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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 해당하는 글들

  1. 2014.12.02  2월 16일 오비히로 - 토카치무라 2
  2. 2014.11.26  2월 16일 오비히로 - 개척과 말의 역사 6
  3. 2014.11.21  2월 16일 오비히로 - 대폭설 6
  4. 2014.11.11  2월 15일 오비히로 - 쌀쌀한 도시 10
  5. 2014.11.05  2월 15일 오비히로 - 한 잔 한 개피 그리고 증기 6
  6. 2014.10.23  2월 14일 시레토코 - 만찬 10

 

경마장 입구가 열리지 않았으니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옆의 산지직송 마켓을 둘러보러 들어간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 사진 찍어도 되냐고 하니까 가볍게 승락해 준다.

 

농산물 신선하기로 유명한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품질좋기로 유명한 토카치 평야 지역이고

식량 자급자족률이 500%를 넘는 곳이니 이곳에서 타 지역 농산물을 먹는다는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

 

 

 

사고 싶게 만들어지는 포장 기술만큼은 백 년이 지나도 한국이 따라잡기 힘들 듯.

좋게 말하면 합리적이라고 할까, 한국은 포장지에 들어가는 돈이 있으면 그걸로 양이 더 많은 걸 사먹는다는 관념이 강하니까.

 

하지만 나같은 여행자들에게는 이런 디자인을 한 과자가 눈에 훨씬 잘 들어오는것도 사실이다.

선물을 사 갈만한 환경이 안되는 본인을 제외하고, 평범하게 타 지역에서 관광 온 사람들이라면

왠지 못해도 한두 개 씩은 구입해 가지 않을까 싶은 물건들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한랭지에서 더욱 부드럽고 고소한 감자다 보니 홋카이도 하면 떠오르는게 이 녀석이다.

품종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지역의 기후가 감자를 맛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홋카이도산 감자를 사용했다고 해도 실제 이 지역 출하품이 아닌 이상 이 맛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

 

얼핏 봐서는 과연 이런 것까지 사 갈까 싶은 상품들까지 많이 진열되어 있는데

만들지 않아서 못 사는 것 보다는 수요를 만들어내는 도전정신과 그것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시장 규모가 부러울 따름이다.

 

 

 

오비히로에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온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한국어로도 광고를 하고 있다.

글자를 보니 일단 한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 쓴 글귀는 아닌 듯 하지만, 이런 지역에서 한국어를 보게 되면 왠지 배려심에 마음이 따듯해진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만화 '은수저'에서 등장하는 장면을 이용한 광고인데

그 옆에 판매중인 '오야코동과 TKG에 어울리는 간장'이 심히 구매욕구를 자극한다.

 

오야코동은 반숙 계란에 닭고기를 더해 밥 위에 올린 덥밥을 의미한다. 의미는 말 그대로 부모와 자식 덮밥.

일본에 있을 때 최고의 아침식사로 손꼽는 것이 TKG 였는데, 타마고(계란)카게(덮)고항(밥)의 약자로 많이 사용된다.

싱싱한 날계란을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흰 쌀밥 위에 얹고 간장을 뿌려 비벼먹으면 그 고소함과 짭짤함은 보물과도 같다.

일본에서는 그 TKG에 알맞게 짠 맛을 줄이고 단 맛을 첨가한 전용 간장도 대인기.

 

문제는 저 간장을 사들고 가도 한국에서 생으로 먹을만한 계란 찾기가 어렵다는 것. 저 상품을 볼 때마다 매번 아쉬운 마음 뿐이다.

특히 이곳 홋카이도에서는 그날 아침 낳은 싱싱하기 그지없는 날게란을 먹을 수 있으니, 상상하면 입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최고의 신선도를 자랑하는 산지 직송 야채들이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진열된 것을 보니

아침에 이곳에 들러 경마 몇 판 땡기고 야채 몇 종류를 사들고 돌아가는 중년 가장의 모습이 어렴풋이 연상된다.

외국 관광객인 나로서는 구입할 가치가 없지만, 돈을 줘도 먹거리에 대한 불신을 지우기 어려운 한국 사정을 생각하면 부러움을 지울 수 없다.

 

경마장 한 켠에 마련된 조그마한 시장에서도 못 구하는 것이 없는 풍족함은 세상에서 가장 디지털화 된 한국과는 다른 만족감을 준다.

나이 탓인지 모르겠는데, 자기가 먹을 것을 실제 손으로 만져보지도 않고 웹에서 구매해 배달시킨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알이 꽉 찬 시샤모가 뜯기 아쉬울 정도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시샤모는 열빙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민물고기인 빙어와는 다른 청어과의 바다물고기라서 헷갈릴 때가 많다.

 

알이 꽉 찬 암컷이 인기가 있지만 가격을 낮추는 것인지 수컷 시샤모도 구분해서 판매중이다.

이걸 숯불 같은데 올려놓고 구워서 아작아작 씹어먹으면 술안주로 예술인데 이곳에서는 아쉽게도 그림의 떡.

 

 

 

산지 직산이라고는 하지만 주방이 없는 조그만 비지니스 호텔에 틀어박힌 여행자로서는 구매할 필요가 없는게 대부분이라

예전부터 신기하게 생각했던 젤리빈 과자나 한 봉지 사들고 밖으로 나온다.

어릴적부터 그 귀여운 모양과 영롱한 색깔이 신기했지만 엄니가 불량식품이라며 먹지 못하게 했고

그 이후로 관심 자체가 시들해져서 아직까지 평생을 손꼽아 한두 번밖에 먹은 기억이 없는 녀석이라 눈에 들어온 김에 사 본다.

 

아직도 경마장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아서 시간 남을 때 미리 배를 채울 생각으로 건너편 푸드코드에 들어간다.

조금 위화감이 들긴 해도 이곳 한정상품이라는 토카치 우유라멘을 먹어보지 않고는 그 호기심을 잠재울 수 없으니까.

 

 

 

자리가 10개도 되지 않는 조그만 라멘가게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우유라멘 하나를 주문하고 나서 버스 티켓을 구입할 때 받았던 200엔 할인권을 건네며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가능하다고 하신다.

 

한정상품이라는 미명 하에서는 뭐든 비싸지기 때문에 할인권이 꽤나 도움이 된다.

전분에서부터 야채 차슈, 우유까지 100% 토카치 산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니 가격만큼의 만족감은 있지만.

 

영하 8도 정도의 바깥에서 돌아다니다 들어와 먹는 라멘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살짝 긴장하면서 한 모금 떠넘긴 우유 국물은 거부감이 전혀 없는 부드러운 곰탕 맛이라 오히려 너무 무난한 편.

하긴 벌칙게임에서 먹는 것도 아니고 맛없는 라멘을 일부러 만들었을리는 없으니 내 기대가 너무 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 라멘에서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과도한 짠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맛이다.

강렬한 자극보다는 곰탕에 부드러움을 한껏 첨가한 듯한 맛이 부담없이 느껴진다. 특히 이런 겨울날에는 날씨가 곧 반찬이니까.

 

차슈가 매우 빈약했던 게 가격대비 아쉬웠지만 어쨌든 국물에 특징을 둬서 광고하는 녀석이니 체험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라멘 명인이 만든 메뉴는 아니라 눈이 동그레 질 맛을 느끼진 못했지만 이곳에서 한 번쯤 먹어볼 녀석으로는 안성마춤.

 

 

 

먹거리는 라멘 외에도 많고, 경마장 안에도 충분하지만 일단 몸이 따뜻해 졌으니 대만족.

밖으로 나오려는데 아주머니가 경마장 할인권 필요없냐고 물어보신다.

토카치무라에서 뭐든 구입을 하면 경마장 할인권을 받을 수 있다고.

 

버스 티켓을 끊으며 이득봤다고 의기양양하던 기분이 조금 사그라드는 정보였지만 어쨌든 이러나 저러나 손해본 것은 없다.

마침내 문을 연 경마장 입구를 통과했지만 바로 건물 내로 들어가기전에 주위 풍경을 다시 한번 담아본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도 이 정도 눈이 내리면 여름만큼이나 풍부하게 잎사귀를 늘어트린 모습이 되어 그것 또한 일품이다.

 

 

 

무용지물이 된 벤치도 쌓일 부분만 쌓인 눈더미가 풍미를 더해줘 셔터를 누르게 할 정도의 쓸모는 있다.

기껏 반에이 경마 보러 왔는데 눈이 부족해서 땅바닥이 어스름하게 비쳐 보인다던가 했다면 매우 아쉬웠을텐데

이렇게 봉긋봉긋 솟아있는 벤치를 보니 참 여행운이 좋은 편이구나 싶어서 미소가 떠오른다.

 

벤치 찍으며 실실 웃고있는 사람을 옆에서 보면 어떤 모습일려나.

 

 

 

경마장 반대편 광장은 원래 아이들의 놀이공원이었던 듯.

예전에 말이 끌던 마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여름이라면 경마에 관심없는 아이들이 한껏 뛰어놀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마차쪽으로 걸어간 것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흔적이 눈 위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봐서

몇몇 아이들이 저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지만, 역시 날씨가 날씨다 보니 오래 버티진 못했나 보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와 보는 경마장인데, 첫 인상은 이게 경마장인가 의아한 기분이다.

경마 관련 상품들을 판매한다는 것 외에는 그닥 특징적일 게 없는 아케이드 같은 분위기.

막상 들어와보니 조금 긴장되기도 하는게, 경마를 어디서 어떻게 관람해야 하는지조차 아는 게 없다.

 

마권을 살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어디에서 말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오래된 상식 상 심각한 표정으로 마권뭉치를 노려보며 줄담배를 피워대는 도박 중독자들이 보이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그냥 놀러온 듯한 가벼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아서 약간은 맥이 풀린 기분이기도 하다.

 

 

 

나같은 초심자를 위한 서비스정신은 철저해서 기분은 좋다.

서로우브래드 같은 일반 경주마들의 편자와 반에이 경주마들의 편자를 비교해 놓은 코너가 인상적.

편자 크기만 봐도 반에이 경주마들의 덩치를 짐작할 수 있다. 겨울용 편자의 스파이크에 가까운 위압감이 특히 눈길을 끈다.

 

정말 한국 사람들도 많이 오는건지 한국어 안내서도 있고, 터치 모니터에는 반에이 경마에 대한 전반적 상식과

표를 구입하고 당첨금 수령하는 방법까지 세심한 설명이 초심자들을 반겨주고 있다.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선 굵은 애니메이션을 사용해 경마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

자칫하면 인생 포기할지도 모르는 것이 도박이란 품종이라 뭔가 순순한 호의로밖에 받아들이기엔 조금 거북하다.

뭐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냥 재미삼아 즐기는 수준으로 유지할 정신을 갖고 있을테니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경마장처럼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반에이 경마는 트랙 길이가 200m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중계용 TV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로또처럼 된 OMR 카드에 자신이 정한 말을 찍은 후 이곳에 넣으면 자동으로 배팅이 되는 시스템인 듯.

창구 너머에도 공간이 넓은데 저 안에서는 사람들이 바쁘게 뭔가를 계산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마는 단순히 현재 어떤 말의 상태가 좋은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몇 대까지 경주마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 말의 습성과 특징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승률을 올릴 수 있는 머릿싸움.

트랙이 잔디인가 진흙인가, 맑은 날씨인가 비가 오는가에 따라 선천적으로 잘 달리는 말이 있기도 한데다가

기수 성격과 경주마의 상성관계 등 고려할 점이 너무 많아서 거의 학문적인 수준에 다다라 있다. 그런 고로 배당율도 로또 등의 고이윤 도박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

 

반에이 경마는 다른 경마와 달리 혈통이 단순화 되어 있어서 조금 쉬울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재미로 즐기는 것 이상의 운을 바래서는 안 된다.

 

 

 

날씨가 워낙 춥다보니 사방에서 거대한 소음을 내며 난로가 가동중이다. 바로 앞에서는 얼굴이 후끈거릴 정도로 강렬한 열풍을 내뿜고 있다.

이글거리는 난로 앞에 잠시 서 있으면 몸이 따뜻해 지지만 아무래도 경마 자체보다 경주마가 달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혹한 속에서 감상해야 하니 부담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아예 밖으로 나갈 생각도 않는 사람들도 꽤 있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쪽은 텅 비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하지 않은 것은 좋은데 너무 황량하다.

이런 폭설 속에서는 굳이 잘 안보이는 2층에서 경기를 감상할 일이 없으니 당연한 상황이겠지만, 그래도 난로는 군데군데 켜 놓았다.

 

일단 생전 처음 와 보는 경마장이니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낡은 시설이지만 청소 정리는 매우 깨끗해게 해 놓아서 보기가 좋다. 하지만 2층 바깥으로 나가는 출입구 중 몇 곳은 사용금지 표지판이 서 있다.

아무래도 눈을 다 치우긴 어려우니 덜 미끄러운 출입구만 개방해 놓은 듯 하다.

 

 

 

밖으로 나오니 이제 좀 경마장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눈이 오는 지금은 이곳 2층 바깥쪽 관객석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지붕이 눈을 전부 커버해 주지 못하기 때문.

매끈한 콘크리트 바닥에 가득 쌓이지 않은 적당한 눈더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끄럽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촬영은 무리일 듯.

 

다른 곳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일단 이 정도 경마장이라도 본인 눈에는 꽤나 거대해 보인다.

성수기때는 여기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서 말들이 말리는 모습을 보며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걸까.

 

 

 

경마장에 비해 트랙이 작은 경마장이란 참 묘하게 느껴진다.

경마장과 트랙 사이에 상당한 공간이 비어있는데 원래 뭘 하는 곳일까 궁금하다.

혹시 저 안쪽까지 걸어가 사진을 찍어도 된다면 참 역동적인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아무도 저곳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확인이 어렵다.

나중에 안내소에 한번 물어볼까 싶기도 한데 그런 거 물어보면 생초보인걸 자랑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경기가 시작되려는지 트랙 옆의 조그마한 패독에 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슴 속에서도 시동이 걸리는 듯 조금씩 두근거리지만 서두를 것은 없다.

눈 속에서 렌즈를 바꿔 끼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일단 2층 멀리서 몸을 푸는 말들의 모습을 담아본다.

 

원래 패독에서 말을 보여주는 시간은 경마에서 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지만

이곳에서는 어쩐지 그닥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다. 마권을 살 사람이면 대강 알고 있는 것일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이 패독 앞으로 몰려나온다. 저기까지는 들어가도 되는가 보다.

지붕 아래서 망원렌즈로 바꾸고 위엄넘치는 말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담아본다.

과연 듣던대로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는 말들. 기수의 허리와 지면과의 높이를 생각하니 역시 상당히 무서울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주마들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워낙 예민해 조그만 반응에도 기수를 떨어트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고대 장군들이 보병들 옆에서 말 위에 앉아있으면 그 높이차로 인해 위압감이 절로 생겨났음에 틀림없다.

 

 

 

긴장한 말들도 많은지 몇몇 기수들은 아예 내려서 말을 끌고 걷기도 한다.

정해진 코스를 돌지도 않고 가끔 가기 싫어하며 멈춰서는 말들도 있는 걸 보면 보는 사람도 불안해진다.

 

일반 경마에서는 워낙 유전적 교배가 잦고 훈련이 충분해서 그 수가 적은 편이지만

반에이 경주마는 일단 주체못할 정도로 힘이 넘치는 녀석들이라 사고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기본적으로 파워게임이라 성격 더럽다고 해서 배팅율이 낮아질 필요가 없기도 하고.

 

 

 

또박또박 걷지 않고 가끔 훌쩍훌쩍 앞다리를 들며 이상한 걸음을 하는 녀석도 있다.

거칠고 우락부락하게 보여도 결국 농경용으로 사람 말을 잘 듣는 말이라 기본적으로 겁쟁이임엔 틀림없다.

눈이 와서 흥분한 것인지, 관객들이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전통적인 패독에 비하면 좀 난장판 느낌이다.

 

방한장비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의 본인 수준으로 얼마동안이나 저 밖에서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최적의 조건에서 경마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1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층 경마장쪽 출입구로 다가가니 안내원들이 '눈더미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고 연신 외치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주먹만한 눈더미가 지붕에서 툭툭 떨어져 내린다. 맞으면 심히 기분이 좋지 않을테니 주의해야 한다.

위험하다 싶으면 안내원들이 손을 들어 나가려는 사람을 제지하며 눈이 떨어진 후 드나들도록 하고 있다.

 

지붕 밖으로 나오니 도심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광경에 끝없이 내리는 눈이 예술 작품을 연상케 한다.

첫 번째 레이스를 시작하기 위해 말들이 패독에서 출발점으로 이동중이다. 200m 정도의 트랙이지만 가까이서 한 눈에 보기엔 역시 먼 거리다.

어디쯤 자리를 잡으면 괜찮은 모습이 나올까 고민한다. 이 경주의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두 개의 언덕 부근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오긴 하지만 역시 경마보다 볼거리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 뿐이라 그리 많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지금 상황이 쉽사리 밖으로 나올 만한 분위기가 아니긴 하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폭설 속이니까.

생애 첫 경마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흥분감에 추위도 잊고 카메라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언덕 장애물 비스듬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선다.

 

 

자료관으로 들어가자 안내원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 장의 셔츠.

NHK 북해도 지부에서 2012년 제작한 '대지의 팡파레' 라는 드라마의 기념 셔츠다.

프린트된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 오비히로의 반에이 경마를 소재로 한 드라마인 듯.

 

장기 연재 드라마가 아니라 2편짜리 스페셜 편성이라 질질 늘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애초에 드라마란 걸 안 본지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은 없다.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가 대발이 나오는 내용이었는데.

 

 

 

사진 찍어도 되느냐 물어보니 괜찮다고 하신다. 입장도 무료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본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경마장이나 카지노 같은 도박 관련 업종들은 주위 시설이 훌륭하고 가격도 저렴하다고 한다.

주 소득원이 도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잡아끌기 위해서 다른 서비스 수준이 뛰어나다고.

 

물론 이곳은 도박에 빠지는 경마장이라기보다 세계에서 이곳밖에 없는 문화시설로 이름이 높긴 하지만

이런 자료관의 유지 운영에 경마장에서 얻은 수익이 들어가지 않을 리는 없을 듯 하다.

 

'애마와의 이별' 이라는 슬픈 제목의 사진은, 공교롭게도 사진의 애상적인 분위기보다 '반에이 말이 정말로 크긴 크구나' 라는 감상이 먼저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본격적인 관람 시작전에 위치한 정보검색용 PC 데스크 옆에는 전 포스팅에서 소개한 만화인 은수저 Silver Spoon이 서 있다.

가져가지 마라고 책 위에 '토카치무라' 라고 적어놓은 부분이 나름 매력포인트.

 

홋카이도 토박이들은 사실상 일본 최후의 개척민들이라 정착 초기에 고생을 어마어마하게 겪었는데

초기 개척민에서 3대째 자손이 되는 작가 아라카와 씨 역시 여성이지만 가업을 돕다보니 대형 트랙터 면허에 공수도 유단자이다 보니

여성만화가가 가질 법한 센시티브한 감정 묘사보다 근육 불끈불끈하는 모험활극쪽에 특화된 느낌을 보여준다.

 

이 은수저라는 만화는 홋카이도 농어촌 학생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물이지만 도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전개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섬세한 감정묘사가 그렇게까지 뛰어나지는 않은 느낌. 작가의 취향이니 비판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자료관은 경마에 대한 정보보다는 토카치 지역에서 말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일본 최대의 평야인 이곳 토카치 지역도 첫 개척시에는 홋카이도의 거친 자연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에

어마어마하게 자라나는 나무와 잡초를 끝없이 베어내는 것에서부터, 덩치가 말보다 더 큰 불곰의 습격에 사냥꾼도 잡아먹히고

메뚜기떼가 몇 년동안이고 지역을 습격해서 입고있는 옷까지 갉아먹는 눈물겨운 고생 끝에 지금에 이르게 된다.

 

우유를 생산하는 홀슈타인종은 추위에 강하지만 밭을 갈때 쓰는 품종은 겨울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추위에 강한 말을 소 대신으로 사용하다보니 점차 골격이 커지고 근육이 붙어 거대한 덩치가 되어 갔다고.

 

 

 

현재 사육되는 말의 대부분은 경마나 승마용이라 몸매가 좋고 스피드와 기교에 중점을 둔 스타일로 진화중인데

이쪽 반에이 경마에 참가하는 말들은 고대 로마시대 사람들을 깔아뭉개며 돌진하던 군마와 같이 육중한 몸매를 자랑한다.

 

키우기를 그렇게 키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양가집 규수같은 섬세한 마음씨를 자랑하는 서로우브레드 종에 비해

이쪽 녀석들은 의외로 한 성질 하는 편. 승부욕도 강하고 체력이 넘쳐 일종의 흥분상태다 보니 열심히 체력소모를 시켜줘야만 얌전해진다.

 

보통은 사육사와 사이가 좋은 경주마들이 장난삼에 사람의 어깨를 무는 등의 애교를 부리지만

반에이 경주마들이 사람 어깨를 장난삼아 물었다가는 멍 정도가 아니라 피부가 찢길지도 모르겠다.

 

 

 

반에이 경마는 어디까지나 농번기에 접어든 농장주들이 누가누가 썰매를 잘 끄나 경쟁하면서 시작된 경주라서

이쪽 말들은 속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짐을 끄는 힘과 지구력이다.

 

당시 농업에 사용하던 각종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빡빡하던 개척시대에 저런 도구들로 땅을 일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람의 욕심에 고생하는 동물들은 아무리 연민을 가져도 모자라지 않다고 세삼 생각해보게 된다.

한국이나 일본같은 오래된 농경국가에서 1900년대 초반에 본격적인 개척이 이루어졌다는 건 나름 특이한 역사인데

일본쪽에서야 당연히 자랑할만한 일이겠지만, 이게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미국인들간에 이루어진 역사와 다를바가 별로 없는 것이라

밖에서 보기에 씁쓸한 인종 탄압의 역사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조금 미묘한 기분이다.

 

개간 없이 인류의 역사가 존재할 수 없기에 단순하게 자연 파괴라는 시점에서 접근하기는 난점이 많아도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 인식에 대한 주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자료관 중간중간에는 지역 상식 퀴즈가 놓여있어서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어째서 말의 이름은 '~호' 였을까 라는 퀴즈고, 정답은 별관에 있다고 한다.

 

기억력이 감퇴하는 어른이라 질문을 잊어버릴까봐 사진까지 찍어 놨는데 사실 정답이 적힌 곳에는 질문도 다 적혀 있다.

재미있는 질문이 많았지만 그건 직접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재미로 남겨두기로 한다.

 

 

 

한국 사람에게 소가 재산 1호였듯, 오비히로에서는 말이 목숨만큼 중요한 가축이었다.

토카치 평야는 당시 홋카이도 인구를 고려할 때 사람이 개간할 수 있는 수준의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와 말이 없으면 그냥 거지라고 해도 될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개인 재산이라는 측면을 제외하고, 초기 개척민들은 거의 예외없이 공동체 생활을 하며 살아남기에 바쁜 상황이긴 했다.

집에 불이 나면 가장 먼저 가지고 튀어나오는 것이 소유한 말의 명부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고.

 

 

 

롯시 2호 라는 이름을 가진 말의 오래된 사진.

본인 역시 경마장에 가 본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일반 경주마와 직접 비교를 하진 못했지만 사진으로만 봐도 범상치 않은 덩치가 인상적이다.

 

특히 서로우브래드의 발목은 속도를 내기 위해 사람 발목 정도의 굵기에 매우 섬세한 근육섬유들이 밀집되어 있지만

이 녀석은 말의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발목 두께가 거진 사람 허벅지와 맞먹는 굵기를 자랑한다.

 

초식동물인 말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속도를 살리는 몸 구조로 진화했는데

예전 군마를 포함해 이런 농경마들은 과연 같은 종인가 싶을 정도로 육중한 덩치를 자랑한다.

물론 얘네들도 말은 말이니까 달리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달리게 해 주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죽어버리는 동물이니까.

 

 

 

예전에는 수의사가 직업으로 인식되지도 못했지만, 농민들에게 있어 소와 말은 자식보다 소중한 자원이었으니

홋카이도에는 서양의 자료들을 이용해 열심히 공부하는 수의사들이 나름 많은 편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극도로 찬양하는 흐름이 만들어 지고, 금기로 여겨졌던 해부학과 내과 관련 서적들이 밀려와서

자연스레 이곳에서는 말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 관리에 그 지식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의사든 수의사든 일단 기본은 저 수많은 부위들 명칭을 달달 외는 것. 이걸 모르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으니.

 

 

 

말은 특히 수컷이 호르몬 분비가 격렬한 편이라 발정기에 골치를 썩이곤 한다.

현재 경마에 사용되는 경주마는 기본적으로 거세를 하지 않는데, 한창 젊은 수컷들은 경주 도중에 암컷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조절이 힘든 수컷은 할 수 없이 거세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면 성격도 차분해지고 경주 성적도 좋아지지만

일종의 도핑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상위권 대회에는 출장이 금지되어 있다.

 

반에이 말들도 예외가 아니고, 오히려 그 거대한 덩치로 성질 부리면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거세도 많이 이루어지는 편.

190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도 거세법이 지정되어 사진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기구들로 자손 번식의 꿈이 좌절된 말들이 많다.

동물의 감정을 무시한 비인도적인 처사가 아니냐 싶지만 사실 말과 소는 수천년 전부터 철저히 사람의 소유 재물로서 취급받았기 때문에

지금와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이긴 하다. 애초에 말이란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비싸서 재산 개념이 아니고서는 사육 자체가 힘들고.

 

경마와 승마 용도가 거의 대부분인 현대 사회의 말 역시 수많은 인위적 교배에 따라 재산 가치가 변할 수밖에 없어서

거시기를 달고 있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암컷과 짝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 경주마인 서로우브래드 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주마들의 유전자 지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단지 2~3마리의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

 

 

 

놓여있는 자료 사이에 구매욕을 자극하는 말 조각상이 버티고 있어서 한참을 쳐다본다.

오래된 자료로서 이곳에 놓여있는건지 그냥 장식으로 놔 둔건지 모르겠지만 꽤나 마음에 든다.

 

기념품점에서 발견한다면 한 개쯤 구입해 가도 나쁘지 않으리라 보는데

이번 여행은 개인적인 기념품은 구입하지 않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듯.

나름 기간이 긴 여행이라 지갑이 텅텅 비는 불상사를 막으려 한 것도 있고

돌아가기전에 나침반님한테 홋카이도의 미식을 조금이나마 소개시켜 드리려고 준비중이기도 했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아이들과 함께 찾아오는 젊은 부모들도 많이 들어온다.

경마에 관심을 가지라는게 아니고 이 지역의 문화로서 뗄 수 없는 것이다 보니 나름 인기있는 지역.

나처럼 경마에 돈 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도 와서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니까.

 

반에이 경마는 일단 토카치 지방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지금은 홋카이도의 명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계절별로 홋카이도 내의 경마장을 순회하며 실시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반에이 경마 하면 역시 눈길을 헤치며 돌진하는 겨울이 가장 인상적이기도 하고

겨울엔 본고장인 이곳 오비히로에서 금, 토, 일요일 경기가 열리기 때문에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다.

 

여름 자전거 여행때는 이 경마를 굳이 다른 곳에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그냥 패스했지만

이렇게 겨울에 기회가 생겼으니 이 경기를 보지 않고 지나간다는 건 너무나 아쉬웠기에.

 

 

 

겨울에 말들이 끌었던 눈썰매가 전시되어 있다. 눈 덕분에 조금 편하게 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만큼 말이 쑥쑥 빠지기 때문에 여름에 비해 편했으리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물론 소중한 재산인 동시에 가족과 다름없는 말이었던 만큼 이곳 사람들의 말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니

그 덩치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먹이와 휴식을 제공해 줬음에는 틀림없다.

 

반에이 경마는 채 200m 도 되지 않는 서킷 길이에 비해 너무나 가혹한 경기 방식으로 인해

일각에서는 지금도 동물 학대라고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경주마들은 계절별 첨단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하고 더없이 편안한 잠자리와 최상급의 식사를 제공받지만

어찌됐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육되고 있는 것이니 학대라고 불러도 근본적으로 반박할 만한 여지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인류 역사가 이러한 동물들의 힘 없이는 발전할 수 없었으니 동물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의 죄는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듯.

 

 

 

자료관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반에이 경마는 겨울이 진국이고, 겨울이라면 눈이 펄펄 내리는 곳에서의 강렬한 경주가 최고.

이번 여행은 원하는 장소에 원하던 날씨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어서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시레토코에서 단 하루만에 맑은 날씨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는데

이렇게 반에이 경마마저도 폭설이 맞이해 주니, 운이 참 좋았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오비히로의 겨울은 매섭기 그지없지만 추위마저도 나를 축복해 주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화덕은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조금 매니악한 볼거리.

조금 전 언급했던 만화 은수저에 등장하는 화덕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농고에 다니는 주인공이 학교 안에서 만든 재료들만으로 이 화덕을 이용해 피자를 만들어 먹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연히 신선도로는 최상급인데다 이런 화덕에서 구워내 바로 먹는 피자니 그 맛은 만화를 읽으면서도 저절로 느껴질 정도.

 

실제로 피자를 구워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은 그런 이벤트가 벌어지기엔 눈이 너무 많이 오는 듯 하다.

 

 

 

경마장은 아직 개장 전이지만 토카치무라 구석을 살짝 빠져나가보면 경마장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아이들에 대한 배려로 한 켠에 마련해 놓은 놀이터는 마치 늪처럼 늘어가기 무려울 정도로 눈이 쌓여있다.

삿포로에서부터 눈 내리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까지 쏟아붓는 눈은 처음이라 점점 흥분감이 고조된다.

 

 

 

경마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대충 경주를 감상할 수는 있지만

입장료도 주된 수익원이고, 가능한 한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모습을 잘 담아내기 위해서는 장소 선정이 중요하니

이제와서 몇 천원 밖에 안되는 돈을 아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것과 별개로 저 의자에 앉을 용기조차 나지 않는것도 사실.

 

 

 

반에이 경마가 겨울의 이벤트라고 해도 역시 쌓이는 눈을 아무렇게나 방치해서는 레이스가 불가능하니

직원들이 무전기까지 써 가며 이곳저곳 눈을 퍼내고 트랙을 점검중이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망원으로 찍고 보니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어서 긴장이 풀리는 느낌.

군대에서라면 절대 저렇게 웃으면서 제설작업을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한국 남자들은 일단 눈 하면 군대가 연상되는 것도 병이라면 병.

 

반에이 경마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경사로가 눈에 들어오는데, 처음엔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다는 인상이다.

저런 경사로가 두 개 포함되어 길이가 2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직선이지만, 경주마들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라 한다.

대강 내용은 알고 있지만 역시 직접 경주를 보지 않으면 그 박력을 느끼기 힘들 듯.

 

 

 

경마장 안도 각종 먹을거리와 기념품점 등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시설이 잘 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으니 이곳 토카치무라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며 배도 좀 채우고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직 배가 고플 시간은 아니지만 방금 전 봤던 이곳 한정 우유 라멘이 궁금하기도 하고.

우유가 들어간 라멘이라면 얼핏 떠올리기에 느끼할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자랑하는 한정 상품으로 내 놓은 녀석이니 기본적인 맛은 보장하리라 생각한다.

버스표를 구입하면서 받은 200엔 할인권도 있으니 먹지 않을 이유도 없다. 잠시 후에 들어갈 경마장 앞의 거대한 포스터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방향을 돌린다.

 

 

 

보통 알람을 설정해 놓고 자긴 하는데, 소리를 듣고 눈을 떠도 자기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새벽녘이 다가오기 전의 어슴프레함 때문에

혹시 시간을 잘못 설정해 놓고 잔 건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상하다 싶어 커튼을 걷어보니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아침해는 밝았지만 무식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같은 눈발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다.

자동차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밖은 더욱 조용하다. 도심지에 위치한 비지니스 호텔에서 아침이 이렇게 조용한 것도 참 신선한 경험이다.

 

조식 먹으러 가기도 전에 카메라부터 주섬주섬 꺼내들어 촛점이 맞지 않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셔터를 누른다.

이번 여행은 적어도 날씨라는 면에 있어서는 완전히 로또를 맞은 것이나 다름 없다. 아침이라 환호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지 않지만 입가엔 미소가 흐른다.

 

 

 

오늘의 목적지는 눈이 많이 내리면 내릴수록 좋기 때문에, 더 할 나위 없는 최상의 조건이다.

삿포로에서도, 아사히카와에서도, 시레토코에서도 눈은 많이 내렸지만 오늘 내리는 눈은 비교를 불허한다.

일반적인 관광이었다면 오늘 과연 이동할 수 있을까 하고 가슴이 철렁했을 법도 하다.

 

눈이 이만큼 많이 온다면 오히려 얼어붙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들은 별 무리없이 운전이 가능하다.

문제는 바퀴를 덮을 정도로 눈이 쌓이게 되면 역시 사고 위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단체 여행객으로서는 치명적일지도.

 

 

 

이곳 토카치 지역은 원래 눈 많이 오고 춥기로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은 별 신경 안쓰고 돌아다닌다.

이쪽에서는 눈 때문에 학교나 회사가 쉬는 경우도 있을까 궁금하다.

원 서식지인 대구에서 이만큼 눈이 왔다고 하면 도시 전체가 눈 속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데.

 

 

 

평소 자신보다 위에 서 있는 것들을 더 높은 곳에서 망원으로 당겨 보는것은 묘한 신선함이 있다.

이게 부적절한 호기심과 욕망으로 연결되면 범죄가 되겠지만, 어쨌든 평소와는 다른 시야를 즐긴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눈은 많이 와도 바람은 심하지 않은 듯, 가로등 위에 덮인 눈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높게 쌓여 있다.

경사면에서 녹아내린 물이 다시 얼어버려서 고드름을 만들어 낸 모습이, 토카치 지역의 살아있는 기후 소개를 담당하는 듯 하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싶더니 제설차 두 대가 열심히 눈을 한쪽으로 치워내고 있다.

이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라 제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더 쌓이다가는 자동차가 전진을 못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을 듯.

 

치워내는 눈의 양은 상당하지만 온 사방이 눈으로 뒤덮힌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제설차는 한없이 작고 연약해 보인다.

처음엔 바램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했지만 심상치 않게 눈이 내리니 오늘 목적지가 영업을 하는지 오히려 걱정까지 되기 시작한다.

 

목적지는 다름아닌 경마장인데, 원래 겨울 스포츠이긴 해도 눈이 이렇게 오면 과연 괜찮을까 싶다.

 

 

 

고민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 조식을 먹은 후 역으로 출발한다.

 

걸어서 10분 거리지만 이동이 힘들어 시레토코에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도 든다. 주위 풍경은 전혀 다르지만.

가끔 바람이 불기만 해도 건물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마법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카메라를 꺼내기는 좀 불안한 상황이지만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기도 힘들어 조심조심 셔터를 누른다.

방진방적 정도는 지원하기 때문에 물이 스며들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렌즈 앞에 물기가 묻으면 닦아내기 귀찮아서.

 

 

 

도시 기능이 거의 마비되는게 아닐까 싶은 폭설인데, 도로에는 버스나 택시 등이 간간히 보이지만 승용차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 홋카이도는 그것대로 워낙 매력적이라서 지난 자전거 여행 도중 겨울의 풍경이 궁금한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 와 보니 역시 이곳의 겨울은 여름 못지않은 자연의 힘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준다.

 

생물이 살 것 같지 않은 이런 혹독한 겨울을 넘기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강렬히 충만된 여름의 생명력이 빛을 발하는 것일 듯.

 

 

 

일단 카메라를 들고 나니 이곳저곳 시야가 넓어진다. 습관 탓인가.

일찍 나섰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본다.

출근길 시민들에겐 참 괴롭겠지만 쌓인 눈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과 순백색 배경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도시를 치장한다.

 

대도시였다면 아무리 눈이 많이 쌓여도 먹고살기 위한 인간의 대규모 이동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어서

도로와 도보는 온통 흙탕물로 얼룩질 수밖에 없겠지만, 이곳은 겉으로 보이는 도시 규모에 비해 한적한 편이다.

자전거 방치 금지구역 팻말이 평소보다 따뜻해 보이는 것도 그런 기분 탓일까.

 

 

 

한국에서도 번안되어 인기를 끌었던 '눈의 꽃'이라는 노래가 어울리는 풍경.

이런 조경수들은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풍성한 잎들을 노리고 조성된 경우가 많은데

겨울에만 피는 이런 꽃은 확실히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과하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오늘 비가 이만큼 오는데 경마장이 열렸으려나 물어본다.

가볍게 물어본 것 뿐인데 아가씨는 직접 경마장에 전화까지 해서 개장 여부를 알아본 후 문제없다는 답변을 건네준다.

 

더불어 정보 부족인 나에게 여기서 경마장까지 가는 왕복 버스티켓과 경마장 입장료를 한꺼번에 사면 경마장 입장료 할인과 함께

당일 사용이 가능한 토카치무라 200엔 할인권까지 끼워준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토카치무라는 경마장 앞에 있는 조그만 문화센터 같은 곳.

따로따로 구매하는 경우에 비해 500엔 정도 할인이 되기 때문에 왕복 버스표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없는 이득이다.

더더구나 나 같은 손님들을 위해 귀여운 말 캐리커처까지 프린트 된 왕복 버스 시간표까지 챙겨줘서, 출발 전에 만족감을 듬뿍 선사해 준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버스 시간표마저도 여행 후의 추억으로 보관할 가치가 충분하도록 만드는 소소한 배려가 여행 산업의 진짜 핵심이 아닐까.

 

 

 

10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오기 때문에 굳이 안내소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필요를 못느끼고 눈발을 감상하러 밖으로 나간다.

 

맞은편 벤치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라 카메라에 담아 본다.

이미 벤치로서의 기능은 상실한지 오래지만 이미 그 자체로 예술 작품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가치가 충분하다.

대구에 살면서 평생 보아온 눈보다 더 많은 눈을 홋카이도에서의 10일동안 본 탓에, 이국의 정취를 찾아다니는 여행으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사실 역에서 경마장까지는 날만 좋다면 30분 정도만 걸어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

평균 시속 20km 정도로 마실 나가듯이 천천히 도로를 거니는 버스 안에서 보는 풍경도 각별하다.

눈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힘들어 정류소 이름을 외치는 안내기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마장 정류소쪽에 내리긴 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시레토코처럼 천혜의 자연속이라면 오히려 주변 풍경만으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지만

모든 곳이 비슷비슷한 도시 속에서는 폭설이 그나마 남아있던 분석 가능한 지형들을 전부 가려버리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의 혼란을 야기한다.

 

하는 수 없이 같이 내린 노인 일행에게 경마장이 어디인지 물어봤는데 어이없게도 도로 바로 건너편에 경마장 입구를 가리킨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니 이런 실수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고개를 돌려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눈이 일으킨 방해공작이라 변명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경마장 들어가기 전에도 놀라운 풍경은 여기저기서 나를 반기고 있어서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고 있다.

 

상록수인 소나무마저도 끝없이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혀 색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은 처절하기보다는 아름답다.

 

 

 

오비히로는 도시 전체가 평야이긴 하지만

혹여 저 눈안개 앞에 라우스산이 버티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평야와 다를 바 없을 듯 하다.

 

이쪽 사람들에겐 매년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나에게는 이 모습만으로도 오비히로까지 온 보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좋아하는 풍경에 너무 몰입해서 경마장의 재미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마저 느끼며 무릎까지 푹푹 꺼지는 눈 속을 걷기 시작한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 해도 강압적이라 해도 될 만큼 주위의 풍경이 자신을 담아달라는 듯 미려함을 뽐내는 탓에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춰 셔터에 손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게 형성된 흑과 백의 차분한 대비는

그림같은 풍경을 찾아 몇 시간이고 이동하고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사진가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물론 본인이 그런 사진가들하고 비교할 만큼 건방진 편은 아니고.

 

 

콘크리트 도심 속에서도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빛이 바래지 않지만

경마장 관계자와 마을 사람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열성적인 태도 역시 그에 밀리지 않을 만큼 볼만한 것이다.

 

자전거 보관소의 지지대가 눈썹까지 예쁘장하게 그려놓은 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한탕 벌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아저씨들의 집합소라는 선입견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경마장에 대한 이미지가 한층 부드러워진다.

물론 경마도 도박의 일종이라 마음이 흐려진 사람들이 없잖아 있겠지만

이곳 오비히로의 경마장은 사실상 주민들이 자랑하는 문화 공간으로 형성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해도 될 듯 하다.

 

 

 

경마장 앞에 세워진 동상은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혼신의 레이스 후 몸에서 쏟아지는 땀처럼 보여서 굉장히 인상적이다.

 

금방이라도 저 말의 콧가에서 거칠고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올 듯한 느낌.

경마에 빠삭한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자세히 보면 이 말의 동상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경마용 말은 덩치만 큰 유리 세공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모든 부위가 속도만을 내기 위해 매우 세심하고 가냘픈 편인데

이 녀석은 사람 허벅지만큼 굵고 튼튼한 하체를 가지고 있어서 경마용 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곳 경마장을 찾을 이유이기도 한데, 오비히로의 경마는 반에이(ばんえい)경마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눈이 많고 험난한 지형상 소를 경작지 개척에 이용하기 힘들었던 이곳은 소 대신 말을 이용해 돌을 부수고 땅을 골라 논밭을 만들어 왔다.

그러기에 이 곳의 말은 속도를 중시하는 말과는 달리 수백 kg에 달하는 짐을 끌 수 있는 육중한 덩치가 필요했던 것.

반에이 경마는 그 농경마들의 힘자랑을 위해 만들어 진 독특한 이력때문에 일반적인 경마와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다.

 

 

 

경마 시작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이곳은 경마장 외에도 산지 직송의 신선한 농산물을 파는 슈퍼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오비히로와 반에이 농경마들의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 등 즐길거리가 충분하기 때문에 일찍 와도 부담이 없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바닥이 깔끔하게 보일 정도로 눈을 치워낸 모습인데, 옆에서는 직원들이 열심히 눈을 퍼담고 있다.

옷을 두툼하게 입긴 했지만 가녀린 여직원이 거대한 제설장비를 들고 눈을 이리저리 치워내는 모습이 인상적.

 

 

 

푸드코트쪽에 오비히로 경마장 한정이라고 선전하는 우유 라멘이 매우 신경쓰였지만

아직 조식의 여력이 남아있기 때문에 저 쪽은 경마 시작전 마지막으로 들르기로 결심한다.

땀을 흘리던 동상과는 달리 토카치무라 앞에 전시된 붉은 말조각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농경마들의 역사를 간직한 듯한 느낌을 준다.

 

노리고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토카치무라는 건물이 전부 붉은색으로 되어 있어 이렇게 눈내리는 날에는 굉장한 임팩트를 느낄 수 있다.

 

 

 

자료관 쪽에는 커다란 애니메이션 광고판이 놓여 있는데 이곳 출신 만화가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작품인 '은수저 Sliver Spoon'이다.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로 큰 인기를 모은 작가로

재미삼아 시작했던 고향 오비히로의 농촌 이야기가 워낙 도시 독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는 바람에 그걸 토대로 장기 연재를 시작한 특이한 작품이다.

 

미국같은 농업 대국에서야 그게 별건가 싶겠지만 한국이나 일본처럼 고도화 된 국가 사람들에게

홋카이도의 농업 형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신기한 것들 뿐이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작품 속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이 반에이 경마가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로서는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고향 출신 만화가가 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니 본인들도 굉장히 뿌듯할 듯.

본인은 이 작품이 연재되기 전에 이곳을 다녀왔기 때문에 크게 연관성은 없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홋카이도의 생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이라도, 이곳 홋카이도는 그 기대감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만큼 신기한 곳이 되리라 확신한다.

 

 

사카이 씨가 휴대폰으로 지도를 이리저리 검색하며 여러 지역들에 대해 설명해 준다.

기계가 삼성 갤럭시라서 일부러 보여주면서 웃는다.

삼성이야 일본에서도 유명하지만 실제로 일본 스마트폰의 절대 다수는 아이폰이라 오히려 이쪽에서는 레어한 쪽에 속한다.

매년 도쿄에서 이곳까지 놀러오는 사람이니만큼 개성이라고 할까, 매니아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라 왠지 납득이 간다.

이쪽에서는 갤럭시 쓰는 사람이 매니악한 편이니 한국과 비교하면 참 재미있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쿠시로 습지에 다다르자 사카이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뒤쪽의 빈 공간으로 이동한다.

쿠시로라는 도시가 홋카이도에서 그나마 유명한 편에 속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이 쿠시로 습지 때문.

일본에 남아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큰 자연습지로, 겨울은 황량하기 그지없지만 여름엔 압도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이동 수단이 그러다보니 습지 내부까지 깊숙하게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만 슬쩍 돌았는데

당시 도로 왼편에서 고양이를 사냥해 입에 물고 있던 북방여우와 마주친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자전거를 멈춰줬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어 조금 의아했는데

혹시나 싶어 도로 건너편을 살펴보니 새끼 여우 몇마리가 어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뒤로 슬금슬금 빼 주니 잔뜩 경계하며 도로를 건너가 새끼들과 함께 풀숲 속으로 사라졌다.

고양이를 참 좋아하는 본인이지만 자연 속의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내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는 없었던 기억.

 

여름과는 너무나도 다른 황량한 모습에 약간 실망도 했지만 쿠시로 습지는 이렇게 잠깐 지나가는 걸로는 도무지 감상할 수 없는 곳이다.

이미 1980년에 람사르 조약에 등록되었으며, 한국 최대의 습지라는 우포늪의 50배가 넘는 크기를 가진 녀석이라서.

우포늪이 1억 4천만년전에 생성된 것에 비해 쿠시로 습지는 고작 2천만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30년 전부터 사라져가는 습지 보호운동을 시작한 터라, 4대강 등의 무자비한 파헤치기로 거의 고사 상태에 이르른 우포늪에 비해

오히려 1980년 조약 당시보다 30% 정도 습지의 크기가 늘어난 상황이다. 여러가지로 씁쓸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는 쿠시로 습지는 여름 홋카이도 여행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절경 중의 절경이라

열차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이 아쉬운 모습을 여름 여행의 영양분으로 삼으며 참기로 한다.

 

 

 

사카이 씨는 쿠시로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는데 지정좌석이 아니라 빠른 사람이 앉아갈 수 있는 터라 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마구 달린다.

바쁜 작별인사였고 딱히 연락처도 받아놓은 게 없지만, 시레토코에 찾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본인 역시 쿠시로에서 갈아타긴 해도 어차피 JR 레일패스를 이용해 모든 좌석을 예약해 놨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다.

홋카이도의 레일패스는 외국인 관광객만 구입할 수 있어서 이런 사치를 부리는 것도 나름 뿌듯한 일이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외진 곳을 지나왔기 때문인지, 이제 번듯한 열차를 타고 양복을 입은 비지니스맨들 사이에 앉아서 현대 문명의 향취를 느낀다.

 

사카이 씨가 떠나고 나서는 별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묵묵히 음악이나 들으며 1시간 정도를 달려 오비히로에 도착한다.

쿠시로나 오비히로나 자전거 여행때 지나갔던 곳이라 여전히 주위 풍경은 낯설지 않다.

홋카이도 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라서 아침까지 머물렀던 시레토코의 대자연의 풍광은 금새 사라진다.

 

 

 

토요코인에 투숙하자 룸 키와 함께 신문을 한 부 건네받았다. 당연히 일본 신문.

여권까지 복사해 갔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신문을 건네 준 것인지.

 

날씨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긴 해도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라 이대로 호텔에 틀어박히는 건 재미가 없다.

홋카이도의 면적을 생각하면 결코 길지 않은 10일여간의 여행 중에 굳이 이런 도시에 멈춰선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이지만

도착 당일인 오늘은 어차피 멀리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몸이 좀처럼 침대 위를 떠나지 못한다.

조금 전 지나왔던 쿠시로 근처의 평원에서는 무려 이글루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특별 체험도 할 수 있었지만

숙박비가 여간 비싼 게 아닌데다 그런 고생은 자전거 여행 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즐겼기 때문에 딱히 아쉽진 않다.

 

이곳은 원래 아이누어로 토카치(十勝) 지역으로 불리는 홋카이도 최대의 평야 지대라 낙농업의 성지이기도 하고 그 덕에 오비히로 시는 상공업도 상당히 발달한 편이다.

미식가들에게도 나름 유명한 곳인데,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인해 각종 유제품들의 품질이 매우 신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유를 사용하는 고급 과자류가 인기를 끈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인 롯카테(六花亭) 본점이 이곳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굉장한 레벨의 과자, 케이크점이 포진하고 있다.

과자 마을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예전 포스팅의 오타루 여행쪽에 보이는 과자점의 상당수가 이곳 오비히로에 본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달달한 과자나 케이크류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지금은 과자보다 더 필요한 게 짭짤한 식사라서 그렇게 당기지 않는다. 아침식사 이후로 맥주 한 잔 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낙농업과 함께 양돈업도 크게 발달한 토카치 지역에서는 이곳의 지역 음식이라 할 만한 돼지고기 덮밥 부타동(豚丼)도 유명하다.

원래 일본의 대표음식중 하나인 덮밥은 소고기를 얹은 규동, 장어를 얹은 우나동 정도가 일반적인데

이곳 토카치 지방에서는 소중한 노동력과 유제품 생산원인 소를 마구 잡아먹기 힘들었고, 장어는 있을리가 없으니

겨울에 강하고 대량 사육이 용이한 돼지를 덮밥 재료로 사용하면서 이 지방의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었다.

 

요시노야 등의 전국 체인점 메뉴에 올라오는 곁다리 부타동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신선함으로 유명한 녀석인데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오비히로의 밤거리로 나와 보니 지금 꼭 부타동을 먹어야 할 의무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내일 하루 더 머물 예정이라 급하게 이곳의 특산물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기도 했고

내륙 지역이라 홋카이도에서 겨울이 가장 매서운 곳인 만큼 뭔가 좀 더 몸을 따뜻하게 해 줄 무언가를 갈구하게 된다.

 

 

 

쌓여 있는 눈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시레토코에서 느꼈던 어딘가 푸근했던 겨울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의 바람은 정말 꽁꽁 싸맨 옷가지 사이의 조그만 틈새로도 가차없이 파고 들어오는 칼날같은 매서움을 자랑한다.

안면 근육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시레토코의 야외 온천에서 눈을 맞으며 즐기던 그 겨울과는 달리 산을 넘어 불어오는 내륙의 바람은 자비심이 없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도에 이르고 있어서 밤거리를 오래 즐길만한 여유도 없다. 사실 시레토코에서 건너온 터라 별로 보고 싶은 풍경도 아니긴 하지만.

그나마 오비히로가 꽤나 큰 도시라서 이 정도지, 토카치 평야 부근에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모 유명 만화가의 아버지는 그런 추위에서도 빤스 한장만 입고 밖을 나돌아 다닌다고 하는데, 과연 인간의 적응력은 놀라울 따름.

 

 

 

먹을 게 없으면 부타동이라도 먹을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불쑥 시야에 나타난 인디언 카레.

그러고보니 왜 이제껏 이 녀석을 잊고 있었을까 싶다. 전혀 생각나지 않다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 대자연의 뜻이라 믿으며 길을 건넌다.

 

외지 사람들이 오비히로 하고 떠올리는 음식이 부타동이라면 실제 지역민들의 소울 푸드로 인식되는 것이 이 인디언 카레.

오비히로 안에서는 카레 업계의 절대적인 정점에 군림하고 있어서 코코 이치방야 같은 전국구 체인점이 발 들일 틈도 없다.

이곳 사람들은 심지어 집에서 냄비를 들고 와서 카레를 싸 가기도 한다고. 젊은 창업자의 끝없는 노력이 만들어 낸 절묘한 루의 깊은 맛이 만들어 낸 전설이다.

 

 

 

카레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이젠 밖에서 사 먹는 카레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에서 거하게 만들어먹는 습관이 생긴 본인이라

코코 이치방야 정도의 그럭저럭 괜찮은 카레도 만족감을 느끼는 정도는 아닌데, 이 인디언 카레는 본받고 싶은 맛 중 하나다.

 

자전거 여행때는 한여름이라 카레가 그렇게까지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신료의 배합은 놀라웠다.

소고기, 돼지고기, 야채를 기본으로 한 세 종류의 루가 그 강렬한 향신료 안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점이 포인트.

 

해산물 카레 등 비싼 녀석도 있지만 이곳 인디언 카레는 지극히 저렴하고 서민적인 풍취가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싼 녀석을 주문해도 실망하는 법은 없다.

카레만으로 배를 채우려면 세 그릇 정도는 먹어치워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허기와 추위를 달래는 정도로만 즐기기로 생각하고

중간 매운맛의 비프 카레를 주문한다. 이 정도라면 밖에 나와서 군것질 한 번 더 할 여지는 충분히 남겨놓는 양이다.

 

한국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진하게 우려낸 카레 향기가 얼어붙은 코 속을 통과하는 순간 척수 부근에서부터 짜릿한 전기가 통하는 느낌.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도 일본식 고형카레와 한국의 가루 카레를 서너 종씩 배합해서 루를 만들긴 하지만

이곳의 루는 시판용 카레가 아니라 갖가지 향신료를 직접 사용해서 그 독특한 풍미를 만들다 보니 흉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건더기가 많은 한국의 카레와 달리 이곳은 고기 이외의 건더기가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야채의 겉모습이 아예 남지 않을 정도로 수십 수백시간을 끓여 일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만 발전한 독특한 방식이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입맛 들이면 한국의 카레는 그냥 맹물이나 마찬가지.

 

 

 

콧물을 참으며 전신을 자극하는 카레를 한 그릇 비우고 나니 행복감이 몰려온다.

오비히로에서 인디언 카레를 잊고 있었던 자신을 생각하니 이제 나도 늙었구나 싶다.

 

양이 허기를 해결한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편의점에서 내일 먹을 간식과 음료수까지 구입한 후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들어가기 전에 조금 더 배를 채우자고 생각하고 모스버거로 들어간다. 여기 햄버거는 맛있는 반면 크기가 워낙 작아서 간식거리로는 유용하다.

 

카레를 즐긴 후라 달콤한 토마토소스의 맛이 약간 옅어지는 역효과가 있었지만

아삭아삭한 양파의 식감과 치즈의 부드러운 맛이 빈 속에 자극적이었던 카레의 향기를 중화시켜준다.

겨울 저녁이라 모두들 일찍 귀가했는지 한적한 분위기에, 숙소에 돌아가도 할 일은 없었기에 느긋하게 밀린 일기를 쓰며 햄버거를 씹는다.

밖에는 칼날바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슬눈이 내리고 있지만 내일만큼은 좀 더 펑펑 내려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여행하는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바라던 날씨가 떡하니 나타나는 바람에

내일까지 그런 행운을 바라기엔 좀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희망은 희망이다.

함박눈은 도시 여행에서는 매우 번거로운 녀석이지만 내일은 오히려 눈이 신나게 내려주는 게 일정에 도움이 된다.

 

카레와 햄버거로 속이 든든해지고 따듯한 가게 안에서 일기를 쓰고 있으니 스스륵 눈이 감겨온다.

숙소로 돌아와 뜨끈한 욕조에서 몸을 녹인 후 TV를 즐기며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쑤셔서 이리저리 뒤척여 줘야 좀 편안해 지는데 그러면 TV를 보기가 힘들어 살짝 귀찮다.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내일 여정에 행운이 따르길 기원하며 전등을 끈다. TV는 타이머 설정해 뒀으니 잘 떠들다가 알아서 꺼지겠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몸을 떨며 보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이 호텔의 전망 좋은 객실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쪽이지만

저 언덕에 추억을 가지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이 풍경이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아마 살아가는 동안 이 풍경은 몇 번이고 더 보게 될 듯.

 

아침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쾌청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 하늘이 유지될런지.

오늘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평야지대인 토카치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비히로(帯広)까지 이동한다.

렌터카가 없는 본인으로서는 나갈 때나 들어갈 때나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갈아타야하는 시레토코라는 곳이 가장 이동하기 귀찮은 곳이지만

어제의 황홀한 경험만으로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어서 부담이 없다.

 

단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도착 하기만 하면 오케이였던 때와 달리

아침에 나가는 버스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출발일이라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새벽에 일어나 후다닥 조식을 챙기러 간다.

 

이곳에서 기차가 움직이는 샤리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90분 혹은 2시간에 한 대씩밖에 운행하지 않기도 하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버스의 운행시간과 샤리역의 열차 운행시간이 연계되도록 조절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계획대로의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이동 시간이 연쇄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어마어마한 손실이 생긴다.

첫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 오비히로에 도착하는 시간이 최대 3시간 넘게 차이날 수도 있어서

아무리 피곤한 몸이라도 날렵하게 움직여 짐을 싸고 나가야 한다. 체크아웃 시간이 널널한 관광호텔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쉽긴 하다.

 

 

 

로비에서 샤리로 가는 버스를 어디에서 타는지 물어보니 손으로 그려서 인쇄한 지도까지 건네주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거리는 눈길을 느긋하게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편이라 30분 일찍 나온 본인으로서는 안도감이 든다.

샤리행 버스와 열차는 시간 연계가 철저하니까 한번 버스에 타기만 하면 일사천리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도 건네 줘서 든든하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나와보니 조그만 마을 안에서도 담을거리는 눈만큼이나 쌓여있다.

원래 어디까지가 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행자를 위해 깔끔하게 눈을 치워 놓았는데

반듯하게 잘 닦아놓은 길 옆으로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마치 처음부터 이런 모양의 길인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단 아스팔트 길이고 삿포로처럼 도로 밑에 열선이 깔려있지 않기 때문에 미끄러움 주의는 어제의 오호보다 더 신경써야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 일찍 도착해 편안한 마음으로 대기중인 버스에 앉아 있으니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이 올라탄다.

어제 함께 오호를 거닐었던 사카이 씨와 눈이 맞자 양측 모두 순간 어리둥절 하다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사카이 씨는 어제 바로 삿포로로 돌아간다고 한 것 같은데 여기서 만나게 되니 더욱 놀랍기도 했고.

피곤해서 그냥 푹 쉰 다음 오늘은 쿠시로(釧路) 습지 부근의 온천 마을에 들렀다가 삿포로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오비히로행 역시 쿠시로 습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이동 거리의 절반 정도는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홀로 여행을 좋아하긴 해도 이렇게 만들어진 인연은 언제나 대환영이기 때문에 즐겁게 동승한다.

어제까지는 오호 투어에 너무 정신을 뺐겨서 동행하던 사람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나니 비로소 사카이 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조금 더 빨리 기억에서 잊혀졌을 듯.

 

샤리 역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꽤나 많이 모여있다. 겨울 비수기라고 해도 여전히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이곳 지역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으니까.

10분쯤 뒤에 열차가 도착하는데 사카이 씨가 이제 막 문을 열고 있는 역내 매점에 들어가 맥주 없냐고 물어본다.

가게 주인이 턱하니 거대한 금속 드럼통을 꺼내더니 시원하게 생맥주 한 잔을 뽑아준다. 뭔가 신기한 볼거리로 느껴진다.

 

나도 한잔 하겠냐고 해서 이런 기회니 고개를 끄덕였는데, 당연히 본인 분의 맥주값을 내려고 하다가 저지당했다.

일본에 왔으니 손님 대접을 해야 한다며 사카이 씨가 웃는다. 일본인들이 더치페이에 철저하다는 일반 상식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좀 신선할 듯.

본인은 시골을 많이 달리다 보니 이미 이런 호의에는 나름 익숙해져 있기는 하다. 사실 도심을 벗어나면 일본 쪽이 이방인을 훨씬 더 챙겨주는 편이다.

 

 

 

굳이 삿포로가 아니라도 일단 홋카이도의 생맥주 레벨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수준.

물 맑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렇기도 하고, 일본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끄트머리 기차역 매점에서 파는 생맥주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아침부터 쌓인 눈을 바라보며 생맥주 한 잔이라는 매우 드문 경험을 즐기며 기차에 오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조금 늦게 올라섰다면 앉을 자리도 없었는데, 다행히도 사카이 씨와 둘이 앉을 자리는 확보했다.

맥주를 손에 들고 기차에 타서 홀짝홀짝 마시는 경험은 처음이라 나름 신선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문득 건너편 창가에 훌륭한 풍경이 흘러가고 있다.

당연히 건너편에도 중국인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였다면 소심함을 한껏 발휘해서 카메라엔 손도 대지 않았겠지만

사카이 씨가 망설임없이 카메라를 꺼내 건너 풍경을 담기 시작하니 본인도 슬며시 카메라를 꺼낼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을 피해 풍경을 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 장 찍고나니 용기를 낸 보람은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도쿄에서 시레토코까지의 거리는 거진 서울에서 도쿄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이런 여행 패턴을 가진 사람은 나처럼 음울한 사람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플러스적인 성향이 강해서 옆에 있으면 도움을 많이 받는 느낌이다.

 

 

 

경험이 풍부한 사카이 씨다 보니 이것저것 알고 있는것도 많다.

어느 정도 달리다가 사카이 씨가 차장석 쪽으로 가자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찍을거리가 많다고.

짐을 자리에 놔 두고 이동한다는 게 살짝 부담되기도 하지만 일단 사카이 씨에게 이끌려 카메라만 들고 운전석 쪽으로 이동.

 

이런 스팟은 이미 유명한지 좁은 차장실 내부엔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워낙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나 보다.

덜컹거리는 원맨 열차 앞쪽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니 철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열차를 운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실감된다.

 

 

 

이쪽 홋카이도에서는 꽤나 드문 터널을 지나는 노선이라서 더욱 유명한가보다. 그리고 어쩐지 이런 터널은 겨울과 어울린다. 카와바타의 영향일까.

사람들이 많아서 몸을 지지할 만한 공간이 없고 화각상 망원렌즈를 사용해야 해서 셔터 누르기가 힘들지만 셔터스피드를 높이고 손떨림 방지를 최대한 이용해 몇 장을 담아본다.

열차에는 이제껏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차장실 쪽 풍경을 담아본 적이 없는데

도심과 달리 이런 대자연의 품 속을 달리는 열차의 풍경은 상당한 흥미를 동하게 만든다.

여러가지로 정보가 풍부한 사카이 씨 덕에 모르고 지나갈 뻔 했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 고마울 따름.

 

 

 

월급은 적고 고된 홋카이도 철도원의 생활이지만

매일 이런 풍경을 스쳐지나가며 열차를 조작하는 직업도 분명 급여 이외의 매력이 존재할 법 하다.

지하철 같은 곳에서 열차 몰아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특히나 일본에서 가장 노후된 시설과 열차를 가지고 있는 홋카이도 철도는

디지털 기기에서 느끼기 힘든 육중함과 애상적인 매력이 남아있어서 철도 매니아들에게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사카이 씨는 딱히 철도 매니아가 아니지만 이 곳을 지나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매력에 눈을 뜨게 된 듯 하다.

 

어느 정도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는데, 사카이 씨가 조금 뒤에 또 볼거리가 하나 있다고 기대감을 주입해 준다.

아침 맥주는 태어나서 처음이라 원맨 열차의 흔들림이 묘하게 느껴지지만 아직은 괜찮은 듯.

일단 헤어지기 전까진 사카이 씨가 모든 볼거리를 다 제공해 줄 것 같아서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정도 달리니 사카이 씨가 이제 앞으로 가자고 다시 일어난다.

여전히 정보에 빠삭한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산 아래로 기차가 돌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참 기묘하게 생긴 산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육중한 근육질 몸매 밑으로 달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예술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많은 홋카이도라 이런 철로를 개설할 때 참 고생 많이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언급했듯이 교도소에서 많은 인원이 이곳 노동에 투입되었는데, 시체도 못 찾고 사라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혼자였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장관을 소개해 준 사카이 씨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한다.

 

 

 

시레토코에서 오비히로까지는 꽤나 긴 여정이다.

 

직선거리상으로는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간의 1.5배 정도 되지만 철도는 홋카이도 섬의 외곽을 주욱 돌아가기 때문에

거리에 비해 이동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어림잡아 6시간 정도. 그리고 노후된 철로 사정때문에 정차해야 할 경우도 많다.

 

열차 자체는 홋카이도 남동부의 도시 쿠시로(釧路)에서 한 번 갈아타면 되지만 그 전에는 두 번 정도 정차를 한다.

이는 시골 철로가 단선 운행을 하기 때문에 마주보고 오는 열차를 미리 보내는 등의 방법을 써야 하기 때문.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의외로 여기저기서 승하차 하는 승객들로 분주하다. 홋카이도에도 온천이 많아서 겨울 여행객들이 유지되나보다.

15분 정도 정차를 하게 되어 사카이 씨와 함께 밖으로 나와 공기를 마신다. 담배를 꺼내 들고 피냐고 물어봐서 어쩔까 하다가 한 대 받아든다.

사카이 씨는 나보고 담배 피는 줄 몰랐다며 놀란다. 어제 하루종일 오호를 돌아다니면서도 담배 피고싶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러고보니 사카이 씨는 어제 오호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피웠던가.

본인은 여행 중 이런 식으로 권유받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담배를 피지 않으니 헷갈릴만도 하다.

 

홋카이도에도 화산이 많고 그러기에 온천도 많은데 이 부근은 특히 그런 곳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곳으로, 조금 더 한적한 곳에 가면 텅 빈 논밭처럼 넓은 평야가 있는데

그곳에서 삽을 들고 무릎 위쪽 정도까지 흙을 파내려가면 온천이 졸졸 솟아나오는 신기한 장소가 있다.

 

 

 

어차피 오비히로까지만 가면 오늘 일정은 잡아놓은 게 없기 때문에 이런 느긋함도 좋구나 싶다.

사카이 씨는 또 다시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여기서 10분 쯤만 더 기다리면 좋은 볼거리가 있다고.

 

사실은 이 열차가 정차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맞은편에서 기차가 놀랍게도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라는 것이다.

원래는 전부 폐기하기로 했지만 한 대만을 관광용으로 개조해 이 부근을 어슬렁거리게 하고 있다고.

일본 본토쪽에는 아직 몇 대인가 운행하는 녀석이 있지만 홋카이도에서는 이곳의 증기기관차가 유일하다.

 

타이밍을 일부러 잡은 것도 아닌데 그 녀석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물론 사카이 씨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냥 정차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놓쳐버렸을 수도 있었을 듯.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육교 위로 올라간다. 아무래도 멀리서 오는 기차를 찍으려면 높은 데가 좋을 듯 하니.

낡은 합판을 이어붙여 만든 옛날 육교인데 또 친절하게 유리창은 전부 달아놓았다.

얼어붙어 있으면 열기가 힘들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별 무리없이 열려서 장비를 갖추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은 정보를 잘 모르는 것인지, 그냥 많이 봐서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기차를 보러 나오지 않아서 사카이 씨와 둘이서만 육교 위에 올라와 있다. 왠지 이득 본 기분이기도 하다.

연습삼아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원맨 열차를 담아본다.

이런 필름틱한 색상 왜곡은 앞으로 달려 올 증기기관차에게 적용해야 하지만 이것도 나름.

 

 

 

열악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든 단선 철도지만 덕분에 이런 즐거움이 생기기도 한다.

멀리서 다가오는 증기기관차의 첫 인상은 그다지 우람하거나 은하철도의 느낌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굴뚝에서 연기가 퍽퍽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니 역시 실제 경험해 본 적 없는 친근함을 느낀다.

 

기차 하면 칙칙폭폭이 뇌리에 박혀있기도 하고, 워낙 미디어에서 폼 잡을 때 잘 나오는 녀석이라

실물로 달리는 모습을 보니 뭐가 현실적인지 언뜻 구별이 잘 가지 않는 느낌도 든다.

어찌 보면 이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관광열차라서 좌석이 전부 양쪽 창문을 향해 있고 운행 속도가 느린 녀석인데다 요금도 결코 싼 편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승강장에서는 이곳에서 탑승 후 다시 반대편으로 출발하기 위한 관광객들이 많이 서 있고

개중에는 열차 안 승객들에게 즐겁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인사는 역시 전동 기관차보다 이런 녀석이 더 어울리긴 한다.

 

창문으로 나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이런 설경을 즐기며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을 먹는다거나.

실제로 이 기차 안에는 중간에 난로가 있어서 위에서 밤을 구워먹을수도 있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관광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것에 큰 매력을 느낄 만한 나이는 아닌가 싶다.

뭔가 우수에 젖어볼 만한 시간도 없이 사카이 씨와 함께 서둘러 내려간다.

이 기차가 홈에 도착하면 다시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출발하니까.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눈에 새겨놓는게 여러모로 이득인 시레토코의 모습.

슬슬 구름이 다시 라우스산을 가리기 시작해서, 내려가는 중간중간 몇 번이고 카메라를 꺼내 희미한 흔적을 담아본다.

한동안 보이지 않을 듯 했던 정상이 구름 사이로 살짝 솟아있는 모습 또한 온전한 모습과 다른 매력을 뽐낸다.

 

옷을 두 겹이나 입긴 했어도 속이 질퍽거릴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린데다가

태양이 낮아짐과 더불어 체감 온도도 확연히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피로가 빠른 속도로 몰려온다.

오전 10시쯤 볼일을 봤던 방광은 거의 터질 듯 하고, 아침에 든든하게 차 있었던 위장은 빨리 뭐라도 집어넣어 달라고 아우성 중.

 

하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가능한 한 이 곳의 풍경을 많이 봐 두고 싶은 마음 뿐이다.

 

 

 

호수와는 달리 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조그만 하천은 여전히 얼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사람의 흔적으로 보이는 눈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저 곳을 거니는 팀도 있었던 듯 하다.

용캐도 저곳까지 내려갔구나 싶었는데 그 순간 조금 힘을 써서 내려갈 만한 샛길의 흔적이 보이자

동행하던 일행분이 나보고 같이 내려가 보자고 한다. 강가에서 보는 라우스산 쪽의 풍경이 멋질 것 같다며.

 

걷는 스키를 타고 내려갈 만한 곳은 아니라 조금 망설이긴 했다. 통풍의 후유증으로 엄지발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한번 스키를 벗으면 다시 신기가 꽤나 괴로웠기 때문에. 하지만 역시 저 밑에서 나를 유혹하는 설경의 힘에는 이길 수 없다.

 

 

 

운도 좋게 고생해서 내려간 하천 아래에서는 또 다시 타이밍 좋게 라우스산이 구름 너머로 보인다.

그것도 정상 부분만 또렷하고 밑에 은은하게 구름이 깔린 모습은 나를 찍어달라고 어필하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파도마저도 얼어붙어 모든 것이 정지된 것 처럼 조용하던 오호 주변과 달리 힘차게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와 가까워지니

왠지 라우스산 너머는 그림처럼 현실감이 사라지고 일행들은 그 그림 속에서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내가 고생해서 내려오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같이 내려가자고 권유한 일행 분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배려심을 포함하는 표정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괜히 일행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듯.

아마 사하라 사막 때도 그런 습관 때문에 멤버들 괜히 속썩인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혹독한 겨울이라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에 이 곳의 생명들이 이어지는 듯 하다.

여름이라면 불규칙성을 한껏 빛내고 있을 바위조각들이 눈으로 부드럽게 뒤덮혀 버려 꽤나 귀여운 모습으로 변신중이다.

 

고생해서 이 쪽으로 먼저 내려왔던 이름모를 팀이 이해가 가는 풍경.

 

 

 

내려갈 때는 거의 눈에 의지하다시피 해서 깨닫지 못했지만

올라갈 때 아무래도 발이 너무 깊게 파인다 싶어 고생을 좀 했다.

 

이곳저곳을 밟다 보니 그 면모가 드러나는데, 사실 우리가 이동했던 곳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고

운 좋게도 옆으로 누운 굵은 나무 밑둥을 밟았기 때문에 깊이가 얕다고 생각했던 것.

 

저 밑둥을 밟지 않으면 허벅지 위까지 쑥쑥 빠져버리기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여름이라면 아마 허공에 발을 딛고 허우적대는 광경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투시 능력이라도 있으면 눈 속에 파묻힌 지형을 한번 들여다 볼 수 있을텐데.

쌓인 눈만으로 없던 길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위험하면서도 신비롭다.

 

 

 

차를 타고 장비를 벗으니 등산 후 느끼는 이질감이 살아난다.

걸어다닐때는 익숙하지만 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몸 속에 대기중이던 찝찝함이 폭발하는 기분.

빨리 돌아가서 옷을 던져 벗어버리고 샤워를 해야겠다는 욕망이 솟아난다.

 

하지만 가이드분은 또 이 장면을 놓치기가 힘들다며 이미 몇 대의 차량이 멈춰 있는 언덕쪽에 주차를 한다.

우토로 마을에서 오호 쪽으로 가는 길은 언덕이라도 수풀이 빡빡한 편이라

이렇게 주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스팟은 딱 한군데밖에 없다.

 

자전거 여행때도 온갖 악을 쓰며 간신히 올라가다가 페달을 멈추고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었던 그 곳이다.

산맥 끝자락과 바다 사이에 소심한 듯 이루어진 우토로의 모습을 굽이돌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장소.

막 해가 지려는 시간이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삼각대에 거대한 카메라를 장착한 후 셔터를 누르고 있다.

저 멀리 바다 근처에는 유빙 체험을 즐기는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자전거로 언덕을 넘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어주던 호텔 직원분의 미소가 잊혀지지 않던 여름의 사진.

분명 같은 장소지만 식상해 질 일은 전혀 없는 풍경들이라 감회가 새롭다.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강렬한 생명력을 자랑하던 여름의 시레토코가

바다마저 얼어붙어 조용히 숨 죽이고 있는 겨울의 모습으로 변하는 데 6개월이라는 찰나의 시간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지식으로 이해해도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신비로움을 체감하기가 힘들다.

 

 

 

사무실에 들려 옷을 돌려드리고 나서 다시 호텔 앞까지 배웅을 받는다.

여러가지로 폐를 많이 끼쳤다고 인사를 드리니 웃으면서 다음에도 꼭 다시 방문해 달라고 하신다.

 

도쿄에서 온 일행분은 오늘 야간버스로 삿포로로 돌아가신다며 굉장한 활동력을 자랑하신다.

자기는 매년 이곳을 찾기 때문에 다시 온다면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 한다.

본인 역시 모자라는 건 돈과 시간이지, 기회만 된다면 당연히 몇 번이라도 오고 싶은 곳이니

살다 보면 다시 한번 만나서 술잔이나 기울일 수 있지 않으려나.

 

호텔에 들어서서 일단 객실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1층에서 화장실을 찾아 밀린 액체를 방출한다.

가벼운 런너스 하이 상태였는지, 오호 주변에서는 그야말로 활기에 넘쳐 날뛰었는데

호텔의 은은한 조명과 온기 속에 들어오니 온 몸이 벽에 짓눌리는 듯한 감각으로 돌아온다.

 

황홀했던 석식 뷔페를 즐기기 전에 일단 씻기는 씻어야 하는데

이게 또 호텔 옥상의 대형 온천이 그냥 후다닥 씻고 나오기에는 너무 훌륭해서

조금 이른 시간에 온천에서 몸을 녹이기엔 또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난감하다.

1층 로비에서 무료 비치된 주스를 마구마구 퍼 마시며 잠깐 생각하기를, 일단 객실에서 가볍게 샤워만 하고

식사를 즐긴 후 밤 9시쯤 온천에서 쌓인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샤워를 마친 후 몸을 식히려고 잠깐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는데도 등줄기가 내려앉는 듯 피로가 노곤히 몰려온다.

여기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분명 황홀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다음 날 아침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어제 챙기지 못한 카메라를 가지고 식당으로 향한다.

호텔이 크긴 하지만, 대체 어디에 이런 공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식당의 모습에 매번 압도된다.

폐가 될까봐 좌석 쪽은 담지 않고 음식 코너만 담았는데, 좌석 규모는 이 곳의 5배가 넘는다. 동시 수용 인원이 500명은 넘을 듯.

창가 쪽 좌석은 오호츠크해가 시원하게 보이는 대형 유리라 벌써부터 인기가 높다.

경관이 좋은 곳은 혼자서 앉아 즐기기에 테이블이 커서, 미안한 마음에 그냥 2인용 조그만 식탁에 혼자 자리를 잡는다.

 

 

 

높은 천장쪽에서 은은하게 엔야의 음악이 깔리는 이 곳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신비롭다고 표현할 만하다.

얼어붙은 바다와 뒤덮힌 눈 속에서 코와 눈을 자극하는 요리를 엔야의 음색과 함께 즐기는 시간은

아무리 피곤한 하루였더라도 입가에 미소를 띄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호텔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될 정도로 시설, 규모, 서비스, 요리 수준이 모두 최상급이다.

식기도 메뉴별로 따로 담을 수 있도록 구분이 되어 있어 음식이 섞일 걱정도 없다.

해파리 냉채나 특정 해산물 요리등은 1인분으로 나눠져 따로 아담한 그릇에 담겨 있어 먹기도 편하다.

 

해산물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바로 구워내는 스테이크 역시 육즙 날아가지 않게 잘 구워 놨다. 굵은 후추까지 잘 뿌려놨고.

음식의 질에 대해 만족은 못하지만 여러가지를 즐긴다는 점을 좋아해 뷔페를 가끔 찾는 본인이지만

퀄리티에 실망하지 않고 먹으려면 최소 기준이 강남의 보노보노 정도라, 에슐리나 빕스 같은 곳에서는 그냥 싼 맛에 먹는다는 느낌인데

이곳은 11만원짜리 호텔 투숙비에 이런 석식과 만만치 않은 조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보노보노와 동급 이상이다.

 

 

 

투숙객이 아닌 사람들도 식사하러 많이 찾아오는 모양인데

전용 식권을 사용한 사람들 테이블을 전부 기록해 놓는 듯, 투숙객에게만 내어주는 신선한 회 몇조각을 따로 전해준다.

테이블이 2인용이라 그런지 두 접시를 내려놓길래 '전 혼자 왔습니다만' 하고 물어보니

점원 아가씨가 웃으면서 '두 접시는 못드시나요? 라고 대답한다. 흔쾌히 두 접시를 혼자서 즐겁게 비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뷔페에 놓인 회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재료 자체가 조금 더 비싼 것인 듯.

혹시나 하고 담아 온 게살도 맛살이 아니라 진짜 게살을 찢어놓은 녀석이라, 평생 게살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해 준다.

그릇이 구역화되어 있어 얼핏 보면 양이 적을 것 같지만 이걸 두세 접시 먹으면 상당히 배가 부르다.

메뉴가 상당히 다양해서 한 종류씩만 먹더라도 충분히 세 접시 이상 나오기 때문에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즉선 라멘, 소바, 우동 등도 바로바로 만들어주기는 하는데, 국물을 많이 마시면 다른 걸 집어넣을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만 맛본다.

내장을 깔끔하게 드러내서 구운 빙어를 씹으면 맥주 한잔이 생각난다고 하는 연상을 해 보는데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라 술은 다음 여행에 무리를 주리라 생각해 패스하기로 한다.

 

원래 술은 유료지만 이 날은 또 투숙객에게 와인 한잔씩 돌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사양하며 음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구색내기에 급급하는 뷔페점과는 달리 디저트를 위해 어느 정도 위장을 비워놓을 가치가 충분한 녀석들.

아이스크림은 말할것도 없고 각종 젤리와 계란 케이크 등등 디저트만으로도 한 끼 채울 수 있을만한 품질이다.

퐁듀는 블랙과 화이트 초콜릿이 따로 흐르고 있어서 골라먹는 재미도 있고.

 

투숙 이후 두 번째 석식이지만 이렇게 배가 불러서 더 못먹는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뷔페는 매우 오랜만이다.

지붕도 굉장히 높은데 거기서 울려퍼지는 엔야의 몽환적인 음악이 식사를 좀 더 우아하게 만들어 줘서 오히려 조금 위축되는 느낌도 든다.

 

일기를 쓰며 소화를 시키고, 좀 더 들어가겠다 싶으면 다시 음식을 담고 하면서 시레토코의 마지막 밤을 여한없이 즐긴다.

 

이후의 옥상 온천 역시 매우 인상깊은 체험이었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아쉬울 정도로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내부는 일반적인 온천과 다를 바가 없지만 낮은 계단을 살짝 올라가면 무려 야외로 통하는 문이 존재한다.

밖으로 나가면 증기로 가득한 노천 온천이 눈보라 치는 시레토코의 밤과 어우러져 현실감을 잊게 한다.

영하 10도에 펑펑 퍼붓는 눈을 맞으며 어깨까지 온천에 담그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심지어 호텔 측에서 서비스로 자연센터 쪽에 거대한 조명을 쏘아주기 때문에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는 모습을 조명 사이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오호를 탐험할 때는 화창한 날씨로 라우스 정상까지 보여주고

밤에는 이렇게 옥상 노천 온천에서 쏟아지는 눈꽃을 감상하며 몸을 녹이는 경험을 선사해주니

이번 여행의 운을 이곳에서 다 써버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번 절묘한 타이밍에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목욕 후에는 또 시원한 체험이 기다린다. 호텔 지하 암반에서 솟아나오는 천연수를 자연 정수되는 도자기 속에 담아 놓았다.

이 물은 맛있는 물 명선에도 몇 번이나 선정된 경력이 있다고 화려하게 선전을 해 놔서 과연 어떨까 하고 마셔 보는데

한 잔 마시는 순간 바로 다음 잔을 도자기 입구쪽에 가져다 대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온천 후 마시는 물이 원래 맛있긴 하지만 이 녀석은 확실히 시중에 판매되는 물과 느낌이 다르다.

물의 맛은 직접 마셔보지 않는 한 설명하기가 어려워 난감해도, 호텔 홈페이지 소개에서도 한 장을 차지할 만큼 자신있게 내 놓을 만한 녀석이다.

 

미련이 남지 않을만큼 보고 먹고 마시고 하며 흡족하게 보낸 시레토코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역시 긴 시간과 경비를 들여 이곳 땅끝까지 찾아온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음미하며 푹신한 침대의 감촉을 즐긴다.

내일은 또 이동하는데 하루를 꼬박 소비해야 하지만, 오늘의 만족감만으로도 내일을 즐겁게 보내는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