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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밥'에 해당하는 글들

  1. 2015.08.18  대구에 생긴 캇파즈시 4
  2. 2014.01.05  과거로의 여행 - 나고야의 사치 & 향락 6
  3. 2012.06.12  킨키 방황 - 우메다에서 마지막 화풀이 17
  4. 2010.02.11  오사카(쿄토)여행기 9편 - 금각사 14
  5. 2010.02.10  오사카 여행기 8편 - 빛나는 우메다 공중정원 23
  6. 2008.08.16  동경여행기 10편 - 오다이바(お台場), 츠키지 수산시장(築地水産市場) 12

 

 

친구하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대구 시내에 나갔습니다. 한 달 전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예전에 시내 돌아다닐 때 일본서 친숙했던 회전초밥집 캇파즈시 간판이 보여서 신기했기에

이번 영화보기 전 맛을 한 번 보기로 결심하고 있었죠.

 

물론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캇파즈시 자체가 일본에서도 저가형 회전초밥집이기도 하고

그것조차 내륙지역인 대구에서 뭘 기대할까 싶은 기분이었으니까요.

 

방문하니 개점 기념인가 뭔가 해서 정액제(?)가 실시중이었습니다.

저야 정액제 해도 접시수 채울 수 있지만 친구와 동생분이 과연 그렇게 먹어댈 것인가가 약간 걱정되더군요.

 

 

 

처음 자리에 앉아서 흰새우 초밥을 먹어보니 왠걸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서 놀랐습니다.

 

90분간 18000원 정도의 가격이었는데, 일본 캇파즈시 최저가 초밥 한 접시가 105엔이고

보통은 아무리 안 먹어도 최저가보다 두세 배 비싼 초밥을 몇 접시는 반드시 먹게 마련이니

거의 이거보다 더 내려갈 수 없는 최저가였는데, 흰새우 초밥은 그냥저냥 먹을 만 하더군요.

 

 

 

하지만 사실 흰새우 초밥이 이 가게에서 제일 신선한 녀석이었다는게 함정이었네요.

나머지 초밥은 생선살은 제대로 된 게 거의 없고, 이런 패류 초밥들은 거의 건조된 거나 마찬가지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의 내륙 지역에서 이런 회전초밥이라면 가격대로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죠.

대구 시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몇몇 회전초밥집은 예전에 가 보니 초밥이라 부르기가 힘든 레벨이었으니까.

 

 

 

생선초밥보다 이런 오리훈제 초밥이 인기 순위에 들어있다고 자랑하는 팜플렛에서 이미 결론난 상황이긴 합니다.

생선초밥의 신선도는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고, 그나마 종류도 별로 없고, 있어봤자 일본의 105엔 초밥 이상의 메뉴는 없습니다.

 

참치초밥이란 것도 기름기 없는 최하급 부위만 덩그러니 올라가 있어서 굳이 먹을 필요가 없었고 말이죠.

 

 

 

메뉴가 있어서 신기할 정도였던 게살과 게장 군함말이였습니다.

게살은 퍼석퍼석하고 게장은 반쯤 농담으로 발효시킨 정도라 해도 되겠지만

그래도 가격이 모든것을 상쇄해 줍니다. 정말로 대구 회전초밥집에서 이거 이상을 기대할 수가 없거든요.

 

차라리 일본의 좀 괜찮은 회전초밥처럼 기본이 300엔 이상에 고급은 600~800엔 짜리 접시가 돌아가는

그런 초밥집도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 대구에서 그 정도 레벨이라면 회전초밥에 내밀 필요도 없으니 애석할 따름입니다.

 

 

수준 파악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정말 의미없는 행동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예의상 계란말이도 하나 시켜봅니다.

초밥이 아니라 그냥 계란이 통째로 하나 딸려오네요. 일본에서도 이렇게 주는 데가 있으니 특이하진 않지만.

 

 

 

시스템만은 일본의 캇파즈시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회전 테이블에 올려져 있지 않은 것들을 터치패널로 주문하면 열차가 초밥을 싣고 달려옵니다.

일본 것을 그대로 가져왔는지 열차에 일어가 적혀있더군요.

 

요즘 일본의 캇파즈시나 스시로 등의 저가 회전초밥집들은 주요 소비층들을 공략하기 위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개발하고 있죠.

다 먹은 빈 접시를 투입하는 구멍이 있어서 거기 5개를 넣으면 모니터에서 슬롯머신이 돌아갑니다.

당첨되면 휴대폰 스트랩 등 조그만 선물을 증정하기도 하죠. 부모들과 온 아이들이 재미삼아 돌리기 위해 초밥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대구쪽 캇파즈시는 아직 그런 모델까지 도입하지는 못했네요.

 

 

 

인기 NO.1 이었나 NO.2 였나 추천하는게 이런 녀석입니다.

일본 초밥집에서 인기 NO에 이런 녀석이 올라가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마을의 토픽감일텐데 말이죠.

 

여기서는 날생선 레벨이 이 녀석보다 위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순수한 결정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녀석도 랭킹에 올라가 있었던 걸로 기억.

 

중반을 넘어가니 생선은 먹을 게 없고 해서 이런 것도 재미로 시켜봅니다.

물론 고기니까 맛이 없진 않는데, 전체적으로 간도 짜고 조미료맛이 강해서 난감하네요.

생선초밥의 아이덴티티와 괴리가 심한 느낌이죠. 이런 강렬한 소스로 무장한 녀석을 먹으면 생선초밥이 너무 싱겁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시간은 꽉 채우고 나가기 위해 이젠 별의 결 것을 다 시켜봅니다.

그래도 고로케는 나름 맛있더군요. 일본에서도 아이들이 이런 데 오면 생선초밥보다 이런 곁들이 요리를 많이 시키니까요.

 

그러고보니 초밥의 친구인 녹차는 어디가고 탄산음료 등이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모습도 조금 특이했습니다.

초밥에 찍어먹는 간장도 사실 초밥용이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양조간장을 써서 맛 밸런스가 안맞더군요.

어쩌겠습니까. 그냥 가격대 성능비를 즐기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면 먹을 만 합니다.

 

 

 

와사비 문어는 제가 참 좋아하는 메뉴인데, 짠 맛이 강하고 와사비 맛이 별로라서 이것도 그냥저냥.

세삼 한국에서 중저가 초밥으로 만족하기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서울쯤 가면 일본에서도 일류로 통할 만한 장인들이 쥐는 초밥집이 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가격이 십만 원대를 넘어가니 자주 먹을만한 녀석이 아니죠.

 

일본에서는 저가형 회전초밥 말고도 어느정도 레벨을 갖춘 회전초밥집도 있어서, 1인당 4~5만원 정도 투자해 만족할만한 레벨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한국은 그 정도의 중간대 초밥을 찾기가 참 힘드네요.

 

 

 

그래도 초밥집 분위기나 시스템만큼은 일본의 캇파즈시를 거의 완벽히 가져왔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추억을 음미하며 즐기는 정도의 재미는 있었습니다.

 

초밥을 더 먹을 게 없어서 별걸 다 시켜보네요. 전체적으로 너무 짠 느낌이라 나중에 고생 좀 했습니다만.

 

 

 

코코넛 새우튀김이란 것도 있어서 무조건 시켜봅니다.

맛은 별로지만 따끈따근하게 나와서 와작와작 씹어먹기는 좋네요.

친구와 동생분은 나름 많이 먹으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역시 기본인 18접시까지 가기는 좀 힘들었나 보네요.

 

 

 

과일이나 디저트류는 몇 접시 이상 주문시 추가요금이 가산되기도 하더군요.

대부분의 뷔페집들이 그렇습니다만, 케이크 같은 디저트류는 많이 먹을수록 가게쪽 손해라 어느 정도 제한을 둡니다.

 

 

 

그래도 이미 초밥에서는 흥미가 멀어진 동생분이 이것저것 디저트를 시켜봅니다.

샤베트 홍시는 맛있었나 모르겠네요. 저는 먹지 않았습니다만.

 

이 당시 타이밍을 잘 잡은건지, 저희 일행이 들어갔을 때는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먹는 도중 뒤를 돌아보니 대기 인원이 상당하더군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시간 다 채우며 먹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문한 오레오 빙수는 최악이었네요. 빙수가 아니라 그냥 얼음조각입니다.

와드득 와드득 씹히는 얼음조각을 빙수라 생각하고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요.

오레오하고 궁합이 맞으려면 빙수를 매우 세심하게 갈아넣어야 할 텐데, 지금 씹는 것이 얼음인지 오레오인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여기 오기 1주일쯤 전에 일본서 괜찮은 초밥을 먹고 왔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기 가고 난 1주일쯤 후에 또 일본에 갈 일이 생겨서 거기서도 초밥을 먹은 터라

이 녀석의 추억이 미화될 일은 아마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대구에도 캇파즈시가 들어오는구나 하는 신기한 볼거리를 체험해 봤다는 데 의의를 두면 되겠죠.

영화보러 가는 도중 재미있는 가게가 있어서 한 장 찍어봤습니다. 찜닭에서 장미향기라도 나는 걸까요.

 

SINCE 2013이라는 글자도 약간 우습습니다.

대구 동성로는 워낙 가게 들어오고 나가는 게 심해서 제대로 오래 된 맛집이란 게 별로 없거든요.

저 가게는 SINCE 라는 단어에 어울릴 정도로 오래 버틸 수 있을지 가끔가다 쳐다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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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어렴풋이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오긴 했는데 해가 뜨고 나서 보이는 창밖 풍경은 역동적이기 그지없다.

키소에서 돌아오고 난 후 살짝 우울한 채 잠이 들었다.

탄산 기포가 터지는 소리처럼 지면을 때려대고 있는 바깥 풍경이 오히려 위안을 주는 느낌이다.

내일 귀국이고, 오늘은 여행 전부터 아무런 예정도 넣지 않았다. 그냥 하루를 멍하니 보내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키소에서의 추억은 인생의 큰 획을 긋는 크고 명확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추억 되짚기를 하고 난 후의 반동 역시, 즐거운 해외여행과는 아귀가 살짝 어긋날 수 밖에 없다.

이런 기분에 콘크리트 숲인 나고야 시내로 돌아와 맞이하는 첫 아침이 화창한 푸른 하늘이었다면

오히려 할 일이 없도록 해 놓은 여행의 하루가 너무 눈부셔 보여 한층 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어 줬을 터였으니까.

 

밖에 나가고픈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건물의 경계와 하늘 사이를 미묘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볼 만한 풍경이 된다.

비와 물체가 부딪히는 모습보다는 하늘에서 총알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의 모습이 더욱 훌륭하다.

아주 강렬한 폭우가 대낮에 쏟아내려야 시야에 담을 수 있는 빗줄기라서 희소성도 있고.

 

 

 

지금 가진 카메라 장비로는 그런 풍경을 담을 수 없다.

애초에 내 실력으로 그 모습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지면의 실루엣에 들어가기 전의 묘한 컨트라스트, 정지해 있지 않음에도 장노출로는 담을 수 없는 동적인 빗줄기는

제대로 된 비디오 카메라가 아닌 이상, 두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를 정적인 사진으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다.

 

대충 이렇게 비가 신나게 왔다는 증거품으로 몇 장 남기긴 했지만

사진에 담기는 노이즈 낀 듯한 결과물 보다는 기분이 좋았다는 기억도 되살아난다.

 

한여름이라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아침에 이렇게 내려봤자 별로 겁나지는 않는다.

단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니 어디로든 쏘다니기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약간 희석시켜주는 효과는 있다.

천천히 호텔 조식을 먹고 돌아와 모닝 TV를 보면서 대충 오늘 할 일을 생각해 본다.

 

나고야 역까지 투숙자들을 배달해 주는 무료 셔틀버스는 10시 30분까지 운행하기 때문에

아무리 비로 인해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그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내 섬세한 마인드와 별개로 돈은 아껴야 하니까.

마지막 날이고 하니 부탁받은 물건들 좀 사는 겸, 서점에서 건질만한 책 좀 찾아보는 일은 필수 코스나 다름없다.

일단 쇼핑 물건을 호텔에 놔 두고 저녁즈음 다시 나가볼까 싶다. 오늘은 남는게 시간밖에 없으니까.

 

확정하진 않았지만, 나고야에서 시간이 남으면 당시 상영중이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 불다'를 볼까 생각중이었다.

한국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작품이었고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을 모를리 없으면서도 무리하게 실제 역사를 고집한 미야자키의 의도가 궁금했으니까.

 

역사적 고증에 따라 작품 감상의 관점에 민감한 성격이기 때문에

한국의 언론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포인트가 실제로 작품 속에서 내 신경을 긁는다면

미야자키가 나이 헛처먹었구나 하고 미련없이 기억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미야자키는 아무래도 그런 단순한 미화에 치우칠 리가 없다는 사전 경험 때문에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 되려 한번은 꼭 봐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극장 가격이 그리 낮은 편이 아니라 여행중의 소비치고는 좀 사치스러운 면이 있는 탓에

보러 갈 것인지 말지의 판단은 아침까지도 내려지지 않고, 일단 쇼핑을 끝낸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한다.

 

 

 

폭우는 슬슬 그쳐가지만 10분의 짧은 간격 사이에도 확 내렸다가 부슬부슬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호텔 프론트에서 우산 하나 빌려서 갖고 나간다. 필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우산 하나만으로 굉장히 불편해지는 감각이다.

몸에 닿는 모든 소지품을 몸의 일부분처럼 상비하고 다니는 여행 중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할 일이 없는 우산이고

싸구려이긴 해도 일단 빌린 물건이다 보니 익숙해 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심코 버려두고 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때문에 더욱 귀찮아진다.

 

편안하게 나고야 역에 도착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공짜의 마력이란 이런 것인지, 무료 셔틀버스는 탈 때마다 이득본 기분이다.

 

날씨가 어떻든 나고야 역은 항상 사람으로 붐빈다.

중심가가 역 주변에서 점점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 한국의 대도시와는 달리

일본은 대도시간 거리를 자동차로 커버하기 힘들기 때문에 철도의 비중이 한국보다 훨씬 높고

그런 점에서 대도시의 중앙역 주변은 굉장한 밀집지역으로 악명이 높다.

 

나고야는 오사카와 도쿄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도시로, 대놓고 막나가진 않아도 향략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출근시간이 넘어서 그나마 좀 한산해진 역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넘어가 본다.

나고야 역은 정문 쪽과 반대편 쪽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데

정문에서는 주욱 걸어나가기만 하면 여행 가이드에 실려있는 모든 유명 장소를 다 둘러볼 수 있는 '정석적' 코스가 보이고

후문으로 나가면 관광하고는 별 관계없는 낡은 비즈니스 호텔과 낡아빠진 상가, 어른들만의 공간 등등이 좁은 골목골목에 포진해 있다.

 

연휴 기간이 끝난 우중충한 날씨의 대도시 골목길은 관광이라는 단어와 동떨어진 기분을 주기에 충분한데

나이 지긋한 노인네들이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모습과, 작업복을 허리에 둘러매고 원을 이뤄 길거리에 나앉아 술 마시는 노동자들의 모습 등

서울역 뒷골목에서 볼 법한 모습이 한적하게 펼쳐지고 있다. 아마 홀로 여성 여행자라면 은근히 다른 길로 나가버리고 싶은 느낌이 들 듯.

 

밤이 되어야 활기가 돌아오는 곳이다 보니 오전의 역 뒷골목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아침부터 28도를 넘어가서 덥기는 무지하게 덥고.

이곳 뒷쪽 어딘가에 친구가 부탁한 게임, 애니메이션, 코믹스 등등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어서 찾아온 것인데

오타쿠들에게 10시 30분이란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개점 시간이 11시라서 아직 문도 열지 않고 있다.

30분만 기다리면 첫 손님으로 혼잡하지 않은 가게 안을 마음껏 탐방할 수 있어서 좋긴 한데

키소의 상쾌한 공기에 익숙해진 내 몸은 진득진득한 더위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

이곳에서 30분 동안 서 있는 것은 극기훈련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고야 역까지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니 역으로 돌아가서 적당히 까페 하나 찾아 들어간다.

일본도 절전운동이 활발하긴 하지만, 까페처럼 공간을 제공하는 서비스업에서는 훨씬 융통성이 있다.

밖에 나가기가 싫어지는 쾌적한 온도와 커피 향기가 나의 대퇴근섬유를 마비시켜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든다.

양복 입은 젊은이들, 양복 입은 늙은이들, 세련된 옷을 걸친 아가씨들이 아침부터 뭐하는지 많이들 앉아있는데

회사 직원임에 분명한 수트맨들은 대체 왜 이 시간에 까페에 들어와 있는건지 모르겠다.

 

커피를 홀짝이며 메모장을 꺼내 일기를 쓴다. 남는게 시간밖에 없어서 그런지 글도 여유있게 써지는 느낌.

일반적으로 8일간의 해외여행이라면 짧다고 할 만한 길이는 아니지만, 본인에게는 그냥 잠깐 한숨 돌리고 오는 정도라

귀국 시간이 돌아오면 슬슬 아쉬움이 밀려오는게 일상적인 흐름이었는데

왠지 오늘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으니 '이번 여행은 이걸로 됐다'라는 기분이 든다.

끝내도 좋은 여행이라는 기분이 드는 것은 의외로 좋은 느낌이다. 아쉬움 보다는 만족감이 우선하니까.

 

 

 

11시 30분에 카페를 나와 오덕가게인 멜론 북스에 들어간다.

평일 낮의 쇼핑을 즐길 수 있는 특권 탓에 사람도 적어서 느긋하게 책 구경하고 부탁받은 물건도 살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발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책이나, 한국에서 발매했지만 그 전에 이미 원서를 사 버린 시리즈물 등등

눈에 불을 켜고 쇼핑을 즐기고, 그 와중에 구입하기는 망설여지지만 가게에서 서서 읽어볼 만한 책들은 탐독하다 보니

3시간 정도가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 카메라를 든 가방이 슬슬 무겁게 느껴질 즈음이 되고 나서야 계산대로 이동.

 

돈을 좀 느긋하게 갖고 온 여행이라 귀국 하루를 남겨 둔 지금도 1/3 정도의 자금이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귀국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인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마구 책을 쓸어담았다.

친구에게 부탁받은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근 12만원 정도 책 사는데 사용한 듯.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원서를 많이 보는 입장상 여유 자금이 있을때 쓸어오지 않으면 훨씬 더 후회할 테니까.

 

책 구경이 꽤나 지치는 일이라 약간 피곤한 몸과 뻐근한 눈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니 세상이 달라져 있다.

아침까지 쏟아붓던 비는 말할것도 없고, 모노크롬의 하늘마저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공간엔

맨눈으로 바라보기에도 힘든 강렬한 푸른색이 도시 이곳저곳에 색깔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덥기는 매한가지라도 하늘이 이만큼 빛나고 있으면 기분도 밝아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가방이 책으로 가득 차서 카메라는 이미 어깨에 걸어두고 다닌다. 허기가 진 건 아니지만 왠지 음식과 함께 자리에 앉아 쉬고싶은 기분이 든다.

 

 

 

마지막 날이라 거하게 한번 먹어볼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건 저녁식사때의 일이라

적당히 싸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선택은 별 후회없는 요시노야가 제격이다.

 

식욕이라는 의미보다 그냥 규동을 한번 먹어두고 싶다는 마음으로 갈 때는 저렴한 규동 한그릇으로 해결을 보지만

지금은 자리에 앉아 얼음물 한잔 들이키니 순간적이지만 천국을 체험할 정도로 상쾌한 기분인 것으로 보아

좀 더 풍요로운 메뉴를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을 듯 하다. 규동에 비하면 비싼 편인 580엔 짜리 카레 규동을 주문한다.

 

카레가 아주 맛있는 편은 아니지만, 규동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때 이 녀석을 먹으면 한국인이라도 나름 배가 든든해 진다.

카메라 좀 진한 편이기 때문에 규동과 카레의 남은 양을 잘 조절해 가며 먹는 편이 좋다.

너무 한 쪽에 집중해 버리면 혀가 마비되어 규동의 고소한 맛을 느끼기 힘들어 지니까.

 

점심시간이긴 해도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다. 자리가 널널하니 사진도 찍고 일기도 쓰고 하면서

에어콘 바람을 좀 더 즐겨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일본에서는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후다닥 먹고 나오는 것이 제일 싫다.

 

만족감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온다. 무료 셔틀버스는 오후 5시부터 운행을 재개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

아무리 공짜를 좋아한다고 해도 34도의 폭염 속에서 할 일도 없이 무거운 책뭉치를 지고 도심지를 떠돌아 다닐 수는 없으니까.

방으로 올라와서 어깨의 짐을 내려놓자 홀로 여행중 항상 쥐고 있던 가벼운 긴장이 풀린다.

바닥에 땀이 똑똑 떨어지는 걸로 봐서 확실히 짐 들고 돌아다닐 만한 날씨가 아니긴 하다. 카메라만큼은 어쩔 수 없어도.

그래도 에어콘 틀어놓고 전리품들을 꺼내서 다시 정리하는 일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기분좋은 일이다.

종류, 크기별로 구겨지지 않게 책을 정리해서 베낭에 넣고 있는데 세삼스럽게 키소에서의 하루가 마음을 움직인다.

 

이번 여행엔 52L 짜리 대형 베낭을 들고 왔는데, 본인이 사용할 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키소 사람들에게 줄 선물 부피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소에서 나고야로 돌아오는 오늘 같은 날부터는 베낭이 매우 널널해 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맨손으로 나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은 못 보내겠다는 듯이, 소야노 씨 가족부터 해서 카미무라 씨와 소바집 사장님까지 전부 선물을 들고 와 나에게 건내주셨다.

덕분에 텅텅 빌 것이라 생각한 내 베낭은 올 때와 다름없이 빠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책은 부피가 적어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이라, 이래가지고는 분명 내일 귀국시에 추가금을 내야 할 듯 하다.

저가항공이기 때문에 규정 무게를 조금만 넘어가도 칼같이 추가 요금을 받는다. 그래도 키소 마을의 선물이니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한다.

 

 

 

5시가 넘어 셔틀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로비로 내려가 직원에게 근처 극장이 어디 있는지 물어본다.

우연의 일치인지 나고야 역 바로 앞 빌딩에 극장이 있다고 하니 망설임없이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나고야 역으로.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역 주변은 평소대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파도처럼 일정한 진폭으로 횡단보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극장이 있다는 건물은 단순한 극장도 아니고,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갖춘 백화점도 아니다.

상당히 비싼 고급 요리점과 층마다 위치한 회사 사무실 등등 비지니스와 서비스업이 묘하게 혼합된 빌딩이다.

젊은이들 왁자지껄하게 노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엘리베이터 타고 극장층으로 이동하는데 묘하게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극장 앞에 가니 '바람 불다'는 6시 15분 상영이라 조금 난감하다.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점도 그렇고

상영 후에는 저녁을 제대로 먹을만한 시간이 좀 아슬아슬하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일본에서의 극장 관람은 역시 돈이 좀 아깝기도 하고 해서, 10분 쯤 고민하다가 그냥 다음에 기회되는대로 보기로 하고 돌아선다.

대신 극장 관람을 포기한 분 만큼의 자금과 시간은 최후의 만찬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기로 한다.

 

다시 나고야 역으로 돌아가 고층으로 올라간다. 나고야 역은 그 자체가 거대한 쇼핑몰 구조를 하고 있어서

여행이 아니라 쇼핑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역 안에서 거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

서울역처럼 역사 내부 음식점들이 비싸기만 비싸고 맛은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고

비싸긴 비싸지만 비싼 값은 하는 그런 가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일단 '호기'를 부려보고 싶은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장소.

 

나고야는 여러 번 와 봤지만 자전거 여행 당시 나고야에서 먹은 가장 비싼 외식이라고 해 봤자 500엔 정도 하는 전골 정도였기에

역 위의 음식점들이 무엇을 팔고 어떤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물론 일본 물가에 대한 상식 정도는 알고 있는 본인 경험상 지갑속에 든 소지금이 결코 모자라는 일은 없을거라 확신하고 있고

만에 하나 소지금보다도 요금이 높을 경우엔 비상수단으로 신용카드를 쓸 수 있으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먹을거리를 찾아 본다.

 

어느 매장에 들어가도 후회할 일은 없어보이지만, 결국 여행 마지막 날 선택한 식사는 초밥이다.

그것도 싸구려 회전초밥이 아니라 제대로 된 회전 초밥집. 비상 사태를 대비해 신용카드 사용 가능 여부까지 물어본 후 입장한다.

회전초밥이란 원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저가 경쟁의 일환으로 탄생된 구조라서, 고급 회전초밥집이 무슨 의미인가 싶은데

이곳은 레일 위를 완성된 초밥들이 돌아가고 있는 상태에서 손님들이 집어가는 일반적인 구조가 아니라

모든 초밥이 터치패드를 통해 주문 받은 후, 주문한 사람에게만 자동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즉석 초밥집이다.

'회전'이라는 요소를 순수하게 가게의 규모를 확장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하고, 초밥의 질은 떨어트리지 않은 하이브리드 방식.

 

가족 단위의 손님이나, 정장 갖춰입고 비지니스식 접대를 즐기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혼자 자리 잡으니 약간 긴장도 되지만

테이블 사이의 간격이 꽤나 떨어져 있고 간이 칸막이까지 착실히 갖춰져 있어서 사진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다.

 

 

 

터치패드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잘 눌리지 않는 단점이 있지만 어쨌든 주문하기는 어렵지 않다.

종업원이 와서 간단한 설명은 해 주고 가는데다가, 외국인이라면 영어로 메뉴를 전환하는 항목도 있어서 문제 없다.

하지만 이럴 경우 본인처럼 일어만 잘 하는 사람 입장에서 좀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생선 이름은 전부 다 꿰고 있느게 아니다 보니 사진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데다가

영어로 바꿔봤자 내가 영어로 생선 이름을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본 한 접시에 300엔이 넘고, 고급 초밥은 600엔도 넘어가는 초밥집이라

괜히 전투 직전의 병사처럼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돈 신경 안쓰고 식사를 즐기리라 다짐하고 버튼을 누른다.

초밥이 레일을 타고 돌아와서 정확히 내 테이블 쪽으로 쪼르르 밀려 들어온다.

접시가 내 앞에서 멈추면 그 사이에 내가 집어들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테이블 앞으로 이동하는 것까지 완전한 자동.

외식 문화란 역시 자금의 차이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중요한 초밥 맛을 느껴본다.

 

나고야 역에 존재하는 어떤 초밥집도 새벽 수산물 직판시장 앞에서 장사하는 초밥집에 비할 수는 없다.

초밥은 재료의 신선함이 맛의 80~90%를 좌우하는 극단적인 요리라서, 산지에서 떨어진 초밥집은 일단 가격대 성능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점을 제외하고서는, 이 가게의 초밥은 100~300엔 짜리 초밥이 레일 위를 굴러다니는 일반 회전초밥집과 비교할 건덕지가 없는 훌륭한 맛이다.

 

 

 

주문을 한 접시씩 할 필요도 없어서, 한꺼번에 3~4 접시를 주문하면 같은 종류별로 나눠서 도착한다.

밥의 끈기와 온도, 초대리의 배합 역시 교과서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며

생선 쪽은 부위 선정을 칼같이 지키고 있다. 맛이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발라내는 것은 초밥 요리사의 양심이기도 하고.

 

겉을 살짝 구운 다랑어 타타키(たたき)도 재료의 상태나 구운 정도 등, 가격대 이외의 모든 부분에서 상급이라 할 만 하다.

이러한 초밥을 수산시장 근처에서는 반값 정도에 먹을 수 있다는 게 항상 마음에 걸리는 일이지만

이곳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식사 환경과 아름다운 인테리어, 최상급의 접대 매너를 함께 즐기는 외식이란 것도 나름 중요한 점이라 본다.

 

애초에 나고야의 마지막 밤만큼은 이렇게 사치와 향락에 젖어 보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왠지 신분 상승한 듯한 기분으로 우아하게 맛을 음미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먹는거 가리질 않다보니 150엔 짜리 편의점 도시락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초밥 두 점에 편의점 도시락 2개 가격이 확확 날아가는 식사를 하고 있으니 색다른 스릴과 된장남의 자뻑기분을 조금이나마 대리체험할 수 있는 듯 하다.

 

 

 

사실은 초밥에 대해서만은 그나마 조금 민감함 편이라 더욱 기쁜 탓도 있다.

일본의 저가 회전초밥집 정도라면 감탄 막 하면서 먹을 정도는 아니고, 그냥 맛있구나 하는 수준으로 만족할 수 있는데

한국의 상당한 대다수 초밥집은 그 정도 만족감 주는 곳도 꽤나 드물다.

 

애초에 한국에서 초밥이란 횟집에서 적당히 회 먹으면서 사이드 메뉴로 넣는 듯한 녀석들이 많고

그런 곳에서는, 생선은 그럭저럭 신선해도 초밥 쥐는 법이나 생선과의 비율 등은 그냥 엉망인 수준이다.

밥은 쥐꼬리만큼 쥐어놓고 생선은 꼬리쪽을 길게 늘어트리면서 '밥 적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따위의 헛소리를 하는 곳도 있으니까.

 

일본의 회전초밥집 정도가 마지노선이라면, 한국의 회전초밥집이나 그마트 등에서 파는 낱개 초밥같은건

사실 초밥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냥 말라 비틀어진 과자일 뿐.

 

 

 

6인 가족이 앉을 수 있을 만한 반 독실 좌석이라서 짐도 마음껏 풀어해쳐놓고 사진 마구 찍어도 전혀 거슬릴 게 없다.

얼핏 칸막이 너머를 바라보면, 회사 사람들 접대 자리인 듯 중앙에 후나모리를 떡하니 세팅해 놓고 덕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후나모리는 익히들 알고 있는 모듬회와 같은 메인 요리로, 이곳에서는 크기 때문에 따로 주문받아 종업원이 직접 들고 온다.

 

나고야에서 다시 이 가게에 들를 확률은 한없이 낮기 때문에 아쉬울 것 없이 시험해보고 싶은 녀석은 전부 주문해 버린다.

가게의 숙련도를 가늠하는 계란 초밥은 충분히 괜찮은 편이다.

TV에 나오는 진짜 명인의 카스테라같은 계란 초밥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사실 그 정도 계란초밥을 만드는 명인 가게에서 먹으려면 적당히 1인당 40~50만원 쯤은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 사람 대부분이 평생 그런 계란초밥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간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리는 널널하고, 초밥이 레일위를 돌고 있어서 말라가는 것도 아니니

무심코 '역시 돈은 좋은 것이로구나' 하는 속물적인 감탄사까지 읊게 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인데, 여기서 이런 초밥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먹는다 해도 금액은 많아봐야 5~6만원 내외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대식가인 가족들과 함께 고기라도 굽는 날엔 20만원 정도는 훌쩍 넘겨버리는 것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서 가슴 졸여가면서 서민 행세하며 먹고 있는 건, 마치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기가 걸어온 길도 돌아보지 못하는 행동이다.

한국에서 먹었던 외식의 평균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이 초밥집에서 지불할 금액은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평균가에 가깝다.

그게 단지 소지금이 한정된 헝그리 여행중의 한 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천상의 행복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

 

해외 여행이라면 다들 자연스럽게 자국에서보다 절약하게 되니, 덜덜 떨면서 초밥을 입에 집어넣다 보면 인지부조화 상태를 느끼기도 한다.

 

 

 

마음의 여유를 밖으로 발산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냥 허세 한번 부려보고 싶었던 것일까.

평소엔 거들떠도 보지 않는 가지절임 초밥도 호기심에 한번 주문해 본다.

해산물 초밥 지상주의인 본인으로서는 초밥집에서 해산물 초밥 이외의 초밥을 먹는다는 것은 이단으로 간주하는데

못 먹어본 맛도 경험해 보자는 의미로 이런 것까지 한번 먹어본다. 이왕 버린 몸(?) 이것저것 시도해 보자는 심정이었던가.

 

시원한 가지의 수분과 짜지 않게 적절히 절임된 맛이 입가심으로 나쁘지 않다.

가격도 100엔대로 싼 편이라 해산물 초밥의 짠 맛에 조금씩 부담을 느낄 때 먹어주는 것도 괜찮을 듯.

물론 따끈한 녹차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초밥집에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있을까 싶지만.

 

가지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잘 먹는 야채인데, 초밥의 다양화는 가격적 폭리만 아니라면 여러가지로 시도되어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다.

 

 

 

가게에서는 홋카이도 특선이라고, 홋카이도쪽에서 유명한 해산물로 만드는 초밥을 선전중이다.

물론 홋카이도에서 가져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신선해도 거기서 나고야까지 초밥 재료를 가져올 수는 없다.

 

주문한 녀석들 중에서는 가장 비쌌던 이 녀석은 김으로 밥 주위를 둘러싼 군함말이인데

위에는 홋카이도에서 유명한 해산물인 연어알, 가리비, 게살, 성게알이 한꺼번에 올라가 있는 디럭스 초밥.

저 네가지 모두 없어서 못 먹는 최고의 재료들인데, 저걸 흘러내릴정도로 담아올렸으니 그 사치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백화점 사치품 부스에 들어가서 프라다나 에르메스 제품을 눈 앞에 했을 때의 느낌일까.

이 배덕적인 초밥의 모습을 보면서 가방에 환장하는 허영심 덩어리 여성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섞어놓으니 4배로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초밥은 장르별로 하나씩 먹는게 낫다.

 

 

 

배가 터질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아쉬움 없이 먹었다고 생각하며 만족감 가득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먹은 금액은 5700엔. 당시 환율로 치면 6만원 조금 넘는 가격이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도 혼자 먹어본 적이 없는 금액이긴 하다.

자전거 여행중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고, 단기 홀로 여행 역시 자금을 넉넉히 들고 나간 적이 별로 없다 보니

마음이 가끔 동해도 좀처럼 시도하지 못했던 쾌락의 추구였는데, 시원하게 해결해버리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 것일까.

 

왠지 키소에 있을 때보다 물질적으로 타락해 버린 듯한 기분이 들지만 그냥 과한 생각이겠지.

 

초밥은 만족스러웠지만,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역시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

편의점이 아닌 나고야 역 지하상가에서 한참 떨이중인 나고야 코친을 한 팩 구입해 온다.

나고야 역 지하상가는 사실상 백화점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음식물들 수준이 장난 아닌데

어떤 지역이라도 폐장시간이 되면 병적으로 재고 소진을 위해 할인판매를 하기 때문에

이걸 잘 이용하면 식비를 절약하면서 맛있는 것들을 많이 맛볼 수 있다.

 

200엔 정도 가격으로 나쁘지 않은 코친을 사 온 덕택에 저녁이 외롭지 않다. 맥주도 한 캔 따고.

코친은 그 쫄깃함과 함께 살이 별로 붙어있지 않은 날개부분을 뜯어먹는게 재미있어서

먹을때는 열정적이지만 다 먹고 나면 허무함이 살짝 밀려오는 그런 안주거리.

 

가방에 가득 쌓인 전리품 도서를 보며 오늘 영수증을 체크해 보니, 거진 8일간 여행 경비의 1/4 정도를 오늘 하루만에 다 써버렸다.

이제 남은 돈은 3000엔 남짓. 이 정도면 공항에 돌아가서 마지막 식사 정도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여행가서는 항상 짜투리 경비를 남겨 와서, 다음 여행의 추가 용돈으로 사용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광란의 마지막 하루 덕택에 남는 예산이 거의 없다. 물론 그걸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뉴스를 보니 오늘 새벽부터 나고야에 내린 폭우는 시간당 50mm 라는 집중호우였다고 한다.

그 정도면 그냥 하늘이 뚫렸다고 표현하는게 적당한데, 그 탓에 나고야 역의 모든 신칸센이 오전 내내 연착되었다고.

오늘 하루는 그런 굳은 날씨에도 전혀 관계없는 일정이었고, 이제까지의 7일간 한 번도 날씨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기에

이번 여행은 이 협조적인 날씨만으로 충분히 고맙고 즐거운 편에 들어간다. 35도를 넘나드는 폭염만큼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내일 귀국 비행기는 오전 10시 45분이라 더 이상 여행이라는 개념은 없다.

TV 프로를 즐기면서 이런 단기 여행으로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만족감으로 충만한 눈꺼풀 셔터를 내린다.

 

 

약이란 건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이 조그만 자갈같은 녀석이 배 속에 들어가면 묘한 성분으로 분해되어

사람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는 건지. 어릴적에 이런 호기심이 들었다면 아마 의사나 약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누워있거나 앉아있으면 그닥 통증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약효가 돌고 있다.

물론 평소처럼 걷기는 힘들고 여전히 절뚝거리지만, 이동 속도는 어제보다 조금 빨라진 느낌.

 

사실 어디까지나 응급 처치일 뿐이라, 실제로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염좌도 통풍도 그냥 진통제의 효과로 고통을 잊고 있는 것일 뿐

여전히 왼쪽 발은 끈 전부 풀어헤친 280짜리 신발에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퉁퉁 불어터져 있는 상태.

무리하지 않으려고 아침 조식 먹으러 내려가지도 않았다.

이로서 조식 있는 호텔에 투숙한지 처음으로 3일동안 딱 하루밖에 조식을 먹지 않은 낭비의 업적을 달성하고 말았다.

돈 아까워서라도 조식은 절대 빠지지 않고 챙겨먹는데...

 

그나마 머리가 돌아갈 정도로 고통이 줄어드니 엉망이 된 여행 계획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이번엔 좀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 일부러 예산까지 편성해 왔고, 각종 신뢰할만한 곳을 뒤진 끝에

후회는 없으리라는 오사카의 맛집을 두루두루 조사했기 때문에, 예정대로라면 어제와 오늘의 아침, 점심, 저녁은

나름 내 기준에서는 꽤나 호화스러운 음식을 마음껏 즐겨야 했다.

 

오사카 최대의 수산 도매시장에서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100년 전통의 초밥집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회전초밥과는 비교도 안되고, 국내 일류급 초밥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가격은 나름 저렴한 곳이라서

이곳에서는 마음먹고 8만원 정도 소비할 각오를 했다.

하지만 수산시장에 위치해 있다보니 전철에서 내리더라도 꽤나 걸어가야 하는 곳인 탓에

지금 상태로 거기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어제 먹으려 했던 맛집들도 당연히 전부 캔슬. 어제 먹은건 편의점 도시락밖에 없다.

마음껏 맛집 탐방을 하려 했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변해버려,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고, 돌아갈 곳 없는 허탈감을 안은 채 10시에 호텔을 나선다.

짐은 다 맏겨놓고 공항 가기 전에 찾아가기로. 어제 스루패스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도 전철은 무료 이용이다.

출국시 이어폰의 수명이 다 됐기 때문에, 이어폰 하나 구매하려고 우메다(梅田)역으로 향한다.

 

오사카의 번화가는 남쪽의 난바(難波), 북쪽의 우메다(梅田)로 나뉘어 있는데

난바는 칸사이 국제공항과 연결되어 있고, 온갖 잡다한 소비와 유흥 쪽에 촛점이 맞춰진 곳이라면

우메다는 오사카의 거의 모든 시영, 국영 전철이 모여있는 교통의 중심이지며, 금융, 기업의 중심지라서

쇼핑이나 먹거리도 난바에 비해 좀 고급스러운, 고층 빌딩으로 아득하게 둘러쌓인 곳이다.

헝그리 여행자들은 저렴한 숙소가 많은 난바역을 이용하는 경향이 많은 듯. 우메다쪽의 호텔은 꽤나 비싸다.

 

 

 

오사카 최대의 전자상가 백화점 요도바시 우메다는 전철역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가기 편하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거대 전자상가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만, 지금은 일단 이곳의 회전초밥집에 들른다.

맛집 순방을 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 비록 예정했던 곳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곳이지만.

 

그래도 회전초밥 치고는 그리 떨어지지는 않는 수준이다. 한국의 동일가격대 초밥과 비교하는건 말도 안되고.

 

 

보통은 이런 저렴한 회전초밥집이라도 접시 색깔을 따져가면서 먹는 편인데

이번엔 한을 풀지 못한 나의 위장을 위로해 주는 차원에서, 그런것 따윈 신경 끄고 마음껏 집어먹기로 결정.

그래도 생선쪽에 퓨린이 많이 들어있을 위험성이 있으니 가능하면 조개 등으로 메뉴를 조정하기로 한다.

 

회전초밥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곳이 오사카라서, 나름 자존심은 있는지 가격대비로 괜찮은 성능을 보여준다.

이렇게 2점에 100엔~200엔 하는 초밥은 일본에서 가장 싼 부류에 속하지만

그래도 한국 음식점의 초밥에 진저리가 나던 내 입장에서는 먹을만한 느낌.

 

 

 

먹고 먹으면서도 결국 가보지 못했던 최고급 초밥집이 눈 앞에 떠오르는게, 안타깝기 그지없다.

먹으면서 분명 맛은 있는데, 이 공허함은 뭘까.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남들 눈도 신경쓰지 않고 초밥들을 마구마구 카메라에 담는다.

원래 음식점에서 이렇게까지 사진을 남발하진 않는데, 그냥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위장에 들어가지 못한 고급 초밥들이 너무 아쉬워 할 것 같은 느낌.

 

사실 여기 초밥도 즐기기엔 충분히 맛있었다.

 

 

 

초밥집의 실력을 알아보는 가장 기본적인 척도가 되는 계란말이.

먹어보면 '역시 회전초밥'이라는 느낌이 들긴 한다.

소위 말하는 초밥 장인이 만드는 계란말이 초밥은, 생크림 가득 들어간 카스테라를 먹는 듯한 느낌.

 

 

 

찍다가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건가 싶다.

예정되어있던 초밥집에 갔다면 그 야들야들하고 빛나는 초밥의 자태를 즐겁게 담았을 텐데

지금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마구 담아낼 뿐이니.

 

포스팅의 대부분을 이런 초밥사진으로 도배하는 것도 참 특이한 경우.

사실 마지막날은 담아온게 거의 없으니 이렇게라도 분량을 채우려는 속셈이다.

 

 

 

점심시간 근처라서 사람들은 꽤 많았지만

어째 나보다 뒤에 온 사람들도 전부 일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슬쩍슬쩍 계산하는 사람들을 보니 한 사람당 6~7접시 정도가 평균인 듯.

 

내 경우 보통 이런 회전초밥에서는 배가 불러서 그만둔다기 보다

더 이상 입맛이 당기는 초밥이 없어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해도 최소 10접시는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시 내가 많이 먹는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징어회는 대체로 한국이나 일본이나 초보자용이라고 인식되어 있는지

원래 오징어 초밥은 그리 비싼편이 아니지만, 타계책으로 위에 연어알을 뿌린 녀석이 있다.

초밥 장인의 집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퓨전적인 방법인데,

이런 걸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맛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잘 모르겠다.

오징어회는 맛과 향보다 씹는 재미가 있지만, 연어알의 짭쪼름한 느낌이 조금 보충해주는 느낌?

 

 

 

싱싱하고 두툼한 가리비도 좋지만 겉만 살짝 구운 가리비는 달달한 맛이 더욱 살아난다.

접시 색깔을 보면 알겠지만 생가리비나 구운 가리비나 가격은 같다. 취향에 따라 먹으면 될 듯.

조개류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둘다 만족.

 

 

오징어 초밥의 또 다른 바리에이션. 고급 재료에 들어가는 성게알이다.

저렇게 성게알 눈꼽만큼 올려놓고 가격을 올리니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기본적으로 오징어가 맛과 향이 옅은 편이라서 위에 뭘 올려도 괜찮은 조합이긴 한데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먹었기 때문에 이런 것도 척척 집어먹었지

생각하면서 먹기에는, 맛이 궁금하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 묘한 녀석이다.

 

 

 

대충 만족했다는 느낌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온다. 계산금액은 약 1700엔 정도.

평소같으면 무리 좀 해서 먹었구나 하는 금액이다. 초밥이 아닌 경우엔 500엔 정도면 배를 채우니까.

하지만 원래 예정했던 고급 초밥집의 예산이 6000엔이었기 때문에 왠지 지불후에도 아쉬운 기분이다.

 

예상보다 돈 적게 썼다고 아쉬워하는 이 모습은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희귀한 케이스.

아픈 다리를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긴만큼, 대가가 돌아오게 되는 느낌이다.

 

사실상 맛있는 거 찾으러 다니는 행동은 이걸로 끝. 더 이상 무리해서 여기저기 옮겨다닐 상태도 아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 한층 내려오면서 친구에게 부탁받은 것들을 구매한다.

각 카메라 회사의 최신 플래그쉽 기종도 전부 전시가 되어 있어서, 어차피 쓰지도 않을 것들 신나게 경험해 본다.

요즘 기종들을 만져보면, 내가 쓰고있는 녀석은 확실히 몇 세대 전의 기기적 성능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1층까지 내려와서 이어폰을 골라보려는데, 예전처럼 시착용 이어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게 아니라

본인의 MP3 플레이어에 직접 꽂아서 테스트 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쪽이 마음에 드는데, 익숙하게 들어오던 음원으로 테스트 하는게 자신에게 맞는 이어폰을 찾기가 쉬우니까.

한국에서는 이어폰을 마음껏 테스트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데, 이곳에는 적당한 보급형부터 각 사의 최고급 이어폰까지 청음이 가능하니

왠지 굉장히 행복한 기분이다. 한국서는 남들의 청음기만 줄기차게 들어보고 고민고민끝에 고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고나면 항상 '다른 기종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이 남았기 때문에

 

여기서 약 2시간동안, 일단 청음용으로 준비된 녀석들은 거의 다 들어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어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약 17년 전, 20초 튕김방지 기능을 가진 휴대용 CDP가 인생의 보물이었던 시절.

그때 이후로 이어폰은 항상 7~9만원 정도의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 일단 귀가 길들여지니 보급형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확 나빠지기까지 하기 때문에, 한때 수십만원짜리 이어폰에도 손을 대 본 결과 그 정도 가격대가 무난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

아이팟이 등장하기 전 춘추전국이었던 한국 MP3 시장 당시엔, 몇몇 회사와 친분을 쌓아서 시중의 거의 모든 MP3P 를 사용하고 음질을 판단하기도 했다.

사용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오디오 전문회사 인켈이 출시한 오디오카드라는 플레이어는 지금까지 가끔 그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요도바시 우메다에서 만난 소니의 신형 이어폰은 상당히 놀라웠다.

새로 개발한 드라이브 유닛이 1개부터 4개까지 장착된 모델이 전시중이었는데

1개와 2개 장착된 모델까지는 그냥 그렇네 정도였지만, 3개가 장착된 모델은 하위모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굉장한 음질을 들려준다.

인이어 이어폰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해상력과 깔끔한 음 분리력이, 여지껏 7~9만원급에 만족해 왔던 나의 귀를 유혹한다.

중음까지는 무난하고, 저음이 조금 약한 느낌이었지만 무작정 울리는 저음보다 이런 느낌이 내 취향이다.

 

최고급 모델인 4개짜리 녀석도 청음해 봤지만, 같은 가격이라면 3개까지를 구입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저음부분이 확연히 보강된 느낌이 들긴 해도 내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편이라서.

 

원래 사용하던 가격대의 제품들을 들어보면, 대강 이제껏 들어왔던 녀석들과 비슷비슷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그냥 그걸 구입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음악생활을 즐길 수 있었겠지만

이 소니의 제품을 청음하고 나니, 매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청음하고 또 청음해도, 결국엔 이 녀석에게 마음이 가게 된다.

한참동안 5000엔 대의 제품 앞에 서서 '이 정도면 문제없는데'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또다시 소니 부스로 이동해서 이 녀석을 들어보는 행동이 반복되는 중.

 

한국에서는 여러 이어폰을 들어보지 못하고 물건을 고르게 되어서 불만이었는데

막상 마음껏 청음할 기회가 생기자, 내 귀의 솔직한 평가를 스스로의 마음이 부정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난점이 생겨버렸다.

약 30분동안 하염없이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이 녀석을 선택해 버린 이유는

어이없게도 마음껏 먹고 마시려고 준비한 맛집 순방이 불발된 데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였다.

예정된 고급 맛집 순방을 완전히 망쳐버렸기 때문에, 그 남은 돈으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구입해 버린 것.

 

위안이라고 한다면, 면세품목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혜택까지 받으면 국내 판매가보다 7~8만원 정도 저렴하는 점 정도.

그 차액조차 왠만한 사람들이 구입하지 않을 중고급형 이어폰 가격이니, 구입하면서 잠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한참 이어폰에 빠졌을 때는 이거보다 훨씬 더 비싼 녀석도 사용해 보긴 했지만, 벌써 6~7년 전의 이야기고

그 당시 45만원쯤 하던 이어폰보다 이 녀석 성능이 확실히 더 좋다. 이제껏 사용해 본 인이어 이어폰 중 단연 최고의 음질.

 

 

 

맛집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도 이걸로 후련하게 날려버리고

남은 시간은 서점에서 책이나 읽을까 하고 안내센터 직원에게 길을 물어 서점 키노쿠니야(紀伊國屋)의 위치를 확인한다.

난바 역과 마찬가지로 우메다 역도 수많은 국철, 사철, 시영 전철이 얽힌 곳이고

운영사가 다르기 때문에 한국처럼 이어져 있지도 않고 환승도 마음대로 안된다.

날씨는 덥고 왼발은 불안불안하지만 시원한 서점을 생각하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긴다.

 

 

 

우메다의 키노쿠니야 서점은 오사카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빌딩 전체를 서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가장 큰 오프라인 서점의 6배는 넘는 규모다.

외국여행이란게 자금만큼이나 시간이 아쉬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널널하게 시간이 남는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왠종일 박혀있을 자신이 있는 서점.

 

유동 인구가 많은 우메다 지역에서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관광객 흉내 낸다고 외계인 머리 닮은듯한 환풍구를 찍어보기도 하는 등, 일반인 행새를 하며 이동한다.

뒤에 보이는 희한한 디자인의 건물이 한큐(阪急) 우메다 역. 저런 거대한 역이 이곳 지역엔 사방팔방 존재한다.

 

 

 

키노쿠니야 서점 근처까지 도달해서 다시 안내센터에 정확한 위치를 물어보니

'오늘 키노쿠니야는 휴무일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땀 뻘뻘 흘리며 20분을 걸어 찾아왔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그냥 웃음이 나오지.

우메다 앞의 안내센터 직원은 오늘이 휴무일이란 걸 몰랐을까. 그렇다면 안내센터로서 좀 문제있는 것 아닌가.

되려 이곳 직원이 더 미안해 하는 듯 해서, 그냥 웃으면서 돌아나온다. 아무튼 이번 여행은 꼬이는 곳에서는 대책없이 꼬인다.

 

이렇게 된 이상 우메다에는 볼일이 없어서 다시 난바역으로 돌아간다.

난카이(南海) 난바역 광장 앞의 조각상을 기념으로 한장 남기고, 음료수를 마시며 잠깐 휴식.

친구에게 부탁받은 물건은 전부 구입했고, 사하라 멤버 나침반님에게 부탁받은 세븐스타 담배는 공항 면세점에서 구입예정이니

아직 공항 출발까지는 2시간쯤 남겨놓고 뭘 할까 생각중이다.

 

다리는 무리하면 할수록 통증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계속 돌아다니기는 힘들고

그냥 이 근처 덴덴타운에 가서 한국에서 팔지 않는 코믹스나 몇권 산 뒤에 까페에서 커피나 마시기로 한다.

다리 덕분에 오카사의 명물 간식인 타코야키 등은 먹질 못해서, 내 평생 이런 여행도 해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새로 산 이어폰의 성능에 하염없이 취해있다가 4시쯤 호텔의 짐을 찾으러 출발.

 

 

 

하지만 진통제 덕분에 다리 상태를 너무 과신했는지, 30분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호텔 왕복은

예상 시간을 훨씬 넘겨 50분이나 걸리고 말았다. 정상적인 몸이라면 15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는데.

비행기 출발이 6시 30분이라서 5시 30분까지는 공항에 도착하려 했고, 이곳에서 공항까지는 45분쯤 걸리니까

4시 30분까지 이곳에 도착하려고 했는데, 막상 와 보니 4시 50분이 넘어있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 지는 중.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플랫홈에 나가 보니 공항까지 연결되는 특급열차 '래피드-베타'가 약 5분뒤에 출발하려고 대기중이다.

이 녀석은 스루패스로 무료 승차가 안되고 추가요금 500엔을 내야 하지만, 발목 상태와 짐을 생각하니 전혀 아깝지 않아서 이녀석으로 결정.

양해를 구하고 사진도 한장 남겨본다. 일반 전철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편안한 좌석과 넉넉한 공간 덕에 아픈 발목에 큰 도움이 되었다.

걸리는 시간은 40분으로 일반 전철과 크게 차이나진 않지만, 모든 일반 전철이 45분 걸리는게 아니라 정차역이 적은 특급 이상만 그렇기 때문에

괜히 그 녀석 시간 맞추다가는 몇분 더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어서 마음 편하게 래피드를 선택했다.

 

 

 

간헐적인 통증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일단 비행기가 이륙하니 이젠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나름 홀가분하다.

예정에 없던 축제도 즐기고, 예정에 없던 사고도 생기고, 예정에 없던 쇼핑도 즐기고...

어째 이번 여행은 거의 예정에 없던 이벤트들의 연속인 듯한 느낌.

 

두번다시 겪고싶지 않은 발목의 통증만 제외하면, 이런 의외성 충만한 여행도 내 취향이다.

그 의외성이란게 결국 발목 통증때문에 생긴 거라서 난감하지만.

 

 

인천공항 착륙 20분쯤 전에 대기가 불안정한지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비행기 수십 번 타본 나로서도 평생 처음 겪어볼 정도의 굉장한 흔들림. 엉덩이가 의자에서 들썩들썩 떨어질 정도로.

 

처음에 몇번 흔들릴 때는 승객들의 웃음소리도 간간히 들렸지만, 그 뒤 롤러코스터 정도의 흔들림이 발생하자

그 웃음소리도 사라지고 객실내는 음산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승무원은 괜찮다고 방송하지만 아마 다들 어지간히 긴장했을 듯.

사고 직전의 상황은 이런 것일까 상상해보며 굉장히 즐거운 기분으로 승객들의 분위기 변화를 감상한다.

 

마침내 흔들림이 진정되고나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잡담소리가 어쩐지 더더욱 흐뭇한 기분을 만들어 주더군.

오늘 밤은 남은 진통제로 어떻게든 버텨보고, 내일 서울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대구 내려가서부터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할 것이다.

다음 여행부터는 이런 돌발 이벤트는 사양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력을 예전 수준으로 되돌려야 하니, 좋게 생각하면 이것도 훌륭한 계기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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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관(?)에서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 후 아침 일찍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쿄토 당일치기 여행이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빠릿빠릿하게 돌아다녀야 하는군요.
사실은 오사카 오고나서부터 빠릿빠릿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쿄토와 오사카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당일치기가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사실 쿄토는 느긋하게 둘러볼려면 1주일은 잡아야 할 정도로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
오사카 관광이 주 목적이었던 이번 여행에서는 그냥 맛배기만 살짝 보여주는걸로 만족할 수 밖에 없네요.

숙소인 에비스쵸(恵美須町)역에서 아와지(淡路)역까지 간 다음 한큐쿄토선(阪急京都線)을 타고
쿄토 카와라마치(河原町)역까지 가는데 대략 45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아침시간이라 사람이 많네요.
아와지역에서 카와라마치역까지 가는 전철은 급행, 쾌속, 준급행 등등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에
잘 알아보고 타야 합니다. 모든 역에 다 정차하는 전철을 잘못 탔다간 1시간 이상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열차가 올때마다 방송으로 '카와라마치역까지 가려면 다음 열차를 타는게 더 빨리 도착합니다' 라고 말해주는데
관광객들에게 그게 쉽게 들릴지는 의문이니까, 전광판을 잘 확인해가며 타는게 좋겠죠.


열차의 종작역인 카와라마치역은 JR 쿄토역에서 꽤나 가깝기도 하고, 쿄토 시내의 중심가중 한 곳이라서 이동하기도 편합니다.
쿄토 버스 1일 승차권을 구입한 후 바로 금각사행 버스를 탑니다.
1일 승차권이 있으면 하룻동안 쿄토 시영버스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민영버스는 무료이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항상 조심을... (이번에 한번 당했습니다. ㅡㅡ;)
왠만한 관광지는 시영버스로 충분히 쉽게 이동이 가능하기도 하고,
쿄토는 오사카에 비해 전철이 구석구석 뻗어있지 않기 때문에 버스가 최적의 이동 수단입니다.

아침부터 버스 안엔 한국인 관광객이 수두룩하네요. 방학이라서 그런가.
근데 이 친구들은 분명 금각사를 가는 길일텐데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려버렸습니다. 뭔가 착각한 듯.


2년만에 보는 쿄토의 풍경이 참 반갑더군요.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제대로 된 관광이나 해보자 싶어서 무작정 내려온 쿄토였는데
그땐 자전거 여행의 피로가 쌓인 터라 뭔가 몽롱한 정신으로 여기저기를 쏘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금각사(金閣寺)는 쿄토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관광 명소중에 한곳인데요.
사실 친구와 동생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면 굳이 제가 이곳을 찾아가진 않았을 겁니다.
평생 한 번만 와 봐도 충분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곳의 실제 이름은 로쿠온지(鹿苑寺)인데, 금박을 입힌 정자가 워낙 유명해서 언제부턴가 금각사란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쿄토 외각에 위치한 한적하고 조용한 사찰이라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쿄토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은터라 자칫하면 엄청난 인파에 쓸려다닐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이번 여행땐 관광객이 아주 적어서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었네요.
지난번 혼자 갔을 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아주 바글바글거려서 사진 한 장 제대로 찍기가 힘들었는데.


쿄토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는 금각사의 모습입니다.
조용한 연못과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조경된 소나무들, 그리고 화려한 금빛 정자는
마치 별세계를 뚝 떼어다 놓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이 금각사에는 비극적인 역사가 살아숨쉬고 있는데요.
원래 금각사는 1397년 쇼군의 별장으로 만들어졌지만 1950년에 한 수도승의 방화로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건물은 1955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정말 세심하게 복원이 잘 되어있지만
역시 원 건축물과는 그 느낌상 아쉬운 부분이 많죠.


방화를 일으킨 수도승은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 사건을 소재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 전후 일본문학의 최고봉으로 뽑히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금각사(金閣寺)입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스승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미시마 유키오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다면 일본의 어느 작가가 그 자격이 있겠나'라고 그의 문학성을 극찬하기도 한 만큼
그의 탐미주의에 대한 깊은 고찰과 광기가 묻어나는 최고 대표작 금각사는 전후 일본문학의 정점을 찍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전후 일본문학을 공부하면서 금각사를 읽지 않으면 공부 헛한거나 마찬가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할 만큼
소설 금각사는 저기 보이는 실제 금빛 정자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훨씬 더 공포스러운 작품이니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말년엔 극우주의자로 여러 기행을 벌이다가 할복 자살을 선택한 미시마 유키오라 한국에서는 그냥 또라이 취급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광기어린 집착과 고집, 오만이 없이는 금각사와 같은 소설이 탄생할 수 없었기에 더더욱 연민의 정을 느끼는 작가입니다.
금각사를 불태우던 자신의 작품 속 승려와 결국 비슷한 최후를 맞이한 작가의 모습은,
어찌보면 그렇기 때문에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의 칭호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게 아닌가 싶네요.

일본을 대표하는 다른 탐미주의 작가인 타니자키 쥰이치로(谷崎潤一郞)의 페티시즘에 가까운 집착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미에 대한 두려울 정도로 순수한 집착은 마치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 1902)이나
영화로 치자면 베르너 헤이조그의 아귀레, 신의 분노(Aguirre: The Wrath Of God, 1972)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입장권 명목으로 받은 부적(?)을 갖고 즐거운 기념사진을 찍는 일행들.
소설의 광기는 어디가고 훈훈한 모습이 연출됩니다.


금각사의 아름다움이야 뭐, 말로하면 쓸데없이 칼로리 소비하는 것 밖에 안되지만.
실제 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쿄토 반대쪽에 있는 은각사(銀閣寺)가 훨씬 중요합니다.

은각사는 원래 치쇼지(慈照寺)라는 이름의 사찰로, 금각사를 세운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손자인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할아버지의 업적을 모방해서 만들었습니다. 요시마사는 절의 바깥을 은으로 감싸서 금각사와 대칭을 이루려고 했지만
그 후, 후계자 문제로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의 시대가 계속되는 바람에
결국 은각사는 은으로 덮히지 못하고 미완성된 채로 남아있게 됩니다.

이 은각사의 토쿠도(東求堂) 사당은 1485년 건립되어 지금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일본의 국보입니다.
진짜 은으로 덮혀버렸다면 오히려 빛이 바랬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할 만큼
금각사와 달리 아담하고 정갈한 조그만 정원과 연못이 어우러진 토쿠도 사당의 모습은
그야말로 일본 사찰문화의 정수라고 할 만큼 화려하지 않은 미의식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죠.

하지만 2008년부터 토쿠도 사당은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간 터라
지금은 돈 내고 들어가도 제대로 된 감상이 힘들기 때문에 일부러 은각사는 코스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아쉬운대로 감상할 수는 있겠지만 기왕 감상하려면 최상의 상태에서 감상하는게 좋겠죠.
평생 쿄토에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아쉬워할것 없이 이번엔 금각사만 감상하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실제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금각사는 비록 1955년에 재건되었다고는 해도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만한 유산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정말 심혈에 심혈을 기울여 소실 전과 거의 100% 동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당시엔 일본도 경제사정이 워낙 좋아서 거의 물쓰듯이 이런 문화제 수복에 돈을 퍼부을 수 있었죠.

따라서 현재 보는 금각사의 모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덕분에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네요..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곳입니다.
원래 별장으로 쓸 목적으로 이곳을 만들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 사후 사찰에 귀속되었지만
저런 곳을 만들어 노년을 보내려 했던 당시 일본 쇼군의 권력이란 참 놀라울 따름이네요.


저기엔 무엇이 적혀있었을까요.


금각사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이제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주변 풍경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이곳은 금삐까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실제로 산책로도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사람도 적어서 유유히 사진 찍고 놀면서 구경 잘했네요. 1년중 350일 정도는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인데
용케도 이런 날에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성년의 날 덕분에 힘들었던 관광 일정을 이런데서 보상받는 듯.


사진 좀 찍어보라고 친구한테 맡겼던 디카는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동생분이 직접 갖고온 똑딱이로 열심히 찍었죠.

차라리 동생분한테 디카를 맡기는게 좋았을지도.


바람도 심하지 않고 날씨도 적당하고
어제 시텐노지에서 비 쫄딱 맞아가며 강행군 했던 기억이 승화되어 갑니다.


중요 문화재까지는 아니지만 예전 일본의 휴게소(?)같은 분위기의 별장입니다.
서양 관광객들이 와서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구경하고 사진찍고 하더군요.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지만 이런 데서 포즈 잘 잡아주는 동생분의 사진도 좀 남겨줘야죠.


이런 곳에도 세전함이... ㅡㅡ;
한국 사찰도 뭐, 돈은 미친듯이 좋아하니 남 욕할 필요는 없지만.


금각사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아서 15~20분 정도면 무리없이 한 바퀴 돌 수 있습니다.
산책로가 끝나가면 이제 다양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앉아서 차 한잔 할 수 있는 휴게소가 눈에 들어오는군요.
느긋하게 저기 앉아서 주변 경관을 만끽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역시 좀 바쁘기도 하고...
15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구지만 여기서 일본 역사와 미의식에 대해 담소를 나눌 만큼 내공이 출중하진 않은 고로
그냥 사진만 찍고 나왔습니다.


동생분은 기념품점에서 선물 몇개 챙겼습니다.
금각사를 빠져나와서 점심을 먹기위해 다시 카와라마치역으로 향합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한 컷. 뷰파인더에 구애되지 마라고 소리쳤던 아줌씨가 누군진 모르겠는데
다양한 구도와 재미있어 보이는 화각을 이용하는 막간의 장난도 카메라의 즐거움이죠.

근데 필름카메라라서 돈이... 돈이... ㅡㅡ;

버스가 한동안 오지 않아서 정류소 옆의 자판기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뽑아먹었는데
제거 한입 먹어보고는 친구도 다른 종류로 하나 뽑아먹었습니다.


지난번 자전거 여행때도 한번 신세를 졌었던 회전초밥집 무사시노(武藏野)입니다.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맛은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는,
한마디로 가격대 성능비가 뛰어난 초밥집이라 헝그리 여행자들이 마음먹고 한 번쯤 가기에 좋은 곳이죠.

한국의 회전초밥집과 비교하면 미안할 정도로 괜찮은 가격에 괜찮은 품질입니다.


시작은 언제나처럼 계란말이로.
계란말이의 폭신함과 탄력, 달달한 맛의 조화로 초밥집의 실력을 가늠한다는 말이 있듯이
요리사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초밥이 이 계란말이니까요.

가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만족.


연어알도 튼실, 오이도 사각거리는게 적당히 풍미를 더하는군요.
한국 회전초밥집으로 따지자면 접시당 3천원~4천원 정도의 퀄리티입니다.
이곳은 접시 색깔별로 가격 차이가 있는게 아니라 모든 품목 균일가이고... 한국 돈으로 1800원 정도였던가?


아~ 강군이 이 사진을 보면 얼마나 괴로워할까. T_T
알면서도 여행기라는 명목으로 고문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나는 죄많은 인간이군요.


이곳에 돌아다니는 초밥은 거의 종류별로 다 먹어봤습니다.
생선이 힘겨운 친구는 문어초밥이나 새우초밥이나, 그냥 초심자용으로 알맞은거 주워먹고 있군요.
이번만큼은 지갑 신경쓰지 말고 뜻한 바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먹고 먹고 또 먹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절제하긴 해서 요 정도로 끝을 봤네요.

그닥 많이 먹은것 같지도 않군요. 역시 무의식적으로 지갑 잔고에 대한 걱정이 앞선 탓도 있고.
하지만 아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참은 건 아니니까 만족합니다. 한국서도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퀄리티 초밥을 먹을 수 있다면
아마 일주일에 세 번정도는 찾아가서 꼬박꼬박 먹어줄텐데 말이죠.

배도 채웠겠다 이제 쿄토에 와서 구경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표 볼거리 키요미즈데라(清水寺)로 향합니다.

해가 넘어갈 무렵 일행은 우메다(梅田)역으로 향합니다. 우메다는 북부 오사카시의 교통, 상업 중심지입니다.

남부 오사카의 요충지인 난바가 칸사이 공항의 관문과도 같은 곳이라면
우메다는 일본 칸사이지방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는 관문으로, 한큐선, 한신선, JR선등
일본 전국을 통하는 주요노선이 대부분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굉장한 번화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철과는 달리 일본의 전철은 국영, 시영, 민영 등 여러 종류로 나눠진 터라 노선이 상당히 복잡한 편이죠.
환승역을 공유하는 곳도 있긴 하지만 이름만 같지 출입구가 완전히 분리된 역도 많기 때문에
한국처럼 2호선 타다가 5호선으로 갈아타야지 하고 편히 생각하다가는 괜히 출구로 나가서 요금 더내고 갈아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이 우메다역은 전철뿐 아니라 신칸센 등 일본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곳이라
한신선 우메다역과 한큐선 우메다역, JR 우메다역이 각각 존재하는 굉장히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난바 지역처럼 주위에 먹고 놀고 즐길거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상가 지역은
쇼핑하기에는 오사카 최적의 장소 중 하나이기도 하고, 비즈니스 중심지역이라 거대한 고층 건물들일 빡빡히 들어서 있는 모습도 볼만합니다.


일행이 목표로 한 스카이빌딩은 우메다역에서 15분~20분 정도 도보로 걸어가야 하는 곳이라
일단 근처 파출소의 경찰에게 물어물어 길을 확인한 후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우어~ 칸사이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는 남자 경찰이 조금 설명해 주려다가
옆의 여자사람 경찰분께서 그나마 표준어로 또박또박 설명해 주시는 덕에 이해하기가 편했네요.

확실히 토호쿠(東北)지방보다 칸사이(関西) 사투리가 더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아주 지렁이가 굴러가는 듯한 느낌.

다리가 좀 뻐근했지만 속도가 느려지는 친구의 등짝을 채찍으로 몰아쳐가며(?) 열심히 걷고 걸어
주유패스 무료 쿠폰의 마지막을 장식할 스카이빌딩(スカイビル)에 도착했네요.

이곳 스카이빌딩은 오사카시에서 7번째로 높은 건물로, 보시다시피 양쪽 건물 사이를 에스컬레이터와 아트리움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4개의 빌딩을 세우고 그 중간을 정원화 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예산 부족으로 건물을 2개까지밖에 세우지 못했다는군요.

쇼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특히 동생분은 모르겠지만 저와 친구는 윈도우 쇼핑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고로
이곳 우메다는 공중정원을 공짜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별로 찾아갈 만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로 기간이 만료되는 주유패스의 쿠폰을 마지막으로 사용할 때가 왔습니다.
아직도 저렇게나 많은 쿠폰이 남아있지만 실질적으로 저걸 이틀만에 다 돌아본다는건 불가능하죠.
가끔 미친척하고 저 쿠폰들을 다 쓰려고 방방 뛰어다니는 여행객들도 있긴 한데
그건 관광이 아니라 완수해야할 미션을 수행하러 가는 듯한 비장함까지 느껴집니다. ㅡㅡ;
거의 한 곳당 15~20분 이상 체류해서는 안되는, 도대체 뭘 구경하러 가는지조차 알수 없게 되어버리는 극한의 도전이죠.


친구가 쿠폰 뜯기 신공을 발휘하는 동안 동생분은 지도를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사진이나 열심히 찍고 있습니다.

야간이 되면 필카는 힘을 쓰기가 힘들기 때문에 낮동안 썼던 감도100 짜리 필름을 400짜리로 교체해서
최대한 쓸만한 녀석으로 만들어 놔야하기 때문에.

그냥 디카쓰면 되잖냐 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사진은 역시 그날그날의 느낌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최대한 필름으로 느낌을 내 보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어떤 난관이 닥쳐와도 닥치고 필름입니다.

그래도 이곳은 어제 방문했던 WTC 코스모타워 전망대보다는 사람이 많이 있더군요.
우메다란 지역 자체가 워낙 번화한 곳이기도 하고, 역시 주유패스를 이용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습니다.
대부분이 한국사람들이었는데, 역시 주유패스의 이익을 가장 잘 챙기는 쪽은 한국 여행객들이 아닌가 싶네요.


일단 전망대 내부는 WTC 타워와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
높이는 WTC 타워가 훨씬 높기 때문에 약간 감흥이 덜할수도 있지만
베이 에이리어에 홀로 떨어져 독수공방중인 WTC 타워와 달리
스카이빌딩은 오사카시 최대의 번화가 우메다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화려한 야경을 감상하기엔 이쪽이 더 좋을지도.

오늘도 아침부터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된 일행은 제가 장노출로 사진 찍어대는 동안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는 중.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런 야경좋은 전망대 위에
2인용 캡슐 호텔같은걸 창가에 주르륵 배치해 놓으면 (매트릭스처럼)
커플들이 많이 이용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럼 너무 노골적인 랜드마크 러브호텔이 되어버리는건가. ㅡㅡ;


셀카찍기가 거의 불가능한 필름카메라지만
창분에 비치는 조명 덕분에 셀카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전망대 내부는 조명이 창문에 반사되는 바람에 야경사진 찍기가 힘들지만
WTC 타워와는 달리 이곳은 야외로 나갈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이곳은 원형 정원이라 오사카시내를 360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분위기 좋더군요.
불행히도 삼각대가 없이는 장노출하기 알맞은 지지 장소가 없는고로 각도가 이렇게 하늘을 향하는 사진밖에 찍을 수가 없었네요.
뭐 이것도 나름 정취가 있는 것 같으니 만족합니다.

일단 뛰어내리려고 작정하면 멋있게 자살할 수 있는 곳이라 정원에는 경비원이 눈을 번뜩이고 있더군요.


위에서 두 번째 사진, 밑에서 스카이빌딩을 올려다 본 사진 중앙에 나온 공중정원을 위에서 본 모습입니다.
레스토랑, 기념품샵 등이 위치해 있는데... 헝그리 여행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죠.

오사카 야경을 한바퀴 쭈욱 돌면서 구경한 후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데 동생분과 친구가 재미있는걸 발견했습니다.


이곳 공중정원은 야간이 되면 바닥이 반짝반짝 모래처럼 빛나는 야광 물질로 되어 있는데요.
빛을 밝혀주는 적외선 램프에 일행이 가지고 있는 손수건의 형광물질이 반응한 겁니다.
PD 수첩이나 불만제로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법한 공포의 형광물질이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웃으면서 각자의 몸에 걸치고 있는 형광물질을 찾느라 바빴네요.
의외로 옷 여기저기에 형광물질이 많이 쓰이고 있었습니다. 천연 섬유로 만들었다는 제 버프도 아주 반짝반짝 빛을 발하더군요.
신발 쪽에도 환하게 불이 들어오고... 원래같으면 기분이 나쁠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여행의 재미있는 헤프닝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스카이빌딩 관람을 마치고 우메다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위치한 거대 전자상가 요도바시 카메라(ヨドバシカメラ)에 들렀습니다.
이쯤되서 식사를 한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이곳 요도바시 카메라는 규모가 엄청나게 크더군요. 도쿄 아키하바라에 위치한 요도바시보다 훨씬 더 커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야 카메라 매장에서 죽치고 싶었지만 그건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라
옆에서 지루해할 일행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바람에 그냥 밥이나 먹으러 올라갔습니다.

오사카 도착때부터 계속 먹고싶었지만 자금사정때문에 횟수를 제한해야 하는 초밥을 좀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양에 비해 가격이 좀 센편이긴 하지만 초밥 품질은 평범한 회전초밥보다 훨 나은 편입니다.


저는 일단 성게알과 연어알이 포함된 세트를 주문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메뉴죠.
탱글탱글한 연어알이 저를 유혹하고 있네요.


미국서 유학중인 친구 강군이 무지하게 좋아하는 성게알.
이 사진 보면 아마 또 고통에 몸부림치겠군요. ㅡㅡ;


기름기 흐르는 참치 뱃살도 좋아합니다.
적당한 품질에 배를 많이 채우기 위해서는 역시 회전초밥이 낫긴 하지만
회전초밥집은 내일 쿄토여행때 점찍어둔 곳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무리 좀 해서 괜찮은 정식 세트를 먹습니다.


친구와 동생분은 무난한 세트를 시켰습니다.
아무래도 성게알같은 메뉴는 처음 도전하기엔 조금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특히 친구녀석은 생선을 거의 못먹는 타입이라 최대한 무난해 보이는걸 시켜야 했을 겁니다.


자금 여유만 널널했다면 저 혼자 이거 두 세트정도는 단칼에 해치울 수 있었는데...
그래도 진정한 초밥 사냥은 내일 쿄토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니 꾹 참으며 얼마 남지않은 초밥을 음미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후 저는 결국 짐 챙겨서 옆의 조그만 비즈니스 호텔로 향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코 고는 소리때문에 잠을 거의 못 잔터라, 오늘도 잠을 설쳤다간 내일 쿄토여행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결국 옆의 싸구려 비즈니스 호텔에 개인적으로 1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참 여행이란 건 예측불가능이군요.

저는 성격이 굉장히 예민해서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잘 때도 30분~1시간은 뒤척여야 겨우 잠이 들 정도라
바로 옆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면 잠은 다 잔거나 마찬가집니다.

자기 코고는 소리때문에 쫓겨가는 제 모습을 보고 친구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ㅡㅡ;
불행중 다행인지 숙소인 신세카이 거리는 굉장히 낡은 건물이나 숙소가 많아서
제가 찾아간 곳도 가족 단위로 꾸려나가는 조금만 민박이나 다름없는 곳이라
할머니께서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고, 따뜻한 녹차까지 한 잔 대접해 주시더군요.

엄청 낡은 곳이라 나무로 된 히터, 고풍스러운 타일 욕조 등 1980년대로 워프한 듯한 느낌이었지만
친구의 코고는 소리에서 해방된 덕택에 평화스러운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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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개별행동을 했던 저는 오다이바를 구경중인 부모님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신바시(新橋)역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는 오다이바를 여행하기 위한 필수 교통수단인 유리카모메(ゆりかもめ)를 탈 수 있죠.
유리카모메는 百合鴎 라고 쓰고 붉은부리갈매기라고 읽습니다.

일반 전철과는 다른 경전철로서, 전선이 전철 위쪽이 아닌 아래쪽에 감춰져 있어서 미관도 좋고
전 구간이 무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는 재미있는 전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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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이바 전체를 운행하는 최적의 교통수단인데다
오다이바 끝에서 신바시까지 왕복만 해도 740엔이라는 요금이 나오기 때문에
오다이바를 구경하시려면 1일 프리패스 승차권은 거의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룻동안 유리카모메를 마음껏 탈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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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시에도 볼 건 많습니다. 일본 최초의 철도가 세워진 곳이라 철도박물관도 있구요.
니폰테레비 본사도 있어서 구경거리는 많습니다. 참고로 오다이바엔 후지테레비 본사가 있어서 거기가 더 볼만하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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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군 아버님이 일본서 생활하셨던 20년전 무렵은 오다이바가 개발되기 전이라 요즘의 오다이바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고 계시진 않는 것 같더군요. 부모님께서는 사진의 배 박물관만 관람하고 바로 오다이바를 떠났습니다.

레인보우 브릿지의 야경과 비너스 포트의 쇼핑과 후지테레비 견학과 아리아케의 원더페스티발과(응?)
등등 하루종일 둘러봐도 모자랄 오다이바는 그렇게 시간관계상 겉핥기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올 수 밖에 없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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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박물관 옆의 조그만 씨사이드 풀은 34년간의 개장을 마치고 8월 31일부로 폐쇄하게 되었답니다.
저곳에 추억이 있는 분들은 서글프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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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다이바에서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것이, 4일간의 강행군으로 부모님도 많이 힘들어 하시고
그냥 식사나 한끼 하자고 연락드렸던 강군 아버님이 4일동안이나, 더구나 본인의 경비를 모두 스스로 지불하시는 바람에
저희 가족의 심리적 부담이 너무 커서 오늘은 식사만 마치고 빨리 돌아가 쉬시라고 말씀드리기로 했거든요.

그동안 여행한다고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한터라 이번엔 작정하고 음식을 위한 관광지를 찾았습니다.
동경 최대의 수산시장인 츠키지 수산시장(築地水産市場)이 그곳인데,
특히 일본인들이 사족을 못쓰는 참치가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행복한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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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이곳뿐만 아니라 모든 수산시장이 마찬가지지만, 사실 이런 곳은 새벽 5시경에 문을 열어서 오전 9시 쯤이면
시장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그 왁자지껄한 모습을 구경하려면 아침 일찍 출발했어야 합니다.

12시가 넘어 도착했을땐 이미 시장은 끝나고 한산한 상태였죠. 하지만 오늘 여기 온 목적은 싱싱한 초밥을 맛보기 위한 것이니 관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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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지 시장에서는 그 특성상 여전히 전통적인 가옥이나 생활 모습이 눈에 자주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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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유명한 초밥집인 스시잔마이(すし三昧) 본점이 이곳에 있습니다. 한국어로 '초밥삼매경' 정도랄까요.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벌건 대낮에 맥주를 세 병이나 시켰습니다. 이래서 술 좋아하는 사람과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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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다치고, 모든 초밥이 참치 부위로만 이루어진 참치 초밥세트가 나왔습니다!!
제 인생 30년 동안 먹어본 초밥중 단연 최강! 입에 들어가면 그냥 살살 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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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가 잘잘 흐르죠. 이걸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뿅가 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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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세트만으로 배가 찰리가 없으니 모듬세트도 시켰습니다. 초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때가 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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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크림 케이크의 딸기를 맨 마지막에 먹는 기분으로 남겨뒀던 참치 대뱃살! 입에 넣으면 그냥 살살 녹습니다.
아후~~ 또 먹고싶네요. T_T

사실 장소가 장소라서 그리 비싸지도 않습니다. 행복지수가 최고조로 올라갔던 한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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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풀어오른 배를 움켜쥐고 다시 역으로 돌아가던 중 보였던 공중변소. 정말 낡아보여도 냄새도 없고 깨끗합니다.

강군 아버님은 끝까지 가이드를 해 주시려고 했지만 저희 가족이 부디 들어가 쉬시라고 극구 요청하는 바람에
오늘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내일은 공항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굳이 오실 필요가 없어서 사실상의 작별인사였군요.

돌아오는 내내 괜히 여행간다고 말씀드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다음에 갈 때는
부디 이번처럼 신경쓰실 필요 없이, 그냥 간단하게 식사나 하는 걸로 했으면 좋겠네요.

강군 아버님이라는 든든한 가이드와 헤어진 후 저는 여지껏 동경다운 곳을 그다지 보지 못한것 같다는 요청에 따라

동경 최대의 번화가인 긴자(銀座)를 가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