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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23  킨키 방황 - 류큐왕국의 눈물 18

 

 

 

길거리 농구 감상을 마치고 다시 난바역쪽으로 걸어간다.

미도스지 거리는 넓은 도로지만 양쪽에 나 있는 거리는 옛 정취가 남아있는 조금은 난잡한 골목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걸 좋아하는 오사카 사람들의 이미지엔 화려하고 정돈된 거리보다 이런 느낌이 어울리긴 한다.

일요일인 탓도 있지만 미도스지 페스타 덕분에 오사카의 유동인구는 전부 이쪽으로 몰려드는 듯 하다.

 

 

중간에 간식거리를 파는 코너가 있었지만 줄을 길게 늘어선 행렬 탓에 먹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도 별로 없고, 더워서 물 생각은 났지만 음식 생각은 그다지.

한국 음식점도 있었는데, 오사카까지 여행와서 한국 음식을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 패스.

음식 코너 앞에는 자연스럽게 어디든 걸터앉아서 음식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분위기가 조성중이다.

귀여운 강아지들이 많아서 허락을 받아서 한번 담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몸이 많이 피곤해서 그냥 넘어갔다.

 

다음으로 눈길이 간 곳은 통일된 티셔츠가 인상적인 트래드재즈 공연이었다.

이곳 역시 인파로 사진 찍기가 쉽진 않았지만 슬쩍 구경하고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뒤에서 기회를 잡으니 대강 건질만한 거리는 된다.

미도스지 페스타의 특징이기도 한데, 전국구급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을 초정하는게 아닌

아마추어들의 다양한 공연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마음 편하게 축제에 녹아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

 

큰 돈 들여 연예인 초청하는 축제는, 그냥 먼 발치에서 굵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구경하는 동물원과 같은 느낌.

보행자 천국이라는 취지에는 역시 이렇게 친숙해 보이는 일반인들의 숨겨진 솜씨에 감탄하는 것이 어울린다.

 

 

 

나이 지긋하게 드신 분들의 가벼운 스윙을 듣고 있으면, 뷰파인더를 보고 있더라도 가끔 몸이 들썩거려서 셔터찬스를 놓치곤 한다.

물론 이럴 때는 사진따윈 망쳐도 관계없다. 어디까지나 여행의 증거품일 뿐, 이 사람들의 공연은 귀로 즐기는 것이니까.

아마추어라고는 하지만 실력이 떨어진다고는 볼 수 없고, 국내 왠만한 프로밴드와 거의 동일한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똥배와 가죽모자가 묘하게 어울리는 플라리넷 연주 할아버지는 중년의 미학을 여지없이 피로해주는듯 하다.

좀 전의 길거리 농구에 비해 조용한 편이지만, 나이 지긋한 분들이 느긋하게 감상하는 모습은, 이 축제가 내부적으로 튼실한 녀석이라는 반증이겠지.

 

 

 

이제 저 너머에 슬슬 난바역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사이바시(心斎橋)에서 난바역까지 이어지는 미도스지 거리는 그렇게 길진 않지만

자동차에서 해방된 시민들의 모습엔 평소보다 활기가 넘치는 듯 하다.

 

 

 

지체 부자유자들도 단체로 관광 나왔었는데, 도우미들의 힘을 빌어 관람에 무리가 없에 공간도 잘 만들어 주더군.

눈높이가 거의 같아서 사진이 잘 안나오길래 카메라를 최대한 치켜들고 촛점을 무한대에 맞추서 한장 찍어 봤다.

오른쪽에 보이는 핑크색 부스는 미용 연습생들이 원하는 사람들 상대로 무료 이발, 화장을 해 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웨딩 컨테스트 비슷하게, 미용사들이 모델들에게 각종 드레스로 치장하는 곳도 있다.

 

모두 나하고는 그닥 인연이 없는 곳이라서 그냥 슬쩍 쳐다만 본 후 발걸음을 옮긴다.

 

피로가 점점 누적되는지 몸이 무거워지는게 느껴진다.

교통비가 비싼 일본이라 난바역에 도착한 후로는 계속 도보로만 걸어다녔기 때문에

호텔로 돌아갈 때도 물론 걸어서 갈 생긱이었지만,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않는게 의외로 타격이 큰 것 같다.

내일 칸사이 스루 패스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이틀간 왠만한 전철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은 걸어서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이동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것도 오래 걸으니 무리가 간다.

 

 

 

희한하게 생긴 건물 주위에서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들고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생방송으로 클라이밍 중계 중이었다. 선발된 지원자들이 제한시간내에 정상에 도달하는 이벤트인 듯 하다.

주위에서 들리는 말로는 곧 개봉하는 어떤 산악 영화와 연계되는 이벤트라고 한다.

일본 영화는 한국 영화 못지 않게 억지 신파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원래 건물 자체가 상당히 높은데, 그 중앙에 클라이밍 시설을 설치에 놓으니

올라가는 사람들의 체감 높이는 상당하리라 예상된다. 저 위치로 치면 거진 30m 는 될 듯 하다.

망원렌즈로 보지 않으면 옆에 카메라맨이 있다는 사실도 눈치재치 못할 정도니까.

 

지금 도전중인 선수는 외국인인듯 한데, 열심히 올라가고 있지만 제한시간이 아슬아슬한가 보다.

넓은 광장이라 소리가 퍼지는 바람에 잘 들리지는 않지만 방송 관계자인듯한 사람이 마이크로 생중계중이다.

 

 

 

육중한 몸무게를 지닌 나로서는 저런 클라이밍을 대체 어떻게 하는걸까 궁금할 때가 많은데

아무리 안전장치가 되어 있다고는 해도 의지할 곳 없는 절벽에 매달려 올라갈 때의 기분은 참 스릴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이번처럼 수백명의 시선과 카메라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상황에서의 압박감은 상상하기 힘들 듯.

 

 

 

진행자가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결국 손을 놓치고 만다.

클라이밍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얼핏 봐도 상당한 난이도인 듯 하다.

한동안 대롱대롱 매달리던 선수는 그래도 저~기 밑에서 박수쳐 주는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한다.

 

계속 구경하고 있으면 한두 명쯤은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축제 시간은 중반을 넘어가고 있고, 볼거 다 챙겨보기 전에 내 체력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이곳은 이 정도로 끝낸다.

 

 

 

음악 중심의 이벤트 공간에는 세계 각국의 뮤지션들이 가볍게 몇 곡씩 연주중이었는데

멕시코의 활기차면서도 적당히 힘 뺀듯한 음악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분위기 띄우는 법도 잘 아는 아저씨가 가벼운 개그도 선보여 주시고. 일본어가 아니라서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미도스지 페스타는 오후 5시에 모두 끝나지만 도톤보리나 각종 주변 공연장에서는 주말에도 이벤트가 이어진다.

그 중에는 한국 초청팀인 난타 팀도 포함되어 있더라. 뒤의 팜플렛 보면 슬그머니 보인다.

오사카 사람들의 취향과는 꽤나 잘 맞을 듯 하다.

 

그 외에 검은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60~70대의 신사 할아버지들이 신들린듯한 솜씨를 뽐내던 재즈 공연도 있었는데

일본 재즈 역사와 길을 함께 걸어온 듯한 느낌의 그 밴드의 보컬은 영어도 매우 능숙해서, 일본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본토 발음의 재즈송을 열창했다.

잠깐 들어도 놀라운 실력의 밴드라는걸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 인지도도 있는 밴드일 듯 하다.

좋은 음악에는 사람이 몰리는게 당연한 듯,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사진은 한 장도 담지 못했지만 귀는 즐거웠다.

 

 

 

난바 역이 거의 보일만한 거리까지 걸어가는데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의 공연 소리가 들려온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쪽은 사람들로 가득차서, 밴드의 뒤쪽 통행로에서 사진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음악을 감상중이었다.

 

청춘 스트리트2012 라는 제목의 이벤트장이었는데, 오사카 시내 고등학교 동호회가 참가해서 실력을 뽐내는 장소다.

밴드 실력이야 출중하다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리듬에 맞춰서 멤버 전원이 발도 구르고 점프도 하고 하면서 흥을 돋구는게 인상적.

 

 

 

활기찬 음악을 들썩들썩하는 율동과 함께 선보이니 꽤나 들을 만 하다.

고등학교 경음부가 축제의 한 부분을 당당하게 맡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요즘 한국 고등학생들은 이런 동아리 활동 좀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려나? 적어도 내가 고딩때는 그런거 없었다.

 

 

 

곡 하나가 끝나고 자리를 옮기려 했는데, 그 다음 흘러나오는 곡이 귀에 익다.

혹시나 싶어서 가만히 들어보니 역시나,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곡 '꽃~모든 사람의 마음에 꽃을' (花~すべての人の心に花を) 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항상 느꼈던, 히로시마의 원폭 희생자보다도 기구하고 서글픈 역사를 간직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애환을

가슴 저리는 음악으로 대변하는 대표곡 중 하나인 이 곡을 이곳 오사카의 고교 밴드부에게서 들을 수 있을줄은 몰랐다.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때 독립하지 못했다면 일어났을 한국의 대체역사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150년전 류큐 왕국이 멸망한 이후 식민지로 전락한 오키나와는, 갖은 수탈과 차별을 당하면서도

태평양 전쟁 당시엔 '위대한 황국 신민'으로서 총알받이가 되거나 자결을 강요당하는 이중적 취급을 받으며

본섬만으로는 제주도의 60%밖에 되지 않는 이 섬에서 20만명의 원주민이 미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총알에 목숨을 잃었다.

 

전쟁 후에도 일본 전체에서 학력성취도, 취업률, 평균 수입이 가장 낮은 곳이며, 일본내 0.2%의 토지에 75%의 미군이 주둔중인,

과연 이곳이 본토와 같은 일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소외된 지역.

 

이런 슬픔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의 음악은 구슬프기 그지 없으면서도 그 내용만큼은 눈물에 젖어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진정한 눈물을 흘려보지 않으면 떠올릴 수 없는 애잔함이 그 희망적인 가사 속에서 심금을 울린다.

 

 

 

 

강은 흘러서 어디로 어디로 가나요

사람도 흘러서 어디로 어디로 가나요

 

그 흐름이 닿는 곳에는

꽃으로서 꽃으로서 피워주고 싶네요 

 

울어 주세요 웃어 주세요 

언젠가는 언젠가는 꽃을 피워요 


눈물은 흘러서 어디로 어디로 가나요

사랑도 흘러서 어디로 어디로 가나요


그 흐름을 이 가슴에

꽃으로서 꽃으로서 맞이하고 싶네요

 

울어 주세요 웃어 주세요 

언젠가는 언젠가는 꽃을 피워요 


꽃은 꽃으로서 웃을수도 있죠
사람은 사람으로서 눈물도 흘려요

  
그런게 자연의 노래 인거죠

마음속에 마음속에 꽃을 피워요

 

울어 주세요 웃어 주세요

언제까지라도 언제까지라도 꽃을 쥐어요

 

울어 주세요 웃어 주세요

언제까지라도 언제까지라도 꽃을 쥐어요

 

울어 주세요 웃어 주세요

언젠가는 언젠가는 꽃을 피워요

 

 

 

 

 

며칠 후인 5월 15일은 오키나와 영유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된지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쟁의 참혹한 역사 속에서 류큐인들이 바라는 것은 여전히 총칼 대신 꽃을 드는 것.

 

 

 

 

이 곡이 흐르는 동안 건너편의 관객들 중 눈시울을 붉히는 중년층을 몇몇 볼 수 있었다.

수천km 떨어진 오키나와의 음악을 오사카 거리에 선사해준 젊은 학생들에게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