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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22  후쿠오카 여행 - 프롤로그 19

부산에 가 본게 대체 몇년만인지 기억이 안 난다.
십여년 전 부모님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예전 신혼여행 코스를 돌아보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때 살짝 지나친 적은 있지만 차에서 내린 건 국밥 한그릇 먹을 때 뿐이었으니 그건 횟수에 넣기 힘들고.
기억에 남아있는 부산은 약 20여년 전 해운대와 그 앞의 붉은 색 호텔 뿐이다.

뭘 타고 갔는지도 기억에 없고, 단지 호텔에서 해운대로 걸어나가는 동안 노점상에서 사먹었던
밑에 구멍뚫린 다슬기같은 녀석이 그나마 지금까지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에 본 부산역의 전경은 나름 신선하다. 별다른 특징이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겉모습만큼이나 내부도 넓직한게 듬직한 느낌.
그런데 부산역을 나오자마자 왠 짝퉁 일본인처럼 생긴 녀석이 가이드북에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한국어를 가리키며 돈달라고 조른다.
그냥 경찰서에 갖다 쳐넣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여행 전엔 마음을 평온하게 먹어야지.
일본어로 '돈은 없지만 열심해 해보쇼'라고 웃으며 한마디 던져줬다.


항구도시는 대체 활기차고 시원시원한 느낌과 더불어
신,구의 융합이 조화롭다기 보다는 조금 어지럽게 뒤섞인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개인적인 정의를 내리는데
부산의 경우엔 번쩍번쩍한 부산역과 산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마을, 적당히 예전 풍취를 느끼게 하는 재래시장 등에서
그런 정의에 부합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요즘들어 무섭게 발전중이라고 하니.

좀 덥긴 해도 이 정도 날씨만 유지해 주면 이번 여행은 참 행복할 것 같다.
숙박자 대부분이 일본사람이라는 토요코 인에 들어가 보니 정말 일본쪽과 신기할 정도로 똑같은 구조다.
한국 대다수의 호텔, 모텔에 비해 턱없이 조그마한 객실이지만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나름 정겹다.

자전거 여행, 특히 대지진 당시 근 2주일 가까이 토요코인 야마구치점에 처박혀서 여행을 접을까 계속할까를 고민했던 추억이 있다.
그 외에도 야마구치점의 서비스 정신이 좋은건지, 원래 제공되는 조식외에 석식으로 무제한 카레가 제공되던 점도 틀어박힌 원인.

주 서식지인 서울과 대구에서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산자락 마을이 여기저기 보이는 모습이 인상깊다.
아마 피난시절에 생긴 달동네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이것도 부산의 지형적 특성인지 그런 곳이 참 많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나에게 있어서 부산이란 도시는 외국의 이름모를 도시와 다를바가 없는 듯.
KTX 타고 50분이면 가는 옆동네를 20년간 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짧은 시간동안 어디를 둘러볼까 고민하다가 현 부산의 발전상을 느낄 수 있다는 센텀시티쪽을 선택했다.
성격대로라면 자갈치 시장같은 곳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20년간 미지의 영역이었던 부산의 최신 모습을 한번쯤 봐 두는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그리고 센텀시티는 광안리와 가까우니 그 놀랍다는 야경도 구경할 수 있어서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한 몫 했다.


머나먼 센텀시티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몸으로 느낀 부산의 모습은
도시의 캐치프라이즈 '다이내믹 부산'이 딱 어울리는 느낌이다. 한 번도 각 도시의 캐치프라이즈에 동의한 적이 없었는데.
아, 주 서식지인 '컬러풀 대구' 캐치프라이즈도 어떤 의미로서 참 어울린다고 생각은 했다.
실컷 두드려 맞고 알록달록해진 괴팍한 노장 복서의 얼굴을 떠올렸으니까.

세계 최대의 백화점이라는 센텀시티 신세계 백화점은
뭔가 있어보이는 수식어와는 정 반대의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그 크고 거대한 건물 안은, 다른 수많은 백화점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우동과 짜장면이나 파는 그저 그런 푸드코트 안에서도 앉을 자리가 없어 바둥대는 사람들로 꽉꽉 채워진 곳이었다.

세계 최대라고 해 봤자 결국 개미같은 사람들에게 손쉽게 점령당해 버리는 놀이터.
덩치가 커지면 그만큼 사람들이 그 공간을 더 차지할 뿐. 다른 백화점들과 차별화 된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센텀 시티에서 더 볼만한 광경은
이런 초거대 백화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을 뚫으며 위엄을 과시하는 고층 주상복합 건물들이었다.
이런 녀석들이 포진해 있으면, 센텀시티의 두 백화점은 단지 동네 슈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과연 이것이 현재진행형 부산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현재진행형 부산이란 녀석은
여기저기서 껍데기만 뒤집어 쓴 서울의 냄새가 흠씬 풍기는 어색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지금 삼성역이나 강남역 주변을 찍고 있는건가'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으니.
부산의 최고급 아파트들 소유주가 어디 사람들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신호등에 멈춰 선 젊은 커플이 이 추운 바람 속에서 팔짱을 꽉 끼고 즐거운 잡담중이다.
재미있게도 여자 쪽이 '돈 X니 많이 벌어서 여~ 살게 해주께' 라고 구수한 사투리로 말하고 있다.
한국처럼 좁고 밀집된 곳에서 그나마 지역색이라는 걸 유지해 주는 것이 사투리인 듯.

센텀시티를 슬쩍 구경후 아무데나 들어가서 소고기 국밥 한그릇 먹고, 옆의 까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
바람이 너무 강하고 구름도 가득해서 광안리의 야경이 조금 걱정되긴 한다.
삼각대도 없고 노이즈도 형편없는 카메라를 쓰다 보니 멋들어지게 담는 건 애초에 포기하긴 했지만.
약간은 기대했었던 센텀 시티는 사실 부산의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20여년간 외국이나 다름없었던 부산의 압축된 시간을 일거에 폭발시켜줄 임펙트를
광안리에서 기대하고 있다. 일단 한국 어느 지역에도 광안리같은 풍경은 없다고 하니까.


역에서 내렸을 때는 한적한 골목길이 이어졌지만
바다쪽으로 가면 갈수록 조금씩 사람들이 늘어나는 느낌이 들더니
이곳으로 나오자 일순 세상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광안리였다'

끝없이 늘어선 건물들의 압도적인 광채에, 소문의 광안대교조차 초라하게 느껴진다.
마치 바다가 도시에 삼켜진 듯한 모양새에, 그 바다를 최후까지 가둬버리는 광안대교라는 창살까지.



광안대교보다 찬란한 거리의 불빛이 더욱 눈길을 끈다.
그 대단하다는 홍콩의 야경도 이런 느낌일까.
모래사장에 나와 걸었던 처음 40분간 바다보다 길거리쪽에 훨씬 더 시선을 많이 두게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적인 절경이라 함에 부족함이 없다.

광안리는 파도마저 형형색색이구나.


한국에서 가장 긴 현수교인 광안대교.
부모님 말씀으로는, 20년 전의 광안리는 내가 자주 가던 포항의 조그마하고 한적한 해수욕장과 전혀 다를게 없는 곳이었단다.
광안대교와 함께 폭발적으로 상가와 주택가가 만들어져서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자연의 흔적을 덮어버릴 정도의 별천지가 되었다.

분명 비수기일 지금도 사람들이 꽤나 붐빈다.
상가들은 밝기 경쟁이라도 하듯 화려한 불빛으로 시선을 빼앗는다.


인공물이라는 녀석은 조금만 선을 잘못 타면 흉물이 되어 버리곤 하는데
바다 위에 떡하니 서서 가끔 분수나 뿌려대는 저 녀석이 바로 그렇게 느껴진다.
빛의 향연으로 가득찬 이곳 광안리에서 저 이질적이고 초라한 녀석은 대체 뭔가.

이미 전통적인 유래나 역사가 담긴 무언가를 기대하기엔 너무 발전한 곳이라서
이 몽환적인 야경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텐데, 저 녀석만큼은 영 꼴불견이다.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들은 왠만한 서울 부촌보다 더 가격이 높다고 하더라.
특히 광안대교가 잘 보이는 아파트는 다른 것보다 몇억원씩 더 비싸다고.
저기 살며 365일 끊이지 않는 인공 조명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것이 수억원의 값어치를 하는 것일까?

부산의 힘이랄까.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전진할 의지가 느껴지는 광안리는
여지껏 한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압도적인 야경을 자랑한다. 처음엔 가슴이 쿵 하더군.
두 시간 반동안 거닐며 바다와 네온 불빛을 번갈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딱 하나 마음에 남는 것이라면
이곳은 마틴과 루디가 보고 싶었던 바다는 아닐 것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