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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5  매실나무 전지 프로젝트 20

저희 집 신발장 앞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매실 액기스.

신선한 매실과 설탕을 넣은 후 완전히 밀봉하면 액기스가 죽죽 빠집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건더기를 들어내면 1년 내내 물에 타서 마시는 달콤새콤한 매실 쥬스가 완성됩니다.
저 정도 양이면 1년도 넘게 마실 수 있는데, 올해도 매실 나무를 가만 놔 둘수 없는터라...


소싸움과 운문사로 유명한 경북 청도에 위치한 조그만 매실밭이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뭔가 재배할 만큼 자주 오지도 못하고 땅도 조그마해서
그저 되는대로 매실나무 몇 그루 심어두고 연중 행사로 매실이나 따 먹고 있네요.

하지만 거저 얻어지는 매실이란 없어서, 이렇게 봄이 되기전에 전지를 해 줘야 튼실한 열매가 맺힙니다.
그 후로는 나중에 약 좀 뿌리고, 매실 따 담는게 일이죠.


매실나무는 자생력이 굉장해서
그냥 손놓고 있으면 어마어마하게 새순이 돋아나 열매를 맺기 때문에
크고 튼실한 열매를 얻으려면 반드시 전지를 해 줘야 합니다.


보통은 '너무 많이 전지하다가 열매가 너무 적게 맺히는거 아닌가' 싶은 걱정도 하지만
속된말로 지금 거의 반 죽여놔도 어차피 여름되면 미칠듯한 기세로 자라나기 때문에
양털 깎는다고 생각하고 새순으로 보이는 녀석들은 무자비하게 잘라내 버리면 됩니다.


잔 가지는 전지 가위로 싹뚝싹뚝 잘라내 버리면 되지만
그새 엄청나게 굵게 솟아오른 녀석들도 많기 때문에 이런 톱도 필요합니다.
전날 피트니스 클럽에서 웨이트 트레이닝 격하게 한번 하고 난 터라
어깨부위에 심각한 근육통을 겪고 있던 저는 끙끙거리면서 간신히 작업하는 중.


그래서 때때로 숙련자인 엄니에게 일을 맡기고 찍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카메라를 가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했죠.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봄날씨라 거의 초여름처럼 느껴지는 더위가 사람 참 지치게 합니다.

이곳에는 감나무, 목화나무등이 조금씩 심어져 있는데, 지금은 그네들 가져가는건 거의 포기하고
그냥 매실만 줄기차게 키워서 담궈 먹고 있습니다.


아직 푸른빛이 감돌기엔 이른 시기지만 새순들은 벌써부터 맹위를 떨치고 있네요.
저렇게 너무 조밀하게 난 새순도 성장에 좋지 않기 때문에 거침없이 잘라버립니다.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가슴아프다고 봐줬다가는 맛있는 매실을 못 먹어요.

실제로 전지 해주는게 나무한테도 좋으니 이럴 땐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는게 좋습니다.


새로 산 전지가위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지만 작년에 잘랐던 새순 흔적들과, 새로 나기 시작하는 새순은
거의 가시나무의 가시와 같은 뾰족함을 자랑하기 때문에
우거진 매실나무 가지 사이를 몇번 헤집다 보면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저는 더워서 반팔 입고 작업했기 때문에 더더욱 상처가 많이 생겼죠.


처음에야 나들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지만
맑고 청명한 날씨도 이쯤되면 짜증을 유발시킵니다.
인원수도 적어서 너무 딩가딩가 하다가는 해질 때까지 일을 끝마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사실은 꽤나 열심히 자르고 잘랐습니다.


후반엔 매실나무에게 도움 안 될것 같은 근처의 가시나무라던가를 밑둥부터 톱으로 잘라버리는 통에
아주 땀 뻘뻘 흘리면서 식겁을 했습니다. 얼마나 단단한지 3/4 정도를 잘라내도 손으로 쓰러트릴수가 없네요.

근육통만 아니었으면 좀 더 늠름하게 일했겠지만 워낙 어깨가 아파서
'에고~ 내팔자야'를 입에 달고 작업을 하느라 엄니께서 하찮은듯한 눈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ㅡㅡ;


하지만 날씨가 워낙 좋았던 터라 사진은 참 잘나왔네요.
광량이 풍부하니 집에 돌아와서 보정도 잘 먹고, 애써 청도까지 내려간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요즘 날 좋은 야외에서 사진 찍어본 적이 별로 없네요. 사진은 역시 빛이 중요하죠.

밭에서 일하고 오면 항상 옷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녀석. 이름이 가물가물하네요.


이렇게 너무 조밀조밀하게 돋아나는 녀석들은 손질이 필요합니다.

전체적으로 이런 잔가지가 너무 많을때는 아예 가치 채로 잘라버리기도 하구요.
저도 생초보라 이런 걸 적절히 판단한 능력은 안되지만
기본적으로 '많아보이면 다 잘라버려'라서 많다 싶으면 마음껏 칼을 휘둘러 버리면 됩니다.
여름에 다시 가보면 어차피 다시 날 녀석들은 다 생생하게 자라고 있어요.


엄니도 모델을 시켜드려야겠죠.
한 손에 전지가위, 한 손에 톱을 든 엄니는 무적.
매실나무에게는 공포의 사신이나 다를 바 없죠.


조금 몸을 푼 후에 점심 먹을 준비를 합니다.
밥 조금과 김치, 그리고 밖에서 일하다 먹으면 꿀맛인 라면을 준비했죠.


그런데 가스 버너가 너무 오래된 녀석이라 그런지 도통 물이 끓질 않습니다.
엄니는 바람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자전거 여행하면서 숱하게 밥 지어먹었던 제 경험으로 보자면
이 정도 바람 때문에 1시간 반동안 라면 두개분량의 물도 못 끓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가스는 새거지만 버너가 15년은 된 녀석이라... 다음엔 새 버너를 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물 끓이다가 굶어죽을 것 같아서 일단 밥부터 먹기로 합니다.
라면에 말아먹었으면 훨씬 맛있었을 테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죠.


결국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물은 끓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냥 뜨끈뜨근한 물에 라면 풀어놓고 적당히 퍼지면 알아서 먹기로 했네요.
라면이야 뭐, 날걸로 먹어도 되고 찬 물에 불려서 먹어도 되는 전천후 음식이니까.


이런 일은 식사를 위해 존재하는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정도로
땀 흘린 후에 밖에서 자리 펴놓고 먹는 밥은 반찬이 없어도 진수성찬입니다.


김치와 김, 밥만 있으면 안넘어가는게 없습니다.
과일도 튼실하네요.


선물로 받은 한라봉.
무지 비싼 녀석인데 달콤한 녀석도 있고 새큼한 녀석도 있고 가지가지입니다.


여전히 라면은 끓을 생각이 없어서 잠시 사진이나 찍으며 시간 때우다가 그냥 먹기로 했습니다.
슬금슬금 돋아나는 초록 새싹들을 보니 이제 또 인생이 한 바퀴 도는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스프를 절반 정도밖에 넣지 않아서 순수함을 자랑하는 싱거운 라면이네요.
엄니께서 짠 음식을 질색하는 터라, 그리고 김치하고 같이 먹으니 이 정도도 먹을만 합니다.
한 번도 끓지 않은 라면이지만 푸욱 우려내서 면은 다 풀어졌군요.

다음엔 화력이 확실히 검증된 녀석을 데리고 와야겠습니다.


배를 너무 채웠는지 오히려 힘이 빠져서 후반부엔 작업이 힘든 느낌이었네요.
가시에 긁히고 햇빛에 타고 하면서 악전고투를 벌였습니다.
15그루 남짓한 매실나무지만 이거 전지 하는데도 이렇게 진이 빠지니
역시 농사란 건 만만하게 볼 게 아니네요.

도시에 살면서 일년에 한두 번 왔다갔다 하니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만...
올해는 매실을 따도 더 담궈먹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한테 거의 나눠줄 듯 합니다.


공터에 홀로 서 있는 죽은 나무의 모습과
그 주위를 떠받치듯이 솟아나온 정체불명의 무엇인가가
사진사의 감성을 자극하더군요(?)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 치는 건 아닙니다.


그림자와 기괴한 나뭇가지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모습에 절로 셔터를 붙잡았을 뿐.

다시 말하지만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 친 건 아니에요.


방학중에도 바쁘신 엄니는 일하시랴 전화받으시랴 바쁩니다.
모 정신나간 공무원 색히는 희망근로 지원자들에게 자기네 밭을 갈도록 하기도 했다는데요...
엄니께서는 학교 선생들을 동원하는 대신 무임금으로 뼈빠지게 일해주는 아들내미를 선택하셨습니다.


사실 제가 일하고 있는 밭 건너편에서는 정자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처음엔 집 짓나 싶었는데 몇시간 지나니 번듯한 정자가 금새 올라가고 있더군요.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짓고 있는 듯.

산 중턱에 멋진 거목 한 그루와 함께 지어지는 정자의 모습은 꽤나 멋졌습니다.

지금 이 사진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말이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대충 전지를 마친 후 짐 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상처난 팔이 지릿지릿한 것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역시 육체노동은 멋집니다.
엄니께서는 일당 10만원 줘도 못할 짓이라고 한숨을 쉬시는데
그럼 일당 5만원도 좋으니 달라고 하니 '먹여주고 재워준 값이나 내놔라'고 일침을 가하시네요.

나중에 제가 돈 많이 벌면 은행 계좌에 팍팍 넣어드리고 오늘의 일당을 받아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