년대 자동차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 앞의 서킷에서 꾸준히 주행중이다.

정비를 마치고 시운전이라도 하는 것일까. 자동차란 녀석도 참치와 마찬가지로 달리지 않으면 죽어버릴 듯.

자동차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 일도 즐겁게 해낼 수 있을듯 하다.

팜플렛을 얼핏 보니, 좀 레어한 자동차가 시운전 할때는 미리 선전도 하고 해서 관람객이 많이 모이는 모양.

 

 

 

핫도그는 미국식이 아니라 아주 아담한 녀석이었는데,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는 탱글탱글한게 씹어먹는 맛이 있었다.

사실 여기서는 사진 찍을 생각이 없었지만 지친 몸을 추스리면서 일기 쓰고 찍었던 사진을 점검하다보니

문득 한장 찍고 싶어지는 바람에 핫도그의 자태를 담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정말 풍족한 여행이 아닌 이상, 남들처럼 맛집 찾아가서 증거사진 착착 남기는 멋들어진 행동은 못하고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동네 분식집에서 수백만원짜리 카메라 펼쳐놓고 심각하게 셔터 누르는 짓만 하고 있다.

여행의 먹거리라는게 꽤나 추억거리가 되기 때문에 납득은 하지만, 찍고 있으면 묘하게 초라해 보인다.

 

예정대로라면 예산이 꽤나 널널하기 때문에, 일부러 남겨오려 하지 않는 이상

한 번쯤은 돈 좀 들여서 제대로 식사를 즐길 기회가 있다. 그 때는 정말 인정사정없이 찍어줘야겠다고 생각중이다.

 

 

 

밖에 나오니 그래도 박물관 안은 시원한 편이었다고 향수에 젖을만큼 무덥다.

습도는 아직 조금 낮은 편이지만 36도에 달하는 낮시간 온도는, 어디서 솟아나는지 모를 정도로 땀을 송글송글 맺게 만든다.

2시쯤 되니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들어오는 편인데, 이곳 주차장이 워낙 넓어서 전체적으로 한산한 분위기다.

 

대도시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에 이런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는 건

나같은 여행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나고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소소한 축복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그리 싫어할만한 곳도 아니고, 그렇게 성장하다보면 첫 자동차를 토요타 제품으로 선택할 가능성도 높아질테니.

'돈만 있으면 어디 횬다이 따위를'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을 한국인 입장에서 본다면

자국 자동차 메이커의 근시안적인 발상은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잘 가꾸어진 조경을 한번 둘러보고 돌아가려다 오랜만에 깔끔한 녀석을 한 마리 만난다.

손가락으로 시야 앞에서 깔짝깔짝 거리면 양손으로 공격도 걸어온다. 물론 꽉 잡히면 조금 따끔하지만.

황색 사마귀보다는 이런 녹색 사마귀가 귀여워 보이는건 역시 색채의 이미지가 가지는 힘일까.

 

자전거 여행 도중 워낙 많이 짜부를 만들어버린 녀석이라서 미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다.

산길 언덕을 내려갈 때면 나나 저녀석이나 도저히 피할수가 없으니 그냥 밀어버리는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사마귀는 체형 자체가 뒤로 물러날 수 없게 되어 있어서, 빠른 물체를 피하는 능력이 전무하다.

그 덕분에 가진 공격성으로 포식자 위치를 점하고는 있지만, 사람에게도 덤벼드는 무모함은 사실 겁이 없어서라기 보다 도망갈수가 없어서이다.

 

 

 

주차장에는 전기 자동차를 위한 무료 충전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과연 자동차 박물관이다 보니 자동차에 대한 배려 역시 사람에 대한 그것 못지 않다.

외부 디자인은 그냥 조금 수수한 정도이지만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이 녹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푸른 하늘 아래서는 단정한 인상을 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더워서 그런지 거의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자동차를 끌고 온 듯 하다.

들어올 때나 나갈때나 이렇게 걸어서 역 사이를 이동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따가울 정도의 햇살이 힘들긴 하지만, 덕분에 사진 담는것도 수월하니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나고야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주위도 한적하고.

관광객 상대가 아닌 본토 사람들 상대하는 가게가 드문드문 보이는 것도 나에게는 즐거운 요깃거리다.

시 외곽에는 커다란 창고형 북오프나 잡화점, 파칭코 가게 같은게 들어서 있어서

의외로 정해진 코스만 이동하게 되는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다.

자전거 여행하면서 실컷 즐겼으니 그건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리니모에는 벌써부터 학생들이 많이 타고있어 소심한 나는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

시간에 여유가 있는 관광객이라면 이 리니모를 타고 주변을 구경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하다.

가이드 역할을 할 일은 없겠지만, 이 블로그에 들어와서 이 정도 정보는 얻어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고야역에 돌아오니 4시쯤 되는데, 호텔까지의 무료 셔틀버스는 오후 5시부터 운행한다.

1시간 일찍 들어가서 쉬어봤자 시간만 아까울 뿐이니 역 주변을 술렁술렁 돌아다녀본다.

여행중 가장 먹기 힘든것이 야채나 과일이다보니, 편의점 들어가서 야채주스 하나 마시기도 한다.

 

다행히도 역 근처에 부탁받은 물건을 살 만한 가게가 있어서 잠깐 들어가 구입해 온다.

사람이 너무 바글바글해서 오래 있고싶진 않았지만, 한국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코믹스가 있어서 그것도 서둘러 몇권 사고 나온다.

학생이 많이 몰려드는 시간대라서 그런 듯. 한번쯤은 더 갈 기회가 있으니 다음엔 오전에 일찍 나와서 조용하고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고 싶다.

 

일단 나고야에서의 초반 일정은 이걸로 끝이고, 내일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오늘밤엔 식초에 절인 문어라도 좀 뜯으면서 한 잔 마셔보려고 생각중인데

그래도 이거 한그릇 더 먹는다고 내 배가 포만감을 느낄 일은 없으니, 휴식을 겸해서 요시노야에 들어간다.

딱히 엄청 맛있다고 생각이 드는 녀석은 아니지만, 어째선지 일본에 오면 반드시 규동집에 들어가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한 끼 식사라기보다, 휴식을 취하며 허기를 달래는 간식이라는 느낌이라서 그럴까.

한국서 규동 한번 먹어보고는 그 생각이 좀 더 강해졌다. 한국에서 규동 먹는건 돈이 아까운 행위다.

이미 40년 가까이 맛이 거의 변하지 않는 우직한 요시노야 규동은, 어딜 가도 꽝을 뽑을 일이 없어서 안심이니까.

 

 

 

나고야 역 안내센터에 가서 내일 목표인 히다 타카야마(飛騨高山)에 가는 방법을 물어본다.

처음엔 JR 전철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던데, 내가 좀 더 싼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자 버스 시간표를 알려준다.

 

20분쯤 더 소요되지만 무려 1500엔 정도나 저렴하다.

나고야로 돌아오는 하루 루트가 아니라 거기서 숙박할 예정이라, 20 분의 시간차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히다 타카야마가 굉장히 유명한 관광지이긴 하지만 나한테는 그곳 역시 그냥 전초기지 역할이라서.

 

호텔에 도착하니 6시가 넘어있다. 나고야 여행중에 하루 꼬박을 토요타 박물관 하나 돌아보는데 소비했다고 하면

아마 아까워 할 사람이 적지 않을거라 생각하는데, 홀로 여행의 즐거움이란 이런 느긋함에서 오는 것이다.

 

셔틀버스를 타기 전에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안주, 술을 좀 사왔다.

오늘은 세탁기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쉬기는 힘들지만,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라서 어쩔수가 없다.

보통 호텔에 들어가면 옷이고 뭐고 다 벗어버리고 속옷 한장으로 뒹굴거리기 때문에.

 

1층에 위치한 코인 세탁기를 사용하려면 옷 입고 세탁 돌리고, 1시간 뒤에 내려와 건조기에 집어넣고, 또 한시간 뒤에 걷으러 가야 한다.

한마디로, 약 2시간 반이 넘는 시간동안 방 안에서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 이거 나한테는 꽤나 불편한 일이다.

 

 

 

쥐꼬리만한 세제도 30엔씩 받아챙기기 때문에, 반드시 한국에서 세재를 비닐봉지에 담아온다.

 

매번 담으면서도 참 이 돈 아껴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의외로 여행이란, 수천 엔씩 들여서 맛있는거 먹고 수천 엔씩 버스비 내고 이동하는 것보다 빨래하는데 30엔 쓰는게 더욱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국에서 조리도구와 쌀과 반찬을 들여와 여기서 만들어 먹을수는 없지만 세탁세제는 충분히 갖고 올 수 있으니까.

 

그리 길지 않은 토요타 박물관 관람이었지만, 찍어온 사진을 보니 오늘은 만족감으로 충만하다. 이 정도면 하루 잘 보냈다는 기분이 든다.

 

 

 

도시락을 먹고 한 시간쯤 지나서 빨래 돌려놓고 냉장고에서 식혀놓은 캔을 꺼낸다.

나고야를 떠나는 날이라 기분이나 좀 낼까 싶어서 한잔 마셔볼 생각이었는데

아침에 TV에서 선전하던 녀석이 기억에 남아있어 일부러 이 녀석을 찾아 구해왔다.

 

한국에서는 분류되기 어려운 츄-하이(チューハイ)라는 주류인데, 증류주에 소다와 함께 각종 과일향을 첨가한 술이다.

발포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소주와 같은 증류주 계열이라도 거의 맥주 마시는 느낌으로 알싸하고 시원하게 즐길 수 있다.

일본에서는 물론 여성들이 좋아하는 술인데, 이게 마셔보니 한국의 왠만한 맥주보다는 낫다.

 

정통 맥주도 나쁘진 않지만, 이번에 기린에서 자사의 '빙결'주에 가장 원하는 과일 앙케이트를 했을 때

1위를 먹은 녀석이 이 복숭아맛이라고 아침 TV 에 광고가 나와서 구매해 봤다.

당연하게도 기간한정 제품이라 지금 한번 먹어보자 했지만

사실 기간한정이라고 이름붙이고 이제까지 셀 수도 없을만큼 다양한 과일종류가 나왔었기 때문에 반쯤은 그냥 상술.

 

증류주의 깔끔함과 탄산의 시원함, 달달한 복숭아맛이 아주 훌륭하다.

 

빙결이라는 이름의 이 술은 일본에서 매우 대중적으로

캔을 뜯으면 기압차로 인해 표면의 프리즘처럼 생긴 무늬부분이 자동적으로 구겨지기 때문에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게 만드는데, 이 아이디어가 대박을 터트렸다. 지금도 기린 빙결의 심볼과도 같은 녀석.

 

원래는 레몬이나 오렌지 빙결을 마시곤 했지만, 신경 좀 써서 만들었는지 확실히 맛과 향이 잘 조합되어 있다.

술이 그리 강하진 않아도 즐겁게 시큼한 문어다리를 뜯으며 술과 함께 TV 버라이어티를 시청한다.

여행와서 이렇게 초저녁부터 느긋하게 방에 틀어박혀 술과 TV를 즐긴다는건, 조금 사치러운 행동일런지.

 

내일도 버스가 10시 30분에나 출발하기 때문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 필요도 없다.

세탁 때문에 계속 1층으로 왔다갔다 해야 한다는 귀찮음만 제외하면 후회없는 느긋한 하루였다고 자찬하며 한 모금 들이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