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두시간 정도 자고 새벽 6시에 넷까페를 빠져나온다. 근처의 요시노야에서 규동 한그릇 주문.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한끼 떼우기에 좋은 녀석이고, 사진도 한장 남길까 싶어서 들어갔는데

왠걸 막상 규동 나오자 그냥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사진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거의 다 비우고 나서야 아차 싶더군.

기회는 아직 많이 있으니 아쉬울 것 없이 밖으로 나와서 인적없는 난바역 거리를 걸어다닌다.

 

예약한 비즈니스 호텔은 오늘 오후 3시부터 들어갈 수 있고, 짐은 훨씬 전부터 맡길 수 있지만

아무래도 새벽 6시에 찾아가서 짐 맡긴다는 건 뭔가 이상해서 일단은 가볍게 산책이나 할까 싶었다.

 

예전 자전거 여행때는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새벽 5시에 도착해서 일단 직원 불러서 짐부터 맡겨놓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다니다가 까페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그랬는데, 몇달 지나고 나서는 오전 11시쯤 도착해도

몰골이 영 아니었던지 짐을 맡겨주는게 아니라 청소 다 된 방을 미리 들어갈 수 있게 배려해 주기도 했다.

뭐든 메뉴얼 대로만 움직이는 일본 사회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 건 참으로 신선한 경험.

 

난바역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온갖 PC 부품과 게임, 만화, 메이드까페등이 즐비해 있는 덴덴타운이 나온다.

휴일엔 특히나 굉장히 붐비는 곳이지만 새벽 산책의 특권이랄까, 이렇게 한산한 덴덴타운의 모습은 진귀한 경험이다.

 

 

 

 

친구에게 부탁받은 물건이 있어서 언젠가 한번 더 들려야 할 곳이지만 지금은 문 연 곳도 없으니 그냥 패스.

목적지도 없이 마음 내키는대로 시장 옆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차장에 기분좋게 퍼질러 있던 비둘기를 한번 담아보려고 카메라를 꺼내는 순간, 놀랐는지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버린다.

괜히 쉬고 있던 녀석 깨운게 아닌가 싶어서 미안하다.

 

 

 

싸구려 민가가 이어진 좁은 골목길은, 후줄근한 콘크리트 벽과 썩어가는 나무판대기 건물이 묘한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데

몸을 숙여야만 겨우 사람 한 명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작디 작은 뒷문 근처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보다 훨씬 생명력 넘치고 아름답게 자라나 있는 녀석들이 꽤나 빡빡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허름한 곳도 이 녀석들의 매력 덕분에 사람 살 만한 곳이라는 인상으로 바뀌니 참 대단하다.

 

재래시장 근처라서 아침이 빠른지 가게 준비하는 상인들의 모습도 보이고, 특히 생선가게에서는 벌써부터 문 열어놓고 생선 손질중이다.

운동복에 슬리퍼 끌며 걸어오는 노인네나, 제대로 차려입고 산뜻하게 활보하는 아가씨나

이 시간대엔 대부분 개와 함께 산책나오는 경우가 많다. 졸졸 잘만 따라다니는 녀석도 있고 어지간히도 말 안듣고 옆길로 빠지는 녀석도 있고.

 

 

 

난바역 북쪽은 서울의 명동거리를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거리지만

남쪽으로 내려오면 서너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스낵바나, 노동자들을 위한 3~4평짜리 원룸 주택 등이 포진해 있다.

당연히 욕실이나 베란다 등이 있을리가 없는 그런 원룸 생활자들을 위한 목욕탕이나 코인 세탁기 등이 근처에 꼭 있는것이 특징.

 

익숙함의 차이일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방음도 되지 않는 그런 조그만 곳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까 항상 의아하긴 하다.

에도시대부터 수백년간 이어진 생활 방식이니 서민들에겐 익숙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구밀도가 대구의 4배 가까운 오사카이니 그런 생활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일까.

 

 

 

지독한 불경기는 오사카도 예외가 아니고, 불경기의 여파를 직격으로 받는 것은 역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다.

세계 공통으로 불경기에는 강건 보수파가 인기를 얻고 , 오사카 시민도 41세의 젊은 보수 우파 하시모토 토오루(橋下徹)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일본 제 2의 도시 오사카에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하시모토 시장은, 학교와 관공서에 국가 제창 의무화, 일본의 핵무기 보유 주장 등

과격함으로는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에 못지 않는 우파에 속하지만, 공무원의 철밥통 수당 삭감, 복지정책의 개혁 등 시민들의 불만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진보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는 일본 정치계의 새로운 물결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

 

한국에서는 대외적인 발언이 영 꺼림직한 부분이 많아서 이시하라의 뒤를 잇는 꼴통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한데

정작 오사카 시민들에게는 서울의 박원순 시장만큼이나 지지를 받고 있는 묘한 인물이다.

물론 내가 오사카 시민이라도 정책적인 면에서는 그를 지지하고 싶을 만큼 구미가 당기는 개혁안을 불같이 추친하고 있는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지 전까지는 그의 행동이 정치적 퍼포먼스에 불과한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우니 단언은 금물.

 

오사카 공무원들에게 비난받는 반면 정통 우파 자민당, 정통 좌파 공산당에게 동시에 지지를 받는 이 독특한 인물이

내부로부터 심각하게 썩어들어가고 있는 오사카시의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궁금하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든 생각.

 

 

 

 

측면에서 보면 이런 식이다. 포장마차처럼 서서 손님을 받는 곳인데, 뒷편엔 살림사는 집과 연결이 되어 있는 방식.

도톤보리나 신사이바시 등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지만 이런 지역민 상대로 하는 외곽의 선술집은 점점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오사카는 특히 한국인의 입지가 강해져 가는 곳 중 하나인데다, 한인타운 츠루하시(鶴橋) 부근은 요즘 한류열풍과 더불어 인기몰이중이라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는 경쟁 재래시장의 눈길이 점점 곱지않게 변해가는 중이다.

각박한 세상일수록 높으신 분들은 흐뭇하게 내려다볼 뿐, 서로 상처내는 것은 가장 아랫쪽의 영세민들이지.

아버지가 천민 야쿠자 출신인 하시모토 시장이 과연 오사카에서 영향력이 강해지는 재일한국인들에 대해 어떤 방안을 내놓을 것인지 궁금하다.

천박한 극우파의 대표인 이시하라 도쿄지사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한국의 박원순 시장처럼 상생의 길을 택할 것인지...

 

 

 

재래시장가를 빠져나와 츠루하시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예전 자전거 여행때 츠루하시 부근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한인시장에서 6개월만에 닭발과 족발을 사들고 없는 살점 열심히 뜯어먹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한국에서와 똑같이 설사로 시달렸던 것도 이제와서는 그저 추억일 뿐이고.

 

활기를 잃어가는 재래시장가와는 달리 대로변의 대형 할인점은 벌써부터 자전거 타고 장보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국보다 변화에 대해 훨씬 둔감하고 고지식한 일본도 경기 불안에 따른 대형 양판점의 매력을 거슬리진 못하는 듯.

잠시 주춤할 당시에도 재래시장은 지역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희망과 포부에 찬 회생정책으로 용감히 맞선 전례가 있지만

이제는 지역민들간의 연대, 끈끈한 정 같은 따뜻해 보이는 수식어만으로 대형 양판점의 공세를 이겨내기란 힘들어지고 있는게 현실.

 

지독한 불경기에 거대한 천재지변, 철밥통들의 어리석은 인재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일본은

그네들이 최후의 끈처럼 붙잡고 있는 '모두가 힘을모아 이겨나가는' 조금은 공허한 구호만으로 이 정세를 뒤집을 수 있을런지.

 

츠루하시까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갔다가 다시 난바역을 거쳐 비즈니스호텔이 위치한 요츠바시(四つ橋)로 발걸음을 옮긴다.

중간중간 편의점에 들어가 잡지도 좀 읽고 하면서 정말 관광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느긋함을 즐긴다.

사실 오사카에서는 별로 돌아보고픈 곳도 없고, 며칠 후에 있을 출판사와의 미팅 생각에 그닥 유쾌한 기분도 아니다.

내일은 그래도 외국까지 왔으니 제대로 관광 한번 해보자는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코야산(高野山)에 갈 작정을 하고 있지만

오늘은 그러잖아도 칸사이 공항에서 일찍 도착한 탓에 별로 할 일이 없다. 저녁에 서점이나 좀 들러볼 생각 뿐.

 

 

 

거진 5시간동안 그저 걸어다니며 요츠바시쪽으로 향하던 도중

난바역에서 정북쪽으로 나 있는 번화가인 미도스지(御堂筋)거리에서 뭔가 안내방송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뒤에 미도스지 페스타를 위해 차량 통제를 시작하니 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탓인지 수십 명이 넘는 경찰관이 물샐 틈없이 직접 교통통제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미도스지 페스타라는 건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꽤나 유서깊은 축제라고 하는데

사전 지식도 전혀 없었고, 오늘이 축제날이라는 사실도 방송 듣고서야 알았기 때문에

어젯밤부터 2시간밖에 자지 못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이건 놓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호텔에 가서 카메라장비를 제외한 짐만 맡겨놓고 다시 나오면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있고.

 

서점은 축제 끝나고 저녁에 가 봐도 되니까 예정없던 공허한 일요일에 관광다운 일거리가 하나 생겨서 기분이 좋다.

 

미도스지 거리는 오사카 최대의 번화가 도톤보리(道頓堀)와 크로스식으로 교차된 번화가.

난바역에서 북쪽으로 길게 난 미도스지와,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도톤보리가 교차하는 곳은

일요일 오전에도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관광객들이 도톤보리에서 빼놓지 않는 돈키호테와 글리코 전광판이 보인다.

이곳은 밤이 되어서야 본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라 흐릿한 대낮 풍경은 뭔가 어수선하다.

 

미도스지 페스타 때문인지 평소보다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요츠바시로 향하는 길은 어디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 와중에 힘든 숨을 내쉬는 녀석을 발견.

길고양이치고는 나이를 꽤나 먹은 녀석으로,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이 힘겹게 들쑥거린다.

거의 움직일 기력이 없는 듯 한데, 카메라를 슬쩍 들이대도 조금 움찔거릴 뿐 재빨리 피할 여력은 없는 듯 하다.

더 이상 다가갔다간 무리해서라도 도망갈 듯 하고, 그러면 괜히 고생만 시킬 것 같아서 다가가진 않는다.

 

일본도 대도시 고양이들은 온갖 질병과 배고픔에 시달리고, 시골 고양이들은 느긋하고 여유롭다.

한달 쯤 전에 시골도시 유후인에서 친근하게 나에게 머리를 들이밀던 고양이들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모습.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실은 도시 사람도 마음 속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도스지 거리를 살짝 옆으로 벗어나서 요츠바시쪽으로 걸어가면 아메리카무라(アメリカ村)를 통과한다.

아메리카무라는 이름 그대로 미국향기가 조금은 느껴지는 신세대들의 놀이터. 각종 마이너 샵과 명품점이 얽혀있고

분위기를 중요시하는 까페와 이국적인 스테이크점, 이탈리안 식당 등이 포진해 있는 곳이다.

 

실제로 외국인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묘하게 굽이친 프레임 디자인이 살짝 바이크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Schwinn 사의 자전거가 멋져보여서 한 장 담는다.

이곳 거리엔 1950년대에 만들어진 빈티지 자전거를 전시해 놓은 샵도 있는데, 실로 기분좋게 자랑은 할 수 있겠지만 그 자전거로 여행은 무리겠지.

 

 

 

호텔에 도착해 짐을 맡겨놓고 다시 미도스지쪽으로 걸어나온다.

난바역에서 요츠바시역까지는 지하철로 두 코스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사실 난바역이란 게 역 한개의 이름이 아니라 난카이선, 킨테츠선, JR선 등등 수많은 시영 전철, 국철, 사철 등이 얽혀있는 곳이라서

난바역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간만 해도 한 바퀴 도는데 20분은 걸리는 곳이다.

 

어제 공항에 도착한 후 넷까페서 새우잠 2시간 정도 잔 것 외에는 15kg 정도의 짐을 짊어지고 줄창 걸어다니기만 했기 때문에

오후 1시쯤 되자 상당히 피곤한 느낌이었지만, 일단 1년에 한번 있는 페스타를 볼 기회가 생겼으니 놓치기는 아쉽다.

호텔에 짐을 맡겨놓으니 어깨는 조금 홀가분해졌지만 카메라 장비가 여전히 5kg 정도는 되기 때문에 가뿐한 느낌은 아니다.

 

다시 미도스지 거리로 돌아오니 어느새 차량은 통제되고 사람들은 인도쪽에 설치된 펜스 앞에 줄지어 모여있다.

축제 시작시에 뭔가 퍼레이드 같은걸 하기 때문에 도로를 통제하고 있다는데, 운 좋게도 펜스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다.

이걸로 그 퍼레이드라는 걸 제대로 찍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피로도 잠시 잊을 수 있는 느낌.

반대편에는 유명한 백화점 건물이 서 있는데, 구불구불한 외관이 꽤 멋져서 축제가 시작되기 전 한 장 담아본다.

 

 

 

이윽고 미도스지 거리 끝부분에서 개최 신호를 알린다. 사전 지식이 전혀 없어서 과연 어떤 퍼레이드일까 기대중.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이 개회사를 주절거리고 나서 나머지 한쪽 끝인 난바역까지 걸어가는 것으로 페스타가 시작된다.

나야 뭐 오사카 시민도 아니고 이런 사람들 걸어가는 모습엔 관심이 없었지만, 수동렌즈 연습삼아 한장 찍어본다.

 

동쪽 사람들에 비해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질서 안지키기로 유명한 칸사이 지방이라서

요인 경호에 신경쓰느라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밀려오는 인파를 막고 통제하느라 경찰들이 진땀을 뺀다.

 

 

 

 

그 뒤로 카메라 여러개를 짊어진 프레스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고

이제 뭔가 퍼레이드가 시작되겠구나 싶어서 카메라를 단단히 쥐어본다.

헬로키티의 머리에 달려있는 리본같은 녀석을 이끌고 진군하는 스탭들을 시작으로 어떤 행렬이 이어질까 사뭇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사람들 지나가고 나니 경찰들이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라고 하면서 펜스를 치워버리는게 아닌가.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멍하게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제 좀 살것같다는 느낌으로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순식간에 도로는 인파로 가득 차고, 나는 여전히 멍하니 서서 이게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정리하기 바쁘다.

 

결국 이 미도스지 페스타라는 건 원래 도로를 통제하고 보행자 천국같이 만들어 놓고, 거기에 각종 이벤트를 벌이는 축제였던 것.

올해가 10주년 기념이라서 그냥 하시모토 시장이 거리 끝에서 끝까지 한번 걸어가는 이벤트가 있었고

그 이벤트를 위해 사람들을 도로 바깥에 붙잡아 놓았던 것이다.

 

펜스 맨 앞에 자리를 잡아서 이제 퍼레이드 사진 좀 찍겠구나 하던 내 생각은 그저 어이없는 망상일 뿐이었다.

되려 곳곳의 이벤트장에는 벌써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어지간한 장소에서는 사진 찍기가 불가능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맞닥트린 이벤트란 나름의 두근거림도 있지만, 역시 돌발 상황에는 대처하기가 힘들다는걸 실감했다.

 

뭐가 어찌됐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기분으로 카메라 짊어매고 보행자 천국의 인파속으로 뛰어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