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많이 떠들진 않았지만 왁자지껄한 느낌이 사라지고 잠깐의 혼동 후에
다시 평소대로의 홀로 여행으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든다. 입을 열 일이 별로 없는 묵묵한 여행.
데미야 철로쪽으로 걸어가다가 보이는 KFC 에 들어가 작은 치킨샌드위치 하나를 시키고 자리를 잡는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고, 어차피 저녁은 먹고 삿포로로 돌아갈 예정이지만 왠지 쓸 건 써야 할 것 같아서.
글 쓰기에는 시간에 관계없이 눈치 볼 필요 없는 패스트푸드점이 최고다.
얼어붙은 피부를 녹이며 글을 쓰고 있는데 건너편 좌석의 할머니 두 분이 직원을 거칠게 비판하고 있어서 자연스레 귀가 쏠린다.
얼핏 들어보니 주문한 커피가 많이 식어버린 채로 나온 것에 대한 지적인 듯 하다.
주문이 많이 밀려서 순서대로 만들다 보니 사고가 생겼다고 직원이 해명을 하는데 오히려 그게 화를 더 돋군 모양.
변명이 아니라 사과를 정식으로 했어야 한다며,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깐깐한 기숙사 사감같은 목소리로 직원을 쏘아붙이는 할머니.
결국엔 점장이 나와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는 일까지 벌어졌다.
할머니는 여기 직원이나 나나 모두 이 마을 사람이라 얼굴도 보고 사는 사이인데 이런 식의 태도는 아니지 않느냐고 강렬하게 항의한다.
점장은 그야말로 죄인의 모습으로 바닥에 무릎 꿇고 그저 죄송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결국 할머니도 웃으면서 앞으로 주의해 달라고 해결되긴 했지만 직원과 점장에게는 식은땀 흐를만한 한 때였으리라 생각한다.
말투는 거칠지만 논리적으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할머니라 딱히 반박할 내용도 없긴 하다.
예상치 않았던 싸움 구경 한번 하고 일기를 쓴 후 다시 차가운 밖으로 나선다.
원래는 저녁이 될수록 사람이 한적해지는 곳인데, 기간이 기간이다보니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북적이고 있다.
오히려 볼거리가 데미야선과 운하 정도로 한정되기 때문에 오히려 낮보다 사람이 더 많은 기분마저 들게 한다.
데미야 철로에 도착하니 잔잔한 촛불만이 깜깜한 하늘 속에서 아련하게 비치고 있다.
주위 환경 탓인지, 너무 크게 떠들다간 촛불이 꺼지기라도 할 듯 사람들이 상당히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다.
촛불이 엄청 밝은 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람들도 들뜬 기분을 잊고 차분하게 관람하게 되는 듯.
굉장히 어두워서 카메라 감도를 꽤나 높이고 찍어야 그나마 흔들리지 않게 나온다.
낮에도 예쁘긴 했지만 본연의 목적을 드디어 내비치기 시작한 스노우 캔들은 파라핀 사이에 놓인 단풍잎을 영롱하게 통과하며 빛을 발한다.
소근소근하는 이야기소리와 눈을 밟는 소리, 가끔 들리는 셔터소리만이 조용하게 화음을 이룬다.
아마 맛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셔터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 듯.
철로는 똑바른 일직선이지만 애초에 눈길은 이리저리 구부러진 모습이고
내렸다 그쳤다는 반복하는 동안에 만든 아마추어들의 스노우 캔들은 아이들의 학예회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보는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
스스키노 거리의 화려한 네온사인 사이에서 빛을 발하던, 녹는 것이 아까울 정도의 얼음 조각상들이 가지런하게 정비된 모습과는 사뭇 달라도
오타루라는 마을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이곳에서도 충분히 전해지는 듯 하다.
나처럼 혼자서 묵묵하게 촬영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캔들의 불빛에 동화된 자신의 일행을 예쁘게 담아주고 있다.
Y양 일행도 여기까지 같이 할 수 있었다면 이런 사진 몇 장은 남겨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기분에 은근슬쩍 딴 곳을 찍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습도 살짝 담아본다. 소심한 찍사의 발버둥.
축제 기간동안 몇 번이고 보수를 거친 듯한 울퉁불퉁한 캔들과
적당히 눈뭉치 몇개 결합시켜서 만들어 낸 듯한 눈사람, 혹은 그냥 순수한 눈덩이라도
저녁 촛불 옆에 놓여있으니 무엇이든 나름 작품으로 변신하는 기분이다.
눈만 있다면 주민들과 세계 각국의 자원 봉사자들의 힘으로 이렇게 축제를 열 수 있다는 점이 일종의 저력으로 느껴진다.
녹고 얼고를 반복하다보니 뽀송뽀송한 듯 미끌미끌한 듯한 토끼가 둘이 사이좋게 얼굴을 맞대고 있는 모습.
이글루와 비슷한 원리인지, 촛불 위쪽은 꽤나 뜨겁기 때문에 적당히 눈이 녹다가 날씨때문에 다시 얼어버리곤 해서 저런 모양이 되는가 보다.
자원이 부족하면 역시 아이디어가 커버해 준다.
낮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불을 켜 놓으니 마지 장작이 타면서 사이사이로 불길이 새어나오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낮에 스노우 캔들 만드는 방법을 구경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주위에 있는 사물들 이용해서 간단히 만드는데도
무엇을 표현할까를 잘 고려하면 이런 재미있는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보다.
단순한 스노우 캔들이지만 발상에 따라 훌륭한 바리에이션이 탄생한다.
열매를 넣은 얼음조각을 촛불을 넣었던 입구쪽에 배치한 것. 눈과는 다른 얼음의 투과성이 불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참치 한마리 집어넣는 것 보다 이런 녀석들이 훨씬 보기 좋다.
거대한 눈벽 중간을 파내고 그 안에 촛불을 늘어놓은 후 별모양 얼음으로 겉을 채운 은하수같은 작품.
눈이라는 소재가 무궁무진한 이유도 있겠지만, 참 한 걸음 뗄 때마다 다양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다.
오타루에서는 겨울 밤에 하늘을 쳐다보지 않아도 이렇게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다.
규모가 큰 단체 작품이다 싶은 건 아마도 해외 봉사단 청년들이 힘써서 만들어 놓은 것 아닐까 싶다.
젊을 때 해볼 수 있는 멋진 여행의 일종이라 부러울 때도 있긴 했지만
사실 그 정도 단체생활에는 발작을 일으킬 정도라, 아마 돈을 줘도 가지는 않을 듯.
낮에도 보긴 좋지만 역시 촛불은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통과하면서 빛을 내뿜는가가 중요하다.
한국 팀이 만든 것이라면 첨성대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듯한 눈덩어리라도 그 속에서 촛불이 빛을 발하면 은은한 기운이 참 훈훈하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아서 진득하게 자리를 만들기가 힘들다. 그냥 슬슬 걸어가면서 되는대로 적당히 찍는 중.
감도를 3200 까지 올리고 찍으면서 이렇게 올려도 되나 싶었는데, 아직도 필름 쓰던 기억이 남아있어서 감도 올리는데 소극적이 된다.
요즘 최신 디지털 바디들은 6400 까지는 기본이고 심하면 십만 단위까지 감도가 올라가는데
아날로그의 향수에 젖어있지만 말고 디지털의 이점을 잘 살리는 것도 찍사로서의 진화에 포함되어야 할 것인지 고민도 해 본다.
저녁에 되어 촛불에 불 켰다고 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할 일이 끝난 게 아니다.
오늘은 바람이 심하지 않고 날씨는 적당히 추워서 촛불이 아무 문제없이 유지되고 있지만
조금만 날씨가 험해지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너진 부분을 보강하고 꺼진 촛불을 켜고 한다고.
직접적으로 물건을 팔아 수익이 들어오는 축제가 아님에도, 이것이 주민과 관광객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는 듯 하다.
아주머니들이 숯불에 뭔가를 구워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군밤인가 싶었는데 사실은 감자였다.
감자가 원래 추위에 강한 작물이다 보니 홋카이도의 감자는 그 크림처럼 사르르 녹는 부드러움이 일품으로 유명하다.
추운 겨울날 야외에서 숯불에 구워 주는 감자의 맛은 이 축제를 더욱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 준다.
밤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리다 보니 사진 찍기도 힘들거니와 걸어다니기도 쉽지 않다.
그냥 움직이는 인파를 따라서 조용히 이동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일행들끼리 기념사진 찍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홀로 정물사진이나 찍고 있는 본인이 양보해야 마땅하다.
사진으로 촛불 축제의 은은한 매력을 담아내기에는 내공이 많이 부족해서, 굳이 집착하며 사진을 남겨야 할 필요도 없고.
낮에 제작과정을 잠깐 봤다고 벌써 친근한 느낌이 드는 파라핀 캔들의 모습.
실제로 길을 비춰주는 용도로 쓰이기엔 많이 어두운 편인데, 오히려 또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줘서 더욱 매력적이다.
주민들이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 힘을 합해 이렇게 이뤄낸 야경모습을 보면 얼마나 뿌듯한 느낌이 들런지.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삿포로의 눈축제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본인 취향상 이쪽에 더 마음이 끌린다.
아무것도 모르고 삿포로에 숙박지를 잡은 것이 살짝 아쉬워 질 정도.
홋카이도는 이주 개혁 초기에 관청의 심볼로 별모양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별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삿포로 맥주캔만 봐도 금새 알 수 있고.
눈이 부족한 해에는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 타지역에서 많은 돈을 들여 눈을 퍼오기도 했다는데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눈이 온 올해는 왠지 축제에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사진찍느라 사람들이 많아서 잠깐 기다리다가 간신히 온전한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나한테도 매력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자기 키를 훨씬 넘는 눈벽으로 이루어진 길을 보는 아이들은 기뻐 날뛴다는 표현이 적당할 듯.
부모들이 당황하며 부르고 있어도 신나하며 눈벽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해가 지고나서 떠오르는 이 새로운 세계는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멋진 추억거리가 되겠지.
낮에도 불만했지만 밤엔 더욱 미려한 자태를 뽐내는, 민가처럼 생긴 조그만 건물.
진짜로 사람이 살고 있다면 축제 기간에 프라이버시는 버려야 할 것 같지만 아마도 별로 개의치 않으리라 본다.
실제 철도가 운행되고 있었을 당시에도 서 있었음에 틀림없는 건물인데, 거의 철로와 딱 붙어있어서 생활이 참 고됬을 법 하다.
그 때에 비한다면 당연히 지금의 웅성거림은 애교에 불과할 듯. 물론 그 때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확률은 좀 낮지만.
진짜 눈사람이 아니라도 실제 눈과 함께 전시되면 왠지 훨씬 더 멋져보인다.
전방 부대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좀 사치스러운 생각이지만, 눈이란 소재는 참 다양한 방법으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눈과 파라핀, 얼음은 확실히 유리와 특성이 비슷해서 촛불과 함께하면 굉장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곳 못지 않게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에서는 이런 축제를 기획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문든 머리를 스친다.
삿포로라는 홋카이도 최대의 도시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너지가 강원도에는 없으니 조금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스노우 오브제 제작 체험에 1000엔이 든다고 한다. 비매품 선물도 증정한다고 하니 아이들과 함께라면 나쁘지 않은 체험인 듯.
이런 체험은 사실 낮에 하는게 보기도 좋고, 축제의 일원이 되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눈이 내리지 않더라도 오타루의 밤은 생각보다 추워서 천천히 걷고 있음에도 조금씩 몸이 굳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다행히 추위를 워낙 타지 않는 체질인데다, 그래도 홋카이도라서 가져온 따뜻한 비니때문에 체력적인 문제는 없다.
삼각형 집 사이로 아련히 빠져나오는 불빛을 보고 있으면
왠지 눈내리는 차가운 겨울 저녁 단란한 가정을 추위에 떨며 엿보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라던가
파트라슈의 온기로 쓸쓸함을 걷어내려는 네로의 심정이 살짝 엿보인다고 할까.
원래는 좀 더 화목한 가정이 느껴져야 하겠지만 본인은 아직 그 당사자가 아니가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밖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 듯 하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이지만 잠깐의 산책만으로 오타루의 눈 축제가 가지는 소박한 따뜻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삿포로의 거대 조형물들은 태생 자체가 그렇다보니 그냥 그렇구나 하는 생각으로 셔터를 눌러왔지만
이곳의 스노우 캔들은 하나 하나가 평범한 개인의 정성으로 빛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돌아가는 버스 시간은 아직 한 시간 넘게 남아있기 때문에, 이 길로 운하의 야경을 감상한 후 기념 식사라도 한끼 하려고 발걸음을 옮긴다.
여행 3일째까지 교통비 말고는 사용한 게 거의 없어서 원하는 건 아무거나 먹을 수 있다.
역시 초밥이라도 신나게 먹을까 생각하며 중앙 거리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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