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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近畿'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05.29  킨키 방황 - 몽롱한 참배길 13
  2. 2012.05.28  킨키 방황 - 촬영금지 18
  3. 2012.05.27  킨키 방황 - 성불의 의미 18
  4. 2012.05.26  킨키 방황 - 코야산 오쿠노인 19
  5. 2012.05.25  킨키 방황 - 코야산으로 가는 길 12
  6. 2012.05.23  킨키 방황 - 거품같은 축제의 마무리 10

 

 

들어왔던 쪽보다 좁고 오래된 길이라서 운치는 느껴지는데, 그만큼 길이 험하다는 뜻도 되니

어느 정도 걸어야 끝이 보일런지 걱정부터 앞선다. 누가 보면 여기가 험한 산골짜기인줄 알겠군.

다행히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통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 무리하지말고 천천히 한걸음씩 걸어가면

어쨌든 출구에 도착은 할 테니까 거기서 좀 쉬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일이 없어, 아픈건 둘째치고 연신 셔터를 누르게 되는 건 행복하다.

아마 제정신이었다면 좀 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인상에 남는 걸 더 담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전거 여행동안 가장 아쉬웠던 점이라면, 기대했던 히메지(姫路)성이 보수공사를 들어가서 볼 수 없었던 것과

모노노케 히메로 유명한 야쿠시마(屋久島)에 가지 못했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는데

야쿠시마와는 생태 습성이 전혀 다른 곳이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모노노케 히메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참배객의 인파에 떠밀려서 움직이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던 점이 플러스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기도 하고.

드문드문 새소리 정도밖에 들리지 않는 외딴 길을 거의 혼자서 걸어가며 이런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행운이랄 수 있다.

 

 

 

이쪽 길은 좀 더 산속 깊은 곳이라서 조금 전의 빡빡하고 정갈한 묘석들의 모습보다는

불규칙적이고 산만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당연히 이쪽 길이 더 마음에 든다.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곳곳에 보수공사 표지판이 놓여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런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유지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공식적으로는 약 천년간, 실제로는 수백년 정도의 나이를 먹은 곳임에도 이 정도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내가 죽고 몇백년 더 지나면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

 

 

 

입혀놓은 옷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본래는 새빨간 색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알 방법은 없다.

저 석불의 나이가 대강 백살 쯤 된다면, 내가 이 석불과 인연을 맺은 시간은 고작해야 수 초밖에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을지.

 

그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문화유산이 가진 가치가 아닐까 싶다.

 

 

 

모종의 사고로 잘린 건지, 참배길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잘린건지 알 수 없는 삼나무 옆에

일본에서 역사가 긴 회사인 쿠보다사의 묘석이 보인다.

이제까지 봐 왔던 삐까번쩍한 기업들, 산요, 닛산, 토요타, 샤프, 파나소닉 등의 묘석에 비해 꽤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묘석인 듯 하다.

 

원래 농기계, 엔진 중장비 등을 제작하는 회사로 유명한데, 요즘엔 친환경 발전, 리사이클 제품, 수자원 건설 등에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아마 중장비나 농기계 만져 보신 분들은 쿠보타라는 이름이 그리 어색하진 않을 듯.

연륜이 있는 회사라서 좀 딱딱한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일본 국내에서도 사원 복지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저 멀리서 아주머니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걸 보고 뭘까 싶어 슬금슬금 다가가 봤는데

내 몸굵기의 네 배는 되어보이는 거목 밑의 풍경이 묘한 형태로 되어 있어서, 나도 카메라를 손에 잡았다.

 

이런 모습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참배길에 워낙 가까이 있는데다, 길을 만드느라 깎아낸 산 때문에 점점 앞으로 구부러 지는걸 방지하기 위해

밑에 돌맹이를 고아놓은 것이 원인이 되어 이런 모습의 둥치가 만들어진게 아닌가 한다.

 

자전거 여행때도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몇번 있는데, 나무라는건 올려다 볼때 만큼이나 둥치 부분도 신기한 볼거리가 많더군.

 

 

 

둥치가 조금은 불안정한 모습의 삼나무지만, 다른 것들 못지않게 훌륭하게 자라나 있다.

원래 이런건지 모르겠지만 스크류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성장한 모습이 보인다.

나무가 워낙 굵은 탓에 되려 윗부분의 줄기가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이 나타날 정도.

 

조금 과장하면 살짝 바오밥나무 같은 모습이랄까.

 

 

 

아주머니들이 찍은 모습은 이것이었을까.

반대편으로 가 보니 저런 공간 사이에도 석불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돌 위에 놓여진 동전들을 보니 역시 인기가 꽤나 많은 듯 하다.

 

수십억을 들여서 호화스럽게 세운 거대한 묘석보다

이렇게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자리잡은 석불 쪽에 동전이 훨씬 많이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다들 생각하는건 비슷한 건지.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자꾸 야쿠시마와 비교를 해서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들지만

조금이나마 사진에서 본 야쿠시마와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런 모습들이 워낙 반가워서라고 이해해 주길.

 

사실 일본에서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이 야쿠시마였는데

지난 자전거 여행 당시 야쿠시마 근처에 도달했을 때는 한겨울이었고

자전거째로 배를 타고 가기에는 교통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좋게 생각하면, 야쿠시마는 자전거 여행 도중이 아니라도 제대로 날 잡고 본격적으로 돌아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훗날 더욱 완벽하게 즐기기 위한 일시적인 유보라고 해도 되긴 된다.

야쿠시마에서 추정 연령 5천년의 죠몬 스기라는 삼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왕복 약 15시간 가까운 산행을 해야 하는데

그곳만큼은 혼자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일부러 속을 파낸 것이 아니라면, 정말 절묘한 장소에 놓여있는 석불이다.

제대로 된 묘석이 아닌, 이렇게 군데군데 놓여져 있는 석불 중에서는 가장 명당이라는 느낌.

그래서 그런지 뭔가 놓여있는 것도 많다. 제대로 모습을 갖춘 세전함까지.

 

마치 서민 흉내를 내면서 영업하는 강남의 포장마차 같은 느낌이랄까?

 

 

 

좁은 산길을 빠져나오자 점점 길이 넓어지고 깔끔하게 정비된 것이

조금씩 출구가 가까워져 가는 느낌이다.

 

좀 전에 나무 둥치에서 사진 찍던 아주머니들이 멀리 사진에 보인다.

망원으로 당겨 찍은 녀석이라서 사실 훨씬 멀리 있지만, 지금 걸음걸이로는 저분들 속도가 훨씬 빠르다.

땀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찢어지는 발목의 통증을 참고 걸어가고 있지만

왠지 조금 더 가면 끝이라는 생각에 배가 부르게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참배길은 인생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아픈 몸이 원망스럽지만 그렇다고 감상을 소홀히 한 건 아니니 뭐.

 

 

 

여기서 본 석불 중 가장 단순하고 특징적인 녀석.

이쯤되면 정말로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건지 의심이 갈 정도다.

 

혹시 인류가 멸망한 후 수천 수만년이 지나고 나서 다른 생명체가 이곳을 찾았을 때

조잡한 상태로 봐서 '이 녀석들이 이곳에서 제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너무 앞서나간 걱정인가?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묘석과, 분명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묘석이 혼재해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의 묘터 지정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그냥 낡거나 부서졌다고 그걸 치워버리고 새 묘석을 세우진 않을텐데.

 

가족들의 성묘는 좀 전에 봤던 입구쪽에서만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데

이 근처에도 조금 젊어보이는 어머니와 딸이 간략한 음식을 들고 묘석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살아서 이어져 가는 문화 유산이라는 점도 이 곳의 장점이라고 생각.

이미 수백년전 현실과의 맥이 끊겨버려서, 지금은 단지 관광객의 볼거리로만 여겨지는 문화재가 수없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걸어가면서 눈에 들어온 오륜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녀석.

안개낀 날이나, 저녁무렵에 이런 산길을 걷고 있으면 지금과는 달리 꽤나 음산한 기분이 들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문화재라고 해도 공동묘지는 공동묘지라서, 이곳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고 들었으니.

 

 

 

현실세계와는 정반대로, 이곳에서는 묘석과 삼나무보다 이런 꽃을 보기가 더 힘들다.

꽃 이름은 모르지만 잎사귀가 밑으로 늘어진 모습이 독특하다. 저런 모습이 꽃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 하다.

 

이 정도 깊숙한 산골이라면 야생동물에 대한 경고문 같은거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아직까지는 이 곳에 와서 그런 표지판을 본 적도 없고, 개나 고양이는 물론 어떤 숲짐승도 본 적이 없다.

너무 오랫동안 참배객이 이어지다보니 이 곳은 사람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일까.

 

코야산 주변은 여전히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 대부분이고, 일본의 산은 한국과는 달리

등산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도 굉장히 드물어서

아마도 굳이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야생동물은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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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휴게소가 있는 곳까지는 도착. 화장실 한번 들어가고 나서 주위를 슬쩍 감상한다.

휴게소라는게 필요없어 보이는 길이의 참배길이지만, 나이 많이 든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까 있으면 좋을 듯.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없는 사찰이, 옆의 나무와 참 단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 본다.

 

 

 

사계절 내내 단풍나무인 듯 하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일까. 주위 풍경과 굉장히 대비되는 모습이 멋지긴 하다.

 

아무튼 주변 풍경 하나하나에 감탄하지 않을 곳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곳이라서

떨어지는 사진 실력을 갖고 있어도 그럭저럭 찍으면 꽤나 보기좋게 나오는 듯.

지역이 지역이라 그런지 확실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평일 낮에 여기 찾을 수 있는 젊은이란 나같은 관광객밖에 없긴 하겠지.

 

 

 

휴게소가 이렇게 멋들어지니, 이곳 오쿠노인 참배길은 어색함 없이, 어디 하나 조화롭지 않은 구석이 없다.

2015년이 고야산 개창(開創) 1200년이 되는 해라서, 그해 5월달은 아마도 상상할 수 없는 참배객과 관광객이 몰려들 것 같다.

 

1년간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홋카이도의 시레토코(知床), 오카야마의 쿠라시키(倉敷) 였는데,

이곳 오쿠노인도 그 중에 당당히 들어갈 정도로 굉장히 마음에 든다.

 

1200년 기념으로 이곳을 처음으로 찾을 수 많은 관광객들은, 아마도 인파에 휩쓸려 고생 좀 하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깊은 인상을 받고 오랫동안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추억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워낙 성지로 추앙받는 곳이다 보니 그 흔한 자판기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이 더욱 놀랍다.

일본에서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관광지라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히 희귀한 편.

휴게소도 얼핏 보니 먹을 걸 파는 곳은 없는 듯 하고, 노인들이 앉아서 TV의 고야산 소개를 보고 있다.

 

 

 

휴게소 역시 근간에 지은 듯한 느낌은 나지 않는다.

정교하게 지어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인지, 정말로 오래된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양 건축물에서는 항상 처마 밑과 지붕의 흐름, 단청의 모양 등을 가장 유심히 살펴보는데

이곳 오쿠노인의 건축물들은 오사카 안의 왠만한 전통 건축물보다 훨씬 미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이곳이 속한 와카야마(和歌山)현은 발전도 더디고 인구도 킨키 지역에서 가장 적은 산골인데

정말 코야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다. 수백년 전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해 이곳을 찾은 참배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예전 참배객과 같은 의상을 하고 순례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그런 사람들과 일반 관광객을 위해 예전부터 이곳의 백여 개 사찰들에서는 템플 스테이가 가능하다.

여유가 있다면 경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금액이 왠만한 일급 호텔 수준이라서 나한테는 무리.

 

불교 문화의 정수를 맛볼 수 있기도 하고, 모든 숙박실에 열쇠가 없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나 같은 사람은 카메라 장비를 그런 데 내려놓고 돌아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시 속세인의 번뇌.

 

 

 

자판기 같은 전자기기가 이곳에 어울릴 리가 없으니, 없는편이 훨씬 낫긴 한데

그래도 기념품이나, 불교식으로 소원 비는 각종 도구들은 팔고 있다.

 

종교란 개인적인 소망 들어주는데 이용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지론을 같고 있기에 관심은 없지만

참배객인지 홍법대사인지 모를 마스코트 캐릭터 스트랩이라던가 하는건 그럭저럭 볼만해서 잠깐 구경해 본다.

본인이 쓸 생각은 없고, 이런 거라면 여행 선물로 남한테 주기에는 적당할 것 같은데

뭐랄까, 내 지인들에게는 그런 선물 주는것보다 그냥 여기 한번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어서 구매는 하지 않기로 결정.

 

지면에 내딛는 힘의 80%를 오른발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이젠 왼발만큼이나 오른발도 피곤하다.

휴게소에서 앉아버리면 다시 일어나는데 상당히 고생할 것 같아서 잠시 숨만 고르고 다시 출발.

사하라 사막 마라톤 당시 체크포인트에서 주저앉아 잠시 쉬고나면, 일어나서 출발할 때 훨씬 아프고 힘들었다는 경험상.

 

 

 

기념품점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고, 고뵤 참배할때 봉납하는 도구들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할까.

오쿠노인에서 가장 세속적인 건물이긴 한데, 건축 양식은 후기 카마쿠라(鎌倉)의 흔적이 보여서

어지간하면 다른 역사적 건축물들에 비해 좀 현대적이고 이질적인 경향이 있는 이런 건물도 거의 위화감이 없다.

 

이런 곳에서는 왠지 마음도 경건해 지는 듯 한데, 화장실 근처에서는 공사 인부들이 담배를 피고 있는걸 봐서 꼭 그런것만은 아닌 듯.

오쿠노인 참배길은 전부 금연인 걸로 알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휴식 시간에는 역시 빠트리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담배가 천박한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겨난지 4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뭐.

 

 

 

난 지금 무슨 고행중인가 싶을 정도로 왼발 통증이 심하다.

몸을 생각해서 오늘 푹 쉬었다면 붓기가 어느정도 가라앉았을 테지만

여기서 이런 풍경을 감상하는걸 포기하는 것도 통증만큼이나 아쉽고 괴로운 일이다.

 

걷다가 가끔씩 발을 잘못 디디면, 매운 걸 먹었을 때처럼 본능적으로 쓰읍~ 하고 숨을 들이키게 된다.

산길치고는 굉장히 평탄한 길이지만 어쨌든 산길은 산길이라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곤 한다.

고뵤가 코앞이니 이제 절반 정도 걸어온 셈인데, 문제는 코야산의 볼거리가 오쿠노인만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

 

원래대로라면 오쿠노인을 빠져나와 반대쪽 끝인 다이몬(大門)까지 느긋하게 경치 구경하며 걸어간 후

단상가람과 영보관(霊宝館)을 감상할 생각이었는데, 2km 정도 되는 그 거리를 걸어서 가는건 지금으로서는 무리다.

오쿠노인이 약 3km 정도, 이곳만은 도보 이외에 어떤 이동수단도 없으니까 죽기살기로 걸어가고 있지만

다이몬까지는 결국 짧은 거리라도 버스를 이용해서 이동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다행히도 스루패스덕에 버스비는 공짜.

 

 

 

이 다리 앞에서부터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일본 문화재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뭘 이런 것까지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사진 금지 구역이 많다.

중요 문화재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이라면야 얼떨결에 플래시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테니 이해가 되지만

사방천지 뻥 뚫려있고, 다리 하나 지나는 것 외엔 바뀔 것도 없는 이런 곳에서도 촬영 금지라는건 조금 의아하다.

 

뭔가 엄숙함과 경건함을 위한 조치라고 개인적으로 예상해 보지만, 멋들어지게 수식했을때나 그런 거고

간단히 말하자면 사진 따위로 귀중한 볼거리를 공개하고 싶지 않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이란 것이겠지.

사진이란게 마이너리티 리포트 세대처럼 현실감 100%인 입체영상도 아니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에 피해를 줄 수 있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촬영 금지라는 푯말이 일본 전역에 너무 많다.

 

그러라고 하니 일부러 규칙 어겨가면서 찍지는 않지만, 다리 넘어서 사진 찍는다고 오쿠노인의 경건함이 사라지진 않는다고 본다.

루브르 박물관도 플래시와 삼각대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데 말이지.

 

아무튼 망원렌즈도 가지고 왔으니 저 멀리 보이는 고뵤도 한장 남기고 다리를 건넌다.

앞의 관광객 단체를 이끄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세심하게 설명을 하고 있던데

조금조금씩 듣는건 몰라도 아픈 발목을 핑계로 느리게 걸으면서 설명 내용을 전부 다 들어버리는건

약간 도둑질 같은 느낌도 들어서 그냥 들리는 말만 듣고 지나가 버린다.

 

다리 건너서 고뵤까지는 이십 미터정도 될 법 한데, 이 안의 묘석들은 대체로 일본인이라면 알고있을만한 유명 인물들의 것.

예전 총리대신 했던 사람 이름도 얼핏 들리는 걸로 봐서

홍법대사와 가장 가까이 있지만 그의 뜻과는 가장 동떨어진 묘석들이 모여있는 곳인 것 같다.

홍법대사의 사당에 가까이 가서 누울수록 더 큰 복을 얻을 거라는 허망하고 탐욕스러운 중생들의 작태.

 

 

 

고뵤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굉장히 엄숙한 분위기.

일본 전국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니 분위기가 사뭇 남다르다.

 

그룹을 이끄는 가이드 아저씨가 들어가기 전의 예절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난 그냥 신발 안 벗는 곳까지 가서 내부 모습만 감상하고 가볍게 목례한 후 다시 빠져나왔다.

다리를 건너서 카메라의 전원을 다시 켜고 이제부터 돌아갈 길을 한장 담아본다.

이 길로 주욱 돌아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좀 전과 다른 방향을 선택하면 된다.

 

나만 그런건 아닌지, 몇몇 사람들이 나처럼 다리 바로 앞에 서서 고뵤의 모습을 담고 있더군.

 

 

 

 

잘려나간 나무 둥치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서 보기 좋은데

제대로 터를 잡지 못하고 이런 곳 사이사이에 놓여진 석불도, 과거나 현재나 고단한 서민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떡하니 묘터 잡아서 늠름하게 서 있는 묘석보다 이런 녀석들에게 합장 한번이라도 더 하겠다.

 

 

 

죽은 사람도 언젠가는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지론으로 보자면

아무리 반듯한 묘석이라도 결국 시간에 침식되어 이렇게 점점 형태를 잃어가는 게 본모습이라고 생각.

한국의 묘소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다 보면 슬금슬금 깎여나가서 결국은 주위와 동화되어 버리는게, 그게 좋다.

 

아버지가 묘석을 별로 안좋아하는 이유도, 천년만년 지나도 계속 그대로라서 뭔가 이상하기 때문이었으니.

그런데 이곳에서는 묘석도 점점 사그라져 가는게, 훗날엔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 있겠지.

순환의 필연성과 그 아름다움은 사람이나 비생물이나 마찬가지다.

 

 

 

왔던 길과 다른 쪽으로 나 있는 참배길로 들어선다.

30분이면 쉽게 돌아볼 거리를 한 시간 반씩 잡아먹고 있으니, 통증만 아니라면 느긋한 구경에 적합한 속도인데.

어제 겨우 그거 무리한 것 가지고 발목이 이 모양이라는게 이쯤되니 뭔가 억울하게까지 느껴진다.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닌데 왜 이번엔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왼쪽 발을 들어올리는 것도 부담되서 이제는 아예 왼다리를 쭉 편 상태에서 지면에 원을 그리듯이 휘적휘적 돌려가며 걷는다.

영 꼴불견이지만 그나마 이게 제일 덜 아프니까. 그런데 가끔 어디 툭 걸리고 할 때면 지옥이 엄습해 온다.

 

 

 

이 정도 한자는 다들 읽을 수 있으리라 본다.

계단을 올라가면 뭔가 볼만한 묘석 혹은 사당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리가 멀쩡했다고 해도 저기 올라가는 수고따위는 하고싶지 않네.

 

일본에서는 당연하게도 전국시대의 영웅으로 명성이 높지만, 한국인이라면 유전자에 거부감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을 듯.

전국시대를 막 끝낸 당시의 일본은 거의 들개같은 야만과 혼란의 집합체였고, 장수들에게 하사할 토지가 턱없이 부족하던 때

하필이면 얼토당토 않는 방향으로 머리 굴린다는게 조선 침략이었으니... 지네들 밥그릇 싸움에 옆집 끌어들인다는 발상이 참 기가 찬다.

 

한국인 입장에서라면 그냥 올라가서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저 녀석을 위해 계단 올라가는 수고도 아깝다.

 

일본 역사를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자기가 아는 일본 인물 90% 이상은 이곳 오쿠노인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유랑 시인인 마츠오 바쇼(松雄芭蕉)의 묘석이라면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지금 이 다리로는 그저 참배길을 온전히 빠져나가는데만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포기.

 

 

 

오륜탑에 생명을 틔운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풍륜과 화륜 사이에 식물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라, 문학적인 감상이 떠오르는 듯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각자 알아서 감상하는 편이 좋을 듯.

 

자신의 사진은, 본인이 브레송 정도의 대가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찍사 자신의 의도와 느낌을 설명해 주는게 좋긴 하지만

가능하면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고 각자의 생각을 간직하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한 장이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사진은 아니니까.

 

 

다리의 통증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나로서는 오디오 가이드를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곳까지 오는 사람이라면 7천원쯤 지불하고서라도 꼭 오디오 가이드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설명이 극히 제한적이고, 그나마 일본어와 어색한 영어 안내문밖에 없는 곳이 많아서

역사적 향기를 간직한 수많은 묘석들에 대한 설명은 전적으로 오디오 가이드에 의지할 수 밖에 없으니까.

 

한국어 버전도 있다고 하니, 몸만 정상이었다면 훨씬 알차게 즐겼을 터였는데

그 당시엔 오디오 가이드에 대한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발목 통증이 심했다.

 

저런 조그만 표지판을 보고 그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지금와서 다시 안내소까지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가이드가 없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점이 있긴 있다.

고지대 숲속 깊은 곳에 위치한 오쿠노인은, 목재나 금속재로 만든 것들이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꽤나 대단한 모습을 한 묘석조차도 전부 석재로 되어 있다는 점.

 

중요문화재로 선정되어 있을 만큼, 꽤나 오랜 시간 지난 묘석인데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주위 환경과 절묘하게 조합되어가는 모습이 실로 인상적이다.

 

 

 

군데군데 보강을 거친 모습이 조금 어색한 것도 사실이지만 훌륭한 볼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이 정도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한다면, 세워질 당시에도 상당한 권력가였을 듯.

코야산에 묘석이 들어서기 시작한 건 약 1000년 전인데, 실제로는 500~600년 전의 묘석이 주를 이룬다.

 

물론 셀 수도 없이 부서지고, 그 위에 다시 세우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연도는 거의 알 수 없지만

현대 일본 전통건축 양식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점을 보이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다.

 

저런 기와와 처마의 모습은, 당시 중국과 한국의 양식의 틀이 여전이 남아있었다고 해도 되겠지.

 

 

 

불교 건축물로는 유명한 오륜탑.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빠릿빠릿한 녀석보다 이렇게 세월의 흔적을 가진 녀석이 훨씬 보기 좋다.

이런 식으로 보존되기에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기도 하고.

 

이곳은 예전에 세워진 몇몇 특정 묘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아니고

참배길 자체가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 자체가 이 곳의 신비성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끼게 해 주는 모습.

날려나간 거목 위에 다시 새로운 삼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백 년이 지나면 이 녀석도 주변의 거목들처럼 높디 높게 솟아있겠지.

아마 마야나 잉카 문명처럼, 일본이라는 나라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이 오쿠노인의 참배길은 여전히 남아서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길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소원 종이. 설마 이런 곳에까지 매달려 있을줄은 몰랐다.

사실 근본적으로는 낙서와 다를 바 없는 행위이긴 한데, 주변을 훼손하진 않으니까 괜찮으려나.

 

저건 보통 소원을 적어서 나뭇가지에 매다는 것인데, 이런 묘지 가운데서 무슨 소원을 비는지는 모르겠다.

 

 

 

오쿠노인 참배길은 V 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앙에 홍법대사의 영령을 기리는 고뵤가 위치한다.

그래서 고뵤 부근을 제외하면 입구와 출구의 위치가 다르다. 거리상으로는 약 2km 정도.

 

고뵤에 다가가면 확 트인 공간과 함께 기념품을 파는 곳이나 휴게소, 영령전, 사찰 등의 건물들이 나타난다.

평상시라면 산책 축에도 들지 않는 가벼운 길이지만 나로서는 거의 극기훈련 하는 기분.

잠깐 생각해보니, 이곳은 눈이 쌓인 겨울에 와도 그 경관이 놀라울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비가 와서 안개가 자욱히 낀 모습도 이 곳의 경건한 분위기에 어울릴 것 같고.

 

푸르름을 마음껏 발산하는 5월 중순의 맑은 하늘 아래에서 감상하는 오쿠노인도 좋긴 한데

뭐랄까 이렇게 맑고 화창하면 분위기가 조금 안 사는것도 사실인 듯. 그래도 사진 담기엔 좋다.

 

 

 

조금만 더 가면 고뵤에 도달하는데, 그 전에 눈에 들어온 이 탑은, 고뵤 자체보다 더 인상깊게 다가왔다.

'무연불' 이라는 제목의 탑으로, 이름 그대로 연고가 없이 방치된 석불들을 한 곳에 모아서 세워 놓은 것.

오쿠노인에 산재해 있던 수만개의 석불들을 이곳으로 모은 이유까지는 모르겠다. 묘석을 세우는데 방해가 되어서 그런가?

 

 

 

일반적으로 이런 조그만 석불들은 어린 아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별할 것 없이 이렇게라도 명복을 빌곤 했다.

이제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수십, 수백년 전의 석불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은 뭔가 형이상학적인 느낌.

 

 

 

상당히 오래된 것들인데다가, 원래부터 그렇게 정교하게 조각되지 않은 석불이기 때문에

지금와서는 얼굴의 형체조차 사라져 버리고, 그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흔적만이 남아있다.

 

오쿠노인은 아직도 사람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방치된 석불들이 꽤나 많은데

가난한 자들의 노력이라고는 하지만 석불은 당시 꽤나 비싼 축에 들어갔고, 오쿠노인 안에서도 도난 사건이 셀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는 이렇게 한 곳에 모여 도난당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늘어서 있으니, 좋은 시절인 듯 하다.

 

 

 

중요 문화제로 지정되어 있는 수많은 묘석들과, 홍법대사의 고뵤 등이 아무리 중요하고 위대하더라도

결국 코야산과 오쿠노인이라는 이미지를 현세에까지 이어가는 원동력은

 

힘 없는 서민들이 한개 한개씩 공양했던 이런 조그만 석불들이 아닐까 싶다.

역사는 권력자들에 의해 쓰여지지만 문화는 항상 가장 낮고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샘과 같으니까.

단순한 돌맹이에 불과한 물체에 정성스럽게 헝겊을 둘러주고, 타인을 위해 합장하는 그 마음가짐이야말로

홍법대사가 의도했던 불교의 정신이며, 세계 각국에서 이 곳을 찾아오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

 

 

 

이것도 아마 공양물이겠지.

성불이란 표면적으로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행위이지만

결국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겨진 사람은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죽은 사람에 대한 연민을 선택한다.

그렇게 본다면, 성불이란 결국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거라고 생각.

이 인형을 놓고 간 사람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평온해 졌을 것이다.

 

 

 

무연불 주변에는 확실히 아이들을 위한 공양물이 많이 보이는 듯 하다.

실을 뭉쳐서 만든 저것도 옛날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오쿠노인에 가서 동전 한닢이라도 봉납하고픈 기분이 든다면, 무연불 앞에서 하는게 제일 적절하지 않나 싶다.

 

 

 

관광객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정말로 자기 가족들의 묘에 참배하러 온 사람들도 있다.

꽃과 간단한 음식 따위를 올려두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것은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패스.

좀 전의 흰개미 묘석도 충격적이었지만, 왠만큼 알려진 대기업들이 세운 묘석도 상당히 많다.

아니, 대기업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만 조금 알려진 기업들의 묘석도 상당수.

 

대부분 자사 공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명목을 비는 묘석인 듯 한데, 기업이라 자금이 빵방해서 그런지

일반적인 묘석보다 크기도 크고, 조각상까지 설치해 놓는 곳도 있다.

 

개인 묘석보다 너무나도 크고 웅장해서, 이쯤되면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인지 기업 자랑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진에 담지 않았다.

 

 

 

끝없이 줄지어 선 묘석들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과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어쩌면 이렇게도 생장이 다른 삼나무가 자라고 있는지 신기하다.

중국의 메타쉐콰이아 나무도 삼나무의 일종이지만, 한국에는 이런 삼나무가 없다는 것이 특이한 점.

 

기원을 따지자면 야쿠시마(屋久島)나 시레토코(知床) 등,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백년 전 인공적으로 조성된 삼나무 숲이긴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인공미는 사라지고 어엿한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듯.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묘석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중이다.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꽃이나 캔 음료수, 비닐에 쌓인 먹을거리 등을 놔두고 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관리 없이는 온통 썩어나는 것들로 뒤덮힐 것 같다.

 

묘석 앞에는 1엔짜리에서부터 100엔짜리 동전도 많이 올려져 있는데, 이곳엔 그런 거 가져가는 사람은 없는가 보다.

마음먹고 털어가면 아무리 동전이라도 기십만원어치는 우습게 모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인데.

 

 

 

이곳에 묘석을 세우는게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닌데, 이런 애완견의 묘석까지 놓여있는걸 보면 여러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엄니처럼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나처럼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도 맘대로 못 눕는곳에 돈X랄 해가며 동물 비석까지 세우는구나. 이놈의 세상~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고.

 

아, 내세의 명목을 비는 건 굳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동일한 것이구나. 이게 불교의 원리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묘석을 세우는거야 어쨌든 좋은 의도지만, 코야산이라는 의미깊은 위치 자체가 빈부 측정의 척도로 쓰이는 것 같아서 약간 마음에 걸린다.

 

이곳에 이 정도 묘석 세우는데는 싸게 잡아도 기본 3~4억은 든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묘지에서 가장 씁쓸한 광경은 이런 동자상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니, 춥지 말라고 옷을 입혀주는 것이나

앞에 놓인 먹을거리도 아이들 입맛에 맞는 과자같은 것들이 많아서 더더욱 애잔하다.

 

나같은 독신도 사무치게 이해가 되는데 자식 가진 부모들이라면, 7살이 되기 전에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그 심정을 설명할 필요나 있을까.

엄니는 예순이 넘으신 지금도, 내가 어릴적 사고나 병으로 죽어버렸다면 당신도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하신다.

 

그 찢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단지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일념 하나로

이렇게 세워 둔 조그만 동자상들의 모습은, 그 의미를 안다면 이 곳을 찾는 전 세계의 누구라도 아련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배길 초반에는 대부분 반짝반짝한 새 묘석들이 줄지어 있지만

가끔씩 이렇게 사람이 손을 놓아버린 듯한 녀석들도 눈에 들어온다.

자리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고, 새것으로 보이는 양초가 남아있는 걸로 봐서

아직 이곳에서 명복을 비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벗겨진 페인트와 녹슨 철판도 왠지 이곳에서는 그리 흉물스럽지 않다.

 

 

아직까지는 정돈도 잘 되어있는 산책길 같은 분위기다.

 

그 빼곡하던 묘석들 사이에 공터가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이번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기 위한 예정지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대참사의 흔적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모습에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

 

 

 

온통 하늘을 찌를듯한 푸른색 천지에 이런 단풍이 서 있는 모습은 극히 인상적.

인공적으로 걔량되어, 사시사철 저런 색을 하고 있다는 말은 들은적이 있는데

절경 속의 절경이랄까,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인상적인걸로 치면 이 묘석을 빼놓을 수가 없다.

어느 유쾌한 사람이 만든 '낙서총'이라는 이름의 이 묘석은, 낙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행위이니

하지 말라는데 하지 말고 이곳에서 신나게 낙서라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하다.

 

묘석 자체도 여기저기 낙서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그 옆에 정말 낙서할 수 있는 판이 놓여져 있다.

이렇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인생을 잘 산 사람이 아닐까 싶다.

 

 

 

딱히 표시된 건 없지만 이 안쪽부터는 분위기가 급변한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포장된 현대인들의 묘석들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전의 묘석들이

참배길 주변 뿐만 아니라 길이라고 할 수 없는 산속 구석구석에까지 빼곡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으로서의 진면목은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급변하는 분위기만큼 왼쪽 다리도 아주 심각한데

어떻게든 버티겠지 싶던 다리는 계속 무리를 줘서 그런지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다.

목발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힘을 거의 줄 수가 없다.

 

절뚝거리며 어떻게 전진은 하고 있지만 게속 그러다 보니 오른쪽 다리는 근육이 아주 터질듯 하다.

코야산 탐방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이미 일반인 걷는 속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으니.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 갈 수도 없으니 그냥 어쨌든 참으면서 계속 걷는 수 밖에.

 

 

 

걷다보면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간다.

이 정도 규모와 역사를 가진 묘지는 확실히 세계적으로도 드물거라 생각.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거대한 삼나무와 셀 수도 없는 묘석들 뿐이다.

 

길이 나 있지 않은, 시야가 보이는 끝까지 묘석이 빼곡하다. 현실감각이 없어질 정도의 풍경.

코야산이 성지로 추앙받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껴진다.

 

 

 

입술과 볼에 연지까지 칠한 동자상이 어째 되려 애처로운 모습이다.

동자상에는 대부분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데, 아마 가족뿐만 아니라 참배객 모두가 명복을 빌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유독 동자상들 앞에는 동전이 많이 놓여있는 것이 인상적.

 

 

 

오쿠노인 참배길은 홍법대사의 영령을 기리는 고뵤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오래된 묘석들로 채워진다.

고뵤에서 시작한 곳이니 당연한 결과지만, 그 덕에 참배객들은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듯한 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인공미 느껴지는 묘석들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색이 바래고 이끼가 끼면서 오쿠노인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듯 하다.

 

수백 년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은 굉장히 신선하다. 점점 현실세계와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도 들고.

 

 

 

추정 20만개 이상의 묘석이 안치된 곳인데다가

사람 이름 한자는 일본인들도 제대로 읽기 힘든 터라, 나로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물론 일본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유명 인물들의 묘도 전부 이곳에 있다.

 

실제로 시신이 안치된 건 아니고, 극락왕생 기원과 현세에서 저지른 무수한 악행, 살상을 정화하기 위한 의미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이곳에는 꼭 묘비를 세우곤 했으니까.

왠지 나쁜 짓 실컷 벌여놓고 회개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이 사상, 어딘가와 많이 닮았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던 입구와는 달리 이곳부터는 삼나무 그늘에 뒤덮혀서 그 분위기가 이루 말할수가 없다.

절룩거리는 발을 이끌고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기가 힘들어 몇 걸음 가지 않아 셔터를 누르고 누르게 된다.

 

이곳 사진을 전부 블로그에 올려서는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가 없어서 적당히 추려내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오쿠노인 사진은 포스팅은 몇 번을 더 해야 간신히 마무리가 될 듯 하다.

이런 곳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찾아가 볼 가치가 있는 곳이라서,

실제 풍경의 10%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진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면 나로서도 뿌듯할 듯.

 

 

 

해발 1000m 가량 되는 코야산이고, 안개가 굉장히 짙게 드리우는 곳이라서

묘석이 자연과 동화되는데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 원인과 결과가 묘하게 얽혀있는 것도 이곳의 가치라고 할 수 있을 듯.

 

왼쪽의 묘비에 살짝 보이는 문양은 일본 특유의 전통이기도 한데,

완전한 천민 계급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서민들 역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문양을 가지고 있다.

자전거 여행때 신세를 졌던 나가노현의 산골마을 가족도 물론 그 문양을 걸어놓고 있었지.

여자는 보통 시집갈 때 문양을 가지고 가기도 하지만, 남편 가문의 문양을 쓰는게 일반적.

 

유명한 군주들의 문양이야 알려질대로 알려져 있고, 역사학자들의 주요한 연구원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한국에 족보가 있다면 일본에는 가문의 문양이 있다고 할 정도로, 현대까지 내려오는 표식이다.

 

이곳 오쿠노인의 묘석에도 그건 예외가 아니라서, 연구를 해도 끝이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여전히 일본 역사학자들의 마르지 않는 지식의 샘으로 유용하게 활용중.

 

7시에 일어나 무료 조식을 먹으러 가는데 왼쪽 발목이 심상치 않다.

뜨거운 물에 푹 담궜으니 피로가 좀 빠졌을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마라톤 풀코스 완주후에 느끼는 통증과 흡사하다.

그냥 근육통과는 다른 욱신욱신함이, 십중팔구 인대에 염증이 생긴 감각이다. 몇 번 느껴봐서 익숙하긴 한데.

 

몸이 아프니 밥맛도 없지만 일단 주먹밥과 소세지를 입에 우겨넣고 다시 올라와서 짐을 챙긴다.

어째선지 왼쪽 발목만 심하게 아픈데, 카메라 장비 때문에 균형이 어긋나서 그런건가 싶다.

그래도 일단 코야산에 가는데 장비를 줄일수도 없고, 오늘 좀 고생하겠구나 생각하면서 호텔을 나선다.

 

오늘은 칸사이 스루 패스를 사용하니까 난바역까지 걸어갈 필요가 없다.

칸사이 스루 패스는 분명 영어로 'Thru Pass' 인데 이상하게 일본에서는 '스롯토'라고 발음한다.

이틀간 이용권이 3800엔인데, 그 동안 국영 JR 전철이나 각종 버스를 제외하고는 오사카, 코베, 나라, 쿄토, 히메지, 와카야마, 코야산 등등

칸사이 모든 지역을 잇는 전철과 각 도시 내의 전철을 무제한으로 이용가능한 티켓이다.

 

오사카 내부에서만 관광할 목적이라면 별로 의미가 없지만, 칸사이 지역을 여기저기 돌아보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티켓.

이제부터 편하게 전철 타주마 라고 생각하며 요츠바시역에서 전철을 탔지만,

요츠바시역을 달리는 요츠바시선과, 코야산으로 향하는 난카이(南海) 전철간에는 이름이 같은 난바역이라도 한참 떨어져 있어서

난바역에 내려 15분간 줄기차게 걸어가야 하는 통에, 별로 이득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게 아쉬울 따름.

 

오사카에서 코야산으로 가는 전철은 한 시간에 두세 편밖에 없어서 쉽지 않다.

그것도 코야산역(高野山駅)까지 가는 전철은 없고, 하시모토(橋本)역까지 가서 코쿠라쿠바시(極楽橋)행 열차로 갈아타고

다시 거기서 케이블 전철로 갈아타고 코야산 역으로 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거기까지는 약 2시간 거리.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코야산역은 그냥 역일 뿐이고, 진짜 코야산 구경은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코야산에 가는 승객들을 위해 왠만하면 대기시간없이 바로바로 이어지는 열차를 탈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일본행 비행기를 타던 도중 수명이 간당간당하던 이어폰이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2시간 가까운 열차 여행동안 음악을 들을수가 없어서 처음엔 조금 심심했지만

도심지를 벗어나서 코야산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느긋한 전원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해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열차 속에서 그 풍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름 좋은 기분이다.

 

코야산까지 가는 길이 워낙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기 때문에, 하시모토역에서는 500엔 추가로 내면 특별 관광열차를 탈 수도 있다.

그건 보통 열차처럼 창문을 등지고 앉는게 아니라 창가를 보고 앉아서 경치 감상할 수 있도록 고안된 녀석으로

거기서 흘러가는 차창 밖 풍경은 코야산 정상 못지않게 훌륭하다고 하더라. 조금 고민했지만 일단 이번에는 그 녀석 안타기로 결정.

살아있는 동안 분명 이곳을 한번쯤은 더 찾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코쿠라쿠바시에 도착하면 바로 케이블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왼쪽 발목이 점점 찌릿해와서 발걸음이 상당히 느려진 탓에 일반인들 발걸음 따라가기 바쁘다.

'극락다리' 라는 이름의 코쿠라쿠바시 역은 정말로 이 케이블 열차를 타는 순간 사바세계의 경계를 넘어갈듯한 분위기.

도쿄 근처의 하코네에도 비슷한 녀석이 있긴 하지만 여기는 그곳보다 훨씬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서

이런 깊은 산중에 열차역이 존재한다는 풍경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지난 자전거 여행중 코야산에 흥미가 있었음에도 찾아가지 못했던 이유는

저렇게 어마어마한 경사의 열차를 타고 정상 부근까지 올라가야 하는 코야산을 자전거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열차 내부 역시 계단형식으로 되어 있다.

 

 

 

맨 앞쪽으로 이동했는데, 경사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알프스 근처라면 이런 열차 보는게 어렵진 않겠지만, 이 정도면 그냥 로프웨이를 설치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주변에 열차 관련 시설 말고는 온통 푸른색 뿐이라서 정말 분위기가 확 바뀌는게 코야산의 명성 답다는 생각이 든다.

내려올 때라면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은 고생 좀 할듯한 높이.

 

 

 

이 정도 경사는 전철 자체의 힘으로 올라갈 수 없어서 케이블이 설치되어 있다.

저게 툭 끊어지기라도 하면 대형참사가 일어나겠지만, 저 굵기를 보니 어지간하면 걱정 안해도 될 듯.

하코네의 전철은 지그재그로 스위칭을 해 가며 산길을 오른느데, 여기는 그럴만한 공간도 없어서 그냥 직선으로 쫙 올라간다.

 

덜컹거리며 전철이 움직이니까 왠지 긴장된다. 약 5분간 이 절벽에 가까운 경사를 오르는데 이런 철덩어리 속에 몸을 맡기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인기척이라고는 느낄 수도 없는 깊은 산속을 올라가는 도중 갈래길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두 대의 전철은 항상 이곳에서 만나서 서로 엇갈리게 되어 있다.

오늘은 평일 오전이라서 관광객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성수기에는 이 전철도 지옥철로 변할 거라는 예상이 된다.

 

이러한 지옥철은 예전 히로시마의 미야지마(宮島)에 있는 미센 산의 로프웨이에서도 경험한 바가 있어서, 그림처럼 예측 가능.

승객이 별로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여러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코야산은 일본 불교의 총본산인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지역이라서

성수기때의 참배객과 관광객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 한적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발목이 많이 아프지만.

 

 

 

5분간 케이블 전철을 타고 코야산역에 도착. 해발 1000m 가량의 산지에 둘러쌓인 곳이다.

높이만으로라면 자전거로도 못갈 위치는 아니지만, 코야산이 위치한 키이(紀伊) 반도가 워낙 험한 산세에다가

해변가와 달리 중앙부 산맥에는 맷돼지나 곰등 야생동물이 많아서, 자전거로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좀 위험한 곳이다.

 

여기까지 오는 전철비, 케이블비, 그리고 이 오쿠노인(奥の院)행 버스 등등 모든 교통비가 칸사이 스루패스로 이용가능하니

코야산을 가려면 스루패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틀 이용권을 구입해도 코야산 왕복 한번에 구입금액 이상을 사용가능.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상태 보존을 위해 무분별한 개발이 제한되기도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라도 이 코야산은 명성에 비해 주민들이 더없이 소박하고 조용하게 생활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은 일본 불교의 중심인 진언종의 창시자 홍법대사 쿠카이(空海)가 수행을 닦고 진언종을 설립한 곳으로

일본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일본 역사 전반을 통틀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인물의 성지이기 때문에.

 

홍법대사의 발자취는 일본 전역에 남아있는데, 천년간 이어져 온 시코쿠(四国) 88개소 1200km 순례길은 그가 다녀간 발자취이고

미야지마의 미센 정상에 불타고 있는 정화의 불도 그가 피워놓은 후 수백년간 꺼지지 않고 있으며

그 불씨를 가져와서 평화의 상징으로 불타고 있는 히로시마의 원폭 박물관 앞의 횃불 등등

불교와는 관계없는 일반 일본인이라도 코보 다이시(弘法大師) 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위인이다.

 

높게 솟은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이곳은 마치 연꽃 모양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수백년간 성지로 추앙받았는데

그래서인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에도 마을의 모습은 크게 변한 것 없이

이 좁은 분지에 세워진 백여 개의 사찰과 함께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다.

 

일본 전통문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닛코(日光) - 눈, 귀, 입을 가린 원숭이상으로 유명한 그곳 -

와 함께 이 코야산을 빼놓고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명승지중의 명승지이다. 국보의 2%가 이곳에 모여있기도 하고.

그런데 재미있게도 실제 코야산이라는 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행정명일 뿐, 그런 이름의 산은 없다.

 

 

 

코야산역에서 실제 관광지까지 가는 길은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걸어서 갈 수 없지만

일단 구역 안으로 들어오면, 걸어서 1시간 반 정도에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조그마한 분지가 나온다.

그런 조그만 곳에 사찰만 해도 백 개가 넘으니,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문화제나 마찬가지인데

일단은 코야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쿠노인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내린다.

 

이곳에서 좀 더 진행하면 거기서부터는 나의 자전거 여행 루트와 만나게 된다.

익숙한 이름의 표지판을 보니,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나는듯 하다. 1년간의 여행중 거의 막바지에 통과한 곳.

 

아주 화창한 건 아니지만 산책하기엔 더없이 맑은 날씨라 기분도 좋은데

문제는 왼쪽 발목. 도통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절뚝거리지 않으면 걸을수도 없을 정도.

무슨일이 있어도 코야산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서 악을 써서 이곳까지 왔지만, 이제부터는 2km 남짓한 산길을 걸어야 한다.

어제 미도스지 페스타가 전혀 예정에 없던 이벤트라서 꽤나 무리해 버린 게 이렇게 발목을 잡게 될 줄은.

예정대로 오후 3시에 호텔에 들어가서 편하게 쉬었다면 오늘은 아마 생생했겠지.

 

후회해봤자 소용없고, 어제 재미있게 즐겼으니 어쩔 수 없다. 그냥 버티는 수 밖에.

 

 

 

불교 기반의 문화적 특성이 비슷한 한국 사람이라면 그냥 그렇네 라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서양쪽 관광객은 이런 곳이 제일 볼만한지, 영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관광객이 상당히 많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에도 신성시되던 곳이라 입구에서부터 그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다.

나름 일본에 익숙해져 있는 나로서도 이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일 정도로.

 

20m는 족히 넘어서, 뷰파인더에 한꺼번에 담기지도 않을 정도의 삼나무들이 무수히 줄지어 있는 입구의 모습은

이 안에 정말로 뭔가가 있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만드는 위압감이 감돌고 있다.

 

 

 

 

오쿠노인은 홍법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그의 영령을 기리는 사당인 고뵤(御廟)를 중심으로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와 역사상의 인물들, 그 외 수많은 일반인들의 묘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묘지.

약 천년간 셀 수도 없는 묘가 들어서고 사라지고를 반복해, 현재 남아있는 묘는 추정 20만개를 넘는다.

코야산에서도 가장 신성한 곳으로, 사람에 의해 세워진 단순한 역사를 넘어 코야산의 정기 가득한 자연의 품에

일본의 역사 자체가 그대로 녹아들어있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곳이다.

 

과연 발목이 버텨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참배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년간 일본을 돌아봤지만 이 정도로 기대감을 고취시키는 입구도 드문 편.

천년 간 이어진 공간이란 계획적으로 조성된 인공미와는 다른, 글로 설명하기 힘든 오묘한 느낌이 있다.

 

외국인인 나로서는 이 공간을 단순히 구경거리 많은 문화 유산으로 인식할수밖에 없지만

일본인 입장에서는, 옛 사람들뿐 아니라 지금 이 시기에도 여전히 이곳에 가족과 지인들의 묘를 만들어 혼을 위로하는 현실적인 공간일 테니

과연 그들의 눈으로 보는 이곳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참배길 초반에는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묘석이 대부분이다.

사실 이런 풍경만 해도 한국의 그것과는 꽤나 차이가 있는 편이라 신선함은 느낄 수 있다.

물론 역사를 간직한 문화 유산으로서의 감각은 전혀 느낄 수 없지만.

 

씁쓸한 현실이긴 한데, 500년전 전국시대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이나 이 오쿠노인에 묘석을 세우려면 상당한 자금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하다.

돈이 없는 서민들은 나무조각에 글씨를 세겨 눈에 띄지 않는 나무둥치 사이에 살그머니 끼워넣거나 했다.

홍법대사의 가르침과는 뭔가 동떨어진 현실에, 그래서 세상이 지옥이라는 말이 통용되는건가 싶다.

 

 

 

일본인이라면 그리 신기한 광경도 아닌것이,

왠만한 마을 어귀는 물론, 심지어는 대도시의 조그만 공원 사이사이에도 이런 묘석은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

일본 장례 풍습은 대체로 화장 후 유골함을 집 안에 신주와 함께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공동묘지에 이렇게 묘석을 세우긴 하지만 실제로 저 밑에 유골을 안치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한국처럼 가문의 묘터 같은 개념도 없고, 기일이 되면 공원 산책나가듯이 공동묘지에 가서 꽃을 바치고 합장하는 정도.

같은 동양권 문화지만, 셀 수도 없이 늘어져 있는 이곳 오쿠노인의 묘석들은 한국인에게도 새로운 체험일거라 생각한다.

 

 

 

전통과 역사를 가진 참배로인데, 역시 어깨의 힘을 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엄숙하기만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참배로 초반에는 이런 황당하기 그지없는 묘석도 세워져 있다.

재단법인 일본 흰개미 구제협회에서 마련한 묘석으로, '흰개미 편안히 잠들라' 라고 쓰여져 있다.

 

여기 들어와서 발걸음을 옮길 때 조금은 긴장된 느낌이었는데 이 비석을 보고 그냥 웃음이 나온다.

묘지라고 해서 똥 씹은 표정으로 침묵해야만 할 필요는 없곘지.

 

목조 건물이 많은 일본 주택들의 안전을 위해서 이 시간에도 박멸당하는 중인 흰개미들에게 명복을 빈다.

 

 

이제 이벤트장 하나만 더 지나가면 종착지인 난바역.

마지막 이벤트장에서는 미도스지 미나코이 그랑프리(御堂筋みなこいグランプリ)가 열리고 있었다.

미나코이라는 단어는 전혀 들어본 바가 없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추고 있는 춤은 요사코이춤(よさこい踊り)이다.

 

요사코이란 코치현(高知県)에서 시작된 일본의 전통 집단군무인데, 서민들의 축제 전야제 의식으로 시작된 춤이라서

기본적인 몇 개의 규칙만 지키면 남녀노소, 음악의 종류, 안무의 형식, 의상 등등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절제되고 웅장한 춤에서부터, 신나게 날뛰는 춤까지 매우 다양하고 창작적인 형식을 선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본 각지에서 이런 요사코이 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전통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꽤나 자유로운 군무.

 

한일 문화 페스티발 같은 곳에서는 이런 요사코이춤의 배경음악으로 아리랑이 흘러 나오기도 하는 등, 타문화에 녹아들어가기에도 좋은 녀석이다.

 

 

 

일단 대회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출전 팀들은 꽤나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응원단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깃발에 맞춰 한 동작 한 동작 절도있는 움직임을 피로하고 있는 중.

 

아오모리현(青森県)의 대표적 축제인 네부타(ねぶた) 축제는

그야말로 누구나 행렬에 뛰어들어서 마음 가는대로 춤추며 소리를 지르는 야성의 기쁨이 살아있는데

요사코이춤은 형식에 있어 자유롭긴 해도, 정해진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집단 군무에 속하기 때문에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일종의 예술 행위 관람으로서의 매력이 있다.

 

 

 

말 그대로 동네 아주머니도 옆집 꼬맹이도 참가할 수 있는 춤이라서 연령대가 다양하다.

이번에 나온 팀은 꽤나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분위기라서 일종의 신성함이 엿보인다.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받는 대회다 보니 나름 힘을 준 것이겠지만, 막상 정말 축제날에 가 보면

거의 전성기의 X-JAPAN 같은 펑크록 스타일과 모히칸 머리를 한 젊은이들이 날뛰는 요사코이춤도 있으니

이런 사진만으로 요사코이가 어떤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고 슬그머니 운을 띄워 본다.

 

 

 

나처럼 우연찮게 축제에 찾아든 관광객도, 작정하고 구경하러 온 타지인도 있겠지만

이런 분위기의 축제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오사카 시민들을 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만들어가고 즐기는 그런 축제.

 

거대한 규모와 압도적인 스펙타클을 보여주는 일본 각지의 대표 축제들과 비교하면

분위기 좋은 까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듯한 친근함을 가진 축제라는 느낌이다.

 

그냥 자동차에 점령되던 미도스지의 대로 중앙을 산책하듯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길만큼 즐긴다는 감각.

입장료도, 긴 대기시간도 필요 없는 가벼운 축제지만 일요일 오후에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는 의미로서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이런 축제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던 내가 운좋게 이날 오사카에 도착한 것은 여행중 만나는 돌발적인 보물과 같다.

 

 

 

난바역에 도착한 후 다시 요시노야에 들어가서 규 나베동(牛鍋丼)을 하나 주문한다.

배가 고팠다기 보다는, 아침에 사진을 찍지 못한게 마음에 걸려서. 

 

규 나베동은 규동의 소고기를 조금 줄이고 두부와 당면을 넣은 녀석. 고기가 줄었으니 규동보다 가격은 좀더 저렴하다.

한국에서 규동을 한번 먹어봤는데, 가격도 요시노야보다 비싸고 맛은 정말 먹다가 내다버릴 정도라서

규동 먹으려면 일본 가야겠구나 싶은 생각에, 일본 갈때면 한번씩 먹곤 하는 요리다. 대(大)자 이상이 아니면 간식이라고 할 만큼 양이 적지만.

여행중 일본사람에게도 물어봤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라 일본사람에게도 보통 사이즈의 규동은 배가 전혀 안찬다고 하더라.

 

자전거 여행중 꽤나 즐겨먹었던 규 김치국밥이라는 메뉴가 사라져서 조금 아쉽다.

한국의 김치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지만, 일단 고춧가루를 쓴 붉은 음식이라는 것 자체가 꽤나 그리웠던 시기라.

 

 

 

지금은 사라져버린 메뉴인 규 김치국밥의 모습.

이 사진은 2010년 나고야 헌혈센터에서 헌혈 한번 해주고 난 뒤 근처에서 영양보충했을 때.

 

숙성되지않은 싱싱한 배추일 뿐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그리운 맛이었다. 가격도 싸서 여행중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국밥이라고 하기엔 국물에 든게 너무 없었지만, 저렇게 밥을 말아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일본에서는 그나마 한국 냄새 나던 음식.

 

 

 

난바역 근처엔 그럭저럭 큰 서점인 쥰쿠도(ジュンク堂)가 있긴 한데

막상 축제길을 다 걸어오고 나니 피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

넷까페에서 새우잠 2시간 잔 후, 거진 14시간 가까이 계속 걷기만 했으니.

 

몸은 이미 형편없는 체력으로 돌아와 있는데, 마음만은 계속 1년간의 자전거여행 당시에 맞춰져 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라고 생각하고 다니는데도 체력은 예전같지 않다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서점에 들어가면 보통 두시간 정도 책을 훑어보기 때문에, 지금 체력으로는 그것도 상당히 무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한 강행군이 준비되어 있으니 오늘은 이정도로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내일 코야산 가기 위해 난바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칸사이 스루패스 2일권을 구매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종료한다.

외국인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스루패스 티켓이라서 여권까지 확인하고, 구매명단 리스트까지 작성한 후 티켓을 건네준다.

 

참 징하게도 세세한 곳까지 신경쓰는구나 싶었는데, 그런 나라가 얼빠진 대처로 치명적인 원전사고를 일으켰다는 건 일종의 희극이다.

낙하산 인사들의 편안한 안식처였던 도쿄전력 임원들이야, 고위공무원의 얼빠진 나태함은 일본이라고 해서 빗나갈 리가 없지만

자신들이 원전 사고로 입은 피해만큼이나, 지금 일본인들은 그 우쭐해 하던 프라이드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 거다. 애써 외면하고 싶겠지만.

 

아무리 피곤해도 돈내고 전철 두 코스 타기는 싫어서 왔던길을 다시 돌아간다.

내일 스루패스를 사용하면 칸사이 각 도시를 잇는 전철은 물론 오사카 시내의 왠만한 전철도 전부 무제한 사용가능하기 때문에

오늘 전철 타는건 왠지 손해본다는 느낌이 강하다. 사실 호텔까지 가는데 한국 돈으로 3천원만 내면 되는데도.

여행가면 얼마 안되는 돈은 최대한 아끼고 비싼건 팍팍 써버리는 이상한 금전 감각이 발동해 버린다.

 

오후 6시쯤 다시 미도스지 거리를 걸어가는데, 그 북적이던 이벤트장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싹 정리되어 버리고

벌써 자동차들이 평상시처럼 운행을 하고 있다. 물론 도로쪽이나 인도쪽이나 쓰레기도 눈에 띄지 않고 평소 그대로.

한국에서 축제 뒤에 남겨지는 쓰레기더미의 산을 자주 봐 온터라, 5시간 남짓한 축제만큼이나 이런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다.

 

40분 정도 걸어서 숙소에 도착. CM 광고에서 나에게 깊은 임팩트를 주었던 닛신 컵누들(日清カップヌードル) 하나 사들고 간다.

기름많고 짜기만 해서 인스턴트 컵라면은 한국에 비해 영 맛이 없는데, 이 컵누들만큼은 내 입맛에 잘 맞는다. 시푸드나 카레맛 말고 오리지날이.

 

 

 

나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컵누들 광고 그 첫번째.

중간의 일본어 부분을 간략하게 해석해 보자면

 

'아들내미는 중3. 수험공부 하고 있었다 (있었다)'

'야식 컵누들, 엄마가 잊어버렸다(잊어버렸다)'

'아들내미는 삐졌다'

 

왠만한 일본 버라이어티 쇼보다 이 광고가 더 재밌더군.

 

그리고 충격과 공포 그 두번째.

 

 

 

이건 뭐 해석할것도 없이 '딴거 싫어~ 컵누들 좋아~' 다.

 

 

뜨거운 물 받아놓고 욕조에 몸 누이니 온 몸이 짜릿짜릿한게 정말 무리좀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숙소에 돌아와서 긴장이 풀리면 느껴지는 그 무거운 감각이 평소보다 훨씬 심해서 스스로도 놀란다.

침대에 누우니 밑으로 몰렸던 혈액이 쏵 퍼지는 걸 느끼며 TV 틀어놓고 되는대로 보다가 새벽 1시쯤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