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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캇'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06.16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16
  2. 2008.06.23  아메리칸 갱스터 (American Gantster, 2007) 2
  3. 2008.04.30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 (Kingdom of Heaven Director's cut, 2006) 2

 

 

 

 

참 난감한 영화다.

 

감상하면서도 '이거 리뷰쓰기 어렵겠는데'라고 생각했던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 2011)보다 훨씬 더 썰을 풀기가 어렵다.

분명히 내 스타일에 잘 맞는 영화고, 시간가는줄 모르고 재미있게 감상했는데

다 보고나서는 걸어나오는 동안 바로 다음 상영날짜 검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관람 3일만에 또 다시 감상하고 나서도, 참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마음이 잡히질 않는다.

 

유명 사이트나 리뷰에 영화에 대한 해석은 거의 다 나와있으니 딱히 거기에 덧붙힐 말은 없는데,

이 영화는 이해하기 어려운게 아니고, 감독이 해석 자체를 해 놓질 않았기 때문에 난감한 영화.

 

하지만 확실한 건, 감독의 능력이 부족해서 빠뜨린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해석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 무한한 추측이 가능한 여러 요소들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영화 내적으로 설명 가능하도록 미세한 부분까지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이 영감의 괴팍함과 꼼꼼함에 감탄하며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다만 중간중간 연결이 어색해 보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데, DVD나 블루레이 버전엔 분명히 추가장면이 들어갈 거라고 예상.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만큼 기대했던 작품. SF 호러의 걸작 에이리언(Alien, 1979)과 연관성이 풍부한 작품인 동시에

헐리우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스타일리스트인 감독이 오랜만에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장르였기 때문에.

 

스캇 감독은 안드로이드라는 매체를 통한 메시지 전달이 주특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에이리언부터 시작해서, 블레이드 러너는 말할 것도 없고. 이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스캇 감독의 안드로이드 인생을 총망라 하는 듯 절묘한 포지션을 차지해, 사실상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

 

안드로이드가 사람이라는 인격체를 넘어선 것은 이미 블레이드 러너때 증명되었고,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이었던 '로이 베티'와 달리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인지, 데이빗은 이미 인간미를 의도적으로 감추기까지 하는 캐릭터.

그에게 남은 유일한 족쇄는 자신의 '창조주'뿐, 지루하게 논의되던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 있는가'라는 낡아빠진 의문 따위는

영화 초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며 대사를 음미하는 데이빗의 모습에서 이미 종결된 것이다.

 

외우주를 항해하는 기술력을 가진 시대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로봇 이외의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 장면들을 보니,

그 어리석은 창조주들을 냉소하며 자신이 해야 할 계획을 교묘하게 진행해 가는 데이빗은 단연 인간을 초월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 엘리자베스 쇼의 마음, 믿음을 통한 의미없는 신념에의 집착은,

그가 안드로이드라서가 아니라 초월자로서 미물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인해 생기는 의아스러움이라고까지 느껴진다.

영화의 후속작이 나온다고 가정하면, 데이빗은 아마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 감정마저 이해하고 더욱 완성되어 가지 않을까.

 

이야기의 중심에 드러나지 않는 그의 행동 역시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결과라는 느낌을 받도록 영화는 구성되어 있다.

엔지니어:인간 = 인간:데이빗이라는 공식이 명확하게 성립하기 때문에, 감독이 무심하게 버려둔 엔지니어의 의도는

관객이 직접 저 등식에 대입해서, 인간과 데이빗 사이의 관계를 통해 유추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위치에 있는 관객은 그 객체의 차이성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가설과 토론을 낳는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논란은 둘째치고, 이만큼 다양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능력만큼은 블레이드 러너 시절과 변한게 없는 듯.

 

블레이드 러너의 광팬이라면, 이번 작품의 찬란하다고까지 할 만한 경이적인 비쥬얼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을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수십년 전의 필름질감이 가져다 주는, 자신 역시 그 장소에 있었다는 아날로그적 동질감을 이 작품에서는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

블레이드 러너 당시, 화염을 뿜어내던 암흑의 도시 LA의 모습은 30년이 지난 지금, 현실로 다가오지만

이 작품의 황량하지만 놀라운 모습은 아직 머나먼 미래의 꿈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블레이드 러너가 현실감을 가득 간직한 SF 영화라고 한다면

이 프로메테우스는 SF의 껍데기를 쓴 고대 신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기원을 외계에서 찾는다는 소재 자체가 하드SF와 연관짓기엔 너무나 모호한 영역이라서

감독의 불친절함 만큼이나 이 작품에서 SF적 고증을 바란다는건 무리가 있는 듯. 여기저기 오류 투성이다.

 

역사서에서 지워진 부분들을 상상해 내듯이, 이 작품은 노골적으로 신화 시대의 낭만을 그로테스크적으로 풀어낸다.

타이틀 자체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고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프로메테우스' 아닌가.

물론 인간의 창조 자체가 숭고한 희생이었는지, 우연의 산물인지, 그가 받는 고통의 발현인지조차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수도승 복장을 하고 나타난 엔지니어의 모습만 봐도, '스캇 영감 참 짓궂기도 하구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갔으니.

저기 포스터의 영어만 해석해봐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인류의 탄생이라는 (우리들만의) 축복이 과연 진짜 축복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영화.

'왜 인간들은 자신을 만들었을까'라는 데이빗의 질문에 너무나 무심히 대답해 버리는 할러웨이. 그에 대한 데이빗의 냉소.

평생을 창조주와 만나기 위해 바쳤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할러웨이가

정작 창조주의 입장에서 그토록 무심한 대답을 입에 담은 이유는, 분명 데이빗이 생명체가 아닌 로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엔지니어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을까. 인류 탄생, 구원자에 대한 신화는 대체로 희망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어쨌든 인류의 탄생은 인류에게는 축복의 시작이었으니까. 하지만 과연 창조주의 생각은?

 

엔지니어의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는 감독이지만

영화 곳곳에 묘한 설정들을 집어놓은 탓에, 더더욱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 수만년 전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프로메테우스 호가 LV-223에 도착한 날은 크리스마스, 엔지니어의 목 잘린 시체는 2000년 전의 것. 그리고 일어나는 '불가능한 수태' 까지...

이런 장면들은 너무 노골적이라서, 스캇 감독이 에이리언의 명성을 뛰어넘는 거대 서사시를 다시 한번 세우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실제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시리즈는 2편인 에이리언이지만, 아버지격인 스캇 감독은 그런 재생산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원래 에이리언 1편의 프리퀄로 제작되다가 중간에 변경된 작품이라서, 완전히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는 장면들이 나온다.

스토리 전체에 에이리언이 관계되는 일은 없고, 단지 팬서비스 정도의 장면만 넣어놨을 뿐이지만

팬들에게는 스페이스 죠키의 정체가 알려진 것 하나만 해도 30년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듯한 쾌감이 느껴질테니까.

 

스캇 감독은 인터뷰에서 '에이리언이라는 작품은 훨씬 더 흥미롭고 방대한 요소가 있지만, 다들 제노모프(에이리언)에만 신경쓰는 모습때문에'

그 대답으로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이 작품에서 제노모프는 이야기에서 완전히 제외시켜도 딱히 문제가 없는 수준.

영화속에서 절대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몇 가지 궁금증들이 대부분 에이리언에 등장했던 스페이스 죠키와 제노모프에 관련된 점이라는 걸 보면

이 작품은 거대한 서사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에이리언이라는 작품에 종속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듯한 느낌이 든다.

 

고대 문자 한두개 해석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르듯, 이 작품 역시 신화적 상상력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던져주지 않는다.

되려, 해석을 내려버리면 신화로서의 가치가 사라진다고 봐도 될 듯. 그래서 이 불친절한 영화의 후속작을 꼭 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더 이상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들기도 한다.

척 봐도 역시 블레이드 러너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실로 리들리 스캇 감독다운 작품인데, 이 작품의 논란도 꽤나 오래 갈 듯.

 

캐릭터들의 특징 역시, 친절한 해설이 거의 없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추론 요소로 작용하는데

각각의 분석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제껏 쓴 분량의 몇 배는 되는 글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냥 심심풀이로 적는 포스팅은 이 정도로만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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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치오 델 토로, 알 파치노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손꼽는 덴젤 워싱턴과
블레이드 러너, 킹덤 오브 헤븐으로 명실공히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된 리들리 스캇 감독이 만났다.
거기다 좋아하진 않아도 연기력으로는 위의 배우들에 비해 떨어질 것 없는 러셀 크로우에
조쉬 브롤린(악역형사 트루포), 쿠바 구딩 주니어(클럽점장 니키) 등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조연에 포진.

이거 뭐 완전히 나를 위한 영화가 아닌가.

거기다 킹덤 오브 헤븐 이후 간만에 보는, 내 입맛에 짝짝 맞는 굴곡 심하지 않고 무거운 영화라서
긴 플레이타임 동안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젠 영화 시작하기 전 날아오르는 새 모습만 봐도 미소가 번지네.

친구 강군이 이 영화를 미국서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정말 실화였다니~' 란다.
난 실화인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저런 거물과 부패 경찰들이 정말로 잡혀 들어갔다니' 였다.

한국에서 저 정도 거물이 설친다면 잡혀 들어갈 리가 없으니까.
커넥션은 전부 정치, 법조, 재벌가에 연결되어 있을테니 설사 거물 하나는 들어가더라도 커넥션이 잡힐리가 없다.

보는 내내 2008년의 대한민국과 1970년의 미국이 대조되었는데, 타락의 정도로 따지면 둘다 만만치 않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 드러난 범죄에 대한 처벌은 미국이 30년 후의 한국보다 월등히 앞서 있는게 사실인 듯 하다.
변변한 증거도 없던 그 시절에 비해, 자기 입으로 범죄사실을 떠벌리는 영상이 떠도 떳떳히 대통령 되는 사회니까.

외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영화 이야기에서 벗어나버리니 이건 그만하고.

이 영화 역시 스캇 감독의 철학이자 고집인 극한의 리얼리티 추구가 여기저기서 드러나 있는 영화다.
그 당시를 뉴저지와 뉴욕에서 보냈던 사람이라면 그때의 모습에 꽤나 놀랄 정도로 당시를 잘 표현했다.
'블레이드 러너'같은 SF 에서도, '에일리언'같은 호러에서도, '매치스틱 맨' 같은 드라마에서도 그의 리얼리티는
영화 전체의 뼈대를 단단히 받쳐주는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물론 G.I 제인이나 글라디에이터 같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버리고 싶은 영화도 있긴 하지만.

구성이 밋밋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 이 작품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밋밋한 구성 중에서 이만한 몰입도를 주는
작품은 스캇 감독의 그것 이외에는 찾기 힘들다. 그건 역시 탄탄한 구성력과 리얼리티에서 나오는게 아닐까.
시청각적 만족감으로 보자면 스탠리 큐브릭, 제임스 카메론과 함께 장인정신마저 느껴지는 인물이라서
작품을 볼 때 마다 이런 사소한 곳에도 집착적인 면을 보이는 그의 집념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질 정도다.

갱스터 영화는 장르적 특성이 매우 확고하고,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들이 몇 개씩이나 포진해 있는 장르라
이 영화 역시 감상 전부터 그 명작들의 비교 대상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진행 방식에서는 결국 눈감고도 줄줄 욀 정도의 정형화를 보여주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20세기 중후반을 아우르던 미국 갱들의 인생이란, 이제는 식상해 버릴 정도로 영화같은 삶이었다는걸 반증하는거나 마찬가지.

'정의'라는 개념에 선악의 가치판단을 없애버리면, 덴젤 워싱턴과 러셀 크로우라는 두 인물이 탄생한다.
결국 영화가 우리에게 감정적 동의를 유발시키는 저 두 인물은 자기가 할 일 착실하게 수행하고, 딴 생각 품지 않은 프로페셔널이란 거다.

덴젤이 처음부터 프로의 본분을 직감하고 있던 것에 비해
러셀은 중반후 법정에서 아내에게 쓴소리 한번 듣고나서 그걸 깨닿는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사전 전후의 러셀의 연기를 살펴보면, 과연 이 배우 보통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기 그지 없다.
그 미묘한 심리 변화를 안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과 대사 몇개로 표현해 낸다는 점, 배우로서는 자랑스러워 할만한 능력이다.

덴젤이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던 범피가 가장 질색했던 '생산자와 직거래'를 직접 실천해 성공하는 점과
그렇게 청렴결백에 집착하는 러셀이 가정적으로는 형편없는 바람둥이에 불과하다는 점이 교차되어 드러나는 점도 이 영화의 백미.

겨우 그 정도 마약에 70년대의 미국 사회가 얼마나 흔들렸는가를 생각하면,
1800년대 중반 중국을 나른하게 만들었던 아편의 위력은 상상도 못할 정도고, 그러고도 되려 전쟁을 일으킨,
얼굴에 특수 탄소섬유강을 도배한 당시의 영국이란 나라의 추악함도 상상하기 힘들다.

스캇 감독의 영화는 항상 영화 알맹이와 함께 미장센 등의 매니아적 즐거움,
그리고 이놈의 세상 돌아가는 꼴에 대한 탄식도 곁들일 수 있어서 항상 관람후에 배가 부르다.

제발 오래오래 살아서 영화 좀 더 만들어 주시길.
제임스 카메론이야 아직 창창한데, 당신은 이제 옆에서 보기에 걱정이여..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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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영화들을 잘 만들어 줘서 매우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인 리들리 스캇이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실망했던 영화가 '글라디에이터'였다 보니 이 영화도 내심 기대 반 불안 반으로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극장에서 감상 후에는 여전히 낙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주로 나오던 불만이었던 '밋밋한 스펙타클'이 문제가
아니라, 전개의 개연성이 상당히 들쭉날쭉했다는 점에서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랙 호크 다운'같은
영화에 애초에 정치적 공정성따윈 기대도 하지 않은 터라 스캇 감독 특유의 세심하기 짝이 없는 미장센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는데, 에픽물에선 그것만큼이나 서사의 흐름이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기 때문에 거기에만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블랙 호크 다운'의 경우엔 '라이언일병 구하기'와 멋진 승부를 펼치면서도, 두 작품 모두 공정성과는 담 쌓은 작품이라
딱히 어느 한 쪽이 두드러져 보이진 않았는데, 이 '킹덤 오브 헤븐'에는 뛰어넘어야 할 막강한 벽이 버티고 있었다.
에픽물에선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시대의 명작 '반지의 제왕'의 절대적인 명성이 그것이었는데, 올리버 스톤 특유의
느낌은 잘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참을성을 시험하는데 일조해 버린 '알렉산더'나, 대놓고 전통 블록버스터
영화를 표방한 볼프강 페터슨의 '트로이'등의 작품들이 거센 비평과 함께 침몰해 버린 전례가 이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극장개봉판 사상 초유의 동시 3부작 제작을 힘에 입은 거대 에픽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하기엔 그 후의
작품들이 억울할 지경이었고, 가뜩이나 긴 상영시간 덕에 무리없이 짜여 있었던 구성의 탄탄함도 상상을 초월하는
확장판의 퀼리티 덕분에 그 명성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했는데, 애석하게도 이 '킹덤 오브 헤븐'은 극장 개봉판으로는
그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구멍 쑹쑹 뚫린 전개를 보여주는 바람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꽤나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생략해 버린 터라 필연적으로 나올 감독판이라고 해서 더 좋아질
수 있으려나 걱정도 했었는데, 나의 사랑스러운 리들리 스캇 감독은 내 기대를 몇 배는 뛰어넘는 최고의 감독판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비교적 개봉판과 확장판의 차이가 심했던 '왕의 귀환'보다 훨씬 더 큰 차이를 보였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있겠는가. 추가된 50분 가량의 장면과 결합된 감독판은 아예 이야기 자체가 판이하게 틀려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환골탈태했다. 이것은 부족했던 설명을 덧붙였다기보다는, 아예 등장하지조차 않았던 스토리를 집어넣어
훨씬 깔끔하고 납득 갈 만한 전개를 만들어내는 수준이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개봉판 영화에서의 주된 불만이 어색한 이야기 전개였던 사람이라면 두말 할 것 없이 감독판
을 다시 봐야 할 것이다. 감독판은 리들리 스캇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밀도높고 응집력 높은 전개력을 자랑하는
진정한 에픽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블랙 호크 다운'에서 조금씩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조명 포기'는, 덕분에 가장 리얼한 근대전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해 줌과 동시에 아쉬운 점 역시 남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반대로 '너무나도 중립적'이라는 불평이 터져나올 정도로 시종일관 담담한 시점으로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내 입장에선 '블랙 호크 다운'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단번에 씻겨 나갈 정도로 만족한 편이었는데
의외로 이 극도의 중립적 시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스펙타클한 쾌감의 감소가 많은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었나 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거의 제 2의 '블레이드 러너'라고 느껴질 만큼 눈 돌아가게 만드는
엄청난 미장센과 역사적 고증이 가미된 공성전 씬이 얼마나 놀랍게 다가왔는지. 흥분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역사적 사실과 영화 내 이야기와의 차이점은 상당수 존재하지만, 스캇의 특기인 집요한 리얼리티 추구의 결과
영화 내 등장하는 건물, 의상, 소품, 전쟁 등 거의 모든 시각적 요소들은 그보다 더 할수 없을 정도의 사실성을
자랑하고 있다. 섬세하기 그지없었던 '반지의 제왕'의 그것조차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니 말이다.

논란이 많았던 발리앙 역의 올랜도 블룸도 그 소심하고 내성적인 느낌을 소화하는데 제격이었고, 시대상과 비교해
볼 때 조금은 과하지 않나 싶은 그의 휴머니즘 사상도, 작품 전체를 꽤뚫고 있는 감독의 중립성을 대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과장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의 괴리감조차 없으면 더욱 밋밋한
작품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역설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한데.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도덕성을 떡쳐먹고 있는 현실속에서 발리앙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련한 향수마저
느껴지니 말이다. 쑥맥같아도 차라리 그게 낫다.

여러가지 면에서 감독판은 에픽물을 아주 싫어하는 부류만 아니라면 누구에게라도 추천해주고 싶은 제대로 된
명작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하고 싶다. 감독판을 5점 만점이라면 개봉판은 2점 정도밖에 줄 수 없을 정도로 두 버전은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니, 극장 개봉판에 실망한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놓쳐선 안되는 작품이라고 생각.




P.S. 볼드윈 4세(극중 인물들 발음 체계가 좀 이상한 듯. 보드엥으로 읽어야 되는거 아닌감?)의 목소리를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했다는 사실을 알기는 어렵다. 굳이 이런거 알아야 영화매니아라고
자랑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 감상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니 별 의미없지만, 굳이 노튼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볼드윈 4세의 연기는 극중 최고의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주인공 발리앙 따위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존재감이 막강하다. 데뷔작 '프라이멀 피어'때 부터 감동만 받고 있는데, 이 배우 정말 놀라운 연기력의 소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