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묘미란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사건들이 한 몫을 합니다.
카이유칸 이후로 구경해보려고 했던 나니와 우미노지쿠칸(なにわ海の時空館)은 개장시간이 오후 5시까지였는데
카이유칸을 서둘러 나왔음에도 이미 3시가 넘어버린 시간이라 거의 반쯤 포기상태.

우미노지쿠간은 주유패스를 이용해 공짜로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1차 목표가 카이유칸이었던 탓에 뒤로 밀려버렸군요.
카이유칸 건너편에 보이는 산토리 뮤지엄(サントリーミュジアム)에 낯익은 그림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슬램덩크, 베가본드로 유명한 만화가 이노우에 타케히코씨의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군요.
들어갈까 말까 하면서 일단 뮤지엄쪽으로 향해 봅니다.


특별 전시회라서 관람료가 꽤 비싸더군요. T_T
제가 이 작가를 많이 좋아했다면 그 돈내고라도 들어갔겠지만
공교롭게도 슬램덩크 이후 작품에는 관심이 없던 터라 그냥 회장 앞에 전시된 거대한 일러스트 한 장 찍고 나왔습니다.
왼쪽에 살짝 보이는 액자가 사람 정도의 높이입니다. 저렇게 프린트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들런지... ㅡㅡ;

지난번 히로시마 여행 때 이 작가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던데, 슬랭덩크 연재 당시 NBA 화보집 트레이스 사건 때문에 말도 많았지만
베가본드 연재 이후 그 특유의 작품에 대한 집착이 잘 나타난 방송이었습니다.
단 1페이지의 얼굴 표정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이틀 밤을 지새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결국 마감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걸 보니
역시 창작가로서 자기 의도를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할 때의 그 죽고싶은 심정은 장르를 불문한다는 걸 실감했네요.


뭔가 어정쩡한 시간이지만 아직까지 장소를 이동하지 않는 것은
사진 너머의 저 관람차를 타기 위해서입니다.
저런 관람차는 역시 야경을 보는게 재미있기 때문에 일부러 해질 때까지 기다리는거죠.
기다린다고 해봐야 그냥 시간만 때우는 건 아니고, 아직 이 주변엔 둘러볼 거리가 많이 남았습니다.


카이유칸 들어가기 전에 묘기를 선보이던 장소엔 다른 팀이 불쇼를 펼치고 있군요.


위험하기 그지없는 2인 저글링이지만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공연이 끝나고 새끼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나와 돈을 건네주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돈을 받는 공연인줄은 몰랐네요.


일단 배는 별로 고프지 않지만 나름 명물 볼거리라고 소문이 난 곳으로 향했습니다.
마켓플레이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나니와 쿠이신보 요코쵸(なにわ食いしんぼ橫丁)입니다.
1960년대 오사카 시장거리를 재현한 좁고 어두운 음식거리인데요, 이런 식의 마케팅은 예전부터 일본에서 인기였습니다.

도쿄 오다이바의 다이바 잇쵸메(台場一丁目), 삿포로의 라멘공화국(らめん共和国)등등
대부분 일본의 1950~70년대를 재현해놓은 정겨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발을 끌어들이죠.
일본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대였던가 봅니다.

하지만 이곳 쿠이신보 요코쵸는 앞서 말한 두 곳에 비해 확연하게 음식의 질이나 다양성에서 떨어지는 듯 합니다.
다이바 잇쵸메야 워낙 막강한 자금력으로 승부하는 곳이고, 라멘공화국은 일본 굴지의 라멘집들이 모여 각축하는 곳이라
이곳은 그냥 예전부터 인기있었던 추억의 음식들 그 자체로 승부하는 조금은 소박한 느낌이네요.


가이드북에도 소개되었던 카레집에 들어가서 한 접시 먹어봅니다.
지유켄(自由軒)이라는 상점에서 처음 시도한 이 독특한 카레는 이미 나이를 100년이나 먹은 일본의 고전 카레로서 유명하죠.
카레 이름도 명물카레(名物カレー)입니다. ^^
지금은 인도에 이어 세계 2위의 카레 소비국인 일본이지만, 그 당시엔 카레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 통일되어있지 않아
최대한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들어진 음식입니다.

요즘 카레와는 만드는 방법도 판이하게 다른데요. 일단 양파와 버터, 소고기를 살짝 볶은 다음
닭뼈를 고아 만든 육수와 카레가루를 섞은 후, 밥과 함께 볶아주면 명물카레가 완성됩니다.

카레 중앙에 저렇게 생달걀 하나 얹어주는게 포인트죠. 달걀에 살짝 간장소스를 뿌린 후 비벼먹으면 됩니다.
뭐랄까 정말 일본인들이 고안해낼 만한 느낌의 카레였습니다. 크게 맵지도 않고 계란 덕에 담백한 맛이 부각되네요.
중간중간 아삭하게 씹히는 양파의 감촉도 특이하죠. 이 녀석은 루를 오랫동안 숙성시키는 타입이 아니라
현재의 진득한 맛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일본의 카레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독특한 녀석이니 시식해 봤습니다.


마켓플레이스로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씹어먹는데 무녀복을 입고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는 무리를 발견.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어린이들이 예쁘장하게 치장하고 이곳 손님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뒤쪽의 케논 플래그쉽을 들고 열심히 찍고 계시는 분은 로리 오타쿠가 아니라 관계자분이니 오해는 금물.

그러고보니 마켓플레이스 중앙 공연홀에서 아이돌 그룹같은 애들이 춤추고 노래도 하던데
상가 활성화를 위해 여러가지 이벤트를 마련하고 있군요. 우리도 보고 배울만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애들이 웃으면서 금방울 흔들어주면 좋다고 쫄래쫄래 따라다닐 오덕들이 있을 테니까 말이죠.


마켓플레이스 내부에서 유리공예점을 발견, 동생분과 저는 가족들에게 선물로 줄 기념품을 고르는데 열중했습니다.
수공예로 만든 것들이라 완전히 똑같은 것들이 없더군요. 고민고민하며 둘러본 끝에 형님부부 드릴 예쁜 부엉이 한쌍을 구입.
원래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인데 친구녀석이 밖에서 찍었네요. 뭐, 전시품을 확대해서 찍은게 아니니 괜찮겠죠.


훗날 친구가 들고 있던 제 카메라 사진을 재생해보니 이런 것도 찍었더군요.

ㅡㅡ;

ㅡㅡ;;;;;

노코맨트.


이곳 마켓플레이스엔 예전에 한때 화제가 됐던 닌자저택도 있습니다.
현지인보다는 외국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겠죠.
애니메이션부터 온갖 닌자틱한 잡동사니들을 모아서 팔고 있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가지 닌자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도 있는데
제가 저기 돈내고 들어갈 리가 없죠.

여담으로, 일본엔 마을 전체가 닌자 관련 내용으로 구성된 곳도 있습니다.
사가현(佐賀県)의 우레시노(嬉野)시에 위치한 히젠 유메카이도(肥前夢街道)라는 테마파크에서는
모든 직원들이 닌자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수리검 던지기, 사금 캐기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죠.
역사적 사실과는 한참 동떨어졌지만 그래도 상업성이 있다면 뭐든 활용하는 능력은 참 대단합니다.


슬슬 해가 저물어가고 있으니 관람차로 향합니다.
탑승료 700엔이지만 주유패스의 할인쿠폰을 이용해 630엔으로.
조금씩이라도 아낄 수 있을때 최대한 아끼는게 여러모로 이득이니까요. 세 명 합쳐서 210엔 절약이면
음료수 두 개 뽑아먹을 수 있는 돈입니다 넵.

친구가 높은곳을 아주 무서워해서 오기로 타게 된 관람차입니다. ㅡㅡ;
배려심이 철철 넘치는 저는 일부러 친구를 위해 바닥부분이 투명하게 되어 있는 씨스루 관람차를 20여분이나 기다려서 잡아탔죠.
결코 놓지 않는 저 왼손이 지금 친구의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항상 지적하긴 하죠. 그거 암만 잡고있어봤자 진짜 떨어지면 어차피 몰살이여.


몇 개 없는 씨스루를 타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이곳 텐포잔 관람차는 높이 112m의 세계 최대급 관람차로, 한바퀴 도는데 약 15분이 소요되죠.
날씨가 좋을 땐 칸사이 공항까지 보입니다. 날씨가 안좋아도 화려한 야경을 즐기기엔 이만한 게 없네요.


원래 연인들끼리 염장질하는데 특화된 게 이 관람차라는데, 저희 일행이야 뭐...
사진 밑부분의 판넬식 구조물이 마켓플레이스, 녹색으로 장식된 묘한 모양의 건물이 카이유칸입니다.
카이유칸의 오른쪽엔 오늘의 항해를 마친 산타마리아 호가 휴식을 취하고 있군요.


15분동안 빼도박도 못하니 느긋합니다.
저는 친구를 놀려먹으며 사진이나 찍고, 동생분은 그 와중에도 가이드북을 뒤적이며 학구열을 불태우는군요.


여기서 잠깐 토막지식을 열거해 보자면
오사카시의 면적은 220㎢ 밖에 되지않습니다만, 인구는 270만명으로 상당한 인구밀도를 자랑합니다.
제가 서식하는 대구시 면적이 884㎢ 인데도 인구는 250만명 정도인것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일 갈 듯.
한국에서 면적당 인구비율이 오사카시보다 높은 곳은 서울밖에 없습니다.


해가 완전히 질 무렵 관람차는 서서히 밑으로 내려오는군요.
건너편에 많은 즐거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선사한 카이유칸의 모습이 보입니다.


밤이 되면 관람차는 화려하게 빛나는데요.
관람차 색깔은 내일의 날씨를 예보하기도 합니다.
녹색은 흐림이네요. 사진 찍는데 조금 아쉽긴 하지만 여행때는 비만 오지 않아도 감지덕지죠.


하루종일 서성거렸던 텐포잔을 뒤로하고 일행은 서둘러 다음 목적지로 향합니다.
대부분의 볼거리들이 5~6시에 문을 닫아버리는 오사카에서 저녁 늦게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무엇?

정답은 전망대입니다.
크고 높은걸 좋아하는 오사카인들답게 시내 군데군데에 관람차, 전망대 등이 산재해 있죠.
그러고보니 숙소에서 엎어지면 코닿는 거리에 있는 츠텐가쿠도 못가봤는데
멀리 전철타고 와서 전망대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도 참... ㅡㅡ;


다음 목표는 베이 에이리어 내부에 있는 WTC 코스모타워 전망대입니다.
물론 주유패스로 무료 관람이 가능하니까 이렇게 기를 쓰고 찾아가는 것이죠. 돈내야 했으면 애초에 관심도 없음.
WTC 코스모타워는 서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256m)
이곳에 가려면 난코 포트타운선(南港ポトタウン線)으로 바꿔타고 트레이트센터앞 역으로 가야합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어차피 코스모타워와 연결된 무역센터의 쇼핑 거리는 문을 닫았을 테고
오늘은 전망대를 구경한 후 화려한 밤문화를 즐기려 오사카 최대의 번화가 도톤보리로 향하는게 마지막 일과네요.


이 포트타운선은 뉴트램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도쿄의 오다이바(お台場)를 순환하는 무인 모노레일 유리카모메(ゆりかもめ)와 비슷한 녀석입니다.
승무원이 없는 모노레일은 일행들끼리 장난치기 좋죠.


매거진에 장전된 필름이 딱 한장 남아서 의미없이 친구 사진을 떡하니 찍었습니다.
피곤한듯한 눈이 참 인상적이시네요.

뒤로 젖혀진 동생분의 고개에서도 삶의 고단함이 느껴집니다.
원체 느긋한 컨셉의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일행들에게 여러가지 많이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곳을 둘러보는 중이라서 아무래도 좀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네요.
이런 여행도 한두 번 해보면 금새 익숙해져서 새벽부터 새벽까지 마구 돌아다닐 수 있으니 미리 연습해 보는것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