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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12.19  2월 18일 홋카이도 - 선물 4
  2. 2014.12.17  2월 17일 삿포로 - 마지막 밤 4
  3. 2014.12.15  2월 17일 삿포로 - 삿포로 비어가든 9
  4. 2014.12.11  2월 17일 홋카이도 - Skyfall 6
  5. 2014.08.05  2월 10일 삿포로 - 스키 점프 8
  6. 2014.07.31  2월 10일 삿포로 - 잠깐동안 다시 홀로 10

 

 

히터를 틀어놓고 잤는데도 콧등이 시려서 잠을 깨보니 밤중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나보다.

눈은 막 그친 참인데, 새벽까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홋카이도 전역의 철도 대부분이 운행중지가 되어 있다.

어제 이동했던 오비히로에서 삿포로까지의 구간도 오후가 되어야 운행이 재개되는 듯 해서, 하루만 늦었다면 꼼짝없이 이곳에 갇힐 뻔 했다.

 

삿포로가 대도시이긴 해도 어제 밤처럼 시야를 가릴 정도의 눈이 쏟아지면 조심해야 한다.

몇 년 전에 불과 자기 집 대문 십여 미터 앞에서 길을 잃어 동사한 사람이 뉴스에 나왔을 정도니까.

 

자금과 시간적 여유만 널널하다면야 폭설로 인한 귀국 연기라는 사고도 한 번쯤 겪어볼 만한 일이지만

이제부터 미련 가지는 것은 만족스러웠던 여행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으니 시원한 기분으로 짐을 챙긴다.

 

신 치토세 공항 국제선은 차별이라 느껴질 정도로 한산하다. 홋카이도를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인가.

홋카이도 모든 지역의 쟁쟁한 기념품, 선물, 식당가가 포진한 국내선과 달리 국제선쪽엔 편의점 수준의 가게 한두 점포밖에 없다.

자국민 우선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이 선물을 사기 위해 국내선 라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

 

 

 

현실적으로는 당연히 신 치토세 공항의 수요와 크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다.

원래 자위대 공항이었던 녀석을 민간용으로 확장 개조했기 때문에 마음껏 확장하기엔 힘든 면이 있었으니까.

 

국제선도 원래 국내선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었을 정도지만 워낙 수요가 폭증하는 바람에 새로 지은 것이 지금의 국제선.

수요가 없어서 간당간당한 다른 지방 공항들과 달리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딸려서 골치를 안고 있는 곳이다.

이런 국제선과 국내선간의 현격한 차이와 거리를 해소하기 위해 나름 신경은 쓰고 있다.

 

무빙워크도 있지만 그보다 더 편리한 수송을 위해 사파라 관람열차같은 전동차 두 대가 왕복중이다.

나이든 사람이나 짐이 많은 사람만 타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그런 거 없고 그냥 마음껏 타시라고 하며 나를 불러세운다.

걸어가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 뒤에 탄다. 기념 사진도 한 장 남기고.

 

운전중에는 보행자를 위해 경쾌한 맬로디가 울려퍼진다. 사소하지만 공항에 대한 인상을 좋게 만드는 배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원서 사 오는건 매번 있는 일이니 예상 범위 내였지만 본가에 전해줄 과자와 나침반님에게 전해줄 과자 등 부피가 큰 녀석들이 많다.

부피로 친다면, 사실 홋카이도 특산품이 아니라 닛신의 컵누들 1박스가 제일 많이 나가기는 하지만.

 

본인이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컵라면인데 예전에 나침반님한테 맛보기로 몇 개 드렸더니 꽤나 상성이 좋았던 터라

온갖 맛있는 먹거리가 가득한 이곳 홋카이도에서 편의점 직원에게 부탁해 컵누들을 박스채로 창고에서 가져오게 했다.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자기한테 맛있는 거라면 희소성 따윈 상관 없다.

 

 

닛신은 그 엽기성을 자랑하는 CM으로도 유명하다.

이제까지의 닛신 CM만 모아놓아도 어지간한 코메디 프로에 꿇리지 않을 듯.

 

롯카테의 고급 과자인 '마루세이 버터 샌드'와 홋카이도산 감자튀김인 '쟈가포클' 등을 몇 개 구입한다.

본가와 나침반님에게 각각 가지고 가려니 생각보다는 지출이 많은 편.

일본에서는 여행 후 지인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행동이 사실상 강제나 마찬가지인 예절의 일부분이라

학생들의 경우 부모가 선물용 용돈을 따로 주는 경우도 있다. 지인들 거 몇 개 사기만 해도 금액이 상당하니까.

 

원래 본인에게나 남에게나 선물은 거의 사 가지 않는 편이지만 홋카이도라면 건질거리가 좀 있으니 오랜만에 소비를 즐겨본다.

 

눈축제는 끝났는데 공항은 여전히 스노우 미쿠로 성황중이다. 과자를 사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미쿠 종이가방에 넣어준다.

일단 이것도 희소성이라면 희소성이니 곱게 가져와서 여전히 방에 보관중. 막상 희소성 생각하니 재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 조금 난감하다.

 

 

 

10일 전 이 공간에 미쿠라는 괴생물체가 빡빡히 들어서 있었는데

공식적인 축제도, 개인적인 축제도 끝난 지금은 매우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원래는 이렇게 넓은 곳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눈축제 기간 중 그러지 않아도 빡빡한 공항에 대량의 오덕을 몰고다니는 미쿠까지 들어서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쿠의 저력은 만만하지 않아서, 구석에서 여전히 방문객들의 마지막 지갑까지 털어가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여행 후 선물은 사람들간의 친근감의 척도로 사용될 수도 있는 중요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에게만 주려고 구입해도 그 부피가 감당하기 힘들어 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공항에서 택배 서비스가 성황중인 것. 한국과는 이런 점에 있어서 정서가 많이 다르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미쿠가 덤벼들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마토 택배와 미쿠가 콜라보레이션을 맺었다.

 

일반인이라면 저걸로 택배 서비스를 보내는 정도는 홋카이도에서의 소소한 이벤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고

오덕이라면 아마 택배 보내지 않고 박스만 사 갈 듯한 느낌이 든다. 본인도 젊을 때는 열혈 오덕이었으니 왠지 상상이 된다.

 

 

 

어제 징기스칸 폭풍흡입과 더불어 오늘 아침도 조식을 빵빵하게 즐기고 왔기 때문에 식사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혹시나 또 폭설로 열차가 연착될까봐 시간을 매우 넉넉하게 잡아 도착했고

쇼핑도 대충 다 끝냈으니 남는 시간은 역시 식당에서 때우는 것이 제일 좋다.

 

벌써부터 줄이 생겨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음식점도 있지만 지금은 라멘이나 고기류는 조금 부담스럽다.

가벼운 음식을 찾으려고 몇 바퀴 돌다가 한산한 소바집으로 들어간다.

 

이 블로그를 오래 접한 사람들은 본인이 나가노현의 300년 넘은 소바가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듯.

그래서 이런 공항 소바집에서 엄청 기대를 크게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나가노의 가게 역시 메밀을 이곳 홋카이도에서 공급받고 있을 정도로

홋카이도 메밀은 품질이 상당히 좋기로 유명하다. 속에 부담이 없어서 선택한 메뉴니 기본만 해 주면 후회없을 듯 하다.

 

국수 자체는 나쁘지 않은 레벨이지만 역시 소바는 찍어먹는 소스인 쯔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나가노의 쯔유와는 비교하기가 아쉬운 평범한 레벨이라서 그냥 그렇군 하면서 후루룩 집어넣는다.

 

 

 

뿌듯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활주로를 벗어나는데 하늘이 마지막으로 멋진 선물을 선사해 준다.

방금 전 신 치토세 공항은 운이 좋게도 살짝 눈이 그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위로 올라와 보니 알 수 있었다.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의 외계인 공중전함의 공습을 생각케 하듯 일렬로 위압감을 뽐내는 눈구름이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고보니 이곳에 입국할 때도 두터운 눈구름을 내려다보며 두근두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고마운 날씨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눈만 오면 지루할까봐 맑은 하늘도 하루에 몇 번씩 보여주고, 꼭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엔 여지없이 쏟아부어 주었으니까.

10일간의 짧은 여행동안 날씨가 이렇게까지 도와 준 적은 드물다. 여름의 혹한보다는 오히려 편안했던 편이기도 하고.

 

 

 

여러 번 가면 점점 식상해져서 발걸음이 뜸해지는 곳도 있지만

홋카이도는 적어도 짦은 생애 한 순간동안은 아무리 찾아가도 지루해 질 틈이 없는 곳이다.

가장 일본적이지 않은 곳에 살짝살짝 보이는 일본적인 특성이 특히 그렇다.

나름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본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 묘한 이질감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혼자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일거리만 찾을 수 있다면 이 근방에서 가장 정착해서 살고 싶은 곳이다.

시야를 길게 본다면 사실 나가기 좋아하는 성격상 평생을 틀어박히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운 여행이든 후회가 남는 여행이든 끝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아쉬움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예 여행에 인생을 던져버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 아닐까.

 

 

 

돌아와서 바로 나침반님과 만난다. 내려가기 전에 선물을 전해줘야 하니까.

동대문의 밤거리에 도착하니 역시 사방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여기가 한국'이라는 느낌이 엄습해 온다.

멀리서 보면 쌍동이같아도 가까이서 보면 정말 달라도 이렇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다.

 

국밥을 주문해도 알았다던가 고개를 끄덕인다던가 하는 리액션 하나 없이 휙 돌아 가버리는 아줌마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역시나 한국'이다.

사실 더 풍족해질리도 없지만, 아무리 풍족해진다 해도 불친절이 친절로 바뀔 일은 절대로 없다. 친절은 부유함에서 오는 사치가 아니다.

 

 

 

나침반님에게는 닛신 컵누들 한박스와 쟈가포클 한박스, 마루세이 버터 샌드를 선물로 건내드린다.

나침반님 집에는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살짝 걱정이긴 하지만 25도 이하에서만 보관하면 괜찮다고 적혀있으니 뭐.

 

오비히로에서 시작한 제과점 롯카테의 간판 스타같은 녀석으로, 모든 재료를 토카치산으로 사용한 고급이다.

가지고 온 선물 중에서 크기는 가장 작지만 가격은 가장 비싸다. 포장이 너무 고급스러워서 부담갈 정도.

본인이 사서 먹는 것이야 아무렇게나 포장해도 관계없지만 역시 선물이 주가 되는 과자다 보니 예의바르게 포장되어 있다.

 

 

 

다행히도 훗날 나침반님이 맛있었다고 평가하셔서 구입한 보람이 있었다.

집에도 하나 들고 왔는데, 엄니는 역시 포장에 질겁을 하셨다. 뜯기가 아깝게시리 뭐하러 이렇게 멋지게 싸 놓았냐고.

 

허물없는 가족끼리야 사실 이런 거 구입해 봤자 감흥없이 확 뜯어서 팍팍 씹어먹을 뿐이다.

아무래도 '가족끼리 시식용' 이라고 저렴하고 엉성한 포장지를 두른 상품을 따로 발매해 줬으면 싶다.

 

 

 

쿠키 속에 진한 버터, 그리고 사이사이에 건포도가 들어간 살짝 고풍스러운 과자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본인에게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분석적으로 파고든다면 재료의 질이 워낙 뛰어나서 아껴 먹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달고 짠 맛과 함께 스폰지처럼 부드러운 쿠키와 농후한 버터의 고소함이 조화롭다. 요 한 조각이 2000원쯤 하니 결코 싼 가격은 아니다.

개인적으로야 양보다는 질이기 때문에 싼 과자 많이 먹는것 보다야 이런 거 한개씩 먹는게 훨씬 만족감이 크긴 하다.

입맛이 저렴한 편인지, 그냥 신선한 오징어만 씹고 있어도 다른 과자 생각이 나지 않는 편이지만

역시 1년이나 되다 보니 사진 정리할 때 가끔 이 녀석의 맛이 생각나기도 한다.

 

 

 

오타루에서 이별할 때 Y양이 선물로 덥썩 사 줬던 초콜릿.

선물은 사실 이쪽에서 줘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하나 받아버려서 조금 난감했다.

 

연락을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도 키타미에서 한국어 교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본인 역시 키타미 주변에 일자리만 있으면 당장 짐 싸서 날아갈 생각이었지만 아쉽게도 교습소 원장이 한국인이라 그건 포기.

오랜만에 안부나 물어볼까 싶다. 사실 여건만 된다면 2015년 2월에도 당연히 날아가고 싶지만.

 

 

 

왁자지껄한 밤풍경이 한국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역시 이런 도시 모습은 내 취향이 아니다.

활기와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모습은 활기가 아니라 발버둥으로밖에 안보인다.

 

나침반님은 서울 토박이지만 역시 나만큼이나 서울 좋아하지 않는 듯. 그러니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겠지.

일단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는 점에서 삿포로와 크게 차이가 난다. 10일동안 눈바닥 말고는 본 기억이 없다.

눈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기분. 황량한 아스팔트 도로를 보니 금새 홋카이도가 그리워진다.

 

사람이라면 무릇 자제심을 갖고 살아가야 하니 2015년 겨울에 다시 날아가는 사치스러운 일은 하지 않겠지만

시간이든 자금이든 여유만 있다면 언제나 파묻히고 싶은 곳이 홋카이도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되는 기분으로 나침반님과 헤어진다. 이제 깨어날 시간.

 

 

 

고기를 다 먹고 짐을 챙긴 후 나오는데 문득 이 아이스크림 생각이 난다.

삿포로 시내의 호텔이나 역 등에서 제공하는 정보지에는 여러가지 음식점 할인 쿠폰이 들어있는데

대부분 소소한 할인이나 단체 몇 인분 이상 주문시 서비스로 딸려나오는 음식 등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반드시 들르는 이곳 비어가든의 후식 무료제공 티켓은 꽤나 흥미를 동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티켓을 제시하면 홋카이도산 우유를 사용한 아이스크림을 하나 준다고 해서 입가심으로 그만.

홋카이도의 이름있는 소프트크림은 매우 농후하고 부드러운 우유향기가 입안 가득히 퍼져서 황홀한데

비어가든은 일단 맥주 전문이라 그런지 상급 소프트크림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해서 살짝 아쉽긴 했다.

 

이번엔 겨울이라 그런지 이걸 먹을 수 있는 무료 티켓을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징기스칸으로 텁텁해진 입을 헹구는데 참 유용할 텐데 아쉬울 따름.

물론 돈 주고 사먹을 수는 있다. 이곳은 징기스칸과 맥주가 무제한이지만 따로 주문할 수 있는 해산물, 소시지 디저트 등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한 번 무료로 먹고 나면 좀처럼 지갑을 열기가 힘든 게 나같은 가난뱅이의 습성일까.

 

 

 

밖으로 나오니 눈 내리는 모습이 더욱 심상치 않다.

배가 너무 불러서 버스 타고 돌아가는 건 소화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숙소까지 걸어갈까 싶은데

여름이라면 몰라도 지금 이 눈을 뚫고 갈 수 있을지 살짝 겁이 난다.

 

그래도 여기서 징기스칸을 먹고 나면 걸어거 돌아가는게 연례행사처럼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눈 때문에 그 익숙함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밖으로 나선다.

비어가든을 찾은 사람 외에는 밖에 돌아다니는 모습 보기가 힘들 정도로 다들 꽁꽁 틀어박혀 있는 모양.

 

 

 

나보다 조금 먼저 비어가든에서 나온 관광객들 역시 비슷한 기분인지 꺅꺅거리며 눈 속을 걸어가는 중이다.

눈 내리면 발광하는 강아지들 모습이 이런 광경속에서는 나름 이해가 가는 기분도 든다.

눈 때문에 시야가 10m 될까말까 한 풍경은 원래 서식지에서는 결코 구경할 수 없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눈 속에 파묻힌 공중전화 박스를 보니 무심코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엄습하기도 한다.

저러다가 눈 무게때문에 유리창 깨지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홋카이도 도착부터 오늘까지 눈이 내리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지만 이 정도의 폭설은 처음이다.

눈이 많이 올수록 좋다는 눈축제 역시 이런 눈이라면 관람이 어려웠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쏟아붓는다.

 

양고기와 맥주를 너무 많이 집어넣은 탓인지 슬슬 아랫배에 위험신호가 감지되고 있지만

눈을 못 뜰 정도로 눈이 쏟아질수록 기분은 점점 흥분 상태에 돌입하고 있다. 장관은 장관이다.

물론 여행 중이니 이런 사치스러운 기분을 부릴 수 있는 것이겠지만. 출근길 시민이나 강원도 부대 장병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풍경일 듯.

 

 

 

평소엔 그닥 볼 것 없는 주거지역이지만 눈이 내리면 뭐든 신기한 모습으로 변한다.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 주변이 모두 생크림으로 덮힌 듯한 분위기.

 

혼자 서 있으니 왠지 발광을 한 번 해보고 싶은 기분이지만 카메라의 안위도 걱정될 뿐더러 속에서 힘찬 고동을 준비중인 찌꺼기들이 위험하다.

다행히도 아무리 눈이 많이 와서 시야가 흐려져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냥 계속 직진만 하다보면 역에 도착한다.

자전거 여행으로는 결코 찾을 일이 없는 겨울 홋카이도의 모습을 10일동안 뇌리 깊숙히 새겨놓고 갈 기회를 마련해 주니

마음 속으로는 얼마든지 더 내려보라고 응원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바람까지 불어대서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친다는 점은 좀 힘들었지만.

맥주와 양고기가 열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그나마 서럽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슬슬 서두르지 않으면 억압에 항거하겠다고 뱃속이 단호하게 주장중인데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지 못한다고 가던 길에 놓인 북오프가 또 발걸음을 잡는다.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지만, 사실 비어 가든에 갈 때마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들른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삿포로 중심가쪽에도 북오프가 있긴 한데 사람이 항상 빡빡해서 책 구경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꼭 이 지점을 찾곤 했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좀 전까지 코뺴기도 보이지 않던 차들이 이 앞에 포진중이다. 눈 내리고 밖에서 돌아다닐 수 없으니 책이나 읽으러 오는 듯.

 

어차피 괄약근도 간당간당하니 저기 들어가서 볼일이나 보고 책을 좀 읽으면 금상첨화겠다 싶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곳은 화장실이 수리중이니 사용할 수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가는 날이 장날인 듯.

이마에 땀까지 송글송글 맺히고 있어서 이건 책 구경 따위의 여유를 부릴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밖으로 나가 살짝 옆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편의점에 들어간다.

밖에서 쏟아지는 눈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기개로 배출을 마친 후 미안한 마음에 간식거리라도 하나 사 들고 나온다.

다시 북오프로 들어가 편안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가지런지 늘어선 수많은 책을 황홀하게 구경하다가 적당히 몇 권 구입한다.

 

배가 홀가분해지니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좀 더 느긋한 기분으로 걸어가니, 역에 도착할 때쯤엔 다시 눈이 그쳐가고 있다.

이 눈이 내일 아침까지 계속 내린다면 귀국행 비행기도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그나마 다행.

사실 이렇게 눈이 쏟아져도 치토세 공항은 항상 비행기 이착륙으로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에 별로 걱정스럽지도 않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에 TV만 바라보며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한다.

돌아가면 또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겠지만

이번 여행은 모든 코스에서 원하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달성할 수 있었기에 그런 사치스러움은 조금 경감될 듯 하다.

 

 

비어가든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다. 깔끔할 때 비어가든 모습이나 담아주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먹으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건물 자체가 가치를 지닌 붉은 벽돌집이라 구경하기에도 좋다.

생애 첫 비어가든은 자전거로 도쿄에서 이곳까지 달려오기도 했고 싱싱한 20대였기 때문에 미친듯이 고기와 맥주를 흡입했던 기억이 난다.

 

바지 고간쪽이 자전거와의 마찰 때문에 구멍이 나 버려서 난감했지만 누가 쳐다나 볼까 싶어 그냥 입고 다녔는데

문제는 행색이 워낙 노숙자같아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서 있던 한국인 부부에게 '한국서 오셨나봐요' 하고 말을 거니

몰래카메라라도 걸린 듯 꺅 하면서 기겁을 하던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그쪽은 금새 친근하게 대답해 줬지만.

 

 

 

비어가든 주변엔 거대 쇼핑몰도 있어서 구경하기 좋지만

여행자들의 경우엔 시내에도 구경할만한 쇼핑몰이 많아서 굳이 이곳까지 둘러볼 필요가 없다는 게 아쉬운 점.

시간을 느긋하게 잡아서, 3~4시쯤 이곳에 와 쇼핑몰을 구경한 뒤 비어가든으로 들어가도 나쁘지 않지만

비어가든에서 배를 채우려면 쇼핑몰 안쪽의 먹거리가 전부 무의미해 지기 때문에 약간 김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근은 관광객이 비어가든 외에 별로 즐길거리가 없는 거주지 구역이지만

삿포로 역과 버스 연계가 매우 충실한 편이라 거대 쇼핑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 봐도 될 듯.

한국 물가가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지를 확실히 체감해 볼 수도 있다.

 

 

 

붉은 벽돌집은 겨울의 눈과 굉장히 잘 어울리지만 사실 이곳은 여름이 좀 더 낫다.

더울때 먹는 맥주가 각별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비어가든이라는 이름답게 공원처럼 주위 조경이 아름다워서.

 

여름 삿포로는 눈축제가 열리는 중앙공원 전부를 비어가든으로 만들어 온갖 맥주를 야외 잔디에서 즐길 수 있다.

여름에 맥주, 겨울에 눈축제라는 두 가지 큰 이벤트만으로도 이 곳의 활기는 일년 내내 사그라들줄 모른다.

대구에서 치맥축재라며 사람들 줄 세워놓고 그깟 치킨조각 조금과 김빠진 맥주 한 잔 돌리는 모습을 보니

축제의 의도와 방향성이 얼마나 그 축제를 아름답게 혹은 추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세삼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저 양조주 근처에 블루 포피라는 희귀종을 키우고 있어서 여름즈음엔 귀한 구경을 할 수 있다.

 

 

 

자전거 여행때 찍은 블루 포피 사진. 학명은 메코놉시스라는 희귀 양귀비로, 원래 부탄 고지대에서 발견된 야생종이다.

고산지대 양귀비중에서도 특히 귀하다는 푸른색 양귀비이고

일본이나 한국 여름기후에서는 생존하기 어려운 녀석이지만 노력끝에 이곳에서 번식에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삿포로의 여름은 예전에 비해 월등히 더워지고 있어서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로 알고 있어서, 이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홋카이도 관광겸 이곳으로 오면 좋을 듯.

 

 

 

사진 몇장 찍고 있는데 다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다.

물론 건물 내부는 고기굽는 열기로 후끈후끈할 테니 크게 문제는 되지 않지만.

 

건물 풍경과 함께 산책을 즐긴다던가, 삿포로 맥주 역사에 관심이 있다던가 하지 않는 이상 사실 이곳의 가격대 성능비는 그다지 좋지 않다.

1인당 3000엔 정도의 요금을 내면 양고기 징기스칸과 맥주가 무제한으로 나오지만

삿포로 시내에서 그 정도의 금액이라면 무제한이 아니더라도 배 터질만큼 징기스칸을 즐길 수 있으며

양고기 품질도 이곳보다 훨씬 좋은 맛집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맥주야 삿포로 어디든 레벨이 높은 편이고.

 

하지만 관광객으로서 이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 삿포로에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기는 행위이기도 하고

거대한 양조 기계를 볼 수 있는 2층 뻥 뚫린 벽돌집의 디자인을 즐기며 뛰어난 서비스를 맛볼 수 있는 이곳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맛 뿐만 아니라 여행 기분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역시 이 곳을 추천할 수밖에 없다.

 

 

 

눈축제가 끝났다고 해서 눈이 그치지는 않기 때문에 여전히 이곳의 겨울은 현재진행형이다.

매일 이렇게 쏟아붓는 눈 청소하고 길 만드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을텐데.

 

삿포로 시민들에게는 정신적 상징이나 마찬가지 건물인데다, 이 정도 넓은 공간에서 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식당 안은 항상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럽기 그지없다. 일본은 일반 음식점은 조용하지만 술집은 묘하게 시끄러운데

이곳은 일본답지 않은 호탕함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 몇 번이고 혼자서 고기 구우러 오는 본인도 어지간이 제정신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이곳만큼은 혼자 와도 그다지 눈치 볼 일이 없다. 거의 모든 음식점을 혼자 즐기는데 매우 익숙한 본인이라도

고기집만큼은 어지간해서 혼자 찾지 않는데, 여기는 그런 눈치 볼 필요가 없어서 즐겁게 즐길 수 있다.

사실 혼자 가서 보통 일본인 가족 2~3인 정도가 먹는 양을 먹어치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수용인원이 많기도 하고, 제대로 요리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레스토랑도 있어서

원하는 건물과 음식 내용에 따라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매표소 사람들은 영어도 곧잘 알아들으니 문제는 없다.

본인처럼 몇 번이고 이곳을 찾은 사람이라면 이제 슬슬 다른 건물에서 식사를 즐겨도 될 법하지만

그래도 항상 징기스칸 무제한이 반기는 가장 앞쪽 벽돌집을 찾게 된다. 왠지 이제는 하나의 정해진 코스처럼 느끼고 있으니.

 

낮에 이곳을 찾으면 맥주 박물관도 견학해 볼 수 있다. 삿포로 맥주의 역사와 맥주 제조공정 등을 구경해 볼 수 있어서 나름 재미있다.

한 잔에 100엔짜리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를 견학 후 조그마한 바에서 시음해 볼 수 있는데

그 맛은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본인에게도 꽤나 충격을 줄 정도로 깔끔하다. 이래서 국산 맥주가 욕을 먹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눈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많이 쏟아지고 있어서 지채하지 않고 들어가기로 한다.

본인만의 징크스라도 해도 되겠지만, 이곳에 올 때는 버스를 타도 돌아갈 때는 항상 걸어서 숙소까지 가는 일이 일상화 되어 있다.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댔으니 가볍게 밤거리를 산책하며 삿포로의 야경을 구경하고 걸어가면 적당히 속도 진정이 되기 때문에.

 

거리상으로는 느긋하게 걸어도 30분 걸리지 않아 삿포로 역에 도착할 정도니 무리가 없지만

만약 식사 후에도 이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다면 조금 고심해 봐야 할 듯 하다.

 

 

 

식당 안은 여전히 왁자지껄하다. 맥주와 고기를 즐기며 소리를 지르면 소화도 잘 될것 같다.

기름이 많이 튀기기 때문에 옷가지와 가방 등을 넣을 수 있는 비닐백을 좌석마다 준비중이다.

 

징기스칸은 양고기를 야채와 함께 구워먹는 홋카이도의 소울 푸드인데, 정작 양고기가 부족해서 현 삿포로 시내 징기스칸의 99%는 호주산 or 유럽산 양고기다.

일본산 양고기는 매우 고가로 특급 요리점에서나 구경할 수 있다고. 맛은 호주산이라 해도 괜찮으니까 별 문제 없지만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이긴 하다.

 

고기는 로스구이용과 생고기가 준비되는데, 직원들이 상시 테이블을 둘러보다가 고기가 떨어졌다 싶으면 알아서 추가 주문여부를 물어본다.

홋카이도의 지형을 그대로 본뜬 불판은 올 때마다 인상적. 불판 중앙에 떡하니 놓인 별모양이 이들의 프라이드를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먼저 지방을 불판 여기저기에 골고루 발라 윤기를 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양고기가 지방이 좀 있는 편이라도 쉽게 들러붙기 때문에 꼼꼼히 바르는 편이 좋다.

 

 

 

식당 한켠에는 맥주 제조에 쓰이는 거대 양조기가 구릿빛 광채와 함께 전시중이다.

이렇게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고기 레벨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많다.

아니 관광객이라기 보다는 주말 나들이나 회사 회식등으로 이곳을 찾는 현지인들이 더 많다.

본인 역시 삿포로에 살고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혼자 이곳을 찾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보니 약간 차질이 생긴다.

원래 징기스칸은 바닥에 야채를 가득 깔고나서 그 위에 고기를 얹어 익히는 것이 정석.

고기의 육즙이 밑의 야채에 스며들고, 고기가 타서 들러붙지 않기 때문에 깔끔하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온 본인으로서는 한꺼번에 고기를 많이 구워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야채 위를 고기로 덮을수가 없다.

야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게 고기를 덮어야 제대로 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덮으면 혼자서 처리가 힘들다.

 

그래서 그냥 첫 번째 접시는 대강대강 주위에 야채르 놓고 생고기를 중앙에 얹는다. 이렇게 하면 그나마 육즙이 옆으로 내려가니 흉내는 낼 수 있다.

 

 

 

맥주는 가볍게 한 잔 마신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니 애주가들처럼 마구 퍼마실수는 없지만

이곳에 오면 기본적으로 500cc 두 잔은 마실 정도로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다. 신선한 삿포로 생맥주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도 하고.

 

찍고나면 바로 테이블 밑 의자로 숨겨버리며 카메라에 기름이 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생각보다 기름이 많이 튀기기 때문에 방심했다간 렌즈 앞이 기름범벅이 될지도 모른다.

 

 

 

육즙을 머금은 숙주나물과 양배추는 고기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최소한 두 명이었다면 업무 분담이 가능해서 좀 더 편안한 흡입이 가능하지만

고기를 혼자 구우면 사진 찍고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타기 전에 접시에 담아 먹는 모든 행위를 혼자 진행해야 한다.

 

홀로 여행의 장점이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런 점에서만큼은 아쉬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고기 굽기를 혼자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지만. 삿포로에서 이곳을 찾지 않기는 또 아쉽고 해서 조금 난감하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많이 잡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소나 돼지고기와는 그 향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처음 먹었을 때 거부감이 심하다면 다시 찾지는 않을 터이지만, 본인은 고기라면 어지간하면 다 환영이라 폭풍 흡입중이다.

 

 

 

두 번째 잔은 흑맥주로 부탁한다. 이곳은 일반 생맥주와 흑맥주, 그 둘을 섞은 갈색 맥주를 무제한 마실 수 있는데

본인은 종류별로 마셔보기엔 술이 약한 편이라 그냥 두 잔 정도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한국에서 흑맥주 처음 마셨을 때는 영 쓰기만 하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는 친구가 구인네스를 한 캔 가지고 왔을 때 흑맥주의 매력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고

이곳 비어가든에서 마셨던 흑맥주에서 비로소 흑맥주만의 무게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자전거 여행으로 녹초가 된 직후였고

밥이라 해 봤자 하루 12시간 40여일간 달리면서 편의점 주먹밥 정도밖에 먹은 게 없었으니

거의 눈이 뒤집힌 채로 고기와 야채를 7접시 정도 먹었던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편안한 기차여행이고 점심때 뜨끈한 수프 카레까지 먹었으니 헝그리 정신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네 접시 정도 먹으니 배가 한계임을 분명히 하는 신호를 내보낸다. 역시 먹는것도 젊을 때 많이 들어가는 것인지.

 

로스를 좀 많이 주문해서 원래 정석대로의 모습을 구현해보려 한다.

원래는 좀 더 수북히 쌓아서 야채가 보이기는 커녕 공기 빠져나갈 구석도 없게 만드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랬다가는 타기전에 먹느라 너무 허둥댈 위험이 있어서 이 정도로 타협을 보기로 한다.

 

 

 

맥주 세 잔까지는 아무래도 무리라 마지막 입가심을 위해 무알콜 진저 에일을 부탁한다.

진저 에일이 아동용 음료수는 아닐텐데 비어가든의 마스코트인 삿짱의 얼굴이 예쁘장하게 찍힌 컵에 담겨온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음료수지만 일본서는 탄산음료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달달하긴 하지만 생강의 상쾌한 씁쓸함이 조금 남아있어서 무작정 달기만 한 콜라 등을 싫어하는 본인 마음에 드는 녀석.

 

야채까지 합하면 총 5접시를 맥주 1000cc, 음료수 500cc 와 함께 혼자서 먹고 마시니 배가 거의 폭발직전이다.

아주 많이 오버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그냥 용인해 주긴 하지만, 일단 시간제한도 2시간이기 때문에 아슬아슬하다.

일행이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2시간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느긋하게 즐겨도 충분하겠지만

혼자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사진 찍고 하다보면 2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다.

 

삿포로 사람들은 일본에서 고기 잘 먹기로라면 오키나와와 쌍벽을 이루는 매니아들이라

이곳의 징기스칸은 그야말로 식사가 아니라 전쟁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쿄같은 얌전한 본토사람이 이쪽 토박이들과 고기 먹으러 갔다가 제대로 입에 넣지도 못하고 패배하는 경우도 많은 듯.

그런 전투적인 흡입을 본인 혼자서 하고 있으니 왠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접시째는 진짜 이러다가 토하는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절박하다.

뭐든 과하면 좋은게 아닌데, 이곳 비어가든에서는 왠지 배 터질만큼 채워넣지 않으면 굉장히 아쉬워진다.

이건 전후 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꿀꿀이죽의 맛을 잊지 못하고 풍족해 진 후에도 부대찌개를 찾는 그런 심정일려나.

 

생애 첫 징기스칸을 골골 골아가던 자전거 여행 중에 즐기다 보니 이곳에서는 미친듯이 먹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뇌리에 박혀있는 듯.

 

어쨌든 더 이상 먹었다간 정말 못볼 꼴을 보이게 될 것 같아서 남은 것들 대강 입에 쑤셔넣고 남아있는 진저 에일을 윤활유삼아 위 속에 밀어넣는다.

숙소에 도착하면 폭풍 배설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지만 이 정도면 삿포로의 마지막 밤에 어울리는 진수성찬이었다고 자찬해 본다.

 

 

 

한겨울의 폭설 속에서도 열기를 잃지 않는 비어가든 내부를 기념으로 남기고 자리를 정리한다.

이제와서는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삿포로를 찾을 때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반사적인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온 몸에 진득하게 베어버린 징기스칸의 미묘한 냄새는 사진을 정리할 때마다 입맛을 돌게 만든다.

 

맥주와 징기스칸이면 삿포로의 하룻밤은 언제든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조식을 든든히 챙겨먹고 삿포로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걸어간다.

삿포로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리지만 갈아타지 않아도 되니 걱정할 일은 없다.

 

단지 눈이 그쳤다고는 하지만 어제보다 훨씬 매서운 바람이 강렬하게 몰아치고 있어서, 홋카이도 여행 중 처음으로 뼛속까지 추위를 느낄 수 있다

하늘의 눈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나는 눈은 훨씬 매서운 법.

산더미처럼 쌓인 눈이 칼바람 때문에 온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어서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한번 땅으로 내려왔다 다시 흐트러지는 눈은 어찌나 매서운지.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지만 바람 탓에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넘나들고 있다.

포근하게 보였던 눈이 칼바람에 굳어버린 것인지 지금 피부를 때리는 눈송이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섭다.

 

 

 

레일 너머가 신기루처럼 흐려지는 풍경은 조금 뒤에 이쪽으로 몰아칠 눈보라를 더욱 두렵게 만든다.

이게 극지방에서 강화된다면 소위 말하는 블리자드가 되리라 생각.

 

도저히 이래서는 못버티겠다 싶어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내방송이 나온다.

다른 지역의 폭설 때문에 기차가 25분 정도 연착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첫 연착.

평소라면 그냥 기다리면 되지만 개방된 공간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라 조금 귀찮아 진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올라오는 앞에서 오밀조밀 모여있다. 다들 밖에서 기다릴 수가 없으니까.

밀도가 너무 높아서 그냥 1층으로 내려가 개찰구를 나와버린다.

어차피 홋카이도 레일 패스는 따로 티켓을 기계에 집어넣거나 하지 않고 역무원에게 제시만 하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까.

 

역내 매점에서 따뜻한 옥수수 스프 한 캔을 사들고 손을 녹이며 주변을 서성인다.

25분이란 시간이 참 애매해서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으니 꽤나 지겹다.

 

역에서는 거의 2~3분에 한 번씩 연착 소식을 방송하고 있다. 전광판에도 당연히 연착 정보를 표시해 놓았다.

10분쯤 뒤에 도착하는 열차는 내가 예약한 차가 아니라 그 전 시간에 도착하는 열차이기 때문에

자칫하다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4시간을 서서 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런 점은 주의를 요한다.

워낙 쉴세없이 연착 소식을 방송중이라 어지간하면 헷갈리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외국인이라면 좀 난감한 상황일지도.

 

다행히도 25분 뒤에 온 열차는 따뜻해서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터라 창가 자리에 앉아 경치를 감상한다.

 

 

 

지루해지기 쉬운 기차 여행이지만 홋카이도만큼은 그럴 틈이 없다.

원채 조용한 객실 안이지만 참다 참다 결국 카메라를 꺼내든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장면이 수도 없이 펼쳐진다.

 

조심해서 셔터를 누르고 이제 괜찮겠지 싶으면 금새 더욱 황홀한 광경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아예 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이런 이동중 사진은 항상 보던 것보다 조금 아쉬운 장면만을 간신히 담을 수 있다.

그렇다고 4시간 넘게 계속 창밖을 뚫어져라 주시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마음을 비우고 중간중간 무덤덤하게 셔터를 누르기로 한다.

 

 

 

홋카이도의 날씨는 수직적이기도 한 동시에 수평적이기도 하다.

한 곳에 머무를 때도 쨍한 하늘에서 폭설로 휙휙 바뀌기도 하고

기차로 빠르게 이동중일 때 역시 푸르던 하늘 아래를 넘어가면 갑자기 시야를 막아버리는 눈보라가 떡하니 나타나기도 한다.

 

울창했던 푸른 생명력들의 역동성이 전부 바람과 눈으로 스며들어 간 건지, 살아있는 건 나무와 풀숲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보라 속을 부담없이 찍을 수 있게 해 주는 열차의 든든함이 고맙기도 하지만 역시 속도가 속도이다 보니 감도를 좀 높여야 한다.

아예 감도를 낮추고 자연스러운 패닝샷 기분을 내는 것도 괜찮지만 창가에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의 감정을 좀 더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기분.

 

 

 

대도시는 그렇다 치고 중간중간 위치하는 작은 마을은 어떻게 겨울을 넘기는지 궁금하다.

홋카이도 자동차들은 기본적으로 출고시부터 스노우 타이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고

얼음보다는 눈이 많은 곳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잘만 달린다. 본인처럼 눈이 적은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은 조마조마한 기분.

 

여름의 초목이 지겨워 질 때쯤이면 이렇게 세상을 뒤덮어버리는 눈밭이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니 역시 기후변화가 다양한 지역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푸르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진행 방향의 심상치 않은 하늘 쪽은 열차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기다리고 있다.

지면의 모양이나 색깔마저도 단조롭게 변해버리는 겨울이지만 하늘만큼은 변화무쌍해서 부족한 역동성을 채워준다.

 

눈을 잠깐 감고 졸다가 깨어나 보면 대체 여기가 무슨 세상인지 모를 정도로 변해버리는 점이 매우 인상적.

눈길 자동차 운전에 어느 정도 숙련이 된다면 그냥 드라이브만 해도 인상적인 장면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서부터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르기만을 반복하던 무아지경의 시간이라

글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과 함께 하니 예술 전시회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난 뒤 갑자기 평온해 보이는 거대한 설원과 그 위를 거니는 젖소들이 나타난다.

땅이 넓으니 목장도 여유가 느껴지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방목장인지 모르겠다.

 

여름에 이런 곳을 지나갈 때는 확실히 울타리가 보였지만 지금은 거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울타리 너머에서 자전거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소들이 호기심 초롱초롱한 눈으로 앞까지 다가오기도 했다.

 

거친 눈보라를 뚫고 나자 온화한 풍경이 펼쳐지는 순간은 마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을 연상케 한다.

정말로 도착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서, 여행의 끝을 조용히 축하해 주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오랜만에 삿포로로 돌아오니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분주한 도시 풍경은 이제껏 즐겼던 차분함과 거리가 있지만 조금씩 현실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는 반가움도 없지 않다.

 

삿포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뜨겁게 달궜던 눈축제장의 스키 점프대는 빠르게도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축제란 건 준비하는 기간이나 열리는 도중이나 열기가 넘치지만 이렇게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숙연해지는 강도도 그만큼 크다.

부자가 아니라 매년 겨울 이곳을 찾아오는 사치를 누릴수는 없으니 이제 내려놓을 감정은 내려놓고 돌아가라는 느낌이 든다.

 

 

 

숙소에 짐을 맡겨놓고 삿포로에서 해야 할 몇 안남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저녁에 맥주 공원에서 징기스칸을 즐기는 것은 제외하고라도 겨울 삿포로의 별미인 수프 카레를 먹지 않고 떠나기는 아쉽다.

 

오비히로뿐 아니라 오늘은 홋카이도 전역의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는지 쓰러진 자전거가 한층 더 무섭게 느껴진다.

대체 쓰러진 자전거가 저만큼 파묻힐 정도라면 눈이 얼마나 왔다는 것인지. 마치 물 속에 잠긴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이곳의 기후에 대해 감탄하게 만든다.

 

 

 

축제가 성대하게 열린 만큼 해체 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다. 아마 준비 기간과 마무리 기간을 합치면 축제 기간의 몇 배는 되지 않을까.

원래 축제란 그런 것이지만 이런 아련한 모습 또한 다음 축제를 위한 안식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삿포로는 여전히 흐렸다가 맑았다가 눈이 쏟아지는 정신없는 날씨를 자랑하고 있다.

내일 귀국이니 이제는 억눌러 놓았던 구매 욕구를 풀어재끼는 일만 남았다.

서점을 돌아보며 읽을 만한 책을 10만원 어치 정도 쓸어담는다. 가능하면 한국에 발매될 일이 적을 듯해 보이는 책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나름 긴 여행이다 보니 자금을 좀 넉넉하게 가지고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남은 자금을 전부 써버리기엔 아까워서 꼼꼼하게 검토를 하며 구매한다.

이 정도면 내일 공항에서 선물 몇 개 사들고 가도 2만엔 이상 남아있을 테니, 다음 여행의 자금 보충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하다.

 

 

 

오비히로에 맞먹는 추위를 뚫고 이리저리 해맨 끝에 건물 지하 구석에 아담하게 숨어있는 수프 카레점을 찾아낸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게에다 카운터 석에 앉아도 부담없어 보이는 친근한 아가씨가 맞이해 줘서 긴장이 풀린다.

 

수프 카레는 홋카이도에서 탄생한 변종으로, 워낙 추운 홋카이도의 겨울을 좀 더 후끈하게 즐기기 위해 고안된 카레.

점성이 없는 찌개같은 카레로 처음 볼 때는 위화감이 들 수도 있지만 짜릿한 카레의 자극은 더욱 강렬해서 매력적인 녀석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오히려 찌개 먹는 느낌으로 밥과 함께 먹으면 매우 훌륭한 궁합을 자랑한다.

얼어버린 콧속에 확 퍼지는 뜨끈뜨끈한 카레 수프의 얼큰함은 묘하게 한국 정서와 어울린다. 겨울의 홋카이도라면 꼭 먹어볼 만한 녀석.

 

지역 별미라 가격이 좀 세긴 해도 불만없이 즐길만한 음식이다. 맛은 기본적으로 보장이 되니 부담도 없고.

식사와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생각보다 졸리고 피곤하다. 어제까지의 강행군도 그렇고 장시간 기차 여행도 쉴 틈이 없었으니까.

90분 정도 쉴 시간이 있는데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니 슬금슬금 고개가 밑으로 내려간다.

날씨가 춥다 보니 들어왔다 나가는게 한층 번거롭지만 홋카이도의 마지막 밤에 징기스칸을 먹지 않는다는 건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해가 지고 한층 추워진 공기를 마시며 눈덮힌 길을 조심조심 걸어 삿포로 역으로 향한다.

역에서 맥주공원까지 저렴하게 왕복중인 버스가 있어서 찾아가기도 편하다.

오비히로만큼이나 눈이 쏟아지고 있어서 여행 막바지의 아쉬움과 애상이 배가 되는 느낌이지만 고기와 맥주로 즐거운 마무리를 하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다들 박수는 쳐 주는데, DJ 가 혀 굴리며 흥을 돋구는 것에 비해서는 좀 조용하다.

일본인들이 공연이나 행사에서 해당 외국인들에게 그닥 감흥을 주지 못하는게 이 어중간한 호응도 때문이 아닐까.

본인 역시 양손에 카메라 들고 있느라 흥겹게 박수를 치지는 못하지만.

 

추운 겨울밤 이런 경기를 보고 있어도 점프 특성상 가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있어서 오히려 추워지는 듯 하다.

 

 

 

선수들 소개하는 점프가 끝난 후엔 본격적으로 공연이 펼쳐진다.

한 사람 점프하는 것도 조마조마한데 이젠 두셋이서 한꺼번에 점프를 시도한다.

공간 확보는 충분하겠지만 동작이 큰 스키 점프다 보니 사람들의 걱정섞인 환호성이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내일이 눈축제 마지막 날인데, 오타루를 둘러보러 갈 예정이라 실질적인 눈축제 구경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은 이벤트도 여러가지 있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서 별로 구경하고픈 생각도 들지 않는다.

 

조금 조용하게 넘어갈려나 싶었던 삿포로 눈축제는 그나마 마지막 밤에 이런 생기넘치는 이벤트를 볼 수 있어서 다행.

Y양 일행도 같이 보면 좋았겠지만, 한 시간 넘게 열리는 이벤트라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감도를 3200에서 6400까지 올려야 겨우 셔터스피드를 맞출 수 있을 만큼 속도가 빠른 점프라서

결과물은 거의 포기하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셔터를 누르는 연습을 해 본다.

 

점프대 주변에 촛점을 고정시켜 놓고 타이밍 맞춰 찍어본다던가

꼭지점에 도달할 때 즈음에 동체추적으로 선수들을 담아본다던가

점프 후 이쪽으로 이동해 오는 선수들을 패닝샷으로 담아본다던가.

 

선수들의 환한 미소를 보니 감각이 없어져가는 손가락도 그나마 위안을 얻는 느낌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카메라로 잡아내기가 힘든 연출이 이어진다.

시간차를 두고 서너 명이 연속적으로 점프를 하거나, 거의 줄줄이 비엔나처럼 여러명이 단체 점프를 하거나.

 

연사 사진을 합성하거나 동영상을 찍지 않는 이상 이 분위기를 담아내는건 불가능한데

사진 합성도 귀찮고 동영상은 취미 밖이라 그냥 적당적당히 셔터만 누른다.

보통은 열 장 찍어서 아홉 장 정도는 그대로 포스팅하는 편인데

이런 스포츠 계열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백 장 찍어서 서른 장 정도 건지는 편을 선택한다.

 

RAW 촬영만큼은 항상 고집하다 보니 훗날 귀국에서 편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지만

여행 사진을 편집하는 건, 남은 장수가 줄어드는게 아쉬울 정도로 좋아하는 편이라 문제될 것 없다.

 

 

 

전반부가 끝나고 다시 하염없이 눈발을 맞으며 대기하는 시간이 돌아온다.

하지만 선수들 안전을 위해 쉴새없이 바닥을 고르는 요원들의 모습을 보니 불평할 것도 아니다 싶다.

바닥 형태 탓인지 마치 씨 뿌리기 전 밭을 가는 듯한 느낌.

 

 

 

공식 촬영팀은 점프대 꼭대기에서부터 점프대 바로 옆에까지 여러 장비로 무장하고 열심히 촬영중인데

역시 이 밑에도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한 명 있다. 니콘 장비를 사용중인데, 눈발 대책으로 카메라를 꼭꼭 싸매놓은 모습이 인상적.

 

본인 카메라는 니콘보다 더 방진방적이 떨어지는 녀석인데도 신경쓰지 않고 내리는 눈에 노출되어 있다.

망원렌즈는 후드가 길어서 눈이 렌즈 표면에 묻을 일도 별로 없어서 그냥 되는대로 내버려 두는데

자신의 기계에 애정을 갖고 있다면 좀 더 소중히 다루어 줘야 함에도, 카메라는 그냥 도구일 뿐이지 하면서 팽개치는 성격이라.

 

 

 

다리도 뻐근하고 볼과 손가락은 얼어붙었고, 이만큼 봤으니 이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고생해서 날아온 눈축제 현장에서 즐기는 유일한 이벤트이다 보니 왠지 아쉽다는 생각에 끝까지 서 있기로 한다.

 

한밤중같지만 아직 한국사람에게는 초저녁 시간이라, 돌아가봤자 별로 할 일도 없으니.

 

스키 점프는 그냥 점프 모습 그대로 날아서 죽지 않고 착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할 따름인데

몸을 비틀어가면서 휙휙 날아가는 모습이 조마조마한 기분마저 들게 만든다.

점프대를 벗어나는 순간은 마치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거인이 사람들을 집어던지는 듯한 움직임이 연상된다.

 

 

 

일년에 눈이 일주일도 올까말까 한 지역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이렇게 휙휙 날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눈과 당연스럽게 뒹굴며 자라온 사람들일 터.

눈이라는 것 자체에 익숙하지 않는 나에게는 왠지 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종이라는 사실이 어색하기도 하다.

 

 

 

몇 초간의 스릴을 즐기는 운동이니 본인이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자전거 타고 몇일 몇달이고 앞에 펼쳐진 길을 달리던 그 때의 감정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녀석이 아닌가 싶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람은 어떤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지루해서 죽어버리는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성공이든 자식 잘 키우기든 스키 점프든 여행중독이든, 뭐라도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니까.

 

점프해서 착지하는 2~3초 남짓한 이 순간이 저 선수들에게는 인생의 가장 큰 부분으로 남지 않을런지.

 

 

 

점프가 막바지에 이르자 내용도 점점 과격해진다. 거의 모든 선수가 1~2초 간격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장관.

처음엔 염통이 쫄깃해지는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 되니 저 선수들이 느끼는 흥분과 쾌감이 어떤 것인지 살짝 공감이 가기도 한다.

 

 

 

익스트림 스포츠에는 한계가 없어서, 점점 몰입하다보면 거의 정신줄을 놓아야 할 정도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딱히 별종이라고 비난할 필요도 없는 듯 느껴지는 이유는 점프를 끝낸 직후 보여주는 저 시원한 미소 덕분이 아닌가 싶다.

 

뭔가를 해내는 순간 뇌속 신호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안면 근육이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달성감의 미소는

저 사람들이 이 짓(?)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익스트림 스포츠의 순간적인 쾌감이 얼마나 강렬한지는 체험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본인은 조금 더 느긋하고 지속적인 면을 추구하긴 해도 그 방향성이 동일하다 보니 은근히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숙소 잡아놓고 편안히 왔다갔다 하는 여행은 사실 조금 미지근하긴 하지만

이 사람들의 2~3초를 나는 하루 단위로 끊어가며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한참 그런 여행을 해 보지 못해서 그 반동으로 평범한 여행이라도 자주 나가게 되었는데

역시 너무 많이 참는 건 몸에 좋지 않을 듯 하다.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나가재껴도 아직 부족하냐는 말이 나오겠지만.

 

 

 

어리긴 해도 숙련된 선수들이니 다행히 사고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DJ의 소개를 들어보니 가장 어린 선수가 13살 정도, 최고령 선수가 마흔을 훌쩍 넘겼다고 한다.

어린 선수의 경우엔 어쩌면 올림픽을 누빌 수 있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서 롤러코스터만 타도 심장이 오그라드는데, 이렇게 새처럼 날아오를 때의 쾌감은 과연 어떤 것일런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도 저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자기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정말 새라도 된 것처럼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데

일단 다리가 저렇게까지 찢어지는 데에서부터 감탄해야 하는 본인이 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초보인 본인 눈으로 보자면 스키 점프 자체는 거의 다른 세계의 기술처럼 보여서 멍하니 구경만 하는 느낌이라면

스틱도 사용하지 않고 관객들 앞을 스르르 미끄러지며 환호에 보답하는 모습이 실질적으로 놀라움을 준다.

넘어지지 않고 전진하기도 힘든 스키를 저렇게 몸의 일부분처럼 타고 있는게 참 신기하다.

 

 

 

 

후반부 점프는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선수 전원이 연속으로 펄떡펄떡 뛰는 고난이도 장면을 보여준다.

그냥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지만 앞 선수와의 거리 조절이 잘못되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점프라 굉장히 신중하게 간격을 둔다.

 

앞선 선수가 착지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텐데, 이런 이벤트에 참가할 정도의 실력자들이니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활강 점프에 비한다면야 별 것 아닌 속도지만, 그래도 수십 km 는 가뿐히 넘어가는 점프를 성공시킨 사람들의 쾌감은 말로 전달하기 힘들 듯.

멋지게 착지 성공하고 나서 바로 눈 앞에 서 있는 관객들이 셔터 세례와 함께 박수를 쳐 주는 모습을 보는 것도 뿌듯하지 않을 리가 없다.

 

 

 

가장 왼쪽 선수가 아마도 이번 이벤트 최연소 출장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된 점프에서도 한 번의 사고 없이 웃는 얼굴을 보여주니 추운 겨울밤도 조금은 훈훈해 지는 느낌.

사실 초반 점프에서 착지가 살짝 불안했던 선수가 있었지만 넘어진 정도는 아니고 약간 주저앉은 수준이라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대회가 끝나갈수록 눈발을 더욱 거세지고 있다. 

평소같으면 불평이라도 터져나올듯한 매서운 눈보라지만 축제에 몸을 맡기고 있는 지금은 아무리 퍼부어도 모자라지 않다.

이것도 부르주아틱하게 말하자면 돌아갈 호텔이 있음에서 비롯되는 자만감이지만. 자전거 여행때는 이런 날이 정말 지옥과도 같다.

 

 

 

대망의 마지막 점프는 사실 이제까지의 점프 중 가장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모든 참가자들이 몇 초 정도의 간격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응원이 미지근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마지막 점프가 되니 관객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마지막 선수의 점프까지 계속 박수를 이어가 준다.

 

폭설에 가까운 눈으로 결코 쉽지는 않을 점프였겠지만 훌륭히 멋진 모습을 보여 준 선수들에게 던지는 박수소리를 끝으로 이벤트가 끝이 난다.

 

 

 

사실상 눈축제의 마지막 밤을 후련한 퍼포먼스로 만족시키고 난 후, 폭설 속을 뚫고 삿포로 역으로 걸어간다.

코가 얼어서 맛이 느껴질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축제를 즐겼으니 맛있는 저녁이라도 먹어볼까 싶다.

어제는 피곤해서 저녁에 편의점 도시락 하나 까먹고 잤기 때문에 뭔가 아쉬운 기분이 남아있다.

 

스스키노쪽에 먹거리가 많긴 하지만 이동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아서 숙소 근처의 삿포로역으로 향한다.

역 내부는 가격이 좀 세긴 해도 한국과 달리 꽤나 먹을만한 것들이 많다.

 

 

 

홋카이도의 소울 푸드라는 징기스칸은 어차피 마지막날 먹을 계획을 세워놨기 때문에

식당가로 올라가서 뭘 먹어볼까 두리번거린 끝에 그다지 비싸지 않은 양식집으로 들어간다.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 한 잔과 함께 미디엄 레어로 일본식 스테이크 하나 주문.

 

축제 기간이긴 하지만 역내 음식점이다 보니 슈트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모여서 뭐라뭐라 떠들기도 한다.

대충 나하고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젊은 샐러리맨 둘이 맥주 마시면서 한국 시장이 어쩌고 하는 말을 진지하게 나누고 있는 중.

 

양은 좀 작지만 스테이크 품질은 매우 훌륭하다. 미국식 정통 스테이크와는 달리 씹히는 맛이 강한 한국 숯불구이 같은 느낌이랄까.

술을 즐기지 않는 본인이지만 삿포로에 와서 맥주 안 마시기는 좀 그랬는데, 스테이크가 맛있으니 술도 그럭저럭 들어간다.

 

물론 맥주 반 잔만 마셔도 온 몸이 신호등처럼 새빨개지기 때문에 마시고 나면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냥 앉아있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당연히 취하지는 않아서 느긋하게 스테이크의 육질을 음미하며 수첩을 꺼내 밀린 일기를 쓴다.

 

 

 

맥주 탓에 얼어붙었던 몸도 금새 녹았고, 한 시간 가량 식사와 일기를 즐기고 숙소로 돌아간다.

8시만 되어도 술집과 파칭코 가게 외에는 거의 조용해지는 분위기라서, 조금 전 그 뜨거웠던 스키 점프가 한 줌의 꿈처럼 느껴지는 고요함.

 

삿포로가 워낙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다 보니 보통 외곽에 많이 위치한 대형 파칭코 가게가 역 주변에도 참 많이 포진해 있다.

파칭코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면 취기도 올라왔겠다 시원하게 한 판 땡기고 가겠는데, 돈이 아까워서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오늘 밤까지 실컷 내리고 오타루에서는 맑은 하늘이 맞이해주길 바라며 숙소 골목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다.

 

LP의 부드러운 음색에 취해 한동안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슬슬 밖으로 나간다.

Y양과 코마츠군은 저녁에 식사 약속이 있다고 해서 너무 늦기전에 전철을 타야 한다.

내일은 오타루를 둘러볼 예정이라고 하는데 괜찮으면 함께 가잔다. 나 역시 내일은 오타루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동의.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고 날씨도 더욱 쌀쌀해진다.

삿포로의 날씨가 서울과 비교해서 그리 추운편은 아니라지만 눈이 워낙 많이오기 때문에 밤이 되면 체감적으로 더 추운 느낌이다.

 

관광객이 워낙 많은 눈축제장이라 가능하면 시계 반대방향으로 회장을 한 바퀴 돌수 있도록 요원들이 지도를 하고 있다.

인파가 역방향으로 엉켜버리면 워낙 난잡해질 가능성이 있어서. 그래서 일단 Y양과 코마츠군은 전철 타는 곳까지 걸어가며 못 본 전시물들을 구경하기로 한다.

일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울트라맨. 이것 외에도 고지라 등 50~60년 전의 캐릭터들이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부럽기 그지없다.

 

 

 

곰이 서 있어서 혹시 쿠마모토의 마스코트인 쿠마몬인가 싶었는데

옆에 TV타워로 보이는 건물과 함께 곰 가슴에 홋카이도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쿠마모토와 홋카이도의 합작품인가 싶기도 하다.

홋카이도는 이주 역사가 짧은 만큼 그 반작용으로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저 지도는 여러가지로 많이 쓰이곤 하는데, 삿포로 맥주정원의 명물인 무한 징기스칸의 불판도 홋카이도의 지도모양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역시 알아보기 힘든 일본 지역 캐릭터보다 이런 세계적인 캐릭터들이 이해하기 쉽다.

일부러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쪽에 눈이 쌓여서 마치 머리카락 자란 푸우처럼 보이는게 재미있다.

 

 

 

호빵맨에 나오는 세균맨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뭔가 얼굴이 심각하게 무서워서 인상적.

호빵맨은 참 순수한 얼굴밖에 나오지 않지만 어른들의 장난으로 여러가지 무서운 바리에이션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터널을 통과하는 하행 신칸센.

현재 홋카이도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로, 도쿄에서 삿포로까지 신칸센 철로를 만드는 공사가 2015년 완공 예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탓에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이 녀석이 완공되면 도쿄에서 삿포로까지 4시간에 이동이 가능해진다.

 

옆의 설명 간판에는 사용할 수 있는 IC 카드까지 설명해놓는 살짝 개그스러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것도 뭔가의 마스코트인 듯 한데 알 수가 없다. 코마츠군에게 계속 물어보기도 미안하고.

스키를 신고 있는걸로 봐서 동계올림픽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홋카이도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 당연히 캐릭터의 인지도 때문일거라 생각한다.

스마트기기의 보급과 함께 터진 첫 번째 대박 앵그리버드의 주인공.

인기작이라 그런지 특징 묘사도 꽤나 잘 되어있어서 아는 사람은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제작팀 쪽에서 일부러 넣은건지 군데군데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도 재미있다.

 

 

 

축제에 대한 일본인의 꼼꼼한 준비성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자판기 스킨마저도 축제 캐릭터를 집어넣는 모습은 한국에서도 배워갈 만한 점이 아닌가 싶다.

당연히 이런 걸로 매상의 변동에 큰 영향은 없겠지만, 본인처럼 소소한 부분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가 아닐런지.

 

 

 

회장 중간부분엔 세계 각국의 팀이 출품하는 국제 눈조각 콩쿠르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 팀도 분명 출전했을거라 생각해서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이 올해 콩쿠르 우승작이라고 한다.

처음엔 뭔가 싶었는데 설명문을 보니 금새 이해가 간다. 하나되는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

 

 

 

워낙 일본이라는 나라가 공동체의식을 중요시하기도 하고, 세계인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을 앞둔 시기이도 하고

특히 지금 일본은 협동과 협력이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보니 한국팀이 시류를 잘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출품작들에 비해 모던 아트적인 느낌도 들고, 자세히 뜯어보니 우승 먹을만 하겠다는 생각.

 

 

 

조형의 퀄리티는 다른 국가 팀들의 작품도 결코 떨어지지 않지만, 주제 표현이라는 면에서는 확실히 한국팀이 뛰어나다.

물론 이 눈조각 콩쿠르라는 것이 피말리게 경쟁해서 우승을 거머쥐는 그런 대회가 아니라서.

 

 

 

저녁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Y양 일행은 이제 돌아가는 중이니 그렇다치고 본인은 좀 더 눈축제를 구경하려고 생각중인데.

바로 돌아가기에는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지만 추운 날씨에 무리하는건 앞으로의 여행에 지장을 줄 지도 모르니 신중해야 할 듯.

 

어둑어둑해지니 좀 전까지 새하얀 자태를 자랑하던 퐁키 키즈의 거대한 조각상이 고운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낮에 새햐안 눈색을 만끽하고 저녁에 화려한 조명빨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눈축제의 묘미 중 하나가 아닐까.

 

 

 

여기저기서 대인기인 후낫시. 확실히 일본에서 인기몰이중인듯, 관광객 중에 '후낫시다~' 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꽤 많다.

코마츠군도 후낫시를 매우 좋아하는지 싱글벙글하며 사진을 찍는다. 그러고보니 코마츠군에게도 뭔가 선물을 줬었어야 하지 않았다 싶다.

Y양은 한국에서 타지까지 와서 고생한다고 과자라도 하나 사드렸는데, 코마츠군은 토박이라는 생각에 선물 생각을 깜빡 한 듯 하다.

 

 

 

일행 셋이 전부 사진찍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라서, 이동 속도 맞추기가 쉬운 점이 참 마음 편하다.

사진에 관심없는 일행이라면 어쨌든 찍는 입장에서 시간을 잡아먹는 모습이 되기 때문에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드는데.

 

낮과 밤의 이미지가 이렇게 달라지면 어쩐지 이득보는 기분이 된다.

 

 

 

무려 자위대 삿포로지부 마스코트인 모코가 회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홋카이도 토박이인 코마츠군이 설명해 준다.

자위대는 당연히 모병제이다 보니 항상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홍보에도 열을 올리는 중이다.

군대라고 해서 마스코트를 딱딱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컨셉으로 나온 듯한 느낌.

 

 

 

밤이 되면 밤을 이용한 즐길거리가 등장한다. 단순히 불만 켜 놓는 것 보다 훨씬 좋은 아이디어.

저 멀리서 레이저로 바닥에 캐릭터 그림을 비춰주니 아이들이 재밌어하며 달려든다. 이럴 때는 물론 좋은 셔터찬스.

저작권(?) 문제로 가능하면 얼굴이 나오지 않게 소심하게 찍는다. 어디서 아이 부모가 달려와 카메라를 내던지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며.

 

 

 

거대한 전시물들은 오히려 밤이 되니 그 위용을 드러내는 듯 하다. 주위의 어둠과 대비되어 명암도 확실해지고 웅장함이 더해진다.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 낮보다 사람이 훨씬 많은 듯 하다. 역시 축제는 저녁부터가 본편인 것인가.

 

이러나저러나 날씨도 매우 춥고 조명이 9시 정도까지밖에 켜지지 않기 때문에,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초저녁 기분밖에 나지 않지만.

Y양이나 코마츠군이 저녁약속 없고 술이나 펍의 분위기를 즐기는 타입이었다면 늦은 밤까지 술안주를 즐겼을 테지만

두 사람 모두 나와는 다른 매우 착실한 생활을 하고 있는 분위기라서 살짝 아쉽긴 했다.

 

 

 

말레이시아 가게에서는 현란한 반죽돌리기를 시연하고 있다.

피자 도우 돌리는것과 비슷하긴 한데 좀 더 유연성이 있어서 움직임이 비규칙적이라 더욱 생동감이 느껴진다.

 

겨울 삿포로 축제장에서 말레이시아 사람이 그것도 무려 반팔로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더 놀라웠지만.

음식 만드는 부스 내부는 어디든 춥기보다는 덥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데, 실제로 보면 또 그게 금방 이해되기는 어렵다.

열정을 봐서 하나 사먹어 주고 싶기는 했지만 Y양 일행은 이제 저녁먹으로 가는 중이고

본인 역시 홀로 저녁이지만 괜찮은 녀석 먹고 싶어서 배를 비우는 중이라 군것질은 힘들다.

 

 

 

오오도리 중앙에 도착해 Y양과 코마츠군은 전철을 탄다. 눈축제 기간이라도 삿포로는 돌아가고 있으니 저녁시간대의 인파는 대단하다.

혼잡한 개찰구에서 내일 삿포로역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초면 일행들과의 관광이라서 좀 긴장한 탓인지, 큰일 하나 끝내고 홀가분한 기분도 없지 않다.

물론 눈축제 같은 행사는 혼자서 묵묵히 걸어다니며 사진찍어봤자 별로 재미있지 않으니 일행이 생긴 건 나에게 참 좋은 이벤트였긴 하다.

 

6시도 되지않은 시간이라 어둑어둑한 하늘과 달리 이대로 돌아가기엔 많이 아쉽다.

형형색색의 대만측 얼음궁전을 감상하며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잠시 생각해 본다.

 

 

 

인파가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몰리고 있는데, 주변에서 확성기를 든 사람들이 스키 점프를 위해 이동을 서둘러 달라는 소리를 지른다.

아마도 어젯밤 텅 비었던 그 점프대에서 오늘도 이벤트가 일어나는 모양이라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슬금슬금 걸어간다.

 

점프 구경은 아마도 자리를 한번 잡으면 꼼짝도 못하고 있어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이 추운 날씨에 Y양 일행과 보려고 했다면 괜히 극기훈련 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해 질 수도 있었을 듯.

 

점프 이벤트는 6시에 시작하는데, 다행이 조금 이른 시간이라 무난하게 펜스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다.

10여분 전부터는 뒤로 빠져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진행요원들은 이동하는 사람들 방해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한다.

 

 

나름 괜찮은 장소다 싶었는데 사람이 가득 들어차고 나니 방송이 나온다.

오늘 점프는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한다고. 라인의 상태도 전혀 다른걸 봐서 아무래도 점프도 종목이 따로 있는가보다.

 

왼쪽에 자리를 잡은 탓에 생각한 것보다 시야가 확 트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일찍 온 것은 다행.

늦었으면 사진 대부분의 하단부엔 시커먼 뒷통수가 난립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을테니까.

 

 

 

망원으로 갈아끼우고 눈 펑펑 쏟아지는 저녁에 서 있으니 팔은 뻐근하고 다리는 욱신거린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망원을 통해 보는 게 훨씬 잘 보이니 계속 주시중인데, 준비하는 선수들이 굉장히 어려보인다.

저 위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다리에 힘이 쏙 빠질것 같은 높인데다가 거기서 수십 km의 속도로 점프를 하다니.

 

스피드를 즐기는 운동은 별로 하지 않는 본인으로서는 섬뜩하기만 하다. 부디 실패하는 일은 없기를.

 

 

 

타이밍 좋게도 점프가 시작할 즈음부터 내리는 눈이 더욱 거세진다.

이 정도로 눈내리는 상황에서 사진을 찍는 경험은 처음이라 좋은 연습이 되리라 생각.

 

사실 이번 여행중 눈이 이 정도로 내리기를 바라는 날이 딱 하루 있다.

토카치(十勝) 지방의 독특한 경마인 반에이 경마는 자이언트급의 거대 경주마들이 속도보다 파워를 겨루는 경기인데

원래 겨울경기에 특화된 녀석들이라, 내가 가는 날짜에 눈이 펑펑 내려주면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아서 기대중이다.

안내린다면 어쩔 수 없지만 운이 좋으면 이번 폭설이 그 날 촬영의 시험촬영 쯤 될 수 있을테니 나쁘지 않다.

 

 

 

풀프레임 망원렌즈는 베낭여행에 가져가기엔 참 크고 무거운 녀석이라 여간 귀찮은게 아닌데

그래도 다가갈 수 없는 지역의 모습을 찍을 일이 많은 경우엔 항상 믿음직하게 사진을 뽑아주기 때문에 내치고 갈 수가 없다.

 

살짝 억지스럽게 악을 쓰고 있지만, 촬영의 편의를 위해 손가락쪽은 드러난 손목 보온대만 차고 있어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망원렌즈를 물린 풀프레임 카메라를 들고 있으니 극기훈련하는 느낌이 든다.

겨울 홋카이도의 위력이란 걸 실감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이번 여행은 주욱 이 차림으로 갈 생각인데

고작 삿포로 정도에서 고생한다면 앞으로가 험난할거라 생각해 어찌어찌 참아보려고 노력중.

 

 

 

어쨌든 실수하면 생명마저도 위험한 점프이다 보니 안전관리에는 각별히 신경 쓰는 느낌이다.

몇 안되는 인원들이 정말 땀흘리며 열심히 필드를 고르고 있다.

 

왼쪽 점프대는 매끈하게 닦여져 있는데, 오늘 점프하는 오른쪽은 눈이 굉장히 울퉁불퉁하게 쌓여 있어서

아마도 점프의 종류에 따라 지면의 상태도 달라야 하는 것인가 싶다.

 

 

 

30여분간의 기다림 끝에 DJ 같은 사회자의 신명나는 목소리와 함께 이벤트가 시작된다.

한국과 달리 이런 쪽에서는 감정표현을 자제하는 일본 사람들의 특성상, DJ 가 흥을 띄우려 노력해도 신사적인 박수 외에는 꽤나 조용한 편.

선술집에서는 누가누가 소리 잘 지르나 싶을 정도로 웃고 떠드는 일본 사람이지만 이런 곳에선 왠지 사회적인 분위기에 신경을 쓰나 보다.

 

가볍게 한 사람씩 점프가 시작되는데

조명이 있다고는 해도 이런 캄캄한 밤에 조리개값 어두운 망원렌즈로 질주하는 스키어들을 잡아낸다는 게 보통 힘든일이 아니다.

내 카메라가 동체추적에 특화된 모델도 아니라 일단 평소 습관대로 싱글 AF 에다가 연사만 걸어놓고 타이밍을 노려서 찍어본다.

 

아주 구닥다리 카메라는 아니라서 다행히도 3장 중 1장은 그럭저럭 건질 만한 녀석이 나온다. 감도를 3200 에서 6400 까지 올려야 겨우 셔터스피드가 확보되긴 하지만.

 

 

 

이번 이벤트는 누가누가 멀리 날아가는가가 아니라 익스트림처럼 멋진 동작을 보여주는 쪽으로 진행되는 듯 하다.

점프대 자체의 높이도 아찔한데 그걸 몸을 꼬면서 날아가는 스키어들의 모습을 보니 거의 서커스 보는 느낌.

 

홋카이도에서는 친숙한 겨울스포츠지만 관객들 사이에서도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선수들의 연령대는 대학생이나 사회인도 있지만 상당수가 지역 중고등학교 학생들이라 놀라울 따름이다.

 

 

 

전부 개성있는 포즈라 점프 위치만 같을 뿐이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어떤 식으로 몸을 움직이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거의 패닝샷에 가깝게 카메라를 움직여가며 촬영할 수 밖에 없는데, 다행히도 촛점이 잡히기만 하면 대충 찍을 순 있다.

 

컴팩트 카메라 들고 온 사람들은 거의 동영상 촬영용으로 쓰고 있는 분위기.

맛폰 촬영탓인지 여기저기서 번쩍거리기는 하는데, 이 거리에서 플래시 터져봤자 별 의미가 없다.

휙휙 날아올라서 사뿐하게 착지하는 인간같지 않는 모습에 감탄하면서 눈을 뷰파인더에서 뗐다 붙였다 한다.

사진만 담으면 실제로 보는 재미가 줄어들기 때문에 둘 다 놓치지 않기가 참 피곤하지만, 집중해서 다음 선수들의 점프를 주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