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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야산'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03.29  엄니와 함께 - 코야산 단상가람 6
  2. 2014.03.11  엄니와 함께 - 코야산 오쿠노인 (2/2) 8
  3. 2014.02.05  엄니와 함께 - 코야산 오쿠노인 (1/2) 6
  4. 2012.06.08  킨키 방황 - 일기일회 18
  5. 2012.06.06  킨키 방황 - The Two Towers 12
  6. 2012.06.05  킨키 방황 - 코야산 단상가람 18

 

여름에 왔을 때는 그래도 시야에 사람 한둘 정도는 보이곤 했는데

겨울 코야산은 시즌이 아닌지 자동차 말고는 사람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홀로 여행이었다면 매우 훈훈한 기분으로 경치를 즐겼겠지만

엄니와 함께 오니 '내가 지금 가이드를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설상가상으로 다이몬으로 향하는 버스도 승객은 엄니와 저 둘뿐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다이몬입니다. 여전히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네요.

이 녀석은 주위에 덩치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으면 사진으로 크기 가늠하기가 참 힘듭니다.

 

사진엔 나오지 않았지만 나이 지긋한 노인 몇분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동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엄니한테 덜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흐리고 눈발 휘날리던 날씨는 잠깐동안이지만 매우 화창해지곤 합니다.

그래도 날씨는 추위서 엄니는 오래 구경하기보다는 빨리빨리 구경하고 다음 코스로 넘어가길 바라시네요.

 

엄니는 단체 관광 여행을 많이 다녀오셨기 때문에, 그 타이밍과 비교하면 확실히 제가 좀 느린 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여행이란 건 역시 남과 리듬을 조율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죠.

 

 

 

걸어서 험한 산길을 넘고 넘어 비로소 도착한 이 코야산의 정문 앞에 도착했던 순례자들의 기분이 어땠을런지.

 

사찰과 문화유산의 도시인 나라와 비교해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별로 모자랄 것 없는 이곳이라도

이렇게 한산한 모습인 것은 역시 접근성의 차이에서 기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가 완벽히 관광지화 되었다고 한다면

이곳은 진언종의 총본산 답게 불교 문화에 대한 좀 더 깊은 성찰을 위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편입니다.

 

이곳 산길 중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키이(紀伊) 산지의 침례도라는 길이 있는데

제 대학원 교수님께서 작년에 그 침례도 투어에서 가이드 역할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그쪽 침례도에서는 가이드분이 특정 구간마다 시를 읊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예절이 존재하는데

그 교수님께서 고문학 전공을 하셔서 동료 교수분들께 그 시를 해석해 주셨다고 합니다.

 

 

 

키이 산지의 침례도는 짐을 수십 Kg씩 실은 여행용 자전거로는 달리기가 너무나 힘든 곳이라

제가 자전거 여행할 때는 그 밑의 일반 도로 갈림길 휴게소 앞에서 텐트 치고 하룻밤 묵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밤에 트럭 기사분이 잠깐 주차를 해서 이야기 좀 나누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젊은 기사분은 가끔씩 여유있을 때 일부러 침레도 쪽을 트럭으로 달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다이몬 구경을 마친 후 단상가람쪽을 향해 걸어갑니다.

코야산처럼 천혜의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은 여름과 겨울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재미있더군요.

 

그것도 저처럼 여름의 코야산을 와 본 사람에게나 적용될 말이지

엄니께서는 인적도 없는 겨울 시골길을 처음 걸어보셨으니 어떤 기분이셨을지.

 

그래도 참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라고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곳을 좋아는 하지만 그래도 도시의 편의성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도시 토박이 엄니께서는 이런 마을이 나름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죠.

 

 

 

단상가람은 눈이 거의 녹지 않았습니다.

여름의 찬란함을 더해주던 침염수가, 겨울엔 오히려 햇빛을 막아주는 바람에 눈이 그대로 쌓여 있네요.

 

2013년 1월의 대구는 눈 구경도 하기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나름 이 때는 눈 구경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 달 후에 전 아예 눈 속에 파묻히는 일을 경험하게 되지만.

 

 

 

엄니는 개한테도 목도리 걸어놨네 하면서 재밌어 하십니다.

구경 포인트가 특이한 건 유전인가 싶었네요.

 

여름과 비교해서 모든 모습이 확 바뀐 느낌이지만

인공물인 토이리만큼은 홀로 더욱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색채가 약해진 코야산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실제 토리이는 이런 색깔이 아니지만 왠지 대비를 좀 더 주고 싶어서 손을 봤습니다.

사람이 보글보글하는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산 속의 고요한 사찰이라서 그런지

이 조그만 토리이가 가지는 존재감이란게 더욱 크게 다가오더군요.

 

이곳도 내년 즈음에는 사람들로 미어터질거라 생각하니, 문화재 덩어리인 이곳이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 살짝 걱정도 됩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런 모양을 하게 되었을까요.

이 거목의 뿌리 밑부분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심히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하나의 나무가 아니라 몇 그루의 나무가 얽혀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찰 내부에 위치한 신사입니다.

 

이 녀석은 지난 여름 여행기 때 글로 설명은 했지만 담아온 사진은 한 장도 없었던 묘한 사정을 갖고 있는데

이번 여행기에서는 사진만 이렇게 담아오고, 설명은 예전 여행기로 떠넘겨 버리기로 합니다.

여름의 단상가람을 보고 싶으시면 제 블로그 검색해 보시길.

 

 

 

여름엔 자연에 둘러싸여 정진하는 수도승의 모습이 우러러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 겨울에 이곳에서 뼛속까지 시려올 걸 생각하면, 역시 수행이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겨울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엄니도 체온 유지를 위해서인지 저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여기저기 돌고 다니십니다.

 

 

 

홀로 여행과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제가 이렇게 사진 몇 장 찍지 않고 후다닥 돌아다닌 적은 처음인 것 같네요.

여행가서 증명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테고

그런 사람이라면 제가 카메라 들 때마다 찍어달라고 파인더 너머에서 튀어나오거나 그럴 텐데.

 

엄니께서는 '니 사진엔 관심 없다'는 식으로 마구 휘젓고 다니시니, 나중에 보여 드릴 사진이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사람 모습이 시야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이 풍경이 마음에 들긴 합니다.

전 여행 사진 찍을때도 가능하면 사람이 파인더 안에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라서.

물론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그래도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한 배려적인 면이 강하죠.

 

색채는 차분해지고 새들의 울음소리도 멈춘 겨울 단상가람이라도

사찰의 모습만큼은 변함없이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상가람의 중심 건물은 역시 이 근본대탑입니다만, 여전히 그렇게 인상적인 느낌을 주진 않습니다.

이제 다리가 아픈것도 아니고 해서 들어가 볼 수는 있지만 굳이 안 들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엄니께서도 그냥 밖에서 구경하지 들어갈 것 까지는 없다고 하십니다.

 

들어가면 나름 볼만한 것들이 있다는 소문인데, 사진 촬영 금지라서 더더욱 흥미가 동하지 않는 점도 있고.

 

 

 

그래도 근본대탑이고 하니 엄니 기념사진 한 장 찍어드립니다.

그런데 찍고나니 이게 엄니 기념사진인지 근본대탑 기념사진인지 모르겠네요.

 

 

 

코야산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 부동당과 함께 근본대탑을 담아 봤습니다.

결코 바래지 않는 불변성을 상징하는 붉은 근본대탑과

나무로 만들어져 사라지기 쉬움에도 800년 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부동당의 대비가 묘한 기분을 들게 하더군요.

 

 

 

1197년에 세워진 부동당입니다. 다른 사찰들이 화재로 소실되는 와중에도 이 녀석만큼은 살아남았죠.

사실 단상가람 안에서 크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물이 아닌데, 오히려 그렇기에 이렇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합니다.

 

역시 인생은 짧고 굵게 사는가 길고 얇게 사는가의 문제인 것일까요. 이 녀석들은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마을 인구당 사찰 수가 일본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보니

이게 절인지 민가인지 알 수 없는 곳도 꽤 있더군요.

 

겉으로 보기엔 문패도 달려있는 일반 민가로 보이는데, 언덕 위의 종루와 연결되어 있는 게 신기합니다.

종루로 연결된 길에는 왜 지붕까지 만들어 놓은 건지도 모르겠고.

 

 

 

오늘 하루만이라면 그렇게까지 무리한 일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쌓인 피로가 누적되고 있는 건지 돌아가는 곳에 도착하자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 기분이 듭니다.

 

오늘은 7시 전에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 듯 하니, 푹 쉬어야겠네요.

내일부터는 숙소를 옮겨서 나라에서 1박을 할 예정이라 더더욱 그렇습니다.

 

 

 

올라갈 때도 그랬지만 낭떠러지같은 모습을 보니 약간 섬뜩합니다.

이 무거운 전철을 지탱해주는 로프가 끊어지는 날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게 될테니까요.

 

 

 

코야산은 관광객을 위해 전철과 버스 시간이 철저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편리합니다만

그 편리함 때문에 지난 번 여행때부터 찍고 싶었던 풍경을 찍을 시간이 없어서 참 난감했죠.

 

이번에도 이미 대기중인 전철로 뛰어들어가는 도중에 간신히 한 장 남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코야산 산자락 밑의 풍경인데, 처음 봤을 때부터 매우 마음에 들던 모습이었습니다.

자전거로라면 아마 여기가 종점이겠죠. 세계문화유산 코야산 만큼이나 정겨운 모습의 오솔길이네요.

 

 

 

엄니나 저나 거의 녹초가 되어 꾸벅꾸벅 좁니다.

다행히도 코야산부터 오사카까지는 종점에서 종점이라 앉아가는 건 별 문제가 없었네요.

둘 다 성격이 예민해서 잠을 잘 못자는 편인데, 전철 안에서 고개가 홱 넘어갈 정도로 졸아 본 것도 오랜만입니다.

 

 

 

그래도 날씨가 많이 좋아지는 바람에 졸기 전에 한 장 담아봅니다.

전철 안이라 유리창 반사는 어쩔 수가 없는게 약간 아쉬웠지만.

 

대중교통을 타고 목적지와 목적지를 이동하는 이런 여행은 그 사이사이의 매력을 즐기기가 어려운 게 가장 아쉽더군요.

하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여행이란 건 평생을 걸쳐서도 몇 번 즐기기 어려운 녀석이니

이번엔 이런 식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5시 반쯤 오사카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돌아가서 푹 쉬어도 되지만

오사카를 떠나기 전에 식사는 맛있게 한번 즐겨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백화점 식당층에 올라가 뭘 먹을까 한번 둘러봅니다.

 

엄니께서 고기나 속에 부담되는 걸 별로 안좋아하셔서 결국 일식집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저녁 세트라는 게 있어서 다양하게 나온다고 하니 그걸 주문하고, 그 외에 몇가지 추가해 보기로 합니다.

 

한국에도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메뉴 밑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저 펜으로 꾹 누르면 자동 주문이 되는 재미있는 방식을 사용중이더군요.

 

 

 

초밥 전문점이 아니라 극찬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불만을 표시할 정도는 아니네요.

요건 제가 세트메뉴와 따로 주문한 초밥들입니다.

 

역시 오사카 중심가 백화점 식당가여서 그런지 가격대를 생각한다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피곤한데 여기서 더 움직여 맛집을 찾아다니고 할 생각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튀김요리도 기본에 충실합니다. 따뜻하고 아삭아삭하고 재료 신선하고.

간장이 아니라 소금에 살짝 찍어먹어도 괜찮습니다.

 

 

 

이런 곳의 저녁 식사시간이 다들 그렇긴 합니다만

먹고 즐기는 걸로 유명한 칸사이 지방이다 보니, 반쯤 개별실 같은 느낌의 방 안에 있어도

사방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려오네요. 엄니도 한국과 별로 다를게 없네 하십니다.

 

이게 참 맛있는 부위라고 하는데, 살은 별로 없지만 확실히 식감이 좋았습니다.

 

 

 

무슨 생선 머리를 간장에 쪄낸 녀석인데, 달달한 간장소스와 궁합이 좋았습니다.

생선의 머리부분이 맛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임에도, 전 먹을 살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죠.

역시 일정 이상의 질만 보장된다는 전제하에서 저한테 중요한 건 질보다 양입니다.

 

 

 

숙소로 돌아와 목욕을 마치고 나니 엄니께서 침대에 비닐 시트를 깝니다.

숙소가 작아서 따로 차 마실 공간이 없으니, 침대에 비닐 시트로 차 마실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제가 여행할 때는 절대로 비싼 숙소를 선택하지 않다 보니 이런 것도 꽤 익숙합니다.

 

이런 조그마한 비지니스 호텔에 들어와서까지도 차만큼은 마셔야 겠다는 엄니의 의지가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여행 가방에 이런 차 도구 세트를 가지고 여행을 나오신다는 거죠.

이게 일본 같은 가까운 지역 여행뿐 아니라, 미국 갈때도 항상 가지고 가십니다.

이게 만약 술이었다면 부부 불화의 엄청난 요인이 될 만한 상황이지만.

 

초라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지만 사실 이렇게 마시는 보이차라는 게 의외로 맛있습니다.

몸이 힘들수록 차는 더 맛있어 지는 법이죠. 이렇게 보면 술이나 차나 하는 일은 별로 다른게 없어 보이네요.

 

과자봉지는 이제껏 숙박하면서 사용하지 않은 일회용 칫솔 세트를 프론트에서 교환한 것입니다.

슈퍼 호텔은 환경 보호를 위해 일회용 세트를 사용하지 않으면 과자로 바꿔 주는데, 엄니와 저는 그런 거 다 챙겨 왔으니까 말이죠.

 

 

 

식사 후 백화점 지하에서 먹을거리를 좀 사 왔습니다.

역시 여행 중에는 비타민과 식이섬유 섭취에 난항을 겪는 경우가 많으니 일부러 먹기좋고 보관 편한 미니토마토를 사 왔죠.

 

일본에서는 이게 야채 취급을 받으니, 그네들 시각에서 본다면 차 마시면서 생야채를 씹어먹는 모습일 듯.

 

 

 

엄니께서는 차가 참 맛있다고 홀짝홀짝 드십니다.

여행와서 들뜬 기분때문에 맛있게 느껴진다는 말을 하기엔

엄니나 저나 여행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고, 차 맛도 10년 이상 알고 지내왔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죠.

 

사실은 이 여행용 차 세트는 집에 있는 걸 주섬주섬 꾸린 게 아니고

상비용으로 항상 꾸러미 속에 준비되어 있는 녀석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속에 들어있는 보이차는 집의 차방에서 금방금방 소비되는 녀석과 달리 오랜 시간 숙성중이었던 것이죠.

 

차 색도 매우 맑아서 사진도 한 장 찍어봤습니다. 여행 와서 술 대신 차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물론 홀로 여행에서 이런 세트 가져올 정도로 제 짐사정이 그렇게 널널한 편은 아니지만.

내일은 나라로 출발해야 하니 9시쯤 되어 이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엄니도 매우 피곤해 하시니 잠은 깊게 주무시겠죠.

 

 

 

눈이 많이 쌓이지 않았지만 날씨는 매우 매섭습니다.

오사카가 원래 부산만큼 따뜻한 곳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역시 해발이 높은 산 속은 추위를 무시하지 못하겠더군요.

 

엄니 역시 후드에 목도리까지 둘러쓰고 피부 노출을 최대한 줄이고 이동중입니다.

 

  

 

이 탑을 보려면 이동 루트에서 조금 빠져나와야 했지만

그래도 이 녀석을 보지 않고 오쿠노인을 통과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엄니를 안내했습니다.

 

엄니도 한자를 읽을 수 있기 대문에 이 곳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라는 걸 금방 아시더군요.

 

 

 

하지만 이런 동자승 불상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아이들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모르셨습니다.

굶어 죽는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시대에서 배 부르게 무언가를 먹는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많았음은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곳 입구의 번쩍번쩍한 기업 묘비와 달리

이 연고 없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조각상은 내세에서라도 복을 받기를 원하는 진심이 강하게 묻어나는 듯 하더군요.

 

 

 

목도리처럼 보이는 것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음식이나 음료수 같은 녀석들은 말이죠, 공양하려는 마음은 이해가 가도 관리자 측에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딱히 주변에 음료수나 먹을 거 놓지 마라는 표지판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요함 속의 오쿠노인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이곳 관리하는데는 굉장한 인원과 시간이 필요하죠.

고용인이나 청소 알바가 아닌 사찰 관계자가 직접 관리하다 보니, 이 것도 일종의 공덕을 쌓는 행위라고 인식하는 듯.

모기가 덤벼들던 피부가 얼어붙는 추위 속이던 1년 내내 꾸준히 부지 관리에 열심입니다.

 

 

 

무연불은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지금 와서야 더 늘어날 일 없겠지만

단지 피라미드처럼 생겼다는 볼거리 하나만으로 이렇게 세워놓은 게 아니라는 점은 꼭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식으로 묘터를 구입할 돈이 없는 사람들이 돌맹이 하나씩 들고 조용히 내려놓고 간 역사의 흔적이 응집된 모습이니까 말이죠.

정말로 내세라는 게 있다면 휘황찬란한 묘석을 세운 사람보다

이런 연고없는 조그만 불상의 주인들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길 바랍니다.

 

 

 

유명한 관광지이긴 하지만 주위에 젊은 사람이 즐길만한 컨텐츠가 없고

이동 수단도 빡빡해서, 하루 꼬박 잡아야 겨우 관람이 가능한 곳이 코야산이라

여름에도 크게 관광객이 많이 붐비진 않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음산할 정도로 사람이 없더군요.

 

엄니께서는 제 예상과 달리 이런 훌륭한 자연 경관 속에서도

무덤이라 싫다는 철직과 함께 매서운 겨울 산바람 때문에

구경을 하시는건지 마는건지 모르는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십니다.

 

 

 

홍법대사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는 걸어가실 생각도 없고

빨리 나가자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조금 아쉽긴 하지만 서둘러 이 곳을 벗어나기로 합니다.

다만 완전히 똑같은 길로 돌아가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쪽 출구로 이동했죠.

 

날씨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만 더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면

엄니께서도 거부감을 줄이실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혼자서 이곳을 찾아왔을 당시의 포스팅에도 적혀있습니다만

기온차가 극심하고 습도가 매우 높은 이 곳의 특성상

나무로 만든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역시 이런 모습이 여기저기서 자주 보이더군요.

 

여름때 본 녀석인지까지는 확인할 시간이 없었습니다만

이곳에 왜 그리 돌로 석불과 묘석이 많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석불 역시 오래 가긴 가겠지만 이것 역시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닌 것 같네요.

원래부터 별로 정교하게 조각된 녀석은 아닌 듯 하지만

슬그머니 비탈길에 누워있으니, 몇 년 지나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땅 속으로 사라져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겨울이라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끔씩 부는 풍절음만이 사람 으스스하게 만드는군요.

 

저는 지난 번 왔을 때 통풍때문에 거의 죽을 뻔한 기억이 었어서

이번엔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며 코야산의 풍경을 만끽하려고 했었습니다만

엄니께서 춥고 무섭다고 후다닥 지나가시는 바람에 어째 몸이 아플 때보다 더 구경시간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사진 좀 많이 찍혀본 사람이 아닌 이상, 찍는다고 정보를 줘 버리면

그냥 정면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몸이 굳어버린 사진밖에 얻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몸을 30도 정도 옆으로 틀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어쩌고 하는 방법을 말해줘도

그건 그냥 보기좋은 모델처럼 담겨버릴 뿐 여행 사진으로서는 뭔가 좀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냥 뒷모습만 찍어도 여행 사진으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추운 날씨라 코가 얼어서 냄새를 평소보다 잘 맡진 못하지만

여름의 풀냄새와 조금은 다른 향기가, 햇빛이 조금 강해지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이 느껴지는군요.

 

기온이 낮아서 직사광선이 통과하기 어려운 오쿠노인의 땅바닥은 여전히 눈으로 덮혀있지만

그늘 아래서도 습기때문에 푹푹 찌던 여름과 달리

겨울엔 햇빛 한번 쏴 하고 비치면 걸음을 멈출 정도로 따뜻함을 느끼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이 나무는 예전 여름 여행때도 찍은 적이 있죠.

그때는 한여름이라 빛도 틀리고 습기도 틀리고 해서 이것과는 전혀 다른 진득진득한 사진이 나왔었는데

촬영 요건이 다르다고는 해도 확실히 나무는 계절에 따라 보여주는 모습이 매우 다르다는 걸 세삼 알 수 있었습니다.

 

 

 

엄니가 너무 빨리 치고 나가시는 바람에 사진 찍는게 쉽지 않네요.

묘지를 그렇게까지 싫어하신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단지 날씨가 추워서 그러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뭐 엄니 따라가느라 셔터를 누르는 시간도 절약하며 달립니다.

핀이 맞았는지 구도가 어땠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네요.

 

혼자 떠나는 여행이 아닌 이상 상대방의 사정을 고려해 줘야 하는 것이고

역시 느긋함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좀 빡빡한 면이 있더군요.

 

 

 

생각을 할 시간이 부족한 체로 찍은 사진이라

돌아와서 정리할 때는 역시 본인이 당시 느꼈던 감각을 재현하기가 조금 더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사진은 금방 생각이 나던데 말이죠. 여름에 결코 볼 수 없는 겨울만의 멋진 모습입니다.

 

 

 

성실하신(?) 분이라면 여름 포스팅과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름과는 빛이 전혀 달라서 똑같은 소재를 찍어도 분위기가 꽤나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카메라도 바뀌긴 했지만 동 회사의 거의 비슷비슷한 녀석이라, 기계적으로 차이점은 별로 없습니다.

 

추위에 마음이 조급해지면 조금씩이나마 부족하거나 모자란 점이 좀 더 드러나게 되죠.

사진과 사냥은 한 글자 차이이듯, 사진 찍을때는 셔터에 손가락 얹어놓고 집중을 잘 해야 좋은 녀석을 건집니다.

 

 

 

오쿠노인의 나무는 참 허벌나게 큽니다.

미국 대륙의 나무야 이런 녀석들도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하는 거목들이 많지만

일본의 참나무는 확실히 동아시아에서는 유난히 큰 편이긴 하죠.

 

 

 

석불에 이렇게까지 따뜻하게 옷을 입혀 놓은 모습을 보면

문득 정말로 저 석불이 제 체온보다 더 따뜻하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산날씨는 변하기 쉽다는게 일본에서도 틀린 말이 아니더군요.

버스 내렸을 때 눈발이 날리던 날씨는 이제 푸른 하늘과 맑은 햇살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온이 확 올라가는 건 아니라, 사진 찍기에 좀 더 좋아졌을 뿐 여전히 온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하지만 말이죠.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저하고는 좀 다른 엄니라서

진귀한 볼거리이긴 하지만 오래 있고 싶진 않다는 일념으로 확확 진행중이신데

저는 이런 곳에서 사진 찍으며 좀 더 느긋하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더군요.

 

 

 

 

동양의 어머니상은 일단 옷깃 잡는 아이와 안고 있는 아이가 기본인가 봅니다.

특정 인물에 대한 석불인지 그냥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양인지 모르겠더군요.

 

 

 

엄니가 너무 앞서나가시는게 걱정되어 카메라도 어깨에 들쳐매고 앞으로 따라갑니다.

이렇게 바싹 붙어서 광각으로 찍는 사진도 나름 재미있죠.

 

 

 

이런 번쩍번쩍하고 덩치 큰 녀석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좋던 싫던 한번쯤은 눈길이 가게 마련이더군요.

돈과 권력이 많아서 이렇게 지었다기보단, 코야산에서 입적한 스님들을 기리는 무덤인 듯 합니다.

 

 

 

머나먼 홋카이도에서 여기까지 온 비석도 있네요.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는 오쿠노인이지만

그 안을 보면 워낙 다양한 모습의 묘석이 공존하고 있어서, 살아있는 사회의 압축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추운날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그런지, 제 입장에서는 세삼스럽게 그리 짧은 길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름에 통풍 걸린 발로 어기적거리며 두 시간 가까이 걸어가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인지

막상 멀쩡한 몸으로 걸어봐도 생각보다 긴 산책로더군요.

 

엄니께서는 이 정도 거리가 피곤하실 분은 아니라 크게 걱정은 없습니다만, 날씨가 추운 게 조금 마음에 걸렸습니다.

엄니는 아프리카와 호주 대륙 정도는 빼면 거의 전세계를 여행하신 분이지만

겨울에는 한 번도 해외에 여행가본 적이 없다고 하시니 말이죠.

 

 

 

정오를 넘기고 날씨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니 엄니의 걸음걸이도 조금씩 진정되는 느낌입니다.

오쿠노인에 처음 왔을 때 저도 그랬지만, 뭐라고 딱 잘라서 표현하기 힘든 심상을 주는 곳이니

엄니께서도 입 속에서 맴돌기는 하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난감한 그런 느낌인 듯 보였죠.

 

한국의 묘지 문화에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덕지덕지 공간 활용하는 모습은 참 좋다고 하십니다. 그건 저도 동감.

 

 

 

찍어드리려고 해도 거절하시는 엄니라서, 이렇게 같이 걸어가면서 다른 피사체만 찍어대더라도

전혀 부담될 것이 없다는 점은 참 좋습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한국에도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전 맨날 여행가서 사람 그림자라고는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사진만 줄창 담다보니

막상 사람이 프레임 안에 들어와 배경과 함께 담아내야 하는 사진을 찍어야 할 때가 오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게 되니까 말입니다.

 

 

 

묘석에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이런 석불들에게는 눈이 머물게 되는 게 평범한 반응일 듯 합니다.

엄니께서는 석불 자체보다는 알록달록하게 입혀놓은 옷을 더 신기하게 생각하시더군요.

지난 번 언급했듯, 어린 아이들의 명복을 비는 석불이기 때문에 이런 색상이 선호되는 것이라 설명해 드렸습니다.

 

 

 

서둘러 걷다보니 그리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출구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오쿠노인은 제 예상과 전혀 다른 전개를 불러일으켜서 당황스럽더군요.

 

여름의 오쿠노인은 그 찌는 날씨에 통풍의 지옥같은 고통으로 날뛰는 발가락과 싸우며 걸어갔는데

'발만 나으면 정말 느긋하게 걸어봐야지'라고 생각하며 다시 돌아온 겨울의 오쿠노인은

동행자인 엄니께서 추우니까 빨리 걷자고 하시는 바람에 느긋함과는 전혀 다른 스릴이 넘치는 산책이 되어버렸네요.

 

 

 

오쿠노인을 나와서 다이몬 쪽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한 시간에 한두 대 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15분쯤 기다려야 하지만

버스만큼은 혼자 기다리는 것 보다 함께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편이 시간이 잘 가죠.

 

 

 

조그마한 코야산 안에는 백여 개가 넘는 사찰이 위치하고

그 중 상당수는 템플 스테이 같은 숙박도 가능하기 때문에

사찰 문화에 관심이 많거나 시간과 돈이 널널한 관광객은 이곳에서 하루 묵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돈을 더 열심히 벌어서 이런 곳에서도 하루 자 보는 그런 여행도 즐겨봐야 되는데 말이죠.

 

 

 

버스 시간이 남아서 이곳저곳 둘러보십니다.

일본의 불교는 한국과 조금 달라서, 결혼도 하고 절도 자기 소유로 자식에게 물려주는 스님이 많습니다.

 

엄니께서는 그 설명을 듣고는 '그럼 종교로서는 별로~'라고 단칼에 언급하시는군요.

물론 종교인이 사유재산을 가졌을 때 생기는 폐단에 대해 익히 경험을 해 오셨기 때문에 그러리라 봅니다.

의외로 일본의 신사나 절 같은 경우는 그냥 근근히 먹고 살 만한 가업 정도로 이어지는 소박한 녀석들이 꽤 있긴 하지만.

 

 

 

이번 코야산은 큰 이벤트 하나 터트리기 전의 고요한 분위기라고 할까요.

일본 진언종의 총본산인 이곳 코야산은 2015년에 창건 120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해를 맞이하기 때문에

전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2015년엔 이곳에 올 엄두가 나지 않을 듯 합니다.

아마도 순례자들 틈에 끼여 무빙워크를 탄 듯한 기분을 맛보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전 홀로 여행때는 가방에 간식거리를 일체 넣어다니지 않는 타입인데

엄니께서는 익숙하게 준비해 온 물과 과자를 꺼내 드십니다.

 

저는 보통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기 전 먹을거리를 사들고 가

목욕 시원하게 한판 당기고 나와서 느긋하게 즐기는 성격이라서.

 

그래도 추운날 버스를 기다리며 짭쪼름한 센베이 씹어먹는 맛 역시 일품이었습니다.

 

 

 

버스 타기전에 엄니가 만든 눈사람입니다.

눈코입도 만들까 했는데 버스가 오는 바람에 서둘러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마우리가 되어 버렸네요.

 

 

 

다이몬으로 향하기 전에 일단 점심을 해결하기로 합니다.

이곳 코야산이 물 맑고 공기 좋아서 밥맛도 좋다고는 하지만

유명한 관광지의 물가 + 해발 1000m 넘는 산골짜기 라는 요건이 겹치는 바람에

이 곳의 먹거리는 양이나 질에 비해 좀 비싸다는 인식이 넓게 퍼진 편이죠.

 

하지만 홀로 여행때처럼 비싸다고 안 먹고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적당히 속에 부담가지 않을 만한 가게를 찾아보다가 평범해 보이는 곳을 하나 찾았습니다.

 

정식요리도 여러가지 있지만 살짝 배만 채울 요량으로 들렀기에 주문은 간단하게 합니다.

물이 좋아서 그런지 이 지역은 두부가 유명하다고 하길래 반찬 요량으로 작은 거 하나 시켜봅니다.

일본의 두부는 한국과 맛과 향이 전혀 다른데, 고소한 콩 향기가 진한 한국의 두부와 달리

맛은 간장과 와사비 없이는 밍밍하게 느껴질 정도로 맛이 약하고, 속에 기포가 거의 없이 젤라틴처럼 탄력있게 말랑말랑한게 특징이죠.

 

지역 명물이라 그런지 요 조그만 녀석이 3천원 가까이 하는 무서운 가격이지만

전 두부를 매우매우 좋아해서 막 퍼먹는 수준이기 때문에, 깔끔하고 색다른 일본 두부 탐방은 매우 즐거웠습니다.

 

 

 

식사는 그냥 간단하게 달맞이 우동으로 때웠습니다.

일본에서는 국물 요리 중앙에 날계란을 떨어트려서 살짝 익히는 녀석을 달맞이(月見)라고 부르죠.

 

우동은 그냥 매우매우 흔한 일반적인 수준이었는데, 계란은 꽤나 깔끔한 맛이 괜찮았습니다.

달맞이 우동은 먹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달라서, 확 풀어헤쳐 고소한 국물을 즐길 수도 있고

저처럼 면발 다 먹고 국물 조금 남긴 상태에서 풀지않은 반숙 계란을 후르륵 한꺼번에 삼킬 수도 있습니다.

 

두부는 반찬이고 우동이 정식이었지만, 느낌상으로는 두부에 더 집중하고 우동은 그냥 배 채우기 위해 먹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네요.

 

날씨가 추워서 체력소모도 심하니 조금 더 쉬고 싶기도 했지만

엄니는 열심히 구경하고 저녁에 일찍 돌아가 푹 쉬는게 좋겠다고 하셔서 금방 일어나 밖으로 나갑니다.

 

작년 여름에 코야산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아 겨울의 코야산은 어떤가 엄니와 함께 가 보기로 했습니다.

왕복 3시간 반을 넘어가는 장거리 이동입니다만, 어제 코베와는 달리 전철과 버스에 앉아갈 수 있어서 체력적인 부담은 덜 하죠.

 

엄니는 여행 좋아한다고 하셔도 역시 연세도 있고, 여행사 패키지에 익숙하셔서 그런지 좀 피곤해 하셔서

오늘은 코야산만 살짝 둘러보고 저녁 늦기전에 돌아와 쉬기로 했습니다.

 

겨울 코야산이 그런 건지, 그냥 시즌이 아닌건지 모르겠지만 전철 안에 저하고 엄니하고 옆에서 조는 사람 세 명밖에 없습니다.

엄니께서는 이쯤 되니 코야산이란 데 오늘 문 닫는거 아니냐고 걱정까지 하십니다.

저도 이렇게 한산할줄은 정말 몰랐는데, 다행히도 환승역인 하시모토(橋本)역에서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이 서 있더군요.

 

 

 

극락다리라는 이름의 역을 통과하자 눈이 바람에 휘날리는게, 개인적으로는 기대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저야 여름의 코야산을 다녀왔으니 눈이 내린 코야산의 모습 역시 크게 기대되지만

엄니는 그러지 않아도 피곤해 하시는데 눈까지 내리고 쌀쌀하면 몸에 부담이 되실 것 같아서 말이죠.

 

오랜만에 보는 코야산 행 케이블 전철의 모습입니다.

눈이 많이 오진 않지만 이미 군데군데 쌓여있는걸 보니 이전에도 내렸던 것 같더군요.

 

 

 

눈이 오던말던 이 열차는 강력한 케이블로 끌어당기듯 올라가는 방식이라 별 문제 없을 듯.

굉장한 경사의 오르막을 천천히 오릅니다. 지난번 여름과 달라진 점 한가지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해발 600m 즈음에 '여기가 도쿄 스카이 트리와 같은 높이'라는 팻말이 새로 생겼습니다.

코야산은 해발 1000m 에 가까운 곳이니, 스카이 트리보다 높은 곳을 이렇게 전철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저 앞에 도넛 모양의 교차로가 보입니다. 저 곳이 상행 열차와 하행 열차가 마주치는 곳이죠.

자연 보호를 위해 선로를 두 개 만들지 않고 저런 교차로만 만들어서 선로의 부피를 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던 적던 이 열차는 반드시 두 대만이 동시에 운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2015년 4월은 코야산 개창 12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시기라서, 그 때는 이 열차도 타기가 무서울 정도로 빡빡해 지겠죠.

 

 

 

사람이 많던 적던 정해진 시간에 항상 운행하는 두 대의 열차가 이곳에서 교차합니다.

경사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조그만 사고라도 굉장히 위험할 수 있어

두 번째 탑승임에도 꽤나 조마조마했지만, 코야산은 일본에서도 관리 철저하기로 유명한 곳이니 괜찮겠죠.

 

 

 

오사카는 대구보다 더 따뜻한 날씨라서 입고 온 옷이 더울 정도였는데

코야산은 역시 산 속이라 그런지 도착하자마자 추위가 온 몸으로 느껴집니다.

내린다기보다는 옆으로 흩날리는 눈발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여름의 코야산과 전혀 다른 광경을 선사해 주더군요.

 

여름의 코야산 포스팅도 이 블로그에 남아있으니 비교해 가며 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오사카에서 이곳까지는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강행군입니다만

외국인을 위한 아이템인 칸사이 스루 패스 덕분에 오늘은 아무리 버스와 전철을 많이 타도 추가 요금이 없습니다.

 

 

 

이 곳은 제가 받았던 감동에 비하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더군요.

보고 즐길거리가 많다기 보다는, 이런 곳에서 차분히 경치를 감상하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곳이니까 말이죠.

 

엄니는 일단 쭉쭉 뻗은 삼나무들의 모습에 흥미를 보이셨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여름때 혼자 온 것처럼 천천히 느긋하게 둘러볼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눈은 때때로 흩뿌리는 정도라 우산은 필요없었습니다만

이전에도 몇 번 내린 듯 하고, 이 곳의 기온 탓에 거의 녹지 않고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삼나무를 비롯해 이곳 오쿠노인의 많은 나무들이 침엽수라서 녹색을 간진하고 있었는데

녹색 이끼 사이로 다소곳히 쌓인 눈이 여름과 너무나 다른 이미지를 풍겨서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여름에 다녀왔으니 비교하는 재미가 있어서 신났지만 엄니께서는 추운데 걸어다니시느라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좀 뜨끔하더군요.

 

 

 

코야산 오쿠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 여행 포스팅에서 나름 상세하게 적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포스팅에서는 생략합니다. 좀 더 느긋한 여행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는 엄니와 리듬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제 마음도 별로 느긋하지는 않았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더욱 적막해 진 오쿠노인의 진중한 매력도 차분하게 느끼며 즐기기는 힘들더군요.

 

 

 

엄니도 입구에 안치된 기기묘묘한 묘석들을 보고 굉장히 신기해 하시더군요.

한국의 묘와는 달라서 처음엔 여기 서 있는 것들이 뭔가 하셨는데 자세히 보니 전부 묘석입니다.

 

이곳에 20만개가 넘는 비석이 500여년 전부 들어서 있었다고 설명해 드리니

놀라시는게 아니라 오히려 얼굴을 잔뜩 찡그리시더군요. 무덤 보면 무섭다고.

 

 

 

일본 흰개미 구제협회에서 세운 흰개미 추모비도 여전합니다.

엄니는 한자로 적힌 묘비는 곧잘 읽으시지만 이 녀석은 무슨 뜻인지 모르셔서 제가 해석해 드렸죠.

엄니의 반응 역시 별 걸 다 세우는구나 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모습을 보고 윤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원념이 자연의 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라는 사실에 꽤나 놀랐습니다만

엄니는 그냥 이렇게 묘비가 우르르 몰려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무섭고 쓸쓸하고 그렇다고 하시는군요.

역시 살아오시면서 죽음을 많이 겪었고, 본인도 퇴직 후 남은 삶에 대한 걱정이 더해가고 있는 시기라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으면 굳이 제 욕심으로 코야산에 오지 않았어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와 버린 이상 구경이라도 재밌게 하고 가시면 좋을텐데, 저도 마음이 무거워지더군요.

 

 

 

 

그래도 일본어보다 한자가 많이 적혀있는 곳이라 엄니가 중간중간 걸어가며 한자를 읽어보십니다.

특정 기업체에서 새운 묘석은 대강 어떤 곳에서 세운 것인지 이해하실 수 있어서 흥미를 가지시는 듯.

 

일본도 불교를 믿냐고 물어보시길래, 믿긴 하는데 여기서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한다고 대답하니

그럼 종교인으로서는 별로라고 하시네요. 종교에 개인적 욕심이 묻어날 여지가 남아있을 때 펼쳐지는 지옥도는 한국에서 곧잘 볼 수 있으니 말이죠.

 

 

 

흰개미 묘비와 함께 꼭 눈길을 빼앗기게 되는 강아지 묘석입니다.

엄니 역시 피식 웃으시더군요. 그래도 이 강아지 가족들은 얼마나 이 녀석들을 사랑했으면 비석까지 만들겠냐고 이해를 해 봅니다.

 

 

 

불상들의 머리와 어깨를 따뜻하게 해 주는 모습을 굉장히 신기해 하셨습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돌맹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하등 쓸데없는 행위이겠습니다만

역시 자신과 닮은 조각상에 마음을 열어주는 이런 행동이야말로 인간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저도 오쿠노인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기도 하고

따뜻한 봄남이었다면, 오디오 가이드 하나 대여해서 하나하나 들어가며 이곳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엄니는 추워서 그런지 묘석이 너무 많아 그런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후다닥 걸어가십니다.

 

전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을 여유도 없이 따라가느라 바빴죠.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이 상황도 꽤나 유쾌하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1년 반 전 여름의 코야산 여행은, 기구하게도 불의의 염좌에 의한 급성 통풍 증세 탓에

이 넓은 코야산을 바늘로 찔리는 듯한 격통에 시달리며 절뚝절뚝 간신히 돌아본 매우 특이한 체험이었습니다.

이동 자체를 빨리 할 수 없으니 역으로 풍경과 사진을 담는 시간을 좀 더 차분히 가질 수 있었죠.

 

지금은 몸이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그 때보다 더 여유없이 엄니 뒤만 따라가고 있으니

이것 또한 같은 장소를 다른 상황에서 여행할 때 생기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오더군요.

 

 

 

참 다양한 묘석들이 많습니다. 이 녀석은 동물들이 혼을 달래는 묘석이라 부처님 주위에 동물들의 석상이 둘러서 있네요.

 

 

 

물론 침엽수라 하더라도 여름과 겨울의 색은 너무나도 달라서 같은 사진이 나올 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엔 절대로 볼 수 없는 눈이 곳곳에 쌓여있었던 탓에

지난 번에 와 봤다는 생각보다, 마치 처음 찾는 듯한 신선함을 여전히 느낄 수 있어서 이득 본 느낌입니다.

 

 

 

UCC 커피 맛있습니다.

 

 

 

이곳 역시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이 가끔 보입니다만

총 관광객 수가 워낙 적고, 사람의 발소리를 제외하면 참으로 적막한 겨울 풍경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중국인 관광객이라도 다른 곳 처럼 왁자지껄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여름보다 더욱 고요해 진 오쿠노인의 분위기에 매우 흡족했습니다만, 엄니는 가끔 서서 한자를 읽는 걸 빼고는 그냥 슥슥 전진만 하실 뿐.

 

 

역시 제가 아직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죽음이 자신의 것이라는 자각이 부족한 탓이라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같은 나이대 사람들에 비하면 죽음에 대해 좀 더 자주 생각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단순히 젊어서 엄니처럼 이런 곳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단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엄니와는 조금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쪽이라고 한다면 저는 이 비석 세운 사람 쪽으로 아주 약간 기울어 있다고 할까요.

자기 무덤의 비석 앞에 마음껏 낙서를 하라는 낙천가의 묘비입니다.

 

엄니는 이곳을 돌아보면서 '묘가 이렇게 많으니 여기 귀신들은 지루하진 않겠다' 라고 하시던데

이 낙서총의 주인은 그 중에서도 꽤나 인기인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묘비 안에 증명사진이 주르륵 늘어서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읽어보니 일본 사진협회 회원들의 공동 묘석인 듯 합니다.

아마도 근대화 이후 카메라맨 1세대들 부터 이 곳에 등록되어 있을 듯.

 

 

 

오쿠노인은 진언종의 창시자인 홍법 대사의 사당 쪽으로 들어갈수록 더더욱 문화재급의 예전 묘석들이 줄지더 나타나기 때문에

이제부터 진짜 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엄니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만 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곳과는 상성이 맞지 않은 것 같네요.

 

 

 

전 아픈 다리를 질질 끌던 여름과 달리 잘 움직이는 몸과 머리를 최대한 이용해서

엄니를 따라가면서도 후다닥 고개를 돌려 사진으로 담을 만한 것이 있으면

촛점이 맞았는지도 보지 않고 셔터만 눌러재낀 후 남은 건 한국에 돌아가서 손 좀 봐야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코야산은 원래 이렇게 둘러보는 게 아니긴 합니다만, 이번 여행은 엄니에게 맞춰드려야 하는 것이니 별로 불만은 없었습니다.

 

 

 

이런 불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시길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한 석상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역시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지, 다른 불상에 비해 이런 옷가지가 걸려 있는 비율이 훨씬 높더군요.

 

 

코야산에 이러한 사찰과 묘터가 만들어졌던 500여년 전의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사람의 목숨이 파리만도 못했던 곳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자연 재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영주들의 땅따먹기로 인해 자기가 무엇을 위해 죽창을 드는지도 모르는 농민들은

그냥 하루하루가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죠.

 

그런 덧없는 현세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내세에 찾아올 평온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기였습니다.

이곳 오쿠노인은 그 바램이 물질화 되어 이루어진 유적과 같은 곳이죠.

 

 

 

여기서도 빈부의 차는 드러난다는 게 참 쓴웃음 나오게 합니다만.

그냥 산 사람이 들어가 살아도 될 만큼 담까지 둘러가며 지은 묘석은

신기함을 넘어서 괴이하기까지 합니다. 내세를 원한다면 이 곳의 화려한 돌덩이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지.

 

 

 

묘석의 행렬에 눈이 지치면 고개를 조금 들어 하늘을 찌르는 삼나무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더군요.

엄니께서도 묘석은 둘째치고 코야산의 맑은 공기와 삼나무 숲은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입니다.

 

날씨가 예상보다 추워서 그걸 즐길 만한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말이죠.

 

 

 

여름에 벗겨주고 겨울에 씌워주는 것은 아니라서 사시사철 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역시 원래는 추운 겨울에 서 있는 모습이 안스러워 입혀준 것이라는 예상을 해 봅니다.

눈 덮힌 모습이 아무래도 가장 어울리니 말이죠.

 

 

 

휴게소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만, 엄니는 화장실만 한번 가시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시네요.

이곳에서 휴식하는 것 보다는 빨리 구경을 마치고 도로쪽으로 돌아가는 게 덜 피곤하리라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저는 추위를 별로 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후드나 목도리 등이 없었기 때문에

코야산의 추위는 제 예상보다도 훨씬 매섭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엄니가 서두르시는 것도 이해가 되더군요.

 

 

 

그래도 계속 뒷모습만 찍을 순 없으니 거대한 삼나무 앞에서 한 장 찍어드리겠다고 합니다.

찍는 건 좋은데, 역시 삼나무의 덩치를 담아내려니 사람이 주역인지 나무가 주역인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렇게 담은 건 엄니의 목도리가 이곳과 워낙에 강렬하게 대조되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 두죠.

 

 

 

다른 불상과는 달리 칠복신의 모습을 한 불상이 서 있습니다.

한국의 금복주 마스코트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묘석 앞에는 따지도 않은 술병이 꽤나 많이 놓여있네요.

 

귤도 아직 생생한 것으로 봐서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인 듯 합니다.

술 좋아한다면 하나 따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역시 신성한 곳이니 공양물을 훔쳐가는 건 안좋은 일이겠죠.

 

 

 

확실히 춥긴 추운가 봅니다.

 

한낮온도가 10도를 상회하는 오사카와는 달리 이곳은 가장 따뜻한 시기에도 2~3도에 그치는 듯.

그래도 관리하는 분들이 힘을 써서 그런지 순례길 자체는 얼음도 눈도 거의 없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눈이 딱 요렇게 쌓였을 때가 왠지 포근해 보이더군요.

아마 여름이라면 이런 묘석은 동글동글하지만 별 감흥을 받지 못하고 지나쳤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람은 별로 불지 않았던지, 왠지 저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자연의 섭리를 망가트리는 듯한 흉폭함이 표출될 것 같네요.

 

확연히 시선을 잡아끄는 몇몇 묘석들을 제외하면 확실히 여름과 겨울의 사진 결과물이 꽤나 다르게 분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눈발 때문에 살짝 흐린 하늘이 오히려 여름과의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듯 해서, 타이밍은 잘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 앞에 홍법 대사의 사당이 있습니다만 엄니는 이만큼 봤으면 됐으니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아쉬워도 억지로 보여드릴 필요는 없으니 발걸음을 돌립니다. 단지 왔던 길이 아니고 다른 한 쪽 길로 가면서 조금이라도 더 구경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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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대탑의 동쪽에는 몇 채의 불당과 동탑이 서 있는데

이 위치에서 더 이상 동쪽으로 걸어가는건 무리라고 판단.

이제 슬슬 버스 정류장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으면, 가능성은 희박해도 버스를 놓칠 가능성도 있어서.

 

결국 단상가람에서 내가 본 가장 동쪽 건물은 이 녀석, 대회당(大会堂)이 되었다.

대회당 오른쪽에 빼꼼 보이는 건물은 삼미당(三昧堂),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탑이 동탑(東塔)이다.

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서탑과 달리 동탑은 너무 현대식 느낌이 나서 패스해도 그닥 아쉽진 않다.

 

이 대회당은 1848년 재건되었고, 원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불당이지만

현재는 진언종 승려들의 법회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사진 찍을만한 포인트 앞에 청소용구를 담은 수레가 서 있어서, 좋게 생각하면 체험! 삶의 현장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 대회당에서 정남쪽으로 쭈욱 걸어가면 출구가 나오고, 거기서 30m 정도만 더 가면 버스 정류장.

나름 끈기와 오기로 아침부터 오만 곳을 다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의욕 자체가 사라질 정도로 지쳤다.

사실 8시에 전철 타기 시작해서 지금 오후 3시쯤이니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기분상으로는 북한산 두 번은 탄 듯한 느낌. 등산 스틱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더 버텨보겠는데 그런건 없다.

 

 

 

정면으로 뻗는 출구를 향해 삐그덕거리며 걸어가는데, 단상가람에서 구경할 마지막 불당이 나타난다.

생크림 케이크 윗부분의 딸기는 맨 마지막에 음미하는 성격이라서, 일부러 이 녀석을 가장 마지막에 둘러본 셈이다.

1197년에 세워져 현재 코야산의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인 부동당(不動堂)의 모습.

 

부동명왕을 안치한 곳이라는 의미의 부동당은 800여년의 세월동안 숱한 화재와 방화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역사의 산물.

당연하게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가까이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카마쿠라(鎌倉)시대의 건축양식이 고스런히 녹아있는 귀중한 녀석인데

사실 1800년대 재건된 가람내 대부분의 불당들도 이 카마쿠라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 녀석만 특출나 보인다거나 하는 건 없다. 단지 이 부동당의 지붕과 처마, 단청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른 불당보다 간결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실된 녀석을 재건하다보면 아무래도 좀 더 치장을 하게 되는 것일런지.

 

카마쿠라 시대는 1180년대부터 1330년대를 어우르는 시기로  

카마쿠라 막부 자체는 도쿄 바로 아래쪽 카나가와(神奈川)현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중기까지는 여전히 쿄토 조정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년수도라는 쿄토를 중심으로 한 시가(滋賀), 효고(兵庫), 미에(三重), 나라(奈良), 와카야마(和歌山)까지 5개 현을

수도의 근방이라는 의미의 킨키(近畿)지방이라고 불렀고, 거기에 속한 코야산에도 여전히 그 당시의 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보통 오사카 하면 전부 관(関)의 서쪽이라는 의미의 칸사이(関西) 지방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엄밀히 칸사이라고 하면 교토 서쪽의 모든 지방 (현재로서는 심지어 오키나와까지)을 뜻하기 때문에

킨키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재를 킨키 문화라고 하지 칸사이 문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이 지긋하게 든 사람들이.

 

 

 

막상 현재의 카마쿠라 지역에 가 보면 남아있는 몇몇 중요문화재 외엔, 한때 일본 문화의 중심지였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상태인데

한국의 경주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 그땐 그랬지라는 그리움만 남은 채 추억을 회상하는 정도의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다.

 

일본의 쿄토에 뒤쳐지지 않고, 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수도로서 명성을 떨쳤던 경주가, 쿄토와의 비교는 어림도 없이

카마쿠라 정도에 비교된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야후 어디에 서식하는 정신나간 일빠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카마쿠라와 쿄토를 한번씩 가 보면 그 안타까움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느끼리라 생각.

 

 

 

부동당의 보존 상태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한국에서는 그것보다, 숭례문 소실 당시 비교대상으로 이 녀석을 신나게 칭송했던 기록이 있어서 그쪽으로 더 유명한 편이다.

 

어디에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지, 사실 보고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절묘하게 감춰놓긴 했지만

이 부동당 주변과 지붕 곳곳에는 첨단 스프링쿨러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어서

화재 감지시 자동으로 무수한 물길이 불당 전체를 휩싸도록 되어있다.

 

부동당 뿐만 아니라 단상가람내 중요 불당들, 그리고 코야산 전체의 중요문화재에는

이러한 스프링쿨러 시스템이 거진 장착되어 있으며, 이 시스템의 파이프라인 길이는 8km에 달한다고 한다.

더더욱 감탄할 만한 점으로,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물탱크는 이곳보다 200m 쯤 높은 산봉우리 정상에 위치해 있어서

펌프 등이 작동하지 못하는 비상시에도 문제없이 물을 뿜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900리터에 달하는 물탱크는 코야산 전체 시스템을 일시에 가동시킨다고 해도 5분동안 물을 배출할 수 있으며

5분이면 소방대가 코야산 어디든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

물길은 불당의 손상을 최소화 하기 위해 매우 세밀하게 퍼져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 등등...

한국 사람으로서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솔직히 좀 비참한 느낌마저 든다.

왜냐하면, 이 시스템은 이미 1960년대부터 설치되어서 꾸준히 업그레이드 되고 있기 때문에.

 

숭례문 소실 당시 한국 취재팀이 방문했을 때, 이 곳의 방재시설을 한번 가동한 적이 있어서

관광객들도 놀라고, 기자들이 사진을 많이 담아왔기 때문에 지금도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면 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찬란한 문화를 가진 한국이라도, 이 폭력에 가까운 안전불감증 만큼은 뼈저리게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생각.

 

 

 

부동당 관람을 마지막으로 단상가람을 뒤로 한다.

출구까지는 원만한 내리막길로 되어 있어, 내려가다가 살짝 아쉬운 마음으로 부동당의 모습을 한 장 더 담아본다.

 

지금까지 돌아본 것들은 단상가람의 약 70% 정도로, 제대로 관람하지 못한 곳도 몇몇 있지만

전부 다 관람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둘러볼 수도 없고

지금 다리 상태로 이 정도라면 후회 남기지 않을 만큼 있는 힘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머지 녀석들은 다음 기회의 즐거움으로 남겨 놓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다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고는 해도

돌아가는 길 도중에 눈에 들어오는 이런 꽃들은 부담없이 찍어줘야지.

참 신기하게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어 줄 정도로 리드미컬하게 욱씬거리는 발목의 통증도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면서 왼손으로 촛점을 슥슥 맞추는 이 순간만큼은 완전히 잊혀지는 듯 하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긴 하지만, 사람의 정신이란 참 편리하고 고성능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드는 하루였다.

 

 

 

출구에 거의 다다라서 고개를 돌려 봤다.

오쿠노인을 거닐면서 - 이런 표현은 내가 펼쳤던 묘기에 가까운 휘적거림에 비하면 좀 고상하지만 -

느꼈던 고요한 충격만큼은 아니었지만, 이곳 단상가람의 푸근한 모습도 더할 나위 없이 내 심란한 마음을 다독여 준다.

 

아침에 절룩거리며 전철을 탈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해서 과연 만족할만한 곳일까 걱정했던 마음은

이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오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라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렸다.

 

 

 

단상가람을 빠져나와도 주변 풍경은 여전히 꿈길을 걷고 있는 듯.

어찌보면 보통 마을보다 사찰이 더 많은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쿠노인을 빠져나왔을 때는 설국의 도입부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눈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이니 어쨌든 저기까지만 가면 오늘 하루는 끝이라고 되내인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 이제 일단 코야산 여행은 끝이 난 느낌이다.

눈 앞에는 코야산의 각종 국보와 문화재들을 모아놓은 영보관 표지판이 보여서 조금 낙심.

정상적인 발걸음이었다면 아마 저기까지 돌아보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

 

중요문화제가 워낙 많아서 한꺼번에 전시하지 못하고 기간별 로테이션 방식으로 전시한다고 한다.

 

단상가람 내내 끼고 다녔던 35mm 렌즈 내려놓고 가방 안에서 굴러다닌 70-300 렌즈 손질 좀 하고 있으니

나이 지긋한 노부부 한쌍이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는다.

남한테 말 먼저 거는 성격이 아니라서 시치미 뚝 떼고 있는데

어느 나라나 노인층이 손아래 사람에게 말거는게 더 편한 듯, 카메라 좋은거 쓰네~ 라고 운을 떼주신다.

 

일단 말 한마디 통하고 나면 이쪽에서도 별로 부담없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70-300 렌즈라고 하니 그럼 실제 화각이 105-450이 되는거냐고 물어보시는걸 보면 카메라를 좀 아시는 분.

135 판형과 똑같은 센서 쓴다고 말씀드리니까 좋은 사진 많이 남겼겠네라고 웃으신다.

사실 그런 말 들으면 괜히 더 쪽팔려서 보여드리질 못하는데...

실력별로 카메라 크기가 커진다고 하면 난 미러리스 써야 한다.

 

두분 모두 67세이고, 오늘 새벽 카마쿠라에서 여기까지 기차타고 여행중이라고 하신다.

카마쿠라에서 이곳까지는 서울에서 부산보다 조금 더 먼 거리인데, 내 부모님보다 더 연세 드신 분들이

새벽 6시에 신칸센 타고 여기까지 놀러왔다는게 굉장히 보기 좋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

일본 나이로 67세라면 한국 나이로 68~69세인데, 온통 도보이동 뿐인 코야산을 누비고 다니시다니.

더구나 이대로 쿄토로 가서 쉬고, 내일은 나라(奈良)를 구경하신다고.

결혼이라는걸 긍정적으로 바라볼수 있는 극히 희귀한 경우를 이 부부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 사찰들 상당수가 카마쿠라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카마쿠라에서 이곳에 구경왔다는 사실이 뭔가 재미있다고 말씀드리니

살짝 손사래를 치시며, 그곳도 쪼~금은 볼만한게 있지만 여기하고는 비교가 안된다고 하신다.

일본인들이 봐도 이곳은 보통 훌륭한 곳이 아니니까. 사찰도 훌륭했지만 마을 전체의 느낌이 매우 고즈넉한 점이 좋단다.

본인도 나름 일본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는데, 이런 곳은 정말 흔치 않다고 맞장구를 치니까

살짝 이해가 안되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할머니깨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신다.

 

그 다음부터는 뭐, 자전거 여행동안 시도때도 없이 들어본 레파토리의 반복.

한국서 왔다고 하면 일단 놀라고, 일본어는 어디서 배웠느냐고 하고, 구별이 안간다고 하는 등등...

한국에는 코야산같은 문화재가 있냐던가, 한국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 있냐던가 하는 질문도 받았는데

한류 아이돌이나 김치 등을 통한 식문화 등으로 익숙한 요즘 세대들과 달리

이 나이대 분들은 한국에 대해 그다지 아는게 없는 듯 하다. 애초에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제껏 아시아에 관심이 없었으니.

 

 

 

버스를 탈때 뒤로 물러나서 '먼저 타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역시 한국사람들이 예의바르다고 기뻐하신다. 음, 예의 이전에 일본에는 이런 격식 자체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지키고 안지키고의 문제라기보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 자체는 대체로 어디서나 좋게 평가받을 듯.

 

물론 한국에서도, 자리 비켜주다가 '내가 그렇게 늙어뵈냐!'라고 욕지거리를 들어먹은 지인의 케이스가 있어서, 그냥 사람 나름인갑다.

노부부는 분명 국제 정세 등에 관심이 많은 인텔리전트 부류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했는데,

요즘 일본 뉴스의 주요 화제가 중국의 오만하기 짝이없는 꼴불견들이라서 그런 면도 있지만

이 부부는 대부분 두리뭉실한 관념을 갖고 있는 일본 사람들과 달리 3국 관계에 대해 꽤나 예리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의 한국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거기 대한 사죄와 보상이 미흡한 것도 사실인데

잘못을 넘긴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재 대책없이 날뛰고 있는 중국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한국과 일본의 우호 협력이 아닐까라고 자신들은 생각한다고 꽤나 논리정연하게 말씀을 하신다.

노인들이나 젊은이들이나 과거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황을 잘 모른다면서

이제 바톤은 나같은 젊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대화를 해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주셨다.

 

딴건 몰라도 현 중국의 실태에 대해서는 나와 전적으로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대화가 스무스하게 이어진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정치인 쪽에서의 문제는 심각해서, 국가 교류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니냐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정작 내가 일본 정세에 대해서는 그렇게 빠삭한 편이 아니라서 좀 더 깊게 들어가지는 못했다.

덤으로, 중국같은 독재 상태에서야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소용이 없으니, 그 인간들 진짜 문제라는 면에서는 모두들 의기투합.

 

북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 사람 상대라서 조금 조심하는 어투로 말씀을 하시던데

나야 북한이라는 곳을 제대로 된 국가 취급하지도 않고, 세뇌당한 그쪽 국민들한테 동정심 같은것도 없는 사람이라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코야산역에 도착. 노부부는 여기서 시간 좀 보낸다고 하셔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케이블 열차를 탄다.

내려갈때도 맨 앞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발목때문에 어기적거리다 보니 사람들이 꽉 들어차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급한대로 망원렌즈로 틈을 잡아가며 간신히 한장 건진 정도. 사실 꼭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긴 했다.

 

코쿠라쿠바시역에서 전철을 타고 하시모토역까지 돌아가 다시 전철을 갈아타는, 이곳에 올 때와 역순으로 행동중.

앉아 있어도 도무지 발목의 통증이 가라앉질 않아서 전혀 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철 안은 아침과 달리 그럭저럭 붐비는 편이었는데, 하시모토역에서는 관광객뿐 아니라 교복 입은 학생들도 많이 보인다.

미리 앉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좀 전의 그 노부부가 전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하니까 반갑게 놀라면서, 3명이 앉을 수 있는 빈 자리로 손짓을 하신다. 아프지만 흔쾌히 자리 이동.

자기들은 역 앞 까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오는 길이라고 하신다.

 

좀 전엔 서로 이름도 안 물어봤는데, 마에다(前田)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부부는 두 번째의 만남에 굉장히 즐거워하는 분위기.

인생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격언이 있다면서, 한 번만 만나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두 번씩이나 만나게 되는건

아주 소중한 인연이라고 하며, 피로회복용 초콜릿을 꺼내서 한 조각 건내주신다.

중간까지는 같은 전철을 타고, 도중에 쿄토행 전철로 갈아타신다고.

 

그 일기일회라는 격언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

2008년과 2010년 두 번의 일본 자전거 여행 중,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해 준 사람이 나에게 해 준 말이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되돌려서 2008년의 이야기를 해 본다.

 

자전거 여행 당시, 후쿠시마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더 이상 자전거를 타기엔 힘들 정도의 어둠이 깔리던 시간이고

도쿄에서 여기까지 달려오며 떨어진 체력과 밀린 빨래 등으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적당한 숙소라도 잡을까 싶어 근처 파출소에 가서 물어보니, 한참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던 순경이 '여기가 괜찮고 싸다'며 추천해 준 호텔.

 

쿠니미(国見)라는 조그만 마을로, 여기서 얼마 안 걸린다고 해서 가뿐한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거리는 거리대로 꽤나 멀었고 설상가상으로 그곳까지 가는 도로가 공사중이라서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에, 자갈과 바위가 드러나 있는 비포장 공사길을 장님처럼 덜컹거리며 달려

30분만에 간신히 그 호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절한 순경아저씨한테 마음 속으로 불평 한마디 하고 카운터로 향했었지.

 

막상 카운터에 들어오자 커다란 스크린에 각 객실의 사진이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거 혹시 러브호텔 아닌가 해서 당황하고 있는데, 카운터에서 후덕한 아주머니가 매우 친절하게 인사를 해 주셨다.

숙박도 가능하냐고 하니 물론이라고 하는 걸 봐서, 러브호텔과 일반호텔을 겸하는 듯 했다.

평생 러브호텔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어쨌든 반쯤 경계심을 품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는데

자전거에 짐이 많아서 천천히 옮기겠다고 하자, 걱정말라고 하시며 안쪽에 있던 가족들을 전부 불러서 함께 짐을 들어주셨다.

 

한국서 와서 자전거 여행중이라고 하니 놀라워 하시면서, 자기 딸이 지금 한국에 수학여행 가 있다고 하신다.

자기도 한국 배우들 너무 좋아한다고. 욘사마 어떻냐고 하시길래 가감없이 솔직하게 '지금와서는 좀 낡은 느낌이죠'라고 했더니

짐 옮겨주던 가족들이 '그거 보라고!'라고 하면서 맞장구를 치는 모습에, 아주머니가 욘사마 꽤나 좋아하는가 싶었다.

 

당시 한국선 누가 인기있냐고 하길래 잠시 생각후 이병헌이 좋죠 라고 하니, 그사람도 좋아한다고 아주 기뻐하시더군.

달콤한 인생을 추천해 드리고 (놈놈놈은 개봉하지 않았다) 좀 잔인하니까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도 해 드렸다.

 

모두 함께 짐을 옮기고 나서, 빨래할 게 많을테니 느긋하게 목욕 후 옷가지들을 전부 달라고 하신다.

원래 그런 서비스가 있을 리가 없어서, 괜한 폐 끼치기 싫어 스스로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아주머니가 꺼내신 말이 '일기일회' 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분명 인연이니까, 호의를 배풀 수 있는 자기 쪽이 오히려 기쁜 편이니 부담없이 받아들이라고.

혼자 노숙해가며 밥 만들어 먹는 장거리 자전거 여행 중, 이런 말을 들을 때는 정말 가슴이 꽉 막혀오는 느낌이 든다.

자칫하면 정말 울컥할 수도 있었지만

바로 전날 결국 눈물 글썽이게 만들어 준 농촌 노부부와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감정을 추스리고 호의를 받기로 했다.

이 노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 계속 써내려가다가는 여행기 전체를 쓰게 될 지도 모르니까.

 

더군다나 세탁물을 받으러 올 때, 간단하게나마 식사까지 준비해 주셔서

호텔 로비에 들어갔을 때의 막연한 의구심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이렇게 고맙고 미안한 적이 평생 있었나 싶을 정도로.

 

편안한 밤을 보내고, 정성스럽게 갠 뽀송뽀송한 세탁물을 받고, 나갈 때 자판기에서 음료수까지 서너개씩 뽑아주시던

그 호텔 사람들의 호의는 정말 뼈에 사무치는 것으로, 그 전까지는 단순한 격언에 불과했던 '일기일회'가

그때부터는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려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지표가 되어 주었다.

 

 

 

그 고마움을 잊을수가 없어서 2010년 자전거 여행때 또 다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감사의 표시를 위해 일부러 밝은 오후 4시쯤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소소한 선물을 가져오긴 했지만

숙박료라도 두둑하게 드리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보답이라고 생각해서.

 

러브호텔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 투숙하면 요금이 좀 더 오르게 되는 점을 생각한 행동이었는데

나를 본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가 되어서 가족들 다 부르고, 아침에 교대하는 시아버지에게 전화까지 하는 등

더할나위 없이 반가워 하시며 맞이해 주셨다.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는 당초 목표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오후 8시에 투숙했을때나 가능한 최저 숙박요금만 내면 된다고

한사코 거절을 하셔서 무리하게 돈을 쥐어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러브호텔 방식이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호텔은 체크아웃 할때 입구쪽의 기계에 표시된 숙박료를 집어넣으면 방문이 열리는 구조라서

내가 더 내고 싶다고 해서 더 낼수도 없는 형식이고, 직접 드린다고 해도 받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더욱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세탁물을 다 받아가시고, 간단한 라멘이나 주먹밥 정도가 전부인 석식 메뉴 (그것도 원래는 유료)가 아니라

차를 타고 밖에 나가서 초밥과 맥주, 술안주까지 준비해 주시는 통에, 감사 인사 하러 왔다가 더더욱 몸둘 바를 모르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아주머니는 평생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고 기뻐해 주셨다.

 

30년을 살아온 한국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대라는 것을 평생 처음으로 방문한,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여행길 시골마을의 조그만 호텔에서 받았다는 사실은

타국에서의 자전거 여행이라는 찰나같은 순간에서,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을 안마시는 내가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맥주를 들이킬 수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 그 날의 만찬은 인생 최고였다.

게다가 아침에는 식당을 열지 않는 러브호텔인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근처 편의점까지 가서 도시락을 사다 주시기까지 했으니.

 

 

 

한참동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던 약봉지.

아침식사와 함께 건내주셨는데, 비상시 꼭 필요한 위장약과 감기약, 두통약, 반창고를 넣어주셨다.

약품별로 쪽지까지 붙여 놓았을 뿐더러, 한자를 읽기 어려워 할까봐 위에 독음까지 적어주시는 꼼꼼함까지.

 

정말 당시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될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지.

격언이라는 건 외워놓으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녀석이지만, 그 격언을 정말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옆에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꾸준히 손님이 줄어드는 시골 국도변의 러보호텔 사람들이 내게 보여준 마음은

어떠한 위대한 지혜나 삶의 업적, 사회적 지위 등이 없이도 타인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시켜 주었다.

이러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사진들을 볼 때마다 떠올리게 된다.

 

 

코야산에서 오사카로 돌아오는 도중 만난 마에다 씨 노부부가 가볍게 한마디 던진 '일기일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위의 추억이 단 몇초만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딱히 이걸 그분들에게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고, '그 말 저도 참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며 한번 웃어주는 것으로 만족.

 

마에다씨 부인은 할아버지가 독일인으로, 소위 말하는 '쿼터'시란다. 어렸을 적에 독일서 산 적도 있었다고.

아들내미가 나보다 나이 좀 많은데, 미국 유학가서 공부하다가 지금은 외교관이 되었다고 기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아~ 어디나 자식자랑하는 부모 얼굴이 제일 행복해 보인다. 난 그런 표정 짓게 만들수가 없어서 들을 때마다 그냥 쓴웃음만 짓지만.

 

일단은 나도 내일 나라에 가볼까 생각중이라고 말씀드리니, 이렇게 두 번씩이나 만났으니 내일도 아마 만나지 않을까 라고 하신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새벽에 출발해서 나라를 좀 둘러보고 오후에 출판사와의 미팅을 할 예정이었는데

지금 다리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하룻밤만에 나을것 같지는 않아서 가능성이 희박하다.

느낌상 만약 내일 나라에 간다면 이 분들과 한번 더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인간에겐 한계라는게 있는 법.

 

마에다 씨는 삼성과 LG의 어마어마한 약진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다.

해외에서 단편적으로 들리는 정보이긴 하지만, 결코 1인자의 위치를 넘겨주지 않을 듯이 보였던 기술대국 일본 기업들이

한국의 대기업 앞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가는 현 상황이 놀랍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물론 난 여기서 끝낼 생각 없이, 한국엔 요즘 그런 친 대기업 정책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해 준다.

간단하게 빅맥지수 정도만 언급하며, 현재 한국의 최저임금이 엔화로 시간당 300엔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주니

상당히 놀라는 눈치다. 일본의 최저임금은 지방별로 다르지만 (편의점 동일상품도 지역소득에 따라 가격이 1/3이상 차이난다)

전국 평균치는 740엔 정도니까, 삼성의 어마어마한 약진에 난생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사실을 들은 마에다 씨 부부는,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어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느낌이다.

 

일본은 물가가 비싸니까 단순비교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빅맥지수로 아주 대강이나마 그 차이는 실감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일본은 2000년 이후로 10년동안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거나 1%이내로 넘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물가 상승이 없다는 것.

한국은 상승률이 매년 4%를 넘어가고, 일본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면 그보다 훨씬 높다. 눈가리고 야옹인 셈.

특히 모 설치류가 나라 말아먹기 시작한 이후 물가상승률은 14% 가깝다던데?

 

 

 

시간가는줄 모르고 마에다 씨 부부와 대화를 하다가 헤어졌다.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일본 경제에 대해 토론하는 노숙자 차림의 한국 여행객을 힐끔힐끔 쳐다보긴 했지만

그냥 무시하고 , 마에다 씨와 헤어지고 난 후에는 눈 딱 감고 난바 역까지 고통을 참으며 앉아 있었다.

 

이제 난카이(南海) 라인에서 요츠바시(四つ橋) 라인까지 30분간 걸어가야 하는 최후의 시련만이 남았다.

아침 조식외에는 아무것도 먹은게 없는데, 배는 고프지 않지만 일단 뭐라도 입에 넣고 들어가야 편할것 같아서

난바 워크(난바역의 거대 상가 지하도)를 걸어가다가 그냥 눈에 보이는 파스타&카레 전문점에 들어가서 해물카레를 주문.

 

한국서 직접 만들어 먹던 해물카레는 일단 해물 맛이 우러나도록 카레와 함께 밤새도록 끓여먹곤 했는데

이곳 해물카레는 그냥 카레 소스에다가 삶은 해물을 얹어서 나오는 방식. 이런걸 해물 카레라고 불러도 되는건가 싶다.

하지만 카레 소스는 대충 만든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이

맵다기 보다는 혓속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향기가 콧구멍까지 역류하는 진한 풍미를 느끼게 해 준다.

확실히 이 정도 진한 카레 소스라면 해물을 넣고 우려내봤자 향기로 인한 이득보다, 퍼석퍼석해지는 해물이 더 아까울 듯 하다.

 

해물의 상태는 꽤나 앙호한 편으로, 가리비나 문어나 새우나 식감과 향기가 쉽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하다.

밥까지 같이 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소스 조금에다가 해물만 먹는게 더 맛있게 느껴진다.

유명한 카레 체인점인 코코 이치방야(CoCo 壱番屋)보다 가격은 높지만, 가격차이만큼의 맛은 느껴져서 만족.

 

잠깐 휴식후 요츠바시 라인으로 걸어가다가 약국에서 소염 파스를 구입. 일단 이걸로 하룻밤 잘 휴식하면 내일은 걸어다닐 정도는 되려나 싶다.

발목 염좌에는 특히 인도메타신이 포함된 파스가 효과가 좋은 듯 해서 일부러 고르고 골라서 구입했다.

사하라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국내 일반 마라톤도 몇번 뛰어봤는데, 그때 몸으로 기억했던 지식이라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간신히 호텔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으니 마치 댐이 붕괴되는 듯이 쌓여있던 통증이 일순간에 퍼져가는데

저절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올 정도로 굉장하다.

끙끙거리며 침대에 다이빙하듯 쓰러져 발을 높이 들어올리니까 놀라울 정도로 쏴악~ 하며 통증이 격감하는 느낌이 참 오묘.

파스로 발목을 감싸니 타오르던 발목이 시원해져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면, 마치 구내염에 알보칠 원액을 쏟아붓는듯한 신나는 율동과 함께 몸이 꼬여온다.

아주 작은 비즈니스 호텔이라 침대에서 화장실까지는 70~80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화장실 한번 가려면 일단 몸을 일으키고 한동안 끅끅거린 후에

미션 임파서블 1편의 랭리 잠입신을 연상시키는 절제된 움직임으로 약 3분에 걸쳐 이동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땀범벅이라 느긋하게 욕조에 들어가고 싶은데도, 염좌엔 뜨거운 목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왼쪽 발목은 욕탕 밖으로 내밀어 샤워기로 찬물을 뿌려주는, 뭔가 상쾌하지 않은 목욕을 간신히 끝마쳤다.

 

최대한 왼발을 높이 올리고 누워서 TV를 보는데, 뉴스에서 소니와 파나소닉의 디지털 TV 부분의 전략적 제휴 소식이 들려온다.

당연히 원인은 삼성 때문. 사실 소니와 파나소닉 점유율을 전부 합쳐도 삼성의 점유율 근처에도 못가고 있으니까.

한국인으로서는 그게 뭔 대수인가 싶겠지만, 소니와 파나소닉은 70년전 창사 이후로 한 번도 사이좋았던 적이 없는 라이벌 중의 라이벌.

소니 본사가 도쿄에 있고 파나소닉은 오사카에 있기 때문에 동쪽과 서쪽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었다.

 

한때 세계 전자시장을 잠식하다시피 한 거물급 라이벌 회사가

외국 회사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기술 협력을 한다는 것은, 일본인들로서는 경천동지할만한 큰 사건이다. 근데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게 문제.

 

마에다 씨, 이 뉴스 보면 아마 내 생각이 나겠지 라고 추측해 보며, TV OFF 타이머를 맞춰놓고 누웠는데

아무리 파스를 감았다고 해도 하루종일 너무 무리했는지 통증이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화장실 한번 가려면 대소동을 펼쳐야 하고.

자세를 조금만 바꿔도 바로 격통이 엄습해 오기 때문에 잠을 자는건지 마는건지 알 수가 없다.

2시간 30분으로 설정해놓은 TV가 꺼지고도 잠을 자지 못해서, 결국 TV 틀어놓고 보다가 졸다가 하는 수 밖에. 체력회복은 물건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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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가람의 관람 순서라는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그걸 지킬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그냥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건물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귀국후 사진을 정리하는데 건물들 찍은 사진의 시간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루트상으로 대략 금당 -> 산노인 -> 서탑으로 진행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진이 찍힌 시간순으로 배열해보면 완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다리미 인간처럼 왔다갔다한 결과가 나온다.

걸어다니는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사실은 그냥 빙 둘러보는 루트보다 훨씬 더 많이 걸었던 것.

 

이쯤되면 당시 내 정신상태가 어느 정도 절박했는지 스스로 납득이 간다.

 

어쨌든 산노인 옆의 이 건물은 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설명을 읽을 여유도 없었으니.

가이드북에는 그냥 '종루'라고 적혀있는데, 2층에 종이 있는 건가?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가람의 동쪽에는 코야시로(高野四郎)라는, 척 봐도 종루처럼 생긴 녀석이 있는데, 이 녀석과는 형태가 전혀 다르다.

 

 

 

그러고보니 1층의 입구쪽에는 출입금지라는 펫말도 없는걸로 봐서 들어가도 될 법 한데

계단을 오르내린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몸이 회복되어 포스팅중인 지금 생각해보면, 한번 더 가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느낌.

 

산 속 풍경이 다들 그렇지만, 이곳도 사계절에 따라 그 느낌이 90도씩 딱딱 바뀌기 때문에

다음 방문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가게 된다면 일단 가을이나 겨울쯤이 좋을 듯 하다.

 

 

 

단상가람의 북서쪽에 위치한 서탑(西塔)의 모습. 1834년에 재건했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이 서탑은 다보여래의 사리를 모시는 다보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국사의 다보탑과는 덩치나 형태가 매우 달라서 나름 신기한 경험이다.

 

높이가 27미터나 되는 거대한 녀석이지만, 그 높이를 훨씬 뛰어넘는 삼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탓인지

그리 위압적으로 보이지 않고 주변 풍경에 잘 녹아들어간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니 한층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

 

 

 

예술성에 촛점을 맞춰 감상해 본다면 사실 이 서탑은 불국사의 다보탑과는 비교할 필요도 없다고 보지만

200년 전에 세워진 이 정도 크기의 목조 건축물의 보존 상태 하나만큼은,

사진을 찍으면서도 괜스레 아쉽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 아쉽다는 표현은, 물론 현재 모습으로도 신라 석탑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는 불국사 다보탑에 대한 것.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이 멋대로 보수한답시고 완전히 해체되었다가 복원되었는데, 그에 관련한 기록이 일절 남아있지 않아서

전통성에 큰 상처를 입혔으며, 원래 네 마리였던 돌사자도 가져가버려, 한 마리만 남은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당시엔 조선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하찮게 내려봤으면 절세의 미탑을 그딴 식으로 주물거렸는지 한탄스럽기만 하다.

자기네들 다보탑 복원은 이렇게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석굴암에 관한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을테고 여기서 더 말했다간 분노 폭발할 뿐이니 넘어가고.

 

세계적으로 보면 역사의 비극 아래 일어난 무수한 사고중 하나일 뿐이니 지금부터라도 잘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다보탑과 더불어 석탑양식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석가탑은 왠걸,

해방 이후 보수공사중 옥개석을 떨어트려 박살내버린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러서, 강점기때하고 다른게 뭐냐고 욕먹기도 했으니

강점기의 그 사건이 없었더라도 과연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이 서탑만큼 극진히 보수를 받아왔을지, 솔직히 말해 부정적이다.

 

 

 

역사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인데다

특히 불교라는 전통 문화와 자국의 역사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공통된 국가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런 문화재를 볼 때마다, 한국쪽이 훨씬 더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현재 문화재들의 보존 상태를 보면 일본 쪽이 월등히 앞서있는지, 한숨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감상은 즐겁게 하고, 셔터도 기분좋게 누르고 있지만, 두고 온 자식걱정이 계속 든다고 할까. 물론 자식 길러본 경험은 없지만.

 

이번 여행과는 관계없는 개인적인 잡설일 뿐인데,

현재 한국의 불교 문화재 중, 비단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를 통들어서도 가장 가치있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팔만 대장경만큼은 부디 천년만년 그 가치를 잃지 말고 지속되어주길 바란다.

대장경 원판은 물론, 원판을 보관하는 장경판고조차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보존이 잘 되어있던, 완전히 망가져 있던, 이런 불교 문화재들을 볼 때면 항상 드는 생각.

 

 

 

상념은 그만하고 반시계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껏 보아온 사당과는 분위기가 달라보이는 준지당(准胝堂)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준제관음(准提觀音)이라고 부르고, 이는 산스크리트어 'Cundi'의 훈음이라고 전해진다.

청정함과 모성성을 상징하는 여성 관음이라고 하는데, 불교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

 

아무튼 이 녀석은 1883년 재건되었는데도, 비슷한 시기에 재건된 다른 불당과 비교해서 꽤나 고풍적인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인상깊었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어영당(御影堂)이 홍법대사가 거주하던 불당으로 유명한 탓에

가람 안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 녀석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드니 뭐.

 

 

 

준지당 바로 옆에 위치한 어영당. 일본어로는 미에이도(みえいどう)라고 하는데, 때로 고에이도(ごえいどう)라고 하기도 한다.

가뜩이나 현대 일본어 상용한자 발음도 못 외우겠는데, 고어 문법의 영향을 받는 이런 사찰들의 발음은

가끔씩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발음되기도 해서, 설명 없이는 알아먹기 힘들다. 이건 현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일본에 실존하는 특이한 성씨 같은 경우도, 가끔 일본 TV에 소개되기도 할 만큼 정상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녀석들이 있지.

대표적인 것이 '一' 이라는 한자. '일'자를 읽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가 싶기도 하지만,

이게 이름의 성으로 쓰일때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읽히기도 한다.

바로 니노마에(二の前). 숫자 2의 앞에 있다는 뜻.

 

최근 모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해서 이제는 꽤나 친숙해 진 타카나시(たかなし)라는 성씨도 대표적인 케이스.

원래 타카나시는 '鷹無し' -> 즉, '매가 없음'이라는 뜻인데, 이게 성씨로 쓰이면 한자가 참으로 절묘하다.

'小鳥遊' 라고 쓰는데. 뜻 그대로 '작은 새가 논다'라는 뜻. 작은 새가 노는 곳에는 매가 없다는 해석상

'小鳥遊' 라고 쓰고 타카나시라고 읽는, 실로 오묘한 성씨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녀석.

 

예전에 나름 재밌게 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이 성씨를 읽을줄 몰라서 타카나시가 아니라 카타나시(形無し)로 부르는데

이건 '형편없음'이라는 의미라서, 참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남자 이름이 타카나시고, 행진중인 괴생물체가 그를 자꾸 카타나시라고 부르는 그렇고 그런 애니메이션.

사찰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것도 이 블로그의 특성이라고 이해하면 편할 듯 하다.

 

참고로 실제 작품에서 이런 러시아 행진곡이 나오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와서, 어영당은 조사(祖師)의 초상을 안치한 곳을 뜻하는데, 조사란 불교 종파를 창건하거나 그에 준하는 큰스님을 지칭하는 말.

종파에 따라서 조사당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한국에서는 어영당보다 조사당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듯.

 

물론 건물 자체는 1847년에 재건되긴 했지만, 기록상으로는 홍법대사가 거주하던 곳이라고 한다.

단상가람의 상당수 불당이 1800년대 재건된 이유는, 그 당시 이곳 산맥 전체를 휩쓸었던 큰 화재가 있었기 때문.

 

매년 3월 21일에는, 1년에 한번 이곳의 내부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한다고 한다. 흥미는 동하지만 아마 미어터지겠지.

홍법대사가 머무르던 곳이라서 그런지 규모도 크고, 연꽃 모양을 한 등잔이 가지런지 배열된 모습이 심히 아름답다.

위의 어영당 설명에서 알 수 있지만, 실제 홍법대사가 머무르던 시기에는 딱히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고

홍법대사 입적후 초상화가 안치되고 나서부터 어영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단상가람의 정북쪽에 위치한, 가람 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근본대탑(根本大塔)의 모습.

진언종의 근본 사상을 표현한 거탑으로, 단상가람의 중심 역할을 한다.

 

48.5미터나 되는 탑이라서, 전신 사진을 담으려면 저 멀리 한참을 떨어져야 했는데

다리 상태는 말할것도 없고, 사실 너무 깔끔한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사찰과는 좀 동떨어진 모습이라서

그냥 대강대강 담고 말았다. 여행의 전리품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좀 아쉽긴 한데,

분명히 여행 당시엔 '그렇게까지 해서 전신 모습을 찍고싶진 않다'라는 기분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남들 보여주기에 멋진 사진 남기려고 여행 간거 아니니까 지금 보이는 이런 사진이 이 탑에 대한 내 솔직한 기분이지.

 

 

 

신성한 건물에 저 색깔을 사용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위화감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저런 발색을 내는게 쉽지 않았던 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신성하고 웅대하게 보였을 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져 버리는걸까.

1937년 재건된 녀석이라서 천년 전의 모습을 찾는 건 불가능하지만.

 

내부에는 대일여래 본존불상과 함께, 극채색으로 내부를 뒤덮은 화려한 만다라의 세계가 관광객들을 압도한다고 하는데

입장료가 필요한 곳이고, 그럼에도 누가 따로 지키고 있는게 아니라 그냥 스스로 내고 들어가는 곳이라서

저 계단 올라가는 것만 해도 만다라의 세계로 떠나버릴듯한 나로서는 그냥 접근도 하지 않고 주위에서 사진만 찍는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좀 전의 서탑이 훨씬 마음에 들어서, 이곳엔 큰 관심이 없다.

서탑과 기본적인 구조가 비슷하기도 하고.

 

가람 동쪽 끝에는 물론 동탑도 있는데, 이 동탑은 1984년에야 재건되었고, 서탑과 달리 이 근본대탑처럼

시멘트 골격에 목재를 사용한 형태를 하고 있어서 관심이 가지 않아, 그곳까지 이동하진 않았다.

서쪽에서 중앙부까지 오는데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동탑 외에는 그닥 볼만한게 없는 곳까지 가기는 힘들다.

 

본인에겐 그닥 감흥이 없었지만 그래도 단상가람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보니 관광객이 내부로 들어가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경건하게 문 앞에서 합장하고 들어간다. 문화재 관광만큼이나 불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곳이겠지.

 

이렇듯 중앙부에 거대한 탑이 우뚝 서 있는 곳은, 대부분 그 주변이 탁 트인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런 곳에 설 때마다 뭔가 왜소하고 고독한 미물이 된 것 같아서 어색하다.

내가 불교 사찰에서 바라는 건 웅장함이 아니라 조화로움이라서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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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미터의 짧은 거리를 간신히 기어서 단상가람에 도착했다.

가람에 들어가기 전에, 가람 주위를 둘러싼 숲속 풍경이 멋들어져서 셔터를 누른다.

울창하긴 울창한데도 이렇게 조경이 멋진 숲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보통 이런 산속 깊은 곳은 어딘가 살짝 어둡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데.

 

도착하자마자 정면에 거대한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와서, 혹시 내부 보수중이라 못 보는건가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는데

앞쪽 표지판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2015년 개창 1200년을 맞아 1843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중문(中門)을 건설중일 뿐

나머지 사찰들은 멀쩡하게 공개중이다. 여기까지 와서 단상가람 구경을 못했다면 정신적인 충격이 컸을 듯.

 

진언종의 현재 총본산은 콘고부지(金剛峰寺)이지만, 원래 홍법대사가 수행하던 본당은 이곳 단상가람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를 가진 불당은 이곳에 거의 집결해 있다. 국보급 보물들도 굉장히 많았지만 현재는 영보관에 보관중.

 

 

 

가람은 산스크리트어 상가-아라마(sanghārāma)의 한음표기인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임말.

승려들이 거주하며 수행하는 거주지를 뜻한다. 한국에서도 쓰이는 말이라서 포스팅에서 일본어 표기가 아닌 가람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한다.

 

공사중인 중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보이는 금당(金堂)의 모습. 단상가람의 본당에 해당하며,

현재 건물은 수많은 화재 끝에 1932년 재건된 녀석이다.

워낙 중요한 가치를 가진 건물이라 가까이서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심하게 복원되어 있다.

 

 

 

코야산의 모든 사찰이 그렇듯 이곳도 실제 진언종의 승려들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곳인데

그 덕분에 더더욱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할까.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대다수의 문화재급 사찰에 비해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처음 창건되었을 당시인 819년의 건축양식과는 사실 차이점이 많이 보이지만

살짝 굽이친 서까래와 원만한 곡선을 그리는 처마의 구조는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고려시대 건축된 사찰인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중국, 일본을 모두 포함해서도 으뜸간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적어도 일본에서 이 정도로 미려한 모습을 한 사찰은

나라에 남아있는 극소수의 사찰과 닛코의 사찰, 그리고 이곳 뿐이라고 평가해 본다.

심심한 느낌이 없잖아 있는 현재의 일본 사찰 양식과는 레벨이 다르다.

 

  

 

금당 내부는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외부와 달리 상당히 화려하다.

건축 당시, 당대 일본 최고의 예술가가 그려넣은 약사여래 불화가 굉장하다고 하는데, 원본은 영보관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가람 내부에 있던 수많은 국보들이 관리와 보존을 위해 대부분 영보관으로 이전되는 바람에 조금 아쉽지만

돈 주고 보물 관람하는데 조금 인색한 편인 나로서도, 몸 상태만 괜찮았다면 꼭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가람의 사찰들 대부분은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니 딱히 보여줄 것도 없긴 하지만.

 

 

 

 

금당 왼편엔 넓은 마당과 함께 조그마한 벤치 몇개가 놓여있다.

문화재 덩어리인 단상가람안에 의아하게도 흡연 가능한 장소가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흡연문화에 꽤나 관대해서, 대부분 흡연금지인 명승지 입구 앞에 흡연소가 설치되어 있는 일본에도

이렇게 가람 내부에 흡연소를 만들어 놓은 것은 상당히 드문 케이스. 혹시 승려들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걸까.

 

어쨌든 벤치에 앉아서 아마도 마지막이 될 휴식을 취하며 가람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한다.

오쿠노인에서 숱하게 봤던 거대한 삼나무들은 역시 이곳에서도 잘 어울린다.

날짜를 잘 잡아서 그런지 관광객의 모습이 정말로 드물어, 몸은 아파도 날짜 하나는 참 잘 선택했다고 자화자찬 해 본다.

 

땀을 식히고 욱씬거리는 왼쪽 발목을 진정시키며 이 곳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에게 신성함과 경건함을 일으키는 근원은 종교가 아니라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속과 떨어져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이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미지라고 한다지만

만약 그 세속이라는 곳에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면 아마도 이곳과 세속의 경계는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적 신비함도 결국엔 나무와 흙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사고의 발달로 인해 언어라는 수단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동시에 언어로 인해 인간의 사상과 개념 자체에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 처럼

 

종교가 가지는 경건함과 신비함 역시 원래부터 자연이 가진 요소였음에도, 단지 사람의 머릿속 필터를 거쳐

종교라는 관념으로 구체화 된 결과물일 뿐이라고, 이런 풍경을 보면서 상상해 본다.

 

한마디로, 인류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개념은 그 모태를 자연 그 자체에 두고 있다고 말이지.

먼 길을 돌아와서 진리를 갈구하지만, 결국 태초부터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의 산물이었을 따름.

 

 

 

일반적인 불교 가람과는 달리 이곳 단상가람에는 신사도 들어서 있다.

신사의 입구를 알리는 토리이(鳥居)가 이곳에서는 왠지 낮선 느낌.

물론 홍법대사와 관련이 있는 역사적 건축물이고, 후대에 일부러 세워둔 신사는 아니다.

 

 

 

이곳의 신사는 따로 이름이 정해져 있지 않고 그냥 니우묘진(丹生明神)이라는 토지신을 기리는 어사(御社)라고 불리는데

일본에서는 훈음과는 맞지 않게 미야시로(みやしろ)라고 부르기도 한다.

 

니우묘진이라는 신은 홍법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건립할 때 그를 수호해 준 토지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 사찰을 짓는 승려도 축복해 주는 토지신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물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 신토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토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든 카톨릭이든 힌두교든 자신들의 신과 다를바 없는 한 명의 신일 뿐이며

신토를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날 성당에 간다던가, 사찰을 찾아 절을 올린다던가 하는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코야산 한국 가이드북에는 이러한 설명 싹 빼버리고 그냥 '묘신사'라는 이름 하나만 달랑 쓰여있어서

대체 이게 뭔가 싶은 사람들이 많을 듯 하다. 나머지 중요문화재 설명하기에도 페이지가 모자라니 어쩔 수 없지만.

 

사진의 건물은 미야시로가 아니라 그 앞에 건립된 산노인(山王院)이라는 배전.

이 곳은 규모가 큰 신사에서 쓰이는 양식처럼 본전과 배전이 나뉘어져 있는데

이 배전은 또 불교 사찰건물의 양식을 상당부분 빼다박은 건축물이라서 굉장히 묘한 느낌이다.

 

이렇게 신사와 사찰이 한 곳에 세워져 있는 광경은 일본에서도 극히 드문 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일본에서 이곳밖에 없다. 찾아보면 더 나올지도 모르지만.

 

 

 

정작 미야시로 신사는 그 강렬한 주황색이 워낙 두드러지는 바람에

이곳과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어색함 탓인지 한 장도 담아오지 않고 그냥 눈으로만 구경했는데

산노인은 신사 양식과 불교 양식이 훌륭히 조합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구도를 잡고 뷰파인더를 바라보는데, 문득 '코야산의 시린 산속에서 해가 막 떠오늘 무렵'의 산노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듯 해서

색온도를 조절해서 그때 느꼈던 이미지를 재현해 보려고 노력해 봤다.

보정 프로그램 쓰는것도 쥐약이라서 마음먹은 것처럼 뚝딱뚝딱 고치진 못하지만, 대강 이런 느낌.

이곳에서 아침을 맞이해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신사 앞이라면 에마(絵馬)가 빠질 수 없지.

그런데 그냥 신사가 아니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에마 역시 불교식과 신토식이 따로 걸려 있다.

한국과는 조금 다르지만, 진언종식 에마라는 느낌. 쓰여 있는 소원도 읽기힘든 한자로 쓰여 있는 점이 특징.

참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쓴 흔적이 보인다. 일본인들의 에마 사랑은 이곳에서도 멈추지 않는구나.

 

 

 

이곳은 전형적인 신사의 에마를 걸어두는 곳.

역시 진언종의 총본산인 만큼 이런 에마보다는 불교식으로 소원을 비는 곳이 훨씬 빡빡하다.

 

대체로 신사의 에마들을 잘 살펴보다 보면, 소원 빈다기 보다는 반쯤 우스갯소리를 적어놓는 경우가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장난스러운 에마가 보이지 않는다. 세삼 이곳을 바라보는 일본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

거기다가 옛 향기 가득한 이곳 단상가람에 걸맞게도, 오랜 시간이 지나 매직으로 쓴 글씨가 지워져 버린 에마마저 찾을 수 있다.

이제껏 꽤나 유명하다는 신사는 다 찾아가본 나로서도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에마마저 이렇게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광경은 소소하지만 확실히 각인되는 여행의 추억이다.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굉장한 사찰들이 꽉꽉 모여있는, 보물상자같은 단상가람이지만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 지고 있다. 한시간에 두 번 오는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타려면

지금부터라도 이동속도를 높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평소 발걸음 대로라면 이곳 단상가람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는,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만

혹사에 혹사를 거듭한 왼쪽 발목은 원래 이동속도를 1/10 이하로 줄여버린데다

덕분에 계속 부담을 준 오른쪽 다리는 근육이 터질듯 단단해진 상태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일 때를 생각해서 구경하다보면 자칫 버스를 놓칠지도 모르는 위험성이 있었다.

 

단상가람의 입구까지 최소한 버스 도착 15분 전에는 도착해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될 것 같아서

하나라도 더 많이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서두르게 된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혼자 쇼를 벌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단상가람은 17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저 녀석들이 전기로 빛을 밝히는지, 여전히 초롱불을 사용하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쉽다.

어둠 속에 잠긴 단상가람 사이사이에서 조그맣게 빛나는 풍경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지.

조용한 산골짜기 사찰 아래 울려퍼지는 우렁찬 셔터소리에 그나마 기운이 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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