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를 택시에 태워 보내드리고 2시간 정도 까페에 들어가서 커피 홀짝거리며 책을 읽었습니다.

삼계탕 먹고나서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디 둘러보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더군요.

 

다행히 어제 부산가는게 확정된 후 부랴부랴 전자책에 새로 나온 책들 몇권 넣어왔기 때문에 읽을거리가 부족하진 않았습니다.

꾸물한 날씨가 좀 나아진다 싶어서 슬금슬금 밖으로 나와봤습니다. 카메라가 무거워서 더운날엔 참 고역이군요.

이럴때는 미러리스같은 카메라가 참으로 부럽기도 하지만, 일단 갖고 있는 녀석이라도 열심히 활용해야겠죠.

 

그냥 하염없이 걷다가 보니 거대한 롯데백화점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35mm 렌즈로는 한번에 다 잡을수 없는 거대한 녀석이었습니다.

좁고 복잡한 도로를 걸어가다가 갑자기 확 트이는 공간으로 나오니 땀에 절은 머리도 잠깐 시원해졌지만

아직 그리 크지 않은, 약간 색바른 듯한 익숙한 건물들 사이로 유독 거대한 백화점이 떡하니 서 있는 모습은

뭔가 이질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수가 없겠더군요.

 

겨우겨우 제 빛을 찾아가는 하늘을 이렇게 가려버리는 건물은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발과 마음이 향하는 대로, 백화점과는 반대편으로 나 있는 골목길로 걸음을 옮기게 되는군요.

 

도장 파는 집, 오디오 가게, 각종 기계부속품 가게, 나름 깔끔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듯한 모텔 등등

성충으로 완전히 탈피하기 전의 곤충을 보는 듯한 느낌의 골목길입니다.

 

자주 거닐던 일본의 골목길과 다른 점이라면, 길가에 한없이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과 이런 쓰레기봉투 정도일까요.

 

 

 

까페에서 몸을 좀 식혔지만 습기많은 하늘 아래서는 그닥 소용이 없네요.

연신 땀을 닦아가며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길을 그저 걷기만 합니다.

 

집 안이나 근처에서만 입고 다닐법한 시원시원한 옷을 걸친 노인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습니다.

자갈치 시장과 국제시장 근처에서는, 시원시원하기는 해도 결코 동네 슈퍼갈때는 입지 않을법한 옷을 입은 커플들이

진득한 날씨 속에서도 잘도 철썩철썩 붙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는데, 몇백 미터만 걸어가도 분위기는 이렇게 바뀌는군요.

 

마침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을 나이대와 겉모습을 한 채로 걸어다니니, 정말 외국에 온 듯한 느낌입니다.

 

 

 

골목길을 빙 둘러서 걷다보니 다시 대로변으로 나오게 되는군요.

전철로 서너 정거장 정도의 거리에 부산역이 있으니 느긋하게 걸어가면 될듯 합니다.

 

엄니께서는 회의 마치고 저녁 드실때 저한테 전화 주시고 하셨으니, 저도 그때쯤 저녁 챙겨먹고 역으로 가면 OK.

센텀시티처럼 완전히 물길이가 끝난 곳은 아니지만, 이곳도 대로변부터 시작해서 점차 세련된 도시의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네요.

여객터미널 근처를 지날때엔 자꾸만 후쿠오카행 페리가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꾹 참고 지나칩니다.

 

 

 

또 다른 골목길엔 어떤 예술가의 조각상들이 길을 따라서 전시되어 있더군요.

힘든 일을 마치고 시원하게 널부러진 사람을 조각한 녀석으로 기억하는데

신발 벗고 맨발로 누워있으면 개운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골목 주변 곳곳에는 노인분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느긋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옵니다.

병원복 차림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은, 이 동상처럼 꼼짝도 앉고 길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더군요.

 

 

 

비가 온 덕에 물 긷는 소녀가 더욱 리얼하게 느껴집니다.

아예 속이 텅 비어있었다면 비가 올때마다 훌륭한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었겠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그랬더라면 아마 쓰레기통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을 끝없이 걸어갑니다.

대충 부산역 방향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어디로 걸어가나 상관없으니, 도보여행은 그 정도가 딱 좋죠.

자주 보이던 외국인도 점점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부산이라면 이런 곳을 걸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번 부산에 왔을때는 광안리와 센텀시티만 둘러본 터라, 이게 내 기억속에 있는 부산이 맞는가 싶었는데

자갈치시장 근처에서 시작한 이번 산책은 아련하게 남아있던 부산이라는 느낌을 잘 살려주는 곳을 볼 수 있어서

광안대교를 둘러싼 어마어마한 가격대의 최신 고층 아파트의 몽환적인 모습보다는 좀 더 친ㄴ근감이 듭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계획도시로 만들어졌다면 아마 다 깍아내 버렸겠지만

한국의 근대사와 함께 시작된 도시로서의 부산은, 산지가 많은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개발되어 왔기 때문에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는 달동네도 쉽게 볼 수 있고, 바다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도 마을 곳곳에 언덕배기가 많이 있네요.

 

작동을 하는건지 마는건지 알 수 없는 스쿠터가 새로 정비된 깔끔한 도로 위에, 대강대강 산을 깎아서 만들어진 언덕 아래 세워진 모습은

뭔가 있어야 할 장소에 딱 맞게 서 있다는 느낌을 주는군요. 센텀시티에 이런 녀석이 놓여있으면 이렇게 어울리지 않겠죠.

 

 

 

바다를 빙 둘러싸듯이 급한 경사의 언덕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군요.

살짝 대만의 지우펀 느낌이 나기도 하고, 부산은 이렇게 성장해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굳어진 도시의 모습을 다시 만들기에는 힘든 면이 상당히 많으니

이런 모습은 꽤 오래 갈거라고 예상해 봅니다만, 어쩌면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서 사진으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네요.

 

 

 

엄니께서 7시 전에 부산역에 도착할거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6시쯤 눈에 보이는 돼지국밥집에 들어가서 땀을 식히고 국밥을 한그릇 주문했습니다.

 

부산엔 밀면, 냉채족발, 돼지국밥이 유명하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막상 대구 돌아와서 엄니한테 이야기를 하니 돼지국밥이 유명하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다고 하시네요.

이름난 맛집을 찾아간것도 아니라서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맛있어서 남에게 추천할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기름기 둥둥 뜨는 고기와, 당면이 아니라 고기속으로 채워진 순대의 씹히는 맛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사각사각하는 부추무침을 한젓가락 집어서 씹어넘기면 궁합이 괜찮더군요.

 

손수건은 땀에 절어서 방금 세탁한 것처럼 축축해져 버렸고

번들번들한 얼굴과 낡아빠진 옷차림을 조합해 보니, 좀 전까지 시장에서 쌀포대 좀 옮기다 온 사람처럼 보일것 같습니다.

제가 음식점 주인이었다면 저 사람 밥값 낼 돈은 있으려나 하는 생각도 해봄직 하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드는군요.

뭐, 카메라와 카메라 가방이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이라서 그런 오해는 순식간에 풀리겠지만.

 

그러고보니 걸레짝같은 바지도 사실은 꽤나 고급 브랜드의 비싼 옷이긴 하네요. 입다보니 이렇게 된 것일 뿐.

 

 

 

부산역 광장은 (주)예수를 믿으라는 인간들이 튀기는 침과 아코디언 소리로 가득합니다.

광장이 넓어서 기분이 시원하지만, 제일 좋은 볼거리는 2층으로 올라가서 바라보는 맞은편의 모습이네요.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이 풍경이 사실 부산에서 제일 인상적입니다.

고지전을 하듯이 여전히 산에서 내려올 기미가 없는 달동네의 모습과

시끌벅적한 도로가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이곳의 활기를 무언으로 표현하고 있군요.

 

지난번엔 일본어로 돈 좀 달라는 거지가 들러붙더니

이번에는 엄니 학교 학생쯤으로 보이는 녀석이 와서 5백원만 달라고 들러붙습니다.

스무살도 안되어 보이는데, 아마 윗선에서 구걸을 시키는 녀석이 있겠죠.

옷차림을 비교하면 사실 제가 그녀석한테 돈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부산은 항상 반나절 정도의 짧은 기간동안만 불러보게 되는데

역시 서울과는 다른 부산만의 맛을 계속 이어 가줬으면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혼잡하고 낡아보여도 서울보다는 그게 어울리는 곳인것 같아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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