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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야산'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06.03  킨키 방황 - 코야산 다이몬 16
  2. 2012.05.30  킨키 방황 - 우라시마 타로 체험 14
  3. 2012.05.29  킨키 방황 - 몽롱한 참배길 13
  4. 2012.05.28  킨키 방황 - 촬영금지 18
  5. 2012.05.27  킨키 방황 - 성불의 의미 18
  6. 2012.05.26  킨키 방황 - 코야산 오쿠노인 19

 

 

버스를 타고 코야산의 끝쪽인 다이몬(大門)으로 향한다.

시골인데도 비싼건지 시골이라서 비싼건지 관광지라서 비싼건지

아무튼 2km 남짓한 거리를 달리는데도 차등요금이 적용될 정도로 비싸다. 한국 돈으로 약 3천원.

 

오쿠노인의 출구에 해당하는 이치노하시(一の橋)앞에서 버스를 타고 다이몬으로 가는 관광객은 별로 없을거라 생각.

거리가 거리다보니 굳이 버스를 탈 이유가 없다. 칸사이 스루패스 덕에 무료 이용이 가능하다고 해도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면서 주위 풍경을 둘러보는게 훨씬 이득이기 때문에.

 

그래도 나이 지긋하게 드신 분들이 버스를 타긴 하는데, 대부분 다이몬보다 두 정거장 앞인 단상가람(壇上伽藍)에 내리는 모습이다.

일단 진언종이 시작된 핵심지라서 오쿠노인과 함께 코야산 필수코스로 통하다 보니 그런 것일까.

다이몬은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정말로 대문역할을 할 뿐이라서, 결국 종점인 다이몬에 내린 건 나를 포함 딱 두 사람 뿐.

 

찢어질듯한 다리를 끌고 다이몬 앞의 자그마한 벤치에 앉아서 한숨을 돌린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사실 이곳이 코야산의 입구 역할을 한다.

해발 1000m 의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험난한 산길을 통과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것이 이 다이몬.

수백년 전 사람들은 고행 끝에 다다른 이 거대한 대문앞에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런지.

 

높이가 25m에 달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 대문이라서 35mm 렌즈로는 전체를 담기가 힘들 정도.

다이몬 뒤는 바로 절벽이기 때문에 뒤로 물러날수도 없다. 광각렌즈를 가져왔다면 다 담았을 테지만, 이번엔 35mm 렌즈니까 힘들다.

사진 찍고 있는 관광객과 크기 비교를 할 수 있어서, 대충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단은 앉아서 쉬며 여기저기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 할아버지와 다이몬을 셋트로 구경한다.

 

 

 

소실된 것을 1705년에 재건해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이 다이몬은

건축 양식으로 볼때, 불교 문화가 어디를 통해 전파되었는지 쉽게 입증해주는 산 증인이라고 볼 수 있다.

처마 밑쪽은 일본식 양식이 남아있지만 여러 부분에서 현재의 일본 건축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인다.

 

도로를 지나 절벽 바로 앞의 덤불에까지 들어가서 겨우 전신사진을 한 장 남길 수 있었다.

크기만으로는 정말 일본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녀석이다.

 

여기서 500m 쯤 내려가면 딱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불상이 있긴 한데, 도저히 거기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당장 200m 떨어진 목적지 단상가람까지도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상상이 되지 않고 있으니.

카메라 장비가 더더욱 아픈 몸을 귀찭게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 덕분에 이렇게 즐길수나 있으니까 어쩔수 없다.

 

 

 

분위기 중시의 관광객이라면 이곳 다이몬에서부터 시작하는게 인상적인긴 한데

그렇게 되면 오쿠노인이 마지막 관광 코스가 되기 때문에, 그곳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최소한 아침 8시쯤에 도착해서 관광 시작해야 그나마 적절한 시간대에 구경이 가능하니, 부지런한 사람은 도전해 볼 만하다.

 

이 부근엔 다이몬을 필두로 진언종의 본당인 콘고부지(金剛峰寺)와 단상가람, 국보와 보물을 모아서 전시하는 영보관 등등

코야산의 주요 관광지가 대부분 모여있는 곳이라서, 제대로 둘러보려면 최소 6시간 이상은 걸리기 때문에

오쿠노인까지 전부 돌아보려면 사실 하루 일정은 너무나 빡빡하다.

 

거기다가 아픈 다리까지 겹쳤으니, 일단 입장료가 필요한 영보관과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콘고부지는 넘겨버리고

이곳과 단상가람만 구경하기로 결정.

 

한번만 오고 끝낼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관광 내내 들었기 때문에, 이만큼만 보고 돌아가도 크게 아쉽진 않다.

 

 

 

당연하게도 문의 양쪽엔 금강역사상이 세워져 있다. 어느 곳의 역사상이든 자세는 비슷비슷.

예전에 친구 일행과 오사카 갔을 때,

시텐노지(四天王寺)의 역사상 앞에서 친구와 친구 동생분을 저 포즈를 시켜 사진찍던 기억이 나는군.

이 블로그의 오사카 항목에 들어가 보면 그 때의 사진이 아직 남아있다. 포즈 취해주는 일행이 있으면 여행이 좀 더 재미있다.

 

 

 

덩치도 거대하고 보존상태도 좋지만

일본서 본 금강역사상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의 역사상.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사찰인 탓에, 그 시간의 흔적이 만들어내는 형언하기 어려운 매력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여행과는 관계없지만, 예전에 찍어온 호류지의 금강역사상을 비교삼아 올려본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강역사상.

 

사실 2008년 자전거 여행은 어느 곳에도 포스팅 한적이 없기 때문에, 이 사진들을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워낙 사진찍는 실력이 형편없던 시기라서 별로 올리고 싶지도 않다.

 

 

 

다시 현재로 되돌아와서, 다이몬을 지나 조심스럽게 단상가람으로 이동한다.

지뢰밭을 통과하는 느낌으로 한 발짝씩 정성을 다해 움직이는 모습이 실로 애처롭기 그지없다.

발목이 워낙 부어있다 보니 이제는 신발에 압박을 받아서 앉아있어도 아프긴 마찬가지.

그렇다고 한번 신발을 벗으면 다시 신기도 어려우니 그냥 정신줄 살짝 놓은 채로 구경 마치고 오사카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다이몬을 통과하면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이 광경이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

문화유산에 둘러쌓인 생활이라는 게 이곳에서는 허언이 아니다.

 

꽤나 현대적인 건물임에도 코야산이 가지는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조화로움을 자랑한다.

관광을 위해서 무리하게 도로를 확장하지도 않아, 인도라는게 거의 없다시피 하다.

물론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이 천천히 사람들을 피해 달리니까 걱정할 건 없고.

이 곳의 제한속도는 40km 인데, 사실 40km 까지 달리는 자동차도 본 적이 없다.

 

걸어가다보면 조그만 식당도 몇개 보이고, 대부분 이 근방 재료를 사용해서 깔끔함이 자랑인 듯 먹음직스럽긴 한데

지금 도저히 뭘 먹을 기분이 아니다. 맛도 느낄 여유가 없는데 괜히 비싼 관광지 식사를 즐길 수는 없지.

 

그때 다리 상태를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주위 사람이 '여행에 미친 놈'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걷는다는 것 자체가 무모할 만큼 굉장한 통증이었는데, 스스로도 참 사람이 아프면 제정신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긴 한다.

 

 

 

100m쯤 걷다보니 건너편에 뭔가 대단해 보이는 건물이 보이는데, 가이드북에도 그닥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런 사찰들은 코야산에 워낙 많아서, 이런것까지 하나하나 돌아보고 간다면 최소 3~4일 이상은 기간을 잡아야 할 듯.

입구쪽 풍경이 인상적이라서 셔터를 누른다. 그래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때만큼은 그나마 통증을 순간적으로 잊을 수 있어서 좋다.

 

 

 

유명한 명소도 아니지만, 코야산 내부는 중간중간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풍경이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몸이 가뿐했다면 계단을 올라가서 저기 끝까지 한바퀴 돌아봤을 텐데.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길거리 풍경 하나하나도 허투로 해 놓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애초에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곳이니, 어색하게 꾸미지만 않는다면 곳곳이 훌륭한 감상 포인트가 된다.

발목의 통증을 꾸준히 중화시켜주는 진통제 역할을 해 준다고 할까.

 

 

 

비록 인도가 없다시피해서 자동차에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화창한 날에 이런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

 

국보급 보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보관 같은 곳에서 지출이 있을수도 있지만

이렇게 마을 전체가 훌륭한 공원만큼이나 분위기 좋은 곳을, 돈 쓸 걱정없이 돌아다닌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렇게 아파도 찍을건 대충 다 찍고 오는구나.

 

 

 

지금도 사용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옛 향기를 자연스럽게 간직한 이곳 마을의 모습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

매일 아침 저곳에 들어가 있는 유우 한병을 가져오는 것에서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드라마를 보는 것 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분.

 

사람이 정성을 쏟으면, 오래된 집이라도 최첨단 아파트 못지 않게 아름답다.

 

 

이곳 코야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부분만 볼거리가 아니다.

역사와 문화를 가진 관광지가 어떤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해답을

마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건 한국에서 가장 소홀히하는 요소이기도 해서 더욱 대비되는 느낌.

 

속도 표지판 위에 올려둔 사찰 지붕 모양의 장식품 하나에서도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곳이 오사카 시내였다면 아마도 통증에 굴복해서 한두 시간 전에 관광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갔을 듯.

분명히 이곳의 풍경과 공기에는 천연 진통제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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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기나 통증이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악을 쓰며 걷고 있는데

굉장히 아기자기한 모습의 미니 사당이 보수공사터 주변에서 눈에 들어온다.

이끼로 지붕을 만든 듯한 고픙있는 모습이 멋지구나 싶었지만

만든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 듯 함에도, 부식 상태를 보니 역시 목조 사당은 이곳에서 버티기 힘든 듯 하다.

 

얼핏 보면 비슷비슷한 한국과 일본의 자연 환경도,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보이는데

일본은 기본적으로 여름에 훨씬 고온 다습한 곳이고, 그 때문에 산발성 호우가 자주 내리며

특히 계곡이나 산에서는 그 탓에 안개가 끼는 곳이 많다 보니

이렇게 산이나 계곡 전체가 이끼로 뒤덮힌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목조 건축은 순식간에 이끼로 뒤덮혀 부식되어 버리곤 한다.

 

코야산 정도라면 아마 이 목조 사당은 길어봐야 20년을 버티기 힘들 듯.

다음에 찾아갈 때 까지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 줬으면 한다.

 

 

 

한국에서는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길고 흐물흐물한 치마를 입은 관광객이 눈길을 끈다.

깍지 끼고 걸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구만. 사실 이 사진을 도촬할 당시엔 그것보다는

내 다리가 저 정도만 건강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더 절실하긴 했다.

 

걸어가는 도중, 아까 고뵤 앞에서 봤던 단체 관광객들이 혹여 내 발걸음을 따라잡으면 어쩌나 걱정도 했는데

아마도 나와는 반대 루트로 이동한 듯. 그 사람들을 만날 일은 없었다.

 

내가 들어온 입구 쪽에 대형차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출구를 그쪽으로 잡았을지도.

 

 

 

이렇게 가문 대대로 이곳에 묘석을 세우는 사람도 있는 듯 한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 이 정도 규모의 묘터를 마련했다는 건 상당한 재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불교의 중심지인 코야산이지만 이곳에도 토리이(鳥居)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의 종류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하다.

대문 역할을 하는 토리이 뒷면에 불교를 상징하는 오륜탑이 일렬로 늘어선 모습도 나름 퓨전적이다.

 

 

 

언덕 위쪽에 묘하게 한국식 느낌이 나는 건물이 보여서 조금 망설이다가 다가가 보기로 결정.

언덕으로 향하는 길은 아무런 정비도 되지 않은 흙길에다가, 흐르는 물 때문에 진흙으로 된 부분도 있어서

그 때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이제껏 봐온 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멀리서 볼 때는 색상 탓인지 조선 건축물인가 싶었는데 조금 다가가고 보니 그건 아닌듯 하다.

지붕이나 처마의 형태는 전혀 다른데, 색상이 왠지 조선시대 건축물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혹시 그 당시 유명한 조선시대 인물의 사당인가 싶었는데, 다가가서 보니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의 사당이라서 약간 맥이 빠졌다.

 

사실 맥이 빠질일도 없는게, 착각은 했지만 이 우에스기 켄신이란 인물은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영웅호걸로 유명한 인물이니

우연이 겹쳐졌다고는 해도 한번 구경할 수 있었다는 건 큰 수확이라고 생각.

 

전란의 시기였던 1500년대, 전국시대라고 불리는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의 무장들이 전국 통일을 목표로 전쟁을 벌이던 시기.

결국 일본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도 두려워했던 호걸 중의 호걸이 이 우에스기 켄신이라는 무장이다.

당시 최고의 무공과 뛰어난 용병술을 자랑하는 무장이라고 하면

누구나 우에스기 켄신과 그의 라이벌이었던 타게다 신겐(武田信玄) 두 명을 꼽을 정도로 뛰어난 무장.

평지에서 그의 군대와 부닥치면 전투도 하기 전에 후퇴하는 장수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런 인물임에도 불교에 심취해서 사생활이 깨끗하기로 유명했으며, 당시 불교의 뜻에 따라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인의와 예의를 지키는 무장으로 이름나, 적이었던 수많은 장수들의 문헌에도 켄신의 덕을 칭송하는 문구가 빠지지 않는다.

그 검소함의 함정이랄까, 대주가였던 그가 고기는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술안주로 짜고 신맛의 매실절임(梅干)을 즐겨 먹었던 탓에

49세때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 사실은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시 와카(和歌)의 대가이기도 한 것을 보면,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틀린것도 아닌 듯. 비유가 좀 이상한듯 하다만.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목조건축물임에도 보존 상태는 꽤나 양호하다.

1700년대 건축물로 추청되는 이 사당은, 1960년대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기 전에는 상부 지붕도 거의 날아간 상태였지만,

현재는 원래의 모습을 복원, 오쿠노인의 묘지 중에서도 꽤나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다.

 

 

 

조심조심 언덕을 내려와서 걸어가는 도중, 위에서 언급한 또 한명의 무장 타게다 신겐의 묘석이 눈에 들어온다.

묘석보다는 이 묘비가 훨씬 대단해 보인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서 있었는지, 외모에서 역사가 느껴질 정도.

사실 지금껏 걸어오면서 이 외에도 유명한 인물들의 묘를 많이 지나쳤음에 틀림없지만

이 정도로 눈길을 끄는 녀석이 아니면 하나하나 살펴볼 여력이 없을 때라서.

 

유명하다고 해도 일본인한테나 그런 것이고, 그것보다는 오쿠노인 참배길 전체가 갖고있는 풍경을 즐기는게 훨씬 낫긴 하다.

 

 

 

이런 건 이끼라고 부르기는 좀 이상한데, 수백 년이 지나면 이 녀석도 어엿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일까.

 

이제까지의 사진에 나온 거대 삼나무들은 보통 수명이 500년쯤 된 녀석들인데

야쿠시마에 있는 5천년 된 삼나무도 시작은 이런 조그마한 녀석이었다고 생각하면

자연이 만들어내는 매력이란 사람의 인지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듯 하다.

 

 

 

단체 석불상도 나름 신기한 모습.

거대한 삼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석불 앞에는 이끼와 새싹들이 돋아나 있는 풍경이 훌륭하다.

석불이라는 것도 동일한 모습이 없이 각자 개성이 있으니, 허투로 볼 곳이 거의 없다는 것도 이곳의 장점.

 

 

 

묘석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듯 피어있는 이 꽃은,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꽤나 묘하게 생긴 모습이다.

중앙의 노란색 반점 위엔 수술로 보이는 미세한 돌기가 나 있는데 잎사귀의 모양이 비대칭인 것이 신기할세.

구글 같은 데서, 그림만으로 꽃 이름을 찾아주는 서비스 같은 건 없는지 모르겠다.

 

음악같은건 마이크에 대고 재생하면 곡명을 알려주는 스마트한 서비스도 있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컷 하나만으로 무슨 동영상인지도 알려주는 서비스까지 개발중이고. 이 녀석은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긴 하지만.

내가 못 찾고 있는건지 한번 알아봐야겠다.

 

 

 

원래는 무엇에 쓰이던 녀석일까.

살짝 옆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오히려 주변 모습과 어울린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꽃들도 저 녀석 따라서 살짝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지 않나?

딱딱한 사각형 모양의 조각도 이러고 있으니 왠지 푸근한 인상을 준다.

 

 

 

이제 길다면 길었던 오쿠노인 참배길의 끝이 보인다.

3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볍게 산책할 만한 코스인데도

나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 끝낸 것 같은 성취감과 비장함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릴듯한 느낌.

 

사실 오사카에서 출발해서 하루 코스로 돌아본다면 아무리 뼈빠지게 돌아봐도 코야산의 전부를 감상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왕복 4시간이나 걸리고, 코야산 내부 숙박시설은 상당히 비싼 편이라서, 와카야마시에서 출발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새벽 6시쯤 출발하려 한 오늘 일정은 뜻하지 않은 염좌때문에 8시에나 출발하게 되었으니, 애시당초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볼거리는 한정된 몇몇 부분으로 계획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쿠노인을 완주(?)했다는 점에서

나름 고생해서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 물론 아쉬운 점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쿠노인을 빠져나가기 전 늠름하게 홀로 서 있는 오륜탑 한장 남긴다.

 

 

 

다행히도 출구 바로 앞에 벤치가 있어서 주저앉았는데

그동안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발목이, 모 막장 방송국처럼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광을 시작한다.

꽉꽉 눌려있던 통증 인자들이 한꺼번에 뛰쳐나오는 느낌이랄까. 자신의 심장 고동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두근 두근하는 신호에 맞춰 발목이 욱신거리는 것이, 아 이것이 인체의 신비로구나 하는 생각이 패닉 상태의 뇌속을 스친다.

 

오쿠노인에서 길가로 빠져나오자, 조금 전까지 시야를 가득 채우던 삼나무 숲과 몽환적인 묘석들이 일순에 사라지고

잘 정돈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스팔트 도로와 전기 가로등이 줄을 잇는 현대적인 거리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내가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있었는지조차 혼란스러워지는 순간.

 

며칠동안 용궁에서 놀다가 육지로 돌아오니 이미 300년이 지나있었다는 우라시마 타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

 

앉아 있어도 별로 편해지지 않는 느낌이라서 한숨 한번 내쉬고 길 건너의 관광안내소로 향한다.

다이몬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와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서.

 

코야산은 내부 순환 버스도 한 시간에 두대 정도밖에 운행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추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기도 한다.

물론 일반인이라면, 오늘 하루 7~8km 쯤 걷는다고 생각하면 버스없이도 거의 모든 곳을 돌아볼 수 있는데

지금의 나로서는 다이몬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하더라도 그 후의 구경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상태가 안좋다.

 

약 20분 후에 저기 언덕 위의 정류장에 버스가 한대 온다고 하니 다시 절룩거리며 이동을 시작한다.

 

 

 

정류장엔 다행히도 벤치가 있어서 그곳에 장비를 내려놓고 앉아서 최대한 체력을 회복한다.

어젯밤에 구입해 놓은 이온음료를 조금씩 마시면서, 비록 움직이진 못하지만 코야산의 일상적인 모습을 좀 담아보려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뛰어들기 주의라고 적힌 표지판. 세계 어느 곳이나 애들이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건 무서운 일이니까.

 

아이들이 직접 그린 듯한 마스코트가 그려진 표지판은 나름 인상적인데, 문제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는 시안성이 좋지 않다는 점.

카메라로 찍고도 한참 확인한 후에야 무슨 글씨가 쓰여져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

 

훌륭한 시안성의 표본이 바로 위에 설치되어 있으니 아이들은 저걸 보고 배울 수 있으려나.

 

 

 

맞은편의 버스정류장에는 벤치를 설치할 만한 공간이 없다.

만약 저곳에서 기다려야 했다면 20분동안 고생 꽤나 했을 듯.

2차선 도로이긴 하지만, 양쪽에서 버스 정도의 덩치가 달려온다면 한 쪽이 정차를 해야 지나갈 수 있을만큼 좁은 길이어서

인도 역시 이쪽에서 이어지다가 갑자기 끊어지고 반대편에 나타나는 등, 거의 한쪽으로만 만들어져 있다.

 

문화재로 뒤덮히다시피 한 코야산도 사실 일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어엿한 마을로

일단 중학교까지 교육시설도 갖춰져 있긴 한데, 아이들이 즐길만한 패스트푸드, 게임센터 등은 아예 없으니

번화가로 놀러가려면 버스와 전철을 몇 번씩 갈아타고 최소 1시간은 가야 하는걸 생각하면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예전처럼 산골에서 친구들끼리 노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거나

놀고싶은건 많은데 놀게 없어서 불만이 쌓이는 시골 아이들이거나

어려서부터 불법에 눈을 떠서 가부좌로 수행하는 아이들이거나 할 듯. 마지막 경우는 아닐거라고 보지만.

 

 

 

근대적인 모습이라고는 자동차밖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곳 마을은

관광객들이 번성하는 기간이 아닌 이상 인기척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한적하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

 

도시에서는 집이 나이를 먹으면 가끔씩 탈피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확 신축되어버리기도 하는데

이런 곳의 주택은 사람과 함께 느긋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옛날 주택은 물빠짐도 좋지 않고 여러가지로 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런 단점들은 전부 커버하고도 남는, 더 이상 신선할 수 없는 산내음과 맑은 물에 한없이 둘러쌓여 있으니까.

 

아이들에겐 좀 단조로울수도 있지만, 휴일에 드라이브겸 도심지로 데려가서 놀게 할수만 있다면

이 곳에서 애들 교육시키는것도 멋질거라는 생각이 든다.

널려있는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재를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는 유아기를 보내는 아이들의 감성은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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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왔던 쪽보다 좁고 오래된 길이라서 운치는 느껴지는데, 그만큼 길이 험하다는 뜻도 되니

어느 정도 걸어야 끝이 보일런지 걱정부터 앞선다. 누가 보면 여기가 험한 산골짜기인줄 알겠군.

다행히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통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 무리하지말고 천천히 한걸음씩 걸어가면

어쨌든 출구에 도착은 할 테니까 거기서 좀 쉬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일이 없어, 아픈건 둘째치고 연신 셔터를 누르게 되는 건 행복하다.

아마 제정신이었다면 좀 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인상에 남는 걸 더 담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전거 여행동안 가장 아쉬웠던 점이라면, 기대했던 히메지(姫路)성이 보수공사를 들어가서 볼 수 없었던 것과

모노노케 히메로 유명한 야쿠시마(屋久島)에 가지 못했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는데

야쿠시마와는 생태 습성이 전혀 다른 곳이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모노노케 히메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참배객의 인파에 떠밀려서 움직이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던 점이 플러스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기도 하고.

드문드문 새소리 정도밖에 들리지 않는 외딴 길을 거의 혼자서 걸어가며 이런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행운이랄 수 있다.

 

 

 

이쪽 길은 좀 더 산속 깊은 곳이라서 조금 전의 빡빡하고 정갈한 묘석들의 모습보다는

불규칙적이고 산만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당연히 이쪽 길이 더 마음에 든다.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곳곳에 보수공사 표지판이 놓여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런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유지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공식적으로는 약 천년간, 실제로는 수백년 정도의 나이를 먹은 곳임에도 이 정도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내가 죽고 몇백년 더 지나면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

 

 

 

입혀놓은 옷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본래는 새빨간 색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알 방법은 없다.

저 석불의 나이가 대강 백살 쯤 된다면, 내가 이 석불과 인연을 맺은 시간은 고작해야 수 초밖에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을지.

 

그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문화유산이 가진 가치가 아닐까 싶다.

 

 

 

모종의 사고로 잘린 건지, 참배길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잘린건지 알 수 없는 삼나무 옆에

일본에서 역사가 긴 회사인 쿠보다사의 묘석이 보인다.

이제까지 봐 왔던 삐까번쩍한 기업들, 산요, 닛산, 토요타, 샤프, 파나소닉 등의 묘석에 비해 꽤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묘석인 듯 하다.

 

원래 농기계, 엔진 중장비 등을 제작하는 회사로 유명한데, 요즘엔 친환경 발전, 리사이클 제품, 수자원 건설 등에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아마 중장비나 농기계 만져 보신 분들은 쿠보타라는 이름이 그리 어색하진 않을 듯.

연륜이 있는 회사라서 좀 딱딱한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일본 국내에서도 사원 복지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저 멀리서 아주머니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걸 보고 뭘까 싶어 슬금슬금 다가가 봤는데

내 몸굵기의 네 배는 되어보이는 거목 밑의 풍경이 묘한 형태로 되어 있어서, 나도 카메라를 손에 잡았다.

 

이런 모습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참배길에 워낙 가까이 있는데다, 길을 만드느라 깎아낸 산 때문에 점점 앞으로 구부러 지는걸 방지하기 위해

밑에 돌맹이를 고아놓은 것이 원인이 되어 이런 모습의 둥치가 만들어진게 아닌가 한다.

 

자전거 여행때도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몇번 있는데, 나무라는건 올려다 볼때 만큼이나 둥치 부분도 신기한 볼거리가 많더군.

 

 

 

둥치가 조금은 불안정한 모습의 삼나무지만, 다른 것들 못지않게 훌륭하게 자라나 있다.

원래 이런건지 모르겠지만 스크류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성장한 모습이 보인다.

나무가 워낙 굵은 탓에 되려 윗부분의 줄기가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이 나타날 정도.

 

조금 과장하면 살짝 바오밥나무 같은 모습이랄까.

 

 

 

아주머니들이 찍은 모습은 이것이었을까.

반대편으로 가 보니 저런 공간 사이에도 석불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돌 위에 놓여진 동전들을 보니 역시 인기가 꽤나 많은 듯 하다.

 

수십억을 들여서 호화스럽게 세운 거대한 묘석보다

이렇게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자리잡은 석불 쪽에 동전이 훨씬 많이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다들 생각하는건 비슷한 건지.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자꾸 야쿠시마와 비교를 해서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들지만

조금이나마 사진에서 본 야쿠시마와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런 모습들이 워낙 반가워서라고 이해해 주길.

 

사실 일본에서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이 야쿠시마였는데

지난 자전거 여행 당시 야쿠시마 근처에 도달했을 때는 한겨울이었고

자전거째로 배를 타고 가기에는 교통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좋게 생각하면, 야쿠시마는 자전거 여행 도중이 아니라도 제대로 날 잡고 본격적으로 돌아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훗날 더욱 완벽하게 즐기기 위한 일시적인 유보라고 해도 되긴 된다.

야쿠시마에서 추정 연령 5천년의 죠몬 스기라는 삼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왕복 약 15시간 가까운 산행을 해야 하는데

그곳만큼은 혼자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일부러 속을 파낸 것이 아니라면, 정말 절묘한 장소에 놓여있는 석불이다.

제대로 된 묘석이 아닌, 이렇게 군데군데 놓여져 있는 석불 중에서는 가장 명당이라는 느낌.

그래서 그런지 뭔가 놓여있는 것도 많다. 제대로 모습을 갖춘 세전함까지.

 

마치 서민 흉내를 내면서 영업하는 강남의 포장마차 같은 느낌이랄까?

 

 

 

좁은 산길을 빠져나오자 점점 길이 넓어지고 깔끔하게 정비된 것이

조금씩 출구가 가까워져 가는 느낌이다.

 

좀 전에 나무 둥치에서 사진 찍던 아주머니들이 멀리 사진에 보인다.

망원으로 당겨 찍은 녀석이라서 사실 훨씬 멀리 있지만, 지금 걸음걸이로는 저분들 속도가 훨씬 빠르다.

땀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찢어지는 발목의 통증을 참고 걸어가고 있지만

왠지 조금 더 가면 끝이라는 생각에 배가 부르게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참배길은 인생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아픈 몸이 원망스럽지만 그렇다고 감상을 소홀히 한 건 아니니 뭐.

 

 

 

여기서 본 석불 중 가장 단순하고 특징적인 녀석.

이쯤되면 정말로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건지 의심이 갈 정도다.

 

혹시 인류가 멸망한 후 수천 수만년이 지나고 나서 다른 생명체가 이곳을 찾았을 때

조잡한 상태로 봐서 '이 녀석들이 이곳에서 제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너무 앞서나간 걱정인가?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묘석과, 분명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묘석이 혼재해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의 묘터 지정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그냥 낡거나 부서졌다고 그걸 치워버리고 새 묘석을 세우진 않을텐데.

 

가족들의 성묘는 좀 전에 봤던 입구쪽에서만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데

이 근처에도 조금 젊어보이는 어머니와 딸이 간략한 음식을 들고 묘석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살아서 이어져 가는 문화 유산이라는 점도 이 곳의 장점이라고 생각.

이미 수백년전 현실과의 맥이 끊겨버려서, 지금은 단지 관광객의 볼거리로만 여겨지는 문화재가 수없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걸어가면서 눈에 들어온 오륜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녀석.

안개낀 날이나, 저녁무렵에 이런 산길을 걷고 있으면 지금과는 달리 꽤나 음산한 기분이 들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문화재라고 해도 공동묘지는 공동묘지라서, 이곳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고 들었으니.

 

 

 

현실세계와는 정반대로, 이곳에서는 묘석과 삼나무보다 이런 꽃을 보기가 더 힘들다.

꽃 이름은 모르지만 잎사귀가 밑으로 늘어진 모습이 독특하다. 저런 모습이 꽃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 하다.

 

이 정도 깊숙한 산골이라면 야생동물에 대한 경고문 같은거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아직까지는 이 곳에 와서 그런 표지판을 본 적도 없고, 개나 고양이는 물론 어떤 숲짐승도 본 적이 없다.

너무 오랫동안 참배객이 이어지다보니 이 곳은 사람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일까.

 

코야산 주변은 여전히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 대부분이고, 일본의 산은 한국과는 달리

등산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도 굉장히 드물어서

아마도 굳이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야생동물은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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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휴게소가 있는 곳까지는 도착. 화장실 한번 들어가고 나서 주위를 슬쩍 감상한다.

휴게소라는게 필요없어 보이는 길이의 참배길이지만, 나이 많이 든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까 있으면 좋을 듯.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는 사찰이, 옆의 나무와 참 단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 본다.

 

 

 

사계절 내내 단풍나무인 듯 하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일까. 주위 풍경과 굉장히 대비되는 모습이 멋지긴 하다.

 

아무튼 주변 풍경 하나하나에 감탄하지 않을 곳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곳이라서

떨어지는 사진 실력을 갖고 있어도 그럭저럭 찍으면 꽤나 보기좋게 나오는 듯.

지역이 지역이라 그런지 확실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평일 낮에 여기 찾을 수 있는 젊은이란 나같은 관광객밖에 없긴 하겠지.

 

 

 

휴게소가 이렇게 멋들어지니, 이곳 오쿠노인 참배길은 어색함 없이, 어디 하나 조화롭지 않은 구석이 없다.

2015년이 고야산 개창(開創) 1200년이 되는 해라서, 그해 5월달은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참배객과 관광객이 몰려들 것 같다.

 

1년간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홋카이도의 시레토코(知床), 오카야마의 쿠라시키(倉敷) 였는데,

이곳 오쿠노인도 그 중에 당당히 들어갈 정도로 굉장히 마음에 든다.

 

1200년 기념으로 이곳을 처음으로 찾을 수 많은 관광객들은, 아마도 인파에 휩쓸려 고생 좀 하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깊은 인상을 받고 오랫동안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추억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워낙 성지로 추앙받는 곳이다 보니 그 흔한 자판기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이 더욱 놀랍다.

일본에서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관광지라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히 희귀한 편.

휴게소도 얼핏 보니 먹을 걸 파는 곳은 없는 듯 하고, 노인들이 앉아서 TV의 고야산 소개를 보고 있다.

 

 

 

휴게소 역시 근간에 지은 듯한 느낌은 나지 않는다.

정교하게 지어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인지, 정말로 오래된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양 건축물에서는 항상 처마 밑과 지붕의 흐름, 단청의 모양 등을 가장 유심히 살펴보는데

이곳 오쿠노인의 건축물들은 오사카 안의 왠만한 전통 건축물보다 훨씬 미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이곳이 속한 와카야마(和歌山)현은 발전도 더디고 인구도 킨키 지역에서 가장 적은 산골인데

정말 코야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다. 수백년 전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해 이곳을 찾은 참배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예전 참배객과 같은 의상을 하고 순례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그런 사람들과 일반 관광객을 위해 예전부터 이곳의 백여 개 사찰들에서는 템플 스테이가 가능하다.

여유가 있다면 경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금액이 왠만한 일급 호텔 수준이라서 나한테는 무리.

 

불교 문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기도 하고, 모든 숙박실에 열쇠가 없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나 같은 사람은 카메라 장비를 그런 데 내려놓고 돌아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시 속세인의 번뇌.

 

 

 

자판기 같은 전자기기가 이곳에 어울릴 리가 없으니, 없는편이 훨씬 낫긴 한데

그래도 기념품이나, 불교식으로 소원 비는 각종 도구들은 팔고 있다.

 

종교란 개인적인 소망 들어주는데 이용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지론을 같고 있기에 관심은 없지만

참배객인지 홍법대사인지 모를 마스코트 캐릭터 스트랩이라던가 하는건 그럭저럭 볼만해서 잠깐 구경해 본다.

본인이 쓸 생각은 없고, 이런 거라면 여행 선물로 남한테 주기에는 적당할 것 같은데

뭐랄까, 내 지인들에게는 그런 선물 주는것보다 그냥 여기 한번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어서 구매는 하지 않기로 결정.

 

지면에 내딛는 힘의 80%를 오른발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이젠 왼발만큼이나 오른발도 피곤하다.

휴게소에서 앉아버리면 다시 일어나는데 상당히 고생할 것 같아서 잠시 숨만 고르고 다시 출발.

사하라 사막 마라톤 당시 체크포인트에서 주저앉아 잠시 쉬고나면, 일어나서 출발할 때 훨씬 아프고 힘들었다는 경험상.

 

 

 

기념품점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고, 고뵤 참배할때 봉납하는 도구들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할까.

오쿠노인에서 가장 세속적인 건물이긴 한데, 건축 양식은 후기 카마쿠라(鎌倉)의 흔적이 보여서

어지간하면 다른 역사적 건축물들에 비해 좀 현대적이고 이질적인 경향이 있는 이런 건물도 거의 위화감이 없다.

 

이런 곳에서는 왠지 마음도 경건해 지는 듯 한데, 화장실 근처에서는 공사 인부들이 담배를 피고 있는걸 봐서 꼭 그런것만은 아닌 듯.

오쿠노인 참배길은 전부 금연인 걸로 알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휴식 시간에는 역시 빠트리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담배가 천박한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겨난지 4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뭐.

 

 

 

난 지금 무슨 고행중인가 싶을 정도로 왼발 통증이 심하다.

몸을 생각해서 오늘 푹 쉬었다면 붓기가 어느정도 가라앉았을 테지만

여기서 이런 풍경을 감상하는걸 포기하는 것도 통증만큼이나 아쉽고 괴로운 일이다.

 

걷다가 가끔씩 발을 잘못 디디면, 매운 걸 먹었을 때처럼 본능적으로 쓰읍~ 하고 숨을 들이키게 된다.

산길치고는 굉장히 평탄한 길이지만 어쨌든 산길은 산길이라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곤 한다.

고뵤가 코앞이니 이제 절반 정도 걸어온 셈인데, 문제는 코야산의 볼거리가 오쿠노인만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

 

원래대로라면 오쿠노인을 빠져나와 반대쪽 끝인 다이몬(大門)까지 느긋하게 경치 구경하며 걸어간 후

단상가람과 영보관(霊宝館)을 감상할 생각이었는데, 2km 정도 되는 그 거리를 걸어서 가는건 지금으로서는 무리다.

오쿠노인이 약 3km 정도, 이곳만은 도보 이외에 어떤 이동수단도 없으니까 죽기살기로 걸어가고 있지만

다이몬까지는 결국 짧은 거리라도 버스를 이용해서 이동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다행히도 스루패스덕에 버스비는 공짜.

 

 

 

이 다리 앞에서부터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일본 문화재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뭘 이런 것까지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사진 금지 구역이 많다.

중요 문화재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라면야 얼떨결에 플래시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테니 이해가 되지만

사방천지 뻥 뚫려있고, 다리 하나 지나는 것 외엔 바뀔 것도 없는 이런 곳에서도 촬영 금지라는건 조금 의아하다.

 

뭔가 엄숙함과 경건함을 위한 조치라고 개인적으로 예상해 보지만, 멋들어지게 수식했을때나 그런 거고

간단히 말하자면 사진 따위로 귀중한 볼거리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이란 것이겠지.

사진이란게 마이너리티 리포트 세대처럼 현실감 100%인 입체영상도 아니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촬영 금지라는 푯말이 일본 전역에 너무 많다.

 

그러라고 하니 일부러 규칙 어겨가면서 찍지는 않지만, 다리 넘어서 사진 찍는다고 오쿠노인의 경건함이 사라지진 않는다고 본다.

루브르 박물관도 플래시와 삼각대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데 말이지.

 

아무튼 망원렌즈도 가지고 왔으니 저 멀리 보이는 고뵤도 한장 남기고 다리를 건넌다.

앞의 관광객 단체를 이끄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세심하게 설명을 하고 있던데

조금조금씩 듣는건 몰라도 아픈 발목을 핑계로 느리게 걸으면서 설명 내용을 전부 다 들어버리는건

약간 도둑질 같은 느낌도 들어서 그냥 들리는 말만 듣고 지나가 버린다.

 

다리 건너서 고뵤까지는 이십 미터정도 될 법 한데, 이 안의 묘석들은 대체로 일본인이라면 알고있을만한 유명 인물들의 것.

예전 총리대신 했던 사람 이름도 얼핏 들리는 걸로 봐서

홍법대사와 가장 가까이 있지만 그의 뜻과는 가장 동떨어진 묘석들이 모여있는 곳인 것 같다.

홍법대사의 사당에 가까이 가서 누울수록 더 큰 복을 얻을 거라는 허망하고 탐욕스러운 중생들의 작태.

 

 

 

고뵤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굉장히 엄숙한 분위기.

일본 전국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니 분위기가 사뭇 남다르다.

 

그룹을 이끄는 가이드 아저씨가 들어가기 전의 예절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난 그냥 신발 안 벗는 곳까지 가서 내부 모습만 감상하고 가볍게 목례한 후 다시 빠져나왔다.

다리를 건너서 카메라의 전원을 다시 켜고 이제부터 돌아갈 길을 한장 담아본다.

이 길로 주욱 돌아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좀 전과 다른 방향을 선택하면 된다.

 

나만 그런건 아닌지, 몇몇 사람들이 나처럼 다리 바로 앞에 서서 고뵤의 모습을 담고 있더군.

 

 

 

 

잘려나간 나무 둥치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서 보기 좋은데

제대로 터를 잡지 못하고 이런 곳 사이사이에 놓여진 석불도, 과거나 현재나 고단한 서민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떡하니 묘터 잡아서 늠름하게 서 있는 묘석보다 이런 녀석들에게 합장 한번이라도 더 하겠다.

 

 

 

죽은 사람도 언젠가는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지론으로 보자면

아무리 반듯한 묘석이라도 결국 시간에 침식되어 이렇게 점점 형태를 잃어가는 게 본모습이라고 생각.

한국의 묘소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다 보면 슬금슬금 깎여나가서 결국은 주위와 동화되어 버리는게, 그게 좋다.

 

아버지가 묘석을 별로 안좋아하는 이유도, 천년만년 지나도 계속 그대로라서 뭔가 이상하기 때문이었으니.

그런데 이곳에서는 묘석도 점점 사그라져 가는게, 훗날엔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 있겠지.

순환의 필연성과 그 아름다움은 사람이나 비생물이나 마찬가지다.

 

 

 

왔던 길과 다른 쪽으로 나 있는 참배길로 들어선다.

30분이면 쉽게 돌아볼 거리를 한 시간 반씩 잡아먹고 있으니, 통증만 아니라면 느긋한 구경에 적합한 속도인데.

어제 겨우 그거 무리한 것 가지고 발목이 이 모양이라는게 이쯤되니 뭔가 억울하게까지 느껴진다.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닌데 왜 이번엔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왼쪽 발을 들어올리는 것도 부담되서 이제는 아예 왼다리를 쭉 편 상태에서 지면에 원을 그리듯이 휘적휘적 돌려가며 걷는다.

영 꼴불견이지만 그나마 이게 제일 덜 아프니까. 그런데 가끔 어디 툭 걸리고 할 때면 지옥이 엄습해 온다.

 

 

 

이 정도 한자는 다들 읽을 수 있으리라 본다.

계단을 올라가면 뭔가 볼만한 묘석 혹은 사당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리가 멀쩡했다고 해도 저기 올라가는 수고따위는 하고싶지 않네.

 

일본에서는 당연하게도 전국시대의 영웅으로 명성이 높지만, 한국인이라면 유전자에 거부감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을 듯.

전국시대를 막 끝낸 당시의 일본은 거의 들개같은 야만과 혼란의 집합체였고, 장수들에게 하사할 토지가 턱없이 부족하던 때

하필이면 얼토당토 않는 방향으로 머리 굴린다는게 조선 침략이었으니... 지네들 밥그릇 싸움에 옆집 끌어들인다는 발상이 참 기가 찬다.

 

한국인 입장에서라면 그냥 올라가서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저 녀석을 위해 계단 올라가는 수고도 아깝다.

 

일본 역사를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자기가 아는 일본 인물 90% 이상은 이곳 오쿠노인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유랑 시인인 마츠오 바쇼(松雄芭蕉)의 묘석이라면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지금 이 다리로는 그저 참배길을 온전히 빠져나가는데만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포기.

 

 

 

오륜탑에 생명을 틔운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풍륜과 화륜 사이에 식물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라, 문학적인 감상이 떠오르는 듯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각자 알아서 감상하는 편이 좋을 듯.

 

자신의 사진은, 본인이 브레송 정도의 대가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찍사 자신의 의도와 느낌을 설명해 주는게 좋긴 하지만

가능하면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고 각자의 생각을 간직하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한 장이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사진은 아니니까.

 

 

다리의 통증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나로서는 오디오 가이드를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곳까지 오는 사람이라면 7천원쯤 지불하고서라도 꼭 오디오 가이드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설명이 극히 제한적이고, 그나마 일본어와 어색한 영어 안내문밖에 없는 곳이 많아서

역사적 향기를 간직한 수많은 묘석들에 대한 설명은 전적으로 오디오 가이드에 의지할 수 밖에 없으니까.

 

한국어 버전도 있다고 하니, 몸만 정상이었다면 훨씬 알차게 즐겼을 터였는데

그 당시엔 오디오 가이드에 대한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발목 통증이 심했다.

 

저런 조그만 표지판을 보고 그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지금와서 다시 안내소까지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가이드가 없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점이 있긴 있다.

고지대 숲속 깊은 곳에 위치한 오쿠노인은, 목재나 금속재로 만든 것들이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꽤나 대단한 모습을 한 묘석조차도 전부 석재로 되어 있다는 점.

 

중요문화재로 선정되어 있을 만큼, 꽤나 오랜 시간 지난 묘석인데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주위 환경과 절묘하게 조합되어가는 모습이 실로 인상적이다.

 

 

 

군데군데 보강을 거친 모습이 조금 어색한 것도 사실이지만 훌륭한 볼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이 정도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한다면, 세워질 당시에도 상당한 권력가였을 듯.

코야산에 묘석이 들어서기 시작한 건 약 1000년 전인데, 실제로는 500~600년 전의 묘석이 주를 이룬다.

 

물론 셀 수도 없이 부서지고, 그 위에 다시 세우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연도는 거의 알 수 없지만

현대 일본 전통건축 양식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점을 보이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다.

 

저런 기와와 처마의 모습은, 당시 중국과 한국의 양식의 틀이 여전이 남아있었다고 해도 되겠지.

 

 

 

불교 건축물로는 유명한 오륜탑.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빠릿빠릿한 녀석보다 이렇게 세월의 흔적을 가진 녀석이 훨씬 보기 좋다.

이런 식으로 보존되기에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기도 하고.

 

이곳은 예전에 세워진 몇몇 특정 묘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아니고

참배길 자체가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 자체가 이 곳의 신비성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끼게 해 주는 모습.

날려나간 거목 위에 다시 새로운 삼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백 년이 지나면 이 녀석도 주변의 거목들처럼 높디 높게 솟아있겠지.

아마 마야나 잉카 문명처럼, 일본이라는 나라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이 오쿠노인의 참배길은 여전히 남아서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길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소원 종이. 설마 이런 곳에까지 매달려 있을줄은 몰랐다.

사실 근본적으로는 낙서와 다를 바 없는 행위이긴 한데, 주변을 훼손하진 않으니까 괜찮으려나.

 

저건 보통 소원을 적어서 나뭇가지에 매다는 것인데, 이런 묘지 가운데서 무슨 소원을 비는지는 모르겠다.

 

 

 

오쿠노인 참배길은 V 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앙에 홍법대사의 영령을 기리는 고뵤가 위치한다.

그래서 고뵤 부근을 제외하면 입구와 출구의 위치가 다르다. 거리상으로는 약 2km 정도.

 

고뵤에 다가가면 확 트인 공간과 함께 기념품을 파는 곳이나 휴게소, 영령전, 사찰 등의 건물들이 나타난다.

평상시라면 산책 축에도 들지 않는 가벼운 길이지만 나로서는 거의 극기훈련 하는 기분.

잠깐 생각해보니, 이곳은 눈이 쌓인 겨울에 와도 그 경관이 놀라울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비가 와서 안개가 자욱히 낀 모습도 이 곳의 경건한 분위기에 어울릴 것 같고.

 

푸르름을 마음껏 발산하는 5월 중순의 맑은 하늘 아래에서 감상하는 오쿠노인도 좋긴 한데

뭐랄까 이렇게 맑고 화창하면 분위기가 조금 안 사는것도 사실인 듯. 그래도 사진 담기엔 좋다.

 

 

 

조금만 더 가면 고뵤에 도달하는데, 그 전에 눈에 들어온 이 탑은, 고뵤 자체보다 더 인상깊게 다가왔다.

'무연불' 이라는 제목의 탑으로, 이름 그대로 연고가 없이 방치된 석불들을 한 곳에 모아서 세워 놓은 것.

오쿠노인에 산재해 있던 수만개의 석불들을 이곳으로 모은 이유까지는 모르겠다. 묘석을 세우는데 방해가 되어서 그런가?

 

 

 

일반적으로 이런 조그만 석불들은 어린 아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별할 것 없이 이렇게라도 명복을 빌곤 했다.

이제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수십, 수백년 전의 석불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은 뭔가 형이상학적인 느낌.

 

 

 

상당히 오래된 것들인데다가, 원래부터 그렇게 정교하게 조각되지 않은 석불이기 때문에

지금와서는 얼굴의 형체조차 사라져 버리고, 그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흔적만이 남아있다.

 

오쿠노인은 아직도 사람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방치된 석불들이 꽤나 많은데

가난한 자들의 노력이라고는 하지만 석불은 당시 꽤나 비싼 축에 들어갔고, 오쿠노인 안에서도 도난 사건이 셀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는 이렇게 한 곳에 모여 도난당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늘어서 있으니, 좋은 시절인 듯 하다.

 

 

 

중요 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는 수많은 묘석들과, 홍법대사의 고뵤 등이 아무리 중요하고 위대하더라도

결국 코야산과 오쿠노인이라는 이미지를 현세에까지 이어가는 원동력은

 

힘 없는 서민들이 한개 한개씩 공양했던 이런 조그만 석불들이 아닐까 싶다.

역사는 권력자들에 의해 쓰여지지만 문화는 항상 가장 낮고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샘과 같으니까.

단순한 돌맹이에 불과한 물체에 정성스럽게 헝겊을 둘러주고, 타인을 위해 합장하는 그 마음가짐이야말로

홍법대사가 의도했던 불교의 정신이며, 세계 각국에서 이 곳을 찾아오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

 

 

 

이것도 아마 공양물이겠지.

성불이란 표면적으로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행위이지만

결국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겨진 사람은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죽은 사람에 대한 연민을 선택한다.

그렇게 본다면, 성불이란 결국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거라고 생각.

이 인형을 놓고 간 사람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평온해 졌을 것이다.

 

 

 

무연불 주변에는 확실히 아이들을 위한 공양물이 많이 보이는 듯 하다.

실을 뭉쳐서 만든 저것도 옛날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오쿠노인에 가서 동전 한닢이라도 봉납하고픈 기분이 든다면, 무연불 앞에서 하는게 제일 적절하지 않나 싶다.

 

 

 

관광객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정말로 자기 가족들의 묘에 참배하러 온 사람들도 있다.

꽃과 간단한 음식 따위를 올려두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것은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패스.

좀 전의 흰개미 묘석도 충격적이었지만, 왠만큼 알려진 대기업들이 세운 묘석도 상당히 많다.

아니, 대기업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만 조금 알려진 기업들의 묘석도 상당수.

 

대부분 자사 공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명목을 비는 묘석인 듯 한데, 기업이라 자금이 빵방해서 그런지

일반적인 묘석보다 크기도 크고, 조각상까지 설치해 놓는 곳도 있다.

 

개인 묘석보다 너무나도 크고 웅장해서, 이쯤되면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인지 기업 자랑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진에 담지 않았다.

 

 

 

끝없이 줄지어 선 묘석들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과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어쩌면 이렇게도 생장이 다른 삼나무가 자라고 있는지 신기하다.

중국의 메타쉐콰이아 나무도 삼나무의 일종이지만, 한국에는 이런 삼나무가 없다는 것이 특이한 점.

 

기원을 따지자면 야쿠시마(屋久島)나 시레토코(知床) 등,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백년 전 인공적으로 조성된 삼나무 숲이긴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인공미는 사라지고 어엿한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듯.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묘석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중이다.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꽃이나 캔 음료수, 비닐에 쌓인 먹을거리 등을 놔두고 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관리 없이는 온통 썩어나는 것들로 뒤덮힐 것 같다.

 

묘석 앞에는 1엔짜리에서부터 100엔짜리 동전도 많이 올려져 있는데, 이곳엔 그런 거 가져가는 사람은 없는가 보다.

마음먹고 털어가면 아무리 동전이라도 기십만원어치는 우습게 모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인데.

 

 

 

이곳에 묘석을 세우는게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닌데, 이런 애완견의 묘석까지 놓여있는걸 보면 여러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엄니처럼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나처럼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도 맘대로 못 눕는곳에 돈X랄 해가며 동물 비석까지 세우는구나. 이놈의 세상~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고.

 

아, 내세의 명목을 비는 건 굳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동일한 것이구나. 이게 불교의 원리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묘석을 세우는거야 어쨌든 좋은 의도지만, 코야산이라는 의미깊은 위치 자체가 빈부 측정의 척도로 쓰이는 것 같아서 약간 마음에 걸린다.

 

이곳에 이 정도 묘석 세우는데는 싸게 잡아도 기본 3~4억은 든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묘지에서 가장 씁쓸한 광경은 이런 동자상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니, 춥지 말라고 옷을 입혀주는 것이나

앞에 놓인 먹을거리도 아이들 입맛에 맞는 과자같은 것들이 많아서 더더욱 애잔하다.

 

나같은 독신도 사무치게 이해가 되는데 자식 가진 부모들이라면, 7살이 되기 전에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그 심정을 설명할 필요나 있을까.

엄니는 예순이 넘으신 지금도, 내가 어릴적 사고나 병으로 죽어버렸다면 당신도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하신다.

 

그 찢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단지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일념 하나로

이렇게 세워 둔 조그만 동자상들의 모습은, 그 의미를 안다면 이 곳을 찾는 전 세계의 누구라도 아련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배길 초반에는 대부분 반짝반짝한 새 묘석들이 줄지어 있지만

가끔씩 이렇게 사람이 손을 놓아버린 듯한 녀석들도 눈에 들어온다.

자리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고, 새것으로 보이는 양초가 남아있는 걸로 봐서

아직 이곳에서 명복을 비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벗겨진 페인트와 녹슨 철판도 왠지 이곳에서는 그리 흉물스럽지 않다.

 

 

아직까지는 정돈도 잘 되어있는 산책길 같은 분위기다.

 

그 빼곡하던 묘석들 사이에 공터가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이번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기 위한 예정지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대참사의 흔적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모습에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

 

 

 

온통 하늘을 찌를듯한 푸른색 천지에 이런 단풍이 서 있는 모습은 극히 인상적.

인공적으로 걔량되어, 사시사철 저런 색을 하고 있다는 말은 들은적이 있는데

절경 속의 절경이랄까,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인상적인걸로 치면 이 묘석을 빼놓을 수가 없다.

어느 유쾌한 사람이 만든 '낙서총'이라는 이름의 이 묘석은, 낙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행위이니

하지 말라는데 하지 말고 이곳에서 신나게 낙서라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묘석 자체도 여기저기 낙서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그 옆에 정말 낙서할 수 있는 판이 놓여져 있다.

이렇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인생을 잘 산 사람이 아닐까 싶다.

 

 

 

딱히 표시된 건 없지만 이 안쪽부터는 분위기가 급변한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포장된 현대인들의 묘석들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전의 묘석들이

참배길 주변 뿐만 아니라 길이라고 할 수 없는 산속 구석구석에까지 빼곡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으로서의 진면목은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급변하는 분위기만큼 왼쪽 다리도 아주 심각한데

어떻게든 버티겠지 싶던 다리는 계속 무리를 줘서 그런지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다.

목발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힘을 거의 줄 수가 없다.

 

절뚝거리며 어떻게 전진은 하고 있지만 게속 그러다 보니 오른쪽 다리는 근육이 아주 터질듯 하다.

코야산 탐방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이미 일반인 걷는 속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으니.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 갈 수도 없으니 그냥 어쨌든 참으면서 계속 걷는 수 밖에.

 

 

 

걷다보면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간다.

이 정도 규모와 역사를 가진 묘지는 확실히 세계적으로도 드물거라 생각.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거대한 삼나무와 셀 수도 없는 묘석들 뿐이다.

 

길이 나 있지 않은, 시야가 보이는 끝까지 묘석이 빼곡하다. 현실감각이 없어질 정도의 풍경.

코야산이 성지로 추앙받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껴진다.

 

 

 

입술과 볼에 연지까지 칠한 동자상이 어째 되려 애처로운 모습이다.

동자상에는 대부분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데, 아마 가족뿐만 아니라 참배객 모두가 명복을 빌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유독 동자상들 앞에는 동전이 많이 놓여있는 것이 인상적.

 

 

 

오쿠노인 참배길은 홍법대사의 영령을 기리는 고뵤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오래된 묘석들로 채워진다.

고뵤에서 시작한 곳이니 당연한 결과지만, 그 덕에 참배객들은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듯한 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인공미 느껴지는 묘석들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색이 바래고 이끼가 끼면서 오쿠노인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듯 하다.

 

수백 년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은 굉장히 신선하다. 점점 현실세계와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도 들고.

 

 

 

추정 20만개 이상의 묘석이 안치된 곳인데다가

사람 이름 한자는 일본인들도 제대로 읽기 힘든 터라, 나로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물론 일본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유명 인물들의 묘도 전부 이곳에 있다.

 

실제로 시신이 안치된 건 아니고, 극락왕생 기원과 현세에서 저지른 무수한 악행, 살상을 정화하기 위한 의미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이곳에는 꼭 묘비를 세우곤 했으니까.

왠지 나쁜 짓 실컷 벌여놓고 회개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이 사상, 어딘가와 많이 닮았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던 입구와는 달리 이곳부터는 삼나무 그늘에 뒤덮혀서 그 분위기가 이루 말할수가 없다.

절룩거리는 발을 이끌고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기가 힘들어 몇 걸음 가지 않아 셔터를 누르고 누르게 된다.

 

이곳 사진을 전부 블로그에 올려서는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가 없어서 적당히 추려내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오쿠노인 사진은 포스팅은 몇 번을 더 해야 간신히 마무리가 될 듯 하다.

이런 곳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찾아가 볼 가치가 있는 곳이라서,

실제 풍경의 10%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진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면 나로서도 뿌듯할 듯.

 

 

 

해발 1000m 가량 되는 코야산이고, 안개가 굉장히 짙게 드리우는 곳이라서

묘석이 자연과 동화되는데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 원인과 결과가 묘하게 얽혀있는 것도 이곳의 가치라고 할 수 있을 듯.

 

왼쪽의 묘비에 살짝 보이는 문양은 일본 특유의 전통이기도 한데,

완전한 천민 계급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서민들 역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문양을 가지고 있다.

자전거 여행때 신세를 졌던 나가노현의 산골마을 가족도 물론 그 문양을 걸어놓고 있었지.

여자는 보통 시집갈 때 문양을 가지고 가기도 하지만, 남편 가문의 문양을 쓰는게 일반적.

 

유명한 군주들의 문양이야 알려질대로 알려져 있고, 역사학자들의 주요한 연구원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한국에 족보가 있다면 일본에는 가문의 문양이 있다고 할 정도로, 현대까지 내려오는 표식이다.

 

이곳 오쿠노인의 묘석에도 그건 예외가 아니라서, 연구를 해도 끝이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여전히 일본 역사학자들의 마르지 않는 지식의 샘으로 유용하게 활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