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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近畿'에 해당하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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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6.06  킨키 방황 - The Two Towers 12
  4. 2012.06.05  킨키 방황 - 코야산 단상가람 18
  5. 2012.06.03  킨키 방황 - 코야산 다이몬 16
  6. 2012.05.30  킨키 방황 - 우라시마 타로 체험 14

 

 

통증때문에 길어봤자 한 시간 정도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고 아침을 맞이한다.

 

어리석은 희망이었을까.

파스 좀 붙이고 있으면 나으려나 싶었는데, 아주 조금 통증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걸어다니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화장실 가는것도 힘들고, 의자에 앉아있는것도 힘드니, 유일한 해결책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 뿐.

무료 조식을 먹으러 가는것도 무리니까, 예정대로 새벽에 나라를 둘러보고 오는것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마에다 씨 부부와 한번 더 만날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이러나저러나 오후에 출판사와의 미팅만큼은 취소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최대한 회복을 해 놔야 한다.

파스는 여러 장 들어있었으니 2시간 간격으로 바꿔주면서 무조건 쉬고 또 쉬는 수 밖에.

쓰레기통과 사용후의 수건을 문 밖에 놔두면 청소하는 사람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결국 오전 시간동안은 그냥 얌전히 누워있기를 선택한다. 나라의 호류지와 사슴을 한번 더 보고 싶었는데.

 

내일 귀국시간이 오후 6시 반이니까 시간적인 여유는 꽤나 있는 편이니

혹시 운이 좋아서 발목이 회복된다면 그때라도 좀 어기적거려볼까 싶다.

 

통증, 피로, 수면부족의 삼종세트가 어우러지니 어째 어젯밤보다 아침 7시부터 잠이 더 잘온다.

파스를 붙이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통증도 많이 줄어들기 때문에

오사카 도착후 거의 처음으로 달콤하다고 느껴질 만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약 2시간 간격으로 살짝살짝 깨긴 하지만 짜증날 정도는 아니고, 기분좋게 뒤척이며 TV 보고 있으면 다시 잠이 들기를 반복.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하늘도 영 찌부둥하고, 오후부터는 강수확률이 80%에 달하기 때문에

결국 관광 하루 빼먹을만한 여러가지 제반 사정은 갖춰진 셈이니까 조금은 덜 아쉽다는 느낌도 든다.

 

오후엔 출판사에 들른 후 아무 미련없이 바로 호텔로 돌아올 예정이니까, 내일은 그럭저럭 돌아는 다닐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생긴다.

미도스지 페스타 당시부터 무리를 하긴 했는지, 엄지발톱 안쪽에 피멍이 들어있군.

이 정도 통증이면 이게 어느 부분이 아파오는지 구분도 못할 지경이 되기 때문에 피멍이 든 줄도 몰랐다.

걷는 자세도 엉망이었으니 피멍 정도는 충분히 들고도 남았을 거라고 납득.

저 피멍이 발톱 끝으로 밀려나오려면 수 개월은 충분히 걸리는데

결국 끝까지 밀려나온 피멍을 발톱과 함께 끊어버리면 꽤나 후련한 느낌이 든다.

 

오후 2시까지는 정말 편안한 느낌으로 푹 쉬었다. 슬슬 회복된다는 실감이 들 정도로.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2시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는 순간, 익히 경험해 왔던 느낌이 엄지발가락 관절에 돌연 나타난다.

작년 자전거 여행 귀국 직후, 여러가지 집안 사정과 떨어진 체력,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발병했던 통풍의 느낌 그대로다.

 

한동안 본인이 착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때와는 달리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통풍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전엔 근 2주일 가까이 발가락 관절 부분이 조금씩 뜨겁고 살짝살짝 욱신거리다가 결국 악화되는 순서가 있었는데

바로 한두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전혀 다를바 없던 관절이 갑자기 눈에 띄게 느낌이 오는 것은

이제껏 알고 있던 통풍에 대한 지식과는 동떨어진 현상이라서 머리가 멍한 느낌이다.

 

혹시 염좌에서 발생한 염증이 통풍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싶었는데

훗날 귀국후 병원에 가서 물어보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는 대답을 받았다.

그래서 족구 신나게 하던 사람이 갑자기 통풍 증상때문에 병원에 실려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나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그저 신기할 뿐.

 

처음부터 통풍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봤지만, 발목의 상태는 분명히 염좌가 확실하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통풍의 지옥같은 고통은, 한번 겪어보면 염좌와 확실히 구별이 되니까.

애초에 발목의 통증이 통풍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어제처럼 코야산을 걸어다닌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

통풍의 통증은 참을성으로 걸어다닐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아도 통증은 지속되고, 그 강도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

학문적인 신뢰성은 부족하다고 하지만, 평균적으로 급성 통풍의 관절 통증은 여성의 출산시 고통에 맞먹는다고 할 정도.

정말 심할 경우엔 스스로 관절을 잘라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냥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지발가락 관절의 통증은 통풍이 확실했기 때문에, 한동안 패닉에 빠졌다.

좀 있다가 출판사에 가야 하는데, 염좌는 둘째치고 통풍까지 겹친다면 어제와 비교할 수 없는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물론 이동거리는 훨씬 짧지만 통풍의 통증이 본격화되면 그때부터는 그냥 지옥이니까.

지금 욱신거리는 정도는 발목의 염좌와 비교해서 그리 심한 편이 아니지만, 일단 이런식으로 발병하고 나면

길어봤자 2시간 사이에 본격적인 통증이 시작된다는 것을 작년의 체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여기서 출판사와의 미팅을 캔슬시킨다면, 일본에 온 이유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서 그럴수는 없다.

 

잠시동안 멍한 눈을 하고, 현재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시뮬레이션 해 본 결과

최대한 빨리 일어나서 출판사와 미팅을 마치고 즉시 돌아오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동은 무조건 택시로. 왕복한다면 아마 한국 돈으로 8만원 정도는 깨질것이 틀림없었지만

이 상태에서 전철따위 탔다가는 중간에 그냥 주저앉아서 엠뷸런스에 실려가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재빨리 파스를 잘게 잘라서 발가락 관절쪽을 한바퀴 감싼 다음, 폭발물을 다루는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양말을 신고 신발을 끼워넣는다.

 

통풍의 원인은 단백질 생성물인 퓨린 성분 때문이지만, 그 퓨린때문에 일어나는 염증이 격통을 일으키기 때문에

임시 방편으로나마 파스도 일단 진통제 역할을 하긴 한다. 통풍의 통증은 파스 정도로 해결할 수준이 아니긴 하지만.

왼쪽 신발은 줄을 다 푼 다음 최대한 느슨하게 해서 간신히 발을 집어넣는다. 왼발이 1.5배 가까이 부어있어서 그냥은 들어가질 않으니.

걸음걸이는 어제와 변함없이 질질 끌다시피 할 수 밖에 없지만, 최소한 걸을 수는 있는 지금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최대한 일을 보고 돌아와야 한다.

 

출판사 관련 일은 공개적으로 포스팅할 생각이 없으니 이 부분은 패스.

 

돌아와서 신발을 벗자 이제 통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감각이 느껴진다.

한번 겪어본 사람이라면 정말 치를 떨 정도의 극악한 통증.

초침에 맞춰서 바늘로 관절을 쿡쿡 찌르는 감각이다. 그런 것 같은 감각이 아니라 정말 찔렸을 때의 통증과 똑같을 정도로.

초 단위로 일정하게 바늘이 피부에 박히는 느낌을 몇 시간동안 계속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까.

많던 파스도 거의 다 써버렸다. 발목 염좌도 치료된 게 아니라서 왼쪽 발은 그야말로 초토화 상태.

발가락 관절에 파스를 붙이면 단 몇초간 시원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걸로는 숭례문 화재시 오줌 한번 갈기는 수준밖에 안된다.

 

 

 

코야산에서 느꼈던 불교의 가르침을 몸에 새기고

부처가 된 듯한 느낌으로 처연히 고통에 몸을 맞기고 있었지만

입적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성인군자처럼 폼 잡고 고통을 이겨낼 수는 없다.

 

저녁 7시쯤 일은 잘 되었냐는 엄니의 문자가 도착해서, 몸 상태를 설명했는데

단호하게 당장 나가서 진통제 사먹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가는게 아무리 힘들어도 그 상태로는 밤을 못 견딘다고. 통풍은 밤에 더 심해지는게 맞다.

 

통풍 치료제는 퓨린의 생성을 억제하는 약과, 염증을 치료하는 소염제, 진통을 덜어주는 진통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단 염증으로 인한 통증이 심할 때에는 퓨린 억제제가 소용이 없기 때문에, 우선은 진통제와 소염제를 복용해야 한다.

하지만 통풍용 진통, 소염제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의사의 처방 없이는 구할 수 없는 매우 강한 성분이기 때문에

약국에서 판매하는 일반 진통제는 정말 일시적인 응급 처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간호사 경력이 풍부한 엄니가 강력하게 요구를 했기 때문에, 아무리 아파도 일단 나가서 진통제를 사오는게 정답이라고 생각.

밖엔 비도 오고 있고, 약국은 전철역 근처의 지하상가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지금의 나로서는 굉장한 도전이다.

호텔 로비에서 약국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한 지도와 우산을 빌려서 조심조심 몸을 옮기기 시작.

극기훈련도 이런 극기훈련이 없지만, 어쨌든 이 방법밖에는 없다.

계단을 통해 지하도로 내려갈 때, 장애인의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40분만에 약국에 도착. 8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아슬아슬했다.

일본에서는 통풍을 뭐라고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일단 한자 그대로 읽어보니, 다행히도 이곳 역시 똑같은 병명을 쓰고 있었다.

약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통풍약은 이런 곳에서 살 수 없다고 설명해 줬지만

내일 귀국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설명을 하자, 큰 효과는 없다고 하면서도 일단 제일 강한 진통제를 하나 골라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감탄도 하시던데, 통풍의 통증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사람이 없을때

이렇게 그 고통을 이해해주는 의사나 약사를 만나면 왠지 위로받은 것 같아서 살짝 마음이 놓인다.

 

탈진상태에 가까운 몸이지만 돌아오면서 편의점에 들렀다. 8시 30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은게 없었으니.

식욕이 있는건 아니라도, 뭐든 입에 집어넣어야 약효도 올라가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도시락을 두개 산다.

2L 짜리 생수도 두 통을 구입. 의학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통풍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수분 섭취밖에 없다.

퓨린 성분은 대소변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역시 많이 마시고 줄기차게 싸는 것이다.

 

호텔에 돌아오자 프론트 직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호텔엔 지금 이것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쓰시라고 파스 몇조각을 건네준다.

효과는 둘째치고 그렇게 신경 써 주는 것만으로 흡족한 기분이 되었으니, 큰 도움을 받은 셈이다.

당시는 통증때문에 여행시 빠지지 않고 쓰는 일기도 쓰지 못했지만, 훗날 그 호텔 체인점을 찾아갔을 때

고객용 설문지에 그 때의 배려에 대해 감사의 인사라도 한마디 써서 보내야 겠다고 생각.

 

 

 

커피의 카페인도 극히 미흡하긴 하지만 통풍의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프론트에서 염치 불구하고 커피를 세 봉지 가져왔다. 이곳 토요코 인은 몇개월 전까지 커피 수준이 별로였지만

이번에 갔을땐 커피가 꽤나 마음에 드는 즉석 드립방식으로 바뀐 덕에 나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드립 커피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한국의 몇몇 맛없는 대형 프렌차이즈 점포의 커피보다 더 낫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 커피는 인스턴트 봉지커피 중에서는 꽤나 괜찮은 품질을 자랑한다. 이 녀석을 준비하는 호텔은 좀 센스가 있는 편이다.

 

하루에 두 알만 먹으라는 진통제를 6시간 간격으로 한알씩 먹는 극약처방까지 해 가며

없는 식욕에도 불구하고 도시락을 마구 입에 집어넣고 10분 간격으로 꾸준히 물을 마셔준다.

당연히 머나먼 화장실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눈물 찔끔 짜야 할 정도로 고생을 해야 하지만

내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최대한 상태를 호전시키려고 필사의 사투를 벌인다.

그 상황을 머릿속에서 재현해 보니, 총만 안들었다 뿐이지 전쟁터 한가운데 있었던 느낌.

 

다행히도 진통제는 진통제,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관절의 통증이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잠은 잘 수 있을 정도의 진통 효과가 있다.

이런 약 없이 급성 통풍 걸린 사람이 밤에 잠을 잘 수 있는 확률은 아마 로또에 버금가지 않을까 싶다.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고통은 계속되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이 싸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서 이를 악물고 왕복.

혼신의 힘을 다해 오줌누려고 화장실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이 허탈해서 가끔 웃음도 나온다. 통증때문에 미쳐버린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자본주의의 노에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의료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일본 병원에 가면 수십만원씩 깨지기 때문에

내일까지만 참으면 내가 이긴다는, 살짝 정신줄 놓은 생각 덕분에 병원을 찾지 않았으니까.

내가 백만장자였다면 느긋하게 택시 불러서 병원에 갔겠지. 그러고보니 백만장자라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여행도 하지 않을 듯.

 

진통제라는 든든한 아군의 지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수분 보급과 호텔 직원의 정성이 담긴 파스의 도움을 받으며

타지에서 염좌와 통풍의 더블 어택이라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아 고군분투하며 마지막 밤을 보낸다.

그래도 TV 프로그램이 재미있어서 웃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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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대탑의 동쪽에는 몇 채의 불당과 동탑이 서 있는데

이 위치에서 더 이상 동쪽으로 걸어가는건 무리라고 판단.

이제 슬슬 버스 정류장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으면, 가능성은 희박해도 버스를 놓칠 가능성도 있어서.

 

결국 단상가람에서 내가 본 가장 동쪽 건물은 이 녀석, 대회당(大会堂)이 되었다.

대회당 오른쪽에 빼꼼 보이는 건물은 삼미당(三昧堂),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탑이 동탑(東塔)이다.

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서탑과 달리 동탑은 너무 현대식 느낌이 나서 패스해도 그닥 아쉽진 않다.

 

이 대회당은 1848년 재건되었고, 원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불당이지만

현재는 진언종 승려들의 법회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사진 찍을만한 포인트 앞에 청소용구를 담은 수레가 서 있어서, 좋게 생각하면 체험! 삶의 현장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 대회당에서 정남쪽으로 쭈욱 걸어가면 출구가 나오고, 거기서 30m 정도만 더 가면 버스 정류장.

나름 끈기와 오기로 아침부터 오만 곳을 다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의욕 자체가 사라질 정도로 지쳤다.

사실 8시에 전철 타기 시작해서 지금 오후 3시쯤이니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기분상으로는 북한산 두 번은 탄 듯한 느낌. 등산 스틱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더 버텨보겠는데 그런건 없다.

 

 

 

정면으로 뻗는 출구를 향해 삐그덕거리며 걸어가는데, 단상가람에서 구경할 마지막 불당이 나타난다.

생크림 케이크 윗부분의 딸기는 맨 마지막에 음미하는 성격이라서, 일부러 이 녀석을 가장 마지막에 둘러본 셈이다.

1197년에 세워져 현재 코야산의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인 부동당(不動堂)의 모습.

 

부동명왕을 안치한 곳이라는 의미의 부동당은 800여년의 세월동안 숱한 화재와 방화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역사의 산물.

당연하게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가까이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카마쿠라(鎌倉)시대의 건축양식이 고스런히 녹아있는 귀중한 녀석인데

사실 1800년대 재건된 가람내 대부분의 불당들도 이 카마쿠라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 녀석만 특출나 보인다거나 하는 건 없다. 단지 이 부동당의 지붕과 처마, 단청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른 불당보다 간결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실된 녀석을 재건하다보면 아무래도 좀 더 치장을 하게 되는 것일런지.

 

카마쿠라 시대는 1180년대부터 1330년대를 어우르는 시기로  

카마쿠라 막부 자체는 도쿄 바로 아래쪽 카나가와(神奈川)현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중기까지는 여전히 쿄토 조정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년수도라는 쿄토를 중심으로 한 시가(滋賀), 효고(兵庫), 미에(三重), 나라(奈良), 와카야마(和歌山)까지 5개 현을

수도의 근방이라는 의미의 킨키(近畿)지방이라고 불렀고, 거기에 속한 코야산에도 여전히 그 당시의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보통 오사카 하면 전부 관(関)의 서쪽이라는 의미의 칸사이(関西) 지방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엄밀히 칸사이라고 하면 교토 서쪽의 모든 지방 (현재로서는 심지어 오키나와까지)을 뜻하기 때문에

킨키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재를 킨키 문화라고 하지 칸사이 문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이 지긋하게 든 사람들이.

 

 

 

막상 현재의 카마쿠라 지역에 가 보면 남아있는 몇몇 중요문화재 외엔, 한때 일본 문화의 중심지였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상태인데

한국의 경주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 그땐 그랬지라는 그리움만 남은 채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의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다.

 

일본의 쿄토에 뒤쳐지지 않고, 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수도로서 명성을 떨쳤던 경주가, 쿄토와의 비교는 어림도 없이

카마쿠라 정도에 비교된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야후 어디에 서식하는 정신나간 일빠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카마쿠라와 쿄토를 한번씩 가 보면 그 안타까움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느끼리라 생각.

 

 

 

부동당의 보존 상태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한국에서는 그것보다, 숭례문 소실 당시 비교대상으로 이 녀석을 신나게 칭송했던 기록이 있어서 그쪽으로 더 유명한 편이다.

 

어디에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지, 사실 보고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절묘하게 감춰놓긴 했지만

이 부동당 주변과 지붕 곳곳에는 첨단 스프링쿨러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어서

화재 감지시 자동으로 무수한 물길이 불당 전체를 휩싸도록 되어있다.

 

부동당 뿐만 아니라 단상가람내 중요 불당들, 그리고 코야산 전체의 중요문화재에는

이러한 스프링쿨러 시스템이 거진 장착되어 있으며, 이 시스템의 파이프라인 길이는 8km에 달한다고 한다.

더더욱 감탄할 만한 점으로,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물탱크는 이곳보다 200m 쯤 높은 산봉우리 정상에 위치해 있어서

펌프 등이 작동하지 못하는 비상시에도 문제없이 물을 뿜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900리터에 달하는 물탱크는 코야산 전체 시스템을 일시에 가동시킨다고 해도 5분동안 물을 배출할 수 있으며

5분이면 소방대가 코야산 어디든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

물길은 불당의 손상을 최소화 하기 위해 매우 세밀하게 퍼져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 등등...

한국 사람으로서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솔직히 좀 비참한 느낌마저 든다.

왜냐하면, 이 시스템은 이미 1960년대부터 설치되어서 꾸준히 업그레이드 되고 있기 때문에.

 

숭례문 소실 당시 한국 취재팀이 방문했을 때, 이 곳의 방재시설을 한번 가동한 적이 있어서

관광객들도 놀라고, 기자들이 사진을 많이 담아왔기 때문에 지금도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면 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찬란한 문화를 가진 한국이라도, 이 폭력에 가까운 안전불감증 만큼은 뼈저리게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생각.

 

 

 

부동당 관람을 마지막으로 단상가람을 뒤로 한다.

출구까지는 원만한 내리막길로 되어 있어, 내려가다가 살짝 아쉬운 마음으로 부동당의 모습을 한 장 더 담아본다.

 

지금까지 돌아본 것들은 단상가람의 약 70% 정도로, 제대로 관람하지 못한 곳도 몇몇 있지만

전부 다 관람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둘러볼 수도 없고

지금 다리 상태로 이 정도라면 후회 남기지 않을 만큼 있는 힘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머지 녀석들은 다음 기회의 즐거움으로 남겨 놓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다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고는 해도

돌아가는 길 도중에 눈에 들어오는 이런 꽃들은 부담없이 찍어줘야지.

참 신기하게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어 줄 정도로 리드미컬하게 욱씬거리는 발목의 통증도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면서 왼손으로 촛점을 슥슥 맞추는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잊혀지는 듯 하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긴 하지만, 사람의 정신이란 참 편리하고 고성능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하루였다.

 

 

 

출구에 거의 다다라서 고개를 돌려 봤다.

오쿠노인을 거닐면서 - 이런 표현은 내가 펼쳤던 묘기에 가까운 휘적거림에 비하면 좀 고상하지만 -

느꼈던 고요한 충격만큼은 아니었지만, 이곳 단상가람의 푸근한 모습도 더할 나위 없이 내 심란한 마음을 다독여 준다.

 

아침에 절룩거리며 전철을 탈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해서 과연 만족할만한 곳일까 걱정했던 마음은

이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오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라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렸다.

 

 

 

단상가람을 빠져나와도 주변 풍경은 여전히 꿈길을 걷고 있는 듯.

어찌보면 보통 마을보다 사찰이 더 많은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쿠노인을 빠져나왔을 때는 설국의 도입부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눈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이니 어쨌든 저기까지만 가면 오늘 하루는 끝이라고 되내인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 이제 일단 코야산 여행은 끝이 난 느낌이다.

눈 앞에는 코야산의 각종 국보와 문화재들을 모아놓은 영보관 표지판이 보여서 조금 낙심.

정상적인 발걸음이었다면 아마 저기까지 돌아보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

 

중요문화제가 워낙 많아서 한꺼번에 전시하지 못하고 기간별 로테이션 방식으로 전시한다고 한다.

 

단상가람 내내 끼고 다녔던 35mm 렌즈 내려놓고 가방 안에서 굴러다닌 70-300 렌즈 손질 좀 하고 있으니

나이 지긋한 노부부 한쌍이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는다.

남한테 말 먼저 거는 성격이 아니라서 시치미 뚝 떼고 있는데

어느 나라나 노인층이 손아래 사람에게 말거는게 더 편한 듯, 카메라 좋은거 쓰네~ 라고 운을 떼주신다.

 

일단 말 한마디 통하고 나면 이쪽에서도 별로 부담없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70-300 렌즈라고 하니 그럼 실제 화각이 105-450이 되는거냐고 물어보시는걸 보면 카메라를 좀 아시는 분.

135 판형과 똑같은 센서 쓴다고 말씀드리니까 좋은 사진 많이 남겼겠네라고 웃으신다.

사실 그런 말 들으면 괜히 더 쪽팔려서 보여드리질 못하는데...

실력별로 카메라 크기가 커진다고 하면 난 미러리스 써야 한다.

 

두분 모두 67세이고, 오늘 새벽 카마쿠라에서 여기까지 기차타고 여행중이라고 하신다.

카마쿠라에서 이곳까지는 서울에서 부산보다 조금 더 먼 거리인데, 내 부모님보다 더 연세 드신 분들이

새벽 6시에 신칸센 타고 여기까지 놀러왔다는게 굉장히 보기 좋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일본 나이로 67세라면 한국 나이로 68~69세인데, 온통 도보이동 뿐인 코야산을 누비고 다니시다니.

더구나 이대로 쿄토로 가서 쉬고, 내일은 나라(奈良)를 구경하신다고.

결혼이라는걸 긍정적으로 바라볼수 있는 극히 희귀한 경우를 이 부부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 사찰들 상당수가 카마쿠라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카마쿠라에서 이곳에 구경왔다는 사실이 뭔가 재미있다고 말씀드리니

살짝 손사래를 치시며, 그곳도 쪼~금은 볼만한게 있지만 여기하고는 비교가 안된다고 하신다.

일본인들이 봐도 이곳은 보통 훌륭한 곳이 아니니까. 사찰도 훌륭했지만 마을 전체의 느낌이 매우 고즈넉한 점이 좋단다.

본인도 나름 일본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는데, 이런 곳은 정말 흔치 않다고 맞장구를 치니까

살짝 이해가 안되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할머니깨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신다.

 

그 다음부터는 뭐, 자전거 여행동안 시도때도 없이 들어본 레파토리의 반복.

한국서 왔다고 하면 일단 놀라고, 일본어는 어디서 배웠느냐고 하고, 구별이 안간다고 하는 등등...

한국에는 코야산같은 문화재가 있냐던가, 한국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 있냐던가 하는 질문도 받았는데

한류 아이돌이나 김치 등을 통한 식문화 등으로 익숙한 요즘 세대들과 달리

이 나이대 분들은 한국에 대해 그다지 아는게 없는 듯 하다. 애초에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제껏 아시아에 관심이 없었으니.

 

 

 

버스를 탈때 뒤로 물러나서 '먼저 타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역시 한국사람들이 예의바르다고 기뻐하신다. 음, 예의 이전에 일본에는 이런 격식 자체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지키고 안지키고의 문제라기보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 자체는 대체로 어디서나 좋게 평가받을 듯.

 

물론 한국에서도, 자리 비켜주다가 '내가 그렇게 늙어뵈냐!'라고 욕지거리를 들어먹은 지인의 케이스가 있어서, 그냥 사람 나름인갑다.

노부부는 분명 국제 정세 등에 관심이 많은 인텔리전트 부류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했는데,

요즘 일본 뉴스의 주요 화제가 중국의 오만하기 짝이없는 꼴불견들이라서 그런 면도 있지만

이 부부는 대부분 두리뭉실한 관념을 갖고 있는 일본 사람들과 달리 3국 관계에 대해 꽤나 예리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의 한국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거기 대한 사죄와 보상이 미흡한 것도 사실인데

잘못을 넘긴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재 대책없이 날뛰고 있는 중국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한국과 일본의 우호 협력이 아닐까라고 자신들은 생각한다고 꽤나 논리정연하게 말씀을 하신다.

노인들이나 젊은이들이나 과거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황을 잘 모른다면서

이제 바톤은 나같은 젊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대화를 해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주셨다.

 

딴건 몰라도 현 중국의 실태에 대해서는 나와 전적으로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대화가 스무스하게 이어진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정치인 쪽에서의 문제는 심각해서, 국가 교류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니냐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정작 내가 일본 정세에 대해서는 그렇게 빠삭한 편이 아니라서 좀 더 깊게 들어가지는 못했다.

덤으로, 중국같은 독재 상태에서야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소용이 없으니, 그 인간들 진짜 문제라는 면에서는 모두들 의기투합.

 

북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 사람 상대라서 조금 조심하는 어투로 말씀을 하시던데

나야 북한이라는 곳을 제대로 된 국가 취급하지도 않고, 세뇌당한 그쪽 국민들한테 동정심 같은것도 없는 사람이라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코야산역에 도착. 노부부는 여기서 시간 좀 보낸다고 하셔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케이블 열차를 탄다.

내려갈때도 맨 앞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발목때문에 어기적거리다 보니 사람들이 꽉 들어차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급한대로 망원렌즈로 틈을 잡아가며 간신히 한장 건진 정도. 사실 꼭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긴 했다.

 

코쿠라쿠바시역에서 전철을 타고 하시모토역까지 돌아가 다시 전철을 갈아타는, 이곳에 올 때와 역순으로 행동중.

앉아 있어도 도무지 발목의 통증이 가라앉질 않아서 전혀 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철 안은 아침과 달리 그럭저럭 붐비는 편이었는데, 하시모토역에서는 관광객뿐 아니라 교복 입은 학생들도 많이 보인다.

미리 앉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좀 전의 그 노부부가 전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하니까 반갑게 놀라면서, 3명이 앉을 수 있는 빈 자리로 손짓을 하신다. 아프지만 흔쾌히 자리 이동.

자기들은 역 앞 까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오는 길이라고 하신다.

 

좀 전엔 서로 이름도 안 물어봤는데, 마에다(前田)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부부는 두 번째의 만남에 굉장히 즐거워하는 분위기.

인생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격언이 있다면서, 한 번만 만나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두 번씩이나 만나게 되는건

아주 소중한 인연이라고 하며, 피로회복용 초콜릿을 꺼내서 한 조각 건내주신다.

중간까지는 같은 전철을 타고, 도중에 쿄토행 전철로 갈아타신다고.

 

그 일기일회라는 격언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

2008년과 2010년 두 번의 일본 자전거 여행 중,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해 준 사람이 나에게 해 준 말이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되돌려서 2008년의 이야기를 해 본다.

 

자전거 여행 당시, 후쿠시마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더 이상 자전거를 타기엔 힘들 정도의 어둠이 깔리던 시간이고

도쿄에서 여기까지 달려오며 떨어진 체력과 밀린 빨래 등으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적당한 숙소라도 잡을까 싶어 근처 파출소에 가서 물어보니, 한참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던 순경이 '여기가 괜찮고 싸다'며 추천해 준 호텔.

 

쿠니미(国見)라는 조그만 마을로, 여기서 얼마 안 걸린다고 해서 가뿐한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거리는 거리대로 꽤나 멀었고 설상가상으로 그곳까지 가는 도로가 공사중이라서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에, 자갈과 바위가 드러나 있는 비포장 공사길을 장님처럼 덜컹거리며 달려

30분만에 간신히 그 호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절한 순경아저씨한테 마음 속으로 불평 한마디 하고 카운터로 향했었지.

 

막상 카운터에 들어오자 커다란 스크린에 각 객실의 사진이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거 혹시 러브호텔 아닌가 해서 당황하고 있는데, 카운터에서 후덕한 아주머니가 매우 친절하게 인사를 해 주셨다.

숙박도 가능하냐고 하니 물론이라고 하는 걸 봐서, 러브호텔과 일반호텔을 겸하는 듯 했다.

평생 러브호텔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어쨌든 반쯤 경계심을 품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는데

자전거에 짐이 많아서 천천히 옮기겠다고 하자, 걱정말라고 하시며 안쪽에 있던 가족들을 전부 불러서 함께 짐을 들어주셨다.

 

한국서 와서 자전거 여행중이라고 하니 놀라워 하시면서, 자기 딸이 지금 한국에 수학여행 가 있다고 하신다.

자기도 한국 배우들 너무 좋아한다고. 욘사마 어떻냐고 하시길래 가감없이 솔직하게 '지금와서는 좀 낡은 느낌이죠'라고 했더니

짐 옮겨주던 가족들이 '그거 보라고!'라고 하면서 맞장구를 치는 모습에, 아주머니가 욘사마 꽤나 좋아하는가 싶었다.

 

당시 한국선 누가 인기있냐고 하길래 잠시 생각후 이병헌이 좋죠 라고 하니, 그사람도 좋아한다고 아주 기뻐하시더군.

달콤한 인생을 추천해 드리고 (놈놈놈은 개봉하지 않았다) 좀 잔인하니까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도 해 드렸다.

 

모두 함께 짐을 옮기고 나서, 빨래할 게 많을테니 느긋하게 목욕 후 옷가지들을 전부 달라고 하신다.

원래 그런 서비스가 있을 리가 없어서, 괜한 폐 끼치기 싫어 스스로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아주머니가 꺼내신 말이 '일기일회' 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분명 인연이니까, 호의를 배풀 수 있는 자기 쪽이 오히려 기쁜 편이니 부담없이 받아들이라고.

혼자 노숙해가며 밥 만들어 먹는 장거리 자전거 여행 중, 이런 말을 들을 때는 정말 가슴이 꽉 막혀오는 느낌이 든다.

자칫하면 정말 울컥할 수도 있었지만

바로 전날 결국 눈물 글썽이게 만들어 준 농촌 노부부와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감정을 추스리고 호의를 받기로 했다.

이 노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 계속 써내려가다가는 여행기 전체를 쓰게 될 지도 모르니까.

 

더군다나 세탁물을 받으러 올 때, 간단하게나마 식사까지 준비해 주셔서

호텔 로비에 들어갔을 때의 막연한 의구심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이렇게 고맙고 미안한 적이 평생 있었나 싶을 정도로.

 

편안한 밤을 보내고, 정성스럽게 갠 뽀송뽀송한 세탁물을 받고, 나갈 때 자판기에서 음료수까지 서너개씩 뽑아주시던

그 호텔 사람들의 호의는 정말 뼈에 사무치는 것으로, 그 전까지는 단순한 격언에 불과했던 '일기일회'가

그때부터는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려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지표가 되어 주었다.

 

 

 

그 고마움을 잊을수가 없어서 2010년 자전거 여행때 또 다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감사의 표시를 위해 일부러 밝은 오후 4시쯤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소소한 선물을 가져오긴 했지만

숙박료라도 두둑하게 드리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보답이라고 생각해서.

 

러브호텔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 투숙하면 요금이 좀 더 오르게 되는 점을 생각한 행동이었는데

나를 본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가 되어서 가족들 다 부르고, 아침에 교대하는 시아버지에게 전화까지 하는 등

더할나위 없이 반가워 하시며 맞이해 주셨다.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는 당초 목표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오후 8시에 투숙했을때나 가능한 최저 숙박요금만 내면 된다고

한사코 거절을 하셔서 무리하게 돈을 쥐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러브호텔 방식이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호텔은 체크아웃 할때 입구쪽의 기계에 표시된 숙박료를 집어넣으면 방문이 열리는 구조라서

내가 더 내고 싶다고 해서 더 낼수도 없는 형식이고, 직접 드린다고 해도 받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더욱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세탁물을 다 받아가시고, 간단한 라멘이나 주먹밥 정도가 전부인 석식 메뉴 (그것도 원래는 유료)가 아니라

차를 타고 밖에 나가서 초밥과 맥주, 술안주까지 준비해 주시는 통에, 감사 인사 하러 왔다가 더더욱 몸둘 바를 모르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아주머니는 평생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고 기뻐해 주셨다.

 

30년을 살아온 한국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대라는 것을 평생 처음으로 방문한,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여행길 시골마을의 조그만 호텔에서 받았다는 사실은

타국에서의 자전거 여행이라는 찰나같은 순간에서,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을 안마시는 내가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맥주를 들이킬 수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 그 날의 만찬은 인생 최고였다.

게다가 아침에는 식당을 열지 않는 러브호텔인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근처 편의점까지 가서 도시락을 사다 주시기까지 했으니.

 

 

 

한참동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던 약봉지.

아침식사와 함께 건내주셨는데, 비상시 꼭 필요한 위장약과 감기약, 두통약, 반창고를 넣어주셨다.

약품별로 쪽지까지 붙여 놓았을 뿐더러, 한자를 읽기 어려워 할까봐 위에 독음까지 적어주시는 꼼꼼함까지.

 

정말 당시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될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지.

격언이라는 건 외워놓으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녀석이지만, 그 격언을 정말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옆에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꾸준히 손님이 줄어드는 시골 국도변의 러보호텔 사람들이 내게 보여준 마음은

어떠한 위대한 지혜나 삶의 업적, 사회적 지위 등이 없이도 타인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시켜 주었다.

이러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사진들을 볼 때마다 떠올리게 된다.

 

 

코야산에서 오사카로 돌아오는 도중 만난 마에다 씨 노부부가 가볍게 한마디 던진 '일기일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위의 추억이 단 몇초만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딱히 이걸 그분들에게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고, '그 말 저도 참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며 한번 웃어주는 것으로 만족.

 

마에다씨 부인은 할아버지가 독일인으로, 소위 말하는 '쿼터'시란다. 어렸을 적에 독일서 산 적도 있었다고.

아들내미가 나보다 나이 좀 많은데, 미국 유학가서 공부하다가 지금은 외교관이 되었다고 기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아~ 어디나 자식자랑하는 부모 얼굴이 제일 행복해 보인다. 난 그런 표정 짓게 만들수가 없어서 들을 때마다 그냥 쓴웃음만 짓지만.

 

일단은 나도 내일 나라에 가볼까 생각중이라고 말씀드리니, 이렇게 두 번씩이나 만났으니 내일도 아마 만나지 않을까 라고 하신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새벽에 출발해서 나라를 좀 둘러보고 오후에 출판사와의 미팅을 할 예정이었는데

지금 다리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하룻밤만에 나을것 같지는 않아서 가능성이 희박하다.

느낌상 만약 내일 나라에 간다면 이 분들과 한번 더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인간에겐 한계라는게 있는 법.

 

마에다 씨는 삼성과 LG의 어마어마한 약진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다.

해외에서 단편적으로 들리는 정보이긴 하지만, 결코 1인자의 위치를 넘겨주지 않을 듯이 보였던 기술대국 일본 기업들이

한국의 대기업 앞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가는 현 상황이 놀랍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물론 난 여기서 끝낼 생각 없이, 한국엔 요즘 그런 친 대기업 정책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해 준다.

간단하게 빅맥지수 정도만 언급하며, 현재 한국의 최저임금이 엔화로 시간당 300엔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주니

상당히 놀라는 눈치다. 일본의 최저임금은 지방별로 다르지만 (편의점 동일상품도 지역소득에 따라 가격이 1/3이상 차이난다)

전국 평균치는 740엔 정도니까, 삼성의 어마어마한 약진에 난생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사실을 들은 마에다 씨 부부는,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어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느낌이다.

 

일본은 물가가 비싸니까 단순비교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빅맥지수로 아주 대강이나마 그 차이는 실감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일본은 2000년 이후로 10년동안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거나 1%이내로 넘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물가 상승이 없다는 것.

한국은 상승률이 매년 4%를 넘어가고, 일본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면 그보다 훨씬 높다. 눈가리고 야옹인 셈.

특히 모 설치류가 나라 말아먹기 시작한 이후 물가상승률은 14% 가깝다던데?

 

 

 

시간가는줄 모르고 마에다 씨 부부와 대화를 하다가 헤어졌다.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일본 경제에 대해 토론하는 노숙자 차림의 한국 여행객을 힐끔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그냥 무시하고 , 마에다 씨와 헤어지고 난 후에는 눈 딱 감고 난바 역까지 고통을 참으며 앉아 있었다.

 

이제 난카이(南海) 라인에서 요츠바시(四つ橋) 라인까지 30분간 걸어가야 하는 최후의 시련만이 남았다.

아침 조식외에는 아무것도 먹은게 없는데, 배는 고프지 않지만 일단 뭐라도 입에 넣고 들어가야 편할것 같아서

난바 워크(난바역의 거대 상가 지하도)를 걸어가다가 그냥 눈에 보이는 파스타&카레 전문점에 들어가서 해물카레를 주문.

 

한국서 직접 만들어 먹던 해물카레는 일단 해물 맛이 우러나도록 카레와 함께 밤새도록 끓여먹곤 했는데

이곳 해물카레는 그냥 카레 소스에다가 삶은 해물을 얹어서 나오는 방식. 이런걸 해물 카레라고 불러도 되는건가 싶다.

하지만 카레 소스는 대충 만든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이

맵다기 보다는 혓속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향기가 콧구멍까지 역류하는 진한 풍미를 느끼게 해 준다.

확실히 이 정도 진한 카레 소스라면 해물을 넣고 우려내봤자 향기로 인한 이득보다, 퍼석퍼석해지는 해물이 더 아까울 듯 하다.

 

해물의 상태는 꽤나 앙호한 편으로, 가리비나 문어나 새우나 식감과 향기가 쉽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하다.

밥까지 같이 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소스 조금에다가 해물만 먹는게 더 맛있게 느껴진다.

유명한 카레 체인점인 코코 이치방야(CoCo 壱番屋)보다 가격은 높지만, 가격차이만큼의 맛은 느껴져서 만족.

 

잠깐 휴식후 요츠바시 라인으로 걸어가다가 약국에서 소염 파스를 구입. 일단 이걸로 하룻밤 잘 휴식하면 내일은 걸어다닐 정도는 되려나 싶다.

발목 염좌에는 특히 인도메타신이 포함된 파스가 효과가 좋은 듯 해서 일부러 고르고 골라서 구입했다.

사하라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국내 일반 마라톤도 몇번 뛰어봤는데, 그때 몸으로 기억했던 지식이라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간신히 호텔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으니 마치 댐이 붕괴되는 듯이 쌓여있던 통증이 일순간에 퍼져가는데

저절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굉장하다.

끙끙거리며 침대에 다이빙하듯 쓰러져 발을 높이 들어올리니까 놀라울 정도로 쏴악~ 하며 통증이 격감하는 느낌이 참 오묘.

파스로 발목을 감싸니 타오르던 발목이 시원해져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면, 마치 구내염에 알보칠 원액을 쏟아붓는듯한 신나는 율동과 함께 몸이 꼬여온다.

아주 작은 비즈니스 호텔이라 침대에서 화장실까지는 70~80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화장실 한번 가려면 일단 몸을 일으키고 한동안 끅끅거린 후에

미션 임파서블 1편의 랭리 잠입신을 연상시키는 절제된 움직임으로 약 3분에 걸쳐 이동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땀범벅이라 느긋하게 욕조에 들어가고 싶은데도, 염좌엔 뜨거운 목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왼쪽 발목은 욕탕 밖으로 내밀어 샤워기로 찬물을 뿌려주는, 뭔가 상쾌하지 않은 목욕을 간신히 끝마쳤다.

 

최대한 왼발을 높이 올리고 누워서 TV를 보는데, 뉴스에서 소니와 파나소닉의 디지털 TV 부분의 전략적 제휴 소식이 들려온다.

당연히 원인은 삼성 때문. 사실 소니와 파나소닉 점유율을 전부 합쳐도 삼성의 점유율 근처에도 못가고 있으니까.

한국인으로서는 그게 뭔 대수인가 싶겠지만, 소니와 파나소닉은 70년전 창사 이후로 한 번도 사이좋았던 적이 없는 라이벌 중의 라이벌.

소니 본사가 도쿄에 있고 파나소닉은 오사카에 있기 때문에 동쪽과 서쪽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었다.

 

한때 세계 전자시장을 잠식하다시피 한 거물급 라이벌 회사가

외국 회사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기술 협력을 한다는 것은, 일본인들로서는 경천동지할만한 큰 사건이다. 근데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게 문제.

 

마에다 씨, 이 뉴스 보면 아마 내 생각이 나겠지 라고 추측해 보며, TV OFF 타이머를 맞춰놓고 누웠는데

아무리 파스를 감았다고 해도 하루종일 너무 무리했는지 통증이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화장실 한번 가려면 대소동을 펼쳐야 하고.

자세를 조금만 바꿔도 바로 격통이 엄습해 오기 때문에 잠을 자는건지 마는건지 알 수가 없다.

2시간 30분으로 설정해놓은 TV가 꺼지고도 잠을 자지 못해서, 결국 TV 틀어놓고 보다가 졸다가 하는 수 밖에. 체력회복은 물건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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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가람의 관람 순서라는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그걸 지킬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그냥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건물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귀국후 사진을 정리하는데 건물들 찍은 사진의 시간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루트상으로 대략 금당 -> 산노인 -> 서탑으로 진행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진이 찍힌 시간순으로 배열해보면 완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다리미 인간처럼 왔다갔다한 결과가 나온다.

걸어다니는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사실은 그냥 빙 둘러보는 루트보다 훨씬 더 많이 걸었던 것.

 

이쯤되면 당시 내 정신상태가 어느 정도 절박했는지 스스로 납득이 간다.

 

어쨌든 산노인 옆의 이 건물은 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설명을 읽을 여유도 없었으니.

가이드북에는 그냥 '종루'라고 적혀있는데, 2층에 종이 있는 건가?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가람의 동쪽에는 코야시로(高野四郎)라는, 척 봐도 종루처럼 생긴 녀석이 있는데, 이 녀석과는 형태가 전혀 다르다.

 

 

 

그러고보니 1층의 입구쪽에는 출입금지라는 펫말도 없는걸로 봐서 들어가도 될 법 한데

계단을 오르내린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몸이 회복되어 포스팅중인 지금 생각해보면, 한번 더 가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느낌.

 

산 속 풍경이 다들 그렇지만, 이곳도 사계절에 따라 그 느낌이 90도씩 딱딱 바뀌기 때문에

다음 방문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가게 된다면 일단 가을이나 겨울쯤이 좋을 듯 하다.

 

 

 

단상가람의 북서쪽에 위치한 서탑(西塔)의 모습. 1834년에 재건했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이 서탑은 다보여래의 사리를 모시는 다보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국사의 다보탑과는 덩치나 형태가 매우 달라서 나름 신기한 경험이다.

 

높이가 27미터나 되는 거대한 녀석이지만, 그 높이를 훨씬 뛰어넘는 삼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탓인지

그리 위압적으로 보이지 않고 주변 풍경에 잘 녹아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니 한층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

 

 

 

예술성에 촛점을 맞춰 감상해 본다면 사실 이 서탑은 불국사의 다보탑과는 비교할 필요도 없다고 보지만

200년 전에 세워진 이 정도 크기의 목조 건축물의 보존 상태 하나만큼은,

사진을 찍으면서도 괜스레 아쉽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 아쉽다는 표현은, 물론 현재 모습으로도 신라 석탑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는 불국사 다보탑에 대한 것.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이 멋대로 보수한답시고 완전히 해체되었다가 복원되었는데, 그에 관련한 기록이 일절 남아있지 않아서

전통성에 큰 상처를 입혔으며, 원래 네 마리였던 돌사자도 가져가버려, 한 마리만 남은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당시엔 조선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하찮게 내려봤으면 절세의 미탑을 그딴 식으로 주물거렸는지 한탄스럽기만 하다.

자기네들 다보탑 복원은 이렇게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석굴암에 관한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을테고 여기서 더 말했다간 분노 폭발할 뿐이니 넘어가고.

 

세계적으로 보면 역사의 비극 아래 일어난 무수한 사고중 하나일 뿐이니 지금부터라도 잘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다보탑과 더불어 석탑양식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석가탑은 왠걸,

해방 이후 보수공사중 옥개석을 떨어트려 박살내버린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러서, 강점기때하고 다른게 뭐냐고 욕먹기도 했으니

강점기의 그 사건이 없었더라도 과연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이 서탑만큼 극진히 보수를 받아왔을지, 솔직히 말해 부정적이다.

 

 

 

역사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인데다

특히 불교라는 전통 문화와 자국의 역사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공통된 국가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런 문화재를 볼 때마다, 한국쪽이 훨씬 더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현재 문화재들의 보존 상태를 보면 일본 쪽이 월등히 앞서있는지, 한숨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감상은 즐겁게 하고, 셔터도 기분좋게 누르고 있지만, 두고 온 자식걱정이 계속 든다고 할까. 물론 자식 길러본 경험은 없지만.

 

이번 여행과는 관계없는 개인적인 잡설일 뿐인데,

현재 한국의 불교 문화재 중, 비단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를 통들어서도 가장 가치있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팔만 대장경만큼은 부디 천년만년 그 가치를 잃지 말고 지속되어주길 바란다.

대장경 원판은 물론, 원판을 보관하는 장경판고조차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보존이 잘 되어있던, 완전히 망가져 있던, 이런 불교 문화재들을 볼 때면 항상 드는 생각.

 

 

 

상념은 그만하고 반시계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껏 보아온 사당과는 분위기가 달라보이는 준지당(准胝堂)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준제관음(准提觀音)이라고 부르고, 이는 산스크리트어 'Cundi'의 훈음이라고 전해진다.

청정함과 모성성을 상징하는 여성 관음이라고 하는데, 불교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

 

아무튼 이 녀석은 1883년 재건되었는데도, 비슷한 시기에 재건된 다른 불당과 비교해서 꽤나 고풍적인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인상깊었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어영당(御影堂)이 홍법대사가 거주하던 불당으로 유명한 탓에

가람 안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 녀석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드니 뭐.

 

 

 

준지당 바로 옆에 위치한 어영당. 일본어로는 미에이도(みえいどう)라고 하는데, 때로 고에이도(ごえいどう)라고 하기도 한다.

가뜩이나 현대 일본어 상용한자 발음도 못 외우겠는데, 고어 문법의 영향을 받는 이런 사찰들의 발음은

가끔씩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발음되기도 해서, 설명 없이는 알아먹기 힘들다. 이건 현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일본에 실존하는 특이한 성씨 같은 경우도, 가끔 일본 TV에 소개되기도 할 만큼 정상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녀석들이 있지.

대표적인 것이 '一' 이라는 한자. '일'자를 읽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가 싶기도 하지만,

이게 이름의 성으로 쓰일때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읽히기도 한다.

바로 니노마에(二の前). 숫자 2의 앞에 있다는 뜻.

 

최근 모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해서 이제는 꽤나 친숙해 진 타카나시(たかなし)라는 성씨도 대표적인 케이스.

원래 타카나시는 '鷹無し' -> 즉, '매가 없음'이라는 뜻인데, 이게 성씨로 쓰이면 한자가 참으로 절묘하다.

'小鳥遊' 라고 쓰는데. 뜻 그대로 '작은 새가 논다'라는 뜻. 작은 새가 노는 곳에는 매가 없다는 해석상

'小鳥遊' 라고 쓰고 타카나시라고 읽는, 실로 오묘한 성씨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녀석.

 

예전에 나름 재밌게 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이 성씨를 읽을줄 몰라서 타카나시가 아니라 카타나시(形無し)로 부르는데

이건 '형편없음'이라는 의미라서, 참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남자 이름이 타카나시고, 행진중인 괴생물체가 그를 자꾸 카타나시라고 부르는 그렇고 그런 애니메이션.

사찰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것도 이 블로그의 특성이라고 이해하면 편할 듯 하다.

 

참고로 실제 작품에서 이런 러시아 행진곡이 나오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와서, 어영당은 조사(祖師)의 초상을 안치한 곳을 뜻하는데, 조사란 불교 종파를 창건하거나 그에 준하는 큰스님을 지칭하는 말.

종파에 따라서 조사당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한국에서는 어영당보다 조사당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듯.

 

물론 건물 자체는 1847년에 재건되긴 했지만, 기록상으로는 홍법대사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한다.

단상가람의 상당수 불당이 1800년대 재건된 이유는, 그 당시 이곳 산맥 전체를 휩쓸었던 큰 화재가 있었기 때문.

 

매년 3월 21일에는, 1년에 한번 이곳의 내부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한다고 한다. 흥미는 동하지만 아마 미어터지겠지.

홍법대사가 머무르던 곳이라서 그런지 규모도 크고, 연꽃 모양을 한 등잔이 가지런지 배열된 모습이 심히 아름답다.

위의 어영당 설명에서 알 수 있지만, 실제 홍법대사가 머무르던 시기에는 딱히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고

홍법대사 입적후 초상화가 안치되고 나서부터 어영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단상가람의 정북쪽에 위치한, 가람 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근본대탑(根本大塔)의 모습.

진언종의 근본 사상을 표현한 거탑으로, 단상가람의 중심 역할을 한다.

 

48.5미터나 되는 탑이라서, 전신 사진을 담으려면 저 멀리 한참을 떨어져야 했는데

다리 상태는 말할것도 없고, 사실 너무 깔끔한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사찰과는 좀 동떨어진 모습이라서

그냥 대강대강 담고 말았다. 여행의 전리품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좀 아쉽긴 한데,

분명히 여행 당시엔 '그렇게까지 해서 전신 모습을 찍고싶진 않다'라는 기분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남들 보여주기에 멋진 사진 남기려고 여행 간거 아니니까 지금 보이는 이런 사진이 이 탑에 대한 내 솔직한 기분이지.

 

 

 

신성한 건물에 저 색깔을 사용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위화감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저런 발색을 내는게 쉽지 않았던 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신성하고 웅대하게 보였을 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져 버리는걸까.

1937년 재건된 녀석이라서 천년 전의 모습을 찾는 건 불가능하지만.

 

내부에는 대일여래 본존불상과 함께, 극채색으로 내부를 뒤덮은 화려한 만다라의 세계가 관광객들을 압도한다고 하는데

입장료가 필요한 곳이고, 그럼에도 누가 따로 지키고 있는게 아니라 그냥 스스로 내고 들어가는 곳이라서

저 계단 올라가는 것만 해도 만다라의 세계로 떠나버릴듯한 나로서는 그냥 접근도 하지 않고 주위에서 사진만 찍는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좀 전의 서탑이 훨씬 마음에 들어서, 이곳엔 큰 관심이 없다.

서탑과 기본적인 구조가 비슷하기도 하고.

 

가람 동쪽 끝에는 물론 동탑도 있는데, 이 동탑은 1984년에야 재건되었고, 서탑과 달리 이 근본대탑처럼

시멘트 골격에 목재를 사용한 형태를 하고 있어서 관심이 가지 않아, 그곳까지 이동하진 않았다.

서쪽에서 중앙부까지 오는데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동탑 외에는 그닥 볼만한게 없는 곳까지 가기는 힘들다.

 

본인에겐 그닥 감흥이 없었지만 그래도 단상가람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보니 관광객이 내부로 들어가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경건하게 문 앞에서 합장하고 들어간다. 문화재 관광만큼이나 불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곳이겠지.

 

이렇듯 중앙부에 거대한 탑이 우뚝 서 있는 곳은, 대부분 그 주변이 탁 트인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런 곳에 설 때마다 뭔가 왜소하고 고독한 미물이 된 것 같아서 어색하다.

내가 불교 사찰에서 바라는 건 웅장함이 아니라 조화로움이라서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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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미터의 짧은 거리를 간신히 기어서 단상가람에 도착했다.

가람에 들어가기 전에, 가람 주위를 둘러싼 숲속 풍경이 멋들어져서 셔터를 누른다.

울창하긴 울창한데도 이렇게 조경이 멋진 숲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보통 이런 산속 깊은 곳은 어딘가 살짝 어둡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데.

 

도착하자마자 정면에 거대한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와서, 혹시 내부 보수중이라 못 보는건가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는데

앞쪽 표지판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2015년 개창 1200년을 맞아 1843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중문(中門)을 건설중일 뿐

나머지 사찰들은 멀쩡하게 공개중이다. 여기까지 와서 단상가람 구경을 못했다면 정신적인 충격이 컸을 듯.

 

진언종의 현재 총본산은 콘고부지(金剛峰寺)이지만, 원래 홍법대사가 수행하던 본당은 이곳 단상가람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를 가진 불당은 이곳에 거의 집결해 있다. 국보급 보물들도 굉장히 많았지만 현재는 영보관에 보관중.

 

 

 

가람은 산스크리트어 상가-아라마(sanghārāma)의 한음표기인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임말.

승려들이 거주하며 수행하는 거주지를 뜻한다. 한국에서도 쓰이는 말이라서 포스팅에서 일본어 표기가 아닌 가람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한다.

 

공사중인 중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보이는 금당(金堂)의 모습. 단상가람의 본당에 해당하며,

현재 건물은 수많은 화재 끝에 1932년 재건된 녀석이다.

워낙 중요한 가치를 가진 건물이라 가까이서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심하게 복원되어 있다.

 

 

 

코야산의 모든 사찰이 그렇듯 이곳도 실제 진언종의 승려들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곳인데

그 덕분에 더더욱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할까.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대다수의 문화재급 사찰에 비해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처음 창건되었을 당시인 819년의 건축양식과는 사실 차이점이 많이 보이지만

살짝 굽이친 서까래와 원만한 곡선을 그리는 처마의 구조는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고려시대 건축된 사찰인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중국, 일본을 모두 포함해서도 으뜸간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적어도 일본에서 이 정도로 미려한 모습을 한 사찰은

나라에 남아있는 극소수의 사찰과 닛코의 사찰, 그리고 이곳 뿐이라고 평가해 본다.

심심한 느낌이 없잖아 있는 현재의 일본 사찰 양식과는 레벨이 다르다.

 

  

 

금당 내부는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외부와 달리 상당히 화려하다.

건축 당시, 당대 일본 최고의 예술가가 그려넣은 약사여래 불화가 굉장하다고 하는데, 원본은 영보관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가람 내부에 있던 수많은 국보들이 관리와 보존을 위해 대부분 영보관으로 이전되는 바람에 조금 아쉽지만

돈 주고 보물 관람하는데 조금 인색한 편인 나로서도, 몸 상태만 괜찮았다면 꼭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가람의 사찰들 대부분은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니 딱히 보여줄 것도 없긴 하지만.

 

 

 

 

금당 왼편엔 넓은 마당과 함께 조그마한 벤치 몇개가 놓여있다.

문화재 덩어리인 단상가람안에 의아하게도 흡연 가능한 장소가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흡연문화에 꽤나 관대해서, 대부분 흡연금지인 명승지 입구 앞에 흡연소가 설치되어 있는 일본에도

이렇게 가람 내부에 흡연소를 만들어 놓은 것은 상당히 드문 케이스. 혹시 승려들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걸까.

 

어쨌든 벤치에 앉아서 아마도 마지막이 될 휴식을 취하며 가람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한다.

오쿠노인에서 숱하게 봤던 거대한 삼나무들은 역시 이곳에서도 잘 어울린다.

날짜를 잘 잡아서 그런지 관광객의 모습이 정말로 드물어, 몸은 아파도 날짜 하나는 참 잘 선택했다고 자화자찬 해 본다.

 

땀을 식히고 욱씬거리는 왼쪽 발목을 진정시키며 이 곳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에게 신성함과 경건함을 일으키는 근원은 종교가 아니라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속과 떨어져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이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미지라고 한다지만

만약 그 세속이라는 곳에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면 아마도 이곳과 세속의 경계는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적 신비함도 결국엔 나무와 흙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사고의 발달로 인해 언어라는 수단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동시에 언어로 인해 인간의 사상과 개념 자체에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 처럼

 

종교가 가지는 경건함과 신비함 역시 원래부터 자연이 가진 요소였음에도, 단지 사람의 머릿속 필터를 거쳐

종교라는 관념으로 구체화 된 결과물일 뿐이라고, 이런 풍경을 보면서 상상해 본다.

 

한마디로, 인류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개념은 그 모태를 자연 그 자체에 두고 있다고 말이지.

먼 길을 돌아와서 진리를 갈구하지만, 결국 태초부터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의 산물이었을 따름.

 

 

 

일반적인 불교 가람과는 달리 이곳 단상가람에는 신사도 들어서 있다.

신사의 입구를 알리는 토리이(鳥居)가 이곳에서는 왠지 낮선 느낌.

물론 홍법대사와 관련이 있는 역사적 건축물이고, 후대에 일부러 세워둔 신사는 아니다.

 

 

 

이곳의 신사는 따로 이름이 정해져 있지 않고 그냥 니우묘진(丹生明神)이라는 토지신을 기리는 어사(御社)라고 불리는데

일본에서는 훈음과는 맞지 않게 미야시로(みやしろ)라고 부르기도 한다.

 

니우묘진이라는 신은 홍법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건립할 때 그를 수호해 준 토지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 사찰을 짓는 승려도 축복해 주는 토지신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물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 신토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토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든 카톨릭이든 힌두교든 자신들의 신과 다를바 없는 한 명의 신일 뿐이며

신토를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날 성당에 간다던가, 사찰을 찾아 절을 올린다던가 하는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코야산 한국 가이드북에는 이러한 설명 싹 빼버리고 그냥 '묘신사'라는 이름 하나만 달랑 쓰여있어서

대체 이게 뭔가 싶은 사람들이 많을 듯 하다. 나머지 중요문화재 설명하기에도 페이지가 모자라니 어쩔 수 없지만.

 

사진의 건물은 미야시로가 아니라 그 앞에 건립된 산노인(山王院)이라는 배전.

이 곳은 규모가 큰 신사에서 쓰이는 양식처럼 본전과 배전이 나뉘어져 있는데

이 배전은 또 불교 사찰건물의 양식을 상당부분 빼다박은 건축물이라서 굉장히 묘한 느낌이다.

 

이렇게 신사와 사찰이 한 곳에 세워져 있는 광경은 일본에서도 극히 드문 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일본에서 이곳밖에 없다. 찾아보면 더 나올지도 모르지만.

 

 

 

정작 미야시로 신사는 그 강렬한 주황색이 워낙 두드러지는 바람에

이곳과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어색함 탓인지 한 장도 담아오지 않고 그냥 눈으로만 구경했는데

산노인은 신사 양식과 불교 양식이 훌륭히 조합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구도를 잡고 뷰파인더를 바라보는데, 문득 '코야산의 시린 산속에서 해가 막 떠오늘 무렵'의 산노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듯 해서

색온도를 조절해서 그때 느꼈던 이미지를 재현해 보려고 노력해 봤다.

보정 프로그램 쓰는것도 쥐약이라서 마음먹은 것처럼 뚝딱뚝딱 고치진 못하지만, 대강 이런 느낌.

이곳에서 아침을 맞이해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신사 앞이라면 에마(絵馬)가 빠질 수 없지.

그런데 그냥 신사가 아니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에마 역시 불교식과 신토식이 따로 걸려 있다.

한국과는 조금 다르지만, 진언종식 에마라는 느낌. 쓰여 있는 소원도 읽기힘든 한자로 쓰여 있는 점이 특징.

참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쓴 흔적이 보인다. 일본인들의 에마 사랑은 이곳에서도 멈추지 않는구나.

 

 

 

이곳은 전형적인 신사의 에마를 걸어두는 곳.

역시 진언종의 총본산인 만큼 이런 에마보다는 불교식으로 소원을 비는 곳이 훨씬 빡빡하다.

 

대체로 신사의 에마들을 잘 살펴보다 보면, 소원 빈다기 보다는 반쯤 우스갯소리를 적어놓는 경우가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장난스러운 에마가 보이지 않는다. 세삼 이곳을 바라보는 일본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

거기다가 옛 향기 가득한 이곳 단상가람에 걸맞게도, 오랜 시간이 지나 매직으로 쓴 글씨가 지워져 버린 에마마저 찾을 수 있다.

이제껏 꽤나 유명하다는 신사는 다 찾아가본 나로서도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에마마저 이렇게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광경은 소소하지만 확실히 각인되는 여행의 추억이다.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굉장한 사찰들이 꽉꽉 모여있는, 보물상자같은 단상가람이지만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 지고 있다. 한시간에 두 번 오는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타려면

지금부터라도 이동속도를 높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평소 발걸음 대로라면 이곳 단상가람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는,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만

혹사에 혹사를 거듭한 왼쪽 발목은 원래 이동속도를 1/10 이하로 줄여버린데다

덕분에 계속 부담을 준 오른쪽 다리는 근육이 터질듯 단단해진 상태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일 때를 생각해서 구경하다보면 자칫 버스를 놓칠지도 모르는 위험성이 있었다.

 

단상가람의 입구까지 최소한 버스 도착 15분 전에는 도착해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될 것 같아서

하나라도 더 많이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서두르게 된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혼자 쇼를 벌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단상가람은 17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저 녀석들이 전기로 빛을 밝히는지, 여전히 초롱불을 사용하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쉽다.

어둠 속에 잠긴 단상가람 사이사이에서 조그맣게 빛나는 풍경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지.

조용한 산골짜기 사찰 아래 울려퍼지는 우렁찬 셔터소리에 그나마 기운이 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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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코야산의 끝쪽인 다이몬(大門)으로 향한다.

시골인데도 비싼건지 시골이라서 비싼건지 관광지라서 비싼건지

아무튼 2km 남짓한 거리를 달리는데도 차등요금이 적용될 정도로 비싸다. 한국 돈으로 약 3천원.

 

오쿠노인의 출구에 해당하는 이치노하시(一の橋)앞에서 버스를 타고 다이몬으로 가는 관광객은 별로 없을거라 생각.

거리가 거리다보니 굳이 버스를 탈 이유가 없다. 칸사이 스루패스 덕에 무료 이용이 가능하다고 해도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면서 주위 풍경을 둘러보는게 훨씬 이득이기 때문에.

 

그래도 나이 지긋하게 드신 분들이 버스를 타긴 하는데, 대부분 다이몬보다 두 정거장 앞인 단상가람(壇上伽藍)에 내리는 모습이다.

일단 진언종이 시작된 핵심지라서 오쿠노인과 함께 코야산 필수코스로 통하다 보니 그런 것일까.

다이몬은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정말로 대문역할을 할 뿐이라서, 결국 종점인 다이몬에 내린 건 나를 포함 딱 두 사람 뿐.

 

찢어질듯한 다리를 끌고 다이몬 앞의 자그마한 벤치에 앉아서 한숨을 돌린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사실 이곳이 코야산의 입구 역할을 한다.

해발 1000m 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험난한 산길을 통과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것이 이 다이몬.

수백년 전 사람들은 고행 끝에 다다른 이 거대한 대문앞에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런지.

 

높이가 25m에 달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 대문이라서 35mm 렌즈로는 전체를 담기가 힘들 정도.

다이몬 뒤는 바로 절벽이기 때문에 뒤로 물러날수도 없다. 광각렌즈를 가져왔다면 다 담았을 테지만, 이번엔 35mm 렌즈니까 힘들다.

사진 찍고 있는 관광객과 크기 비교를 할 수 있어서, 대충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단은 앉아서 쉬며 여기저기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 할아버지와 다이몬을 셋트로 구경한다.

 

 

 

소실된 것을 1705년에 재건해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이 다이몬은

건축 양식으로 볼때, 불교 문화가 어디를 통해 전파되었는지 쉽게 입증해주는 산 증인이라고 볼 수 있다.

처마 밑쪽은 일본식 양식이 남아있지만 여러 부분에서 현재의 일본 건축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인다.

 

도로를 지나 절벽 바로 앞의 덤불에까지 들어가서 겨우 전신사진을 한 장 남길 수 있었다.

크기만으로는 정말 일본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녀석이다.

 

여기서 500m 쯤 내려가면 딱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불상이 있긴 한데, 도저히 거기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당장 200m 떨어진 목적지 단상가람까지도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상상이 되지 않고 있으니.

카메라 장비가 더더욱 아픈 몸을 귀찭게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 덕분에 이렇게 즐길수나 있으니까 어쩔수 없다.

 

 

 

분위기 중시의 관광객이라면 이곳 다이몬에서부터 시작하는게 인상적인긴 한데

그렇게 되면 오쿠노인이 마지막 관광 코스가 되기 때문에, 그곳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최소한 아침 8시쯤에 도착해서 관광 시작해야 그나마 적절한 시간대에 구경이 가능하니, 부지런한 사람은 도전해 볼 만하다.

 

이 부근엔 다이몬을 필두로 진언종의 본당인 콘고부지(金剛峰寺)와 단상가람, 국보와 보물을 모아서 전시하는 영보관 등등

코야산의 주요 관광지가 대부분 모여있는 곳이라서, 제대로 둘러보려면 최소 6시간 이상은 걸리기 때문에

오쿠노인까지 전부 돌아보려면 사실 하루 일정은 너무나 빡빡하다.

 

거기다가 아픈 다리까지 겹쳤으니, 일단 입장료가 필요한 영보관과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콘고부지는 넘겨버리고

이곳과 단상가람만 구경하기로 결정.

 

한번만 오고 끝낼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관광 내내 들었기 때문에, 이만큼만 보고 돌아가도 크게 아쉽진 않다.

 

 

 

당연하게도 문의 양쪽엔 금강역사상이 세워져 있다. 어느 곳의 역사상이든 자세는 비슷비슷.

예전에 친구 일행과 오사카 갔을 때,

시텐노지(四天王寺)의 역사상 앞에서 친구와 친구 동생분을 저 포즈를 시켜 사진찍던 기억이 나는군.

이 블로그의 오사카 항목에 들어가 보면 그 때의 사진이 아직 남아있다. 포즈 취해주는 일행이 있으면 여행이 좀 더 재미있다.

 

 

 

덩치도 거대하고 보존상태도 좋지만

일본서 본 금강역사상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의 역사상.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사찰인 탓에, 그 시간의 흔적이 만들어내는 형언하기 어려운 매력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여행과는 관계없지만, 예전에 찍어온 호류지의 금강역사상을 비교삼아 올려본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강역사상.

 

사실 2008년 자전거 여행은 어느 곳에도 포스팅 한적이 없기 때문에, 이 사진들을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워낙 사진찍는 실력이 형편없던 시기라서 별로 올리고 싶지도 않다.

 

 

 

다시 현재로 되돌아와서, 다이몬을 지나 조심스럽게 단상가람으로 이동한다.

지뢰밭을 통과하는 느낌으로 한 발짝씩 정성을 다해 움직이는 모습이 실로 애처롭기 그지없다.

발목이 워낙 부어있다 보니 이제는 신발에 압박을 받아서 앉아있어도 아프긴 마찬가지.

그렇다고 한번 신발을 벗으면 다시 신기도 어려우니 그냥 정신줄 살짝 놓은 채로 구경 마치고 오사카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다이몬을 통과하면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이 광경이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

문화유산에 둘러쌓인 생활이라는 게 이곳에서는 허언이 아니다.

 

꽤나 현대적인 건물임에도 코야산이 가지는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조화로움을 자랑한다.

관광을 위해서 무리하게 도로를 확장하지도 않아, 인도라는게 거의 없다시피 하다.

물론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이 천천히 사람들을 피해 달리니까 걱정할 건 없고.

이 곳의 제한속도는 40km 인데, 사실 40km 까지 달리는 자동차도 본 적이 없다.

 

걸어가다보면 조그만 식당도 몇개 보이고, 대부분 이 근방 재료를 사용해서 깔끔함이 자랑인 듯 먹음직스럽긴 한데

지금 도저히 뭘 먹을 기분이 아니다. 맛도 느낄 여유가 없는데 괜히 비싼 관광지 식사를 즐길 수는 없지.

 

그때 다리 상태를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주위 사람이 '여행에 미친 놈'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걷는다는 것 자체가 무모할 만큼 굉장한 통증이었는데, 스스로도 참 사람이 아프면 제정신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긴 한다.

 

 

 

100m쯤 걷다보니 건너편에 뭔가 대단해 보이는 건물이 보이는데, 가이드북에도 그닥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런 사찰들은 코야산에 워낙 많아서, 이런것까지 하나하나 돌아보고 간다면 최소 3~4일 이상은 기간을 잡아야 할 듯.

입구쪽 풍경이 인상적이라서 셔터를 누른다. 그래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때만큼은 그나마 통증을 순간적으로 잊을 수 있어서 좋다.

 

 

 

유명한 명소도 아니지만, 코야산 내부는 중간중간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풍경이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몸이 가뿐했다면 계단을 올라가서 저기 끝까지 한바퀴 돌아봤을 텐데.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길거리 풍경 하나하나도 허투로 해 놓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애초에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곳이니, 어색하게 꾸미지만 않는다면 곳곳이 훌륭한 감상 포인트가 된다.

발목의 통증을 꾸준히 중화시켜주는 진통제 역할을 해 준다고 할까.

 

 

 

비록 인도가 없다시피해서 자동차에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화창한 날에 이런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

 

국보급 보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보관 같은 곳에서 지출이 있을수도 있지만

이렇게 마을 전체가 훌륭한 공원만큼이나 분위기 좋은 곳을, 돈 쓸 걱정없이 돌아다닌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렇게 아파도 찍을건 대충 다 찍고 오는구나.

 

 

 

지금도 사용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옛 향기를 자연스럽게 간직한 이곳 마을의 모습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매일 아침 저곳에 들어가 있는 유우 한병을 가져오는 것에서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드라마를 보는 것 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분.

 

사람이 정성을 쏟으면, 오래된 집이라도 최첨단 아파트 못지 않게 아름답다.

 

 

이곳 코야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부분만 볼거리가 아니다.

역사와 문화를 가진 관광지가 어떤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해답을

마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건 한국에서 가장 소홀히하는 요소이기도 해서 더욱 대비되는 느낌.

 

속도 표지판 위에 올려둔 사찰 지붕 모양의 장식품 하나에서도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곳이 오사카 시내였다면 아마도 통증에 굴복해서 한두 시간 전에 관광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갔을 듯.

분명히 이곳의 풍경과 공기에는 천연 진통제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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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기나 통증이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악을 쓰며 걷고 있는데

굉장히 아기자기한 모습의 미니 사당이 보수공사터 주변에서 눈에 들어온다.

이끼로 지붕을 만든 듯한 고픙있는 모습이 멋지구나 싶었지만

만든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 듯 함에도, 부식 상태를 보니 역시 목조 사당은 이곳에서 버티기 힘든 듯 하다.

 

얼핏 보면 비슷비슷한 한국과 일본의 자연 환경도,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보이는데

일본은 기본적으로 여름에 훨씬 고온 다습한 곳이고, 그 때문에 산발성 호우가 자주 내리며

특히 계곡이나 산에서는 그 탓에 안개가 끼는 곳이 많다 보니

이렇게 산이나 계곡 전체가 이끼로 뒤덮힌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목조 건축은 순식간에 이끼로 뒤덮혀 부식되어 버리곤 한다.

 

코야산 정도라면 아마 이 목조 사당은 길어봐야 20년을 버티기 힘들 듯.

다음에 찾아갈 때 까지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 줬으면 한다.

 

 

 

한국에서는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길고 흐물흐물한 치마를 입은 관광객이 눈길을 끈다.

깍지 끼고 걸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구만. 사실 이 사진을 도촬할 당시엔 그것보다는

내 다리가 저 정도만 건강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더 절실하긴 했다.

 

걸어가는 도중, 아까 고뵤 앞에서 봤던 단체 관광객들이 혹여 내 발걸음을 따라잡으면 어쩌나 걱정도 했는데

아마도 나와는 반대 루트로 이동한 듯. 그 사람들을 만날 일은 없었다.

 

내가 들어온 입구 쪽에 대형차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출구를 그쪽으로 잡았을지도.

 

 

 

이렇게 가문 대대로 이곳에 묘석을 세우는 사람도 있는 듯 한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 이 정도 규모의 묘터를 마련했다는 건 상당한 재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불교의 중심지인 코야산이지만 이곳에도 토리이(鳥居)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의 종류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하다.

대문 역할을 하는 토리이 뒷면에 불교를 상징하는 오륜탑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도 나름 퓨전적이다.

 

 

 

언덕 위쪽에 묘하게 한국식 느낌이 나는 건물이 보여서 조금 망설이다가 다가가 보기로 결정.

언덕으로 향하는 길은 아무런 정비도 되지 않은 흙길에다가, 흐르는 물 때문에 진흙으로 된 부분도 있어서

그 때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이제껏 봐온 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멀리서 볼 때는 색상 탓인지 조선 건축물인가 싶었는데 조금 다가가고 보니 그건 아닌듯 하다.

지붕이나 처마의 형태는 전혀 다른데, 색상이 왠지 조선시대 건축물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혹시 그 당시 유명한 조선시대 인물의 사당인가 싶었는데, 다가가서 보니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의 사당이라서 약간 맥이 빠졌다.

 

사실 맥이 빠질일도 없는게, 착각은 했지만 이 우에스기 켄신이란 인물은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영웅호걸로 유명한 인물이니

우연이 겹쳐졌다고는 해도 한번 구경할 수 있었다는 건 큰 수확이라고 생각.

 

전란의 시기였던 1500년대, 전국시대라고 불리는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의 무장들이 전국 통일을 목표로 전쟁을 벌이던 시기.

결국 일본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도 두려워했던 호걸 중의 호걸이 이 우에스기 켄신이라는 무장이다.

당시 최고의 무공과 뛰어난 용병술을 자랑하는 무장이라고 하면

누구나 우에스기 켄신과 그의 라이벌이었던 타게다 신겐(武田信玄) 두 명을 꼽을 정도로 뛰어난 무장.

평지에서 그의 군대와 부닥치면 전투도 하기 전에 후퇴하는 장수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런 인물임에도 불교에 심취해서 사생활이 깨끗하기로 유명했으며, 당시 불교의 뜻에 따라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인의와 예의를 지키는 무장으로 이름나, 적이었던 수많은 장수들의 문헌에도 켄신의 덕을 칭송하는 문구가 빠지지 않는다.

그 검소함의 함정이랄까, 대주가였던 그가 고기는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술안주로 짜고 신맛의 매실절임(梅干)을 즐겨 먹었던 탓에

49세때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 사실은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시 와카(和歌)의 대가이기도 한 것을 보면,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틀린것도 아닌 듯. 비유가 좀 이상한듯 하다만.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목조건축물임에도 보존 상태는 꽤나 양호하다.

1700년대 건축물로 추청되는 이 사당은, 1960년대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기 전에는 상부 지붕도 거의 날아간 상태였지만,

현재는 원래의 모습을 복원, 오쿠노인의 묘지 중에서도 꽤나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다.

 

 

 

조심조심 언덕을 내려와서 걸어가는 도중, 위에서 언급한 또 한명의 무장 타게다 신겐의 묘석이 눈에 들어온다.

묘석보다는 이 묘비가 훨씬 대단해 보인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서 있었는지, 외모에서 역사가 느껴질 정도.

사실 지금껏 걸어오면서 이 외에도 유명한 인물들의 묘를 많이 지나쳤음에 틀림없지만

이 정도로 눈길을 끄는 녀석이 아니면 하나하나 살펴볼 여력이 없을 때라서.

 

유명하다고 해도 일본인한테나 그런 것이고, 그것보다는 오쿠노인 참배길 전체가 갖고있는 풍경을 즐기는게 훨씬 낫긴 하다.

 

 

 

이런 건 이끼라고 부르기는 좀 이상한데, 수백 년이 지나면 이 녀석도 어엿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일까.

 

이제까지의 사진에 나온 거대 삼나무들은 보통 수명이 500년쯤 된 녀석들인데

야쿠시마에 있는 5천년 된 삼나무도 시작은 이런 조그마한 녀석이었다고 생각하면

자연이 만들어내는 매력이란 사람의 인지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듯 하다.

 

 

 

단체 석불상도 나름 신기한 모습.

거대한 삼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석불 앞에는 이끼와 새싹들이 돋아나 있는 풍경이 훌륭하다.

석불이라는 것도 동일한 모습이 없이 각자 개성이 있으니, 허투로 볼 곳이 거의 없다는 것도 이곳의 장점.

 

 

 

묘석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듯 피어있는 이 꽃은,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꽤나 묘하게 생긴 모습이다.

중앙의 노란색 반점 위엔 수술로 보이는 미세한 돌기가 나 있는데 잎사귀의 모양이 비대칭인 것이 신기할세.

구글 같은 데서, 그림만으로 꽃 이름을 찾아주는 서비스 같은 건 없는지 모르겠다.

 

음악같은건 마이크에 대고 재생하면 곡명을 알려주는 스마트한 서비스도 있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컷 하나만으로 무슨 동영상인지도 알려주는 서비스까지 개발중이고. 이 녀석은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긴 하지만.

내가 못 찾고 있는건지 한번 알아봐야겠다.

 

 

 

원래는 무엇에 쓰이던 녀석일까.

살짝 옆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오히려 주변 모습과 어울린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꽃들도 저 녀석 따라서 살짝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지 않나?

딱딱한 사각형 모양의 조각도 이러고 있으니 왠지 푸근한 인상을 준다.

 

 

 

이제 길다면 길었던 오쿠노인 참배길의 끝이 보인다.

3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볍게 산책할 만한 코스인데도

나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 끝낸 것 같은 성취감과 비장함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릴듯한 느낌.

 

사실 오사카에서 출발해서 하루 코스로 돌아본다면 아무리 뼈빠지게 돌아봐도 코야산의 전부를 감상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왕복 4시간이나 걸리고, 코야산 내부 숙박시설은 상당히 비싼 편이라서, 와카야마시에서 출발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새벽 6시쯤 출발하려 한 오늘 일정은 뜻하지 않은 염좌때문에 8시에나 출발하게 되었으니, 애시당초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볼거리는 한정된 몇몇 부분으로 계획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쿠노인을 완주(?)했다는 점에서

나름 고생해서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 물론 아쉬운 점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쿠노인을 빠져나가기 전 늠름하게 홀로 서 있는 오륜탑 한장 남긴다.

 

 

 

다행히도 출구 바로 앞에 벤치가 있어서 주저앉았는데

그동안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발목이, 모 막장 방송국처럼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광을 시작한다.

꽉꽉 눌려있던 통증 인자들이 한꺼번에 뛰쳐나오는 느낌이랄까. 자신의 심장 고동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두근 두근하는 신호에 맞춰 발목이 욱신거리는 것이, 아 이것이 인체의 신비로구나 하는 생각이 패닉 상태의 뇌속을 스친다.

 

오쿠노인에서 길가로 빠져나오자, 조금 전까지 시야를 가득 채우던 삼나무 숲과 몽환적인 묘석들이 일순에 사라지고

잘 정돈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스팔트 도로와 전기 가로등이 줄을 잇는 현대적인 거리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내가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있었는지조차 혼란스러워지는 순간.

 

며칠동안 용궁에서 놀다가 육지로 돌아오니 이미 300년이 지나있었다는 우라시마 타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

 

앉아 있어도 별로 편해지지 않는 느낌이라서 한숨 한번 내쉬고 길 건너의 관광안내소로 향한다.

다이몬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와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서.

 

코야산은 내부 순환 버스도 한 시간에 두대 정도밖에 운행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추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기도 한다.

물론 일반인이라면, 오늘 하루 7~8km 쯤 걷는다고 생각하면 버스없이도 거의 모든 곳을 돌아볼 수 있는데

지금의 나로서는 다이몬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하더라도 그 후의 구경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상태가 안좋다.

 

약 20분 후에 저기 언덕 위의 정류장에 버스가 한대 온다고 하니 다시 절룩거리며 이동을 시작한다.

 

 

 

정류장엔 다행히도 벤치가 있어서 그곳에 장비를 내려놓고 앉아서 최대한 체력을 회복한다.

어젯밤에 구입해 놓은 이온음료를 조금씩 마시면서, 비록 움직이진 못하지만 코야산의 일상적인 모습을 좀 담아보려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뛰어들기 주의라고 적힌 표지판. 세계 어느 곳이나 애들이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건 무서운 일이니까.

 

아이들이 직접 그린 듯한 마스코트가 그려진 표지판은 나름 인상적인데, 문제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는 시안성이 좋지 않다는 점.

카메라로 찍고도 한참 확인한 후에야 무슨 글씨가 쓰여져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

 

훌륭한 시안성의 표본이 바로 위에 설치되어 있으니 아이들은 저걸 보고 배울 수 있으려나.

 

 

 

맞은편의 버스정류장에는 벤치를 설치할 만한 공간이 없다.

만약 저곳에서 기다려야 했다면 20분동안 고생 꽤나 했을 듯.

2차선 도로이긴 하지만, 양쪽에서 버스 정도의 덩치가 달려온다면 한 쪽이 정차를 해야 지나갈 수 있을만큼 좁은 길이어서

인도 역시 이쪽에서 이어지다가 갑자기 끊어지고 반대편에 나타나는 등, 거의 한쪽으로만 만들어져 있다.

 

문화재로 뒤덮히다시피 한 코야산도 사실 일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어엿한 마을로

일단 중학교까지 교육시설도 갖춰져 있긴 한데, 아이들이 즐길만한 패스트푸드, 게임센터 등은 아예 없으니

번화가로 놀러가려면 버스와 전철을 몇 번씩 갈아타고 최소 1시간은 가야 하는걸 생각하면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예전처럼 산골에서 친구들끼리 노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거나

놀고싶은건 많은데 놀게 없어서 불만이 쌓이는 시골 아이들이거나

어려서부터 불법에 눈을 떠서 가부좌로 수행하는 아이들이거나 할 듯. 마지막 경우는 아닐거라고 보지만.

 

 

 

근대적인 모습이라고는 자동차밖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곳 마을은

관광객들이 번성하는 기간이 아닌 이상 인기척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한적하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

 

도시에서는 집이 나이를 먹으면 가끔씩 탈피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확 신축되어버리기도 하는데

이런 곳의 주택은 사람과 함께 느긋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옛날 주택은 물빠짐도 좋지 않고 여러가지로 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런 단점들은 전부 커버하고도 남는, 더 이상 신선할 수 없는 산내음과 맑은 물에 한없이 둘러쌓여 있으니까.

 

아이들에겐 좀 단조로울수도 있지만, 휴일에 드라이브겸 도심지로 데려가서 놀게 할수만 있다면

이 곳에서 애들 교육시키는것도 멋질거라는 생각이 든다.

널려있는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재를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는 유아기를 보내는 아이들의 감성은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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