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지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내일 돌아가야 한다고 못을 박아놓은 지금은

이삼 일 정도 머무르며 느긋하게 추억을 회상하지 않고 왜 이렇게 도망치듯 서두르는 것일까 스스로도 의아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름 이유는 다 가지고 있는 법이다.

 

자전거 여행 도중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갖고 이곳에 도착했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누워 자기만 해도 그 잠이 달콤하게 느껴졌을 만큼 한계에 달해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나보다 먼저 자전거 여행을 재개하는 쇼야 군을 따라갈 수도 없이

계약한 기간만큼 묵묵히 시간을 보내며 자금을 모으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그렇게 가끔 고개를 하늘로 올려들고 눈을 감은 채로 자전거를 타며 자유에 탐닉하던 내가 아니라

여름 휴가철을 맞아 없는 시간 쪼개서 간신히 날아와, 원래는 자전거에 실어 놓던 백팩을 등에 메고

버스와 전철을 이용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사람이다. 자전거 여행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지금의 나는 이곳에서 자전거 여행 당시와 달리 돌아갈 길만 남아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없는 여행자의 신분일 뿐.

인사하러 온 사람이라면 딱 그만큼만 하는 게 좋다. 추억은 새록새록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전거 여행자가 아니다.

 

 

 

저녁에 소야노 아버지가 직장에서 돌아오셨다.

술을 많이 마시면 살짝 흥이 올라오는 분이지만, 평소엔 조용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분.

살짝 어리숙해 보이는 말투와 쑥쓰러운 듯 벗겨진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손짓이, 되려 그 사람의 순수함을 드러내는 타입의 사람이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금방 달려 내려오고 싶었지만, 오늘은 천문대쪽에 학생 관람이 있어서 빠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이곳 산자락 천문대에 근무하고 계셔서, 밤에 별 보는 일의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상당히 불규칙한 편이다.

한창 바쁠 때 소야노 어머니를 위시한 천문대 근무 남편을 둔 아내들은 '과부 클럽'이라는 가명으로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했다고도.

 

나가노 현은 인적이 드문 산골을 찾기가 쉽고, 해발이 높아 공기도 깨끗한 편이라 천체 관측에 좋은 지역.

기온이 낮은 겨울에 가장 잘 보이지만 한때는 주변 스키장 때문에 관측이 어려웠던 적도 있다고 한다.

요즘엔 스키 열풍도 어느 정도 잠잠해 진 편이라 조용한 산속 생활을 즐기고 있는 중.

 

오늘은 예정이 잡혀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소나기가 워낙 쏟아지던 때라 사실 헛수고이긴 했다고 하신다.

 

 

 

2010년 당시, 이 곳을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소야노 아버지가 내게 천문대를 소개시켜 주셨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긴 해도, 천문대 부지는 정말로 잡광에 민감한 곳이기 때문에

산을 중턱쯤 오르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도 구분이 어려울 만큼 암흑으로 뒤덮힌 모습이 인상깊었다.

 

중간에 놀란 맷돼지가 소리 지르며 산길을 뛰쳐나가는 모습에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뻔 했지만.

 

천문학에 관심은 많지만, 단순히 교양 서적 정도의 개념으로 브라이언 그린과 미치오 카쿠 정도만 즐겨 읽는 본인이라

우주를 직접적으로 쳐다보는 소야노 아버지의 현장감 살아있는 설명은 책과는 다른 흥분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처음 관측을 시작할 때엔 이런 디지털 센서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요즘엔 천체 촬영도 디지털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멋적게 웃으면서 그것 때문에 예전처럼 별 바라보는 시간이 줄어서 아쉽다고 하신다.

 

흔히들 쓰는 필름 판형의 1.5배쯤 되는 센서를 8개 병렬로 연결한 천체 망원경의 심장.

내 손바닥 보다 조금 큰 센서의 집합체는 진공에서 영하 수십 도 이하로 내려간 상태로

밤하늘의 빛을 증폭시키고 또 증폭시켜 별의 모습을 담아내 준다. 저 장비 하나만 10억은 쉽게 넘는다.

 

 

 

천문학에 있어서 천체 관측은 이제 낭만 넘치던 주류에서 살짝 자리를 물러선 느낌이다.

키소의 천문대는 일본에서 가장 크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슈미트 망원경으로 유명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런 디지털 망원경의 발달로 인해 대구경 아날로그 망원경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특수용도 기계를 사용하는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렇지만

필요한 장비와 기계는 알아서 디자인 해 알아서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다 보니 외관 같은건 아예 고려 대상에도 들지 않고, 단지 작동만 잘 하면 된다는 공돌이 특유의 난잡함이 연구소 전체에 만연해 있다.

 

주변 정리 따윈 내팽개치고 필요한 장비에만 열중하는 모습이 금새 보이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왠지 동지애를 느끼게 되는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정리 싫어하는 성격인가 보다.

 

 

 

우주에 대한 상상은, 나에게 있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 중 하나였다.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새로 들어온 정보, 허블과 몇몇 관측선이 보내오는 보물같은 사진 몇장만 있으면

몇 시간이든 그 거대하고도 극도로 미세한 조화의 절정을 탐닉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천문대에서 소야노 아버지가 나를 위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여러 장비와 자료를 소개해 주던 당시엔

상상이 현실로 내려오는 듯한 묘한 탈력감과 함께, 현실에 존재하는 우주의 모습을 이렇게 지켜본다는 흥분감이 공존했었다.

 

이곳의 망원경과 좀 전의 센서를 이용해 수십 시간 촬영한 결과가 바로 이 사진.

먼지처럼 보이는 점들이 별이다. 어쩌면 성운일 수도 있고.

천체 촬영용 센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이즈 감소이다.

별과 노이즈를 구분할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센서로서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진공 상태의 박스 안에서 영하 수십도 이하로 냉각되어 작동하는 이런 센서들은

노이즈 비율이 일반 디지털 카메라의 수천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센서는 특수 제작하는 녀석들이라, 카메라 매니아들이 본다면 군침 흘릴만 하다.

 

우주의 기원까지 밝혀내려고 힘을 쓰는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보통 천문학도 어마어마하게 발달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아무리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또 발전해도 우주는 너무나 넓다.

수십년간 키소에서 돌아가는 중인 망원경을 통해서도, 여전히 가끔 새로운 별을 찾아내기도 한다고.

 

흑백 사진에 찍힌 별과 성운의 모습은, 형이상학적 위상에서 나에게 지적 즐거움을 안겨주던 우주가

지금 같은 공간에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을 일깨워 주는 듯한 경외심을 들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제대로 말하자면 지금 사진에 찍힌 저 빛의 원류는 나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녀석이 아니긴 하다.

저 별들은 이미 지금 시점에서는 수억년 전에 사라지고 없는 잔상일 수도 있으니.

 

소야노 아버지가 콩알 지식을 소개해 주셨는데, 우리가 보는 별의 사진이 십자가 모양으로 빛나는 것은

원래 그런게 아니라 카메라 셔터막이 십자형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메라의 작동 원리를 아는 사람은 사실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하지만, 우주라는 개념이 워낙 사람과 멀어진 환상같은 존재라

십자 형태로 빛나는 우주 사진만으로 '별은 십자 모양으로 빛난다'고 믿어버리는 사람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소야노 아버지는 내가 우주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신이 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준다.

원래 학생들이 견학 오면 이곳에서 간단한 실습과 함께 설명이 이루어지는데

나에게는 세세한 설명 필요없으니 적색 편이에서부터 감마선 버스트 등을 이용해 가며

연구소에서 관측하고 있는 천체의 상황에 대해 한 차례 강연을 펼쳐주셨다.

 

본인은 일본어로 의사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편이지만 막상 이런 천문학 용어는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째어째 한국어로 알고 있던 용어들을 한자 훈음으로 발음해 보며 단어를 교정해 나가는 초보 단계에서 어물쩡 거리고 있어야 했다.

 

소야노 아버지는 매번 쑥쓰러운 표정으로, 자기는 공부는 커녕 글도 잘 못 읽는 바보였다고 말을 하시곤 하는데

실제로 학생 때는 집에서 농사 거들고 하루종일 산을 뛰어다니며 생활했을 뿐이었다고.

 

전후 일본, 그것도 이 산골짜기 키소에서 공부라는 개념은 애초에 너무나 희박한 존재였긴 했지만

그래도 산에서 별 바라보는 일이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소야노 아버지는

별 보는걸로 먹고 살수 있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천문대에 일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순박한 시골 아저씨로 보이는 분이지만, 어릴적 부터 키소의 험한 산맥들을 놀이터처럼 뛰어놀던 분이라

젊은 당시엔 거의 프로 선수에 근접하는 스프린터, 자전거 라이더였으며

현재도 50세 이상 100m, 200m 육상 일본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매년마다 참가해서 한 번도 기록을 넘겨준 적이 없는 분이다.

목표는 70세 이상 실버 대회까지 꾸준히 일본 신기록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몸 관리만 잘하시면 낙승이라 생각한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자기 집에서 이곳 키소 천문대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이 가능한 체력이니.

내가 두번다시 자전거로 갈쏘냐고 이를 가는 하코네 고개쯤 되는 지형을 이 사람은 그냥 출퇴근길로 생각한다는 뜻.

 

문제는 몸 관리를 별로 안 하는 분이라...

하루 하루의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해 버리고 눕자마자 잠에 빠지는 그런 부지런함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이다.

생활에 있어서 여분의 에너지, 혹은 여유라는 것을 태생적으로 가질 수 없는 성격이고

그래서 시간이 남을 때 오히려 안절부절하는 그런 분이다. 여행은 안좋아하는데 드라이브는 좋아하는 타입.

 

 

 

근래엔 잠만 자고 있어서 아련한 느낌이라는 키소의 천체망원경.

슈미트형 망원경은 일종의 반사망원경으로, 촛점식 망원경에 비해 넓은 우주를 좀 더 밝게 담을 수 있다.

렌즈 제조가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라 대구경의 슈미트 망원경은 우주 프론티어 시절에 그 나라의 광학기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니콘에서 만든 105cm 슈미트 망원경은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컸기 때문에 굉장히 유명한 녀석이었다.

지금은 가끔 오는 학생들 학습용으로 사용되고, 좀처럼 지붕이 열리지 않는 아련한 녀석이 되어 있다.

천문학의 발전은 별의 낭만에 이끌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많은 천체과학자들이 직접 별 쳐다보는 일도 없이 수많은 디지털 데이터와 전파 분석에 매달리는게 현실이다.

 

소야노 아버지는 여기서 별을 자주 못 보니, 연말 보너스를 털어서 집에서 볼 수 있는 망원경을 구입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이같은 어른을 좋아하고 동경한다. 소야노 아버지는 진짜로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소야노 아버지가 슈미트 망원경 하단부를 열고 한번 들어가 보라고 하셨다.

평생 살다보니 천체망원경 내부로 들어가는 경험도 할 수 있다니.

 

카메라 렌즈 경험이 많은 사람은 이 구조가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고 느낄 듯 하다.

보통 일반적인 카메라 렌즈중 500mm 반사, 속칭 오반사 라고 불리는 렌즈의 내부구조와 비슷하다.

 

중앙의 원통 뒤쪽에 센서를 장착하고 별의 궤적을 따라가며 장시간 촬영을 한다.

엄청 어두웠지만 차마 이 내부 사진을 안 남길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찍어 봤다.

2010년 당시 내 카메라는 고감도 노이즈가 매우 취약했던 녀석이라

아마 내 사진생활 중 가장 감도가 높은 한 장이 아닌가 한다.

 

  

 

본인은 남들이 마음 편하게 말 걸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소야노 가족들은 내력이 있기도 하고, 나와 꽤 오랫동안 살다 보니 나름 허물없게 지낼 수 있었다.

 

쇼야 군은 놀랍게도 일주일 뒤에 성인식이라고 한다.

물론 놀랍지 않게도 술은 벌써부터 잘 마시고 있지만, 사실 3년 전 자전거 여행때도 질펀하게 마시긴 했다.

 

일본에서 성인식은 한국과 달리 상당히 규모가 크고 중요한 행사인데

특히 쇼야 군의 성인식은 가족에게나 나에게나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타이밍이 어긋나 버린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직장만 아니면 비행기 값을 물고라도 1주일 더 머물겠지만.

 

쇼야 군과 자전거 여행으로 만난 인연인데도 소야노 가족 이야기만 하고 쇼야 군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아직은 이런 곳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쇼야 군이 다니는 도쿄의 자전거 학원은, 세계 유수의 테크니컬과 유명 선수들을 강사로 초청해

진짜 전문적인 자전거 장인을 배출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일본 최초의 자전거 전문 학원이라고 한다.

희망자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이탈리아 연수도 보내서, 그곳 장인들의 실력을 눈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고.

아버지의 체력을 물려받은 쇼야 군은, 자전거에 제트 엔진이라도 단 것처럼 종횡무진하는 실력이었지만

자전거 하드웨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내가 좀 도와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친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학원에서 한 학기 수강한 쇼야 군은 벌써 상당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매일 작업대에서 프레임의 구성 요소와 무게와 강도사이의 밸런스를 연구하는 수준이 되어 있다.

제대로 배워서 자기 가게를 갖고 싶다는 쇼야 군은, 약간씩이지만 어둡고 흐릿하기만 하던 자기 앞길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듯 하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밤 12시쯤 되자 소야노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가 오긴 하지만, 홈 스테이 당시 꼭 자기 전엔 휴게소까지 밤 산책을 즐기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과였다.

물론 당시엔 자전거로 시원한 라이딩을 즐기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지만

자전거가 없는 지금은 곰이라도 나올 법한 어두운 시골길을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걷는다.

농담이 아니고, 손전등 없이는 휴게소까지 내려가기 힘들다.

 

밤의 키소 휴게소는 꿀잠을 자기 위해 정차된 트럭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가끔 밖에 음료수 사러 나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한국보다 훨씬 더 장거리를 운행하는 트럭 기사들은 어쩐지 이야기가 잘 통하는 느낌.

그것과 별개로 쓰레기 투기를 일본에서 제일 많이 하는 부류가 트럭 운전사라고 하니 그건 좀 아쉽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3개월간 보았던 풍경을 아무 말 없이 1시간 가량 바라본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은 아직 한 번밖에 가지 않았는데, 두 번 간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 들 것인가.

하지만 추억은 굉장히 섬세해서, 조금만 비틀리거나 색이 바래도 당사자가 느끼는 괴리감은 크게 느껴진다.

다음엔 역시 자전거를 들고 와야 하나 싶은 생각을 하며 음료수 한 캔과 담배 한개피를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