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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신'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12.19  2월 18일 홋카이도 - 선물 4
  2. 2012.05.23  킨키 방황 - 거품같은 축제의 마무리 10

 

 

히터를 틀어놓고 잤는데도 콧등이 시려서 잠을 깨보니 밤중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나보다.

눈은 막 그친 참인데, 새벽까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홋카이도 전역의 철도 대부분이 운행중지가 되어 있다.

어제 이동했던 오비히로에서 삿포로까지의 구간도 오후가 되어야 운행이 재개되는 듯 해서, 하루만 늦었다면 꼼짝없이 이곳에 갇힐 뻔 했다.

 

삿포로가 대도시이긴 해도 어제 밤처럼 시야를 가릴 정도의 눈이 쏟아지면 조심해야 한다.

몇 년 전에 불과 자기 집 대문 십여 미터 앞에서 길을 잃어 동사한 사람이 뉴스에 나왔을 정도니까.

 

자금과 시간적 여유만 널널하다면야 폭설로 인한 귀국 연기라는 사고도 한 번쯤 겪어볼 만한 일이지만

이제부터 미련 가지는 것은 만족스러웠던 여행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으니 시원한 기분으로 짐을 챙긴다.

 

신 치토세 공항 국제선은 차별이라 느껴질 정도로 한산하다. 홋카이도를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인가.

홋카이도 모든 지역의 쟁쟁한 기념품, 선물, 식당가가 포진한 국내선과 달리 국제선쪽엔 편의점 수준의 가게 한두 점포밖에 없다.

자국민 우선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이 선물을 사기 위해 국내선 라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

 

 

 

현실적으로는 당연히 신 치토세 공항의 수요와 크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다.

원래 자위대 공항이었던 녀석을 민간용으로 확장 개조했기 때문에 마음껏 확장하기엔 힘든 면이 있었으니까.

 

국제선도 원래 국내선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었을 정도지만 워낙 수요가 폭증하는 바람에 새로 지은 것이 지금의 국제선.

수요가 없어서 간당간당한 다른 지방 공항들과 달리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딸려서 골치를 안고 있는 곳이다.

이런 국제선과 국내선간의 현격한 차이와 거리를 해소하기 위해 나름 신경은 쓰고 있다.

 

무빙워크도 있지만 그보다 더 편리한 수송을 위해 사파라 관람열차같은 전동차 두 대가 왕복중이다.

나이든 사람이나 짐이 많은 사람만 타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그런 거 없고 그냥 마음껏 타시라고 하며 나를 불러세운다.

걸어가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 뒤에 탄다. 기념 사진도 한 장 남기고.

 

운전중에는 보행자를 위해 경쾌한 맬로디가 울려퍼진다. 사소하지만 공항에 대한 인상을 좋게 만드는 배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원서 사 오는건 매번 있는 일이니 예상 범위 내였지만 본가에 전해줄 과자와 나침반님에게 전해줄 과자 등 부피가 큰 녀석들이 많다.

부피로 친다면, 사실 홋카이도 특산품이 아니라 닛신의 컵누들 1박스가 제일 많이 나가기는 하지만.

 

본인이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컵라면인데 예전에 나침반님한테 맛보기로 몇 개 드렸더니 꽤나 상성이 좋았던 터라

온갖 맛있는 먹거리가 가득한 이곳 홋카이도에서 편의점 직원에게 부탁해 컵누들을 박스채로 창고에서 가져오게 했다.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자기한테 맛있는 거라면 희소성 따윈 상관 없다.

 

 

닛신은 그 엽기성을 자랑하는 CM으로도 유명하다.

이제까지의 닛신 CM만 모아놓아도 어지간한 코메디 프로에 꿇리지 않을 듯.

 

롯카테의 고급 과자인 '마루세이 버터 샌드'와 홋카이도산 감자튀김인 '쟈가포클' 등을 몇 개 구입한다.

본가와 나침반님에게 각각 가지고 가려니 생각보다는 지출이 많은 편.

일본에서는 여행 후 지인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행동이 사실상 강제나 마찬가지인 예절의 일부분이라

학생들의 경우 부모가 선물용 용돈을 따로 주는 경우도 있다. 지인들 거 몇 개 사기만 해도 금액이 상당하니까.

 

원래 본인에게나 남에게나 선물은 거의 사 가지 않는 편이지만 홋카이도라면 건질거리가 좀 있으니 오랜만에 소비를 즐겨본다.

 

눈축제는 끝났는데 공항은 여전히 스노우 미쿠로 성황중이다. 과자를 사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미쿠 종이가방에 넣어준다.

일단 이것도 희소성이라면 희소성이니 곱게 가져와서 여전히 방에 보관중. 막상 희소성 생각하니 재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 조금 난감하다.

 

 

 

10일 전 이 공간에 미쿠라는 괴생물체가 빡빡히 들어서 있었는데

공식적인 축제도, 개인적인 축제도 끝난 지금은 매우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원래는 이렇게 넓은 곳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눈축제 기간 중 그러지 않아도 빡빡한 공항에 대량의 오덕을 몰고다니는 미쿠까지 들어서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쿠의 저력은 만만하지 않아서, 구석에서 여전히 방문객들의 마지막 지갑까지 털어가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여행 후 선물은 사람들간의 친근감의 척도로 사용될 수도 있는 중요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에게만 주려고 구입해도 그 부피가 감당하기 힘들어 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공항에서 택배 서비스가 성황중인 것. 한국과는 이런 점에 있어서 정서가 많이 다르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미쿠가 덤벼들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마토 택배와 미쿠가 콜라보레이션을 맺었다.

 

일반인이라면 저걸로 택배 서비스를 보내는 정도는 홋카이도에서의 소소한 이벤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고

오덕이라면 아마 택배 보내지 않고 박스만 사 갈 듯한 느낌이 든다. 본인도 젊을 때는 열혈 오덕이었으니 왠지 상상이 된다.

 

 

 

어제 징기스칸 폭풍흡입과 더불어 오늘 아침도 조식을 빵빵하게 즐기고 왔기 때문에 식사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혹시나 또 폭설로 열차가 연착될까봐 시간을 매우 넉넉하게 잡아 도착했고

쇼핑도 대충 다 끝냈으니 남는 시간은 역시 식당에서 때우는 것이 제일 좋다.

 

벌써부터 줄이 생겨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음식점도 있지만 지금은 라멘이나 고기류는 조금 부담스럽다.

가벼운 음식을 찾으려고 몇 바퀴 돌다가 한산한 소바집으로 들어간다.

 

이 블로그를 오래 접한 사람들은 본인이 나가노현의 300년 넘은 소바가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듯.

그래서 이런 공항 소바집에서 엄청 기대를 크게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나가노의 가게 역시 메밀을 이곳 홋카이도에서 공급받고 있을 정도로

홋카이도 메밀은 품질이 상당히 좋기로 유명하다. 속에 부담이 없어서 선택한 메뉴니 기본만 해 주면 후회없을 듯 하다.

 

국수 자체는 나쁘지 않은 레벨이지만 역시 소바는 찍어먹는 소스인 쯔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나가노의 쯔유와는 비교하기가 아쉬운 평범한 레벨이라서 그냥 그렇군 하면서 후루룩 집어넣는다.

 

 

 

뿌듯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활주로를 벗어나는데 하늘이 마지막으로 멋진 선물을 선사해 준다.

방금 전 신 치토세 공항은 운이 좋게도 살짝 눈이 그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위로 올라와 보니 알 수 있었다.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의 외계인 공중전함의 공습을 생각케 하듯 일렬로 위압감을 뽐내는 눈구름이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고보니 이곳에 입국할 때도 두터운 눈구름을 내려다보며 두근두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고마운 날씨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눈만 오면 지루할까봐 맑은 하늘도 하루에 몇 번씩 보여주고, 꼭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엔 여지없이 쏟아부어 주었으니까.

10일간의 짧은 여행동안 날씨가 이렇게까지 도와 준 적은 드물다. 여름의 혹한보다는 오히려 편안했던 편이기도 하고.

 

 

 

여러 번 가면 점점 식상해져서 발걸음이 뜸해지는 곳도 있지만

홋카이도는 적어도 짦은 생애 한 순간동안은 아무리 찾아가도 지루해 질 틈이 없는 곳이다.

가장 일본적이지 않은 곳에 살짝살짝 보이는 일본적인 특성이 특히 그렇다.

나름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본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 묘한 이질감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혼자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일거리만 찾을 수 있다면 이 근방에서 가장 정착해서 살고 싶은 곳이다.

시야를 길게 본다면 사실 나가기 좋아하는 성격상 평생을 틀어박히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운 여행이든 후회가 남는 여행이든 끝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아쉬움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예 여행에 인생을 던져버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 아닐까.

 

 

 

돌아와서 바로 나침반님과 만난다. 내려가기 전에 선물을 전해줘야 하니까.

동대문의 밤거리에 도착하니 역시 사방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여기가 한국'이라는 느낌이 엄습해 온다.

멀리서 보면 쌍동이같아도 가까이서 보면 정말 달라도 이렇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다.

 

국밥을 주문해도 알았다던가 고개를 끄덕인다던가 하는 리액션 하나 없이 휙 돌아 가버리는 아줌마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역시나 한국'이다.

사실 더 풍족해질리도 없지만, 아무리 풍족해진다 해도 불친절이 친절로 바뀔 일은 절대로 없다. 친절은 부유함에서 오는 사치가 아니다.

 

 

 

나침반님에게는 닛신 컵누들 한박스와 쟈가포클 한박스, 마루세이 버터 샌드를 선물로 건내드린다.

나침반님 집에는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살짝 걱정이긴 하지만 25도 이하에서만 보관하면 괜찮다고 적혀있으니 뭐.

 

오비히로에서 시작한 제과점 롯카테의 간판 스타같은 녀석으로, 모든 재료를 토카치산으로 사용한 고급이다.

가지고 온 선물 중에서 크기는 가장 작지만 가격은 가장 비싸다. 포장이 너무 고급스러워서 부담갈 정도.

본인이 사서 먹는 것이야 아무렇게나 포장해도 관계없지만 역시 선물이 주가 되는 과자다 보니 예의바르게 포장되어 있다.

 

 

 

다행히도 훗날 나침반님이 맛있었다고 평가하셔서 구입한 보람이 있었다.

집에도 하나 들고 왔는데, 엄니는 역시 포장에 질겁을 하셨다. 뜯기가 아깝게시리 뭐하러 이렇게 멋지게 싸 놓았냐고.

 

허물없는 가족끼리야 사실 이런 거 구입해 봤자 감흥없이 확 뜯어서 팍팍 씹어먹을 뿐이다.

아무래도 '가족끼리 시식용' 이라고 저렴하고 엉성한 포장지를 두른 상품을 따로 발매해 줬으면 싶다.

 

 

 

쿠키 속에 진한 버터, 그리고 사이사이에 건포도가 들어간 살짝 고풍스러운 과자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본인에게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분석적으로 파고든다면 재료의 질이 워낙 뛰어나서 아껴 먹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달고 짠 맛과 함께 스폰지처럼 부드러운 쿠키와 농후한 버터의 고소함이 조화롭다. 요 한 조각이 2000원쯤 하니 결코 싼 가격은 아니다.

개인적으로야 양보다는 질이기 때문에 싼 과자 많이 먹는것 보다야 이런 거 한개씩 먹는게 훨씬 만족감이 크긴 하다.

입맛이 저렴한 편인지, 그냥 신선한 오징어만 씹고 있어도 다른 과자 생각이 나지 않는 편이지만

역시 1년이나 되다 보니 사진 정리할 때 가끔 이 녀석의 맛이 생각나기도 한다.

 

 

 

오타루에서 이별할 때 Y양이 선물로 덥썩 사 줬던 초콜릿.

선물은 사실 이쪽에서 줘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하나 받아버려서 조금 난감했다.

 

연락을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도 키타미에서 한국어 교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본인 역시 키타미 주변에 일자리만 있으면 당장 짐 싸서 날아갈 생각이었지만 아쉽게도 교습소 원장이 한국인이라 그건 포기.

오랜만에 안부나 물어볼까 싶다. 사실 여건만 된다면 2015년 2월에도 당연히 날아가고 싶지만.

 

 

 

왁자지껄한 밤풍경이 한국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역시 이런 도시 모습은 내 취향이 아니다.

활기와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모습은 활기가 아니라 발버둥으로밖에 안보인다.

 

나침반님은 서울 토박이지만 역시 나만큼이나 서울 좋아하지 않는 듯. 그러니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겠지.

일단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는 점에서 삿포로와 크게 차이가 난다. 10일동안 눈바닥 말고는 본 기억이 없다.

눈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기분. 황량한 아스팔트 도로를 보니 금새 홋카이도가 그리워진다.

 

사람이라면 무릇 자제심을 갖고 살아가야 하니 2015년 겨울에 다시 날아가는 사치스러운 일은 하지 않겠지만

시간이든 자금이든 여유만 있다면 언제나 파묻히고 싶은 곳이 홋카이도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되는 기분으로 나침반님과 헤어진다. 이제 깨어날 시간.

 

 

이제 이벤트장 하나만 더 지나가면 종착지인 난바역.

마지막 이벤트장에서는 미도스지 미나코이 그랑프리(御堂筋みなこいグランプリ)가 열리고 있었다.

미나코이라는 단어는 전혀 들어본 바가 없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추고 있는 춤은 요사코이춤(よさこい踊り)이다.

 

요사코이란 코치현(高知県)에서 시작된 일본의 전통 집단군무인데, 서민들의 축제 전야제 의식으로 시작된 춤이라서

기본적인 몇 개의 규칙만 지키면 남녀노소, 음악의 종류, 안무의 형식, 의상 등등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절제되고 웅장한 춤에서부터, 신나게 날뛰는 춤까지 매우 다양하고 창작적인 형식을 선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본 각지에서 이런 요사코이 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전통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꽤나 자유로운 군무.

 

한일 문화 페스티발 같은 곳에서는 이런 요사코이춤의 배경음악으로 아리랑이 흘러 나오기도 하는 등, 타문화에 녹아들어가기에도 좋은 녀석이다.

 

 

 

일단 대회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출전 팀들은 꽤나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응원단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깃발에 맞춰 한 동작 한 동작 절도있는 움직임을 피로하고 있는 중.

 

아오모리현(青森県)의 대표적 축제인 네부타(ねぶた) 축제는

그야말로 누구나 행렬에 뛰어들어서 마음 가는대로 춤추며 소리를 지르는 야성의 기쁨이 살아있는데

요사코이춤은 형식에 있어 자유롭긴 해도, 정해진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집단 군무에 속하기 때문에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일종의 예술 행위 관람으로서의 매력이 있다.

 

 

 

말 그대로 동네 아주머니도 옆집 꼬맹이도 참가할 수 있는 춤이라서 연령대가 다양하다.

이번에 나온 팀은 꽤나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분위기라서 일종의 신성함이 엿보인다.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받는 대회다 보니 나름 힘을 준 것이겠지만, 막상 정말 축제날에 가 보면

거의 전성기의 X-JAPAN 같은 펑크록 스타일과 모히칸 머리를 한 젊은이들이 날뛰는 요사코이춤도 있으니

이런 사진만으로 요사코이가 어떤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고 슬그머니 운을 띄워 본다.

 

 

 

나처럼 우연찮게 축제에 찾아든 관광객도, 작정하고 구경하러 온 타지인도 있겠지만

이런 분위기의 축제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오사카 시민들을 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만들어가고 즐기는 그런 축제.

 

거대한 규모와 압도적인 스펙타클을 보여주는 일본 각지의 대표 축제들과 비교하면

분위기 좋은 까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듯한 친근함을 가진 축제라는 느낌이다.

 

그냥 자동차에 점령되던 미도스지의 대로 중앙을 산책하듯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길만큼 즐긴다는 감각.

입장료도, 긴 대기시간도 필요 없는 가벼운 축제지만 일요일 오후에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는 의미로서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이런 축제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던 내가 운좋게 이날 오사카에 도착한 것은 여행중 만나는 돌발적인 보물과 같다.

 

 

 

난바역에 도착한 후 다시 요시노야에 들어가서 규 나베동(牛鍋丼)을 하나 주문한다.

배가 고팠다기 보다는, 아침에 사진을 찍지 못한게 마음에 걸려서. 

 

규 나베동은 규동의 소고기를 조금 줄이고 두부와 당면을 넣은 녀석. 고기가 줄었으니 규동보다 가격은 좀더 저렴하다.

한국에서 규동을 한번 먹어봤는데, 가격도 요시노야보다 비싸고 맛은 정말 먹다가 내다버릴 정도라서

규동 먹으려면 일본 가야겠구나 싶은 생각에, 일본 갈때면 한번씩 먹곤 하는 요리다. 대(大)자 이상이 아니면 간식이라고 할 만큼 양이 적지만.

여행중 일본사람에게도 물어봤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라 일본사람에게도 보통 사이즈의 규동은 배가 전혀 안찬다고 하더라.

 

자전거 여행중 꽤나 즐겨먹었던 규 김치국밥이라는 메뉴가 사라져서 조금 아쉽다.

한국의 김치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지만, 일단 고춧가루를 쓴 붉은 음식이라는 것 자체가 꽤나 그리웠던 시기라.

 

 

 

지금은 사라져버린 메뉴인 규 김치국밥의 모습.

이 사진은 2010년 나고야 헌혈센터에서 헌혈 한번 해주고 난 뒤 근처에서 영양보충했을 때.

 

숙성되지않은 싱싱한 배추일 뿐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그리운 맛이었다. 가격도 싸서 여행중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국밥이라고 하기엔 국물에 든게 너무 없었지만, 저렇게 밥을 말아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일본에서는 그나마 한국 냄새 나던 음식.

 

 

 

난바역 근처엔 그럭저럭 큰 서점인 쥰쿠도(ジュンク堂)가 있긴 한데

막상 축제길을 다 걸어오고 나니 피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

넷까페에서 새우잠 2시간 잔 후, 거진 14시간 가까이 계속 걷기만 했으니.

 

몸은 이미 형편없는 체력으로 돌아와 있는데, 마음만은 계속 1년간의 자전거여행 당시에 맞춰져 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라고 생각하고 다니는데도 체력은 예전같지 않다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서점에 들어가면 보통 두시간 정도 책을 훑어보기 때문에, 지금 체력으로는 그것도 상당히 무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한 강행군이 준비되어 있으니 오늘은 이정도로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내일 코야산 가기 위해 난바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칸사이 스루패스 2일권을 구매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종료한다.

외국인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스루패스 티켓이라서 여권까지 확인하고, 구매명단 리스트까지 작성한 후 티켓을 건네준다.

 

참 징하게도 세세한 곳까지 신경쓰는구나 싶었는데, 그런 나라가 얼빠진 대처로 치명적인 원전사고를 일으켰다는 건 일종의 희극이다.

낙하산 인사들의 편안한 안식처였던 도쿄전력 임원들이야, 고위공무원의 얼빠진 나태함은 일본이라고 해서 빗나갈 리가 없지만

자신들이 원전 사고로 입은 피해만큼이나, 지금 일본인들은 그 우쭐해 하던 프라이드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 거다. 애써 외면하고 싶겠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돈내고 전철 두 코스 타기는 싫어서 왔던길을 다시 돌아간다.

내일 스루패스를 사용하면 칸사이 각 도시를 잇는 전철은 물론 오사카 시내의 왠만한 전철도 전부 무제한 사용가능하기 때문에

오늘 전철 타는건 왠지 손해본다는 느낌이 강하다. 사실 호텔까지 가는데 한국 돈으로 3천원만 내면 되는데도.

여행가면 얼마 안되는 돈은 최대한 아끼고 비싼건 팍팍 써버리는 이상한 금전 감각이 발동해 버린다.

 

오후 6시쯤 다시 미도스지 거리를 걸어가는데, 그 북적이던 이벤트장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싹 정리되어 버리고

벌써 자동차들이 평상시처럼 운행을 하고 있다. 물론 도로쪽이나 인도쪽이나 쓰레기도 눈에 띄지 않고 평소 그대로.

한국에서 축제 뒤에 남겨지는 쓰레기더미의 산을 자주 봐 온터라, 5시간 남짓한 축제만큼이나 이런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다.

 

40분 정도 걸어서 숙소에 도착. CM 광고에서 나에게 깊은 임팩트를 주었던 닛신 컵누들(日清カップヌードル) 하나 사들고 간다.

기름많고 짜기만 해서 인스턴트 컵라면은 한국에 비해 영 맛이 없는데, 이 컵누들만큼은 내 입맛에 잘 맞는다. 시푸드나 카레맛 말고 오리지날이.

 

 

 

나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컵누들 광고 그 첫번째.

중간의 일본어 부분을 간략하게 해석해 보자면

 

'아들내미는 중3. 수험공부 하고 있었다 (있었다)'

'야식 컵누들, 엄마가 잊어버렸다(잊어버렸다)'

'아들내미는 삐졌다'

 

왠만한 일본 버라이어티 쇼보다 이 광고가 더 재밌더군.

 

그리고 충격과 공포 그 두번째.

 

 

 

이건 뭐 해석할것도 없이 '딴거 싫어~ 컵누들 좋아~' 다.

 

 

뜨거운 물 받아놓고 욕조에 몸 누이니 온 몸이 짜릿짜릿한게 정말 무리좀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숙소에 돌아와서 긴장이 풀리면 느껴지는 그 무거운 감각이 평소보다 훨씬 심해서 스스로도 놀란다.

침대에 누우니 밑으로 몰렸던 혈액이 쏵 퍼지는 걸 느끼며 TV 틀어놓고 되는대로 보다가 새벽 1시쯤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