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떠나자/山陰'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10.15  산인 여행 - 잡화점의 별 22
  2. 2012.10.11  산인 여행 - 비 그리고 비 18
  3. 2012.10.09  산인 여행 - ANTWORKS GALLERY 17
  4. 2012.10.06  산인 여행 - 이즈모 군것질 16
  5. 2012.10.05  산인 여행 - 어디서부터 10
  6. 2012.09.27  산인 여행 - 크고... 아름답습니다? 18

 

 

유시엔 입구가 아니라 꽃집 입구에 상당한 양의 우산이 곱게 접혀져 대기중인 모습.

버스정류장이 이곳이니 여기서부터 비에 젖지 않게 하기위한 배려인 듯 하다.

유시엔이 이렇게까지 큰 곳인가 싶을 정도로 우산 수가 많은데, 전부 가지런하게 접혀있고, 손잡이 끝부분엔 유시엔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이쪽으로서는 굳이 비오는데 돌아보며 사진 찍을만큼 급하진 않으니 사용할 일은 없지만

구경을 시작하기 전 이런 배려의 흔적을 접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질 만도 하다.

 

 

 

30분쯤 쏟아지고 나니 서서히 비구름이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쏟아부은것 치고는 오래 내린 편.

이 정도라면 느긋하게 둘러보고 사카이미나토행 버스를 타더라도 페리에 늦을 일은 없을 듯 하다.

사카이미나토에도 나름 유명한 볼거리가 있으니 아주 넉넉한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버스가 1시간에 두 대정도 오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서 이동하는 수 밖에 없다.

 

오늘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으로, 오전중 마츠에를 돌아다닐 때는 깨끗하다가 버스 타고나서부터 비가 쏟아지고

조금 기다리니 또 다시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정원을 둘러볼 수 있다. 마츠에 성에서 폭우에 쫄딱 젖었던 경우에 비하면야.

 

 

 

유시엔으로 가는 길에 단촐한 꽃집의 분위기도 몇장 담으며 걷는다.

꽃집이 다들 그렇지만 꽃 외에는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건물 덩어리인데,

화분들 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건, 역시 식물이 가진 힘이라고 할까.

 

 

 

오키나와에서도 자주 눈에 들어오던 거대한 꽃.

무궁화와 같은 종이라서 닮긴 닮았다.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무궁화와는 크기나 색깔이 많이 다르지만.

비가 그치고 간접적이긴 해도 햇살이 들어오다보니 꽃들에게서도 활기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름모를 꽃. 피어있는 모습도 물론 아름답지만, 피기 전의 꽃망울도 저렇게 모여있으니 나름 매력있다.

 

아파트 구조상 마음껏 식물을 들여놓을 수가 없어서 이런 곳에 오면 항상 아쉬운 느낌.

가끔 아파트 베란다 전체에다가 흙을 채워넣어서 조그마한 정원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구쪽 본가는 베란다를 트는 바람에 그럴 공간이 없지만, 서울쪽 아파트라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듯 한데.

배수시설이나 꾸준한 관리 등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도, 조그만 화분에 담겨있는 녀석들보다 훨씬 보기좋을 것 같다.

 

 

 

희귀한 꽃들이 전시되어 있는건 아니지만, 마음 다잡고 구경하는 이런 시간에는

얼핏 길가다가 스쳐 지나가는 녀석들보다도 집중해서 보는 탓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매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정원이란 건, 겨울을 제외하면 응축된 에너지로 넘쳐나는 공간이라서

조금 있다가 구경할 녀석을 대비해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을 풀고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랄까.

 

 

 

버스정류장 위치를 생각하면, 이 꽃집과 유시엔은 한데 묶어서 생각하는것이 옳다고 본다.

일본식 정원과 함께하는 꽃집이란 것이 조금 생소하기도 한데.

규모는 큰편이지만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가건물에 식물들만 모아놓은 이 곳이

어째서 독립된 버스 루트까지 가지고 있는 유명한 정원 옆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시엔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의아한 것이 당연했지만

관람이 끝난 후 조그만 이벤트 덕분에 이곳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된 시점에서는 여러가지로 마음이 따뜻해 진다.

그 이야기는 당연히 다음 포스팅에서.

 

 

 

요 조그만 길만 건너면 바로 유시엔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면 고층 건물은 고사하고, 마을 전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없는 듯한 분위기.

아마도 이 길이 마을에서 가장 큰 도로일 것이다. 자전거 여행때 자주 봐왔지만, 일본에서 가장 마음 편한 모습이란 이런 것.

 

한국은 도시 외곽의 분위기를 뭐라고 찝어서 정의하기가 힘든데

일본의 도시 외곽은 상당부분이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이 나즈막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도심지에서는 자리잡기 어려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상점들이 주를 이룬다.

땅값만 싸다면 높은 건물보다 낮고 넓은 건물이 월등히 저렴하기 때문에.

그 결과 주로 잡화점, 중고차 가게, 2층을 넘지 않는 대형 마트등이 외곽으로 빠져 있다.

대형 마트의 경우에도 굳이 지하 주차장을 만들 필요가 없이, 마트 앞에 상당히 큰 규모의 주차장을 가진 녀석들이 대부분.

자전거로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서서히 중고차가 주르륵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보이면 도시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

 

왼쪽 건물에 보이는 간판은 옷이나 그릇 등을 파는 잡화점 콘페이토(こんぺいとう)라고 적혀 있는데

거대 체인이 아닌게 확실한 저 가게 이름은 의외로 일본 각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도심지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생활권인 외곽지역에 주로 위치하는지라 관광객이 찾아가기엔 힘든 곳.

대부분이 관광객이 버스나 철도 등을 이용해서 이동하는데, '창고'라고 불리는 잡화점이 위치한 곳은

이런 대중교통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 대부분인 평범한 도시 외곽이기 때문에 작정하고 찾아가지 않는 한 보기 힘들다.

 

도심의 유명한 잡화점으로는 돈키호테가 있지만, 외곽의 잡화점은 한국의 대형 마트만한 크기의 단층건물이 대부분.

돈키호테 따위는 가소롭게 보일 정도로, 정말 잡화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녀석들이 창고처럼 가득가득 차 있다.

좀 큰 도시 외곽의 잡화점은 악기, 의류, 반지, 시계, 음악, 영화, 게임, 장난감, 카드게임, 중고책 등등 없는게 없다.

콜렉터들이 군침흘리는 빈티지 기타나 구하기 힘든 모형건, 분위기와 달리 고가의 희귀 라이터 등도 눈길을 끈다.

 

조명은 어둡고 내부 마감 없이 짙은 나무색 등의 어두운 소재로 만들어져 있고, 통로는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

난잡하고 시끄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잡화점은, 오랜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그런 분위기가 매상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이곳의 잡화점이야 그런 물건들을 들여놓을 일이 없으니, 그냥 옷이나 그릇등을 파는 것 같은데

콘페이토라는 이름의 잡화점이 의외로 많은 것은 나름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콘페이토는 포르투갈어(Confeito)로 '별사탕'이란 뜻. 건빵에 들어있는 그것. 발음을 차용해서 한자로는 '金平糖'이라고 쓴다.

1500년경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별사탕은, 당시로서는 만들기 힘들고 비싼 고급 과자였는데

재래식으로 별사탕을 만들때는, 특수한 가마솥을 가열하면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설탕물을 넣고 끊임없이 회전시켜줘야 했다.

여기서 별사탕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참깨를 이용하는데, 이것이 사탕의 핵이 되어 주변에 설탕이 모이면서 별 모습이 된다.

 

잡화점에 콘페이토라는 이름이 자주 붙는 것은 그 빛나는 듯한 오묘한 모습과 함께, 사탕의 핵이 되는 참깨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들어와서 이리저리 구경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반짝하고 눈에 들어오는 상품을 찾을 수 있는 곳.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지만, 이렇게 가게 이름으로 그 원류를 연상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맞은편에 드디어 유시엔의 모습이 드러난다. 비 때문에 한참 지체되었지만 일단 목적지에 도달한 셈.

버스 정류정에 내려서 꽃집을 통과한 다음 보이는 유시엔의 정문 모습만으로는

저 너머 어디에 어떤 정원이 기다리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앞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니까.

 

비는 그쳤어도 아직 구름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하늘이라 약간 아쉽지만, 저 멀리서 천천히 푸른 하늘이 다가오고 있으니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으면 하늘 색도 촬영과 감상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한다.

이곳 역시 외국인에게는 입장료 반값 할인이 가능하니 부담이 없다. 등에 가득한 짐을 보관할 장소가 있기를 바라며 길을 건넌다.

 

'떠나자 > 山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인 여행 - 유시엔 2/3  (14) 2012.10.18
산인 여행 - 유시엔 1/3  (18) 2012.10.16
산인 여행 - 비 그리고 비  (18) 2012.10.11
산인 여행 - ANTWORKS GALLERY  (17) 2012.10.09
산인 여행 - 이즈모 군것질  (16) 2012.10.06

 

8시에 일어나 조식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오늘의 일정을 생각해 본다.

오후 7시에 출항하는 페리는 6시까지 승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넉넉하게 5시 조금 넘겨 터미널에 도착해야 한다.

시간이 아까워서 빠듯하게 도착할 수도 있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자칫 1주일동안 이곳에 고립되는 상황을 낳을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느긋하게 도착해서 기다리는게 마음 편하다. 짧진 않지만 느긋하지도 않은 오늘이란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어떻게 할까.

 

일반적인 관광객보다는 훨씬 느긋한 발상인데, 보통 하루에 한 곳 정도만 확실히 정해놓고 움직이는 본인 스타일상

오늘 가장 중점을 둘 곳은 이곳에서 페리 터미널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아담한 정원 유시엔(由志圓)이다.

크게 유명한 곳도 아니고 원래부터 가고 싶었던 곳도 아니지만, 마츠에 시와 페리 터미널의 딱 중간즈음에 위치한 곳이라서

돌아가는 길에 들르기엔 최적의 장소라 여행 계획때부터 코스에 넣어둔 곳.

 

문제는 유시엔이 너댓시간동안 돌아다닐만큼 큰 곳은 아닐듯 해서, 지금 바로 체크아웃후 뛰쳐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

오후 1시쯤 도착하면 딱 알맞을 듯 한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12시 반쯤 버스를 타면 된다.

약 3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이곳 마츠에에서 보내야 한다는 결론. 멀리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현립미술관이나 카라코보 공방 등등 구미를 돋구는 장소가 있고, 그냥 아담한 까페에서 커파나 홀짝여도 시간은 충분히 간다.

일단은 10시까지 체크아웃이니, 짐을 프론트에 맡겨놓고 나서보기로 한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창밖 구경이나 하다가 눈길이 가는 곳에 내리면 되겠지.

 

걸어서 5분거리인 마츠에 역으로 가는 도중에 만화 캐릭터같은 녀석의 동상이 서 있다.

시마네현과 인접한 돗토리현은 '게게게의 키타로'나 '명탐정 코난'같은, 시대에 한 획을 그은 만화가들의 고향인데

문화 컨텐츠쪽으로는 돗토리현에 뒤지지 않는 시마네 쪽에서도, 만화 쪽에서는 크게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는 편.

이 캐릭터는 한국에 정식 수입된 적은 없는 듯 하고, 상당히 오래 전 인기를 끌었던 녀석인 것 같다.

 

 

 

3일간 마음껏 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레이크라인 버스를 사진에 담아본 적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면 돌아와서 조금 아쉬웠을 듯. 관광용 버스 중에서는 디자인이 참 잘된 녀석이다.

원목은 아니지만 좌석도 나무로 되어있고, 안내에 능숙한 여성 운전자들이 반쯤 가이드 역할도 해 주는 훌륭한 녀석.

 

한쪽 방향으로만 순환하기 떄문에, 잘못타면 마츠에 역 바로 앞에서 승차해, 40분이나 걸려 역에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다.

 

어제 이즈모에서 돌아온 후 마츠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을때도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수첩에 일기를 쓰지 않은 여행이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나서 읊어본다. 이래서 일기를 써야 한다니까.

 

신지코 온천역 앞의 버스 정류장은 마츠에 역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곳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면

약 30분 가까이 마츠에 시내를 돌고 돌아 최종적으로 마츠에 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그냥 일반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던 중. 퍼펙트 티켓은 시영버스라면 어떤 것도 무료로 탈 수 있으니.

그런데 젊은 여성관광객 둘이 갑자기 앞에 와서 뭔가를 물어본다. 영어로. 네이티브는 아니고 적당한 아시안 잉글리쉬로.

영어로 말하는 모습만 봐도 아, 한국인이구나 싶었는데, 일본어에 익숙하다보니 막상 한국인의 영어는 알아듣질 못하겠더군.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그나마 영어로 물어본 것 같은데, 내가 일본인이었더라도 그 영어를 알아들을수는 없었을거라 생각한다.

 

도중에 말 끊을 타이밍을 잡을수가 없어서, 질문 다 끝나고 한국어로 이야기하자 폭소가 터졌다. 나야 자주 겪는 일이긴 하다만.

레이크라인 버스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마츠에 역으로 가는 일반 버스를 타고 싶은데 그걸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마침 나도 그럴 예정이었으니 함께 일반버스를 탔다. 홀몸이 아니라서(?) 버스기사분께 마츠에 역 가느냐고 확인질문까지 하고.

 

딱히 친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선 그냥 두분끼리 이야기하도록 뒤에서 앉아있었다.

내리고 나서 감사인사 한번 듣고 헤어졌을 뿐. 그래도 여행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긴 것이니 이쪽 입장에서도 즐거웠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경치를 감상한다.

현립미술관에서 내릴지, 카라코보 공방에서 내릴지를 머릿속으로 저울질하고 있는데

출발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창밖 너머에 중고서점 체인인 북오프가 보이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제 비참한 패배를 맛봤던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저기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떠오른다.

북오프는 기본적으로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곳이지만 대부분 음악CD, 영화, 게임 등도 함께 취급하니까.

친구 부탁때문에 다른 관광지를 놓치는 것이 아깝다면 아까울수도 있지만, 사실 북오프 탐방은 원래부터 좋아하는 코스다.

한국에서 일본 원서 찾아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 일본에 오면 꼭 한두 번은 북오프를 찾아다니곤 하니까.

게임소프트가 없어도 그냥 읽고 싶은거 읽으면 되기 때문에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결국 몇 초간의 짧은 고민끝에 현립미술관도, 아트공방도 포기하고 북오프 앞에 내려버렸다.

만약 여행 시작후 좀 더 열심히 돌아다녔다면 이곳도 일찍 발견해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희미한 아쉬움은 금새 사라진다. 여행은 신기한 거 많이 본다도 성공하는게 아니니까.

숙련된 주방장이 완숙미 넘치는 손놀림으로 부드러운 면을 뽑아내듯이, 느긋하게 마음이 가는대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런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이야, 가이드북에 실려있는 관광지들을 하나라도 더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 이해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급해 지는 순간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느긋한 여행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정류장에 내려서 한가롭게 휴식중인 호리카와 유람선의 모습을 담아본다.

마츠에 성 주변을 1시간 가까이 유랑하는 이 배는 선착장이 몇 군데로 나뉘어 있어서, 여행하다가 편한 곳에서 승선이 가능.

지금 이녀석 타기엔 시간이 좀 촉박하니 그냥 사진으로만 담기로 한다. 물이 영 깨끗하지 않는게 조금 거슬린다.

호리카와 강 원류는 깨끗한 편이지만, 워낙 지류가 여기저기 많이 나눠진 녀석이라 이런 곳은 물흐름이 좋지 않다.

 

 

 

북오프에 들어가기 전, 맞은 편 약국에서 오늘 저녁을 대비한 멀미약을 구입한다.

강한 녀석은 몸에 좋지 않으니 액상으로 된 조그만 녀석을 구입. 2병으로 나눠져 있어서 상태를 봐 가며 마실 수 있다.

가능하면 마시지 않는게 좋겠는데, 막상 어지러울 때 이녀석이 없으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일단 챙겨가는게 좋을 듯.

 

일본의 약국은 한국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한국의 약국과 똑같은 곳도 있는데, 왠만한 이마트만한 녀석도 꽤나 많다.

그런 곳에서는 전문 처방뿐 아니라 왠만한 보조식품, 미용도구, 비타민, 음료수, 심지어 과자나 컵라면까지 판다.

다이어트 라면이라던가, 묘하게 건강과 관련된 제품들로 채워져 있으니 일반 마트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일본은 의사 처방없이 구할 수 있는 상품들이 상당히 많아서, 약국이라고 해도 오만가지 상품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구경하기 힘든 곳이니 그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관광.

 

멀미약을 구입 후, 옆에 보이는 도시락집으로 이동. 계속 목표였던 북오프를 재쳐두고 딴길로 새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도 도시락집이 꽤나 성업중인데, 일본도 역시 편의점 도시락보다는 이렇게 바로바로 만드는 집이 더 맛있는 편.

호텔서 조식을 먹었으니 도시락까지는 필요없고, 그냥 반쯤 기념삼아 닭다리 한조각이나 구입해서 뜯어먹는다.

한국의 닭다리보다 양념맛이 훨씬 약하고 부드러운데, 저질 프라이드 치킨의 뼈 근처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없어서 먹기 좋다.

 

 

 

북오프는 마츠에 시의 크기에 비교하면 꽤나 준수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역시 중고품 전문점이기 때문에, 발매된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게임소프트는 없었다.

인기가 있는 녀석인지, 그 게임소프트 중고를 고가 매입합니다 라는 안내문을 적혀 있다. 결국 친구녀석의 부탁은 실패.

애초에 마츠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이니, 이런 시골마을에서 게임 소프트를 구해달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

 

그것과는 별개로 가볍게 읽을 책을 한권 샀는데, 페리 안에서는 아무리 멀미약을 먹어도 책을 읽기는 힘들 듯 하다.

그냥 한국에서 시간날때 읽으면 되니까 상관은 없다. 중고라고 해도 책이 워낙 깨끗하니 이득본 느낌도 들고.

 

의외로 약국, 도시락점, 북오프 세 군데만 돌아봐도 시간은 금방금방 흘러간다.

마츠에 시내는 버스가 그리 자주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 미리미리 이동하는게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30분 정도 일찍 버스를 타고 역으로 돌아와서, 떠나기 전 마지막을 기념하는 먹거리라도 찾아볼까 해서 역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좋아하는 라멘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고 만다.

 

사실 마츠에는 화과자 같은 전통 먹거리들이 유명하고, 라멘은 유명한게 별로 없다는게 정설이라서 이제껏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가게 앞에 붙어있는 고객의 목소리에는 '도쿄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맛있는 라멘 먹을줄은 몰랐습니다' 등의 글이 쓰여있어서 흥미가 동했다.

립서비스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이 '멀리서 들렀는데 의외로 맛있었다'는 내용.

마츠에가 라멘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맛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에 묘하게 신뢰감이 든다.

 

이곳의 메인은 닭육수에 소금으로 맛을 낸 시오라멘. 돼지육수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라멘과는 달리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인연맺기의 명소 이즈모 타이샤가 세워진 지역이다보니 이 라멘도 인연맺기 라멘이라고, 커플을 상징하는 흰색 분홍색 메추리알이 들어가 있다.

숙주나물과 짭짤한 죽순도 전부 근교에서 구입한 지역특화 상품이라고 하는데, 마츠에가 아직은 청정지역이니 좋은 포인트가 될 듯.

 

점심시간이라서 볶음밥 세트를 주문했는데, 볶음밥은 매우 평범하고 그저 그런 맛이다. 덤으로 딸려온다는 느낌에 딱 맞을 정도.

라멘은 확실히, 이 정도라면 맛없다고 한탄할 정도는 아니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이 목으로 넘어갈때 기분좋은 자극을 준다.

돼지 육수를 사용하는 다른 라멘들은 한국사람들이 먹기에 과하게 강렬하고 기름진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때는 이런 시오라멘이 재격.

죽순은 미리 소금에 절여놓은 녀석이라서 반찬 대용으로 먹으면 괜찮다. 아삭아삭한 숙주나물과 면을 함께 집어먹으면 궁함이 좋다.

가격도 크게 비싼편은 아니라, 마츠에에서 라멘이 고프다면 이곳에서 먹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만족한 케이스.

 

 

 

배도 충분히 채웠고 슬슬 버스시간이 다가오니 호텔로 가서 짐을 챙기기로 한다.

카메라 장비와 백팩을 들고 관광하러 돌아다니는건 꽤나 힘들지만

아마 유시엔 쪽에는 물품 보관소가 있을거라고 긍정적인 추측을 해 본다.

 

역 앞에 세워진 이 물 흐르는 기둥은, 표면에 묘하게 굴곡진 탓에 물이 0일정한 패턴을 형성하며 흘러내린다.

고속으로 찍으니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데, 삼각대도 ND 필터도 없이 장노출을 할 수도 없고.

 

 

 

짐을 챙겨 역앞으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시 하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한다.

이건 비가 올까 말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스트레이트한 자기주장이라서, 저 너머로 어마어마한 비구름이 올려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로써 이곳 여행하는 3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게릴라성 호우를 경험하게 되는데, 일기예보에서도 요즘 날씨가 참 이상하다고 멘트를 날리긴 하더라.

 

한국에서도 폭염과 태풍 때문에 말이 많은 여름이었지만, 그럴 경우 대체로 일본쪽이 한국보다 더욱 그 증상이 심한 편.

이쪽도 폭염과 폭우 때문에 사망자도 생기도 재산 피해도 꽤나 컸다고 한다. 여름이 지나가려니 이제는 게릴라성 호우가 출몰중이고.

하필이면 야외 정원 산책하러 가는데 저런 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그마한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좀 전까지만 해도 덥고 쨍쩅한 하늘이었으니, 지나가는 폭우라면 내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거라고 기대해 볼 수 밖에.

 

유시엔까지는 일본의 느긋한 버스속도로 운행해도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역시 그 속도로는 비구름에 금새 따라잡힌다.

버스 안에서 만나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는

창문을 전부 닫은 버스 안에서도 귀가 얼얼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천둥까지 뿌린다. 번쩍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폭발음이 들리는걸 보면 굉장히 가깝다.

슬쩍슬쩍 바닷가가 보이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옆에서 보기엔 시야가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폭우가 쏟아진다.

조금도 과장 보태지 않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 왜냐하면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밑의 도로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사분이 대체 어떻게 운전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 워낙 가까이서 내려치는 번개 덕에 마치 전장 한복판을 달리는 듯한 분위기.

 

 

 

유시엔에 내리는 사람은 세 명. 당연히 나를 포함해 젊은 한국인 커플 한쌍 뿐이다.

이런 폭우속에 야외 정원인 유시엔을 구경하러 내리는 사람들이란.

어차피 승선시간을 계산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페리가 기다리는 사카이미나토까지 가 봤자 의미가 없긴 하다.

가슴이 후련할 정도로 신나게 쏟아지는 비를 보니 오히려 엔돌핀이 분비되는 듯 하다. 저절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차피 유시엔에 배정한 시간은 충분히 남았고, 설마 3시간 가까이 비가 계속 오진 않으리라 생각하니까.

만약 정말 3시간 가까이 내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비오는 정원을 어떻게든 슬쩍 둘러보고 돌아가는 수 밖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조그만 식물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곳 통로를 지나면 바로 유시엔인데, 지금 가 봤자 의미가 없으니 벤치에 짐을 다 풀어놓고 비구경이나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중에는 번개가 내려치는 순간을 포착한 진귀한 녀석들이 있는데

타이밍만 잘 잡으면 정말 찍을 수 있을 만큼 번개가 가까운 곳에 떨어진다.

번쩍하고 나서 5~10초 정도 후에 우르릉 거리는 그런 번개가 아니라, 번쩍하고 1초쯤 되어 바로 귓전을 때리는 폭탄같은 굉음.

가까운 곳에서 번개가 칠때는 정말 온 하늘이 플래시 터트린것처럼 새하얗게 물든다. 아주 신선한 경험이라 즐겁다.

 

식물원은 지붕이 있으니 카메라 들고 두리번거려본다. 바깥에 내놓은 녀석들에게는 단비가 되고 있다.

식물원이라기 보다는, 동네 할머니가 손질하고 판매하는 조그만 꽃가게 같은 느낌인데

꽤나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런 걸 분재라고 하던가. 작은 공간에 큰 녀석을 오랫동안 길러서 자연상태처럼 나이먹어 보이게 한다는 취미활동.

 

당연히 원래 지면에서 자라는 것보다 영양도 공간도 부족하니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진 않는데

식물은 동물과 달라서 이런 식의 스트레스 요소가 오히려 수명을 연장시키기 때문에, 사실상 분재의 수명은 자연상태보다 더 길다.

일본에서는 500년 전의 분재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역시 인간의 취미활동이지 이녀석들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은 아니다.

 

 

 

오키나와에서 자주 보던 녀석. 암술로 보이는 부분이 두세 개씩 피어나는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도 본 기억이 날랑말랑 하는데 아직도 이름은 찾아보지 않고 있다. 이름 같은거 없어도 잘 클 녀석들이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바로 유시엔으로 이어졌다면 지금쯤 얼마나 생고생을 하고 있었을지.

비가 오니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우산 빌려쓴다고 해도 사진 찍기는 보통 고역이 아니다.

작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식물원 덕분에 심심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다를 떨면서 이런 화분을 사 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곳과 유시엔은 무슨 관계인지 조금 궁금하다. 버스 정류장 위치를 봐서는 이곳을 지나서 유시엔으로 가는게 정식 코스인데

그런 것 치고는 동네 아주머니가 열어놓은 평범한 가게같은 느낌. 적어도 관람을 위한 장소는 아니다. 대부분이 판매용이니까.

그런 반면에 번듯한 공공 화장실도 있고, 사람은 안들어 있지만 안내소를 겸한 사무실도 자리잡고 있는걸 보니 조금 애매하다.

 

애시당초 유시엔이라는 정원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냥 여행가기 전 볼거리를 슬쩍슬쩍 찾아보다가 눈에 들어왔고

위치상 페리 타기전에 들러보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찾아온 곳이니.

비가 그치고 나서 유시엔에 들어가더라도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곳이면 좀 아깝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뭐가 어찌됐든 이런 폭우 속에서 비를 피할 곳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

마츠에 시내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이런 빗속에서 제대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조금씩 약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버스 안에서의 폭우는 정말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쫄딱 젖었던 지난날보다는 훨씬 즐겁다. 일단 비는 맞지 않으니까.

탁 트인 농촌마을 하늘에서 쏟아내리는 비의 박력은 확실히 도시의 그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주위가 완전히 잿빛으로 변하는 것이 살짝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꿋꿋이 경고의 색을 발산하는 녀석이 더욱 돋보이는 장점도 있다.

언제가 되더라도 그치긴 그칠테니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마시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어쨌든 여행이라서 이런 것도 좋은 법. 평일 낮에 내리는 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란 것도 소중하다.

'떠나자 > 山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인 여행 - 유시엔 1/3  (18) 2012.10.16
산인 여행 - 잡화점의 별  (22) 2012.10.15
산인 여행 - ANTWORKS GALLERY  (17) 2012.10.09
산인 여행 - 이즈모 군것질  (16) 2012.10.06
산인 여행 - 어디서부터  (10) 2012.10.05

 

 

소바를 거뜬히 비운 다음 역쪽으로 걸어간다.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조금씩 피곤이 쌓일 즈음.

좀 전에 지나쳐 왔던 개미공방에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 젊은 커플손님이 안에 있어서 살짝 망설이기도 했다.

아트공방은 너무 시끄러워도 너무 조용해도 문을 열때 살짝 긴장감이 도는 느낌.

 

그래도 뭔가 재밌어 보이는 공예품들이 창문 너머로 보이길래 큰맘먹고 안으로 돌격한다.

 

 

 

주인장이 먼저 온 커플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팜플렛에 소개되어 있던 녀석을 먼저 살펴본다. 지인의 작품을 대신 전시해 주는 특별 기간인 듯.

 

다양한 종류의 나무조각을, 원본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정도까지 다듬은 후

눈이 동글동글한 새 한마리를 그려넣고 격언이랄것도 없는 짧은 문구 하나를 적어놓은 녀석.

사용법은 스스로 만들어 보시라고 적혀있다. 목걸이나 열쇠고리로 제격일 듯 한데.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사용해서 손의 감촉, 무게, 색깔, 향기 등이 꽤나 차이가 난다.

모양도 불규칙한데다가, 뒤에 적혀있는 글자도 랜덤성이 강해서 한참 보고 있어도 고르는 맛이 있고.

문득 제천 솟대박물관에 늘어서 있던, 자연 그대로의 나무조각만 모아서 완성시킨 솟대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하다.

도시에 살고 있으면 의외로 다양한 나무의 질감과 차이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 더욱 반갑기도 하고.

 

막 태어난 조카한테 부적 대신으로 하나 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한참동안 만지지도 못하겠지만

생후 첫 선물이니 나이가 좀 먹은 후에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역할은 할 것 같고.

똑같은 녀석이 하나도 없어서 약 30분 가까이 심혈을 기울여 계속 적당한 녀석을 찾아본다.

 

주인장 아주머니가 아마 좀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여간해서는 뭔가 딱 맞는다 싶은게 손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결국 크기나 모양, 색깔이 제일 무난하다 싶은 녀석을 고르긴 했다. 뒤쪽에는 'ゆっくり、ゆっくり' 라고 적혀 있다.

뜻은 여기서 해석하지 않아야지. 조카가 혹여 몇년 후 뜻을 물어본다면 가르쳐 주겠다.

 

 

 

사진 촬영 허락을 받고, 그리 적극적이진 않지만 조금씩이나마 대화를 시도해 본다.

전부 자기 작품은 아니고, 지인들의 작품도 정기적으로 전시를 한다고. 방금 전의 나무조각들은 친구의 작품이지만

앞의 유리선반 위에 올려진 나무 조각품들은 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풍경을 보면 느껴지겠지만 상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상품들과 공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듯한 느낌.

뭔가를 구입해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천천히 돌아보면서 분위기를 감상하는게 더 적합한 방법일 듯 하다.

 

 

 

여러가지 악세사리와 함께, 안쪽에는 가볍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다.

마침 손님도 나밖에 없어서, 주인장 아주머니와 커피 한잔씩 하면서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어 갈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설명하기 어려운 부담감이 계속 엄습해 와서 그냥 소심하게 몇가지만 슬쩍 물어보는 수준으로 끝나고 말았다.

 

개인공방이라는 게 참 푸근하고 정감있는 곳일텐데, 나는 이상하게 이런 공간에 발을 들이는데 조금의 긴장을 필요로 한다.

좋은 공방은 판매를 위해 전시된 제품이 아니라 공방 자체가 주인의 예술성을 주장하는 공간이라서

굉장히 폐쇄적으로 집필활동을 하는 본인 성격상, 왠지 쉽게 건드려서는 안될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기회가 있다면 혼자보다는 누군가 함께 오는 편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참동안 혼자 둘러보고 있으니 주인장 아주머니는 까페 깊숙한 곳에서 여러가지 나무조각에다가 뭔가를 만들고 계신다.

이번 여행에서 기념품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이곳은 몇개 집어가면 나름 괜찮은 선물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라서

먹는것 외에는 쓸일이 없는 자금을 조금 과감하게 투자해도 될 듯 하다.

 

 

 

조카의 생후 첫 선물로는 자연미 풍기는 위의 나무조각을 선택했고

줄 사람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 마음에 드는거 몇개 사 가면 언젠가 누구한테 줄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본 결과, 이 녀석들이 어쨌든 제일 귀엽고 앙증맞다. 이렇게 간단한 발상임에도 흉폭할 정도의 귀여움과 개성이 살아있다니.

 

여유가 아주 많았다면 종류별로 여러개를 사 오고 싶었지만, 아무리 단순해도 어쨌든 예술품의 일종이니 저거 한개에 내 밥값은 된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올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일단 이것 중에서 하나, 그리고 이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역시 훌륭한 조각품 하나를 구입.

 

아주머니께서 받침판 필요하시면 하나 가져가시라고, 동그랗고 넓적한 나무조각들을 여러개 보여주신다.

그냥 손바닥만한 나무줄기를 양파 썰듯이 잘라놓은 조각인데, 나무 공예품의 받침판으로는 딱이다.

이즈모의 지역특색이 살아나는 기념품은 아니지만, 이 부근이 예술로 유명한 곳이니까 이런 녀석들도 좋지 않을까.

이런 부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질 녀석들이 많아서, 왠지 지갑을 쥔 손이 두려워지는 느낌도 든다.

 

 

 

마츠에로 돌아가는 기차도 한시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괜히 시간낭비 하지 않으려면 돌아가는 기차 시간은 알아보고 가는게 좋다.

이런 말 하는 본인은 사실, 시간 남으면 앞에서 커피나 한잔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출발 5분전에 딱 맞춰서 도착.

 

일단 돌아가서 남는 시간을 좀 활용해 볼까 싶어서 전철에 올라탄다.

전철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고양이는 시마네현의 마스코트 시마네코.

왼쪽의 눈매 사나운 캐릭터는 '매의 발톱단'이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요시다군.

예산이 있다고 말하기에도 어색할 정도의 초저예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혼자서 감독, 연출, 성우, 작화 전부 다 도맡은 원작자 FROGMAN 의 고향이 이곳 시마네현이라서

전국적 컨텐츠가 극히 부족한 이곳에서는 꽤나 밀어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병맛넘치는 애니메이션을 시험삼아 한편. 참고로, 모든 목소리는 감독 혼자서 낸다.

 

 

 

 

 

전철 통로에는 시마네코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찍혀 있다.

특출날 것 없는 마스코트지만, 이런 소소한 곳에 인상을 꾸준히 남기는 것이 정석이겠지.

돈이 많은 쪽은 그런 마스코트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예 애니메이션까지 제작하곤 하지만

일본에서 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적은 시마네현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태로 노력하는게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한시간쯤 달려서 마츠에 역으로 돌아왔는데, 이쪽은 하늘 색이 영 심상치 않다.

일기예보란게 마츠에쪽에만 딱 들어맞는 녀석이었을까. 이즈모와는 그리 거리가 멀지도 않은데.

아무튼 어꺠에 살짝살짝 비가 흩뿌리는게 영 불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편의점보다 훨씬 저렴한 대형마트 이온(AEON)이 있어서 서둘러 그쪽으로 향한다.

이번 중국 시위대에게 박살난 그 이온 맞다.

 

도시락이나 음료수 전부 아껴봤자 300엔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이온에 가려는 건 그것때문만이 아니라

친구가 구해달라고 하는 게임소프트를 찾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워낙 시골이라서 그런거 없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센터에 물어보니 이곳 이온과, 다리건너 있는 전자제품 양판점 데오데오 두 군데가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일본만 가면 꼭 게임소프트 사달라고 하는데, 구할 수 있으면 구해주는게 어쩄든 나쁠거 없으니 발걸음을 옮겨본다.

날씨가 영 불안하긴 해도 이 정도면 맞아도 걸어가면서 말라버릴 정도의 가랑비라서 다행인데.

 

시골이라고는 해도 일단 시마네현 제1의 도시다보니, 이온 마트는 상당히 큰편이다. 건물 안애 영화관과 게임센터까지 있고.

전자제품쪽에서 찾아보니 친구가 찾는 게임은 신발매품이라서 이곳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감이로군.

허탕치고 그냥 돌아가기는 뭣하니, 지하 식품매장에서 먹을거 대충 사고 푸드코트에서 소고기덮밥 한그릇 먹는다.

여행이란게 중간중간 군것질 없이는 금새 배가 허해지는 녀석인데다, 일본은 음식 양이 적어서 그냥 삼시세끼로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

지금 소고기덮밥을 먹어도, 어차피 숙소에서 쉬다보니 입이 심심해질거라 생각하고 오징어다리와 맥주 한캔을 건져온다.

 

 

 

이온을 나오자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한다.

어제 비를 신나게 맞은 경험이 있어서 더 이상 맞고싶진 않은데, 일단 시간은 넉넉하니 그냥 기다려 보기로 한다.

일기예보에서 맑다가 갑자기 소나기라고 했으니, 기다리다보면 다시 맑아질 거라고 희망적인 예측을 하면서.

 

그래도 약 30분간 아주 신나게 내리는데, 기다리는게 지겹긴 해도 우산 사서 나가기는 싫다.

이쯤되면 거의 자존심 싸움으로, 어차피 버리고 가야 할 싸구려 비닐우산을 비싼 돈 주고 산다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다.

비싼것도 아니고 몇백 엔밖에 하지 않긴 한데, 한국에 비하면 비싸고, 그런데다 돈 쓰기는 이상할 정도로 싫다.

 

그래서 비 그칠때까지 사진이나 찍으면서 논다.

대도시 전자상가 근처에 밀집한 메이드까페란게 여기도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그 메이드까페란게 다른 곳에서 본 샤방샤방한 것과는 달리,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은근히 들어가려는 그렇고 그런 업소같은 분위기라서 더욱 놀랐다.

저게 메이드까페라고 쓰여있지 않으면 캬바레로 보이지 메이드까페로 보이나?

보통 메이드까페 앞에서는 메이드복장을 한 아르바이트생들이 호객행위를 하곤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벽화에 그려진 메이드마저 검은색 실루엣으로 표현해놓다 보니 이건 뭐...

 

 

 

비가 오니 한 곳에서 주변을 계속 살펴보게 되고

고정된 화각에서 오래 살펴보다 보면 문득 담고 싶을만한 요소들이 슬그머니 떠오를 때가 있다.

사진 담으러 다닐때 조급해서는 안되는 이유중 하나지만, 이렇게 빗줄기에 의해 억지로라도 멈춰지지 않으면

사람이란게 자기 마음을 그렇게 간단히 컨트롤 할 수 없는 종족인가 보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다지 싫지 않은데

결국 또 신지코 호수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아쉽다.

어제부터 계속 저녁에는 날씨가 영 좋지 않은데, 지금 상태라면 일몰을 볼 수 있을만큼 하늘이 맑아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

그냥 인연이 아닌가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까지 미친듯이 보고 싶은것도 아니니 기회가 되면 언젠가 볼 일이 있겠지.

 

자전거 여행중에는 아주 멋진 일출스팟이 있다고 누가 소개해 줘서, 큰맘먹고 거금 들여 그곳 앞의 호텔에 하룻밤 투숙한 적도 있었는데

특수한 여행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평범한 여행중에는, 똑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차이가 나는것 같다.

지금 자전거 여행중이었다면 신지코 호수의 일몰을 보지 못하고 통과하는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했겠지.

 

 

 

바람을 동반한 폭우라서 전신주가 재미있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비는 미친듯이 내리는데 정작 전신주는 한 쪽만 시커멓게 젖어있고, 반대편은 물기가 없이 깨끗한 것.

20분쯤 보고 있으니 서서히 반대편도 물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왠지 중세의 공성전을 생각나게 해서 재밌게 관전중이다.

 

저 반대편 전신주마저 완전히 젖어버리면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라서, 비닐 우산을 하나 구입해버릴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일듯 한데

묘하게도 30분쯤 내리던 비는, 아주 조금의 마른 공간을 남겨놓고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기회는 이때뿐이라고 생각하며 성큼성큼 진격.

 

 

 

그런데 하늘이 불쌍하다고 한번 던져준 기회를 또 이렇게 놓치고 만다.

비가 그쳤다고 열심히 걸어가다가, 강 건너편에 있다는 양판점에 결국 한번 가보자고 다리를 건너버린 것.

 

이온에서 숙소로 바로 걸어가면 15분쯤, 이온에서 데오데오에 들렀다가 숙소로 가면 30분쯤 걸린다.

사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거기엔 있을까 싶어서 결국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넓직한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는 도중 결국 인내의 한계를 드러낸 빗줄기가 다시 무정히도 쏟아지기 시작한다.

방금 전과는 달리 다리 한가운데라서 숨을 곳도 없다. 결국 어제 마츠에 성에서와 같이 쫄딱 젖어버릴 수 밖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그 비를 맞아가며 다리 위의 풍경도 한장 남긴다. 그냥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었으니.

다리를 건너면 바로 시민회관 비슷한 건물이 있고, 거기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이니 거기까지만 힘내기로 한다.

그래도 5분 넘게 폭우를 맞았으니 어제와 똑같은 꼴이 되고 말았지만.

 

 

 

간신히 지붕있는 건물로 대피했지만 또다시 30분간 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다.

방금 쫄딱 젖어가며 건너온 다리가 유독 길어보이는 느낌.

일기예보를 보면 분명 우산을 들고 다녀야 했지만, 카메라 장비때문에 우산은 워낙 거치적거릴 뿐이라

비가 오면 맞을 각오를 하고 나왔다. 하지만 진짜로 맞아보니 이건 이거대로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여기서 데오데오까지는 5분쯤. 데오데오에서 숙소까지는 15분쯤 걸리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를 맞으며 이동하기에는 여러가지로 힘든 길이다. 꼭 이렇게 하루 한번씩은 비에 얻어맞는 여행도 참 오랜만.

이렇게까지 애를 써서 왔는데,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찾을 수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참 맥빠질듯 싶다.

 

결국 이 비도 30분 정도 지나니 물러가는데, 여기서부터는 오래된 상가거리가 주욱 이어지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

역 주변의 오래된 상가거리는 천막으로 지붕을 줄지어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아서, 비가 와도 그 안을 잘 걸어가면 크게 문제가 없으니.

기대를 안고 데오데오로 들어갔지만, 이곳은 아예 게임기 코너가 존재하지 않았다. 크게 실망.

마츠에 시내의 관광지 한두군데는 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두 군데나 걸어다니 찾아본 게임소프트는 결국 꽝이었다.

게임을 살 수만 있었으면 젖어버린 옷과 머리카락도, 둘러보길 포기한 관광지도 다 흘려보낼 수 있었는데, 완전히 헛수고한 느낌.

하긴 이런 시골에서 최신 게임 사려고 돌아다닌다는것 자체가 좀 웃기는 일이긴 했다.

친구도 없으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부탁을 받은 쪽에서 성의없이 찾아보기는 힘들고.

 

답답한 가슴은 비닐봉투 안에 든 캔맥주 한병이 해결해줄거라 믿고, 어둑어둑한 구 상가거리를 지나서 숙소로 돌아간다.

내일은 귀국행 페리를 타는 날이지만, 출발이 저녁 7시라서 아직 여기저기 둘러볼 여유는 충분하다.

'떠나자 > 山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인 여행 - 잡화점의 별  (22) 2012.10.15
산인 여행 - 비 그리고 비  (18) 2012.10.11
산인 여행 - 이즈모 군것질  (16) 2012.10.06
산인 여행 - 어디서부터  (10) 2012.10.05
산인 여행 - 크고... 아름답습니다?  (18) 2012.09.27

 

 

어느 정도 주택가를 활보하다가 슬금슬금 방향을 상점가쪽으로 바꾼다.

좀 더 느긋하게 돌아봐도 되겠지만, 날씨도 덥고 점심시간도 지나가고 있으니.

 

한국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안내 팜플렛에서는 여러가지 맛집이나 기념품점을 한국어로 부담없이 볼 수 있는데

그런 곳에 가면 괜히 사람 많을까봐 오히려 꺼리게 된다.

팜플렛에 적힌 가게들은, 아주 특출나진 않지만 충분히 이름을 올릴 가치가 있는 실력파들이긴 하다.

모든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지역이라서, 창업 40~50년은 넘은 소바집, 까페 등이 포진하고 있고

아무리 텃세가 있다고 해도 맛에 대한 보장없이 수십년을 이어올 만큼 일본의 상업정신은 만만하지 않으니까.

 

관광객으로 붐빈다고 해도, 맛있는 요리 먹기 위해서라면 친절한 가이드북에 의지하면 되지만

원채 다른 관광객하고 섞이는걸 꺼리는 성격이라서, 맛조차도 포기할 수 있다.

 

여행은 다른 세상을 체험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인데, 동류의 이방인들이 가득 모이는 장소는 마치 블랙홀같은 느낌.

 

 

 

상점가로 나오니 많은 간판들이 손님을 유혹한다.

유명 관광지에서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이렇게 풍부하게 자리잡은 상점가가 아닐까 생각.

과연 이렇게도 장사가 될까 싶을 정도로, 관광지 주변에 상점가가 많다.

 

일본 관광지의 가게들이 나름 장사가 잘 되는 이유는, 여행 선물이라는게 당연히 지켜야 할 예절의 하나로 자리잡았기 때문.

어른과 얼굴 맞대고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한국의 예절처럼

출장이든, 관광이든 타지에 다녀오는 사람들은 그쪽 지방 특산품을 지인들에게 사오는 것이 예절이다.

 

예절이라고 언급했듯,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욕먹을 정도의 행동이라서

심지어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에게도 부모들이 선물용 용돈을 따로 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관광지의 상가들이 활기를 띄게 되고

일정 크기 이상의 시장이 형성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경쟁이 시작되어 품질의 하락을 걱정할 염려도 없다.

 

오미야게(御土産)라고 부르는 이 여행 선물의 특성상, 일정 금액 이상은 지불하기 힘들고, 반대로 싸기만 한 녀석도 인기가 없다.

부피가 큰 녀석은 받는 쪽에서도 집안에 전시하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가장 인기있는 선물은 지역 특색을 살린 먹거리, 그 뒤로 인기있는 선물이 열쇠고리같은 작은 기념품이다.

방향과 상한선이 분명히 정해진 덕에 상점들의 경쟁은 가격 논리보다 독특함과 아이디어의 승부가 되고

제로섬 게임으로 흐르는 일 없이, 가족이나 직원 회의에서 괜찮은 아이템에 대해 토론하는 정도의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 블로그 오사카 여행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꼬리흔드는 고양이' 인형이 대표적인 케이스로

오미야게 아이디어상품 대상을 수상한 그 인형은, 제작비가 비싸지도 않으면서도 로또에 버금가는 대박을 터트려서

이제는 왠만한 여행지에서 다양한 바리에이션 상품이 제작되어 지역 경제 전체에 톡톡히 이바지하고 있다.

이곳 이즈모의 선물가게에서도 그 꼬리흔드는 녀석을 볼 수 있었고.

 

지역특색에 의존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지역특색을 만들어가는 이런 모습이 부럽기 그지없다.

한국은, 그 지역 관광지에서만 살 수 있는 특산품이란게 뭐가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으니...

것도 홍삼 등의 이름난 녀석들은 너무 비싸서, 지인들에게 돌릴만큼 구매할 수도 없고.

 

 

 

일단 나는 일본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니, 선물을 꼭 준비해가야 할 필요도 없고

애초에 그렇게 여유있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라서 마음은 홀가분한 편이다.

 

사하라 멤버 나침반님한테 면세점 담배나 한보루 사다드리고, 나머지는 그냥 돌아보다가 괜찮은거 있으면 사고

없다 싶으면 그냥 돌아오면 되는 것. 주위에서 그정도는 이해해 주니까 뭐.

애초에 가족들은 물질적인 뭔가에 관심이 굉장히 희박한 편이다. 필요하다 싶은건 자기가 사버리기 때문에

먹는게 아닌 뭔가를 선물로 사들고 가면, 한두 달만 지나도 선물로 뭘 받았는지조차 기억 못한다.

 

일단 배나 좀 채울까 싶은데, 가이드북에 전시된 이즈모 소바집은 사람들이 많을것 같아서 패스.

이미 어제 마츠에에서 가장 유명한 소바집에서 식사를 했으니, 이번에는 이름값과 관계없는 곳에 갈 생각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여행의 즐거움인 군것질을 좀 해봐야겠다고 생각중.

이곳 이즈모의 유명한 군것질거리는 젠자이(ぜんざい)라고 하는, 한국의 단팥죽과 비슷한 녀석.

죽은 아니고, 밀떡이나 쌀떡을 달콤한 팥국물에 동동 띄워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게 예전 자전거 여행중 아르바이트 하던 소바집에서도 가끔 나오던 요리였는데, 요즘엔 물맑은 지방에서 많이들 만든다.

나가노 지방 사람들이 이거 한국에도 비슷한거 있다고 하니까 상당히 놀라던데

사실 팥국물에 단거 넣어서 떡하고 같이 먹는건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지방 어디든 익숙한 요리.

 

젠자이는 나가노에서 신나게 먹었었고, 굳이 여기서 먹을 필요가 없어서 다른 곳을 물색중이었는데

직접 만든 오야키라고 광고하는 집 앞에서 결국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오야키(お焼き)는 호떡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근래들어 기름 철철 뿌려서 철판에 튀겨버리는 그런 호떡 말고

기름 하나도 쓰지 않고 그냥 철판위에서 구워내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리지날은 고기 따위의 고가품이 아니라 산나물이나 삭힌 야채 등이 들어가는 서민의 음식.

 

원류를 따지고 가자면, 고대 아프리카 시절부터 존재하는 에인션트 푸드(?)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나가노 지방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어디서나 다들 만들지만.

 

나가노 지방은 고지대에다 산세가 험하고 물이 맑아서, 에전부터 쌀농사보다 메밀과 밀농사가 주류를 이뤘고

한랭지의 야채 특성때문에(시래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생각해 보시길. 일본에도 시래기가 있다) 오야키의 원류로 알려져 있다.

특히 메밀의 본고장인 나가노이다 보니 메밀피로 된 오야키가 유명한데, 쫄깃한 맛은 떨어져도 그게 오히려 야채의 식감과 잘 어울리는게 특징.

 

 

 

야채가 든 녀석과 호박이 든 녀석 두가지를 주문해서 맛만 보기로 한다.

뭐든 넣으면 되는 녀석이라 종류가 수십가지를 넘는데, 제일 인기있어 보이는 카레와 고기속은 이미 품절.

주문후 바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시간은 좀 걸려도 따끈따끈 바삭바삭한 식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홈스테이하던 나가노현의 키소마을 앞에는 '길 안의 역'이라는 뜻의 미치노에키(道の駅)가 있었는데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비슷하지만, 국도에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상당히 활성화가 잘 되어 있다는게 특징인 곳.

지역에 따라서 판매하는게 다르기 때문에, 그냥 운전하다가 이곳에서 선물이나 먹을거리를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본섬 하나만 놓고 봐도 자동차로 끝에서 끝까지 24시간 이상 걸리는 일본이라, 이런 휴게소의 가치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홈스테이하던 집에서 3분만 걸어내려오면 이 미치노에키가 있었는데, 나가노 지방이다보니 역시 오야키도 팔고 있었다.

어느날 아르바이트 후 들러서 잠깐 쉬는 도중, 한번 먹어볼까 싶어서 고기가 든 오야키 하나를 주문했는데

한입 물고나니 고기가 아니라 산나물이 들어있었던 것. 크기가 작은 간식거리에 불과해서 이것도 맛보고 고기 하나 더 먹을까 싶었는데

아주머니는 미안해 죽으려고 하시면서 고기 오야키를 그냥 덤으로 주셨다. 괜찮다고 한사코 말려도 그냥 주시니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그런 추억이 있는 간식이라서 이곳에서 오랜만에 접한 반가움에 먹어보기로.

사실 이쪽도 카레와 고기 오야키를 먹고 싶었지만, 대중들의 휘향이란 비슷한 듯 이미 품절상태였다.

야채 오야키는 쌉싸름하게 오독오독 씹히는 맛이 매력있고, 호박향기 가득한 오야키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을 듯.

 

만든 후 바로 먹어야만 최고의 맛을 내는 녀석인데, 굽기 전의 오야키를 냉동해서 선물세트로 파는 모습을 보니

진짜 장사하는 머리는 잘 돌아가는구나 싶다. 메밀피 오야키를 불에 직접 구우면 그 포근포근한 향기가 아주 일품.

 

 

 

오야키 두 개로 배가 든든해질 일은 없지만 어쨌든 관광기분좀 내 보고 다시 걸어간다.

역사가 오래된 관광지이다 보니 신기한 자판기도 볼 수 있다.

아마 일본서 본 자판기중 가장 오래된 녀석이 아닐까 싶은데, 건전지를 파는 녀석.

 

아직 작동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건전지를 사용하던 카메라 시절에 제 역할을 하던 녀석이 아닐까 싶다.

온몸으로 어마어마한 연식을 어필하는 녀석이라, 조만간 골동품점에 팔려가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역을 지나서 한적한 길을 계속 내려가면 Ant Works Gallary 가 나온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본 팜플렛에서 뭔가 느낌이 팍하고 왔던 곳이라서

꽤나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평범한 시골 주택을 그대로 사용하는 분위기가 편안한 느낌이 든다.

 

시마네현이 일본에서 꼴찌를 다툴만큼 인구도 적고 개발이 덜 된 지역이지만

예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라프카디오 헌,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아다치 미술관을 위시해, 예술 쪽에서는 상당한 기반을 다진 곳.

그래서 이렇게 개인이 운영하는 공방도 군데군데 암약중이다. 이런 데 관심있는 사람은 유심히 살펴봐야 할 곳.

 

한국사람에게 익숙한 가이드북에는 큼직큼직한 공방밖에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아서, 진짜배기를 보려면 현지 조사가 좀 필요할 듯.

 

 

 

개미공방은 좀 있다가 들어가보기로 하고, 일단 좀 더 길거리를 둘러본다.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것도 아니고, 도로가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녀석.

그러고보니 요즘엔 한국사람들도 우물에 동전 잘 던진다고 하더라.

 

우물과는 달리 이건 손만 뻗으면 바로 가져갈 수 있는 거리인데, 용감도 하다.

사실 대부분 1엔짜리 동전이라서 가져가봤자 음료수 하나도 못뽑아먹긴 하지만.

 

 

 

열성적으로 관광객을 맞이하는 이즈모타이샤 앞의 상점가도

눈에 보이지 않는 특정 구간만 지나버리면 금새 한산한 시골가로 모습이 변해버린다.

상권의 생성과 성장이라는게 실은 굉장히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정착되는 것이라서

의도적으로 상권을 이동시키거나 범위를 넓히려는 위정자들의 수많은 시도는 번번히 물거품이 될 때가 많다.

 

자전거 여행중이었으면 표지판에 보이는 미치노 에키에서 잠깐 쉰 후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을텐데.

밤중에 도착한다면 이런 시골 미치노 에키는 훌륭한 야영지가 되기도 한다.

붐비는 곳은 눈치보여서 못하지만, 7시만 되면 문을 닫아버리는 시골 휴게소는

넓직한 주차공간과 텅 비어버리는 야외 판매부스, 24시간 가동되는 화장실 덕에 천국과도 같은 곳.

 

드물기는 하지만 지붕이 딸린 무인휴게소를 24시간 개방하는 곳도 있어서, 그런 곳에 도착한다면 운수 좋은 날이다.

 

 

 

적당히 돌아보는것도 점점 채력이 딸리기 시작한다. 날씨가 워낙 더워서.

흐리고 가끔 비가 철철 내린다는 예보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물론 화창해서 정말 다행이긴 하다.

 

미치노 에키까지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평범한 관광에 거기까지 갔다가는

또 한번 자전거 여행의 그 추억들이 폭풍같이 밀려와서 괜히 괴로워 질것 같아서 무심히 방향을 돌린다.

 

이즈모타이샤는 한참 뒤지만, 이미 여기서부터 토리이가 서 있다. 상점가의 시작을 알린다고 보면 될 듯.

큰것 좋아하는 이곳답게, 이 토리이도 일본에서 가장 큰 토리이. 그런데 느껴지는 매력은 없다.

물 위에 떠있는 것도 아니고,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나무향기가 나는것도 아니고, 그냥 큰 돌덩이일 뿐.

 

 

 

토리이를 통과해서 쭉 직진하면 신사가 나오지만

방금 그 상점가를 한번 스윽 둘러봤기 때문에 다시 방향을 왼쪽 골목으로 틀어본다.

역시 일직선 상점가를 빼면 어디나 평범하게 사람들이 하는 풍경.

 

시간도 충분하고 다시 주택가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서 천천히 걸어간다.

마당이 조금 작아서 아쉽지만, 나무들이 아주 건강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는 집이 인상깊다.

아침마다 이 녀석들한테 물 뿌리면서 얼마나 컸나 한번씩 살펴보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일 듯.

 

 

 

조금 걸어가다보니 수타소바점이 보이길래 이것도 인연이겠지 싶어서 들아가 본다.

관광지에서 좀 떨어진 곳이다 보니, 안에서 한국어가 들릴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마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단련된 유명 소바집보다 맛있지는 않겠지만

일단 수타소바라고 광고를 하고, 맛의 레벨과는 별개로 지역민들이 찾는 식당이라는것도 나름 매력이 있으니

생각없이 걸어가던 내 눈앞에 이렇게 나타난 것만으로도 들어가볼 가치는 충분하다.

 

 

 

카운터를 포함해서 자리가 10개도 채 되지 않는 조그마한 식당.

원래 카운터에는 잘 앉지 않는 편인데, 뭔가 재미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와서 끌려가듯 앉게 된다.

이건 일본식 장기에서 쓰는 말의 모양인데, 카운터에 조각을 한게 아니라 홈을 파고 끼워넣은게 재미있다.

 

주인장이 장기를 좋아하나 싶었는데, 그다지 인상이 친근해 보이지 않는 주인장이라서 물어보진 못했다.

동네 가게라는 이미지에 딱 맞게, 어디서 일하고 온 듯한 아저씨들 서너 명이 모여서 주섬주섬 정치 이야기 중.

무뚝뚝한 주인장은 일단 인사는 잘 하는데, 뭐라고 더 말 걸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어쩐지 예상한 것과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오히려 미소가 떠오르는 듯.

 

 

 

어제 마츠에에서 먹지 않고 일부러 남겨 둔 와리고 소바(割り子そば)를 주문한다.

도시락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저렇게 나뉘어 진 녀석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식당에서 지역 명물로 소개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긴 한다. 이곳에서는 이렇게 먹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

맛보다는 먹는 느낌이 중시되는 편이랄까. 본인 스타일과는 그닥 맞지 않는 명물이긴 하다.

 

그래도 담궈먹는 방식이 아니라 부어먹는 방식이라 다신 국물이 상당히 진한 맛이라는 건 특징이라 할 만하다.

어제 먹었던 야쿠모안이라는 가게는 워낙 유명한 곳이어서 양에 비해 좀 비싼 편이었는데

이곳은 일단 양이 많은 편이라서 그것만으로도 흡족한 기분이 든다.

배가 큰 사람들은, 일본에서 특히 맛만큼이나 양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듯. 먹어도 배가 차질 않으니.

 

물론 저렇게 3단계로 나눠서 나온 녀석이라고 해도, 예전 아르바이트하면서 먹은 양의 절반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소스의 향이 달아나지 않게 하려고 목 부분을 종이로 막아놓은 것도 괜찮은 배려.

 

수타소바라는, 고급스럽고 정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단어에 비하면 확 띄는 인상은 없는 편인데

지역이 지역이다보니 이런 허름한 동네 가게도 일정 수준은 넘기는 듯 하다. 중상급 정도라고 하면 되려나.

 

다신 국물에다가 소바를 푸욱 담궈서 후루룩 흡입하는 본인 스타일 상

진하다고는 해도 저기다가 졸졸 부어서 먹는 방식은 약간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맛없지는 않으니 이쪽 명물 맛을 봤다는 쪽으로 만족하고 넘어가면 될 듯.

 

단지, 아르바이트 하면서 점심으로 소바를 마구 퍼먹던게 워낙 뇌리에 남아있어서

손님으로서 돈을 내고 소바를 먹으면 항상 양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드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손님에게 내 놓는 격식있는 모양새를 갖추지 않고, 그냥 커다란 라면그릇에다가 마구 퍼담아 먹었으니...

그렇게까지 입맛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원래 소바 그릇은 물이 밑으로 빠지도록 되어 있어서

라면그릇처럼 하단부에 면과 물이 닿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는다. 면이 정말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지기 때문에.

공기와 함께 흡입해야 향기를 느끼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 미스터 초밥왕을 생각케 하는 이것저것 미묘한 포인트가 많은게 소바라는 음식이라

사실 어지간히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냥 대충 먹는것하고 차이를 느끼기는 힘들다.

요리만화에 익숙해지면 자기가 뭔가 대단한 미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만화는 만화일 뿐.

 

너무 조용해서 소화가 잘 안될듯한 분위기였지만, 혼자 먹는데 익숙한 본인은 그냥 묵묵히 맛을 음미하고

맛있었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가게를 나왔다. 주인장분은 내가 외국인이라는걸 알고 있는지, 그쪽에서도 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는 외국인에게 익숙한 그런 가게가 아니라서, 아마 괴이한 몰골의 외국인 덩치가 들어와서 좀 긴장했겠지.

 

간식도 먹었고 식사도 마쳤고, 이제 먹는것에 대한 미련은 충분히 해소했으니 조금 전 지나친 개미공방에 구경이나 하러 발걸음을 옮긴다.

 

 

카구라전을 감상후 왔던 길과는 다른 루트로 걸어간다.

이곳 상점가는 이즈모탸이샤를 기점으로 일직선으로 주욱 뻗어있는데

거기서 한 블록만 옆으로 빠져도 상점가하고는 관계없는, 평범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주택가로 가기 전에, 버스 정류장이 앞에 있어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커다란 기념품점 앞에서 음료수 한개 뽑아들고 휴식.

흐리고 비가 올거라는 기상예보와는 달리 32도를 넘나드는 쨍한 날씨라서 생각보다 수분 보충이 필요하다.

카메라 장비때문에 처음부터 물을 많이 가져올 생각이 없긴 했지만. 돈쓸일이 별로 없는 여행이라서 음료수 정도는 뽑아먹어도 지장이 없다.

 

자전거 여행때는 편의점에서 제일 저렴한 64엔짜리 주스만 골라먹곤 했는데, 이제 100엔짜리 탄산음료도 거뜬하다.

이런 행동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부르주아틱.

 

음료수 마시면서 잘 가꿔놓은 꽃도 담아본다.

다 뜯어먹고 뼈다귀만 앙상한 옥수수처럼, 이 녀석 제대로 핀 상태가 아니다. 제대로 핀 녀석은 아마 눈에 익을 듯.

그렇지만 되려 그 불완전함 덕에 아직 여물지 않은, 혹은 다 여물고 저물어가는 꽃이 한없이 투명한 모습이라서 더욱 인상깊다.

사람 역시 꽃다운 시절 지나간다고 장점이 없어지는 것 아니니.

 

 

 

그 옆의 녀석들은 아주 한창이다. 저기 저 빨간 녀석이 위의 녀석과 같거나 비슷한 종인듯 한데

전체적인 실루엣을 빼면 정말 같은 종인가 할 정도로 강렬한 색상을 뿜어내고 있다.

 

찍사의 능력이 떨어져도 언제나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꽃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쉴 때가 대체 몇 번이었을까.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들이 원래 뿌리내리던 곳과 비슷한 환경을 업고 자라나는 녀석들은 확실히 생기가 넘친다.

어쩐지 소심하게 조금조금씩 자라면서, 가끔 힘을 내서 한두 송이 피워주는 본가 아파트 안의 꽃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생기고.

 

 

 

보기좋은 도로, 산책하기 좋은 길이란 어려울 것 같으면서도 사실 단순한 편.

좁은 도로지만 인도와 단절감을 느끼게 하는 높이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점수를 줄 수 있다.

 

높은 턱이 있으면 자동차가 없는 한산한 시기에도 왠지 인도 안에서만 걸어다녀야 한다는 관념에 얽매인다.

실제로 도로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이런 흰 선 하나만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의식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실제로 이런 재질과 구조의 도로는 교통량이 많거나 속도가 높은 곳에서는 문제가 많지만

제한속도 30km 를 지키는 곳이라면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보다 시각적으로 훨씬 훌륭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 외에도 껌딱지같은 보기싫은 주근깨가 없다던가, 여기저기 땜빵해서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도로가 없다는 것도 장점.

익숙해지면 그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되는대로 땜빵해놓은 도로의 모습은 개인적으로 참 흉물스럽다.

자전거로 이동할때는 그 울퉁불퉁함이 실제로 큰 부담이 되기도 하고.

매년 블럭 박살내고 다시 까는 짓은 하면서도, 도로 하나 매끄럽게 유지하지 못하는 건 실소를 자아내게 할 뿐이다.

 

디자인이랍시고 여기저기 괴상한 아이콘으로 치장하며 애써 티내는 것보다

원래 용도에 맞게 제대로 관리만 해도 길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상점가하고 한 블럭 떨어져서 걸어가면, 사람 사는 맛이 나는 주택가로 들어간다.

상점가쪽도 워낙 관리를 잘 해놔서 구경하면서 걷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물건을 팔기 위한 어필이 강한 곳보다는 이런 곳이 혼자 걸어다니며 사진 찍기에 적합하다.

 

그냥 주택가인데도 문 앞에 이런 멋진 녀석들을 장식해놓은 곳도 있고.

아마도 그곳에 사는 주민보다, 이 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름모를 사람들에게 더욱 큰 미소를 선물해 줄 테지.

근본적으로 이런 배려를 느낄 수 없는 아파트라는 거주지에 아무래도 정이 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까.

 

 

 

자전거 여행중 둘러본 많은 시골동네 중에서는

이곳이 체감적으로 꽤나 부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래도 이즈모타이샤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듯.

담 너머에는 생명력 넘치는 정원이 펼쳐져 있을 것 같은 큰 저택은, 이곳 이미지와는 약간 이질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담 바깥에 놓여있는 손바닥만한 화단이, 담 속에 가려진 거대한 조경식물들보다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겠지.

저 정도로 왁자지껄한 정원이라면, 손질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부분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정성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윗 사진의 저택이 훨씬 잘 사는 곳이겠지만

이곳처럼 담 없이 조그만 자투리 공간에서 시원하게 자라주는 나무가 역시 푸근하다.

담으로 둘러친다는 행위는, 그 안의 것이 완벽하게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

 

아무래도 땅의 기운과 태양의 기운을 받고 자라는 푸른색 생명체들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게 제일 보기 편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일본에서는 별로 드물것도 없는 평범한 주택의 모습이지만, 어쩐지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셔터를 눌러본다.

 

 

 

지금은 점점 헐리고 무너져가는 한국의 예전 주택들을 둘러싼 담벼락은

잘못 스치면 피부가 벗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정도로 까칠까칠한 시멘트 덩어리가 대부분.

 

다들 먹고살기 힘들어서 건물 외관에까지 신경쓰기에는 어려웠을거라 이해해 보지만

사소한 디자인이라도, 오랫동안 혹은 평생을 지켜보며 살아갈 경우엔 사람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고 생각한다.

중세시대 요새마저 방불캐하는 공격적인 담벼락이 주택가를 애워싼지 수십 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부유층을 중심으로 조금씩 미적 감각이라는 걸 살려가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여기 시골 사람들이 한국의 그 부유층보다 더 널널해서 이렇게 디자인을 해 놓은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아무리 먹고살만해진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은 자동적으로 풍족해지지 않는다.

외상을 가만 놔두면 자칫 파상풍으로 번지고,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듯이

사람 마음의 여유로움이라는 것도, 잘 치료하고 관리해주지 않으면 쉽게 아물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근대 들어서면서부터 결코 자생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마음의 상처를 안고 태어난 사람이나 마찬가지.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으로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텐데.

 

 

여기서 담아온 사진은 전부 허락받고 촬영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충분한 녀석들.

분명 개인의 주택부지에 포함된 사유재산임에도, 지나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쉽게 보일 수 있는 곳의 모습이다.

 

인구 50명도 되지 않는 경남 언저리의 시골집 역시 이곳 못지않은 한적한 곳이지만

담도 없는 그곳의 마당 깊숙히 박힌 디딤돌마저 억지로 뽑아내서 가져가버리는 한국에서

이런 꾸밈이 가능할까 싶은 생각에 괜히 우울해지기도 한다.

 

사람이 살지않는 집은 죽은 집이라는 말처럼, 집의 모습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 이즈모의 시골 주택가 풍경이 부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집이라는 장소는 어디까지나 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움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지론.

쉽게 말하면, 집 안에서야 홀딱벗고 돌아다녀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이 단지 수십 센티미터의 콘크리트 벽 하나로 구분되기엔

사람의 마음이란게 그렇게 수학적이지 못한 것도 사실.

 

주택의 마당이라는 존재가, 그 두 개의 상반된 공간을 보완해주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명백히 사유지의 부분이기도 하면서, 개방된 공간의 특성 역시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공간.

하지만 사람 키보다도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마당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것도 아닌데

이런 아담한 공간 하나가 존재함으로서 마당이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듯 하다.

 

강도에서는 떨어지겠지만, 주변 풍경과 위화감이 없는 대나무로 창살로 가벼움을 주장하는 듯한 모습이 훌륭하다.

이런 공간을 통해 누군가가 마당 안의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떨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건 집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이미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병들어 가고 있다는 셈이겠지.

 

 

 

외국 관광객들이 풍물시장을 찾는 것처럼

그 나라의 모습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대도시의 번쩍번쩍한 네온사인이 아니라 생활상이 묻어나는 시골이라고 생각.

 

도시에서는 이미 여행자의 생활권과는 다른, 타문화의 향기를 느끼는게 불가능에 가깝고

현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비치지만, 여행자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오는 모습을 느끼는 것이 여행의 재미라고 본다.

 

좁은 길, 허름한 주택, 엉성한 전선과 쇠퇴의 부산물로 떠오르는 듯한 적막함 등, 한국의 시골과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터인 이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매력 중 하나인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른' 향기를 끈임없이 풍긴다.

 

경제 발전이 늦었던 한국의 무서운 성장 속도를 체감할 수 있는 곳은 이런 시골이 아니라, 서울과 같은 대도시.

2000년대 초반은, 도쿄에서 10년전 유행하던 것이 서울로 건너온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던 시기였다.

지금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사람들의 옷, 식습관, 유행어 등이 쌍동이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이런 시골의 모습만큼은 수십 년이 지나도 결코 동기화될수 없을 듯 하다.

한국의 시골은 여러가지 이유로, 예전의 정체성 자체가 뿌리째 사라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한국의 시골이 향하는 곳은 궁극적으로 대도시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예상해 본다.

 

이제 도쿄 놀러가서는 뭐가 한국과 다른지 헷갈릴 정도의 시대가 되었지만

그럴수록 이런 곳의 풍경은 점차 한국의 그것과 다른 향기를 풍기게 될 듯.

 

 

 

느긋하게 동네를 한바퀴 도는데, 미니 신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관광지로 유명한 신사보다는 사실 이쪽이 실제 생활과 더 밀접한 모습.

그리고 자전거 여행당시의 나한테는 절호의 야영지이기도 하다.

 

대도시에서는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공원이나 공터에서 텐트 치는 수 밖에 없는데

시골 마을에서는 이런 신사 구석이 의외로 훌륭한 야영지가 된다.

시골이라고 해도 어디나 마음껏 텐트 칠만한 장소가 별로 없다는 것에 놀라곤 했는데

수도나 화장실 등이 비치된 곳이 제일 좋긴 하지만, 이 정도 독립적인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취사까지 해결하기에는 좀 미안한 느낌이 들긴 해도, 마을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잠만 자고 일어나서 출발하면

근처에 식사 해결할 만한 곳은 충분하니까.

 

아마 자전거로 이곳을 통과하는 도중이었다면 오늘 밤은 여기서 해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일본은 시골사람들 인심이 한국에 비해서 눈에 띄게 후한 곳이라

자전거 여행 도중엔 염치불구하고 잘 들이대기만 하면, 마당이나 화장실, 가끔은 식사도 제공받을 수 있는데

1년여간 돌아다녀도 이 소심한 성격은 쉽게 고쳐지질 않았다. 적극적이었다면 훨씬 많은 인연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뭐, 그건 본인의 아이덴티티에 관련된 문제니, 거기에 따른 불이익은 기꺼이 감수할수 있고.

 

시골이라서 비슷하겠지 싶었던, 주민들의 인심에 대한 시각은 본인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한국쪽이 훨씬 정이 많이 않을까 하는게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은게 신기했다.

 

똑같은 자전거여행을 해 본 결과, 한국의 시골마을에서는 이유가 어찌됐든 기본적으로 강한 경계를 느낀적이 많다.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경우는 대부분이 자전거나 여행에 관심이 있는 도시인, 즉 타지에서 놀러온 사람들이었고

나이 지긋한 지역 주민들은 묘한 눈으로 쳐다보기는 해도 이쪽으로 접근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슈퍼에서 물건 살때조차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몇분이고 늘어놓던 일본쪽 시골에서의 경험은, 한국에서는 전무하다.

 

반대로 일본은, 대도시에서는 거의 타인에게 무관심한데 비해 시골사람들은 꽤나 시원시원하게 접근해 온다.

어찌됐든 인사하는데는 도가 튼 특징이 영향을 미쳤다고 예상해 보는데, 대도시에서는 그게 단순한 인사치례일 뿐이지만

시골에서는 꽤나 진지하게 상대방을 대해주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것이 아닌가 싶다.

초코파이때문에 무의식에 각인된 한국인의 정이라는 단어는, 이제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

 

 

신사 정문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카구라전(神楽殿)이 나오는데, 그 전에 보이는 이 장소는

문득 머리에 드는 '해우소'라는 제목이 딱 들어맞는 듯한 느낌이다.

공간이 부족하니 여기서 마음껏 근심 날려보세요 라고 선전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소원이 빼곡하게 걸려있는 소원서버.

 

인연맺기라는 단어, 그냥 보면 단순히 젊은 남녀의 달달한 이벤트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종족 번식을 위한 암수의 교미는 우주만물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이자 중요한 근본 욕구임에 틀림없으니

없다는거 다 알면서도, 신이라는 초월체에게 콩고물 좀 얻어보려는 이들의 헌신적인 행동은

충분히 납득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납득을 시켜야 이곳의 광경에 합리성이 부여될 것 같으니.

 

 

 

나무의 생장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붙어있는 소원 종이들.

저게 만약 매미같은 녀석들이었다면 굉장히 혐오스러운 광경이 연출될 듯 하다.

 

남에게 뭘 빈다는 행동에 대해서 그닥 이해심을 발휘하지 않는 본인으로서는

매번 볼때마다 이 무의미한 행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할까 곰곰히 생각해 보지만

쉽게 생각하면, 동물이 영역 마킹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뭔가 흔적은 남기고 싶은데, 낙서같은 욕 먹을 짓보다는 공인된 방법이 누이좋고 매부좋을테니까.

 

 

 

아무리 깨끗하고 신성한 흰 종이라도 이렇게 붙어있으니 좀 무섭다.

저게 겨울무렵까지 그대로 붙어있으면, 해충 박멸하는데는 좋은 방법이 될것 같긴 한데.

 

실로 셀 수 없는 소원 종이와 에마들이 가득가득 걸려있는 모습은

코뿔소의 뿔이나, 하마의 입 크기처럼 '이 신사 이렇게 대단한 곳입니다'라고 선전하기에 좋은 잣대가 될것 같다.

한국인으로서는 꽤나 여러군데 신사를 둘러봤다고 자부할만 한 본인도, 이만큼 많이 붙어있는 곳은 처음.

 

 

 

여기도 뭔가 재미있는 소원이 적혀있을까 싶어서 슬쩍 살펴봤는데

몇 살 되지 않아 보이는 꼬마가 쓴 듯한 소원이 나름 눈길을 잡는다.

얼마나 친절한지, 오른쪽에 글로 소원 적어놓고 왼쪽에는 그걸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오오쿠니누시님께서 글자를 못 읽을 가능성도 있으니 이렇게 철저하게 소원을 설명해 주려는 것일까.

대충 '산수 잘하게 해 주고, 부자되고싶고, 게임 갖고싶다'는 정도의 소원이다.

그 중에서 '부자되고싶다'는 두 번씩이나 강조해서 적어놓는걸 보니, 이 꼬마녀석 앞으로 크게 될지도.

게임 관련 그림에 닌텐도 3DS 게임이라는 표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도 범상치 않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하지 않고 왼쪽 최상단에 '엄마 살빼' 라고 적어놓는 지극한 효심까지.

 

 

 

시마네현에서 가장 큰 마츠에나, 이곳 이즈모 지역 통들어서 이렇게 사람흔적이 뚜렷한 곳도 없을 듯.

티끌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경건한 이즈모 타이샤에도, 만약 영적인 뭔가를 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소원이 산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혼돈의 카오스를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곳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까지 조금의 아쉬움을 남긴, 공사중인 본전의 모습을 한번 더 담아본다.

멀리 본전 지붕에 보이는 X 자 모양의 표식은, 이곳 시마네 현의 마스코트 시마네코가 머리에 쓰고 있다.

그런데 여행 선물로는 너무 일색이 짙고, 그 고양이가 그리 귀여운 타입도 아니라서 구입은 포기.

 

 

 

본전에서 왼쪽으로 걸어나오면, 사실 본전보다도 더 커보이는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들에게 음악과 춤을 바치는 카구라전인데, 인연 맺기의 신사인 이곳 이즈모타이샤에서는 결혼식장으로도 쓰인다.

신사의 결혼식은 굉장히 격식있고, 신들의 가호를 받는다는 느낌도 들고, 가격도 상당히 비싸기 때문에

나름 수요층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특히 이즈모타이샤 정도의 신사에서 결혼식 하려면 몇억정도는 우습다.

 

빨리빨리 다음 손님 위해 치워내는 듯한 느낌의 한국 결혼식과는 달리

일본 결혼식은 최소 4~6시간은 걸리는 장거리 마라톤. 초대받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으며 오만가지 이벤트가 난무하는 곳이다.

이 정도 되는 신사에서 결혼식이라면 그야말로 결혼 파티가 아니라 뭔 신내림 받는 듯한 엄숙함까지 추가되니

이런 것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에 다시 겪을 수 없는 멋진 추억이 될 듯 하다.

 

 

 

물론 결혼식이 아니라도 이곳에서 행해지는 가악 등의 공연은 유명한 볼거리.

특히 일본 각지의 신이 모인다는 10월에는, 사람들도 덩달아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데...

9월 초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아무리 볼거리가 많아도 인파에 치여 쓸려다니는건 사양이다.

 

 

 

카구라전에 걸려있는 시메나와는 일본에서 가장 큰 녀석으로, 무게만 4.5톤 가까이 된다고 한다. 저거 떨어지는 날에는 대참사.

본전에 들어갈 수 없는 이즈모 타이샤에서 단연 유명세를 타는 녀석.

 

신기한 풍경이라서 보기엔 좋은데, 대체 이렇게 큰 시메나와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은 의구심은 든다.

단순히 커서 좋은거라면, 집 앞에 소박하게 걸린 시메나와들은 효능이 없는 것일까. 그것도 아닐테고.

 

이곳 이즈모탸이샤는 매우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주요도시들과 많이 떨어져 있어서, 다른 유명 신사에 비해 찾는 발길이 적은 편이긴 한데

그 반작용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일본에서 가장 큰 XX' 타이틀을 갖고 있는게 많다.

이 시메나와도 일본에서 가장 큰 녀석.

 

 

 

원래는 저 밑둥에 동전을 던져 박아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다들 동전들고 던지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박히고 떨어지는 문제도 있고, 사람 다칠수도 잇어서 이제는 그냥 철망으로 감싸버렸다.

짚단으로 만든 녀석이라 수명도 있어서, 이거 새걸로 교체하는 것도 큰 이벤트중에 하나인데

동전 소문때문에 아무래도 골치가 좀 아팠던 듯. 근데 자기 동전을 그렇게까지 소모할 필요가 있나?

 

 

 

워낙 거대한 녀석이라 제작방식이 궁금해진다.

아무래도 사람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크기가 아닌 듯 한데, 그렇다고 신사에서 기계식으로 만들리도 없을 것 같고.

 

여행 당시에는 날씨도 덥고 해서 그냥 지나쳤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이 시메나와 제작 방법에 대해서 조사해 보고 싶다.

프라모델도 완성품보다는 만들 때의 즐거움이 진짜라고 하듯, 이 거대한 녀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워낙 크다보니 비교대상이 있어야 실감이 갈 듯 하다.

다행히도 비교할만한 소재인 사람들은 여기저기 널려있으니 마음껏 사용한다.

 

결혼식장으로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다른 신사에 비해서 이곳의 카구라전 역시 크기가 매우 큰 편이다.

아무래도 신사 이름이 타이샤(大社)이다 보니 뭐든 크고 아름답게 짓는게 특징인가 보다.

나는 '대'자 들어가는 것들이 너무 가식적으로 보여서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아무튼 본전은 못봤지만 유명한 시메나와 마음껏 감상한 것만으로도 목표는 달성했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밖으로 나서면 또 보이는게 이 게양대.

이 역시 높이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큰 녀석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가야 하는게 관광지의 숙명이겠지.

어지간한 삼나무보다 더 높아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 방금 전 시메나와 때보다 더욱 더 '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일본에서 제일 높은 게양대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이렇게까지 '제일 큰 XX'의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녀석은 처음이라고 생각.

이곳에는 일본에서 가장 큰 토리이(鳥居)도 있지만, 그건 훗날 포스팅에 아마 등장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아니하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그 녀석도 나한테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는 뜻도 되고.

 

시간을 쌓아서 흔적을 남겨놓은 녀석들은 뭔가 느껴지는게 있지만

돈 많이 들여서 이렇게 제일 큰 타이틀을 거머쥐는 녀석들은 굉장히 덧없게 느껴진다.

그나마 시메나와야 일본 전통이 녹아있는 녀석이기도 하니 관광객들에겐 좋은 구경거리지만

내가 일본에서 제일 높은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보고 놀라거나 신기해 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난 우리집 아파트 앞의 국기 게양대에도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