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심하게 흐립니다.
어제 텐포잔 관람차의 색깔을 분명 흐림을 뜻하는 녹색이긴 했는데, 이렇게 흐린 건 불안하군요.
저는 어제도 친구의 코 고는 소리덕분에 자다깨다를 반복했습니다.
서울서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도 잠을 좀 설쳤는데, 일본 와서 이틀 연속으로 코 고는 소리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자니
머리가 어질어질했습니다. 동생분도 몸 상태가 안좋은데 저도 자칫하면 뻗어버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침에 스테이터스 이상이... ㅡㅡ;

일단 나가 돌아다니다 보면 제정신으로 돌아오겠지 싶어서 숙소를 뛰쳐나왔습니다.
신세카이 주변엔 요즘 한국에서 보기 힘든 이런 옛 극장도 유지되고 있더군요. 그리운 풍경입니다.
상영중인 영화는 서브웨이123, 트랜스포터3, REC 등이 있네요. 성인용 영화도 상영중이니 참 정겨운 풍경이로세.


오늘 아침에는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시텐노지(四天王寺)로 향했습니다만...
난리났습니다. 결국은 비가 오더군요.
 
역시 어느 나라나 기상 예보는 믿을게 못된다는게 정설인가봅니다. 관람차녀석...
일단 우산도 하나 없는 일행이라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이상 여행의 뽕을 뽑기 위해 무조건 전진밖에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냥 슬금슬금 내리는 편이지만 마음은 불안하군요. 여행때 가장 만나기 싫은 녀석입니다.


문을 통과하니 파마+염색한 아줌마 같은 녀석이 눈에 들어오네요. 문화유산은 아닙니다.
사실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세운 애틋한 녀석입니다.


동생분이 사찰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주유패스로 무료 관람가능한 곳이라 찾아오긴 했는데
이곳 시텐노지는 그 역사에 비해서는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어서 (거의가 아니라 아예 없다고 해도 됩니다)
진짜 사찰 매니아에게는 조금 아쉬운 곳이기도 합니다.

시텐노지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59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며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이기도 합니다. 백제인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쇼토쿠 태자라 감회가 새롭더군요.
하지만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이곳의 사찰은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었고, 현존하는 건물은 모두 1970년대에 지어진 것들입니다.

사실상 일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사찰은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에 세워진 서원가람(西院伽藍)입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기도 하죠.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영령당(英靈堂)입니다.
앞에 세워진 두 개의 거대한 돌기둥에는 밀어로 보이는 글씨가 새겨져 있군요.
영령당 근처엔 돌로 된 위령비가 많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시텐노지 대부분의 사찰은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진으로 남기는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제가 존중하는 불교의 정신은 이런 건물이나 문화제, 부처 이름 외우는데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저한테 사찰문화재라는 것은 그냥 그 시대의 문화와 풍미를 느끼게 해주는 단순한 물건에 불과한 터라
사진을 찍지 않으면 그닥 감흥이 없네요.

그런 고로, 맨날 산위에 올라가서 양초나 켜놓고 자식 수능 대박나기를 손이 닳도록 비는 어미아비들의 모습도
'불교를 욕보이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세계 평화나 빌겠습니다.


빌고 싶으면 요 정도로 소박하게 하라니까요. ㅡㅡ;
니네 자식들 종이 위의 문제 푸는 등신으로 전락시키고 싶어서 사기꾼들한테 돈 쳐바르지 말고.

아~ 교육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군요. 릴렉스하고 다시 정신을 시텐노지로 워프시키겠습니다.


비가 주섬주섬 내리긴 하지만 그것도 꾸준히 맞으니 심히 불쾌해지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동생분은 모자도 있고, 저도 버프를 쓰고 있으니 직접적으로 머리에 타격을 받진 않는데
(친구는 뭐 쓰고 있었나? 기억이 없습니다. 쏘리. ㅡㅡ;)

이곳은 약사여래, 사천왕상이 보존되어있는 육시당(六時堂)입니다.
시텐노지의 중앙에 위치한 큰 사당이며, 매일 6번씩 영령에게 예를 갖추는 의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육시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당연하게도 사진 촬영은 금지. 이곳에서는 많은 현지인들이 경건하게 합장을 하더군요.


이곳은 카메이 부동당(亀井不動堂) 이라는 조그만 건물로, 건물 안에는 이끼에 덮힌 부동명왕상이 있습니다.
이곳과 바로 옆의 카메이당(亀井堂)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은 시텐노지의 본당인 금당(金堂)의 지하에서 나오는 물이라고 하는데요.
쇼토쿠 태자가 이곳의 샘물에서 부동명왕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사당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저 부동명왕상에 샘물을 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뭐 그런 것이겠지요.


시텐노지의 대표 스팟중 하나인 이시부타이(石舞臺)입니다.
이곳 돌무대 위에서 매년 4월 22일 성덕태자의 덕을 기리는 부가쿠(舞樂)가 열립니다.
부가쿠는 당나라의 행사 예식인 당악에서 유래되어 일본 특유의 문화로 발전한 의식으로, 이곳에서 부가쿠가 열려온 지 천 년이 넘었다고 하는군요.
물론 믿거나 말거나.

비가 점점 굵어지는터라 서둘러 이번 시텐노지 공략의 1차 목표중 하나인 보물관(宝物舘)으로 향했습니다.
보물관은 쇼토쿠 태자와 관련된 중요 문화재들을 전시하는 곳으로, 국보급 보물들도 전시되어 있는 터라
문화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꼭 둘러보셔야 할 곳입니다. 입장료를 받는데 주유패스로 무료!
물론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보여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보물전 내부는 상당히 좁고, 문화재 수도 그리 많은건 아니지만 진득하게 감상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라
40분 남짓 열심히 구경한 후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는군요.
오늘중으로 돌아봐야 할 곳이 많은데 계속 비가 내린다면
최악의 경우 우산을 사거나 숙소로 돌아가서 우산을 빌려 나오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곳은 태자전(太子殿)이라고 하는, 쇼토쿠 태자의 덕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한국 역사책에도 잘 나오는 이야기지만 (요즘엔 국사도 필수과목이 아니라면서요? 나라의 망조가 보이네요)
쇼토쿠 태자가 일본 불교, 나아가서 일본 역사와 문화 전체에 미친 영향이 워낙 중요한 지라
역사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건축물이지만 정말 정성들여서 가꾸어 온 모습이 금새 눈에 들어옵니다.
빗소리에 파묻힌 성덕원의 모습이 오히려 더 경건하게 보이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원래 이곳의 이름은 성덕원(聖霊院)인데, 요즘엔 그냥 태자전이라고 많이 불린다고 합니다.
태자전 내부 지하에는 2만 2천개의 금동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아요.


비가 와서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이젠 막 쏟아 붓는군요.
동생분이 뭔가 불만어린 표정입니다. 근데 포즈는 왜 귀여운지? 이거 설정샷이었나? ㅡㅡ;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머리를 싸매고 고심합니다
일단 이곳의 볼거리인 보물전은 관람 마쳤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혼보 정원(本坊庭園)과 중심가람(中心伽藍)이 남았는데
혼보 정원은 이 빗속에 돌러보기란 불가능해서 일단 태자전의 바로 옆에 위치한 중심가람으로 서둘러 향하기로 했습니다.


가람은 불교 용어로, 산스크리트어인 '상가 아라마(sangha- arama)'가 어원인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임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승려들이 거주하며 수행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보통 7가지 구조물(불전,강당,승당,주고,욕실,동사,산문)이 갖춰진 구역을 뜻하죠.

이곳 시텐노지의 중심가람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인데,
중문, 오중탑, 금당, 강당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일직선 형식 배치를 이루며, 주위에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일본의 '음미하는' 정원 느낌을 이곳에서도 받을 수 있었네요. 활용 공간으로서가 아닌 미의식의 표출 수단으로 사용되죠.


회랑 내부에서 쏟아지는 비를 피하면서 가만히 가람 내부를 바라만 봅니다.
사실은 이게 제대로 된 감상 방법일지도 모르죠. 빗소리가 일행을 점점 개인으로 흐트려 놓는 듯한 느낌.


중앙의 건물이 금당(金堂), 뒤의 탑이 오중탑(五重塔)입니다.
오중탑에서는 석가모니의 전신사리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네요.
금당은 시텐노지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사방에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으며 중앙에는 구세관음상이 놓여있습니다.


회랑 옆에는 우물도 있었습니다.
상당히 깊더군요. 이런 곳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좀 무서워지죠.


회랑 내부는 차분합니다.
비가 많이 오기도 하고, 좀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이 별로 없어서 그냥 일행들끼리 조용히 서 있었네요.
비는 싫어하지만 이런 차분한 느낌은 좋습니다.

건물 전체가 너무 새것같은 느낌이라는게 참 아쉽긴 했군요.
호류지의 1500년 된 나무 기둥들은 정말 세월의 흐름이 이런거구나 싶었는데.


그냥 부슬비라면 어떻게 맞아가면서 움직이겠지만 장대비는 정말 무립니다.
그래서 그냥 막간을 이용해 사진이나 찍고 놀았죠.
역광도 이런 분위기에선 나름 잘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그칠 기미가 안보여서 결국 근처의 휴게소로 뛰어가기로 결정.
휴게소에서 좀 쉬면서 비가 잦아들길 기다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숙소로 돌아가 우산을 빌린다던가 할 수도 있지만 왠지 여기서 시간 보내는것보다 돌아가는 시간이 더 아까운 것 같아서.


가기전에 가람의 정문인 인왕문 앞에서 강제로 기념사진을 찍게 만들었습니다.
양쪽의 인왕상은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녀석들이죠. 5.3m의 높이에 무게는 1톤입니다.
그냥 찍으면 재미 없으니 인왕 모습을 주문했죠. 동생분은 잘 따라줬습니다. 손바닥에서 여래신장의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찍기 싫다고 잡아빼는 친구를 협박해서 억지로 포즈를 세워넣고 찍었습니다.
여행때는 이런 사진 남기는게 즐거움인데 말이죠. 지난 번 도톤보리의 글리코 앞에서는 실패했지만 이번엔 성공.


휴게실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먹으며 1시간 반 정도를 뒤척였습니다.
어제 잠을 하도 못자서 눈만 감으니 졸음이 오더군요.

내일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쿄토 당일치기인 터라, 이 체력으로 오늘 밤도 코 고는 소리에 잠을 못자면
여행에 중대한 지장이 있을 것 같아 오늘 밤은 따로 숙소를 잡아 도망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친구가 코를 골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ㅡㅡ;

하늘이 도운건지 결국 기다리다 보니 빗줄기가 잦아지더군요.
완전히 그친 건 아니지만 이제 어느 정도 돌아다닐 수 있을만큼 약해졌습니다.
이제 시텐노지의 마지막 볼거리인 혼보 정원으로 향합니다.

시간관계상 다음 포스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