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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해당하는 글들

  1. 2013.02.16  도쿄 산책 - 그때의 시작과 지금의 끝 10
  2. 2012.10.23  산인 여행 - 유시엔 3/3 21
  3. 2012.10.18  산인 여행 - 유시엔 2/3 14
  4. 2012.10.16  산인 여행 - 유시엔 1/3 18
  5. 2012.10.15  산인 여행 - 잡화점의 별 22

 

새벽에 갑자기 호텔 전화기에서 벨이 울리길래 깜짝 놀랐다.

프론트 직원이 '손님 오늘 콜택시 예약하셨는데요' 하고 말하길래 더욱 깜짝 놀랐다.

예약은 체크아웃 당일인 내일 새벽에 해 놓은거라고 하니까 자기는 'Tomorrow' 라고 들었다고 한다.

어쨌든 내일이라고 확인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시간은 4시 45분쯤.

 

콜택시를 4시 반에 예약했으니, 택시기사는 15분 혹은 20분쯤이나 도로에서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프론트를 불렀을 터.

본의는 아니라고 해도 괜한 수고를 하게 해서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새벽 불시에 잠이 깬 터라 전화기에 제대로 응수를 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직원쪽의 미스라는 확신이 생긴다.

내가 외국인인걸 알고 있으니 직원은 자꾸 자기가 'Tomorrow' 를 들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난 일본에 왔을때는 머릿속 생각조차 일본어로 떠올리는데 익숙해 있다.

나하고 얼굴 맞대고 이야기를 해도 내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런 내가 호텔 직원한테 영어를 이야기 할리가 있나? 한국어는커녕 일본어보다 더 못하는게 영어인데 말이다.

 

어느 쪽이든 변명은 필요했을테니 직원에게 악감정을 가질 것까지는 없지만

이런 일이 있고나니 잠은 완전히 깨어버리고, 두시간동안이나 침대에 파묻혀서 당시의 잘잘못에 대해 끊임없이 되짚어보는 고행만이 남을 뿐.

 

조식 먹고나서 문득 네거티브한 생각이 든다. 여행중에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생겨난 방어기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아무튼 직원에게는 좀 미안한 가정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호텔은 새벽시간중엔 프론트가 휴무를 하기 때문에, 이 직원은 괜히 근무시간 외에 잠이 깨서

내 뒷수습을 해 준 셈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든 짜증일런지, 아니면 순수한 착각의 산물로 인해

내일 새벽의 콜택시 예약을 그만 잊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

 

그다지 바람직한 추측은 아니지만, 어쨌든 오늘로 착각한 콜택시가 그만 취소되어버려서 내일 오지 않는다면

나는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버릴지도 모르니, 이런 경우엔 재차 확인해 두는것도 나쁘진 않다.

 

프론트 직원분한테 다가가자 그쪽에서 먼저 웃으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여줘서 한결 기분이 풀린다.

내일 콜택시 다시한번 정확히 확인하고, 어제 직원이 내 이야기 받아적던 종이를 다시 펼쳐들었는데

거기엔 분명히 내일 날자가 프론트 직원의 손으로 정확히 적혀있었다. 동그라미까지 친 상태로.

여기서 '이거 봐요. 분명히 내일이라고 적혀있네' 라고 확인사살을 할 수도 있지만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해만 풀린다면, 굳이 이 친절한 직원에게 면박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웃으며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내일 예약시간을 정확히 확인해 두었다.

나같은 사회부적응자 치고는 꽤나 스무스한 일처리였다는 만족감에 조식도 한층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내일은 새벽 4시 반에 공항으로 출발하니 사실상 오늘이 여행 마지막날.

닛코를 다녀오지 않은 이번 여행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행선지는 미리 정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콘크리트 정글인 도쿄에서 숨막히게 돌아다녔으니 마지막으로 숨 좀 돌리는 의미로, 일본식 정원에서 산책이나 하기로 한다.

 

 

단지, 지갑속에 남은 현금을 탈탈 털어보니 불안감을 떨칠 수 없긴 하다.

남은 금액이 5천엔쯤 되니, 예정에 없었던 선물까지 계산에 포함하더라도 그리 흥청망청 쓴 것은 아니고

귀국 하루 남겨두고 이 정도면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 모든 계산을 무시하고 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내일 새벽의 콜택시 요금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요금 비싸기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본의 택시인데, 콜택시 추가요금까지 붙으니 얼마나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우에노 역에 도착해 거기서 공항까지 전철요금은 약 1천엔쯤.

그러니 콜택시 요금이 거진 2천엔쯤 나오는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해 본다면, 오늘 맛있는거 사먹을 돈은 1천엔밖에 없다는 셈이다.

점심, 저녁, 그리고 간간히 먹을 간식을 생각하면, 1천엔으로 하루 버티는건 사실상 편의점 컵라면과 주먹밥 정도가 전부.

 

오늘 산책할 정원 리쿠기엔(六義園)의 입장료와, 거기까지 왕복 차비를 계산하면 1천엔도 남지 않을 가능성마저 있고.

그놈의 새벽출발만 아니었어도 5천엔은 느긋하게 즐길거 다 즐기고 책한권까지 사도 될 금액인데.

 

이렇게 머리 쥐어뜯던 내 고민은 사실, 맥이 풀려버릴 정도로 너무나 손쉽게 해결되었다.

돈이 없으면 ATM에서 뽑으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해 버렸기 때문에.

시티은행 카드를 갖고 온게 아니라 저렴한 수수료는 기대할 수 없지만

4~5천원 정도의 수수료를 지불하면 편의점에서도 엔화를 바로 인출할 수 있다.

 

조식 먹고 옆의 편의점 가서 몇초만에 1만엔 한장을 뽑아내니, 이제껏 한 고민은 무엇인가 마음이 허전해진다.

외국 신용카드로는 1만엔 단위로밖에 인출이 되지 않아서 울며 겨자먹기로 1만엔 뽑은게 조금 아쉽긴 했다.

몇분 전까지 돈을 어떻게 세이브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갑자기 소지금이 3배로 펄쩍 뛰어버려 돈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차피 남겨서 돌아가봤자 환전수수료때문에 손해밖에 못 볼 것. 여행 마지막날을 컵라면으로 때워야 하나 고민했던 나는

한순간에 '오늘은 사고싶은 책이나 사고 먹고싶은거 막 먹고 호탕하게 놀아보자' 라고 자신만만해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바보같긴 하지만.

 

목표지인 리쿠기엔은 우에노역에서 야마노테선 전철을 타고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또다시 무료 셔틀버스의 힘을 빌어 공짜로 우에노역세 도착한다.

일부러 할 것까진 없지만,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셔틀버스나 조식같은거 많이 먹고 많이 이용할수록

왠지 이득봤자는 기분에 뿌듯해진다. 이런게 소시민의 소소한 기쁨이려나.

 

 

야마노테선 코마고메(駒込)역에 내려서 조금 걸으면 이곳 리쿠기엔에 도착한다.

도쿄에는 중앙에 큰 연못을 중심으로 돌길이 형성되어 있고, 그 주변을 잔디와 초목이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의 '회유식 천수정원'이

접근하기 좋은 곳에 꽤나 여러군데 흩어져 있다. 과거엔 쇼군이나 지역 유지들의 개인 소유 정원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국가에 귀속되어 문화재나 명승지로 등록되어 있다. 덕분에 이렇게 일반인들도 구경할 수 있는 것이고.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도쿄 내부의 여러 회유식 정원중 이 리쿠기엔이 특별히 더 훌륭하거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현존하는 도쿄의 모든 회유식 정원은 지진, 화재, 전쟁등으로 오리지날이 사라진지 오래고, 모두 전후 재건된 것들이니까.

 

그런 것들 재쳐두더라도, 이곳 리쿠기엔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경치와 매력을 가진 정원 역시 없지 않다.

구 시바리큐온지 정원(旧芝離宮恩賜庭園) 역시 경치가 빼어나고, 코이시카와 코라쿠엔(小石川後楽園) 같은 중국식 감각이 남아있는 정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도쿄가 콘크리트 정글임에도 서울보다는 낫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들 회유식 정원이 곳곳에 가동중이기 때문.

복잡한 빌딩숲에 둘러쌓여 있어도, 전철 조금만 타면 도쿄 어디에서든 자연 가득한 정원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요소가

도시로서의 가치에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다 주는지, 직접 다녀보지 않으면 실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정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와본곳인 이곳 리쿠기엔을 다시 찾은것은

새로운 정원을 탐미하는 즐거움보다, 예전의 추억을 다시 곱씹어 보는 즐거움이 더 클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 때문이다.

 

 

이곳은 생애 첫 자전거여행을 시작한 2008년, 도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찾아간 정원이기 때문에.

첫 자전거 여행으로 짐 40kg 가까이 싣고, 장거리 여행전용 자전거를 사고, 막 발매된 니콘 D700 과 렌즈군을 들고

도쿄에서 홋카이도 최북단까지 약 2000km 정도를 달릴 생각에 흥분도 되고 불안도 하고 정신없는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아늑한 정원이나 산책하면서 마음을 좀 다스리자고 생각하고 찾아온 곳이 여기 리쿠기엔이었다.

그때는 9월이라 도쿄는 아직 한창 더울때였고, 마음을 다스리는데는 훌륭하게 성공했다고 자신할 만큼

고즈넉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모습에 매우 만족했었는데, 문제는 모기가 창궐하기 딱 좋은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산책하고 사진찍는동안 정말 미친듯이 모기에 물어뜯겨서, 팔다리에 근육이 불어난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음은 편안해지고 몸은 가려워지는 이면적인 성과를 안고 출발한 자전거여행은 나름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긴 여행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곳 리쿠기엔이니

이번엔 오랜만에 찾은 도쿄 산책의 마지막 코스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것이다.

 

지금은 겨울이니 더 이상 모기의 습격에 벌벌 떨 필요는 없을테고

반대로 숨막힐 정도로 생명력을 뿜어대던 이곳의 초목들은 지금 꽤나 느긋한 겨울잠 중일 듯 하다.

실제로는 벚꽃과 낙엽으로 도쿄 내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지라서

봄과 가을 시즌이 되면 지금처럼 느긋하게 둘러본다는 건 꿈도 못꾸는 호사가 되어버리니

멋진 풍경도 인파에 치여가면서는 보고싶지 않은 나에게는 지금같은 시기가 어울릴 법도 하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맨 먼저 보이는 빨간 의자와 양산.

자연적인 붉음과는 다른 강렬함이 항상 첫 번째로 눈길을 끈다. 나름대로 괜찮은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입구 지나치자마자 지칠 일은 없으니 항상 이곳은 텅 빈채로 담게 된다.

이곳은 입구와 출구가 같은 곳이라, 정원 산책을 한바퀴 끝내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 그때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많긴 한데.

 

 

아직 제대로 된 정원 내부엔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기분은 굉장히 좋다.

2008년 첫 장거리 자전거 여행때문에 잔뜩 긴장해서 심히 우울했던 나에게

아주 훌륭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준 곳을 다시 한번 찾게 된 즐거움이기도 하고.

 

이번 도쿄 여행중 제대로 된 산소 한번 들이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상쾌하기도 하고

의도치않게 매번 해질녘이나 해가 지고나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제야 화창한 날씨아래서 마음껏 카메라질좀 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고.

 

입구 언저리에 아직 단풍이 남아있는걸로 봐서, 완전히 황량한 리쿠기엔을 상상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본인은 그런 황량한 정원도 얼마든지 좋아한다. 자연의 모습은 활기차던 숨죽이던 모두 빠트릴것 없이 멋지니까.

 

 

요즘들어서는 카메라를 꺼내는 일이 좀 줄어들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이번 도쿄 여행사진을 봐도, 외국에 여행까지 와서 최고급 카메라 장비 들고 고작 하루에 50~60장 찍은게 전부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미러리스나 컴팩트나 휴대폰 사진에 비하면야 꺼내들고 조준하기 여간 힘든게 아니니

셔터 수가 줄어드는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행사진이 하루에 50~60장이라는 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

 

하지만 오늘같은, 정원을 산책하는 날에는 유난히 셔터횟수가 늘어나는게 내 성격인가보다.

입구에서 10m 밖에 걸어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 사진이 4장째다. 어제까지는 4장 찍으려면 30분 정도 걸렸는데.

사실 도쿄라는 콘크리트 정글속에서 뭘 더 찍어야 할지 난감했던 것도 있고

리쿠기엔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지닌 곳이라, 평소보다 더욱 반갑고 기분이 들뜬 탓이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듯.

 

 

구름 한 점 찾아보기 힘든 청명한 날씨다. 도쿄에서 이정도로 맑은 날을 보는건 드문 일.

물론 서울보다는 확률이 조금 높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맑은 날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 때가 12월 초였는데, 한국과 일본 동북부 전선이 묘하게 정체되어 있는 바람에

한기류가 정체된 곳에서는 눈도 어마어마하게 오고 날씨도 매우 매섭고 그랬던 시기다.

도쿄는 그런 전선의 바로 밑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날씨도 따뜻했고 아주 깨끗한 하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단지, 구름이 전혀 없는 탓에 오전부터 아주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이고 있는 실정이라

이곳 정원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상당히 강하고 진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버리는게 살짝 아쉽다.

이런 곳은 은은한 풍취가 어울리는데, 지금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보다 대비가 좀 더 강해보인다.

 

물론 흐리멍텅한 날이나 비오는 날보다는 나으니, 분에 겨운 투정할 필요없이 줄기차게 셔터를 누를 뿐.

 

 

자전거 여행 도중에도 도쿄는 몇번이고 거쳐갔지만

이곳 리쿠기엔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 곳이었으니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다시 찾고픈 생각이 없어서였을까.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흥분과, 여행 직후의 무기력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고

도쿄에서의 도시냄새나는 여행을 마무리짓기엔 역시 이곳의 힘이 필요하다는 기분이 든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별도 예약과 요금을 주고 들어갈 수 있는 차실로

일반 관광객들이 산책하는 도중에 차 마시는 가게가 아니다.

건물이나 좀 직어볼까 싶어서 다가갔는데, 사실은 저 위의 대나무 입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저 차실 예약하지 않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제대로 돈을 내고 집회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니 납득은 가지만

오늘은 저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슬쩍 들어갔다 나와도 뭐라 할 사람 없다.

애초에, 정말로 나이 지긋한 단체 몇몇을 빼면 저기를 이용할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일단 도쿄의 주요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대실을 한다고 해도 흡연, 음주 불가, 음악 등의 큰 소리 불가등의 제약이 있고

말 그대로 차분하게 차와 간단한 식사를 즐기며 정원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곳이니까.

내가 애늙은이 소리 자주 듣는 편이지만, 젊은층이 이런 곳에서 모임 가지지는 않을거라 본다.

 

 

언제 찾아와도 뭐라 그리 겁나는지 새파란 얼굴로 맞아주는 소나무 덕분에

정말 한적한 겨울의 리쿠기엔도 생명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겨울 오전중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산책은 거의 혼자 하는 수준이라 다행이다.

오후부터는 날씨도 풀리고 하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듯 하다.

그래봤자 꽃놀이 단풍놀이 하는 시기에 비하면 텅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니 별로 신경쓸 건 없고.

 

 

저기 수용인원이 총 25명이고, 전실을 하루 통째로 빌리면 12만원쯤 하던데

6개월 전부터 이용할 수 있으니 아마 시즌 무렵은 이미 꽉 차있을듯 하다.

 

단풍구경은 둘째치고, 벚꽃구경에는 술자리가 빠지면 섭섭한 일본사람들이라서

음주가 금지되는 이곳 리쿠기엔은 조금 아쉬운 생각 드는 사람도 많을 듯.

눈처럼 깔려있는 낙엽의 파도들이, 화려했던 시기의 이곳이 남긴 조그마한 여흥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이 난리치고 난 뒤의 모습은 별로 보기 좋지 않지만

자연의 잔치는 그 뒷모습도 여윤을 남기곤 한다.

 

 

사실 입구에서 제대로 된 루트를 밟으면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게 이 모습이다.

도쿄에 와서 5일동안 나무다운 나무, 숲다운 숲, 공기다운 공기를 접한 적이 없다가

이렇게 이곳에 오고 나니 왠지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도 별로 없어서, 멀리 담 너머 들려오는 도시의 잡음조차도

이곳에서는 적당히 자극을 주는 일종의 리듬으로 들리는 듯 하다. 시각적 풍요로에 청각 역시 너그러워지는 기분.

 

이렇게 보면 겨울이라도 충분히 푸르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지금 이 풍경은 1년중 가장 쓸쓸한 모습이다. 겨울이라서 이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것 같아서 2008년 9월에 비슷한 위치에서 담았던 리쿠기엔의 모습을 풀어본다.

봄엔 벚꽃, 가을엔 낙엽으로 색이 풍부해지지만, 여름부근까지는 그런 거 없다.

산책하고 있으면 마음도 잔잔해지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폭발하는 듯한 생명력의 향연은

도쿄 시내에서 없어서는 안될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물론 요즘엔 에어콘 있는 곳이 더 편하겠지만.

 

 

지금은 겨울에다가 오전이고 해서, 정원은 아직 잠이 덜 깬듯한 차가움을 보여준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단풍이 조금 더 남아있다고 해야 할까.

반대로 생각하자면 한창 가을무렵의 단풍이 너무도 대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정원이란 곳이 그렇다.

어느 계절에 오던 모습이 워낙 달라서, 눈 앞의 풍경에 즐거워하면서도

다른 계절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른 매력을 보여줄 것인가 궁금해져서, 또 다시 찾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리쿠기엔은 늦여름과 초겨울의 모습을 감상했으니 이제 봄과 가을이 남았는데

꽃놀이 무렵의 도쿄는 사실 내 상성과 심히 맞지 않는 곳이라 꺼려지긴 한다.

 

뭐, 평일날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구경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도쿄가 아닌 한적한 시코쿠의 정원에서는 인파가 꽤나 붐볐음에도 불구하고 꽃구경 실컷 했으니까.

 

막 걷기 시작했을 뿐이라 지치진 않았는데, 벤치에서 낙엽 감상이라도 할까 싶어 잠깐 앉는다.

2008년의 리쿠기엔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지만 주위를 둘러볼수록 그 때의 모습이 조금씩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 길지 않은 코스길이지만 두 번째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더운 날엔 이렇게 한번씩 쉬어가는게 꽤나 도움이 된다.

 

센스있게도 휴게소 앞에는 이런 모래정원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다.

이는 일본의 정원, 사찰 등에서 자주 보이는 방식인데, 일본 근대 최고의 작가중 한명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그의 에세이에서 언급했듯이, 서양의 정원이 레크리에이션과 공간활용에 중점을 둔다면 일본의 정원은 그림을 감상하듯

미적 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곳 모래 정원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한 것인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돌은 우리가 살고있는 육지를 의미하고

모래는 바다, 가지런한 줄무늬는 파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엄격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차도(茶道)와 함께, 정원의 구조와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도

옛날 일본의 잘나가는 분들이 가져야 했던 소양과 덕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좀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긴 하지만.

 

 

 

맞은편에는 그늘이 시원한 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바람도 잘 통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땀을 식히기에는 그만이다.

카메라 장비를 들쳐매고 이리저리 렌즈 바꿔가면서 곳곳마다 발걸음을 멈추는 이쪽으로서는 오늘의 날씨가 좀 부담스럽지만

별 힘들이지 않고 후다닥 감상중인 단체 관광객들은 여기서 별로 쉴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그냥 모래 정원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데 더욱 정성을 쏟는 듯.

 

1년동안 자전거여행을 다니면서도 본인 얼굴이 찍힌, 소위 인증사진이란 건 두세 장밖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에서 자기 모습 남기는 행위에 어떤 만족감이 존재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전부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의 흔적이고, 거울이라도 들고 다니지 않는 한 자기 모습을 볼 수는 없으니까.

 

반대로 여행중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찍은 본인 사진은 아마 그사람들 하드디스크에 잘 저장되어 있을 듯 하다.

나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꽤나 많이 담은 편이니까.

 

 

 

날씨와 거리상의 문제로 결국 찾아가보지 못했던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그 유명하다는 '미술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정원 모습'을 한번 흉내내 본다.

아무래도 이렇게 넓직넓직한 창문을 만들어 놓은 것 역시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오마쥬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미술관에 전시된 미술품보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더욱 유명한 아다치 미술관은

조금만 검색해보면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실제로 이곳 산인지역에 여행을 온다고 해도, 워낙 교통편이 드물고 거리도 꽤 떨어진 개인 미술관이라서

이것저것 둘러보다보면 놓치는 경우가 많은 곳이다. 그곳의 절경이라 불리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휴게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유시엔의 모습이 충분히 그 마음을 보듬어 주는 듯 하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정말 사계절 모두 한번씩 찾아와서 각각의 매력을 담아내고픈 생각도 들고.

 

 

 

아다치 미술관의 정원이 유명해 진건, 창틀이 마치 미술품 액자와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

그래서 대부분의 사진은 정방향에서 액자처럼 찍힌 모습뿐인데, 유시엔에서까지 그런 흉내를 내려니

살짝 아쉬운 느낌도 들어서 이렇게 아무렇게나 각도를 틀어 담아보기도 한다.

 

신나게 내린 소나기 덕분에 햇살도 쨍쩅하고, 물을 실컷 머금은 조경수들도 생동감이 넘친다.

3일 내내 비가 와서 조금은 우울해져 있었는데, 귀국날 그 소나기 덕분에 멋진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플러스 마이너스가 상쇄되는 느낌. 어떤 여행이라도 끝나고 나면 그 총합은 제로가 되는 듯 하다.

 

 

 

땀도 식혔고 해서 슬슬 장비 점검해 마지막 코스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 전에 외로운 섬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한장 더 담아보고.

 

마치 우주 어딘가에 살아숨쉬고 있을 다른 생명체에게 날 좀 봐달라고 외롭게 소리치는 지구의 전파를 보는 듯 하다.

 

 

 

유시엔 산책도 마무리단계에 들어간다. 일반적인 코스와는 달리 두갈래로 나눠진 길이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 봤더니

언뜻 봐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불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내 키보다 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담해 보이는 인상이고

특별한 미술적 가치를 가진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든 느낌이라서 의아스럽다.

 

일본식 정원 안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 정원을 만든 사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츠에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적당히 안내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얼핏 읽은 바로는,

이 유시엔(由志園)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정원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마도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정원일 듯 하다.

중앙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든것 같지는 않다. 이곳 다이콘지마까지 버스를 타고 오면서 풍경을 훑어보니, 정부나 시 차원의 계획 관광지로서

조성된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 그렇다면 아마도 이 지역 유지가 개인적으로 만든 정원일테니, 그 사람과 관계된 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한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정원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은것 역시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들었다고 보기엔 좀 아담하다.

 

 

 

출발지였던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경치 감상하랴 카메라 셔터 누르랴 해서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걸린 편.

그래도 워낙 여유있게 마츠에 시를 출발했기 때문에 승선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친다. 그쪽에도 유명한 볼거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긴 하지만.

 

출발할때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인의 지도를 받아 바로 정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건물 안 테이블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걸로 봐서 찻집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듯 하다.

시원한 건물 안에서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며 차 한잔하는것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옆구리에 같이 온 사람도 없고, 일기장마저 잊어버리고 온 여행이라서 혼자 차 마시는게 왠지 어색하다.

경치 감상만으로 반찬(?)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그건 왠지 본인의 미적 우아함보다 더 잘난체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이 든다.

 

 

 

산책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뭔가 놓친건 없나 싶어서 주변을 더 살펴보게 된다.

바위 위에 끼는 이끼와 비옥한 토양 위에 끼는 이끼, 나무줄기에 끼는 이끼가 전부 다른 종류라는 것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해 이렇게 담아보기도 하고. 이 정도 기후에서 바위 위에 이끼가 낀다는건 꽤나 낮은 확률이다.

 

 

 

위의 바위와는 전혀 다른, 흐르는 개울가 옆의 그늘진 곳에서는 충분히 이끼가 번성할만한 여건이 조성된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기는 하지만, 실제 개울가에서 저렇게 소복히 깔린 이끼를 보게 된다면

밟는게 아까워서 개울가에 다가가기도 힘들 듯한 느낌. 감상에 목적을 두는 일본의 회유식 정원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물론 경치 감상하는 정원도 좋긴 한데, 잔디밭에서 개와 뛰어놀고 싶은 나의 희망상, 이런 정원은 입장료 내고 구경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삼각대와 ND 필터가 있었다면 조리개를 F22 까지 조여놓고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곳.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고, 몇몇 개인관광객밖에 돌아다니지 않은 상황이라서

크게 방해는 되지 않겠지만, 일단 이런 좁은 정원에서 삼각대를 설치하는건 매너 위반이긴 하다.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 언제든 들려오는, 몰지각한 인간들의 행태에 대해 마음껏 비난하고 있는 입장이니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을것 같아도, 그것보다는 주위에 폐가 되지 않는지를 먼저 고려하는게 언행불일치를 막기 위한 수단일 터.

주인장한테 직접 가서 부탁하면 못 찍을만한 상황도 아니지만, 다른걸 떠나서 지금은 삼각대와 ND 필터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산책을 마치고 처음 출발한 건물로 돌아오자 가슴 시원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더운데 수고하셨다고 준비해 놓은, 얼음에 파묻힌 물수건을 보자, 이 정원에서 느꼈던 관리인들의 손길이 과연 착각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판기처럼 기계 한대 가져다놓고 척척 얼음 물수건이 나오게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손님에 대한 배려이겠지만

대나무 광주리에 아날로그식으로 놓여진 얼음에서는, 직접 손발로 뛰면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다.

주변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정원답게, 얼음 위에 살짝 놓여진 단풍잎 두 장이 더욱 운치를 풍긴다.

 

시원한 물수건이 목덜미를 적시니 정원 산책의 만족도가 더욱 높아지는 듯 하다. 이런 배려라면 점수를 더 줘도 괜찮겠지.

이 앞에는 정원 운영에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기념품들이 포진하고 있을테니, 위치상으로도 절묘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정취가 가득한 정원에서, 에어콘이 완비된 현대식 건물로 들어갈 때의 위화감을 줄이려는 의도였을까.

자동문 앞에 과하지 않게 홀로 서 있는 꽃꽃이 모습도 과하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는 중이다.

회유식 정원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소소한 분위기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물수건이나 꽃꽃이에 눈길을 주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거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를 가치가 있었다. 정원 산책할때만큼이나 나를 기분좋게 해 줬으니까.

 

 

 

건물 내부는 상당히 넓고, 정원을 향해 나있는 창문이 내 키의 세 배는 될 정도로 시원하게 뚫려있어서

어찌보면 정원쪽보다 더 밀도가 낮아서 널널하다는 인상이다.

 

마침 푹신푹신한 창가쪽 테이블에서 양복입은 장년층이 뭔가 이야기중이라서

전체 모습을 광각으로 담아내기는 좀 부담스러운 상황. 그냥 특이하다 싶은 녀석을 찾아보다가 이 인삼을 발견한다.

그러고보니 이곳 입장할 때도 붙어있었던 홍보 포스터에는 '모란과 고려인삼의 고장' 이라는 수식어가 적혀있던데

그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듯 하다. 고려인삼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고유명사화 되어 버렸으니 이곳에서 사용하는것도 큰 문제는 없을 듯.

반대로 생각하면, 당시 인삼계를 주름잡았던 고려인삼의 명성이 일본에서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뿌듯하기도 하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일본쪽도 인삼 재배에 과학적이고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어서

고려인삼이라는 타이틀을 제외하고, 순수한 약용효과로 따지자면 일본쪽 인삼도 세계 정상급에 속한다.

이곳 다이콘지마의 고려인삼도 전량 수출용으로, 일본 본토에서도 굉장한 가격대인 인삼을 수출용으로 쓴다는 건

본토보다 더 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요즘 중국이 떠오르기 전엔 소비의 블랙홀이라고 불리던 일본에서

자국 소비보다 수출쪽에 중점을 둔다는 건 그리 흔한 케이스가 아니다.

 

설명을 보니 이 인삼은 자연산으로 발견된 녀석중에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게 큰 녀석으로

추정 가치는 수억원을 넘는 듯 하다. 그걸 이렇게 전시해놔도 되는건가 싶은데.

 

 

 

인삼 사진찍고나니 매점 카운터를 보던 할머니께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정원 구경 잘 했고, 물수건 놔둔 것이 참 인상깊었다고 본말전도격인 칭찬을 하니 기뻐하면서 차라도 한잔 들라고 하신다.

종이컵에 담긴 녀석은 알싸한 맛이 감도는 인삼차. 과연 이곳은 인삼쪽으로도 유명한 곳인가 보다.

 

정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을이나 겨울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니 꼭 한번 다시 와보라고 하신다.

특히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절경중의 절경이니 보면 좋을거라는데, 올해 가을이 한달 반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다시 오는건 무리고, 잘해봐야 내년에나 올 수 있을것 같아서 마음 속으로는 조금 아쉬운 기분.

 

중간에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 하니까 여느때처럼 깜짝 놀라주시고, 귀한 손님 오셨다는 듯한 대우를 해주셔서 약간 쑥쓰럽기도 하다.

단체 관광객은 한국쪽이 제일 많지만, 아마 이정도로 자기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 관광객을 보는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테니까.

처음부터 말은 잘 통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외국인하고 말이 통한다는 게 재미있으셨는지, 할머니는 정원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자세히 풀어주신다.

 

산인 지방이 원래 낙후된 변경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다이콘지마는 제주도처럼 화산 융기로 솟아난 섬인데다가

서울의 동 하나보다도 작은 손바닥만한 화강암 섬에서는 제대로 된 농사도 짓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을 여성들은 이곳 특산품인 모란꽃을 한가득 등에 매고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방금 전 보았던 불상은 그 여인들의 고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 그러고보니 가슴팍에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곳의 지주였던 사카에(栄)씨는 원래부터 장사에 소질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젊어서 안해본 장사가 없다고.

1950년대, 전후 더욱 피폐해진 마을의 사정을 실감한 사카에씨는

'여성이 꽃을 팔러 멀리 떠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일본 각지에서 관광객이 구경하러 오는 정원을 만들자'고 결심하게 된다.

사카에 씨 본인의 가계는 생활에 그리 궁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서 큰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예전부터 정원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그의 아버지 요시조(由蔵)씨가 아들의 의지를 지원해 주었다고.

 

주위의 논밭을 전부 사들이고, 화강암 덩어리인 토양에 흙과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같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착공 당시엔 이름 그대로 이곳은 외딴 섬이었기 때문에, 중고로 배 한척과 불도저, 크레인을 각각 1대씩 들여와

끊임없이 육지를 옮겨다니며 자재와 나무를 실어날랐다고 한다. 지금은 육지를 잇는 도로가 만들어져 버스로 편하게 올 수 있지만.

그 때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이 건물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할머니께서는 나를 직접 그곳까지 끌고 가셔서

자신이 지내왔던 세월의 흔적을 되짚어 가듯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 하신다.

 

착공 8년만에 일차 공사가 마무리되고, 사카에씨는 아버지 요시조가 꿈에도 그렸던 정원을 기억하기 위해서

유시엔(由志園)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후로도 여러번 공사를 거쳐서 점차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듣기 어려운 생생한 세월의 기억을 알려주셔서 감사의 표시를 하고, 기념으로 사진 한장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할머니께서는 예상 외로, 그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는 점원들은 모두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굉장히 뻘쯤하다.

아무튼 다들 쑥쓰러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는다. 뒷 배경의 커다란 모란 그림도 유명한 화가의 작품.

나를 안내해 주던 할머니는 앞줄 왼쪽에 앉아계시는 분이고, 앞줄 중앙의 할머니는 사카에 씨의 따님으로, 유시엔의 2대 주인이라고 하신다.

 

오늘 귀국날이라서 바로 가봐야 한다는 말에 조금 아쉬워하시는 할머니.

만약 우연이 겹쳐서 귀국일과 관계없는 날에 이곳을 찾았다면, 함께 식사하는 정도의 대접은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훌륭하니 꼭 다시 한번 찾아와 발라고 당부하시는 할머니를 보니, 뭔가 의무감이란게 드는 느낌.

실제로 이곳은 꽤나 마음에 드는 정원이고, 가을의 절경이 상상되는 듯 해서, 내년 가을에라도 인사하러 찾아가보게 될 것 같다.

 

또 하나 여행의 인연을 만들었으니 뭐라도 사 갈까 싶어서 기념품점을 둘러본다.

형체가 남는 물건은 어제 개미공방에서 구입했으니 넘어가고, 추천하고픈게 있느냐고 물어보니

요즘에 자신들이 개발한 모란전병을 추천해 주신다. 짭짤한 전병 사이사이에 모란을 닮은 분홍색 반점이 들어가 있는 녀석.

물론 모란 자체는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새우맛 소스를 대신 집어넣었다고. 고급스러운 새우깡 느낌이라 마음에 들어서 2개 구입.

하나는 집에서 먹고, 하나는 형님부부쪽으로 보내려고 한다.

 

 

 

폭우와 함께 천지를 진동시키던 벼락이 떨어지던 좀 전의 하늘에서

잠깐 정원 산책을 하고 온 것 뿐인데, 청명하게 펼쳐져 있는 하늘의 모습을 바라보니

정말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들었다가 꿈 속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버스 코스가 맞아서 귀국하기 전에 들렀을 뿐인 유시엔에서는

훌륭한 풍경과 함께 사연 많은 현지인들의 배려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화려한 모란에 숨겨져 있던 고난의 시간이, 한 지역 유지의 노력으로 인해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공간.

 

나와는 동떨어진 수백 년 전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정원이라던가

중앙정부나 시 차원에서 조성되고 관리되는,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서의 정원이 아닌

힘겨운 생활을 보내는 마을 여인들을 위한 마음으로 시작된 조그만 정원은,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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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가 여기저기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잘 둘러보면서 걸으면 거의 모든 지역을 다 볼수 있다.

수리중인지 원래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한두 군데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있는 곳도 있는데

그렇게 넓은 정원은 아니기 때문에 멀리 서서도 감상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예를들면 이런 곳. 지나갈 수 없게 만들어서 아쉽긴 하다.

오리지날 정원은 통로를 저런 자갈로 깔아놨기 때문에, 주인장이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고 나면

하인들이 매일 자갈을 고르게 펴서 깨끗한 형태로 만드는게 일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식 정원은 100% 확률로 개장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옛날 이 정원의 주인은 해가 지고 나서도 정원 곳곳에 설치된 불빛과 초롱 하나 들고 밤의 정원을 즐길 수 있었을 듯.

연못가에 반딧불이라도 서식하고 있다면 밤에 보는 풍경도 참 운치있을것 같다.

 

 

 

여름 한철이 지나가고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애매한 시기라서

푸른 초목과 이끼에 비해 화사한 꽃들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중간에 모란관이라는 작은 건물이 한채 있는데

그곳은 초겨울이라고 할만큼 선선하며, 안에는 형형색색의 모란들로 이루어진 조그만 정원이 있다.

단순히 모란꽃만 모아놓은게 아니라, 작은 공간이지만 제대로 정원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훌륭한 볼거리.

모란은 향이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지만 폐쇄된 공간에 그만한 모란이 피어있으니 은은한 향기가 가득 차 있다.

 

사진 촬영금지라는 푯말이 적혀 있어서 그냥 감상만 했는데, 단체 한국인 관광객은 그런거 신경쓸 이유가 없다.

모란꽃 앞에 가족들 세워놓고 신나게 찍고 있는 모습을 보니, 사실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을때는 찍어도 큰 문제 없을듯 하다.

작은 건물이라서 사람들에게 방해될까봐 촬영금지라고 붙여놓은 듯 하니까.

 

어쩄든 관리자한테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모란관의 내부 모습은 촬영없이 눈으로만 감상하고 나왔다.

어쨰서 이 정원이 모란을 그렇게 중요시 하는지는 심히 궁금하다. 사시사철 다른 종류의 꽃이 피는 곳이라서 모란에 집중할 이유가 없는데

모란관이라는 별장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분명 이 정원과 관련된 뭔가가 있겠지. 훗날 알아보기로 한다.

 

 

 

밖은 덥고 모란관 안은 시원해서 나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이끼들 모습을 보니 땀 흘리며 셔터 누르는 보람이 있어 즐겁다.

 

 

 

숲 속의 숲이라고 할까. 고개를 숙이고 가까운 곳에서 지면을 바라보면

이제껏 봐 왔던 정원과는 다른 마이크로 세상이 따로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조경용으로 심어진 이끼는 나름 모습도 준수한 편이라, 방금 전 뿌린 비로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더욱 매력적.

 

 

 

절반쯤 코스를 돌다보면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조그만 가게에 도착한다.

분위기 타면서 한잔 해도 되겠지만 너무 여유부렸다간 버스 시간을 못맞출수도 있으니 조심하기로 한다.

호텔 숙박이라면 아무리 늦게 가도 관계없지만, 페리 승선시간에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와버리니.

 

차 한잔은 넘기기로 하고, 그냥 그늘 벤치에 앉아서 숨좀 돌리며 주변의 꽃이나 찍어본다.

한달 정도만 더 넘기면 계절에 맞는 꽃이 활짝 필것 같아서, 그 모습도 기대가 된다.

 

 

 

가끔씩 코스가 두 부분으로 나눠지기도 하는데, 조그만 언덕으로 나 있는 길 앞에는 폭포가 있단다.

정원의 크기를 볼떄 폭포라고 할 만한 녀석은 아니겠지만 아마 인공적으로 지어졌을 그 폭포의 모습이 궁금하긴 하다.

 

사실 일본의 정원은 뭔가를 보기 위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길이 아니라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목적인 곳이라서, 이렇게 걸어가는 코스의 사진을 담는게 목적에 더 부함하는 듯.

 

 

 

인공 폭포임에도 꽤나 볼만하다.

인공은 인공이지만 돌 색깔로 칠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진짜 돌을 쌓아 만든 녀석이라서.

 

그렇지 않은 곳도 많지만, 중간중간 제주도에서나 많이 보이는 현무암이 많이 놓여있는 걸 보고

이곳도 화산융기로 솟아난 곳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여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곳 유시엔이 속한 곳은 여의도같은 내륙의 섬이다.

내륙 호수이긴 하지만 바다와 연결된 곳이라서, 사실상 그냥 섬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

 

이름은 재미있게도 다이콘지마(大根島), 다이콘은 무라는 뜻. 총각김치 만드는 그 무.

무리는게 생으로 먹으면 좀 매운 느낌이 있는데, 소바 양념장에 갈아넣는 무 종류중에는 특히 더 매운 녀석이 있다.

카라미다이콘(辛味大根)이라는, 의미 그대로 '매운맛 무'라는 이 녀석을 갈아서 양념장에 넣으면

시원시원하면서도 톡 쏘는듯한 매운맛이 소바의 맛을 더해준다.

 

아르바이트하던 소바집은 젊은 사장님부부과 그 부모님, 친척, 동네 할머니등이 이끌어가고 있었는데

키가 190은 되는 거구의 사장님은 전반적인 요리를 담당하기 때문에 그 외의 잡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힘 없는 다른 분들을 대신해, 재료중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가는 무 갈기는 항상 내가 도맡아 했던 기억이 난다.

 

점심시간에 카라미다이콘과 와사비를 듬뿍듬뿍넣고, 한입 먹을때마다 머리속이 찡해지는 느낌을 즐기고 있으니

역시 한국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하면서 놀라워하던 그쪽 사람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아마 이곳이 제주도처럼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섬이라면, 벼농사보다는 무 재배같은게 주를 이루었을 수도 있겠지.

 

 

 

중간중간에 묘한 나무판이 보이길래 뭔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태우는 모기향이 설치된 상자였다. 대낮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조금씩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시원하게 물린 뒤라서, 이 넓은 곳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이란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손님들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에 기분은 꽤나 흡족하다.

 

 

 

단체 관광객들은 이미 구경 다 마치고 기념품점에 와글와글 몰려있다.

나로서도 이곳 유시엔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기념품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제 이즈모의 개미공방에서 몇가지 기념품을 구입해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패스.

애초에 이 풍경을 놔두고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기념품점에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이제 산책로도 중반을 넘은 듯 한데, 거닐어보면 참 즐거울듯한 연못 위 나무다리는

아쉽게도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예전에는 실제로 거닐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게 조금 아쉽다.

 

사진 담으면서 여러번 느꼈지만, 단풍이 한창 물드는 시기의 유시엔은 정말 환상적일 듯 하다.

너무 꽉꽉 들어차있는 느낌이 드는 지금에 비해서, 소나무의 푸른색과 단풍의 붉은색이 적절히 혼합된 가을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완성도있는 풍경을 선사해 주지 않을까 싶다.

 

가을에도 꼭 한번 들러보고 싶지만, 사진을 담을 당시가 9월 초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올해 가을에 다시 가기엔 좀 그렇지.

 

 

 

키우는 녀석인지 알아서 들어와 사는 녀석인지 모르겠다.

연못 안의 붕어들이야 구입해와서 기르는 녀석들이겠지만.

 

그래도 뭐 먹이 받아먹고 하다가 알아서들 정착한 녀석들이지 않을까 싶다. 천적도 별로 없고 사람도 안건드리고.

오리가 고개를 뒤로 접어서 턱을 앞가슴에 괴고 있는 저 모습은, 사람이 보기엔 뭔가 어색하지만 실은 편안한 휴식 자세.

일광욕을 즐기며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나보다도 저 녀석이 이 정원을 더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느긋하게 걷다보니 처음 출발했던 건물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면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인데, 오솔길마냥 시야가 가려지는 부분이 많아서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도 각각 다른 공간을 산책하고 온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게 나름 섬세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의 강인한 생명력이 아직 충분히 남아있던 시기라서

조경수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녹색 에너지에 조금 지쳐갈 즈음이면

이렇게 사진을 만져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로와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어차피 푸른색 위주의 단색 풍경이었지만

무채색으로 바꾸고 나면, 화려한 색에 산란된 형태적 미학이 좀 더 쉽게 느껴지는 듯 하다.

 

 

 

모기들이 극성을 부리는 곳에서 렌즈를 갈아끼우는게 나름 귀찮은 일이긴 해도

광각으로 담은 이끼와 망원으로 담은 이끼의 모습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즐거운 작업이다.

 

멀리서 보면 보슬보슬한 녹색 모래처럼 보이는 이끼지만

가까이서 보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엄연한 조경수의 동료로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크로 렌즈까지 가지고 왔다면 조경용 이끼의 모습을 좀 더 세밀하게 담을 수 있었겠지만

24mm 단렌즈, 50mm 단렌즈, 70-300 망원렌즈를 들고도 이렇게 헥헥거리는데.

 

육중한 본인의 카메라는, 일단 결과물에 불만을 주지 않기 때문에 굳건히 내 옆구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방을 내려놓고 렌즈를 여러번 교환하는 도중에는 역시 가벼운 최신 미러리스 카메라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완전 기계식 필름카메라와는 달리, 수명이 정해진 디지털 기기라서 언젠가는 다른 녀석으로 바꾸겠지만

훨씬 작아진 녀석을 만지작 거리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또 지금의 육중한 반사식 카메라의 느낌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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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보여주고 입장료 반값 할인받은 후 짐 맡기는 곳을 물어보자 자기들이 직접 맡아주겠다고 한다.

백팩이 좀 커서 보관함에 안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애초에 보관함이 없으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도 했고.

입구 부분이 수리중이라서 약간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정원쪽은 돌아보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다행.

 

변형된 입구로 들어가는데 안내하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방금 도착하신 일행분이신가요?' 라고 물어본다.

아마도 같은날 이곳에 페리로 도착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이곳에 온 모양인데, 그쪽과는 관계없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출 리는 없을텐데... 아무래도 그쪽 팀 역시 비 그치기를 기다린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얽히는 일 없이 혼자서 느긋하게 돌아보고 싶으니 전후방 주시해가며 전진.

 

아직 비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도중이라서 그렇게 화창하진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쨍쨍해 질듯한 하늘이다.

입구를 통과하고 처음 마주한 유시엔의 모습은 생각보다 넓으면서도 생각보다 좁은 듯 하다.

 

뭔 선문답인가 하면, 정원 전체의 크기는 생각했던것보다 커서

지역의 대표급 정원들에 비하면 좀 작아도 충분히 입장료를 지불할만한 넓이였다는 뜻이고

생각보다 좁다는 것은, 정원에 심어진 조경수들의 밀도가 좀 빡빡한 느낌이 들어서 확 트이는 시원한 느낌보다는 오밀조밀하다는 뜻.

 

 

 

그래도 살짝 주위를 둘러보니 한적한 시골마을의 외딴 정원이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다.

굉장히 세심히 주의를 들여 가꾸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드는 조경수들의 상태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정원이란 온갖 식물들을 최상의 상태로 보전하면서, 산, 물, 땅 등의 요소를 축소해 집약시킨 공간.

인위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쟀든 이런 인공적인 미를 유지시키려면

마치 축산업에 종사하듯이 휴일없이 사시사철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확실히 관리 하나는 잘 되어있다는 느낌.

 

 

 

입구가 달라졌기 때문에 원래 이 루트인지, 내가 지금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지만

산책 시작하자마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정원 내부의 식당인데, 정원을 둘러보기도 전에 식당이 나오는건 조금 의아하다.

 

하지만 공사중이라고는 해도 소소한 서비스 정신을 잊을리가 없는 이쪽 사람들 탓에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 정확한 루트라고 나무 푯말이 확실히 박혀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은 이 방향이 맞다.

보통 식당이나 기념품점은 관광이 다 끝나는 지점에 세워놓는게 지극히 정상적인데,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건지.

 

아무튼 마츠에에서 밥은 여러가지 많이 먹고 왔으니 여기서 한끼 할 일은 없다.

정원을 바라보면서 한끼 하는 식사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여기에서까지 외국인 할인은 되지 않겠지.

 

정원의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는 외관이나 색상, 소재 선택은 이곳의 완성도를 재차 어필하는 듯 하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서 기분이 좋아진 이유중 하나는, 이곳이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이끼 정원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고, 일본의 정원 중에서는 단연 이끼 정원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유명한 정원이라고 해도 이끼 정원이 아닌 경우는 많다. 정원 전체를 이끼로 덮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

예전에 도쿄 옆의 하코네 이끼정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태양빛에 반사되는 찬란한 이끼들의 향연이 너무나 인상깊었기에

오랜만에 접하는 이끼정원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일시에 기분을 고취시켜준다.

 

하코네 이끼정원에 대한 포스팅은 아주 옛날 녀석이 남아있으니 보실 분들은 이곳으로.

 

 

 

이끼 정원은 일반 정원에 비해 풍성함이라고 할까,

걸어가는 루트 이외의 장소가 전부 자연의 생명력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힘들지만, 습한 기후의 일본에서도 이끼 정원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수십 가지의 이끼를 배양해서 정원을 만들어도, 그 기후와 토양등 수많은 요소에 적합한 녀석 몇종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생장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냥 놔둬서 되는 녀석들도 아니고, 사람이 만든 공간에서 살아가려면 사람의 철저한 관리가 필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끼 정원은 별천지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연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금 저 사진의 토양 부분이, 이끼가 없는 평범한 흙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느낌이 어떨지 짐작이 갈까.

잔디와는 완전히 별개의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생소한 풍경이다.

한국에서도 이끼 정원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지만, 야외에 광범위하게 만들기에는 기후상 어려움이 따른다.

 

가장 일본적인 맛을 느낄 수 있는게 이 정원이라면, 그 중에서도 이끼 정원이야말로 타국 여행이라는 느낌을 확실히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밀도가 조금 높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 없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시엔의 모습은 1등급 정원이라고 결론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본의 3대 정원이라는 곳중 두군데는 돌아봤지만, 그 몇대 어쩌구 하는 수식어에 휘둘리는 듯한 느낌.

훌륭하기로야 더할 나위 없지만, 그 이름값 때문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정원의 모습은

본연의 가치를 감상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 유시엔은 한적하게 홀로 거닐만큼 여유가 있어서, 조금 빡빡한 느낌이 들어도 충분히 마음에 든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쪽도 여기저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긴 한데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를 앞에 세워놓고 찍는 기념사진인듯, 나하고는 다른 차원의 생물 같으니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을 세워놓고 사진 찍는 반면 이동속도는 나보다 훨씬 빨라서, 내가 몇장 찍고 있으면 금새 앞질러 가버린다.

덕분에 이쪽은 얽힐 필요없이 천천히 진행할 수 있으니 나쁠거 없지만.

 

 

 

규모로 보면 그렇게까지 큰 편에 속하지 않지만, 이곳저곳 둘러봐도 상당히 알찬 느낌의 유시엔.

정원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동선과 그 주변의 풍경 등 설계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복잡하다.

걷다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 차 한잔 할 수 있는 가게 등도 철저하게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한적한 시마네현이기 때문에 이렇게 멋들어진 풍경 촬영에 열을 올려도 방해받지도, 남을 방해하지도 않는 여유가 가능.

유명한 정원에 가면 걷다가 마음껏 사진 담을 공간마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틀간의 페리 여행과 이어지는 비 때문에, 시작부터 뭔가 꿀꿀하고 초초한 기분이었던 이번 여행에서

오랜만에 홀로 녹음속을 마음껏 거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듯 하다.

 

 

 

사진 찍을 포인트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고.

사진 한장 찍기전에 1분쯤 그자리에 서서 천천히 주변 풍경을 음미하는 시간도 잊지 않는다.

 

옛날 일본 다이묘들은 이런 정원을 자기 집 안에 떡하니 지어놓고 매일 산책하며 물고기들에게 먹이나 주는 호사를 누렸다.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만 가능한 사치스러운 행위가, 다행히도 오늘날엔 약간의 입장료를 지불함으로서 체험이 가능하다.

 

물론 옛 다이묘들 중에는, 백성들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기 소유의 저택과 정원을 팔아서 곡식을 구입해 나눠준 사람도 있긴 하다.

 

 

 

자연 그 자체라면,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예술성을 뛰어넘는 장관을 연출하지만

미약한 사람의 힘으로 그 흉내를 내려는 노력이 빚어낸 일본식 정원은, 아주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써야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시멘트 길 위에는 자갈이라도 뿌려서 그 인공적인 느낌을 감춰야 하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정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철봉이 아니라 굽이진 대나무로 위화감을 없애야 한다.

 

소소한 곳에 신경을 쓴다면, 보는 사람 역시 소소한 곳까지 뜯어봐도 만족감이 드는 법.

나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벌써 저 멀리 기념품점에서 바글거리고 있는 단체관광객은 이런 요소들을 음미하고 있을려나.

 

 

 

햇살에 반짝이는 이끼의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하코네 이끼 정원에서 받았던 그 감격을 실로 오랜만에 느낄 수 있으니 셔터를 누르는 횟수도 늘어난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왼편의 저 나무가 단풍으로 물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잘 만들어진 정원은 사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을의 유시엔이 매우 절실해지는 느낌.

봄과 여름에는 이렇듯 색이 좀 단조로워지는 느낌이 있지만, 가을의 정원은 그야말로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절경을 뽐낸다.

 

물론 눈으로 덮인 겨울정원의 모습도 빠뜨릴수 없고, 자연을 모방한 정원이니 계졀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도 당연하다.

 

 

 

이끼의 생육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잘 자라다가도 조금만 일조량과 습도 등이 변화하면 곧 죽어버리는 녀석들이라서

나무 앞쪽의 이끼들은 이미 누렇게 죽어버렸다. 물론 타이밍이 맞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만.

 

죽은 이끼들 사이로 다른 종류의 이끼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도 보인다.

정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저 틈을 되살릴 것인지도 궁금하다.

 

 

 

반대로 그늘이 많아서 습도가 높은 지역의 이끼는 또 그 느낌이 다르다.

색도 진해지도 조밀해져서 이름 그대로 그늘에 걸맞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항상 일정한 색과 밀도를 유지하는건, 천해의 혜택을 받은 지형과 날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현재로서도 불가능에 가깝고

넓은 벌판에 고립된 정원이 아닌 이상 주변 건물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하다.

 

여기저기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오늘 갈아입은 반바지 밑이 좀 가려워진다.

장소가 장소다보니 모기가 아주 신나게 활동중인듯 하다. 마지막 날이라서 편하게 반바지 입었는데 이런 함정이 도사릴줄은.

다 잡아낼수도 없으니 그냥 물리면 물리는대로 놔 두는수 밖에.

여담으로, 그때 물린 흔적은 한달 반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이끼 정원의 매력은 역광 촬영시에도 잘 드러난다.

빼곡한 조경수 덕분에 직광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에 빛은 부드러워지고

오밀조밀한 이끼가 지면 가까이서 반사되는 빛에 부드럽게 퍼지는 모습은 푸근하기 그지없다.

 

인공적인 산물이긴 해도, '이 곳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모습.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감상하기를 여러 차례.

 

 

 

나무의 새순들은 어떤 운명을 맞을지 궁금하다. 조경수라는 목적상 이런 새순은 쳐내버리는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새순 잎사귀 밑에 매미껍질이 보인다. 이번 여름은 한껏 더웠으니 이 녀석들, 원없이 울어대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늦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30도를 넘나드는 날씨라서,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남아있는 듯 느껴진다. 착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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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엔 입구가 아니라 꽃집 입구에 상당한 양의 우산이 곱게 접혀져 대기중인 모습.

버스정류장이 이곳이니 여기서부터 비에 젖지 않게 하기위한 배려인 듯 하다.

유시엔이 이렇게까지 큰 곳인가 싶을 정도로 우산 수가 많은데, 전부 가지런하게 접혀있고, 손잡이 끝부분엔 유시엔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이쪽으로서는 굳이 비오는데 돌아보며 사진 찍을만큼 급하진 않으니 사용할 일은 없지만

구경을 시작하기 전 이런 배려의 흔적을 접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질 만도 하다.

 

 

 

30분쯤 쏟아지고 나니 서서히 비구름이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쏟아부은것 치고는 오래 내린 편.

이 정도라면 느긋하게 둘러보고 사카이미나토행 버스를 타더라도 페리에 늦을 일은 없을 듯 하다.

사카이미나토에도 나름 유명한 볼거리가 있으니 아주 넉넉한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버스가 1시간에 두 대정도 오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서 이동하는 수 밖에 없다.

 

오늘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으로, 오전중 마츠에를 돌아다닐 때는 깨끗하다가 버스 타고나서부터 비가 쏟아지고

조금 기다리니 또 다시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정원을 둘러볼 수 있다. 마츠에 성에서 폭우에 쫄딱 젖었던 경우에 비하면야.

 

 

 

유시엔으로 가는 길에 단촐한 꽃집의 분위기도 몇장 담으며 걷는다.

꽃집이 다들 그렇지만 꽃 외에는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건물 덩어리인데,

화분들 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건, 역시 식물이 가진 힘이라고 할까.

 

 

 

오키나와에서도 자주 눈에 들어오던 거대한 꽃.

무궁화와 같은 종이라서 닮긴 닮았다.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무궁화와는 크기나 색깔이 많이 다르지만.

비가 그치고 간접적이긴 해도 햇살이 들어오다보니 꽃들에게서도 활기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름모를 꽃. 피어있는 모습도 물론 아름답지만, 피기 전의 꽃망울도 저렇게 모여있으니 나름 매력있다.

 

아파트 구조상 마음껏 식물을 들여놓을 수가 없어서 이런 곳에 오면 항상 아쉬운 느낌.

가끔 아파트 베란다 전체에다가 흙을 채워넣어서 조그마한 정원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구쪽 본가는 베란다를 트는 바람에 그럴 공간이 없지만, 서울쪽 아파트라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듯 한데.

배수시설이나 꾸준한 관리 등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도, 조그만 화분에 담겨있는 녀석들보다 훨씬 보기좋을 것 같다.

 

 

 

희귀한 꽃들이 전시되어 있는건 아니지만, 마음 다잡고 구경하는 이런 시간에는

얼핏 길가다가 스쳐 지나가는 녀석들보다도 집중해서 보는 탓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매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정원이란 건, 겨울을 제외하면 응축된 에너지로 넘쳐나는 공간이라서

조금 있다가 구경할 녀석을 대비해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을 풀고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랄까.

 

 

 

버스정류장 위치를 생각하면, 이 꽃집과 유시엔은 한데 묶어서 생각하는것이 옳다고 본다.

일본식 정원과 함께하는 꽃집이란 것이 조금 생소하기도 한데.

규모는 큰편이지만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가건물에 식물들만 모아놓은 이 곳이

어째서 독립된 버스 루트까지 가지고 있는 유명한 정원 옆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시엔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의아한 것이 당연했지만

관람이 끝난 후 조그만 이벤트 덕분에 이곳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된 시점에서는 여러가지로 마음이 따뜻해 진다.

그 이야기는 당연히 다음 포스팅에서.

 

 

 

요 조그만 길만 건너면 바로 유시엔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면 고층 건물은 고사하고, 마을 전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없는 듯한 분위기.

아마도 이 길이 마을에서 가장 큰 도로일 것이다. 자전거 여행때 자주 봐왔지만, 일본에서 가장 마음 편한 모습이란 이런 것.

 

한국은 도시 외곽의 분위기를 뭐라고 찝어서 정의하기가 힘든데

일본의 도시 외곽은 상당부분이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이 나즈막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도심지에서는 자리잡기 어려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상점들이 주를 이룬다.

땅값만 싸다면 높은 건물보다 낮고 넓은 건물이 월등히 저렴하기 때문에.

그 결과 주로 잡화점, 중고차 가게, 2층을 넘지 않는 대형 마트등이 외곽으로 빠져 있다.

대형 마트의 경우에도 굳이 지하 주차장을 만들 필요가 없이, 마트 앞에 상당히 큰 규모의 주차장을 가진 녀석들이 대부분.

자전거로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서서히 중고차가 주르륵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보이면 도시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

 

왼쪽 건물에 보이는 간판은 옷이나 그릇 등을 파는 잡화점 콘페이토(こんぺいとう)라고 적혀 있는데

거대 체인이 아닌게 확실한 저 가게 이름은 의외로 일본 각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도심지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생활권인 외곽지역에 주로 위치하는지라 관광객이 찾아가기엔 힘든 곳.

대부분이 관광객이 버스나 철도 등을 이용해서 이동하는데, '창고'라고 불리는 잡화점이 위치한 곳은

이런 대중교통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 대부분인 평범한 도시 외곽이기 때문에 작정하고 찾아가지 않는 한 보기 힘들다.

 

도심의 유명한 잡화점으로는 돈키호테가 있지만, 외곽의 잡화점은 한국의 대형 마트만한 크기의 단층건물이 대부분.

돈키호테 따위는 가소롭게 보일 정도로, 정말 잡화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녀석들이 창고처럼 가득가득 차 있다.

좀 큰 도시 외곽의 잡화점은 악기, 의류, 반지, 시계, 음악, 영화, 게임, 장난감, 카드게임, 중고책 등등 없는게 없다.

콜렉터들이 군침흘리는 빈티지 기타나 구하기 힘든 모형건, 분위기와 달리 고가의 희귀 라이터 등도 눈길을 끈다.

 

조명은 어둡고 내부 마감 없이 짙은 나무색 등의 어두운 소재로 만들어져 있고, 통로는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

난잡하고 시끄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잡화점은, 오랜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그런 분위기가 매상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이곳의 잡화점이야 그런 물건들을 들여놓을 일이 없으니, 그냥 옷이나 그릇등을 파는 것 같은데

콘페이토라는 이름의 잡화점이 의외로 많은 것은 나름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콘페이토는 포르투갈어(Confeito)로 '별사탕'이란 뜻. 건빵에 들어있는 그것. 발음을 차용해서 한자로는 '金平糖'이라고 쓴다.

1500년경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별사탕은, 당시로서는 만들기 힘들고 비싼 고급 과자였는데

재래식으로 별사탕을 만들때는, 특수한 가마솥을 가열하면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설탕물을 넣고 끊임없이 회전시켜줘야 했다.

여기서 별사탕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참깨를 이용하는데, 이것이 사탕의 핵이 되어 주변에 설탕이 모이면서 별 모습이 된다.

 

잡화점에 콘페이토라는 이름이 자주 붙는 것은 그 빛나는 듯한 오묘한 모습과 함께, 사탕의 핵이 되는 참깨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들어와서 이리저리 구경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반짝하고 눈에 들어오는 상품을 찾을 수 있는 곳.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지만, 이렇게 가게 이름으로 그 원류를 연상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맞은편에 드디어 유시엔의 모습이 드러난다. 비 때문에 한참 지체되었지만 일단 목적지에 도달한 셈.

버스 정류정에 내려서 꽃집을 통과한 다음 보이는 유시엔의 정문 모습만으로는

저 너머 어디에 어떤 정원이 기다리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앞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니까.

 

비는 그쳤어도 아직 구름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하늘이라 약간 아쉽지만, 저 멀리서 천천히 푸른 하늘이 다가오고 있으니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으면 하늘 색도 촬영과 감상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한다.

이곳 역시 외국인에게는 입장료 반값 할인이 가능하니 부담이 없다. 등에 가득한 짐을 보관할 장소가 있기를 바라며 길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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