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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1  2월 15일 오비히로 - 쌀쌀한 도시 10
  2. 2014.11.05  2월 15일 오비히로 - 한 잔 한 개피 그리고 증기 6

 

 

사카이 씨가 휴대폰으로 지도를 이리저리 검색하며 여러 지역들에 대해 설명해 준다.

기계가 삼성 갤럭시라서 일부러 보여주면서 웃는다.

삼성이야 일본에서도 유명하지만 실제로 일본 스마트폰의 절대 다수는 아이폰이라 오히려 이쪽에서는 레어한 쪽에 속한다.

매년 도쿄에서 이곳까지 놀러오는 사람이니만큼 개성이라고 할까, 매니아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라 왠지 납득이 간다.

이쪽에서는 갤럭시 쓰는 사람이 매니악한 편이니 한국과 비교하면 참 재미있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쿠시로 습지에 다다르자 사카이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뒤쪽의 빈 공간으로 이동한다.

쿠시로라는 도시가 홋카이도에서 그나마 유명한 편에 속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이 쿠시로 습지 때문.

일본에 남아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큰 자연습지로, 겨울은 황량하기 그지없지만 여름엔 압도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이동 수단이 그러다보니 습지 내부까지 깊숙하게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만 슬쩍 돌았는데

당시 도로 왼편에서 고양이를 사냥해 입에 물고 있던 북방여우와 마주친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자전거를 멈춰줬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어 조금 의아했는데

혹시나 싶어 도로 건너편을 살펴보니 새끼 여우 몇마리가 어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뒤로 슬금슬금 빼 주니 잔뜩 경계하며 도로를 건너가 새끼들과 함께 풀숲 속으로 사라졌다.

고양이를 참 좋아하는 본인이지만 자연 속의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내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는 없었던 기억.

 

여름과는 너무나도 다른 황량한 모습에 약간 실망도 했지만 쿠시로 습지는 이렇게 잠깐 지나가는 걸로는 도무지 감상할 수 없는 곳이다.

이미 1980년에 람사르 조약에 등록되었으며, 한국 최대의 습지라는 우포늪의 50배가 넘는 크기를 가진 녀석이라서.

우포늪이 1억 4천만년전에 생성된 것에 비해 쿠시로 습지는 고작 2천만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30년 전부터 사라져가는 습지 보호운동을 시작한 터라, 4대강 등의 무자비한 파헤치기로 거의 고사 상태에 이르른 우포늪에 비해

오히려 1980년 조약 당시보다 30% 정도 습지의 크기가 늘어난 상황이다. 여러가지로 씁쓸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는 쿠시로 습지는 여름 홋카이도 여행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절경 중의 절경이라

열차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이 아쉬운 모습을 여름 여행의 영양분으로 삼으며 참기로 한다.

 

 

 

사카이 씨는 쿠시로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는데 지정좌석이 아니라 빠른 사람이 앉아갈 수 있는 터라 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마구 달린다.

바쁜 작별인사였고 딱히 연락처도 받아놓은 게 없지만, 시레토코에 찾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본인 역시 쿠시로에서 갈아타긴 해도 어차피 JR 레일패스를 이용해 모든 좌석을 예약해 놨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다.

홋카이도의 레일패스는 외국인 관광객만 구입할 수 있어서 이런 사치를 부리는 것도 나름 뿌듯한 일이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외진 곳을 지나왔기 때문인지, 이제 번듯한 열차를 타고 양복을 입은 비지니스맨들 사이에 앉아서 현대 문명의 향취를 느낀다.

 

사카이 씨가 떠나고 나서는 별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묵묵히 음악이나 들으며 1시간 정도를 달려 오비히로에 도착한다.

쿠시로나 오비히로나 자전거 여행때 지나갔던 곳이라 여전히 주위 풍경은 낯설지 않다.

홋카이도 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라서 아침까지 머물렀던 시레토코의 대자연의 풍광은 금새 사라진다.

 

 

 

토요코인에 투숙하자 룸 키와 함께 신문을 한 부 건네받았다. 당연히 일본 신문.

여권까지 복사해 갔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신문을 건네 준 것인지.

 

날씨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긴 해도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라 이대로 호텔에 틀어박히는 건 재미가 없다.

홋카이도의 면적을 생각하면 결코 길지 않은 10일여간의 여행 중에 굳이 이런 도시에 멈춰선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이지만

도착 당일인 오늘은 어차피 멀리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몸이 좀처럼 침대 위를 떠나지 못한다.

조금 전 지나왔던 쿠시로 근처의 평원에서는 무려 이글루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특별 체험도 할 수 있었지만

숙박비가 여간 비싼 게 아닌데다 그런 고생은 자전거 여행 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즐겼기 때문에 딱히 아쉽진 않다.

 

이곳은 원래 아이누어로 토카치(十勝) 지역으로 불리는 홋카이도 최대의 평야 지대라 낙농업의 성지이기도 하고 그 덕에 오비히로 시는 상공업도 상당히 발달한 편이다.

미식가들에게도 나름 유명한 곳인데,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인해 각종 유제품들의 품질이 매우 신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유를 사용하는 고급 과자류가 인기를 끈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인 롯카테(六花亭) 본점이 이곳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굉장한 레벨의 과자, 케이크점이 포진하고 있다.

과자 마을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예전 포스팅의 오타루 여행쪽에 보이는 과자점의 상당수가 이곳 오비히로에 본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달달한 과자나 케이크류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지금은 과자보다 더 필요한 게 짭짤한 식사라서 그렇게 당기지 않는다. 아침식사 이후로 맥주 한 잔 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낙농업과 함께 양돈업도 크게 발달한 토카치 지역에서는 이곳의 지역 음식이라 할 만한 돼지고기 덮밥 부타동(豚丼)도 유명하다.

원래 일본의 대표음식중 하나인 덮밥은 소고기를 얹은 규동, 장어를 얹은 우나동 정도가 일반적인데

이곳 토카치 지방에서는 소중한 노동력과 유제품 생산원인 소를 마구 잡아먹기 힘들었고, 장어는 있을리가 없으니

겨울에 강하고 대량 사육이 용이한 돼지를 덮밥 재료로 사용하면서 이 지방의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었다.

 

요시노야 등의 전국 체인점 메뉴에 올라오는 곁다리 부타동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신선함으로 유명한 녀석인데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오비히로의 밤거리로 나와 보니 지금 꼭 부타동을 먹어야 할 의무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내일 하루 더 머물 예정이라 급하게 이곳의 특산물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기도 했고

내륙 지역이라 홋카이도에서 겨울이 가장 매서운 곳인 만큼 뭔가 좀 더 몸을 따뜻하게 해 줄 무언가를 갈구하게 된다.

 

 

 

쌓여 있는 눈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시레토코에서 느꼈던 어딘가 푸근했던 겨울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의 바람은 정말 꽁꽁 싸맨 옷가지 사이의 조그만 틈새로도 가차없이 파고 들어오는 칼날같은 매서움을 자랑한다.

안면 근육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시레토코의 야외 온천에서 눈을 맞으며 즐기던 그 겨울과는 달리 산을 넘어 불어오는 내륙의 바람은 자비심이 없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도에 이르고 있어서 밤거리를 오래 즐길만한 여유도 없다. 사실 시레토코에서 건너온 터라 별로 보고 싶은 풍경도 아니긴 하지만.

그나마 오비히로가 꽤나 큰 도시라서 이 정도지, 토카치 평야 부근에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모 유명 만화가의 아버지는 그런 추위에서도 빤스 한장만 입고 밖을 나돌아 다닌다고 하는데, 과연 인간의 적응력은 놀라울 따름.

 

 

 

먹을 게 없으면 부타동이라도 먹을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불쑥 시야에 나타난 인디언 카레.

그러고보니 왜 이제껏 이 녀석을 잊고 있었을까 싶다. 전혀 생각나지 않다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 대자연의 뜻이라 믿으며 길을 건넌다.

 

외지 사람들이 오비히로 하고 떠올리는 음식이 부타동이라면 실제 지역민들의 소울 푸드로 인식되는 것이 이 인디언 카레.

오비히로 안에서는 카레 업계의 절대적인 정점에 군림하고 있어서 코코 이치방야 같은 전국구 체인점이 발 들일 틈도 없다.

이곳 사람들은 심지어 집에서 냄비를 들고 와서 카레를 싸 가기도 한다고. 젊은 창업자의 끝없는 노력이 만들어 낸 절묘한 루의 깊은 맛이 만들어 낸 전설이다.

 

 

 

카레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이젠 밖에서 사 먹는 카레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에서 거하게 만들어먹는 습관이 생긴 본인이라

코코 이치방야 정도의 그럭저럭 괜찮은 카레도 만족감을 느끼는 정도는 아닌데, 이 인디언 카레는 본받고 싶은 맛 중 하나다.

 

자전거 여행때는 한여름이라 카레가 그렇게까지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신료의 배합은 놀라웠다.

소고기, 돼지고기, 야채를 기본으로 한 세 종류의 루가 그 강렬한 향신료 안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점이 포인트.

 

해산물 카레 등 비싼 녀석도 있지만 이곳 인디언 카레는 지극히 저렴하고 서민적인 풍취가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싼 녀석을 주문해도 실망하는 법은 없다.

카레만으로 배를 채우려면 세 그릇 정도는 먹어치워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허기와 추위를 달래는 정도로만 즐기기로 생각하고

중간 매운맛의 비프 카레를 주문한다. 이 정도라면 밖에 나와서 군것질 한 번 더 할 여지는 충분히 남겨놓는 양이다.

 

한국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진하게 우려낸 카레 향기가 얼어붙은 코 속을 통과하는 순간 척수 부근에서부터 짜릿한 전기가 통하는 느낌.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도 일본식 고형카레와 한국의 가루 카레를 서너 종씩 배합해서 루를 만들긴 하지만

이곳의 루는 시판용 카레가 아니라 갖가지 향신료를 직접 사용해서 그 독특한 풍미를 만들다 보니 흉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건더기가 많은 한국의 카레와 달리 이곳은 고기 이외의 건더기가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야채의 겉모습이 아예 남지 않을 정도로 수십 수백시간을 끓여 일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만 발전한 독특한 방식이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입맛 들이면 한국의 카레는 그냥 맹물이나 마찬가지.

 

 

 

콧물을 참으며 전신을 자극하는 카레를 한 그릇 비우고 나니 행복감이 몰려온다.

오비히로에서 인디언 카레를 잊고 있었던 자신을 생각하니 이제 나도 늙었구나 싶다.

 

양이 허기를 해결한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편의점에서 내일 먹을 간식과 음료수까지 구입한 후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들어가기 전에 조금 더 배를 채우자고 생각하고 모스버거로 들어간다. 여기 햄버거는 맛있는 반면 크기가 워낙 작아서 간식거리로는 유용하다.

 

카레를 즐긴 후라 달콤한 토마토소스의 맛이 약간 옅어지는 역효과가 있었지만

아삭아삭한 양파의 식감과 치즈의 부드러운 맛이 빈 속에 자극적이었던 카레의 향기를 중화시켜준다.

겨울 저녁이라 모두들 일찍 귀가했는지 한적한 분위기에, 숙소에 돌아가도 할 일은 없었기에 느긋하게 밀린 일기를 쓰며 햄버거를 씹는다.

밖에는 칼날바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슬눈이 내리고 있지만 내일만큼은 좀 더 펑펑 내려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여행하는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바라던 날씨가 떡하니 나타나는 바람에

내일까지 그런 행운을 바라기엔 좀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희망은 희망이다.

함박눈은 도시 여행에서는 매우 번거로운 녀석이지만 내일은 오히려 눈이 신나게 내려주는 게 일정에 도움이 된다.

 

카레와 햄버거로 속이 든든해지고 따듯한 가게 안에서 일기를 쓰고 있으니 스스륵 눈이 감겨온다.

숙소로 돌아와 뜨끈한 욕조에서 몸을 녹인 후 TV를 즐기며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쑤셔서 이리저리 뒤척여 줘야 좀 편안해 지는데 그러면 TV를 보기가 힘들어 살짝 귀찮다.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내일 여정에 행운이 따르길 기원하며 전등을 끈다. TV는 타이머 설정해 뒀으니 잘 떠들다가 알아서 꺼지겠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몸을 떨며 보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이 호텔의 전망 좋은 객실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쪽이지만

저 언덕에 추억을 가지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이 풍경이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아마 살아가는 동안 이 풍경은 몇 번이고 더 보게 될 듯.

 

아침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쾌청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 하늘이 유지될런지.

오늘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평야지대인 토카치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비히로(帯広)까지 이동한다.

렌터카가 없는 본인으로서는 나갈 때나 들어갈 때나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갈아타야하는 시레토코라는 곳이 가장 이동하기 귀찮은 곳이지만

어제의 황홀한 경험만으로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어서 부담이 없다.

 

단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도착 하기만 하면 오케이였던 때와 달리

아침에 나가는 버스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출발일이라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새벽에 일어나 후다닥 조식을 챙기러 간다.

 

이곳에서 기차가 움직이는 샤리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90분 혹은 2시간에 한 대씩밖에 운행하지 않기도 하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버스의 운행시간과 샤리역의 열차 운행시간이 연계되도록 조절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계획대로의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이동 시간이 연쇄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어마어마한 손실이 생긴다.

첫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 오비히로에 도착하는 시간이 최대 3시간 넘게 차이날 수도 있어서

아무리 피곤한 몸이라도 날렵하게 움직여 짐을 싸고 나가야 한다. 체크아웃 시간이 널널한 관광호텔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쉽긴 하다.

 

 

 

로비에서 샤리로 가는 버스를 어디에서 타는지 물어보니 손으로 그려서 인쇄한 지도까지 건네주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거리는 눈길을 느긋하게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편이라 30분 일찍 나온 본인으로서는 안도감이 든다.

샤리행 버스와 열차는 시간 연계가 철저하니까 한번 버스에 타기만 하면 일사천리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도 건네 줘서 든든하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나와보니 조그만 마을 안에서도 담을거리는 눈만큼이나 쌓여있다.

원래 어디까지가 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행자를 위해 깔끔하게 눈을 치워 놓았는데

반듯하게 잘 닦아놓은 길 옆으로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마치 처음부터 이런 모양의 길인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단 아스팔트 길이고 삿포로처럼 도로 밑에 열선이 깔려있지 않기 때문에 미끄러움 주의는 어제의 오호보다 더 신경써야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 일찍 도착해 편안한 마음으로 대기중인 버스에 앉아 있으니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이 올라탄다.

어제 함께 오호를 거닐었던 사카이 씨와 눈이 맞자 양측 모두 순간 어리둥절 하다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사카이 씨는 어제 바로 삿포로로 돌아간다고 한 것 같은데 여기서 만나게 되니 더욱 놀랍기도 했고.

피곤해서 그냥 푹 쉰 다음 오늘은 쿠시로(釧路) 습지 부근의 온천 마을에 들렀다가 삿포로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오비히로행 역시 쿠시로 습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이동 거리의 절반 정도는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홀로 여행을 좋아하긴 해도 이렇게 만들어진 인연은 언제나 대환영이기 때문에 즐겁게 동승한다.

어제까지는 오호 투어에 너무 정신을 뺐겨서 동행하던 사람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나니 비로소 사카이 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조금 더 빨리 기억에서 잊혀졌을 듯.

 

샤리 역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꽤나 많이 모여있다. 겨울 비수기라고 해도 여전히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이곳 지역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으니까.

10분쯤 뒤에 열차가 도착하는데 사카이 씨가 이제 막 문을 열고 있는 역내 매점에 들어가 맥주 없냐고 물어본다.

가게 주인이 턱하니 거대한 금속 드럼통을 꺼내더니 시원하게 생맥주 한 잔을 뽑아준다. 뭔가 신기한 볼거리로 느껴진다.

 

나도 한잔 하겠냐고 해서 이런 기회니 고개를 끄덕였는데, 당연히 본인 분의 맥주값을 내려고 하다가 저지당했다.

일본에 왔으니 손님 대접을 해야 한다며 사카이 씨가 웃는다. 일본인들이 더치페이에 철저하다는 일반 상식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좀 신선할 듯.

본인은 시골을 많이 달리다 보니 이미 이런 호의에는 나름 익숙해져 있기는 하다. 사실 도심을 벗어나면 일본 쪽이 이방인을 훨씬 더 챙겨주는 편이다.

 

 

 

굳이 삿포로가 아니라도 일단 홋카이도의 생맥주 레벨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수준.

물 맑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렇기도 하고, 일본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끄트머리 기차역 매점에서 파는 생맥주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아침부터 쌓인 눈을 바라보며 생맥주 한 잔이라는 매우 드문 경험을 즐기며 기차에 오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조금 늦게 올라섰다면 앉을 자리도 없었는데, 다행히도 사카이 씨와 둘이 앉을 자리는 확보했다.

맥주를 손에 들고 기차에 타서 홀짝홀짝 마시는 경험은 처음이라 나름 신선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문득 건너편 창가에 훌륭한 풍경이 흘러가고 있다.

당연히 건너편에도 중국인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였다면 소심함을 한껏 발휘해서 카메라엔 손도 대지 않았겠지만

사카이 씨가 망설임없이 카메라를 꺼내 건너 풍경을 담기 시작하니 본인도 슬며시 카메라를 꺼낼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을 피해 풍경을 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 장 찍고나니 용기를 낸 보람은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도쿄에서 시레토코까지의 거리는 거진 서울에서 도쿄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이런 여행 패턴을 가진 사람은 나처럼 음울한 사람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플러스적인 성향이 강해서 옆에 있으면 도움을 많이 받는 느낌이다.

 

 

 

경험이 풍부한 사카이 씨다 보니 이것저것 알고 있는것도 많다.

어느 정도 달리다가 사카이 씨가 차장석 쪽으로 가자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찍을거리가 많다고.

짐을 자리에 놔 두고 이동한다는 게 살짝 부담되기도 하지만 일단 사카이 씨에게 이끌려 카메라만 들고 운전석 쪽으로 이동.

 

이런 스팟은 이미 유명한지 좁은 차장실 내부엔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워낙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나 보다.

덜컹거리는 원맨 열차 앞쪽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니 철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열차를 운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실감된다.

 

 

 

이쪽 홋카이도에서는 꽤나 드문 터널을 지나는 노선이라서 더욱 유명한가보다. 그리고 어쩐지 이런 터널은 겨울과 어울린다. 카와바타의 영향일까.

사람들이 많아서 몸을 지지할 만한 공간이 없고 화각상 망원렌즈를 사용해야 해서 셔터 누르기가 힘들지만 셔터스피드를 높이고 손떨림 방지를 최대한 이용해 몇 장을 담아본다.

열차에는 이제껏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차장실 쪽 풍경을 담아본 적이 없는데

도심과 달리 이런 대자연의 품 속을 달리는 열차의 풍경은 상당한 흥미를 동하게 만든다.

여러가지로 정보가 풍부한 사카이 씨 덕에 모르고 지나갈 뻔 했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 고마울 따름.

 

 

 

월급은 적고 고된 홋카이도 철도원의 생활이지만

매일 이런 풍경을 스쳐지나가며 열차를 조작하는 직업도 분명 급여 이외의 매력이 존재할 법 하다.

지하철 같은 곳에서 열차 몰아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특히나 일본에서 가장 노후된 시설과 열차를 가지고 있는 홋카이도 철도는

디지털 기기에서 느끼기 힘든 육중함과 애상적인 매력이 남아있어서 철도 매니아들에게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사카이 씨는 딱히 철도 매니아가 아니지만 이 곳을 지나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매력에 눈을 뜨게 된 듯 하다.

 

어느 정도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는데, 사카이 씨가 조금 뒤에 또 볼거리가 하나 있다고 기대감을 주입해 준다.

아침 맥주는 태어나서 처음이라 원맨 열차의 흔들림이 묘하게 느껴지지만 아직은 괜찮은 듯.

일단 헤어지기 전까진 사카이 씨가 모든 볼거리를 다 제공해 줄 것 같아서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정도 달리니 사카이 씨가 이제 앞으로 가자고 다시 일어난다.

여전히 정보에 빠삭한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산 아래로 기차가 돌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참 기묘하게 생긴 산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육중한 근육질 몸매 밑으로 달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예술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많은 홋카이도라 이런 철로를 개설할 때 참 고생 많이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언급했듯이 교도소에서 많은 인원이 이곳 노동에 투입되었는데, 시체도 못 찾고 사라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혼자였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장관을 소개해 준 사카이 씨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한다.

 

 

 

시레토코에서 오비히로까지는 꽤나 긴 여정이다.

 

직선거리상으로는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간의 1.5배 정도 되지만 철도는 홋카이도 섬의 외곽을 주욱 돌아가기 때문에

거리에 비해 이동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어림잡아 6시간 정도. 그리고 노후된 철로 사정때문에 정차해야 할 경우도 많다.

 

열차 자체는 홋카이도 남동부의 도시 쿠시로(釧路)에서 한 번 갈아타면 되지만 그 전에는 두 번 정도 정차를 한다.

이는 시골 철로가 단선 운행을 하기 때문에 마주보고 오는 열차를 미리 보내는 등의 방법을 써야 하기 때문.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의외로 여기저기서 승하차 하는 승객들로 분주하다. 홋카이도에도 온천이 많아서 겨울 여행객들이 유지되나보다.

15분 정도 정차를 하게 되어 사카이 씨와 함께 밖으로 나와 공기를 마신다. 담배를 꺼내 들고 피냐고 물어봐서 어쩔까 하다가 한 대 받아든다.

사카이 씨는 나보고 담배 피는 줄 몰랐다며 놀란다. 어제 하루종일 오호를 돌아다니면서도 담배 피고싶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러고보니 사카이 씨는 어제 오호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피웠던가.

본인은 여행 중 이런 식으로 권유받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담배를 피지 않으니 헷갈릴만도 하다.

 

홋카이도에도 화산이 많고 그러기에 온천도 많은데 이 부근은 특히 그런 곳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곳으로, 조금 더 한적한 곳에 가면 텅 빈 논밭처럼 넓은 평야가 있는데

그곳에서 삽을 들고 무릎 위쪽 정도까지 흙을 파내려가면 온천이 졸졸 솟아나오는 신기한 장소가 있다.

 

 

 

어차피 오비히로까지만 가면 오늘 일정은 잡아놓은 게 없기 때문에 이런 느긋함도 좋구나 싶다.

사카이 씨는 또 다시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여기서 10분 쯤만 더 기다리면 좋은 볼거리가 있다고.

 

사실은 이 열차가 정차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맞은편에서 기차가 놀랍게도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라는 것이다.

원래는 전부 폐기하기로 했지만 한 대만을 관광용으로 개조해 이 부근을 어슬렁거리게 하고 있다고.

일본 본토쪽에는 아직 몇 대인가 운행하는 녀석이 있지만 홋카이도에서는 이곳의 증기기관차가 유일하다.

 

타이밍을 일부러 잡은 것도 아닌데 그 녀석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물론 사카이 씨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냥 정차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놓쳐버렸을 수도 있었을 듯.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육교 위로 올라간다. 아무래도 멀리서 오는 기차를 찍으려면 높은 데가 좋을 듯 하니.

낡은 합판을 이어붙여 만든 옛날 육교인데 또 친절하게 유리창은 전부 달아놓았다.

얼어붙어 있으면 열기가 힘들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별 무리없이 열려서 장비를 갖추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은 정보를 잘 모르는 것인지, 그냥 많이 봐서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기차를 보러 나오지 않아서 사카이 씨와 둘이서만 육교 위에 올라와 있다. 왠지 이득 본 기분이기도 하다.

연습삼아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원맨 열차를 담아본다.

이런 필름틱한 색상 왜곡은 앞으로 달려 올 증기기관차에게 적용해야 하지만 이것도 나름.

 

 

 

열악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든 단선 철도지만 덕분에 이런 즐거움이 생기기도 한다.

멀리서 다가오는 증기기관차의 첫 인상은 그다지 우람하거나 은하철도의 느낌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굴뚝에서 연기가 퍽퍽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니 역시 실제 경험해 본 적 없는 친근함을 느낀다.

 

기차 하면 칙칙폭폭이 뇌리에 박혀있기도 하고, 워낙 미디어에서 폼 잡을 때 잘 나오는 녀석이라

실물로 달리는 모습을 보니 뭐가 현실적인지 언뜻 구별이 잘 가지 않는 느낌도 든다.

어찌 보면 이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관광열차라서 좌석이 전부 양쪽 창문을 향해 있고 운행 속도가 느린 녀석인데다 요금도 결코 싼 편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승강장에서는 이곳에서 탑승 후 다시 반대편으로 출발하기 위한 관광객들이 많이 서 있고

개중에는 열차 안 승객들에게 즐겁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인사는 역시 전동 기관차보다 이런 녀석이 더 어울리긴 한다.

 

창문으로 나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이런 설경을 즐기며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을 먹는다거나.

실제로 이 기차 안에는 중간에 난로가 있어서 위에서 밤을 구워먹을수도 있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관광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것에 큰 매력을 느낄 만한 나이는 아닌가 싶다.

뭔가 우수에 젖어볼 만한 시간도 없이 사카이 씨와 함께 서둘러 내려간다.

이 기차가 홈에 도착하면 다시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출발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