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길지 않은 코스길이지만 두 번째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더운 날엔 이렇게 한번씩 쉬어가는게 꽤나 도움이 된다.

 

센스있게도 휴게소 앞에는 이런 모래정원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다.

이는 일본의 정원, 사찰 등에서 자주 보이는 방식인데, 일본 근대 최고의 작가중 한명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그의 에세이에서 언급했듯이, 서양의 정원이 레크리에이션과 공간활용에 중점을 둔다면 일본의 정원은 그림을 감상하듯

미적 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곳 모래 정원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한 것인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돌은 우리가 살고있는 육지를 의미하고

모래는 바다, 가지런한 줄무늬는 파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엄격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차도(茶道)와 함께, 정원의 구조와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도

옛날 일본의 잘나가는 분들이 가져야 했던 소양과 덕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좀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긴 하지만.

 

 

 

맞은편에는 그늘이 시원한 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바람도 잘 통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땀을 식히기에는 그만이다.

카메라 장비를 들쳐매고 이리저리 렌즈 바꿔가면서 곳곳마다 발걸음을 멈추는 이쪽으로서는 오늘의 날씨가 좀 부담스럽지만

별 힘들이지 않고 후다닥 감상중인 단체 관광객들은 여기서 별로 쉴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그냥 모래 정원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데 더욱 정성을 쏟는 듯.

 

1년동안 자전거여행을 다니면서도 본인 얼굴이 찍힌, 소위 인증사진이란 건 두세 장밖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에서 자기 모습 남기는 행위에 어떤 만족감이 존재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전부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의 흔적이고, 거울이라도 들고 다니지 않는 한 자기 모습을 볼 수는 없으니까.

 

반대로 여행중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찍은 본인 사진은 아마 그사람들 하드디스크에 잘 저장되어 있을 듯 하다.

나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꽤나 많이 담은 편이니까.

 

 

 

날씨와 거리상의 문제로 결국 찾아가보지 못했던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그 유명하다는 '미술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정원 모습'을 한번 흉내내 본다.

아무래도 이렇게 넓직넓직한 창문을 만들어 놓은 것 역시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오마쥬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미술관에 전시된 미술품보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더욱 유명한 아다치 미술관은

조금만 검색해보면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실제로 이곳 산인지역에 여행을 온다고 해도, 워낙 교통편이 드물고 거리도 꽤 떨어진 개인 미술관이라서

이것저것 둘러보다보면 놓치는 경우가 많은 곳이다. 그곳의 절경이라 불리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휴게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유시엔의 모습이 충분히 그 마음을 보듬어 주는 듯 하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정말 사계절 모두 한번씩 찾아와서 각각의 매력을 담아내고픈 생각도 들고.

 

 

 

아다치 미술관의 정원이 유명해 진건, 창틀이 마치 미술품 액자와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

그래서 대부분의 사진은 정방향에서 액자처럼 찍힌 모습뿐인데, 유시엔에서까지 그런 흉내를 내려니

살짝 아쉬운 느낌도 들어서 이렇게 아무렇게나 각도를 틀어 담아보기도 한다.

 

신나게 내린 소나기 덕분에 햇살도 쨍쩅하고, 물을 실컷 머금은 조경수들도 생동감이 넘친다.

3일 내내 비가 와서 조금은 우울해져 있었는데, 귀국날 그 소나기 덕분에 멋진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플러스 마이너스가 상쇄되는 느낌. 어떤 여행이라도 끝나고 나면 그 총합은 제로가 되는 듯 하다.

 

 

 

땀도 식혔고 해서 슬슬 장비 점검해 마지막 코스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 전에 외로운 섬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한장 더 담아보고.

 

마치 우주 어딘가에 살아숨쉬고 있을 다른 생명체에게 날 좀 봐달라고 외롭게 소리치는 지구의 전파를 보는 듯 하다.

 

 

 

유시엔 산책도 마무리단계에 들어간다. 일반적인 코스와는 달리 두갈래로 나눠진 길이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 봤더니

언뜻 봐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불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내 키보다 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담해 보이는 인상이고

특별한 미술적 가치를 가진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든 느낌이라서 의아스럽다.

 

일본식 정원 안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 정원을 만든 사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츠에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적당히 안내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얼핏 읽은 바로는,

이 유시엔(由志園)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정원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마도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정원일 듯 하다.

중앙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든것 같지는 않다. 이곳 다이콘지마까지 버스를 타고 오면서 풍경을 훑어보니, 정부나 시 차원의 계획 관광지로서

조성된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 그렇다면 아마도 이 지역 유지가 개인적으로 만든 정원일테니, 그 사람과 관계된 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한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정원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은것 역시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들었다고 보기엔 좀 아담하다.

 

 

 

출발지였던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경치 감상하랴 카메라 셔터 누르랴 해서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걸린 편.

그래도 워낙 여유있게 마츠에 시를 출발했기 때문에 승선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친다. 그쪽에도 유명한 볼거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긴 하지만.

 

출발할때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인의 지도를 받아 바로 정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건물 안 테이블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걸로 봐서 찻집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듯 하다.

시원한 건물 안에서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며 차 한잔하는것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옆구리에 같이 온 사람도 없고, 일기장마저 잊어버리고 온 여행이라서 혼자 차 마시는게 왠지 어색하다.

경치 감상만으로 반찬(?)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그건 왠지 본인의 미적 우아함보다 더 잘난체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이 든다.

 

 

 

산책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뭔가 놓친건 없나 싶어서 주변을 더 살펴보게 된다.

바위 위에 끼는 이끼와 비옥한 토양 위에 끼는 이끼, 나무줄기에 끼는 이끼가 전부 다른 종류라는 것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해 이렇게 담아보기도 하고. 이 정도 기후에서 바위 위에 이끼가 낀다는건 꽤나 낮은 확률이다.

 

 

 

위의 바위와는 전혀 다른, 흐르는 개울가 옆의 그늘진 곳에서는 충분히 이끼가 번성할만한 여건이 조성된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기는 하지만, 실제 개울가에서 저렇게 소복히 깔린 이끼를 보게 된다면

밟는게 아까워서 개울가에 다가가기도 힘들 듯한 느낌. 감상에 목적을 두는 일본의 회유식 정원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물론 경치 감상하는 정원도 좋긴 한데, 잔디밭에서 개와 뛰어놀고 싶은 나의 희망상, 이런 정원은 입장료 내고 구경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삼각대와 ND 필터가 있었다면 조리개를 F22 까지 조여놓고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곳.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고, 몇몇 개인관광객밖에 돌아다니지 않은 상황이라서

크게 방해는 되지 않겠지만, 일단 이런 좁은 정원에서 삼각대를 설치하는건 매너 위반이긴 하다.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 언제든 들려오는, 몰지각한 인간들의 행태에 대해 마음껏 비난하고 있는 입장이니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을것 같아도, 그것보다는 주위에 폐가 되지 않는지를 먼저 고려하는게 언행불일치를 막기 위한 수단일 터.

주인장한테 직접 가서 부탁하면 못 찍을만한 상황도 아니지만, 다른걸 떠나서 지금은 삼각대와 ND 필터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산책을 마치고 처음 출발한 건물로 돌아오자 가슴 시원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더운데 수고하셨다고 준비해 놓은, 얼음에 파묻힌 물수건을 보자, 이 정원에서 느꼈던 관리인들의 손길이 과연 착각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판기처럼 기계 한대 가져다놓고 척척 얼음 물수건이 나오게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손님에 대한 배려이겠지만

대나무 광주리에 아날로그식으로 놓여진 얼음에서는, 직접 손발로 뛰면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다.

주변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정원답게, 얼음 위에 살짝 놓여진 단풍잎 두 장이 더욱 운치를 풍긴다.

 

시원한 물수건이 목덜미를 적시니 정원 산책의 만족도가 더욱 높아지는 듯 하다. 이런 배려라면 점수를 더 줘도 괜찮겠지.

이 앞에는 정원 운영에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기념품들이 포진하고 있을테니, 위치상으로도 절묘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정취가 가득한 정원에서, 에어콘이 완비된 현대식 건물로 들어갈 때의 위화감을 줄이려는 의도였을까.

자동문 앞에 과하지 않게 홀로 서 있는 꽃꽃이 모습도 과하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는 중이다.

회유식 정원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소소한 분위기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물수건이나 꽃꽃이에 눈길을 주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거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를 가치가 있었다. 정원 산책할때만큼이나 나를 기분좋게 해 줬으니까.

 

 

 

건물 내부는 상당히 넓고, 정원을 향해 나있는 창문이 내 키의 세 배는 될 정도로 시원하게 뚫려있어서

어찌보면 정원쪽보다 더 밀도가 낮아서 널널하다는 인상이다.

 

마침 푹신푹신한 창가쪽 테이블에서 양복입은 장년층이 뭔가 이야기중이라서

전체 모습을 광각으로 담아내기는 좀 부담스러운 상황. 그냥 특이하다 싶은 녀석을 찾아보다가 이 인삼을 발견한다.

그러고보니 이곳 입장할 때도 붙어있었던 홍보 포스터에는 '모란과 고려인삼의 고장' 이라는 수식어가 적혀있던데

그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듯 하다. 고려인삼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고유명사화 되어 버렸으니 이곳에서 사용하는것도 큰 문제는 없을 듯.

반대로 생각하면, 당시 인삼계를 주름잡았던 고려인삼의 명성이 일본에서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뿌듯하기도 하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일본쪽도 인삼 재배에 과학적이고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어서

고려인삼이라는 타이틀을 제외하고, 순수한 약용효과로 따지자면 일본쪽 인삼도 세계 정상급에 속한다.

이곳 다이콘지마의 고려인삼도 전량 수출용으로, 일본 본토에서도 굉장한 가격대인 인삼을 수출용으로 쓴다는 건

본토보다 더 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요즘 중국이 떠오르기 전엔 소비의 블랙홀이라고 불리던 일본에서

자국 소비보다 수출쪽에 중점을 둔다는 건 그리 흔한 케이스가 아니다.

 

설명을 보니 이 인삼은 자연산으로 발견된 녀석중에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게 큰 녀석으로

추정 가치는 수억원을 넘는 듯 하다. 그걸 이렇게 전시해놔도 되는건가 싶은데.

 

 

 

인삼 사진찍고나니 매점 카운터를 보던 할머니께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정원 구경 잘 했고, 물수건 놔둔 것이 참 인상깊었다고 본말전도격인 칭찬을 하니 기뻐하면서 차라도 한잔 들라고 하신다.

종이컵에 담긴 녀석은 알싸한 맛이 감도는 인삼차. 과연 이곳은 인삼쪽으로도 유명한 곳인가 보다.

 

정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을이나 겨울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니 꼭 한번 다시 와보라고 하신다.

특히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절경중의 절경이니 보면 좋을거라는데, 올해 가을이 한달 반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다시 오는건 무리고, 잘해봐야 내년에나 올 수 있을것 같아서 마음 속으로는 조금 아쉬운 기분.

 

중간에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 하니까 여느때처럼 깜짝 놀라주시고, 귀한 손님 오셨다는 듯한 대우를 해주셔서 약간 쑥쓰럽기도 하다.

단체 관광객은 한국쪽이 제일 많지만, 아마 이정도로 자기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 관광객을 보는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테니까.

처음부터 말은 잘 통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외국인하고 말이 통한다는 게 재미있으셨는지, 할머니는 정원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자세히 풀어주신다.

 

산인 지방이 원래 낙후된 변경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다이콘지마는 제주도처럼 화산 융기로 솟아난 섬인데다가

서울의 동 하나보다도 작은 손바닥만한 화강암 섬에서는 제대로 된 농사도 짓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을 여성들은 이곳 특산품인 모란꽃을 한가득 등에 매고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방금 전 보았던 불상은 그 여인들의 고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 그러고보니 가슴팍에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곳의 지주였던 사카에(栄)씨는 원래부터 장사에 소질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젊어서 안해본 장사가 없다고.

1950년대, 전후 더욱 피폐해진 마을의 사정을 실감한 사카에씨는

'여성이 꽃을 팔러 멀리 떠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일본 각지에서 관광객이 구경하러 오는 정원을 만들자'고 결심하게 된다.

사카에 씨 본인의 가계는 생활에 그리 궁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서 큰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예전부터 정원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그의 아버지 요시조(由蔵)씨가 아들의 의지를 지원해 주었다고.

 

주위의 논밭을 전부 사들이고, 화강암 덩어리인 토양에 흙과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같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착공 당시엔 이름 그대로 이곳은 외딴 섬이었기 때문에, 중고로 배 한척과 불도저, 크레인을 각각 1대씩 들여와

끊임없이 육지를 옮겨다니며 자재와 나무를 실어날랐다고 한다. 지금은 육지를 잇는 도로가 만들어져 버스로 편하게 올 수 있지만.

그 때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이 건물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할머니께서는 나를 직접 그곳까지 끌고 가셔서

자신이 지내왔던 세월의 흔적을 되짚어 가듯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 하신다.

 

착공 8년만에 일차 공사가 마무리되고, 사카에씨는 아버지 요시조가 꿈에도 그렸던 정원을 기억하기 위해서

유시엔(由志園)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후로도 여러번 공사를 거쳐서 점차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듣기 어려운 생생한 세월의 기억을 알려주셔서 감사의 표시를 하고, 기념으로 사진 한장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할머니께서는 예상 외로, 그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는 점원들은 모두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굉장히 뻘쯤하다.

아무튼 다들 쑥쓰러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는다. 뒷 배경의 커다란 모란 그림도 유명한 화가의 작품.

나를 안내해 주던 할머니는 앞줄 왼쪽에 앉아계시는 분이고, 앞줄 중앙의 할머니는 사카에 씨의 따님으로, 유시엔의 2대 주인이라고 하신다.

 

오늘 귀국날이라서 바로 가봐야 한다는 말에 조금 아쉬워하시는 할머니.

만약 우연이 겹쳐서 귀국일과 관계없는 날에 이곳을 찾았다면, 함께 식사하는 정도의 대접은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훌륭하니 꼭 다시 한번 찾아와 발라고 당부하시는 할머니를 보니, 뭔가 의무감이란게 드는 느낌.

실제로 이곳은 꽤나 마음에 드는 정원이고, 가을의 절경이 상상되는 듯 해서, 내년 가을에라도 인사하러 찾아가보게 될 것 같다.

 

또 하나 여행의 인연을 만들었으니 뭐라도 사 갈까 싶어서 기념품점을 둘러본다.

형체가 남는 물건은 어제 개미공방에서 구입했으니 넘어가고, 추천하고픈게 있느냐고 물어보니

요즘에 자신들이 개발한 모란전병을 추천해 주신다. 짭짤한 전병 사이사이에 모란을 닮은 분홍색 반점이 들어가 있는 녀석.

물론 모란 자체는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새우맛 소스를 대신 집어넣었다고. 고급스러운 새우깡 느낌이라 마음에 들어서 2개 구입.

하나는 집에서 먹고, 하나는 형님부부쪽으로 보내려고 한다.

 

 

 

폭우와 함께 천지를 진동시키던 벼락이 떨어지던 좀 전의 하늘에서

잠깐 정원 산책을 하고 온 것 뿐인데, 청명하게 펼쳐져 있는 하늘의 모습을 바라보니

정말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들었다가 꿈 속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버스 코스가 맞아서 귀국하기 전에 들렀을 뿐인 유시엔에서는

훌륭한 풍경과 함께 사연 많은 현지인들의 배려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화려한 모란에 숨겨져 있던 고난의 시간이, 한 지역 유지의 노력으로 인해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공간.

 

나와는 동떨어진 수백 년 전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정원이라던가

중앙정부나 시 차원에서 조성되고 관리되는,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서의 정원이 아닌

힘겨운 생활을 보내는 마을 여인들을 위한 마음으로 시작된 조그만 정원은,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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