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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山陰'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09.26  산인 여행 - 이즈모 타이샤의 처절한 소원들 18
  2. 2012.09.25  산인 여행 - 이즈모 타이샤 10
  3. 2012.09.24  산인 여행 - 혼자 가는 인연맺기 신사 10
  4. 2012.09.19  산인 여행 - 소바의 추억 20
  5. 2012.09.18  산인 여행 - 무사 저택 14
  6. 2012.09.17  산인 여행 - 이방인 20

 

 

주변 풍경이 훌륭하긴 하지만, 본전을 볼 수 없는 이즈모 타이샤는 이미 절반 이상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요 근래 후쿠오카의 다자이후 텐만구나 킨키지방의 코야산 등을 다녀온 터라

반쪽짜리 이즈모 타이샤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애초에 인연을 맺어주는 신사라는, 나를 제외한 다른 커플들에게는 심히 중요한 소재가 주를 이루는 곳이라서

정겹게 두 손 잡고 참배를 하거나, '둘이 오래오래 러브러브~' 따위의 문구를 에마에 적어넣을 필요가 없는 사람은

그냥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감상하면서 잘 정돈된 산책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정도외에는 할 일이 없다.

 

본인은 일단 카메라를 들고 왔으니, 이제 에마에 적혀있는 염장질의 흔적이나 기념으로 담아와야지.

그 염장질을 찾아보기 전에 일단 꽤나 정성들여 제작한 이곳의 에마를 한장 담아본다.

저 정도로 색을 많이 넣고 디자인이 깔끔한 에마는, 외국 관광객들의 입장에서는 걸어놓기가 아까운 느낌도 든다.

실제로 외국 관광객들 중에는 그냥 기념으로 에마를 사들고 오는 경우도 많다.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는 신사에 걸린 에마는 좀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유명해도 일단 인연 맺기 신사이다 보니 조금은 어깨 힘이 빠진 느낌이 든다.

 

수학여행 코스로 많이 선택되는 신사가 사실 제일 재미있고, 유명 애니메이션에 나온 신사에 가면 다들 그림그리느라 정신이 없기도 한데

과연 이곳은 어떤 문구가 나를 즐겁게 해 줄것인가 살짝 기대된다.

 

중앙의 저 에마는, 다른 문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녀석인데, 좌측 상단의 'とりあえず彼氏がほしい' 라는 문구가 인상적.

뜻은 '일단은 남자친구가 필요해' 이다. 아무래도 여성 관광객인 두 명이 여행온 듯 한데...

세상에 솔로는 나만 있는게 아니구나 싶어서 왠지 응원을 보내주고 싶어지게 만든다. 니시카와 와카코씨한테 얼른 남친한마리 떨어지길.

 

 

 

이 녀석은 또 넘기기 힘든 문구를 적어놓았다.

자전거 여행 온 사람인듯 한데, '무사히 야마가타에 자전거로 돌아갈 수 있기를' 이라고 적혀 있다.

야마가타현은 토호쿠지방 후쿠시마현과 인접한 곳으로, 여기서의 거리는 서울서 부산의 2.5배가 넘는다.

올 때도 자전거로 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혹여 예전의 나처럼 자전거로 일본 전국을 일주하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왠지 동지애를 느끼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물론 돈내고 에마를 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러고보니 내가 일본 자전거 일주할 때, 신에게 기도를 올린 적은 딱 두번.

출발 전 도쿄 아사쿠사에서 5엔짜리 (한국돈 70원)동전 하나 던지고, 무사히 여행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 첫 번째.

일본서 가장 신성한 곳인 이세 신궁에서 50엔짜리 (한국돈 700원) 동전 하나 던지고, 로또 당첨될 수 있기를 바란 것이 두 번째.

 

로또가 많이 고팠는데, 50엔 정도의 뇌물로는 어림없었던 것 같다. 500엔짜리 로또에 당첨이 되어서 한장 더 사본 경험은 있지만.

 

 

 

장사가 잘 안되는 신사는 좀 황량한 느낌도 드는데

이즈모타이샤는 그럴 걱정이 없는 곳이니, 아주 빡빡하게 에마가 걸려있다.

거는 곳이 이곳뿐만이 아니라서, 걸려있는 에마들의 단순 구입가격은 약 10만엔쯤 할 듯.

이런 곳이 서너 군데는 있었으니, 회전율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6백만원 정도의 이익은 있을 듯 하다.

 

신사에는 에마 말고도 여러가지 부적, 기념품을 팔고, 본전에 참배할때도 돈을 던져넣기 때문에 꽤나 짭짤하다.

지정문화재로 등록된 신사는 정부로부터 보조금도 받고, 결혼식장으로 사용되기도 하니까 나름 괜찮은 편.

의외로 개인 소유의 신사가 꽤 많은 편이라서, 큰 부자는 못되도 대를 이어 먹고사는데는 문제없는 가게라고 생각하면 될 듯.

 

연말연시에는 작은 신사라도 불티나게 바빠질 정도로 참배객들이 몰려들고, 신사의 지주는 대부분 지역 토박이인 탓에

한국에서 거의 전멸중인 지역경제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는 톡톡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는 곳.

종교적인 시설인 만큼 지주의 사생활도 꽤나 조심스러운 편이라, 그 엄격함에 후계자 위치를 관두고 나와버리는 자식들도 있다.

한국의 종교야 뭐... '토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것은 주식회사 예수를 믿지 않아서'라는 똥을 입에 물어도 믿습니다! 를 외치는 곳이니까.

 

 

 

잠깐 안구에 습기 좀 닦고...

차마 상세하게 번역할 수는 없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처절한 에마가 떡하니 걸려있다.

'O형에 귀여운 독신여성과 결혼전제로 사귈 수 있기를, 부디 부탁드립니다' 라는 뜻으로... 크흑.

 

거기다 얼마나 현실적인지, 아니면 절박한건지 자기 주소까지 꼼꼼하게 적어놨다.

류타라는 이름의 남성이여. 여기서 이럴 시간 있으면 그냥 오사카 시내에 놀러나가는게 더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리고 혈액형이 대체 뭔 관계람. 독신여성이란 단어 안 적어놓으면 불륜이라도 할 생각인가?

결혼전제라는 말을 붙일 때부터 여성에게는 부담이 클 것 같은데... 눈이 높은건지 그냥 생각이 없는건지 스스로 벽을 쌓는 느낌이다.

100엔짜리 공물 하나 받아먹고 들어주기에는 오오쿠니누시에게도 좀 리스크가 큰 소원인 것 같은데.

 

 

에마만으로 부족한지 이곳 나무 곳곳에는 소원을 비는 종이가 가득 매여있다.

 

이거 나무한테 부담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손이 닿는 곳에는 전부 매여있어서

이곳 관리하는 사람들도 할 일이 없는건 아니구나 싶다. 저걸 전부 일일히 손으로 풀어서 모아놨다가 날 잡아서 태워야 하니까.

보지 않는 곳에서 마구잡이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저런 것 정중히 처분하는것도 신사의 일이라서, 만약 잘못하면 뉴스에 실릴 정도의 사건이니까 그런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듯.

 

 

 

이름난 신사이다 보니 찾아온 관광객들을 위한 서비스정신도 훌륭하다.

날씨가 더운 탓에, 휴게소 곳곳에 얼음을 넣은 선풍기를 작동시키고 있다.

 

시각적으로는 햐안 김이 바람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게 엄청 시원해 보이지만

아주 가까이 가지 않으면 그닥 효과는 없는 편. 그래도 저런 걸 설치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이런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가 쌓여서 관광온 사람들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결코 쉽게 생각할 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조금 기분좋아진 채로 목 끝까지 짜릿하게 시원한 음료수 하나 뽑아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가면 라이더 그림을 박아넣은 센스작품 '가면 사이다'도 오랜만에 보지만, 그건 자전거 여행때 뽑아먹었으니 패스.

 

일본은 음료 자판기 옆에는 반드시 쓰레기통을 비치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 뽑아먹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게 별것 아닌 듯 해도 사실 굉장히 유용하고 편리한데,

일본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말 이래도 장사가 되는가 싶을 정도로 자판기 숫자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길다가 생각나서 목을 축이고, 걱정없이 쓰레기를 금새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마음 든든한 일이다.

 

 

 

목도 축이고 휴식도 취하고 난 뒤, 마지막으로 좀 전의 배전을 한바퀴 더 돈다.

처음부터 한바퀴 더 돌아보기 위해서 사진도 찍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관광객이 줄어든 틈을 타서 한 장 남긴다.

여행 사진에 어지간하면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냥 사진만 봐서는 황량한 곳을 혼자 돌아다닌듯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가능한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타이밍을 노려서 찍고 있으니 오해가 없었으면.

 

저작권(?)이니 초상권이니 하는거 신경쓰기도 귀찮고, 실제 여행중에서도 관광객은 내 시선에서 한참 떨어져 있기 때문에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의 물리적인 숫자와는 별개로, 여행 때 보고 느낀 나의 시선은 대충 이런 사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는 더더욱 그렇기도 한데, 목조건축물이 많은 일본의 문화재는

보존하는게 보통 힘든일이 아니기 때문에, 관광객 감소를 감수하고서라도 주기적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이게 되어 있다.

그것도 빨리빨리가 아니라 약 5년 정도의 기간을 들여 꼼꼼하게 복원하니, 성질 급한 한국사람들에게는 여간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을 듯.

 

이즈모타이샤의 본전이 거대한 편이긴 하지만, 저 정도 크기의 건물을 5년동안 보수한다는 건 진짜 그동안 뭐하나 싶을 정도.

 

 

 

이즈모타이샤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라면 단연 이 녀석이다.

이건 시메나와(注連縄)라고 부르며, 한국 토속신앙의 금줄과 같은 의미를 가진 녀석.

단지, 이곳 이즈모타이샤의 시메나와가 다른 곳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다보니 명물로 유명해졌다.

 

사실 일본여행가서 조금만 눈여겨보면 조그마한 시메나와는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동네 조그만 신사나, 음식점 입구 위, 혹은 그냥 일반 가정집 문앞에서도.

보통은 새해 첫날 악귀는 물러가고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며 걸어두는 경우가 많다.

 

이곳 배전의 시메나와는, 다른 곳과 비교하면 크긴 하지만 이게 이즈모에서 가장 큰 녀석은 아니다.

인연맺기의 소중함이라고 할까, 유독 이곳 이즈모탸이샤에는 일본에서 가장 큰 XX 라는 타이틀을 가진 것이 많다.

본전 구경은 할 수 없지만, 이 거대한 시메나와 역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명물이니 실컷 감상한다.

 

 

 

일단 배전의 시메나와도 보통 큰 녀석은 아니지만, 이즈모타이샤 하면 생각나는 그 시메나와에 비해서는 작은 편.

원래는 여기서 배전 구경 한번 하고, 본전으로 들어가서 국보급 건축물의 위용을 감상한 후

돌아오는 길에 카구라덴(神楽殿)을 보는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본전 구경이 불가능하니...

그래서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참배를 하는데, 일반적으로 손뼉을 두 번 치는 신사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자신과, 미래의 인연을 위해서 네 번을 친다고 한다. 역시 인연맺기의 신사.

 

이곳은 제국주의의 잔재가 묻어나는 신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고

애초에 오오쿠니누시라는 신이 진한과 신라 이주민들과 관계된 녀석이라, 인연 맺어지기를 기원해도 별 문제는 없을 듯.

하지만 그것도 저것도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실들...

 

이곳 본전은 한때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가 1744년 재건된 녀석인데

재건당시 크기가 24m로 꽤 큰편인데도 불구하고, 기록상 전해지는 본전은 48m나 되는 거대한 녀석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축물.

덕분에 본전 자체에 들어가는 것은, 공사기간이 아니더라도 불가능하다. 그냥 옆에서 살짝 구경만 할 수 있는데

지금 공사 덕분에 그 살짝 구경조차도 못하는 실정이 되어버린 것. 관광객으로서는 아쉽기 그지없지만

지은지 300년된 국보 목조건축물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긴 하다. 허무하게 사라진 숭례문의 케이스만 봐도.

 

내년 5월인가부터 다시 일반인에게 공개된다고 하는데, 사실 흥미깊은 건축물이긴 하지만

이것때문에 다시 시마네현을 찾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훗날 포스팅에 설명하겠지만 다시 갈만한 일이 좀 생겨서.

 

 

 

이 배전 앞이 조금 전 비둘기를 바라보며 휴식하던 곳인데

그 쪽으로 가보니 왜 비둘기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먹이주는 상자가 놓여있었기 때문.

내가 휴식을 취하던 곳은 뒤쪽 벤치라서 여기에 먹이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한 봉지 20엔짜리 먹이는, 20년전 일본을 찾았을 때 본 후로 정말 오랜만이다.

20년 전에는 도쿄의 신사에도 이런 먹이상자가 설치되어 있어서, 흰 비둘기들이 사람에게 막 덤벼들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둘기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후 그런 먹이상자는 대부분 철거되어 버렸다.

이곳은 워낙 외진 산골짜기라서 먹이를 줘도 큰 문제가 없는 듯 하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절대로 도망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녀석들.

 

 

 

저 녀석들이 덤벼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경험해 본 나로서는

단벌 옷에 카메라까지 들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먹이를 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가만 기다려 보니 젊은 커플이나 나이 지긋한 단체 관광객이 가끔 먹이를 꺼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엇는데

일단 저 상자에 손이 다가가는 순간 털 고르고, 암컷 쫓아다니던 녀석들의 시선이 일순 집중되는 묘한 풍경이 연출된다.

먹이봉투를 손에 들면 그야말로 미친듯이 달려들며 한껏 소리높여 애교를 떠는데, 비둘기라는 녀석 참 적응력도 좋다.

 

마구 쓰다듬어도 먹이가 손에 들려있는 한 도망가지 않기 때문에 녀석들의 귀여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이곳에서 사는 비둘기야 도시 녀석들처럼 더러운 편도 아니라서, 열심히 놀아주고 손 한번 씻으면 그만일 터.

물론 옷에 알록달록한 액체 X가 달라붙을 수 있으니 그점은 항상 조심해야 하겠지만.

 

머리도 좋아서, 먹이를 손에 든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다가오지 않는 영악한 녀석들.

 

 

 

이 비둘기 아지트 오른편에는 보물전이 있어서 이곳의 중요 문화재들을 감상할 수 있지만

몇 번이고 들어가본 보물전이란 곳은, 의외로 입장료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패스.

 

사진도 당연히 찍을 수 없고 한국어 설명은 조잡하고, 일본어 설명은 어려운 한자가 꽤 많이 들어가 있는데다가

어지간히 지역 역사와 문화를 알고 있지 않으면 그 문화재에서 느낌을 받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한가로운 비둘기들의 모습을 빼면, 조금 소름끼칠정도로 깔끔하게 정비된 신사 내부를 한번 더 둘러보고

슬슬 돌아보지 못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신사 하나만 볼거리가 아니라 마을 전체가 산책로나 마찬가지니까.

 

 

일단 본전이 공사중이라 의지가 한풀 꺾인 이즈모타이샤보다는

주변 풍경이나 느긋하게 감상하면서 천천히 산책해 보기로 한다.

입구에서 본전까지는 꽤나 먼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이 정자같은 휴게소는 입구 바로 옆에 위치.

 

휴게소 앞에 묘하게 넓은 공터가 있는데, 주차장은 아니다. 아마도 간단한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 아닐까 싶다.

날씨도 무지 덥고 해서 쉬어가는것도 나쁘진 않은데, 이미 1시간 넘게 기차타고 왔으니 휴식은 충분히 취한 것 같다.

어제 하루종일 머리를 괴롭히던 멀미도 싹 사라져서 기분도 괜찮고.

 

 

 

일본엔 신사가 워낙 많이 세워져 있어서 뭐라 비교하기는 힘든데

이곳 이즈모타이샤는, 이름 알려진 유명 신사 중에서는 그렇게 큰 규모가 아닌듯 하다.

 

신사 바깥 상점가 -> 신사 정문 -> 본전 앞까지 완전히 일직선으로 쫘악 이어져 있는 모습은 굉장히 독특한 경우.

규모가 큰 신사는 보통 본전으로 향하는 통로가 나무와 이끼에 둘러쌓여 좀 어둡고 습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여기는 환경이 그런건지 일부러 그렇게 만든건지 길도 넓고 시원시원하다.

 

유명 관광지 치고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데, 9월에 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곳이 가장 붐비는 시기가 바로 옆 10월이기 때문에.

 

일본의 신토는 어떤 것에든 신이 깃들어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데, 그 수많은 신들을 '八百万'이라 쓰고 야오요로즈(やおよろず)라고 부른다.

실제 신의 숫자가 8백만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냥 무수히 많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는 매년 10월에 한번씩 일본 전국의 모든 신들이 이곳에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10월을 '신이 없는 달'이라고 하는 '칸나즈키'(神無月)라 하는데

이곳 이즈모 지역만은 10월을 '신이 있는 달'이라는 뜻의 '카미아리즈키'(神在月)라고 부른다.

 

그 신들이 모이는 이유가 남녀간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한 서류작업(?)이기 때문에 이곳은 인연맺기 신사로서 유명한 것.

 

 

 

물론 그리스신화가 알아서들 사랑과 전쟁을 연출해주듯이

이곳 신화 이야기도 사람들이 여기저기 만들어내고 살을 붙여서 풍성해진 것.

 

실제로 칸나즈키(神無月) 라는 단어 중간의 '無' 라는 단어는, 고어에서 'の'를 대체해서 쓰는 한자어였고

'の"라는 단어는 '~의'라는 뜻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이 없는 달이 아니고 '신의 달'이라는 해석이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이즈모 신사의 비상한 머리를 가진 누군가가 후대에까지 내려오는 멋진 마케팅 포인트를 만들었다는게 현실적인 해석일까.

 

덤으로, 10월에 모든 신이 이즈모에 모이는 것도 아니고, 집지키는 신이 가끔 남아있기도 한단다.

대체로 칠복신중 어부와 상인의 신인 에비스(恵比寿)가 집지키는 신으로 일컬어지는데,

어업과 상업의 중요성과 결부시켜보면 은근 현실적인 설정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어업이란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위험한 직종 중 하나이고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현대에서도 진수식에 와인을 깨트리는 등, 여전히 미신에 의존하고 싶을 만큼 운이 따라야 하는 편이니까.

 

 

 

세력이 큰 신사는 원래 마케팅을 위해서 자신만의 특징을 잘 부각시키는데

의외로 손발이 잘 맞아서, 지주격의 신사들이 각자 그 설화 혹은 신화들을 잘 조합시켜준 결과

일본인이라면 계절별로 각 지방의 신사를 여기저기 찾아가는 식의 여행도 즐길 수 있다.

 

새해 첫날에는 이세신궁에서 일출 보기, 5월에는 아사쿠사신사에서 축제, 10월엔 이즈모타이샤에서 인연맺기 참배 등등.

상업적인 아이디어가 먼저인지, 그냥 그렇고 그런 이야기에 상업적인 향기를 덧입힌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에 동조해주고 자동차로 5~6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서까지 타 지방으로 여행가고, 숙식비와 선물비를 뿌리고 돌아오는,

사람으로 치자면 혈액순환이 골고루 잘 돌아가도록 움직여주는 시민들의 행동 덕에 지방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은 참 부럽다.

 

사실 중국과 한국등의 동양인들에게 신사라는 개념은 그리 신기한 관광지가 아니라서,

그냥 주변 풍경과 신사 모습만 슬쩍 보고 사진찍고 돌아오면 이게 외국까지 가서 돌아볼 곳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이런 곳을 재미있게 보려면, 자국인들이 이렇게 찾아오는 이유와, 거기 얽혀있는 소소한 이야기와 지방 특색을 알아보는게 좋은 방법인 듯.

 

알면 알수록 여행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말에는 사실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냥 가서는 별 재미가 없는 곳에 한해서, 즐길만한 요소를 따로 생각해 보는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신사 쪽으로는 별로 진행하지도 않았는데, 주변 풍경이 계속 눈길을 끌어서 걸음이 더뎌진다.

돗자리와 도시락 잔뜩 싸들고 그늘밑에 누워서 책읽으면 천국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 많다.

 

도쿄 내부 신사는 그런 곳이 많아서, 휴일날이면 이런 곳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천혜의 풍경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람은 왠만해서 찾아보기 힘들다.

 

애초에 타지에서 이곳까지 오는 관광객은, 저기 누워서 시간 보낼 여유라는게 별로 없기도 하겠지.

시간과 돈을 들여 관광지에 왔으니 열심히 못보던 것들 구경해야 하는데 저곳에서 한나절을 보내기엔 좀 아까울 듯.

그리고 이곳 지역민들은, 학교 소풍때야 오겠지만 굳이 이곳에서 누워있을 필요도 없다. 원래가 시골마을이라서.

 

 

 

그래도 한동안 살짝 고민하게 만드는 그늘 밑 벤치.

카메라 가방 내려놓고 전자책좀 읽으며 바람에 땀을 식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1시간 넘게 기차타고 와서 걸어다닌지 15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퍼질러진다는 건 좀.

자전거 여행중 방문했다면 아마 신사 구경은 저리 넘기고 저런 곳에서 3시간쯤 휴식을 취했을 듯 하다.

 

사실 크게 볼거리가 없는 이곳을 굳이 방문한 이유는, 지난 번 자전거 여행때 불의의 사건으로 가 보지 못한 곳이기 때문.

겨울을 오키나와에서 보내고 3월에 다시 큐슈로 돌아와, 시모노세키 해협을 건너고 야마구치현으로 들어온 것이 3월 초순.

3월이라고 해도 여전히 초겨울 날씨라서, 야마구치현의 토요코인에 들어와 무료 카레를 먹으며 체력을 보충하고

이제 슬슬 달려볼까 싶어서 준비하던 3월 11일의 화창한 오후.

 

호텔 로비 TV에서 긴급 방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뭔가 좀 크게 났구나 싶은 정도였지만

15분 후 생중계되는 지옥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일본의 지인들과 한국의 가족들에게 급히 전화를 돌렸다.

너무 빨리 전화를 하는 바람에 엄니께서는 뭔 일인지 전혀 모르고 '그려 알았다'라고만 대답하셨는데

막상 그 후에 TV 중계를 보고 나서는 사색이 되어 나한테 전화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국제회선이 마비된 후.

 

급히 로비에서 숙박을 연장하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에서야 지나간 일이지만, TV에서 흘러나오는 긴급방송 외에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던 답답한 상황이라서

무턱대고 출발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애초에 도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이게 진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싶은 영상이 흐르고, 며칠간 오키나와에서 함께 했던 일본인 라이더들이

마침 후쿠시마 주변을 달릴 시기라서 연락을 해 봐도 닿지 않는다. 그야말로 패닉 상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오직 TV와 인터넷의 불확실한 정보만을 눈이 빠져라 찾아가면서

약 10일이 넘도록 계속 호텔에 처박혀 고민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도쿄까지는 돌아가겠지만 북쪽 루트를 타기는 힘들다는 것.

야마구치현에서 남쪽 해안가 루트를 타면 큰 도시도 많고, 한번 지나와본 길이라 무난히 도쿄까지는 돌아가겠지만

북쪽 해안가 루트는 일본에서도 이름난 시골동네가 대부분인데다, 어차피 쿄토 근방에서 남쪽 루트로 내려가지 않으면

그 이후부터는 어마어마한 산맥을 넘거나, 지진으로 개발살이 난 후쿠시마쪽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었기 때문.

 

지진과 원전 상태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라고 판단된 이상

도쿄에 돌아가는 것조차도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1년간의 자전거 여행을 여기서 끝낼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곳 시마네현과 돗도리현을 포기하고, 원래 왔던 남쪽 해안가 루트를 타고 도쿄로 돌아간 추억이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참동안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깨끗히 잊어버렸지만

역시 한번 기회가 생기니 그때 지진때문에 가지 못했던 이곳에 대한 아쉬움이 점점 커지는 바람에

이렇게 배타고 와서 그때의 심란했던 마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있다.

 

그때 왔었다면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을 저 벤치가, 그렇기 때문에 낯설게만 보이지 않는다.

 

 

 

신사 바로 앞까지 왔는데, 뭔가 힘좀 준듯한 조각상이 서 있다.

주인공은 이곳 이즈모타이샤에서 모시는 신이자, 일본 신화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오쿠니누시노오오카미(大国主大神)이고

파도 위에 보이는 드래곤볼(?)은 말 그대로 신의 힘을 구체화시켜 표현한 것이고

저 구슬을 얻음으로서 오오쿠니누시는 인연을 맺어주는 힘을 가진 신으로 격상되었다고 한다.

 

 

 

왜 인연을 맺어주는 신이 되었는가 하면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아주 귀찮을 정도로 일본 신화에 대해 깊게 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패스.

 

나처럼 일본쪽 전공한 사람도 아닌, 일반 블로거들이 그렇게까지 일본 신화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본의 3대 신에 들어가는 타케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建速須佐之男命)의 딸내미를 갖은 시련끝에 얻어서 결혼한 인물이기 때문.

 

요즘엔 스사노오라고 간단하게 불리는 이 신은 한반도에서 찾아와 정착한 세력을 신격화한 것이고

그의 행적과, 딸이 오오쿠니누시와 결혼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당시 정치상황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나 마찬가지.

따라서 이걸 파고들어간다는 건 상당히 학술적 시점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신화에서의 스사노오는 괴물퇴치도 하고, 일본 신중 대빵인 아마테라스를 이지메해서 쫓아버리기도 하는 등, 폭력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당시 한반도에서 건너온 세력에 대해서 중앙정부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가가 신화의 이름으로 표현되어 있다.

딱 이정도만 알고 있어도 이즈모타이샤 구경에는 지장이 없을 듯.

 

 

 

아무튼 신화의 내용에 맞춰서 이곳은 인연을 맺어주는 신사로 유명해졌으니

이곳 사람들은 저 핸섬남에게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듯 하다.

 

당시 일본에서는 현대와 같은 결혼식보다는, 그냥 마음에 드는 여성을 밤에 보쌈해가는게 결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요즘 세상에 좋게 해석하자면, 이성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정도로 묘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진짜 보쌈해가는 사람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사진을 찍을때 가능하면 사람이 안나오게 찍는 성격이기도 하고

실제로 다른 유명 신사에 비하면 좀 조용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마츠에에 도착한 이후 가장 사람이 많이보이던 곳이다.

약간 우충중한 느낌이 드는 다른 유명 신사보다는 훨씬 화사한 분위기라서

정말로 커플들끼리 오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처럼 그냥 놀러온 사람이야 에마(絵馬)같은데 소원을 적거나 할 필요도 없지만

커플들끼리 오면 뭔가 의무감 떄문에라도 멋진 소원 적어야 하지 않을까. 연애란 것은 적당한 과시와 허세도 필요하니.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이 신사를 지탱하는 귀중한 수입원이 될 것이고.

 

왠지는 모르지만 이곳 나무들이 자꾸 옆으로 누으려는 경향이 있는 듯, 지지대로 받쳐놓은 곳이 꽤 많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인연맺기 신사이다 보니 어쨌든 누워보려는 것일까 하고 낭만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마츠에도 물론 맑은 공기를 자랑하긴 하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청정지역이기 때문에, 쏟아지는 햇살과 시원한 솔내음 풍기는 공기를 열심히 흡입하는 것만으로도 만족도가 상승중.

 

기온은 33도까지 올라가서 꽤나 괴롭긴 하다. 줌렌즈는 망원밖에 없고 나머지는 전부 단렌즈라서

구도에 맞게 렌즈 갈아끼우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막상 이곳까지 오니 공사중이라서 꽉 막혀버린 본전 때문에 약간 의기소침하다.

 

옆쪽으로 돌아가서 살짝 나있는 창문 틈으로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보려는 사람들도 있고.

위에서 밝혔듯이, 이번 여행은 이즈모타이샤 때문이 아니라 자전거 여행의 미련을 풀어버리기 위한 여행이기 때문에

사실 본전이 보이나 안보이나 별 상관 없다. 그거 못봤다고 훗날 다시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늘이 조금 펼쳐진 벤치 앞에 앉아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그 앞에는 왠지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털을 고르는 중이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도 신기한듯 한번씩 비둘기들을 바라보고 가지만, 이 녀석들은 본 척도 하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러는걸까 궁금하지만, 괜히 다가갔다간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고 해서 그냥 사진이나 담아본다.

 

20년전의 일본 신사에는 흰 비둘기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엔 흰 비둘기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게 약간 아쉬울 따름.

 

 

 

잠깐 땀만 식히고 일어날 요량이었는데, 이녀석들이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니 그냥 눌러앉기로 한다.

느긋하게 털고르고 있는 녀석들과는 달리 이 혈기넘치는 수컷은 한창 넘치는 정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

 

목의 화려한 털부분을 힘껏 부풀리면서, 아파트 창문에서 익히 들어온 구애의 노래와 함께 암컷을 따라다닌다.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할 정도로 열심히 구애를 하는데, 암컷은 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자리를 피해버리는 중.

두세 마리의 암컷에게 똑같이 차이고 나서 조금 낙심하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암컷 따라다닐때의 목 주변은 정말 두툼하고, 햇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색을 자랑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인연 맺기가 힘든 듯. 하필이면 인연맺기의 전당 이즈모 타이샤에서 신나게 차이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다.

 

쟤네도 머리는 있는지, 몇번 차이고 나니 그냥 단념한 듯 혼자 서서 털이나 고르고 있다.

우측 상단에 보이는 암컷이 이 녀석을 차버린 녀석.

비둘기한테 발정기라는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암컷 녀석은 그냥 쉬고 싶을 뿐인가 보다.

 

에마에다가 '저 비둘기들이 새끼 쑴풍쑴풍 낳도록 해 주세요'라고 빌고싶은 마음이 조금 드는둥 마는둥 했지만

내가 내돈내면서 저 녀석들 인연을 빌어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앞서는 바람에 그냥 안스러운 눈길 한번 주는걸로 끝낸다.

 

 

 

30분쯤 그늘에 앉아서 비둘기 구경하는 재미로 보냈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차례로 돌아다니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본다.

이곳의 중요한 이벤트는 대체로 10월에 열리기 때문에 지금은 꽤나 조용한 편.

특히 본전이 내년까지 수리중이라 올해는 꽤 차가운 한해가 될 것 같다.

 

신사 내부에서 볼만한 건물은 현재 저 앞의 배전밖에 없고

좌측에는 결혼식장으로 쓰이는 카구라전(神楽殿)이 있어서, 아마 그쪽이 여기보다 더 볼만한게 많을 듯 하다.

본전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신사 치고는 규모가 꽤나 아담한데, 그와 반대로 건물 상태는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다.

규모보다는 질을 우선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풍경이 되려 이질적일 정도로.

 

신화를 간직한 의미있는 곳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느낌이 훌륭하다고 할 수도 있을 듯.

바닥을 보면 알겠지만, 단정한 통로 위에는 그 옆의 자갈조차 올라와있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관광객들도 왠지 큰소리로 떠들지 못하고 조금 조용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림같은 풍경은, 그림으로 볼때는 훌륭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보면 살짝 위화감이 든다고나 할까.

 

 

무료 조식이 아침 7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좀 느긋하게 먹으려고 미리 준비하다가 7시에 내려갔는데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 넓지 않은 로비 식당이 가득가득 차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

 

대체 마츠에라는 한적한 도시에 왜 이리 사람이 많은건지 싶을 정도.

태반이 일본인이고 한국인 몇쌍, 중국인 몇쌍 정도인데, 관광이 아니라 업무차 온 듯한 사람도 많다.

나이 지긋한 팀이나 젊은 팀이나 정장에 어두운 색 넥타이 매고 신문 끼며 아침먹고 있으면 관광객은 아니겠지.

 

관광객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즈모타이샤 덕분인지 붐빌때는 꽤나 붐비는 곳이라서

시내 주변에 숙소가 상당히 많기는 하다. 아주 저렴한 여인숙 레벨에서 괜찮은 관광호텔까지.

한국은 어지간한 대도시라도 관광호텔 or 러브호텔 정도의 선택권밖에 없는데,

그래서 일본서 놀러오는 사람들이 인터넷 호텔 예약대행 사이트를 통해 예약하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설명은 번지르르한 일반 호텔로 해 놨는데, 실상 가족들과 가 보면 러브호텔인 경우가 많아서.

 

비지니스호텔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탓도 있고, 한국사람 기준에서 보면 좁아터져서 장사 되겠나 싶은 토요코 인도

서울에 단 한곳 있는 동대문점은 빈방 한번 잡기도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객실 소화율을 자랑한다.

 

아무튼 줄서서 기다리며 간신히 조식 때우고, 방 안에 들어가서 날씨정보를 다시 찾아본다.

찌부둥하고 비오는 날씨라면 근처 미술관이나 공방 같은 곳을 돌아보려고 생각중이었는데

의외로 하늘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다. 아침부터 에어콘이 필요할 정도로 날씨도 덥고.

일기예보에서는 '맑아도 결코 주의를 늦추지 말지어니'라고 예언해주시는걸 보면, 어제같은 소나기가 쏟아질 듯.

 

어쨌든 이런 하늘이고 하니, 갈까말까 고민하고 있던 이즈모타이샤에 가보기로 한다.

인연맺기 신사라서 나하고 별로 관계는 없는 곳인데다가, 본전이 공사중이라서 볼게 별로 없긴 하겠지만

날씨가 괜찮으니 야외 나들이 하는 겸 해서. 중간에 비가 쏟아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이즈모타이샤는 마츠에 옆 마을 이즈모 시에 있고, 마츠에 역에서 JR 이즈모역 가는 전철을 타도 되긴 하지만

상당수의 관광객은 마츠에 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 마츠에 신지코 온천역에 도착한 다음, 사철인 이치바타(一畑)선을 탄다.

왜냐하면 본인이 사용중인 퍼펙트 티켓을 포함해서 상당수의 할인 티켓들을 JR 에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퍼펙트 티켓이 있으면 여기까지 가는 버스도, 이치바타 전철도 모두 무제한 사용가능하다. 타지 않으면 손해.

이즈모타이샤에 갈 예정이라면, 공항이나 항구에서 마츠에 시까지 왕복, 이즈모타이샤 왕복 이 두가지만 해도 본전 뽑는다.

거기다 마츠에 시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지 않을리가 없으니 당연히 필수적으로 구입해야 할 티켓.

 

신지코온천역에 도착하니 열차 출발까지는 40분쯤 남아있어서, 그동안 주변 산책이나 하기로 했다.

내부는 아주 아담하지만 외부 모습은 꽤나 멋들어지게 꾸며놓은 역을, 간만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담아본다.

며칠동안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해서 조금씩 우울해져가는 참이었는데 왠지 셔터를 누르고 나니 후련하다.

 

 

 

역 이름이 신지코온천인 만큼, 이곳에는 온천이 여기저기 많다.

역 앞의 무료 족욕탕에 한번 담궈볼까 싶었지만, 오전 10시인데 기온이 30도 가깝다. 지금은 무리.

자전거 여행때 지친 몸으로 무료 족욕탕에 들어가면 그냥 천국이었는데

평범한 관광객 흉내를 내고 있는 지금은 그다지 땡기질 않는다.

 

 

 

자고로 괜찮은 온천이 있는 곳은 괜찮은 숙소도 따라오는 법.

마츠에 역 주변의 호텔은 그냥 적당적당히 쉬고 가는 느낌이 들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 있는 호텔은 제대로 된 관광호텔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온천도 그렇고, 창가에 신지코 온천의 풍경이 펼쳐지니 당연한 일이겠지.

 

신지코(しんじ湖) 호수는 지금의 마츠에가 존재하게 해준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

일본에서 7번째로 큰 호수로, 동서로 길죽한 모양을 하고 있어 마츠에 뿐만 아니라 지금 향하는 이즈모까지도 주욱 이어진다.

둘레 47km 의 기다란 형태라서 얼핏 보면 강처럼 보일 정도로 큰 녀석.

 

특히 버스타고 30분만 달리면 바다가 보이는 지형이니, 이곳 신지코 호수는 해수와 담수가 섞인 기수호로 유명하다.

기수호들은 해수어와 담수어가 모두 활동하는 곳이라서 영양과 자원이 풍부한 편.

마츠에를 포함한 시마네현의 큰 도시들은 다들 이 신지코 호수의 축복을 받아서 자라난 곳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도시 인근 기수호들의 문제점이기도 한 부영양화가 심각하게 진행중이라서 요즘 좀 위태로운 상황.

 

 

 

예전처럼 소박하게 살아가기에는 어디 하나 부족함없는 호수였지만

도시가 발달하면 할수록 기수호의 특징인, 영양은 풍부한데 물흐름이 나빠지는 현상이 더욱 심각해져서

곳곳에 녹조 현상도 심해지고 어획량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의 100경에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신지코 호수의 일몰 모습은 가히 예술작품을 방불케 하는데

막상 뜨거운 아침 햇살에 반사되는 녹조라떼는 괜히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곳은 별로 심한것도 아니고, 신지코에서 무수히 뻗어나와있는 조그만 지류들은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한 곳도 있다.

마츠에 시는 공업화된 곳도 없고, 특별지정구역으로 선정되어 중점관리를 받고 있을만큼 자연보호에 열성적인 곳인데도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 세계적 규모의 환경변화의 두 난점에는 여전히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깔끔하고 조용하고 길게 늘어선 산책로를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40분이란 이렇게 돌아다니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열차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에 멀리는 못가겠다.

 

 

 

생긴건 강처럼 보여도 역시 호수는 호수.

흐름의 역동성이 느껴지는 강과는 달리 이렇게 넓고 긴 녀석도 강에 비하면 잔잔하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마츠에 시에서 가장 높은 녀석. 사실 한국 기준으로는 동네 아파트보다도 낮은 녀석이지만

저 위에서 바라보는 신지코 호수의 일몰이 꽤나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의식이긴 하지만 사람은 자연의 모습에 영향을 받는다는 느낌이 이곳에서도 든다.

마치 DNA처럼, 강 주변의 마을 모습과 호수 주변의 마을 모습은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듯 하다.

서울의 한강이나 대구의 신천에서 느끼는, 사람의 등을 떠밀어 주는 듯한 방향성의 힘과는 반대로

이곳에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진정제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강변공원과 호수공원의 모습이 다른 것과 비슷한 맥락인 듯.

 

이곳은 아침에 산책삼아 한 바퀴 돌 수 있는 그런 크기가 아니라서, 호수의 잔잔함과 함께 묘한 박력이 느껴진다는게 특이하긴 하다.

 

 

 

지금 와서는 신지코 호수의 어획량이 마츠에 시에 미치는 경향이라는 거 꽤나 줄어들긴 했지만

이곳에서 손에 꼽는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니, 관광 자원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이곳의 부영양화는 주민들의 골치거리다.

 

한국처럼 처음부터 물을 죽여버릴 생각으로 녹조라떼를 인공 생산해내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지만

기수호의 부영양화는 이렇다 할 정도로 딱부러지는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답답할 듯.

 

광각 단렌즈로 사진을 찍다가, 저 녀석 한장 담아보려고 땡볕 아래서 망원렌즈로 갈아끼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

귀찮지만 담고는 싶고, 담으려면 가방 내려놓고 렌즈 갈아끼워야 하니.

 

 

 

잠시 호수 구경을 하다가 역으로 돌아가려는데, 낮익은 조각상이 보인다.

마츠에의 문호 코이즈미 야쿠모의 '괴담'집에서도 가장 유명한 '귀 없는 호이치'의 조각상.

 

귀 없다는 말을 들으면 대강 짐작은 다들 할 수 있을거라 생각.

귀신을 쫓는 불경을 온 몸에 적다가 귀에만 깜빡 잊어버려서 귀가 없어져 버린다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신지코 산책로를 걸으면서 이렇게 코이즈미 야쿠모의 향기를 느끼는 것도 즐거운 이벤트인 듯.

왼쪽에 보이는 녀석이 마츠에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관광호텔인데, 여기서 묵으면서 석양 바라보고

호수 산책하면서 이런 조각상들과 조우하고... 이런 호화스러운 여행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어디든 그렇지만, 이런 관광호텔은 나같은 1인 손님을 위한 시설이 없어서 거의 불발되곤 하지만.

 

 

 

적절한 시간에 돌아오니 전철이 대기중이다.

돈이나 표를 준비할 필요없이 퍼펙트 티켓만 스윽 보여주고 개찰구 통과할 때의 묘한 만족감.

 

창가에 적힌 단어는, 발음 그대로 옮기자면 '완만'(ワンマン)이다.

처음 봤을때는 완만하게 움직이는 열차인가 싶기도 했는데, 저게 한국어도 아니고.

저 단어는 영어 One Man 의 일본식 발음. 열차가 작아서 승무원이 한 명밖에 타지 않는다는 의미다.

승무원이 한 명이라는 뜻은 바꿔 말하면, 운전수가 없이 운행할 수는 없으니 승무원이 운전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예전 방식의 전철도 여전히 운행중이고, 거리별로 운임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라서

나갈 때 요금을 정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맨 열차가 다니는 곳이 대부분 인적 드문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가는 곳이 무인 역인 경우, 운전수가 직접 운임을 열차 안에서 받아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름 관광객이 타긴 했지만 그래도 널널한 내부 모습.

원맨열차라고 적혀있긴 해도, 이 노선은 대부분 관광지쪽으로만 이어져 있기 때문에

간략한 소개를 위해서인지 여성 승무원이 한명 더 타서 가이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완전히 자동화 되어가는 열차보다는 역시 조금이라도 사람냄새 나는 편이, 특히 관광지에서는 더욱 필요할 듯.

녹음된 안내방송은, 아무리 사람의 목소리라고 해도 결국 기계가 만들어내는 음성표식일 뿐이다.

 

이 열차는 이즈모타이샤까지 직통으로 운행되는 녀석이 아니라서, 중간에 갈아타야 하지만

그 역에 내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즈모타이샤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연게플레이는 완벽하니 걱정할 것 없다.

 

전철 안에서는 카메라 잘 꺼내지 않는데, 한참동안 신지코 호수를 끼고 달리는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한장 남겨본다.

이게 정말 호수인가 싶을 정도로 징하게 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니 살짝 감상적인 기분도 들고.

이 전철은 아주 노후된 녀석으로, 운전시 소음이나 흔들거림은 요즘 한국에서 체험하기도 힘든 수준이지만

창밖에서 흘러가는 느긋한 신지코의 모습이 함께하니, 최신 설비의 전철보다 더욱 친근해서 기분이 좋다.

본인은 철도 매니아는 아니지만, 아마 매니아들도 이 노선을 신형 전차로 바꾸는데는 반대할 거라고 생각해 본다.

 

약 50분쯤 달리면 도착하는 카와토(川跡)역에서 대부분의 승객들이 하차한다.

이즈모 시 주민이 아닌 이상, 이즈모타이샤로 가려면 이곳에서 갈아타야 하기 때문.

하차하면 선로 하나를 건너서 정차되어 있는 전철로 갈아타면 되는데

나이 지긋한 역무원들이 이미 선로 위에 서서 수신호로 안내를 하고 있다.

 

요즘들어 한국 전철의 무인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데, 돌발 상황에서는 절대로 인간의 판단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유 외에도

사람이 서서 길을 안내해 준다는 행위가 얼마나 든든한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경제 논리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무인화가 더 이득이겠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산업혁명때 죽어간 10세 소년들 역시 당연한 것이겠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서 역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일변한다.

소박하고 아담해 보이는 모습은 얼핏 비슷하지만, 관광지로서 정비된 모습이 금새 느껴진다.

DSLR 이 점점 사라지는 요즘에, 의아하게도 중급기쯤 되어보이는 DSLR을 든 사람들이 꽤나 많아서

이즈모타이샤가 그렇게 대단한 곳인가 하고 여러가지 추측을 해 봤는데

 

그 사람들은 사실 이곳에 전시중인 열차를 찍으러 온 것이었다.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건너편에 있는 열차로 달려가더군.

철도 역사가 긴 일본에는 매니아들도 많은데, 이곳은 이즈모타이샤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철도 매니아들에게도 성지.

옆에 서 있는 전철은 매우 예전 것으로, 이곳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전철이 아닌가 싶었다.

 

철도 오덕들이 열심히 사진찍는 모습에,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기도 하고 철도에는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서 그냥 나왔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이즈모타이샤마에(出雲大社前)역인데, 이 건물 역시 성지.

1930년 만들어진 이후 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재중 하나다. 물론 보수공사야 많이 거쳤지만.

옆에는 까페도 하나 붙이고, 조금 현대적인 모습으로 단장을 했지만 그래도 유서깊은 녀석 때려부시지 않아서 다행.

 

이즈모타이샤가 워낙 오래전부터 유명한 곳이기도 했고, 이 역이 들어설 당시엔 일본 도로사정이 워낙 좋지 않을 때라서

철도가 일본 교통의 희망으로 한창 떠오르던 시절이었으니, 자국의 매니아들에게는 성지순례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구 타이샤 역이란 곳도 있어서, 철도 매니아들은 이즈모타이샤보다 그쪽을 더 중요시하기도 한다.

 

 

 

유명한 관광지라도 시원깔끔한건 여전하다.

특히 유명 신사 주변에는, 미관상 문제도 있고 해서 높은 건물을 보기 힘들기 때문에

아담하게 늘어선 건물들이 더욱 인상깊게 다가온다. 이런 곳에 돈 된다고 고층 빌딩 세워놓으면 그 얼마나 흉하게 보이려나.

 

느긋하게 신사 쪽으로 걸어가며 가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느 팜플렛에 우연히 눈이 간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기념품같은 모습이었는데, 그 자연스러움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서 일단 팜플렛을 가져왔다.

Ant Works Gallary 라는 공방으로, 이즈모타이샤와는 반대방향에 위치한 곳. 돌아올 때 들러보기로 한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신사 중 한곳인데, 의외로 그렇게 사람이 많지는 않다.

약간 이른 시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평일인 탓도 있을 듯 하지만

진짜 이유가 따로 있긴 하다. 그건 다음 포스팅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입구는 다른 신사와 별다를 것 없는데, 지금껏 걸어오면서 본 모습과 함께 생각하니

주변 건물들의 풍경도 그렇고, 그 깔끔떠는 일본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정돈된 느낌이 든다.

애초에 이곳 마을이 이렇게까지 성장한 것도 이즈모타이샤 하나 때문이었고

이치바타 전철이 따로 이곳까지 선로 하나 만들면서도 '타이샤 관광객만으로도 운영가능하다'라는 판단을 했을 정도로

굉장한 위세를 자랑하는 신사였으니, 주변 모든 주택과 상가도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

 

일본의 어지간한 곳은 많이 둘러봐서 별로 놀라지 않는 본인도

이즈모타이샤 급의 유명 신사 주위가 이렇게까지 잘 정비되고 깔끔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다.

이건 쓰레기가 떨어져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보도블럭과 도로 아스팔트조차 흠집하나 없어 보이는 수준.

이곳 정문이 살짝 언덕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길게 늘어선 상점가를 보면 굉장한 계획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냄새 풍기는 쪽이 좋은데

이쯤되면 신사 내부를 기대해야 할지, 상가 거리에서 사람냄새 나는 곳을 찾아봐야 할지 살짝 고민도 해 볼만 하다.

지나오면서 본 바로는, 이곳 상점가엔 아트 공방도 많고 신화 관련해서 여러가지 이벤트도 벌어지고 있어서

어쩌면 본전도 수리중이라 못 보는 신사보다, 주변에서 더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듯 하다.

 

일단 날씨가 화창할 때 열심히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정문을 통과한다.

정말 운이 좋아서 이 날씨가 지속된다면,  저녁 일몰을 마츠에 현립미술관에서 감상할 수도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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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비가 완전히 그칠 것 같지는 않고, 맞으며 걸어다닐 정도라고 판단될 때 일어나서 언덕을 오른다.

오르기 전에 홀로 고고히 피어있는 꽃을 한장 찍어주고.

이 녀석 좀 전 주택가에서 봤던 빨간 꽃과 색만 다르지 같은 녀석인 듯 하다. 이름이 뭘까.

 

 

 

언덕 위에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올라가보니 무사 저택하고는 상관없는 볼거리였다.

이 지역의 축제때 사용하는 거대한 북 가마를 전시해 놓은 곳.

 

아무래도 무사 저택만 구경하기에는 입장료가 조금 아쉽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까.

보통 일본의 축제는 그 지역의 토지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오미코시'(御神輿)라는 가마를

장정들이 어깨에 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 주변에서 북을 치고 흥을 일으키는게 일반적이지만

이곳의 축제는 오미코시보다 이 거대한 북이 메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북이 매우 크고 무거워서 가마처럼 사람들이 직접 매고 이동하지는 못하고, 밑에 바퀴를 장착해서 끌고 다닌다.

 

신성함과 부정탐에 대한 결벽증이 있는 일본 사람들 답게, 원래 축제에 사용하는 오미코시나 이런 가마들은

마을 사람들도 축제 전까지는 보지 못하도록 안치하는것이 보통인데, 관광객을 위해서 특별히 전시해 놓은 것이라고.

 

조그만 브라운관에 영상과 함께 흐르는 설명도 일본어, 한국어, 영어를 선택해서 들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작은 무사 저택이지만 외국인을 위한 배려가 상당히 인상깊어서, 입장료 낸 만큼의 만족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본다.

 

 

 

북을 보고 나오니 또 비가 강해졌다 약해졌다 한다. 이젠 그냥 포기.

오후 3시를 넘어갈려나 말려나 하는 시간인데, 15시간의 항해중 잠다운 잠은 자질 못했으니

사실상 어제 아침 9시부터 지금까지 30시간을 뜬눈으로 깨어있는 셈이다. 멀미는 덤으로.

 

무사 저택 앞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면 아직 어디든 구경갈 수 있는 시간이고

멀미만 아니었으면 느긋하게 호리카와 유람선에 몸을 맡기고 뱃사공의 입담을 즐기기에 알맞은 곳인데

풍경을 즐길수 있는 몇몇 곳은 비때문에 가나마나한 상태, 배는 도저히 탈 기분이 아니고.

 

비는 좀 맞겠지만 그냥 시오미나와테 거리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녀보기로 한다.

 

 

 

시오미나와테 거리는, 해자 건너편에 고풍스러운 무사 저택이 늘어서 있고

해자 쪽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만한 흙길이 늘어서 있다. 날씨가 좋은 날 걸어다니면 매우 훌륭한 산책로.

 

이곳 홍보 팜플렛에는 '일본의 산책로 100선'에 선택된 곳이라고 하는데

무엇무엇 100선 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서, 그냥 그렇다고만 생각한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100선 정도면 각 도도부현에 2개씩 최고의 장소 뽑고도 몇개 더 남으니까.

마음에 드는 풍경이란 건 사람마다 다르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건 그렇고, 이 묘한 모양의 노송은 나이가 600살쯤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사람의 보살핌이 없이는 호리카와에 처박힐 운명이긴 하지만

나이를 진득하게 먹은 나무라는 건 어떤 생물에게서도 볼 수 없는 연륜이란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 하다.

지구가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가이아설을 문학적으로 생각한다면, 가이아의 직계 자손이 이런 녀석들이고 우리는 10대 후손쯤 되려나.

 

외딴 섬이라서 자전거 여행과는 맞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지만

이 젊은(?) 노송을 보고 있으니 야쿠시마(屋久島)의 7천년된 삼나무가 다시 그리워진다. 언젠간 반드시 가게 될 터.

 

 

 

이번 여행 포스팅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게 누구 흉상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옆에는 아일랜드 대통령이 내방했을 때 심은 기념수도 있다.

그쪽의 라프카디오 헌이나 이쪽의 코이즈미 야쿠모나 모두에게 참 자랑스러운 인물이겠지.

 

지금에서야 세계화다 뭐다 해서, TV 앞에서 전세계의 비경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시대지만

처음으로 배나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떨어진 나라에 도착한 사람들의 문화적 충격은 얼마나 어마어마했을지.

경계가 명확할수록 낭만이 넘치는 시대였고, 이제는 외국이라는 절대적인 놀라움의 대상도 그저 즐기러 훌쩍 떠날 수 있는 가벼운 존재가 되었다.

옛 향수를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인간이 지식을 쌓아가면서 점점 놀라움의 대상이 사라져 간다는 건 좀 재미없는 일.

 

이대로 발전이라는 걸 계속한다는 가정하에, 만약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의 지식마저 습득하는 그 때에는

모든 존재에 대한 신선함과 호기심을 잃고 멸망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중심을 두긴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과학에 대해서 매번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여전히 무궁무진한 미지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즐거움이 광산에서 캐내는 보물과도 같은 것이라면

대통일이론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현재의 과학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노다지나 같으니까.

 

 

 

비가 와도 유유히 호리카와 강을 흐르는 유람선의 모습이 보여서 서둘러 한장 담는다.

50분간 고즈넉한 마을과 마츠에 성 주변의 풍부한 자연을 감상하는 저 코스는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한다.

비싸긴 해도 외국인 할인까지 되니, 일본어를 알아듣는 나로서는 즐길거리가 많을 텐데.

 

아무래도 다음엔 비행기로 가볍게 날아와서 멀미 없이 유람선을 타 봐야 할것 같다.

 

 

 

쿨맥스 소재라서 마르기는 기가 막히게 잘 마르는데

비 맞으면서 동시에 말리는 듯한 묘한 산책을 잠시 즐기다가 다시 출발점이었던 무사 저택 앞으로 돌아온다.

문득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치고, 주변에 먹을만한게 있나 둘러본다.

 

역 근처에 가면 적당히 배 채울만한 곳이야 있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좀 유명한 거라도 먹어볼까 싶다.

입장료가 비싼 곳도 별로 없고, 대부분 외국인 할인이 되다 보니 거기서 아낀 돈을 음식에 투자하면 되니까.

아끼려고 작정하면야 일본 1주일 돌아다녀도 식비로 5만원 정도만 쓰면 충분하지만

지금 자전거 여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돈 남겨가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시오미나와테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이라면 단연 소바집 야쿠모안(八雲庵)이다.

이곳 역시 원래 무사 저택이었던 곳을 음식점으로 개조한 건물인데, 예전 미관을 크게 해치지 않아서 그 풍경이 예사롭지 않기로 유명.

 

음식점도 대를 잇는 곳이 많은 일본에서, 특히 소바집은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쟁쟁한 가게들이 많기 때문에

중장년층이 많이 찾기도 하고, 이름값 탓에 새로 생긴 맛있는 소바집이 괜히 평가절하받는 경우도 있다.

 

제대로 면을 뽑아먹은 역사는 약 500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지만,

메밀이라는 게 워낙 아무렇게나 뿌려놔도 잘 자라는 잡초같은 녀석이라

메밀을 이용한 음식은 일본에서 14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녀석. 뭐든 장인정신으로 승화시키려는 이쪽 사람들이라서

각 지역마다 이름 날리는 소바집이 산재해 있다. 특히 물 맑은 지방의 소바집은 그 맛이 일품이라, 먼 시골까지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본인이 몸담았던 나가노현 키소(木曽)마을의 소바집도 창사 300년쯤 된 이름있는 곳이었는데

수익성 때문에 직접 메밀을 재배하진 않고 홋카이도에서 가져오긴 하지만

평균 해발 1000m를 넘는 산간지방에서 흐르는 물과 함께 만들어낸 소바의 퀄리티는 일본에서도 최상급.

도쿄 관광 가본 사람들중에는, 유명한 관광버스인 하토버스를 알고 있는 분도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도쿄에서 출발하는 그 하토버스의 코스중에 이 소바집을 찾는 것도 있을 정도. 도쿄에서 그곳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있는 일본의 메밀국수 형태의 소바의 시초가 된 곳이 그곳 키소였기 때문에

사실 이곳에서 유명한 이즈모소바(出雲そば)도 원류를 따지고 들어가면 키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산골짜기 나가노현 안에서도 정말 이름 그대로 산골짜기중의 산골짜기 키소마을이라

이즈모타이샤를 찾는 사람들 덕에 이곳 이즈모소바가 훨씬 더 대중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신슈소바(信州そば)라고 불리는 그 지역 소바의 맛은, 매니아들이 찾아가는 일본의 극소수 특 S급 소바집을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일본 최고라고 판단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점심시간엔 그 소바를 정말 마음껏 퍼먹을 수 있었는데

조금의 과장도 없이, 최저임금 이하의 시급을 받으면서도 그 소바맛 하나때문에 아르바이트가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을 정도.

 

커피나 중국차도 마찬가지지만, 미각의 레벨을 올리려면 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녀석을 맛의 기준으로 삼는게 쉬운 방법이듯이

소바의 맛도 일단 제대로 된 녀석에 익숙해지고 나면 다음부터 맛을 구별하는데 좋은 비교점이 된다.

키소의 소바에 익숙해진 후로, 같은 일본에서 먹는 다른 지역의 소바도 레벨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한국 일식집에서 나오는 소바는 이제 손도 대지 않는다. 비교하는게 미안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차이.

지하실에서 직접 메밀을 탈곡해서 바로 면을 뽑아올려 만드는 소바가

대량생산되어 비닐에 쌓인 채 배송된 후 가게에서 삶아 나오는 녀석과 맛이 같을수가 있나.

 

일단 마츠에에서 가장 유명한 이즈모소바집인 이곳 야쿠모안도, 직접 탈곡해서 수타로 면을 만드는 곳이니 퀄리티는 보장된다.

소바는 그 퀄리티는 둘째치고, 지역마다 차별된 방식의 먹는 방법이 존재하는데

이즈모 소바는 도시락 소바인 와리고소바(割子そば)가 가장 유명하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따로메밀국수' 정도로 해석가능.

야외에서 소바를 갖고 나가 먹는데서 유래한 소바로, 이곳 특유의 칠기그릇을 도시락처럼 단을 나눠 그안에 소바를 담는다.

각각의 단마다 소바 위에 얹는 고명의 종류를 달리해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특징.

 

원래 소바는 작은 그릇에 담긴 다신 국물(だし汁)에 면을 듬뿍 담궈서 먹는 방식이지만

야외 도시락 개념의 이곳의 와리고소바는, 국물의 맛을 유지시키기 위해 소바에다 직접 뿌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국물을 여러번 담궈 쓰면 소바에서 나오는 수분이 스며들어 맛이 점점 약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이곳 다신 국물은 타 지역보다 맛이 진하다. 담궈먹는 방식보다는 어쩄든 양이 적으니까.

 

와리고소바는 이즈모소바의 원류인 이즈모타이샤에 가서 먹어보기로 하고

이곳에서는 브랜드 상품으로까지 알려진 청정생달걀과 함께 나오는 4색소바를 시식해 보기로 했다.

 

 

 

흰 쌀밥에 풀고 간장뿌려 비벼먹으면 맛이 일품일 듯한 최고급 계란을 얹고

다신 국물을 좌악 뿌려서 입으로 넘겨본다. 계란의 담백한 맛 때문에 강한 국물의 맛이 약간 중화되는 느낌.

국수 자체의 퀄리티는 꽤나 괜찮은 편이고, 위에 올라온 4가지 색의 고명을 조금씩 섞어서 함께 흡입하면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레퍼런스급 맛을 느낄 수 있다. 가격은 비싸지만 맛은 합격점.

 

키소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먹은 소바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끈적끈적한 참마를 국물에 갈아넣고

무와 와사비를 갈아넣은 후 담궈먹고는 했다. 참마의 끈적함 때문에 면에 국물이 훨씬 많이 달라붙고

무의 시원함이 함께 느껴져서 먹고있으면 그저 행복할 따름.

 

이게 상당히 맛을 진하게 먹는 방법이라서, 이곳의 소바는 거기에 비하면 조금 약한 맛이지만

사실 원래 소바는 그렇게까지 진하게 먹는 음식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커스텀 취향.

한국인 입맛에는 좀 허전하다고 느껴질수도 있고, 소바는 면류음식 중에서는 가격이 좀 비싼 편이라서

아무래도 여기서 한그릇 먹어보고 좀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법 하다.

 

소바의 맛은 있는듯 없는듯 느껴지는게 정상이고, 다신 국물의 퀄리티에 따라서 평가가 갈리는 음식.

면을 뽑을 때 껍질부분까지 같이 뽑느냐, 핵만 뽑느냐에 따라 면의 색깔이 바뀌고, 목넘김과 향기도 달라진다.

소바를 먹을 때 일부러 후루룩 소리를 내며 공기와 같이 삼키는 것도 그 목넘김과 향기를 즐기기 위해서.

 

소바는 끓는물에 삶으면 영양소의 대부분이 물에 녹아버리기 때문에, 칼로리도 없고 별로 건강에 좋은 음식은 아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부탁하면 소바 삶은 희멀그레한 물을 한잔씩 내놓기도 한다. 그걸 남은 다신국물에 섞어 마시면 진득한 육수.

겨울에는 물론 소바째로 넣고 각종 야채를 넣어 우동처럼 삶은 뜨끈한 녀석도 판매한다. 겨울에는 그게 별미.

 

이곳의 소바는 이름값은 하는 만큼 괜찮은 수준이지만, 역시 추억거리가 잔뜩 쌓여있는 키소의 소바와 비교하는건

개인적인 감상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나름 평가해 보려고 해도 진짜 키소쪽이 맛있게 느껴지긴 하는데.

호텔의 최고급 코스요리보다 어머니가 해 주는 된장찌개가 더 맛있는 건 어쩔수 없는 일 아닌가.

 

한 번만으로 평가하기엔 소바라는게 꽤나 민감하고 애매한 맛이라서 다음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가게 정원이나 내부 인테리어는 참 정감있게 꾸며놓았다.

마츠에의 유려한 산책로에서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곳이니, 먹고 후회할만한 퀄리티는 아니다.

 

배도 조금 채웠겠다, 체력이 조금 돌아온 사이에 오늘 여행은 이걸로 접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

사실 갈아입을 옷을 한벌씩밖에 안가져왔는데, 이렇게 쫄딱 젖었으니 조금 일찍 가서 빨래도 해야 한다.

그래도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숙소와 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빙 돌아본다.

반대쪽으로는 15분만에 도착하지만 , 이곳의 일반 버스는 50분에 한대씩 오기 때문에 기다려봤자 헛일.

 

오늘 돌아보지 못한 다른 관광지를 버스 안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바라보는 것도 나름 운치있다.

버스가 30km 를 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의 감상이 가능한 것. 한국의 시내버스를 타면 경치 감상이고 뭐고...

 

역 앞에서 내려 편의점서 적당한 간식거리 구입후 호텔로 돌아온다.

코인세탁기와 건조기는 돈 내고 사용하지만, 원래는 세제도 프론트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이럴줄 알고 한국서 세제를 한움큼 퍼담아 왔기 때문에 5백원정도 아낄 수 있었다. 참 잘났다.

 

시골 지역이라서 TV 채널이 4개밖에 없다. 참고로 도쿄는 기본채널이 10개 정도.

하지만 되려 좋은점도 있는게, 채널 수가 적으니 각종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몰려서 한꺼번에 나온다.

예를들어 도쿄에서 월요일엔 무한도전, 화요일엔 유한도전, 수요일엔 제한도전 따위의 방송이 나온다고 하면

이곳에서는 6시에 무한도전, 7시에 유한도전, 8시에 제한도전이 나오는 셈. 물론 날짜상으로는 재방송이지만.

일본은 지역별로 편성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동시간대에 방영하지는 않는다.

 

자전거 여행때 A 지역에서 본 TV 프로그램이, 1주일 달린 후 들어간 B 지역에서 또 방송되는 경우도 있었고.

 

덕분에 세탁기 돌리고 건조기 돌리고 하는 사이 속이 꽉꽉 찬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일본어가 가능하니, 남들보다 일찍 들어와서 TV 틀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일까.

침대에 누워도 여전히 배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오늘만 잘 넘기면 내일부터는 머리도 정상으로 돌아올거라 생각한다.

흐리며 때때로 비, 강수확률은 70%를 넘고 있어서 내일 일정이 조금 걱정이긴 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안 가보면 큰일나는 곳도 없고 그냥 날씨 맞춰서 그때그때 발길을 정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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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만큼은 아니지만 가랑비가 끊임없이 내려서, 옷 말리는건 사실상 포기.

다들 우산 한개씩 들고 다니는데, 한국에서 접이식 우산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호텔에서 대여해주는 비닐우산은 장우산이라서

귀찮아 들고오지 않았더니 이런 꼴이다. 사실 본인은 비에 젖어도 관계없는데 어디 들어가기가 좀 미안할 따름.

 

아버지께서 일본을 다녀왔을때 한국과 가장 다른 인상을 받았던 점으로,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가 없다는 것을 드셨는데

확실히 아무렇게나 주차된 차량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 거리의 풍경이 확 바뀌는 기분이 든다.

 

일본은 어떤 건물이든 주차공간을 확보하도록 법으로 지정되어 있고,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불법 주차시 벌금 20만원

골목이 아닌 대로변 주차 혹은 일정시간 지나거나 하면 견인비 30만원 정도가 부가되기 때문에

시골은 말할것도 없고 어지간한 대도시에도 교통에 방해되는 불법주차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처벌이 무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처럼 엉성엉성 주차단속하는 한량과는 달리

일단 발견되면 그 즉시 사진찍고 선 긋고 딱지 붙여버리기 때문에 그닥 엄두를 내지 않는다.

 

멀쩡하게 차선 지키면서 운전해도 불법 주정차된 차량 때문에 곡예운전을 해야 하는 한국에 비하면

마음 느긋하게 주행을 즐길 수 있는 이쪽 도로사정은 참으로 부럽기 그지없다.

내가 일본에 거주한다면 앞뒤 불문하고 바이크나 스쿠터같은 이륜구동 몰고 다닐텐데

한국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륜 몰고다닐 마음이 안생긴다. 사륜마저도 개떡같은 운전매너때문에 몰기 싫은데.

 

 

 

들어가서 구경하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나올법한 잡화점이 보인다.

밖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집 자체가 골동품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지만 저렇게 좁은 곳은 지금 이렇게 젖어버린 몸으로 들어가기 좀 미안하다.

밖에서 살짝 구경이나 했는데, 창문 밑의 저 간판이 심히 신경쓰인다.

네모세모동그라미... 이거 뭘 의미하는거지?

소니의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의 버튼이 비슷하긴 한데, 골동품점에서 팔 물건은 아닌듯 하고.

 

현지인들 상대인지 관광객들 상대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둘러보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 건져오는 것도 재미있을것 같다.

막상 사들고 오면, 내가 왜 이런걸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겠지만. 특히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 분위기 탈 확률이 높으니 조심.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보이는 저택이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

기념관 입구에도 쓰여 있지만, 이곳은 코이즈미의 생가가 아니고 기념관이다.

그가 살던 생가는 바로 옆에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고는 하지만 외국인에게 그게 별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입장료가 있긴 한데 그리 비싸지 않고, 외국인은 50% 할인이라서 매우 저렴하게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난 코이즈미 야쿠모라는 문학가를 좋아하지 그가 살던 집이나 그의 물품에는 관심이 없다.

얼마 안되는 입장료 내고 들어가 구경하는건 관계없는데, 작은 물건 세심하게 쳐다보기에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힘들 듯.

 

 

 

옆집은 진짜 코이즈미의 생가. 여기도 안에 들어가려면 요금 내야 하지만 앞마당까지는 공짜다.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듯 하다. 이 꼴로 들어가면 폐를 끼칠 것 같은 느낌.

 

일본인들에게 100년 전 자신들의 나라를 좋아해 찾아온 푸른눈의 외국인은 매우 귀중한 존재겠지.

나쁘게 말하자면 그가 왔다는 사실 자체를 자신들의 자부심으로 변환하는, 조금은 허세적인 마음일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도 안에 들어가지는 않고, 마당에 새초롬히 피어있는 이름모를 꽃이나 찍고 돌아선다.

비가 조금 세지는 듯 해서 몇 분 정도 입구 처마에 서서 비를 피하기도 하고.

 

 

 

그가 살았던 저택을 구경하기보다는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마츠에라는 조그마한 마을의 풍경을 느껴보는게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 부근은 그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한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조금이나마 코이즈미의 시선을 엿볼 수 있을 듯.

물론 코이즈미 야쿠모 때문에 이렇게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건 아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곳은 시오미나와테(塩見縄手)라는 이름의 거리고, 나와테(縄手)라는 건 새끼줄처럼 길게 뻗어있는 거리를 뜻한다.

마츠에 성이 세워지고 나서 번주를 호위하는 무사들이 성 주변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거주하게 된 것이 이 거리의 탄생.

시오미(塩見)라는 건 그 당시 봉행직에 있었던 시오미  코헤(塩見小兵衛)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 중 관광객에게 공개된 건물이 바로 무사 저택. 이 길 대부분의 저택이 무사 저택이긴 하지만, 들어가 볼수 있는 녀석은 이곳 뿐.

 

 

 

특출나게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시오미나와테 거리와 함께 그 시절 사람들의 실제 생활터를

실감나게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점수를 받는 편.

 

280년 전쯤의 건물인데, 목조건물의 특성상 수리는 여러번 거쳤지만 당시 모습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다.

여기도 외국인에게는 반값할인이 되니, 음료수 한개 사먹는 돈으로 입장 가능.

 

계속 비가내리고 있어서 파란 하늘이 참 그리워지지만, 이것도 나름 운치는 있다고 생각중이다.

 

 

 

물론 저런 인형까지 280년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 저택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중급 무사가 거주하던 곳인데, 관광화 되면서 그 당시 생활도구등을 모아 전시하게 되었다.

스피커에서는 일본어 설명과 함께 한국어 설명도 나와서 이해하기 쉬운 편.

 

물론 중급이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무사는 무사, 애초에 이 거리는 번주를 호위하기 위한 무사들의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 저택이 서민들의 생활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어긋나지 않았나 본다.

한국의 경우에 대입한다면 어쨌든 어엿한 양반집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게 편할 듯.

 

 

 

일본은 일단 문인 무인 가르기 전에 관료직 자체를 무사라고 지칭하는 편이 적합하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무사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랄까, 그런 흔적이 꽤나 느껴진다.

깊게 들어가자면 논문 쓸 정도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그냥 검소하고 절제있는 생활에 맞춰져 있다고 보면 될 듯.

 

한국의 마당과는 달리, 일본의 정원은 그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풍경의 일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자갈은 항상 수면처럼 잘 골라놓고, 움직일 때는 저 돌을 밟는 꼼꼼함을 보인다. 난 그렇게는 못하겠다만.

 

 

 

여기는 여성들이 사용하던 물품들을 전시해 놓은 곳.

내용물은 그 시대 동양 여성들이 가지고 있었을 만한, 은근히 만고불변의 진리같은 느낌이 든다.

 

뒤에 걸려있는 예복은 생각보다 꽤 무겁다.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가벼워지긴 했지만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던 헤이안 시대 여성의 예복은, 겹겹히 다 착용했을 경우 30kg 는 넘었으니.

그래서 자연스럽게 옷걸이도 매우 든든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하급 무가의 여성들은 저 예복이 인생에서 가장 귀한 물건일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물론, 제대로 된 전통 예복은 4~5천만원이 훌쩍 넘어가니... 화장품과 옷은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으리.

 

 

 

사실 300년 전쯤의 전통 가옥은, 그 편의성 면에서 볼때 한국의 그것이 월등히 앞서는 부분이 많다.

 

목재의 수급이 한국보다 수월해서 유리한 점이 있긴 했지만,

부엌이나 온돌, 대청 등 사계절의 변화에 능동적인 대처능력이 뛰어난 한국의 전통 가옥은,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도 굉장한 하이레벨.

솔직히 집 짓는 능력은 요즘들어 훨씬 퇴화하지 않았나 싶은데, 물론 돈때문이곘지만 한국의 요즘 건물모습은 그냥 추하다.

 

 

 

예전에 사용하던 우물터.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덮개가 조금 인상적.

딱히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 그냥 저택 뒷 언덕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였겠지.

 

 

 

빗줄기도 점점 심해지고 그에 맞춰 머리도 돌기 시작해서 때마침 나타난 휴게소에 들어가서 걸터앉는다.

이곳도 원래 사용하던 건물인데, 휴게소로 사용하기 위해 살짝 보수를 거친 녀석.

 

물에 젖은 옷때문에 사실 앉아있는것도 좀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 신발 벗고 위로 올라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옆에서 본다면 음악이라도 흥얼거리고 있는걸까 할 정도로 머리가 저절로 운율을 타고 있다.

몇몇 관광객들이 앉았다가 다시 나가기를 반복하는 시간동안 그냥 멍하니 앉아서 바깥 경치를 바라만 본다.

그 사람들은 우산을 가지고 있었으니 나가고 싶을때 나갈 수 있지만, 난 일단 비 그칠때까지 앉아있으려고.

 

 

 

이곳 무사 저택도. 개인 집치고는 그럭저럭 큰 편이지만 관광지로서는 참 조그마한 곳이라서

느긋하게 돌아도 15분이면 떡을 친다. 그런데 비 때문이기는 하지만 휴게소에 앉아서 20분 넘게 이 풍경만 계속 바라보고 있다.

꼼꼼하게 본다고 해도 역시 걸어가다가 멈추고, 다시 걸어가고 하는 구경과

그냥 한자리에 앉아서 같은 풍경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과는 꽤나 차이가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한옥에 익숙해서 그닥 살아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 저택이지만

집 안에서도, 심지어 수면 중에도 무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그때 그시절의 딱딱한 격식때문일까

난 집안에서는 옷 훌떡 벗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역시 좋다.

 

여기서 오른쪽을 보면 찻집을 겸한 조그마한 상점과, 언덕 위로 올라가는 작은 오솔길이 나 있는데

보통 이런 저택에는 언덕이라는게 있지도 않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저 위에 뭐가 있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비가 그치면 올라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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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의 소화전 뚜껑이 비에 젖어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듯 하다.

나름 관광지라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그리 신기하지도 않은 모습이지만

한국과 비교해서 조금 놀라운 점은, 저 총천연스러운 색깔이 굉장히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한국에서도 의외로 이런 다양한 모양을 가진 뚜껑이 꽤 많이 있다. 요즘 대구시내 돌아다녀도 가끔 볼 수 있고.

관광지에서는 시야가 넓어져서 이것저것 쳐다보며 걸으면 눈에 들어오지만

맨날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는 의외로 옆에 있어도 잘 보이지 않더라.

 

하지만 자동차가 지나가는 곳에 설치된 녀석이 이렇게 색깔 하나 벗겨지지 않고 본모습을 유지한다는 건 칭찬할 만 하다.

 

 

 

이나리 신사를 지나서 계속 걸어가면 한동안 관광지와는 별 관게없는 주택가가 이어진다.

여기서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까지는 2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또 조금씩 비가 흩뿌리는 바람에 발걸음도 약간씩 늦어지는 기분.

 

한적한 시골 분위기에 흠뻑 젖어서 있으나 없으나 한 앙증맞은 대문같은, 관광지 사진과는 전혀 관계없는 녀석도 담으면서 이동.

문득 제주도 생각이 났는데, 요즘에도 도둑이 없어서 문이 필요없다거나 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진다.

일본엔 일년에 몇번씩이나 가면서 제주도는 가본지 20년이 넘었다는 것도 좀 아쉽고.

 

그런데 이제껏 다녀온 일본은, 제주도 여행경비보다 더 쌌기 때문에 갔다는게 숨겨진 반전.

 

 

 

비가 오고나니 반가운 녀석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초콜릿이 진하게 들어간 녀석은 참 오랜만에 보는 듯.

 

어렸을 적에야 많이 갖고 놀았는데, 2008년 자전거 여행때 길가에 포진한 수만마리의 달팽이를

어쩔 수 없이 와그작와그작 밟아재끼며 전진할 수 밖에 없었던 사건 때문에 관계가 좀 소원해 진 요즘이다.

손가락으로 저 늘씬하게 뻗은 요술봉의 동그란 끄트머리를 건드려보고 싶었지만

그냥 오랜만에 반가운 모습 보여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도시든 시골이든, 일본 주택가의 특징이라고 할까, 대문 앞에 여러가지 꽃을 기르는 모습이 참 좋다.

오사카같은 삭막한 도시에도 그런 녀석들의 얼굴 덕분에 조금이나마 어두운 골목길이 밝아지는 느낌이고.

 

여기는 제대로 된 공장시설도 거의 없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라서 꽃들도 스스럼없이 색을 발하는 듯 하다.

아직까지 따로 길거리 사진을 찍은 적은 없지만, 사카이미나토 항구에 도착하고 나서 지금까지 버스, 도보로 이동해 오면서

도로에 쓰레기라는거 떨어져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츠에에서 가장 붐비는 마츠에 역에서조차.

아마 이런 곳에서는 적당히 뭐든 심어놓으면 쑥쑥 잘 자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폭우 때문에 고생한 흔적이 보이지만 그래도 생기를 머금은 이름모를 꽃.

꽤나 큰 녀석인데 꽃잎이 완전히 분리되어 자라는 듯한 묘한 모습이다.

 

사진 찍는 도중에도 다시 조금씩 비가 내리길래, 방금 전의 경험을 바탕삼아 미리 대피할 곳을 찾아본다.

다행히도 골목 맞은편에 넓은 공터가 있고, 그 끝에 든든한 지붕이 버티고 있는 벤치가 보인다.

비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휴식을 하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

 

사진 찍으려고 뷰파인더를 보고 있으면 어깨와 손은 딱 고정되는데 머리가 앞뒤로 흔들흔들거려서 여간 힘든게 아니다.

그 지옥같던 15시간의 항해가 끝나고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멀미란 녀석.

사실 전날 잠을 잘못자서 왼쪽 허리까지 뻐근한 상태였기 때문에, 벤치에 앉을때 멀미와 허리통이 동시에 습격해서 혼났다.

 

 

 

서 있을때가 허리는 덜 아픈 편인데, 멀미때문에 앉아있으려니 이젠 허리가 쑤신다.

이럴때는 살짝 느긋한 정자세를 유지해서 한쪽으로 가는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줘야지.

 

한숨 한번 길게 쉬고, 무거운 가방과 카메라를 옆에 던져두고 나니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 든다.

정신없어서 잘 몰랐지만, 항구에 도착후 버스타고 이동하는 시간 외에는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구나.

15시간의 항해는 아무리 누워있어도 체력이 소비되기 때문에, 지금 꽤나 피곤한 상태다.

 

방금 전의 폭우와는 달리 조금씩 뿌리는 듯한 비라서 맞아도 별 문제는 없지만

어깨에서 카메라를 한번 내려놓고 나니까 왠지 자리를 뜨기가 귀찮아진다.

 

사진의 자판기가 서 있는 건물은 꽤나 근사한 찻집이라서, 다양한 차와 달콤한 화과자를 판다.

이곳 마츠에는 딱히 해산물이 다양하고 신선하기로 유명하지만, 그것 외에는 특산품이라 할 만한 음식은 없어서

그나마 가장 유명한 것이 차와 함께 먹는 화과자이다. 사실 화과자라는게 그렇게 특출난 맛을 보여주느 것도 아니라서.

 

저기 들어가서 차와 함께 화과자를 한입 씹으면 기분이 좋아질것도 같지만, 여전히 홀딱 젖은 차림새.

물론 웃으며 맞이해는 주겠지만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될 필요는 없다.

자전거 여행때도 그랬지만, 이런 여행에 익숙해지면 멋들어진 까페나 레스토랑보다 그 옆의 공터가 더 편안한 법.

 

 

 

두 개의 벤치 중앙에는 나무 색깔을 한 콘크리트 휴지통이 놓여 있다.

가볍고 쓰기 편한 50mm 수동렌즈를 교체하면서 테스트용으로 담아 봤는데

나무 흉내내려는 차가운 녀석의 색감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서, 처음부터 흑백변환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찍었다.

 

혼자 휴식하고 있으니 원래는 카메라 가방에 들어있어야 할 일기장이 참 고프다.

이럴 때 항상 펜과 메모장을 꺼내들고 한숨 돌리면서 몇십 분이고 글을 쓰는게 일과였는데.

여행때는 잘 듣지 않지만, 아이팟도 가져오지 않아서 그냥 아무 일도 하지않고 멍하니 앉아있을 뿐.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휴게소는 뭔일인지 저런 구멍이 나 있다.

바람 잘 들어오라고 해 놓은 것일까. 하지만 이곳은 원래 그렇게 더운 지방도 아니다.

이 구멍 말고도 바람 통하는 창은 뚫려있기 때문에, 대체 뭘 하는 녀석일까 궁금해진다.

 

조금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다치 미술관 흉내라도 내려는 걸까 하는 상상도 해 보고.

아다치 미술관이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한 폭의 예술작품이라 불리는 바람에

미술작품 구경오는 사람보다 그 유명한 창문너머 정원 모습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은, 이 지역의 유명한 미술관.

 

 

 

비는 대충 그쳤지만 여전히 자리를 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멍하니 아기자기한 주택들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본다.

 

옆집하고 너무 붙어있어서 프라이버시는 어쩔까 하는 생각을 이미 20년 전부터 해 왔고...

가끔 일본 만화를 보면, 저렇게 딱 붙어있는 집 애들이 나중에 연인이 된다던가 하는 그런 달달한 러브스토리도 있었는데

진짜로 그러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만화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소재를 쓰는게 일반적이니까.

 

홈스테이 했던 나가노의 집은, 저렇게 다닥다닥이 아니라 사방팔방이 확 트인 저택같은 구조라서

이웃집이 어쩌고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름의 매력은 있겠지만 난 프라이버시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저런 집에서는 살기가 좀 힘들지도. 특히 주택거주의 가장 큰 장점인, 빵빵하게 소리켜놓고 영화감상도 못할 것 같으니 말이지.

 

문득 교복입은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서 저 앞을 지나간다.

군것질 하는 애들은 아스트랄하게도 방금 전의 그 찻집에서 화과자 사들고 나와서 먹으며 걸어간다.

중고등학교 귀갓길 군것질을 화과자로 때우는 모습이라...

그러고보니 대구의 서식지 근처에도 호두과자 전문점이 있어서, 교복입은 학생들이 그거 사들고 가는 모습도 봤으니.

 

남정네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남녀 둘이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몇몇 학생들은 시커멓고 빵빵한 채 젖어있는 내 모습을 슬쩍 쳐다보기도 하는데, 들어와서 말 걸 것 같지는 않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제일 말 잘거는 사람은 대체로 상대방보다 나이가 많은 쪽이니까.

 

나야 뭐 누구든 말을 걸어오면 기꺼이 대화할 용의는 있지만.

 

1년동안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자전거여행을 했으니 나름 이 나라에도 꽤나 익숙한 편이다.

일본어 수준도 그쪽 TV 쇼 보면서 웃을 정도는 된다.

알바도 3개월동안 하면서 여러가지 친분도 쌓고, 일본 곳곳에 전화 한통하고 찾아가면 재워주고 먹여줄 사람들은 꽤 있다.

 

그런데도 문득 역시 난 이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행중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주위를 지나가는 교복입은 학생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생시절이란 일생 단 한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극히 특수한 상황이니까.

아무리 일본에 익숙해져도 그건 단지 나이들고나서 적응한 것일 뿐,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학생들 사이의 대화같은, 아무 저항없는 의사의 교류는 아마 평생 나누기 어려울거라 생각한다.

이제껏 만난 그 많은 사람들도, 그 인연의 가장 근원적인 곳에는 내가 일본말 잘하는 외국인이라는 의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까.

 

 

 

내가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렇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듯 하다.

여행도 공부의 일종이니, 점점 능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창문 밖으로 나가서 직접 풍경을 만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40분 정도 휴식하고 다시 일어난다. 여전히 비는 계속 조금씩 내리고 있다.

하늘을 보니 완전히 그칠것 같지도 않고, 머리는 여전히 흔들거려도 체력이 조금 회복된 것 같으니까.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까지는 정말 순식간인데, 그 와중에도 계속 시골풍경이 눈길을 끌어서 걸음을 멈춘다.

왠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지는 녀석. 돌담이나 흙담, 나무담같은 것들은 확실히 콘크리트 담보다는 좀 더 편안하다.

 

 

 

한적한 산책로를 빠져나와서, 그나마 표시선이 그려져 있는 도로가로 나온다.

사실 역 근처 외에는 딱히 번화가라고 할 만한 곳도 없으니, 주욱 이런 느낌의 가옥들이 이어진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지만, 쓰레기가 없어서인지, 도로가 움푹움푹 파여있지 않아서인지

굉장히 잘 정리된 느낌이 드는 골목길. 자전거 한대 있으면 좀 더 즐거울 것 같은데.

마츠에 시내에는 자전거 대여해주는 곳이 몇군데 있어서 못 탈것도 아니지만

카메라 장비가 꽤나 부피를 많이 차지하고, 계속 비가 내리다 말다가 해서 그냥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무채색이 많은 일본의 주택가에서, 비 내린 후의 상큼함을 책임지는 녀석들이란 역시 물방울 머금은 식물들이구나 싶다.

사람은 비맞으면 굉장히 애처로워 보이는데 이 녀석들은 어째 더욱 발랄해 보이니.

 

 

 

이제 마츠에 성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왔다. 멀리 왔다기 보다는 언덕 너머에 가려서 안보이는 것 뿐이지만.

마츠에 성을 둘러싼 해자 역할을 하는 호리카와(堀川) 강은,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물길을 만들기가 용이해서

다른 곳보다 훨씬 넓고 길게 만들어져 있다. 사이사이로 빠지는 지류도 굉장히 많고.

 

지리적 특성에 대해서는 훗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테니 넘어가고, 이 둥글넓적한 호리카와 강을 느긋하게 한 바퀴 도는

호리카와 유람선이 이곳에서는 꽤나 유명하다. 다른 도시처럼 잠깐 즐기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50분 가까이 쪽배를 타고 뱃사공이 구수한 입담으로 여러가지 설명도 해 주고, 노래도 한 곡조 뽑아주는 이곳의 명물.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높이가 매우 낮아서, 뱃사공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할 정도.

겨울에는 유람선 안에 난방기구까지 설치되어서, 내리는 눈과 함께 유유히 흘러가는 느낌이 또 각별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15시간이나 페리를 타고, 땅 위에서도 멀미의 여파로 머리가 터져나가는 기분이라서

아무리 명물 유람선이라도 배라는 탈것에 더 이상 타고싶은 기분이 쥐박이 양심만큼도 들지 않는다.

긴 시간만큼 요금도 꽤 비싼 편이지만, 외국인에게 할인이 되기 때문에 놓치기 아까운 녀석이긴 하지만

아무리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배를 한번 더 탄다는 건 생리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으니.

 

그냥 유람선 모습이나 몇장 찍는걸로 만족하기로 하고, 눈 앞으로 다가온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쪽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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