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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해당하는 글들

  1. 2013.11.25  과거로의 여행 - 키소 마을 주민들 9
  2. 2013.11.22  과거로의 여행 - 작은 마을 키소 20
  3. 2010.03.03  진짜 오해란 이런 것 31

 

 

휴게소에서 멍하니 한참을 시간 보내고 다시 언덕을 올라간다.

완만한 경사가 산자락까지 이어진 이 길에는 느긋한 밀집도의 주택가가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좀 더 깊숙히 들어가면 단순한 주거용 주택이라기 보다는, 도심의 좀 잘나가는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는 별장 단지가 나오기도 한다.

일본의 시골이 한국보다 정비가 잘 되어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곳은 확실히 경치가 좋은 편이다.

별장이 늘어서 있는 산자락의 수려한 환경이 아닌 순수하게 사람들 살아가는 논밭 사이의 주택가임에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소가 한 두곳이 아니다.

 

일본에서 홋카이도의 해안가 말고는 '여기서 살고싶다'는 생각이 든 곳이 별로 없었지만

바다 근처가 아닌 산속 깊은 곳에서 그런 느낌이 드는 곳은 아마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땅값이라던가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10년 전만 해도 거의 텅텅 빈 곳에 지금은 새로 집 짓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고.

가게 하나 차려도 될 만한 이런 예쁜 디자인의 집 역시

돈 좀 만지는 사람들이 놀러오는 별장이 아니라, 그냥 이곳에서 사는 주민들이 일반적인 주택이다.

 

예전에 소야노 가족과 이야기 할 때, 적당히 땅값만 싼 곳 고르면 주택 짓는것까지 합해서

한국돈으로 2억 조금 넘으면 무난할거라 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

가끔은 진지하게 이곳에 눌러앉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다.

 

좋긴 하지만 역시 현실과는 달리 포기할 수 없는 꿈은, 홋카이도처럼 바다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곳이라

이곳의 많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말뚝을 막아버릴까 생각하면 꼭 마음속에서 막아서는 요소들이 있는게 아쉬운 점.

 

 

 

소야노네 집까지는 휴게소에서 도보로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임에도

오랜만에 즐기는 키소 마을의 정경에 도저히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번호판을 떼어버린 걸로 봐서 폐차 수순을 밟는 녀석인 것 같은데

저런 녀석마저 거부감없이 프레임속에 녹아들게 만드는 이곳의 풍경이 가지는 힘은 실로 강력하다.

 

한두 걸음 걸으면 또 이런 풍경들이 날 유혹하고

동네 할머니가 지나가면, 마치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듯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물론 그 할머니가 나를 알 리는 없지만 역시 시골이라 그런지 전혀 거리낌없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준다.

 

의외로 소야노네 가족과 몇 블럭 떨어진 곳에 살고있는 쇼야 군의 할머니만큼은

절대 사교적이지 않은, 꽤나 무뚝뚝한 표현력을 가진 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무뚝뚝함은 상대에 대한 경계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생 마을 이웃들 외엔 말 한번 걸어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의 본능적인 수줍음인 것을 느낄 수 있어서 기분 나쁘지 않았다.

 

 

 

3년 전 마을 사람들이 나에게 꼭 한번 보여주려고 데리고 가던 온타케 산의 풍경은 이번엔 시간이 부족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산과 함께 살아가는 나가노 중부의 키소 마을과,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많은 마을들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산이 이 온타케 산(御嶽山이다.

 

한국처럼 등산가기 좋은 친숙한 산이라는 느낌보다는, 마을의 조상님쯤 되는 신성한 산으로 추대받고 있어서

그만큼 이 산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라고 할까, 자부심은 굉장한 수준이다.

 

해발이 높은 산인데다가, 나가노 산맥의 특성상 기후 변화가 심해서 깔끔한 봉우리를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보는 온타케 산의 위엄은 굉장한 것이었다.

 

 

 

점이 아니라 선의 형태로 아름다움을 간직한 한국의 산맥과는 달리

온타케 산은 화산의 분화로 생성된 독립봉으로, 일본 최대의 산맥지역인 나가노 중앙알프스 산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엄을 자랑한다.

 

해발 3000 미터를 넘는 산 중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지진대 중앙에 위치한 산인데다가, 아직까지 가끔 연기도 나는 활화산이기 때문에 마냥 인자한 녀석만은 아니다.

예로부터 후지산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신성한 산으로 유명한 녀석이라, 한국 등산객들도 상당히 많이 찾는 산.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지역에서 밤 9시쯤 출발하면 정상에서 새벽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키소 주민들이라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광경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물론 쇼야 군은 나보고도 많이 꼬셨지만, 자전거 여행의 여파로 지친 데다가 주 6일 아르바이트로 바쁜 본인이라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자전거 여행이 끝난 지금은 날 잡아서 소야노 가족들에게 연락해 놓고 일출 보러 가 볼 생각을 하고 있다.

등산은 특히나 나이와 별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레져인지라 급할 거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야노네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덕을 내려오는 소야 군과 딱 마주쳤다.

원래 연락도 하지 않고 놀래켜 주려고 슬금슬금 이동중이었고, 소야 군은 올해부터 도쿄로 자취하러 갔다고 들었던 터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보다 쇼야 군이 더 의아했을 듯. 뭔가 낯익은 사람이 올라오긴 하는데 설마 그게 나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몇 초간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후 드디어 나라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서프라이즈를 기대했는데 이렇게 집앞 길위에서 만나버리니 오히려 긴장이 풀려서 안면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쇼야 군은 마침 도쿄에서 다니던 자전거 전문학교가 방학이라 본가로 돌아온 참이라고.

사실 본인이 소야노 집에 찾아간다고 전화를 하지 않은 것에는 쇼야 군의 사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괜히 내가 간다고 말했다가 쇼야 군의 귀에 들어가서, 무리하게 키소까지 돌아오는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인간의 인연은 항상 우연이 필연처럼 얽히는 묘한 타래와 같은 것이라,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고 만다.

 

쇼야 군이 집에 들어가며 깜짝 손님이 왔다고 어머니한테 소리를 친다.

쇼야 군의 어머니는 하반신 마비라 전용 침대에 누워계시는데, 이때만큼은 너무 예의없는것 아닐까 걱정이 된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얼굴을 보여드려도 처음엔 누군지 잘 모르는 표정이었는데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하자 목소리로 구분을 했는지, '리 상~' 하면서 깜짝 놀라주신다.

 

대낮 시간대에 침대에 누워있다는 점이 마음에 좀 걸렸는데, 어제까지 열이 약간 있어서 쭉 쉬고 있었다고.

소야노 어머니의 상처는 자동차 사고로 생긴 척추 골절이라, 단순히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 외에도 여러가지로 몸이 아플 때가 있다.

몸 아픈데 괜히 신경쓰이게 하는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소야노 어머니는 오늘 거의 다 나았으며, 오랜만에 내 얼굴 보니 굉장히 기뻐서 기운이 난나고 웃으며 대답해 준다.

 

젊을 때 간호보조사, 노인복지사 등등 봉사활동과 관련된 일이라면 안해 본 것이 없는 분이라

자동차 사고가 난 뒤 허리 아랫부분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상 위에서 깨달았을 때에도

'어차피 나이 더 들면 휠체어 생활하는데, 조금 더 앞서서 체험하는 것일 뿐' 이라고 생각할 만큼

누구한테나 웃음을 잃지 않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 주는 편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힘든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쪽에서 항상 순진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 미소만큼은 정직한 것임에 틀림없어서

이 분와 이야기 할 때마다 나는 많은것을 배우고 얻어간다. 나에게는 인생의 스승 중 한명이나 다름없는 분.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넓은 소야노네 이층집은 여전히 별로 변한 게 없다.

차이점이라면 어머니 몸이 불편해 쇼야 할머니 집에 맡겨놨던 '리쿠'라는 푸들 강아지가 다시 집에 돌아와 있다는 점 정도.

 

리쿠는 쇼야 할머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그곳에서는 되게 우울해 했고, 할머니 쪽도 힘들다고 해서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시 이쪽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물론 리쿠는 엄청 기뻐하며 쇼야네 어머니한테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사진은 내가 생활하던 현관 옆 빈방이었는데, 여행중 묵었던 어떤 비즈니스 호텔보다 더 넓은 방이었다.

물론 사람이 살던 방이 아니라 에어콘이고 뭐고 없어서 여름에 상당히 덥긴 했지만

자전거 여행중의 본인은 이미 불편함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선풍기 한 대만으로도 천국일 뿐.

 

소야노 집안의 특징 중 하나로, 소야노 어머니 한분 빼고는 도무지 '정리'와 '청소'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를 잇고 이어 수백년간 시골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한정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생각 자체에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냥 예전처럼 창고 하나 뚝딱 만들어서 거기다 뭐든 집어넣어 버리면 해결된다는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애초에 시골 토박이일수록 쓰레기를 버린다는 개념도 없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다 싶으면 그냥 창고행이다.

 

몇년 전 화재로 창고가 없어졌다지만, 당시 그 창고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거울이나 갑옷, 검도 있었고

개화시대 초기 물건으로 추정되는 나무 벽걸이 시계 등등... 온전한 상태였다면 진품명품에서 고가에 팔릴만한 녀석들도 있었다고.

그러니까 이쪽 사람들은 500년 전의 물건도 자신들한테 쓸모없다고 그냥 창고에 처박아 놓는 그런 부류란 것.

 

현대식 주택에 살아도 그 마음가짐만은 훌륭히도 변한게 없어서

소야노 어머니가 몸이 멀쩡할 때는, 천성적인 깔끔함으로 그래도 집안이 깨끗했지만

몸을 다친 이후로 2층에 올라갈 수가 없게 되고나서는 그냥 포기해 버렸다고.

지금은 리쿠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3년 전보다 좀 더 지저분해 진 듯 하다.

 

본인도 방이 돼지우리라고 엄니한테 지탄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엄니를 소야노네 집으로 한번 초대하고픈 생각이 소떼처럼 밀려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마 엄니가 이쪽 집안 모습을 본다면 기절하실것 같지만.

 

 

 

소야노 어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여기저기 전화하기 바쁘다.

나한테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준 친구 카미무라 씨한테 연락해서 누가 우리집에 왔는지 맞춰보라고...

사실 이렇게 조용히 온 것도, 그냥 혼자 돌아다니면서 한분 한분 인사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렇다고 좋아서 여기저기 전화 걸고 있는 소야노 어머니를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카미무라 씨 따님은 내가 여기서 지낼 때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은 키소후쿠시마의 작은 선술집에서 남편과 함께 가게를 열고 있다.

거기서 저녁 한 끼 하면 어떻겠냐고 이야기가 나와서 전화해 보니, 불행히도 저녁에 가게 전체를 빌리는 모임이 있다고.

 

본인은 일단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 전해주고 인사하는 것만 목표로 삼았지만

그 가게 술의 수준도 그렇고 안주나 음식 수준이 상당한 편이라 살짝 아쉽긴 했다.

 

카미무라 따님의 시어머님, 그러니까 남편의 어머니 되는 분은, 내가 가니까 놀랍게도 김치를 작은 접시에 담아 주셨다.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무치와는 달리 진짜 삭아있는 한국식 김치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부산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배워온 것이라고. 외국인이 그 정도 경험으로 김치를 담글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아주머니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술과 요리가 참으로 맛있었던 곳.

 

카미무라 씨 일행과는 저녁 함께 먹기로 했고, 소야노 아버지는 오늘 일때문에 늦게 오신다고 하니 밤에 집에서 맥주나 한잔 하기로 한다.

그럼 시간 있을때 아르바이트로 신세를 졌던 소바집에가 가보려고 하니

소야노 어머니가 차로 태워주겠다고 자꾸 호의를 배풀어 주셔서 살짝 난감하기도 했다.

사실 자전거로 15분 가까이 걸리는 거리라 걸어가려면 왕복 1시간은 넘게 잡아야 하는 곳이긴 하지만

가는 길의 풍경이 워낙 좋아서, 사진이나 좀 찍으며 느긋하게 즐길까 싶었던 나의 계획은

그러고보니 이쪽 가족들이 내가 그렇게 발품 팔도록 놔두지 않으리라는 기본적인 추측을 하지 못함으로서 멋지게 빗나가 버렸다.

 

3년 전 내가 신세를 지던 당시 소야노 어머니는 상반신만으로 운전 가능한 특수차량을 주문해 받았고

타고 내리는 것까지 남의 도움 필요없이 혼자서 모두 해낼 수 있는 차량이라서

장거리를 제외한 많은 곳을 혼자 운전해 돌아다니며 집안에 틀어박히는 스트레스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역시 시간이 지나서인지 아주 능숙하게 휠체어에서 운전석으로 이동하고, 후크에 휠체어를 걸어 자동차 위쪽의 보관대에 집어넣고

두 손으로 엑셀과 브레이크도 자연스럽게 밟아가며 순식간에 나를 소바집 앞에 내려놓아 주셨다.

 

유턴해서 다시 올라가는 소야노 어머니 차량을 지켜본 다음에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서 소바집 쿠루마야(くるまや)의 전경을 담아본다.

원래 쿠루마야는 창업 300년이 넘은 전통있는 소바집인데, 오리지날은 마을 안쪽 거리에 아직 영업중이고

이곳은 예전 가족들이 분가하면서 도로가에 새로 만든 쿠루마야이다.

드라마처럼 사이가 틀어져서 분가한 건 아니고, 추구하는 맛이 달라서 하나 더 차린 것이라고. 이름도 두 가게 모두 '쿠루마야'를 쓴다.

 

이곳 사장님은 서글서글한 거구로, 음식에 대해서는 엄청난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장인이다.

마을 소방대 단장을 맡을정도로 활동적이면서도 매우 세심한 성격을 가진 분으로,

가게 바로 옆 키소 경찰청 사람들이 회식왔을 때 모두들 앞에서 '한국서 자전거 여행하며 알바하는 리 군'이라고 아주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정도라

쑥쓰럽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잘 봐달라고 부탁하는 의미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만큼 고마운 사람도 없다.

 

그 사장님 눈썰미가 아주 좋은 편이라, 길 건너에서 사진찍고 있는 나를 주방 창문에서 단박에 알아보시고 '리 군~' 이라고 소리를 친다.

요리를 하면서도 항상 창가에서 손님이나 가게 관계자가 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분이라, 3년만의 재회도 순식간에 파악해 버린다.

 

 

 

가게 입장에서야 좋은 일이겠지만, 점심시간을 넘겨 왔는데도 손님이 상당히 많아서 바쁜 편이다.

사장님과 인사를 한 후 주방쪽으로 들어가자 모든 직원들이 몰려들어 반가움을 표시한다.

직원 대부분이 친인척이고, 그렇지 않은 직원 아저씨도 10년 넘게 함께 해 온 분이라 모두들 가족이나 마찬가지.

 

본인 역시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한 몸이라, 일부러라도 돈 내고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그걸 허락해 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척하고 내어주는 소바를 감사 인사와 함께 후르룩 빨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내가 평생 먹어본 소바 중에서 최상의 맛을 자랑하는 녀석.

 

소바는 전문가 수준의 매니아가 되어야 알 수 있는 미묘한 맛도 있지만

나같은 일반인 레벨에서는 면의 목넘김과 소스의 깔끔한 맛 정도로 판단하는 수준.

이곳 소바가 너무 맛있어서 소야노 어머니한테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소야노 어머니도 이곳에서 한번 먹어보고 이 주변 소바집 중에서도 상당히 맛있는 편이라고 감탄하시는걸 보면

절대 맛 없는 소바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참고로 이 주변은 일본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소바 가게가 진을 치고 있다. 이곳에서 망하지 않고 장사한다는 것만으로도 레벨 보장은 된다는 뜻.

 

 

 

할아버지 한 분을 제외하면 건장한 남성 두 명이 모두 주방 요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힘쓰는 일은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때 운 좋게도 내가 바이트를 시작하면서 2층에 음식 나르기나 설거지 등의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초보 알바생 치고는 나름 도움이 되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일하는 내가 미안할 정도로, 틈만 있으면 앉아서 쉬라고 자리 내 주고 커피 타 주고 과자 주고 했는데

바이트 하면서 마음이 이렇게 편했던 적이 과연 한국에 있었던가 지금도 생각해 본다.

 

오랜만에 주방에 앉아있으니 다시 몸이 근질근질해서, 자기가 먹은 소바 그릇이라도 좀 씻으려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니

사모님이 웃으면서 일 안해도 된다고 말리신다. 하지만 기분은 이해하시는지 심하게 말리진 않는다.

괜히 안절부절하게 앉아있는 것 보다는 슬쩍슬쩍이라도 일 도와주는게 역시 맘 편하다.

 

강력한 성능으로 인해 한동안 나의 손가락 끝을 화끈하게 해 줬던 스팀세척기도 여전히 잘 작동중이다.

여름엔 쪄 죽을듯 했는데 겨울이 다가오자 세척기의 스팀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변화무쌍함이 음식점의 주방이라는 곳.

 

 

 

이곳에서의 수많은 추억은 간단히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좀처럼 끝이 나지 않을듯 하다.

내가 바이트 하던 당시의 미친듯한 혼잡함과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시간대에 비해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던 터라 약간의 미안함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서 그 때의 충실한 하루하루를 되짚어 본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은 이제 대학교 가서 집에는 없다고 하고

소바집 딸내미이면서 메밀 알레르기가 있는 따님은 내년에 결혼한다고 한다. 역시 변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사람만은 같은 시간을 걷는다.

 

2층 단체손님 지나간 자리를 정리하면서 '아들내미의 우유부단함에 대해' 걱정하던 사모님의 고민거리도 들어줬고

메밀 알레르기로 소바를 먹지 못하는 딸을 위해 볶음밥이나 카레 덮밥 같은 굉장한 요리들을 척척 만들어 던져주던 사장님의 모습도 새록새록하다.

 

젊은 시절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음식 수련을 한 사장님이라, 이런 주방과 조리도구만 있으면 못만드는게 없다.

지금 생각하면 참 황당하지만, 소야노네 가족이 사정상 1박 2일로 멀리 떠나가면서 나한테 집을 맡겨놓은 상황도 종종 발생했는데

그럴 때 편의점 도시락을 사 가려고 하니 사장님이 아무 말 없이 즉석해서 눈물나게 맛있는 도시락을 훌쩍 만들어 건네주시곤 했다.

당연히 다음 날 도시락을 씻어서 돌려드리며 500엔을 함께 드렸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프로 요리사들에게는 그만한 값어치를 지불하는 것이 예의니까.

 

 

 

소바를 끓이는 거대한 가마솥은 항상 열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뒤쪽에 이렇게 소바를 놓는 대나무 판을 씻어서 올려놓는게 내 소소한 일과중 하나였다.

워낙 뜨거워서 아주 바싹하게 잘 마르는 곳이었으니. 의외로 겹치지 않게 착착 늘어놓는 이 일도 꽤나 재미있었다.

 

사모님은 굉장한 여장부이면서도 접객에 일가견이 있는 만능인으로

거대한 체구의 사장님이 요리 장인이라 그런지 젊으면서도 우직한 면을 가진 반면

여러가지로 도심지의 아이덴티티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분이라, 주방 외의 가게 주인이라 할 만하다.

 

체력적으로는 역시 건장한 사장님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바쁜 하루가 끝나는 날엔 꽤나 힘들어 하시기도 하는데

이 정도 가게를 열면서도 평생 여행한번 제대로 갈 시간이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과 함께,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란 것을 세삼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격일로 출근하시는 할머니께서 쉬는 날이라 전 멤버가 다 모이진 않았지만

내가 해 왔던 어떤 일보다 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던 이곳 소바집 멤버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손님이 적은 편도 아니었는데 이곳 역시 소야노 쪽과 마찬가지로 휴게소까지 차로 태워주겠다고 한다.

사진도 좀 찍고 싶었기에 걸어서 올라갈 거라고 하니 꽤나 힘들고 시간 많이 걸린다면서 자동차 시동을 건다.

하긴, 나라는 사람은 이곳에서 애초에 혼자 걸어다닐만큼 홀로 서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삼 깨닫는다.

 

1년간의 자전거 여행동안 질리지도 않고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달려왔던 본인도

이 마을에서만큼은 그 고독을 즐길 여지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한국에서라면 솔직히 기분 좋지만은 않은 일이겠지만 이곳은 고독하지 않아도 괜찮은 극소수 장소 중 한 곳이다.

뭔 배짱인지 지역 신문기자가 기사를 쓰고 싶다고 하는데 승락을 해 버리는 바람에 신문에도 나와버렸으니...

 

다음엔 좀 더 많은 지인을 데리고 와서 소바 맛을 좀 보여주고 싶다고 인사를 하며 추억의 쿠루마야를 뒤로 한다.

휴게소에 내려서 매번 하던 것처럼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캔을 뽑아 마신다. 이 날은 담배가 없어서 그건 패스하고.

소야노 집으로 돌아갈 필요없이, 도로 건너편의 카미무라 씨네 가게에 소야노 일행이 도착해 있다고 한다.

소바도 얻어먹고 해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이런 날은 배가 터지더라도 이 사람들의 환대에 대답하는 것이 도리일 터.

쿠루마야의 추억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정갈한 모양새를 자랑하고 있는 카미무라 가게로 들어간다.

 

다음날 여전히 화창날 날씨와 함께 짐을 챙겨 마츠모토 역으로 향한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원맨 열차 시각이 아직 남아서 역사 바깥의 모스버거에서 모닝 세트를 주문해 놓고 시간을 때운다.

시간이 널널하리라 생각했는데 체감상 그 작디 작은 모닝세트를 허겁지겁 먹어치운다고 느낄 정도로 여유가 없다.

아마도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일 듯.

 

원맨 열차는 차량에 승무원이 한 명밖에 없는 열차로, 승객이 그렇게 많지 않은 구간이나 무인역이 많은 구간에서 운용한다.

한국과 달리 거리별 운임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일본 전철이기 때문에

무인역에서 정산할 수단이 마땅히 않은 바, 원맨 열차의 전철 끝 기관사쪽 문을 통해서만 내리게 되어 있다.

그 앞의 요금함 안에 본인이 내야 할 요금을 내는 방식.

 

그래서 무인역에서는 다른 출입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열리는 경우는 타는 사람이 바깥에서 버튼을 눌렀을 경우 뿐.

은근히 요금 안내고 타는 사람과 타이밍 맞춰서 나갈 수도 있겠다 싶지만

철도원들의 승객 체크는 의외로 철저한 편이고, 한적한 곳인 만큼 한번 찍히면 자칫 벌금 크게 물 수도 있으니

그냥 이런 허술함 역시 시골의 여유와 낭만의 일부분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는게 좋을 듯 하다.

 

1시간 반 가까이 전철을 타고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은근히 기억이 날 듯한 모습이 차창을 스치고 지나가면 문득문득 가슴이 지려오는 기분이다.

중간에 나라이(奈良井)역에서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한다. 대부분이 등산복 차림을 한 노인 관광객들.

 

과거 쿄토와 도쿄를 잇는 내륙도로 나카센도(中仙道)의 유명한 숙박지였던 나라이는

아직까지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중요 관광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구경하러 온다.

 

나라이에 도착했다는 건 목적지와 가까워 졌다는 의미. 괜히 카메라를 꺼내 추억속의 풍경을 찍어본다.

 

 

 

하라노 역에 내리니 잠에서 깨어난 듯 신경이 예민해지는 기분이 든다.

처음 이곳에서 마츠모토나 나가노로 놀러 갔을 때는

전철역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고요하고 자연 풍만한 이곳 모습이 놀라고

한 시간에 한 대라는 차를 놓치면 어떻하나, 무인역이라는데 표는 어디서 뽑는건가 하면서 쓸데없이 긴장타던 기억이 난다.

 

그런 안절부절마저도 결국엔 아련한 아쉬움과 즐거움의 흔적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추억이란 녀석인 듯.

 

 

 

원래는 직원이 상주하던 유인역이었다.

매표소였음에 분명한 곳은 아크릴 시간표로 단절의 의사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3년만에 이 모습을 다시 접하니 지브리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海か聞こえる) 마지막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일본의 무인역이라 하면 이곳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북쪽 무인역인 홋카이도의 밧카이(抜海)역이 나에게는 추억의 장소.

밧카이 역에서는 먹을것에 낚여서 NHK 에 출연하기도 하고, 하룻밤 자고 가기도 했는데

이곳 하라노 역은 바로 옆에 쇼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굳이 이 안에서 텐트 칠 일은 없었다.

 

 

 

역을 나오고 나서부터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추억의 집합체일 뿐이다.

첫 여행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평범한 풍경이지만

나의 이번 여행에는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다. 그 위에 다시 색을 덧칠하는 마음은 각별한 것이다.

그래서 여행에 대한 나의 지론은 확고하다. '간 곳에 또 가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 여행'이라고.

 

당시 자전거 여행중이다 보니, 동네 슈퍼를 가도 항상 자전거로 이동했었고

당연히 마츠모토나 나고야, 나가노에 놀러 가려고 이곳 역으로 올 때도 자전거를 타고 와서 이곳에 세워놓았다.

2~3일 동안 무인역 앞에 고가의 자전거를 세워 놔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곳이었고

히로시마 근처에서 짐을 도둑맞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일본에서 안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여행이란 건 남한테 자랑하려고 떠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지만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은근히 드러낼 때의 뿌듯함은 분명 인간의 본능이리라고 이해는 한다.

단지 그것이 소요되는 시간과 금전의 양에 좌우되어

그곳에 쉽사리 가지 못하는 부류와의 비교가치로서 이용될 때 구린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 문제일 뿐.

 

그런 면에서 이곳 하라노는, 나에게 있어서는 은근히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그런 비밀스러운 가치를 지닌 곳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광객도 이곳을 일부러 찾아오거나 부러워 할 일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도리어 마음이 편한 곳이기도 하다.

 

하라노 역 바로 옆에는 이 부근에서 가장 활성화된 키소후쿠시마(木曽福島)가 있어 그곳에 온천, 여관 등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관광객이 이곳에 올 일은 없다. 단지 자동차나 바이크 여행을 즐긴다면 큰 휴게소가 있어서 자주 들르긴 하지만.

 

아무런 특징 없는 이곳 풍경이 나에게는 죽은 세포를 되살리는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걸음을 뗄 때마다 3년 전의 일상과 겹쳐지기 때문에 좀처럼 쇼야 가족네 집까지 도달하기가 힘들다.

하라노 역과 쇼야네 집 사이에는 나가노의 허리를 관통하는 주 도로가 나고야까지 주욱 이어지고 있는데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무서운 트럭들 사이를 조심하며 건너거나

조금 돌아가긴 하지만 도로 밑으로 난 터널을 살짝 통과해 건너거나 한다.

 

횡단보도쪽으로 건너가도 괜찮긴 하지만, 횡단보도 바로 앞 가게가 본인과 큰 인연이 있는 집이라서

가능하면 쇼야네 집 사람들과 인사하는걸 첫 번째로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곳을 피해 밑으로 건너갔다.

추억이란게 이렇게도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큰 원료가 되는 녀석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뭐하고 있는건가 싶기도 하다. 겨우 3년만에 만나는 사람들인데 말이지.

 

 

 

건널목을 건너면 휴게소가 보이는 저곳으로 올라오게 되고

터널을 지나 샛길로 올라오면 여기에서 합류한다. 쇼야네 집은 여기서 고개를 돌려 반대쪽 언덕으로 간다.

 

하지만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휴게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인과 만나는 것은 쇼야네를 처음으로 하고 싶지만, 나는 이곳에서도 혼자임을 즐기는 시간이 많았다.

나름 체력을 요하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상당한 경사를 자전거로 올라 이곳 휴게소에 도착하는 저녁 무렵엔

항상 벤치에 앉아서 음료수 한 캔과 담배 한모금으로 노을에 취하는 게 일과였다.

 

 

 

3년 전은, 본인 뿐만 아니라 쇼야 군에게도 여러가지 변화와 고통을 감내해야 할 시기였다.

친구가 적었던 쇼야 군의 소울 메이트가 자위대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시기였고

여전히 일본 일주 도중이긴 했지만 쇼야 군 역시 스스로 변화해야 함을 인식해야만 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쇼야 군의 심리에 나라는 정체불명의 외국인이 끼어들어 몇 달간을 함께 한 시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나에게도 그의 고민과 고통은 무시할 수 있는 남의 감정이 아니었다.

키소의 풍요로운 풍경은 전혀 변함없이 나를 차분히 들뜨게 하지만

사람들끼리의 인연이란 시간과 공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항상 변화하며 서로 맞물리고 때로는 흩어지며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시골은 정비가 워낙 잘 되어있어서

한국과 가장 이질감이 많이 느껴지는 지역 중 하나이긴 하지만

특히나 이곳 키소 마을은, 시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어색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아담한 주택이 많다.

 

당연히 빈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굉장한 부촌도 아닌듯 하고

그럼에도 2층 주택과 그 앞의 텃밭, 마당의 조합은 키소의 대자연에 위배되지 않는 제한선이라도 갖고 있는듯

과시라는 인간의 욕망을 거세해버린 느낌의 조화로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휴게소로 내려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판기에서 싸고 양 많은 탄산 오렌지 쥬스를 하나 뽑아들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짐을 내려놓은 후 한숨을 한번 내쉰다.

 

인생에서 단 3개월간의 순간이었지만, 이곳은 나에게 있어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아무리 더워도 그늘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냥 주위 모든 풍경을 다시 한번 시야에 담아낼 뿐.

이렇게 한숨이 자꾸 나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버스나 자동차로 관광하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이곳 휴게소에 내리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내륙도로 나카센도의 거리상 정중앙이 바로 이 지점이기 때문.

 

이 지점이 쿄토와 도쿄간 거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곳이기도 하고

마침 이곳에 서면 저 멀리 키소 8경중 하나로 유명한 키소 코마가타케(駒ヶ岳)의 석양을 즐길 수 있다.

 

코마가타케는 당시 한국인 등산객이 사망한 그 산과 인접해 있어서

저 아름다운 풍경이 그리 우습게만은 보이지 않게 되기도 했다. 해발 3천미터 산을 그렇게 쉽게 오르려 하다니.

 

관광객들에게는 그냥 중앙에 가족 세워놓고 한장 찍는 정도의 장소이겠지만

본인은 매일 저녁 이곳에서 눈으로 보면서도 신기하게만 느껴지는 풍경의 변화를 즐기고 또 즐겼다.

 

 

 

주차 공간은 매우 넓지만 크게 특색있는 휴게소는 아닌 이곳은

시골 휴게소들이 그렇듯 반쯤은 마을 주민들의 시장같은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다.

 

휴게소는 보통 지역의 유명한 먹을거리를 주무기로 삼는데

키소는 철마다 다양한 채소가 유명하긴 해도, 장사가 되는 요리를 꼽을만한 게 별로 없는 듯.

키소엔 일본에서 소바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라 휴게소가 소바 팔아봤자 느낌이 오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날부터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이곳에 머물렀는데

해발 2천미터 산맥 양쪽의 계곡을 따라 형성된 이곳 마을과 도로는

일반적인 산보다 훨씬 대기의 흐름이 변화무쌍해서, 갑작스러운 비는 이미 갑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를 훨씬 좋아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계곡사이 마을인 키소라는 곳의 끝없이 다양한 모습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곤 했다.

 

3년 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힘겹게 휴게소까지 돌아와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폭우와 동시에 찬란한 햇살이 옆에서 치고 들어오듯 반짝이는 그 풍경은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다행히도 아르바이트 하러 가면서도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녔기에 담을 수 있었던 사진.

 

 

 

스펙트럼이 원래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지개가 떠도, 무지개 위쪽과 아래쪽의 하늘색이 전혀 다른 이런 풍경도 신기했다.

이건 키소만의 특징은 아니겠지만, 사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떡하니 나타나는 무지개를 그만큼 본 적이 드물었다는 이유도 있고.

 

그 외에도 밤에 산책 좀 하려고 손전등 하나 들고 휴게소로 내려오면

음료수 자판이 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청개구리떼가 너무 귀여워 흥분하던 기억도 난다.

20여년 전만 해도 비만 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청개구리가 이렇게 반가워지는 시대다 보니

세삼스럽게 이곳 키소가 정겨워지는 이벤트였다.

 

 

 

나가노의 산들은 옷을 빡빡하게 입고 있는 편이다.

이곳 지역의 삼나무들은 매우 곳도 굴고 단단한 상품으로 유명해서

황제의 궁전이나 각지의 주요 신사의 기둥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국가 소유의 재산이었다.

 

당시엔 워낙 귀한 삼나무였고, 아무리 산골 깊숙히 위치한 이런 마을이라고 해도

땔감이나 가옥의 유지 보수 등 나무가 풍족하다고 할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몰래 삼나무를 베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탓에, 일본 정부에서는 당시 삼나무 숲을 관리 감독하는 직책을 만들고

그 감독관에게는 살인면허의 일종인 키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이라는 무사들의 권리가 주어졌다.

 

'키리스테고멘'이란 무례를 범한 상인, 농민계급을 무사가 칼로 죽여도 면책받을 수 있다는 법으로

상상과는 달리 매우 엄격한 규칙에 의거해 있고, 죽인 후에도 강도높은 조사를 받는데다가

설사 정당방위로 죽였다고 해도 칼을 압수당하고 무조건 20일간 구류를 당하는 등, 무식할 정도로 야만적인 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삼나무의 관리직은 생계가 힘들어 나무를 훔치는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무자비한 감독관이었기 때문에

지역 농민들에게 적대감을 많이 살 수 밖에 없는 관직이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쇼야네 가족이 그 감독관의 후손. 물론 지금은 마을 사람들끼리 악감정 같은 거 없지만

가끔씩은 쇼야네 가족들 입에서 스스로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때 불쌍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가문에 안좋은 화가 낀 건 아닌가 하고.

 

 

 

위쪽 사진 오른쪽을 보면 바위같은게 보이는데, 그걸 확대해서 찍어보았다.

뭐, 관광 상품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이름도 없는 바위인데

쇼야 군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정말 큰 비가 와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그 바람에 정상 부근에서 굴러 떨어져 박혀 버린 바위라고.

 

당시엔 마을 전체가 피난가야 하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큰 산사태였다고 하니

저렇게 어마어마한 바위도 굴러내려오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다. 주위 나무를 보면 알겠지만 집채만한 바위다.

 

쇼야 군은 집에 있을때 심심하면 저곳에 올라가 바위 위에서 풍경 바라보는게 일상이었다고.

나보고도 몇번 가보자고 꼬시긴 했는데, 사실 저 산은 등산을 위한 산이 아니라 제대로 나 있는 길이 없다.

특히 저 바위로 향하는 루트는 정상까지 올라가서 다시 내려가야 하는데, 거기는 이곳 토박이들이 아니면 지나갈 수도 없는 길이라서.

 

자전거 여행으로 많이 지쳐있을 때라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혹시나 다시 산사태로 바위가 이사가기 전에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약 30분간 휴게소를 거닐며 떠오르는 상념을 즐기느라 머릿속이 바쁘다.

소야네를 만나기 껄끄러워해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했던 그대로의 풍경이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지는 걸 보고 굉장히 가슴이 벅차오른 탓.

 

다시 이곳을 찾아온 게 역시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자연은 시시각각 나를 만족시켜 주고, 지루할 틈 없게 만들어 준다.

 

자전거 여행중 만난 인연이 이렇게 확대되고 확대되어

지금은 새로운 가족과 고향이 생긴 것 같은 큰 마음 속 덩어리가 되었으니

훗날 너덜너덜한 인생을 뒤돌아보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때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웃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04년 쯤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가던 도중이었는데요.
몸이 안좋아서는 아니고, 예전에 평범한 검사 하나 예약해놓은거 받으러 가는 중이었죠.

라디오에서 제가 한국 영화의 명작중 하나로 꼽는 '지구를 지켜라'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까지 그 영화를 보지 않았거든요. 봐야지 봐야지 하는데도 계속 미루고 있었던 터라.

그 놈의 라디오에서 '이제 볼 분들은 다 보셨으니 이야기 하는건데요...'
라면서 영화의 중요 내용을 까발리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화 까발리기 등에는 굉장히 민감해서, 일부러 저한테 안 본 영화내용을 까발리는 친구하고는 절교도 할 정도입니다.
당황한 저는 머리를 숙이고 귀를 막고 입을 껌뻑껌뻑하면서 그 라디오 소리를 안 들으려고 고생했죠.
택시 기사분께 '라디오 좀 끄세요!'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고, 그러다가 다 들어버릴 것 같은 타이밍이라서... ㅡㅡ;

한 몇분 그러고나서 슬그머니 귀를 풀고 고개를 드니 다행히도 영화 이야기는 넘어가 있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니까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근심어린 얼굴로 한 마디 하시더군요.

'저기, 응급실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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