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청결도가 어쨌든 간에 피곤해서인지 잠은 잘 잤다.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는데, 일정이 바쁜 단체 관광객은 벌써 다 떠나고 없다.
호텔이라는 이름을 달기엔 심하게 낡은 곳이라, 기본 식단이 차려진 식탁에 앉아서 밥과 국만 직접 솥에서 떠 오면 되는 시스템.
그런데 식단이 차려진 테이블이 한 군데밖에 없고 맞은편에도 하나 차려져 있어서인지 내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이 어물쩡거리다가 내 앞에 앉는다. 불편하다면 그냥 상을 들고 다른 테이블에 가면 될 일인데.
본인은 그런 거 신경쓰지 않으니 그냥 식사를 시작한다. 매우 전형적인 일본식 식단이라 아침에 먹기에 부담감이 없어서 좋다.
식자제는 충분히 신선한 지역이고 쌀은 역시나 맛있는 편이라 조금씩 음미하며 식사를 즐긴다.
하지만 대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맞은편 남성은 이런 식단이 심히 난감한지 보는 사람 감질나게 깨작거리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대강대강 먹다가 결국 저 달걀이 삶지 않은 날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그냥 두고 가 버린다.
저 많지 않은 반찬도 조금씩만 맛보고 거의 남기는 수준이었는데 이러면 역시 그냥 두기 아깝다.
달걀은 삶은 것인지 확인한다고 조금 깨져 있는 상태라 다른 사람에게 다시 내 놓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니 스스럼없이 내 달걀을 밥 위에 얹어 간장을 부어 후다닥 흡입한 후, 한 그릇을 더 담아 맞은편 계란도 밥 위에 끼얹어 버렸다.
일본 자전거 여행 중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홈스테이 하던 소야노 아주머니가 휠체어 생활인 탓에
굳이 나를 위해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시는게 매우 미안했었다.
그래서 밥만 예약으로 지어놓고 나머지는 날계란에 간장 뿌려서 먹겠다는 제안을 했고 아주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뽀송뽀송한 흰 쌀밥에 달계란과 간장을 비벼먹으면 그 맛은 천하 일품. 일본 계란은 충분히 날 것으로 먹는 상황을 상정하고 기르기 때문에 위생문제도 없다.
별 것 없는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하고 밖으로 나온다. 히타카츠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4번 정도 오는데 아직 1시간 30분 정도 남아있다.
바로 히타카츠까지 간다면 아무거나 타도 되겠지만, 중간에 니이(仁位)라는 곳에 내려서 구경을 좀 하고 다시 버스를 탈 예정이다.
버스간 간격이 2시간 조금 넘으니 시간을 잘 체크해야 엉뚱한 곳에서 노숙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듯.
걸어서 쉽게 구경할 만한 게 없을까 생각하며 무작정 걸어가다 보니 재미있는 쓰레기 수거함이 보인다.
일본은 보통 까마귀나 고양이 등이 쓰레기 봉투를 습격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저런 수거함을 사용하는데
아무래도 그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그냥 쓰레기통인가 싶어 수거봉투에 들지 않은 그냥 쓰레기를 막 버렸나 보다.
주민들로서는 꽤나 짜증나는 일이었는지 '천벌이 당장에 내림'이라는 무당집에서나 볼 법한 문구와 함께 멋진 번개그림까지 그려놓았다.
외국에서 이상한 한글 표지를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시내라 할 것도 없는 조그만 상업지구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꽤나 넓은 주차장 너머로 신사 같은 녀석이 보인다.
자동차를 렌트한 한국인 가족이나 단체 관광 버스도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니 이 곳에서는 나름 이름있는 신사인 듯.
신사는 산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조그마한 언덕 사이에 위치한 아담한 모습이지만
주차장이 생각보다 넓어서 관광객 용으로 꽤나 인기를 끄는 곳인가 생각해 본다.
해풍이 강하고 유지보수가 쉽지 않은 조그만 섬에서는 이렇게 돌로 만든 토리이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
바다 가운데 용감하게도 나무로 된 토리이를 세운 히로시마의 이츠쿠시마(厳島)신사는 어마어마한 수입이 있기에 가능하다.
아침부터 이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사람의 대부분은 한국인 관광객이다.
실제로는 섬사람들이 틈나면 간간히 찾아오는 그들의 생활속 신사이겠지만
볼거리가 그리 많지 않은 이곳 대마도에서는 그냥 지나칠만한 평범한 신사도 일단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는 듯 하다.
주차장 앞의 간판을 읽어보니 이곳은 하치만구(八幡宮) 신사라고 하는데, 원래 하치만은 전쟁의 신으로 이런 곳에서 모시는 신은
대부분 외세로부터 마을을 보호했거나 어딘가를 점령한 실존 혹은 가상 인물인 경우가 많다. 대마도라는 위치상 뭔가 꺼림직한 부분.
주차장에서 보니 토리이가 두 개 서 있다. 이것은 신사가 두 개 있다는 증거. 아무래도 하치만구 외에도 뭔가가 하나 더 있는 듯.
본인은 한국의 절처럼 신사 그 자체보다는 지리적으로 자연과 가깝다는 점 때문에 풍경을 즐기러 가다보니
굳이 어떤 일을 한 신을 모시고 있는가에 별 관심은 없지만, 아무래도 대마도에서 한국과의 역사적 관계를 무시하기는 힘들다.
하치만구 쪽으로 가 보니 문 양쪽에 코마이누(狛犬)가 서 있다. 보통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이 암컷.
개와 사자를 섞어놓은 듯한 이 녀석은 보통 고려시대에 전파된 한국 토종개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원류를 따지고 가자면 이런 수호신은 대부분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신사는 그럭저럭 오래 된 녀석인지 옆에 서 있는 비석이 꽤나 오래된 느낌을 준다.
그냥 돌기둥이라면 별 매력이 없겠지만 공기좋은 산 속에 수국 등의 아름다운 꽃과 함께 있으니 묘한 조화를 이룬다.
사람의 손을 탄 것들이라도 역시 자연의 백업이 없으면 빛을 발하기 어렵다.
하치만구의 설명을 보니 예전 삼한시대 한국에 임나일본부를 세운 가상의 인물을 모시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하치만구라는 이름을 들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있지도 않은 이야기의 주인공에 마음대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곳이다.
학계에서도 처절히 매장당한 학설이라 더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도 한 때 잘나갔지'하고 자위라도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그냥 코웃음 한 번 치고 사진이나 담으면 될려나.
한국 관광객도 이런 신사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는게 멍청한 짓 하지 않기 위한 요건이 아닐까 싶다.
대포 탄약처럼 보이는 것들이 줄줄이 서 있어서 신기하다.
하치만구 설명을 보고 나서는 그냥 주변 풍경이나 둘러보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 녀석들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과도 관계가 없는 지역이다 보니 아리송하긴 하지만. 어쩌면 포탄이 아니라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사는 둘째치고 주위를 둘러싼 거목들 모습은 참 훌륭하다.
기후상 한국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녀석들이라 이국적인 느낌을 받게 하는 몇 안되는 자연물 중 하나.
삼나무가 많은 일본의 산과 숲은 그래서인지 한국보다 무서운 이미지를 갖고 있는 편. 빡빡한 곳은 낮에 들어가도 꽤나 음산하다.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조그만 신사는 이마미야(今宮) 신사라고 하는데,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딸을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사정에 능통한 이곳 대마도 번주 소우 요시토시(宗 義智)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장수였던 코니시의 딸과 그를 결혼시키게 했는데, 코니시는 히데요시 사후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적대하게 되어 사망한다.
소우 요시토시는 자신에게 불길이 옮기는 것을 두려워 해 코니시의 딸인 자기 아내를 나가사키로 귀향보내 평생 마주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대마도 사람들은 그 아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 신사를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의 신사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귀족의 혼을 달래기 위한 신사를 많이 모신다.
신사라는 것이 숭배의 대상과 함께 원귀의 넋을 달래어 진정시키는 대조적인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토속신앙의 궁극적 목적인 '살아있는 사람이 잘 살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미에서라면 둘 다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으니
신사는 의외로 상당히 현실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은혜로운 신에게 빌어 축복을 받는 것이나, 원한을 가져서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귀신을 달래는 것이나 결론적으로는 같은 행위니까.
거목 중에는 뿌리 부분에 동굴처럼 구멍이 생겨 그것을 시멘트로 발라버린 모습도 볼 수 있다.
나무가 문제라기보다는 저기 들어가려는 사람이 문제가 되어서 설치한 게 아닌가 싶다.
아이 한명 정도는 쉽게 들어갈만한 공간이라, 괜히 문제생기면 곤란해 질 수도 있을테니까.
나름 나무 색깔과 어울리기는 하지만 역시 실감이 전혀 다르다 보니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사 구경을 가볍게 마치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이제는 그냥 버스 시간까지 마을 풍경이나 감상하려 한다.
바다와 맞닿은 곳이라 평소 내륙지역에서 서식중인 본인으로서는 신기해 보이는 모습이 꽤나 많이 보인다.
밀물과 썰물간 풍경이 심히 다를 것이라 예상되는 지역의 모습. 자기 집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차오르는 느낌은 어떤 것일런지.
대문앞을 꾸미는 건 일본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해도 될려나.
분명 이제는 사용하지 않을 조그만 자전거도 꽃바구니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풍경에 녹아들어가 있다.
한국 아파트 정원에서는 대나무를 심으니 죽순을 캐 가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일도 있었는데
마당이 있든 없든 일본의 주택가에는 화단과 정원이 이렇게 늘어서 있어도 그런 일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자동차도 작은 녀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트럭조차도 심히 앙증맞다. 한국에서 저런 녀석을 본 기억은 없다.
짐을 얼마나 실을 수 있는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달리는 모습이 꽤나 귀여울 듯 하다.
하천 제방쪽 구멍에 비둘기 꽁무니가 보이길래 한동안 관찰해 본다.
그냥 휴식을 취하는 모습으로는 보기 힘들고 구멍 안쪽으로 뭔가가 있는 것처럼 들락날락 하고 있다.
아무래도 저 안에서 새끼를 기르고 있는 듯. 배수구가 아닌가 해서 놀랐지만 물 흐른 흔적을 보니 실제로 배수는 옆쪽 구멍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보인다.
저 녀석이 날아가고 나서 줌을 당겨 확인해 보니 역시 새끼들 몇 마리가 오손도손 앉아 있다.
조금만 더 크면 혼자 날아갈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다. 주택가나 아파트 단지쪽에서 사람 괴롭히는 것 보다는 이런 곳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그렇고 그런 구멍이 몇 개 있는걸 보니 비둘기들에게는 꽤나 인기있는 서식지인가 보다.
바로 밑 구멍에서도 한 마리가 왔다갔다 하는데 내가 카메라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한동안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새끼를 확인할 수 없는 각도라 내부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이 꽤나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걸 보니 뭔가 있기는 한 듯.
다행히 본인으로서는 아무런 악의가 없으니 말똥말똥한 녀석의 얼굴이나 찍어주고 자리를 피해준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점차 사라져 가는 골목 풍경이지만 아마 대마도는 꽤나 오랫동안 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게 개인주의를 좋아하는 나라이면서도 집만큼은 저렇게 담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여 놓은건지.
시골 사람들끼리는 비밀도 없다지만 특히 일본은 시골로 갈수록 공동체 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서 도시사람들 입장에서는 좀 번거롭기까지 하다.
젊은 세대가 남아있는 시골에서는 마을 소방단까지 조직해서 수시로 화재 점검을 하고 있으니까.
여행객 입장에서는 이런 풍경들이 옛 정취 풍기는 그림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것도 그런 점에서 연유할지도 모르겠다.
보기는 좋지만 만질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할까. 물론 드문 확률로 저 공동체에 잠깐이나마 소속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버스 정류장 앞의 티아라 쇼핑몰 1층의 빵집에서 따끈따끈한 카레빵을 하나 구입한다.
히타카츠에 도착하면야 먹거리는 충분히 살 수 있겠지만 중간에 내려서 구경할 니이에서는 그럴 시간이 없다.
원래 니이쪽은 자동차나 최소 자전거 정도는 있어야 원할하게 구경이 가능한데
그런게 없이 버스로 이동하는 입장에서는 다음 버스가 도착할 시간까지 열심히 걸어도 관광지를 왕복하기가 빠듯하다.
티아라몰 중앙 에스컬레이터 쪽에는 이쪽 학생들이 만든 큰 장식이 걸려있다.
한일 화합과 교류를 위해 만든 녀석인 듯 한데, 저게 일본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심히 헷갈린다.
서로의 특징을 완전히 이해하고 표현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형이상학적으로 만들어서는.
뺨에 연지로 보이는 화장 정도가 한국사람을 환영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어제 구입해 둔 버스 1일권을 쥐고 정류장에서 기다린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각각 절반쯤 되려나.
단체관광객은 따로 버스를 타고 갔을 텐데도 이 정도로 사람이 많이 서 있다는 점이 조금 불안하다.
날씨도 덥고 해서 가능하면 좌석에 앉아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다행히도 아주 뒤쪽에 줄을 선 것은 아니라 그리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줄였다고는 해도 백팩과 카메라용 사이드백이라는 짐을 갖고 있는 본인이라 옆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움츠리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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