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의 목표는 저 산입니다. 상당히 특이하게 생겼죠.
300m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산이지만 이곳에서는 명산으로 유명한 야시마(屋島)산입니다.
시코쿠에는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인 홍법대사 쿠카이(空海)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홍법대사가 순례한 88개소의 사찰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행이 꽤나 유명하죠.
자동차로 가면 며칠만에 모두 돌아볼 수 있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을 듯.
실제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순례길을 걷고 있으며 외국인들에게 오히려 인기인 코스라고 하네요.
저는 자전거로 몇 군데 둘러봤습니다만 그냥 걸어서 돌아보려면 거진 한 달넘게 걸리니 쉬운 길은 아닙니다.
저기 야시마 산 정상에는 그 88개소 순례길 중 84번째 사찰이 위치해 있습니다. 전망도 좋고 해서 인기있는 관광지죠.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절 하나만 둘러보고 가기엔 시간과 노력이 아깝습니다.
이 곳은 야시마 사찰 외에도 시코쿠의 옛 마을 모습을 재현해 놓은 시코쿠무라(四国村)라는 민속촌도 위치하고 있어서
한 번의 이동으로 두 군데를 모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에 엄니에게 보여드리려는 의도에서 선택했죠.
하지만 5분 정도 걸리는 시코쿠무라까지 가는 도중 관광객이 한 명도 없었기에 오늘 혹시 휴일인가 하는 걱정까지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매표소에 직원이 상주하고 있는 걸 보니 휴일은 아니었는데 조금 더 걸어가고 나서야 오늘 사람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가 일본 최고의 폭염이 창궐하던 때라서 아무도 이런 곳에 오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기온이 37도까지 올라가서 입구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땀으로 절어버리더군요.
완성도가 매우 높아서 인기가 많은 민속촌인데 그런 만큼 에어콘이라던가가 설치된 현대식 건물이 없습니다.
덕분에 이 민속촌을 한 바퀴 다 돌아보는 동안 단 한명도 다른 관광객과 만나지 않고 단 둘이서 고독을 즐길 수 있었죠.
어찌보면 굉장한 경험이었지만 정말 이렇게 더워서는 여기 안 오는게 이해가 될 정도더군요.
민속촌으로 들어가려면 카츠라바시라는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하는데 이게 재현도가 쓸데없이 대단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다리 하나 쑥 빠져버리는 건 일도 아니겠더군요.
엄니도 매우 조심하며 건넜고, 저는 이딴 나무조각이 제 덩치를 이겨낼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을 하며 건넜습니다.
사실 그 질기다고 하는 칡덩굴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다리가 끊어질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시코쿠는 산악 지형이 많고 발전이 더딘 편이라 대도시에서 보던 민속촌과는 분위기가 좀 다른 편인데
시작부터 사람을 살떨리게 만들어 주는군요. 항간엔 이 다리가 가장 좋은 볼거리라고 하는 곳도 있으니까요.
물론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갈 수도 있지만 여기 와서 이걸 안 건너가 보는 것도 좀 아쉽겠죠.
전통을 보존하려는 마음 하나는 이상할 정도로 강한 일본이라서, 당해 본 경험이 있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좀 거북하기도 한데요.
그것과는 별개로 이 마을을 평가하자면 참 용캐로 이런 곳에 이 정도 규모의 민속촌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시대까지의 시코쿠 각지 민가를 재현한 마을인데
애초에 시코쿠라는 곳 자체가 타 지역에서의 접근성이 그리 좋은 곳이 아님에도
마을 전체가 산 중턱에 파묻혀 있어서 주변에서 전혀 현대적 건물의 흔적을 느끼지 않고 순수하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면 관광 상품으로서의 상업성이 오히려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일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건축물의 보존 상태는 완벽에 가깝습니다.
날이 날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마을 안에서는 직원 한 명 보이지 않고 적막함이 감도는군요.
엄니와 저는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마을 전체를 전세낸 듯이 돌아다닙니다.
시코쿠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가 적고 맑은 날이 많지만 태풍 시기엔 엄청난 강수량을 보이는 편이라
집의 구조나 재료 등이 조금 특이한 편입니다. 전체적으로 넓고 평평한 거실이 많으며 바람이 잘 통하도록 설계되어 있네요.
코스를 정상적으로 밟으면 맨 처음 보이는 곳입니다. 카부키 극장이네요.
실제로 이 곳에서 공연도 가끔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오늘은 공연은 커녕 마을 전체에 사람이 엄니와 저밖에 없으니.
관광객들에게 얽혀서 복잡한 것도 싫지만 이렇게 덩그러니 둘만 거니는 것도 좀 무섭습니다.
평범한 곳이라면 모르겠는데 이곳 시코쿠무라는 시골의 산 속에 위치해 있다 보니 좀 섬뜩하다고 할까요.
이 곳은 시코쿠 각지에서 보존중이던 33개의 민속 가옥을 재현해서 모아놓은 곳입니다.
재현이라고 해도 단순히 다시 만든 게 아니고 그 가옥을 해체해서 전부 가져온 다음 이곳에서 재조립한 녀석들이죠.
나고야 근처의 이누야마(犬山)라는 곳에도 유명한 메이지무라(明治村)가 있는데
그 곳은 무려 메이지 시대 당시 하와이 같은 곳에서 일본인이 생활하던 저택을 전부 해체해서 갖고 와 재현해 놓기도 했습니다.
상업적인 이득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 정도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재현도에 신경을 쓰고 그것을 무기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굉장한 시도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곳도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대부분이 실제 사람이 살던 가옥을 옮겨온 것이라 이곳저곳 볼 거리가 많습니다.
한국처럼 부엌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톡특하네요. 뭐, 기본적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한국 가옥과의 차이가 커지긴 합니다.
엄니 입장에서 보자면 꽤나 친숙해 보이는 느낌이 든다고 하시네요.
엄니 어릴 적에 살던 곳도 일본식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던 집이라서 말이죠.
대구는 아직도 일본식 가옥이 조금 남아 있기도 하고, 엄니 연세라면 아마 일본식 가옥이 그렇게 특이하지도 않을 법 합니다.
물론 이곳 시코쿠무라는 1800년대 가옥들도 있는데다가 본토와는 꽤나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녀석들이라 엄니도 재밌게 보실 수 있겠죠.
가옥 구경뿐 아니라 이 곳의 자연 풍경 역시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자연의 생명력이 팍팍 느껴진다고 할까요. 시코쿠 88개소 사찰 근처에 있어서 주변에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원래 이런 마을이 있던 곳이 아니고 각지의 가옥들을 모아서 만든 곳이다 보니
실제로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형이 복잡합니다.
엄니는 물도 많이 마시고 화장실도 가고 하면서 휴식을 취하며 이동합니다.
기온이 너무 높아서 땀 하나는 정말 시원하게 빼고 가는군요. 다행히도 공기가 매우 좋아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고 하시네요.
가옥들은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표시가 없는 곳은 그냥 들어가 봐도 됩니다.
한국보다 나무가 풍부한 지역이라 황토를 이용하는 가옥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일까요.
에도시대 이전에는 각 지역별로 발달한 상업이 에도시대의 산킨코타이 제도로 인해 유통망이 완성되면서
1800년대를 기점으로 조직적 상업사회 기틀이 완성되고 있었는데, 시골인 시코쿠도 다르진 않습니다.
기후와 지형적 영향으로 각종 농산품과 해산물이 유명했던 지역이라서 시코쿠무라 안에도 양조장이라던가 곡물 창고같은게 드문드문 보이네요.
지난 번 포스팅에 아기자기한 조각품들이 많은 우동집에 나왔었는데요.
거기서 나왔던 화로와 냄비가 여기서는 실제 크기로 전시중입니다.
일본의 전통 가옥은 이렇게 거실 한가운데 물을 지켜서 식사를 하는 방식이 꽤나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목조 건물이다 보니 불 관리에 매우 엄격했는데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는게 의아하기도 하죠.
물론 목조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수도권에서는 집 안에서 불 피우는 행위 자체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런 거 없었습니다.
민속촌 전체가 산등성이를 타고 만들어져 있어서 평지가 별로 없네요.
거대한 면적을 엄니와 둘이서 독점하는 건 좋아도, 왜 사람이 없는지 절실하게 느끼며 걷고 있습니다.
척 봐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건물이 놓여있네요.
곡물 창고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설탕을 만드는 곳이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일본 최초로 정제 설탕을 만들어 내던 곳입니다.
세계 어디든 동일하지만 당시엔 설탕이 매우 귀한 몸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지역의 특산품으로서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죠.
소를 이용해서 맷돌을 돌리는데 이 방식은 오키나와의 전통적인 방식과도 거의 일치합니다.
그러고보니 한국은 설탕을 어떻게 만들었으려나요. 아마 이런 정제설탕보다는 엿이나 꿀을 애용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건물 주변에는 이렇게 사용했던 맷돌들이 장식품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엄니가 보시더니 참 많이도 만들었다 하셨죠.
정제 설탕은 에도시대만 해도 꿀보다 훨씬 비싼 녀석이었고, 상류층의 허례허식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뭣 때문에 이렇게 많은 맷돌을 모아놓은 건지는 모르겠네요. 정말로 그냥 장식용일런지.
둘이서만 주구장창 구경하고 있는데 더욱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주의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돈 내고 들어가는 민속촌 안에서 맷돼지 주의라는 표지판을 봐야 한다니.
공교롭게도 저는 자전거 여행 중 시코쿠에서 맷돼지와 조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저 푯말을 보면 긴장이 되네요.
시코쿠 해안선을 따라 밤 8시쯤 달리고 있는데, 멀쩡하게 도로와 민가가 주르륵 늘어선 평범한 해안가 마을 한가운데서
서로 마주보는 모습으로 딱 만나게 되었습니다. 짐까지 더해 40kg 가까운 제 거대한 여행용 자전거와 거의 비슷한 덩치였죠.
실제로 지근거리에서 보는 맷돼지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등골이 서늘해진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느꼈네요.
저는 감전된 사람처럼 자전거를 빙글 돌려서 반대쪽으로 미친듯이 도망갔습니다만 다행히도 맷돼지 역시 저한테 놀라서 저와 반대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자전거 위에 타고 있다보니 제 덩치도 워낙 크게 보인 것이겠죠. 근 5m 정도 거리였기 때문에 저한테 달려들었으면 아마 다음 날 뉴스에 나왔겠죠.
민속촌의 가장 위쪽에 도착하니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정갈한 조경수와 반듯한 콘크리트 건물이 숲 속에서 맞이해 줬습니다.
딱 보니 이 건축물은 안도 타다오가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타카마츠에서 가까운 조그만 섬 나오시마가 부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섬 전체를 예술의 마을로 만들어 버렸는데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미술관이다 보니 이곳과 안도 타다오는 꽤나 인연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코쿠무라에도 미술관이 들어선 것 같습니다만, 여긴 따로 입장료가 들어가기 때문에 관람은 포기했습니다.
사실 내일 찾아갈 곳이 나오시마라서 굳이 이곳을 들를 필요가 없기도 하거든요.
엄니나 저나 미술품 자체에 크게 관심이 있는 성격도 아니고.
그래서 미술관에 들어가지는 않고 그의 예술관을 살짝 흉내내어서 사진을 한 장 담아봅니다.
가장 인공적인 재료인 콘크리트를 이용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죠.
건축계의 거장이라서 사실 들어가 보면 구경거리는 많겠지만
오늘은 이곳에서만 시간을 사용할 수도 없고, 내일 나오시마에서 온갖 예술품을 감상할 예정이라 그늘에서 땀만 식힙니다.
그나마 날씨가 이렇게 더워도 도시의 매퀘하고 찝찝한 공기가 아니라 땀을 흘려도 나름 상쾌합니다.
엄니도 땀은 많이 흘리시지만 공기가 참 좋아서 나름 견딜 만하다고 하시네요. 조금 더 힘내서 돌아보고 야시마로 올라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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