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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토코'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11.05  2월 15일 오비히로 - 한 잔 한 개피 그리고 증기 6
  2. 2014.10.23  2월 14일 시레토코 - 만찬 10
  3. 2014.10.21  2월 14일 시레토코 - 뒤돌아 볼 수밖에 없는 6
  4. 2014.10.17  2월 14일 시레토코 - 멀었던 두 시간의 결합 2
  5. 2014.10.15  2월 14일 시레토코 - 비경으로 향하는 길 4
  6. 2014.10.13  2월 13일 시레토코 - 호텔 구경과 오로라 판타지 4

 

매일 아침 일어나서 몸을 떨며 보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이 호텔의 전망 좋은 객실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쪽이지만

저 언덕에 추억을 가지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이 풍경이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아마 살아가는 동안 이 풍경은 몇 번이고 더 보게 될 듯.

 

아침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쾌청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 하늘이 유지될런지.

오늘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평야지대인 토카치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비히로(帯広)까지 이동한다.

렌터카가 없는 본인으로서는 나갈 때나 들어갈 때나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갈아타야하는 시레토코라는 곳이 가장 이동하기 귀찮은 곳이지만

어제의 황홀한 경험만으로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어서 부담이 없다.

 

단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도착 하기만 하면 오케이였던 때와 달리

아침에 나가는 버스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출발일이라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새벽에 일어나 후다닥 조식을 챙기러 간다.

 

이곳에서 기차가 움직이는 샤리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90분 혹은 2시간에 한 대씩밖에 운행하지 않기도 하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버스의 운행시간과 샤리역의 열차 운행시간이 연계되도록 조절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계획대로의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이동 시간이 연쇄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어마어마한 손실이 생긴다.

첫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 오비히로에 도착하는 시간이 최대 3시간 넘게 차이날 수도 있어서

아무리 피곤한 몸이라도 날렵하게 움직여 짐을 싸고 나가야 한다. 체크아웃 시간이 널널한 관광호텔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쉽긴 하다.

 

 

 

로비에서 샤리로 가는 버스를 어디에서 타는지 물어보니 손으로 그려서 인쇄한 지도까지 건네주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거리는 눈길을 느긋하게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편이라 30분 일찍 나온 본인으로서는 안도감이 든다.

샤리행 버스와 열차는 시간 연계가 철저하니까 한번 버스에 타기만 하면 일사천리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도 건네 줘서 든든하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나와보니 조그만 마을 안에서도 담을거리는 눈만큼이나 쌓여있다.

원래 어디까지가 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행자를 위해 깔끔하게 눈을 치워 놓았는데

반듯하게 잘 닦아놓은 길 옆으로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마치 처음부터 이런 모양의 길인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단 아스팔트 길이고 삿포로처럼 도로 밑에 열선이 깔려있지 않기 때문에 미끄러움 주의는 어제의 오호보다 더 신경써야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 일찍 도착해 편안한 마음으로 대기중인 버스에 앉아 있으니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이 올라탄다.

어제 함께 오호를 거닐었던 사카이 씨와 눈이 맞자 양측 모두 순간 어리둥절 하다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사카이 씨는 어제 바로 삿포로로 돌아간다고 한 것 같은데 여기서 만나게 되니 더욱 놀랍기도 했고.

피곤해서 그냥 푹 쉰 다음 오늘은 쿠시로(釧路) 습지 부근의 온천 마을에 들렀다가 삿포로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오비히로행 역시 쿠시로 습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이동 거리의 절반 정도는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홀로 여행을 좋아하긴 해도 이렇게 만들어진 인연은 언제나 대환영이기 때문에 즐겁게 동승한다.

어제까지는 오호 투어에 너무 정신을 뺐겨서 동행하던 사람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나니 비로소 사카이 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조금 더 빨리 기억에서 잊혀졌을 듯.

 

샤리 역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꽤나 많이 모여있다. 겨울 비수기라고 해도 여전히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이곳 지역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으니까.

10분쯤 뒤에 열차가 도착하는데 사카이 씨가 이제 막 문을 열고 있는 역내 매점에 들어가 맥주 없냐고 물어본다.

가게 주인이 턱하니 거대한 금속 드럼통을 꺼내더니 시원하게 생맥주 한 잔을 뽑아준다. 뭔가 신기한 볼거리로 느껴진다.

 

나도 한잔 하겠냐고 해서 이런 기회니 고개를 끄덕였는데, 당연히 본인 분의 맥주값을 내려고 하다가 저지당했다.

일본에 왔으니 손님 대접을 해야 한다며 사카이 씨가 웃는다. 일본인들이 더치페이에 철저하다는 일반 상식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좀 신선할 듯.

본인은 시골을 많이 달리다 보니 이미 이런 호의에는 나름 익숙해져 있기는 하다. 사실 도심을 벗어나면 일본 쪽이 이방인을 훨씬 더 챙겨주는 편이다.

 

 

 

굳이 삿포로가 아니라도 일단 홋카이도의 생맥주 레벨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수준.

물 맑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렇기도 하고, 일본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끄트머리 기차역 매점에서 파는 생맥주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아침부터 쌓인 눈을 바라보며 생맥주 한 잔이라는 매우 드문 경험을 즐기며 기차에 오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조금 늦게 올라섰다면 앉을 자리도 없었는데, 다행히도 사카이 씨와 둘이 앉을 자리는 확보했다.

맥주를 손에 들고 기차에 타서 홀짝홀짝 마시는 경험은 처음이라 나름 신선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문득 건너편 창가에 훌륭한 풍경이 흘러가고 있다.

당연히 건너편에도 중국인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였다면 소심함을 한껏 발휘해서 카메라엔 손도 대지 않았겠지만

사카이 씨가 망설임없이 카메라를 꺼내 건너 풍경을 담기 시작하니 본인도 슬며시 카메라를 꺼낼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을 피해 풍경을 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 장 찍고나니 용기를 낸 보람은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도쿄에서 시레토코까지의 거리는 거진 서울에서 도쿄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이런 여행 패턴을 가진 사람은 나처럼 음울한 사람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플러스적인 성향이 강해서 옆에 있으면 도움을 많이 받는 느낌이다.

 

 

 

경험이 풍부한 사카이 씨다 보니 이것저것 알고 있는것도 많다.

어느 정도 달리다가 사카이 씨가 차장석 쪽으로 가자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찍을거리가 많다고.

짐을 자리에 놔 두고 이동한다는 게 살짝 부담되기도 하지만 일단 사카이 씨에게 이끌려 카메라만 들고 운전석 쪽으로 이동.

 

이런 스팟은 이미 유명한지 좁은 차장실 내부엔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워낙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나 보다.

덜컹거리는 원맨 열차 앞쪽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니 철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열차를 운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실감된다.

 

 

 

이쪽 홋카이도에서는 꽤나 드문 터널을 지나는 노선이라서 더욱 유명한가보다. 그리고 어쩐지 이런 터널은 겨울과 어울린다. 카와바타의 영향일까.

사람들이 많아서 몸을 지지할 만한 공간이 없고 화각상 망원렌즈를 사용해야 해서 셔터 누르기가 힘들지만 셔터스피드를 높이고 손떨림 방지를 최대한 이용해 몇 장을 담아본다.

열차에는 이제껏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차장실 쪽 풍경을 담아본 적이 없는데

도심과 달리 이런 대자연의 품 속을 달리는 열차의 풍경은 상당한 흥미를 동하게 만든다.

여러가지로 정보가 풍부한 사카이 씨 덕에 모르고 지나갈 뻔 했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 고마울 따름.

 

 

 

월급은 적고 고된 홋카이도 철도원의 생활이지만

매일 이런 풍경을 스쳐지나가며 열차를 조작하는 직업도 분명 급여 이외의 매력이 존재할 법 하다.

지하철 같은 곳에서 열차 몰아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특히나 일본에서 가장 노후된 시설과 열차를 가지고 있는 홋카이도 철도는

디지털 기기에서 느끼기 힘든 육중함과 애상적인 매력이 남아있어서 철도 매니아들에게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사카이 씨는 딱히 철도 매니아가 아니지만 이 곳을 지나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매력에 눈을 뜨게 된 듯 하다.

 

어느 정도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는데, 사카이 씨가 조금 뒤에 또 볼거리가 하나 있다고 기대감을 주입해 준다.

아침 맥주는 태어나서 처음이라 원맨 열차의 흔들림이 묘하게 느껴지지만 아직은 괜찮은 듯.

일단 헤어지기 전까진 사카이 씨가 모든 볼거리를 다 제공해 줄 것 같아서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정도 달리니 사카이 씨가 이제 앞으로 가자고 다시 일어난다.

여전히 정보에 빠삭한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산 아래로 기차가 돌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참 기묘하게 생긴 산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육중한 근육질 몸매 밑으로 달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예술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많은 홋카이도라 이런 철로를 개설할 때 참 고생 많이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언급했듯이 교도소에서 많은 인원이 이곳 노동에 투입되었는데, 시체도 못 찾고 사라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혼자였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장관을 소개해 준 사카이 씨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한다.

 

 

 

시레토코에서 오비히로까지는 꽤나 긴 여정이다.

 

직선거리상으로는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간의 1.5배 정도 되지만 철도는 홋카이도 섬의 외곽을 주욱 돌아가기 때문에

거리에 비해 이동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어림잡아 6시간 정도. 그리고 노후된 철로 사정때문에 정차해야 할 경우도 많다.

 

열차 자체는 홋카이도 남동부의 도시 쿠시로(釧路)에서 한 번 갈아타면 되지만 그 전에는 두 번 정도 정차를 한다.

이는 시골 철로가 단선 운행을 하기 때문에 마주보고 오는 열차를 미리 보내는 등의 방법을 써야 하기 때문.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의외로 여기저기서 승하차 하는 승객들로 분주하다. 홋카이도에도 온천이 많아서 겨울 여행객들이 유지되나보다.

15분 정도 정차를 하게 되어 사카이 씨와 함께 밖으로 나와 공기를 마신다. 담배를 꺼내 들고 피냐고 물어봐서 어쩔까 하다가 한 대 받아든다.

사카이 씨는 나보고 담배 피는 줄 몰랐다며 놀란다. 어제 하루종일 오호를 돌아다니면서도 담배 피고싶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러고보니 사카이 씨는 어제 오호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피웠던가.

본인은 여행 중 이런 식으로 권유받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담배를 피지 않으니 헷갈릴만도 하다.

 

홋카이도에도 화산이 많고 그러기에 온천도 많은데 이 부근은 특히 그런 곳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곳으로, 조금 더 한적한 곳에 가면 텅 빈 논밭처럼 넓은 평야가 있는데

그곳에서 삽을 들고 무릎 위쪽 정도까지 흙을 파내려가면 온천이 졸졸 솟아나오는 신기한 장소가 있다.

 

 

 

어차피 오비히로까지만 가면 오늘 일정은 잡아놓은 게 없기 때문에 이런 느긋함도 좋구나 싶다.

사카이 씨는 또 다시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여기서 10분 쯤만 더 기다리면 좋은 볼거리가 있다고.

 

사실은 이 열차가 정차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맞은편에서 기차가 놀랍게도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라는 것이다.

원래는 전부 폐기하기로 했지만 한 대만을 관광용으로 개조해 이 부근을 어슬렁거리게 하고 있다고.

일본 본토쪽에는 아직 몇 대인가 운행하는 녀석이 있지만 홋카이도에서는 이곳의 증기기관차가 유일하다.

 

타이밍을 일부러 잡은 것도 아닌데 그 녀석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물론 사카이 씨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냥 정차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놓쳐버렸을 수도 있었을 듯.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육교 위로 올라간다. 아무래도 멀리서 오는 기차를 찍으려면 높은 데가 좋을 듯 하니.

낡은 합판을 이어붙여 만든 옛날 육교인데 또 친절하게 유리창은 전부 달아놓았다.

얼어붙어 있으면 열기가 힘들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별 무리없이 열려서 장비를 갖추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은 정보를 잘 모르는 것인지, 그냥 많이 봐서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기차를 보러 나오지 않아서 사카이 씨와 둘이서만 육교 위에 올라와 있다. 왠지 이득 본 기분이기도 하다.

연습삼아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원맨 열차를 담아본다.

이런 필름틱한 색상 왜곡은 앞으로 달려 올 증기기관차에게 적용해야 하지만 이것도 나름.

 

 

 

열악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든 단선 철도지만 덕분에 이런 즐거움이 생기기도 한다.

멀리서 다가오는 증기기관차의 첫 인상은 그다지 우람하거나 은하철도의 느낌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굴뚝에서 연기가 퍽퍽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니 역시 실제 경험해 본 적 없는 친근함을 느낀다.

 

기차 하면 칙칙폭폭이 뇌리에 박혀있기도 하고, 워낙 미디어에서 폼 잡을 때 잘 나오는 녀석이라

실물로 달리는 모습을 보니 뭐가 현실적인지 언뜻 구별이 잘 가지 않는 느낌도 든다.

어찌 보면 이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관광열차라서 좌석이 전부 양쪽 창문을 향해 있고 운행 속도가 느린 녀석인데다 요금도 결코 싼 편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승강장에서는 이곳에서 탑승 후 다시 반대편으로 출발하기 위한 관광객들이 많이 서 있고

개중에는 열차 안 승객들에게 즐겁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인사는 역시 전동 기관차보다 이런 녀석이 더 어울리긴 한다.

 

창문으로 나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이런 설경을 즐기며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을 먹는다거나.

실제로 이 기차 안에는 중간에 난로가 있어서 위에서 밤을 구워먹을수도 있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관광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것에 큰 매력을 느낄 만한 나이는 아닌가 싶다.

뭔가 우수에 젖어볼 만한 시간도 없이 사카이 씨와 함께 서둘러 내려간다.

이 기차가 홈에 도착하면 다시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출발하니까.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눈에 새겨놓는게 여러모로 이득인 시레토코의 모습.

슬슬 구름이 다시 라우스산을 가리기 시작해서, 내려가는 중간중간 몇 번이고 카메라를 꺼내 희미한 흔적을 담아본다.

한동안 보이지 않을 듯 했던 정상이 구름 사이로 살짝 솟아있는 모습 또한 온전한 모습과 다른 매력을 뽐낸다.

 

옷을 두 겹이나 입긴 했어도 속이 질퍽거릴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린데다가

태양이 낮아짐과 더불어 체감 온도도 확연히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피로가 빠른 속도로 몰려온다.

오전 10시쯤 볼일을 봤던 방광은 거의 터질 듯 하고, 아침에 든든하게 차 있었던 위장은 빨리 뭐라도 집어넣어 달라고 아우성 중.

 

하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가능한 한 이 곳의 풍경을 많이 봐 두고 싶은 마음 뿐이다.

 

 

 

호수와는 달리 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조그만 하천은 여전히 얼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사람의 흔적으로 보이는 눈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저 곳을 거니는 팀도 있었던 듯 하다.

용캐도 저곳까지 내려갔구나 싶었는데 그 순간 조금 힘을 써서 내려갈 만한 샛길의 흔적이 보이자

동행하던 일행분이 나보고 같이 내려가 보자고 한다. 강가에서 보는 라우스산 쪽의 풍경이 멋질 것 같다며.

 

걷는 스키를 타고 내려갈 만한 곳은 아니라 조금 망설이긴 했다. 통풍의 후유증으로 엄지발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한번 스키를 벗으면 다시 신기가 꽤나 괴로웠기 때문에. 하지만 역시 저 밑에서 나를 유혹하는 설경의 힘에는 이길 수 없다.

 

 

 

운도 좋게 고생해서 내려간 하천 아래에서는 또 다시 타이밍 좋게 라우스산이 구름 너머로 보인다.

그것도 정상 부분만 또렷하고 밑에 은은하게 구름이 깔린 모습은 나를 찍어달라고 어필하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파도마저도 얼어붙어 모든 것이 정지된 것 처럼 조용하던 오호 주변과 달리 힘차게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와 가까워지니

왠지 라우스산 너머는 그림처럼 현실감이 사라지고 일행들은 그 그림 속에서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내가 고생해서 내려오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같이 내려가자고 권유한 일행 분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배려심을 포함하는 표정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괜히 일행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듯.

아마 사하라 사막 때도 그런 습관 때문에 멤버들 괜히 속썩인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혹독한 겨울이라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에 이 곳의 생명들이 이어지는 듯 하다.

여름이라면 불규칙성을 한껏 빛내고 있을 바위조각들이 눈으로 부드럽게 뒤덮혀 버려 꽤나 귀여운 모습으로 변신중이다.

 

고생해서 이 쪽으로 먼저 내려왔던 이름모를 팀이 이해가 가는 풍경.

 

 

 

내려갈 때는 거의 눈에 의지하다시피 해서 깨닫지 못했지만

올라갈 때 아무래도 발이 너무 깊게 파인다 싶어 고생을 좀 했다.

 

이곳저곳을 밟다 보니 그 면모가 드러나는데, 사실 우리가 이동했던 곳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고

운 좋게도 옆으로 누운 굵은 나무 밑둥을 밟았기 때문에 깊이가 얕다고 생각했던 것.

 

저 밑둥을 밟지 않으면 허벅지 위까지 쑥쑥 빠져버리기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여름이라면 아마 허공에 발을 딛고 허우적대는 광경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투시 능력이라도 있으면 눈 속에 파묻힌 지형을 한번 들여다 볼 수 있을텐데.

쌓인 눈만으로 없던 길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위험하면서도 신비롭다.

 

 

 

차를 타고 장비를 벗으니 등산 후 느끼는 이질감이 살아난다.

걸어다닐때는 익숙하지만 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몸 속에 대기중이던 찝찝함이 폭발하는 기분.

빨리 돌아가서 옷을 던져 벗어버리고 샤워를 해야겠다는 욕망이 솟아난다.

 

하지만 가이드분은 또 이 장면을 놓치기가 힘들다며 이미 몇 대의 차량이 멈춰 있는 언덕쪽에 주차를 한다.

우토로 마을에서 오호 쪽으로 가는 길은 언덕이라도 수풀이 빡빡한 편이라

이렇게 주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스팟은 딱 한군데밖에 없다.

 

자전거 여행때도 온갖 악을 쓰며 간신히 올라가다가 페달을 멈추고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었던 그 곳이다.

산맥 끝자락과 바다 사이에 소심한 듯 이루어진 우토로의 모습을 굽이돌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장소.

막 해가 지려는 시간이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삼각대에 거대한 카메라를 장착한 후 셔터를 누르고 있다.

저 멀리 바다 근처에는 유빙 체험을 즐기는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자전거로 언덕을 넘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어주던 호텔 직원분의 미소가 잊혀지지 않던 여름의 사진.

분명 같은 장소지만 식상해 질 일은 전혀 없는 풍경들이라 감회가 새롭다.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강렬한 생명력을 자랑하던 여름의 시레토코가

바다마저 얼어붙어 조용히 숨 죽이고 있는 겨울의 모습으로 변하는 데 6개월이라는 찰나의 시간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지식으로 이해해도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신비로움을 체감하기가 힘들다.

 

 

 

사무실에 들려 옷을 돌려드리고 나서 다시 호텔 앞까지 배웅을 받는다.

여러가지로 폐를 많이 끼쳤다고 인사를 드리니 웃으면서 다음에도 꼭 다시 방문해 달라고 하신다.

 

도쿄에서 온 일행분은 오늘 야간버스로 삿포로로 돌아가신다며 굉장한 활동력을 자랑하신다.

자기는 매년 이곳을 찾기 때문에 다시 온다면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 한다.

본인 역시 모자라는 건 돈과 시간이지, 기회만 된다면 당연히 몇 번이라도 오고 싶은 곳이니

살다 보면 다시 한번 만나서 술잔이나 기울일 수 있지 않으려나.

 

호텔에 들어서서 일단 객실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1층에서 화장실을 찾아 밀린 액체를 방출한다.

가벼운 런너스 하이 상태였는지, 오호 주변에서는 그야말로 활기에 넘쳐 날뛰었는데

호텔의 은은한 조명과 온기 속에 들어오니 온 몸이 벽에 짓눌리는 듯한 감각으로 돌아온다.

 

황홀했던 석식 뷔페를 즐기기 전에 일단 씻기는 씻어야 하는데

이게 또 호텔 옥상의 대형 온천이 그냥 후다닥 씻고 나오기에는 너무 훌륭해서

조금 이른 시간에 온천에서 몸을 녹이기엔 또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난감하다.

1층 로비에서 무료 비치된 주스를 마구마구 퍼 마시며 잠깐 생각하기를, 일단 객실에서 가볍게 샤워만 하고

식사를 즐긴 후 밤 9시쯤 온천에서 쌓인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샤워를 마친 후 몸을 식히려고 잠깐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는데도 등줄기가 내려앉는 듯 피로가 노곤히 몰려온다.

여기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분명 황홀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다음 날 아침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어제 챙기지 못한 카메라를 가지고 식당으로 향한다.

호텔이 크긴 하지만, 대체 어디에 이런 공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식당의 모습에 매번 압도된다.

폐가 될까봐 좌석 쪽은 담지 않고 음식 코너만 담았는데, 좌석 규모는 이 곳의 5배가 넘는다. 동시 수용 인원이 500명은 넘을 듯.

창가 쪽 좌석은 오호츠크해가 시원하게 보이는 대형 유리라 벌써부터 인기가 높다.

경관이 좋은 곳은 혼자서 앉아 즐기기에 테이블이 커서, 미안한 마음에 그냥 2인용 조그만 식탁에 혼자 자리를 잡는다.

 

 

 

높은 천장쪽에서 은은하게 엔야의 음악이 깔리는 이 곳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신비롭다고 표현할 만하다.

얼어붙은 바다와 뒤덮힌 눈 속에서 코와 눈을 자극하는 요리를 엔야의 음색과 함께 즐기는 시간은

아무리 피곤한 하루였더라도 입가에 미소를 띄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호텔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될 정도로 시설, 규모, 서비스, 요리 수준이 모두 최상급이다.

식기도 메뉴별로 따로 담을 수 있도록 구분이 되어 있어 음식이 섞일 걱정도 없다.

해파리 냉채나 특정 해산물 요리등은 1인분으로 나눠져 따로 아담한 그릇에 담겨 있어 먹기도 편하다.

 

해산물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바로 구워내는 스테이크 역시 육즙 날아가지 않게 잘 구워 놨다. 굵은 후추까지 잘 뿌려놨고.

음식의 질에 대해 만족은 못하지만 여러가지를 즐긴다는 점을 좋아해 뷔페를 가끔 찾는 본인이지만

퀄리티에 실망하지 않고 먹으려면 최소 기준이 강남의 보노보노 정도라, 에슐리나 빕스 같은 곳에서는 그냥 싼 맛에 먹는다는 느낌인데

이곳은 11만원짜리 호텔 투숙비에 이런 석식과 만만치 않은 조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보노보노와 동급 이상이다.

 

 

 

투숙객이 아닌 사람들도 식사하러 많이 찾아오는 모양인데

전용 식권을 사용한 사람들 테이블을 전부 기록해 놓는 듯, 투숙객에게만 내어주는 신선한 회 몇조각을 따로 전해준다.

테이블이 2인용이라 그런지 두 접시를 내려놓길래 '전 혼자 왔습니다만' 하고 물어보니

점원 아가씨가 웃으면서 '두 접시는 못드시나요? 라고 대답한다. 흔쾌히 두 접시를 혼자서 즐겁게 비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뷔페에 놓인 회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재료 자체가 조금 더 비싼 것인 듯.

혹시나 하고 담아 온 게살도 맛살이 아니라 진짜 게살을 찢어놓은 녀석이라, 평생 게살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해 준다.

그릇이 구역화되어 있어 얼핏 보면 양이 적을 것 같지만 이걸 두세 접시 먹으면 상당히 배가 부르다.

메뉴가 상당히 다양해서 한 종류씩만 먹더라도 충분히 세 접시 이상 나오기 때문에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즉선 라멘, 소바, 우동 등도 바로바로 만들어주기는 하는데, 국물을 많이 마시면 다른 걸 집어넣을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만 맛본다.

내장을 깔끔하게 드러내서 구운 빙어를 씹으면 맥주 한잔이 생각난다고 하는 연상을 해 보는데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라 술은 다음 여행에 무리를 주리라 생각해 패스하기로 한다.

 

원래 술은 유료지만 이 날은 또 투숙객에게 와인 한잔씩 돌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사양하며 음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구색내기에 급급하는 뷔페점과는 달리 디저트를 위해 어느 정도 위장을 비워놓을 가치가 충분한 녀석들.

아이스크림은 말할것도 없고 각종 젤리와 계란 케이크 등등 디저트만으로도 한 끼 채울 수 있을만한 품질이다.

퐁듀는 블랙과 화이트 초콜릿이 따로 흐르고 있어서 골라먹는 재미도 있고.

 

투숙 이후 두 번째 석식이지만 이렇게 배가 불러서 더 못먹는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뷔페는 매우 오랜만이다.

지붕도 굉장히 높은데 거기서 울려퍼지는 엔야의 몽환적인 음악이 식사를 좀 더 우아하게 만들어 줘서 오히려 조금 위축되는 느낌도 든다.

 

일기를 쓰며 소화를 시키고, 좀 더 들어가겠다 싶으면 다시 음식을 담고 하면서 시레토코의 마지막 밤을 여한없이 즐긴다.

 

이후의 옥상 온천 역시 매우 인상깊은 체험이었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아쉬울 정도로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내부는 일반적인 온천과 다를 바가 없지만 낮은 계단을 살짝 올라가면 무려 야외로 통하는 문이 존재한다.

밖으로 나가면 증기로 가득한 노천 온천이 눈보라 치는 시레토코의 밤과 어우러져 현실감을 잊게 한다.

영하 10도에 펑펑 퍼붓는 눈을 맞으며 어깨까지 온천에 담그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심지어 호텔 측에서 서비스로 자연센터 쪽에 거대한 조명을 쏘아주기 때문에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는 모습을 조명 사이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오호를 탐험할 때는 화창한 날씨로 라우스 정상까지 보여주고

밤에는 이렇게 옥상 노천 온천에서 쏟아지는 눈꽃을 감상하며 몸을 녹이는 경험을 선사해주니

이번 여행의 운을 이곳에서 다 써버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번 절묘한 타이밍에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목욕 후에는 또 시원한 체험이 기다린다. 호텔 지하 암반에서 솟아나오는 천연수를 자연 정수되는 도자기 속에 담아 놓았다.

이 물은 맛있는 물 명선에도 몇 번이나 선정된 경력이 있다고 화려하게 선전을 해 놔서 과연 어떨까 하고 마셔 보는데

한 잔 마시는 순간 바로 다음 잔을 도자기 입구쪽에 가져다 대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온천 후 마시는 물이 원래 맛있긴 하지만 이 녀석은 확실히 시중에 판매되는 물과 느낌이 다르다.

물의 맛은 직접 마셔보지 않는 한 설명하기가 어려워 난감해도, 호텔 홈페이지 소개에서도 한 장을 차지할 만큼 자신있게 내 놓을 만한 녀석이다.

 

미련이 남지 않을만큼 보고 먹고 마시고 하며 흡족하게 보낸 시레토코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역시 긴 시간과 경비를 들여 이곳 땅끝까지 찾아온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음미하며 푹신한 침대의 감촉을 즐긴다.

내일은 또 이동하는데 하루를 꼬박 소비해야 하지만, 오늘의 만족감만으로도 내일을 즐겁게 보내는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바람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멀리 라우스 산맥 쪽은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눈을 머금어 무거운 구름이 힘겹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이, 사람에게는 더없이 신비로워 보인다.

수십 번 이곳을 찾은 일행들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동영상과 사진을 남기며 서 있다.

가장 커다란 DSLR을 든 본인이 제일 먼저 가방에 카메라를 집어넣을 정도로.

 

일행분들이 나한테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함께 오게 되어 고맙다고 말을 한다.

하루만에 이 풍경을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일종의 복을 몰고 왔다고 생각해 주는 듯.

당연히 이쪽이야말로 육중한 덩치에 허둥대는 본인을 잘 커버해 주는 것만으로 고마울 따름이지만.

 

 

 

사진 찍으며 이동하려뎐 일행 분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호수 위라서 눈이 비교적 적게 쌓인 평탄한 곳이지만

오히려 그 평탄성 때문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바닥은 얼음이라 스틱을 지지할 수 없고, 다리로 일어나려 해도 스키가 미끄러질 뿐.

 

본인 역시 오호 첫 탐험 때 신나게 넘어져서 미친듯이 악을 쓴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에 웃을 일은 아니다.

근처에 다가가서 손을 붙잡아 주니 어렵지 않게 일어날 수 있다. 세삼스럽게 협동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

내가 넘어졌던 곳은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 도와주러 올 수 없었긴 했지만.

 

 

반대로 이야기해서 너무나 운이 좋았기에 그 가치가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는 단점 역시 나타나는 듯 하다.

 

시레토코에 있어서만큼은 그렇게 비가 많이 온다는 여름에도 한 번만에 화창한 날씨를 경험했고

정상 보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겨울의 라우스산 모습도 이렇게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으니

왠지 언제 찾아와도 이런 모습쯤은 쉽게 볼 수 있는 것 처럼 착각하기 딱 좋은 편이다.

 

하지만 언젠가 흐린 하늘에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라우스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제서야 이 날의 어마어마한 행운을 어째서 좀 더 황홀해하지 않았을까 후회하게 되지도.

 

 

 

풍경에 매료되어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가이드분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지금 출발해야 해 지기전에 밑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신다.

 

보통 등산이라면 발목의 부담은 둘째치고 내려갈 때 체력적인 면에서 좀 편하리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이곳의 하산길은 올라가며 봤듯이 자동차 통행을 위해 다져놓은 길이라 눈도 많이 치워놓은 상태에다 경사도 상당하다.

 

프로 수준의 스키어라면 정말로 스키를 타고 순식간에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사람이 미끄러져 내려가다간 커브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흉내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천천히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겨울이지만 최소한 저 휴게소 사용만 가능하게 해 놨다면 트래킹이 월등히 쉬워졌으리라 생각한다.

하다못해 화장실이라도 쓸 수 있으면 하지만, 주위 상태를 보면 폐쇄하는게 너무나 당연한 처사이긴 하다.

애초에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최대한 통제를 하는 곳인데, 겨울에 따뜻한 난로를 피워 곰이나 여우를 불러들일수는 없으니까.

 

천상의 풍경처럼 새하얀 모습과는 달리 봉긋봉긋한 언덕도 바닥의 형태를 알 수 없어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야 한다.

눈 때문에 별로 높아보이지 않는 조그만 다리도, 위에 쌓인 눈의 두께를 보면 섬뜩해 진다.

저기서 미끌어져 떨어졌다간 구조대를 부르지 않는 한 혼자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스키를 신은 채로 40cm 가까이 푹푹 꺼지는 눈 속인데, 저기서 떨어지면 아마 1m 넘게 눈 속에 파묻힐 테니까.

 

 

 

위험할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자연의 매력인지 사람의 오만인지.

 

가이드분이 조심스럽게 바닥을 확인하며 만드는 길 위를 힘겹게 따라가는 상황에서도

주위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흥분시키고 있다. 내가 지금 이런 곳을 걷고 있다는 벅찬 만족감이.

 

사하라 사막 때도 그랬듯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인과의 흐름으로 만들어 진 지형 지물 속에서

사람이 혼자 신나고 감동받아 날뛰는 모습은 뭔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지구가 생명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저 개미같은 것들이 혼자서 꼬물락 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이해가 될려나.

하지만 어찌보면 극히 자연스러운 이런 풍경 하나하나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눈길을 걷는 매 시간마다 느끼고 있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좋은 타이밍에 시레토코를 찾을 수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라우스산을 포함한 시레토코의 척추가 되는 산맥 전부가 이렇게 또렷히 보이는 순간을 두 눈으로 감상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

 

여름엔 조심한다고 해도 사람 등쌀에 시달리는 곳인데, 그 흔적이 사라지고 여우 발자국만이 남아있는 설원은 좀 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다.

 

이런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사하라를 함께 달렸던 사람들이 문득 생각난다.

적당히 힘든 트래킹이라 아무하고나 함께 가자고 권할 수는 없는 곳이지만, 그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 곳을 좋아하리라는 확신이 생긴다.

 

 

 

한창 밝은 시간이지만 특히 산 위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니다.

잠깐 스키를 벗고 휴식을 취하면서 제설차가 세워놓은 눈벽 너머를 쳐다본다.

원래는 저 평원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가이드분이 설명해 주신다.

 

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이 곳 아이들이 산 아래 라우스 학교에 통학하기도 했다고.

겨울에는 아무래도 살아갈 방법이 전혀 없어서 대부분 마을 쪽으로 내려와서 지냈다고 한다.

출입이 통제되던 때, 이 곳 사람들은 집을 전혀 허물지 않고 그대로 떠났지만

시레토코의 자연은 손쉽게 그들의 흔적은 지워버리고 여전히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에도 저 라우스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저기에 필적할만한 난이도를 가진 산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바다와 접한 해발 1600m 짜리 산이라 적설량이 워낙 많은데다가, 주위에 활화산이 있는 만큼 정상쪽이 매우 가파른 형태라서

히말라야 등반하려는 팀들이 연습하는데 적합할 정도라고 하니 과연 어떨까 싶다.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주위에 어떤 피난처나 산장도 없어서, 겨울 등정은 당일치기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굉장한 난점.

그 위용만큼이나 사람을 쉽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본인이 육체파에다가 등산을 즐기는 활동적인 성격이라면 아마 도전 정신이 불끈불끈 솟아오를 법 한데.

 

 

 

묵묵히 길을 걸어 내려가면서도 다들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며

구름이 걷혀있다면 여지없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앞으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라우스산의 모습을 담는다.

탁 트인 설원 아래서나, 건장한 침염수 사이에서나 저 산의 정상은 여전히 놓치기 아까운 소중한 풍경이다.

 

쉽게쉽게 돌아갈 줄 알았던 하산길은 이렇듯 화창한 날씨가 오히려 발목을 잡아 사람을 쉽사리 떠나보내지 않는다.

이 곳을 오면서 나도 미러리스로 한 번 가봐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DSLR 의 덩치에 힘들었지만

이런 풍경이 눈 앞에 들어오면 일단 '그래도 좋은 카메라라 모자란 실력을 커버해 준다'는 생각에 뿌듯한 기분도 든다.

 

자전거 여행 때도 편의를 위해 컴팩트 카메라를 들고 갔다면, 돌아와서 평생 결과물에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묵묵히 내려가다가 수풀 사이에서 뭔가 이상한 모습이 보여서 일행을 세워 관찰해 본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인공물이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사진을 촬영한 후 고화소를 이용한 확대로 모습을 보여주니 가이드분이 알아차린다.

예전 사람이 살던 때 지어졌던 조그마한 공장의 굴뚝이라고. 가내수공업 정도의 작은 생필품 등을 만는 곳이었는데

저것이 굴뚝 윗부분이라고 하면 지금 보는 광경이 참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집 전체가 전부 눈 속에 파묻혀 있다는 뜻이니.

 

가이드분이 용캐 나무 사이에서 저걸 찾아냈다고 웃는다. 자주 오지 못하는 몸이다 보니 신경을 좀 곤두세워서 주위를 살펴보는가 보다.

 

 

 

가이드분이 웃으면서 말을 꺼낸다. 사실 내가 걷는 스키를 타고 트래킹하는 거 처음엔 좀 걱정 되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빨리 적응을 해서 스노우 슈즈를 건네주지 않아도 괜찮았다고 하신다.

 

가이드분은 스노우 슈즈가 그렇게까지 편한 건 아니고, 나처럼 무게가 나가는 사람은 어차피 푹푹 가라앉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을거라 하시지만

그것보다도 일단 스노우 슈즈는 일종의 이단처럼 생각을 하시는 듯 하다. 이곳은 걷는 스키로 걸어야 제맛이라는 경험담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본인은 단시 스노우 슈즈도 신어본 적이 없어서 그냥 궁금할 뿐인데, 아무래도 걷는 스키로 이곳을 정복한 것에 만족감을 느끼면 되는 것인가 보다.

일단 처음 신은 것이 걷는 스키다 보니 중간에 힘들어서 갈아신었다고 하면 왠지 시레토코에 패배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한창 내려가는데 젊은 남녀 커플이 밑에서 올라오고 있다. 가이드분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일단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는데, 가이드분은 걱정이 되는지 자꾸 뒤를 쳐다본다.

사실 이곳의 겨울 트래킹은 허가받은 날짜 안에서라면 가이드 없이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경험했듯 숙련자가 아니고서는 루트 잡기도 힘들고, 눈 밑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권장하지는 않는다.

 

이 곳 가이드끼리는 모두 안면식이 있기 때문에 가이드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방금 올라간 두 사람이 숙련자라고 해도 해가 지기 전까지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 왜 지금 이시간에 올라가고 있는지 다들 의아한 표정이다.

 

어떤 숙련자라도 해가 지고 나서 오호를 돌아다니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 가이드분은 아무래도 계속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꼼꼼한 성격상 하산 후 오늘 올라간 사람 명단을 조사해 보실 듯 한데, 별 일 없기를 기원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하산 때문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조금씩 누적된 피로가 몸을 무겁게 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천천히 조심해가며 발걸음을 옮긴다. 

 

홋카이도에서 날씨가 휙휙 변하는 건 나름 익숙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시레토코의 대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격변은 또 각별하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뉴스레터(?)의 장면처럼 아름답게 내려앉는 눈꽃이 온 하늘을 뒤덮어 버리는 풍경은 참으로 절경이다.

아마 트래킹 초반부터 이런 눈이 팍팍 내렸다면 기가 팍 꺾였을 수도 있겠지만

푸른 하늘을 마음껏 감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만한 즈음에서부터 이렇게 내려주니 오히려 반가운 기분도 든다.

 

든든한 가이드분과 몇 년동안 이곳을 찾아 오는 단골 일행분 덕분에 두려움도 없이 묵묵히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다.

다들 비슷한 기분인 듯 대화도 없이 한동안 역동성과 고요함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시간을 조용히 즐긴다.

 

 

 

해가 워낙 빨리 지기 때문에 이제부터 슬슬 다시 둘러보기 시작해야 한다는 가이드분의 말에 따라 다시 장비를 챙긴다.

물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어차피 남은 건 오호 중 가장 크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호수만 돌아보면 되니까.

 

장비를 챙기고 막 떠나려는데 세상을 연기처럼 뒤덮던 그 눈발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다시 화창한 하늘이 펼쳐진다.

홋카이도에 도착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경험했던 일이지만 정말 놀라지 않을 틈을 주지 않는다.

 

본인은 그냥 날이 맑아졌다는 정도였지만 가이드분은 조금 전보다 더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구름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보니 운이 좋으면 라우스 산봉우리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겨났기 때문.

겨울에는 맑은 날 라우스 산의 꼭대기를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데, 이번에 보게 된다면 첫 참가인 나에게는 굉장한 행운이라고 한다.

 

 

 

첫 번째 호수로 향하는 길은 겉보기에도 쉽지 않다.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다가 수풀이 빡빡해서 스키를 게걸음으로 옮길 공간도 부족하다.

가이드분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루트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한동안 고민을 하신다.

결국 약간 두르더라도 덜 위험한 곳으로 가기로 한다. 우리와 엇갈린 또 한 팀은 걷는 스키가 아니라 스노우 슈즈를 신고 있기 때문에 경사 높은 곳으로 용감하게 전진중.

 

스키라는 게 그냥 슥슥 밀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평지에서 스무스한 이동을 위해서는 평소 걷는 것 처럼 발을 지면 위로 띄울 수 없는 점이 오히려 어색하게 작용해서

허벅지 뒤쪽에 굉장한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전신운동이라 해도 될 만큼 체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키를 신지 않고 일반적인 신발로 걸어다니는게 편한가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애초에 스키라는 게 설원을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니까.

걷는 스키는 일반적인 스키보다 폭이 넓고 길이가 짧은 편이라 눈 위를 걸어도 몸이 덜 빠지는 장점이 있다.

그냥 신발로 이런 곳을 걸어다니면 기본적으로 무릎 위까지는 푹푹 빠지게 되니,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설명 할 필요가 없을 듯.

문제는 본인 체중이 너무 강렬해서 앞의 두 분이 발목 정도까지 빠지며 스키로 밀고 나간다고 하면

나는 거의 정강이까지 잠겨서 이동하는 느낌이라 상대적으로 체력 소모가 심한 편.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라는 말이다.

 

 

 

고생 좀 해서 거친 수풀을 빠져나오니 드디어 첫 번째 호수에 도착한다. 한 쪽이 바다와 인접해 있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우며 크기도 가장 큰 호수.

여름에는 불곰 출몰로 인해 첫 번째 호수만 둘러볼 수 있었기에,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와의 접점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나무로 된 고가도로 위에서만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던 본인이, 그 울창하고 신비로운 매력을 내뿜던 호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높이 3~4미터의 목책로 주변에는 전기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불곰이 접금하지 못한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시레토코의 풍경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이 곳을 찾게 되었다.

 

 

 

여름 목책로 위에서 찍었던 사진. 1년 간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빼앗기는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시레토코에서 가장 높은 라우스 산과, 드레스처럼 구름을 두르고 있는 산맥과 온갖 생명력으로 흘러넘치는 오호의 모습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이란 게 이렇게도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들게 만들어 주곤 했다.

 

한 시간에 한두 번밖에 버스가 오지 않는데다가 마지막 입장 시간도 매우 이른 편이라

관광 버스나 렌트카를 이용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즐기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짧은 시간이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연히 저 목책로 위에도 눈이 쌓여있어서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여름의 목책로 높이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눈이 어느 정도 쌓여있는지 짐작이 갈 듯.

그 웅장하던 생명력이 모두 눈속에 갖혀버린 채 다시 봄을 기다리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정도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이런 풍경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또 문명인의 생활이란 것이고.

호수를 가로질러 나 있는 북방여우의 가지런한 발자국을 보니

그 녀석도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가며 화려했던 여름의 회상에 젖어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행 분은 도쿄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매년 삿포로까지 7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홋카이도로 온 다음

바로 삿포로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도쿄에서 이곳으로 이사올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름다운 산과 들은 조금만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여름엔 불곰이 거닐고 겨울엔 얼어붙은 호수를 거닐 수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바다와 근접한 산맥 끝자락 풍경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겨울엔 그렇게도 보기가 힘들다던 라우스산의 정상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주위엔 구름이 많아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모습만이라도 일행들은 열심히 사진 찍기 바쁘다.

한국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일본의 산은 산맥의 아름다운 곡선보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굵은 선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상층부는 수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설산의 위용을 자랑하는데

사실 라우스산은 출입 통제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등반이 가능하다.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아니면 매우 위험하긴 하지만.

 

 

여름의 그 압도적인 생명력을 모두 평탄한 눈밭으로 덮어버리는 겨울의 모습은

이 곳에 한 번 이상은 와서 원래의 모습을 느껴본 뒤에야 비로소 그 매력이 배가 되는 느낌을 준다.

 

불규칙적인 지형 속에 사냥꾼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습지와 그 주변을 가득 메운 수풀을 모두 동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겨울 시레토코는

거대한 힘으로 밀어버린 듯 깨끗한 설원 속에 가지런한 여우의 흔적만을 남긴 체 느릿한 숨을 내쉬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듣고 자라는 곳에서 살다 보니 그 개념에 대해 꽤나 흐리멍덩해 진 상태였는데

이 모습을 보면 그 사계절이란 게 축복은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바다와 마주닿는 쪽의 산들은 서서히 깎아지른 듯한 정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덩달아 일행들의 셔터도 바빠지고 있다.

꼭 가장 높은 산만이 인상적이란 개념은 없고, 맨 끝의 산부터 라우스산까지 형제처럼 보이는 봉우리들이 위용을 뽐내는 모습은

어떤 강력한 인연으로 맺어진 형제자매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듯한 결합감을 느끼게 한다.

 

카메라를 꺼내고 넣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본인은 이제까지 조금씩 부담감을 안고 있었지만

정상이 드러나 갈수록 쉴새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다른 일행들 덕분에 개운해 진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마구 찍어댄다.

 

 

 

분명 같은 모양이지만 여름과 겨울의 모습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다르다.

여름의 산이 바다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면 겨울의 산은 가만히 바다 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겨울의 산은 단색으로 통일되는 동시에 강한 햇빛에 의해 명암이 강해져 좀 더 우락부락해 보이는데

그럼에도 여름보다 조금 더 차분해 진 듯 하다. 아마 산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구름이 이동할 때마다 일행들의 일사불란하던 움직임은 무질서하게 변해간다.

걸어가면서도 몇 번씩 고개를 돌려 구름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기도 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라우스산의 정상이 보인다 싶으면 카메라를 꺼내들고, 그러면 나머지 일행들도 자연스럽게 멈춰서서 몸을 돌리게 된다.

 

눈 오는 설산의 모습도 물론 좋지만, 이런 하늘에서는 산의 혈관과 근육이 더욱 대비를 드러내기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바빠진다.

 

 

 

목책로 위에서 보던 풍경 속에 들어가 반대로 그 목책로를 풍경삼아 감상하는 경험은 참으로 신선하다.

사실 겨울 홋카이도 여행 계획은 삿포로 눈축제와 Y양을 만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레토코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여름에 저 목책로 위에서 오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저런 데 잘못 들어갔다간 습지에 가라앉아 버리는 거 아닌가 겁을 낼 정도였는데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를 이렇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현실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네이처 가이드분도 매년 도쿄에서 먼 길을 찾아오는 일행 분도 겨울의 시레토코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현재 걷고 있는 수풀 언저리가 바로 여름 목책로 위에서 감탄하며 바라보던 그 첫 번째 호수의 저 멀리 가장자리라는 사실.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면서도 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는 실감을 느끼기 힘든 것도 여전히 납득이 간다.

 

시간이라는 요소 외에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동일한 장소에서 느끼는 낯설음은, 여러 곳을 이동하며 즐기는 여행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래서 갔던 곳을 가고 또 가는 여행이라도 전혀 아쉽거나 지겹지 않은 법이기도 하고.

 

 

 

가이드분은 이미 이곳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시레토코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다.

이제껏 실컷 출입금지 지역을 누비고 다니긴 했지만, 여름의 한계였던 목책로 끝을 넘어가 바다쪽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겨울의 우리들은 저 한계마저 넘어서 직접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새로운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목책로가 상당히 높아서 저 위에서도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그림 한 점처럼 구경만 하던 그 장소에 두 발로 걸어가 볼 수 있다는 체험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흥분할 수 있다.

 

 

 

목책로 위에서도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숨겨진 부분을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먼저 온 팀은 저 밑까지 내려간 듯 흔적이 보이는데, 가이드분 말로는 저기까지 갈 필요는 별로 없을 듯 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려갔다가 고생 좀 하겠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고.

 

목책로 위에서 봤을 때는 언덕 뒤가 바로 바다인 줄 알았는데, 옆으로 돌아와 보니 뒤쪽에도 어느 정도 공간이 있다.

저 부분의 여름 모습만큼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는 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마치 한쪽 면만 보이는 달의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

 

 

 

호텔 창문 안에서 바라보던 것과 달리 이런 곳에서 유빙을 보면 정말로 그 거대한 바다 위에 얼음이 떠다니는구나 싶다.

바닷물이 얼은 것이니 유빙도 짠 맛이 날까 궁금했지만 경치 구경하느라 금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8개월이나 지난 이제서야 다시 생각이 난다.

 

여름에 배를 타고 이 쪽을 통과해 가다보면 가끔 해안가 부근에서 장난치고 있는 불곰들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당연히 그 비싼 배를 탈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일반적인 여행을 위해 찾아올 때는 반드시 멀미약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다.

사방팔방이 탁 트인 곳이지만 어쩐지 다소곳이 숨겨져 있던 공간을 발견한 듯한 즐거움을 뒤로 하고 스키의 방향을 돌린다.

 

 

 

사진이란 녀석이 가지는 장점은, 특정 시공간에 대한 떨어져가는 기억력을 복구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미 4년이나 지난 추억이라 세세한 지형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었는데

목책로 뒤에 봉긋 솟은 저 언덕 옆을 지나면서 담은 사진과 비교해 보니 비로소 다른 시간대의 두 풍경이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관념으로 정립되는 기분이다.

 

이제 여름과 겨울의 모습을 모두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었으니

여름에 찾아가면 설원이 생각나고, 겨울에 찾아가면 푸르디 푸른 습지가 생각나는 즐거운 선순환만 남게 되었다.

 

 

스키를 신고 있기는 하지만 프로급 선수가 아니고는 어차피 하산할 때도 천천히 걸어서 조심소심 내려가야 하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도 결코 이른 시간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무서운 추위가 엄습하니까.

 

아슬아슬하게 사람 애간장을 태우던 구름이 선심을 썼던 것인지, 돌아가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살포시 커튼을 걷듯이 물러나 준다.

겨울 시레토코 여행 첫날이자 마지막 날에 깨끗한 하늘 아래서 라우스산의 정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른 두 명도 당연히 즐겁겠지만 본인은 이 모습을 보면서 그 자전거 여행때의 가슴 묵직했던 감동이 재현되는 기분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길지 않은 사진생활이지만 이제껏 찍은 사진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을 바로 이곳에서 담았다.

시레토코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셔터를 누른 후 십여 분간 자리를 뜨지 않고 가만히 시선을 고정시켰던 기억이 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습지인지 알 수 없을 듯한 두려움을 간직한 호수 주변의 경이로운 모습과

바다와 접한 그 다섯 개의 호수를 굽어보는 웅장한 라우스산의 풍경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 출입 불가능했던 두려움 위를 걸어가는 기분은 언어로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

 

식사가 너무 맛있어서 거하게 먹었더니 아침이 되도 여전히 속이 든든하다.

하지만 조식을 빠트릴 순 없어 얼굴 씻고 어제의 식당으로 향했는데, 이게 또 토스트와 계란 같은 가벼운 조식이 아니다.

메뉴가 어느 정도 바뀌긴 했지만 따듯한 국수와 우동, 밥과 각종 반찬, 샐러드와 생선, 고기, 생선, 조개류에다가

요구르트에서 푸딩까지 완전한 풀코스 식사를 즐길 수 있는 화려한 조식이 여전히 그 거대한 식당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배가 고프진 않지만 행복에 겨워 열심히 이것저것 주워먹는다. 오늘은 어차피 점심은 거의 건너뛰다시피 하며 강행군을 해야 하는 날이니

많이 먹어둔다고 나쁠 거 없다. 어차피 고난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 또 훌륭한 저녁 만찬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창문을 열고 바깥 날씨를 확인하려 했는데, 밤 사이 객실 안팎의 기온차로 인해 창틀이 얼어버렸다.

창문이 부서질 정도로 힘을 줘도 꼼짝을 하지 않길래 어쩔 수 없이 포트에 물을 끓여와 조금씩 부어서 녹인 후 창문을 연다.

이번 여행중 반드시 날씨가 좋아야만 하는 유일한 날이라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적당한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비춰보인다.

 

유빙도 밤새 증식을 했는지 보기 좋게 떠 있다.

사실 겨울의 오호는 가이드비 1만엔은 둘째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등산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라이 수트를 입고 유빙 위를 걷거나 물 위에 떠보거나 하는 가벼운 이벤트를 즐긴다. 그쪽도 참가비는 1만엔.

 

본인 역시 당연히 해 보고 싶은 일이긴 한데 그건 좀 더 허약해 진 후에 즐겨도 될 것이고

여름의 오호 주변 풍경에 너무나도 압도당한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놓칠 수가 없다.

 

9시에 호텔 로비로 나가자 조그마한 승합차가 한 대 서 있다.

오늘의 참가자는 세 명으로, 가이드 한 분과 50대쯤 되어보이는 활기찬 아저씨 한 분, 그리고 체중 100kg 가까이 나가는 본인 한 마리.

차를 타니 길 건너 편의점으로 직행해서 오늘 먹을 점심을 구입하도록 한다. 냄새가 과하지 않고 가볍고 열량많은 녀석을 선택해야 한다.

아침을 워낙 든든하게 먹어서 주먹밥과 초콜릿 정도로 해결해보려 한다. 어쨌든 본인은 카메라 장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하니까.

 

 

 

사무실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는다. 뒷굼치 부분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 반쯤 걷는 느낌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걷는 스키와

스틱 두 개, 카메라와 식량을 넣을 조그마한 백팩, 두툼한 스키복 상하의와 장갑 등을 받아 입는다.

 

본인 덩치에 맞는 옷이 별로 없기도 했거니와, 산 속 추위는 정말 무시할 수 없는 녀석이기 때문에

원래 입고 있는 옷을 벗지 않고 스키복을 위에 겹쳐입는다. 덕분에 몸이 매우 빵빵해져서 조금 거북하긴 하다.

 

예전 자전거로 땀 흘리며 올라가던 해안선 언덕을 훌쩍 통과해 출입금지 표시가 붙은 곳에서 내린다.

원래 여름에는 버스 정류장과 휴게소가 위치한 오호 앞까지 차가 통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한참 아래에서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각오를 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까마득한 눈길이 위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오늘 선택이 정말 잘 한 일인가 걱정도 된다.

 

아예 제설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걸어 올라가는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눈을 고르게 만들어 놓긴 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으면 평지에서도 움직이기 힘든 걷는 스키를 타고 등산을 하려니 몸 전체에 굉장한 힘이 들어간다.

가이드 분은 전문가라서 확확 올라가고, 함께 투어에 참가한 분은 사실 몇 번이고 겨울 오호를 정복한 베터랑이라

맨 뒤에서 10분도 되지 않아 온 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둘을 따라가기 바쁘다.

 

가이드분이 무리할 필요 없이 앞사람이 만들어 놓은 스키 라인을 따라가는게 편하다고 조언해 주신다.

두분 다 얼굴이 참 선하고 부담없이 친절한 성격이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가도 된다고 격려를 해 준다.

괜히 나 때문에 속도가 느려져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1만엔이나 내고 딴 생각할 것 없이 마음껏 자연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웃는다.

 

기가 막히게도 오호로 가는 산길은 걷는 스키로 40~50분 동안 한 번의 끊임도 없이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고

30분 정도의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다시 끝까지 오르막이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덕분에 평탄면이 나올 때까지는 스키를 신은 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간이 없다. 그냥 묵묵히 이를 악물로 전진하는 수 밖에.

 

실로 오랜만에 땀을 좀 빼고, 스틱을 잡은 손이 저려오는 만큼 걷는 스키에도 익숙해지자 체력적인 부담은 줄어든다.

40분쯤 오르고 나니 마침내 그냥 서 있을만한 평지가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처음엔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시레토코의 거대한 풍경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이드분은 NHK 쪽에 동물 발자국이나 이곳 풍경 등을 촬영해서 보내는 일고 하고 계시기 때문에

중간중간 멈춰서서 뭔가를 사진에 담고 있다. 사람이 들어간 적 없는 설원에 가지런한 폭의 발자국이 길게 찍혀 있는데

가이드분은 슬쩍 보기만 해도 어느 동물의 것인지 금새 알아차린다. 매년 이곳에서 가이드를 하지만 올 때마다 신기하지 않은 모습이 없다고.

 

중간에 멀리 길 너머에 가옥의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더미가 있어서 가이드분에게 물어보니

예전 시레토코에 원주민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거주하고 있을 때 살던 집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어차피 생활이 불가능해서 우토로 등으로 내려와 생활하고, 봄부터 다시 들어와 채집과 수렵 등을 하며 살아갔었다고.

통제구역으로 지정된 후 사람들이 전부 떠나버린 집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뒷정리를 해 준다.

 

 

 

카메라를 꺼낸 김에 두 사람 사진도 좀 찍고 하며 휴식을 취한다.

다들 조그마한 컴팩트 카메라를 들고 왔는데 본인만 거대한 DSLR을 들고 와서

가뜩이나 느린 발걸음 때문에 미안한 터라 좀처럼 카메라를 꺼낼 타이밍을 잡기 힘들다.

 

딱히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금새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두분 다 전혀 신경쓸것 없이 필요할 때마다 사진 마구 찍으라고 하신다.

아무도 방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긴 내 입장에서도 두 분이 사진 찍을 때 기다리는 게 지겨운 적은 없었으니까.

 

각자의 백팩에는 이름표와 연락처가 든 카드가 걸려 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순찰용 자동차가 아주 가끔 왔다갔다 하는 곳이라서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오호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다행히도 곰은 동면중이기 때문에 오히려 여름보다 더 안전하다는 말도 있지만.

 

 

 

어느 정도 평지를 걷고 나자 가이드분이 '자, 이제부터가 조금 난관입니다' 라고 격려인 듯한 말을 꺼낸다.

경사가 좀 전보다 더 가파른 오르막길이 주욱 펼쳐진 채로 일행을 맞이한다.

기본적인 제설 작업이라도 완료해 놓았으니 이렇게나마 이동이 가능하지, 1m 가까이 쌓인 눈을 그대로 놔 뒀다면

사람의 힘으로 오호 부근까지 올라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겨울 중 입산이 허가되는 약 20일간을 위해 그래도 지역에서 힘을 많이 써 준 느낌.

 

걷는 스키나 허약한 지구력이나 기본적으로 적응의 문제기 때문에 가파른 경사에도 불구하고 첫 등반 때보다는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경치를 구경할 만한 여유는 없이, 묵묵히 비니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쳐다보며 한 걸음씩 몸을 움직일 뿐.

눈으로 덮힌 산을 걷는 스키로 올라가는 일은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미끄러운 진흙 오르막을 올라가는 기분이 든다.

 

스틱에 힘을 주지 않으면 스르륵 뒤로 내려가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해서, 마침 동계올림픽이 개최되고 있을 그 당시엔

크로스 컨트리 선수들이 얼마나 힘들지 가소롭게나마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약 2시간에 가까운 등산을 마치고 드디어 원래 오호 관광이 시작되는 휴게소 앞에 도착을 했는데

눈 앞에 나타난 모습은 살짝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제설작업이고 뭐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치 지표면과 휴게소 지붕이 이어져 있는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

당연히 휴게소는 사람이 없고 출입도 금지되어 있으며 화장실도 이용할 수 없다.

500ml 물 한 병만 들고 온 나로서는 벌써부터 타는 듯한 갈증때문에 반 이상 병을 비워버린 상태라

이제부터는 여기가 사하라 사막이구나 하는 최면을 걸어서 물을 아끼는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다행히도 여기서부터는 다섯 개의 호수가 위치하고 있는 탓에 고저차가 심한 곳은 없지만

문제는 기본적으로 무릎까지는 푹푹 빠지는 눈길로 이 다섯 개의 호수를 전부 돌아봐야 한다는 것.

호수가 전부 얼어있기 때문에 그 위는 완전한 평지임에도, 그 호수로 내려가거나 올라가거나 하는

30~40cm 정도의 별 것 아닌 단차마저도 겨울에는 어마어마한 장애물로 변신한다는 점이다.

 

눈 속 지면의 상태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이드분이 앞장서서 가장 통과하기 편할 만한 지점을 고르기로 한다.

산을 올라왔으니 이젠 오호를 즐겁게 산책하면 되리라 생각했던 본인의 안일한 상상은 무참히 찢겨나가고

여름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비경에 첫 발을 딛는 순간부터 어마어마한 눈과 갑자지 쑥 꺼지는 구멍에 털썩 쓰러지고 만다.

 

호수로 내려가는 길에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기가 매우 힘든데, 스키를 탄 상태에서는 미끄러워서 그냥 몸을 일으킬 수가 없고

스틱을 이용하려 해도 도무지 어디가 땅끝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푹푹 꺼져버리기 때문이다.

왠지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으로 약 3분간 일어나려고 열심히 애를 쓰지만 손을 짚을 곳이 없는 눈속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원래 길이 아니고 숲 속을 헤쳐나가는 도중이라 일행들이 스키 방향을 돌려서 이쪽으로 오기도 어렵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 때는 미리 준비라도 하고 가서 망정이지만, 편안하게 관광 기분으로 와서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니

왠지 부끄러움과 오기가 동시에 폭발해 순수하게 허벅지 힘만으로 100kg 의 거구를 확 들어올려서 간신히 탈출한다.

 

 

 

여름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다섯 번째 호수 위에 서 있다.

밑에는 얼음이라 스틱을 단단하게 찍을 수 있어 편하다.

겨울이긴 하지만 호수 위라서 좀 걱정도 들었지만, 시레토코의 겨울은 이런 호수쯤은 자동차가 달려도 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얼어 있다.

 

가이드분과 함께 여우가 지나간 흔적을 신기해하며 찍는다. 불곰이 잠을 자는 겨울은 추위에 강한 북방여우가 활개를 치는 계절.

북방여우는 홋카이도 전역에서 서식하는데, 도심 근처의 여우들은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아서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도 촬영이 가능하지만

이곳은 사람과 접할 일이 별로 없어서 경계심이 강하다. 실제로 볼 수 있다면 대단한 행운이겠지만 지금은 발자국만 봐도 즐겁다.

 

자전거 여행 때는 초속 9m 짜리 순풍을 맞고 워프하듯 신나게 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길 옆으로 뛰어나온 북방여우를 보고 깜짝 놀라 녀석의 코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얼마나 놀랐는지 10초 가까이 서로의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피할 생각도 않았던 추억이 있다.

 

 

 

겨울은 겨울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이곳이 정말 호수 위라는 감각이 살아나질 않는다.

거기다 여름에는 멀리서 수풀에 가려 간신히 보일락 말락 하는 호수를 담는 것 외에는 접근할 수가 없고

불곰 목격 정보가 들어오면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호수를 제외하면 모든 트래킹이 금지되기 때문에

호수 위에서 사진을 담은 이런 체험은 오직 겨울에만 할 수 있는 보물과도 같다.

 

특히나 이 곳을 여러 번 와 본 두 사람이 나한테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는 것이

첫 번째 여행, 그것도 단 하루밖에 없는 시간에 이렇게 날씨가 좋은 건 로또에 가까운 경험이라며 좋아하신다.

 

어딜 봐도 일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언덕 너머 오호츠크해가 넘실대는 비경 속에서의 시간은

일절의 다른 유희가 필요없는 순수한 자연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이다.

 

 

 

한 번 넘어지고 나니 그래도 요령이 생겨서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여전히 호수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의 조그마한 높이가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여름엔 몇 걸음만에 후닥 넘어갈 수 있는 그 곳을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고생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세 번째 호수에 도착하니 다른 팀이 먼저 와 있다. 네이처 가이드는 몇 군데가 있긴 한데 다들 친한 친구나 마찬가지라 반갑게 인사.

가이드의 지도를 받고 있는 아저씨는 걷는 스키 대신에 테니스 라켓처럼 생긴 장구를 신고 있는데, 확실히 저런 건 눈에 덜 빠지고 편리한 느낌이 든다.

본인은 처음부터 저걸 신청하지 않았으니까 걷는 스키를 타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게 있었다면 조금 쉬웠을지도.

 

 

 

구름에 가린 산은 이런 호사스러운 날씨 속에서도 아쉬움이 들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개의 봉우리 중 이곳 시레토코에서 가장 높은 라우스산이 있다고 한다.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녀석이긴 해도, 오늘 같은 날씨라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이드분이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속의 호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동물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긴다.

북방늑대보다 사슴이 더 많은데, 정작 그 사슴은 이미 홋카이도에서 유해 동물로 지정되어 겨울마다 사냥을 당하는 신세다.

늑대가 전멸하고 불곰의 서식지가 줄어든 이후 이 녀석들의 번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줄어들어서

지금은 그냥 놔두다간 농작물이나 초원이나 삼림이나 아예 박살이 나 버린다고.

 

매년 겨울 사냥 가능한 개체수를 발표하면 허가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정도의 사슴을 사냥해 간다고 한다.

사슴고기는 꽤나 맛있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사냥해가는 경우도 많다.

 

시레토코가 자연의 힘 가득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조절 없이 자체 정화가 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그 정도의 천연 자연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지만. 얠로우스톤에서부터 아프리카 사바나까지 사람의 손 없이는 유지되기 힘들다.

 

 

 

네 번째 호수에 도착하니 수풀 중앙에 고요한 호수 위의 풍경이 마치 대회가 끝난 콜로세움 안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 준다.

라우스산이 보이지 않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기념으로 사진 찍으라고 바람을 넣는다.

자기 사진은 거의 찍지 않는 편이지만 워낙 의미가 깊은 곳이다 보니 이것도 추억이다 싶어서 카메라를 건네 드린다.

물론 그냥 평범하게 앞면 나오는 건 재미가 없어서 호수를 바라보는 뒷모습을 남겨달라고 했지만.

 

다들 카메라는 잘 다루는 편이라 별 설명없이도 잘 찍어주셔서 매우 만족스럽다.

 

 

 

베터랑 참가자 분은 호수 안쪽가지 이동해서 기념사진 많이 찍으신다. 몇 번째 호수인가를 알기 위해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요즘 셀카가 그렇게 유행이라던데, 본인 역시 자기 얼굴 찍는 거 좋아했다면 여기는 그냥 별천지다.

속된 말로 좀처럼 들어가기 쉬운 곳도 아니라 자랑하기도 좋으니까. 본인은 애초에 사람을 찍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예외이긴 하다.

 

 

 

다섯 개의 호수 중 유일하게 중간에 섬이 만들어져 있는 두 번째 호수의 모습.

사실 오호의 호수들은 각각의 큰 단일 호수가 아니라 주변에 습지와 늪지 등등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불연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굉장히 입체적이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무가공의 혼합체인데, 그것을 눈이란 녀석이 이렇게도 단순하게 밀어버린다.

 

아마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가 봐도 여기가 정말 거기인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사람이 대부분일 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여러 번 가도 아쉽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사박사박한 동물들의 발자국과는 달리 걷는 스키와 스틱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흔적은 꽤나 우악스럽다.

멀리 보이는 저 정도의 사소한 단차마저도 이런 환경에서는 거대한 장애물로 느껴진다.

익숙해 졌다고는 하나 호수와 호수 사이를 넘나들 때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언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가벼운 비포장 산책로가 겨울엔 범접하기 힘든 험한 길로 변모하는 이 모습은

사람이 역사를 통해 편의성이란 것을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구해 왔는가를 세삼 느끼게 해 준다.

 

 

 

호수 위는 눈도 적게 쌓이고 바닥이 얼음이라 스틱을 힘껏 지지할 수 있어서 참 편하다.

 

일단 호수에 도착해 사진 촬영과 구경을 하기 시작하면 걷는 스키도 걸리적 거리기 때문에

스키를 탈착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거나 하는데, 본인은 통풍의 흔적 때문에 왼쪽 엄지발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스키를 한 번 벗었다가 다시 신으려니 발끝에 힘을 줘서 밀어넣어야 하는데, 왼발 끝은 아무리 힘을 준다고 생각해도 실제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통풍의 무시무시한 격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완치 후에도 그렇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힘들겠지만

상처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도 발가락 끝은 여전히 그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는 듯 일정 이상의 힘을 주지 않도록 퇴화해 버린 기분이다.

 

한동안 씨름을 하다가 머리를 짜 내서, 신발을 벗어서 손으로 스키와 체결한 후 다시 신는 방법으로 해결하긴 했다.

 

 

 

호수 위의 섬 앞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행분. 나도 찍어주겠다고 했지만 원체 본인 사진을 찍는걸 싫어해서.

기념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 사진이라도 충분하다.

사진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피사체가 주인공이고,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그 역할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거기에 누가 들어가던 그것은 나의 추억이니까.

 

여름에는 호수에 접근은 커녕 이렇게 수풀의 방해 없는 장소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침엽수가 많은 곳이긴 해도 폭발적인 생명력을 자랑하는 이곳의 여름은 수풀의 밀도가 어마어마해지기 때문.

 

 

 

경황이 없어서 이제껏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이드분의 베낭 뒤에는 걷는 스키가 아닌, 다른 팀의 아저씨가 신고 있었던 스노우 슈즈가 걸려 있다.

비상시를 대비해 가지고 온 것일까. 자빠지고 미끄러지며 고생하는 나한테 저걸 신겨줬으면 좀 나았을 텐데.

 

하지만 가이드분이 하는 일이니 다 의미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냥 걷는 스키로 계속 이동한다.

일단 나름 익숙해지기도 했으니, 이중으로 입은 두터운 방한복에 몸 안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지만 더 이상 무서울 건 없다.

단지 눈 앞에 보이는 저 아담한 언덕도 겉보기와 달리 밑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걷는 스키로는 게다리걸음으로 간신히 올라갈 수준이라

호수에서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꼭 저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항상 각오를 다지게 만들기는 하지만.

 

실제로 저런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언덕배기는 개울처럼 푹 파여 있거나 나무뿌리, 바위 등으로 들쑥날쑥한 곳이 많아서

자칫 스틱에 의지해서 이동하다가 균형을 잃고 고꾸라질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노련한 네이처 가이드가 앞에서 지형 상태를 확인해가며 일행은 인도하는 것.

 

 

 

갑자기 가이드분이 가방과 스키를 벗더니 조그마한 삽을 들고 눈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한다.

어리둥절하며 멀뚱멀뚱 서 있었는데, 한동안 열심히 삽질을 해서 구덩이를 만들어 놓은 가이드분이 '여기 앉아서 점심 드세요' 라고 하신다.

눈 때문에 양반다리 말고는 할 수가 없는 일행들을 위해 의자처럼 걸터앉을 수 있도록 구덩이를 만들어 주신 것.

그런 줄 알았으면 도와드리는 시늉이라도 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굉장히 미안한 기분이다. 사실 삽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이곳에 도착해서 산을 오르고 호수를 거니는 3시간 동안 한 번도 앉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편안한 자세로 눈더미에 앉아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야간행군 후 먹는 컵라면에 뿌려지는 마법의 조미료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눈을 파서 의자를 만든다는 방법 자체가 이런 곳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긴 했어도 지금 본인의 몸 상태에 비하면 꽤나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은근히 배가 고프다.

한국 편의점보다는 훨씬 레벨이 높지만, 그래도 125엔짜리 연어 초밥 하나에 그렇게까지 감탄할 일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대자연의 설원을 반찬으로 먹는 점심은 극상의 만찬이나 다름없다. 이 순간 이 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행복.

 

날씨가 순식간에 흐려지고 조금씩 눈이 날리기 시작하는데, 편안한 자세로 앉아 주먹밥을 씹고 있으니 그것 역시 멋들어진 영화 한 편이나 마찬가지 느낌이다.

보통은 라우스산이 가려져서 아쉽다거나, 돌아갈 때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리라 생각하지만

행군 끝의 휴식과 식사, 그리고 앞에 펼쳐진 고요한 호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할만큼 부정적인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린다.

 

 

 

가이드분은 서 있는게 편하다며 앉으려 하시질 않는다.

시레토코 네이처 가이드들은 모두 이곳이 좋아서 자진해 활동하는 봉사단체나 마찬가지다.

가이드비가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대여해주는 장비와 이동 경로, 일행들 뒷바라지를 하루종일 맡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곳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일본에서 오래 살아왔다면 아마도 어느 날 여행중에 이곳을 알게 되고, 몇년동안 여기를 그리다가 결국 비슷한 행적을 걷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바람이 별로 없어 적막 속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의 야간 레이스 때 그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서 있으면 모래 흘러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비슷한 느낌.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는데, 이곳의 아름다움도 일단 리스트에 올라갈 정도의 위력은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곳의 눈은 한국에서 봤던 싸라기같은 눈과는 확연히 다르다. 기온 차이 때문인지 옆에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맨눈으로도 육각형의 눈결정이 그대로 보일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데, 평생 이런 눈은 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사진으로는 설명이 어려울 것 같아 크기 비교를 위해 초콜릿 박스 옆에 떨어진 눈을 담아본다.

이런 눈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 진 설원은 딱딱하게 뭉치지 않고 설탕을 깔아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기온 탓에 잘 녹지도 않아서 오랫동안 결정 모양을 유지하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도 신기한 즐거움.

 

 

 

식사중에 괜히 내가 따라와서 발목을 잡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더니 둘 다 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손을 흔든다.

 

단순히 위로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가이드분은 시계를 꺼내서 보여주며 지금까지 예정했던 스케쥴과 전혀 차이가 없이 적당한 페이스로 트래킹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오히려 처음에 과연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이렇게까지 맞춰줄 줄은 몰랐다고 하시니 그나마 위안이 조금 된다.

 

거의 기어서 가다시피 했지만 젊을때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도 하고, 일본 전국 자전거 일주도 했다고 말씀드리니 두 분 모두 웃으면서 납득하는 분위기.

백여 미터 옆에 바다가 위치해서 그런지 하늘을 뒤덮은 눈 속에서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고 앉아있는 지금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가끔 가만히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가이드분의 뒷모습을 보면, 이 사람은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여기에 오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읽혀지는 듯 하다.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은 것이 참 후회될 정도로 이곳 호텔의 석식 뷔페는 굉장한 수준이다.

국내 5만원 이상급의 뷔페식당의 메뉴급인데, 신선도나 요리 수준은 이쪽이 더 낫게 느껴진다.

해산물이야 당연하겠지만 스테이크나 디저트류도 맛이 굉장해서 놀라고 또 놀라며 오랜만의 만찬을 음미하느라 바쁘다.

조식은 아직 먹어보지 않았지만, 이런 석식을 포함해서 10만원 초반대의 숙박료라면 비싼 게 아니라 싸다고 해도 될 정도.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돌아올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내일도 머물 예정이니 사진은 그때 찍으면 된다고 생각.

 

호텔들은 지역 관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시레토코에서 실시중인 이벤트에 대한 정보는 로비에서 전부 얻을 수 있다.

분에 넘치는 식사를 만끽한 후 레이저 쇼의 관람권 역시 로비에서 구입한다. 시간은 조금 남아있어서 호텔 1층이라도 슬쩍 불러보며 사진을 찍는다.

 

오래된 호텔이라 디자인적으로는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다.

한창 호황기 때 만들어 진 부스인지, 가벼운 오락실도 들어서 있다. 심지어 작은 간이 노래방 시설까지 만들어져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

 

 

 

어마어마한 석식에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술과 함께 가벼운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스낵바 역시 운영중이다.

호텔비에 포함된 식사 레벨이 그렇게 높은데 여기서 라멘과 맥주를 즐기는 사람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궁금할 정도.

 

지리적 특성상 지나가다가 그냥 들르는 숙박이 불가능한 시레토코의 호텔들은

거의 모든 관광용 수요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전천후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로비쪽 역시 가벼운 주스와 녹차 등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넓직하게 마련되어 있다. 식사 후 목이 좀 말라서 석류주스를 두 잔 정도 비웠다.

겨울은 비수기라 영업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원래는 주문을 받는 차도 있는 듯 하다. 무료 음료수가 빵빵해서 딱히 돈을 주고 사 마실 필요가 없긴 한데.

 

 

일본의 호텔은 어쨌든 공간 활용을 위해 조그마한 느낌이 들지 않을수가 없는데

이곳은 일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넓다.

 

일본식 정원을 본따 만든 듯한, 실내를 흐르는 인공 개울과 다리까지 만들어 놓은 모습을 보면 호텔인지 백화점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당연히 옆에는 그냥 길이 나 있지만 일부러라도 이 쪽을 지나가고픈 재미가 느껴지는 곳.

굉장한 공간 낭비로 보일수도 있는데, 그 만큼 이제껏 애용하던 비즈니스 호텔과는 방향점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의 본인처럼 이런 배려에 기분이 흡족해 질 수 있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관광 호텔이니까.

 

 

 

1층을 살짝 걸어다녔을 뿐인데도 모든 시설들이 큼직큼직한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바닥에 카펫을 깔아놔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도 꽤나 조용하다.

 

특산품점도 한 곳이 아니라 특색별로 여러가지 가게가 들어서 있다. 일반적인 잡화점부터 시작해서 사슴 뿔로 만든 조각품들을 파는 가게까지.

위층에도 대연회장, 키즈 코너, 애완동물 보호 공간인 펫 라운지까지 있어서 굉장한 대응성을 자랑한다.

 

호텔이 이 정도까지 가면 오히려 실외의 가게들에 갈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 무서운 느낌마저 든다.

원래 고급 호텔이란 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조식, 석식 모두 합해서 11만원 정도의 숙박료가 드는 호텔치고는 너무 훌륭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컨텐츠가 많은데, 미니 수족관 속에 유빙을 떠와서 전시까지 하고 있다.

아마도 여름 손님들을 위한 볼거리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여기서 볼 필요 없이 바로 앞바다에 유빙이 떠다니고 있으니까.

위도가 낮은 지역 사람들에게는 나름 신기하게 느껴진다. 바다가 얼어붙는다는 생각은 극지방에서나 생각할만한 이미지라서.

 

실제로 홋카이도 북쪽 바다는 유빙한계선에 걸쳐 있어, 한국과 일본에서 유빙을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냥 한바퀴 돌아보려 했을 뿐인데 뭔가 관광을 제대로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조그마한 전시실에 노구치 준이치라는 작가의 시레토코 동물사진전이 개최되고 있다. 물론 무료.

 

야생동물 사진은 끈기와 노력이 어떤 장르보다 중요한데, 참 신기하게도 상당수의 동물들이 사진가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다.

상당한 망원으로 찍은 사진인데 어떻게 이렇게 담을 수 있는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결과물에서 물씬 풍긴다.

 

 

 

밤이 늦어서 아무도 없었는데, 덕분에 조용하게 감상이 가능하다.

사진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결과물 수준이 상당해서 눈이 즐겁다.

애초에 호텔에서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볼거리가 계속해서 생겨나기 때문에 기분이 상당히 좋은 편이기도 했고.

 

 

 

동물은 원래 귀엽지만, 녀석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 그 매력을 십분 살린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시레토코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자동차가 가지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카메라 장비를 갖고 해발 1000m 가량의 산에 올라 몇나절이고 진득히 관찰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구도 배경 배치도 매우 능숙하고, 동물들의 시선이 향하는 찰나의 순간을 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끈기가 필요했을지 상상이 간다.

 

 

 

사진은 결과물로 말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물론 자연을 훼손하는 등의 짓거리를 하는 건 전혀 별개의 이야기지만.

 

단순히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거나, 하루 이틀 정도 산에 오르는 정도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시레토코의 넘치는 생명력의 매력이 사진가의 능력과 결합되어 따뜻한 시선으로 탄생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배울만한 점이 많은 작품이라 자칫 레이저 쇼 시간에 맞추지 못할 법한 순간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서둘러 밖으로 나온다.

 

 

 

본관, 신관, 별관은 각 구역간 이동거리가 꽤나 길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전부 따로 위치해 있다.

체크인 할 때 로비에서 지도까지 줘 가며 자세하게 설명한 이유가 있었다.

 

본인이 묵었던 곳은 가장 저렴한 방임에도 분에 넘칠 정도였는데

홈페이지 가 보니 바다와 마주하고 베란다에 개인 노천온천까지 완비된 최고급 객실이 2인 26만원 정도이다.

객실의 수준과 조, 석식 포함을 생각하면 이것조차도 그렇게까지 비싼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 최북단의 오지에서 60년간 경영해 온 호텔의 저력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속물적인 생각으로 역시 돈이 참 좋긴 좋구나 싶기도 하고.

 

아직은 젊은 편이니 조금 더 노력해서 자금을 널널하게 만들어 오면 최고급 객실에서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시레토코는 나처럼 도심 여행보다 자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도 전혀 아쉽지 않은 곳이니.

 

 

 

밖으로 나오니 다른 호텔에서 온 듯한 일행들도 많이들 걸어오고 있다. 언덕 위에 위치한 호텔에서는 관광버스가 직접 실어나르는 중.

일단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시레토코에 숙박한 이상 이건 한 번씩 보고 가기 때문에 지역 경제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래봤자 겨울에는 관광객이 많은 편이 아니고, 1인당 500엔씩 받아봤자 레이저 쇼는 꽤나 비용이 많이 드는 이벤트라서 어떨런지.

 

길을 못찾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본인이 투숙중인 호텔의 바로 뒷편인데다가 주민들이 길안내를 해 주고 있어서 무리없이 찾을 수 있었다.

색색의 조명으로 밝혀진 터널에 이르자 레이저 쇼에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름 오로라를 재현하기 위한 레이저 쇼라서 아이디어를 쓴 장식도 만들어 놓고 했는데

초연 당시엔 상당히 첨단 공연이던 레이저 쇼도 지금 와서는 그냥 그럭저럭 구경할 만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 것이 현실.

 

분수 등을 보드로 이용하는 레이저 쇼를 처음 본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 LA의 디즈니랜드였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벤트라 굉장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지금은 닳고 닳은 감성이라 과연 이걸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든다.

사실 뭔가를 기대하고 간다기 보다는 오늘 하루종일 차 타고 이동하는 것 말고는 해 본게 없기도 하고

비수기에 관광객들에게 만족을 주고 싶다는 지역 주민들의 열정에 응답하는 기분도 있었고.

 

 

 

원래 단차가 있는 건지 그냥 눈으로 만들어 놓은건지 알 수 없지만 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계단 형식으로 만들어 져 있다.

안내하는 분이 확성기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안쪽 뒤쪽이 더 잘보이니 좀 더 들어가 달라고.

 

별 생각없이 깊숙한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그냥 원활한 자리 배치를 위해 그렇게 꼬드긴 것이 아닌가 싶은데. 아무래도 중앙 앞쪽이 좀 더 잘 보일 듯 하니 말이다.

사진 몇 장 찍어내는 데 불편함만 없다면 위치는 어디든 상관 없다.

 

단지 주위에는 불빛이란 게 거의 없는 칠흙같은 밤이라 왠만한 카메라로도 좀 버거울 듯한 예감이 든다.

 

 

 

걸어오는 사람 수는 그냥저냥이라서 널널하겠네 싶었는데

아마도 언덕 위의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로 추정되는 인파가 몰아닥치자 회장은 순식간에 만원이 된다.

일찍 온 장점을 활용해서 가장 좋은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안내원의 속삭임에 응하는 바람에 엉성한 선정이 되어버렸다.

 

모자와 장갑을 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시레토코의 밤은 강렬하다. 본인은 카메라 원활히 다루기 위해

손가락 쪽은 덮히지 않은 손목 방한대만 걸치고 있어서 조금 더 춥지만, 원래 추위에 강해서 별다른 부담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현재 시레토코에 머물고 있는 관광객의 80%는 다 나와있다는 느낌. 절반쯤은 중국인 관광객이지만 그래도 꽤나 왔다는 느낌이다.

 

 

 

그냥 평범한 공터라서 장막 역할을 할 분수 같은 장치가 전혀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했는데

사람은 머리를 쓰는 동물이라서, 뒤편에서 살짝 매큼한 냄새가 난다 싶더니만 열심히 뭔가를 태워서 연기를 내고 있었다.

분수처럼 장막을 만들어 줄 정도는 아니지만 마침내 시작한 오로라 레이저 쇼를 보니 이런 연기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연출이다.

 

워낙 어두워서 거리감을 느낄 수도 없지만, 어디선가 발사되는 다양한 레이저의 물결이 피워놓은 연기에 산란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주변 불빛이 거의 없는 천혜의 환경 덕에 하늘 전체를 뒤덮는 레이저의 모습은 예상보다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오로라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실제로 중간중간 흐르는 나레이션도 오로라에 대한 설명이 반이고 나머지는 일본 신화와 시레토코에 관련된 연극같은 느낌의 내용.

바다쪽은 그야말로 암흑의 중심이라 중앙의 레이저 포인터 위치를 감잡을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비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치 바다 건너 언덕쪽에서 비추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 거리가 5km 가까이 되기 때문에 저곳에서 레이저를 쏘기는 어렵다.

 

아마도 바다 중간 어디쯤에 장치를 설치해 놓은 듯 한데 완전한 암흑 속에서는 흡사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25년쯤 전에 이 쇼를 봤다면 평생 잊지 못할 굉장한 추억이 되었을 법 하다. 지금 봐도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닌 수준이니까.

 

 

 

끊임없이 움직이는 레이저를 디지털 카메라로 포착하기가 쉽지는 않다.

감도를 무리하게 올리고도 촛점 잡는게 쉽지는 않은데, 이럴 때는 휴대폰처럼 심도와 셔터스피드 생각 할 필요가 없는 작은 녀석들이 더 유용할지도.

 

바람이 많이 불거나 하면 애써 피워놓은 연기가 다 날아가는 불상사가 벌어질수도 있지만 다행히도 기온만 낮았지 바람은 별로 없는 편이다.

주변이 워낙 어두워서 레이저가 통과하지 않는 부분은 연기를 전혀 볼 수 없었던 탓에 집중감이 강해진다.

외계인이라던가, 달세계에서 내려오는 신성한 빛과 같은 느낌을 수는 데는 이런 연기와의 콜라보가 큰 효과를 주는 듯.

 

 

 

대자연의 웅장함 말고는 그다지 내세울 게 없는 일본 최고의 오지에서 첨단 레이저 쇼를 즐기는 기분도 나름 각별하다.

 

기획한 사람들의 노력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다.

부족한 자원을 아이디어로 커버한다던가, 바다 쪽 공간을 충분히 활용한다던가.

크기만 보자면 어떤 대형 극장보다도 박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멋진 시간이 될 듯 하다.

 

잠깐동안이긴 하지만 추위를 잊고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좋고.

 

 

 

레이저가 표현할 수 있는 움직임과 색상에는 한계가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넓게 퍼져가는 연기 덕분에 훌륭한 연출이 가능하다.

 

하늘의 문이 열리는 듯한 연출에서는 레이저가 가만히 있어도 연기가 움직이는 벽을 만들어 내고 있어 장엄한 느낌을 준다.

일본쪽의 성격이 그렇겠지만 기본적으로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미국에서는 장소가 장소이기도 했고, 가볍고 즐거운 음악과 노래가 주를 이뤘는데.

 

디즈니랜드의 그것과 비교해서 연출적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형적 장점을 최대한 이용한 넓은 공간감은 아무래도 여기를 따라올 만한 장소가 없을 듯 하다.

 

 

 

30분 남짓한 공연이 끝나고 진행자가 감사 인사를 한다.

관람료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 괜찮을까 싶기도 하지만 시레토코에서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준수한 편이다.

500엔 아낀다고 이걸 보지 않고 지나가는 관광객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고.

 

물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매번 갈 때마다 이걸 볼 생각까지 드는 것은 아니라, 다음에 찾아갈 때도 이걸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고민을 해 봐야겠지만.

 

공연 후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하트모양의 레이저를 쏴 주는데

오히려 이것 때문에 커플사진 찍는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인과 함께 온다면 꽤나 로맨틱한 분위기가 될 듯 하다.

 

 

 

워낙 어두워서 지금 돌아가는 길이 왔던 길과 같은 것인가조차 헷갈리는데

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바위에 조명이 들어와 있다. 조명이 없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촬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척 보자마자 금방 웃음이 나올 만한 바위.

이름 역시 당연하게도 '고지라 바위'다. 일부러 깎아낸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놀랄만큼 닮아 있다.

 

 

 

가까이 가서 봐도 참 묘하게도 닮아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자연의 조각력이란 꽤나 섬세해서, 이곳 시레토코 곳곳에는 재미있는 모양을 한 바위가 많다.

마을 어귀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는 정말 너무나도 거북이 모습과 똑같아서, 인위적으로 깎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이 고지라 바위도 밤에 보니 명암차에 의해 더욱 위엄있게 보인다. 레이저 쇼에서 이득을 하나 더 얻어가는 느낌.

 

 

 

길을 걸어가는데 주민들이 '괜찮으시면 들렀다 가세요' 라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이 시간엔 당연히 문 여는 가게가 없지만, 오로라 쇼가 끝나고 나서 조금이나마 매상을 오려보고자 기획한 임시 시장인 듯.

역시 일본인들의 장사 수완은 참 꼼꼼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해산물 중심인 시레토코의 특산품이라 본인이 구입할 거리는 별로 없지만 이런 구경을 놓칠 이유는 없었기에 들어가 본다.

건물 중앙에는 숯불이 놓여있어 손님들을 따듯하게 맞아주고, 천정에서는 시레토코 오로라 판타지 공식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다.

크게 유명한 가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들을 만 한 일반적인 가요 레벨이라, 레이저 쇼를 재미있게 즐긴 사람이라면 기념으로 구입해가도 될 정도.

 

물건을 사지 않아도 한 쪽에서는 이 곳을 찾아준 사람들에게 따듯한 감주를 한 잔씩 나눠주고 있다.

한국의 달달한 감주와는 살짝 다르게, 달콤하면서도 살짝 톡 쏘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일본의 감주는

추운 겨울날 따뜻하게 해서 마시면 그 만족감이 굉장하다. 실제로 연말 연시 신사나 절에서 많이 나눠주기도 한다.

 

 

 

감주만 받아먹어서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구입할 만한 것이 없다.

물론 진공 포장 잘 된 해산물들이지만, 내가 바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몰라도 앞으로 6일간 여행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도시 특산품에 비하면 조금 투박한 포장과 내용물이지만 신선도로 치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을 찾기 어려울테니

나이든 사람들은 꽤나 이것저것 구입해 가는 편이다.

 

시레토코에는 애정이 각별해서, 뭔가를 구입하러 온다기 보다는 이 곳의 분위기에 취해 한두 개쯤은 사 주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외지 중 외지인 이곳에서 한국까지 버틸 수 있는 먹거리를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 항상 아쉽기도 하다.

 

 

 

겨울이라고 손 놓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마을 사람들의 열의를 충분히 느끼며 다시 호텔로 돌아온다.

 

멋들어진 볼거리와 편의성으로 무장한 관광 도시와 달리

이런 곳은 크게 즐길 거리가 없어도 지역민들의 노력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는 점만으로 관광 온 보람이 충분하다.

오로라 레이저 쇼를 보러 가서, 레이저의 화려함보다는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정성에 훈훈함을 느끼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는 곳.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레이저 쇼 회장에서 상당히 가까운 호텔이라 돌아오는 길도 가볍다.

하지만 워낙 어두워서 이런 짧은 거리에서도 길을 잃는 바람에 버스 주차장으로 가 버리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머뭇거리고 있으니 안내원이 다가와서 어느 호텔이냐고 물어본 후 바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줬다.

 

삿포로, 오타루, 아사히카와 등의 이름난 도시와 비교하면 별 것 없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곳에 와서는 매 순간순간이 그저 훈훈하고 즐거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