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폭우'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10.11  산인 여행 - 비 그리고 비 18
  2. 2012.09.15  산인 여행 - 폭우속의 마츠에 22

 

8시에 일어나 조식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오늘의 일정을 생각해 본다.

오후 7시에 출항하는 페리는 6시까지 승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넉넉하게 5시 조금 넘겨 터미널에 도착해야 한다.

시간이 아까워서 빠듯하게 도착할 수도 있지만, 한순간의 실수가 자칫 1주일동안 이곳에 고립되는 상황을 낳을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느긋하게 도착해서 기다리는게 마음 편하다. 짧진 않지만 느긋하지도 않은 오늘이란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어떻게 할까.

 

일반적인 관광객보다는 훨씬 느긋한 발상인데, 보통 하루에 한 곳 정도만 확실히 정해놓고 움직이는 본인 스타일상

오늘 가장 중점을 둘 곳은 이곳에서 페리 터미널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아담한 정원 유시엔(由志圓)이다.

크게 유명한 곳도 아니고 원래부터 가고 싶었던 곳도 아니지만, 마츠에 시와 페리 터미널의 딱 중간즈음에 위치한 곳이라서

돌아가는 길에 들르기엔 최적의 장소라 여행 계획때부터 코스에 넣어둔 곳.

 

문제는 유시엔이 너댓시간동안 돌아다닐만큼 큰 곳은 아닐듯 해서, 지금 바로 체크아웃후 뛰쳐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

오후 1시쯤 도착하면 딱 알맞을 듯 한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12시 반쯤 버스를 타면 된다.

약 3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이곳 마츠에에서 보내야 한다는 결론. 멀리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현립미술관이나 카라코보 공방 등등 구미를 돋구는 장소가 있고, 그냥 아담한 까페에서 커파나 홀짝여도 시간은 충분히 간다.

일단은 10시까지 체크아웃이니, 짐을 프론트에 맡겨놓고 나서보기로 한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창밖 구경이나 하다가 눈길이 가는 곳에 내리면 되겠지.

 

걸어서 5분거리인 마츠에 역으로 가는 도중에 만화 캐릭터같은 녀석의 동상이 서 있다.

시마네현과 인접한 돗토리현은 '게게게의 키타로'나 '명탐정 코난'같은, 시대에 한 획을 그은 만화가들의 고향인데

문화 컨텐츠쪽으로는 돗토리현에 뒤지지 않는 시마네 쪽에서도, 만화 쪽에서는 크게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는 편.

이 캐릭터는 한국에 정식 수입된 적은 없는 듯 하고, 상당히 오래 전 인기를 끌었던 녀석인 것 같다.

 

 

 

3일간 마음껏 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레이크라인 버스를 사진에 담아본 적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면 돌아와서 조금 아쉬웠을 듯. 관광용 버스 중에서는 디자인이 참 잘된 녀석이다.

원목은 아니지만 좌석도 나무로 되어있고, 안내에 능숙한 여성 운전자들이 반쯤 가이드 역할도 해 주는 훌륭한 녀석.

 

한쪽 방향으로만 순환하기 떄문에, 잘못타면 마츠에 역 바로 앞에서 승차해, 40분이나 걸려 역에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다.

 

어제 이즈모에서 돌아온 후 마츠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을때도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수첩에 일기를 쓰지 않은 여행이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나서 읊어본다. 이래서 일기를 써야 한다니까.

 

신지코 온천역 앞의 버스 정류장은 마츠에 역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곳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면

약 30분 가까이 마츠에 시내를 돌고 돌아 최종적으로 마츠에 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그냥 일반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던 중. 퍼펙트 티켓은 시영버스라면 어떤 것도 무료로 탈 수 있으니.

그런데 젊은 여성관광객 둘이 갑자기 앞에 와서 뭔가를 물어본다. 영어로. 네이티브는 아니고 적당한 아시안 잉글리쉬로.

영어로 말하는 모습만 봐도 아, 한국인이구나 싶었는데, 일본어에 익숙하다보니 막상 한국인의 영어는 알아듣질 못하겠더군.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고 그나마 영어로 물어본 것 같은데, 내가 일본인이었더라도 그 영어를 알아들을수는 없었을거라 생각한다.

 

도중에 말 끊을 타이밍을 잡을수가 없어서, 질문 다 끝나고 한국어로 이야기하자 폭소가 터졌다. 나야 자주 겪는 일이긴 하다만.

레이크라인 버스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마츠에 역으로 가는 일반 버스를 타고 싶은데 그걸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마침 나도 그럴 예정이었으니 함께 일반버스를 탔다. 홀몸이 아니라서(?) 버스기사분께 마츠에 역 가느냐고 확인질문까지 하고.

 

딱히 친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버스 안에선 그냥 두분끼리 이야기하도록 뒤에서 앉아있었다.

내리고 나서 감사인사 한번 듣고 헤어졌을 뿐. 그래도 여행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긴 것이니 이쪽 입장에서도 즐거웠다.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경치를 감상한다.

현립미술관에서 내릴지, 카라코보 공방에서 내릴지를 머릿속으로 저울질하고 있는데

출발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창밖 너머에 중고서점 체인인 북오프가 보이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제 비참한 패배를 맛봤던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저기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떠오른다.

북오프는 기본적으로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곳이지만 대부분 음악CD, 영화, 게임 등도 함께 취급하니까.

친구 부탁때문에 다른 관광지를 놓치는 것이 아깝다면 아까울수도 있지만, 사실 북오프 탐방은 원래부터 좋아하는 코스다.

한국에서 일본 원서 찾아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서, 일본에 오면 꼭 한두 번은 북오프를 찾아다니곤 하니까.

게임소프트가 없어도 그냥 읽고 싶은거 읽으면 되기 때문에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결국 몇 초간의 짧은 고민끝에 현립미술관도, 아트공방도 포기하고 북오프 앞에 내려버렸다.

만약 여행 시작후 좀 더 열심히 돌아다녔다면 이곳도 일찍 발견해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희미한 아쉬움은 금새 사라진다. 여행은 신기한 거 많이 본다도 성공하는게 아니니까.

숙련된 주방장이 완숙미 넘치는 손놀림으로 부드러운 면을 뽑아내듯이, 느긋하게 마음이 가는대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런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이야, 가이드북에 실려있는 관광지들을 하나라도 더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 이해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급해 지는 순간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느긋한 여행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정류장에 내려서 한가롭게 휴식중인 호리카와 유람선의 모습을 담아본다.

마츠에 성 주변을 1시간 가까이 유랑하는 이 배는 선착장이 몇 군데로 나뉘어 있어서, 여행하다가 편한 곳에서 승선이 가능.

지금 이녀석 타기엔 시간이 좀 촉박하니 그냥 사진으로만 담기로 한다. 물이 영 깨끗하지 않는게 조금 거슬린다.

호리카와 강 원류는 깨끗한 편이지만, 워낙 지류가 여기저기 많이 나눠진 녀석이라 이런 곳은 물흐름이 좋지 않다.

 

 

 

북오프에 들어가기 전, 맞은 편 약국에서 오늘 저녁을 대비한 멀미약을 구입한다.

강한 녀석은 몸에 좋지 않으니 액상으로 된 조그만 녀석을 구입. 2병으로 나눠져 있어서 상태를 봐 가며 마실 수 있다.

가능하면 마시지 않는게 좋겠는데, 막상 어지러울 때 이녀석이 없으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일단 챙겨가는게 좋을 듯.

 

일본의 약국은 한국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한국의 약국과 똑같은 곳도 있는데, 왠만한 이마트만한 녀석도 꽤나 많다.

그런 곳에서는 전문 처방뿐 아니라 왠만한 보조식품, 미용도구, 비타민, 음료수, 심지어 과자나 컵라면까지 판다.

다이어트 라면이라던가, 묘하게 건강과 관련된 제품들로 채워져 있으니 일반 마트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일본은 의사 처방없이 구할 수 있는 상품들이 상당히 많아서, 약국이라고 해도 오만가지 상품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구경하기 힘든 곳이니 그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관광.

 

멀미약을 구입 후, 옆에 보이는 도시락집으로 이동. 계속 목표였던 북오프를 재쳐두고 딴길로 새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도 도시락집이 꽤나 성업중인데, 일본도 역시 편의점 도시락보다는 이렇게 바로바로 만드는 집이 더 맛있는 편.

호텔서 조식을 먹었으니 도시락까지는 필요없고, 그냥 반쯤 기념삼아 닭다리 한조각이나 구입해서 뜯어먹는다.

한국의 닭다리보다 양념맛이 훨씬 약하고 부드러운데, 저질 프라이드 치킨의 뼈 근처에서 풍기는 비린내가 없어서 먹기 좋다.

 

 

 

북오프는 마츠에 시의 크기에 비교하면 꽤나 준수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역시 중고품 전문점이기 때문에, 발매된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게임소프트는 없었다.

인기가 있는 녀석인지, 그 게임소프트 중고를 고가 매입합니다 라는 안내문을 적혀 있다. 결국 친구녀석의 부탁은 실패.

애초에 마츠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이니, 이런 시골마을에서 게임 소프트를 구해달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지.

 

그것과는 별개로 가볍게 읽을 책을 한권 샀는데, 페리 안에서는 아무리 멀미약을 먹어도 책을 읽기는 힘들 듯 하다.

그냥 한국에서 시간날때 읽으면 되니까 상관은 없다. 중고라고 해도 책이 워낙 깨끗하니 이득본 느낌도 들고.

 

의외로 약국, 도시락점, 북오프 세 군데만 돌아봐도 시간은 금방금방 흘러간다.

마츠에 시내는 버스가 그리 자주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 미리미리 이동하는게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30분 정도 일찍 버스를 타고 역으로 돌아와서, 떠나기 전 마지막을 기념하는 먹거리라도 찾아볼까 해서 역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좋아하는 라멘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고 만다.

 

사실 마츠에는 화과자 같은 전통 먹거리들이 유명하고, 라멘은 유명한게 별로 없다는게 정설이라서 이제껏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가게 앞에 붙어있는 고객의 목소리에는 '도쿄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맛있는 라멘 먹을줄은 몰랐습니다' 등의 글이 쓰여있어서 흥미가 동했다.

립서비스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이 '멀리서 들렀는데 의외로 맛있었다'는 내용.

마츠에가 라멘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맛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에 묘하게 신뢰감이 든다.

 

이곳의 메인은 닭육수에 소금으로 맛을 낸 시오라멘. 돼지육수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라멘과는 달리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인연맺기의 명소 이즈모 타이샤가 세워진 지역이다보니 이 라멘도 인연맺기 라멘이라고, 커플을 상징하는 흰색 분홍색 메추리알이 들어가 있다.

숙주나물과 짭짤한 죽순도 전부 근교에서 구입한 지역특화 상품이라고 하는데, 마츠에가 아직은 청정지역이니 좋은 포인트가 될 듯.

 

점심시간이라서 볶음밥 세트를 주문했는데, 볶음밥은 매우 평범하고 그저 그런 맛이다. 덤으로 딸려온다는 느낌에 딱 맞을 정도.

라멘은 확실히, 이 정도라면 맛없다고 한탄할 정도는 아니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이 목으로 넘어갈때 기분좋은 자극을 준다.

돼지 육수를 사용하는 다른 라멘들은 한국사람들이 먹기에 과하게 강렬하고 기름진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때는 이런 시오라멘이 재격.

죽순은 미리 소금에 절여놓은 녀석이라서 반찬 대용으로 먹으면 괜찮다. 아삭아삭한 숙주나물과 면을 함께 집어먹으면 궁함이 좋다.

가격도 크게 비싼편은 아니라, 마츠에에서 라멘이 고프다면 이곳에서 먹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만족한 케이스.

 

 

 

배도 충분히 채웠고 슬슬 버스시간이 다가오니 호텔로 가서 짐을 챙기기로 한다.

카메라 장비와 백팩을 들고 관광하러 돌아다니는건 꽤나 힘들지만

아마 유시엔 쪽에는 물품 보관소가 있을거라고 긍정적인 추측을 해 본다.

 

역 앞에 세워진 이 물 흐르는 기둥은, 표면에 묘하게 굴곡진 탓에 물이 0일정한 패턴을 형성하며 흘러내린다.

고속으로 찍으니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데, 삼각대도 ND 필터도 없이 장노출을 할 수도 없고.

 

 

 

짐을 챙겨 역앞으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시 하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한다.

이건 비가 올까 말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스트레이트한 자기주장이라서, 저 너머로 어마어마한 비구름이 올려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로써 이곳 여행하는 3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게릴라성 호우를 경험하게 되는데, 일기예보에서도 요즘 날씨가 참 이상하다고 멘트를 날리긴 하더라.

 

한국에서도 폭염과 태풍 때문에 말이 많은 여름이었지만, 그럴 경우 대체로 일본쪽이 한국보다 더욱 그 증상이 심한 편.

이쪽도 폭염과 폭우 때문에 사망자도 생기도 재산 피해도 꽤나 컸다고 한다. 여름이 지나가려니 이제는 게릴라성 호우가 출몰중이고.

하필이면 야외 정원 산책하러 가는데 저런 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조그마한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좀 전까지만 해도 덥고 쨍쩅한 하늘이었으니, 지나가는 폭우라면 내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거라고 기대해 볼 수 밖에.

 

유시엔까지는 일본의 느긋한 버스속도로 운행해도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역시 그 속도로는 비구름에 금새 따라잡힌다.

버스 안에서 만나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는

창문을 전부 닫은 버스 안에서도 귀가 얼얼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천둥까지 뿌린다. 번쩍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폭발음이 들리는걸 보면 굉장히 가깝다.

슬쩍슬쩍 바닷가가 보이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옆에서 보기엔 시야가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폭우가 쏟아진다.

조금도 과장 보태지 않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 왜냐하면 창밖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밑의 도로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사분이 대체 어떻게 운전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 워낙 가까이서 내려치는 번개 덕에 마치 전장 한복판을 달리는 듯한 분위기.

 

 

 

유시엔에 내리는 사람은 세 명. 당연히 나를 포함해 젊은 한국인 커플 한쌍 뿐이다.

이런 폭우속에 야외 정원인 유시엔을 구경하러 내리는 사람들이란.

어차피 승선시간을 계산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페리가 기다리는 사카이미나토까지 가 봤자 의미가 없긴 하다.

가슴이 후련할 정도로 신나게 쏟아지는 비를 보니 오히려 엔돌핀이 분비되는 듯 하다. 저절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차피 유시엔에 배정한 시간은 충분히 남았고, 설마 3시간 가까이 비가 계속 오진 않으리라 생각하니까.

만약 정말 3시간 가까이 내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비오는 정원을 어떻게든 슬쩍 둘러보고 돌아가는 수 밖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조그만 식물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곳 통로를 지나면 바로 유시엔인데, 지금 가 봤자 의미가 없으니 벤치에 짐을 다 풀어놓고 비구경이나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중에는 번개가 내려치는 순간을 포착한 진귀한 녀석들이 있는데

타이밍만 잘 잡으면 정말 찍을 수 있을 만큼 번개가 가까운 곳에 떨어진다.

번쩍하고 나서 5~10초 정도 후에 우르릉 거리는 그런 번개가 아니라, 번쩍하고 1초쯤 되어 바로 귓전을 때리는 폭탄같은 굉음.

가까운 곳에서 번개가 칠때는 정말 온 하늘이 플래시 터트린것처럼 새하얗게 물든다. 아주 신선한 경험이라 즐겁다.

 

식물원은 지붕이 있으니 카메라 들고 두리번거려본다. 바깥에 내놓은 녀석들에게는 단비가 되고 있다.

식물원이라기 보다는, 동네 할머니가 손질하고 판매하는 조그만 꽃가게 같은 느낌인데

꽤나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이런 걸 분재라고 하던가. 작은 공간에 큰 녀석을 오랫동안 길러서 자연상태처럼 나이먹어 보이게 한다는 취미활동.

 

당연히 원래 지면에서 자라는 것보다 영양도 공간도 부족하니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진 않는데

식물은 동물과 달라서 이런 식의 스트레스 요소가 오히려 수명을 연장시키기 때문에, 사실상 분재의 수명은 자연상태보다 더 길다.

일본에서는 500년 전의 분재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역시 인간의 취미활동이지 이녀석들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은 아니다.

 

 

 

오키나와에서 자주 보던 녀석. 암술로 보이는 부분이 두세 개씩 피어나는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도 본 기억이 날랑말랑 하는데 아직도 이름은 찾아보지 않고 있다. 이름 같은거 없어도 잘 클 녀석들이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바로 유시엔으로 이어졌다면 지금쯤 얼마나 생고생을 하고 있었을지.

비가 오니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우산 빌려쓴다고 해도 사진 찍기는 보통 고역이 아니다.

작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식물원 덕분에 심심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다를 떨면서 이런 화분을 사 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곳과 유시엔은 무슨 관계인지 조금 궁금하다. 버스 정류장 위치를 봐서는 이곳을 지나서 유시엔으로 가는게 정식 코스인데

그런 것 치고는 동네 아주머니가 열어놓은 평범한 가게같은 느낌. 적어도 관람을 위한 장소는 아니다. 대부분이 판매용이니까.

그런 반면에 번듯한 공공 화장실도 있고, 사람은 안들어 있지만 안내소를 겸한 사무실도 자리잡고 있는걸 보니 조금 애매하다.

 

애시당초 유시엔이라는 정원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냥 여행가기 전 볼거리를 슬쩍슬쩍 찾아보다가 눈에 들어왔고

위치상 페리 타기전에 들러보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는 이유 하나때문에 찾아온 곳이니.

비가 그치고 나서 유시엔에 들어가더라도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곳이면 좀 아깝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뭐가 어찌됐든 이런 폭우 속에서 비를 피할 곳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

마츠에 시내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이런 빗속에서 제대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조금씩 약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버스 안에서의 폭우는 정말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쫄딱 젖었던 지난날보다는 훨씬 즐겁다. 일단 비는 맞지 않으니까.

탁 트인 농촌마을 하늘에서 쏟아내리는 비의 박력은 확실히 도시의 그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주위가 완전히 잿빛으로 변하는 것이 살짝 기분을 침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꿋꿋이 경고의 색을 발산하는 녀석이 더욱 돋보이는 장점도 있다.

언제가 되더라도 그치긴 그칠테니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마시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어쨌든 여행이라서 이런 것도 좋은 법. 평일 낮에 내리는 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란 것도 소중하다.

'떠나자 > 山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인 여행 - 유시엔 1/3  (18) 2012.10.16
산인 여행 - 잡화점의 별  (22) 2012.10.15
산인 여행 - ANTWORKS GALLERY  (17) 2012.10.09
산인 여행 - 이즈모 군것질  (16) 2012.10.06
산인 여행 - 어디서부터  (10) 2012.10.05

 

 

같은날에 배를 타고 온 한국인 관광객이 백명 가까이 되기 때문에 어디서든 스치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커플 두어 팀 빼고는 한국인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뿔뿔이 흩어진 걸까.

단체관광객은 전용버스타고 여기저기 달리고 있는 중이겠고, 자유여행객들은 다들 다른곳으로 흩어졌나보다.

이곳 산인지방은 이렇다 할 유명한 관광지는 한두군데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특유의 '별것 아닌 소재도 잘 꾸며서 관광지로 만드는' 능력이 여기저기에 엿보여서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흩어져 있으니, 그렇게 흩어지는 것일까 싶다.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들은 어느 나라나 점점 비슷해져 가는 시대지만

그리 멀지않은 한국이라도 자연 풍경만큼은 일본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올때마다 꼭 한두장씩은 찍게 되는,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로 이번에도 눈요기.

 

 

 

마츠에 성을 내려오면서 보이던 연못.

아주 조그마한 곳이고, 흐르지 않는 물이다 보니 상당히 지저분한 느낌이다. 중간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얕은 곳.

연못 앞에 '馬洗池' 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름 그대로 말을 씻기던 곳인듯 하다. 과연 식수터는 아닌것 같았다.

 

 

 

이 연못의 맞은편에는 '기리기리 우물터' 라는 의미불명의 푯말이 세워져 있다.

우물터라는건 뭐, 말 그대로이겠는데 '아슬아슬'이라는 뜻의 기리기리가 어째서 붙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슬아슬한 우물이란 게 대체 무슨 뜻인지. 주변 풍경이 그렇게 아슬아슬해 보이지도 않고.

우물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아슬아슬한 우물이 어떻게 생긴건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

 

나름 일본어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본인이 이렇게 막혀버리니 뭔가 패배감을 느끼며 다시 길을 가는데...

 

다행히도 조금 더 걸어가니 이 정체불명의 우물터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어서 안도의 한숨.

그런데 일본어로는 열줄 가까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반면, 한국어로는 단 두줄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놓아서

그냥 한글만 읽으면 거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성의 부족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듯.

 

대강 설명하자면, 에도시대 축성공사때 벽면이 한쪽 무너지는 바람에 그곳을 깊게 파서 조사해 봤더니

사람 해골과 창이 발견되어, 정중히 제사지낸 후 벽을 다시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깊게 파낸 구멍이 사람의 가마와 닮은 모습이었고, 그곳에서 물이 솟아난 덕에 그대로 우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 가마 닮은 구멍때문에 이 근처의 성문과 우물이 모두 '기리기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여기까지 읽고도 그게 기리기리하고 대체 뭔 관계인가 싶었는데

사실 기리기리(ぎりぎり)라는 단어는 가마(つむじ)의 오사카 사투리 버전이라는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가마란 선모(旋毛) 라고도 하며, 사람 정수리의 소용돌이 모양의 머리털을 의미한다. 머리털의 선회점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가 빠를 듯.

애초에 저 가마(つむじ)라는 단어 자체가 여간해서는 외국인이 배울 일이 없는 녀석이라서 깔끔쌈빡하게 모르는 단어인데

그걸 사투리로 '아슬아슬'과 똑같은 단어인 기리기리라고 썼으니 내가 알 턱이 있나.

 

어쨌든 실생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지만, 평생 잊어먹지 않을 단어 하나 배우고 뿌듯한 기분.

 

 

 

말 씻는 연못을 빙 둘러 내려와서 걸어가면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이 나온다고 표지에 적혀있다.

사실 기념관은 한참 더 걸어가야 나오는 거리지만, 어쨌든 길은 맞으니 한동안 산책하는 기분.

 

물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은 나무의 본능인지, 이곳에도 수면쪽으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가 있어서 한 장 남긴다.

여행중 이런 사진을 은근히 많이 남기는 기분이 드는데...

 

 

 

한국에서도 못 볼 풍경은 아니지만, 습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나무에 자리잡은 무수한 이끼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역시 외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은 사람이 조경을 목적으로 기른 이끼가 아니라서 보기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생명력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보고 있으면 왠지 사진 찍고싶어지는 장면이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한국보다 고온 다습에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서 식물들의 생장력이 꽤나 강한 편.

 

 

 

말 씻는 우물터를 빙 돌자마자 후덥지근한 하늘 위에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사실 성에 올라설 때 부터 조금씩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라서 그냥 한숨 한번 쉬어줄 뿐.

여름날 비 오기 직전의 그 텁텁한 습도를 자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곧 비가 오리라는 예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애초에 날씨가 영 불안정하다는 소식은 듣고 온 터라, 비가 오면 맞으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카메라 가방과 카메라는 어느 정도 방수기능이 있고, 내 옷은 위아래 전부 등산용 쿨맥스 소재라서

비를 맞아도 30분 정도만 걸어다니면 금새 말라버린다.

카메라 장비도 짐인데, 언제 올지 모르는 비때문에 우산을 갖고 나오긴 싫어서 맨몸으로 나왔다.

 

사실 자전거 여행때 워낙 익숙해지는 바람에 그렇게 건성으로 대처해 버렸지만

엄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비맞으면 땀냄새와 섞여서 영 불쾌하기도 하고, 신발이 속까지 젖어버리면 그 꾸린내라는 건 엄청난 민폐라서.

자전거 여행때는 며칠 달리면서 비 맞고 나면, 냄새때문에 편의점에 들어가기도 미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런 배려심이 오랫동안의 배멀미로 인해서 다 사라져 버리고, 판단능력이 한없이 저하된 지금은

비맞으면서도 꽃한테 눈길이 팔려서 사진이나 찍고 있는 태평함을 연출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살짝살짝 간보듯 내리던 비가 일순간에 폭우로 변하자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소나기도 보통 소나기가 아니라, 맨살이 닿는 부분에는 방망이로 두드려 맞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미친듯한 빗줄기.

거의 사고가 마비되어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운도 좋게 주위에 비 피할 수 있는 처마란 게 아예 없다.

간이 휴게소라고 소개되어 있는 친절한 장소도, 탁 트인 하늘아래 벤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곳이라서 도움이 안된다.

 

처마가 있어보이는 유일한 장소는 바로 옆 언덕 위의 신사. 30초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간신히 처마밑으로 피신했을때는 이미 옷 입은채로 바다에 뛰어든거나 마찬가지 꼴이 되고 말았다.

조금만 과장하면 대중목욕탕의 폭포수 기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하늘이 무너질 듯이 콸콸 쏟아진다. 비 맞은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지만 속옷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카메라 가방은 재질이 워낙 두꺼워서 방수팩 없이도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지만

몸으로 최대한 가리며 갖고 온 카메라는, 조금만 더 노출됐더라도 이번 여행 촬영은 황으로 날아가 버렸을 터.

뷰파인더 안쪽에 습기가 차서 닦이지도 않고, 자연스레 말라 없어질때까지는 거의 장님촬영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래도 뭐, 일단 처마밑에서 비 피하고 있으니 더 이상 젖을 염려는 없고

망원렌즈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의 피사체를 찾아서 두리번거린다.

 

비를 맞아가면서 하는 촬영은 참 고역이지만, 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비내리는 곳을 촬영하는 건 의외로 꽤 재미있는 일이다.

대비색이 부각되는 피사체를 찍으면 빗줄기때문에 주변 채도는 낮아지고, 몽롱한 꿈 속에서 한가지만 또렷하게 튀어오르는 느낌이랄까.

우렁찬 카메라 셔터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폭우라서, 부옇게 보이지 않는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현실감이 사라진다.

찍고 나서 화면을 보면, 방금 내가 봤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결과물이 나와주니 묘한 기분.

 

 

 

홀딱 젖어서 짜증은 나지만, 의외로 여행중에는 꽤나 긍정적이 되는 타입이다.

특히 카메라를 들고 갔을 때는, 어쨌든간에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는게 다양한 추억거리를 남겨올 수 있으니까.

뷰파인더가 너무 흐려서 사실 화면 보기전까지는 저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주황색 뭔가가 보이길래 찍어본 것.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나와는 달리, 저런 녀석들은 비가 오니 왠지 좀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살짝 김빠진 느낌이 나던 방금 전의 말 씻는 우물터도 지금은 뭔가 왁자지껄하게 파티가 열렸을 것 같아서 근질근질하다.

아무래도 이 빗속을 뚫고 다시 그쪽으로 갈 수는 없지만.

 

 

 

버스 시간에 쫓기거나, 거래처와의 약속에 늦지 않는 한에서라면

사실 비 내리는 구경도 상당히 운치있는 놀이다.

 

한 걸음만 내딛어 빗속에 뛰어들면 눈도 뜨지 못할 격류속에 휘말린 기분이겠지만

든든한 처마 밑에서 이 세상과 단절된 듯 혼자 서서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좋은 고독감을 만끽할 수 있다.

고양이가 좁은 박스를 좋아해서 어떻게든 몸을 끼워보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귀와 눈을 때리는 거대한 빗줄기를 남의 일처럼 쳐다보고 있으면

이 넓은 풍경 속에서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이 경이로운 지구의 움직임 사이의 조그마한 틈새에 끼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꼼짝도 못하게 사방이 막혀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한테만 주어진 안락한 공간이라는 안정감.

 

 

 

 

고개를 돌려보니 인공 폭포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이쯤되면 쏟아지는 비가 되려 고마운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밋밋한 여행이란 건 사실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알아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면 여행의 추억거리가 더욱 늘어나니까.

 

배멀미 때문에 거북하던 머리도, 한국인 관광객을 놔두고 혼자 버스를 타버린 죄책감도, 갑갑한 하늘때문에 흥이 바랬던 천수각도,

몽둥이같은 빗줄기로 머리 한방 맞고 나니 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여행의 흥이란 이렇게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에 의해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고, 삶이 지루해지지 않게 해 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어차피 시간은 남아도는 여행.

숙소는 아무리 늦게 가도 뭐라 할 사람 없으며, 약속 장소에서 발을 굴릴 동행인도 없다.

물론 여기서 발이 묶인다면 돌아보려 했던 몇몇 관광지를 갈 시간이 부족해질수도 있겠지.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초초한 마음으로 달리는 것은

찌든 일상생활 안에서 싫어도 얼마든지 겪을수 밖에 없다. 뭐하러 여행에서 그런 초초함을 추구해야 하나.

시간이 늦으면 안 보면 되는 것이고, 빡빡한 여행일정 계획대로 소화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곳의 사진 더 많이 올려서 블로거들한테 칭찬 한마디 더 듣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되려 이렇게 혼자만의 공간을 강제로 만들어 나를 붙잡아 둔 폭우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우산을 갖고 오지 않아서 생길 수 있었던 시간의 낭비. 그 덕분에 두 손으로 카메라를 쥘 수 있으니까.

 

 

 

아무리 미친듯이 쏟아져도 소나기는 소나기. 10분쯤 내리니 저 멀리서부터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이곳은 빗줄기가 약해지지 않았는데도, 마츠에에 도착한 후 처음 접하는 맑은 하늘.

노란 신호등처럼, 이제 곧 끝나니까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라는 배려깊은 풍경이라고 할까.

 

 

 

빗줄기는 충분히 약해졌지만, 기왕 기다리는거 완전히 그칠 때까지 그냥 서있기로 했다.

후덥지근한 날씨도 완전히 젖어버린 옷 덕분에 많이 시원해졌고, 옷은 한 시간만 걸어다녀도 다 마른다.

 

형체마저 흐트러진듯 보이던 모자상이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멈춰진 듯한 10여분의 시간이 다시 현실감을 띄고 다가오는 듯 느껴진다.

 

 

 

사진에서 생기가 도는 것은 단지 비온 후 먼지가 씻겨 내려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머리는 알아서 흔들거리고 있지만, 이제부터가 제대로 여행한번 즐겨보자는 새로운 각오가 사진에도 영향을 미치는게 아닐까 싶다.

 

비가 오지 않아서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다면 아마 오늘 하루의 대부분을 상당히 뚱한 기분으로 넘겼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엔 다들 비 맞으면서 신나했는데, 간만이긴 하지만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어서 상쾌하다.

'떠나자 > 山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인 여행 - 무사 저택  (14) 2012.09.18
산인 여행 - 이방인  (20) 2012.09.17
산인 여행 - 여우신사의 심술  (23) 2012.09.16
산인 여행 - 마츠에 성  (21) 2012.09.13
산인 여행 - 아무리 준비해도  (16) 2012.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