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박수는 쳐 주는데, DJ 가 혀 굴리며 흥을 돋구는 것에 비해서는 좀 조용하다.
일본인들이 공연이나 행사에서 해당 외국인들에게 그닥 감흥을 주지 못하는게 이 어중간한 호응도 때문이 아닐까.
본인 역시 양손에 카메라 들고 있느라 흥겹게 박수를 치지는 못하지만.
추운 겨울밤 이런 경기를 보고 있어도 점프 특성상 가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있어서 오히려 추워지는 듯 하다.
선수들 소개하는 점프가 끝난 후엔 본격적으로 공연이 펼쳐진다.
한 사람 점프하는 것도 조마조마한데 이젠 두셋이서 한꺼번에 점프를 시도한다.
공간 확보는 충분하겠지만 동작이 큰 스키 점프다 보니 사람들의 걱정섞인 환호성이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내일이 눈축제 마지막 날인데, 오타루를 둘러보러 갈 예정이라 실질적인 눈축제 구경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은 이벤트도 여러가지 있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서 별로 구경하고픈 생각도 들지 않는다.
조금 조용하게 넘어갈려나 싶었던 삿포로 눈축제는 그나마 마지막 밤에 이런 생기넘치는 이벤트를 볼 수 있어서 다행.
Y양 일행도 같이 보면 좋았겠지만, 한 시간 넘게 열리는 이벤트라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감도를 3200에서 6400까지 올려야 겨우 셔터스피드를 맞출 수 있을 만큼 속도가 빠른 점프라서
결과물은 거의 포기하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셔터를 누르는 연습을 해 본다.
점프대 주변에 촛점을 고정시켜 놓고 타이밍 맞춰 찍어본다던가
꼭지점에 도달할 때 즈음에 동체추적으로 선수들을 담아본다던가
점프 후 이쪽으로 이동해 오는 선수들을 패닝샷으로 담아본다던가.
선수들의 환한 미소를 보니 감각이 없어져가는 손가락도 그나마 위안을 얻는 느낌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카메라로 잡아내기가 힘든 연출이 이어진다.
시간차를 두고 서너 명이 연속적으로 점프를 하거나, 거의 줄줄이 비엔나처럼 여러명이 단체 점프를 하거나.
연사 사진을 합성하거나 동영상을 찍지 않는 이상 이 분위기를 담아내는건 불가능한데
사진 합성도 귀찮고 동영상은 취미 밖이라 그냥 적당적당히 셔터만 누른다.
보통은 열 장 찍어서 아홉 장 정도는 그대로 포스팅하는 편인데
이런 스포츠 계열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백 장 찍어서 서른 장 정도 건지는 편을 선택한다.
RAW 촬영만큼은 항상 고집하다 보니 훗날 귀국에서 편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지만
여행 사진을 편집하는 건, 남은 장수가 줄어드는게 아쉬울 정도로 좋아하는 편이라 문제될 것 없다.
전반부가 끝나고 다시 하염없이 눈발을 맞으며 대기하는 시간이 돌아온다.
하지만 선수들 안전을 위해 쉴새없이 바닥을 고르는 요원들의 모습을 보니 불평할 것도 아니다 싶다.
바닥 형태 탓인지 마치 씨 뿌리기 전 밭을 가는 듯한 느낌.
공식 촬영팀은 점프대 꼭대기에서부터 점프대 바로 옆에까지 여러 장비로 무장하고 열심히 촬영중인데
역시 이 밑에도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한 명 있다. 니콘 장비를 사용중인데, 눈발 대책으로 카메라를 꼭꼭 싸매놓은 모습이 인상적.
본인 카메라는 니콘보다 더 방진방적이 떨어지는 녀석인데도 신경쓰지 않고 내리는 눈에 노출되어 있다.
망원렌즈는 후드가 길어서 눈이 렌즈 표면에 묻을 일도 별로 없어서 그냥 되는대로 내버려 두는데
자신의 기계에 애정을 갖고 있다면 좀 더 소중히 다루어 줘야 함에도, 카메라는 그냥 도구일 뿐이지 하면서 팽개치는 성격이라.
다리도 뻐근하고 볼과 손가락은 얼어붙었고, 이만큼 봤으니 이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고생해서 날아온 눈축제 현장에서 즐기는 유일한 이벤트이다 보니 왠지 아쉽다는 생각에 끝까지 서 있기로 한다.
한밤중같지만 아직 한국사람에게는 초저녁 시간이라, 돌아가봤자 별로 할 일도 없으니.
스키 점프는 그냥 점프 모습 그대로 날아서 죽지 않고 착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할 따름인데
몸을 비틀어가면서 휙휙 날아가는 모습이 조마조마한 기분마저 들게 만든다.
점프대를 벗어나는 순간은 마치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거인이 사람들을 집어던지는 듯한 움직임이 연상된다.
일년에 눈이 일주일도 올까말까 한 지역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이렇게 휙휙 날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눈과 당연스럽게 뒹굴며 자라온 사람들일 터.
눈이라는 것 자체에 익숙하지 않는 나에게는 왠지 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종이라는 사실이 어색하기도 하다.
몇 초간의 스릴을 즐기는 운동이니 본인이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자전거 타고 몇일 몇달이고 앞에 펼쳐진 길을 달리던 그 때의 감정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녀석이 아닌가 싶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람은 어떤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지루해서 죽어버리는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성공이든 자식 잘 키우기든 스키 점프든 여행중독이든, 뭐라도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니까.
점프해서 착지하는 2~3초 남짓한 이 순간이 저 선수들에게는 인생의 가장 큰 부분으로 남지 않을런지.
점프가 막바지에 이르자 내용도 점점 과격해진다. 거의 모든 선수가 1~2초 간격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장관.
처음엔 염통이 쫄깃해지는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 되니 저 선수들이 느끼는 흥분과 쾌감이 어떤 것인지 살짝 공감이 가기도 한다.
익스트림 스포츠에는 한계가 없어서, 점점 몰입하다보면 거의 정신줄을 놓아야 할 정도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딱히 별종이라고 비난할 필요도 없는 듯 느껴지는 이유는 점프를 끝낸 직후 보여주는 저 시원한 미소 덕분이 아닌가 싶다.
뭔가를 해내는 순간 뇌속 신호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안면 근육이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달성감의 미소는
저 사람들이 이 짓(?)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익스트림 스포츠의 순간적인 쾌감이 얼마나 강렬한지는 체험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본인은 조금 더 느긋하고 지속적인 면을 추구하긴 해도 그 방향성이 동일하다 보니 은근히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숙소 잡아놓고 편안히 왔다갔다 하는 여행은 사실 조금 미지근하긴 하지만
이 사람들의 2~3초를 나는 하루 단위로 끊어가며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한참 그런 여행을 해 보지 못해서 그 반동으로 평범한 여행이라도 자주 나가게 되었는데
역시 너무 많이 참는 건 몸에 좋지 않을 듯 하다.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나가재껴도 아직 부족하냐는 말이 나오겠지만.
어리긴 해도 숙련된 선수들이니 다행히 사고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DJ의 소개를 들어보니 가장 어린 선수가 13살 정도, 최고령 선수가 마흔을 훌쩍 넘겼다고 한다.
어린 선수의 경우엔 어쩌면 올림픽을 누빌 수 있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서 롤러코스터만 타도 심장이 오그라드는데, 이렇게 새처럼 날아오를 때의 쾌감은 과연 어떤 것일런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도 저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자기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정말 새라도 된 것처럼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데
일단 다리가 저렇게까지 찢어지는 데에서부터 감탄해야 하는 본인이 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초보인 본인 눈으로 보자면 스키 점프 자체는 거의 다른 세계의 기술처럼 보여서 멍하니 구경만 하는 느낌이라면
스틱도 사용하지 않고 관객들 앞을 스르르 미끄러지며 환호에 보답하는 모습이 실질적으로 놀라움을 준다.
넘어지지 않고 전진하기도 힘든 스키를 저렇게 몸의 일부분처럼 타고 있는게 참 신기하다.
후반부 점프는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선수 전원이 연속으로 펄떡펄떡 뛰는 고난이도 장면을 보여준다.
그냥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지만 앞 선수와의 거리 조절이 잘못되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점프라 굉장히 신중하게 간격을 둔다.
앞선 선수가 착지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텐데, 이런 이벤트에 참가할 정도의 실력자들이니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활강 점프에 비한다면야 별 것 아닌 속도지만, 그래도 수십 km 는 가뿐히 넘어가는 점프를 성공시킨 사람들의 쾌감은 말로 전달하기 힘들 듯.
멋지게 착지 성공하고 나서 바로 눈 앞에 서 있는 관객들이 셔터 세례와 함께 박수를 쳐 주는 모습을 보는 것도 뿌듯하지 않을 리가 없다.
가장 왼쪽 선수가 아마도 이번 이벤트 최연소 출장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된 점프에서도 한 번의 사고 없이 웃는 얼굴을 보여주니 추운 겨울밤도 조금은 훈훈해 지는 느낌.
사실 초반 점프에서 착지가 살짝 불안했던 선수가 있었지만 넘어진 정도는 아니고 약간 주저앉은 수준이라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대회가 끝나갈수록 눈발을 더욱 거세지고 있다.
평소같으면 불평이라도 터져나올듯한 매서운 눈보라지만 축제에 몸을 맡기고 있는 지금은 아무리 퍼부어도 모자라지 않다.
이것도 부르주아틱하게 말하자면 돌아갈 호텔이 있음에서 비롯되는 자만감이지만. 자전거 여행때는 이런 날이 정말 지옥과도 같다.
대망의 마지막 점프는 사실 이제까지의 점프 중 가장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모든 참가자들이 몇 초 정도의 간격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응원이 미지근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마지막 점프가 되니 관객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마지막 선수의 점프까지 계속 박수를 이어가 준다.
폭설에 가까운 눈으로 결코 쉽지는 않을 점프였겠지만 훌륭히 멋진 모습을 보여 준 선수들에게 던지는 박수소리를 끝으로 이벤트가 끝이 난다.
사실상 눈축제의 마지막 밤을 후련한 퍼포먼스로 만족시키고 난 후, 폭설 속을 뚫고 삿포로 역으로 걸어간다.
코가 얼어서 맛이 느껴질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축제를 즐겼으니 맛있는 저녁이라도 먹어볼까 싶다.
어제는 피곤해서 저녁에 편의점 도시락 하나 까먹고 잤기 때문에 뭔가 아쉬운 기분이 남아있다.
스스키노쪽에 먹거리가 많긴 하지만 이동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아서 숙소 근처의 삿포로역으로 향한다.
역 내부는 가격이 좀 세긴 해도 한국과 달리 꽤나 먹을만한 것들이 많다.
홋카이도의 소울 푸드라는 징기스칸은 어차피 마지막날 먹을 계획을 세워놨기 때문에
식당가로 올라가서 뭘 먹어볼까 두리번거린 끝에 그다지 비싸지 않은 양식집으로 들어간다.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 한 잔과 함께 미디엄 레어로 일본식 스테이크 하나 주문.
축제 기간이긴 하지만 역내 음식점이다 보니 슈트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모여서 뭐라뭐라 떠들기도 한다.
대충 나하고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젊은 샐러리맨 둘이 맥주 마시면서 한국 시장이 어쩌고 하는 말을 진지하게 나누고 있는 중.
양은 좀 작지만 스테이크 품질은 매우 훌륭하다. 미국식 정통 스테이크와는 달리 씹히는 맛이 강한 한국 숯불구이 같은 느낌이랄까.
술을 즐기지 않는 본인이지만 삿포로에 와서 맥주 안 마시기는 좀 그랬는데, 스테이크가 맛있으니 술도 그럭저럭 들어간다.
물론 맥주 반 잔만 마셔도 온 몸이 신호등처럼 새빨개지기 때문에 마시고 나면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냥 앉아있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당연히 취하지는 않아서 느긋하게 스테이크의 육질을 음미하며 수첩을 꺼내 밀린 일기를 쓴다.
맥주 탓에 얼어붙었던 몸도 금새 녹았고, 한 시간 가량 식사와 일기를 즐기고 숙소로 돌아간다.
8시만 되어도 술집과 파칭코 가게 외에는 거의 조용해지는 분위기라서, 조금 전 그 뜨거웠던 스키 점프가 한 줌의 꿈처럼 느껴지는 고요함.
삿포로가 워낙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다 보니 보통 외곽에 많이 위치한 대형 파칭코 가게가 역 주변에도 참 많이 포진해 있다.
파칭코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면 취기도 올라왔겠다 시원하게 한 판 땡기고 가겠는데, 돈이 아까워서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오늘 밤까지 실컷 내리고 오타루에서는 맑은 하늘이 맞이해주길 바라며 숙소 골목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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