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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네'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09.19  산인 여행 - 소바의 추억 20
  2. 2012.09.18  산인 여행 - 무사 저택 14
  3. 2012.09.17  산인 여행 - 이방인 20
  4. 2012.09.16  산인 여행 - 여우신사의 심술 23
  5. 2012.09.15  산인 여행 - 폭우속의 마츠에 22
  6. 2012.09.13  산인 여행 - 마츠에 성 21

 

 

아무래도 비가 완전히 그칠 것 같지는 않고, 맞으며 걸어다닐 정도라고 판단될 때 일어나서 언덕을 오른다.

오르기 전에 홀로 고고히 피어있는 꽃을 한장 찍어주고.

이 녀석 좀 전 주택가에서 봤던 빨간 꽃과 색만 다르지 같은 녀석인 듯 하다. 이름이 뭘까.

 

 

 

언덕 위에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올라가보니 무사 저택하고는 상관없는 볼거리였다.

이 지역의 축제때 사용하는 거대한 북 가마를 전시해 놓은 곳.

 

아무래도 무사 저택만 구경하기에는 입장료가 조금 아쉽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까.

보통 일본의 축제는 그 지역의 토지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오미코시'(御神輿)라는 가마를

장정들이 어깨에 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 주변에서 북을 치고 흥을 일으키는게 일반적이지만

이곳의 축제는 오미코시보다 이 거대한 북이 메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북이 매우 크고 무거워서 가마처럼 사람들이 직접 매고 이동하지는 못하고, 밑에 바퀴를 장착해서 끌고 다닌다.

 

신성함과 부정탐에 대한 결벽증이 있는 일본 사람들 답게, 원래 축제에 사용하는 오미코시나 이런 가마들은

마을 사람들도 축제 전까지는 보지 못하도록 안치하는것이 보통인데, 관광객을 위해서 특별히 전시해 놓은 것이라고.

 

조그만 브라운관에 영상과 함께 흐르는 설명도 일본어, 한국어, 영어를 선택해서 들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작은 무사 저택이지만 외국인을 위한 배려가 상당히 인상깊어서, 입장료 낸 만큼의 만족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본다.

 

 

 

북을 보고 나오니 또 비가 강해졌다 약해졌다 한다. 이젠 그냥 포기.

오후 3시를 넘어갈려나 말려나 하는 시간인데, 15시간의 항해중 잠다운 잠은 자질 못했으니

사실상 어제 아침 9시부터 지금까지 30시간을 뜬눈으로 깨어있는 셈이다. 멀미는 덤으로.

 

무사 저택 앞에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면 아직 어디든 구경갈 수 있는 시간이고

멀미만 아니었으면 느긋하게 호리카와 유람선에 몸을 맡기고 뱃사공의 입담을 즐기기에 알맞은 곳인데

풍경을 즐길수 있는 몇몇 곳은 비때문에 가나마나한 상태, 배는 도저히 탈 기분이 아니고.

 

비는 좀 맞겠지만 그냥 시오미나와테 거리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녀보기로 한다.

 

 

 

시오미나와테 거리는, 해자 건너편에 고풍스러운 무사 저택이 늘어서 있고

해자 쪽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만한 흙길이 늘어서 있다. 날씨가 좋은 날 걸어다니면 매우 훌륭한 산책로.

 

이곳 홍보 팜플렛에는 '일본의 산책로 100선'에 선택된 곳이라고 하는데

무엇무엇 100선 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서, 그냥 그렇다고만 생각한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100선 정도면 각 도도부현에 2개씩 최고의 장소 뽑고도 몇개 더 남으니까.

마음에 드는 풍경이란 건 사람마다 다르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건 그렇고, 이 묘한 모양의 노송은 나이가 600살쯤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사람의 보살핌이 없이는 호리카와에 처박힐 운명이긴 하지만

나이를 진득하게 먹은 나무라는 건 어떤 생물에게서도 볼 수 없는 연륜이란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 하다.

지구가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가이아설을 문학적으로 생각한다면, 가이아의 직계 자손이 이런 녀석들이고 우리는 10대 후손쯤 되려나.

 

외딴 섬이라서 자전거 여행과는 맞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지만

이 젊은(?) 노송을 보고 있으니 야쿠시마(屋久島)의 7천년된 삼나무가 다시 그리워진다. 언젠간 반드시 가게 될 터.

 

 

 

이번 여행 포스팅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게 누구 흉상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옆에는 아일랜드 대통령이 내방했을 때 심은 기념수도 있다.

그쪽의 라프카디오 헌이나 이쪽의 코이즈미 야쿠모나 모두에게 참 자랑스러운 인물이겠지.

 

지금에서야 세계화다 뭐다 해서, TV 앞에서 전세계의 비경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시대지만

처음으로 배나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떨어진 나라에 도착한 사람들의 문화적 충격은 얼마나 어마어마했을지.

경계가 명확할수록 낭만이 넘치는 시대였고, 이제는 외국이라는 절대적인 놀라움의 대상도 그저 즐기러 훌쩍 떠날 수 있는 가벼운 존재가 되었다.

옛 향수를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인간이 지식을 쌓아가면서 점점 놀라움의 대상이 사라져 간다는 건 좀 재미없는 일.

 

이대로 발전이라는 걸 계속한다는 가정하에, 만약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의 지식마저 습득하는 그 때에는

모든 존재에 대한 신선함과 호기심을 잃고 멸망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중심을 두긴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과학에 대해서 매번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여전히 무궁무진한 미지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즐거움이 광산에서 캐내는 보물과도 같은 것이라면

대통일이론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현재의 과학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노다지나 같으니까.

 

 

 

비가 와도 유유히 호리카와 강을 흐르는 유람선의 모습이 보여서 서둘러 한장 담는다.

50분간 고즈넉한 마을과 마츠에 성 주변의 풍부한 자연을 감상하는 저 코스는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한다.

비싸긴 해도 외국인 할인까지 되니, 일본어를 알아듣는 나로서는 즐길거리가 많을 텐데.

 

아무래도 다음엔 비행기로 가볍게 날아와서 멀미 없이 유람선을 타 봐야 할것 같다.

 

 

 

쿨맥스 소재라서 마르기는 기가 막히게 잘 마르는데

비 맞으면서 동시에 말리는 듯한 묘한 산책을 잠시 즐기다가 다시 출발점이었던 무사 저택 앞으로 돌아온다.

문득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치고, 주변에 먹을만한게 있나 둘러본다.

 

역 근처에 가면 적당히 배 채울만한 곳이야 있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좀 유명한 거라도 먹어볼까 싶다.

입장료가 비싼 곳도 별로 없고, 대부분 외국인 할인이 되다 보니 거기서 아낀 돈을 음식에 투자하면 되니까.

아끼려고 작정하면야 일본 1주일 돌아다녀도 식비로 5만원 정도만 쓰면 충분하지만

지금 자전거 여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돈 남겨가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시오미나와테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이라면 단연 소바집 야쿠모안(八雲庵)이다.

이곳 역시 원래 무사 저택이었던 곳을 음식점으로 개조한 건물인데, 예전 미관을 크게 해치지 않아서 그 풍경이 예사롭지 않기로 유명.

 

음식점도 대를 잇는 곳이 많은 일본에서, 특히 소바집은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쟁쟁한 가게들이 많기 때문에

중장년층이 많이 찾기도 하고, 이름값 탓에 새로 생긴 맛있는 소바집이 괜히 평가절하받는 경우도 있다.

 

제대로 면을 뽑아먹은 역사는 약 500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지만,

메밀이라는 게 워낙 아무렇게나 뿌려놔도 잘 자라는 잡초같은 녀석이라

메밀을 이용한 음식은 일본에서 14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녀석. 뭐든 장인정신으로 승화시키려는 이쪽 사람들이라서

각 지역마다 이름 날리는 소바집이 산재해 있다. 특히 물 맑은 지방의 소바집은 그 맛이 일품이라, 먼 시골까지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본인이 몸담았던 나가노현 키소(木曽)마을의 소바집도 창사 300년쯤 된 이름있는 곳이었는데

수익성 때문에 직접 메밀을 재배하진 않고 홋카이도에서 가져오긴 하지만

평균 해발 1000m를 넘는 산간지방에서 흐르는 물과 함께 만들어낸 소바의 퀄리티는 일본에서도 최상급.

도쿄 관광 가본 사람들중에는, 유명한 관광버스인 하토버스를 알고 있는 분도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도쿄에서 출발하는 그 하토버스의 코스중에 이 소바집을 찾는 것도 있을 정도. 도쿄에서 그곳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다.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있는 일본의 메밀국수 형태의 소바의 시초가 된 곳이 그곳 키소였기 때문에

사실 이곳에서 유명한 이즈모소바(出雲そば)도 원류를 따지고 들어가면 키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산골짜기 나가노현 안에서도 정말 이름 그대로 산골짜기중의 산골짜기 키소마을이라

이즈모타이샤를 찾는 사람들 덕에 이곳 이즈모소바가 훨씬 더 대중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신슈소바(信州そば)라고 불리는 그 지역 소바의 맛은, 매니아들이 찾아가는 일본의 극소수 특 S급 소바집을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일본 최고라고 판단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점심시간엔 그 소바를 정말 마음껏 퍼먹을 수 있었는데

조금의 과장도 없이, 최저임금 이하의 시급을 받으면서도 그 소바맛 하나때문에 아르바이트가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을 정도.

 

커피나 중국차도 마찬가지지만, 미각의 레벨을 올리려면 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녀석을 맛의 기준으로 삼는게 쉬운 방법이듯이

소바의 맛도 일단 제대로 된 녀석에 익숙해지고 나면 다음부터 맛을 구별하는데 좋은 비교점이 된다.

키소의 소바에 익숙해진 후로, 같은 일본에서 먹는 다른 지역의 소바도 레벨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한국 일식집에서 나오는 소바는 이제 손도 대지 않는다. 비교하는게 미안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차이.

지하실에서 직접 메밀을 탈곡해서 바로 면을 뽑아올려 만드는 소바가

대량생산되어 비닐에 쌓인 채 배송된 후 가게에서 삶아 나오는 녀석과 맛이 같을수가 있나.

 

일단 마츠에에서 가장 유명한 이즈모소바집인 이곳 야쿠모안도, 직접 탈곡해서 수타로 면을 만드는 곳이니 퀄리티는 보장된다.

소바는 그 퀄리티는 둘째치고, 지역마다 차별된 방식의 먹는 방법이 존재하는데

이즈모 소바는 도시락 소바인 와리고소바(割子そば)가 가장 유명하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따로메밀국수' 정도로 해석가능.

야외에서 소바를 갖고 나가 먹는데서 유래한 소바로, 이곳 특유의 칠기그릇을 도시락처럼 단을 나눠 그안에 소바를 담는다.

각각의 단마다 소바 위에 얹는 고명의 종류를 달리해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특징.

 

원래 소바는 작은 그릇에 담긴 다신 국물(だし汁)에 면을 듬뿍 담궈서 먹는 방식이지만

야외 도시락 개념의 이곳의 와리고소바는, 국물의 맛을 유지시키기 위해 소바에다 직접 뿌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국물을 여러번 담궈 쓰면 소바에서 나오는 수분이 스며들어 맛이 점점 약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이곳 다신 국물은 타 지역보다 맛이 진하다. 담궈먹는 방식보다는 어쩄든 양이 적으니까.

 

와리고소바는 이즈모소바의 원류인 이즈모타이샤에 가서 먹어보기로 하고

이곳에서는 브랜드 상품으로까지 알려진 청정생달걀과 함께 나오는 4색소바를 시식해 보기로 했다.

 

 

 

흰 쌀밥에 풀고 간장뿌려 비벼먹으면 맛이 일품일 듯한 최고급 계란을 얹고

다신 국물을 좌악 뿌려서 입으로 넘겨본다. 계란의 담백한 맛 때문에 강한 국물의 맛이 약간 중화되는 느낌.

국수 자체의 퀄리티는 꽤나 괜찮은 편이고, 위에 올라온 4가지 색의 고명을 조금씩 섞어서 함께 흡입하면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레퍼런스급 맛을 느낄 수 있다. 가격은 비싸지만 맛은 합격점.

 

키소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먹은 소바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끈적끈적한 참마를 국물에 갈아넣고

무와 와사비를 갈아넣은 후 담궈먹고는 했다. 참마의 끈적함 때문에 면에 국물이 훨씬 많이 달라붙고

무의 시원함이 함께 느껴져서 먹고있으면 그저 행복할 따름.

 

이게 상당히 맛을 진하게 먹는 방법이라서, 이곳의 소바는 거기에 비하면 조금 약한 맛이지만

사실 원래 소바는 그렇게까지 진하게 먹는 음식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커스텀 취향.

한국인 입맛에는 좀 허전하다고 느껴질수도 있고, 소바는 면류음식 중에서는 가격이 좀 비싼 편이라서

아무래도 여기서 한그릇 먹어보고 좀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법 하다.

 

소바의 맛은 있는듯 없는듯 느껴지는게 정상이고, 다신 국물의 퀄리티에 따라서 평가가 갈리는 음식.

면을 뽑을 때 껍질부분까지 같이 뽑느냐, 핵만 뽑느냐에 따라 면의 색깔이 바뀌고, 목넘김과 향기도 달라진다.

소바를 먹을 때 일부러 후루룩 소리를 내며 공기와 같이 삼키는 것도 그 목넘김과 향기를 즐기기 위해서.

 

소바는 끓는물에 삶으면 영양소의 대부분이 물에 녹아버리기 때문에, 칼로리도 없고 별로 건강에 좋은 음식은 아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부탁하면 소바 삶은 희멀그레한 물을 한잔씩 내놓기도 한다. 그걸 남은 다신국물에 섞어 마시면 진득한 육수.

겨울에는 물론 소바째로 넣고 각종 야채를 넣어 우동처럼 삶은 뜨끈한 녀석도 판매한다. 겨울에는 그게 별미.

 

이곳의 소바는 이름값은 하는 만큼 괜찮은 수준이지만, 역시 추억거리가 잔뜩 쌓여있는 키소의 소바와 비교하는건

개인적인 감상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나름 평가해 보려고 해도 진짜 키소쪽이 맛있게 느껴지긴 하는데.

호텔의 최고급 코스요리보다 어머니가 해 주는 된장찌개가 더 맛있는 건 어쩔수 없는 일 아닌가.

 

한 번만으로 평가하기엔 소바라는게 꽤나 민감하고 애매한 맛이라서 다음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가게 정원이나 내부 인테리어는 참 정감있게 꾸며놓았다.

마츠에의 유려한 산책로에서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곳이니, 먹고 후회할만한 퀄리티는 아니다.

 

배도 조금 채웠겠다, 체력이 조금 돌아온 사이에 오늘 여행은 이걸로 접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

사실 갈아입을 옷을 한벌씩밖에 안가져왔는데, 이렇게 쫄딱 젖었으니 조금 일찍 가서 빨래도 해야 한다.

그래도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레이크라인 버스를 타고 숙소와 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빙 돌아본다.

반대쪽으로는 15분만에 도착하지만 , 이곳의 일반 버스는 50분에 한대씩 오기 때문에 기다려봤자 헛일.

 

오늘 돌아보지 못한 다른 관광지를 버스 안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바라보는 것도 나름 운치있다.

버스가 30km 를 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의 감상이 가능한 것. 한국의 시내버스를 타면 경치 감상이고 뭐고...

 

역 앞에서 내려 편의점서 적당한 간식거리 구입후 호텔로 돌아온다.

코인세탁기와 건조기는 돈 내고 사용하지만, 원래는 세제도 프론트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이럴줄 알고 한국서 세제를 한움큼 퍼담아 왔기 때문에 5백원정도 아낄 수 있었다. 참 잘났다.

 

시골 지역이라서 TV 채널이 4개밖에 없다. 참고로 도쿄는 기본채널이 10개 정도.

하지만 되려 좋은점도 있는게, 채널 수가 적으니 각종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몰려서 한꺼번에 나온다.

예를들어 도쿄에서 월요일엔 무한도전, 화요일엔 유한도전, 수요일엔 제한도전 따위의 방송이 나온다고 하면

이곳에서는 6시에 무한도전, 7시에 유한도전, 8시에 제한도전이 나오는 셈. 물론 날짜상으로는 재방송이지만.

일본은 지역별로 편성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동시간대에 방영하지는 않는다.

 

자전거 여행때 A 지역에서 본 TV 프로그램이, 1주일 달린 후 들어간 B 지역에서 또 방송되는 경우도 있었고.

 

덕분에 세탁기 돌리고 건조기 돌리고 하는 사이 속이 꽉꽉 찬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일본어가 가능하니, 남들보다 일찍 들어와서 TV 틀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일까.

침대에 누워도 여전히 배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오늘만 잘 넘기면 내일부터는 머리도 정상으로 돌아올거라 생각한다.

흐리며 때때로 비, 강수확률은 70%를 넘고 있어서 내일 일정이 조금 걱정이긴 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안 가보면 큰일나는 곳도 없고 그냥 날씨 맞춰서 그때그때 발길을 정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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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만큼은 아니지만 가랑비가 끊임없이 내려서, 옷 말리는건 사실상 포기.

다들 우산 한개씩 들고 다니는데, 한국에서 접이식 우산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호텔에서 대여해주는 비닐우산은 장우산이라서

귀찮아 들고오지 않았더니 이런 꼴이다. 사실 본인은 비에 젖어도 관계없는데 어디 들어가기가 좀 미안할 따름.

 

아버지께서 일본을 다녀왔을때 한국과 가장 다른 인상을 받았던 점으로,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가 없다는 것을 드셨는데

확실히 아무렇게나 주차된 차량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 거리의 풍경이 확 바뀌는 기분이 든다.

 

일본은 어떤 건물이든 주차공간을 확보하도록 법으로 지정되어 있고,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불법 주차시 벌금 20만원

골목이 아닌 대로변 주차 혹은 일정시간 지나거나 하면 견인비 30만원 정도가 부가되기 때문에

시골은 말할것도 없고 어지간한 대도시에도 교통에 방해되는 불법주차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처벌이 무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처럼 엉성엉성 주차단속하는 한량과는 달리

일단 발견되면 그 즉시 사진찍고 선 긋고 딱지 붙여버리기 때문에 그닥 엄두를 내지 않는다.

 

멀쩡하게 차선 지키면서 운전해도 불법 주정차된 차량 때문에 곡예운전을 해야 하는 한국에 비하면

마음 느긋하게 주행을 즐길 수 있는 이쪽 도로사정은 참으로 부럽기 그지없다.

내가 일본에 거주한다면 앞뒤 불문하고 바이크나 스쿠터같은 이륜구동 몰고 다닐텐데

한국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륜 몰고다닐 마음이 안생긴다. 사륜마저도 개떡같은 운전매너때문에 몰기 싫은데.

 

 

 

들어가서 구경하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나올법한 잡화점이 보인다.

밖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집 자체가 골동품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지만 저렇게 좁은 곳은 지금 이렇게 젖어버린 몸으로 들어가기 좀 미안하다.

밖에서 살짝 구경이나 했는데, 창문 밑의 저 간판이 심히 신경쓰인다.

네모세모동그라미... 이거 뭘 의미하는거지?

소니의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의 버튼이 비슷하긴 한데, 골동품점에서 팔 물건은 아닌듯 하고.

 

현지인들 상대인지 관광객들 상대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둘러보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 건져오는 것도 재미있을것 같다.

막상 사들고 오면, 내가 왜 이런걸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겠지만. 특히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 분위기 탈 확률이 높으니 조심.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보이는 저택이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

기념관 입구에도 쓰여 있지만, 이곳은 코이즈미의 생가가 아니고 기념관이다.

그가 살던 생가는 바로 옆에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고는 하지만 외국인에게 그게 별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입장료가 있긴 한데 그리 비싸지 않고, 외국인은 50% 할인이라서 매우 저렴하게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난 코이즈미 야쿠모라는 문학가를 좋아하지 그가 살던 집이나 그의 물품에는 관심이 없다.

얼마 안되는 입장료 내고 들어가 구경하는건 관계없는데, 작은 물건 세심하게 쳐다보기에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힘들 듯.

 

 

 

옆집은 진짜 코이즈미의 생가. 여기도 안에 들어가려면 요금 내야 하지만 앞마당까지는 공짜다.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듯 하다. 이 꼴로 들어가면 폐를 끼칠 것 같은 느낌.

 

일본인들에게 100년 전 자신들의 나라를 좋아해 찾아온 푸른눈의 외국인은 매우 귀중한 존재겠지.

나쁘게 말하자면 그가 왔다는 사실 자체를 자신들의 자부심으로 변환하는, 조금은 허세적인 마음일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도 안에 들어가지는 않고, 마당에 새초롬히 피어있는 이름모를 꽃이나 찍고 돌아선다.

비가 조금 세지는 듯 해서 몇 분 정도 입구 처마에 서서 비를 피하기도 하고.

 

 

 

그가 살았던 저택을 구경하기보다는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마츠에라는 조그마한 마을의 풍경을 느껴보는게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 부근은 그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한 건물들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조금이나마 코이즈미의 시선을 엿볼 수 있을 듯.

물론 코이즈미 야쿠모 때문에 이렇게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건 아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곳은 시오미나와테(塩見縄手)라는 이름의 거리고, 나와테(縄手)라는 건 새끼줄처럼 길게 뻗어있는 거리를 뜻한다.

마츠에 성이 세워지고 나서 번주를 호위하는 무사들이 성 주변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거주하게 된 것이 이 거리의 탄생.

시오미(塩見)라는 건 그 당시 봉행직에 있었던 시오미  코헤(塩見小兵衛)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 중 관광객에게 공개된 건물이 바로 무사 저택. 이 길 대부분의 저택이 무사 저택이긴 하지만, 들어가 볼수 있는 녀석은 이곳 뿐.

 

 

 

특출나게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시오미나와테 거리와 함께 그 시절 사람들의 실제 생활터를

실감나게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점수를 받는 편.

 

280년 전쯤의 건물인데, 목조건물의 특성상 수리는 여러번 거쳤지만 당시 모습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다.

여기도 외국인에게는 반값할인이 되니, 음료수 한개 사먹는 돈으로 입장 가능.

 

계속 비가내리고 있어서 파란 하늘이 참 그리워지지만, 이것도 나름 운치는 있다고 생각중이다.

 

 

 

물론 저런 인형까지 280년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 저택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중급 무사가 거주하던 곳인데, 관광화 되면서 그 당시 생활도구등을 모아 전시하게 되었다.

스피커에서는 일본어 설명과 함께 한국어 설명도 나와서 이해하기 쉬운 편.

 

물론 중급이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무사는 무사, 애초에 이 거리는 번주를 호위하기 위한 무사들의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 저택이 서민들의 생활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어긋나지 않았나 본다.

한국의 경우에 대입한다면 어쨌든 어엿한 양반집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게 편할 듯.

 

 

 

일본은 일단 문인 무인 가르기 전에 관료직 자체를 무사라고 지칭하는 편이 적합하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무사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랄까, 그런 흔적이 꽤나 느껴진다.

깊게 들어가자면 논문 쓸 정도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그냥 검소하고 절제있는 생활에 맞춰져 있다고 보면 될 듯.

 

한국의 마당과는 달리, 일본의 정원은 그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풍경의 일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자갈은 항상 수면처럼 잘 골라놓고, 움직일 때는 저 돌을 밟는 꼼꼼함을 보인다. 난 그렇게는 못하겠다만.

 

 

 

여기는 여성들이 사용하던 물품들을 전시해 놓은 곳.

내용물은 그 시대 동양 여성들이 가지고 있었을 만한, 은근히 만고불변의 진리같은 느낌이 든다.

 

뒤에 걸려있는 예복은 생각보다 꽤 무겁다.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가벼워지긴 했지만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던 헤이안 시대 여성의 예복은, 겹겹히 다 착용했을 경우 30kg 는 넘었으니.

그래서 자연스럽게 옷걸이도 매우 든든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하급 무가의 여성들은 저 예복이 인생에서 가장 귀한 물건일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물론, 제대로 된 전통 예복은 4~5천만원이 훌쩍 넘어가니... 화장품과 옷은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으리.

 

 

 

사실 300년 전쯤의 전통 가옥은, 그 편의성 면에서 볼때 한국의 그것이 월등히 앞서는 부분이 많다.

 

목재의 수급이 한국보다 수월해서 유리한 점이 있긴 했지만,

부엌이나 온돌, 대청 등 사계절의 변화에 능동적인 대처능력이 뛰어난 한국의 전통 가옥은,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도 굉장한 하이레벨.

솔직히 집 짓는 능력은 요즘들어 훨씬 퇴화하지 않았나 싶은데, 물론 돈때문이곘지만 한국의 요즘 건물모습은 그냥 추하다.

 

 

 

예전에 사용하던 우물터.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덮개가 조금 인상적.

딱히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 그냥 저택 뒷 언덕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였겠지.

 

 

 

빗줄기도 점점 심해지고 그에 맞춰 머리도 돌기 시작해서 때마침 나타난 휴게소에 들어가서 걸터앉는다.

이곳도 원래 사용하던 건물인데, 휴게소로 사용하기 위해 살짝 보수를 거친 녀석.

 

물에 젖은 옷때문에 사실 앉아있는것도 좀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 신발 벗고 위로 올라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옆에서 본다면 음악이라도 흥얼거리고 있는걸까 할 정도로 머리가 저절로 운율을 타고 있다.

몇몇 관광객들이 앉았다가 다시 나가기를 반복하는 시간동안 그냥 멍하니 앉아서 바깥 경치를 바라만 본다.

그 사람들은 우산을 가지고 있었으니 나가고 싶을때 나갈 수 있지만, 난 일단 비 그칠때까지 앉아있으려고.

 

 

 

이곳 무사 저택도. 개인 집치고는 그럭저럭 큰 편이지만 관광지로서는 참 조그마한 곳이라서

느긋하게 돌아도 15분이면 떡을 친다. 그런데 비 때문이기는 하지만 휴게소에 앉아서 20분 넘게 이 풍경만 계속 바라보고 있다.

꼼꼼하게 본다고 해도 역시 걸어가다가 멈추고, 다시 걸어가고 하는 구경과

그냥 한자리에 앉아서 같은 풍경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과는 꽤나 차이가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한옥에 익숙해서 그닥 살아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 저택이지만

집 안에서도, 심지어 수면 중에도 무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그때 그시절의 딱딱한 격식때문일까

난 집안에서는 옷 훌떡 벗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역시 좋다.

 

여기서 오른쪽을 보면 찻집을 겸한 조그마한 상점과, 언덕 위로 올라가는 작은 오솔길이 나 있는데

보통 이런 저택에는 언덕이라는게 있지도 않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저 위에 뭐가 있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비가 그치면 올라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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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의 소화전 뚜껑이 비에 젖어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듯 하다.

나름 관광지라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그리 신기하지도 않은 모습이지만

한국과 비교해서 조금 놀라운 점은, 저 총천연스러운 색깔이 굉장히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한국에서도 의외로 이런 다양한 모양을 가진 뚜껑이 꽤 많이 있다. 요즘 대구시내 돌아다녀도 가끔 볼 수 있고.

관광지에서는 시야가 넓어져서 이것저것 쳐다보며 걸으면 눈에 들어오지만

맨날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는 의외로 옆에 있어도 잘 보이지 않더라.

 

하지만 자동차가 지나가는 곳에 설치된 녀석이 이렇게 색깔 하나 벗겨지지 않고 본모습을 유지한다는 건 칭찬할 만 하다.

 

 

 

이나리 신사를 지나서 계속 걸어가면 한동안 관광지와는 별 관게없는 주택가가 이어진다.

여기서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까지는 2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또 조금씩 비가 흩뿌리는 바람에 발걸음도 약간씩 늦어지는 기분.

 

한적한 시골 분위기에 흠뻑 젖어서 있으나 없으나 한 앙증맞은 대문같은, 관광지 사진과는 전혀 관계없는 녀석도 담으면서 이동.

문득 제주도 생각이 났는데, 요즘에도 도둑이 없어서 문이 필요없다거나 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진다.

일본엔 일년에 몇번씩이나 가면서 제주도는 가본지 20년이 넘었다는 것도 좀 아쉽고.

 

그런데 이제껏 다녀온 일본은, 제주도 여행경비보다 더 쌌기 때문에 갔다는게 숨겨진 반전.

 

 

 

비가 오고나니 반가운 녀석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초콜릿이 진하게 들어간 녀석은 참 오랜만에 보는 듯.

 

어렸을 적에야 많이 갖고 놀았는데, 2008년 자전거 여행때 길가에 포진한 수만마리의 달팽이를

어쩔 수 없이 와그작와그작 밟아재끼며 전진할 수 밖에 없었던 사건 때문에 관계가 좀 소원해 진 요즘이다.

손가락으로 저 늘씬하게 뻗은 요술봉의 동그란 끄트머리를 건드려보고 싶었지만

그냥 오랜만에 반가운 모습 보여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도시든 시골이든, 일본 주택가의 특징이라고 할까, 대문 앞에 여러가지 꽃을 기르는 모습이 참 좋다.

오사카같은 삭막한 도시에도 그런 녀석들의 얼굴 덕분에 조금이나마 어두운 골목길이 밝아지는 느낌이고.

 

여기는 제대로 된 공장시설도 거의 없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라서 꽃들도 스스럼없이 색을 발하는 듯 하다.

아직까지 따로 길거리 사진을 찍은 적은 없지만, 사카이미나토 항구에 도착하고 나서 지금까지 버스, 도보로 이동해 오면서

도로에 쓰레기라는거 떨어져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츠에에서 가장 붐비는 마츠에 역에서조차.

아마 이런 곳에서는 적당히 뭐든 심어놓으면 쑥쑥 잘 자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폭우 때문에 고생한 흔적이 보이지만 그래도 생기를 머금은 이름모를 꽃.

꽤나 큰 녀석인데 꽃잎이 완전히 분리되어 자라는 듯한 묘한 모습이다.

 

사진 찍는 도중에도 다시 조금씩 비가 내리길래, 방금 전의 경험을 바탕삼아 미리 대피할 곳을 찾아본다.

다행히도 골목 맞은편에 넓은 공터가 있고, 그 끝에 든든한 지붕이 버티고 있는 벤치가 보인다.

비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휴식을 하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

 

사진 찍으려고 뷰파인더를 보고 있으면 어깨와 손은 딱 고정되는데 머리가 앞뒤로 흔들흔들거려서 여간 힘든게 아니다.

그 지옥같던 15시간의 항해가 끝나고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멀미란 녀석.

사실 전날 잠을 잘못자서 왼쪽 허리까지 뻐근한 상태였기 때문에, 벤치에 앉을때 멀미와 허리통이 동시에 습격해서 혼났다.

 

 

 

서 있을때가 허리는 덜 아픈 편인데, 멀미때문에 앉아있으려니 이젠 허리가 쑤신다.

이럴때는 살짝 느긋한 정자세를 유지해서 한쪽으로 가는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줘야지.

 

한숨 한번 길게 쉬고, 무거운 가방과 카메라를 옆에 던져두고 나니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 든다.

정신없어서 잘 몰랐지만, 항구에 도착후 버스타고 이동하는 시간 외에는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구나.

15시간의 항해는 아무리 누워있어도 체력이 소비되기 때문에, 지금 꽤나 피곤한 상태다.

 

방금 전의 폭우와는 달리 조금씩 뿌리는 듯한 비라서 맞아도 별 문제는 없지만

어깨에서 카메라를 한번 내려놓고 나니까 왠지 자리를 뜨기가 귀찮아진다.

 

사진의 자판기가 서 있는 건물은 꽤나 근사한 찻집이라서, 다양한 차와 달콤한 화과자를 판다.

이곳 마츠에는 딱히 해산물이 다양하고 신선하기로 유명하지만, 그것 외에는 특산품이라 할 만한 음식은 없어서

그나마 가장 유명한 것이 차와 함께 먹는 화과자이다. 사실 화과자라는게 그렇게 특출난 맛을 보여주느 것도 아니라서.

 

저기 들어가서 차와 함께 화과자를 한입 씹으면 기분이 좋아질것도 같지만, 여전히 홀딱 젖은 차림새.

물론 웃으며 맞이해는 주겠지만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될 필요는 없다.

자전거 여행때도 그랬지만, 이런 여행에 익숙해지면 멋들어진 까페나 레스토랑보다 그 옆의 공터가 더 편안한 법.

 

 

 

두 개의 벤치 중앙에는 나무 색깔을 한 콘크리트 휴지통이 놓여 있다.

가볍고 쓰기 편한 50mm 수동렌즈를 교체하면서 테스트용으로 담아 봤는데

나무 흉내내려는 차가운 녀석의 색감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서, 처음부터 흑백변환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찍었다.

 

혼자 휴식하고 있으니 원래는 카메라 가방에 들어있어야 할 일기장이 참 고프다.

이럴 때 항상 펜과 메모장을 꺼내들고 한숨 돌리면서 몇십 분이고 글을 쓰는게 일과였는데.

여행때는 잘 듣지 않지만, 아이팟도 가져오지 않아서 그냥 아무 일도 하지않고 멍하니 앉아있을 뿐.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휴게소는 뭔일인지 저런 구멍이 나 있다.

바람 잘 들어오라고 해 놓은 것일까. 하지만 이곳은 원래 그렇게 더운 지방도 아니다.

이 구멍 말고도 바람 통하는 창은 뚫려있기 때문에, 대체 뭘 하는 녀석일까 궁금해진다.

 

조금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다치 미술관 흉내라도 내려는 걸까 하는 상상도 해 보고.

아다치 미술관이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한 폭의 예술작품이라 불리는 바람에

미술작품 구경오는 사람보다 그 유명한 창문너머 정원 모습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은, 이 지역의 유명한 미술관.

 

 

 

비는 대충 그쳤지만 여전히 자리를 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멍하니 아기자기한 주택들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본다.

 

옆집하고 너무 붙어있어서 프라이버시는 어쩔까 하는 생각을 이미 20년 전부터 해 왔고...

가끔 일본 만화를 보면, 저렇게 딱 붙어있는 집 애들이 나중에 연인이 된다던가 하는 그런 달달한 러브스토리도 있었는데

진짜로 그러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만화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소재를 쓰는게 일반적이니까.

 

홈스테이 했던 나가노의 집은, 저렇게 다닥다닥이 아니라 사방팔방이 확 트인 저택같은 구조라서

이웃집이 어쩌고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름의 매력은 있겠지만 난 프라이버시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저런 집에서는 살기가 좀 힘들지도. 특히 주택거주의 가장 큰 장점인, 빵빵하게 소리켜놓고 영화감상도 못할 것 같으니 말이지.

 

문득 교복입은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서 저 앞을 지나간다.

군것질 하는 애들은 아스트랄하게도 방금 전의 그 찻집에서 화과자 사들고 나와서 먹으며 걸어간다.

중고등학교 귀갓길 군것질을 화과자로 때우는 모습이라...

그러고보니 대구의 서식지 근처에도 호두과자 전문점이 있어서, 교복입은 학생들이 그거 사들고 가는 모습도 봤으니.

 

남정네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남녀 둘이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몇몇 학생들은 시커멓고 빵빵한 채 젖어있는 내 모습을 슬쩍 쳐다보기도 하는데, 들어와서 말 걸 것 같지는 않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제일 말 잘거는 사람은 대체로 상대방보다 나이가 많은 쪽이니까.

 

나야 뭐 누구든 말을 걸어오면 기꺼이 대화할 용의는 있지만.

 

1년동안 일본을 돌아다니면서 자전거여행을 했으니 나름 이 나라에도 꽤나 익숙한 편이다.

일본어 수준도 그쪽 TV 쇼 보면서 웃을 정도는 된다.

알바도 3개월동안 하면서 여러가지 친분도 쌓고, 일본 곳곳에 전화 한통하고 찾아가면 재워주고 먹여줄 사람들은 꽤 있다.

 

그런데도 문득 역시 난 이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행중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주위를 지나가는 교복입은 학생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생시절이란 일생 단 한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극히 특수한 상황이니까.

아무리 일본에 익숙해져도 그건 단지 나이들고나서 적응한 것일 뿐,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학생들 사이의 대화같은, 아무 저항없는 의사의 교류는 아마 평생 나누기 어려울거라 생각한다.

이제껏 만난 그 많은 사람들도, 그 인연의 가장 근원적인 곳에는 내가 일본말 잘하는 외국인이라는 의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까.

 

 

 

내가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렇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듯 하다.

여행도 공부의 일종이니, 점점 능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창문 밖으로 나가서 직접 풍경을 만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40분 정도 휴식하고 다시 일어난다. 여전히 비는 계속 조금씩 내리고 있다.

하늘을 보니 완전히 그칠것 같지도 않고, 머리는 여전히 흔들거려도 체력이 조금 회복된 것 같으니까.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까지는 정말 순식간인데, 그 와중에도 계속 시골풍경이 눈길을 끌어서 걸음을 멈춘다.

왠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지는 녀석. 돌담이나 흙담, 나무담같은 것들은 확실히 콘크리트 담보다는 좀 더 편안하다.

 

 

 

한적한 산책로를 빠져나와서, 그나마 표시선이 그려져 있는 도로가로 나온다.

사실 역 근처 외에는 딱히 번화가라고 할 만한 곳도 없으니, 주욱 이런 느낌의 가옥들이 이어진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지만, 쓰레기가 없어서인지, 도로가 움푹움푹 파여있지 않아서인지

굉장히 잘 정리된 느낌이 드는 골목길. 자전거 한대 있으면 좀 더 즐거울 것 같은데.

마츠에 시내에는 자전거 대여해주는 곳이 몇군데 있어서 못 탈것도 아니지만

카메라 장비가 꽤나 부피를 많이 차지하고, 계속 비가 내리다 말다가 해서 그냥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무채색이 많은 일본의 주택가에서, 비 내린 후의 상큼함을 책임지는 녀석들이란 역시 물방울 머금은 식물들이구나 싶다.

사람은 비맞으면 굉장히 애처로워 보이는데 이 녀석들은 어째 더욱 발랄해 보이니.

 

 

 

이제 마츠에 성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왔다. 멀리 왔다기 보다는 언덕 너머에 가려서 안보이는 것 뿐이지만.

마츠에 성을 둘러싼 해자 역할을 하는 호리카와(堀川) 강은,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물길을 만들기가 용이해서

다른 곳보다 훨씬 넓고 길게 만들어져 있다. 사이사이로 빠지는 지류도 굉장히 많고.

 

지리적 특성에 대해서는 훗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테니 넘어가고, 이 둥글넓적한 호리카와 강을 느긋하게 한 바퀴 도는

호리카와 유람선이 이곳에서는 꽤나 유명하다. 다른 도시처럼 잠깐 즐기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50분 가까이 쪽배를 타고 뱃사공이 구수한 입담으로 여러가지 설명도 해 주고, 노래도 한 곡조 뽑아주는 이곳의 명물.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높이가 매우 낮아서, 뱃사공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할 정도.

겨울에는 유람선 안에 난방기구까지 설치되어서, 내리는 눈과 함께 유유히 흘러가는 느낌이 또 각별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15시간이나 페리를 타고, 땅 위에서도 멀미의 여파로 머리가 터져나가는 기분이라서

아무리 명물 유람선이라도 배라는 탈것에 더 이상 타고싶은 기분이 쥐박이 양심만큼도 들지 않는다.

긴 시간만큼 요금도 꽤 비싼 편이지만, 외국인에게 할인이 되기 때문에 놓치기 아까운 녀석이긴 하지만

아무리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배를 한번 더 탄다는 건 생리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으니.

 

그냥 유람선 모습이나 몇장 찍는걸로 만족하기로 하고, 눈 앞으로 다가온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쪽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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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쏟아진 후 아직 하늘을 맑아지지 않았지만, 주변 공기는 한층 더 맑아진 느낌이 든다.

조금 시원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30도를 넘는 날씨라서 후덥지근하다.

다행히 한 걸음 걸으면 바지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흠뻑 젖은 상태라서, 기화열 덕분에 시원하다.

관광객이 많은 곳이었다면 이 몰골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여긴 나 혼자밖에 없으니 여유롭다.

 

이름모를 신사에서 내려와 다시 루트를 타고 걸으니 바로 옆에 죠오잔 이나리신사(城山稲荷神社)로 향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죠오잔이라는 단어, '성산'은 사실 한국의 각 지방에도 얼마든지 보이는 산의 지명인데

일본에도 죠오잔 혹은 '시로야마' 라는 발음으로 각지에 같은 이름의 산이 존재한다.

'성산'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가 그냥 '높은 언덕' 정도 되는 보편적인 뜻이라서 그럴까나.

 

이나리 신사란 곡식의 신인 이나리노카미(稲荷神)를 모시는 신사로서, 농본사회인 일본에서는 친근한 서민들의 신으로 유명하고

농업이 발달한 어지간한 지역에는 대부분 이나리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규모가 작은 신사가 많아서 현재는 몇몇 유명한 곳을 빼면 많이 사라진 편이지만.

 

이나리노카미의 사자(使者) 역할을 하는 동물이 여우였고, 그래서 이나리 신사에는 여우상이 놓여있다고 보면 된다.

어느 지역에서나 마찬가지로, 여우라고 하면 보통 머리 좋고 영악하고 장난끼 많은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데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우가 좋아하는 유부를 공물로 바치지 않으면 길을 잃게 한다던가 비를 맞게 한다던가 하는 장난을 친다고 한다.

유부초밥의 일본어 발음이 이나리즈시(稲荷ずし) 인 것은 여기서 유래된 것.

폐를 끼치긴 해도 기본적으로 장난치는것을 좋아하는 녀석이라서 딱히 심각한 저주를 내린다거나 하는 건 없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안개처럼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여우비라고 하는데

일본어로는 이것을 '맑은날 비'라는 의미의 '日照り雨' 라고 쓰지만, 개인적으로는 문학적 사상이 듬뿍 담긴 '狐の嫁入り' 라는 표현을 훨씬 좋아한다.

말 그대로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라는 뜻인데, 이 역시 이나리 신사의 여우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단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내가 지지하는 가설은, 장난끼 많은 여우신이 시집을 가면서 살포시 흘리는 진심이 담긴 비의 모습이라는 서정적인 녀석이다.

 

그리스 신화가 그랬듯, 사람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사람을 닮은 신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는 신화라는 이름으로 인류 문학의 토대가 된다.

이제와서 여우비가 단순히 급격한 기압차에 의한 소나기의 일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수십 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인류에게 예술의 즐거움을 전해다 준 신화속 에피소드들이, 여전히 주위에 남아있다는 증거중 하나가

바로 이 '여우가 시집가는 날' 이라는 서정성 넘치는 아름다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잠깐 현실 세계로 돌아오자면, 방금 내린 폭우는 아무리 봐도 여우비라고 할만한 녀석은 아니다.

그냥 이곳의 여우신이 심통나서, 혹은 나한테 감수성을 일깨워 여행의 흥을 돋궈 주려는 호의에서 벌인 일이 아닐까.

장난에 놀아난듯한 느낌이 들지만, 지난 번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되려 비 덕에 씨익 웃을수도 있었고.

 

하지만 그런 장난덕에 잘 살고있던 거미는 긴급 복구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상태를 봐서는 대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미친듯한 발놀림으로 부서진 거미집을 다시 이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조금 불쌍하다.

하지만 내가 스파이더맨도 아니고, 그냥 가만 놔 두는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이렇게 사진이나마 남겨서, '이 거미는 게으름피지 않고 충실히 할 일을 하는 부지런한 녀석입니다' 라고 증언해주는 것 정도가

이 녀석의 프라이드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려나.

 

 

 

내가 코이즈미 야쿠모같은 이름난 문호는 아니지만

어쨌든 감수성이란 녀석이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다양한 얼굴을 가진 여우신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곳은 코이즈미 야쿠모가 그토록 사랑하고,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들렀던 신사이기도 하다.

 

마츠에 시에서 가장 유명하고, 지금도 마츠에 시민들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메이지 시대의 문호 코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가 사랑한 신사.

그는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 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에서 태어난 영국인 2세였다.

아일랜드, 미국 등에서 생활하다가 특파원 자격으로 일본에 도착한 후, 이곳의 풍경과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귀화한 인물.

각지의 설화를 모아 출판한 '괴담'과, 자신이 느꼈던 일본의 모습을 담은 '동쪽 나라에서(Out of the East)'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작품집 괴담에 실린 이야기들은 사실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것들이 많다.

코이즈미 야쿠모라는 이름도, 라프카디오 헌이라는 이름도 모르지만 그의 괴담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

 

일본 역사의 주역을 맡아본 적도 없고, 이즈모타이샤를 제외한 문화재도 없는 고요한 시골마을 마츠에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도시 어디를 걸어다녀도 이 코이즈미 야쿠모에 대한 향수로 가득하며,

도시 제일의 볼거리로 문학가의 생애를 내세우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다.

문학가의 피가 스며든 이곳에서는 자연스레 굉장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현립미술관이 들어서고

백만장자 개인이 설립한 사립 미술관은 미국 잡지에서 8년 연속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선정되고 있다.

 

히로시마의 평화 박물관? 그딴 거 자랑하는 것보다 이렇게 한 문호가 사랑했던 조그마한 여우 신사가 더욱 평화스럽다.

문학이란 아무런 형체도 없이,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차분하고 단단하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내리는 힘이다.

이제 메밀밭을 실제로 접한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도, 한밤중 메밀꽃의 숨막힐듯한 향기는 다들 느끼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오니 확실히 방금 전 폭우가 여행에 도움이 되었다는 확신이 든다.

비 내린 후 여우신사의 모습은 한층 더 여러가지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강력한 물줄기에 힘없이 고개를 숙인 무궁화도, 조금만 있으면 그 고개를 들고 더욱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겠지.

 

 

 

이 정도로 원형을 보존한 이나리 신사는 별로 없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규모가 큰 쿄토의 후시미(伏見) 이나리 신사는

이미 여우신의 장난끼있는 소박한 모습은 사라지고, 관광 스팟으로 유명한 천 개의 토리이(千本鳥居)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일본여행 팜플렛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주황색 토리이가 주르륵 배열된 신비한 모습의 주인공.

 

하지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런 나무향기 나는 조그만 신사를 훨씬 좋아한다.

 

 

 

신사 내부는 5분만 돌아다녀도 금방 끝날만큼 정말 자그만 느낌.

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사당과 앙증맞게 늘어선 여우상의 모습은

왜 코이즈미 야쿠모가 이곳을 그토록 사랑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눈썹과 더듬이의 붓선은 사람이 직접 그려넣었기 때문에

다들 비슷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모습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살짝 장난끼있는 느낌.

 

이 신사가 서 있는 언덕 너머로는 코이즈미 야쿠모 생가와 기념관이 나란히 서 있지만

사실 내가 느끼고 싶었던 문학가 코이즈미 야쿠모의 모습은 그곳이 아니라 여기서 전부 둘러봤다고 생각한다.

 

그의 학력, 그의 모습, 그의 생애를 사진과 설명으로 곁들여서

그의 작품과 그가 사용했던 잡화들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기념관에서 과연 그를 느낄 수 있을까.

 

살아생전 그는 자신의 작품과 펜을 유리창 안에 넣어두고 바라보진 않았다.

하지만 통근시 매일 빠지지 않고 이 조그마한 신사에 들러 산책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비단 코이즈미의 그림자가 없었다 해도, 기본적으로 이나리 신사는 다른 신사에 비해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다.

비가 오거나 해가 진 어두컴컴한 시간에는, 어린이들에겐 은근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결국 여우신이라는 녀석은, 조금 무섭긴 해도 기본적으로 무해한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실제로 일본 문학에는 이나리 신사와 아이들의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코이즈미가 이곳에 매료된 것도, 이 기묘한 신사가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속에 작용되어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덕 위에 세워진 신사인데, 뒷쪽으로 더 올라가면 정상에 조그마한 사당이 하나 더 있다.

은근히 마츠에 시의 전경도 슬쩍 보이는 좋은 풍경속에 놓인 이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아침 통근때마다 이곳에 올라서 마츠에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 어떤 이를 생각하니

그럴 만도 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것 같다.

 

조그마한 토리이는, 이즈모시의 한 숙박업자가 헌납해서 세워졌다고 적혀 있는데

이 신사에 딱 알맞을 만한 아담한 녀석이라서 부담감 없다.

 

 

 

때론 교활하고 심술궃고, 재미있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여우신의 모습은

표정을 읽기 어렵게 이루어진 획들에 의해서 그 애매함을 표현해 놓았다.

관광객이 그리 많이 찾는 곳은 아니라서, 얼핏 보기엔 기념품이랍시고 도난당한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신사 앞에 가면 따로 구입할 수도 있으니 설마 이걸 훔쳐가진 않겠지라고 생각은 하는데...

혹여 그런 녀석들이 있다면 좀 전처럼 물폭탄이라도 한방 날려주길 바란다.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하늘도 제 모습을 되찾고 있고

여전히 머리는 흔들거려도 여행에 심한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다.

사실 계획이란 것도 없지만, 왠지 일이 흘러가는대로 잘 풀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흐뭇하다.

 

여기서 좀 더 서두르면 오늘 중으로 현립 미술관, 카라코로 공방(カラコロ工房) 등등 몇군데 유명한 곳을 둘러볼 수 있겠지만

왠지 이곳 정상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오늘은 만족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마츠에라는 도시에서 바라던 것은, 뭔가 특이한 것을 보기 위한 여행이라기 보다는, 딱 이정도의 페이스로 산책하는 것 자체였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여유가 있으면, 이곳 신사의 분위기에 딱 맞는 아기자기한 모양을 놓치지 않고 찾아볼 수가 있다.

신성함을 중요시하는 신사에 이런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는 것, 이것도 문학의 힘이려나?

 

어지간해서는 관광객이 찾아갈 일이 없는 한참 외진 곳의 신사중에는

'젖탱이 신사'라고, 젖탱이를 닮은 돌덩이 하나 놓아놓고 사람 끌어들이는, 묘하게 병맛나는 곳도 있었는데

그 정도로 일선을 넘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함을 살려놓은 이곳은 칭찬할 만 하다.

 

 

 

그 폭우 속에서도 꿋꿋하게 고개를 쳐들고 버텨낸 무궁화가 있었다.

뷰파인더가 습기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찍고나서 보니 힘겹게 버티고 있는 곤충 한마리가 담겨 있었다.

 

저녀석들에겐 방금 전의 폭우가 얼마나 무시무시했을지.

아직 등에서 떨어지지 않은, 자기 몸통만한 물방울이 그 강렬했던 사투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올라갈 때는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친 모습인데, 내려올 때는 묘하게도 눈에 확 들어왔다.

어쩌면 여우신이란 녀석, 그냥 꽃구경이 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을지도.

 

장난끼 넘치는 미소와 함께 발 밑에 흩뿌려진 꽃잎을 보며 즐거워하는 여우의 모습이 살짝 보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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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날에 배를 타고 온 한국인 관광객이 백명 가까이 되기 때문에 어디서든 스치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커플 두어 팀 빼고는 한국인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뿔뿔이 흩어진 걸까.

단체관광객은 전용버스타고 여기저기 달리고 있는 중이겠고, 자유여행객들은 다들 다른곳으로 흩어졌나보다.

이곳 산인지방은 이렇다 할 유명한 관광지는 한두군데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특유의 '별것 아닌 소재도 잘 꾸며서 관광지로 만드는' 능력이 여기저기에 엿보여서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흩어져 있으니, 그렇게 흩어지는 것일까 싶다.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들은 어느 나라나 점점 비슷해져 가는 시대지만

그리 멀지않은 한국이라도 자연 풍경만큼은 일본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올때마다 꼭 한두장씩은 찍게 되는,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삼나무로 이번에도 눈요기.

 

 

 

마츠에 성을 내려오면서 보이던 연못.

아주 조그마한 곳이고, 흐르지 않는 물이다 보니 상당히 지저분한 느낌이다. 중간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얕은 곳.

연못 앞에 '馬洗池' 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름 그대로 말을 씻기던 곳인듯 하다. 과연 식수터는 아닌것 같았다.

 

 

 

이 연못의 맞은편에는 '기리기리 우물터' 라는 의미불명의 푯말이 세워져 있다.

우물터라는건 뭐, 말 그대로이겠는데 '아슬아슬'이라는 뜻의 기리기리가 어째서 붙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슬아슬한 우물이란 게 대체 무슨 뜻인지. 주변 풍경이 그렇게 아슬아슬해 보이지도 않고.

우물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아슬아슬한 우물이 어떻게 생긴건지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

 

나름 일본어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본인이 이렇게 막혀버리니 뭔가 패배감을 느끼며 다시 길을 가는데...

 

다행히도 조금 더 걸어가니 이 정체불명의 우물터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어서 안도의 한숨.

그런데 일본어로는 열줄 가까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반면, 한국어로는 단 두줄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놓아서

그냥 한글만 읽으면 거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성의 부족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듯.

 

대강 설명하자면, 에도시대 축성공사때 벽면이 한쪽 무너지는 바람에 그곳을 깊게 파서 조사해 봤더니

사람 해골과 창이 발견되어, 정중히 제사지낸 후 벽을 다시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깊게 파낸 구멍이 사람의 가마와 닮은 모습이었고, 그곳에서 물이 솟아난 덕에 그대로 우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 가마 닮은 구멍때문에 이 근처의 성문과 우물이 모두 '기리기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여기까지 읽고도 그게 기리기리하고 대체 뭔 관계인가 싶었는데

사실 기리기리(ぎりぎり)라는 단어는 가마(つむじ)의 오사카 사투리 버전이라는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가마란 선모(旋毛) 라고도 하며, 사람 정수리의 소용돌이 모양의 머리털을 의미한다. 머리털의 선회점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가 빠를 듯.

애초에 저 가마(つむじ)라는 단어 자체가 여간해서는 외국인이 배울 일이 없는 녀석이라서 깔끔쌈빡하게 모르는 단어인데

그걸 사투리로 '아슬아슬'과 똑같은 단어인 기리기리라고 썼으니 내가 알 턱이 있나.

 

어쨌든 실생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지만, 평생 잊어먹지 않을 단어 하나 배우고 뿌듯한 기분.

 

 

 

말 씻는 연못을 빙 둘러 내려와서 걸어가면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이 나온다고 표지에 적혀있다.

사실 기념관은 한참 더 걸어가야 나오는 거리지만, 어쨌든 길은 맞으니 한동안 산책하는 기분.

 

물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은 나무의 본능인지, 이곳에도 수면쪽으로 가지를 드리운 나무가 있어서 한 장 남긴다.

여행중 이런 사진을 은근히 많이 남기는 기분이 드는데...

 

 

 

한국에서도 못 볼 풍경은 아니지만, 습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나무에 자리잡은 무수한 이끼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역시 외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은 사람이 조경을 목적으로 기른 이끼가 아니라서 보기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생명력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보고 있으면 왠지 사진 찍고싶어지는 장면이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한국보다 고온 다습에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서 식물들의 생장력이 꽤나 강한 편.

 

 

 

말 씻는 우물터를 빙 돌자마자 후덥지근한 하늘 위에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사실 성에 올라설 때 부터 조금씩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라서 그냥 한숨 한번 쉬어줄 뿐.

여름날 비 오기 직전의 그 텁텁한 습도를 자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곧 비가 오리라는 예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애초에 날씨가 영 불안정하다는 소식은 듣고 온 터라, 비가 오면 맞으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카메라 가방과 카메라는 어느 정도 방수기능이 있고, 내 옷은 위아래 전부 등산용 쿨맥스 소재라서

비를 맞아도 30분 정도만 걸어다니면 금새 말라버린다.

카메라 장비도 짐인데, 언제 올지 모르는 비때문에 우산을 갖고 나오긴 싫어서 맨몸으로 나왔다.

 

사실 자전거 여행때 워낙 익숙해지는 바람에 그렇게 건성으로 대처해 버렸지만

엄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비맞으면 땀냄새와 섞여서 영 불쾌하기도 하고, 신발이 속까지 젖어버리면 그 꾸린내라는 건 엄청난 민폐라서.

자전거 여행때는 며칠 달리면서 비 맞고 나면, 냄새때문에 편의점에 들어가기도 미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런 배려심이 오랫동안의 배멀미로 인해서 다 사라져 버리고, 판단능력이 한없이 저하된 지금은

비맞으면서도 꽃한테 눈길이 팔려서 사진이나 찍고 있는 태평함을 연출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살짝살짝 간보듯 내리던 비가 일순간에 폭우로 변하자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소나기도 보통 소나기가 아니라, 맨살이 닿는 부분에는 방망이로 두드려 맞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미친듯한 빗줄기.

거의 사고가 마비되어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운도 좋게 주위에 비 피할 수 있는 처마란 게 아예 없다.

간이 휴게소라고 소개되어 있는 친절한 장소도, 탁 트인 하늘아래 벤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곳이라서 도움이 안된다.

 

처마가 있어보이는 유일한 장소는 바로 옆 언덕 위의 신사. 30초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간신히 처마밑으로 피신했을때는 이미 옷 입은채로 바다에 뛰어든거나 마찬가지 꼴이 되고 말았다.

조금만 과장하면 대중목욕탕의 폭포수 기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하늘이 무너질 듯이 콸콸 쏟아진다. 비 맞은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지만 속옷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카메라 가방은 재질이 워낙 두꺼워서 방수팩 없이도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지만

몸으로 최대한 가리며 갖고 온 카메라는, 조금만 더 노출됐더라도 이번 여행 촬영은 황으로 날아가 버렸을 터.

뷰파인더 안쪽에 습기가 차서 닦이지도 않고, 자연스레 말라 없어질때까지는 거의 장님촬영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래도 뭐, 일단 처마밑에서 비 피하고 있으니 더 이상 젖을 염려는 없고

망원렌즈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의 피사체를 찾아서 두리번거린다.

 

비를 맞아가면서 하는 촬영은 참 고역이지만, 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비내리는 곳을 촬영하는 건 의외로 꽤 재미있는 일이다.

대비색이 부각되는 피사체를 찍으면 빗줄기때문에 주변 채도는 낮아지고, 몽롱한 꿈 속에서 한가지만 또렷하게 튀어오르는 느낌이랄까.

우렁찬 카메라 셔터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폭우라서, 부옇게 보이지 않는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현실감이 사라진다.

찍고 나서 화면을 보면, 방금 내가 봤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결과물이 나와주니 묘한 기분.

 

 

 

홀딱 젖어서 짜증은 나지만, 의외로 여행중에는 꽤나 긍정적이 되는 타입이다.

특히 카메라를 들고 갔을 때는, 어쨌든간에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는게 다양한 추억거리를 남겨올 수 있으니까.

뷰파인더가 너무 흐려서 사실 화면 보기전까지는 저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주황색 뭔가가 보이길래 찍어본 것.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나와는 달리, 저런 녀석들은 비가 오니 왠지 좀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살짝 김빠진 느낌이 나던 방금 전의 말 씻는 우물터도 지금은 뭔가 왁자지껄하게 파티가 열렸을 것 같아서 근질근질하다.

아무래도 이 빗속을 뚫고 다시 그쪽으로 갈 수는 없지만.

 

 

 

버스 시간에 쫓기거나, 거래처와의 약속에 늦지 않는 한에서라면

사실 비 내리는 구경도 상당히 운치있는 놀이다.

 

한 걸음만 내딛어 빗속에 뛰어들면 눈도 뜨지 못할 격류속에 휘말린 기분이겠지만

든든한 처마 밑에서 이 세상과 단절된 듯 혼자 서서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좋은 고독감을 만끽할 수 있다.

고양이가 좁은 박스를 좋아해서 어떻게든 몸을 끼워보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귀와 눈을 때리는 거대한 빗줄기를 남의 일처럼 쳐다보고 있으면

이 넓은 풍경 속에서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이 경이로운 지구의 움직임 사이의 조그마한 틈새에 끼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꼼짝도 못하게 사방이 막혀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한테만 주어진 안락한 공간이라는 안정감.

 

 

 

 

고개를 돌려보니 인공 폭포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이쯤되면 쏟아지는 비가 되려 고마운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밋밋한 여행이란 건 사실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알아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면 여행의 추억거리가 더욱 늘어나니까.

 

배멀미 때문에 거북하던 머리도, 한국인 관광객을 놔두고 혼자 버스를 타버린 죄책감도, 갑갑한 하늘때문에 흥이 바랬던 천수각도,

몽둥이같은 빗줄기로 머리 한방 맞고 나니 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여행의 흥이란 이렇게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에 의해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고, 삶이 지루해지지 않게 해 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어차피 시간은 남아도는 여행.

숙소는 아무리 늦게 가도 뭐라 할 사람 없으며, 약속 장소에서 발을 굴릴 동행인도 없다.

물론 여기서 발이 묶인다면 돌아보려 했던 몇몇 관광지를 갈 시간이 부족해질수도 있겠지.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초초한 마음으로 달리는 것은

찌든 일상생활 안에서 싫어도 얼마든지 겪을수 밖에 없다. 뭐하러 여행에서 그런 초초함을 추구해야 하나.

시간이 늦으면 안 보면 되는 것이고, 빡빡한 여행일정 계획대로 소화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곳의 사진 더 많이 올려서 블로거들한테 칭찬 한마디 더 듣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되려 이렇게 혼자만의 공간을 강제로 만들어 나를 붙잡아 둔 폭우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우산을 갖고 오지 않아서 생길 수 있었던 시간의 낭비. 그 덕분에 두 손으로 카메라를 쥘 수 있으니까.

 

 

 

아무리 미친듯이 쏟아져도 소나기는 소나기. 10분쯤 내리니 저 멀리서부터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이곳은 빗줄기가 약해지지 않았는데도, 마츠에에 도착한 후 처음 접하는 맑은 하늘.

노란 신호등처럼, 이제 곧 끝나니까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라는 배려깊은 풍경이라고 할까.

 

 

 

빗줄기는 충분히 약해졌지만, 기왕 기다리는거 완전히 그칠 때까지 그냥 서있기로 했다.

후덥지근한 날씨도 완전히 젖어버린 옷 덕분에 많이 시원해졌고, 옷은 한 시간만 걸어다녀도 다 마른다.

 

형체마저 흐트러진듯 보이던 모자상이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멈춰진 듯한 10여분의 시간이 다시 현실감을 띄고 다가오는 듯 느껴진다.

 

 

 

사진에서 생기가 도는 것은 단지 비온 후 먼지가 씻겨 내려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머리는 알아서 흔들거리고 있지만, 이제부터가 제대로 여행한번 즐겨보자는 새로운 각오가 사진에도 영향을 미치는게 아닐까 싶다.

 

비가 오지 않아서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다면 아마 오늘 하루의 대부분을 상당히 뚱한 기분으로 넘겼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엔 다들 비 맞으면서 신나했는데, 간만이긴 하지만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금 일깨울 수 있어서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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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시인지도 모르겠는데... 7시쯤 조식을 준다길래 기어가봤더니

아침이라고 간단히 드시라는 배려인지 어제 저녁보다 더 형편없는 메뉴다. 돈을 냈으니 집어먹어주는 수준.

 

9시에 하선했는데, 역시나 15시간동안 흔들렸더니 몸이 거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땅을 밟고 서도 머리가 흔들흔들 움직이는게, 오늘 하루동안 이 어지러움이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건

지난번에도 겪어봤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 몸이라는게 가끔 이렇게 엉뚱한 적응을 해버린다.

 

빠듯한 일정이니 왠종일 돌아다녀야 하겠지만, 가만히 서있어도 어질어질한 상황에서는 관광이 그리 즐겁지 않다.

무리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오늘은 대강 발가는데로 돌아다니다가 적당히 들어가서 쉬어야 할듯.

 

사키이미나토 여객터미널엔 동해항과 같이 아무것도 없고, 사카이미나토 전철역까지 가야 하는데

다행히도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중이다. 동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동해항까지는 그런 거 없었는데.

 

배멀미로 온갖 고초를 당한 내 인상이 심히 좋지 않으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좀처럼 얼굴을 펼수가 없다.

머리가 흔들리듯이 느껴지는게 아니라, 정말로 가만 서 있으면 머리만 저절로 움직인다. 누가 보면 술 취한줄 알겠네.

사카이미나토 역에 도착하니 그나마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인 미즈키 시게루 로드(水木しげるロード)가

펼쳐지고 있지만, 그쪽은 귀국날 구경할 생각이라서 카메라 꺼내지도 않았다.

지금은 일단 호텔에 가서 짐맡기기 전까지는 카메라를 꺼낼 기분이 전혀 들지 않으니.

 

단체 어르신 관광객들은 이미 알아서 버스타고 가버렸고, 젊은 자유여행 커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사카이미나토역 관광안내소에서 외국인을 위한 3일 교통권을 구입한다. 인연맺기 퍼펙트 티켓(縁結びパーフェクトチケット)이라고 하는데

이번 여행의 전초기지인 마츠에(松江) 근처의 시영, 민영버스와 전철, 공항과 항구까지 가는 버스 등등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녀석.

3천엔짜리인데, 마츠에에 숙소를 잡은 여행객이라면 거의 어떤 상황에서도 99% 이득이 되는 티켓이니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

마츠에에서 공항이나 항구까지 왕복으로 왔다갔다 하는데만 2천엔이 넘게 나오기 때문에, 뭘 타고 돌아다녀도 3천엔보단 더 쓴다.

유일하게 JR 은 사용할 수 없지만, 이곳 근처엔 JR 타고다닐 메리트 자체가 없다. 일본 본토에서 이곳으로 기차타고 찾아오는 사람들 외에는.

 

왜 제목이 인연맺기인가 하면, 마츠에시가 속한 시마네(島根)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인연맺기로 유명한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신사이기 때문.

이렇게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도, 이즈모타이샤 없이는 일본 전체의 신사가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즈모 갔을 때 다시 한번 이야기하기로 하고.

 

1년간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인구 100명도 될까말까한 시골구석도 얼마든지 지나온 터라

내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번화한 곳이라는 인상이자만, 관광 목적으로 콕 찝어서 일본을 다녀본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황량한 마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듯한 분위기의 사카이미나토 역의 모습.

조금 더 이곳의 풍경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연산작용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45L 짜리 백팩과 거대한 카메라가방을 짊어진 체로 멀미에 시달리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거의 뇌 속이 블루스크린이나 다름없다.

 

역 앞의 유일한 버스정류장에 한국 젊은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앞에 슬쩍 가서 표지판을 보니

10시 15분에 마츠에로 출발하는 버스는 이곳이 아니라 길 건너 유람선 정박장에서 출발한다는 안내가 적혀있다. 일본어로.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관광객이 마츠에로 가리라는 예측이 가능한데, 전부 여기 서 있다는건 뭔가 어색하다.

 

내가 길가에서 떨고있는 고양이에게 배풀던 온정의 천 분의 일이라도 사람을 향했다면, 그리고 머리가 저절로 춤추고 있지만 않았다면

거기 서 있던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혹시 마츠에 가는 버스 기다리고 계신가요?' 라고 물어보고

10분 뒤에 오는 버스는 여기서 타는게 아니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줬겠는데. 여기에 정차하는 다음 버스는 10시 40분이나 되어야 온다고.

 

하지만 머릿속이 마비된 때문일까, 파도에 15시간동안 시달린 분풀이를 엉뚱한 곳에 한 것일까.

무심하게도 그냥 혼자서 뚜벅뚜벅 맞은편 선착장으로 걸어간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이기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누구 한사람이라도 나한테 버스타러 가는 거냐고 물어봤다면 해결된 문제였지만

내가 말걸기 편안한 타입은 아니라는건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그건 좀 책임회피적인 생각이겠지.

 

결국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탄 한국인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전부 유람선 타고 바로 도착한 일본인 관광객들 뿐.

10시 15분의 이 버스는 이 유람선 손님들을 위해서 하루에 한 번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은근히 죄책감을 느끼면서 한적하기 짝이없는, 하지만 정비 하나는 제대로 되어있는 시골길을 달려 마츠에로 향한다.

 

마츠에시가 시마네 현에서는 큰 도시이긴 하지만 한국의 도시라는 개념에 비추어보면 꽤나 소박한 곳이다.

이건 이런 분위기의 일본 도시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하늘 위가 썰렁할 정도로, 높은 건물도 없고 그냥 나즈막한 빌딩들과 무채색 계열의 차분한 색깔로 이루어진 이 곳은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조그만 도시와 비슷하다고 쉽게 말하기엔 다른 점이 많다.

 

사실 일본과 한국의 지역개발에서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이런 소규모 도시나 마을의 개발상황인데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한국의 시골 농촌처럼 기본적인 공공시설이 극히 부족하거나, 기반시설이 없다시피 한 그런 느낌은 아니다.

인구 3백명쯤 되는 농촌마을에도 24시간 편의점은 늘어서 있고, 비포장도로는 커녕 시멘트 도로도 거의 없이 전부 제대로 된 아스팔트 도로.

허름해 보이는 시골 주택도 조그만 앞마당에 닛산 큐브쯤 되는 자동차가 들어서 있고, 가끔은 미니 이마트같은 종합 슈퍼도 들어서 있다.

물론 이것은 지역민심을 잡아서 표를 얻기위한 의원들의 무리한 예산집행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고,

덕분에 시골치고는 너무나 잘 정비된 공공시설들 덕분에 정작 지자체 예산은 빵꾸가 나서 파산위기에 놓인 마을도 많다.

이유가 어쨌든, 비슷한 분위기가 많은 한국과 일본에서 진정한 다름을 느끼려면, 관광지가 아닌 진짜 시골에 가 보면 된다.

 

일본에서 좀 편하게 놀고 싶을때 항상 애용하는 비즈니스호텔 토요코 인(東横INN)에 짐 풀어놓고 밖으로 나온다.

사실 한국의 러브호텔과 비교해도 별로 비싸지 않은, 제대로 된 호텔치고는 상당히 저렴한 곳이지만 나한테는 굉장한 사치.

거대 체인호텔이다 보니, 반드시라고 할 만큼 역 주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서 도움이 된다.

비즈니스 호텔의 특성상 싱글룸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좋기도 하고.

 

카메라 가방을 제외한 백팩을 프론트에 보관하려고 가방을 벗을 때도 어지러워서 뒤로 넘어질 뻔할 정도로

여전히 멀미에 시달리고 있어서 기분은 엉망이었지만, 어쨌든 귀중한 하루를 그냥 보낼수는 없으니 다시 3분쯤 걸어서 마츠에 역으로 이동.

 

다행히 목표로 했던 레이크라인 버스가 정류장에 서 있어서 바로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오기가 발동해 버린 것이...

어질어질한 상황에서도 좌석에 앉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려고 맨 뒷쪽 좌석이 없는 곳에 서서 이동해 버린다.

관광용 버스라서 뒤쪽에는 짐 놓을 수 있는 공간과 함께, 시원한 창문 너머로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걸 포기하는게 지금 이 상황에서도 아까웠던 것. 드디어 처음으로 카메라를 꺼내서 버스의 내부를 한 장 담아본다.

아마 사카이미나토 역 앞에서 사진 한 장도 찍지 않고 여기와서 카메라 꺼내는 한국인 관광객은 나밖에 없었을 듯.

 

 

 

이 레이크라인 버스는 관광용으로 특화된 녀석으로, 약 50분간 마츠에 시내의 관광장소라 할 만한 곳을 전부 도는 코스를 취한다.

하지만 이 마츠에 시가 관광객으로 붐비는 그런 도시도 아니기 때문에, 이 버스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계속 순환하는게 특징.

그래서 코스를 거꾸로 가려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일본어가 안되는 관광객들은 이 버스 말고 일반 시영버스 타려니 말이 안통해서 겁도 날것이고.

 

복고풍 풀풀 풍기는 버스 내외부는, 한번쯤 타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 된다.

이 버스의 운전기사분들은 전원이 여성이라는 점도 독특하다. 가이드 역할을 한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머리 잘 쓴 느낌.

50분이라는 이동거리도 사실은 여기저기 빙글빙글 돌면서 관광지 냄새만 나는 곳은 전부 다 정차하기 때문이고

실제 마츠에 시내를 한바퀴 빙글 도는것은 자전거로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인구 30만의 도시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시마네현의 총 인구가 70만, 마츠에 시가 30만이라는 점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시골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참고로 본인이 서식하는 대구시 인구가 약 260만명, 일본의 도시중에서는 적당히 작은편에 들어가는 히로시마시 인구가 120만명이다.

레이크라인 버스가 이동하는 도로 상당부분은 아예 중앙선조차 그려져 있지 않는 곳이 많을 정도.

이 버스 최고시속이 30~40km를 넘지 않기 때문에, 맞은편 차들은 그냥 알아서 슬쩍슬쩍 정지하거나 비켜간다. 느긋한 도시의 특권.

 

기반시설이 제대로 잡힌 소규모 도시에서 30km 로 느긋하게 달리는 버스를 타는 경험은 사실 그것만으로도 일종의 관광인 셈이다.

외국인 관광객들 중에서는 한국인이 압도적인 도시라서, 이 버스도 그렇고 관광지 근처엔 전부 한국어 안내가 적혀있다.

독도문제로 이미 한국인에겐 익숙한 그 시마네 현에서 말이지. 사실 이곳은 한국인 관광객 없으면 재정에 큰 문제가 생기는 곳이다.

일본 주요 도심에서 워낙 떨어진 곳이고, 도쿄에서 신칸센타고 6시간 넘게 달려야 올 수 있는 곳이니 말 다했지.

해외와 루트가 직행으로 이어진 곳은 한국의 인천공항과 동해항 페리터미널 단 두곳밖에 없다. 더 설명이 필요할까.

 

시마네 현에서 독도를 잡고 늘어지는 건 기탄없이 말해서 보수정권한테 예산좀 달라는 땡깡이지, 독도 영유권에는 관심도 없다.

한국인으로서 기분나쁜건 당연하겠지만, 정작 타케시마 돌려달라고 고함치는 애들은 딴 지역에서 온 녀석들이고

실제 50년을 넘게 산 거주민들의 대부분은 타케시마가 어디 있는 섬인지 지금도 모른다. 요 몇년 사이 처음 들어본 섬이라고.

지금 독도가지고 찌질거리는 녀석들의 대부분은 도쿄에 살고있는 정신줄 놓은 극우파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시마네 현은 이름만 빌려주고 한국인들한테 굉장한 미움을 받는 셈이다. 그렇다고 예산이 더 책정된 적도 없다.

 

 

 

15분쯤 달리니 마츠에 제일의 관광지 마츠에 성앞에 도착한다. 일단 오늘은 이 주변을 둘러보기로.

동해항을 떠날 때 보다는 날씨가 나아졌지만 여전히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덥기는 또 상당히 후덥지근하다.

현재 온도는 32도에 습도가 70%를 넘는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상황. 차라리 하늘이라도 쨍했으면 하는데.

 

레이크라인 버스는 1일 무한이용권이 500엔인데, 퍼펙트 티켓을 보여주면 그 500엔짜리 이용권을 3장 준다.

다음부터는 그걸 하루에 한장씩 이용하면 되는 셈. 물론 다른 시영버스, 전철도 계속 무료로 이용가능하다.

이 500엔짜리 1일이용권은 사용하고싶은 날짜에 스크래치를 해서 사용하는데, 그 덕에 남겨놓으면 내년에도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이곳을 여러번 찾는 외국 관광객이 얼마나 되겠느냐만은. 참고로 본인은 쓸일이 없어서 하루치 남겨왔다.

 

이곳 마츠에는 관광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라서 어지간한 곳도 꽤나 한적한 편이다.

1년에 단 한번 꽤나 붐비는 시즌이 있긴 한데, 그건 후술하기로 하고.

 

성 앞으로 걸어가다보면 '마츠에성을 국보로' 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시민들의 마음이야 백분 이해하지만,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여러가지로 난감하다. 정말 알쏭달쏭한 가치를 가진 성이라서.

 

현재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그 정도 자격은 충분하고도 남는 성이지만 과연 국보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없을까는...

왜냐하면 아담한 천수각 하나만큼은 1611년 지어진 후 한 번도 분해, 해체, 파괴를 겪지 않은 살아있는 유산인데

그 외의 현존하는 모든 건축물은 근대 들어와서야 지어놓은 녀석이고, 예전의 모습은 그냥 유적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천수각이 너무 아담한 것도 조금 걸린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히메지(姫路)성이나 까마귀 성이라 불리는 마츠모토(松本)성의 천수각은 솔직히 차원이 좀 다르기 때문에. 둘다 국보 지정.

 

사진에서 보이는 것들도 모두 역사적인 가치는 없는 건축물들이다. 유일하게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하는 저 해자만큼은 인상적이지만.

마츠에의 별명이 '물의 도시'인 만큼, 마츠에 전역을 관통하는 호리카와(堀川)강의 물길을 그대로 해자로 만들어 버린 것.

 

계속 언급하듯 시마네 현과 돗도리 현을 포함하는 산인(山陰) 지역은, 한 번도 일본 역사의 무대에서 중심을 맡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일본의 성 치고는 희한할 정도로 침략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현존하는 오리지날 천수각 12개 중에서도 가장 건축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 이 마츠에 성.

 

 

 

성을 올라가기 전에 보이는 정방형의 공터. 이것은 우마다마리(馬溜)라고 하는데, '말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총탄이 들어가있는 약실, 발사 직전 정자들을 보관하는 고환의 역할을 하는 곳.

전쟁중 출병 직전의 병사와 말을 전열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지역이다. 우물도 있어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듯.

 

물론 지금 남은건 지도를 고려해서 만들어놓은 옛 공터뿐이고, 다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실제로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진 적은 손에 꼽을 정도긴 하지만.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성 주변의 조경은 참 멋들어진다.

현재 마츠에성은 주변이 산책로, 공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매력을 제외하고서라도 느긋하게 즐기기엔 안성맞춤인 곳.

국보로 지정되면 예산도 상당히 불어나기 때문에 이곳을 가꾸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일본 정부가 지금 아사직전이니 과연 어떨런지.

 

구름이 많아서 서늘한것 같지만 정말 더웠다. 의자에 걸터앉아 쉬면서 땀을 닦는데도 계속 자동 헤드뱅잉이 되는 바람에 난감.

 

 

 

근래들어 다시 세워진 녀석들이긴 하지만 일단 에도시대 건축 양식에는 정확하게 부함한다.

일본의 성은 다이묘들의 최후방어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거주보다는 철저하게 수성(守城)에 목적이 맞춰져 있다.

건너오기 힘들게 만든 해자, 깎아지를듯한 성벽, 활과 총을 사용하기 위한 좁은 창문, 성벽으로 끓는 기름을 흘려내릴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멍 등등.

 

물이 풍족한 마츠에라서 특이하게 천수각 안에 우물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수성전에서는 꽤나 효과적인 성이라 할 수 있다.

여러번 말하지만, 애초에 침략받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는게 아이러니.

 

 

 

조금 올라가니 흥운각(興雲閣)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양식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 내부에 왠 서양식 건물인가 싶어서 흥미가 동했는데, 특이하게 이 건축물의 설명에는 한글이 적혀있지 않다.

 

다행히도 읽을 정도는 되니까 읽어봣는데, 1903년 메이지 천황이 이곳을 방문한다는 말에 영접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는 듯.

산인지역에 천황이 방문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일이었던 시절의 흔적인가보다.

허무하게도 그 직후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천황의 방문은 취소되었고

4년뒤에 천황 아들내미가 방문했을 때 영빈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러일전쟁 직전에 지어진 이 영빈관은 사실 러시아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지금은 새로 역사박물관을 다른 곳에 개장중이라서 이곳은 잠시 폐쇄중이라고 한다.

한번쯤 들어가보고 싶기는 했지만, 못들어간다고 그렇게 아쉬울것도 없는 곳이라서 사진 한방 남기고 돌아선다.

 

 

 

무더운 날씨에 죽치고 앉아서 휴식하기 딱 좋은 공간이 보인다.

나무그늘에 철저하게 둘러쌓여 있어서 충분히 서늘한,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가 꽤나 인상적.

종족 특성이기도 한데,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에 가도 정작 눈길이 가는 것은 이런 녀석들이다.

 

그늘이라고 다 같은 그늘이 아닌 것. 살아있는 나무와 그 잎사귀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콘크리트 지붕밑 그늘과는 향기가 다르다.

거기다 밑바닥은 흙으로, 의자는 나무로 되어있으니 이것보다 더 훌륭한 중간휴식처가 있을까.

관광객이 적어서 이런 곳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자꾸 덜 유명한 곳을 찾아가려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려나.

 

앉아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닌자 복장을 한 아저씨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 일본인 여성관광객 두명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안내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던데.

아마도 저렇게 닌자 복장 하고 성 안내 가이드를 하는 사람인 듯 하다. 더운날 입까지 가리는 두건을 쓰고 고생하신다.

이야기 좀 걸어볼까 싶었지만, 소심하기로는 일본인 못지 않은 성격에, 더운데 괜히 붙잡고 귀찮게 하고싶지도 않아서 패스.

 

 

언덕을 오르면 바로 마츠에성 천수각의 모습이 보인다.

천수각 안으로 들어가려면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야 하지만, 들어갈 생각이 없다.

국보급 천수각에는 여러번 들어가 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 몸상태가 저기 들어갈만한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천수각은 계단이 매우 가파르고 통로가 좁게 설계되어 있다.

흔들거리는 머리통으로 거기 올라가려면 고생 좀 하리라는 예상이 쉽게 가능하다.

당연하지만 에어콘같은거 없기 떄문에 더욱 고역이기도 하고.

 

더더욱 큰 문제는, 천수각에 돌아가서 내려다보면 마츠에 시의 전경이, 지금같은 하늘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

날씨가 화창했으면 머리통 붙잡고 올라갈을 것이다. 특히 이곳 마츠에 시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매우 관대해서

여권만 보여주면 거의 대부분의 관광지 입장료를 절반으로 깎아주는 장점이 있다. 어디든 들어가서 보기만 하면 이득이라는 결론.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입장료 내고 들어갈만한 매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일본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충만한 천수각이지만 역시 너무 아담하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

그만큼 평온한 지역이었다는 반증이니 나쁘게 볼 건 아니지만, 왠지 그림으로서 살짝 부족한 느낌이 드는 점은 어쩔 수 없다.

 

 

 

살짝 비교해보는 의미로, 지난 자전거 여행때 찍은 국보 마츠모토성의 천수각 사진을 첨부해 본다.

감상은 각자 알아서들.

 

 

 

들어갈 생각은 아예 접고 외부 모습만 느긋하게 감상한다.

여러 각도에서 찍고 싶었는데, 내 위치에서 오른쪽 모습은 공사중이라서 들어갈 수가 없다.

구름때문에 크게 의미가 없긴 하지만, 해의 위치를 생각하면 오른쪽에서 찍는 사진이 좀 잘 나올것 같은데 살짝 아쉬웠다.

 

1611년 건축 이후 한 번도 해체되거나 손상된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존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양호하다.

매번 '이게 근래들어 다시 만든건지 옛날 모습 그대로인지' 헷갈렸던 건축물들이 많은 일본이었는데

명확하게 옛날 건축물임에 틀림없는 마츠에성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한가지 결론이 나온다.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워진 여러 성들도, 정말 징할 정도로 옛모습 복원을 잘 해놨구나 하는 것.

 

일본의 문화재 관련 예산은, 한국의 예산과 비교하는게 솔직히 부끄러울 정도.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중앙정부에서 따로 예산편성과 관리를 맡기 때문에

국민은 부유하지만 정부는 가난뱅이인 일본의 현실을 따져보면,

아마 한국에서 비슷한 비율의 예산을 배정한다면 '먹고살기도 힘든데 이딴데 돈을 퍼붓냐'고 난리법석이 될 듯 하다.

일본은 알아서들 입장료 내고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보다 좀 숨통이 트인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역사에 대한 국민의식이란게 결코 과거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일본도 역사의식이란거, 쓸데없는 자긍심만 남아서 마약빤듯한 애매함에 도취된 사람들이 많긴 한데

내 입장에서는, 한국도 이번 연말 선거결과에 따라서 일본 욕을 할 수 있는 처지인가 아닌가가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한국 국민들의 역사관이란 저기 북쪽 거지독재국가와 다를게 뭐 있나 싶기도 하고.

만약 그게 현실로 확정되는 날이 온다면, 난 더이상 일본의 어거지 역사관 욕 못한다. 부끄러워서 못한다.

 

 

 

히메지 성같은 매우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본의 성은 대부분 옻칠을 한 목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게 또 대낮에 사진 찍을때는 꽤나 난감한 사항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번처럼 구름이 잔뜩 낀 날이라서, RAW 파일로 촬영후 극단적으로 명부와 암부의 차이를 줄인 덕에

하이라이트나 섀도우를 전부 없애는데 성공했지만, 쨍쩅한 날이라면 정말 얄짤없다.

고전적인 방법이라면 브라케팅을 이용한 HDR 기법으로 양쪽 모두를 살려야겠지만

삼각대도 없이 브라케팅을 사용할 수는 없고, 그냥 RAW 파일의 풍부한 데이터를 살린 간이 HDR 이라도 써먹을 수 밖에.

 

이거 JPG 원본은 완전 새까맣고 완전 새하얀 녀석이다.

 

 

 

까마귀 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츠모토성도 꽤나 시커멓긴 했지만

마츠에성도 못지 않게 옻칠을 한 모습. 사실 같은 별명을 가져도 무리없어 보인다.

 

일본 최고의 방어력을 가진 오사카성이 정말 허무하게 공략당하면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역사에 비해

사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어보이는 이 한적한 성이 건축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를 만드는 사람의 힘이란 건 어찌보면 장난으로 던진 돌맹이에 맞아죽는 개구리의 그것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다.

 

 

 

극단적인 명암차를 보정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사진이 부드러워지다보니

옻칠투성이인 수성전용 성의 이미지가 너무 곱게 나오는 것 같아서

그냥 고전적인 방식을 한번 선택해 본다.

 

여행중 사진은 최대한 그날의 인상 그대로를 남기는 쪽으로 보정을 하는 편이라서

꾸물꾸물한 하늘을 생각하면 위의 사진들이 그때 본 모습과 제일 비슷하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사진이란게 권력을 가진 창조와도 같은 녀석이라서, 좀 더 힘있게 선을 넣어보는것도 일종의 여흥이라고 보면 될 듯.

 

 

 

산책하기엔 참 좋은 마츠에성과 그 주변이지만, 쩍쩍 달라붙는 날씨와 흔들리는 머리통 때문에 흥이 오르질 않는다.

15분 정도 성 주위를 둘러보며 일기장을 갖고 오지 않은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열심히 머릿속에 저장한 후 발걸음을 옮긴다.

국내 여행때는 종종 그러지만, 해외 여행때 일기 쓰지 않고 돌아와서 포스팅 하는건 희귀한 일이라서

눈에 보이는 사물만큼이나 머릿속의 감상을 정리하는데 신경을 더 쓰게 된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리가 더욱 골치아픈데.

 

왔던 길과 반대로 난 산책로를 걸어가면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이 나오는가보다.

쇼핑을 목적으로 마츠에에 오는 사람은 바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니

그 외의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빼놓기 아쉬운 곳.

어차피 마츠에 시내 관광명소는 극히 한정되어 있으니 약간의 의무감이란 것도 작용하고, 천천히 경치 둘러보면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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