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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12.11  2월 17일 홋카이도 - Skyfall 6
  2. 2014.11.21  2월 16일 오비히로 - 대폭설 6
  3. 2014.07.10  2월 9일 삿포로 - 스스키노 눈축제 4
  4. 2014.07.07  2월 9일 삿포로 - 오오도리 눈축제 9
  5. 2014.07.06  2월 9일 삿포로 - 시계탑 주변 8
  6. 2014.07.02  2월 9일 홋카이도 - 신 치토세 공항의 미쿠 4

 

조식을 든든히 챙겨먹고 삿포로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걸어간다.

삿포로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리지만 갈아타지 않아도 되니 걱정할 일은 없다.

 

단지 눈이 그쳤다고는 하지만 어제보다 훨씬 매서운 바람이 강렬하게 몰아치고 있어서, 홋카이도 여행 중 처음으로 뼛속까지 추위를 느낄 수 있다

하늘의 눈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나는 눈은 훨씬 매서운 법.

산더미처럼 쌓인 눈이 칼바람 때문에 온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어서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한번 땅으로 내려왔다 다시 흐트러지는 눈은 어찌나 매서운지.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지만 바람 탓에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넘나들고 있다.

포근하게 보였던 눈이 칼바람에 굳어버린 것인지 지금 피부를 때리는 눈송이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섭다.

 

 

 

레일 너머가 신기루처럼 흐려지는 풍경은 조금 뒤에 이쪽으로 몰아칠 눈보라를 더욱 두렵게 만든다.

이게 극지방에서 강화된다면 소위 말하는 블리자드가 되리라 생각.

 

도저히 이래서는 못버티겠다 싶어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내방송이 나온다.

다른 지역의 폭설 때문에 기차가 25분 정도 연착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첫 연착.

평소라면 그냥 기다리면 되지만 개방된 공간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라 조금 귀찮아 진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올라오는 앞에서 오밀조밀 모여있다. 다들 밖에서 기다릴 수가 없으니까.

밀도가 너무 높아서 그냥 1층으로 내려가 개찰구를 나와버린다.

어차피 홋카이도 레일 패스는 따로 티켓을 기계에 집어넣거나 하지 않고 역무원에게 제시만 하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까.

 

역내 매점에서 따뜻한 옥수수 스프 한 캔을 사들고 손을 녹이며 주변을 서성인다.

25분이란 시간이 참 애매해서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으니 꽤나 지겹다.

 

역에서는 거의 2~3분에 한 번씩 연착 소식을 방송하고 있다. 전광판에도 당연히 연착 정보를 표시해 놓았다.

10분쯤 뒤에 도착하는 열차는 내가 예약한 차가 아니라 그 전 시간에 도착하는 열차이기 때문에

자칫하다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4시간을 서서 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런 점은 주의를 요한다.

워낙 쉴세없이 연착 소식을 방송중이라 어지간하면 헷갈리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외국인이라면 좀 난감한 상황일지도.

 

다행히도 25분 뒤에 온 열차는 따뜻해서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터라 창가 자리에 앉아 경치를 감상한다.

 

 

 

지루해지기 쉬운 기차 여행이지만 홋카이도만큼은 그럴 틈이 없다.

원채 조용한 객실 안이지만 참다 참다 결국 카메라를 꺼내든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장면이 수도 없이 펼쳐진다.

 

조심해서 셔터를 누르고 이제 괜찮겠지 싶으면 금새 더욱 황홀한 광경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아예 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이런 이동중 사진은 항상 보던 것보다 조금 아쉬운 장면만을 간신히 담을 수 있다.

그렇다고 4시간 넘게 계속 창밖을 뚫어져라 주시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마음을 비우고 중간중간 무덤덤하게 셔터를 누르기로 한다.

 

 

 

홋카이도의 날씨는 수직적이기도 한 동시에 수평적이기도 하다.

한 곳에 머무를 때도 쨍한 하늘에서 폭설로 휙휙 바뀌기도 하고

기차로 빠르게 이동중일 때 역시 푸르던 하늘 아래를 넘어가면 갑자기 시야를 막아버리는 눈보라가 떡하니 나타나기도 한다.

 

울창했던 푸른 생명력들의 역동성이 전부 바람과 눈으로 스며들어 간 건지, 살아있는 건 나무와 풀숲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보라 속을 부담없이 찍을 수 있게 해 주는 열차의 든든함이 고맙기도 하지만 역시 속도가 속도이다 보니 감도를 좀 높여야 한다.

아예 감도를 낮추고 자연스러운 패닝샷 기분을 내는 것도 괜찮지만 창가에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의 감정을 좀 더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기분.

 

 

 

대도시는 그렇다 치고 중간중간 위치하는 작은 마을은 어떻게 겨울을 넘기는지 궁금하다.

홋카이도 자동차들은 기본적으로 출고시부터 스노우 타이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고

얼음보다는 눈이 많은 곳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잘만 달린다. 본인처럼 눈이 적은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은 조마조마한 기분.

 

여름의 초목이 지겨워 질 때쯤이면 이렇게 세상을 뒤덮어버리는 눈밭이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니 역시 기후변화가 다양한 지역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푸르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진행 방향의 심상치 않은 하늘 쪽은 열차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기다리고 있다.

지면의 모양이나 색깔마저도 단조롭게 변해버리는 겨울이지만 하늘만큼은 변화무쌍해서 부족한 역동성을 채워준다.

 

눈을 잠깐 감고 졸다가 깨어나 보면 대체 여기가 무슨 세상인지 모를 정도로 변해버리는 점이 매우 인상적.

눈길 자동차 운전에 어느 정도 숙련이 된다면 그냥 드라이브만 해도 인상적인 장면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서부터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르기만을 반복하던 무아지경의 시간이라

글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과 함께 하니 예술 전시회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난 뒤 갑자기 평온해 보이는 거대한 설원과 그 위를 거니는 젖소들이 나타난다.

땅이 넓으니 목장도 여유가 느껴지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방목장인지 모르겠다.

 

여름에 이런 곳을 지나갈 때는 확실히 울타리가 보였지만 지금은 거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울타리 너머에서 자전거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소들이 호기심 초롱초롱한 눈으로 앞까지 다가오기도 했다.

 

거친 눈보라를 뚫고 나자 온화한 풍경이 펼쳐지는 순간은 마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을 연상케 한다.

정말로 도착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서, 여행의 끝을 조용히 축하해 주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오랜만에 삿포로로 돌아오니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분주한 도시 풍경은 이제껏 즐겼던 차분함과 거리가 있지만 조금씩 현실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는 반가움도 없지 않다.

 

삿포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뜨겁게 달궜던 눈축제장의 스키 점프대는 빠르게도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축제란 건 준비하는 기간이나 열리는 도중이나 열기가 넘치지만 이렇게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숙연해지는 강도도 그만큼 크다.

부자가 아니라 매년 겨울 이곳을 찾아오는 사치를 누릴수는 없으니 이제 내려놓을 감정은 내려놓고 돌아가라는 느낌이 든다.

 

 

 

숙소에 짐을 맡겨놓고 삿포로에서 해야 할 몇 안남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저녁에 맥주 공원에서 징기스칸을 즐기는 것은 제외하고라도 겨울 삿포로의 별미인 수프 카레를 먹지 않고 떠나기는 아쉽다.

 

오비히로뿐 아니라 오늘은 홋카이도 전역의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는지 쓰러진 자전거가 한층 더 무섭게 느껴진다.

대체 쓰러진 자전거가 저만큼 파묻힐 정도라면 눈이 얼마나 왔다는 것인지. 마치 물 속에 잠긴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이곳의 기후에 대해 감탄하게 만든다.

 

 

 

축제가 성대하게 열린 만큼 해체 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다. 아마 준비 기간과 마무리 기간을 합치면 축제 기간의 몇 배는 되지 않을까.

원래 축제란 그런 것이지만 이런 아련한 모습 또한 다음 축제를 위한 안식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삿포로는 여전히 흐렸다가 맑았다가 눈이 쏟아지는 정신없는 날씨를 자랑하고 있다.

내일 귀국이니 이제는 억눌러 놓았던 구매 욕구를 풀어재끼는 일만 남았다.

서점을 돌아보며 읽을 만한 책을 10만원 어치 정도 쓸어담는다. 가능하면 한국에 발매될 일이 적을 듯해 보이는 책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나름 긴 여행이다 보니 자금을 좀 넉넉하게 가지고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남은 자금을 전부 써버리기엔 아까워서 꼼꼼하게 검토를 하며 구매한다.

이 정도면 내일 공항에서 선물 몇 개 사들고 가도 2만엔 이상 남아있을 테니, 다음 여행의 자금 보충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하다.

 

 

 

오비히로에 맞먹는 추위를 뚫고 이리저리 해맨 끝에 건물 지하 구석에 아담하게 숨어있는 수프 카레점을 찾아낸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게에다 카운터 석에 앉아도 부담없어 보이는 친근한 아가씨가 맞이해 줘서 긴장이 풀린다.

 

수프 카레는 홋카이도에서 탄생한 변종으로, 워낙 추운 홋카이도의 겨울을 좀 더 후끈하게 즐기기 위해 고안된 카레.

점성이 없는 찌개같은 카레로 처음 볼 때는 위화감이 들 수도 있지만 짜릿한 카레의 자극은 더욱 강렬해서 매력적인 녀석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오히려 찌개 먹는 느낌으로 밥과 함께 먹으면 매우 훌륭한 궁합을 자랑한다.

얼어버린 콧속에 확 퍼지는 뜨끈뜨끈한 카레 수프의 얼큰함은 묘하게 한국 정서와 어울린다. 겨울의 홋카이도라면 꼭 먹어볼 만한 녀석.

 

지역 별미라 가격이 좀 세긴 해도 불만없이 즐길만한 음식이다. 맛은 기본적으로 보장이 되니 부담도 없고.

식사와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생각보다 졸리고 피곤하다. 어제까지의 강행군도 그렇고 장시간 기차 여행도 쉴 틈이 없었으니까.

90분 정도 쉴 시간이 있는데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니 슬금슬금 고개가 밑으로 내려간다.

날씨가 춥다 보니 들어왔다 나가는게 한층 번거롭지만 홋카이도의 마지막 밤에 징기스칸을 먹지 않는다는 건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해가 지고 한층 추워진 공기를 마시며 눈덮힌 길을 조심조심 걸어 삿포로 역으로 향한다.

역에서 맥주공원까지 저렴하게 왕복중인 버스가 있어서 찾아가기도 편하다.

오비히로만큼이나 눈이 쏟아지고 있어서 여행 막바지의 아쉬움과 애상이 배가 되는 느낌이지만 고기와 맥주로 즐거운 마무리를 하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보통 알람을 설정해 놓고 자긴 하는데, 소리를 듣고 눈을 떠도 자기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새벽녘이 다가오기 전의 어슴프레함 때문에

혹시 시간을 잘못 설정해 놓고 잔 건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상하다 싶어 커튼을 걷어보니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아침해는 밝았지만 무식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같은 눈발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다.

자동차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밖은 더욱 조용하다. 도심지에 위치한 비지니스 호텔에서 아침이 이렇게 조용한 것도 참 신선한 경험이다.

 

조식 먹으러 가기도 전에 카메라부터 주섬주섬 꺼내들어 촛점이 맞지 않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셔터를 누른다.

이번 여행은 적어도 날씨라는 면에 있어서는 완전히 로또를 맞은 것이나 다름 없다. 아침이라 환호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지 않지만 입가엔 미소가 흐른다.

 

 

 

오늘의 목적지는 눈이 많이 내리면 내릴수록 좋기 때문에, 더 할 나위 없는 최상의 조건이다.

삿포로에서도, 아사히카와에서도, 시레토코에서도 눈은 많이 내렸지만 오늘 내리는 눈은 비교를 불허한다.

일반적인 관광이었다면 오늘 과연 이동할 수 있을까 하고 가슴이 철렁했을 법도 하다.

 

눈이 이만큼 많이 온다면 오히려 얼어붙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들은 별 무리없이 운전이 가능하다.

문제는 바퀴를 덮을 정도로 눈이 쌓이게 되면 역시 사고 위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단체 여행객으로서는 치명적일지도.

 

 

 

이곳 토카치 지역은 원래 눈 많이 오고 춥기로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은 별 신경 안쓰고 돌아다닌다.

이쪽에서는 눈 때문에 학교나 회사가 쉬는 경우도 있을까 궁금하다.

원 서식지인 대구에서 이만큼 눈이 왔다고 하면 도시 전체가 눈 속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데.

 

 

 

평소 자신보다 위에 서 있는 것들을 더 높은 곳에서 망원으로 당겨 보는것은 묘한 신선함이 있다.

이게 부적절한 호기심과 욕망으로 연결되면 범죄가 되겠지만, 어쨌든 평소와는 다른 시야를 즐긴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눈은 많이 와도 바람은 심하지 않은 듯, 가로등 위에 덮인 눈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높게 쌓여 있다.

경사면에서 녹아내린 물이 다시 얼어버려서 고드름을 만들어 낸 모습이, 토카치 지역의 살아있는 기후 소개를 담당하는 듯 하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싶더니 제설차 두 대가 열심히 눈을 한쪽으로 치워내고 있다.

이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라 제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더 쌓이다가는 자동차가 전진을 못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을 듯.

 

치워내는 눈의 양은 상당하지만 온 사방이 눈으로 뒤덮힌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제설차는 한없이 작고 연약해 보인다.

처음엔 바램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했지만 심상치 않게 눈이 내리니 오늘 목적지가 영업을 하는지 오히려 걱정까지 되기 시작한다.

 

목적지는 다름아닌 경마장인데, 원래 겨울 스포츠이긴 해도 눈이 이렇게 오면 과연 괜찮을까 싶다.

 

 

 

고민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 조식을 먹은 후 역으로 출발한다.

 

걸어서 10분 거리지만 이동이 힘들어 시레토코에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도 든다. 주위 풍경은 전혀 다르지만.

가끔 바람이 불기만 해도 건물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마법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카메라를 꺼내기는 좀 불안한 상황이지만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기도 힘들어 조심조심 셔터를 누른다.

방진방적 정도는 지원하기 때문에 물이 스며들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렌즈 앞에 물기가 묻으면 닦아내기 귀찮아서.

 

 

 

도시 기능이 거의 마비되는게 아닐까 싶은 폭설인데, 도로에는 버스나 택시 등이 간간히 보이지만 승용차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 홋카이도는 그것대로 워낙 매력적이라서 지난 자전거 여행 도중 겨울의 풍경이 궁금한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 와 보니 역시 이곳의 겨울은 여름 못지않은 자연의 힘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준다.

 

생물이 살 것 같지 않은 이런 혹독한 겨울을 넘기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강렬히 충만된 여름의 생명력이 빛을 발하는 것일 듯.

 

 

 

일단 카메라를 들고 나니 이곳저곳 시야가 넓어진다. 습관 탓인가.

일찍 나섰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본다.

출근길 시민들에겐 참 괴롭겠지만 쌓인 눈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과 순백색 배경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도시를 치장한다.

 

대도시였다면 아무리 눈이 많이 쌓여도 먹고살기 위한 인간의 대규모 이동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어서

도로와 도보는 온통 흙탕물로 얼룩질 수밖에 없겠지만, 이곳은 겉으로 보이는 도시 규모에 비해 한적한 편이다.

자전거 방치 금지구역 팻말이 평소보다 따뜻해 보이는 것도 그런 기분 탓일까.

 

 

 

한국에서도 번안되어 인기를 끌었던 '눈의 꽃'이라는 노래가 어울리는 풍경.

이런 조경수들은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풍성한 잎들을 노리고 조성된 경우가 많은데

겨울에만 피는 이런 꽃은 확실히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과하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오늘 비가 이만큼 오는데 경마장이 열렸으려나 물어본다.

가볍게 물어본 것 뿐인데 아가씨는 직접 경마장에 전화까지 해서 개장 여부를 알아본 후 문제없다는 답변을 건네준다.

 

더불어 정보 부족인 나에게 여기서 경마장까지 가는 왕복 버스티켓과 경마장 입장료를 한꺼번에 사면 경마장 입장료 할인과 함께

당일 사용이 가능한 토카치무라 200엔 할인권까지 끼워준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토카치무라는 경마장 앞에 있는 조그만 문화센터 같은 곳.

따로따로 구매하는 경우에 비해 500엔 정도 할인이 되기 때문에 왕복 버스표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없는 이득이다.

더더구나 나 같은 손님들을 위해 귀여운 말 캐리커처까지 프린트 된 왕복 버스 시간표까지 챙겨줘서, 출발 전에 만족감을 듬뿍 선사해 준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버스 시간표마저도 여행 후의 추억으로 보관할 가치가 충분하도록 만드는 소소한 배려가 여행 산업의 진짜 핵심이 아닐까.

 

 

 

10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오기 때문에 굳이 안내소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필요를 못느끼고 눈발을 감상하러 밖으로 나간다.

 

맞은편 벤치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라 카메라에 담아 본다.

이미 벤치로서의 기능은 상실한지 오래지만 이미 그 자체로 예술 작품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가치가 충분하다.

대구에 살면서 평생 보아온 눈보다 더 많은 눈을 홋카이도에서의 10일동안 본 탓에, 이국의 정취를 찾아다니는 여행으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사실 역에서 경마장까지는 날만 좋다면 30분 정도만 걸어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

평균 시속 20km 정도로 마실 나가듯이 천천히 도로를 거니는 버스 안에서 보는 풍경도 각별하다.

눈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힘들어 정류소 이름을 외치는 안내기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마장 정류소쪽에 내리긴 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시레토코처럼 천혜의 자연속이라면 오히려 주변 풍경만으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지만

모든 곳이 비슷비슷한 도시 속에서는 폭설이 그나마 남아있던 분석 가능한 지형들을 전부 가려버리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의 혼란을 야기한다.

 

하는 수 없이 같이 내린 노인 일행에게 경마장이 어디인지 물어봤는데 어이없게도 도로 바로 건너편에 경마장 입구를 가리킨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니 이런 실수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고개를 돌려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눈이 일으킨 방해공작이라 변명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경마장 들어가기 전에도 놀라운 풍경은 여기저기서 나를 반기고 있어서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고 있다.

 

상록수인 소나무마저도 끝없이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혀 색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은 처절하기보다는 아름답다.

 

 

 

오비히로는 도시 전체가 평야이긴 하지만

혹여 저 눈안개 앞에 라우스산이 버티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평야와 다를 바 없을 듯 하다.

 

이쪽 사람들에겐 매년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나에게는 이 모습만으로도 오비히로까지 온 보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좋아하는 풍경에 너무 몰입해서 경마장의 재미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마저 느끼며 무릎까지 푹푹 꺼지는 눈 속을 걷기 시작한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 해도 강압적이라 해도 될 만큼 주위의 풍경이 자신을 담아달라는 듯 미려함을 뽐내는 탓에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춰 셔터에 손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게 형성된 흑과 백의 차분한 대비는

그림같은 풍경을 찾아 몇 시간이고 이동하고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사진가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물론 본인이 그런 사진가들하고 비교할 만큼 건방진 편은 아니고.

 

 

콘크리트 도심 속에서도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빛이 바래지 않지만

경마장 관계자와 마을 사람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열성적인 태도 역시 그에 밀리지 않을 만큼 볼만한 것이다.

 

자전거 보관소의 지지대가 눈썹까지 예쁘장하게 그려놓은 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한탕 벌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아저씨들의 집합소라는 선입견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경마장에 대한 이미지가 한층 부드러워진다.

물론 경마도 도박의 일종이라 마음이 흐려진 사람들이 없잖아 있겠지만

이곳 오비히로의 경마장은 사실상 주민들이 자랑하는 문화 공간으로 형성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해도 될 듯 하다.

 

 

 

경마장 앞에 세워진 동상은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혼신의 레이스 후 몸에서 쏟아지는 땀처럼 보여서 굉장히 인상적이다.

 

금방이라도 저 말의 콧가에서 거칠고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올 듯한 느낌.

경마에 빠삭한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자세히 보면 이 말의 동상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경마용 말은 덩치만 큰 유리 세공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모든 부위가 속도만을 내기 위해 매우 세심하고 가냘픈 편인데

이 녀석은 사람 허벅지만큼 굵고 튼튼한 하체를 가지고 있어서 경마용 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곳 경마장을 찾을 이유이기도 한데, 오비히로의 경마는 반에이(ばんえい)경마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눈이 많고 험난한 지형상 소를 경작지 개척에 이용하기 힘들었던 이곳은 소 대신 말을 이용해 돌을 부수고 땅을 골라 논밭을 만들어 왔다.

그러기에 이 곳의 말은 속도를 중시하는 말과는 달리 수백 kg에 달하는 짐을 끌 수 있는 육중한 덩치가 필요했던 것.

반에이 경마는 그 농경마들의 힘자랑을 위해 만들어 진 독특한 이력때문에 일반적인 경마와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다.

 

 

 

경마 시작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이곳은 경마장 외에도 산지 직송의 신선한 농산물을 파는 슈퍼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오비히로와 반에이 농경마들의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 등 즐길거리가 충분하기 때문에 일찍 와도 부담이 없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바닥이 깔끔하게 보일 정도로 눈을 치워낸 모습인데, 옆에서는 직원들이 열심히 눈을 퍼담고 있다.

옷을 두툼하게 입긴 했지만 가녀린 여직원이 거대한 제설장비를 들고 눈을 이리저리 치워내는 모습이 인상적.

 

 

 

푸드코트쪽에 오비히로 경마장 한정이라고 선전하는 우유 라멘이 매우 신경쓰였지만

아직 조식의 여력이 남아있기 때문에 저 쪽은 경마 시작전 마지막으로 들르기로 결심한다.

땀을 흘리던 동상과는 달리 토카치무라 앞에 전시된 붉은 말조각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농경마들의 역사를 간직한 듯한 느낌을 준다.

 

노리고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토카치무라는 건물이 전부 붉은색으로 되어 있어 이렇게 눈내리는 날에는 굉장한 임팩트를 느낄 수 있다.

 

 

 

자료관 쪽에는 커다란 애니메이션 광고판이 놓여 있는데 이곳 출신 만화가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작품인 '은수저 Sliver Spoon'이다.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로 큰 인기를 모은 작가로

재미삼아 시작했던 고향 오비히로의 농촌 이야기가 워낙 도시 독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는 바람에 그걸 토대로 장기 연재를 시작한 특이한 작품이다.

 

미국같은 농업 대국에서야 그게 별건가 싶겠지만 한국이나 일본처럼 고도화 된 국가 사람들에게

홋카이도의 농업 형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신기한 것들 뿐이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작품 속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이 반에이 경마가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로서는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고향 출신 만화가가 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니 본인들도 굉장히 뿌듯할 듯.

본인은 이 작품이 연재되기 전에 이곳을 다녀왔기 때문에 크게 연관성은 없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홋카이도의 생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이라도, 이곳 홋카이도는 그 기대감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만큼 신기한 곳이 되리라 확신한다.

 

스스키노쪽의 얼음 조형물들은 대부분 업체들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규모의 눈축제를 여는데 지역 상권의 협력이 없이는 예산 편성하기가 쉽지 않을테니.

 

대구에 사는 본인으로서는 대구의 유명한 지역업체가 무엇인지 기억나는게 거의 없다시피 한데

PR도 이런 임팩트를 가질 수 있도록 머리쓰는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것도 없을 듯.

 

 

 

스스키노 눈축제 쪽은 사진 찍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오오도리 공원이 워낙 넓고 커서 비교되는 점도 있지만

원래 유흥가 골목이기 때문에 주변의 화려한 간판과 네온사인이 얼음 조각상의 감상을 방해하는 면이 있다.

거기다 조각상 라인이 두 줄로 붙어서 설치되어 있어서 잘못 찍으면 뒤쪽 조각상과 겹쳐서 형태를 파악하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덧붙여서 오오도리 공원의 라이트가 꺼지는 바람에 관광객이 전부 이쪽으로 몰려든 이유도 있고.

 

 

 

오랜만의 홀로 여행이고, 카메라를 자주 만지지 않은 상태라 첫 날 야간의 얼음 조각상 촬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능한 한 조각상만의 디테일을 담고 싶지만, 조각상 덩치는 크고 사람은 많고 길은 좁아서 뒤로 물러날 수도 없다.

 

촬영하면서도 훗날 집에 돌아가면 결과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물은 보정이라는 양념을 좀 더 팍팍 치는 수 밖에 없다.

얻는 만큼 잃는 것도 있는 보정이라서 6개월만에 보는 결과물은 역시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조형물의 미적 완성도는, 낮다고 할 수준은 결코 아니더라도 시끌벅적한 축제에 노출된 야외다 보니 엄청난 디테일은 아니다.

그래도 여러 가게와 회사들이 손발걷고 참여한 눈축제라서 자존심 같은 게 걸려있다는 느낌일까.

조형물의 완성도로 승부를 보려는 곳도 있고, 신선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곳도 있다.

 

홋카이도 하면 불곰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곳이니 이런 곰 조형물이 자주 눈에 띄는것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이 녀석은 아기곰과 엄마곰이 마주보는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이 정도 크기와 디테일한 작품을 만들려면 역시 제작자의 규모도 커져야 하는 법인가 보다.

전시회에 사용된 얼음 조각상은 대부분 얼음 블록을 여러 개 붙여서 만들었는데

기본적으로 순도가 꽤 높은 얼음이라서, 투명한 부분과 불투명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나타내기에 수월하다.

 

 

 

홋카이도 서식종은 아니지만 겨울 눈축제다 보니 등장한 듯한 눈표범 조각은 꽤나 생동감있게 만들어졌다.

무늬가 하트모양인 것은 그냥 관광객에 대한 애교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매번 느끼는 점이지만, 저렇게 경계선이 생길 수밖에 없는 블록 얼음으로 만들기보다

통짜 얼음으로 조각했다면 크리스탈처럼 청명한 작품이 만들어 졌을텐데 싶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순도를 가지는 얼음덩어리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하고

의외로 통짜 얼음보다 이런 블록 형식으로 만든 조각상의 강도가 더 강하다는 점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자꾸 뒷편의 맥주 선전 여배우 얼굴이 신경을 자극하지만 비네팅 팍팍 넣고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정해 본다.

회사들이 제공한 조각상들이다 보니 어쨌든간에 자사 홍보는 빠뜨리지 않고 넣어놨다.

여의주 속에 뭔가가 들어있는데, 속에 내용물이 있다면 바싹 얼어있을 것 같다.

 

얼음속에 저런 게 들어있으면 왠지 꺼내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그런 시도를 하지는 않은 듯 하다.

 

 

 

일본 TV를 시청중이면 지겹도록 볼 수 있는 삿포로 맥주 '보리와 홉'이 먹음직스럽게 얼음 속에 박혀있다.

조각상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아보이지만 임팩트를 주는덴 그럭저럭 성공한 듯 싶다.

 

저 맥주는 다른 것보다도 지역에 맞춰 CM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 특징.

해안가 지방에는 방금 잡아올린 생선을 구워먹으며 맥주를 마신다던가

홋카이도에서는 소울 푸드라 불리는 징기스칸이나 소시지 등을 구워먹으며 맥주를 마신다던가.

어쨌든 맥주는 들어가지만 CM 의 방향은 꽤나 재미있게 잡아서, 보고 있으면 문득 한 잔 마시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끌릴 수 밖에 없는 건, 저 조각상의 디테일보다 싱싱하게 박혀있는 생선들 때문일 듯.

나름 컨셉은 잘 잡은 듯 하다. 용궁을 표현하는데 이거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을 테니까.

생선이 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만 싱싱할 때 넣었다면 축제 끝나고 나서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스스키노는 삿포로 최대의 번화가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아직 여기서 놀아본 적이 없다.

혼자서 먹고 마시고 하는데 이골이 난 몸인데도 불구하고, 여긴 너무 화려하고 직설적인 유흥가라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들어가는데 저항이 생긴다.

 

주위에 술 좋아하는 친구도 별로 없고, 진짜 징하게 마시고 놀 만한 친구는 같이 여행가기 힘든 경우가 많고.

스스키노의 밤거리는 그대로 사진에 담기만 해도 밤에 살아 숨쉬는 대도시의 분위기를 만끽하는데 부족함은 없지만

일반적인 외국인 관광객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질펀하게 놀 수 있는 곳이 스스키노란 곳이라, 왠지 자주 오지 않는 곳이다.

 

 

 

삿포로 눈축제니까 꼭 홋카이도에 관련된 조각상만 나오란 법은 없어도

말을 타고 창을 들고있는 이 조각상은 대체 어떤 연유로 해서 이곳에 서게 된 건지 의아해진다.

 

제목과 설명이 적혀는 있었지만 상당한 수의 관광객들이 해류처럼 이동중이라 제대로 쳐다 볼 시간이 없다.

일본인 관광객 절반에 중국인이 다수인 외국 관광객 절반이 시끌벅적하게 사진 찍으며 거리를 채우고 있다.

대다수가 컴팩트 카메라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지만, 꽤나 육중한 DSLR 과 렌즈를 짊어진 사람들도 보인다.

 

유명 관광지에 오면 그나마 마음 편한 점이, 아무리 큰 카메라 들고 설쳐도 딱히 경계하거나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지만, 이곳 스스키노 축제장은 야간 조명시간부터 근처 가게들이 불을 좀 꺼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각상 앞에 개별 조명이 있긴 해도 주위 가게들의 불빛이 워낙 강해서 피사체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스트로보가 있으면 이럴 때 요긴하게 쓰이겠지만 사실 사람이 많아서 마음껏 터트리기도 미안하다.

 

하프를 켜며 내려오는 여신의 모습이 꽤나 인상깊었지만 도무지 만족할만한 구도와 광원이 나오질 않는다.

주위 불빛이 전부 꺼진 상태에서의 모습은 상당히 몽환적일 듯 한데.

 

 

 

한국처럼 취하기 위해서 마시지 않는다 뿐이지, 일본도 술 잘마시기로는 유명하다.

지역주가 꽤나 발달해 있어서 술의 종류는 상당히 다양한 편인데, 축제에 참가하는 회사들이다 보니 역시 술 관련 회사가 많다.

 

하이볼은 오리지날 신봉자들에겐 이단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가볍게 마시기 좋아서 요즘 트렌트에 알맞는 녀석.

술에 관심이 있다면 이런 것들 조금씩이라도 맛을 보며 여행을 음미하겠는데, 별로 당기질 않는다.

 

 

 

표절인지 오마쥬인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녀석. 그런데 콜라병의 디테일에 신경쓰느라 곰의 디테일이 영 좋지 않다.

스스키노의 조각상들은 뭔가 미적인 완성도를 뽐낸다기 보다는 아이들 학예회에 들뜬 기분으로 출품하는 그런 기분인 듯 하다.

그 점이 오히려 축제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릴수도 있으니.

 

 

 

넓게 찍어도 주위가 산만해서 알아보기 힘들고, 잘라서 찍어도 영 난잡해 보이는 사진 덕분에

찍어놓고 숙소에 돌아와서 확인할 때도 이게 뭔가 아리송했던 작품.

 

물고기를 잡아채는 독수리 상인데, 디테일은 상당하지만 한 장에 담아내기가 매우 힘든 위치여서 아쉬웠다.

 

 

 

아이디어의 승리라고 해야 할까. 간단하지만 뭘 나타내는지는 금세 알 수 있다.

그러고보니 큰 조각상에서부터 아담하고 간결한 녀석들까지, 이 곳에 출품하는 얼음들은 별다른 제한이 없나 보다.

 

 

 

가만히 얼음조각들만 쳐다보며 걷고 있는 것도 축제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지

중반쯤 걸어가자 아이들이나 연인들끼리 사진찍기 좋은 체험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실제로 아이들이 자리에서 떠난 틈을 찾아서 찍기 위해 잠시 기다렸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눈과 얼음만큼은 남아도는 이곳이니 좋은 추억거리 남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날씨가 날씨라서 녹아버릴 염려도 없고.

 

 

 

굉장히 단순하고 투박한 조각상이지만 이런 미숙함이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얼음이든 눈이든 기본적으로 추운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보니 겨울 홋카이도는 매력덩어리다.

물론 여름의 홋카이도 역시 일본답지 않은 거대한 생명력을 자랑하다 보니 놓칠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남들 생각은 거의 안하는 개인주의 충만한 성격이지만, 이 사진 찍으면서 관광객들이 즐거워하기를 잠깐이나마 바래 본다.

 

 

 

녹아버리면 아까울 듯한 퀄리티의 작품도 간간히 눈에 띈다.

동양식 인어의 유려한 모습은 조금씩 심해지는 눈발과 맞물려 물 속에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스스키노 조형물중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 표현력에서부터 후리소데의 질감을 살리려고 넣어좋은 촘촘한 구멍까지.

일주일의 축제기간 동안에만 빛을 발하고 사라지는 작품들이라 그런지 사진으로 담을 가치가 있는 기분이다.

 

 

 

청새치의 과장된 지느러미도 역동감을 살리는데 그만이다.

얼음의 특징 때문인지 굉장히 싱싱해 보인다. 청새치 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지만.

 

 

 

조촐하지만 달달한 기념사진 찍기 좋은 일루미네이션 로드도 마련해 놓았다.

밤이 길고 차가운 홋카이도 여행이라 나 같은 홀로 여행자가 즐기기에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은 듯.

 

 

 

유리 공방 체험처럼 얼음 조각 만들기 체험같은거 있으면 어떨까 생각도 해 봤는데

아무래도 가공 기구들이 일반인들에게는 좀 위험한 것들이 많을 것 같아서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세밀한 곳이 많거나 세로로 길쭉한 조각상의 경우 무너지거나 부분부분 떨어져 나가는 거 아닐까 걱정도 했지만

강설량 빠방하고 영상으로 올라가는 일이 별로 없는 삿포로의 겨울 특성상 별 문제가 없는 듯 하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 두 번째.

 

이렇게 조형하려면 대체 몇 개의 블록을 사용해서 얼마나 세밀하게 깎아내야 할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 축제 후 부서지거나 녹아내리는 모습을 볼 때의 제작자 마음은 과연 어떨런지.

 

 

 

심각한 상황이지만 왠지 연어 얼굴이 웃겨서 긴장감이 돌지 않는 유쾌한 작품.

 

 

 

의도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부에서 숨구멍같은 기포가 사방으로 뻗어나온 모습이 신기하다.

블록을 결합한 부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만들었을지 더욱 궁금한 방식.

 

 

 

사슴이 좀 위엄있어 보이는데, 실제로 에조시카(エゾシカ)라 불리는 홋카이도 사슴은 진짜 크고 카리스마 있다.

일본 본토 사슴의 2배 가까운 140kg 정도의 수컷은 오토바이 라이더들에게 불곰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

불곰은 좀처럼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지만 이 녀석들은 도로가에서도 태연히 놀고 있다가 오토바이가 달려오면 놀라서 뛰어가는데

그럴 경우 접촉사고라도 나면 그 거대한 덩치 덕에 라이더들도 큰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

 

 

 

 

2010년 여름 시레토코에서 땀 뻘뻘 흘리며 자전거로 고개를 넘어갈 때에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풀을 뜯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

자전거에서 내려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전혀 도망갈 생각을 않는다. 실제로 저 녀석들이 덤비면 내가 더 위험하니까.

자전거야 속도가 느려서 쌍방 충분히 피할 수 있지만 라이더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진짜 노골적인 홍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사진찍는 사람이 많았던 장소. 그야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지만.

그것도 싸구려 조그마한 녀석들 넣은 게 아니고 기회만 있으면 뜯고 싶은 녀석들을 얼음속에 처박아 놨으니 당연하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가끔 한국어와 일본어로 '아깝게스리~' 라는 발언이 바람을 타고 귓가에 들리기도 했다.

중국어는 알아들을수가 없어서 무슨 말 한 건지 모를 뿐, 아마도 비슷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스시잠마이의 조각상은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고 모든 힘을 날생선 얼음속에 집어넣기에 투자한 기분인데

그래도 돌고래끼리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 부분은 묘하게 정감가는 느낌이다.

 

 

 

술도 아닌 그냥 생수 회사에서도 질 수 없다는 듯 공을 들여서 조각상을 전시해 놓았다.

안에는 정말로 액채가 들어있는 듯 한데, 얼어서 부피가 커지더라도 저 얼음덩어리를 깨부술 만한 힘은 아닌가보다.

 

사진 오른쪽에는 건장한 한국남성이라면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를 그 유명한 회사의 가게가 우연히 잡혔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 세 번째.

 

얼음으로 조각한 용이라는 소제는 많이들 쓰여서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역시 내 키보다 더 큰 얼음이 이렇게 유려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상당한 임펙트가 있다.

 

 

 

조형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지만 캐릭터가 재미있어서 한 장.

내 기억으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인스턴트 라멘중 하나로 유명한 캐릭터다.

사실 중국인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느낌이 드는데, 익살적인 모습이 재밌기도 하지만 중국인들이 봤을 땐 어떨런지.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삿포로라서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성원은 대단한 수준이다.

한사발 들이키면 끝내줄 듯한 삿포로 맥주와 콜라보 한 것은 이곳 축구팀 콘사도레 삿포로(コンサドーレ札幌).

 

홋카이도 주민을 도산코(道産子) 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은 콘사도(こんさど) 와 스페인 단어 올레(ole) 를 결합해 만든 것이 콘사도레라는 이름.

야구팀인 닛폰햄 파이터즈 만큼 성적이 좋지는 않지만 강한 지역공동체 정신으로 묶여있는 삿포로이다 보니

이 팀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은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각별하다. 그래서 콘사도레 팀을 위한 모금함까지 마련되어 있다.

 

 

 

좀 전에 화려하게 비상하던 청새치가 여기서는 어부한테 낚이고 있다.

섬나라다 보니 낚시를 매우 좋아하는 일본인인데, 청새치를 혼자 낚는다면 아마 평생 자부심을 가지고 살지 않을런지.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기도 하는 청새치는 상어 이상으로 강력한 바다의 지배자중 하나로, 1인 낚시로 청새치를 낚는다는 건 엄청난 영광이다.

 

 

 

당시 삿포로에서는 오페라의 유령이 절찬 상영중이었기 때문에, 이 녀석도 등장했다.

펜텀까지 조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인지.

 

일본에서 오페라는 딱 한번 가 본적이 있는데, 관람 수준이나 부대 시설이나 한국의 어떤 공연과도 비교가 안될 정도여서

그 이후 한국에서 갔던 공연에서는 열악한 환경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도쿄 여행가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먹어본다는 그 유명한 스시잠마이(すしざんまい) 초밥집에서 만든 부스다.

가격대 성능비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워낙 유명해서 매니아들에게는 그닥 평가를 받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고.

 

예전에 참치 한 마리를 18억 주고 구입했다고 한국 뉴스에도 나온 그 가게다.

거대 체인이라 괜스레 참치 가격 올린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 가게.

여기서도 그 뚝심을 발휘해서 참치 한 마리를 그냥 박아 넣어놓았다. 세상에 이렇게 아까울 수가.

 

가게 홍보를 위해서는 이만큼 시선을 끄는 방법이 또 없을테니 매우 적절한 선택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면 안된다는 철칙이 아주 어릴 적부터 머리에 박혀있는 본인으로서는 홍보 여부와 관계없이 그냥 저 참치가 아까울 뿐이다.

 

물론 참치는 원래 냉동한 것을 잘 해동시켜 먹는게 일반적이니, 축제 끝나고 그대로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진 찍는다고 몸을 별로 움직이지 않은 체로 셔터를 눌러재꼈더니 돌아올 때 즈음엔 좀 무리했다는 느낌이 든다.

옷을 두툼하게 입은 곳은 전혀 문제없지만 역시 카메라를 잡은 손과 얼굴이 문제다.

 

생전 처음 써보는 비니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 주기 때문에, 비니가 가려주는 귓볼은 무사하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

손가락은 거의 감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장갑 때문에 카메라 조작이 불편해 지는 것보다 이게 낫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스스키노의 화려한 밤거리를 기념삼아 남기고 슬금슬금 숙소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스스키노를 빠져나와 모스버거에서 몸을 녹이며 치즈버거 세트를 맛있게 먹었지만

기온차가 심한 건물 안으로 들어오니 렌즈쪽에 서리가 생겨버려서 사진을 찍을수는 없었다. 렌즈에 눈이 묻는 걸 열심히 커버했는데 서리만큼은 어쩔수가 없다.

 

 

40분 가량 일기를 쓰며 버거를 씹어먹고 나서 상당히 조용해진 삿포로 시내를 걷는다.

스스키노가 최후의 보루일 뿐, 이곳도 늦은 밤이 되면 인적은 상당히 뜸해지는 편이다.

냉정할 정도로 차가워 진 밤거리는 삭막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생전 처음보는 눈의 향연에 흥분한 나에겐 기분 좋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경북 토박이로 이런 눈을 즐길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그저 10일간의 여행동안 조금이라도 더 이런 눈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이러다가 한번 크게 당해서 눈을 똥가루 따위로 인식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특히 삿포로와 그 주변을 돌아보는 3일간의 여정은 그 다음부터 일어날 본격적인 여행의 몸풀기에 지나지 않는다.

부디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때까지 눈에 대한 나의 호의적인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시계탑도 낮과는 달리 훨씬 차분해 진 느낌이라 여유롭게 사진을 담는다.

아마 홀로 여행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늦게까지 도심을 거닐며 산책을 즐기지 않았을까 싶다.

 

내일부터는 홀로 여행중 생애 처음으로 이틀간 합류하는 현지 일행이 있어서 조금 긴장되기도 한다.

둘 다 초면인 사람이라서 상당히 긴장되지만, 삿포로와 오타루를 둘러보는 정도의 가볍고 보편적인 루트라서

맨날 혼자서 관광과는 동떨어진 곳으로 파고드는 버릇만 잘 억제하면 평범한 동행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삿포로에 도착한 지 10시간 쯤 되었지만 여전히 이 풍경은 신선하고 즐겁기만 하다.

그렇게 눈이 왔는데 인도쪽은 말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고, 그 눈이 전부 내 키보다 더 큰 높이로 옆에 치워져 있다는 게 놀랍다.

 

서울의 미끄러운 바닥보다도 훨씬 더 걸어다니기 편한 점 하나만으로도 삿포로의 첫날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호텔 근처의 편의점에서 따끈한 도시락 하나 사들고 숙소로 들어가 TV를 켠다. 히터를 틀지 않으면 조금 춥지만 그래도 아늑하게 견딜만 하다.

 

잠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는 건 일종의 고문이다.

많이 피곤했는지 8시 알람소리에 눈을 떠도 일어나는 건 몸이 아니라 짜증 뿐.

 

신체적으로 본다면 그냥 아침까지 푹 자버리는게 최선의 선택이지만 여행중엔 희생해야 할 쾌락도 있다.

찌부둥한 몸을 이끌고 주섬주섬 옷과 장비를 챙겨서 이미 깜깜해 진 삿포로 시내로 나온다.

눈이 많이 내리면 추위는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하지만 역시 밤이 되면 꽤나 쌀쌀하다.

기온은 영하 6도 정도를 가리키고 있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카메라를 꺼내놓은 상태에서 움직이니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을수가 없다.

 

슬금슬금 걸어서 오오도리 공원에 도착하니 낮에 얼핏 보였던 흰 전시품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다. 역시 밤에 와보길 잘했다.

오오도리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신호등이 작동하고 있지만 축제 기간이다 보니 나이 지긋한 요원들이 수신호로 관광객들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

 

 

 

낮부터 희끄무레하긴 했지만 밤이 되니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물론 눈축제 기간에 눈이 온다는 건 싫어할 만한 일이 아니니 기분은 좋다.

 

조심해야 할 건 카메라 렌즈에 눈이 너무 많이 묻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 정도.

눈이라면 정말 펑펑 퍼붓지 않는 한 물이 카메라 안으로 들어갈 일은 없지만

렌즈 앞쪽에 많이 묻어버리면 결과물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후드를 항상 정방향으로 끼워놓는다.

위로 올려다보는 장면을 찍을 때는 살짝 들어서 찍고 바로 내리는 조심성을 보인다. 렌즈 닦는거 정말 고역이라서.

 

낮에는 아마 여러 먹거리들과 이벤트로 인해 시끌벅적하겠지만 점등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밤은 의외로 조용한 편이다.

 

 

 

눈축제에는 눈으로 만든 조형물과 얼음으로 만든 조형물이 혼재해 있는데

단순한 미적 조형물이 아니라 대부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는 인기있는 작품인 시마 시리즈의 작가 히로가네 켄시가 그린 비영리단체가 전시한 작품.

초반엔 그럭저럭 볼만 했지만 지금은 그저 직장인 판타지에다가 극우 자위기계로 전락해 버린 작품이라

저 사람 그림을 봐도 하트모양의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운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리는 세계 3대 눈축제 중 하나라서 더더욱 일본 문화를 나타내는 조각상이 많은 듯 하다.

이 정도 크기로 통짜 얼음을 조각하기엔 무리가 많아서인지

이곳에 전시된 얼음 조각상들은 전부 일정 크기의 블록을 쌓고 깎아서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 블록 조립의 흔적이 보인다.

 

 

 

얼음 조각상은 눈보다 무거워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상당히 거대한 건축물도 몇 점 보인다.

만드는데 고생 좀 했겠구나 싶지만 인상에 깊히 남을만한 예술미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관광은 흥미가 빨리 식어버리기 때문에, 사실 눈축제에 크게 기대하고 온 것은 없다.

낮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많이 열리니 체험하는 재미도 있겠지만 밤엔 그냥 라이트에 반사되는 조각상들의 자태를 감상하는 것 말고는.

 

얼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하트모양이 왠지 크나큰 상처를 받은 듯한 느낌으로 빛나고 있어서

눈 내리는 도시의 밤 속에서 보고 있으니 뭔가 의도와는 다른 불안감이 느껴지는 듯 하다.

 

 

 

맥주는 더울 때 마셔야 좋다고 하던가. 본인은 술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기분내키는 대로 마시느라 잘 모른다.

눈축제 기간이라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니, 수많은 진행요원들이 부지런히 눈을 치우고 개최장을 정비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된다.

 

도시의 눈이란 건 그냥 방치해 뒀다간 여러가지로 흉물스러워지는 법인데

이곳 축제장 주변은 관광객들이 일상적으로 걸어다니기에 거의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정비되어 있다.

1주일간 참 고생하는구나 싶다. 눈이 쌓인 양은 2월 8일 서울의 수 배에서 수십 배는 되지만 걸어다니기는 이쪽이 훨씬 편하다.

 

 

 

관광객이 워낙 많이 오는 축제다 보니 흡연구역의 철저한 격리도 중요한 요소일 듯 하다.

내부는 따로 부스가 설치되어 있지만, 축제와 분위기를 맞추려고 일부러 얼음벽까지 만들어 놓은 꼼꼼함이 만족스럽다.

시간이 늦어서 흡연부스는 문을 닫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밤엔 특별히 이벤트 같은거 없나 싶었는데, 사람이 직접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이벤트라면 열리고 있었다.

경마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는 특히나 목장으로 유명한 곳이 홋카이도인데

서로우브래드의 고향 홋카이도라는 주제로, 음영이 조각되어 있는 거대한 눈벽에다가 영상을 쏘아서 다양한 장면을 연출중이다.

 

기술적으로는 딱히 놀라울 구석이 없는 전시지만 관광객 배려라고 할까, 서비스 정신은 그럭저럭 높게 쳐줄 만하다.

 

 

 

당시는 소치 동계올림픽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라 이번 눈축제에서는 스키점프대도 설치되어 있다.

분명 이곳 오오도리 공원은 완전히 평평한 곳이었는데, 산등성이 대신 철제 구조물을 세우고 거기다가 눈을 퍼부어서

그럭듯하게 점프대를 만들어 놓았다. 언제 이벤트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더 이상 점프가 없는 듯 하다.

 

 

 

동계 종목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지만, 두 곳의 점프대의 모양이 다르다.

자세히 보니 눈의 상태도 전혀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데, 점프의 종류에 따라 지면의 상태도 바뀌는 것인가 싶다.

 

오늘은 기회가 없지만 어차피 내일이나 모레 즈음 한번쯤은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자리를 뜬다.

첫날부터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으면 의외로 실망하기 쉽다는 과거의 전례를 생각해

그냥 슬쩍슬쩍 구경이나 하고 추위에 몸을 적응하는 편에서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머리속이 텅 빈것처럼 멍할 뿐이다.

 

 

 

긴장 풀고 돌아보는 와중에도 메인 조각상에 포함되리라 예상되는 거대한 얼음 조형물은 친숙한 느낌이다.

큰 임팩트는 없었지만 대만에 다녀와 봤기 때문에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고궁박물관과 101 타워의 모습이 얼음으로 재현되어 있다.

 

 

 

대단한 덩치의 얼음 구조물이 형형색색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는 모습은 꽤나 볼 만하다.

얼음 구조물 위에 타이밍 좋게도 눈이 내려서 훨씬 멋들어진 지붕이 만들어 진 것도 좋은 감상 포인트.

 

이 정도 덩치를 얼음으로 만들어서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일지 궁금하다.

만약 쓰러졌다가는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안정성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신경을 썼을 텐데.

 

 

 

조금 전 서로우브래드 때와 비슷한 원리로 이번엔 아우디 부스가 나타났다.

자동차 1:1 크기의 구조물이라 크기는 좀 전 것에 비해 훨씬 작아서,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건 벽면에 붙였다기 보다는 그냥 자동차 한 대를 조각해 놓은 셈이나 마찬가지.

 

밋밋하던 흰색 자동차가 레이저 쇼의 시작과 함께 훌륭한 질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도시의 밤길을 달리는 듯한 연출도 이어지고, 아이들과 함께 보면 먼 훗날 고객층이 0.1% 정도는 늘어날 듯한 느낌.

 

 

 

이번 눈축제에서 가장 큰 조형물 중 하나인 소치올림픽 기념 조각상.

여기는 특별히 색깔을 강조하는 조명이 설치되지 않았는데, 대신 꽤나 밝게 빛을 비추고 있어서 감상하긴 좋다.

 

어쨌든 일본의 눈축제라 그런지 이 조각상에 나와 있는 선수들은 전부 일본쪽에서 유명한 사람들인 듯.

 

 

 

 

실상 소치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지만, 관심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한국과 달리 일본은 여러 종목에서 기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도 기대만큼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목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출전한 사람이 많아서

한국보다는 좀 더 즐기는 축제라는 인식이 들기 쉬운 대회였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으니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옷을 봐서는 아마도 아사마 마오 선수같은데, 가장 크고 박력있게 지어진 조각상과는 달리

김연아에게 밀리기도 했거니와 개똥같은 러시아의 조작질 때문에 스포츠 정신의 몰락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피규어 대회였기 때문에

지금 보면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이 드는 조각상이다.

 

반대로 마오 위에서 점프하고 있는 선수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는데

일본 스키점프 종목의 레전드인 카사이 노리아키(葛西 紀明) 선수를 형상화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당시는 아직 점프 대회 전이라, 훗날에서야 멋진 이야기가 만들어 졌지만

올해 41세의 백전노장인 카사이 선수는 이번이 자신의 올림픽 마지막 출장이었는데

쟁쟁한 유럽의 강호들을 누르고 은메달을 획득, 역대 최연장 메달리스트로 훌륭한 종지부를 찍었다.

 

마오의 캐릭터성 때문에 유독 부각이 되지만, 일본의 동계스포츠 수요는 상당히 큰 편이라 숨겨진 멋진 선수들이 많다.

 

 

 

오오도리 공원은 50% 정도밖에 보지 않았지만, 슬슬 라이트를 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어서 이 정도로 하고 돌아갈까 싶었는데

왠걸 스스키노 거리에서 열리고 있는 눈축제는 10시 넘어서까지도 계속된다는 방송이 나오는 바람에 조금 더 걸어보기로 한다.

 

몸은 무겁고 카메라는 조심스럽고 날씨는 매섭지만 일단 스스키노쪽의 밤풍경도 보기는 봐야 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돌아올 때 꽤나 피곤하겠지만, 여행에서 피곤함이란 뿌뜻한 성취감과도 직결되는 것이니 뭐.

 

오오도리 공원을 벗어나도 삿포로의 밤은 여전히 싱싱하다.

전통 문화라는게 존재할 수가 없는 홋카이도이기 때문에 서양식 펍이 매우 활성화 된 곳이기도 하다.

옆구리에 같이 온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곳에 들어가 분위기를 즐기며 술 한잔 했겠지만.

 

 

 

도로의 높이가 눈 때문에 10cm 정도 올라와 있는 풍경 자체가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국도 철원 정도쯤 되면 이 정도 눈이 우습게 보이겠지만, 인구 200만의 도시에서 이렇게 눈이 쌓이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이다.

 

평범한 거리 모습도 나에게는 셔터를 누를 가치가 충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모습은 왠지 눈 보고 발광하는 개와 비슷하지 않았을려나.

 

 

 

일본 현지인들에게도 오키나와와 더불어 항상 최고의 관광지로 꼽히는 홋카이도는

삿포로의 무한한 향략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아득하고 고풍스러운 주위의 도시, 조금만 더 나가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야생림의 향연 등등

여러가지를 동시에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는 이점이 가득한 섬이다.

 

도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곳 삿포로의 일본답지 않은 시원시원한 도로와 정방형의 시내 구조,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락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을 듯 하다.

 

 

 

개척정신과 독립성이 강한 이주민들의 특성상 대형 브랜드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소규모 공예에 강점을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 최고의 예술 타투이스트들이 밀집해 있기도 하고, 본토에까지 명성을 떨치는 라멘 가게라던가

심지어 아이폰 케이스까지 해외구매 신청이 쇄도할 정도로 유명한 젊은 창작집단 등등. 둘러보면 재미있는 곳이다.

 

묵묵히 사진 찍으며 걸으니 어느세 스스키노 대로변으로 도착한다. 삿포로 최대의 번화가인 이곳은 도로가 정말 시원시원하다.

 

 

 

삿포로 올 때마다 사진은 담지만 한 번도 타 본적은 없는 관람차의 밤모습을 연례행사처럼 찍어본다.

밤에 타 보면 스스키노 거리의 화려한 불빛을 멋지게 담아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삿포로는 항상 혼자 오다 보니, 어쩐지 그냥 타기에는 흥미가 식어버리는 악순환이 펼쳐지고 있다.

 

다음엔 혼자라도 타서 야경을 한번 담아볼까 싶다.

 

 

 

그러고보니 스스키노 거리 중앙에는 노면전차도 달리고 있다.

꽤나 옛날 맛이 살아있는 전차라서 사진 찍기엔 참 좋은데, 문제는 본인 루트상 저 전차를 탈 일이 전혀 없다는 것.

 

 

 

스스키노 거리의 눈축제 코스는 오오도리 공원에 비해 상당히 아담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오도리 공원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길쭉한 야외 정원이 마련되어 있지만

조형물이 전시된 이곳 스스키노 거리는 평소에 그냥 유흥가 골목거리나 마찬가지라서 그럴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오오도리 공원의 조형물들과 겹치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즐기는데는 문제 없을 듯 하다.

오오도리 공원이 끝물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훨씬 많아서 편안하게 사진 담기에는 에로사항이 꽃피겠지만.

 

처음 삿포로 역을 봤을 때가 2008년 즈음이었는데, 그때의 충격은 상당했다.

자전거로 도쿄에서 토마코마이(苫小牧)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중간에 한참동안 시골 마을만 보다가

이 거대한 역사를 보게 되니 삿포로가 생각보다 정말 큰곳이구나 하는 임펙트가 있었던 듯.

 

옆으로 길쭉한 것이 아니라 이 뒤쪽으로 건물이 길에 늘어선 형태니까 실제 크기는 정말 크다.

물론 옆에 백화점, 호텔, 요도바시 카메라 등의 입점업체가 건물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커 보이는 것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냥 크고 멋진 역 중에 하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지만

여전히 그때의 추억이 지금의 나에게 있어 삿포로의 인상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준 영향은 이어지고 있다.

 

 

 

예전보다 많이 더워지는 바람에 삿포로 눈축제도 괜찮을려나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원래 눈축제 조각용 눈은 모자라면 밖에서 사오기까지 한다니까 별로 문제가 되진 않는 듯 하다.

겨울엔 여전히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도 그럭저럭 추워서 눈이 녹지는 않는다고 하니.

 

겨울 홋카이도는 처음 와 보는데, 곳곳에 비치된 미끄럼 방지 모래주머니 박스가 눈길을 끈다.

눈 보기 힘든 지방에 살아서 이런 것도 신기하다. 물론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적혀 있다.

 

 

 

6개월 전에 예약해서 저렴하게 숙박 가능한 호텔은 역에서 10분만 걸으면 되는 가까운 곳이지만

전망이 좋은것도 아니고 빌딩 골목 사이에 조심스럽게 웅크리고 있어서 관광을 즐기려는 기분과는 좀 동떨어진 느낌.

 

짐을 풀고 잠깐 한숨을 돌렸는데, 전날 서울에서 나침반님과 실컷 놀고, 수면시간이 2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피곤하다. 침대에 누으면 다시 일어나기가 힘들 것 같아서

이 날을 위해 준비한 비니와 손목 방한대 등을 착용한 후 밖으로 나온다.

 

원래라면 손가락까지 덮은 장갑을 이용하겠지만, 사진 찍기가 영 불편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손목 밑에서 손가락 밑까지만 올라오는 방한대를 사용한다.

많이 추울때를 대비해 장갑도 가지고는 왔지만 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추위에 강한 편이기도 하고 삿포로는 의외로 그렇게까지 춥지 않다고 하니.

 

확실히 겁낼만큼 추운 편은 아니지만 쌓여있는 눈을 보면 확실히 많이 오는구나 싶다.

서울에 눈 내리는 것만 봐도 재미있는 대구의 환경을 생각해 보면, 이미 이곳은 별천지나 마찬가지.

겨울의 눈은 자비가 없어서 여름에 당당히 서 있던 자전거들은 비참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다.

 

 

 

눈이 그냥 폭폭 쌓인게 아니라 도보에 있던 눈을 위에 쌓고 쌓아서 얼음층처럼 변해버린 녀석들이라

저 밑에 깔려있는 자전거들의 안위가 걱정된다. 어차피 대부분 무단 방치된 녀석들일테니 봐 주는 사람도 없겠지만.

눈축제 보려고 왔지만 눈 자체가 신기한 나로서는 이런 모습도 매우 즐거운 관광 볼거리다.

 

 

 

사방에 눈길 천지라서 무거운 카메라 세트 들고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서울처럼 빙판길 때문에 쭐떡쭐떡 미끄러지는 느낌은 아니다.

 

도보쪽은 상당히 공을 들여 치워놓았고, 쌓여서 얼어버린 길은 모래를 충분히 깔아두었기 때문에

체감되는 미끄러움은 전날 서울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덜하다. 거의 평지 걷는 느낌으로 움직일 수 있다.

 

 

 

삿포로가 홋카이도 안에서 별로 추운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내를 흐르는 조그만 하천은 거의 다 얼어있다.

눈축제를 보고 나면 삿포로 유일의 비경인 시레토코로 향하게 될 텐데, 그 쪽은 살짝 걱정이 된다.

 

 

 

이제는 친숙하기까지 한 TV탑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 오는 사람들은 저게 시계탑인줄 알지만 사실 시계탑은 따로 있다. 워낙 작고 아담해서 처음엔 놀라지만.

저 시계탑을 기점으로 현 장소에서 오른쪽 대로가 전부 눈축제 개설장인데, 지금은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눈축제는 조명이 밝혀지는 밤이 훨씬 더 다채로운 구경이 가능하다고도 하고

낮에 보는 눈축제는 어차피 내일 Y 양과 만나서 하루종일 돌아다닐 예정이니까. 미리 예습해서 즐거움을 덜어내고 싶진 않다.

 

그래서 가능하면 TV탑 앞까지는 가지 않기로 생각하며 천천히 눈 덮힌 풍경을 즐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홋카이도는 메이지 이후의 개척정신 넘치는 강인한 이미지로 인식된다.

선진 문물의 시험장이자 계획도시의 표본이기도 한 삿포로와 그 주변 도시들은 서양식 건축의 흔적도 많이 남아있다.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아내며 확장하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좋게만 볼 수는 없는 현실이지만.

 

조그만 성당이지만 주변 모습과 이질적인 매력이 셔터 한번 누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서부터 언뜻언뜻 눈축제 전시장 모습이 아른거리지만 지금은 꾹 참는다.

일단 삿포로에서 빠뜨릴 수 없는 라멘이라 한 그릇 먹고 돌아가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맛있는 부분은 나중에 먹는 성격이라, 지금 눈축제 구경 시작했다간 아무래도 저녁에 기진맥진해 질 것 같으니까.

눈은 내리지 않지만 역시 천천히 걸어다니고 있으니 살갗이 노출되어 있는 부분은 꽤나 매섭게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딱히 눈축제가 아니라도 눈 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아쉬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설령 눈 보기 힘든 대구 지방 출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도시 안에 이만큼 눈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는 기회란 흔하지 않으리라 본다.

 

일주일간 열리는 눈축제의 2/3 기간쯤에 도착했기 때문에 비교적 사람이 적은 편인지

몇몇 중국인 관광객 외에는 나름대로 한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흐트러지지 않게 쌓인 눈을 보는 건 언제나 즐겁다.

 

 

 

삿포로가 대자연의 축복을 듬뿍 받은 곳이긴 한데, 개척민의 피가 남아있는 탓인지 의외로 도시에서 쓰레기 보기가 어렵지 않은 곳이다.

특히 반달리즘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스트리트 페인팅의 흔적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특징.

사방이 눈이라서 쓰레기 꽂아놓고 가기도 쉽긴 하다.

 

쓰레기라는 점을 배제한다면 흰 눈속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표현중인 금속 캔의 모습이 나름 인상적이기도 하다.

 

 

 

삿포로는 삿포로 역에서부터 메인 공원인 오오도리(大通り) 공원까지가 한 블럭,

오오도리 공원에서 유흥가인 스스키노(すすきの) 거리까지가 또 한 블럭으로 묶어 생각하는게 편하다.

두 구역을 한꺼번에 가로지르는 일은 도보로는 30분쯤 걸리기 때문에 조금 거리가 있지만, 블럭 안에서 돌아다니려면 어디든 도보로 쉽게 갈 수 있다.

 

삿포로 역과 스스키노엔 엄청난 수의 숙박지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어디를 선택해도 오오도리 공원까지 손쉽게 이동 가능하다.

물론 본인 경우엔 삿포로 이외에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닐 생각이라 역 쪽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선택하는게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 수 있지만.

 

오오도리 공원 근처에 위치한 시계탑은 규모는 작아도 역사있는 관광 명소이기 때문에 사람들 모습이 꽤 보인다.

시계탑 정문쪽으로 향하기 전에 귀엽게 만들어놓은 눈사람이 있어서 먼저 담아본다. 입 모양이 만화적 데포르메에 충실한 모습.

 

 

 

몸은 상당히 피곤하지만 지금까지는 겨울 삿포로라는 첫 경험과, 익숙한 지형지물의 묘한 콜라보로 인해

어디를 보며 돌아다녀도 재미있다는 느낌 뿐이다. 오히려 이런 경우엔 메인 이벤트에 속하는 눈축제의 감흥이 크지 않게 되는 역효과가 조금 걱정되는 편.

 

웅장함과 거대함은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보다 자연이 만들어낸 쪽에 훨씬 매력을 느끼는 성격이라서

사실 이번 삿포로 눈축제는 그냥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이외엔 별로 기대하는 게 없다.

 

몸이나 풀고 나서 진짜 목표인 시레토코까지 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할 뿐이라서, 삿포로는 그냥 마음 비우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

 

 

 

삿포로 시계탑은 그 역사성 때문에 이곳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좀 전에 걸어오면서 찍은 이름모를 성당과 비교해도 결코 특이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하고 작은 건물일 뿐이다.

외국에서 기대감을 갖고 들어오는 관광객들에게는 그냥 기념 사진이나 남기는 정도의 과정밖에 남지 않는 소박한 곳.

 

더구나 안에 들어가는 데는 요금까지 들기 때문에, 어지간히 시계탑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추천하지는 않는다.

본인 역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고.

 

 

 

그래도 시계탑 주변에는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손바닥만한 눈사람이 늘어서 있어 관광객들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커플들이 좋아할 만한 하트모양 연결 고리의 선명함이 매력적인데, 수컷으로 보이는 쪽이 의도와는 다르게 좀 우울해 보이는 것이 포인트.

 

 

 

여담이지만, 눈 사진을 마음먹은대로 찍어내는 건 초보인 본인에게 여전히 힘든 일이다.

계조와 DR이 만족할만큼 뛰어나다면 걱정없지만 아직 카메라라는 기계에서는 구현하기 어렵다.

 

특히나 눈 찍을 일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살다 보니, 눈만 내리면 항상 평소보다 더 초보가 되는 기분이 든다.

이번엔 삿포로에서 열심히 연습해서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담을 수 있도록 노력중.

 

 

 

특정 지역이나 가게에서 마스코트를 만들어 홍보하는 데에 어떤 제한이나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계탑 옆의 라멘 가게에서 내 놓은 듯한 프란체스카라는 마스코트 캐릭터는 좀 의외다.

 

라멘과 무슨 접점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양식 건물이라고 고딕풍의 의상을 선택한 것인지. 거기다 안대는 왜 달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국민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하츠네 미쿠가 탄생한 곳이다 보니 이런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

 

점심은 라멘으로 정했기 때문에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캐릭터에 끌리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맛있어 보이는 곳을 찾아가려 하니 일단 패스한다.

 

 

 

올해로 건설 135주년이 되는 시계탑은, 거대화 된 삿포로에 비해 아담하게 위축된 듯한 분위기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길지 않은 역사라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의 노력은 외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0분만 구경하면 더 볼것이 없는 곳이긴 해도, 역시 현대적 건물만 잔뜩 늘어서 있는 것 보다는 보기가 좋지 않은가.

 

 

 

고드름도 평소엔 그저 길어봤자 팔목 정도밖에 되지 않는 녀석들만 봐 왔는데

여기서는 상반신 정도 고드름은 그냥 지천에 널려있다는 점이 또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떨어져서 사람과 접촉하면 단순한 사고로 끝나지 않을 듯 하니

고드름 주위에서는 조금이라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눈 촌놈의 괜한 걱정일수도 있지만, 실제로 예전 삿포로 눈축제 때 전시용 눈 조각상이 무너져 관람객을 덥치는 사고도 발생했다고 하니

스스로 몸 추스려야 하는 겨울 여행엔 무조건 조심하는게 상책이다.

 

 

 

한적한 평원 언덕즈음에 서 있으면 딱 분위기 좋을만한 시계탑이지만

위치가 현 삿포로의 최중심 주변이기 때문에 근처엔 빌딩들로 가득해서 매력이 살지 않는 느낌.

 

실제로 이 시계탑은 옛날 삿포로 농대에 속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정말 분위기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반쯤 얼어버린 손으로 렌즈를 교채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일단 망원렌즈로 교체 후에는 일부러라도 망원으로 건질 만한 피사체를 찾게 된다.

시계탑 건너편에 위치한 이 묘한 정체성의 음식점은 그 좋은 대상으로 손색이 없다.

 

현 홋카이도 대학의 초대 총장이었던 W.S 클라크의 흉상이 가리키는 손끝에 늘어서 있는 맛있는 식재료들의 모습은 매우 초현실적이다.

라멘 목표가 아니었다면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던 센스있는 식당.

 

 

 

한국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Boys, be ambitious' 라는 격언의 주인공인 클라크의 모습은

묘하게 쌓여있는 눈과 더불어 굉장한 인상을 남겨준다.

 

야심을 가지고 맛있게 밥을 먹으라는 의미인지, 팝아트적인 조합이 사진 찍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분위기를 풍긴다.

 

 

 

좋게 말하면 예의바르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한 본토 사람들의 성격과 달리

풍요로운 자연과 거친 환경을 자랑하는 홋카이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뭔가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성향이 있다.

물론 혹독한 겨울을 생각하면 의외로 사색적인 느낌을 풍기기도 하지만, 적어도 삿포로라는 도시는 젊은 혈기가 넘치는 곳임에 틀림없다.

 

자전거 주륜 금지구역에 당당하게 세워놓는 대담함은 말할것도 없이, 그림 그릴만한 공간엔 빠지지 않고 재미있는 그래피티들이 난립해 있다.

주인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지만 개인적으로 삿포로에서는 이 정도 관용은 용납되어도 크게 문제가 없을거라는 기분이 든다.

 

 

 

남한 면적의 80%나 되는 대지에 인구는 겨우 600만도 되지 않고, 그것도 인구의 70% 이상이 삿포로 주변에 밀집해 있는 곳이라

자연스럽게 삿포로 이외 지역을 연결하는 대중교통이 매우 미비한 탓에, 이곳에서는 자동차가 매우 중요한 이동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겨울의 눈보라에도 거침없이 운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홋카이도에서 출고되는 자동차들은 본토와는 다른 타이어를 장비한 채로 나온다.

 

걷다가 우연히 만난 볼보 대리점에는, 요즘들어 디자인에도 신경쓰기 시작한 회사의 기조를 반영이라도 하듯 멋들어진 녀석이 전시중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눈이 아니라 얼음을 깎아 만든 조그마한 조각상이 진열되어 있다.

삿포로 눈 축제가 워낙 유명한 녀석이다 보니, 축제 기간중엔 도시 곳곳에 볼만한 조각상들이 널려 있다.

 

 

 

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매출과 별 상관없는 지출일 수도 있겠지만

도시를 대표하는 축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 준다는 취지를 생각한다면

구성원 모두가 합심해서 축제를 지탱한다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줄 수 있다.

 

한국에서 축제란 조직위원회에서 차려놓은 밥상을 시민들이 퍼먹기만 하는 남의 집 불구경 같은 인상을 지울수가 없는데

이런 시민 참여적 축제가 제대로 열리려면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아쉬워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겨울 날씨란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시나브로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치는 느낌이기 때문에

슬슬 손끝의 감각은 무뎌지고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니 뜨근뜨끈한 라멘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다.

 

홀로 여행자라면 선뜻 들어가기도 꺼려질 정도로 고풍스러운 느낌의 한 오래된 라멘집 간판이 보여서 결심하고 문을 연다.

창업 40년은 넘어보이는 반 목조 건물의 내부는 옻칠한 검은 인테리어가 라멘집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중후함을 풍긴다.

 

축제 기간이라 라멘과 주먹밥 세트가 나름 저렴하게 판매중이라 고민없이 주문해 본다. 라멘은 삿포로의 주류인 미소라멘으로 선택.

 

풍부한 토핑과 완벽한 완성도의 반숙 계란, 짜릿함이 느껴지는 진한 미소 국물의 조합이 추위와의 완벽한 대칭점으로 느껴진다.

처음 몇 숫갈은 얼어붙어서 콧물까지 나올 정도의 얼굴 탓에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이 풀리니 전신을 자극하는 강렬한 맛이 모세혈관에까지 스며드는 듯 하다.

 

 

 

위에는 연어알, 속에는 연어살로 무장한 주먹밥이 세트 메뉴로 따라나온다.

사계절의 변화가 극단적인 곳에서 나는 쌀은 찰기와 꼬들꼬들함이 절묘히 조화된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추운 날씨탓에 라멘의 국물이 조금이라도 식기 전 열심히 흡입하다 보니, 주먹밥을 먹을 타이밍이 조금 애매하다는 게 살짝 아쉽긴 했다.

일본 라멘이 원래 짠 편이지만, 삿포로의 특제 미소라멘은 그 농후함 만큼이나 짜기도 정말 짠 편이라

이걸 맛있게 후룩후룩 먹는 한국인은 나름 일본 문화에 익숙해 진 사람이라 봐도 될 듯.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국물이 짜다고 원성을 낼 법 하다. 이거 한그릇 먹고 나면 몸이 퉁퉁 부는게 느껴질 정도로.

실제로 일본에서도 라멘은 그냥 별식으로 가끔 먹을 정도지, 이걸 매 끼마다 먹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야 라멘을 워낙 좋아해서 몸 생각 하지 않고 여행중엔 1일 1라멘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편이긴 하지만.

 

후끈거리는 뺨과 함께 다시 숙소로 돌아와 옷을 벗고 침대에 몸을 누였다.

TV를 틀고 방송에 집중하려 해 보지만 눈꺼풀이 감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조금이라도 방송을 즐겨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한두 시간이라도 눈을 붙였다가 떼어야지만 야간 눈축제를 볼 수 있을 듯 하다.

 

생각과는 달리 야간 눈축제는 9~10시 즈음에 라이트를 전부 꺼버리기 때문에 심야에 즐기기엔 힘들다.

삿포로엔 3일간 체류할 예정이라 아직 기회는 있다고 생각하며, 일단 8시 쯤 다시 나가기로 하고 체력 보충을 위해 TV 를 전등삼아 눈을 감는다.

 

 

나침반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공항으로 가려던 계획은 미묘하게 실패에 가깝다.

새벽 5시에 공항 리무진을 타야 하는데 새벽 3시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인 것.

마음 속으로는 대충 그렇게 될 거란 사실을 예상하고 있기도 했고

실제로 나침반님과 수다떨지 않았더라도 여행 전날엔 잠을 자지 못하는 특성 상 뒤척이며 시간 보냈을 것.

 

여행 첫날엔 무리하지 말자는 의미로 일찍 숙소에 들어가 쉬는 게 관례에 가까워서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7시에 도착한 인천공항은 기대감에 부푼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붕괴시킬 정도로 난장판이 되어 있다.

 

평생 어느 시간대라도 이렇게까지 인파로 붐비는 인천공항은 본 적이 없다.

9시 5분 출발이라 넉넉하게 7시 5분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진에어 카운터는 백여 명에 가까운 대기자로 빡빡하다.

서둘러 줄을 서서 발권받는데 40분 가까이 걸렸는데 게이트 통과하는 검색대에만도 지네처럼 줄이 늘어서 있다.

그 넓은 인천공항에서 각각의 게이트에 대기하고 있는 줄이 옆쪽 게이트 대기줄과 만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길이.

 

세상에 이럴수도 있나 싶은 생각으로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데, 나 말고도 걱정하는 사람은 많은지

지나가는 직원 붙잡고 이러다가 비행기 못타면 어떻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꽤 있다.

 

심장이 쫄깃해 질 정도의 긴장감을 견디며 출국장을 빠져나오던 시간이 8시 35분.

대체 무슨 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느긋하게 공항에 도착해 구경이나 하자던 계획은 완전히 물건너갔다.

 

어쨌든 좌석에 앉고 나니 긴장은 풀리고 이륙과 함께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낸다.

다들 어느 나라로 떠났는지 신 치토세 공항행 비행기는 빈 좌석이 꽤나 남아있어서 옆자리에 카메라를 던져놔도 문제 없다.

 

 

 

당시 서울에도 그럭저럭 눈이 왔었고, 살짝 얼어버린 바닥 때문에 고생도 좀 했지만

비행기가 고도를 올리면 올릴수록 시야가 눈구름으로 점점 흐려지는 것을 보니 살짝 걱정도 든다.

 

겨울의 홋카이도는 처음이라 그 어마어마하다는 눈 속을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싶다.

홀로 여행이라 도시간 이동을 제외하면 거의 두 발로 움직여야 하는데

심한 평편족인 본인은 얼음바닥 위에서 균형잡기가 매우 힘들다. 발바닥 중앙이 툭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안정감이 없다.

 

겨울 여행은 몸조심이 제일이므로 평생 한 번도 써 본적 없는 비니도 베낭속에 넣어 놨고

튼튼한 장갑과 손목 방한대, 홈쇼핑에서 선전하던 아이젠 수납형 등산화도 신고 왔다.

구입한 돈이 아깝더라도 아이젠을 사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만.

 

 

 

일본쪽으로 날아갈수록 좀 전에 봤던 한반도쪽 구름은 양반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구름이라기 보단 아예 눈덩어리처럼 보이는 것들이 비행기 밑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래도 역시 겨울 홋카이도라면 눈이 팍팍 내리기를 기원했던 만큼, 긴장과 함께 기대감도 커지는 기분.

 

 

 

저가항공이라서 홋카이도 가는 동안 굶을 줄 알았는데 가벼운 간식거리는 제공해 준다.

 

홋카이도는 일본에서도 미식의 전당으로 소문난 곳이긴 한데

홀로 여행 도중에는 사실 아무리 자금 여유가 있어도 맛집 찾아다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부분 적당히 즐길만한 음식으로도 충분히 맛있게 먹기 때문에, 이런 간식 역시 되는대로 먹어주는게 이득이다.

이런 말 하는 이유는, 한 칸 건너 여자 승객이 빵을 반 쪽만 먹고 그냥 남겨버렸기 때문.

 

 

 

신 치토세 공항에 도착해서는 아직까지 추위를 느낄 일이 없다. 워낙 따뜻해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니까.

 

일본에서도 홋카이도 하면 겨울에 끝내주게 추운 지역으로 대충 알려져 있어서 오해를 많이 사는데

날씨가 추운만큼 건물 내부의 난방 장치가 워낙 잘 되어 있는 바람에

오히려 요즘 홋카이도 젊은이들은 본토 사람들보다 추위를 더 많이 탄다고 한다.

 

신 치토세 공항도 전력난이 걱정될 만큼 더운 편이라 베낭과 카메라 사이드백, 두꺼운 점퍼로 몸을 감싼 나로서는 견디기 힘들다.

빨리 짐을 내려놓아야 좀 움직일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항 도착부터 느껴지는 시끌벅적한 축제의 기운은

아무래도 셔터를 누르지 않고서는 쉽게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나에게는 피규어로 친숙한 하츠네 미쿠(初音ミク)가 사방천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 적지 않은 문화컬쳐(?)로 다가온다.

물론 미쿠라는 캐릭터를 만든 회사가 삿포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지역 상품으로서 홍보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전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삿포로 눈축제의 공식 입구인 공항 전체를 미쿠로 도배해 버리는 모습은 예상을 웃도는 덕력이다.

 

아마 오타쿠 문화와 전혀 접점이 없는 일반 관광객이라도 필연적으로 저 캐릭터 모습 정도는 눈에 박혀서 돌아가게 될 듯 하다.

 

 

 

공항에서 하룻밤 즐길 생각인지, 신 치토세 공항의 메인 홀에는 미쿠 관련 이벤트로 바글바글한 상태.

공항 여기저기에서 스템프 찍어오는 미션부터, 일러스트레이터의 원화 갤러리, 레이싱 기업들과의 스폰서 부스 등등

이번 축제에서 아예 끝장을 봐 버리자는 느낌으로 물량공세를 펼치는 분위기는 놀랍기 그지없다.

 

물론 일본에서는 뉴스에도 몇번 나오고, 거대 자동차 회사의 글로벌 CM 에도 등장하는 등 단순한 오타쿠 캐릭터의 범주를 넘어선 편이긴 하지만

공항이라는 나름 딱딱한 공공 기관물에 이런 훈훈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굉장한 임팩트를 가져다 준다.

 

 

 

나름 피규어도 몇 개 가지고 있고, 노래도 몇 곡 들어봐서 그럭저럭 이질감을 덜 느끼는 본인이라도

굉장히 이질적인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하다.

 

그래도 시작부터 카메라 셔터를 좀 풀어놓을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여기저기 담아본다.

땀흘리며 거대 카메라 들고 인형 찍어대는 뚱땡이는 분명 전형적인 오타쿠의 모습일텐데.

 

 

 

미쿠라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녹색 머리에 가깝지만

본사인 크립톤 퓨쳐 소프트웨어가 삿포로에 있다는 이유로 눈 축제 마스코트에 지정된 이후

매년마다 눈축제 기간에서만 공개되는 한정판 바리에이션 모델들이 등장해 매니아들의 지갑을 탈탈 털어가고 있다.

 

눈축제 하면 역시 눈이니 바리에이션의 대부분은 눈이나 흰색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지는 편.

가장 우측의 버전은 일본 전통 결혼식 때 사용하는 의복인 시로무쿠(白無垢) 를 입은 미쿠인데

참 마음에 들어서 하나 구입해볼까 했는데, 금새 품절되고 나서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올라버려서 깔끔하게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신 치토세 공항은 국제선보다 국내선 쪽이 훨씬 활성화 된, 한국에서 보자면 이상한 구조로 되어있지만

규모면에선 꽤 좁은 편에 속해도 효율높은 배치를 통해 즐길만한 것들을 알뜰하게 모아놓은 느낌이 든다.

최상층엔 극장도 있는걸 봐서 확실히 모든 편의시설이 국내선 이용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도 들고.

 

위에서 사진 찍고 있으니, 이번 2014년 겨울버전 미쿠는 아무래도 마법사 의상인 듯 하다.

어차피 저런 한정판은 이미 예전에 예약판매로 동났고, 실제 눈축제 기간에 구매는 거의 불가능하니

그냥 이런 오타쿠 에너지로 가득 찬 공항을 담아볼 수 있다는 흔치 않은 기회를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미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호텔에 짐 풀어놓을 시간도 없이 공항 도착하자마자 몇 시간은 거뜬히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이곳저곳 많이 꾸며놓았다.

위층을 한바퀴 둘러보니 실제로 일본 레이싱 경기에 스폰서로 참가중인 미쿠의 상판대기를 구경할 수 있다.

 

이 팀의 성적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차를 모는 레이서도 나름 미쿠 매니아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스폰서야 높으신 분들의 결정이니 실제로 레이서는 미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가능성이 있지만

저런 프레임을 두르고 레이스를 펼치다 보면 어쨌든 이런 문화에 익숙해 지지 않을까 싶다.

쪽팔려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거부감이 드는 레이서라면 그건 참 불행한 일이겠지만.

 

 

 

첫째 날은 무리하지 않고 숙소로 돌아가 짐 풀어낸 뒤에

잠깐 산책만 하고 맛있는 먹거리로 배를 채운다는 본인의 교과서적 절차가

이 신 치토세 공항에 불현듯 나타난 거대한 오덕의 불길에 갈팡질팡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쓰여있는 것처럼 이 미쿠 이벤트는 2월 11일까지라, 귀국편에서는 볼 수 없으니 오늘밖에 기회가 없다.

짐 좀 풀어놓고 다니고 싶어도 공항에서 코인 락커 사용하는 비용이 얼마나 아까운지.

아직 늙은 몸이라고 할 만한 처지는 아니니 그냥 땀 좀 흘리고 돌아다니기로 한다.

 

 

 

미쿠는 볼만큼 봤으니 신 치토세 공항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눈에 새겨둔다.

국내선에 바글바글한 내국인 관광객들의 모습만 봐도 짐작이 가지만

홋카이도라는 곳이 일본인 입장에서는 반쯤 해외여행 가는 기분으로 오는 곳이라서

특히나 이런 눈축제 기간엔 외국인만큼 내국인들 행렬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다들 공항에서 뭘 하느라 빨리 숙소로 이동하지 않는지, 모든 음식점이나 휴식용 벤치 등이 사람으로 꽉 차있어서

그냥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딱히 즐길 거리가 없다.

최상층의 극장, 게임 센터 등엔 사람이 별로 없어 널널했지만 지금 그런 거 볼 시간도 아니고.

 

 

 

일본의 공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옛 향수 풍기는 구조물도 금방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안에 들어가서 만져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옛 전철 모형인데

이 전철이 움직이고 있을 당시엔 그냥 치토세 공항이라고, 한국의 몇몇 공항과 마찬가지로 항공자위대와 함께 사용하던 조그마한 곳이었다.

 

실제로 이 녀석을 타 본 사람도 아직 살아있을 나이지만 지금 도쿄와 신 치토세 공항의 일일 항공편수는

전 세계 세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굉장한 수송량을 자랑하고 있으니 참 감회가 새로울 듯 하다.

 

 

 

적당히 공항 구경을 마치고 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삿포로로 향한다.

삿포로발 열차는 이곳이 출발역이지만 축제 기간이라 워낙 사람이 많아서

일부러 열차 하나를 보내버린 후 맨 앞줄에서 대기하다가 잽싸게 들어가 좌석을 하나 확보한다.

 

삿포로까지 50분쯤 걸리는 거리라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앞서 말했던 겨울의 홋카이도 실내는 무조건 덥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빡빡한 인파속에 이 정도 짐과 옷가지를 껴안은채로 서 있으면 땀으로 범벅이 될 것이 뻔하다.

아니나다를까 서 있는 사람들은 거의 출근길 열차를 방불케 하는 형상이 되어버려서 아둥바둥거리기 시작한다.

 

노인네들도 좀 서 있는 바람에 살짝살짝 양심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편안하게 삿포로에 도착. 이렇게 오는 건 4년만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JR 여행센터에 가서 레일패스를 구입하는 것.

10일간의 적당히 긴 이번 여행은 렌터카를 쓰지 않고 홋카이도를 가로질러야 하는 긴 이동거리를 자랑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레일패스의 힘이 필요하다.

외국인에게만 판매하는 이 레일패스는 이동거리가 길고 빈번할수록 압도적인 할인율을 자랑한다. 어쨌든 기간 내엔 무제한 이용이 가능하니까.

 

여행 전 준비과정에서 가장 머리를 싸매게 만든 것이 이 레일패스인데

플렉서블이라 하는, 4일간 사용할 수 있으며 날짜를 지정할 수 있는 패스를 제외하면

3,5,7일권 전부 개시하는 날부터 연속적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요금이 가장 많이 나오는 날을 잘 고려해서 개시일을 선택해야 하고, 그 전까지는 교통비를 최대한 줄여야 이득.

 

고민끝에 7일권으로 2월 12일부터 사용하는 레일 패스를 구매한다.

9~11일까지는 삿포로 눈축제와 함께 만나기로 약속한 Y 일행과 지낼 예정이니

굳이 레일패스를 사용할 만큼 이동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안내원에게 한국 여권을 보여주자 한국어로 열차편 예약에 대해서 질문해 온다.

발음상의 미묘한 어색함은 있어도 거의 대학원생 레벨의 숙련도를 자랑하는 한국어다.

 

여행도 왔겠다 평소의 낯가림은 좀 접어둬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한국어 참 잘하시네요' 라고 일본어로 말해준다.

안내원도 웃으면서 일본어 잘하시네요 라고 한국어로 대답해 주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일본인 안내원이 한국어로 말하면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어로 대답하는 형이상학적인 상황이라 묘한 기분이 든다.

 

예정과 완벽히 맞춰서 이동하기는 힘들겠지만 일단 자리라도 예약해놓자는 의미에서

12일부터 시작될 장대한 장거리 기차여행 좌석을 하나하나 예약해 놓았다.

레일패스의 좋은 점은, 출발시간 전이라면 언제든 무료로 캔슬 가능하며, 남은 자리를 얼마든지 다시 예약할 수 있다는 것.

이번 여행은 뒤로 갈수록 굉장히 외진 곳으로 기어들어가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기차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하루 꼬박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수정의 여지를 조금 남겨놓은채로 일단 귀국날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열차까지 전부 좌석예약을 마친다.

 

 

 

숙소는 천원 이천원이라도 저렴한 곳으로 잡아 놓았다.

어차피 어딜 가나 한참을 걸어다녀야 할 여행이라서 호텔의 위치는 별 관계가 없다.

 

삿포로의 정경은 생각만큼 눈이 많이 온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인도쪽의 눈을 놀랄 정도로 열심히 치워놓아서 생긴 착각에 불과했다.

인도쪽에 쌓였던 수많은 눈은 내 키보다도 더 큰 높이로 옆에 쌓여있으며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유심히 보니, 눈이 수십cm 이상 쌓인 채로 굳어버리는 바람에

그냥 도로면 전체가 위로 올라와 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과연 겨울 삿포로는 느낌이 틀리다는 생각에 기분이 매우 좋아진 채로 호텔을 찾으러 나선다.

물론 중간에 볼만한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게 카메라는 손에 쥐고 있다. 생각한 것보다 걷기가 수월해서 카메라 박살낼 가능성은 좀 줄었다.

 

삿포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 녀석은 일본에서 한개밖에 없는 구식 원형 우체통.

원형 우체통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응모받은 디자인으로 설치한 녀석이라고 한다.

2001년에 설치한 녀석이면 분명 나로서도 몇 번은 봤을 법한 위치에 서 있는데

막상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 걸 보면, 처음 와보는 겨울 홋카이도에 시선이 예민해져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말하면 여름엔 아주 태평스럽게 돌아다녔다는 말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