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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10.09  산인 여행 - ANTWORKS GALLERY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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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보여주고 입장료 반값 할인받은 후 짐 맡기는 곳을 물어보자 자기들이 직접 맡아주겠다고 한다.

백팩이 좀 커서 보관함에 안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애초에 보관함이 없으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도 했고.

입구 부분이 수리중이라서 약간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정원쪽은 돌아보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다행.

 

변형된 입구로 들어가는데 안내하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방금 도착하신 일행분이신가요?' 라고 물어본다.

아마도 같은날 이곳에 페리로 도착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이곳에 온 모양인데, 그쪽과는 관계없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출 리는 없을텐데... 아무래도 그쪽 팀 역시 비 그치기를 기다린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얽히는 일 없이 혼자서 느긋하게 돌아보고 싶으니 전후방 주시해가며 전진.

 

아직 비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도중이라서 그렇게 화창하진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쨍쨍해 질듯한 하늘이다.

입구를 통과하고 처음 마주한 유시엔의 모습은 생각보다 넓으면서도 생각보다 좁은 듯 하다.

 

뭔 선문답인가 하면, 정원 전체의 크기는 생각했던것보다 커서

지역의 대표급 정원들에 비하면 좀 작아도 충분히 입장료를 지불할만한 넓이였다는 뜻이고

생각보다 좁다는 것은, 정원에 심어진 조경수들의 밀도가 좀 빡빡한 느낌이 들어서 확 트이는 시원한 느낌보다는 오밀조밀하다는 뜻.

 

 

 

그래도 살짝 주위를 둘러보니 한적한 시골마을의 외딴 정원이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다.

굉장히 세심히 주의를 들여 가꾸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드는 조경수들의 상태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정원이란 온갖 식물들을 최상의 상태로 보전하면서, 산, 물, 땅 등의 요소를 축소해 집약시킨 공간.

인위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쟀든 이런 인공적인 미를 유지시키려면

마치 축산업에 종사하듯이 휴일없이 사시사철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확실히 관리 하나는 잘 되어있다는 느낌.

 

 

 

입구가 달라졌기 때문에 원래 이 루트인지, 내가 지금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지만

산책 시작하자마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정원 내부의 식당인데, 정원을 둘러보기도 전에 식당이 나오는건 조금 의아하다.

 

하지만 공사중이라고는 해도 소소한 서비스 정신을 잊을리가 없는 이쪽 사람들 탓에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 정확한 루트라고 나무 푯말이 확실히 박혀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은 이 방향이 맞다.

보통 식당이나 기념품점은 관광이 다 끝나는 지점에 세워놓는게 지극히 정상적인데,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건지.

 

아무튼 마츠에에서 밥은 여러가지 많이 먹고 왔으니 여기서 한끼 할 일은 없다.

정원을 바라보면서 한끼 하는 식사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여기에서까지 외국인 할인은 되지 않겠지.

 

정원의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는 외관이나 색상, 소재 선택은 이곳의 완성도를 재차 어필하는 듯 하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서 기분이 좋아진 이유중 하나는, 이곳이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이끼 정원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고, 일본의 정원 중에서는 단연 이끼 정원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유명한 정원이라고 해도 이끼 정원이 아닌 경우는 많다. 정원 전체를 이끼로 덮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

예전에 도쿄 옆의 하코네 이끼정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태양빛에 반사되는 찬란한 이끼들의 향연이 너무나 인상깊었기에

오랜만에 접하는 이끼정원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일시에 기분을 고취시켜준다.

 

하코네 이끼정원에 대한 포스팅은 아주 옛날 녀석이 남아있으니 보실 분들은 이곳으로.

 

 

 

이끼 정원은 일반 정원에 비해 풍성함이라고 할까,

걸어가는 루트 이외의 장소가 전부 자연의 생명력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힘들지만, 습한 기후의 일본에서도 이끼 정원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수십 가지의 이끼를 배양해서 정원을 만들어도, 그 기후와 토양등 수많은 요소에 적합한 녀석 몇종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생장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냥 놔둬서 되는 녀석들도 아니고, 사람이 만든 공간에서 살아가려면 사람의 철저한 관리가 필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끼 정원은 별천지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연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금 저 사진의 토양 부분이, 이끼가 없는 평범한 흙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느낌이 어떨지 짐작이 갈까.

잔디와는 완전히 별개의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생소한 풍경이다.

한국에서도 이끼 정원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지만, 야외에 광범위하게 만들기에는 기후상 어려움이 따른다.

 

가장 일본적인 맛을 느낄 수 있는게 이 정원이라면, 그 중에서도 이끼 정원이야말로 타국 여행이라는 느낌을 확실히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밀도가 조금 높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 없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시엔의 모습은 1등급 정원이라고 결론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본의 3대 정원이라는 곳중 두군데는 돌아봤지만, 그 몇대 어쩌구 하는 수식어에 휘둘리는 듯한 느낌.

훌륭하기로야 더할 나위 없지만, 그 이름값 때문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정원의 모습은

본연의 가치를 감상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 유시엔은 한적하게 홀로 거닐만큼 여유가 있어서, 조금 빡빡한 느낌이 들어도 충분히 마음에 든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쪽도 여기저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긴 한데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를 앞에 세워놓고 찍는 기념사진인듯, 나하고는 다른 차원의 생물 같으니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을 세워놓고 사진 찍는 반면 이동속도는 나보다 훨씬 빨라서, 내가 몇장 찍고 있으면 금새 앞질러 가버린다.

덕분에 이쪽은 얽힐 필요없이 천천히 진행할 수 있으니 나쁠거 없지만.

 

 

 

규모로 보면 그렇게까지 큰 편에 속하지 않지만, 이곳저곳 둘러봐도 상당히 알찬 느낌의 유시엔.

정원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동선과 그 주변의 풍경 등 설계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복잡하다.

걷다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 차 한잔 할 수 있는 가게 등도 철저하게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한적한 시마네현이기 때문에 이렇게 멋들어진 풍경 촬영에 열을 올려도 방해받지도, 남을 방해하지도 않는 여유가 가능.

유명한 정원에 가면 걷다가 마음껏 사진 담을 공간마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틀간의 페리 여행과 이어지는 비 때문에, 시작부터 뭔가 꿀꿀하고 초초한 기분이었던 이번 여행에서

오랜만에 홀로 녹음속을 마음껏 거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듯 하다.

 

 

 

사진 찍을 포인트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고.

사진 한장 찍기전에 1분쯤 그자리에 서서 천천히 주변 풍경을 음미하는 시간도 잊지 않는다.

 

옛날 일본 다이묘들은 이런 정원을 자기 집 안에 떡하니 지어놓고 매일 산책하며 물고기들에게 먹이나 주는 호사를 누렸다.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만 가능한 사치스러운 행위가, 다행히도 오늘날엔 약간의 입장료를 지불함으로서 체험이 가능하다.

 

물론 옛 다이묘들 중에는, 백성들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기 소유의 저택과 정원을 팔아서 곡식을 구입해 나눠준 사람도 있긴 하다.

 

 

 

자연 그 자체라면,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예술성을 뛰어넘는 장관을 연출하지만

미약한 사람의 힘으로 그 흉내를 내려는 노력이 빚어낸 일본식 정원은, 아주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써야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시멘트 길 위에는 자갈이라도 뿌려서 그 인공적인 느낌을 감춰야 하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정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철봉이 아니라 굽이진 대나무로 위화감을 없애야 한다.

 

소소한 곳에 신경을 쓴다면, 보는 사람 역시 소소한 곳까지 뜯어봐도 만족감이 드는 법.

나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벌써 저 멀리 기념품점에서 바글거리고 있는 단체관광객은 이런 요소들을 음미하고 있을려나.

 

 

 

햇살에 반짝이는 이끼의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하코네 이끼 정원에서 받았던 그 감격을 실로 오랜만에 느낄 수 있으니 셔터를 누르는 횟수도 늘어난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왼편의 저 나무가 단풍으로 물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잘 만들어진 정원은 사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을의 유시엔이 매우 절실해지는 느낌.

봄과 여름에는 이렇듯 색이 좀 단조로워지는 느낌이 있지만, 가을의 정원은 그야말로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절경을 뽐낸다.

 

물론 눈으로 덮인 겨울정원의 모습도 빠뜨릴수 없고, 자연을 모방한 정원이니 계졀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도 당연하다.

 

 

 

이끼의 생육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잘 자라다가도 조금만 일조량과 습도 등이 변화하면 곧 죽어버리는 녀석들이라서

나무 앞쪽의 이끼들은 이미 누렇게 죽어버렸다. 물론 타이밍이 맞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만.

 

죽은 이끼들 사이로 다른 종류의 이끼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도 보인다.

정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저 틈을 되살릴 것인지도 궁금하다.

 

 

 

반대로 그늘이 많아서 습도가 높은 지역의 이끼는 또 그 느낌이 다르다.

색도 진해지도 조밀해져서 이름 그대로 그늘에 걸맞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항상 일정한 색과 밀도를 유지하는건, 천해의 혜택을 받은 지형과 날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현재로서도 불가능에 가깝고

넓은 벌판에 고립된 정원이 아닌 이상 주변 건물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하다.

 

여기저기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오늘 갈아입은 반바지 밑이 좀 가려워진다.

장소가 장소다보니 모기가 아주 신나게 활동중인듯 하다. 마지막 날이라서 편하게 반바지 입었는데 이런 함정이 도사릴줄은.

다 잡아낼수도 없으니 그냥 물리면 물리는대로 놔 두는수 밖에.

여담으로, 그때 물린 흔적은 한달 반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이끼 정원의 매력은 역광 촬영시에도 잘 드러난다.

빼곡한 조경수 덕분에 직광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에 빛은 부드러워지고

오밀조밀한 이끼가 지면 가까이서 반사되는 빛에 부드럽게 퍼지는 모습은 푸근하기 그지없다.

 

인공적인 산물이긴 해도, '이 곳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모습.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감상하기를 여러 차례.

 

 

 

나무의 새순들은 어떤 운명을 맞을지 궁금하다. 조경수라는 목적상 이런 새순은 쳐내버리는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새순 잎사귀 밑에 매미껍질이 보인다. 이번 여름은 한껏 더웠으니 이 녀석들, 원없이 울어대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늦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30도를 넘나드는 날씨라서,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남아있는 듯 느껴진다. 착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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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엔 입구가 아니라 꽃집 입구에 상당한 양의 우산이 곱게 접혀져 대기중인 모습.

버스정류장이 이곳이니 여기서부터 비에 젖지 않게 하기위한 배려인 듯 하다.

유시엔이 이렇게까지 큰 곳인가 싶을 정도로 우산 수가 많은데, 전부 가지런하게 접혀있고, 손잡이 끝부분엔 유시엔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이쪽으로서는 굳이 비오는데 돌아보며 사진 찍을만큼 급하진 않으니 사용할 일은 없지만

구경을 시작하기 전 이런 배려의 흔적을 접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질 만도 하다.

 

 

 

30분쯤 쏟아지고 나니 서서히 비구름이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쏟아부은것 치고는 오래 내린 편.

이 정도라면 느긋하게 둘러보고 사카이미나토행 버스를 타더라도 페리에 늦을 일은 없을 듯 하다.

사카이미나토에도 나름 유명한 볼거리가 있으니 아주 넉넉한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버스가 1시간에 두 대정도 오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서 이동하는 수 밖에 없다.

 

오늘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으로, 오전중 마츠에를 돌아다닐 때는 깨끗하다가 버스 타고나서부터 비가 쏟아지고

조금 기다리니 또 다시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정원을 둘러볼 수 있다. 마츠에 성에서 폭우에 쫄딱 젖었던 경우에 비하면야.

 

 

 

유시엔으로 가는 길에 단촐한 꽃집의 분위기도 몇장 담으며 걷는다.

꽃집이 다들 그렇지만 꽃 외에는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건물 덩어리인데,

화분들 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건, 역시 식물이 가진 힘이라고 할까.

 

 

 

오키나와에서도 자주 눈에 들어오던 거대한 꽃.

무궁화와 같은 종이라서 닮긴 닮았다.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무궁화와는 크기나 색깔이 많이 다르지만.

비가 그치고 간접적이긴 해도 햇살이 들어오다보니 꽃들에게서도 활기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름모를 꽃. 피어있는 모습도 물론 아름답지만, 피기 전의 꽃망울도 저렇게 모여있으니 나름 매력있다.

 

아파트 구조상 마음껏 식물을 들여놓을 수가 없어서 이런 곳에 오면 항상 아쉬운 느낌.

가끔 아파트 베란다 전체에다가 흙을 채워넣어서 조그마한 정원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구쪽 본가는 베란다를 트는 바람에 그럴 공간이 없지만, 서울쪽 아파트라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듯 한데.

배수시설이나 꾸준한 관리 등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도, 조그만 화분에 담겨있는 녀석들보다 훨씬 보기좋을 것 같다.

 

 

 

희귀한 꽃들이 전시되어 있는건 아니지만, 마음 다잡고 구경하는 이런 시간에는

얼핏 길가다가 스쳐 지나가는 녀석들보다도 집중해서 보는 탓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매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정원이란 건, 겨울을 제외하면 응축된 에너지로 넘쳐나는 공간이라서

조금 있다가 구경할 녀석을 대비해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을 풀고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랄까.

 

 

 

버스정류장 위치를 생각하면, 이 꽃집과 유시엔은 한데 묶어서 생각하는것이 옳다고 본다.

일본식 정원과 함께하는 꽃집이란 것이 조금 생소하기도 한데.

규모는 큰편이지만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가건물에 식물들만 모아놓은 이 곳이

어째서 독립된 버스 루트까지 가지고 있는 유명한 정원 옆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시엔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의아한 것이 당연했지만

관람이 끝난 후 조그만 이벤트 덕분에 이곳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된 시점에서는 여러가지로 마음이 따뜻해 진다.

그 이야기는 당연히 다음 포스팅에서.

 

 

 

요 조그만 길만 건너면 바로 유시엔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면 고층 건물은 고사하고, 마을 전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없는 듯한 분위기.

아마도 이 길이 마을에서 가장 큰 도로일 것이다. 자전거 여행때 자주 봐왔지만, 일본에서 가장 마음 편한 모습이란 이런 것.

 

한국은 도시 외곽의 분위기를 뭐라고 찝어서 정의하기가 힘든데

일본의 도시 외곽은 상당부분이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높은 건물이 거의 없이 나즈막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도심지에서는 자리잡기 어려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상점들이 주를 이룬다.

땅값만 싸다면 높은 건물보다 낮고 넓은 건물이 월등히 저렴하기 때문에.

그 결과 주로 잡화점, 중고차 가게, 2층을 넘지 않는 대형 마트등이 외곽으로 빠져 있다.

대형 마트의 경우에도 굳이 지하 주차장을 만들 필요가 없이, 마트 앞에 상당히 큰 규모의 주차장을 가진 녀석들이 대부분.

자전거로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서서히 중고차가 주르륵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보이면 도시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

 

왼쪽 건물에 보이는 간판은 옷이나 그릇 등을 파는 잡화점 콘페이토(こんぺいとう)라고 적혀 있는데

거대 체인이 아닌게 확실한 저 가게 이름은 의외로 일본 각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도심지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생활권인 외곽지역에 주로 위치하는지라 관광객이 찾아가기엔 힘든 곳.

대부분이 관광객이 버스나 철도 등을 이용해서 이동하는데, '창고'라고 불리는 잡화점이 위치한 곳은

이런 대중교통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 대부분인 평범한 도시 외곽이기 때문에 작정하고 찾아가지 않는 한 보기 힘들다.

 

도심의 유명한 잡화점으로는 돈키호테가 있지만, 외곽의 잡화점은 한국의 대형 마트만한 크기의 단층건물이 대부분.

돈키호테 따위는 가소롭게 보일 정도로, 정말 잡화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녀석들이 창고처럼 가득가득 차 있다.

좀 큰 도시 외곽의 잡화점은 악기, 의류, 반지, 시계, 음악, 영화, 게임, 장난감, 카드게임, 중고책 등등 없는게 없다.

콜렉터들이 군침흘리는 빈티지 기타나 구하기 힘든 모형건, 분위기와 달리 고가의 희귀 라이터 등도 눈길을 끈다.

 

조명은 어둡고 내부 마감 없이 짙은 나무색 등의 어두운 소재로 만들어져 있고, 통로는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

난잡하고 시끄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잡화점은, 오랜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그런 분위기가 매상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이곳의 잡화점이야 그런 물건들을 들여놓을 일이 없으니, 그냥 옷이나 그릇등을 파는 것 같은데

콘페이토라는 이름의 잡화점이 의외로 많은 것은 나름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콘페이토는 포르투갈어(Confeito)로 '별사탕'이란 뜻. 건빵에 들어있는 그것. 발음을 차용해서 한자로는 '金平糖'이라고 쓴다.

1500년경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별사탕은, 당시로서는 만들기 힘들고 비싼 고급 과자였는데

재래식으로 별사탕을 만들때는, 특수한 가마솥을 가열하면서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설탕물을 넣고 끊임없이 회전시켜줘야 했다.

여기서 별사탕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참깨를 이용하는데, 이것이 사탕의 핵이 되어 주변에 설탕이 모이면서 별 모습이 된다.

 

잡화점에 콘페이토라는 이름이 자주 붙는 것은 그 빛나는 듯한 오묘한 모습과 함께, 사탕의 핵이 되는 참깨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들어와서 이리저리 구경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반짝하고 눈에 들어오는 상품을 찾을 수 있는 곳.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지만, 이렇게 가게 이름으로 그 원류를 연상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맞은편에 드디어 유시엔의 모습이 드러난다. 비 때문에 한참 지체되었지만 일단 목적지에 도달한 셈.

버스 정류정에 내려서 꽃집을 통과한 다음 보이는 유시엔의 정문 모습만으로는

저 너머 어디에 어떤 정원이 기다리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앞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니까.

 

비는 그쳤어도 아직 구름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하늘이라 약간 아쉽지만, 저 멀리서 천천히 푸른 하늘이 다가오고 있으니

느긋하게 둘러보고 있으면 하늘 색도 촬영과 감상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한다.

이곳 역시 외국인에게는 입장료 반값 할인이 가능하니 부담이 없다. 등에 가득한 짐을 보관할 장소가 있기를 바라며 길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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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에 일어나 조식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오늘의 일정을 생각해 본다.

오후 7시에 출항하는 페리는 6시까지 승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넉넉하게 5시 조금 넘겨 터미널에 도착해야 한다.

시간이 아까워서 빠듯하게 도착할 수도 있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자칫 1주일동안 이곳에 고립되는 상황을 낳을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느긋하게 도착해서 기다리는게 마음 편하다. 짧진 않지만 느긋하지도 않은 오늘이란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어떻게 할까.

 

일반적인 관광객보다는 훨씬 느긋한 발상인데, 보통 하루에 한 곳 정도만 확실히 정해놓고 움직이는 본인 스타일상

오늘 가장 중점을 둘 곳은 이곳에서 페리 터미널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아담한 정원 유시엔(由志圓)이다.

크게 유명한 곳도 아니고 원래부터 가고 싶었던 곳도 아니지만, 마츠에 시와 페리 터미널의 딱 중간즈음에 위치한 곳이라서

돌아가는 길에 들르기엔 최적의 장소라 여행 계획때부터 코스에 넣어둔 곳.

 

문제는 유시엔이 너댓시간동안 돌아다닐만큼 큰 곳은 아닐듯 해서, 지금 바로 체크아웃후 뛰쳐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

오후 1시쯤 도착하면 딱 알맞을 듯 한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12시 반쯤 버스를 타면 된다.

약 3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이곳 마츠에에서 보내야 한다는 결론. 멀리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현립미술관이나 카라코보 공방 등등 구미를 돋구는 장소가 있고, 그냥 아담한 까페에서 커파나 홀짝여도 시간은 충분히 간다.

일단은 10시까지 체크아웃이니, 짐을 프론트에 맡겨놓고 나서보기로 한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창밖 구경이나 하다가 눈길이 가는 곳에 내리면 되겠지.

 

걸어서 5분거리인 마츠에 역으로 가는 도중에 만화 캐릭터같은 녀석의 동상이 서 있다.

시마네현과 인접한 돗토리현은 '게게게의 키타로'나 '명탐정 코난'같은, 시대에 한 획을 그은 만화가들의 고향인데

문화 컨텐츠쪽으로는 돗토리현에 뒤지지 않는 시마네 쪽에서도, 만화 쪽에서는 크게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는 편.

이 캐릭터는 한국에 정식 수입된 적은 없는 듯 하고, 상당히 오래 전 인기를 끌었던 녀석인 것 같다.

 

 

 

3일간 마음껏 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레이크라인 버스를 사진에 담아본 적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면 돌아와서 조금 아쉬웠을 듯. 관광용 버스 중에서는 디자인이 참 잘된 녀석이다.

원목은 아니지만 좌석도 나무로 되어있고, 안내에 능숙한 여성 운전자들이 반쯤 가이드 역할도 해 주는 훌륭한 녀석.

 

한쪽 방향으로만 순환하기 떄문에, 잘못타면 마츠에 역 바로 앞에서 승차해, 40분이나 걸려 역에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다.

 

어제 이즈모에서 돌아온 후 마츠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을때도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수첩에 일기를 쓰지 않은 여행이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나서 읊어본다. 이래서 일기를 써야 한다니까.

 

신지코 온천역 앞의 버스 정류장은 마츠에 역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곳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면

약 30분 가까이 마츠에 시내를 돌고 돌아 최종적으로 마츠에 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그냥 일반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던 중. 퍼펙트 티켓은 시영버스라면 어떤 것도 무료로 탈 수 있으니.

그런데 젊은 여성관광객 둘이 갑자기 앞에 와서 뭔가를 물어본다. 영어로. 네이티브는 아니고 적당한 아시안 잉글리쉬로.

영어로 말하는 모습만 봐도 아, 한국인이구나 싶었는데, 일본어에 익숙하다보니 막상 한국인의 영어는 알아듣질 못하겠더군.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그나마 영어로 물어본 것 같은데, 내가 일본인이었더라도 그 영어를 알아들을수는 없었을거라 생각한다.

 

도중에 말 끊을 타이밍을 잡을수가 없어서, 질문 다 끝나고 한국어로 이야기하자 폭소가 터졌다. 나야 자주 겪는 일이긴 하다만.

레이크라인 버스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마츠에 역으로 가는 일반 버스를 타고 싶은데 그걸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마침 나도 그럴 예정이었으니 함께 일반버스를 탔다. 홀몸이 아니라서(?) 버스기사분께 마츠에 역 가느냐고 확인질문까지 하고.

 

딱히 친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선 그냥 두분끼리 이야기하도록 뒤에서 앉아있었다.

내리고 나서 감사인사 한번 듣고 헤어졌을 뿐. 그래도 여행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긴 것이니 이쪽 입장에서도 즐거웠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경치를 감상한다.

현립미술관에서 내릴지, 카라코보 공방에서 내릴지를 머릿속으로 저울질하고 있는데

출발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창밖 너머에 중고서점 체인인 북오프가 보이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제 비참한 패배를 맛봤던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저기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떠오른다.

북오프는 기본적으로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곳이지만 대부분 음악CD, 영화, 게임 등도 함께 취급하니까.

친구 부탁때문에 다른 관광지를 놓치는 것이 아깝다면 아까울수도 있지만, 사실 북오프 탐방은 원래부터 좋아하는 코스다.

한국에서 일본 원서 찾아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 일본에 오면 꼭 한두 번은 북오프를 찾아다니곤 하니까.

게임소프트가 없어도 그냥 읽고 싶은거 읽으면 되기 때문에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결국 몇 초간의 짧은 고민끝에 현립미술관도, 아트공방도 포기하고 북오프 앞에 내려버렸다.

만약 여행 시작후 좀 더 열심히 돌아다녔다면 이곳도 일찍 발견해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희미한 아쉬움은 금새 사라진다. 여행은 신기한 거 많이 본다도 성공하는게 아니니까.

숙련된 주방장이 완숙미 넘치는 손놀림으로 부드러운 면을 뽑아내듯이, 느긋하게 마음이 가는대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런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이야, 가이드북에 실려있는 관광지들을 하나라도 더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 이해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급해 지는 순간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느긋한 여행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정류장에 내려서 한가롭게 휴식중인 호리카와 유람선의 모습을 담아본다.

마츠에 성 주변을 1시간 가까이 유랑하는 이 배는 선착장이 몇 군데로 나뉘어 있어서, 여행하다가 편한 곳에서 승선이 가능.

지금 이녀석 타기엔 시간이 좀 촉박하니 그냥 사진으로만 담기로 한다. 물이 영 깨끗하지 않는게 조금 거슬린다.

호리카와 강 원류는 깨끗한 편이지만, 워낙 지류가 여기저기 많이 나눠진 녀석이라 이런 곳은 물흐름이 좋지 않다.

 

 

 

북오프에 들어가기 전, 맞은 편 약국에서 오늘 저녁을 대비한 멀미약을 구입한다.

강한 녀석은 몸에 좋지 않으니 액상으로 된 조그만 녀석을 구입. 2병으로 나눠져 있어서 상태를 봐 가며 마실 수 있다.

가능하면 마시지 않는게 좋겠는데, 막상 어지러울 때 이녀석이 없으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일단 챙겨가는게 좋을 듯.

 

일본의 약국은 한국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한국의 약국과 똑같은 곳도 있는데, 왠만한 이마트만한 녀석도 꽤나 많다.

그런 곳에서는 전문 처방뿐 아니라 왠만한 보조식품, 미용도구, 비타민, 음료수, 심지어 과자나 컵라면까지 판다.

다이어트 라면이라던가, 묘하게 건강과 관련된 제품들로 채워져 있으니 일반 마트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일본은 의사 처방없이 구할 수 있는 상품들이 상당히 많아서, 약국이라고 해도 오만가지 상품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구경하기 힘든 곳이니 그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관광.

 

멀미약을 구입 후, 옆에 보이는 도시락집으로 이동. 계속 목표였던 북오프를 재쳐두고 딴길로 새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도 도시락집이 꽤나 성업중인데, 일본도 역시 편의점 도시락보다는 이렇게 바로바로 만드는 집이 더 맛있는 편.

호텔서 조식을 먹었으니 도시락까지는 필요없고, 그냥 반쯤 기념삼아 닭다리 한조각이나 구입해서 뜯어먹는다.

한국의 닭다리보다 양념맛이 훨씬 약하고 부드러운데, 저질 프라이드 치킨의 뼈 근처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없어서 먹기 좋다.

 

 

 

북오프는 마츠에 시의 크기에 비교하면 꽤나 준수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역시 중고품 전문점이기 때문에, 발매된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게임소프트는 없었다.

인기가 있는 녀석인지, 그 게임소프트 중고를 고가 매입합니다 라는 안내문을 적혀 있다. 결국 친구녀석의 부탁은 실패.

애초에 마츠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이니, 이런 시골마을에서 게임 소프트를 구해달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

 

그것과는 별개로 가볍게 읽을 책을 한권 샀는데, 페리 안에서는 아무리 멀미약을 먹어도 책을 읽기는 힘들 듯 하다.

그냥 한국에서 시간날때 읽으면 되니까 상관은 없다. 중고라고 해도 책이 워낙 깨끗하니 이득본 느낌도 들고.

 

의외로 약국, 도시락점, 북오프 세 군데만 돌아봐도 시간은 금방금방 흘러간다.

마츠에 시내는 버스가 그리 자주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 미리미리 이동하는게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30분 정도 일찍 버스를 타고 역으로 돌아와서, 떠나기 전 마지막을 기념하는 먹거리라도 찾아볼까 해서 역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좋아하는 라멘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고 만다.

 

사실 마츠에는 화과자 같은 전통 먹거리들이 유명하고, 라멘은 유명한게 별로 없다는게 정설이라서 이제껏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가게 앞에 붙어있는 고객의 목소리에는 '도쿄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맛있는 라멘 먹을줄은 몰랐습니다' 등의 글이 쓰여있어서 흥미가 동했다.

립서비스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이 '멀리서 들렀는데 의외로 맛있었다'는 내용.

마츠에가 라멘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맛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에 묘하게 신뢰감이 든다.

 

이곳의 메인은 닭육수에 소금으로 맛을 낸 시오라멘. 돼지육수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라멘과는 달리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인연맺기의 명소 이즈모 타이샤가 세워진 지역이다보니 이 라멘도 인연맺기 라멘이라고, 커플을 상징하는 흰색 분홍색 메추리알이 들어가 있다.

숙주나물과 짭짤한 죽순도 전부 근교에서 구입한 지역특화 상품이라고 하는데, 마츠에가 아직은 청정지역이니 좋은 포인트가 될 듯.

 

점심시간이라서 볶음밥 세트를 주문했는데, 볶음밥은 매우 평범하고 그저 그런 맛이다. 덤으로 딸려온다는 느낌에 딱 맞을 정도.

라멘은 확실히, 이 정도라면 맛없다고 한탄할 정도는 아니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이 목으로 넘어갈때 기분좋은 자극을 준다.

돼지 육수를 사용하는 다른 라멘들은 한국사람들이 먹기에 과하게 강렬하고 기름진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때는 이런 시오라멘이 재격.

죽순은 미리 소금에 절여놓은 녀석이라서 반찬 대용으로 먹으면 괜찮다. 아삭아삭한 숙주나물과 면을 함께 집어먹으면 궁함이 좋다.

가격도 크게 비싼편은 아니라, 마츠에에서 라멘이 고프다면 이곳에서 먹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만족한 케이스.

 

 

 

배도 충분히 채웠고 슬슬 버스시간이 다가오니 호텔로 가서 짐을 챙기기로 한다.

카메라 장비와 백팩을 들고 관광하러 돌아다니는건 꽤나 힘들지만

아마 유시엔 쪽에는 물품 보관소가 있을거라고 긍정적인 추측을 해 본다.

 

역 앞에 세워진 이 물 흐르는 기둥은, 표면에 묘하게 굴곡진 탓에 물이 0일정한 패턴을 형성하며 흘러내린다.

고속으로 찍으니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데, 삼각대도 ND 필터도 없이 장노출을 할 수도 없고.

 

 

 

짐을 챙겨 역앞으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시 하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한다.

이건 비가 올까 말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스트레이트한 자기주장이라서, 저 너머로 어마어마한 비구름이 올려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로써 이곳 여행하는 3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게릴라성 호우를 경험하게 되는데, 일기예보에서도 요즘 날씨가 참 이상하다고 멘트를 날리긴 하더라.

 

한국에서도 폭염과 태풍 때문에 말이 많은 여름이었지만, 그럴 경우 대체로 일본쪽이 한국보다 더욱 그 증상이 심한 편.

이쪽도 폭염과 폭우 때문에 사망자도 생기도 재산 피해도 꽤나 컸다고 한다. 여름이 지나가려니 이제는 게릴라성 호우가 출몰중이고.

하필이면 야외 정원 산책하러 가는데 저런 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그마한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좀 전까지만 해도 덥고 쨍쩅한 하늘이었으니, 지나가는 폭우라면 내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거라고 기대해 볼 수 밖에.

 

유시엔까지는 일본의 느긋한 버스속도로 운행해도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역시 그 속도로는 비구름에 금새 따라잡힌다.

버스 안에서 만나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는

창문을 전부 닫은 버스 안에서도 귀가 얼얼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천둥까지 뿌린다. 번쩍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폭발음이 들리는걸 보면 굉장히 가깝다.

슬쩍슬쩍 바닷가가 보이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옆에서 보기엔 시야가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폭우가 쏟아진다.

조금도 과장 보태지 않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 왜냐하면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밑의 도로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사분이 대체 어떻게 운전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 워낙 가까이서 내려치는 번개 덕에 마치 전장 한복판을 달리는 듯한 분위기.

 

 

 

유시엔에 내리는 사람은 세 명. 당연히 나를 포함해 젊은 한국인 커플 한쌍 뿐이다.

이런 폭우속에 야외 정원인 유시엔을 구경하러 내리는 사람들이란.

어차피 승선시간을 계산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페리가 기다리는 사카이미나토까지 가 봤자 의미가 없긴 하다.

가슴이 후련할 정도로 신나게 쏟아지는 비를 보니 오히려 엔돌핀이 분비되는 듯 하다. 저절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차피 유시엔에 배정한 시간은 충분히 남았고, 설마 3시간 가까이 비가 계속 오진 않으리라 생각하니까.

만약 정말 3시간 가까이 내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비오는 정원을 어떻게든 슬쩍 둘러보고 돌아가는 수 밖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조그만 식물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곳 통로를 지나면 바로 유시엔인데, 지금 가 봤자 의미가 없으니 벤치에 짐을 다 풀어놓고 비구경이나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중에는 번개가 내려치는 순간을 포착한 진귀한 녀석들이 있는데

타이밍만 잘 잡으면 정말 찍을 수 있을 만큼 번개가 가까운 곳에 떨어진다.

번쩍하고 나서 5~10초 정도 후에 우르릉 거리는 그런 번개가 아니라, 번쩍하고 1초쯤 되어 바로 귓전을 때리는 폭탄같은 굉음.

가까운 곳에서 번개가 칠때는 정말 온 하늘이 플래시 터트린것처럼 새하얗게 물든다. 아주 신선한 경험이라 즐겁다.

 

식물원은 지붕이 있으니 카메라 들고 두리번거려본다. 바깥에 내놓은 녀석들에게는 단비가 되고 있다.

식물원이라기 보다는, 동네 할머니가 손질하고 판매하는 조그만 꽃가게 같은 느낌인데

꽤나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런 걸 분재라고 하던가. 작은 공간에 큰 녀석을 오랫동안 길러서 자연상태처럼 나이먹어 보이게 한다는 취미활동.

 

당연히 원래 지면에서 자라는 것보다 영양도 공간도 부족하니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진 않는데

식물은 동물과 달라서 이런 식의 스트레스 요소가 오히려 수명을 연장시키기 때문에, 사실상 분재의 수명은 자연상태보다 더 길다.

일본에서는 500년 전의 분재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역시 인간의 취미활동이지 이녀석들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은 아니다.

 

 

 

오키나와에서 자주 보던 녀석. 암술로 보이는 부분이 두세 개씩 피어나는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도 본 기억이 날랑말랑 하는데 아직도 이름은 찾아보지 않고 있다. 이름 같은거 없어도 잘 클 녀석들이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바로 유시엔으로 이어졌다면 지금쯤 얼마나 생고생을 하고 있었을지.

비가 오니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우산 빌려쓴다고 해도 사진 찍기는 보통 고역이 아니다.

작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식물원 덕분에 심심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다를 떨면서 이런 화분을 사 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곳과 유시엔은 무슨 관계인지 조금 궁금하다. 버스 정류장 위치를 봐서는 이곳을 지나서 유시엔으로 가는게 정식 코스인데

그런 것 치고는 동네 아주머니가 열어놓은 평범한 가게같은 느낌. 적어도 관람을 위한 장소는 아니다. 대부분이 판매용이니까.

그런 반면에 번듯한 공공 화장실도 있고, 사람은 안들어 있지만 안내소를 겸한 사무실도 자리잡고 있는걸 보니 조금 애매하다.

 

애시당초 유시엔이라는 정원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냥 여행가기 전 볼거리를 슬쩍슬쩍 찾아보다가 눈에 들어왔고

위치상 페리 타기전에 들러보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찾아온 곳이니.

비가 그치고 나서 유시엔에 들어가더라도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곳이면 좀 아깝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뭐가 어찌됐든 이런 폭우 속에서 비를 피할 곳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

마츠에 시내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이런 빗속에서 제대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조금씩 약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버스 안에서의 폭우는 정말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쫄딱 젖었던 지난날보다는 훨씬 즐겁다. 일단 비는 맞지 않으니까.

탁 트인 농촌마을 하늘에서 쏟아내리는 비의 박력은 확실히 도시의 그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주위가 완전히 잿빛으로 변하는 것이 살짝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꿋꿋이 경고의 색을 발산하는 녀석이 더욱 돋보이는 장점도 있다.

언제가 되더라도 그치긴 그칠테니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마시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어쨌든 여행이라서 이런 것도 좋은 법. 평일 낮에 내리는 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란 것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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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바를 거뜬히 비운 다음 역쪽으로 걸어간다.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조금씩 피곤이 쌓일 즈음.

좀 전에 지나쳐 왔던 개미공방에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 젊은 커플손님이 안에 있어서 살짝 망설이기도 했다.

아트공방은 너무 시끄러워도 너무 조용해도 문을 열때 살짝 긴장감이 도는 느낌.

 

그래도 뭔가 재밌어 보이는 공예품들이 창문 너머로 보이길래 큰맘먹고 안으로 돌격한다.

 

 

 

주인장이 먼저 온 커플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팜플렛에 소개되어 있던 녀석을 먼저 살펴본다. 지인의 작품을 대신 전시해 주는 특별 기간인 듯.

 

다양한 종류의 나무조각을, 원본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정도까지 다듬은 후

눈이 동글동글한 새 한마리를 그려넣고 격언이랄것도 없는 짧은 문구 하나를 적어놓은 녀석.

사용법은 스스로 만들어 보시라고 적혀있다. 목걸이나 열쇠고리로 제격일 듯 한데.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사용해서 손의 감촉, 무게, 색깔, 향기 등이 꽤나 차이가 난다.

모양도 불규칙한데다가, 뒤에 적혀있는 글자도 랜덤성이 강해서 한참 보고 있어도 고르는 맛이 있고.

문득 제천 솟대박물관에 늘어서 있던, 자연 그대로의 나무조각만 모아서 완성시킨 솟대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하다.

도시에 살고 있으면 의외로 다양한 나무의 질감과 차이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 더욱 반갑기도 하고.

 

막 태어난 조카한테 부적 대신으로 하나 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한참동안 만지지도 못하겠지만

생후 첫 선물이니 나이가 좀 먹은 후에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역할은 할 것 같고.

똑같은 녀석이 하나도 없어서 약 30분 가까이 심혈을 기울여 계속 적당한 녀석을 찾아본다.

 

주인장 아주머니가 아마 좀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여간해서는 뭔가 딱 맞는다 싶은게 손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결국 크기나 모양, 색깔이 제일 무난하다 싶은 녀석을 고르긴 했다. 뒤쪽에는 'ゆっくり、ゆっくり' 라고 적혀 있다.

뜻은 여기서 해석하지 않아야지. 조카가 혹여 몇년 후 뜻을 물어본다면 가르쳐 주겠다.

 

 

 

사진 촬영 허락을 받고, 그리 적극적이진 않지만 조금씩이나마 대화를 시도해 본다.

전부 자기 작품은 아니고, 지인들의 작품도 정기적으로 전시를 한다고. 방금 전의 나무조각들은 친구의 작품이지만

앞의 유리선반 위에 올려진 나무 조각품들은 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풍경을 보면 느껴지겠지만 상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상품들과 공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듯한 느낌.

뭔가를 구입해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천천히 돌아보면서 분위기를 감상하는게 더 적합한 방법일 듯 하다.

 

 

 

여러가지 악세사리와 함께, 안쪽에는 가볍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다.

마침 손님도 나밖에 없어서, 주인장 아주머니와 커피 한잔씩 하면서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어 갈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설명하기 어려운 부담감이 계속 엄습해 와서 그냥 소심하게 몇가지만 슬쩍 물어보는 수준으로 끝나고 말았다.

 

개인공방이라는 게 참 푸근하고 정감있는 곳일텐데, 나는 이상하게 이런 공간에 발을 들이는데 조금의 긴장을 필요로 한다.

좋은 공방은 판매를 위해 전시된 제품이 아니라 공방 자체가 주인의 예술성을 주장하는 공간이라서

굉장히 폐쇄적으로 집필활동을 하는 본인 성격상, 왠지 쉽게 건드려서는 안될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기회가 있다면 혼자보다는 누군가 함께 오는 편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참동안 혼자 둘러보고 있으니 주인장 아주머니는 까페 깊숙한 곳에서 여러가지 나무조각에다가 뭔가를 만들고 계신다.

이번 여행에서 기념품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이곳은 몇개 집어가면 나름 괜찮은 선물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라서

먹는것 외에는 쓸일이 없는 자금을 조금 과감하게 투자해도 될 듯 하다.

 

 

 

조카의 생후 첫 선물로는 자연미 풍기는 위의 나무조각을 선택했고

줄 사람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 마음에 드는거 몇개 사 가면 언젠가 누구한테 줄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본 결과, 이 녀석들이 어쨌든 제일 귀엽고 앙증맞다. 이렇게 간단한 발상임에도 흉폭할 정도의 귀여움과 개성이 살아있다니.

 

여유가 아주 많았다면 종류별로 여러개를 사 오고 싶었지만, 아무리 단순해도 어쨌든 예술품의 일종이니 저거 한개에 내 밥값은 된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올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일단 이것 중에서 하나, 그리고 이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역시 훌륭한 조각품 하나를 구입.

 

아주머니께서 받침판 필요하시면 하나 가져가시라고, 동그랗고 넓적한 나무조각들을 여러개 보여주신다.

그냥 손바닥만한 나무줄기를 양파 썰듯이 잘라놓은 조각인데, 나무 공예품의 받침판으로는 딱이다.

이즈모의 지역특색이 살아나는 기념품은 아니지만, 이 부근이 예술로 유명한 곳이니까 이런 녀석들도 좋지 않을까.

이런 부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질 녀석들이 많아서, 왠지 지갑을 쥔 손이 두려워지는 느낌도 든다.

 

 

 

마츠에로 돌아가는 기차도 한시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괜히 시간낭비 하지 않으려면 돌아가는 기차 시간은 알아보고 가는게 좋다.

이런 말 하는 본인은 사실, 시간 남으면 앞에서 커피나 한잔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출발 5분전에 딱 맞춰서 도착.

 

일단 돌아가서 남는 시간을 좀 활용해 볼까 싶어서 전철에 올라탄다.

전철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고양이는 시마네현의 마스코트 시마네코.

왼쪽의 눈매 사나운 캐릭터는 '매의 발톱단'이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요시다군.

예산이 있다고 말하기에도 어색할 정도의 초저예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혼자서 감독, 연출, 성우, 작화 전부 다 도맡은 원작자 FROGMAN 의 고향이 이곳 시마네현이라서

전국적 컨텐츠가 극히 부족한 이곳에서는 꽤나 밀어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병맛넘치는 애니메이션을 시험삼아 한편. 참고로, 모든 목소리는 감독 혼자서 낸다.

 

 

 

 

 

전철 통로에는 시마네코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찍혀 있다.

특출날 것 없는 마스코트지만, 이런 소소한 곳에 인상을 꾸준히 남기는 것이 정석이겠지.

돈이 많은 쪽은 그런 마스코트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예 애니메이션까지 제작하곤 하지만

일본에서 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적은 시마네현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태로 노력하는게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한시간쯤 달려서 마츠에 역으로 돌아왔는데, 이쪽은 하늘 색이 영 심상치 않다.

일기예보란게 마츠에쪽에만 딱 들어맞는 녀석이었을까. 이즈모와는 그리 거리가 멀지도 않은데.

아무튼 어꺠에 살짝살짝 비가 흩뿌리는게 영 불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편의점보다 훨씬 저렴한 대형마트 이온(AEON)이 있어서 서둘러 그쪽으로 향한다.

이번 중국 시위대에게 박살난 그 이온 맞다.

 

도시락이나 음료수 전부 아껴봤자 300엔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이온에 가려는 건 그것때문만이 아니라

친구가 구해달라고 하는 게임소프트를 찾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워낙 시골이라서 그런거 없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센터에 물어보니 이곳 이온과, 다리건너 있는 전자제품 양판점 데오데오 두 군데가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일본만 가면 꼭 게임소프트 사달라고 하는데, 구할 수 있으면 구해주는게 어쩄든 나쁠거 없으니 발걸음을 옮겨본다.

날씨가 영 불안하긴 해도 이 정도면 맞아도 걸어가면서 말라버릴 정도의 가랑비라서 다행인데.

 

시골이라고는 해도 일단 시마네현 제1의 도시다보니, 이온 마트는 상당히 큰편이다. 건물 안애 영화관과 게임센터까지 있고.

전자제품쪽에서 찾아보니 친구가 찾는 게임은 신발매품이라서 이곳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감이로군.

허탕치고 그냥 돌아가기는 뭣하니, 지하 식품매장에서 먹을거 대충 사고 푸드코트에서 소고기덮밥 한그릇 먹는다.

여행이란게 중간중간 군것질 없이는 금새 배가 허해지는 녀석인데다, 일본은 음식 양이 적어서 그냥 삼시세끼로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

지금 소고기덮밥을 먹어도, 어차피 숙소에서 쉬다보니 입이 심심해질거라 생각하고 오징어다리와 맥주 한캔을 건져온다.

 

 

 

이온을 나오자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한다.

어제 비를 신나게 맞은 경험이 있어서 더 이상 맞고싶진 않은데, 일단 시간은 넉넉하니 그냥 기다려 보기로 한다.

일기예보에서 맑다가 갑자기 소나기라고 했으니, 기다리다보면 다시 맑아질 거라고 희망적인 예측을 하면서.

 

그래도 약 30분간 아주 신나게 내리는데, 기다리는게 지겹긴 해도 우산 사서 나가기는 싫다.

이쯤되면 거의 자존심 싸움으로, 어차피 버리고 가야 할 싸구려 비닐우산을 비싼 돈 주고 산다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다.

비싼것도 아니고 몇백 엔밖에 하지 않긴 한데, 한국에 비하면 비싸고, 그런데다 돈 쓰기는 이상할 정도로 싫다.

 

그래서 비 그칠때까지 사진이나 찍으면서 논다.

대도시 전자상가 근처에 밀집한 메이드까페란게 여기도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그 메이드까페란게 다른 곳에서 본 샤방샤방한 것과는 달리,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은근히 들어가려는 그렇고 그런 업소같은 분위기라서 더욱 놀랐다.

저게 메이드까페라고 쓰여있지 않으면 캬바레로 보이지 메이드까페로 보이나?

보통 메이드까페 앞에서는 메이드복장을 한 아르바이트생들이 호객행위를 하곤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벽화에 그려진 메이드마저 검은색 실루엣으로 표현해놓다 보니 이건 뭐...

 

 

 

비가 오니 한 곳에서 주변을 계속 살펴보게 되고

고정된 화각에서 오래 살펴보다 보면 문득 담고 싶을만한 요소들이 슬그머니 떠오를 때가 있다.

사진 담으러 다닐때 조급해서는 안되는 이유중 하나지만, 이렇게 빗줄기에 의해 억지로라도 멈춰지지 않으면

사람이란게 자기 마음을 그렇게 간단히 컨트롤 할 수 없는 종족인가 보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다지 싫지 않은데

결국 또 신지코 호수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아쉽다.

어제부터 계속 저녁에는 날씨가 영 좋지 않은데, 지금 상태라면 일몰을 볼 수 있을만큼 하늘이 맑아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

그냥 인연이 아닌가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까지 미친듯이 보고 싶은것도 아니니 기회가 되면 언젠가 볼 일이 있겠지.

 

자전거 여행중에는 아주 멋진 일출스팟이 있다고 누가 소개해 줘서, 큰맘먹고 거금 들여 그곳 앞의 호텔에 하룻밤 투숙한 적도 있었는데

특수한 여행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평범한 여행중에는, 똑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차이가 나는것 같다.

지금 자전거 여행중이었다면 신지코 호수의 일몰을 보지 못하고 통과하는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했겠지.

 

 

 

바람을 동반한 폭우라서 전신주가 재미있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비는 미친듯이 내리는데 정작 전신주는 한 쪽만 시커멓게 젖어있고, 반대편은 물기가 없이 깨끗한 것.

20분쯤 보고 있으니 서서히 반대편도 물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왠지 중세의 공성전을 생각나게 해서 재밌게 관전중이다.

 

저 반대편 전신주마저 완전히 젖어버리면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라서, 비닐 우산을 하나 구입해버릴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일듯 한데

묘하게도 30분쯤 내리던 비는, 아주 조금의 마른 공간을 남겨놓고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기회는 이때뿐이라고 생각하며 성큼성큼 진격.

 

 

 

그런데 하늘이 불쌍하다고 한번 던져준 기회를 또 이렇게 놓치고 만다.

비가 그쳤다고 열심히 걸어가다가, 강 건너편에 있다는 양판점에 결국 한번 가보자고 다리를 건너버린 것.

 

이온에서 숙소로 바로 걸어가면 15분쯤, 이온에서 데오데오에 들렀다가 숙소로 가면 30분쯤 걸린다.

사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거기엔 있을까 싶어서 결국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넓직한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는 도중 결국 인내의 한계를 드러낸 빗줄기가 다시 무정히도 쏟아지기 시작한다.

방금 전과는 달리 다리 한가운데라서 숨을 곳도 없다. 결국 어제 마츠에 성에서와 같이 쫄딱 젖어버릴 수 밖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그 비를 맞아가며 다리 위의 풍경도 한장 남긴다. 그냥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었으니.

다리를 건너면 바로 시민회관 비슷한 건물이 있고, 거기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이니 거기까지만 힘내기로 한다.

그래도 5분 넘게 폭우를 맞았으니 어제와 똑같은 꼴이 되고 말았지만.

 

 

 

간신히 지붕있는 건물로 대피했지만 또다시 30분간 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다.

방금 쫄딱 젖어가며 건너온 다리가 유독 길어보이는 느낌.

일기예보를 보면 분명 우산을 들고 다녀야 했지만, 카메라 장비때문에 우산은 워낙 거치적거릴 뿐이라

비가 오면 맞을 각오를 하고 나왔다. 하지만 진짜로 맞아보니 이건 이거대로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여기서 데오데오까지는 5분쯤. 데오데오에서 숙소까지는 15분쯤 걸리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를 맞으며 이동하기에는 여러가지로 힘든 길이다. 꼭 이렇게 하루 한번씩은 비에 얻어맞는 여행도 참 오랜만.

이렇게까지 애를 써서 왔는데,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찾을 수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참 맥빠질듯 싶다.

 

결국 이 비도 30분 정도 지나니 물러가는데, 여기서부터는 오래된 상가거리가 주욱 이어지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

역 주변의 오래된 상가거리는 천막으로 지붕을 줄지어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아서, 비가 와도 그 안을 잘 걸어가면 크게 문제가 없으니.

기대를 안고 데오데오로 들어갔지만, 이곳은 아예 게임기 코너가 존재하지 않았다. 크게 실망.

마츠에 시내의 관광지 한두군데는 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두 군데나 걸어다니 찾아본 게임소프트는 결국 꽝이었다.

게임을 살 수만 있었으면 젖어버린 옷과 머리카락도, 둘러보길 포기한 관광지도 다 흘려보낼 수 있었는데, 완전히 헛수고한 느낌.

하긴 이런 시골에서 최신 게임 사려고 돌아다닌다는것 자체가 좀 웃기는 일이긴 했다.

친구도 없으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부탁을 받은 쪽에서 성의없이 찾아보기는 힘들고.

 

답답한 가슴은 비닐봉투 안에 든 캔맥주 한병이 해결해줄거라 믿고, 어둑어둑한 구 상가거리를 지나서 숙소로 돌아간다.

내일은 귀국행 페리를 타는 날이지만, 출발이 저녁 7시라서 아직 여기저기 둘러볼 여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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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본전이 공사중이라 의지가 한풀 꺾인 이즈모타이샤보다는

주변 풍경이나 느긋하게 감상하면서 천천히 산책해 보기로 한다.

입구에서 본전까지는 꽤나 먼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이 정자같은 휴게소는 입구 바로 옆에 위치.

 

휴게소 앞에 묘하게 넓은 공터가 있는데, 주차장은 아니다. 아마도 간단한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 아닐까 싶다.

날씨도 무지 덥고 해서 쉬어가는것도 나쁘진 않은데, 이미 1시간 넘게 기차타고 왔으니 휴식은 충분히 취한 것 같다.

어제 하루종일 머리를 괴롭히던 멀미도 싹 사라져서 기분도 괜찮고.

 

 

 

일본엔 신사가 워낙 많이 세워져 있어서 뭐라 비교하기는 힘든데

이곳 이즈모타이샤는, 이름 알려진 유명 신사 중에서는 그렇게 큰 규모가 아닌듯 하다.

 

신사 바깥 상점가 -> 신사 정문 -> 본전 앞까지 완전히 일직선으로 쫘악 이어져 있는 모습은 굉장히 독특한 경우.

규모가 큰 신사는 보통 본전으로 향하는 통로가 나무와 이끼에 둘러쌓여 좀 어둡고 습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여기는 환경이 그런건지 일부러 그렇게 만든건지 길도 넓고 시원시원하다.

 

유명 관광지 치고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데, 9월에 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곳이 가장 붐비는 시기가 바로 옆 10월이기 때문에.

 

일본의 신토는 어떤 것에든 신이 깃들어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데, 그 수많은 신들을 '八百万'이라 쓰고 야오요로즈(やおよろず)라고 부른다.

실제 신의 숫자가 8백만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냥 무수히 많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는 매년 10월에 한번씩 일본 전국의 모든 신들이 이곳에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10월을 '신이 없는 달'이라고 하는 '칸나즈키'(神無月)라 하는데

이곳 이즈모 지역만은 10월을 '신이 있는 달'이라는 뜻의 '카미아리즈키'(神在月)라고 부른다.

 

그 신들이 모이는 이유가 남녀간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한 서류작업(?)이기 때문에 이곳은 인연맺기 신사로서 유명한 것.

 

 

 

물론 그리스신화가 알아서들 사랑과 전쟁을 연출해주듯이

이곳 신화 이야기도 사람들이 여기저기 만들어내고 살을 붙여서 풍성해진 것.

 

실제로 칸나즈키(神無月) 라는 단어 중간의 '無' 라는 단어는, 고어에서 'の'를 대체해서 쓰는 한자어였고

'の"라는 단어는 '~의'라는 뜻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이 없는 달이 아니고 '신의 달'이라는 해석이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이즈모 신사의 비상한 머리를 가진 누군가가 후대에까지 내려오는 멋진 마케팅 포인트를 만들었다는게 현실적인 해석일까.

 

덤으로, 10월에 모든 신이 이즈모에 모이는 것도 아니고, 집지키는 신이 가끔 남아있기도 한단다.

대체로 칠복신중 어부와 상인의 신인 에비스(恵比寿)가 집지키는 신으로 일컬어지는데,

어업과 상업의 중요성과 결부시켜보면 은근 현실적인 설정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어업이란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위험한 직종 중 하나이고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현대에서도 진수식에 와인을 깨트리는 등, 여전히 미신에 의존하고 싶을 만큼 운이 따라야 하는 편이니까.

 

 

 

세력이 큰 신사는 원래 마케팅을 위해서 자신만의 특징을 잘 부각시키는데

의외로 손발이 잘 맞아서, 지주격의 신사들이 각자 그 설화 혹은 신화들을 잘 조합시켜준 결과

일본인이라면 계절별로 각 지방의 신사를 여기저기 찾아가는 식의 여행도 즐길 수 있다.

 

새해 첫날에는 이세신궁에서 일출 보기, 5월에는 아사쿠사신사에서 축제, 10월엔 이즈모타이샤에서 인연맺기 참배 등등.

상업적인 아이디어가 먼저인지, 그냥 그렇고 그런 이야기에 상업적인 향기를 덧입힌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에 동조해주고 자동차로 5~6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서까지 타 지방으로 여행가고, 숙식비와 선물비를 뿌리고 돌아오는,

사람으로 치자면 혈액순환이 골고루 잘 돌아가도록 움직여주는 시민들의 행동 덕에 지방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은 참 부럽다.

 

사실 중국과 한국등의 동양인들에게 신사라는 개념은 그리 신기한 관광지가 아니라서,

그냥 주변 풍경과 신사 모습만 슬쩍 보고 사진찍고 돌아오면 이게 외국까지 가서 돌아볼 곳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이런 곳을 재미있게 보려면, 자국인들이 이렇게 찾아오는 이유와, 거기 얽혀있는 소소한 이야기와 지방 특색을 알아보는게 좋은 방법인 듯.

 

알면 알수록 여행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말에는 사실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냥 가서는 별 재미가 없는 곳에 한해서, 즐길만한 요소를 따로 생각해 보는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신사 쪽으로는 별로 진행하지도 않았는데, 주변 풍경이 계속 눈길을 끌어서 걸음이 더뎌진다.

돗자리와 도시락 잔뜩 싸들고 그늘밑에 누워서 책읽으면 천국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 많다.

 

도쿄 내부 신사는 그런 곳이 많아서, 휴일날이면 이런 곳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천혜의 풍경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람은 왠만해서 찾아보기 힘들다.

 

애초에 타지에서 이곳까지 오는 관광객은, 저기 누워서 시간 보낼 여유라는게 별로 없기도 하겠지.

시간과 돈을 들여 관광지에 왔으니 열심히 못보던 것들 구경해야 하는데 저곳에서 한나절을 보내기엔 좀 아까울 듯.

그리고 이곳 지역민들은, 학교 소풍때야 오겠지만 굳이 이곳에서 누워있을 필요도 없다. 원래가 시골마을이라서.

 

 

 

그래도 한동안 살짝 고민하게 만드는 그늘 밑 벤치.

카메라 가방 내려놓고 전자책좀 읽으며 바람에 땀을 식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1시간 넘게 기차타고 와서 걸어다닌지 15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퍼질러진다는 건 좀.

자전거 여행중 방문했다면 아마 신사 구경은 저리 넘기고 저런 곳에서 3시간쯤 휴식을 취했을 듯 하다.

 

사실 크게 볼거리가 없는 이곳을 굳이 방문한 이유는, 지난 번 자전거 여행때 불의의 사건으로 가 보지 못한 곳이기 때문.

겨울을 오키나와에서 보내고 3월에 다시 큐슈로 돌아와, 시모노세키 해협을 건너고 야마구치현으로 들어온 것이 3월 초순.

3월이라고 해도 여전히 초겨울 날씨라서, 야마구치현의 토요코인에 들어와 무료 카레를 먹으며 체력을 보충하고

이제 슬슬 달려볼까 싶어서 준비하던 3월 11일의 화창한 오후.

 

호텔 로비 TV에서 긴급 방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뭔가 좀 크게 났구나 싶은 정도였지만

15분 후 생중계되는 지옥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일본의 지인들과 한국의 가족들에게 급히 전화를 돌렸다.

너무 빨리 전화를 하는 바람에 엄니께서는 뭔 일인지 전혀 모르고 '그려 알았다'라고만 대답하셨는데

막상 그 후에 TV 중계를 보고 나서는 사색이 되어 나한테 전화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국제회선이 마비된 후.

 

급히 로비에서 숙박을 연장하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에서야 지나간 일이지만, TV에서 흘러나오는 긴급방송 외에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던 답답한 상황이라서

무턱대고 출발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애초에 도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이게 진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싶은 영상이 흐르고, 며칠간 오키나와에서 함께 했던 일본인 라이더들이

마침 후쿠시마 주변을 달릴 시기라서 연락을 해 봐도 닿지 않는다. 그야말로 패닉 상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오직 TV와 인터넷의 불확실한 정보만을 눈이 빠져라 찾아가면서

약 10일이 넘도록 계속 호텔에 처박혀 고민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도쿄까지는 돌아가겠지만 북쪽 루트를 타기는 힘들다는 것.

야마구치현에서 남쪽 해안가 루트를 타면 큰 도시도 많고, 한번 지나와본 길이라 무난히 도쿄까지는 돌아가겠지만

북쪽 해안가 루트는 일본에서도 이름난 시골동네가 대부분인데다, 어차피 쿄토 근방에서 남쪽 루트로 내려가지 않으면

그 이후부터는 어마어마한 산맥을 넘거나, 지진으로 개발살이 난 후쿠시마쪽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었기 때문.

 

지진과 원전 상태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라고 판단된 이상

도쿄에 돌아가는 것조차도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1년간의 자전거 여행을 여기서 끝낼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곳 시마네현과 돗도리현을 포기하고, 원래 왔던 남쪽 해안가 루트를 타고 도쿄로 돌아간 추억이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참동안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깨끗히 잊어버렸지만

역시 한번 기회가 생기니 그때 지진때문에 가지 못했던 이곳에 대한 아쉬움이 점점 커지는 바람에

이렇게 배타고 와서 그때의 심란했던 마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있다.

 

그때 왔었다면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을 저 벤치가, 그렇기 때문에 낯설게만 보이지 않는다.

 

 

 

신사 바로 앞까지 왔는데, 뭔가 힘좀 준듯한 조각상이 서 있다.

주인공은 이곳 이즈모타이샤에서 모시는 신이자, 일본 신화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오쿠니누시노오오카미(大国主大神)이고

파도 위에 보이는 드래곤볼(?)은 말 그대로 신의 힘을 구체화시켜 표현한 것이고

저 구슬을 얻음으로서 오오쿠니누시는 인연을 맺어주는 힘을 가진 신으로 격상되었다고 한다.

 

 

 

왜 인연을 맺어주는 신이 되었는가 하면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아주 귀찮을 정도로 일본 신화에 대해 깊게 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패스.

 

나처럼 일본쪽 전공한 사람도 아닌, 일반 블로거들이 그렇게까지 일본 신화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본의 3대 신에 들어가는 타케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建速須佐之男命)의 딸내미를 갖은 시련끝에 얻어서 결혼한 인물이기 때문.

 

요즘엔 스사노오라고 간단하게 불리는 이 신은 한반도에서 찾아와 정착한 세력을 신격화한 것이고

그의 행적과, 딸이 오오쿠니누시와 결혼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당시 정치상황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나 마찬가지.

따라서 이걸 파고들어간다는 건 상당히 학술적 시점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신화에서의 스사노오는 괴물퇴치도 하고, 일본 신중 대빵인 아마테라스를 이지메해서 쫓아버리기도 하는 등, 폭력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당시 한반도에서 건너온 세력에 대해서 중앙정부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가가 신화의 이름으로 표현되어 있다.

딱 이정도만 알고 있어도 이즈모타이샤 구경에는 지장이 없을 듯.

 

 

 

아무튼 신화의 내용에 맞춰서 이곳은 인연을 맺어주는 신사로 유명해졌으니

이곳 사람들은 저 핸섬남에게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듯 하다.

 

당시 일본에서는 현대와 같은 결혼식보다는, 그냥 마음에 드는 여성을 밤에 보쌈해가는게 결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요즘 세상에 좋게 해석하자면, 이성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정도로 묘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진짜 보쌈해가는 사람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사진을 찍을때 가능하면 사람이 안나오게 찍는 성격이기도 하고

실제로 다른 유명 신사에 비하면 좀 조용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마츠에에 도착한 이후 가장 사람이 많이보이던 곳이다.

약간 우충중한 느낌이 드는 다른 유명 신사보다는 훨씬 화사한 분위기라서

정말로 커플들끼리 오면 좋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처럼 그냥 놀러온 사람이야 에마(絵馬)같은데 소원을 적거나 할 필요도 없지만

커플들끼리 오면 뭔가 의무감 떄문에라도 멋진 소원 적어야 하지 않을까. 연애란 것은 적당한 과시와 허세도 필요하니.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이 신사를 지탱하는 귀중한 수입원이 될 것이고.

 

왠지는 모르지만 이곳 나무들이 자꾸 옆으로 누으려는 경향이 있는 듯, 지지대로 받쳐놓은 곳이 꽤 많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인연맺기 신사이다 보니 어쨌든 누워보려는 것일까 하고 낭만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마츠에도 물론 맑은 공기를 자랑하긴 하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청정지역이기 때문에, 쏟아지는 햇살과 시원한 솔내음 풍기는 공기를 열심히 흡입하는 것만으로도 만족도가 상승중.

 

기온은 33도까지 올라가서 꽤나 괴롭긴 하다. 줌렌즈는 망원밖에 없고 나머지는 전부 단렌즈라서

구도에 맞게 렌즈 갈아끼우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막상 이곳까지 오니 공사중이라서 꽉 막혀버린 본전 때문에 약간 의기소침하다.

 

옆쪽으로 돌아가서 살짝 나있는 창문 틈으로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보려는 사람들도 있고.

위에서 밝혔듯이, 이번 여행은 이즈모타이샤 때문이 아니라 자전거 여행의 미련을 풀어버리기 위한 여행이기 때문에

사실 본전이 보이나 안보이나 별 상관 없다. 그거 못봤다고 훗날 다시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늘이 조금 펼쳐진 벤치 앞에 앉아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그 앞에는 왠지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털을 고르는 중이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도 신기한듯 한번씩 비둘기들을 바라보고 가지만, 이 녀석들은 본 척도 하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러는걸까 궁금하지만, 괜히 다가갔다간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고 해서 그냥 사진이나 담아본다.

 

20년전의 일본 신사에는 흰 비둘기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엔 흰 비둘기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게 약간 아쉬울 따름.

 

 

 

잠깐 땀만 식히고 일어날 요량이었는데, 이녀석들이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니 그냥 눌러앉기로 한다.

느긋하게 털고르고 있는 녀석들과는 달리 이 혈기넘치는 수컷은 한창 넘치는 정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

 

목의 화려한 털부분을 힘껏 부풀리면서, 아파트 창문에서 익히 들어온 구애의 노래와 함께 암컷을 따라다닌다.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할 정도로 열심히 구애를 하는데, 암컷은 보지도 않고 매몰차게 자리를 피해버리는 중.

두세 마리의 암컷에게 똑같이 차이고 나서 조금 낙심하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암컷 따라다닐때의 목 주변은 정말 두툼하고, 햇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색을 자랑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인연 맺기가 힘든 듯. 하필이면 인연맺기의 전당 이즈모 타이샤에서 신나게 차이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다.

 

쟤네도 머리는 있는지, 몇번 차이고 나니 그냥 단념한 듯 혼자 서서 털이나 고르고 있다.

우측 상단에 보이는 암컷이 이 녀석을 차버린 녀석.

비둘기한테 발정기라는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암컷 녀석은 그냥 쉬고 싶을 뿐인가 보다.

 

에마에다가 '저 비둘기들이 새끼 쑴풍쑴풍 낳도록 해 주세요'라고 빌고싶은 마음이 조금 드는둥 마는둥 했지만

내가 내돈내면서 저 녀석들 인연을 빌어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앞서는 바람에 그냥 안스러운 눈길 한번 주는걸로 끝낸다.

 

 

 

30분쯤 그늘에 앉아서 비둘기 구경하는 재미로 보냈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차례로 돌아다니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본다.

이곳의 중요한 이벤트는 대체로 10월에 열리기 때문에 지금은 꽤나 조용한 편.

특히 본전이 내년까지 수리중이라 올해는 꽤 차가운 한해가 될 것 같다.

 

신사 내부에서 볼만한 건물은 현재 저 앞의 배전밖에 없고

좌측에는 결혼식장으로 쓰이는 카구라전(神楽殿)이 있어서, 아마 그쪽이 여기보다 더 볼만한게 많을 듯 하다.

본전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신사 치고는 규모가 꽤나 아담한데, 그와 반대로 건물 상태는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다.

규모보다는 질을 우선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풍경이 되려 이질적일 정도로.

 

신화를 간직한 의미있는 곳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느낌이 훌륭하다고 할 수도 있을 듯.

바닥을 보면 알겠지만, 단정한 통로 위에는 그 옆의 자갈조차 올라와있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관광객들도 왠지 큰소리로 떠들지 못하고 조금 조용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림같은 풍경은, 그림으로 볼때는 훌륭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보면 살짝 위화감이 든다고나 할까.

 

 

무료 조식이 아침 7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좀 느긋하게 먹으려고 미리 준비하다가 7시에 내려갔는데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 넓지 않은 로비 식당이 가득가득 차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

 

대체 마츠에라는 한적한 도시에 왜 이리 사람이 많은건지 싶을 정도.

태반이 일본인이고 한국인 몇쌍, 중국인 몇쌍 정도인데, 관광이 아니라 업무차 온 듯한 사람도 많다.

나이 지긋한 팀이나 젊은 팀이나 정장에 어두운 색 넥타이 매고 신문 끼며 아침먹고 있으면 관광객은 아니겠지.

 

관광객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즈모타이샤 덕분인지 붐빌때는 꽤나 붐비는 곳이라서

시내 주변에 숙소가 상당히 많기는 하다. 아주 저렴한 여인숙 레벨에서 괜찮은 관광호텔까지.

한국은 어지간한 대도시라도 관광호텔 or 러브호텔 정도의 선택권밖에 없는데,

그래서 일본서 놀러오는 사람들이 인터넷 호텔 예약대행 사이트를 통해 예약하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설명은 번지르르한 일반 호텔로 해 놨는데, 실상 가족들과 가 보면 러브호텔인 경우가 많아서.

 

비지니스호텔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탓도 있고, 한국사람 기준에서 보면 좁아터져서 장사 되겠나 싶은 토요코 인도

서울에 단 한곳 있는 동대문점은 빈방 한번 잡기도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객실 소화율을 자랑한다.

 

아무튼 줄서서 기다리며 간신히 조식 때우고, 방 안에 들어가서 날씨정보를 다시 찾아본다.

찌부둥하고 비오는 날씨라면 근처 미술관이나 공방 같은 곳을 돌아보려고 생각중이었는데

의외로 하늘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다. 아침부터 에어콘이 필요할 정도로 날씨도 덥고.

일기예보에서는 '맑아도 결코 주의를 늦추지 말지어니'라고 예언해주시는걸 보면, 어제같은 소나기가 쏟아질 듯.

 

어쨌든 이런 하늘이고 하니, 갈까말까 고민하고 있던 이즈모타이샤에 가보기로 한다.

인연맺기 신사라서 나하고 별로 관계는 없는 곳인데다가, 본전이 공사중이라서 볼게 별로 없긴 하겠지만

날씨가 괜찮으니 야외 나들이 하는 겸 해서. 중간에 비가 쏟아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이즈모타이샤는 마츠에 옆 마을 이즈모 시에 있고, 마츠에 역에서 JR 이즈모역 가는 전철을 타도 되긴 하지만

상당수의 관광객은 마츠에 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 마츠에 신지코 온천역에 도착한 다음, 사철인 이치바타(一畑)선을 탄다.

왜냐하면 본인이 사용중인 퍼펙트 티켓을 포함해서 상당수의 할인 티켓들을 JR 에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퍼펙트 티켓이 있으면 여기까지 가는 버스도, 이치바타 전철도 모두 무제한 사용가능하다. 타지 않으면 손해.

이즈모타이샤에 갈 예정이라면, 공항이나 항구에서 마츠에 시까지 왕복, 이즈모타이샤 왕복 이 두가지만 해도 본전 뽑는다.

거기다 마츠에 시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지 않을리가 없으니 당연히 필수적으로 구입해야 할 티켓.

 

신지코온천역에 도착하니 열차 출발까지는 40분쯤 남아있어서, 그동안 주변 산책이나 하기로 했다.

내부는 아주 아담하지만 외부 모습은 꽤나 멋들어지게 꾸며놓은 역을, 간만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담아본다.

며칠동안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해서 조금씩 우울해져가는 참이었는데 왠지 셔터를 누르고 나니 후련하다.

 

 

 

역 이름이 신지코온천인 만큼, 이곳에는 온천이 여기저기 많다.

역 앞의 무료 족욕탕에 한번 담궈볼까 싶었지만, 오전 10시인데 기온이 30도 가깝다. 지금은 무리.

자전거 여행때 지친 몸으로 무료 족욕탕에 들어가면 그냥 천국이었는데

평범한 관광객 흉내를 내고 있는 지금은 그다지 땡기질 않는다.

 

 

 

자고로 괜찮은 온천이 있는 곳은 괜찮은 숙소도 따라오는 법.

마츠에 역 주변의 호텔은 그냥 적당적당히 쉬고 가는 느낌이 들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 있는 호텔은 제대로 된 관광호텔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온천도 그렇고, 창가에 신지코 온천의 풍경이 펼쳐지니 당연한 일이겠지.

 

신지코(しんじ湖) 호수는 지금의 마츠에가 존재하게 해준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

일본에서 7번째로 큰 호수로, 동서로 길죽한 모양을 하고 있어 마츠에 뿐만 아니라 지금 향하는 이즈모까지도 주욱 이어진다.

둘레 47km 의 기다란 형태라서 얼핏 보면 강처럼 보일 정도로 큰 녀석.

 

특히 버스타고 30분만 달리면 바다가 보이는 지형이니, 이곳 신지코 호수는 해수와 담수가 섞인 기수호로 유명하다.

기수호들은 해수어와 담수어가 모두 활동하는 곳이라서 영양과 자원이 풍부한 편.

마츠에를 포함한 시마네현의 큰 도시들은 다들 이 신지코 호수의 축복을 받아서 자라난 곳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도시 인근 기수호들의 문제점이기도 한 부영양화가 심각하게 진행중이라서 요즘 좀 위태로운 상황.

 

 

 

예전처럼 소박하게 살아가기에는 어디 하나 부족함없는 호수였지만

도시가 발달하면 할수록 기수호의 특징인, 영양은 풍부한데 물흐름이 나빠지는 현상이 더욱 심각해져서

곳곳에 녹조 현상도 심해지고 어획량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의 100경에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신지코 호수의 일몰 모습은 가히 예술작품을 방불케 하는데

막상 뜨거운 아침 햇살에 반사되는 녹조라떼는 괜히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곳은 별로 심한것도 아니고, 신지코에서 무수히 뻗어나와있는 조그만 지류들은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한 곳도 있다.

마츠에 시는 공업화된 곳도 없고, 특별지정구역으로 선정되어 중점관리를 받고 있을만큼 자연보호에 열성적인 곳인데도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 세계적 규모의 환경변화의 두 난점에는 여전히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깔끔하고 조용하고 길게 늘어선 산책로를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40분이란 이렇게 돌아다니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열차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에 멀리는 못가겠다.

 

 

 

생긴건 강처럼 보여도 역시 호수는 호수.

흐름의 역동성이 느껴지는 강과는 달리 이렇게 넓고 긴 녀석도 강에 비하면 잔잔하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마츠에 시에서 가장 높은 녀석. 사실 한국 기준으로는 동네 아파트보다도 낮은 녀석이지만

저 위에서 바라보는 신지코 호수의 일몰이 꽤나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의식이긴 하지만 사람은 자연의 모습에 영향을 받는다는 느낌이 이곳에서도 든다.

마치 DNA처럼, 강 주변의 마을 모습과 호수 주변의 마을 모습은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듯 하다.

서울의 한강이나 대구의 신천에서 느끼는, 사람의 등을 떠밀어 주는 듯한 방향성의 힘과는 반대로

이곳에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진정제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강변공원과 호수공원의 모습이 다른 것과 비슷한 맥락인 듯.

 

이곳은 아침에 산책삼아 한 바퀴 돌 수 있는 그런 크기가 아니라서, 호수의 잔잔함과 함께 묘한 박력이 느껴진다는게 특이하긴 하다.

 

 

 

지금 와서는 신지코 호수의 어획량이 마츠에 시에 미치는 경향이라는 거 꽤나 줄어들긴 했지만

이곳에서 손에 꼽는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니, 관광 자원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이곳의 부영양화는 주민들의 골치거리다.

 

한국처럼 처음부터 물을 죽여버릴 생각으로 녹조라떼를 인공 생산해내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지만

기수호의 부영양화는 이렇다 할 정도로 딱부러지는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답답할 듯.

 

광각 단렌즈로 사진을 찍다가, 저 녀석 한장 담아보려고 땡볕 아래서 망원렌즈로 갈아끼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다.

귀찮지만 담고는 싶고, 담으려면 가방 내려놓고 렌즈 갈아끼워야 하니.

 

 

 

잠시 호수 구경을 하다가 역으로 돌아가려는데, 낮익은 조각상이 보인다.

마츠에의 문호 코이즈미 야쿠모의 '괴담'집에서도 가장 유명한 '귀 없는 호이치'의 조각상.

 

귀 없다는 말을 들으면 대강 짐작은 다들 할 수 있을거라 생각.

귀신을 쫓는 불경을 온 몸에 적다가 귀에만 깜빡 잊어버려서 귀가 없어져 버린다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신지코 산책로를 걸으면서 이렇게 코이즈미 야쿠모의 향기를 느끼는 것도 즐거운 이벤트인 듯.

왼쪽에 보이는 녀석이 마츠에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관광호텔인데, 여기서 묵으면서 석양 바라보고

호수 산책하면서 이런 조각상들과 조우하고... 이런 호화스러운 여행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어디든 그렇지만, 이런 관광호텔은 나같은 1인 손님을 위한 시설이 없어서 거의 불발되곤 하지만.

 

 

 

적절한 시간에 돌아오니 전철이 대기중이다.

돈이나 표를 준비할 필요없이 퍼펙트 티켓만 스윽 보여주고 개찰구 통과할 때의 묘한 만족감.

 

창가에 적힌 단어는, 발음 그대로 옮기자면 '완만'(ワンマン)이다.

처음 봤을때는 완만하게 움직이는 열차인가 싶기도 했는데, 저게 한국어도 아니고.

저 단어는 영어 One Man 의 일본식 발음. 열차가 작아서 승무원이 한 명밖에 타지 않는다는 의미다.

승무원이 한 명이라는 뜻은 바꿔 말하면, 운전수가 없이 운행할 수는 없으니 승무원이 운전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예전 방식의 전철도 여전히 운행중이고, 거리별로 운임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라서

나갈 때 요금을 정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맨 열차가 다니는 곳이 대부분 인적 드문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가는 곳이 무인 역인 경우, 운전수가 직접 운임을 열차 안에서 받아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름 관광객이 타긴 했지만 그래도 널널한 내부 모습.

원맨열차라고 적혀있긴 해도, 이 노선은 대부분 관광지쪽으로만 이어져 있기 때문에

간략한 소개를 위해서인지 여성 승무원이 한명 더 타서 가이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완전히 자동화 되어가는 열차보다는 역시 조금이라도 사람냄새 나는 편이, 특히 관광지에서는 더욱 필요할 듯.

녹음된 안내방송은, 아무리 사람의 목소리라고 해도 결국 기계가 만들어내는 음성표식일 뿐이다.

 

이 열차는 이즈모타이샤까지 직통으로 운행되는 녀석이 아니라서, 중간에 갈아타야 하지만

그 역에 내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즈모타이샤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연게플레이는 완벽하니 걱정할 것 없다.

 

전철 안에서는 카메라 잘 꺼내지 않는데, 한참동안 신지코 호수를 끼고 달리는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한장 남겨본다.

이게 정말 호수인가 싶을 정도로 징하게 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니 살짝 감상적인 기분도 들고.

이 전철은 아주 노후된 녀석으로, 운전시 소음이나 흔들거림은 요즘 한국에서 체험하기도 힘든 수준이지만

창밖에서 흘러가는 느긋한 신지코의 모습이 함께하니, 최신 설비의 전철보다 더욱 친근해서 기분이 좋다.

본인은 철도 매니아는 아니지만, 아마 매니아들도 이 노선을 신형 전차로 바꾸는데는 반대할 거라고 생각해 본다.

 

약 50분쯤 달리면 도착하는 카와토(川跡)역에서 대부분의 승객들이 하차한다.

이즈모 시 주민이 아닌 이상, 이즈모타이샤로 가려면 이곳에서 갈아타야 하기 때문.

하차하면 선로 하나를 건너서 정차되어 있는 전철로 갈아타면 되는데

나이 지긋한 역무원들이 이미 선로 위에 서서 수신호로 안내를 하고 있다.

 

요즘들어 한국 전철의 무인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데, 돌발 상황에서는 절대로 인간의 판단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유 외에도

사람이 서서 길을 안내해 준다는 행위가 얼마나 든든한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경제 논리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무인화가 더 이득이겠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산업혁명때 죽어간 10세 소년들 역시 당연한 것이겠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서 역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일변한다.

소박하고 아담해 보이는 모습은 얼핏 비슷하지만, 관광지로서 정비된 모습이 금새 느껴진다.

DSLR 이 점점 사라지는 요즘에, 의아하게도 중급기쯤 되어보이는 DSLR을 든 사람들이 꽤나 많아서

이즈모타이샤가 그렇게 대단한 곳인가 하고 여러가지 추측을 해 봤는데

 

그 사람들은 사실 이곳에 전시중인 열차를 찍으러 온 것이었다.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건너편에 있는 열차로 달려가더군.

철도 역사가 긴 일본에는 매니아들도 많은데, 이곳은 이즈모타이샤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철도 매니아들에게도 성지.

옆에 서 있는 전철은 매우 예전 것으로, 이곳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전철이 아닌가 싶었다.

 

철도 오덕들이 열심히 사진찍는 모습에,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기도 하고 철도에는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서 그냥 나왔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이즈모타이샤마에(出雲大社前)역인데, 이 건물 역시 성지.

1930년 만들어진 이후 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재중 하나다. 물론 보수공사야 많이 거쳤지만.

옆에는 까페도 하나 붙이고, 조금 현대적인 모습으로 단장을 했지만 그래도 유서깊은 녀석 때려부시지 않아서 다행.

 

이즈모타이샤가 워낙 오래전부터 유명한 곳이기도 했고, 이 역이 들어설 당시엔 일본 도로사정이 워낙 좋지 않을 때라서

철도가 일본 교통의 희망으로 한창 떠오르던 시절이었으니, 자국의 매니아들에게는 성지순례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구 타이샤 역이란 곳도 있어서, 철도 매니아들은 이즈모타이샤보다 그쪽을 더 중요시하기도 한다.

 

 

 

유명한 관광지라도 시원깔끔한건 여전하다.

특히 유명 신사 주변에는, 미관상 문제도 있고 해서 높은 건물을 보기 힘들기 때문에

아담하게 늘어선 건물들이 더욱 인상깊게 다가온다. 이런 곳에 돈 된다고 고층 빌딩 세워놓으면 그 얼마나 흉하게 보이려나.

 

느긋하게 신사 쪽으로 걸어가며 가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느 팜플렛에 우연히 눈이 간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기념품같은 모습이었는데, 그 자연스러움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서 일단 팜플렛을 가져왔다.

Ant Works Gallary 라는 공방으로, 이즈모타이샤와는 반대방향에 위치한 곳. 돌아올 때 들러보기로 한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신사 중 한곳인데, 의외로 그렇게 사람이 많지는 않다.

약간 이른 시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평일인 탓도 있을 듯 하지만

진짜 이유가 따로 있긴 하다. 그건 다음 포스팅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입구는 다른 신사와 별다를 것 없는데, 지금껏 걸어오면서 본 모습과 함께 생각하니

주변 건물들의 풍경도 그렇고, 그 깔끔떠는 일본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정돈된 느낌이 든다.

애초에 이곳 마을이 이렇게까지 성장한 것도 이즈모타이샤 하나 때문이었고

이치바타 전철이 따로 이곳까지 선로 하나 만들면서도 '타이샤 관광객만으로도 운영가능하다'라는 판단을 했을 정도로

굉장한 위세를 자랑하는 신사였으니, 주변 모든 주택과 상가도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

 

일본의 어지간한 곳은 많이 둘러봐서 별로 놀라지 않는 본인도

이즈모타이샤 급의 유명 신사 주위가 이렇게까지 잘 정비되고 깔끔하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다.

이건 쓰레기가 떨어져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보도블럭과 도로 아스팔트조차 흠집하나 없어 보이는 수준.

이곳 정문이 살짝 언덕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곳에서 길게 늘어선 상점가를 보면 굉장한 계획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냄새 풍기는 쪽이 좋은데

이쯤되면 신사 내부를 기대해야 할지, 상가 거리에서 사람냄새 나는 곳을 찾아봐야 할지 살짝 고민도 해 볼만 하다.

지나오면서 본 바로는, 이곳 상점가엔 아트 공방도 많고 신화 관련해서 여러가지 이벤트도 벌어지고 있어서

어쩌면 본전도 수리중이라 못 보는 신사보다, 주변에서 더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듯 하다.

 

일단 날씨가 화창할 때 열심히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정문을 통과한다.

정말 운이 좋아서 이 날씨가 지속된다면,  저녁 일몰을 마츠에 현립미술관에서 감상할 수도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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