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보여주고 입장료 반값 할인받은 후 짐 맡기는 곳을 물어보자 자기들이 직접 맡아주겠다고 한다.

백팩이 좀 커서 보관함에 안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애초에 보관함이 없으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도 했고.

입구 부분이 수리중이라서 약간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정원쪽은 돌아보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다행.

 

변형된 입구로 들어가는데 안내하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방금 도착하신 일행분이신가요?' 라고 물어본다.

아마도 같은날 이곳에 페리로 도착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이곳에 온 모양인데, 그쪽과는 관계없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출 리는 없을텐데... 아무래도 그쪽 팀 역시 비 그치기를 기다린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얽히는 일 없이 혼자서 느긋하게 돌아보고 싶으니 전후방 주시해가며 전진.

 

아직 비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도중이라서 그렇게 화창하진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쨍쨍해 질듯한 하늘이다.

입구를 통과하고 처음 마주한 유시엔의 모습은 생각보다 넓으면서도 생각보다 좁은 듯 하다.

 

뭔 선문답인가 하면, 정원 전체의 크기는 생각했던것보다 커서

지역의 대표급 정원들에 비하면 좀 작아도 충분히 입장료를 지불할만한 넓이였다는 뜻이고

생각보다 좁다는 것은, 정원에 심어진 조경수들의 밀도가 좀 빡빡한 느낌이 들어서 확 트이는 시원한 느낌보다는 오밀조밀하다는 뜻.

 

 

 

그래도 살짝 주위를 둘러보니 한적한 시골마을의 외딴 정원이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다.

굉장히 세심히 주의를 들여 가꾸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드는 조경수들의 상태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정원이란 온갖 식물들을 최상의 상태로 보전하면서, 산, 물, 땅 등의 요소를 축소해 집약시킨 공간.

인위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쟀든 이런 인공적인 미를 유지시키려면

마치 축산업에 종사하듯이 휴일없이 사시사철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확실히 관리 하나는 잘 되어있다는 느낌.

 

 

 

입구가 달라졌기 때문에 원래 이 루트인지, 내가 지금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지만

산책 시작하자마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정원 내부의 식당인데, 정원을 둘러보기도 전에 식당이 나오는건 조금 의아하다.

 

하지만 공사중이라고는 해도 소소한 서비스 정신을 잊을리가 없는 이쪽 사람들 탓에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 정확한 루트라고 나무 푯말이 확실히 박혀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은 이 방향이 맞다.

보통 식당이나 기념품점은 관광이 다 끝나는 지점에 세워놓는게 지극히 정상적인데,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건지.

 

아무튼 마츠에에서 밥은 여러가지 많이 먹고 왔으니 여기서 한끼 할 일은 없다.

정원을 바라보면서 한끼 하는 식사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여기에서까지 외국인 할인은 되지 않겠지.

 

정원의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는 외관이나 색상, 소재 선택은 이곳의 완성도를 재차 어필하는 듯 하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서 기분이 좋아진 이유중 하나는, 이곳이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이끼 정원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고, 일본의 정원 중에서는 단연 이끼 정원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유명한 정원이라고 해도 이끼 정원이 아닌 경우는 많다. 정원 전체를 이끼로 덮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

예전에 도쿄 옆의 하코네 이끼정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태양빛에 반사되는 찬란한 이끼들의 향연이 너무나 인상깊었기에

오랜만에 접하는 이끼정원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일시에 기분을 고취시켜준다.

 

하코네 이끼정원에 대한 포스팅은 아주 옛날 녀석이 남아있으니 보실 분들은 이곳으로.

 

 

 

이끼 정원은 일반 정원에 비해 풍성함이라고 할까,

걸어가는 루트 이외의 장소가 전부 자연의 생명력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힘들지만, 습한 기후의 일본에서도 이끼 정원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수십 가지의 이끼를 배양해서 정원을 만들어도, 그 기후와 토양등 수많은 요소에 적합한 녀석 몇종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생장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냥 놔둬서 되는 녀석들도 아니고, 사람이 만든 공간에서 살아가려면 사람의 철저한 관리가 필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끼 정원은 별천지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연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금 저 사진의 토양 부분이, 이끼가 없는 평범한 흙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느낌이 어떨지 짐작이 갈까.

잔디와는 완전히 별개의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생소한 풍경이다.

한국에서도 이끼 정원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지만, 야외에 광범위하게 만들기에는 기후상 어려움이 따른다.

 

가장 일본적인 맛을 느낄 수 있는게 이 정원이라면, 그 중에서도 이끼 정원이야말로 타국 여행이라는 느낌을 확실히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밀도가 조금 높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 없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시엔의 모습은 1등급 정원이라고 결론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본의 3대 정원이라는 곳중 두군데는 돌아봤지만, 그 몇대 어쩌구 하는 수식어에 휘둘리는 듯한 느낌.

훌륭하기로야 더할 나위 없지만, 그 이름값 때문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정원의 모습은

본연의 가치를 감상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 유시엔은 한적하게 홀로 거닐만큼 여유가 있어서, 조금 빡빡한 느낌이 들어도 충분히 마음에 든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쪽도 여기저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긴 한데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를 앞에 세워놓고 찍는 기념사진인듯, 나하고는 다른 차원의 생물 같으니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을 세워놓고 사진 찍는 반면 이동속도는 나보다 훨씬 빨라서, 내가 몇장 찍고 있으면 금새 앞질러 가버린다.

덕분에 이쪽은 얽힐 필요없이 천천히 진행할 수 있으니 나쁠거 없지만.

 

 

 

규모로 보면 그렇게까지 큰 편에 속하지 않지만, 이곳저곳 둘러봐도 상당히 알찬 느낌의 유시엔.

정원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동선과 그 주변의 풍경 등 설계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복잡하다.

걷다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 차 한잔 할 수 있는 가게 등도 철저하게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한적한 시마네현이기 때문에 이렇게 멋들어진 풍경 촬영에 열을 올려도 방해받지도, 남을 방해하지도 않는 여유가 가능.

유명한 정원에 가면 걷다가 마음껏 사진 담을 공간마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틀간의 페리 여행과 이어지는 비 때문에, 시작부터 뭔가 꿀꿀하고 초초한 기분이었던 이번 여행에서

오랜만에 홀로 녹음속을 마음껏 거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듯 하다.

 

 

 

사진 찍을 포인트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고.

사진 한장 찍기전에 1분쯤 그자리에 서서 천천히 주변 풍경을 음미하는 시간도 잊지 않는다.

 

옛날 일본 다이묘들은 이런 정원을 자기 집 안에 떡하니 지어놓고 매일 산책하며 물고기들에게 먹이나 주는 호사를 누렸다.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만 가능한 사치스러운 행위가, 다행히도 오늘날엔 약간의 입장료를 지불함으로서 체험이 가능하다.

 

물론 옛 다이묘들 중에는, 백성들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기 소유의 저택과 정원을 팔아서 곡식을 구입해 나눠준 사람도 있긴 하다.

 

 

 

자연 그 자체라면,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예술성을 뛰어넘는 장관을 연출하지만

미약한 사람의 힘으로 그 흉내를 내려는 노력이 빚어낸 일본식 정원은, 아주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써야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시멘트 길 위에는 자갈이라도 뿌려서 그 인공적인 느낌을 감춰야 하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정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철봉이 아니라 굽이진 대나무로 위화감을 없애야 한다.

 

소소한 곳에 신경을 쓴다면, 보는 사람 역시 소소한 곳까지 뜯어봐도 만족감이 드는 법.

나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벌써 저 멀리 기념품점에서 바글거리고 있는 단체관광객은 이런 요소들을 음미하고 있을려나.

 

 

 

햇살에 반짝이는 이끼의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하코네 이끼 정원에서 받았던 그 감격을 실로 오랜만에 느낄 수 있으니 셔터를 누르는 횟수도 늘어난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왼편의 저 나무가 단풍으로 물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잘 만들어진 정원은 사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을의 유시엔이 매우 절실해지는 느낌.

봄과 여름에는 이렇듯 색이 좀 단조로워지는 느낌이 있지만, 가을의 정원은 그야말로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절경을 뽐낸다.

 

물론 눈으로 덮인 겨울정원의 모습도 빠뜨릴수 없고, 자연을 모방한 정원이니 계졀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도 당연하다.

 

 

 

이끼의 생육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잘 자라다가도 조금만 일조량과 습도 등이 변화하면 곧 죽어버리는 녀석들이라서

나무 앞쪽의 이끼들은 이미 누렇게 죽어버렸다. 물론 타이밍이 맞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만.

 

죽은 이끼들 사이로 다른 종류의 이끼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도 보인다.

정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저 틈을 되살릴 것인지도 궁금하다.

 

 

 

반대로 그늘이 많아서 습도가 높은 지역의 이끼는 또 그 느낌이 다르다.

색도 진해지도 조밀해져서 이름 그대로 그늘에 걸맞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항상 일정한 색과 밀도를 유지하는건, 천해의 혜택을 받은 지형과 날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현재로서도 불가능에 가깝고

넓은 벌판에 고립된 정원이 아닌 이상 주변 건물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하다.

 

여기저기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오늘 갈아입은 반바지 밑이 좀 가려워진다.

장소가 장소다보니 모기가 아주 신나게 활동중인듯 하다. 마지막 날이라서 편하게 반바지 입었는데 이런 함정이 도사릴줄은.

다 잡아낼수도 없으니 그냥 물리면 물리는대로 놔 두는수 밖에.

여담으로, 그때 물린 흔적은 한달 반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이끼 정원의 매력은 역광 촬영시에도 잘 드러난다.

빼곡한 조경수 덕분에 직광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에 빛은 부드러워지고

오밀조밀한 이끼가 지면 가까이서 반사되는 빛에 부드럽게 퍼지는 모습은 푸근하기 그지없다.

 

인공적인 산물이긴 해도, '이 곳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모습.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감상하기를 여러 차례.

 

 

 

나무의 새순들은 어떤 운명을 맞을지 궁금하다. 조경수라는 목적상 이런 새순은 쳐내버리는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새순 잎사귀 밑에 매미껍질이 보인다. 이번 여름은 한껏 더웠으니 이 녀석들, 원없이 울어대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늦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30도를 넘나드는 날씨라서,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남아있는 듯 느껴진다. 착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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