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 돌보기를 끝내고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스트레스 푸는데는 독서가 최고라서, 서점으로 향하는데
뭔가 이상한 조형물이 서 있어서 다가가 봤더니, 페트병으로 만든 천사 모양이네요.
자연보호 블라블라 하는 그런 의미겠죠.
일본서도 12월 초부터 줄기차게 크리스마스를 엮어서 장사하고 있던데
특정 종교 기념일이 모텔 방을 꽉 차게 만드는 이런 현상은 참 재미있습니다.
그냥 일탈의 변명거리를 하나 만들고 싶을 뿐이겠죠.
산 김에 바로 옆 까페에서 책좀 읽고, 국채보상공원쪽 도로가에 뭔가 반짝이길래
그냥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좀 춥긴 한데 30~40분만 걸으면 되니까요.
사진 찍을 생각은 원래 별로 없었고, 혹시나 싶어서 24mm 렌즈 하나만 덜렁 들고 나왔던 터라
맘에 드는 구도는 잘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뭐 스냅으로는 충분합니다.
크리스마스라고 기분이 좋아지는건... 제가 솔로라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평소 보기 힘든 모습, 이런 발광중인 길거리를 볼 수 있으니 저야 뭐 아쉬울 건 없습니다만.
카메라 꺼내들고 마구 찍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건 확실히 크리스마스의 특징일까요.
커플들이나 아이 데리고 온 부모들이나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걸어서 돌아갈 좋은 이유가 생겨서 저도 신나게 사진 찍었죠.
원래는 책이나 실컷 읽다가 버스타고 돌아갈 예정이었고, 카메라는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갖고다니는 정도였으니.
나무들한테는 별로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만 연말연시 이 정도야 뭐...
어릴적엔 집안에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것도 만들어놓고 그랬는데
이제는 아무런 감흥이 없으니 할 필요도 없겠죠.
조카 태어난 형님집엔 초소형 사이즈의 트리가 있긴 하더군요.
그냥 가로수만 빛나고 있으면 좀 재미가 없을것 같아서인지
크리스마스와의 연관성을 찾기는 어려운 동물 모형들이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습니다.
독수리나 코끼리나 백조 같은건데... 제 지식으로는 그게 크리스마스와 뭔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다들 모형 앞에서 사진 찍으려고 난리였습니다.
사진 찍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혼자서 찍을 수 있더군요.
정말 밋밋하고 형편없는 플라스틱 조형이지만
빛이 가미되니 멋진 피사체로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낮에 보면 그냥 흉물스러울 뿐인데 말이죠.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브라이언 그린과 미치오 카쿠 등, 양자역학과 우주론같은 내용이라서
왠지 평소보다 빛이라는 개념이 좀 더 놀랍게 다가오는 듯한 기분입니다.
빛이라는 단어 하나가, 사실은 137억년 전 우리 우주가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속도로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크리스마스라는 개념 따윈 이 한줌의 빛보다도 의미가 없을 뿐이네요.
선거가 끝나도 아직 전광판은 바꾸지 못했군요. 공무원이 하는 일이 그렇죠 뭐.
연말이 되면 여기서 종 치는 모습을 보려고 이 광장이 인파로 가득 찰것 같습니다.
예전엔 그런 심리패턴을 이해해 보려고 서울 종로에서 종치는걸 직접 구경하고
밤새도록 음식점이나 까페 빈자리 찾아다니는 짓도 해 봤습니다만... 모르겠더군요.
10시가 되니 일제히 가로수 불빛이 꺼져버렸습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더군요. 어디에 그런 고지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불친절함이야, 한국에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다들 이해하고 넘어가겠죠.
그 불빛이 없어져도 원래 있었던 가로등들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녀석만으로도 얼마든지 마음에 드는 사진은 남길 수 있네요.
매번 경대병원 장례식장 뒷쪽 골목을 걸어서 돌아옵니다만
2달 전 대구를 떠날때만 해도 이런거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들어서 있는 모습에 심히 당황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라가나 싶더군요.
장례식장 골목의 구 가옥들을 철거하고 공사터를 만드는 모습까지는 봤는데
순식간에 이만큼 올라가 있으니, 1년간 자전거여행하고 돌아왔을때보다 더 큰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거의 빛이 없는 깜깜한 골목이지만, 예전처럼 어두워지면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을 필요가 없네요.
그러고보니 요즘 해가 지고나서 찍는 사진이 부쩍 늘어난 것 같습니다.
카메라의 성능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결국 야간에 찍을만한 성능이라면
알게 모르게 카메라를 꺼내드는 빈도가 늘어가게 되는군요.
기술의 발전에 괜히 고지식하게 귀를 막고 있을 필요는 없나봅니다.
집까지 거의 다 왔습니다.
보통 서울이 더 춥고, 대구는 춥다 춥다 해봤자 별로 춥지 않다는게 정설인데
내려와보니 며칠간은 확실히 서울보다 대구가 더 춥더군요.
눈이 언제 내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며칠동안 영하의 기온이 계속되어서
이런 골목길의 눈은 거의 얼음바닥이 된 채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신고있는 구두는 기형적인 제 발바닥을 편안하게 할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밑창의 내구성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닳아버리더군요.
그래서 눈에 발자국을 찍어보면 완전히 매끈한 평판 모양이 나올 정도로 밋밋합니다.
그런 녀석으로 이런 얼음바닥을 걸으니 이건 뭐...
넘어지면 수백만원짜리 카메라도 박살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조심조심 이동합니다.
수성교를 건너는데 그냥 지나치긴 또 뭣해서, 다리 위의 난간을 삼각대삼아 장노출을 해봅니다.
셔터야 타이머 설정해놓으면 되지만 자동차의 진동때문에 제대로 찍힐까 걱정이 되긴 하더군요.
다행히도 15초 정도의 노출은 별 무리없이 찍혀나왔습니다.
그닥 볼품없는 풍경이긴 하지만, 외국인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참 신기한 풍경일 것 같네요.
이 건널목만 건너면 집인데, 기다라기 심심해서 장노출이 아니라 손으로 들고 야경 찍어봅니다.
사실 이렇게 고감도 야간사진을 많이 찍으려는 건 나름 보상심리를 기대하고 있다고 보는게 맞겠더군요.
지난번 카메라도 별 불만없이 쓰다가, 신제품에 대한 호기심으로 큰 출혈을 감수하고 바꾼 탓에
예전에 찍기 힘들었던 환경에서도 무리없이 결과물이 나온다는걸 스스로 확인해서
출혈구매를 합리화시키고 싶었던 마음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아파트 앞에도, 이미 눈이라고 부를 수 없는 번쩍번쩍한 얼음판이 형성되어 있군요.
얼핏 보기에 눈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형태만 간직했을 뿐, 밟아도 전혀 움푹 파이지 않는 완벽한 얼음입니다.
제가 없는 사이에 대구도 눈 오고 춥고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살짝 들다가 파동함수처럼 붕괴되어 버리네요.
사진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데
지금까지 사진의 긴축 길이를 1100px 로 고정하고 있는 이 블로그를 좀 더 확장해야 하지 않나 합니다.
사진 원본이 6000px 가까이 되는데 이렇게 줄여버러니 왠지 눈에 안들어오는 부분이 많은것 같네요.
이 블로그 처음 시작할때야, 24인치 모니터 쓰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
1100px 정도가 다른 사람들이 구경왔을때 한 화면에 보이는 한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요즘엔 기본적으로 다들 가로해상도 1920 이상의 모니터를 쓰고 있겠죠?
제 모니터는 가로 2560 픽셀이라서 1100px 사진은 그냥 조그맣게 보일 뿐이지만
다들 1920 정도의 모니터를 쓰신다면 사진의 가로길이를 좀 더 늘려도 문제없을 듯한데 말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 봐야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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