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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近畿'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03.11  엄니와 함께 - 코야산 오쿠노인 (2/2) 8
  2. 2014.02.05  엄니와 함께 - 코야산 오쿠노인 (1/2) 6
  3. 2014.02.04  엄니와 함께 - 코베 (2/2) 10
  4. 2014.01.29  엄니와 함께 - 코베 (1/2) 2
  5. 2014.01.28  엄니와 함께 - 오사카 14
  6. 2012.06.12  킨키 방황 - 우메다에서 마지막 화풀이 17

 

 

눈이 많이 쌓이지 않았지만 날씨는 매우 매섭습니다.

오사카가 원래 부산만큼 따뜻한 곳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역시 해발이 높은 산 속은 추위를 무시하지 못하겠더군요.

 

엄니 역시 후드에 목도리까지 둘러쓰고 피부 노출을 최대한 줄이고 이동중입니다.

 

  

 

이 탑을 보려면 이동 루트에서 조금 빠져나와야 했지만

그래도 이 녀석을 보지 않고 오쿠노인을 통과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엄니를 안내했습니다.

 

엄니도 한자를 읽을 수 있기 대문에 이 곳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라는 걸 금방 아시더군요.

 

 

 

하지만 이런 동자승 불상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아이들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모르셨습니다.

굶어 죽는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시대에서 배 부르게 무언가를 먹는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많았음은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곳 입구의 번쩍번쩍한 기업 묘비와 달리

이 연고 없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조각상은 내세에서라도 복을 받기를 원하는 진심이 강하게 묻어나는 듯 하더군요.

 

 

 

목도리처럼 보이는 것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음식이나 음료수 같은 녀석들은 말이죠, 공양하려는 마음은 이해가 가도 관리자 측에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딱히 주변에 음료수나 먹을 거 놓지 마라는 표지판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요함 속의 오쿠노인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이곳 관리하는데는 굉장한 인원과 시간이 필요하죠.

고용인이나 청소 알바가 아닌 사찰 관계자가 직접 관리하다 보니, 이 것도 일종의 공덕을 쌓는 행위라고 인식하는 듯.

모기가 덤벼들던 피부가 얼어붙는 추위 속이던 1년 내내 꾸준히 부지 관리에 열심입니다.

 

 

 

무연불은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지금 와서야 더 늘어날 일 없겠지만

단지 피라미드처럼 생겼다는 볼거리 하나만으로 이렇게 세워놓은 게 아니라는 점은 꼭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식으로 묘터를 구입할 돈이 없는 사람들이 돌맹이 하나씩 들고 조용히 내려놓고 간 역사의 흔적이 응집된 모습이니까 말이죠.

정말로 내세라는 게 있다면 휘황찬란한 묘석을 세운 사람보다

이런 연고없는 조그만 불상의 주인들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길 바랍니다.

 

 

 

유명한 관광지이긴 하지만 주위에 젊은 사람이 즐길만한 컨텐츠가 없고

이동 수단도 빡빡해서, 하루 꼬박 잡아야 겨우 관람이 가능한 곳이 코야산이라

여름에도 크게 관광객이 많이 붐비진 않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음산할 정도로 사람이 없더군요.

 

엄니께서는 제 예상과 달리 이런 훌륭한 자연 경관 속에서도

무덤이라 싫다는 철직과 함께 매서운 겨울 산바람 때문에

구경을 하시는건지 마는건지 모르는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십니다.

 

 

 

홍법대사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는 걸어가실 생각도 없고

빨리 나가자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조금 아쉽긴 하지만 서둘러 이 곳을 벗어나기로 합니다.

다만 완전히 똑같은 길로 돌아가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쪽 출구로 이동했죠.

 

날씨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만 더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면

엄니께서도 거부감을 줄이실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혼자서 이곳을 찾아왔을 당시의 포스팅에도 적혀있습니다만

기온차가 극심하고 습도가 매우 높은 이 곳의 특성상

나무로 만든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역시 이런 모습이 여기저기서 자주 보이더군요.

 

여름때 본 녀석인지까지는 확인할 시간이 없었습니다만

이곳에 왜 그리 돌로 석불과 묘석이 많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석불 역시 오래 가긴 가겠지만 이것 역시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닌 것 같네요.

원래부터 별로 정교하게 조각된 녀석은 아닌 듯 하지만

슬그머니 비탈길에 누워있으니, 몇 년 지나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땅 속으로 사라져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겨울이라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끔씩 부는 풍절음만이 사람 으스스하게 만드는군요.

 

저는 지난 번 왔을 때 통풍때문에 거의 죽을 뻔한 기억이 었어서

이번엔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며 코야산의 풍경을 만끽하려고 했었습니다만

엄니께서 춥고 무섭다고 후다닥 지나가시는 바람에 어째 몸이 아플 때보다 더 구경시간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사진 좀 많이 찍혀본 사람이 아닌 이상, 찍는다고 정보를 줘 버리면

그냥 정면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몸이 굳어버린 사진밖에 얻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몸을 30도 정도 옆으로 틀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어쩌고 하는 방법을 말해줘도

그건 그냥 보기좋은 모델처럼 담겨버릴 뿐 여행 사진으로서는 뭔가 좀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냥 뒷모습만 찍어도 여행 사진으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추운 날씨라 코가 얼어서 냄새를 평소보다 잘 맡진 못하지만

여름의 풀냄새와 조금은 다른 향기가, 햇빛이 조금 강해지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이 느껴지는군요.

 

기온이 낮아서 직사광선이 통과하기 어려운 오쿠노인의 땅바닥은 여전히 눈으로 덮혀있지만

그늘 아래서도 습기때문에 푹푹 찌던 여름과 달리

겨울엔 햇빛 한번 쏴 하고 비치면 걸음을 멈출 정도로 따뜻함을 느끼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이 나무는 예전 여름 여행때도 찍은 적이 있죠.

그때는 한여름이라 빛도 틀리고 습기도 틀리고 해서 이것과는 전혀 다른 진득진득한 사진이 나왔었는데

촬영 요건이 다르다고는 해도 확실히 나무는 계절에 따라 보여주는 모습이 매우 다르다는 걸 세삼 알 수 있었습니다.

 

 

 

엄니가 너무 빨리 치고 나가시는 바람에 사진 찍는게 쉽지 않네요.

묘지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신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단지 날씨가 추워서 그러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뭐 엄니 따라가느라 셔터를 누르는 시간도 절약하며 달립니다.

핀이 맞았는지 구도가 어땠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네요.

 

혼자 떠나는 여행이 아닌 이상 상대방의 사정을 고려해 줘야 하는 것이고

역시 느긋함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좀 빡빡한 면이 있더군요.

 

 

 

생각을 할 시간이 부족한 체로 찍은 사진이라

돌아와서 정리할 때는 역시 본인이 당시 느꼈던 감각을 재현하기가 조금 더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사진은 금방 생각이 나던데 말이죠. 여름에 결코 볼 수 없는 겨울만의 멋진 모습입니다.

 

 

 

성실하신(?) 분이라면 여름 포스팅과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름과는 빛이 전혀 달라서 똑같은 소재를 찍어도 분위기가 꽤나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카메라도 바뀌긴 했지만 동 회사의 거의 비슷비슷한 녀석이라, 기계적으로 차이점은 별로 없습니다.

 

추위에 마음이 조급해지면 조금씩이나마 부족하거나 모자란 점이 좀 더 드러나게 되죠.

사진과 사냥은 한 글자 차이이듯, 사진 찍을때는 셔터에 손가락 얹어놓고 집중을 잘 해야 좋은 녀석을 건집니다.

 

 

 

오쿠노인의 나무는 참 허벌나게 큽니다.

미국 대륙의 나무야 이런 녀석들도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하는 거목들이 많지만

일본의 참나무는 확실히 동아시아에서는 유난히 큰 편이긴 하죠.

 

 

 

석불에 이렇게까지 따뜻하게 옷을 입혀 놓은 모습을 보면

문득 정말로 저 석불이 제 체온보다 더 따뜻하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산날씨는 변하기 쉽다는게 일본에서도 틀린 말이 아니더군요.

버스 내렸을 때 눈발이 날리던 날씨는 이제 푸른 하늘과 맑은 햇살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온이 확 올라가는 건 아니라, 사진 찍기에 좀 더 좋아졌을 뿐 여전히 온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하지만 말이죠.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저하고는 좀 다른 엄니라서

진귀한 볼거리이긴 하지만 오래 있고 싶진 않다는 일념으로 확확 진행중이신데

저는 이런 곳에서 사진 찍으며 좀 더 느긋하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더군요.

 

 

 

 

동양의 어머니상은 일단 옷깃 잡는 아이와 안고 있는 아이가 기본인가 봅니다.

특정 인물에 대한 석불인지 그냥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양인지 모르겠더군요.

 

 

 

엄니가 너무 앞서나가시는게 걱정되어 카메라도 어깨에 들쳐매고 앞으로 따라갑니다.

이렇게 바싹 붙어서 광각으로 찍는 사진도 나름 재미있죠.

 

 

 

이런 번쩍번쩍하고 덩치 큰 녀석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좋던 싫던 한번쯤은 눈길이 가게 마련이더군요.

돈과 권력이 많아서 이렇게 지었다기보단, 코야산에서 입적한 스님들을 기리는 무덤인 듯 합니다.

 

 

 

머나먼 홋카이도에서 여기까지 온 비석도 있네요.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는 오쿠노인이지만

그 안을 보면 워낙 다양한 모습의 묘석이 공존하고 있어서, 살아있는 사회의 압축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추운날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그런지, 제 입장에서는 세삼스럽게 그리 짧은 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름에 통풍 걸린 발로 어기적거리며 두 시간 가까이 걸어가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인지

막상 멀쩡한 몸으로 걸어봐도 생각보다 긴 산책로더군요.

 

엄니께서는 이 정도 거리가 피곤하실 분은 아니라 크게 걱정은 없습니다만, 날씨가 추운 게 조금 마음에 걸렸습니다.

엄니는 아프리카와 호주 대륙 정도는 빼면 거의 전세계를 여행하신 분이지만

겨울에는 한 번도 해외에 여행가본 적이 없다고 하시니 말이죠.

 

 

 

정오를 넘기고 날씨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니 엄니의 걸음걸이도 조금씩 진정되는 느낌입니다.

오쿠노인에 처음 왔을 때 저도 그랬지만, 뭐라고 딱 잘라서 표현하기 힘든 심상을 주는 곳이니

엄니께서도 입 속에서 맴돌기는 하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난감한 그런 느낌인 듯 보였죠.

 

한국의 묘지 문화에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덕지덕지 공간 활용하는 모습은 참 좋다고 하십니다. 그건 저도 동감.

 

 

 

찍어드리려고 해도 거절하시는 엄니라서, 이렇게 같이 걸어가면서 다른 피사체만 찍어대더라도

전혀 부담될 것이 없다는 점은 참 좋습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한국에도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전 맨날 여행가서 사람 그림자라고는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사진만 줄창 담다보니

막상 사람이 프레임 안에 들어와 배경과 함께 담아내야 하는 사진을 찍어야 할 때가 오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게 되니까 말입니다.

 

 

 

묘석에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이런 석불들에게는 눈이 머물게 되는 게 평범한 반응일 듯 합니다.

엄니께서는 석불 자체보다는 알록달록하게 입혀놓은 옷을 더 신기하게 생각하시더군요.

지난 번 언급했듯, 어린 아이들의 명복을 비는 석불이기 때문에 이런 색상이 선호되는 것이라 설명해 드렸습니다.

 

 

 

서둘러 걷다보니 그리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출구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오쿠노인은 제 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를 불러일으켜서 당황스럽더군요.

 

여름의 오쿠노인은 그 찌는 날씨에 통풍의 지옥같은 고통으로 날뛰는 발가락과 싸우며 걸어갔는데

'발만 나으면 정말 느긋하게 걸어봐야지'라고 생각하며 다시 돌아온 겨울의 오쿠노인은

동행자인 엄니께서 추우니까 빨리 걷자고 하시는 바람에 느긋함과는 전혀 다른 스릴이 넘치는 산책이 되어버렸네요.

 

 

 

오쿠노인을 나와서 다이몬 쪽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한 시간에 한두 대 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15분쯤 기다려야 하지만

버스만큼은 혼자 기다리는 것 보다 함께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편이 시간이 잘 가죠.

 

 

 

조그마한 코야산 안에는 백여 개가 넘는 사찰이 위치하고

그 중 상당수는 템플 스테이 같은 숙박도 가능하기 때문에

사찰 문화에 관심이 많거나 시간과 돈이 널널한 관광객은 이곳에서 하루 묵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돈을 더 열심히 벌어서 이런 곳에서도 하루 자 보는 그런 여행도 즐겨봐야 되는데 말이죠.

 

 

 

버스 시간이 남아서 이곳저곳 둘러보십니다.

일본의 불교는 한국과 조금 달라서, 결혼도 하고 절도 자기 소유로 자식에게 물려주는 스님이 많습니다.

 

엄니께서는 그 설명을 듣고는 '그럼 종교로서는 별로~'라고 단칼에 언급하시는군요.

물론 종교인이 사유재산을 가졌을 때 생기는 폐단에 대해 익히 경험을 해 오셨기 때문에 그러리라 봅니다.

의외로 일본의 신사나 절 같은 경우는 그냥 근근히 먹고 살 만한 가업 정도로 이어지는 소박한 녀석들이 꽤 있긴 하지만.

 

 

 

이번 코야산은 큰 이벤트 하나 터트리기 전의 고요한 분위기라고 할까요.

일본 진언종의 총본산인 이곳 코야산은 2015년에 창건 120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해를 맞이하기 때문에

전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2015년엔 이곳에 올 엄두가 나지 않을 듯 합니다.

아마도 순례자들 틈에 끼여 무빙워크를 탄 듯한 기분을 맛보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전 홀로 여행때는 가방에 간식거리를 일체 넣어다니지 않는 타입인데

엄니께서는 익숙하게 준비해 온 물과 과자를 꺼내 드십니다.

 

저는 보통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기 전 먹을거리를 사들고 가

목욕 시원하게 한판 당기고 나와서 느긋하게 즐기는 성격이라서.

 

그래도 추운날 버스를 기다리며 짭쪼름한 센베이 씹어먹는 맛 역시 일품이었습니다.

 

 

 

버스 타기전에 엄니가 만든 눈사람입니다.

눈코입도 만들까 했는데 버스가 오는 바람에 서둘러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마우리가 되어 버렸네요.

 

 

 

다이몬으로 향하기 전에 일단 점심을 해결하기로 합니다.

이곳 코야산이 물 맑고 공기 좋아서 밥맛도 좋다고는 하지만

유명한 관광지의 물가 + 해발 1000m 넘는 산골짜기 라는 요건이 겹치는 바람에

이 곳의 먹거리는 양이나 질에 비해 좀 비싸다는 인식이 넓게 퍼진 편이죠.

 

하지만 홀로 여행때처럼 비싸다고 안 먹고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적당히 속에 부담가지 않을 만한 가게를 찾아보다가 평범해 보이는 곳을 하나 찾았습니다.

 

정식요리도 여러가지 있지만 살짝 배만 채울 요량으로 들렀기에 주문은 간단하게 합니다.

물이 좋아서 그런지 이 지역은 두부가 유명하다고 하길래 반찬 요량으로 작은 거 하나 시켜봅니다.

일본의 두부는 한국과 맛과 향이 전혀 다른데, 고소한 콩 향기가 진한 한국의 두부와 달리

맛은 간장과 와사비 없이는 밍밍하게 느껴질 정도로 맛이 약하고, 속에 기포가 거의 없이 젤라틴처럼 탄력있게 말랑말랑한게 특징이죠.

 

지역 명물이라 그런지 요 조그만 녀석이 3천원 가까이 하는 무서운 가격이지만

전 두부를 매우매우 좋아해서 막 퍼먹는 수준이기 때문에, 깔끔하고 색다른 일본 두부 탐방은 매우 즐거웠습니다.

 

 

 

식사는 그냥 간단하게 달맞이 우동으로 때웠습니다.

일본에서는 국물 요리 중앙에 날계란을 떨어트려서 살짝 익히는 녀석을 달맞이(月見)라고 부르죠.

 

우동은 그냥 매우매우 흔한 일반적인 수준이었는데, 계란은 꽤나 깔끔한 맛이 괜찮았습니다.

달맞이 우동은 먹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달라서, 확 풀어헤쳐 고소한 국물을 즐길 수도 있고

저처럼 면발 다 먹고 국물 조금 남긴 상태에서 풀지않은 반숙 계란을 후르륵 한꺼번에 삼킬 수도 있습니다.

 

두부는 반찬이고 우동이 정식이었지만, 느낌상으로는 두부에 더 집중하고 우동은 그냥 배 채우기 위해 먹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네요.

 

날씨가 추워서 체력소모도 심하니 조금 더 쉬고 싶기도 했지만

엄니는 열심히 구경하고 저녁에 일찍 돌아가 푹 쉬는게 좋겠다고 하셔서 금방 일어나 밖으로 나갑니다.

 

작년 여름에 코야산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아 겨울의 코야산은 어떤가 엄니와 함께 가 보기로 했습니다.

왕복 3시간 반을 넘어가는 장거리 이동입니다만, 어제 코베와는 달리 전철과 버스에 앉아갈 수 있어서 체력적인 부담은 덜 하죠.

 

엄니는 여행 좋아한다고 하셔도 역시 연세도 있고, 여행사 패키지에 익숙하셔서 그런지 좀 피곤해 하셔서

오늘은 코야산만 살짝 둘러보고 저녁 늦기전에 돌아와 쉬기로 했습니다.

 

겨울 코야산이 그런 건지, 그냥 시즌이 아닌건지 모르겠지만 전철 안에 저하고 엄니하고 옆에서 조는 사람 세 명밖에 없습니다.

엄니께서는 이쯤 되니 코야산이란 데 오늘 문 닫는거 아니냐고 걱정까지 하십니다.

저도 이렇게 한산할줄은 정말 몰랐는데, 다행히도 환승역인 하시모토(橋本)역에서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이 서 있더군요.

 

 

 

극락다리라는 이름의 역을 통과하자 눈이 바람에 휘날리는게, 개인적으로는 기대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저야 여름의 코야산을 다녀왔으니 눈이 내린 코야산의 모습 역시 크게 기대되지만

엄니는 그러지 않아도 피곤해 하시는데 눈까지 내리고 쌀쌀하면 몸에 부담이 되실 것 같아서 말이죠.

 

오랜만에 보는 코야산 행 케이블 전철의 모습입니다.

눈이 많이 오진 않지만 이미 군데군데 쌓여있는걸 보니 이전에도 내렸던 것 같더군요.

 

 

 

눈이 오던말던 이 열차는 강력한 케이블로 끌어당기듯 올라가는 방식이라 별 문제 없을 듯.

굉장한 경사의 오르막을 천천히 오릅니다. 지난번 여름과 달라진 점 한가지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해발 600m 즈음에 '여기가 도쿄 스카이 트리와 같은 높이'라는 팻말이 새로 생겼습니다.

코야산은 해발 1000m 에 가까운 곳이니, 스카이 트리보다 높은 곳을 이렇게 전철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저 앞에 도넛 모양의 교차로가 보입니다. 저 곳이 상행 열차와 하행 열차가 마주치는 곳이죠.

자연 보호를 위해 선로를 두 개 만들지 않고 저런 교차로만 만들어서 선로의 부피를 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던 적던 이 열차는 반드시 두 대만이 동시에 운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2015년 4월은 코야산 개창 12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시기라서, 그 때는 이 열차도 타기가 무서울 정도로 빡빡해 지겠죠.

 

 

 

사람이 많던 적던 정해진 시간에 항상 운행하는 두 대의 열차가 이곳에서 교차합니다.

경사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조그만 사고라도 굉장히 위험할 수 있어

두 번째 탑승임에도 꽤나 조마조마했지만, 코야산은 일본에서도 관리 철저하기로 유명한 곳이니 괜찮겠죠.

 

 

 

오사카는 대구보다 더 따뜻한 날씨라서 입고 온 옷이 더울 정도였는데

코야산은 역시 산 속이라 그런지 도착하자마자 추위가 온 몸으로 느껴집니다.

내린다기보다는 옆으로 흩날리는 눈발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여름의 코야산과 전혀 다른 광경을 선사해 주더군요.

 

여름의 코야산 포스팅도 이 블로그에 남아있으니 비교해 가며 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오사카에서 이곳까지는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강행군입니다만

외국인을 위한 아이템인 칸사이 스루 패스 덕분에 오늘은 아무리 버스와 전철을 많이 타도 추가 요금이 없습니다.

 

 

 

이 곳은 제가 받았던 감동에 비하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더군요.

보고 즐길거리가 많다기 보다는, 이런 곳에서 차분히 경치를 감상하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곳이니까 말이죠.

 

엄니는 일단 쭉쭉 뻗은 삼나무들의 모습에 흥미를 보이셨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여름때 혼자 온 것처럼 천천히 느긋하게 둘러볼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눈은 때때로 흩뿌리는 정도라 우산은 필요없었습니다만

이전에도 몇 번 내린 듯 하고, 이 곳의 기온 탓에 거의 녹지 않고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삼나무를 비롯해 이곳 오쿠노인의 많은 나무들이 침엽수라서 녹색을 간진하고 있었는데

녹색 이끼 사이로 다소곳히 쌓인 눈이 여름과 너무나 다른 이미지를 풍겨서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여름에 다녀왔으니 비교하는 재미가 있어서 신났지만 엄니께서는 추운데 걸어다니시느라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좀 뜨끔하더군요.

 

 

 

코야산 오쿠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 여행 포스팅에서 나름 상세하게 적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포스팅에서는 생략합니다. 좀 더 느긋한 여행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는 엄니와 리듬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제 마음도 별로 느긋하지는 않았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더욱 적막해 진 오쿠노인의 진중한 매력도 차분하게 느끼며 즐기기는 힘들더군요.

 

 

 

엄니도 입구에 안치된 기기묘묘한 묘석들을 보고 굉장히 신기해 하시더군요.

한국의 묘와는 달라서 처음엔 여기 서 있는 것들이 뭔가 하셨는데 자세히 보니 전부 묘석입니다.

 

이곳에 20만개가 넘는 비석이 500여년 전부 들어서 있었다고 설명해 드리니

놀라시는게 아니라 오히려 얼굴을 잔뜩 찡그리시더군요. 무덤 보면 무섭다고.

 

 

 

일본 흰개미 구제협회에서 세운 흰개미 추모비도 여전합니다.

엄니는 한자로 적힌 묘비는 곧잘 읽으시지만 이 녀석은 무슨 뜻인지 모르셔서 제가 해석해 드렸죠.

엄니의 반응 역시 별 걸 다 세우는구나 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모습을 보고 윤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원념이 자연의 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라는 사실에 꽤나 놀랐습니다만

엄니는 그냥 이렇게 묘비가 우르르 몰려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무섭고 쓸쓸하고 그렇다고 하시는군요.

역시 살아오시면서 죽음을 많이 겪었고, 본인도 퇴직 후 남은 삶에 대한 걱정이 더해가고 있는 시기라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으면 굳이 제 욕심으로 코야산에 오지 않았어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와 버린 이상 구경이라도 재밌게 하고 가시면 좋을텐데, 저도 마음이 무거워지더군요.

 

 

 

 

그래도 일본어보다 한자가 많이 적혀있는 곳이라 엄니가 중간중간 걸어가며 한자를 읽어보십니다.

특정 기업체에서 새운 묘석은 대강 어떤 곳에서 세운 것인지 이해하실 수 있어서 흥미를 가지시는 듯.

 

일본도 불교를 믿냐고 물어보시길래, 믿긴 하는데 여기서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한다고 대답하니

그럼 종교인으로서는 별로라고 하시네요. 종교에 개인적 욕심이 묻어날 여지가 남아있을 때 펼쳐지는 지옥도는 한국에서 곧잘 볼 수 있으니 말이죠.

 

 

 

흰개미 묘비와 함께 꼭 눈길을 빼앗기게 되는 강아지 묘석입니다.

엄니 역시 피식 웃으시더군요. 그래도 이 강아지 가족들은 얼마나 이 녀석들을 사랑했으면 비석까지 만들겠냐고 이해를 해 봅니다.

 

 

 

불상들의 머리와 어깨를 따뜻하게 해 주는 모습을 굉장히 신기해 하셨습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돌맹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하등 쓸데없는 행위이겠습니다만

역시 자신과 닮은 조각상에 마음을 열어주는 이런 행동이야말로 인간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저도 오쿠노인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기도 하고

따뜻한 봄남이었다면, 오디오 가이드 하나 대여해서 하나하나 들어가며 이곳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엄니는 추워서 그런지 묘석이 너무 많아 그런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후다닥 걸어가십니다.

 

전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을 여유도 없이 따라가느라 바빴죠.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이 상황도 꽤나 유쾌하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1년 반 전 여름의 코야산 여행은, 기구하게도 불의의 염좌에 의한 급성 통풍 증세 탓에

이 넓은 코야산을 바늘로 찔리는 듯한 격통에 시달리며 절뚝절뚝 간신히 돌아본 매우 특이한 체험이었습니다.

이동 자체를 빨리 할 수 없으니 역으로 풍경과 사진을 담는 시간을 좀 더 차분히 가질 수 있었죠.

 

지금은 몸이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그 때보다 더 여유없이 엄니 뒤만 따라가고 있으니

이것 또한 같은 장소를 다른 상황에서 여행할 때 생기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오더군요.

 

 

 

참 다양한 묘석들이 많습니다. 이 녀석은 동물들이 혼을 달래는 묘석이라 부처님 주위에 동물들의 석상이 둘러서 있네요.

 

 

 

물론 침엽수라 하더라도 여름과 겨울의 색은 너무나도 달라서 같은 사진이 나올 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엔 절대로 볼 수 없는 눈이 곳곳에 쌓여있었던 탓에

지난 번에 와 봤다는 생각보다, 마치 처음 찾는 듯한 신선함을 여전히 느낄 수 있어서 이득 본 느낌입니다.

 

 

 

UCC 커피 맛있습니다.

 

 

 

이곳 역시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이 가끔 보입니다만

총 관광객 수가 워낙 적고, 사람의 발소리를 제외하면 참으로 적막한 겨울 풍경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중국인 관광객이라도 다른 곳 처럼 왁자지껄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여름보다 더욱 고요해 진 오쿠노인의 분위기에 매우 흡족했습니다만, 엄니는 가끔 서서 한자를 읽는 걸 빼고는 그냥 슥슥 전진만 하실 뿐.

 

 

역시 제가 아직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죽음이 자신의 것이라는 자각이 부족한 탓이라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같은 나이대 사람들에 비하면 죽음에 대해 좀 더 자주 생각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단순히 젊어서 엄니처럼 이런 곳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단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엄니와는 조금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쪽이라고 한다면 저는 이 비석 세운 사람 쪽으로 아주 약간 기울어 있다고 할까요.

자기 무덤의 비석 앞에 마음껏 낙서를 하라는 낙천가의 묘비입니다.

 

엄니는 이곳을 돌아보면서 '묘가 이렇게 많으니 여기 귀신들은 지루하진 않겠다' 라고 하시던데

이 낙서총의 주인은 그 중에서도 꽤나 인기인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묘비 안에 증명사진이 주르륵 늘어서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읽어보니 일본 사진협회 회원들의 공동 묘석인 듯 합니다.

아마도 근대화 이후 카메라맨 1세대들 부터 이 곳에 등록되어 있을 듯.

 

 

 

오쿠노인은 진언종의 창시자인 홍법 대사의 사당 쪽으로 들어갈수록 더더욱 문화재급의 예전 묘석들이 줄지더 나타나기 때문에

이제부터 진짜 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엄니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만 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곳과는 상성이 맞지 않은 것 같네요.

 

 

 

전 아픈 다리를 질질 끌던 여름과 달리 잘 움직이는 몸과 머리를 최대한 이용해서

엄니를 따라가면서도 후다닥 고개를 돌려 사진으로 담을 만한 것이 있으면

촛점이 맞았는지도 보지 않고 셔터만 눌러재낀 후 남은 건 한국에 돌아가서 손 좀 봐야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코야산은 원래 이렇게 둘러보는 게 아니긴 합니다만, 이번 여행은 엄니에게 맞춰드려야 하는 것이니 별로 불만은 없었습니다.

 

 

 

이런 불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시길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한 석상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역시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지, 다른 불상에 비해 이런 옷가지가 걸려 있는 비율이 훨씬 높더군요.

 

 

코야산에 이러한 사찰과 묘터가 만들어졌던 500여년 전의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사람의 목숨이 파리만도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자연 재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영주들의 땅따먹기로 인해 자기가 무엇을 위해 죽창을 드는지도 모르는 농민들은

그냥 하루하루가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죠.

 

그런 덧없는 현세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내세에 찾아올 평온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기였습니다.

이곳 오쿠노인은 그 바램이 물질화 되어 이루어진 유적과 같은 곳이죠.

 

 

 

여기서도 빈부의 차는 드러난다는 게 참 쓴웃음 나오게 합니다만.

그냥 산 사람이 들어가 살아도 될 만큼 담까지 둘러가며 지은 묘석은

신기함을 넘어서 괴이하기까지 합니다. 내세를 원한다면 이 곳의 화려한 돌덩이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지.

 

 

 

묘석의 행렬에 눈이 지치면 고개를 조금 들어 하늘을 찌르는 삼나무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더군요.

엄니께서도 묘석은 둘째치고 코야산의 맑은 공기와 삼나무 숲은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입니다.

 

날씨가 예상보다 추워서 그걸 즐길 만한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말이죠.

 

 

 

여름에 벗겨주고 겨울에 씌워주는 것은 아니라서 사시사철 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역시 원래는 추운 겨울에 서 있는 모습이 안스러워 입혀준 것이라는 예상을 해 봅니다.

눈 덮힌 모습이 아무래도 가장 어울리니 말이죠.

 

 

 

휴게소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만, 엄니는 화장실만 한번 가시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시네요.

이곳에서 휴식하는 것 보다는 빨리 구경을 마치고 도로쪽으로 돌아가는 게 덜 피곤하리라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저는 추위를 별로 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후드나 목도리 등이 없었기 때문에

코야산의 추위는 제 예상보다도 훨씬 매섭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엄니가 서두르시는 것도 이해가 되더군요.

 

 

 

그래도 계속 뒷모습만 찍을 순 없으니 거대한 삼나무 앞에서 한 장 찍어드리겠다고 합니다.

찍는 건 좋은데, 역시 삼나무의 덩치를 담아내려니 사람이 주역인지 나무가 주역인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렇게 담은 건 엄니의 목도리가 이곳과 워낙에 강렬하게 대조되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 두죠.

 

 

 

다른 불상과는 달리 칠복신의 모습을 한 불상이 서 있습니다.

한국의 금복주 마스코트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묘석 앞에는 따지도 않은 술병이 꽤나 많이 놓여있네요.

 

귤도 아직 생생한 것으로 봐서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인 듯 합니다.

술 좋아한다면 하나 따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역시 신성한 곳이니 공양물을 훔쳐가는 건 안좋은 일이겠죠.

 

 

 

확실히 춥긴 추운가 봅니다.

 

한낮온도가 10도를 상회하는 오사카와는 달리 이곳은 가장 따뜻한 시기에도 2~3도에 그치는 듯.

그래도 관리하는 분들이 힘을 써서 그런지 순례길 자체는 얼음도 눈도 거의 없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눈이 딱 요렇게 쌓였을 때가 왠지 포근해 보이더군요.

아마 여름이라면 이런 묘석은 동글동글하지만 별 감흥을 받지 못하고 지나쳤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람은 별로 불지 않았던지, 왠지 저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자연의 섭리를 망가트리는 듯한 흉폭함이 표출될 것 같네요.

 

확연히 시선을 잡아끄는 몇몇 묘석들을 제외하면 확실히 여름과 겨울의 사진 결과물이 꽤나 다르게 분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눈발 때문에 살짝 흐린 하늘이 오히려 여름과의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듯 해서, 타이밍은 잘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 앞에 홍법 대사의 사당이 있습니다만 엄니는 이만큼 봤으면 됐으니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아쉬워도 억지로 보여드릴 필요는 없으니 발걸음을 돌립니다. 단지 왔던 길이 아니고 다른 한 쪽 길로 가면서 조금이라도 더 구경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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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쿄의 스카이 트리 같은 경우는 엄청난 관광객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데

코베의 포트타워는 야경이 좋긴 하지만 역시 높이도 그리 높지 않고 관광객도 그리 많이 찾지 않아서 좀 황량합니다.

 

낮에 찾아왔으니 더더욱 그런데, 딱히 주변엔 먹을만한 게 없더군요.

하지만 날씨는 쌀쌀해지고 배는 고프고 해서 근처 호텔의 뷔페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런치 뷔페가 1200엔으로 꽤나 싼 편이었는데, 사실 그걸 더 원했다고 할까요.

아침을 많이 먹어서 굳이 코베 스테이크 같은 고기요리를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뷔페 들어가면 많이 먹긴 하겠지만.

 

 

 

저렴한 뷔페다 보니 음식 종류는 꽤나 적었지만 하나하나가 먹을만해서 다행입니다.

밥하고 어울릴 반찬부터 간단한 닭고기와 돼지고기 요리 등등

작정하고 가게를 박살내러 갈 요량이 아니면 느긋하게 런치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네요.

 

코베까지 와서 이런 국적불명 뷔페나 먹나 싶기도 했지만

엄니께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고, 바람이 매서워서 좀 쉬고 싶었으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뷔페가 적당하다 싶더군요.

런치 영업시간이 3시까지였지만 어차피 2시간이 넘게 남았으니 문제 없습니다.

 

 

 

크게 비싼 요리는 없었지만 다들 음식이 깔끔해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직원분이 소고리를 끌고다니면서 원하는 손님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고 있습니다.

소금에 절인 후 겉만 살짝 익혀 보관한 듯한 녀석이로군요.

 

돼지고기는 이탈리아 등에서 이렇게 햄처럼 숙성시킨 녀석들 많이 먹는다는데

아무래도 단가가 비싼 녀석인지 그냥 놔두지 않고 요렇게 한 사람당 두 조각씩만 나눠줍니다.

 

 

 

겨울이라 그런지 뷔페에서 가장 인기있는 메인을 장식한 녀석은 이 전골이더군요.

일본에서는 이런 1인용 전골 냄비를 많이 사용합니다.

여행사 따라 여행할 때, 손님들에게 바로바로 내 줄 수 있는 장점도 있고 말이죠.

 

이곳은 뷔페다 보니 안에 들어갈 재료와 국물 종류를 자기가 선택해서 담으면 됩니다.

종업원 분들이 돌아다니다가 이걸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밑의 고체연료에 불을 붙여 주죠.

 

 

 

저하고 엄니는 벌써 꽤나 많이 먹은 후라서

한 냄비로 두 명이 나눠먹기로 합니다. 따뜻한 국물과 각종 해산물, 닭고기 등을 넣어서 시원하네요.

 

대구의 이리로 보이는 저 녀석은 볼 때마다 제가 엄니한테 물어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옛날엔 그냥 내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내장이 아니더군요.

궁금한 분들은 한번 찾아보시길.

 

뷔페 음식은 미리 만들어 놓아서 질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 있지만

이렇게 고체연료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끓고 있는 냄비를 보면

왠지 그냥 뷔페보다 좀 더 괜찮아 보인다는 느낌이 듭니다. 머리 잘 썼네요.

 

 

 

아이스크림이 6종류가 있는데, 처음엔 그냥 맛만 보자 하고 가져왔지만

먹어보니 이게 빕스나 에슐리 같은 곳의 아이스크림과 레벨이 다른, 상당히 제대로 만든 녀석이라

안 먹고 가는건 아깝다고 모든 종류를 다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엄니께서도 처음엔 영 주저하셨지만 드셔보니 종류별로 맛과 향이 잘 드러나서 결국 조금씩 다 드시더군요.

똥색은 뭐 설명할 것도 없지만 푸른색은 라무네라는 일본식 레모네이드 사이다 맛이고 분홍색은 복숭아 맛입니다.

 

 

 

옅은 색은 요구르트 맛이고 노란 색은 망고, 녹색은 뭐 말할것도 없죠.

생각보다 괜찮은 퀄리티에 놀라는 동시에, 한국의 뷔페집 아이스크림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세삼 깨달았습니다.

 

에슐리라던가 빕스라던가, 음식은 이제 그럭저럭 적응하고 맛있게 먹는 편이지만

아이스크림만큼은 그냥 애들 먹으라고 대충 선정한 듯한 그 낮은 수준이 영 적응이 안되고 있죠.

가끔은 아이스크림 값이 비싸니 그냥 맛없는거 놔 둬서 많이 못 먹게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엄니와 저도 꽤 오래 앉아있었지만 재미있게도 원래 앉아있던 모든 손님들이 저희보다 더 늦게 일어나더군요.

아주머니 몇 분이 언제부턴가 식사는 접어두고 줄창 음료수만 뽑아와 계속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1200엔 정도의 런치 뷔페란 일본에서 그냥 간단한 식사 한 끼 하는 정도의 금액이라

아주머니들 역시 아이들 학교 보내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 떨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75세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은 혼자 오셔서 천천히 음식 덜어먹고 커피 마시며 신문 읽고 계시네요.

걸음이 조금 불안하게 보일 정도로 몸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분인데, 일본의 혼자 식사 문화에 어지간히 익숙해 진 저로서도

흔치 않은 광경이라 살짝 놀랐습니다. 10년쯤 뒤엔 한국에서도 이렇게 혼자 외식하러 나오는 70대 후반의 노인들이 많아질 듯 합니다.

 

그러고보니 저희 가족 중 혼자서 식당에 앉아 밥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기도 하네요.

부모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혼자서 외식은 못한다고 고개를 흔드시는데,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긴 합니다.

 

 

 

조금만 먹고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데 음식을 앞에 두면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결국 배가 터질 때까지 뷔페를 즐기다가 아까와는 달리 터질듯한 배를 움켜잡고 다니 돌아다녀 봅니다.

 

한국의 재래시장이 요즘 애를 써서 지붕도 만들고 하며 자구책을 고심하고 있는데

일본 역시 대형 마트의 난립으로 많이 힘들어졌다고 하지만 워낙 이런 상가가 발달되어 있어서 한국보단 여유가 있는 편이죠.

시대 흐름의 차이라고 할까, 이쪽은 같은 장소에서 몇 대를 이어 장사하던 사람들이 눌러앉은 곳이라서

마을 사람들과의 유대 덕분인지 망하지 않고 계속 장사할 정도는 되는 듯 합니다.

 

물론 한국처럼 점점 이웃 얼굴도 모르게 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그 유대감이 끊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죠.

 

어느 가게에서 폐업 세일을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 엄니가 호기심에 들어가 봤는데

시장판 싸구려가 아니고 원래 50~60만원 하던 것을 15만원에 파는데다가 200만원짜리 가죽 가방을 60만원에 파는 굉장한 세일중입니다.

엄니도 보시고 가방 수준이 장난 아니라고 굉장히 눈여겨 살펴보시는데, 점원이 슬슬 바람을 잡아주더군요.

물론 엄니는 일본어를 모르시니 제가 알아서 커버했습니다.

 

가방의 품질로 본다면 이걸 60만원쯤에 구입하면 굉장히 잘 산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문제는 이 가게 독자적인 브랜드라서 소위 '명품'이라 잘못 불리고 있는 사치품 가방에 비해 희소가치가 떨어지는게 문제인 듯 합니다.

아마 가게 안에서 고민중인 많은 여성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더군요.

엄니는 그냥 실컷 구경하다가 가방은 집에 많이 있다면서 그냥 나오셨습니다. 하나 구입하셔도 된다고 옆구리를 찔러봤지만 별 효과가 있었죠.

 

 

 

코베 관광에 꼭 들어가는 차이나타운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란히 늘어서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장 거리와 바로 한 블럭을 두고 늘어서 있어서 상권 경쟁같은거 일어나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파는 물건이나 음식도 그렇고 차별화가 아주 명확해서 크게 다툼은 없을 것 같더군요.

 

능숙하게 일본어를 구사하는 화교도 있고, 그냥 일본인이 장사하는 가게도 있고 그렇습니다.

일본 정도로 철처하게 고립된 사회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마을을 이루는 화교의 수완은 정말 놀랍기 그지없네요.

 

 

 

한국에서 꽤나 많이 찾아간다는 나가사키의 하우스 텐 보스도 그렇고

이곳에 와서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딱 그겁니다. 왜 일본에서 중국풍 거리를 걷고 있는 걸까.

 

여기는 구경하러 왔다기 보다는 산책하는 길에 맛있는 거나 먹어볼까 싶어서 왔지만

하우스 텐 보스 같은 곳은, 어마어마한 돈을 써가며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구경할 필요가 있을까 항상 궁금할 따름이죠.

버블경제의 절정을 달리던 시기에 지어진 녀석이라 모든 건축자재를 전부 네덜란드에서 수입해 왔다는 점이 놀랍긴 합니다만.

 

각설하고, 저나 엄니나 배는 터질 것 같지만 차이나타운에 와서 먹을거리도 하나 즐기지 않고 돌아가기는 너무 아쉬워

터질 배를 움켜쥐고 조금이라도 신기해 보이는 거 먹어보려 애 씁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더군요.

 

검은색도 그냥 검은색이 아닌 암흑의 심연같은 만두가 눈에 띄여서 하나 사 봤습니다.

색깔은 맛에 크게 관련이 없는 듯 해서 아쉬웠지만, 육즙 가득 머금고 살짝 짭쪼름에 달달한 돼지고기 볶음 속이 맛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뷔페집에 간 걸 조금 후회하게 되었죠.

여기서 조금씩 조금씩 맛있는 거 다양하게 먹었어야 되는데 뷔페에서 그렇게 빵빵하게 하고 왔으니.

 

홀로 여행때는 자금을 아끼기 위해 고심고심해 맛있어 보이는 녀석 사먹고 했다면

지금은 배가 너무 부르기 때문에 고심고심해 맛있어 보이는 녀석을 골라야 하는 사치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엄니는 정말로 배가 부른지 아무리 나눠먹자고 말씀드려도 한 입도 드시지 않더군요.

 

일본식 교자도 맛있지만, 교자 하면 역시 원조는 중국이기 때문에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이것저것 먹을 배가 아니라 아쉽지만 좀 더 한국에서 먹기 힘든 녀석을 찾아다녀 보기로 합니다.

 

 

 

중국음식은 일단 기름을 사용하는 것들이 많고

특히 군것질거리는 뭐 말할것도 없이 칼로리 폭탄인 것들이 많아서...

 

확실히 저렇게 먹는게 맛있긴 합니다. 은근히 빡빡해 보이는 일본 군것질거리와 비교해서

한국적인 느낌도 나고 말이죠. 배만 고팠으면 아주 정복을 하고 다녔을 텐데.

 

 

 

진짜 중국 거리와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세계 어디든 차이나타운의 분위기는 아이덴티티가 드러나죠.

강렬한 붉은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거리의 모습은 일본의 거리와는 다른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겨울이고 평일이고 해서 코베 시내 전체는 꽤나 한산한 편이었지만

차이나타운엔 역시 관광객들 많이 오더군요. 차이나타운에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았다는 건 좀 신기하지만.

실제로 오사카에 있는 코리아 타운도 그렇고, 제일 많이 활용하는 건 재일한국인이었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이곳 코베의 차이나 타운에도 중국사람들이 실생활에 사용할만한 자국 식재료들 같은 거 많이 팔더군요.

 

중간중간 신라면이나 냉동만두 같은 한국어가 적혀진 녀석들도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코베의 소고기가 유명한 대신 차이나타운에서는 돼지고기 요리가 인기를 끕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길게 줄서서 뭔가 사먹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엄니도 함께 있고 해서, 배만 안 불렀다면 줄 좀 서서 뭔가 먹어보기라도 했겠습니다만

시장이 반찬인 것처럼 배부름은 어떤 진수성찬도 길바닥의 개X처럼 보이게 만들죠.

 

 

 

먹는건 포기하고 그냥 재밌는 마스코트 앞에서 사진이나 찍습니다.

차이나타운은 왠지 아무렇게나 마구 사진 찍어도 별 문제없을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이죠.

쿄토 같은 곳에서는 기념품 파는 가게에서도 매의 눈으로 살펴보다가

'사진 찍으면 안됩니다!' 같은 소리로 사람 김 빠지게 만드는데, 이곳은 별로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먹는데 대한 미련은 별로 없어서, 못 먹어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저기서밖에 먹을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먹거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엄니는 중국에도 몇 번이나 여행을 다녀오셨고

이런 거리음식과는 다른 진짜 진수성찬도 먹어보고 하셨기 때문에 이곳에 별 미련이 없으신 듯 하네요.

간식거리 조금 맛이라도 보라고 말씀드려도 배부르다는 말만 하시고 전혀 손을 대지 않으십니다.

 

 

 

차이나타운을 빠져나와 산노미야 쪽으로 걸어가면 큰 백화점이 있는데

엄니가 학교 선생님한테 부탁받은 유아용 그림책과 함께

손자가 가지고 놀 만한 그림책이나 장난감 찾아보려고 서점에 들어가 보자고 하십니다.

 

키노쿠니야(紀伊国屋)라는 일본 최대의 서점체인이 마침 백화점에 입점해 있어서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놀랍게도 할머니 한 분이 이 강아지 두 마리를 자전거에 남겨놓고 그대로 백화점에 들어가 버리시는군요.

이곳은 아직 강아지 납치 같은거 걱정 안해도 되는 곳인가봅니다?

 

강아지들은 많은 사람들이 귀엽다면서 다가와 웃어줘도

할머니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딱딱하게 굳어서 오직 백화점 문 앞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몇 번 겪어본 일인지 뛰쳐나가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게 대견하다고 할까 안스럽다고 할까.

 

10미터쯤 떨어진 백화점 앞 네거리에서는 젊은이들이 피켓을 들고 큰 소리로 지원자를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싶어 들어봤더니 후쿠시마 지진으로 갈 곳을 잃은 강아지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돕자는 호소를 하고 있더군요.

단순히 애완동물만의 문제가 아니라 후쿠시마의 남겨진 동물들에 대한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한국의 다큐에서도 많이 나왔듯, 수만 마리의 소와 말, 개, 닭, 고양이 등이 방사능에 피폭당하는 동시에 굶어죽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이죠.

 

젊은 청소년들의 힘은 한계가 있으니 일단 애완견, 애완묘라도 돕자고 홍보를 하고 있는데

엄니께서는 역시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그냥 피식 웃으시더군요.

사람도 못 돕는데 동물은 뭔 동물이냐고. 하지만 손자가 커서도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을지가 걱정이네요.

사람이 동물도 못 도우면 사람답게 살 수나 있을까 싶습니다.

 

 

 

여기서밖에 못 먹어볼 듯한 녀석이라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하나 사 왔습니다.

창업 40년이 넘은 전통있는 가게에서 팔고 있던데, 조금 딱딱한 크로와상 같은 빵 속에 코베 소고기를 넣은 고기호빵 같은 느낌입니다.

만두처럼 부드러운 건 아니고 프랑스식 빵에 고기를 넣은 듯한 묘한 퓨전느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만족했던걸 보면, 춥고 배고픈 겨울날 하나 사먹으면 굉장히 맛있었을 듯 하네요.

무게감이 있고 크기도 작은 편이 아니긴 하지만 380엔이나 하는 비싼 군것질거리라 혼자 여행다닐 때 과연 먹을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점에서 부탁받은 그림책과 손자용 장난감을 좀 구입한 후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쉴새없이 걸었으니 엄니께서는 굉장히 피곤하실텐데

버스타고 가자고 해도 한 코스밖에 안되는 거 뭐하러 타냐고 하시며 계속 걷는군요.

 

저도 다리가 후들후들할 정도인데, 걱정을 하면서도 일단 코베에 왔으니 건질 건 건지려고 다시 포트타워 쪽으로 이동합니다.

 

 

 

엄니가 오늘 이곳만 세 번이나 왔다면서 웃으시더군요.

사실 제 사진 욕심때문에 괜히 엄니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닌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좀 마음에 걸리는 중이긴 했습니다.

 

포트 타워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라서 엄청 놀라운 야경을 보여줄 정도는 아니죠.

밖에서 보는 모습이 더 재미있긴 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올라는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전진 또 전진.

 

 

 

포트 타워 안엔 별하늘 아래를 걷는 듯한 조명이 사방에 깔려있어서

야경사진 담기엔 오히려 좀 귀찮은 구석이 있더군요. 밖에서 보는 것 만큼 조그마한 타워라서 별 감흥은 없었습니다.

하긴 이 타워의 4배가 넘는 높이의 스카이 트리에서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여기라고 별 수 있나요.

세삼스럽긴 하지만 타워 올라가서 구경하는 건 제 성격과 별로 맞지 않는 듯 합니다.

 

그래도 볼만한 것들은 많았는데요. 쿄토 산자락의 '大' 자를 본따 만든듯한 항구 표시가 저기 산 위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좀 멀어서 박력이 좀 줄었지만, 어쨌든 한 번쯤 신기하게 쳐다볼 가치는 있겠죠.

 

 

 

해양박물관은 밤이 되니 좀 더 볼만하네요.

포트 타워는 이름답게 바다를 끼고 있어서 다른 곳보다는 야경이 좋습니다.

밤이 되니 한번 더 20년 전의 모습이 상상속에서 일어난 듯한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제가 괜히 엄니를 싸구려 비지니스 호텔에 끌고 갔나 싶은 생각이 항상 남아있어서 그런지

여행중 멋진 호텔만 보이면 '돈만 많았으면 저기 묵을 수 있었는데' 하는 한숨을 쉬곤 했네요.

 

물론 엄니께서도 어차피 저녁에 잠만 잘거 뭐하러 그런 데 돈 쓰냐고 하시긴 합니다만.

저는 아직 호화스러운 여행을 가 본적이 없어서, 한번쯤 경험해 보면 그것도 재미있지 않겠나 상상만 하고 있습니다.

호화스럽다고 해도, 여행사 패키지에 들어있는 4성, 5성급 호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니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겠죠.

 

여담으로 부모님이 예전 여행갔을 때 여행사에서 착오가 있어 호텔 스위트룸에서 자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돈이 있어도 투숙할 수 없고, 국빈들에게나 제공하는 스위트룸이었는데 저희 집보다 두세 배쯤 컸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일박 수천만원짜리 그 스위트룸 역시 그냥 하룻밤 자고 일어나 떠나면 끝이었다고 허무해 하셨습니다.

 

 

 

포트 타워 근처는 해양박물관 쇼핑몰, 유원지, 유람선 등 즐길거리가 많지만

엄니나 저나 그런건 별로 안좋아하는 성격에다가, 오늘 이상하게 관광객이 별로 없어서 굉장히 음산한 느낌밖에 안들더군요.

 

포트 타워 야경 구경이라는 항목은 어느 여행 가이드에나 반드시 나와있는 정석 코스인데

막상 와보니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 무리들 말고는 동네 마실 나온 듯이 조용했습니다.

대학생 커플쯤 되는 아해들이 많이 와서 야경의 낭만을 즐기고 있던데

아무래도 저처럼 엄니와 둘이서 여행 온 일행은 없는 것 같아서 더더욱 군중속의 고독을 느낀다고 할까요. 물론 전 그런 거 매우 좋아합니다.

 

 

 

 

산노미야 주변에도 괜찮은 호텔이 좀 있긴 합니다만

이곳 코베 항 주변은 역시 경치 때문인지 척 봐도 고급스럽게 보이는 호텔이 많습니다.

코베는 지진 탓고 있고, 버블 붕괴 이후로 킨키 지방중 가장 경기가 안 좋은 편에 속하는 도시라서

이렇게 한적한 동네 풍경속에 유난히 빛나는 고급 호텔의 모습을 보면 왠지 안스러운 느낌마저 들곤 합니다.

 

실제로 차이나 타운 정도 말고는 거의 대구의 본가 근처 동네 산책할 때보다 사람이 더 없었던 하루였네요.

엄니도 우리 뭔가 관광 잘못온거 아니냐고 걱정하실 정도였고.

 

겨울이라 일본 중부지방은 관광 수요가 좀 줄어든 탓도 있습니다만

겨울에 돌아본 도시 중에서도 이 곳은 제 예상보다 좀 황량한 느낌이 드는군요.

 

 

 

타워 야경을 꼭 보라고 꼬드기는 세간의 흐름에 넘어가 억지로라도 올라간 포트 타워입니다만

엄니나 저나 피로가 상당히 많이 누적되어, 이젠 뭐가 어찌되든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그래도 1층에 내려오니 한국의 빼빼로와 비슷한 포키로 만든 타워가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옆에는 일본 각지의 타워들을 소개해 놓았는데, 자전거 일주여행을 하다 보니 거진 한번씩은 지나가면서 쳐다본 것들이네요.

엄니는 우메다 공중정원 사진을 보고 신기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곳 코베보다 오사카 우메다가 더 가까웠기 때문에 살짝 뜨끔했습니다.

 

예전에도 가 봤지만 높은 곳은 그렇게까지 볼 만한게 별로 없어서.

 

 

 

코베에서 한 번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은 채 걸어다닌 저와 엄니입니다만

이제 지칠대로 지쳤고, 어차피 오사카행 지하철 타려면 산노미야 역에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코베 지하철을 한번 타 봤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역내에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네요.

 

엄니와 저는 둘이서 미나토 모토마치(みなと元町)역의 고요한 승강장에 서서 공포를 만끽했습니다.

인구 150만의 중소도시 치고는 너무나도 한적해, 왠지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물론 피와 살과 뼈가 날아다니는 상큼한 영화라서 진짜 긴장하고 있는 엄니한테 말씀드리긴 어렵죠.

코베에 관광와서 이런 한적함도 구경해 보는구나 싶어 사진은 재미있게 담았습니다.

 

일본은 전혀 관광 시즌이 아닌건지, 코베가 그냥 그런건지, 우리가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닌 건지.

이러나 저러나 제가 코베를 관광 목적으로 다시 찾을 일은 거의 없을 듯 해서

느껴진 텅 진 승강장도 나름 재미있게 느껴지더군요. 어차피 산노미야 역은 붐비겠지만.

 

 

 

산노미야 역에서 난바까지는 40분만에 간단히 도착합니다.

기차 안에서 신나게 졸아댈 정도로 피곤했나 보더군요.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엄니가 가볍게 저녁 먹자고 하십니다. 숙소 안에서는 별로 먹을 게 없으니까요.

 

숙소 바로 옆이 상점가라서 먹을 건 많습니다만, 짜고 기름진 거 싫다고 하셔서 조금 더 발품을 팔아봤습니다.

그래서 10평도 안되는 허름한 가게 문을 무작정 열고 들어갔네요. 여기도 창업 40년은 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동네의 조그만 가게들은 대부분 술집도 겸하고 있는 형식이라, 들어가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맥주 한 잔씩 들이키며 식사 중이로군요.

 

일본에서는 아직 실내 흡연도 인정되고 있어서, 술과 저녁식사와 담배까지 함께 하는 사람들 덕분에

담배냄새가 좀 거북했습니다만, 이것도 동네 구멍가게의 저녁 풍경이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누그러진 마음으로 구경했습니다.

 

엄니는 계란과 버섯, 각종 야채를 얹은 덮밥을 주문하셨습니다. 이것도 좀 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담백해서 먹을 만 하다고 하시더군요.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할아버지와 서빙하는 할머니는 아무래도 부부인 듯 합니다.

엄니가 처음엔 자매가 아닌가 생각하셨다고 할 정도로 닮았는데, 역시 오랫동안 함께 하면 얼굴도 닮아가는 걸까요.

 

저는 중화소바를 시켰는데, 강렬한 라멘보다는 훨씬 옅은 국물맛에 숙주나물이 듬뿍 들어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늦은 밤이라서 너무 짜고 진하면 얼굴이 참 귀엽게 부풀어 오를거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운 맛이라서 부담없이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옆에 후추통으로 보이는 깡통이 있어서 후추 좀 뿌릴까 싶어 집어들었는데

너무 가벼워서 빈 통인갑다 하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 놨습니다.

라멘 먹으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노인들이 담뱃재를 그 깡통에 털고 있더군요. 재떨이였습니다.

안에 무게감이 느껴졌다면 아마 그걸 라멘에다가 들이 부었을 텐데

그랬다면 라멘이 아까운 게 문제가 아니고, '라멘 잘먹다가 담뱃재 들어부은 괴인 출연'이라고 뉴스에 나갈 것 같아서 섬뜩하더군요.

 

미친놈 취급 받지 않고 안전하게 끝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숙소에서 목욕 후 2층 침대로 기어 올라가는데, 내일은 아무래도 여정을 좀 가볍게 해서 일찍 돌아와 쉬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7시에 조식 먹으러 로비로 내려갑니다.

슈퍼 호텔 조식은 저가 비지니스 중에서는 그래도 먹을만한 녀석이고

고기반찬 생선반찬, 달걀, 낫토, 된장국 등등 건강에 별로 나쁘지 않은 반찬이 나와서 나이 드신 분들도 잘 드시는 장점이 있죠.

 

잠은 잘 잤지만 엄니는 역시 좀 피곤하신 듯 합니다.

밥 먹고 소화 좀 시킨 후 나가려고 했는데 잠깐 TV보며 누워있으니 금새 잠이와서 9시 반까지 자 버렸네요.

여행사를 따라다니는 일정이 아니라 피곤하면 늦게 나가서 좀 덜 돌아보면 되고 이런 건 편합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도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엄니께서는 외국이니 도시도 괜찮다고 하셨고, 어차피 내일부터는 거의 대부분 고즈넉한 곳만 돌아다닐 예정이라

크게 관심은 없어도 오사카 옆의 코베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이곳도 관광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들어서.

 

 

 

자전거 여행중 코베에 도착했을 때는 길거리에 사람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아서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알아보니 타이밍 참 절묘하게도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루미나리에 당일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한신 대지진을 잊지 말기 위해 매년 12월날 열리는 루미나리에는 코베 시내 전체 교통을 통제하고 보행자 천국으로 만드는

도시 최대의 행사였기 때문에, 자전거 역시 내려서 간신히 인파를 헤쳐나가야 했고, 당연히 노숙할 만한 장소따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호텔을 잡으려고 해도 이미 코베 시내 모든 호텔이 만실인 상황. 루미나리에를 보고 싶긴 해도, 자전거 세워두고 텐트 칠 장소도 없는 터라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고 도망치듯 코베 시내를 빠져나왔던 기억이 있네요.

 

그 탓에 코베는 자전거 여행 중 별로 추억이 없는 도시라서, 이번에 한번 가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도망치듯 빠져나왔다는 일 자체도 소중한 추억이긴 하네요.

 

코베의 중심역인 산노미야(三宮)역에서부터 여기저기 걸어다니시며 엄니는 진짜 지진으로 쑥대밭이 난 곳이 맞나 놀라워 하셨습니다.

이미 지진의 참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고, 젊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점차 그 때의 악몽도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이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콘크리트 건물처럼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코베는 뭐, 자전거 여행 당시에도 별로 흥미가 없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코베 소고기가 유명하고, 차이나 타운이 유명하고 그렇고 그렇지만

도시 경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오사카와 크게 다른 점을 느끼기가 힘들었으니까요.

 

물론 파고들면 오사카와 다른 점도 많지만 이곳은 하루 이상 느긋하게 둘러볼 만한 구경거리는 별로 없는 곳입니다.

롯코산(六甲山)이라는 곳에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가 보는 야경은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만

오사카를 거점으로 저녁에 돌아가야 하는 여행길에서는 꽤나 힘든 여정이라 그건 산뜻하게 포기합니다.

 

산노미야 역에서 바다쪽으로 주욱 이어지는 넓은 대로는 플라워 로드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정성들여 가꿔 놓은 꽃들이 안간힘을 다 하고 있어서 엄니가 매우 좋아하시더군요.

 

 

 

일본의 겨울 여행은 대부분 완전 남부 아니면 완전 북부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어서

중부지방인 코베는 생각만큼 여행객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길거리 걸어가다 보면 한국인 젊은 커플들의 목소리가 군데군데 들려오긴 합니다만.

 

빌딩 숲이라고 해도 확실히 한국과는 분위기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도 유심히 살펴보면 좋은 여행거리이긴 하죠.

엄니께서는 적당히 주변 둘러보며 구경하시다가 이 주변에 큰 서점 같은거 있으면 나중에 들어가보자고 하십니다.

 

엄니 학교 선생님이 유아용 그림책을 부탁한 게 있어서, 그거 사 줄겸 손자 책도 하나 구경해 보려고 말입니다.

형수님이 일본어를 살짝 읽을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굳이 일본에서 그림책을 사 줄 필요가 있는가 의아하지만

엄니는 그냥 외국까지 왔으니 손자 선물 사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설명을 하시더군요.

 

 

 

엄니께서는 제가 풍경을 찍던 엄니를 찍던 꽃을 찍던 그냥 갈 길을 가셔서

저는 엄니를 쫓아다니며 사진 담을만하다 싶은 녀석을 번개같은 순간에 캐치해서

촛점이 맞았는지 안맞았는지 확인도 못하고 그냥 후다닥 셔터 누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강행군을 해야 합니다.

 

아예 카메라를 가져 오지 않았거나, 스냅머신인 똑딱이를 가지고 왔거나, 최신 미러리스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지만 저는 가난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카메라가 벽돌만한 DSLR 과 방망이만한 렌즈밖에 없거든요.

 

이런 여행은 그리 자주 하지 않으니 참으면 될 일이지만, 역시 필요할 때 필요한 크기의 카메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코베에 오긴 했는데 조식을 든든히 먹어서 뭘 먹고싶은 생각도 별로 없고

도시 조성은 참 잘 되어있는데 그렇다고 딱히 유별나게 볼 만한 곳도 없어서

산책을 즐긴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이곳저곳 걸어갑니다. 그래도 하늘이 눈부시게 맑아서 그거 하나로도 만족.

 

 

 

공원같은 곳에 도착하자 수많은 방송 장비들이 바쁘게 뭔가 설치를 하고 있더군요.

뭘 하는가 궁금해서 주위를 슬금슬금 둘러보다가 늦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엄니와 함께 여행하는 점에 신경을 쓰다 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1월 17일이 한신 대지진 19주년이었던 것이었죠.

 

추운 날씨에 그래도 외국 여행이라고 텐션을 좀 높여서 걸어가고 있던 엄니와 저는 잠깐 조용해졌습니다.

그래도 만약 내일 코베에 갈 예정을 잡아 놓았었더라면 이거보다 훨씬 더 어색한 기분이 되었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네요.

내일은 아마 여행객들이 이것저것 돌아보면서 웃고 즐기고 맛있는거 먹고 할 만한 기분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일본 어느 도시를 가나 꼭 찍어보는 맨홀 혹은 소화전의 모습입니다. 관광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면 꼭 재미있게 만들어 놓더군요.

코베는 좀 큰 도시라 그런지 지역별로 맨홀에 그려진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코베는 오사카, 쿄토, 히메지 등 굴지의 관광 명소에 포위되어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관광보다는 상업 중심의 도시이긴 합니다만, 항구로서의 기능이 뛰어나 서양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이라 그쪽 방면 볼거리는 좀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여행 가기 전의 코베는 역시 NBA의 코비 브라이언트 선수의 에피소드로밖에 남아있지 않았죠.

코비 아버지가 코베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그게 너무 맛있어서 아들 이름을 코비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대체 무슨 의도로 채워 놓은 것인지 궁금했던 자물쇠.

자세히 보니 체인을 고리에 둘러서 고정시켜 놓은 것이더군요. 왜 이런 방법을 썼는지 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혼자 여행가면 이런 '외국 관광'과는 전혀 관계없는 모습에 더 진지하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편이지만

이런 사진 한 장 찍는 순간에도 엄니는 축지법을 구사하시며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어서

역시 남과 같이 가는 여행은 바쁘구나 싶더군요.

 

엄니는 제가 어디 가는줄도 모르는데 저보다 먼저 앞서서 걷고 있으니 참 신묘합니다.

 

 

 

해안가 쪽 거리는 서양식 석조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백화점이나 은행 등으로 쓰이고 있더군요.

한신 대지진 당시에도 콘크리트 건물이나 석조 건물은 별로 무너지지 않아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듯.

 

점심시간이 다가와서인지 갑자기 건물들에서 양복입은 사람들이 우루루 쏟아집니다.

코베에서는 단연 코베 소고기가 유명하다고 하지만, 엄니는 먹는데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분도 아니고

조식을 든든히 먹어서 고기 먹고싶지는 않다고 하셔서 그냥 적당히 즐길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일본쪽은 워낙 편해서 여행 기분이 들지 않는 탓도 있지만

딱히 어느 지역에 왔다고 해서 꼭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지방 특유의 요리 등을 먹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같은게 없습니다.

그래서 지역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먹고싶다는 느낌이 드는 것만 먹는데, 엄니는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거리 이름이 해안거리입니다만

아무래도 건축 양식등을 보면 서양 문물에 크게 영향을 받은 거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겠더군요.

 

아무래도 실제 거주민들보다 저처럼 여행 관광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 거리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펴보는 경향이 있으니

어디에서나 보이는 흰색 테두리에 푸른 색 철판으로 만들어 진 거리명 간판보다 이런 황동 간판이 훨씬 눈에 들어옵니다.

 

거리 자체가 옛 서양식 건물들로 이루어 져 있어서, 미관과의 조화를 생각해 만든 것이겠죠.

간판 하나가 인상을 깊게 만들 수도 있는게 여행이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좀 더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건축 양식 자체가 한국에서는 별로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약간 기분이 어색하더군요.

며칠 전 서울 올라갔을 때도 여전히 구 서울역사의 모습은 묘하게 이질적이었습니다.

 

건축학적으로 의미는 큰 녀석들이겠지만 역시 일제시대의 잔재다 보니 좋게만 봐 줄수는 없는게 민족성이란 녀석일지도 모르겠네요.

조금 더 느긋하게 즐길 요량이었다면 저런 건물들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윈도우 쇼핑 같은 건 조금 더 몸이 지치고 나서 즐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일단은 계속해서 해안쪽으로 이동합니다.

 

 

 

해안쪽으로 다가오자 사정을 알고 있는 저에게는 참 씁쓸한 모습이 눈 앞에 드러나더군요.

한신 대지진 당시 전 세계에 지진의 참상을 단 한장의 사진으로 표현했던 그 녀석입니다.

 

지금은 국도 2호선으로, 여기서 좀 더 움직여야 한신 고속도로와 연결됩니다만, 그 모습만큼은 19년 전의 악몽을 으스름하게 간직한 듯 하네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코베 하면 어쩔 수 없이 맨 먼저 떠오르는 사진입니다.

코베는 수백 년 동안 고진도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안전한 지대에 속해 있었고

이 고속도로가 완성될 1960년대 중반까지는 진도 7.0 이상의 강진에 견딜 수 있는 기술이 없었죠.

 

다시 재건된 고속도로는 진도 7 이상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재건 당시 이제 지진에서 안전하다고 자신감을 표하곤 했습니다만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진도 9.0 이라는 인류 역사상 5번째로 강력한 지진이 토호쿠 지방을 강타해 버렸으니...

진도 7.2 였던 한신 대지진의 1000 배가 넘는 위력을 가진 녀석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동일 국가에서 일어난 점을 보면

코베의 지진 후유증과 불안감이 사라지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코베는 지진 이후 거의 디폴트 상태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습니다만

세계 각지에서 엄청난 성금이 쏟아졌고, 그때까지는 부유했던 일본 정부의 국가 주요 정책으로 복구를 지원했기 때문에

지금은 일부러 기억하지 않는 한 그런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거의 느낄 수 없는 고도화 도시로 변신했습니다.

 

깊은 새벽에 일어난 지진이라 사상자가 6천여명 정도에 그칠 수 있었다는 점도 어찌보면 다행이고...

제가 고가도로를 보며 엄니에게 설명을 드리니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면서 정말 여기에 그런 지진이 있었던 거냐고 물어보시네요.

 

 

 

아주 작은 구역입니다만 한신 대지진 당시의 피해 상황을 그대로 남겨놓은 메모리얼 파크입니다.

제 설명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던 엄니께서도 이 모습을 보시자 깜짝 놀라시더군요.

 

참상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욱 비참한 구역을 남겨놓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이상의 보존은 아마도 살아남은 코베 시민들의 가슴을 너무 아프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본 소고기중 최고라는 코베 소고기를 스테이크로 즐기고

차이나타운의 흥겨운 호객행위와 맛있는 군것질거리를 즐기고

거대 백화점과 상점가들 사이에서 쇼핑을 즐기며 코베 타워에서 야경을 감상하는 그런 여행이라 하더라도

이 메모리얼 파크에서만큼은 그냥 웃고 즐길수 만은 없는 것이 코베라는 도시의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라고 하겠죠.

 

굉장히 복잡한 도시이긴 합니다만, 이쪽 해안가로의 접근성이 좋은 편이라

주민들이 운동복 입고 조깅을 즐기는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이 보존 지역만 없다면 아미 미국의 해안가 공원을 연상시키는 아늑한 모습에 가슴이 시원해졌을 것 같네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나름 성공적인 복구가 이루어진 도시였기 때문에

매년 1월 17일엔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선 안된다고 촛불을 켜며 염원을 빌곤 했는데 말이죠.

이 비극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공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동일본의 대지진 때문에

이곳의 19주년 추모식은 더욱 숙연해 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좀 더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일본인들의 근본적인 정서적 차이가

수천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이런 자연 재해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인생관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그렇게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정말 큰 차이가 있죠.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전에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차이 때문에 섣부른 판단과 추측이 어렵기도 합니다.

 

 

 

메모리얼 파크는 정말 산책하기 딱 좋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제 눈 앞에 나타나는군요.

코베가 대지진이라는 이름 하에서 어느 정도라도 벗어나려면 아직 수십 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풍경을 봐도 마음 속에는 항상 그 때의 고가도로의 모습이 떠오르니 말입니다.

 

 

 

해안가라서 빌딩들에게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늘은 눈을 못 뜰 정도로 화려합니다.

코베에서 건진 가장 큰 볼거리가 이 시간대의 하늘이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과하지 않겠더군요.

 

엄니는 벤치에서 잠깐 쉬도록 하고 자판기에서 따듯한 콘스프 하나 뽑아왔습니다.

음료수를 마시지 않는 엄니는 처음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게 음료수가 아니라 따뜻한 옥수수 스프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씨앗 하나 빠트리지 않고 쪽쪽 다 드시더군요. 저도 한모금 얻어마시려고 했는데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추운 초겨울까지 자전거 여행을 할 때, 자판기의 콘스프는 저한테도 큰 도움이 된 녀석이었죠.

 

 

 

아마 혼자 온 여행이었다면 이곳에서 최소 한두 시간은 하늘을 바라보며 즐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콘 스프에 힘을 얻은 엄니는 제가 사진 좀 찍고 있는 와중에 다시 저 멀리 출발해 버리시는군요.

 

하긴 엄니 가이드 역할로 온 것이라 사진을 너무 찍어댈 필요는 없으니, 사진보다는 엄니 꽁무니를 쫓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도 이 날 코베의 하늘은 정말 담아내는 실력이 부족한 것을 아쉬워 해야 할 정도로 대단해서

천천히 셔터 찬스를 기다려도 안타까울 판에 엄니가 계속 이동하셔서 그냥 대충 담아버릴 수 밖에 없다는게 조금 아쉽긴 했죠.

 

 

 

해안가 공원에는 코베 포트와 해양 박물관, 쇼핑몰 등 그럭저럭 볼 만한 것들이 꽤나 있습니다.

 

엄니는 해외여행 경험이 워낙 풍부해서... 안 가본 대륙이 아프리카와 남미, 호주 정도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죠.

그래서 여행사 따라가면 꼭 들어가게 되는 각종 박물관이라던가 수족관이라던가 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그래서 이곳 박물관들도 그냥 산뜻하게 패스하기로 하고, 신기한 건물 외관이나 사진으로 담아보고 있습니다.

 

 

 

지면에 떨어져 짜부가 된 롤케이크 처럼 생긴 저 건물은 해안가 호텔입니다.

제가 돈이 많았으면 저런 곳에서 하룻 밤 묵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자괴감에 빠지니 엄니가 피식 웃으시더군요.

 

뭐, 사실 일박 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지만... 엄니나 제 성격상 저런 데서 자 봤자 어차피 저녁에 잠만 자는데 돈 아깝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터이니.

 

 

 

원래 이쪽은 밤에 포트 타워를 올라가 야경을 즐기는 게 여행의 기본 코스로 알려져 있는데

시간이 남아서 그냥 낮에 한번 둘러보려 왔던 곳이, 찬란한 하늘 덕분에 그래도 가슴 시원하게 만들어 줘서 좋았습니다.

 

엄니는 추위에 약해서 빨리 이동하자고 계속 신호를 날리고 계셨지만, 전 찬바람을 좋아하는 터라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끌고 있었죠.

산노미야 역에서 이곳까지는 그렇게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전철 약 4코스 정도의 거리를 도보로 이동하고 있었죠.

 

저는 중간중간 엄니한테 어디 들어가서 쉬거나 버스타고 이동하지 않겠냐고 물어봤지만

겨우 한두 코스 이동하는데 뭔 버스냐고 계속 걸어가시는 바람에 조금 걱정도 되었습니다.

날씨도 춥고 하니 배가 많이 고프진 않지만 근처에서 휴식과 식사를 겸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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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가 퇴직하시고 좀 심심해 하셔서 저하고 가볍게 근처 오사카 정도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일본쪽으로 가면 가이드 필요없이 저하고 다닐 수 있어서 말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엄니는 2월 초에 부부모임 동창회에서 대만여행 간다는 사실을

제가 오사카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나서야 알게 되었네요. 그래서 좀 있다 또 나가십니다.

 

더더욱 아이러니하게도 저 역시 작년 10월부터 2월에 홋카이도 가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눈축제 구경이라는 목적도 있지만 거기서 취직하신 대학원 졸업생분과 이야기 좀 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엄니나 저나 전혀 갈 필요가 없었던 여행이었습니다만

그래도 뭐, 자식하고 둘이서 해외여행 나가는 건 평생 처음이니까 괜찮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불행히도 오래 직장을 비울 만한 여력이 없어서, 그냥 2월에 대만 함께 가시는 걸로 결정했네요.

 

대구에서 부산 김해공항으로 당일 버스타고 갈 예정이라 까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엄니가 커피를 너무 조금 드셔서, 이럴 줄 알았으면 음료수는 하나만 시켜도 될 뻔 했네요.

 

 

 

직장생활 당시 시간에 쫓기는 출퇴근을 워낙 많이 경험하신 엄니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가서 기다리는게 낫지 늦게 가서 허둥대기는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별로 볼 것 없는 조그만 김해공항에도 탑승 2시간 반이나 전에 도착해서 미리미리 체크인을 해 버렸네요.

 

김해공항은 정말 아담해서 눈이 번쩍번쩍하는 인천공항의 면세점 물건들 구경할 수는 없지만

청사 내부에 재미있는 쓰레기통이 있어서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줬습니다.

엄니는 한참동안 '왜 여행가방이 이렇게 여기저기 세워져 있지'라고 생각하셨다고 하는군요.

 

 

 

오사카를 기점으로 하는 저가항공인 피치항공을 사용하는 여행입니다.

첫날은 저녁 7시가 넘어야 겨우 오사카 시내에 도착할 것 같지만, 저가항공이니 감내해야 할 듯.

그래도 난바역에서 도보로 이동가능한 숙소인데다 도톤보리라는 밤의 거리까지도 걸어서 갈 수 있으니

피곤한 여행 첫날 저녁은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엄니나 저나 여행 전날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세우는 성격이라

고속버스 -> 비행기 -> 전철 등 하루 5시간 정도를 이동하는데만 소모하는 첫 날 여정은

항상 머리가 지끈거리는 힘든 날입니다만, 그것도 이제는 익숙해 질 만큼 많이도 나가다녔군요.

 

 

 

피치항공은 물조차도 사 먹어야 하는 곳이라 남은 시간동안 점심식사를 합니다.

오사카에서 뭐 먹으러 나가려면 적어도 저녁 8시는 넘어야 할 것 같으니까 말이죠.

 

한국의 공항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은 없어서 심히 불안했지만

배 속에 뭐라도 넣어놔야 하니 일단 푸드코드에서 적당히 주문했습니다.

엄니는 타이식 볶음국수였나 어쩌구였나 주문하고, 저는 뚝배기 된장국 비슷한거 주문했습니다만...

역시 돈값은 거의 하지 못하는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일 뿐이었네요. 기대하지도 않긴 했지만.

 

식사 후에 도착층 쪽으로 내려가 귀국시 바로 타고 갈 버스표를 예약하고 있는데

그 쪽에는 번햄즈 버거였나 크라제 버거였나 아무튼 좀 비싼 버거집이 있는걸 봤습니다.

차라리 그걸 먹는게 좀 더 만족감이 있었으리라 생각했죠.

 

 

 

이륙이 연착되는건 특히 저가항공사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사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예정시각보다 20분쯤 지연되었지만,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워낙에 가까운 거리라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이라면 그 첫경험의 황홀함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금새 착륙해 버릴 테죠.

 

오랜만에 딱 해가 질 무렵쯤 하늘 위를 달리는 비행기를 탄 덕에

푸른 하늘과는 또 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은 만족할만 하군요.

 

 

 

기내 쇼핑 팜플렛을 보니, 칸사이 공항에서 오사카 난바까지 가는 특급열차인 '래피드 a'를

원래 1500엔에서 1000엔으로 판매한다는 좋은 광고가 있어서 그거 사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1시간 15분의 짧은 비행시간동안 기류가 불안정한 곳이 많아서

기장 명령으로 승무원들도 대부분의 시간을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게 되었더군요.

이런 경우엔 기내 쇼핑도 자연적으로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경험했습니다.

 

두 장만 사도 만원이나 절약할 수 있어서 언제 쇼핑이 시작되려나 매우 조마조마했는데

결국 기류 문제로 인해 쇼핑은 시작도 하기 전에 오사카에 도착해 버렸네요.

 

 

 

일단 비행기 내리면서 구입할 수 있는지 한번 더 물어보기로 하고, 해지기 전의 창밖이나 담아봅니다.

노파심에서 적지만, 창쪽 좌석은 엄니에게 드렸고 저는 카메라를 쭈욱 뻗어서 한손으로 담은 겁니다.

 

엄니는 오사카도 외국이라고 추우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시는데

오사카나 쿄토 등의 지역은 한국에서도 따듯한 편인 대구와 비교해도 겨울 평균기온이 더 높은 곳이라

그냥 입던대로 입고 가도 된다고 말씀을 드려도 별로 효과가 없네요.

 

어느 가족이나 다들 그렇겠습니다만

제가 한국의 새집증후군에 대해 설명하면서 추운 겨울이라도 환기 꾸준히 해야 독성물질이 빠져나간다고 한참 설명하면

그냥 듣고 계시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응응거리시다가, 며칠 뒤 TV에서 똑같은 내용의 방송이 흘러나오면

깜짝 놀란 얼굴로 저한테 달려와서 새집증후군이란 게 그런 거라서 우리 환기 열심히 해야겠다고 말씀을 하시곤 하죠.

 

아무튼 금새 착륙하고 내리려는데 옆좌석 밑에 면세점에서 구입한 듯한 담배 두 보루가 떨어져 있습니다.

불쌍하게도 누군가가 잊어버린 모양이네요.

 

저는 팔면 밥값 정도는 나오겠다고 생각했는데

엄니는 남의 것 가져가면 밤에 잠이 오겠냐고 하시며 승무원에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저야 뭐 담배 두 보루 정도라면 밤에도 잠 잘만 하겠지만 어쨌든 얌전히 승무원에게 인계하고 내렸죠.

 

래피드 a 할인권 좀 구할 수 없냐고 물어보니 공항 터미널에서도 할인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거긴 1000엔이 아니라 1100엔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었습니다.

 

 

 

평일에 출발해 평일에 돌아오는 여행이라 좀 한산할 줄 알았더니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이 많은지 한국인 중국인 관광객들이 아주 칸사이 공항을 점령중이더군요.

 

일단 앞으로 이용할 칸사이 스루 패스를 구입한 후 래피드 a 에 탑승하러 이동하는데

광장 한편에 세계의 명화가 묘하게 전시되어 있어서 한번 가 봤습니다. 재현도는 상당한데 대체 뭘로 만든건가 싶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건 다 쓰고 회수한 전철 티켓을 모아 만든 그림이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회수권의 검정 마그네틱 부분과 앞쪽의 노란 부분을 꾸준히 이어붙여서 만든 것이 보이더군요.

 

이 작품에는 131,516장의 티켓이 사용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 전시회 너무 좋더군요. 화려함보다 친근함이 앞서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 혼자라면야 이런 특급열차 탈 필요 없지만 엄니와 함께니까 최대한 편한 이동을 선택합니다.

사실 이 시간에 혼자 온다면 첫 날은 숙소도 잡지 않고 넷까페 같은데서 새우잠이나 자고 있겠죠.

 

무사히 열차를 탔는데 앞 옆 뒤 거의 대부분이 한국 아니면 중국인 관광객입니다.

대학생쯤 되어보이는 젊은 아기들 서너 명이 즐겁게 한국어로 이야기 중이든데

남정네 여럿이 오사카 와서 뭘 즐겁게 여행하고 갈런지 궁금하더군요.

 

그러고보니 전 남하고 여행간 적이 혼자 여행간 적 보다 훨씬 적어서

단체 여행의 매력이란 거 아직 이해하기 힘들긴 합니다.

 

 

 

편안하게 난바역에 도착해서 잠깐 걸어 숙소에 짐 풀어놓고

그냥 하루 보내기는 아쉬워 도톤보리(道頓堀)로 이동합니다. 대낮보단 야경이 더 괜찮은 전형적인 도심지죠.

 

인공 하천을 중심으로 조성된 상가임에도 서울의 청계천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 환락의 거리입니다.

저희 집안 사람들의 특징이, 옆에서 혜성이 폭발해도 미간에 주름 하나 변하지 않고 흐음 하는 성격이라

하천 양쪽에 끝없이 늘어선 욕망의 네온사인을 떡하니 보여드려도

지금 엄니가 초상집에 온 건지 여행 즐기러 온 건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는 보살의 은은한 표정으로 일관하시더군요.

 

제가 즐긴다기 보다는 엄니 가이드 역할로 따라온 터라 이렇게 되면 장소 선택이 잘못된 건가 고심하게 됩니다.

 

저녁이 늦었고 해서 술안주 비슷한 자극적인 먹거리가 많은 도톤보리의 음식점보다

적당히 한끼 때우고 슈퍼에서 간식거리나 사 가자고 하셔서 그냥 요시노야에 들어갔습니다.

일본 서민들의 휴식처인 요시노야인데, 어째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이 전부 한국인 관광객이더군요.

더 웃긴건 영어로 어물어물 뭔가 주문하는 한국인과, 그 주문을 어설픈 일본어로 받아드는 중국인 알바의 시트콤이었습니다.

 

매우 심란한 일본어를 어색하게 발음하고 있어서 오히려 영어와 일본어의 혼합 의사소통보다

제가 일본어로 말하고 종업원이 일본어로 대답하는 그 순간이 더 알아먹기가 어려운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네요.

 

 

 

도톤보리 요시노야점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와서인지

역대 제가 먹어본 백여 군데의 요시노야 지점중 단연 최악의 품질을 보여줬습니다.

규동 소스도 제대로 뿌리지 않아서 밑에 흰 맨밥이 떡하니 늘어붙은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그릇을 점장 머리에 던져주고 싶을 정도더군요.

 

워낙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라, 규동집의 품질마저 개판이 되어버렸습니다.

밝고 해피하고 사교성 좋은 사람들에게는 밤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곳인데

인류의 미래와 진리에의 탐구에 여념이 없는 진중한 저희 모자는 그냥 밝은건 전구고 어두운건 사람이구나 하며 걸을 뿐이었습니다.

 

 

 

도톤보리가 그렇게 일자무식 먹고 마시는 곳만은 아니어서

상당히 오래된 카부키 극장이라던가, 문화 예술적인 면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긴 합니다만

외국인들에게는 별 의미 없는 곳이고, 엄니께 그걸 추천할 수도 없어서 조금 아쉬울 따름이네요.

 

 

 

그래도 일본의 상가 거리는 꽤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어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입니다.

한국의 재래시장 상인들이 이곳에 와서 이렇게나 번창하고 있는 개인 상점들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사진 옆의 멍청한 용이 서 있는 가게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매우 유명한 킨류 라멘입니다.

대체 어떤 멍청이들이 오사카 가이드북에 꾸준히 저 가게를 소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사카의 라멘집 중에서도 레벨이 중하 정도로 떨어지는 곳이라 일부러 갈 일이 전혀 없는 곳이라고 생각.

 

얼마나 한국사람들이 많이 오면 반찬으로 김치도 내준다고 합니다.

 

 

 

오사카 사람들이 부산사람과 닮았다는 말이 도는 이유가 이런 도톤보리의 풍경 때문이기도 하죠.

먹다 죽다(食い倒れ)라는 말이 오사카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이듯

이곳 도톤보리는 일본에서 먹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먹거리가 다 밀집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본의 정갈한 회 요리, 코스 요리 등과는 달리

욕망에 솔직하다는 느낌이 드는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쓰러지기 위한 식당이 너무도 많습니다.

 

성격이 그렇지 않으니 동료들끼리 어깨동무하고 한 손에 맥주병 들고 웃고 떠들며 고기집 찾아다니는

그런 드라마같은 행동은 해 본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지만

이곳 도톤보리는 그나마 일본에서 그런 모습이 제일 어울리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엄니는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사진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제가 카메라를 들던 말던 자기 갈 길을 가십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중 찍은 엄니 모습의 90%는 뒷통수만 나와 있네요.

 

엄니는 그걸로 아쉬워 할 성격이 아니니 저도 부담감은 없습니다.

혼자였다면 아마 저 별다방에 들어가 새벽 1시쯤까지 책이나 읽으며 시간 보내다가

적당히 넷까페 찾아들어가 잠 좀 자고 나오는 그런 여행을 즐겼겠죠.

 

 

 

오사카가 일본의 제 2 도시이긴 하지만, 도톤보리를 걷고 있으면 항상 신기한 기분입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거대한 상권을 소화할 인적 물량이 유입되고 있는지 말이죠.

 

아무래도 20여년의 불경기를 겪은 일본의 입장상, 이 정도의 상권은 외국인 관광객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할 듯 합니다.

오사카에 이 정도의 상권은 도톤보리뿐만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중국의 부유층은 요즘 그야말로 자기들의 세상이라고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일본 관광시장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죠.

 

도톤보리는 항상 그렇지만, 오늘은 아무리 둘러봐도 한국인+중국인 관광객 수가 일본인보다 더 많아 보입니다.

 

 

 

도톤보리에 오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 글리코 전광판도 변함없이 한 장 남겨봅니다.

이 다리가 이 다리에 대한 설명은 예전 오사카 여행기에서 언급을 했으니 넘어갑니다만

프릴이 잔뜩 달려 풍성한 미니스커트에 인형같은 차림을 한 여식들이 한 잔 하고 가라고 바람을 불어넣고 있더군요.

 

젊은 남정네들끼리 온 관광객들은 저런 것도 경험이다 하면서 한 잔 걸치러 갈 것인가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자기들끼리는 허세 만빵이라도 막상 현지인들이 저렇게 덤벼들면 매우 얌전하고 소심해 지는게 지금의 한국 대학생들이 아닐까 싶네요.

 

엄니는 놀랍게도 옷 귀엽게 입었다면서 저보고 사진 같이 찍어보자고 말 걸어보라 하십니다.

저도 만만치 않게 소심한 편이라, 바람잡이들에게 그런 말을 걸 자신은 없죠.

거기다 술 마시러 갈 것도 아니면서 업무에 지장을 주면 안 되니 그 제안은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뭔가 신기한 표정을 슬금슬금 걸어가고 있는 엄니입니다만

세상 여기저기를 다 둘러보셨기 때문에 이 정도는 그냥 슬쩍 보고 넘겨버리는 레벨에 도달하신건지

이미 구경은 다 하셨다는 듯 슈퍼에서 먹을거 좀 사가자고 하십니다.

 

물론 도톤보리에는 재미있는 슈퍼인 돈키호테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습니다. 사진 정면에 보이는 거대 관람차 건물이 돈키호테입니다.

 

 

 

도톤보리 들어가기 전에, 언제 봐도 놀라운 소비의 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담아봅니다.

오사카 사람들이 원래 좀 태평하고 거친 느낌이 있습니다만

묘하게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 들면서도, 여기서라면 한번쯤 타락해버려도 좋을 거라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소비와 향락의 거리인 이곳의 모습은 조화와 부조화가 묘하게 공존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엄니도 한참동안 조그마한 하천 양쪽으로 뻗은 끝없는 건물들을 바라보시더군요.

이곳 도톤보리는 일본이 현대화 되고 나서부터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400년 전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습니다.

 

처음엔 물자 수송 하천으로 개발되었지만 에도시대부터 이미 환락하고 유명했죠.

강가에 배 띄워놓거나 하천 옆 유곽에서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며 경치를 구경하는 곳이었습니다.

뭐랄까, 이 정도 되면 환락가에서도 역사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단순한 슈퍼는 아니고 상당수 제품의 품질이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일본 관광 루트에도 이 곳에 들어가는 코스가 포함되어 있을 만큼 독창성으로 넘치는 가게입니다.

 

엄니도 물건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서 좋아하시더군요. 중간에 아기 장난감은 없냐고 물어보셔서 난감했지만.

손자 장난감은 이런 곳에서 사지 않아도 얼마든지 있다고 설득한 후에 정상적인 구경이 이어졌습니다.

 

의외로 샤넬이라던가 루이 뷔통 같은 브랜드품 중고도 상태 좋게 전시되어 있고

보석류나 고가 시계도 많은 걸 보면, 역시 이곳은 외국인들이 워낙 많이 보다보니 상당히 특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네요.

이곳 돈키호테 만큼은 외국인 관광객이 먹여살리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맨 위에 주욱 내려오면서 일본어보다 한국어와 중국어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눈썰미 좋은 엄니께서도 '저기 저 아해들 우리하고 같은 비행기 탄 애들이다'라고 지적하실 정도로

다들 그 시간에 칸사이 공항에 도착해서는 생각하는 것이 전부 똑같았습니다.

 

지금 내가 한국에 있는건지 일본에 있는건지 헷갈릴 정도로 사방 천지에 한국인들 투성인데

부디 내일부터는 좀 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니와 함께하는 고로, 대충 다들 생각할만한 안정적인 루트를 짜 놓았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긴 했죠.

 

돈키호테는 곳곳에 피식 웃을만한 장치를 많이 마련해 놓은 곳인데

매 층마다 멋지게 그려놓은 캐릭터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저 화풍은 일본에서 꽤나 유명한 예술 장르(?)인데, 궁금하신 분은 '저연비 소녀 하이디'를 찾아보시길.

 

 

 

동키호테는 공산품 품질이 영 엉망이지만 그걸 감안하고 구매하는 그런 곳이고

어디서나 똑같은 물, 음료수, 술 같은 경우는 편의점에 비해 꽤나 싼 편입니다.

오사카의 호텔에서는 3박을 할 예정이라 물과 음료수 빵 등을 넉넉하게 사가지고 돌아갑니다.

 

도톤보리의 화려한 모습은 많이 봤으니 돌아갈 때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돌아가 봅니다.

엄니는 혼자서는 이런 길 못걷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어째 사진 찍고있는 저를 놔두고 혼자서 쑥쑥 전진하시더군요.

 

 

 

난바에서 도톤보리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상권은 그야말로 절제되지 않은 소시민의 거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북쪽의 우메다(梅田)는 좀 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소비가 주를 이루고 있는 편이구요.

 

도톤보리 주변의 이런 골목길은 물론 적당한 고급 요리점이나 숨겨진 맛집 등이 존재하는 곳이긴 합니다만

난바역 주변까지는 워낙 풍속업소가 많아서 사실 엄니와 함께 오손도손 걸어가기 좋은 곳은 아니죠.

하지만 다행이라고 할까, 대부분 엄니가 봐도 풍속업소라는 걸 눈치채기 어렵게 되어 있어서 별 문제는 없습니다.

 

호텔은 어차피 잠만 자고 나오는 곳이라 비싼 곳 필요없다고 말씀하셔서

시장통 주변의 조그만 비지니스 호텔을 선택했지만, 예전부터 제가 칭찬하던 슈퍼호텔이라서 서비스는 좋습니다.

2명 고객을 위해 2층침대가 구비된 슈퍼 룸을 선택했는데 역시 좁긴 좁네요.

사실 엄니하고 함께 간 것이라 자금도 넉넉하게 준비해 왔는데, 좀 더 좋은 호텔로 할까 여쭤봐도 돈아깝다고 하셔서.

 

전날 잠을 못 주무신 터라 많이 피곤하신듯 했습니다. 씻고나서 금새 주무시더군요.

저는 TV라도 좀 보고싶었지만 엄니 수면에 방해가 되니 조용히 2층 침대로 올라갔습니다.

2층 침대는 1층 침대의 절반 크기밖에 안되는 작은 사이즈라서 저는 발을 쭉 펴기도 힘들었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침대를 바꿀수는 없고, 오히려 저는 예전 자전거 여행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듯 해서 기분좋게 잘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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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란 건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이 조그만 자갈같은 녀석이 배 속에 들어가면 묘한 성분으로 분해되어

사람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는 건지. 어릴적에 이런 호기심이 들었다면 아마 의사나 약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누워있거나 앉아있으면 그닥 통증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약효가 돌고 있다.

물론 평소처럼 걷기는 힘들고 여전히 절뚝거리지만, 이동 속도는 어제보다 조금 빨라진 느낌.

 

사실 어디까지나 응급 처치일 뿐이라, 실제로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염좌도 통풍도 그냥 진통제의 효과로 고통을 잊고 있는 것일 뿐

여전히 왼쪽 발은 끈 전부 풀어헤친 280짜리 신발에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퉁퉁 불어터져 있는 상태.

무리하지 않으려고 아침 조식 먹으러 내려가지도 않았다.

이로서 조식 있는 호텔에 투숙한지 처음으로 3일동안 딱 하루밖에 조식을 먹지 않은 낭비의 업적을 달성하고 말았다.

돈 아까워서라도 조식은 절대 빠지지 않고 챙겨먹는데...

 

그나마 머리가 돌아갈 정도로 고통이 줄어드니 엉망이 된 여행 계획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이번엔 좀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 일부러 예산까지 편성해 왔고, 각종 신뢰할만한 곳을 뒤진 끝에

후회는 없으리라는 오사카의 맛집을 두루두루 조사했기 때문에, 예정대로라면 어제와 오늘의 아침, 점심, 저녁은

나름 내 기준에서는 꽤나 호화스러운 음식을 마음껏 즐겨야 했다.

 

오사카 최대의 수산 도매시장에서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100년 전통의 초밥집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회전초밥과는 비교도 안되고, 국내 일류급 초밥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가격은 나름 저렴한 곳이라서

이곳에서는 마음먹고 8만원 정도 소비할 각오를 했다.

하지만 수산시장에 위치해 있다보니 전철에서 내리더라도 꽤나 걸어가야 하는 곳인 탓에

지금 상태로 거기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어제 먹으려 했던 맛집들도 당연히 전부 캔슬. 어제 먹은건 편의점 도시락밖에 없다.

마음껏 맛집 탐방을 하려 했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변해버려,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고, 돌아갈 곳 없는 허탈감을 안은 채 10시에 호텔을 나선다.

짐은 다 맏겨놓고 공항 가기 전에 찾아가기로. 어제 스루패스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도 전철은 무료 이용이다.

출국시 이어폰의 수명이 다 됐기 때문에, 이어폰 하나 구매하려고 우메다(梅田)역으로 향한다.

 

오사카의 번화가는 남쪽의 난바(難波), 북쪽의 우메다(梅田)로 나뉘어 있는데

난바는 칸사이 국제공항과 연결되어 있고, 온갖 잡다한 소비와 유흥 쪽에 촛점이 맞춰진 곳이라면

우메다는 오사카의 거의 모든 시영, 국영 전철이 모여있는 교통의 중심이지며, 금융, 기업의 중심지라서

쇼핑이나 먹거리도 난바에 비해 좀 고급스러운, 고층 빌딩으로 아득하게 둘러쌓인 곳이다.

헝그리 여행자들은 저렴한 숙소가 많은 난바역을 이용하는 경향이 많은 듯. 우메다쪽의 호텔은 꽤나 비싸다.

 

 

 

오사카 최대의 전자상가 백화점 요도바시 우메다는 전철역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가기 편하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거대 전자상가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만, 지금은 일단 이곳의 회전초밥집에 들른다.

맛집 순방을 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 비록 예정했던 곳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곳이지만.

 

그래도 회전초밥 치고는 그리 떨어지지는 않는 수준이다. 한국의 동일가격대 초밥과 비교하는건 말도 안되고.

 

 

보통은 이런 저렴한 회전초밥집이라도 접시 색깔을 따져가면서 먹는 편인데

이번엔 한을 풀지 못한 나의 위장을 위로해 주는 차원에서, 그런것 따윈 신경 끄고 마음껏 집어먹기로 결정.

그래도 생선쪽에 퓨린이 많이 들어있을 위험성이 있으니 가능하면 조개 등으로 메뉴를 조정하기로 한다.

 

회전초밥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곳이 오사카라서, 나름 자존심은 있는지 가격대비로 괜찮은 성능을 보여준다.

이렇게 2점에 100엔~200엔 하는 초밥은 일본에서 가장 싼 부류에 속하지만

그래도 한국 음식점의 초밥에 진저리가 나던 내 입장에서는 먹을만한 느낌.

 

 

 

먹고 먹으면서도 결국 가보지 못했던 최고급 초밥집이 눈 앞에 떠오르는게, 안타깝기 그지없다.

먹으면서 분명 맛은 있는데, 이 공허함은 뭘까.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남들 눈도 신경쓰지 않고 초밥들을 마구마구 카메라에 담는다.

원래 음식점에서 이렇게까지 사진을 남발하진 않는데, 그냥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위장에 들어가지 못한 고급 초밥들이 너무 아쉬워 할 것 같은 느낌.

 

사실 여기 초밥도 즐기기엔 충분히 맛있었다.

 

 

 

초밥집의 실력을 알아보는 가장 기본적인 척도가 되는 계란말이.

먹어보면 '역시 회전초밥'이라는 느낌이 들긴 한다.

소위 말하는 초밥 장인이 만드는 계란말이 초밥은, 생크림 가득 들어간 카스테라를 먹는 듯한 느낌.

 

 

 

찍다가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건가 싶다.

예정되어있던 초밥집에 갔다면 그 야들야들하고 빛나는 초밥의 자태를 즐겁게 담았을 텐데

지금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마구 담아낼 뿐이니.

 

포스팅의 대부분을 이런 초밥사진으로 도배하는 것도 참 특이한 경우.

사실 마지막날은 담아온게 거의 없으니 이렇게라도 분량을 채우려는 속셈이다.

 

 

 

점심시간 근처라서 사람들은 꽤 많았지만

어째 나보다 뒤에 온 사람들도 전부 일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슬쩍슬쩍 계산하는 사람들을 보니 한 사람당 6~7접시 정도가 평균인 듯.

 

내 경우 보통 이런 회전초밥에서는 배가 불러서 그만둔다기 보다

더 이상 입맛이 당기는 초밥이 없어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해도 최소 10접시는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시 내가 많이 먹는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징어회는 대체로 한국이나 일본이나 초보자용이라고 인식되어 있는지

원래 오징어 초밥은 그리 비싼편이 아니지만, 타계책으로 위에 연어알을 뿌린 녀석이 있다.

초밥 장인의 집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퓨전적인 방법인데,

이런 걸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맛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잘 모르겠다.

오징어회는 맛과 향보다 씹는 재미가 있지만, 연어알의 짭쪼름한 느낌이 조금 보충해주는 느낌?

 

 

 

싱싱하고 두툼한 가리비도 좋지만 겉만 살짝 구운 가리비는 달달한 맛이 더욱 살아난다.

접시 색깔을 보면 알겠지만 생가리비나 구운 가리비나 가격은 같다. 취향에 따라 먹으면 될 듯.

조개류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둘다 만족.

 

 

오징어 초밥의 또 다른 바리에이션. 고급 재료에 들어가는 성게알이다.

저렇게 성게알 눈꼽만큼 올려놓고 가격을 올리니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기본적으로 오징어가 맛과 향이 옅은 편이라서 위에 뭘 올려도 괜찮은 조합이긴 한데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먹었기 때문에 이런 것도 척척 집어먹었지

생각하면서 먹기에는, 맛이 궁금하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 묘한 녀석이다.

 

 

 

대충 만족했다는 느낌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온다. 계산금액은 약 1700엔 정도.

평소같으면 무리 좀 해서 먹었구나 하는 금액이다. 초밥이 아닌 경우엔 500엔 정도면 배를 채우니까.

하지만 원래 예정했던 고급 초밥집의 예산이 6000엔이었기 때문에 왠지 지불후에도 아쉬운 기분이다.

 

예상보다 돈 적게 썼다고 아쉬워하는 이 모습은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희귀한 케이스.

아픈 다리를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긴만큼, 대가가 돌아오게 되는 느낌이다.

 

사실상 맛있는 거 찾으러 다니는 행동은 이걸로 끝. 더 이상 무리해서 여기저기 옮겨다닐 상태도 아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 한층 내려오면서 친구에게 부탁받은 것들을 구매한다.

각 카메라 회사의 최신 플래그쉽 기종도 전부 전시가 되어 있어서, 어차피 쓰지도 않을 것들 신나게 경험해 본다.

요즘 기종들을 만져보면, 내가 쓰고있는 녀석은 확실히 몇 세대 전의 기기적 성능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1층까지 내려와서 이어폰을 골라보려는데, 예전처럼 시착용 이어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게 아니라

본인의 MP3 플레이어에 직접 꽂아서 테스트 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쪽이 마음에 드는데, 익숙하게 들어오던 음원으로 테스트 하는게 자신에게 맞는 이어폰을 찾기가 쉬우니까.

한국에서는 이어폰을 마음껏 테스트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데, 이곳에는 적당한 보급형부터 각 사의 최고급 이어폰까지 청음이 가능하니

왠지 굉장히 행복한 기분이다. 한국서는 남들의 청음기만 줄기차게 들어보고 고민고민끝에 고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고나면 항상 '다른 기종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이 남았기 때문에

 

여기서 약 2시간동안, 일단 청음용으로 준비된 녀석들은 거의 다 들어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어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약 17년 전, 20초 튕김방지 기능을 가진 휴대용 CDP가 인생의 보물이었던 시절.

그때 이후로 이어폰은 항상 7~9만원 정도의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 일단 귀가 길들여지니 보급형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확 나빠지기까지 하기 때문에, 한때 수십만원짜리 이어폰에도 손을 대 본 결과 그 정도 가격대가 무난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

아이팟이 등장하기 전 춘추전국이었던 한국 MP3 시장 당시엔, 몇몇 회사와 친분을 쌓아서 시중의 거의 모든 MP3P 를 사용하고 음질을 판단하기도 했다.

사용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오디오 전문회사 인켈이 출시한 오디오카드라는 플레이어는 지금까지 가끔 그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요도바시 우메다에서 만난 소니의 신형 이어폰은 상당히 놀라웠다.

새로 개발한 드라이브 유닛이 1개부터 4개까지 장착된 모델이 전시중이었는데

1개와 2개 장착된 모델까지는 그냥 그렇네 정도였지만, 3개가 장착된 모델은 하위모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굉장한 음질을 들려준다.

인이어 이어폰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해상력과 깔끔한 음 분리력이, 여지껏 7~9만원급에 만족해 왔던 나의 귀를 유혹한다.

중음까지는 무난하고, 저음이 조금 약한 느낌이었지만 무작정 울리는 저음보다 이런 느낌이 내 취향이다.

 

최고급 모델인 4개짜리 녀석도 청음해 봤지만, 같은 가격이라면 3개까지를 구입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저음부분이 확연히 보강된 느낌이 들긴 해도 내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편이라서.

 

원래 사용하던 가격대의 제품들을 들어보면, 대강 이제껏 들어왔던 녀석들과 비슷비슷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그냥 그걸 구입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음악생활을 즐길 수 있었겠지만

이 소니의 제품을 청음하고 나니, 매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청음하고 또 청음해도, 결국엔 이 녀석에게 마음이 가게 된다.

한참동안 5000엔 대의 제품 앞에 서서 '이 정도면 문제없는데'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또다시 소니 부스로 이동해서 이 녀석을 들어보는 행동이 반복되는 중.

 

한국에서는 여러 이어폰을 들어보지 못하고 물건을 고르게 되어서 불만이었는데

막상 마음껏 청음할 기회가 생기자, 내 귀의 솔직한 평가를 스스로의 마음이 부정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난점이 생겨버렸다.

약 30분동안 하염없이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이 녀석을 선택해 버린 이유는

어이없게도 마음껏 먹고 마시려고 준비한 맛집 순방이 불발된 데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였다.

예정된 고급 맛집 순방을 완전히 망쳐버렸기 때문에, 그 남은 돈으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구입해 버린 것.

 

위안이라고 한다면, 면세품목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혜택까지 받으면 국내 판매가보다 7~8만원 정도 저렴하는 점 정도.

그 차액조차 왠만한 사람들이 구입하지 않을 중고급형 이어폰 가격이니, 구입하면서 잠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한참 이어폰에 빠졌을 때는 이거보다 훨씬 더 비싼 녀석도 사용해 보긴 했지만, 벌써 6~7년 전의 이야기고

그 당시 45만원쯤 하던 이어폰보다 이 녀석 성능이 확실히 더 좋다. 이제껏 사용해 본 인이어 이어폰 중 단연 최고의 음질.

 

 

 

맛집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도 이걸로 후련하게 날려버리고

남은 시간은 서점에서 책이나 읽을까 하고 안내센터 직원에게 길을 물어 서점 키노쿠니야(紀伊國屋)의 위치를 확인한다.

난바 역과 마찬가지로 우메다 역도 수많은 국철, 사철, 시영 전철이 얽힌 곳이고

운영사가 다르기 때문에 한국처럼 이어져 있지도 않고 환승도 마음대로 안된다.

날씨는 덥고 왼발은 불안불안하지만 시원한 서점을 생각하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긴다.

 

 

 

우메다의 키노쿠니야 서점은 오사카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빌딩 전체를 서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가장 큰 오프라인 서점의 6배는 넘는 규모다.

외국여행이란게 자금만큼이나 시간이 아쉬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널널하게 시간이 남는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왠종일 박혀있을 자신이 있는 서점.

 

유동 인구가 많은 우메다 지역에서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관광객 흉내 낸다고 외계인 머리 닮은듯한 환풍구를 찍어보기도 하는 등, 일반인 행새를 하며 이동한다.

뒤에 보이는 희한한 디자인의 건물이 한큐(阪急) 우메다 역. 저런 거대한 역이 이곳 지역엔 사방팔방 존재한다.

 

 

 

키노쿠니야 서점 근처까지 도달해서 다시 안내센터에 정확한 위치를 물어보니

'오늘 키노쿠니야는 휴무일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땀 뻘뻘 흘리며 20분을 걸어 찾아왔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그냥 웃음이 나오지.

우메다 앞의 안내센터 직원은 오늘이 휴무일이란 걸 몰랐을까. 그렇다면 안내센터로서 좀 문제있는 것 아닌가.

되려 이곳 직원이 더 미안해 하는 듯 해서, 그냥 웃으면서 돌아나온다. 아무튼 이번 여행은 꼬이는 곳에서는 대책없이 꼬인다.

 

이렇게 된 이상 우메다에는 볼일이 없어서 다시 난바역으로 돌아간다.

난카이(南海) 난바역 광장 앞의 조각상을 기념으로 한장 남기고, 음료수를 마시며 잠깐 휴식.

친구에게 부탁받은 물건은 전부 구입했고, 사하라 멤버 나침반님에게 부탁받은 세븐스타 담배는 공항 면세점에서 구입예정이니

아직 공항 출발까지는 2시간쯤 남겨놓고 뭘 할까 생각중이다.

 

다리는 무리하면 할수록 통증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계속 돌아다니기는 힘들고

그냥 이 근처 덴덴타운에 가서 한국에서 팔지 않는 코믹스나 몇권 산 뒤에 까페에서 커피나 마시기로 한다.

다리 덕분에 오카사의 명물 간식인 타코야키 등은 먹질 못해서, 내 평생 이런 여행도 해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새로 산 이어폰의 성능에 하염없이 취해있다가 4시쯤 호텔의 짐을 찾으러 출발.

 

 

 

하지만 진통제 덕분에 다리 상태를 너무 과신했는지, 30분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호텔 왕복은

예상 시간을 훨씬 넘겨 50분이나 걸리고 말았다. 정상적인 몸이라면 15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는데.

비행기 출발이 6시 30분이라서 5시 30분까지는 공항에 도착하려 했고, 이곳에서 공항까지는 45분쯤 걸리니까

4시 30분까지 이곳에 도착하려고 했는데, 막상 와 보니 4시 50분이 넘어있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 지는 중.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플랫홈에 나가 보니 공항까지 연결되는 특급열차 '래피드-베타'가 약 5분뒤에 출발하려고 대기중이다.

이 녀석은 스루패스로 무료 승차가 안되고 추가요금 500엔을 내야 하지만, 발목 상태와 짐을 생각하니 전혀 아깝지 않아서 이녀석으로 결정.

양해를 구하고 사진도 한장 남겨본다. 일반 전철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편안한 좌석과 넉넉한 공간 덕에 아픈 발목에 큰 도움이 되었다.

걸리는 시간은 40분으로 일반 전철과 크게 차이나진 않지만, 모든 일반 전철이 45분 걸리는게 아니라 정차역이 적은 특급 이상만 그렇기 때문에

괜히 그 녀석 시간 맞추다가는 몇분 더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어서 마음 편하게 래피드를 선택했다.

 

 

 

간헐적인 통증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일단 비행기가 이륙하니 이젠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나름 홀가분하다.

예정에 없던 축제도 즐기고, 예정에 없던 사고도 생기고, 예정에 없던 쇼핑도 즐기고...

어째 이번 여행은 거의 예정에 없던 이벤트들의 연속인 듯한 느낌.

 

두번다시 겪고싶지 않은 발목의 통증만 제외하면, 이런 의외성 충만한 여행도 내 취향이다.

그 의외성이란게 결국 발목 통증때문에 생긴 거라서 난감하지만.

 

 

인천공항 착륙 20분쯤 전에 대기가 불안정한지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비행기 수십 번 타본 나로서도 평생 처음 겪어볼 정도의 굉장한 흔들림. 엉덩이가 의자에서 들썩들썩 떨어질 정도로.

 

처음에 몇번 흔들릴 때는 승객들의 웃음소리도 간간히 들렸지만, 그 뒤 롤러코스터 정도의 흔들림이 발생하자

그 웃음소리도 사라지고 객실내는 음산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승무원은 괜찮다고 방송하지만 아마 다들 어지간히 긴장했을 듯.

사고 직전의 상황은 이런 것일까 상상해보며 굉장히 즐거운 기분으로 승객들의 분위기 변화를 감상한다.

 

마침내 흔들림이 진정되고나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잡담소리가 어쩐지 더더욱 흐뭇한 기분을 만들어 주더군.

오늘 밤은 남은 진통제로 어떻게든 버텨보고, 내일 서울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대구 내려가서부터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할 것이다.

다음 여행부터는 이런 돌발 이벤트는 사양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력을 예전 수준으로 되돌려야 하니, 좋게 생각하면 이것도 훌륭한 계기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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