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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버거'에 해당하는 글들

  1. 2015.04.20  대마도 - 이즈하라 3편 4
  2. 2013.01.07  도쿄 산책 - 관광, 식사, 그리고 쇼핑 18

 

돌아가는 길에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다들 새롭다. 지나칠 만한 일상적인 모습이라도 일본틱한 분위기를 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뭘 심어놔도 무럭무럭 자라는 곳인지 눈을 두는 곳 어디든 잔잔한 녹색이 인공미와 조화되어 푸근한 인상을 준다.

대마도는 대중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이라 느긋해 보이는 마을 풍경에 비해 자가용이 많이 보이고, 꽤나 인상적인 녀석들도 있다.

 

아무리 널널한 곳이라도 일본은 자동차 구입시 반드시 주차공간 확보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거리에 불법주차해 놓은 차를 구경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도 절실히 필요한 법령이지만 이미 늦기도 너무 늦었고 시민의식은 아예 시작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니 아쉬울 따름.

 

 

 

민가 바로 뒤편에는 대나무숲이 울창하다. 뒤편에 언덕이나 산이 위치한 마을에서는 이렇게 방풍림 대용으로 대나무숲이 울창한 곳이 많다.

워낙 잘 자라기도 하고 필요할 때 죽순도 금방금방 캐 먹을 수 있고 꽃도 거의 피지 않는 특성상 키우기가 매우 용이하다.

 

삼나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엔 화분증으로 고생하는 바람이 한국에 비해 훨씬 많은데

대나무는 꽃이 거의 피지도 않고 한번 피더라도 숲의 모든 대나무가 일시에 꽃을 피우고 일시에 져 버리는 특성상

마을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녀석이다. 일시에 꽃을 피우는 것은 애초에 대나무 뿌리가 거의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

 

 

 

팻말이 썩어가는 모습이 조금 위태위태하지만 보기는 참 좋다.

물이 오염되어 있으면 잎 색깔도 탁하고 덩쿨 주변에 눈으로 보기 괴로울 정도의 진딧물이 바글바글한데

이곳은 꽤나 깔끔한 편이다. 애초에 오염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곳인데다가 깔끔하기로는 유명한 사람들이다 보니.

 

관광지는 거의 문을 닫은 6시 즈음이지만 여전히 햇살은 사진을 찍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좀처럼 발걸음이 빨라지지 않는다.

 

 

 

짧은 시간 배를 타고 와서 멀미가 심하진 않았지만 항구에서부터 고생을 하다 보니 첫날 컨디션이 그닥 좋지 않았는데

이렇게 마을 주변의 꽃과 나무들을 찍으며 걷다 보니 슬슬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관광이라면 본인 입장에서 정말 볼 것 없는 곳이지만

차 한대 지나가지 않는 조용한 마을 거리를 걸어다니며 이름모를 수줍은 꽃을 보는 것만으로

여행 하루차를 즐겁게 마무리하기에 충분하다.

 

 

 

분명 사람이 사는 집이지만 점점 자연에 먹혀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바로 옆이 산이다 보니 얘네들을 죽지 않게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늦기전에 끊임없이 정리를 해 줘야 한다는 느낌이 더 강할 듯 하다.

온통 녹색 물결로 덮혀 있어도 뭔가를 키우고는 싶은지 계단에는 알록달록한 꽃이 담긴 화분이 줄지어 서 있다.

 

 

 

다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일본에서 본 시골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집 치장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콘크리트로 떡칠된 도시보다 애초에 더 아름다운 곳이지만서도 소소한 곳에 공을 들여 꾸미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한동안 신세를 졌던 나가노의 산속 깊은 마을 키소에서도 집 앞에 유럽이 기원인 듯한 난쟁이 인형 도자기를 문 옆에 놓아두고 있었고.

지금 나에게나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게나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한 마음의 여유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 저 조그마한 장식품 안에 들어있을 듯 하다.

 

 

 

일본의 3대 편의점이 하나도 없는 시골 섬마을이지만 도회지 못지 않게 차량을 꾸미려는 욕구는 강렬한가 보다.

자동차에 스티커 붙이는 건 대도시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편인데.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자동차 전체에 붙이고 다니는 매니아로 발전할 수도 있을 듯.

매니아 문화에 관대한 일본에서도 그런 차들을 보고 있기 힘들다는 의미에서 이타샤(痛車)라 부를 정도인데

설마 이곳 대마도에 그 정도 자동차까지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밖에서 보는 산의 지형을 바꿔버릴 정도로 높은 거목들이 즐비하지만 그것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쭉쭉 뻗은 대나무들도 참 장관이다.

 

애초에 대나무는 나무라고 부를수도 없는 것이, 목본성이 아니라 초본성 식물이라서 사실 우리가 보는 기둥 부분은 전부 풀이기 때문.

그럼에도 하루에 십수 센티미터씩 쑥쑥 자라는 엄청난 생명력을 보여 주니 여러가지로 묘한 녀석이다.

 

유치원 가기도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한 그림책에서는 대나무의 텅 빈 속을 이용해 물총을 만드는 방법이 그려져 있었는데

매우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여서 한참 동안 그걸 만들어 물놀이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곤 했었다.

불행히도 주변에 대나무 따윈 보기도 힘든 도심 한복판에서 자라다 보니 한 번도 실행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런 곳이라면 대나무 물총 쯤은 다들 한 번씩 손에 쥐어보는 것일까.

 

 

 

문을 작고 아담하게 만드는 건 어떤 이유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밀집지역 주택은 거의 대부분 이런 일본식 건축 방식을 따라 대문이 매우 작았다.

언덕 위의 부자들 집은 자동차가 들어갈 정도의 거대한 검은 철문이 위쪽의 뾰족한 창살과 어울려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줬었고.

 

어릴 적엔 제주도의 미덕을 들먹이며 도둑이 없었기에 대문도 없다는 식의 교육을 많이 받았는데

꼭 그렇다기 보다는 수백년 전 부터의 건축 양식 차이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애초에 마당있는 집이라는 개념은 일본에 정착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으니까.

 

 

 

얼마 걷지 않아 다시 이즈하라 시내로 진입한다. 저녁식사를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하며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다지 유명하진 않지만 대마도 특산인 오징어와 톳을 패티에 섞은 '츠시마 버거'라는 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있다고 해서

그 가게를 찾아봤지만 공교롭게도 오늘은 휴일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어차피 일본의 햄버거 하나로 배를 채우기는 무리지만.

 

토박이라면 몰라도 홀로 여행자가 뭔가 특출난 식사를 즐기기엔 힘든 곳이라 그냥 쇼핑몰 티아라 안에서 적당히 골라서 숙소로 가지고 가기로 한다.

시마토쿠 쿠폰을 사용하면 경비도 절약할 수 있으니 배를 채우는 데는 문제 없을 듯.

 

골목 안에서 조그만 놀이터를 보고 여느때처럼 직업병(?)이 도진다.

자전거 여행중이었다면 훌륭한 숙박지가 되었을 텐데.

 

 

 

골목을 구경하고 있다 보니 살짝 기분이 나빠지는 가게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마토쿠 쿠폰 가맹점이라고 자랑스럽게 선전하는 이 조그만 서양식 바는 한국인 사절이라는 단어도 당당하게 문 앞에 걸어놓았다.

내부를 슬쩍 보니 나무로 된 카운터에 아기자기한 깃발과 뱃지들이 벽에 걸려있는 이국적인 분위기인데

그래서인지 선전 간판도 영어로 적혀있는 것이 나름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있는 듯 하다.

 

인터넷이 되기 때문에 일본의 인기 게임인 몬스터 헌터도 플레이 할 수 있다고 적은 것 까지는 센스를 느낄 수 있는데

한국인 사절이라는 팻말을 걸 정도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상상하기 힘들다.

등산복 입은 중년층 이상 단체 관광객들이 이런 곳에 들어가기나 할까 싶은데.

 

그냥 주인이 혐한론자라서 이유도 없이 사절하는 것인지, 예전에 크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그러는 것인지

이 곳의 역사를 알 리 없는 본인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기분이 편하지는 않다.

 

 

 

버드나무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개천을 다리 위에서 감상하며 처음 출발지로 다시 돌아온다.

정말 깡촌중의 깡촌이 아닌 이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파칭코 가게도 도시의 그것처럼 시끌벅적하지는 않다.

관광객이 아닌 주민 상대로 하는 가게들은 벌써부터 문을 닫고 길거리는 점점 한산해진다.

 

한적한 곳이기는 한데 관광객이 한꺼번에 많이 오면 이 곳은 왠지 소화불량에 걸린 것 처럼 어색해 진다.

굳이 같은 한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없는 조용한 곳을 항상 추구하며 여행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인적이 없는 다리 위에서 조용히 서 있는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을 듯.

 

 

 

다리 위엔 의자도 마련되어 있고 대마도의 특징을 나타내는 그림도 새겨져 있다.

왼쪽의 츠시마 삵은 10만년쯤 전에 이곳이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을 당시 건너온 녀석이라고 하는데

섬에 사는 삵이 그렇듯 이쪽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종이라 실제로 여행중 야생 삵을 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인지도로 친다면 20만년도 전에 격리되어 완전히 분화된 오키나와의 이리오모테 섬에 서식하는 삵이 유명한데

이곳도 일단은 종 분화가 일어난 아종 삵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녀석이긴 하다.

 

 

 

 

자국에서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보다 부산이 더 가까운 곳이다보니 한국인들을 위해 이런 그림도 박아놓았다.

실제로 강점기 시절에는 당일치기 놀러갈 때 후쿠오카보다 부산쪽으로 훨씬 많이 가기도 했다.

멀리 보자면 조선시대 때도 후쿠오카쪽보다는 조선쪽과 무역규모가 컸고.

 

잘사는 나라가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일본도 최근 한국과 중국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주변국에 대해 굉장히 무지한 편이었다.

심지어 2010년 일본에서도 나를 보고

'지금 북한하고 휴전중인데 한국 놀러가도 되나?' 라던가 '한국인들 상당수가 일본인 보면 두들겨 팬다고 들었는데' 라는 말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지금도 한국의 일베나 디씨같은 쓰레기 집합장에서 나오는 말과 비슷하게 '한국에 가면 강간당해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소문 정도는 꾸준히 나도니까.

물론 한국이 과하게 안전불감증인 것처럼 일본이 해외 여행에 겁을 좀 먹는 성격이기도 하니 정말 순수하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으로 알려줄 뿐이지만.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저녁장을 보기 전에 모스버거로 들어간다.

딱히 버거가 땡겨서는 아니지만 생각해 놓았던 츠시마 버거를 먹지 못한 것이 좀 아쉽기도 했고, 편의점도 없는 이곳에 무려 모스버거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해서.

 

50대 중반 혹은 60대 초반쯤 되어보이는 아주머니가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있어서 조금 놀라긴 했다. 확실히 대마도의 인구는 심각한 고령사회이긴 한데.

모스버거는 주문을 받고 나서 패티를 굽기 때문에 확실히 다른 버거에 비해서는 좀 더 따끈하고 폭신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진한 토마토 소스와 싱싱한 양파는 이 코딱지만하면서도 비싼 모스버거를 그래도 완전히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적인 재료.

 

특히 요즘 점점 말라 비틀어져가는 타 회사들에 비해 씹는 맛을 느낄 수 있는 두툼한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어 먹는 것도 별미다.

일본에서는 감자튀김을 선택해도 캐첩이 기본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매번 추가를 해야 하는게 조금 귀찮지만

일회용 비닐주머니에 담겨져 어디 부어서 찍어먹기 참 난감한 한국에 비해 반드시 제대로 된 접시에 담겨 나오기 때문에 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다.

 

 

 

마음에 확 와닿는 일정이 아니라서 일기를 그렇게까지 길게 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햄버거와 함께 여행의 기록 남기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터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바로 옆 티아라 식품관으로 향한다.

대마도쯤 되는 곳에 이런 복합쇼핑몰이 들어서 있다는 것 자체가 경제적 편중을 생각할 때 그렇게 환영할만한 일은 아니겠지만

관광객 수요를 충족시키는데는 또 이만한 곳이 없으니 계륵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에스컬레이터 옆에는 츠시마 삵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은지 158일째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사실 대마도의 분위기라는 게 워낙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다 보니 158째 사고가 없었다는 게 신기하기는 커녕

159일 전에는 삵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긴 하다.

 

물론 인명사고와 달리 고양이과 동물은 자동차같은 빠른 물체와 조우했을 때 일단 상대를 확인하는 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는 습성이 있어서

사람보다 훨씬 빈번하게 로드킬이 일어나다 보니 저 정도 기록도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시마토쿠 쿠폰은 1천엔 단위로 사용할 수 있으며 1천엔 이하의 물건에는 거스름돈을 주지 않기 때문에

뭐가 어찌됐든 1천엔 이상 먹거리를 사야 한다. 컵라면이나 과자 따위로는 방금 전 모스버거까지 먹었던 본인으로서 조금 부담이 되기 때문에

적당히 비싸다 싶은 것들을 골라본다. 이미 관광객들이 한바탕 쓸어간 탓인지 왠만한 즉석요리 코너는 텅텅 비어있는 상황.

 

닭꼬치 한 접시와 초밥, 음료수를 구입하니 1500엔 조금 넘게 나온다. 시마토쿠 한 장과 잔돈으로 계산하고 나니 조금 뿌듯하다.

일단 5천엔을 주고 6천엔짜리 쿠폰북을 샀으니 이럴 때 계산하면 이득 본 듯한 느낌.

아무래도 티아라 쇼핑몰은 이즈하라의 경제 규모를 생각할 때 물가가 좀 비싼 편이긴 하지만

관광객들에게는 쿠폰의 묘한 매력 때문에 이것저것 쓸어담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가짐에 틀림없을 것이다.

 

시력이 나쁘지도 않지만 내 방 PC 모니터의 절반도 안되는 아날로그 TV를 실눈으로 간신히 쳐다보면서 느긋하게 닭꼬치와 초밥을 흡입한다.

대마도는 거리상 후쿠오카와 가깝지만 특이하게도 나가사키현에 소속되어 있어서 TV 방송도 기준 물가도 모두 나가사키를 따라간다.

 

TV가 작아서 좀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는 방송이 몇개 나왔다.

20대 중후반의 젊은 시계 장인이 만들어내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 단위의 초정밀 기계시계를 만드는 다큐였는데

본인의 손톱 끝보다도 작은 부품들을 하나하나 조립해가는 광경은 마치 신적인 존재가 우주 하나를 탄생시키는 모습처럼 보인다.

시계엔 관심이 없지만 장인들의 노력과 신기에 가까운 솜씨만큼은 TV를 쳐다보는데 지루함을 주지 않는다.

 

이불과 배게에서 나는 지독한 악취에 기분좋게 잠들기는 참 어려웠지만 어쨌든 여행은 여행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눈을 감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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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가 되니 소라마치의 문이 열린다. 가면 갈수록 사람이 많아질테니 여기도 재빨리 치고빠져야 할 듯.

'하늘마을'이라는 뜻의 소라마치는, 사실 마을이라기보다는 거대 쇼핑몰이지만

적어도 지상층 몇군데만큼은 마을 주변의 가게처럼 살짝 소박하게 장식해놓았다.

 

이게 몇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층은 살짝 맛만 보는 느낌이고

위로 올라가면 한국의 백화점따윈 쌈싸먹을 정도로 거대한 쇼핑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층은 작은 가게들이 모여서 간단한 기념품, 먹을거리를 팔고 있어서

사실상 내가 볼일있는건 이곳 뿐.

 

 

 

사실 호텔 조식을 뱃속에 집어넣고 왔기 때문에 오전 10시에 뭘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점심시간 맞춰서 가면 대기열이 어떻게 될런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라서 겁난다.

 

거기다가 슬쩍 둘러보려고만 했던 상점가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라멘사진이 떡하니 놓여있어서

이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막 개점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아침부터 라멘이라니 가게 주인장도 이상하게 생각하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옆의 중국인 관광객도 잘 먹고 있는데다, 그 후에 찾아온 백발의 일본인 관광객 두명은

군만두와 생맥주까지 시켜서 잘 먹고 있는걸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서 왠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여지것 일본서 먹어본적 없는 새우라멘의 모습을 보고는 패배를 선언할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해물을 베이스로 한 면음식은 라멘보다 짬뽕과 우동이다.

물론 해물라멘도 없진 않고, 새우로 맛을 낸 라멘은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꽤 유명하기도 한데

여기서 본 이 라멘은 구성이 꽤나 독특해서 눈길을 끌었다.

 

새우 베이스의 라멘은 보통 바다내음을 강조하게 위해 소금으로 간을 하는 시오라멘이 주를 이루는데

이쪽은 일본식 된장인 미소라멘을 베이스로 하고, 국물맛을 내기 위한 우려내기용 작은 홍새우에다가

짭쪼름한 튀김옷을 얇게 입힌 큼지막한 새우를 건더기로 올려놓은 푸짐한 녀석.

 

사실 양은 가격에 비해 작은 편이라서, 한끼 식사라고 생각하면 분명 이것만으로 모자라겠던데

배가 고프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무리하지 않고 먹을만한 분량이라서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

 

죽순 절임인 멘마도 오돌오돌하게 맛있고, 계란도 적당히 간이 들어가서 합격점이다.

일본 라멘의 짠맛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질색하는것도, 당연히 지역간 식감의 차이이니 이해하는데

일단 기본적인 레시피를 볼때, 멘바나 계란이 제대로 절여지지 않고 밋밋하게 나오는건 레벨이 떨어진다는 의미.

그런데 겉치레로 붙어있다는 생각이 드는 챠슈는 별로 훌륭하지 않다. 새우가 메인이니 어쩔 수 없는건가.

 

1100엔이나 하는 고가라멘인데다가 양은 적어서 추천하기에는 좀 꺼려지는 녀석이지만

일반적인 미소라멘과는 달리 새우의 미묘한 단맛이 우러나 있는 국물은 괜찮은 경험이다.

짠 건더기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편인데도, 그걸 계산해서 미소국물의 간을 살짝 싱겁게 조절해 놓은게 마음에 든다.

물론 이건 평균적인 일본인들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고, 한국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짠 편이다.

애초에 한국사람들이 이정도면 되겠지 싶은 맛의 라멘은 일본에서 인기가 없을 걸.

1년간 자전거 여행하며 일본 각지에서 120그릇이 넘은 라멘을 먹어치운 나로서도

어쨌든 첫경험인 새우미소라멘이었다. 새로운 경험에 투자한 금액이 좀 비싸긴 헀지만.

 

 

 

빵빵해진 배를 잡고 촛점없는 눈으로 소라마치를 서성인다.

하다못해 부모님이라도 함께였다면 이것저것 구경하는 부모님을 뒤에서 바라보는 재미라도 있을텐데

쇼핑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본인 혼자서 이런곳에 와 봤자 뭘 하겠는가 싶다.

단지 스카이트리와 함께 조성된 유명한 관광 스팟이니 한번 둘러나 보자 하는 기분.

 

어쨌든 도쿄까지 왔으니 뭐좀 사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거대 쇼핑몰이 생겨서 기분좋을듯 하다.

기본적으로 사진촬영 금지인데다가, 메인 통로쪽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사진을 못담았을 뿐이지

한국의 백화점과 비교하면 실례일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크다.

조카 기저귀사러 청량리 롯데백화점에 가본적이 있는데, 그것의 2.5배 정도는 크지 않을까 싶다.

 

시부야나 신쥬쿠의 쇼핑타운은 워낙 대규모 물량공세라서 이곳과 비교하기 힘들지만

단일 매장으로는 오다이바의 비너스 포트를 능가하는 규모라고 느껴진다.

 

거기다 개장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반짝반짝 새 건물에

가벼운 기념품에서부터 캐쥬얼한 의류, 꽤나 고급 브랜드까지 없는게 없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쇼핑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 폐점시간까지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모자람없는 곳이라고 생각.

 

이번 여행은, 허구헌날 시골구석이나 찾아다니다가 오랜만의 도쿄여행이라 그런지

지인들로부터 뭐 사달라는 요구를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받은 여행이었고

그 중 헬로키티 브랜드의 조그마한 핸드백도 들어있었는데, 여기는 헬로키티 매장만 서너개가 넘는다.

 

묘하게도 대부분의 헬로키티점은 정말 아이들 수준에 맞춘 그런 물품들을 파는 곳이고

나머지 한군데는, 패션에 관심있는 여성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고급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 매장.

그곳의 헬로키티 핸드백은 패션의 패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거 괜찮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녀석이었다.

 

크게 화려하지도 않으면서도 헬로키티 특유의 원색 강조가 잘 나타나 있고

재질은 가벼우면서도 방수기능이 기본적으로 첨가된 고가 원단이라고 점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일본어를 알아들어도 패션 관련 단어를 알아들을수가 없는 나는 오랜만에 일본에서 이국맛을 실컷 느꼈는데

어쨌든 굉장한 인기품이고, 2012년 겨울 한정품목이라서 재고 수급도 간신히 맞추고 있다는 듯.

 

물론 브랜드 사치품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는 8700엔의 가격이지만, 내가 부탁받은 헬로키티 핸드백은 3000엔 짜리였다.

아무리 좋아보여도 이 가격차는 좀 아니다 싶어, 훗날 바이어(?)와 연락이 가능할 때 한번 물어보기로 하고

이번엔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다. 조금 쫄았지만 다행히도 친절한 점원은 인상 변하지 않고 웃으며 배웅해주셨다.

 

 

 

콩글리쉬로 윈도우 쇼핑이라는건 신나게 즐겼지만, 사실 소화좀 시키려고 돌아다닌 것 뿐이라

뭘 봤는지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글쎄, 내가 좀 부자라서 현금뭉치를 수십만엔쯤 들고온 사람이라면

지나다니다가 괜찮다 싶은 옷 몇벌 사서 이미지 체인지를 해 보는것도 나름 행복을 누리는 방법일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굉장하다는 인상을 받으며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던 도중, 재미있는 상품을 발견하고

점원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는 척하며 슬쩍 사진을 담아본다.

사실은 대놓고 찍어도 별로 뭐라 할사람 없겠지만, 쇼핑몰 안에서의 촬영은 언제나 긴장된다.

 

부피에 비하면 꽤나 비싼 녀석인데, 정말 잘도 이런 상품을 만들어내는구나 싶다.

스카이트리형 초콜릿이다. 밑의 마을모형 역시 초콜릿. 스카이트리는 화이트초콜릿으로 임팩트를 줬다.

조금 엉성하긴 해도 스카이트리 옆의 스미다가와 강까지 표현해 놓은걸 보니, 진짜 신경좀 썼구나 싶다.

 

스카이트리 모양이 모양이다 보니, 제품의 포장은 비효율의 극치를 달릴수밖에 없지만

그 효율을 높여보자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스카이트리 모양의 초콜릿만 덜렁 팔고있었다면

이렇게 내가 사진을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자연스럽게 고급 기념품이라는 이미지도 생기고.

 

사소하지만 이런 발상의 전환이 기념품 장사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념품의 덕목은 가격대 성능비가 아니라 임팩트다.

누워있는 스카이트리 초콜릿과, 이 녀석을 나란히 전시한다고 생각해 보라. 어디에 눈길이 갈지.

 

물론 사들고 가서 혼자 까먹어 버린다면야 가격 싼녀석이 제일 좋겠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일본의 기념품은 주위 사람들한테 선물 주기위해 사 가는 것이다.

어떤걸 선물로 줬을때 상대방이 더 좋아할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흡족한 기분으로 소라마치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이곳으로 올때 전철을 타 봤기 때문에, 아사쿠사까지는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한다.

 

어디서든 스카이트리를 카메라에 담느라고 관광객들이 정신없는데

영락없는 노숙자 할아버지가 관광객들에게 촬영 스팟을 조언해주고 있다.

 

여기 이 지점에서 찍으면 전부 다 담을수 있다느니, 시간대별로 멋지게 보이는 촬영장소 등을 읊어대는데

반쯤은 관광객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얼핏 들으면 그냥 혼잣말같기도 하다.

관광지라서 사람들이 좀 온화해 진건지, 그 설명 들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땟국물 줄줄 흐르는 노숙자 할아버지한테 카메라 맡기도 자기들 좀 찍어달라고 부탁도 한다.

 

굉장히 보기좋은 광경인데, 유럽에서나 볼만한 모습을 여기서 보니 내가 좀 어리둥절했다.

 

소라마치와 스카이트리를 한 화면에 담아보려고 했는데 이 거리에서는 35mm 렌즈로도 무리였다.

소라마치는 긴 직사각형의 건물이라서, 둘을 한꺼번에 담으려면 이거보다 더 광각렌즈를 사용하던가

파노라마 형식으로 이어붙어야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파노라마는 귀찮아서 그냥 패스.

그거 못담았다고 내가 아쉬워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연경관 풍성한 곳이 아니라 도쿄같은 도시에서 35mm 보다 더 광각이 필요할줄은 몰랐다.

 

소라마치는 쇼핑몰뿐만 아니라 수족관까지 포함된 복합센터라서, 인파에 휩쓸릴 각오만 있다면

하루 꼬박 소비해도 전혀 아쉬울 것 없는, 도쿄 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명실공히 입지를 다지고 있다.

수족관은 물론 본인도 참 좋아하지만, 전망대 입장료와 미지의 라멘탐험으로 이미 출혈이 상당하고

몰려드는 인파만큼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냥 도망치기로 결정.

 

만일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서 왔다면 이런 불평없이 얼마든지 인파에 치여가며

평범한 관광을 즐기겠지만, 홀로 떠도는 여행에서는 스스로의 기분에 반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고싶지 않다.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어서 걷다보면 땀도 슬쩍 흐를 정도다.

영하의 한파속을 헤매는 서울에서 왔으니 체감적으로 더욱 덥게 느껴지기도 하고.

느긋하게 25분쯤 걸으니 다시 스미다가와 강을 넘어서, 어제 신나게 셔터누른 장소로 돌아온다.

 

역시 제일 간편하게 담을 수 있는 위치는 이곳이라는 생각. 옆에 똥덩어리와 아사히 빌딩도 볼만한 녀석들이고.

도착을 늦게 하는 바람에 첫날 사진이 전부 해질무렵이었는데, 역시 대낮에 사진 찍으니 거리낄게 없어서 좋다.

 

 

 

이곳 촬영포인트 주변에서는 노인 두명이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한 사람은 구슬픈 하모니카를, 한 사람은 점잖게 한 곡조 뽑아내고 있는데

옛날 노래들이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건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며 걷자' (上を向いて歩こう) 정도밖에 없었다.

 

이 곡은 일본인들에게는 국민가요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아시아 노래중에서는 최초로 1963년 빌보드차트 1위를 한 기록으로 유명하다.

재미있게도 해외에서는 제목 발음이 어려워서 '스키야키'로 알려진 그 곡.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위를 보며 걷자'는, 심금을 울리는 가사의 내용덕분에

안그래도 유명한 이 곡이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로 어마어마한 반향과 함께 다시 대인기를 얻었다.

대지진 이후 TV CM에서 이 곡이 부드럽게 흘러나올때, 일본 국민들의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곡의 분위기가 그토록 잘 어울릴수는 없었겠지만

조금 삐딱하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는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현재의 상황이 더욱 적나라게 느껴진다고 할까.

 

 

 

아사쿠사에서 아키하바라로 바로 가는 전철은 없기때문에

버스나 타고 가자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15분이나 기다리고나서야 깨달았다.

적혀있는 노선표를 자세히 보니 일요일엔 아키하바라 행 버스가 3~4시간에 한대씩 온다.

 

도쿄 한복판에서도 이런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어서 허탈한 마음과 함께 그냥 전철을 탄다.

갈아타면 요금도 비싸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한대 얻어맞고 조금 체력이 빠진 상태라서 어쩔 수 없다.

오타쿠와 전자제품의 성지 아키하바라(秋葉原), 원래 이곳은 한국의 용산처럼 조그만 영세가게들이

수도없이 밀집해서 이루어낸 개미집과 같은 장소였는데, 지금은 거대 체인 요도바시 카메라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매장을 역앞에 떡하니 건설하는 바람에 그 독특한 매력이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진짜 매니아들의 아키하바라는, 골목골목 구멍가게를 누비며 이 세상 어떤 전자부품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의 모습을 가리키지만, 이제와서는 대기업의 천편일률적인 제품과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뿌리는 페로몬에 이끌려 하악거리는 오타쿠들의 천국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하긴 나도 20년전 처음 도쿄에 갔을때는 무조건 아키바부터 달려가서 게임팩 사는데 열중했으니까.

지금도 그때 뭐 구입했는지 기억난다. 슈퍼패미콤이라는 가정용 게임기의 'FEDA' 라는 녀석.

난 왜 이런걸 이렇게 오랫동안 잘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게임팩 구입후엔 친구 강군과 함께 버추어 파이터 하려고 종횡무진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때 버추어 파이터 2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라 게임센터에서도 요금이 2배 비싼 200엔이었지만

태어나서 경험해본적 없는 폴리곤 덩어리들의 환상과도 같은 향연에 돈을 마구 쏟아부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그 게임센터 아직도 영업중이긴 하다. 내부 구조는 많이 바뀐것 같더라만.

 

여담으로, 원래 이 지역의 한자명을 읽으면 '아키바하라'가 되는데

공무원이 한자를 잘못 읽어서 '아키하바라' 라는 전철명이 붙어버린 황당한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게 또 재미있는게, 요즘엔 다들 이름을 생략시켜서 '아키바' 라고 읽는데 이게 사실은 제대로 된 이름이었다는 것.

 

 

 

스카이트리에서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이것저것 많은데, 주된 목표는 역시 부탁받은 선물 구입이다.

요도바시 아키바는 단순히 전자제품이나 카메라만 파는게 아니라

백화점이라도 해도 될만큼 없는게 없는 가게라서, 의류같은 패션 상품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건 다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구입할건 쿄세라의 세라믹 부엌칼. 가볍고 오래가고 잡내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한국에도 팔긴 하지만, 최상급 프리미엄 브랜드는 팔지 않고 한단계 낮은 등급의 제품만 있어서

도쿄 가는김에 좋은거 사가기로 했다. 훗날 돌아와서 한번 써보니 확실히 좋긴 하더라.

 

칼 하나에 10만원이나 하는걸 보고 덜덜 떨었지만, 막상 돌아와보니 독일제 부엌칼은 하나에 몇십만원씩 한다.

정식 교육을 받은 셰프들의 칼이야 수백만원짜리도 전혀 비싸지 않은 레벨이긴 한데

가정집 주방에서 대체 뭘 만드시길래 수십만원제 칼이 필요한지까지는 내가 알수있는 범위가 아니다.

쿄세라의 세라믹 칼은 어찌됐든 무지하게 가볍고 절삭력이 좋아서 어느정도 돈값을 하겠지.

 

요도바시 안에는 서점도 있어서 부탁받은 유아용 동화책 몇권과 내가 읽을책 몇권을 산다.

계산은 같이 했다. 지인의 부탁이 아니고 엄니를 통한 2중 부탁이었던 터라 이 정도 수고비는 챙겨도 되겠지.

읽고싶은 책은 산더미같은데, 중고책방이라도 가야지 신품서점에서 구매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물론 새 책을 산 이유는 내가 돈내는거 아니니까. 그래도 항상 정도는 지킨다.

 

이러저러해서 참 인연이 깊은 아키바인데, 역을 나서는 순간 굉장한 상실감이 밀려온다.

아키하바라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라디오회관(ラジオ会館)이 건물채로 사라지고 없었던 것.

지금은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각종 장비들이 가동되고 있다.

 

라디오회관은 아키하바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 건물중 하나로, 그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초기엔 라디오 트랜지스터 등을 파는 작은 가게들의 집합체였다. 아키하바라라는 장소와 동시에 태어난 역사의 산 증인.

 

 

 

2010년 자전거 여행때 담은 라디오회관의 모습.

노란색 네온싸인이 걸려있는 건물이다. '세계의 라디오회관 아키하바라' 라는 촌티나는 제목의 전광판.

 

2000년 이후로야 아키바 대부분이 그렇듯 전자부품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가전제품, 애니메이션, 만화, 피규어 등으로 채워졌지만

이게 1953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아무리 개축을 거듭해도 결국은 노화를 피할 수 없어서

전면 해체후 재시공이라는 처방을 받고야 말았다. 물론 해체 한참 전부터 이곳에 입주해있던 회사들은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지만, 새 건물이 들어서는 즉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거라고.

 

아키바의 터줏대감 같은 건물이라서, 이 건물이 해체되던 때엔 아쉬워하며 사진을 찍는 오덕들이 많았다.

본인도 만화책 살때는 반드시 이곳 라디오회관의 'K-BOOKS'를 이용했던만큼 감회가 새롭기도 했고.

왜 거기서 만화책을 샀느냐 하면, 특이하게도 저 서점이 부스 두개로 나뉘어

한쪽은 비닐 안벗긴 새책을 팔고 다른 부스에서는 중고책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중고책은 보존상태가 상당히 좋아서, 일단 신품부스에서 신나게 구경하고 구입할 책을 정한 후

중고부스에서 그 책을 찾아 구입하면 금액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중고품이 없는 책은 어쩔 수 없이 신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지만.

 

여담이지만 K-BOOKS 는 그것 외에 어른용(!) 만화책도 샘플본을 많이 비치해서, 구입하지 않고도 읽어볼 수 있다는 크나큰 장점이 있었다.

세계 어디든 어른용일수록 구입전까지 내용물 못보도록 철저하게 막는게 일반적인데, 그걸 과감히 깨트린 영업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어른용 만화책은 그림 수준이 좀 떨어져서 본인은 별 관심이 없다?

 

 

 

친구가 닌텐도 게임소프트를 부탁해서 그것도 찾아봐야 하는데

일단 그걸 오늘 구입할 생각은 없다. 게임소프트는 중고유무와 가격대 등을 넓게 조사해 봐야

쓸데없이 돈 더주고 구입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조사하는데 하루, 구입하는데 하루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얼핏 둘러본 바로는 그게 굉장히 인기있는 신작게임이라서 어지간한 곳에 중고물품이 없다.

이렇게 되면 다음에 구입할때 이야기가 좀 편해지긴 한다. 신품가격 제일 저렴한 곳만 골라가면 되니까.

 

20년전의 전자상가 천국은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곳이라서 지루하지 않다.

세상 어디에 이렇게 길거리 전체가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가게등으로 가득찬 곳이 있겠는가.

굳이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 길거리는 충분한 문화충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저기 SEGA의 빨간 건물은 20년전 친구 강군과 내가 버추어 파이터 하려고 뻔질나게 들락날락한 곳.

그거 말고, 자기 사진을 찍어서 모니터에 그걸 띄워놓고 펀치머신으로 두들기면 얼굴이 찌그러지는 게임도 있었다.

내가 강군하고 원수지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며 배를 잡고 뒹굴었던 기억이 난다.

 

 

 

아키하바라라는 매니아 지향 상점가가 이렇게 유지된다는건 사실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화면 하단부의 사람이 보인다면, 저 소프맙 건물이 어느정도 규모인지 알 수 있을 터.

 

아키바에는 이런 건물이 수십채씩 거리 전체에 줄지어 늘어서 있다.

건물에 걸린 거대한 그림들은, 얼핏보면 그냥 애니메이션이겠지 싶어도

사실은 아이들이 만져서는 안되는 어른들(!!)의 게임 광고다.

 

어른용 게임이다보니 수요는 적고 제작은 힘들어서, 게임 하나당 10만원이 넘는 고가를 자랑해도

열심히 구입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보니 이렇게 오늘도 아키바는 돌아가고 있는 것.

 

실제로 인파를 뚫고 성인코너로 들어가보면 그건 그거대로 훌륭한 타국문화체험의 현장이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니, 성인물에 관심이 없어도 그 분위기를 즐기는것 자체는 충분히 관광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항상 이런곳 안에 들어가서 어슬렁거릴때는, 이정도 극단적인 문화적 괴리를 생산하는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가 대부분.

물론 혈기왕성한 중고딩때 이런거 체험해보라는 뜻은 아니고. 어른이라면 이 오묘한 분위기 자체가 재미있는 경험이 될것이다.

 

여성분들은 또 여성분을 위한 그렇고 그런 코너가 있으니 그런데 가보는것도 좋고.

 

 

 

부탁받은 책 몇권 사고, 그냥 선물도 책으로 사고, 내가 읽을 책도 사고 하니 가방이 미어터진다.

이미 카메라는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어깨에 매고 있는데, 이곳 가게들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서

어깨에 카메라 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 굉장히 조심해가며 이동하다보니 진이 빠진다.

 

오늘 책 구입비용만 거의 10만원쯤 나왔는데, 그중에 내가 산건 5만원쯤 된다.

어쨌든 도쿄까지 왔으니 내가 만족하게 싸들고 돌아갈만한 녀석은 책밖에 없고.

 

아키바는 정말 올때마다 느끼지만, 한산할 때가 없는 곳이다.

이쯤 되면 이미 매니아들만의 전유물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일본 최대의 아마추어 동인작가전인 코믹마켓에는 3일간 70만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인파가 모인다.

이 3일간 도쿄 시내의 모든 숙소가 마비될 정도니까, 직접 보지않으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는 곳.

 

자전거 여행때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서 여름 코믹마켓에 잠깐 들른적이 있는데

인간이 이럴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 사진 퍼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런 느낌이다.

 

 

 

아키바에서 이것저것 부탁받은 물건 구입하고 가방이 빵빵해지니 어깨와 발이 뻐근해진다.

아침에 먹은 라멘덕분에 배는 고프지 않고, 이럴때 유용한 녀석은 조금 먹고 시간 오래 때울수 있는 녀석.

쥐꼬리만한 용량을 자랑하는 모스버거에서 한숨 돌린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10분쯤 기다렸다.

 

좋은 재료를 쓰고, 주문받은 후에 만들어서 바로 내놓기 때문에 맛이 괜찮은 모스버거지만

가격대비 크기가 정말 눈물날 정도로 작은 녀석이라, 이걸로 배 채울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다.

모스버거 특유의 양파향 나는 토마토소스는, 그래도 햄버거 소스중에서는 인스턴트 냄새가 덜 나는 편이어서

깔끔한 치즈와 함께 베어물면 나쁘지 않은 맛이다. 어디까지나 일반 패스트푸드점과의 비교우위일 뿐이지만.

 

모스버거에 들어가서 제일 마음에 드는 녀석은 언제나 음료수 컵에 그려져있는 그림.

사진은 있지만 이곳에 올리지 않는다. 혹시 갈일 있으면 음료수 컵 그림을 잘 살펴보시길.

모스버거의 정체성이랄까, 가장 모스버거 답다는 느낌이 들어서 참 친근감을 느끼는 녀석이다.

 

버거는 그냥 자릿세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피로를 풀며 메모장을 꺼내서 펜을 깨작거린다.

 

 

오늘 루트는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대강대강인듯 하다. 스카이트리와 아키하바라 두 군데밖에 둘러보지 않았다.

시간이 아까운 관광객들에게는 너무 낭비가 심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8시 반에 숙소를 나와서 라멘 먹을때 20분간 앉은것 빼고는 8시간 넘게 계속 걸어다닌 셈이라서

모스버거에 앉았을 때 몸이 밑으로 쑤욱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금부터 힘내서 야경보기 좋은곳을 찾아다니면 너댓시간은 더 관광을 즐길 수 있겠는데

그런 식의 강행군은 오직 함께 가는 일행이 있을때만 시도하는 성격이다.

 

자기 물품보다 남한테 부탁받은 물품을 구입하는게 더 피곤한듯 하다.

논리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되게 피곤하다. 이 안에 든게 전부 내가 갖고싶은 것들이었다면 아직 팔팔할텐데.

 

밖으로 나오니 해가 슬슬 지고있다. 어느센가 아키바의 명물로 자리잡은 돈키호테 빌딩의 AKB48 극장이 앞에 보인다.

AKB48 은, 아마 나보다 더 잘 아는 한국인들도 많을거라 생각하는데... 요즘 일본 연예계의 최강 아이돌 그룹이라고 보면 될듯.

한국의 최강 아이돌은 소녀시대인가?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애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처음엔 무명이었던 그 그룹이 꾸준히 공연하던 곳이 이 아키바의 극장. 지금은 국민아이돌로 상승했기 때문에

AKB 전용 극장마저 생겼고, 조그마한 이벤트라도 있는 날엔 저 앞에 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물론 내가 그 아이돌들 이름이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오랜 일본여행끝에 하나 몸에 익힌건 있다.

'에이케이비 사십팔'이 아니라 '에이케이비 포티에잇'이라고 읽는단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해서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으니 비로소 해방감이 느껴진다.

저녁 6시쯤의 이른 귀가라서, 오늘은 느긋하게 피로를 풀 수 있을듯 하다.

할일이 없어서 소중한 여행중에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별로 할일이 없기도 하고.

사실 내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있기 때문에

조금의 문제도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해서 휴식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뜨끈하게 목욕 끝내고 편의점에서 사온 간식거리를 씹으면서 TV 보다가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TV가 예전에 비해 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